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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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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독일 통일
3.1. 제국 선포
4. 비스마르크 체제
4.1. 1878년 이전: 자유주의 시대
4.1.1. 사회입법 개혁4.1.2. 문화 투쟁4.1.3. 자유주의자들과 비스마르크의 충돌
4.2. 1878년 이후: 보수주의 시대
4.2.1. 사회주의 탄압법 제정4.2.2. 보호관세 도입4.2.3. 사회보장제도 도입4.2.4. 정치 구도의 변화
4.3. 외교 정책
4.3.1. 방어적 외교와 불안정한 동맹4.3.2. 독일 제국주의의 시작4.3.3. 비스마르크 체제의 균열
5. 세 황제의 해6. 빌헬름 2세의 등장
6.1. 비스마르크 시대의 종말6.2. 레오 폰 카프리비 내각: '새로운 정책'6.3.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내각6.4. 베른하르트 폰 뷜로 내각
6.4.1. 대양함대 건설6.4.2. 세계 정책으로 가는 길6.4.3. 1900년대 독일 국내 정치6.4.4. 뷜로 블록의 생성과 해체
7.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7.1.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내각7.2. 1912년 선거 이후 국내 정치7.3. 실패한 외교 정책과 유럽 내에서의 고립
8. 제1차 세계 대전
8.1. 사라예보 사건 7월 위기8.2. 전쟁의 전개8.3. 전쟁 도중 국내 상황8.4. 11월 혁명과 제정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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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2. 배경

파일:Map_of_the_Holy_Roman_Empire,_1789_en.png
파일:800px-Coloured_engraving_Vienna_Congress.jpg
<rowcolor=#fff> 1789년 신성 로마 제국 빈 회의
독일은 지난 수백년간 수십수백여 개의 영방국가들로 분열되어 신성 로마 제국 아래 하나된 민족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나뉘어있던 상태였다. 1700년대 들어서는 황제국이자 기존의 패권국이던 합스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와 신생 도전국 호엔촐레른 가문 프로이센이 제국 내에서 서로 치고받고 싸우던 양강 구도의 형세였다. 그러나 갑자기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나타나, 1806년 프랑스 제1제국의 꼭두각시인 라인 동맹을 창설하였고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면서 독일은 크게 요동쳤다.

1789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에 전파한 '민족'이라는 개념은 전 유럽에서 민족국가를 창설하겠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당연히 독일 지방에도 민족주의의 바람이 불어쳐 독일어권이 모두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싹텄다. 하지만 여기서 큰 난관이 하나 존재하였으니 바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재였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인 외에도 체코인, 헝가리인, 크로아티아인 등 동쪽에 여러 민족들을 신민으로 두고 있었기에 이들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논쟁이 벌어졌다. 다민족 오스트리아 제국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와 독일, 심지어 덴마크까지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것이 바로 대독일주의였고 반대로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순수 독일어권 국가들만 프로이센[1] 중심으로 합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바로 소독일주의였다.

하지만 얼마 못가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독일의 옛 제후들은 자신들에게 간섭할 상위 권력을 만들어내는 데에 관심이 없었기에 통일 논의는 흐지부지되었다. 종전 이후 체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1815년 빈 회의에서는 옛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있던 독일 국가들이 모인 느슨한 연방 체제인 독일 연방만이 창설됐다. 이 1815년 독일 연방의 창설부터 1848년 혁명 이전까지 30년 간의 시기를 ' 포어메르츠(Vormärz)'라고 하는데, 오스트리아 총리 메테르니히 하에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가 신성 동맹을 맺고 프랑스 혁명 이전의 앙시앵 레짐으로 회귀하려 시도하였다. 당연히 한 번 혁명과 자유주의의 맛을 본 유럽인들은 과거로의 회귀에 극렬히 반발했고 이는 1848년 혁명을 비롯한 민족국가 수립의 목소리로 분출되었는데, 이 것이 아래 호엔촐레른 가문의 부상과 합쳐져 통일 독일 수립의 근간이 되었다.

2.1. 호엔촐레른 가문의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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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rans_Luycx_-_Frederick_William,_Elector_of_Brandenburg,_at_three-quarter-length.jpg
파일:Friedrich_ii_campenhausen.jpg
파일:Kingdom_of_Prussia_1815.svg.png
<rowcolor=#fff> 프리드리히 빌헬름 프리드리히 대왕 1815년 프로이센 왕국[2]
독일 제국의 황실인 호엔촐레른 가문은 1415년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6세가 1410년 열린 황제선거에서 룩셈부르크 왕조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국왕 지그몬드 독일왕 선출을 도운 대가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브란덴부르크를 하사받아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로 임명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국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종교 개혁 시기에 요아힘 2세 헥토어 선제후는 루터교회로 개종하고 수도원 재산을 몰수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한편 같은 가문의 안스바흐 분가가 세운 프로이센 공국의 대가 끊기면 브란덴부르크의 본가에서 상속받을 수 있도록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와 협약을 체결하였고 알브레히트 공작의 후손들과 자신의 후손들을 이중으로 결혼시키게 하는 등 내실을 철저히 다졌다.

1618년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공작이 사망하자 가장 가까운 친척이자 맏사위였던 요한 지기스문트 선제후가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 받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형성되었고, 1640년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즉위하여 베를린 중심의 중앙집권제 국가를 완성하고 상비군을 창설하면서 북독일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프리드리히 3세 선제후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을 돕는 대가로, 신성 로마 제국 외부의 국가인 프로이센의 이름을 빌려 국왕을 칭하여 프로이센 왕국을 선언하며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부국강병책을 적극 추진하여 수만의 대군과 부유한 국고를 확보하였으며,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팽창정책을 펼쳤다. 이후 어리석고 무능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거쳐 나폴레옹 전쟁의 위기를 지나 빈 체제에 접어들어서는 오스트리아와 함께 독일 연방을 양분하는 강대국으로 등극했다.

1840년 즉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시대는 바야흐로 자유주의 혁명의 시대였다. 과거복고적인 빈 체제에 반발해서 일어난 1848년 혁명에서 호엔촐레른 왕조는 전복될 뻔한 위기를 겪었다. 혁명으로 성립된 독일 국민 의회는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헌법을 제정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황제로 추대했으나, 왕권신수설을 신봉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한낱 폭도들에게 추대받아 황제에 오를 생각이 없다면서 제안을 거절했다. 결국 부유한 중산층 자유주의자들과 도시민들 사이에서 균열이 일어났고, 자유주의 혁명과 투표로 선출된 의회가 주도하는 독일 통일 시도는 유야무야 실패로 돌아가고야 만다.

3. 독일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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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일 연방.svg
파일:북독일 연방 지도(1870).svg
<rowcolor=#fff> 독일 연방 북독일 연방
1848년의 혁명이 무위로 돌아가고, 10여 년간의 반동적인 사회 분위기가 자유주의 민족주의의 바람을 짓누르며 전 유럽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1860년대 초부터 독일 국가들 사이에서 첫 정당들이 창당되며 다시 억압적인 빈 체제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그와중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1850년대까만 해도 자유주의자들을 함께 억누르며 협력했지만, 곧 다시 라이벌 관계로 돌아서고야 말았다. 독일 연방 내에서의 주도권을 두고 기싸움을 벌이기 시작한 것. 1863년 독일군주회의에서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 등은 독일 연방을 국가연합으로 확대하고 싶어했던 반면 프로이센은 느슨한 독일 연방을 제대로 된 통일 국가로 바꾸고 싶어했다.

한편 혁명을 진압한 이후 안정을 되찾은 호엔촐레른 왕조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정신병에 걸려 퇴위한 뒤, 1861년 새로운 국왕 빌헬름 1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빌헬름 1세의 주요 관심사는 군대였다. 왕국의 전통대로 군인으로 성장해 온 그는 독일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프로이센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군제를 개혁하고 신병을 확충하려 하였다. 그러나 곧 자유주의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개혁은 지지부진하게 되었고, 몇 차례의 의회 해산과 재선거에도 불구하고 계속 상황은 불리해져갔다. 결국 국왕은 퇴위를 결심하였으나, 당시 국방 대신이었던 보수 성향의 알브레히트 폰 론 장군이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임명하라고 건의한다. 이리하여 총리에 임명된 비스마르크는 첫 의회 연설에서 그 유명한 철혈 정책을 내세운다. 실용적인 현실주의 정책 아래 오직 철과 피, 즉 무력으로만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1864년 덴마크 위기[3]로 잠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연합했지만 전후 점령지의 처분을 두고 다시 갈라섰다.[4] 결국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프로이센 왕국 이탈리아 왕국, 북독일 국가들과 오스트리아 제국, 남독일 국가들이 정면충돌했다. 프로이센의 승리로 기존의 독일 연방이 해체되고 마인강 이북 22개 국가들이 따로 모여 북독일 연방이 수립됐다.[5] 프로이센은 이후 독일 통일을 가로막던 최후의 장애물 프랑스마저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승리를 통해 꺾어내고[6] 1870년 11월 마인강 남부 4개 국가를 합병함으로써 마침내 독일 통일에 성공했다.

3.1. 제국 선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nton_von_Werner_-_Kaiserproklamation_in_Versailles_1871.jpg
<rowcolor=#fff>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는 빌헬름 1세
프로이센이 1870년 9월 2일 스당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사로잡음으로써, 독일 통일을 가로막던 마지막 장애물 프랑스까지 사라지고 독일 통일은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 비스마르크는 남독일의 왕국들과 협상하기 시작했다. 기존 북독일 연방에 포함되지 않았던 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바덴 대공국 등이 연방에 합류한다는 조약이 1870년 11월 체결됐다. 바이에른이 기존에 주장해왔던 이중 동맹 같은 체제는 아예 폐기당했으며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프로이센 하의 '독일 제2제국'이 수립됐다. 새로 만들어질 제국은 군주제 하의 연방으로써 입헌국가와도 상당한 거리가 있는 절대군주정 제국이었다.

한편 독일 내에서는 이참에 프랑스로부터 알자스-로렌을 뜯어내야 한다는 민족주의 요구가 터져 나왔다. 비스마르크도 이를 받아들여 프랑스에 휴전 조건으로 내걸었는데, 프랑스가 이 조건에만큼은 극렬히 반발하여 전쟁이 연장됐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국민감정은 극도로 악화됐고 반대로 독일의 민족주의는 더욱 강렬해졌다. 독일 민족주의가 극렬해지며 통일 국민국가 수립에 대한 열기가 높아지자, 이는 지지부진한 협상에서 남독일 국가들을 압박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11월에 협상이 타결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물론 비스마르크 역시 남독일 국가들에게 상당한 양보를 해야 했다. 예를 들어 바이에른은 평시에 자치적인 바이에른 왕국군을 보유할 권한을 인정받았다. 뷔르템베르크는 자체적인 우편 제도를 유지할 권한을 얻어갔다.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헤센 등 4개국은 기존의 국영철도마저도 계속 보유할 수 있었다. 외교적으로 봐도 이들은 모두 자치적인 외교 관계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독일 연방의 최고 지도자가 된 프로이센 국왕은 '독일 황제'라는 거창한 칭호를 추대받았다. 이 칭호는 헌법상으로는 부차적인 직함에 불과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상징성이었다. '제1제국'이라는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기억이 독일인들에게 새로운 제국의 등장을 훨씬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비스마르크는 새로 수립된 제국의 정통성을 부각하기 위해, 남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바이에른 루트비히 2세가 빌헬름 1세에게 황제위를 바치는 그림을 구상했다. 비스마르크는 재정난에 쪼들리던 루트비히 2세를 고립시키는 동시에 4~5백만 마르크를 찔러주는 조건으로 루트비히 2세의 허락을 받아냈다. 미리 맞춰진 각본에 따라 1870년 11월 군주회의에서 루트비히 2세가 빌헬름 1세를 황제로 추대할 것을 제안했다. 오직 군주들만이 황제를 추대할 수 있다는 당시 독일의 전제성이 그대로 드러난 부분이었다.[7]

의외로 빌헬름 1세는 황제니 뭐니 하는 것에 아무 관심이 없었고 오직 프로이센 군과 전통에만 꽂혀 있었다. 그는 거창한 황제 칭호가 프로이센 왕가의 위명을 덮어버릴까봐 우려했다. 사실 황제 자리도 '독일국의 황제(Kaiser von Deutschland)'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그런 식이면 구성 제후국들의 군주들이 얄짤없이 신하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수용하지 않을 거라는 비스마르크의 설득 때문에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가 수여된 것이다. 게다가 그마저도 비스마르크의 뒷공작으로 빌헬름 1세의 사위이자 바덴 대공이었던 프리드리히가 직접 빌헬름에게 제위에 올라달라고 요청했기에 겨우겨우 받아들여준 것이었다. 빌헬름은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며 독일 황제위를 받아들였다.

1871년 3월 3일 첫 제국의회 선거가 치러졌다. 베를린이 신생 제국의 수도로 선포되었으며 독일 전역에서 선출된 제헌의회가 프로이센 하원의사당에 집결했다. 1871년 1월 1일의 헌법이 개정되어 4월 17일 의회를 통과했다. 이 헌법을 '비스마르크 헌법'이라고도 부른다.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결됐고 알자스-로렌 일대는 독일 제국에 편입되어 황제의 직할령이 되었다. 6월 16일에는 베를린과 독일 전역의 대도시들에서 대대적인 승전 퍼레이드를 열어 프로이센의 승리와 제국 수립을 경축했다. 제국화폐법으로 독일 전체의 화폐가 하나로 통일됐고 1876년에는 마르크가 도입되어 기존 영방국가들의 화폐를 대체했다. 새 마르크화는 금본위제에 기반한 화폐였다.

4. 비스마르크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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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1878년 이전: 자유주의 시대

4.1.1. 사회입법 개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1990-023-06A,_Otto_von_Bismarck.jpg
파일:54693_ca_object_representations_media_2849_frontend.jpg
<rowcolor=#fff> 오토 폰 비스마르크
신생 제국이 출범하고 1871년부터 1889년까지, 약 20년 동안은 외교적으로나 내치적으로나 어딜 보나 명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시대였다. 이 시대를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비스마르크 체제는 크게 2파트로 나눌 수 있다. 1871년부터 1878/9년까지는 비스마르크가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협력했던 시대이며 1879년부터 1889년까지는 중도, 보수파와 손을 잡고 국정을 이끌어나갔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860년대 프로이센에서 예산과 법률 제정 권한을 두고 비스마르크와 자유주의자들이 헌법 갈등을 벌이며 극심히 대립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어째서 비스마르크가 제국 초기에 자유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는지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비스마르크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당시 자유주의자들이 의회에서 압도적 의석을 점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국민자유당이 혼자서 382석 중에 152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비슷한 자유주의 성향의 제국자유당과 독일진보당까지 합하면 자유주의자들이 의회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874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자유주의 세력은 397석 중에 204석을 차지했으며 비스마르크가 이들을 죄다 적으로 돌리고 국정을 이끈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비스마르크를 비토하던 보수주의자들과 손을 잡는 것도 불가능했고, 중도주의자들은 그만한 세력이 없었다. 이러한 정치 구도 때문에 제국 초기에는 자유주의적 개혁 정책들이 여럿 등장했다.

비스마르크의 정치 파트너는 루돌프 폰 베니히센이 이끄는 국민자유당이었다. 국민자유당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모든 정책들을 추진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핵심적인 자유주의적 개혁 정책들을 밀어붙이는 데에 성공했다. 루돌프 폰 델브뤼크 프로이센 총리나 오토 폰 캄하우젠 재무장관, 아달베르트 포크 문화장관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등장해 개혁을 도왔다. 개혁의 초점은 바로 '경제 자유화'였다. 무역의 자유와 이동의 자유가 독일 전역에 도입되었으며 자유무역 촉진을 위해 모든 철강 제품에 대한 관세를 철폐했다. 상표 보호 및 저작권의 개념과 특허가 도입되었고 주식회사 설립도 훨씬 쉬워졌다. 도량형이 표준화됐고 지역별로 난립하던 통화도 1873년 마르크 하나로 통일했다. 1875년에는 제국의 중앙은행인 라이히스방크가 설립됐다.

자유주의자들은 법치주의 개혁에 나서기도 했다. 1871년 북독일 연방 형법을 기반으로 제정된 제국형법은 아직까지도 본질적으로 독일 형법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1877년 제국사법령을 선포해 법원법, 형사 소송법, 민사 소송법, 파산법 등을 만들어 심지어 아직까지도 유효한 법령들을 연달아 만들어냈다. 1878년 법원법에 따라 제국법원을 만들어 독일 최고 형사 및 민사 법원으로 지정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민법 문제에 있어서 의회의 권한을 확대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북독일 연방 의회는 오직 경제와 관련된 민법 제정만을 담당했으나 1873년 의원들의 요구로 모든 민법 및 절차법이 의회의 소관으로 확대됐다. 제국 민법은 1896년 통과되어 1900년 1월 1일부터 시행됐다.

물론 자유주의자들도 모든 개혁을 다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굉장히 민감한 문제였던 절차법 언론 관련 법들은 자유주의자들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고 이는 좌파 계열 자유주의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자유주의자들은 세력이 줄어 1876년 의회에서는 보수주의자들과의 연합을 통해서만 겨우 의회 다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허나 자유주의자들은 이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제국의 중심지였던 프로이센 하원에서도 자유주의자들과 중도 보수파들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프로이센에서도 정치 개혁이 이뤄졌다. 1872년 하원은 재산에 따라 참정권을 제한하는 기존 법률을 폐지시켰다. 당연히 프로이센 귀족들로 이루어진 상원에서 극심한 반발이 터져나왔고 달래기용으로 요직에 귀족들의 입맛에 맞는 인사들을 임명함으로써 겨우 반발을 무마시켰다.

4.1.2. 문화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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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ladderadatsch_1875_-_Zwischen_Berlin_und_Rom.png
<rowcolor=#fff> 교황 비오 9세와 수싸움을 벌이는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는 입법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면에서도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했다. 가장 큰 예시는 문화 투쟁이라고 불린 가톨릭 교회와의 전쟁이었다. 세속 정부는 교회에 더더욱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했으나 가톨릭 교회 측에서는 하늘 아래 그 누구도 교황과 높이를 같이 할 수 없다는 '교황지상권론' 아래 정부의 간섭을 극도로 반대했던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1864년 회칙에서 신앙과 도덕에 대해 교황무류성을 교의로 선언하면서 당대 독일 정부의 간섭에 명백히 반발하며 불을 붙였다. 가톨릭 입장에서 자유주의는 옛 계몽주의의 유산이자 근대화의 산물로서 완전히 대척되는 위치에 있는 사상이었고,[8] 반대로 자유주의자들 입장에서 가톨릭은 고리타분한 중세의 유물에 불과했다.

자유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비스마르크 역시 가톨릭을 배척할 이유가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동부 일대에서 가톨릭 성직자들이 폴란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국가의 권위와 통합이 가톨릭 같은 구세력에 의해서 제한되는 것을 극히 꺼렸다. 국가와 종교의 갈등은 근대 유럽에서 흔하게 벌어지던 일로 이미 1860년대부터 바덴과 바이에른 등지에서도 문화 투쟁이 일어났던 일이었다. 다만 독일의 가톨릭 주교들은 근대화에 반대하는 교황에 딱히 동조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며 1866년 이래로 프로이센 하원에는 가톨릭 분파조차 없었다. 오히려 1866년 마인츠 대주교 빌헬름 에마누엘 폰 케틀러는 소독일 중심의 통일을 지지하기까지 했다. 비스마르크는 바로 이러한 국내의 교황에 반하는 가톨릭 세력들과 손을 잡았다.

어쨌든 자유주의자들과 비스마르크의 뜻이 맞아떨어졌기에 정부는 1871년 이래로 종교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형법을 개정해 성직자들의 정치 참여를 제한했고, 교황지상권론의 대표 지지세력이던 예수회의 활동을 금지했다. 또한 프로이센에 학교 감독 제도를 도입해 종교계의 영향력을 축소시켰다. 1873년부터는 국가가 성직자 양성과 임명을 통제하며 교회 내에 직접적으로 간섭했다. 세례성사, 견진성사, 혼인성사, 종부성사 등의 7성사를 교회가 주관하는 것까지도 막아 버렸으며 1년 뒤에는 국외추방법을 만들어 반항적인 성직자들을 언제든지 독일 국외로 추방할 수 있도록 했다. 소위 '곡창법'은 교회로 흘러들어가는 모든 나라 자금을 금지하는 역할을 했으며 5월에는 구호활동에 전념하는 수도원들을 제외한 모든 가톨릭 수도원들을 해산시켜 버렸다.

문화 투쟁으로 인해 독일 내 가톨릭 세력은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었다. 1870년대 중반에 이르자 수많은 교구 자리들이 공석으로 비어버렸고 교회의 활동도 크게 축소당했다. 정부에 반항적이던 친교황파 주교들은 대거 체포되거나 해임되거나 아예 나라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정부와 자유주의자들의 가톨릭 탄압은 가톨릭이 주류였던 남독일 일대에서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정부의 과도한 탄압에 오히려 가톨릭계는 똘똘 뭉쳤다. 게다가 정부의 탄압에 불안감을 느낀 개신교도와 자유주의 좌파들마저 이에 동참했다. 문화 투쟁이 일어나기 전에 창당된 가톨릭 중앙당은 이때를 틈타 상당한 가톨릭 유권자들의 표를 끌어모으며 의회 내에서 무시못할 세력으로 성장하기까지 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비스마르크도 사태 해결의 필요성을 느끼고 신임 교황 레오 13세와 2차례 회담을 하는 등 유화 제스처를 맺으며 반가톨릭 법안들을 하나하나 폐지하면서 1878년 문화투쟁을 끝냈다.

4.1.3. 자유주의자들과 비스마르크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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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870년대 초반 독일의 철강 공장 건국 시대 베를린의 철강 공장
이렇게 비스마르크와 자유주의자들이 1870년대 초중반까지는 어느 정도 협력하는 모양새였지만 이 둘은 물과 기름 같이 도저히 하나로 섞일 수 없는 구조였다. 애초에 이해관계 때문에 같이 행동했을 뿐. 예를 들어 독일 전역의 다양한 도시 규정들을 통합하겠다는 국민자유당과 진보당의 시도는 비스마르크의 지원 부족으로 실패했다. 금융 개혁도 처음에 비스마르크의 반대로 좌초됐다. 군대 예산 문제는 첨예한 갈등의 씨앗으로 남았다. 국방비 예산에 대한 의회의 승인 문제는 1874년부터 불이 붙었는데, 의회는 매년 승인을 새로 해야한다고 주장했고 군부는 딱 한 번만 영구적인 승인을 하고 그 다음부터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의회 입장에서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전체 예산 80%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린다는 것이었기에 도저히 물러설 수가 없었고 결국 7년 동안의 승인으로 타협했다. 자유당은 공무원법, 군형법, 언론 범죄에 대한 배심원 재판 요구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1870년대 전반에 걸쳐 자유주의자들은 본인들의 뜻을 상당히 관철시키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비스마르크의 협력 범위 안에서만 가능할 뿐이었다. 자유주의자들도 자유주의 개혁 시행보다 본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은 황제와 군부의 강력한 반대에 막혀 불가능했고, 이로 인해 유권자들은 날로 의회에 실망이 커져갔으며 자유주의 진영 내에서도 긴장이 고조됐다. 게다가 문화 투쟁을 기점으로 가톨릭 중앙당이 등장해 두각을 나타내며 자유주의 진영을 위협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더이상 제국의회의 압도적 다수를 점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1871년 독일 제국이 건국된 직후, 경제 호황이 일어나 소위 짧고 굵은 경제적 황금기 '건국 시대(Gründerzeit)'가 열렸다.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된 내부 시장이 만들어져 독일 내 관세가 아예 사라졌으며 1872년 말 균일한 미터법이 도입되는가 하면 프랑스로부터 뜯어낸 막대한 보상금이 들어오며 경제 전반에 활력이 돌았던 것이다. 제국 건국으로 인한 낙관적인 분위기도 호황에 한몫했다. 그러나 이 건국 시대는 불과 2년만인 1873년 10월 베를린 주식시장 붕괴로 인해 끝나버렸고, 바로 경제 불황이 닥치고야 말았다. 건국 시대 동안의 과열된 투기와 수요 감소, 과잉 생산이 겹치면서 2년 만에 버블이 붕괴해버렸다. 경제 위기는 1879년까지 이어졌다. 소비재 산업은 피해 정도가 덜했으나 광업, 기계공학, 건설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상품 가격과 임금이 크게 하락했다. 거기다가 러시아 제국 미국에서 들여오기 시작한 값싼 곡물 탓에 독일 국내 농업이 가격 경쟁력을 잃어버리면서 1870년대 중반 독일 농업은 위기에 빠졌다. 이 불황 때문에 각종 협회들이 출현했다. 남독일 면화 산업가 협회, 독일 철강 산업가 협회,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의 공동 경제적 이익 보호 협회 등 여러 자본가 협회들이 결성되어 '독일산업가중앙협회'를 설립한 뒤 정부에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하여 보호 관세를 도입할 것을 요구했다. 농업도 마찬가지라 처음에는 자유무역주의자들이 우세했으나 곧 농업 분야에서도 보호 관세 도입을 주장하는 협회들이 여럿 등장했다. 보호 관세의 도입 문제를 두고 산업계와 농업계는 긴밀하게 협력하기 시작했다.

1870년대 중후반의 경제 불황은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지난 수십년간의 진보에 대한 낙관은 현실에 대한 비관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자유무역을 주창한 자유주의자들이 경제 불황의 원인으로 욕을 먹었다. 자유무역을 주장해온 자유주의자들의 세력은 크게 빠졌고 반대로 보수파와 중앙당의 세력이 크게 증가했다. 이러한 비관적 분위기 속에서 주식 시장 교란의 배후로 국제 유대인 카르텔이 의심을 받으면서 반유대주의 세력이 불어나기 시작하기까지 했다. 경제 호황기 때처럼 시장의 힘에 의존하는 대신에 국가가 직접 나서서 시장에 개입하라는 요구가 커졌고 정부도 불황으로 인한 세수 감소와 적자로 인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금융개혁과 보호관세 도입이 시급해졌으나 자유주의자들이 장악한 의회를 상대로 함부로 개혁을 하기도 힘들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되려 경제가 어려운 틈을 타 헌법을 더 자유주의적으로 바꾸기를 바라고 있는 판이었다.

4.2. 1878년 이후: 보수주의 시대

4.2.1. 사회주의 탄압법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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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빌헬름 1세 암살 시도
경제 불황으로 인해 경제적, 사회적, 재정적 문제가 겹친 데다가 자유주의자들과의 협력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자 비스마르크는 정책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크게 ' 사회주의 탄압법' 제정, 자유주의와의 결별, 보호관세의 도입 등 보수주의로의 회귀가 1878년 이후 비스마르크 체제의 골자다. 국민자유당의 태도는 모순적이었다. 자유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한 비스마르크의 태도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나 일부 법안들에 대해서는 찬성했던 것. 결국 정당 내 진영싸움이 격화되어 1879년 자유주의 우익이 당에서 분리되어 나갔고, 좌파 세력은 '자유 연합'을 창설해 비스마르크의 보수 정책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높여나갔다. 경제적으로는 대규모 지주들과 중공업 사업가들이 한 편을 먹었고, 이때 이후로 독일 정치는 보수 - 대지주 - 산업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띈다.[9]

사회주의자들을 대하는 비스마르크의 태도는 매우 교묘했다. 1878년 5월과 6월에 황제 암살 미수가 2번이나 발생하자 비스마르크는 이를 사회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몰고 가 결국 사회민주당을 박살내 버린다. 때로는 노동자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법안, 아동노동을 금지하는 법안을 낸 비스마르크였지만, 그에게 사회주의란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었다. 사회민주당은 당시 1877년 선거에서 9.1%의 득표율을 보였고 독일노동자총연맹과 사회민주노동당 사이의 균열도 2년 전에 봉합하며 순항하고 있었는데, 사회민주당의 지도자 아우구스트 베벨이나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파리 코뮌 지지를 선언한 이후부터는 정부에게 빨갱이로 찍혀서 제국의 위협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사회민주당을 찍어누를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으나 의회에 가로막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1878년 5월에 이어 1개월 뒤 6월에 또 황제 암살 시도가 벌어지자 비스마르크는 이를 사회민주당 제거를 위한 절호의 찬스로 활용했다. 비스마르크는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요구했다. 선거 기간 동안 비스마르크는 부르주아와 자본가들에게 혁명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고 보수 언론은 반사회주의, 반자유주의, 반유대주의에 앞장선 선동의 나팔수가 되었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경제 불황과 이에 따른 보호 관세 도입 논란 때문에 선거에 매우 불리했다. 그해 7월 치러진 선거에서 국민자유당과 진보당은 의석 수가 추락했고 반면 중앙당, 자유보수당과 독일보수당은 약진했다.[10] 하지만 중앙당은 여전히 문화 투쟁의 여파로 협력을 거부하고 있었기에 정부 입장에서 사회주의 탄압법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국민자유당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끈질긴 설득 끝에[11] 일부 조항 완화, 2년 간의 시한 설정과 함께 1878년 10월 19일, 독일 의회는 370석 중 221석의 찬성으로 사회주의 탄압법을 통과시켰다.[12]

이렇게 통과된 사회주의 탄압법은 황제 시해미수범이 사회민주당 당원이라는 근거없는 가정 하에 만들어졌기에 사회주의에 대단히 가혹했다. 클럽, 모임, 출판물, 모금 활동을 금지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위반 시 벌금 혹 징역형이 선고됐다. 일부 지방에 거주 금지령이 내려지거나 계엄령 비슷하게 일대를 포위해 외부와 차단시켜버리는 것까지도 가능해졌다. 물론 이 법은 임시 조치에 불과해 선포할 때마다 의회의 동의를 받아야했고 의회의 업무, 선거에는 원칙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사회주의 탄압법은 장기적으로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사회민주주의는 여전히 독일 내 상당한 정치 세력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사회민주당은 1880년대부터는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취하면서 독일 내에서도 스스로 고립되기 시작, 세력이 점점 약화되고야 말았다.

4.2.2. 보호관세 도입

1875년 초에 비스마르크는 보호 관세 정책을 도입하겠다고 발표, 즉 자유무역을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이에는 이념적 이유보다는 재정 문제가 더 큰 이유였다. 당시 제국 정부는 제국을 구성하는 국가들이 기부하는 세금에만 의존하고 있었는데, 비스마르크는 새로 도입한 관세 수입을 통해서 재정 적자를 완화하기를 원했다. 비스마르크는 보호무역을 지지하던 농촌 지주들와 중도주의자들, 우익과 보수주의자들, 산업 자본가들과 국민자유당 내 우파 세력들이 관세를 지지해줄 것을 기대했다.

앞서 사회주의 탄압법이 통과된 이후인 1878년부터 비스마르크는 새로운 관세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자들의 반대는 극심했다. 자유주의 장관이던 폰 캄하우젠과 아헨바흐는 관세 도입에 반대해 폰 델브뤼크 총리와 마찬가지로 사임했다. 게다가 고위 관료들과 주 재무장관들도 처음에는 관세 도입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보호주의를 지지하던 수많은 경제 단체들이 관세를 찬성한다는 뜻을 밝히고, 특히 독일산업가중앙협회가 관세를 대놓고 지지하면서 판이 바뀌었다. 협회는 제국의회의 의원들에게 적극적인 로비를 했고 보수파 의원 204명, 중앙당 의원 전원, 국민자유당 의원 27명 등 모든 부르주아파 정당과 의원들이 관세 도입에 동참했다.

그러나 관세가 그대로 실행되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국민자유당 의원들이 법안을 통과시킬 때에 관세 법안에 상당한 수정을 가했고, 중앙당도 마찬가지였던지라 관세법은 처음 입안했던 버전과 상당히 달라졌다. 새롭게 걷힌 관세는 제국 중앙 정부 뿐만 아니라 일정 비율로 지방의 왕국, 공국 정부들에까지 나뉘어 흘러들어갔다. 비스마르크는 국민자유당과 중앙당 중 하나를 국정 파트너로 선택해야 했다. 둘 중 어느 정당과 손을 잡든지간에 비스마르크는 상당한 정치적 양보를 해야만 했지만, 그는 결국 중앙당을 선택했다. 갈수록 심해지는 국민자유당의 입헌주의와 의회주의 요구를 도저히 묵과하기 어려웠던 반면 중앙당은 그래도 의회 권한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79년 7월 비스마르크의 의회 연설로 자유주의 시대는 종말을 맞았다. 늙은 재상은 부르주아 자유주의 의회 국가라는 장기 비전을 명백히 부정하고 헌법에 기초하나 근본적으로는 권위주의적인 군주정을 부르짖었다.

4.2.3. 사회보장제도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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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사회보장제도를 소개하는 선전물
독일 제국의 빠른 산업 혁명과 도시화, 고도의 산업화로 인하여 사회문제의 초점이 농촌 하층민에서 도시의 빈곤 노동자들로 옮겨왔다. 지역 차원에서 도시 엘버펠트 등에서 엘버페트 구빈제도를 자치적으로 운용하는 등 구호 노력이 있기는 하였지만, 아직까지 전국적인 사회보장제도는 등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비스마르크의 사회보장제도로, 이로 인하여 현대식 개입주의 국가의 틀이 시작됐다. 부르주아들도 이미 노동자들의 혁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노동자 빈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국가가 어디까지 개입해 이들을 구제해야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자유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구성한 자체 조직을 대안으로 내세웠지만 사회 개혁가들을 중심으로 국가가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빈곤 퇴치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비스마르크와 제국 정부도 처음부터 사회보장제도와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고 수없이 많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던 제안들은 곧 노동자 빈곤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고야 말았다. 게다가 비스마르크는 국가보장제도를 도입시켜 노동자들을 더욱 국가에 의존시켜 혁명을 함부로 시작할 수 없도록 거세해버리는 동시에 사회주의 탄압법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고자 했다. 비스마르크는 국가가 세금을 들여서 지원하고 유지하는 보험 제도를 구상했다.

엄청난 갑론을박 끝에 1883년 건강보험, 1884년 상해보험, 1889년 장애 및 노령 보험 이렇게 3개의 보험제도가 통과됐다. 이 3개의 보험들 모두 당초 원안과 달리 국가의 직접적인 개입이 제한됐다. 보험회사는 공공기관이지 국영이 아니었다. 게다가 보험사들은 정부로부터 상당한 자치권을 가져 주로 세금이 아닌 노동자, 정당이나 기업가들의 기부금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비록 비스마르크의 원안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이 사회보장제도 도입은 비스마르크 체제의 최대 성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다만 비스마르크가 의도했던 대로 노동자들이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다. 여전히 임금이 시장논리에 따라 자본가들이 결정했기에 국민소득이 대폭 증가했음에도 실질임금은 정체됐고 빈부격차는 계속 확대됐다. 사회적 불평등이 강화되며 노동자들은 날로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워졌다.

4.2.4. 정치 구도의 변화

독일 제국의회 의석수 변화
1871년 1874년 1877년 1878년 1881년 1884년 1887년
보수당 57 22 40 59 50 78 80
자유보수당 37 33 38 57 28 28 41
국민자유당 125 155 128 99 47 51 99
진보당 46 49 35 26 60 - -
자유연합 - - - - 46 - -
자유사상당 - - - - - 67 32
중앙당 63 91 93 94 100 99 98
사회민주당 2 9 12 9 12 24 11
소수 정당들 21 34 34 40 45 43 33
기타 31 4 17 13 9 7 3
그가 재상으로 있던 시절 독일에는 주요 6개의 정당이 있었다. 낡은 봉건적 이상을 품고 산업화와 기계화에 반대하던 보수당, 비스마르크의 배경인 융커( 프로이센 왕국의 핵심 지역인 브란덴부르크, 포메른, 동프로이센의 지주들)들의 자유보수당, 가장 강력한 정당인 부르주아지의 국민자유당, 반군국주의, 반보수주의,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던 진보당, 가톨릭 교회의 중앙당, 유일한 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 이 6개의 정당이 여러 주요 쟁점들을 놓고 다투었다.

1878년부터 시작된 비스마르크의 급격한 보수화 정책의 최종 목표는 그동안의 자유주의 개혁들을 되돌리고 그이상으로 더 보수적인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 정책들을 되돌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독일을 그 이상으로 보수화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여전히 자유주의 세력들이 가득하던 의회에서 기를 쓰고 이를 반대했기 때문. 비스마르크는 의회에서 다수를 점하려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1880년대 초까지도 중앙당은 아직 문화 투쟁이 끝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계속 비스마르크에 반대했다. 1880년대에 사회주의 탄압법 등이 확장되었으나 정부는 의회에 밀려 담배 독점법 등 법안 통과에는 실패했다. 1881년 선거로 상황은 정부에게 더 불리해졌다. 2개의 보수당은 38석을 잃었고, 그나마 정부 친화적인 국민자유당도 52석을 잃었으며 반면 반비스마르크 세력인 사회민주당, 중앙당은 소폭 상승했다. 자유연합과 진보당 등 좌파 자유주의자들이 무려 80석을 차지하면서 의회의 자유주의화는 더욱 거세졌다.

의회의 지지가 날로 약화되자 당혹한 비스마르크는 의회와의 대결을 격화하고 의회에 대한 정부 통제력을 강화하려 들었다. 심지어 이익 단체들로 구성된 독일 경제위원회를 만들어 제2의 의회처럼 기능하게 만드는 안까지 고려했을 정도였다. 그는 사회보장제도와 보험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위원회를 만들려 시도했다. 비스마르크가 입맛대로 의회 선거법을 변경하려 한다거나 아예 헌법을 폐지하려 한다는 괴담이 떠돌았다. 비스마르크는 의회를 견제하는 데에 실패했다. 오히려 반비스마르크 세력은 똘똘 뭉쳐 그에게 저항했으며 이는 대중들에게 비스마르크의 정치력이 점점 고갈되어 가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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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제국의사당과 내부 모습
1880년대 들어서 정치적 상황이 또다시 급변했다. 폰 베니히센의 사임과 요하네스 미켈의 부상, 지주들의 영향력 증대 등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국민자유당의 정치적 성향은 크게 우경화됐다. 국민자유당은 1884년 하이델베르크 선언으로 주요 현안들에 대해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으며 좌파 자유주의자들과 차별화를 두었다. 국민자유당이 우클릭하자 좌파 진영도 하나로 모였다. 1884년에 자유연합과 진보당이 합당해 자유사상당을 창당했다. 한편 1880년대 초중반에 문화 투쟁 정책들이 완화되며 중앙당도 조금씩 반정부 성향을 줄여나갔다. 연이어 치러진 1884년 총선에서 좌파 자유주의자들은 쓰디쓴 결과를 받아들였고 보수 정당들은 크게 의석이 증가했다. 국민자유당 역시 약간 의석 수가 증가했지만 이들은 보수주의자들과 협력이 가능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13]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이것으로도 부족했고 우파 정당들이 의회를 완벽히 장악하기를 원했다. 외교 위기가 닥치자 비스마르크는 1886년 평시 군대 주둔을 늘릴 것을 요구했는데 의회의 중앙당과 사회민주당이 대놓고 제동을 걸었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또다시 의회를 해산시켜버린 뒤 1887년 조기 총선을 실시했다. 선거 기간 동안 정부는 좌익 자유주의자, 중앙당, 사회민주당을 제국의 적으로 낙인찍기 위해 온갖 술수를 동원했다. 보수당과 국민자유당은 이른바 카르텔을 결성하고 프랑스와의 전쟁이 날 수도 있다는 루머를 퍼뜨리며 공포 마케팅에 나섰다. 결국 선거에서 국민자유당을 위시한 보수 연합이 압승을 거두었다. 카르텔 정당은 전체 397석 가운데 220석을 차지했다.

강력한 우군을 확보한 비스마르크는 카르텔 정당들과 순조롭게 국정을 운영했다. 군사 법안과 지주들의 이익 관련 법안도 아무 저항 없이 통과됐으며 사회주의 탄압법도 1890년까지 연장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카르텔 정당과의 긴장이 높아졌다. 국민자유당은 문화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법에 동의하지 않았고, 지주들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를 더 올리는 법안 역시 반발이 거셌다. 비스마르크는 중앙당의 도움을 얻어 겨우 이 법안들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자유당은 계속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 탄압법, 식민주의 정책 등을 비판하며 시시건건 정부에 딴지를 걸었다. 국민자유당과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보수당 사이에서는 국민자유당을 버리고 중앙당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4.3. 외교 정책

4.3.1. 방어적 외교와 불안정한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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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베를린 회의
애초부터 독일 제국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도중 영국과 러시아가 중립을 지켜준 덕분에 통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정작 독일이 통일되고 새로운 열강으로 떠오르자 더이상 예전같은 호의를 막연히 기대하고 있기란 불가능했다. 독일은 새로운 국제 체제 내에서 적당한 역할을 찾아야만 했고, 비스마르크는 열강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독일은 더이상 확장하지 않을 것을 거듭 강조했다. 물론 열강들이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소위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불린 특별한 외교 관계를 통해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안위를 도모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예방전쟁을 포함한 모든 옵션을 고심한 끝에,[14] 독일은 강대국들 간의 중재자를 자임하며 방어적인 외교를 펼친다는 나름대로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1872년 9월 7일, 빌헬름 1세가 오스트리아 황제-헝가리 왕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 베를린으로 초청해 3명의 황제가 모인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독일 - 오스트리아 - 러시아 간의 동맹이 체결되었는데 이걸 바로 3제 동맹이라고 한다.[15] 독일은 3제 동맹으로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외교 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다. 1875년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 대한 예방전쟁 카드를 만지작거리자 바로 영국과 러시아가 나서서 이를 저지했는데, 이때 열강들이 독일이 유럽 내 패권을 추구하는 것을 지극히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비스마르크가 먼저 방어적인 외교를 펼치기로 결정했다.

독일의 중재자 역할은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때 처음 발휘됐다. 독일은 1878년 베를린 회의를 열어 러시아와 영국 등 강대국 간의 이해상충을 해결하고 국가들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려 애썼다. 하지만 러시아는 독일이 자국 편을 들어 발칸반도 내의 영향력을 인정할 것이라 믿었던 것과는 달리, 독일은 별다른 희생도 하지 않은 오헝 제국에게 더 큰 영향력을 부여했다. 다 이긴 싸움에서 또다시 서유럽 국가들의 간섭으로 남방으로의 진출이 막혀버린 꼴이 된 러시아는 당연히 격분했고 독일과의 관계는 급속히 경색되어 악화일로를 걸었다. 독일과 러시아 간의 동맹을 유지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따라서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대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더더욱 밀착했다. 이는 1879년 10월 7일의 '이중동맹' 결성으로 그 정점을 찍었고, 이 동맹 체결로 인해 독일 제국의 중재자 역할은 사실상 끝나버리고야 말았다. 비스마르크는 처음에는 동쪽으로, 나중에는 서쪽과 남쪽으로 뻗어나가며 교묘한 동맹 외교를 펼쳤다. 1881년에는 다시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와 모여 비밀 3제 동맹을 다시 체결했다. 3개 국가들은 동맹을 맺고 발칸반도의 상황을 바꿀 때는 협의를 먼저 거칠 것을 약속했고, 전쟁이 발발할 시 동맹 내 3국을 제외한 제4국에 대해서는 중립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본디 이 동맹은 프랑스와 독일,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을 가정하고 맺어진 동맹이었지만 오히려 갈수록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가 발칸 반도의 패권을 두고 관계가 심각하게 악화되면서 결국 1885년 불가리아 위기를 기점으로 완전히 붕괴하고야 말았다.

한편 남쪽으로는 이탈리아 왕국과 동맹을 맺으며 1882년 삼국 동맹으로 확대했다. 튀니지를 놓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며 이탈리아의 반프랑스 감정이 높아졌던 덕이 컸다. 삼국동맹은 상호방어동맹이기도 했고, 이탈리아와 지속적으로 국경분쟁을 겪고 있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구제해주기도 했다. 이렇게 독일 제국은 1880년대 초반 독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 러시아라는 3제 동맹과 독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 이탈리아라는 3국동맹을 동시에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동맹 체제를 동시에 관리하는 것은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고, 어디까지나 독일 역사상 최고의 외교 천재라는 비스마르크 아래에서나 지속될 수 있는 체제였다. 지속가능한 체제는 아니었다는 것. 독일은 이러한 교묘한 외교 외줄타기 속에서 1880년대 초반을 보냈다.

4.3.2. 독일 제국주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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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독일 제국의 해외 식민지들
독일 제국도 앞선 대영제국이나 프랑스 식민제국처럼 해외에 식민지들을 경영하고 싶어했다. 독일은 18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에 뛰어들었는데, 이는 당연하게도 유럽 내의 균형 유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균형을 무너뜨리고야 말았다.

독일의 해외 진출은 초기에는 민간 기업이 먼저 진출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물론 곧 병사들 등 국가 지원이 이뤄졌지만 어디까지나 민간 기업이 주도하는 '비공식 제국'의 형태였지 정부가 직접 경영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동인도회사 인도를 정복한 영국의 모델을 따라한 것이다.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불황을 극복하고 인구 증가를 늦출 수 있는 해법으로 여겼고, 또한 독일이 그 위신에 비해 식민지의 수가 너무나도 적다는 국민들의 불만도 한 몫했다. 결과적으로 독일 내에서 식민지에 대한 요구가 나날이 강력해지자 비스마르크도 이에 떠밀려 식민지 개척에 나섰던 것. 독일식민협회나 독일식민화협회 등이 등장해 국내 식민지 개척 여론을 부추겼고 이 두 단체는 1887년 말에 하나로 합쳐져 독일 식민 협회를 창설했다.

비스마르크가 왜 열강들 간의 충돌까지 감수하며 식민지를 요구하는 여론에 떠밀려 식민제국을 건설하려 나섰는지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수단 문제를 이용해 반영 정책을 펼침으로써 영국과 해외 식민지를 두고 경쟁하던 프랑스와 화해를 모색했다. 특히 1884년 열린 베를린 회담에서 독일과 프랑스가 한목소리로 영국을 반대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와도 연관이 있었다. 식민지 획득은 정부의 지지율을 올리는 최고의 방법이었고 안그래도 다가오는 1884년 총선에서 의회 내 친정부 세력이 절박하던 비스마르크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미끼였던 것이다. 식민지 개척은 독일 내의 사회적 문제를 일소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다. 독일은 1884년부터 본격적인 개척에 들어가, 4월에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를 취득했고 독일령 동아프리카, 토고, 카메룬, 태평양 지대를 공식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비스마르크의 확장 정책은 1년 만인 1885년에 끝났지만 독일의 식민지에 대한 열망은 끝나지 않았고 이는 영국과의 추가적인 갈등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4.3.3. 비스마르크 체제의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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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비스마르크 체제로 구축한 대프랑스 포위망
그러나 이런 팽창주의적인 식민지 정책은 독일의 외교 상황을 갈수록 어렵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조르주 불랑제 장군을 중심으로 독일에 대한 복수를 옹호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등장, 대독 감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불랑제가 전쟁부 장관에 취임하자 전쟁 위기는 더 커졌다. 비스마르크는 이 상황을 부각시켜 국민드렝게 전쟁에 대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1887년 총선에서 친정부 정당들이 다수당을 차지할 수 있도록 교묘하게 이용했다. 동시에 프랑스에 대해 강경책을 펼치며 대중들에게 동유럽과 남동부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던 외교 파행을 가리려 시도했다.

서쪽에서 프랑스가 호전적으로 덤벼들었다면 동쪽도 상황이 안좋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미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으로 한 번 파탄났던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관계는 이후에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독일이 보호관세를 도입하면서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분개한 러시아가 일부러 프랑스에 접근하자 독일은 프랑스-러시아와의 양면전쟁을 걱정해야할 판이었다. 당연히 독일 내에서도 비스마르크의 외교력이 한 물 갔다는 비판이 터져나왔다. 알프레트 폰 발더제 장군 같은 군부 인사들은 물론 보수파, 심지어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러시아에 강경책을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비스마르크는 민족주의적 목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러시아와의 갈등을 외교로 해결하려 노력했다. 비스마르크의 천부적인 능력 덕에 위기는 간신히 진정됐고, 188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와의 삼국 동맹이 회복됐다. 이탈리아와 영국 간의 지중해 협정 같은 추가 조약들이 맺어지며 독일은 반쯤 반러시아 동맹에 합류했다.

러시아 제국도 전 유럽에서 왕따당할 위기에 처하자 울며 겨자먹기로 어쩔 수 없이 독일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1887년 6월 독일과 러시아는 재보장 조약을 맺고 양국이 제3국에게 공격받을 시 중립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게다가 러시아의 발칸, 보스포루스 해협 진출에도 독일이 은밀하게 도와주겠다는 내용이 비밀리에 포함됐다. 당연히 영국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등 기존 동맹국들이 반발할 만한 내용이었지만, 비스마르크에게는 러시아가 프랑스와 연합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 그러나 1887년의 위기는 이렇게 어찌저찌 넘겼지만 비스마르크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열강들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비스마르크 체제 초창기에 비스마르크는 열강들 간의 균형을 맞출 수 있었지만, 후반기에는 오히려 긴장을 고조시키고 거기서 독일의 최대 이익을 추구하는 쪽으로 외교 기조가 변질되어 버렸던 것이다.

5. 세 황제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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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3세, 빌헬름 2세
독일 통일을 이끌고 비스마르크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빌헬름 1세 황제는 1888년 3월 9일 사망했다. 3일 뒤, 이미 후두암에 걸려 건강 상태가 심히 좋지않았던 프리드리히 3세가 새로운 황제로 선포됐다. 빌헬름 1세보다 문화적 재능도 뛰어나고 자유주의 성향이 강했던 프리드리히 3세의 즉위로 독일은 더 자유로워지고 의회의 정치적 권한이 더 커질 것이라는 기대가 터져나왔다.

프리드리히 3세는 영국 의원내각제에 공감한다고 밝힌 바 있었으며 반유대주의 논쟁에서 '유대인의 적'들을 공공연히 반대했다. 게다가 루트비히 밤베르거, 막스 폰 포르크켄베크, 폰 슈타우펜베르크 등 자유주의자들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그는 후두암에 걸려 건강 상태가 심각히 오락가락했기에 거의 정사를 볼 수 없었다. 그나마 매우 보수적인 프로이센 내무장관 폰 푸트카머가 해임된 것 정도가 재위기 프리드리히 3세의 뜻이 반영된 유일한 결정이었다. 결국 황제는 즉위 후 99일 만인 1888년 6월 15일 사망했다. 그가 죽은 지 10일 만에 그의 29세짜리 장남이 빌헬름 2세로 즉위했다. 한 해에 3명의 황제가 등장했기에 1888년을 세 황제의 해로 부른다.

6. 빌헬름 2세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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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비스마르크 시대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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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888년 의회 개회식에 참석한 빌헬름 2세
1888년 빌헬름 1세가 서거하였고, 프리드리히 3세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99일 만에 후두암으로 병사하자 그의 아들 빌헬름 2세가 제위에 올랐다. 빌헬름 2세 시대의 독일은 비스마르크 시대보다 더 경제적, 사회적 압박이 거세졌고 노동자들에 대한 해방, 통합 문제와 더불어 농업과 공업 등 경제 문제가 두드러졌다. 빌헬름 2세가 내세운 세계 정책이라는 새로운 국가과제는 심각한 재정 문제를 야기했고 국가 예산에 높은 부담을 초래했다. 게다가 국민들이 갈수록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황제는 국정 구조를 산업사회와 새로운 정치 국면에 맞추어 바꾸어나가야 할 책임까지 짊어져야 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리드리히 3세 때에도 여전히 재상직을 꿰차고 있었고 빌헬름 2세 시대에도 초기에는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1899년 영국과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사회입법의 마지막 단계로 5월 23일부터 노령 및 장애 보험을 실시하며 사회보장제도를 강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새 황제와 늙은 재상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세대 차이에 더해 빌헬름 2세가 직접 국정을 운영하려는 열망이 비스마르크와 부딪혔던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운신 폭이 크게 줄어들었으며, 오일렌베르크 백작 필리프 등 황제의 최측근들이 재상과의 갈등을 부추겼다. 지난 20년 간 제국을 좌지우지해온 권위주의적인 재상 독재에 대한 반발이 커져갔고 국내의 정치 마비에 대한 비판도 터져나왔다. 게다가 노동자 문제에 대해서도 황제와 재상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가 억압적인 정책을 고수하였으나 황제는 사회주의 탄압법 폐지라는 유화책을 쓰길 원했다.

황제와 비스마르크 사이의 갈등은 1889년 광부 파업 당시 황제가 파업 광부 대표단들을 친히 알현, 이들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드러내면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반면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 탄압법을 영구화하겠다고 밝히며 오히려 노동자들을 더더욱 옥죄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하지만 의회 다수가 이 법을 거부했고, 우익 정당들의 연합은 무너졌다. 우익 보수 정당들은 1890년 총선에서 치명타를 입었지만 중앙당, 자유주의 좌파 세력, 사회민주당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비스마르크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의회 다수당 지위를 잃어버렸다.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 사이의 갈등은 갈수록 심화됐고 재상은 점차 정치적으로 소외당하기 시작했다. 늙은 비스마르크는 황제의 압력에 떠밀려 1890년 3월 18일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로써 지난 20년 간 지속되어온 비스마르크 체제가 끝나고 빌헬름 2세의 시대가 열린다.

6.2. 레오 폰 카프리비 내각: '새로운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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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비스마르크의 퇴임 레오 폰 카프리비 빌헬름 2세의 선전물[16]
수 십년간 집권했던 비스마르크가 재상직에서 물러나자 레오 폰 카프리비가 새로운 재상으로 취임했다. 국내적으로 강경한 대결을 추구했던 비스마르크와 달리 카프리비는 균형과 화해에 초점을 맞추었다. 카프리비의 모든 정책들은 사회 갈등을 완화하고 비스마르크 시대 말기의 정부 정당성 상실을 회복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외교적으로는 프리드리히 폰 아우구스트 홀슈타인의 조언으로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 연장을 거부하는 실책을 저지르고야 말았고, 이로 인해 러시아가 프랑스와 가까워지면서 독일 제국은 점차 유럽에서 고립된다.

1890년대 이래로 새로운 사회개혁이 시작됐다. 프로이센 무역장관 한스 헤르만 폰 베를렙슈와 테오도어 로흐만의 주도로 산업재해 예방과 노동법 개혁에 초점을 두었다. 1890년 2월에 반포된 제국칙령으로 이를 정부의 공식 정책으로 발표했고, 실제로 1891년 무역 규정 개정으로 일부는 현실화되기도 했다. 이 덕분에 일요일에는 노동 금지, 여성과 어린이들의 공장 근무에 대한 추가적인 규제 조치, 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공장에 취업 제한을 거는 등 친노동 정책들이 발표됐으며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서 제대로 지켜지는지 감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열악한 경제와 업계의 저항 때문에 개혁은 지속되는 데에 실패하고야 만다. 무역적으로는 임박한 관세 전쟁을 해결했고 독일 제품 판매 증대를 위한 조약들을 맺었다. 허나 독일은 그 대가로 해외 농산물에 낮은 관세를 물려야 했고, 카프리비 총리 아래에서 독일은 농업에서 수출주도 경제로 바뀌었다.

비스마르크와 마찬가지로 프로이센 총리직도 겸임했던 카프리비는 낙후된 농촌 공동체들을 개혁하려 시도했고 일부 성과를 냈지만 끝내 보수파들의 반대로 완벽히 성공하진 못했다. 그러나 프로이센 재무장관 미켈의 재정 개혁은 성공하여 1891년에 약간 진보한 소득세를 도입하는 성과를 냈다. 1893년에는 부유세가 도입됐다. 재산세, 건물세, 무역세는 그 이래로 지방세로 전환됐다. 하지만 이 개혁들도 한계가 많아서 프로이센 대지주들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많은 양보를 해야 했고 특히 프로이센 특유의 사회를 3개 계급으로 나누어 차별적인 선거권을 주는 제도는 아예 손도 제대로 대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카프리비의 개혁은 성공적이었으나 실질적인 시스템 변화를 이끌어내기에는 너무 약했다. 특히 제국을 이루는 국가들의 정치 체제 차이가 심각했다. 제국과 그 실질적인 본체인 프로이센 왕국 간의 정치 괴리가 무시못할 수준으로 너무 컸다. 카프리비는 제국의회에서 중앙당과 좌파 자유주의자들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와중에 프로이센의 미켈 재무장관은 보수파들과 국민자유당과 협력하길 바라며 제국과 프로이센 간의 미묘한 알력다툼이 생겨났다. 결국 카프리비 재상은 1892년 겸직하고 있던 프로이센 총리직을 보토 추 오일렌베르크에게 반강제로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안그래도 의회에서 다수당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재상의 정치적 입지를 더더욱 악화시켰다. 특히 재상이 준비한 군사력 증강을 위해 준비한 새로운 군비 법안은 사회민주당,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그동안 카프리비를 지지해오던 중앙당마저도 반대했다. 이로 인해 의회가 해산되고 1893년 총선이 치러졌다. 사회민주당이 약진했으나 좌파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사상인민당과 자유사상당으로 쪼개지는 바람에 중앙당과 마찬가지로 의석 수가 감소했다.

이렇게 중앙당과 좌파 진영의 의석이 감소한 덕에 재상은 증강 군비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에는 성공하면서 한숨 돌릴 수 있었지만 바로 관세 및 무역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들의 저항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새로 창설된 농민 협회는 카프리비의 정책에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해나갔고, 1892년 티볼리당 협의회에서 새로 선출된 보수당 지도부가 반유대주의 강령을 채택하고 농민협회와 손을 잡으며 급속도로 우경화되어갔다. 황제도 문제였다. 빌헬름 2세는 갈수록 정치에 직접 참여하고 싶어했고 카프리비에게 직간접적으로, 그리고 무계획적이고 불규칙적으로 간섭했다. 물론 빌헬름 2세는 국내 정치보다는 웅장한 군함 건조 같은 해외 정책에 더 관심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카프리비의 국내 정책에까지 비토를 놓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만큼 정권 정당성 확보에 실패했고 오히려 보수주의자들의 반발만 불러왔기 때문. 게다가 아직도 영향력이 컸던 비스마르크도 카프리비를 비난하며 깎아내렸다.

빌헬름 2세는 통치 초반에는 사회민주당에 어느 정도 호응을 보였지만, 1890년대에 산업계, 지주들, 프로이센 총리 등 신하들의 압력으로 완전히 태도를 바꾸었다. 이들은 황제가 사회민주당과 좌파 자유주의자들에게 더 강경한 정책을 써야 한다고 요구했다. 새롭게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는 루머가 떠돌았고 심지어 누가 쿠데타를 기획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정계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지자 황제는 카프리비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고, 카프리비는 프로이센 총리 오일렌베르크와 함께 1894년 10월 해임당했다.

6.3.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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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당시 베를린의 모습 호엔로헤 재상
카프리비가 재상직에서 물러나고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가 1894년 10월 29일에 새 재상으로 취임했다. 그는 이미 75세가 넘은 고령이라 임시로 재상을 맡을 것처럼 보였다. 호엔로헤 재상은 최대한 황제와의 충돌을 피하려고 노력했지만, 본인부터가 역대 재상들 중 가장 자유주의 성향이 짙은 재상이었기에 근본적인 의견 충돌은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재임기간 내내 황제와 재상 사이의 잠재적인 의견 차이 때문에 내각 불안정이 계속됐다.

빌헬름 2세는 갈수록 직접 나라를 운영하려는 욕심을 두드러지게 드러냈기에 호엔로헤 역시 자신의 권한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정책을 추진하는 데에 머뭇거리고는 했다. 황제는 특히 인사 정책에 강하게 개입했다. 옛 카프리비 내각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대거 잘리거나 정치적으로 배제당했다. 사회정책은 1893년부터 정체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자유주의 성향이 있었던 호엔로헤 재상은 반사민주의 법안들에 대해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빌헬름 2세에게 떠밀려 1894년 국가 전복 기도 처벌 법안, 1899년의 감옥 법안[17] 등을 제출하기도 했다. 물론 의회에서 가로막혀 통과되지 못했지만. 프로이센에서 추진한 '소 사회주의 탄압법' 역시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다만 1898년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대학 교육에서 배제하는 등 이 시기 독일은 갈수록 보수화되어갔다.

호엔로헤 재상이 아무 것도 안한 것은 아니었다. 황제의 세계 정책에 발맞추어 베를린 - 비잔티움 - 바그다드를 잇는 3B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영국과의 건함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또한 근대 한국사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킨 삼국간섭 역시 호엔로헤 재상 때 일어났던 일. 게다가 1896년 호엔로헤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민법이 의회에서 통과되는 업적을 쌓기도 했다. 이 이전까지 지역적으로 민법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덕분에 독일 제국 전역에서 하나의 통일된 민법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새 민법은 1900년 1월 1일부터 발효됐고 이로써 제국 건국 이래 시작된 법률 성문화 과정이 30년 만에 완수됐다.

6.4. 베른하르트 폰 뷜로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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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00년 베를린의 전경
호엔로헤 재상과 황제와의 관계는 날로 안 좋아졌다. 새로운 예외법의 시행에 실패하자 황제의 측근들 사이에서 의회를 갈아엎어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높아졌다. 1897년 빌헬름 2세는 정부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호엔로헤 재상은 계속 남아있었지만, 핵심은 새로 임명된 4명의 인사들이었다. 프로이센 국무부 부총리 요하네스 미크벨, 내무장관 아르투어 폰 포자도프스키베너, 해군원수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국무장관 베른하르트 폰 뷜로가 그 주인공. 이들은 황제의 뜻을 충실히 따라 보수적인 국내 정책들을 연달아 펼치고 강력한 함대 육성, 세계 정책에 기반한 외교를 펼쳐나갔다. 호엔로헤 재상의 힘은 갈수록 줄어들고 친황제파 각료들이 등장해 알아서 기었기 때문에 황제와 내각의 사이는 크게 개선됐다. 특히 1900년 호엔로헤가 스스로 사임하고 베른하르트 폰 뷜로가 재상으로 취임하며 둘 사이는 더 좋아졌다.

1900년대 새로 등장한 뷜로 내각의 슬로건은 사회민주주의의 위협에 맞서 '국가 보존과 생산력'을 통합하겠다는 거창한 명분이었다. 즉 보수적인 관세 정책, 강력한 함대 육성, 세계 정치를 통해 독일을 사회적으로 통일하고 중산층과 부르주아들을 반사회민주주의로 끌여들여 단결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1897년 7월 발표한 수공업법은 상공회의소와 길드를 도입해 중산층들의 오랜 요구를 채워주었다. 정부는 농업과 산업의 이익을 통합하기 위해 새 관세 정책에 농업 및 산업계의 대표들을 참여시켰고, 실제로 보호 관세라는 당근 아래 어느 정도 농업과 중공업계 사이에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수출 지향적인 경공업과 화학 산업계는 보호 관세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1895년 산업가 협회를 설립해 반보호무역주의를 외쳤다. 보호 관세를 둔 농업계와 산업계의 협력도 장기적으로 지속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농업 관세 인상 가능성은 물가 인상을 두려워한 좌파 자유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의 반대를 불러왔다. 미텔란트 운하를 건설하려 했으나 엘베 동부 지주들의 극렬한 반대로 무산됐다. 관세 논란은 1902년까지 봉합되지 못했고, 실제로 농업 관세부과는 국민들에게 식료품값 부담을 안겼으며 때문에 1903년 사회민주당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6.4.1. 대양함대 건설

파일:kaiser-wilhelm-ii-bettmann.jpg
파일:imperial-german-navy-nav-images-in-publ.jpg
<rowcolor=#fff> 승선한 빌헬름 2세 독일 제국 해군
강력한 함대 건설은 빌헬름 2세 황제의 개인적인 최고 관심사이자 사회 내 쌓인 문제들을 해결할 돌파구로 여겨졌다. 특히 강력한 함대 건설을 통한 국력을 과시하겠다는 황제의 야심은 중산층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의회는 돈 먹는 하마인 함대 확충에 썩 미적지근한 반응이었지만 함대 관련 예산은 장기적으로 편성되어서 의회의 허락을 일일히 받을 필요조차 없는 사안이었기에 딱히 제동을 걸만한 방법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함대를 만들겠다는 황제의 구상은 이미 해양의 패권국이었던 영국의 경계심을 불러오는 최악의 부작용까지 필연적으로 불러왔다.

빌헬름 2세가 처음에 강력한 함대를 추구한 이유는 무역과 해안가 일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렇게 확충해놓은 거대한 대양함대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곳곳에 해외 기지들이 필요했고, 때문에 독일은 태평양 지대에서 식민지 정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순양함대로 기획한 계획이 점차 전투함대로 바뀌어갔다. 해군원수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가 이 함대 건설을 지휘하는 총책임자가 되었다. 티르피츠가 입안한 플랜에는 독일 해안을 공격적으로 방어하는 것은 물론, 핵심적으로는 적대국의 봉쇄함대를 돌파하는 것까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적의 봉쇄함대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공격자 역시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했으므로 이 정도의 억지력을 가지려면 웬만한 해군력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독일 해군은 북해에서의 실전을 가정한 교리로 변경해 훈련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인근 국가들, 특히 영국에게 엄청난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막대한 건설 비용과 의회 내의 반대 때문에 1896년에 한 차례 해군력 확장에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불과 2년 뒤, 사회민주당, 자유인민당, 중앙당 일부와 기타 소수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군력 확장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한 첫 번째 해군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1900년부터 다시 해군 증강 프로젝트가 시작됐는데 만약 현실로 이뤄졌다면 세계 최고라는 영국 해군의 3분의 2에 달하는 규모가 되었을 것이었다. 독일은 이런 야심찬 구상을 바탕으로 영국과의 해군 군비 경쟁에 나섰다.

티르피츠는 해군 확대에 대한 여론과 의회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막대한 홍보 캠페인을 벌였다. 해군 정보국은 정기적으로 해군의 위력을 과시하는 캠페인을 벌여 여론전을 펼쳤으며 1898년 설립된 함대 협회와 긴밀히 협력했다. 함대 협회의 회원은 상류층, 중산층에서 하위 중산층까지 폭넓게 분포되어 있었으며 1900년 그 회원 수가 27만 명에 달했다. 법인회원까지 합치면 그 규모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독일인들이 해군력 확대에 열광했던 이유는 해군의 활발한 홍보 프로파간다 덕분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중산층 사이에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해군에 대한 로망 덕분도 있었다. 게다가 당시 넘쳐나던 독일 민족주의는 크고 웅장한 함대가 곧 국가의 힘을 상징한다고 믿었기에 더더욱 함대에 열광했다. 함대를 건설하며 산업계가 막대한 이익을 본 것은 덤이었다. 하지만 엘베강 동부의 프로이센 지주들은 이 함대의 필요성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했고, 때문에 제2차 해군법 제정 때는 관세 정책에서 일정 부분 보수파에게 양보를 해야 하기도 했다.[18]

6.4.2. 세계 정책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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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undesarchiv_Bild_183-B0313-0014-067,_Bremerhaven,_Verabschiedung_Ostasientruppen.jpg
<rowcolor=#fff> 의화단 운동 진압을 위해 떠나는 독일군을 격려하는 빌헬름 2세
1880년대 비스마르크가 약간 제국주의 식민정책을 시도했던 이후부터, 1890년대부터 완전히 독일의 대외정책이 바뀌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의 제국주의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유럽 열강들의 행동 반경이 넓어졌고 충돌이 발생할 수 있는 요소들도 많아졌기 때문. 외교는 더이상 정부만의 비밀로 남아있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의 여론, 사회협회가 한 나라의 외교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제 정책 뿐만 아니라 전략 정책과 군비 정책도 마찬가지. 비스마르크 때까지만 해도 독일은 성공적인 외교를 펼쳐왔다. 처음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나중에는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어 중유럽에서 입지를 강화했으며 1891년에는 삼국 동맹을 만들어 관계를 다듬었다. 또한 영국과 관계 개선을 꾀했는데 잔지바르 헬골란트를 교환한 것도 이같은 목적이었다.[19] 1890년대 독일의 식민지 획득 목적은 오직 해군 기지의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이었다.

영국과의 좋은 관계 덕분에 러시아와의 관계를 포기할 수 있었다. 독일은 1890년 러시아와의 재무장조약 갱신을 거부했다. 독일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영국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관계 악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여겼다. 그 후 러시아는 프랑스와 더 가까워졌다. 1892년 체결된 프랑스-러시아 동맹으로 점차 유럽 열강들이 패를 이뤄 양극화되기 시작했다. 영국과의 화해는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1890년대 독일은 영국과 러시아를 오갔지만 둘 중 누구에게도 신뢰받지 못했다. 러시아의 독일 불신은 독일이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기 시작하며 더욱 커졌다. 하지만 영국과 제대로 우호 관계를 쌓지도 못해서 남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두고 계속 영국과 충돌했다.

1890년대 후반부터 마침내 독일은 대륙정치에서 벗어나 세계정치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즉 독일을 유럽의 제국을 넘어서 세계적인 제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뷜로 재상이 언급한 '우리는 그 누구도 음지에 몰아넣고 싶지 않으나 우리도 양지에 자리가 필요하다'라는 문구는 독일의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장이 되었다. 세계 정책은 국내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이는 제국 내의 결함을 대중들의 눈에서 가렸으며 원자재를 수입하고 수출할 시장 개척의 의미도 있었다. 사회민주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들과 국민들이 세계 정책을 지지했다.[20] 독일인들은 황제의 세계 정책이 풍요와 통합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 보수파들은 제국주의를 국가 통합 수단으로 여겼고 극우파들은 이미 해외 식민지들을 차지한 영국, 프랑스 등 열강들을 비난했다. 독일의 제국주의는 황제의 쓸데없이 자극적인 연설, 위협적이고 변칙적인 정책들로 점철되었으며 독일의 국력과 군사력을 고려했을 때 이는 주변 국가들에게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왔다.
파일:1024px-Germans_to_the_front.jpg
<rowcolor=#fff>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는 독일군을 미화하는 선전물
독일 제국주의 목소리의 핵심은 해외 식민지 확보였다. 하지만 거창한 계획에 비해 그 성과는 초라했다. 독일은 1898년 청나라를 협박해 산둥 반도 이남을 조차한 키아우초우를 획득했으며 1899년에는 태평양 미크로네시아 등 여러 섬들을 확보했다. 동남아시아 필리핀에도 진출하고 싶었지만 영국 미국에 가로막혀 시도하지도 못했다. 바그다드까지 이어지는 철도 건설은 1899년부터 반쯤 제국주의 팽창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유럽에서의 상황은 끊임없이 바뀌었다. 1900년대에 접어들었으나 영국과 독일 사이 관계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영국의 패권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독일과 독일의 해군 증강 시도에 위협을 느끼던 영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 역시 다른 국가들과 좋은 관계라고 하긴 힘들었고 외교란 언제나 바뀌는 것이기에 런던 베를린과 아예 척을 질 생각까지는 없었다. 의화단 운동 당시 서구 열강들이 8개국 연합군을 결성해 청나라를 침공했을 때는 일시적인 화해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1902년 이후 상황이 반전됐다. 1904년 영국과 프랑스가 우호협정을 맺었고 러시아와 가까워지려는 독일의 시도는 실패했다.[21] 빌헬름 2세는 직접 모로코 탕헤르에 상륙해 프랑스의 모로코 합병을 반대하는 등 프랑스를 견제하려 노력했으나 오히려 독일에 대한 불신이 커져갔을 뿐이었다.[22] 독일은 영국 - 프랑스를 적으로 돌렸고 삼국 동맹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 왕국마저 프랑스와 비밀 조약을 체결하면서 독일의 유럽 내 동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만 남아버리고 말았다.

6.4.3. 1900년대 독일 국내 정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ernhard_von_B%C3%BClow.jpg
파일:Reichstagssitzung1905.jpg
<rowcolor=#fff> 폰 뷜로 1905년 독일 제국의회
무리한 건함 경쟁과 세계 정책이 불러온 문제점들이 더이상 은폐하기도 어렵고 중장기적으로는 되려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 확실해졌다. 당시 독일 내 정치는 보수파, 국민자유당, 그리고 중앙당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1903년 치러진 총선 때도 정치 판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좌파 자유주의자들은 약간 손실을 입은 반면 국민자유당과 사회민주당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사회민주당은 의회에서 2번째로 거대한 정당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당이 원내 1당을 유지했고 정부의 가장 중요한 지지기반으로 남아있었다. 이 때문에 정부 역시 중앙당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했다. 예수회 금지령이 해제됐고, 중앙당의 요구에 따라 제국의회 의원들의 봉급도 도입됐다.

세기가 바뀌고 사회주의가 유입되면서 노동조합의 규모도 급속도로 불어났다. 1900년 독일 노조원은 총 68만 명이었지만 1906년에는 무려 160만 명으로 증가했다. 동시에 노사분규도 증가했다. 1900년에는 등록된 파업이 806건에 불과했으나 1906년에는 3,059건으로 늘어났다. 정부는 다시 사회 개혁을 재개했다. 더이상 노동자들이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 빠지는 것을 막고 정부의 연금과 국영보험에 의존하도록 만들 목적이었다. 1901년 사회개혁협회가 창립됐다. 그러나 정부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제한적이었다. 원래 정부의 목표는 사회의무보험을 확대하고 가내수공업에서 아동노동 금지, 대도시에 노동법원 도입 등 정도였다. 그러다가 1905년 광부 파업으로 광업법을 개정했고 광부들이 지하에서 일하는 시간을 하루 8시간 30분으로 제한, 노조위원회를 도입하는 양보를 하기도 했다. 이 이상의 개혁은 없었다.

군사 정책적으로는 평시 병력이 무려 1만 명으로 늘어났다. 1905년 발표한 새 함대 계획에 따르면 순양함을 여러 척 건조하고 더 강력하고 비싼 드레드노트를 건조할 예정이었다. 이 모든 것이 제국의 재정 부담을 어마어마하게 증가시켰다. 그러나 오랜 논의 끝에도 세수 개혁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조그마한 정책들만 겨우겨우 통과해서 세입은 크게 늘지 못했다. 그 와중에 폰 뷜로는 외교 정책 실패로 황제의 신임을 잃었다. 보수파는 뷜로가 사민주의자들에게 지나치게 유약하다고 불만을 품었다. 게다가 정부의 최대 지지기반이었던 중앙당마저도 점차 반정부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중앙당 내에서 기독교노동조합과 가톨릭 독일 인민협회의 지원을 받는 노동자파가 급부상했다. 특히 소규모 마을들의 농민들이 이들을 지지했다.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는 프로이센의 선거법 개혁과 식민 정책 전환을 요구했다. 남서아프리카의 나마족, 헤레로족 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추가 예산 요구가 거부당하자 의회가 해산됐고 1906년 말 새 총선이 치러졌다.

6.4.4. 뷜로 블록의 생성과 해체

독일 제국의회 의석수 변화
1890년 1893년 1898년 1903년 1907년 1912년
보수당 73 72 56 54 60 43
자유보수당 20 28 23 21 24 14
국민자유당 42 53 46 51 54 45
좌파 자유주의 진영 66 37 41 30 42 42
중앙당 106 96 102 100 105 91
사회민주당 35 44 56 81 43 110
소수 정당들 38 35 34 32 29 33
반유대주의 진영 5 16 13 11 22 10
독일 인민당 10 11 8 6 7 -
기타 2 5 18 11 11 9
1907년 선거 캠페인은 감정이 가득한 진흙탕 싸움이었다. 정부와 '반사회민주주의 제국연합' 같은 단체들이 떼거지로 나서서 중앙당과 사회민주당은 믿을 수 없는 세력이라고 프레임을 씌웠다. 보수당, 국민자유당, 좌파 자유주의자들은 중앙당과 사회민주당 모두에 반대하는 선거 블록을 형성했는데 이걸 '뷜로 블록'이라고 부른다. 좌파 자유주의자들은 본디 뷜로의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했지만 진보진영의 거두 오이겐 리히터의 사망 이후 반제국주의 강령을 포기했기에 뷜로의 편에 섰던 것이다. 결국 총선에서 뷜로 블록이 대승을 거두었다. 사회민주당은 의석이 거의 반토막났다. 중앙당은 의석 수는 증가했지만 보수당과 국민자유당이 의회 과반을 차지했기에 정국 주도권을 잃어버렸다.

보수당, 국민자유당, 좌파 자유주의자들이 뭉쳐 형성된 뷜로 블록은 총선 이후에도 계속됐다. 뷜로는 더이상 중앙당에 끌려다녀야 할 필요가 없었기에, 친중앙당 성향의 포자도프스키베너 내무장관을 해임하고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를 임명했다. 뷜로 재상은 뷜로 블록을 기반으로 정책을 펼쳤다. 성향이 다른 여러 정당들이 모여 만들어진 블록이었기에 협력이 가능한 분야도 있었으나 불가능한 분야들도 많았다.

결사법과 집회법 개정이 이뤄지며 자유주의적 정책도 나왔지만 보수파의 압력으로 농민들은 여전히 결사의 자유가 없었다. 또한 독일어를 국어로 지정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로렌인[23]들과 폴란드어를 쓰는 폴란드인들을 차별하는 법안도 좌파 자유주의자들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법이었다. 테오도어 바르트 등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뷜로 블록의 한계에 실망하고 블록을 떠났다. 프로이센의 삼계급 투표제도는 여전히 보수파와 자유주의파 간의 치열한 논쟁거리였고, 갈수록 악화되는 제국 개혁은 이제 미루기조차 어려운 수준이었다. 뷜로는 한동안 뷜로 블록을 조율할 수 있었으나 황제의 호의와 미약한 지지기반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정치적으로 굉장히 위태로웠다.

국내 정치는 1908년 빌헬름 2세가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역대급 병크를 터뜨리면서 최악으로 치달았다. 빌헬름 2세가 영국을 방문하는 동안 데일리 텔레그래프와 인터뷰를 했는데, 문제는 이 인터뷰에 황제가 모든 열강들을 까대며 스스로 적을 만들고 다녔다는 것. 정치계와 대중들 사이에서 황제에 대한 불만과 실망이 터져나왔고 황제의 통치는 그 정당성을 잃어갔다. 막시밀리안 하든은 심지어 황제의 퇴위를 요구했으며 심지어 보수주의자들마저 황제의 입을 자제하게 만들 필요성을 느꼈을 정도였다. 매운 맛을 본 황제는 그 이후로 국내 정치에 관여하는 정도가 다소 줄어들었다. 거기다가 1906년부터 3년간 끓어오른, 빌헬름 2세의 궁정에서 터진 희대의 동성애 스캔들 '율렌부르크 사건'에 뷜로 재상이 거의 황제를 옹호하지 않은 탓에 뷜로는 빌헬름 2세의 신임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1909년에 터진 제국의 재정 개혁 문제가 뷜로 내각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빌헬름 2세의 무리한 건함 경쟁과 제국주의 팽창 정책, 세계 정책 때문에 독일의 재정은 반쯤 황폐화되어버린 실태였다. 지출이 수입을 초과했으며 국가 부채는 산더미처럼 쌓여 그 규모가 45억 마르크[24]에 달했다. 게다가 매년 5억 마르크씩 적자가 쌓였다. 누구나 세수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했지만 문제는 누가 그 세금을 내느냐였다. 소비세는 저소득층에게 영향을 끼쳤지만 재산세는 부유층들에게 민감한 문제였다. 정부는 뷜로 블록 내 정당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개혁안을 제출했으나 상속세에서 갈등이 불거졌다. 특히 보수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동산세를 피하려 들었지만 자유주의자들은 반드시 토지에 세금을 매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충돌했다. 중앙당이 보수당과 협력하며 법안은 조금 더 부유층 쪽에게 온건해졌으나 대지주들은 그마저도 용납치 못했다. 결국 이를 둘러싸고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서 마침내 뷜로 블록이 붕괴했고 1909년 6월 뷜로 재상은 책임을 물어 사임했다.

7.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7.1.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내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obald_von_Bethmann-Hollweg_1913b.jpg
파일:800px-Portrait_of_Ernst_Basserman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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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베트만홀베크 에른스트 바세르만[25] 로자 룩셈부르크
보수당 내에서도 지나치게 융커, 지주들에게 집중된 당권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일어났으나 체질 개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보수당은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 지주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데에 급급해졌다. 보수당은 점점 정부와 반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극우 세력들과 결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당은 1912년~1913년 동안 정치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보수당과 협력했다. 이는 중앙당 내 민주파벌이 약화됐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예를 들어 중앙당 내 노동자파는 노동조합 사이 분쟁이 일어나며 그 세가 위축됐고, 중앙당은 우경화되어갔다. 반대로 국민자유당은 뷜로 블록 붕괴의 여파로 보수당과 거리를 두며 좌경화되었다. 물론 국민자유당 내에도 보수와의 협력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많았기에 내부에 충돌이 일어났다. 에른스트 바세르만 등 국민자유당 지도부는 당내 통합을 중시했던 반면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등은 좌파 자유주의자들과 연합을 모색했다.

좌파 자유주의 진영은 뷜로 블록에 참여해서 실패했던 뼈아픈 경험 때문에 1910년 합당해 훨씬 좌파적인 진보인민당을 창당했다. 다만 자유주의자들 역시 사회민주당과 협력할지말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갈등이 많았다. 가장 큰 이유는 사회민주당의 노선 때문이었다. 사회민주당의 당세가 점점 커지면서 당의 방향성에 변화가 일어났는데 일부 사민당원들은 심지어 마르크스주의를 강령에 넣거나 당세 확대에 집중하던 반면 로자 룩셈부르크 등은 대중파업을 장려하고 노동자 급진화와 동시에 혁명을 준비했다. 수정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좌파 자유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사회개혁에 나설 것을 촉구했지만 별다른 지지를 받지 못했다.[26] 아우구스트 베벨 등 사민당 지도부는 당내 통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중도 노선을 유지했다.

뷜로의 임기 종료와 함께 제국주의 팽창, 온건한 내부 개혁으로 독일이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도 함께 종결됐다. 뷜로 블록의 붕괴는 지주-농촌 세력과 노동자-도시 세력 간의 갈등 대립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정당들과 제국의회의 힘이 날로 강해졌고 반대로 황제와 군부의 지도력은 약화됐다. 새롭게 재상으로 임명된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는 내무장관 클레멘스 폰 델브뤼크와 함께 의회의 힘을 약화하려 애썼다. 재상은 의회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단일 정당과 영구적인 협력을 하기보다는 그때그때마다 의회 다수당과 연정을 맺었다. 다만 내각은 초창기에 보수당과 중앙당에 크게 의존했고, 아무래도 보수당의 힘을 빌리다 보니 대부분의 개혁에 냉담했다. 보통 현실 문제 해결보다 국내 정치 안정이 우선이었기에 민감한 개혁 현안들은 모조리 연기됐다. 그나마 재정 측면에서는 엄격한 재정 긴축을 실시해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좌파 부르주아들과 사회민주당의 압력이 워낙 거세서 정부도 개혁의 목소리를 마냥 무시할 수 만은 없었기에 이들에게 맞서 보수당, 중앙당, 국민자유당을 최대한 결속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 3개의 세력들을 하나로 모으는 건 절대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10년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제를 개편하려 시도하자 보수당은 이 것이 너무 과격하다고 반대했지만 국민자유당은 반대로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와중에 사회민주당은 민주적인 투표권을 요구하는 대중집회를 열었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당과 중앙당은 뭉쳐서 '흑청 블록'을 결성했다.[27] 경제정책은 여전히 지주 친화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베트만홀베크 내각이 아예 보수적이지만은 않았다. 베트만홀베크는 1911년 사회보장조례로 사회보장정책을 강화, 근로자 보험을 도입하는 등 사회개혁적인 정책들을 추진하기도 했다.[28]

7.2. 1912년 선거 이후 국내 정치

파일:Karte_der_Reichstagswahlen_1912.svg.png
<rowcolor=#fff> 1912년 독일 제국 최후의 제국의회 선거 결과[29]
이미 개판이 되어버린 독일을 다스리는 것은 외줄타기나 다름없는 일이었지만 1912년 총선 이후부터는 몇 배로 더 어려워졌다. 일관성 없이 이랬다저랬다하는 정부의 정책은 유권자들의 불만을 불러왔고 총선 때 보수, 중앙, 진보 정당 모두가 의석 수 손실을 입었다. 확실한 승자는 오직 하나, 처음으로 원내 1당을 차지한 사회민주당이었다. 하지만 사회민주당 역시 의회 과반을 차지하는 데에는 실패했고 보수당과 중앙당의 흑청 블록이 과반을 잃어버리며 정국은 극도의 혼란에 휩싸인다. 이제 보수당은 수세에 몰렸고 극우 세력들이 범독일협회와 육군을 중심으로 견인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지주와 산업가들은 1913년 카르텔을 결성해 우익의 보호 세력을 자처했다. 보수 세력은 좌파 뿐만 아니라 정부에게까지 점점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수 사이에서도 지주들과 민족주의자 사이에서 의견 차이가 만연했다.

1912년 총선의 충격으로 개혁이 일어나기도 했다. 중앙당에서는 지주들이 영향력을 크게 잃었고 반대로 부르주아들의 목소리가 강해졌다. 그 결과 중앙당은 보수당과의 관계를 끊고 국민자유당과의 협력으로 전환했다. 두 정당 모두 민족주의적이고 군비 증강 정책을 지지했으나 한편은 독일이 더 큰 민주화와 의회의 권한 증대를 요구하기도 했기에 이해관계가 딱 맞았던 것이다. 좌파 자유주의자들 역시 중앙당과 국민자유당의 결합을 환영했고 여기에 사회민주당까지 다리를 놓아주려 했지만, 워낙 사민당에 대한 반감이 심해서 성공하지는 못했다. 사회민주당 역시 중앙당과 국민자유당에 대한 의심이 상당했다.

사회민주당이 원내 1당이 되면서 정부의 입지는 이전보다도 어려워졌다. 내각은 그 어떠한 이념도 따르지 않고 그때그때 현실적인 대응을 하겠다고 천명했다. 하지만 1912년 총선 이후 국내정치는 정체되어 극한의 대립, 고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특히 사회 갈등이 두드러졌다. 1912년 광부들의 파업으로 상징되는 노동 쟁의의 증가, 반노조 정책의 증가, 개혁의 정체 등 사회는 발전해나가지 못했다. 반면 정부는 마음대로 군비 증강과 해군력 증대를 밀어붙였다. 1912년 군대를 강화하는 내용의 해군법 개정이 통과됐고 1913년 6월 20일에는 새 징병법이 통과되어 역대 최대 규모의 병력 증강이 이뤄졌다. 군비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의회는 일회성 재산세와 누진 부유세 도입을 결정했다. 처음으로 중앙당, 국민자유당, 사회민주당이 한 뜻으로 뭉쳤고 이는 의회의 권한 증가로 이어졌다.[30] 독일 의회는 정부에 대한 불신임을 표했지만, 의회조차도 곧 들이닥칠 전쟁의 참화를 피하게 만들 능력이나 비전은 없었다.

7.3. 실패한 외교 정책과 유럽 내에서의 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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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u.k._SMS_Panther.jpg
<rowcolor=#fff> 당시 유럽의 세력도 S.M.S 판터 호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이미 몇 년전부터 착실히 업보를 쌓으면서 유럽 내에서 고립되고 있었다. 특히 유럽의 화약고였던 발칸반도가 문제였다.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예전 1878년에 점령했던 오스만 제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방을 아예 합병해 버렸는데, 이는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의 반발을 불러왔다.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편을 들고 러시아를 압박했다. 독일은 보스니아 합병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와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독일 외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독일은 러시아를 적으로 돌렸고 대규모 재무장을 시작했다.

당시 재상직을 맡고 있었던 뵐로 역시 점점 고립되는 독일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더 신중한 외교를 펼쳤다. 베트만홀베크 재상 역시 확장주의적인 세계 정책에서 현실 정책으로 다시 선회하며 주변국들의 신뢰를 다시 사려 노력했다. 그는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꾀했고, 영국과도 관계 회복에 나섰다. 실제로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관계는 일시적으로나마 개선되기도 했다. 영국과는 해군력 증강 문제에 대해 합의하고 대신 전쟁 발발 시 영국의 중립을 보장받고자 했지만, 황제와 국민들이 해군 증강 문제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에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영국도 독일과 화친함으로써 프랑스, 러시아와의 동맹 악화를 우려했기에 독일과의 관계 개선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 와중에 독일은 1911년 제2차 모로코 위기로 그동안 겨우겨우 쌓아올린 신뢰를 또 잃어버렸다. 프랑스가 모로코 합병을 착착 추진해나가며 프랑스 식민화에 반발하는 모로코인들의 폭동을 강제로 진압하자, 독일은 이를 빌미로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를 빼앗아올 궁리를 했다. 독일은 이 핑계로 아가디르 앞바다에 군함 판터 호를 파견했다. 물론 모로코의 독립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프랑스령 식민지를 뺏어오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이는 되려 프랑스의 동맹이던 영국의 참전을 불러왔고, 프랑스가 별다른 양보를 보이지 않자 독일은 자국이 유럽의 왕따라는 사실을 씁쓸히 받아들이며 굴복해야 했다.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합병을 받아들이는 대신 프랑스령 카메룬 일부를 받았다. 하지만 이는 완벽한 외교적 실패였다. 독일은 프랑스에게 고작 카메룬을 받고선 경제적으로 훨씬 풍요로운 모로코를 내주었고, 국제사회에서도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제외한 아군이 없다는 사실만이 대놓고 떠벌려졌기에 독일의 고립을 만천하에 드러낸 최악의 악수였다.

독일 외교가 날로 악화되자 당연히 의회와 대중들 사이에서도 고립 탈피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하지만 이미 영국과 프랑스가 동맹으로 붙어버린 마당에 독일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독일 지도부 내에서도 의견 차이가 컸다.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는 황제와 함께 해군 확장을 원했으나 베트만홀베크 재상은 영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이를 막으려 들었다. 하지만 재상이 황제의 뜻을 거스르긴 어려웠고 영국과의 관계는 결국 개선되지 못했으며 영국과 독일 간 군비 경쟁은 계속됐다.[31] 발칸반도의 혼란 문제를 두고 수많은 국가들이 다툼을 벌였음에도 독일 지도부는 여전히 분열된 상태였다. 1912년 12월 황제는 내각의 민간 관료들은 제외하고 군 장성들만을 불러 전쟁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바로 전쟁 선포 결정이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독일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며 선제공격에 나설 것이라는 사실은 갈수록 분명해졌다. 이 이후 1913년 징병법이 통과되어 군대를 대규모로 재무장하기 시작하며 전운이 드리웠다.

8. 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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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사라예보 사건 7월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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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사라예보 사건 7월 위기를 묘사한 만평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인에게 암살당하는 초대형 사건이 터지면서 유럽 대륙은 기나긴 평화를 끝내고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열강들은 서로 서로를 견제, 협박하며 광란의 외교위기에 빠져들었는데 이 것을 7월 위기라고 부른다. 7월 위기 당시 독일은 외교전의 한복판에 서있었다. 1912년 발칸 위기 때와는 달리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세르비아에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으며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베트만홀베크도 이 조치가 유럽에서 대전쟁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근시일 내 러시아의 국력이 독일을 추월하고 영국 - 프랑스 동맹이 더 견고해질 거라는 우려 탓에 차라리 미리 예방 전쟁을 터뜨리자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따라서 독일은 이제 유일한 유럽 내 동맹,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결속하는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 영국, 프랑스를 모두 적으로 돌리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별다른 묘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교착 상태에 빠진 국내 정치 탓도 있었다. 독일 정부는 정부 비판적 세력이 되어버린 보수파를 다시 외교 강경책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결국 독일은 러시아에 대한 예방 전쟁 준비에 착착 나서기 시작하고야 만다.

재상이 전쟁을 썩 달갑잖게 여겼어도 워낙 국내외적 압박이 거세 외교적으로 해결할 가능성은 없었기에 전쟁 자체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제국 지도부는 모든 위험이 통제범위 안에 있다고 보고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모든 것은 러시아의 태도에 달려있었기에 사실 독일이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기도 했다. 그러나 7월 말,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러시아가 부분 동원령으로 대응하면서 전쟁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다. 독일 측에서는 여전히 외교전으로 타협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국민들은 이미 전쟁을 예감하고 있었다. 독일 정부와 언론은 러시아를 침략자로 묘사하는 데에 열을 올렸고 러시아와 독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러시아 제국이 7월 30일 마침내 총동원령을 발표하자 독일은 이를 빌미로 8월 1일 러시아에, 3일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다.[32] 독일은 프랑스를 쉽게 침공하기 위해서 중립국인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침공하는 슐리펜 계획을 실행했다. 독일군의 목표는 독일 - 프랑스 국경에 빽빽하게 세워진 요새들을 우회하고 빠른 진격전으로 프랑스군을 포위해 조기 섬멸해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슐리펜 계획은 당시 독일군의 무기 수준과 기동 속도를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독일 군부가 원하는 만큼 빠른 진격 속도가 나오지 않았고, 결국 프랑스군은 독일군을 국내에 묶어놓는 데에 성공했다. 전투는 소모전으로 끌려들어갔으며 영국이 독일의 벨기에 침공을 방관할 것이라는 희망도 깨져버렸다. 영국은 모든 식민지들을 이끌고 대전에 참전, 협상국을 결성해 독일의 동맹국 세력과 맞붙었다.

8.2. 전쟁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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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세계 대전 당시 동맹국과 협상국 지도
독일은 빠르게 협상국을 포위하기 위해 8월 18일부터 대규모 공세를 펼쳐 브뤼셀로 진격했다. 독일군은 9월 4일 마른강을 건넜으나 제1차 마른 전투에서 협상국의 반격에 막히면서 서부 전선의 빠른 돌파는 실패로 돌아갔다. 마른 전투에서 패전하자 독일군은 제1차 이프르 전투에서 최대한 서부 전선을 빨리 해결지으려 했는데, 이마저도 실패했다. 프랑스를 속전속결로 마무리하려던 슐리펜 계획은 실패했고 이는 곧 독일이 서쪽의 프랑스와 영국, 동쪽의 러시아를 동시에 상대하는 이중전선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가 예상보다 일찍 동프로이센을 침공했으나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이 압승을 거두며 진격이 돈좌됐다.[33] 그 와중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전쟁 초기부터 러시아, 세르비아를 동시에 상대하기 쩔쩔매면서 큰 도움이 안되고 있었다. 독일군은 한 쪽 전선이라면 모를까, 양면전선에서 모두 승리할 역량은 없었다.

1915년 들어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서부 전선보다 동부 전선이 중요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망할 판에 처하자 독일은 지원을 파병해 오스트리아를 구원하고 동맹국인 오스만 제국과 연결선을 구축해냈다. 독일의 맹렬한 공격으로 러시아 제국군은 밀려났고,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으로 참여하며 세르비아를 패퇴시켰으며 루마니아 왕국은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1915년 5월 23일에 사태를 관망하던 이탈리아 왕국이 삼국 동맹에서 이탈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하면서 독일은 또다른 전선을 펼쳐야만 했다. 동쪽의 러시아, 서쪽의 프랑스와 영국, 남쪽에서는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무려 3중 전선에서 싸워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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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베르됭 전투 솜 전투
1916년부터는 전쟁의 중심이 다시 서부 전선으로 옮겨왔다. 그러나 곳곳에 파인 참호와 요새들 때문에 양 측은 전선을 밀어붙여 돌파하거나, 지지부진한 소모전에 시달리거나 둘 중 하나를 강요받았다. 1915년 봄 협상국은 여러 차례 독일 전선을 돌파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독일은 프랑스에게 막대한 소모를 강요하기 위해 1916년 2월 21일 베르됭 전투를 벌여 엄청난 인명, 재산 피해를 냈다. 독일의 피해도 만만찮아서 양 측에서 각각 60만 명이 넘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명피해가 발생, 프랑스에 일방적인 손실을 주겠다는 목표는 실패로 돌아갔다. 전투의 비인간성은 독일군의 사기를 급격히 저하시켰다. 협상국은 1916년 7월 솜 전투에서 반격을 시도했으나 역시나 지옥도를 방불케 할 수준의 인명피해를 낸 뒤 성과없이 끝났다. 양측 모두 병사들을 갈아넣던 미친 짓은 1916년 11월에야 중단됐다.

서부 전선에서 전투가 한창일 때, 사실 독일에서는 이미 내부적으로 다중 전선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연해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와 러시아 모두가 공세에 나섰다. 브루실로프 공세로 인해 갈리치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무너졌다. 이를 본 루마니아는 잽싸게 협상국 편으로 붙었고 독일군은 동부 전선을 보강하기 위해 피같은 병력을 또다시 동쪽으로 빼돌려야 했다. 1916년 8월에는 참모총장이 에리히 폰 팔켄하인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로 교체됐다. 독일 군부는 1916년 이후 점점 발악하며 과격해졌다. 독일은 1917년 1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했는데[34] 이는 1917년 4월 6일 미국이 협상국 측으로 참전하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1917년 봄부터는 프랑스가 니벨 공세를 펼쳐 공세를 시작했고 영국은 아라스 전투와 7월 말 제3차 이프르 전투로 반격에 나섰다. 1918년 늦여름부터는 미군이 쏟아져들어왔다. 독일은 서부 전선에 막대한 병력과 자원을 쏟아넣었지만 획득한 영토는 작았고 인명피해는 나라가 휘청거릴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1917년 러시아 제국에서 혁명이 일어나 전제정이 뒤집히자 동맹국도 잠시간 숨통이 트였다. 2월 혁명으로 차르가 쫓겨났고 뒤이은 10월 혁명으로 임시정부까지 무너뜨린 소비에트 러시아는 일단 내부 안정을 위해 어떻게든 독일과의 전쟁을 멈추길 바랐다. 1917년 12월 중순에 휴전이 체결됐고, 독일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라는 러시아 희대의 굴욕을 안겨주며 엄청난 이득을 따냈다. 러시아는 폴란드, 쿠를란트, 리투아니아, 조지아의 대부분을 포기하고 우크라이나 핀란드의 독립을 보장하는 동시에 에스토니아 리보니아에서 철수해야 했다. 동부 전선을 마무리한 독일은 서부 전선에 집중하려 들었다. 1918년 3월 독일 최후의 발버둥인 루덴도르프 공세가 이뤄졌지만 곧 실패하며 독일의 패배는 기정사실화되었다. 독일은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아가며 싸우는 협상국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고 1918년부터 더더욱 많은 독일군들이 협상국에 투항하거나 항복했다.

8.3. 전쟁 도중 국내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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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14년 브뤼셀을 점령한 독일 제국군
전쟁 시작 직후부터 독일은 전시 경제 체제로 전환됐다. 잠시간 실업률이 높아졌지만, 전쟁의 막대한 수요와 징집으로 인력이 빨려들어가면서 곧 인력 부족이 발생했다. 기업들은 전쟁 포로들을 노동에 동원하고 여성의 비중을 늘려서 부족한 남성 노동력을 메꾸려 시도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식량 수입 부족, 농업 노동력 부족 등 문제가 터져나왔고 독일 내의 물자 수급은 날로 악화되었다. 물자 공급 부족으로 물가는 폭등했고 정부는 이를 통제하는 데에 실패했다.

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얽힌 실타래처럼 꼬여있던 국내 문제들은 한순간에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정부가 고안하나 '나는 그 어떠한 정당도 모른다, 나는 독일만 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독일인들이 파벌을 초월해 독일이라는 국가 아래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다. 독일에서는 러시아 제국이 침략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체제에 가장 비판적인 사람들마저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 아래에서는 모두 일단 정부에게 협력했다. 예를 들어 사회민주당은 7월 위기 때까지만 해도 대규모 시위를 개최했으나 전쟁이 터지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반전주의자들은 고립된 반면 에두아르트 다비트나 루트비히 프랑크 같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전쟁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빠르게 전쟁예산을 통과시켜주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전쟁이 길어야 몇 주 안에 끝날 것이라 생각했고 사회적으로 모든 분쟁을 잠시 멈추는 '합의'가 생겼다. 노조는 파업을 연기했고 의회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든 선거를 미뤘다.

계엄령이 선포되며 행정권은 군관구의 군사령관들에게 이양됐다. 이 24명의 군사령관들은 법적으로는 황제 직속이었으나 빌헬름 2세는 더이상 이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 개전 직후부터 전쟁본부에만 머물던 황제는 상황에 완전히 압도되어 버려 정치적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고 권위를 상실했다. 무능한 황제 대신 군부의 참모총장과 그의 부관 등 군부 인사들이 권력의 핵심으로 급부상했다.

전쟁 초기에 독일이 군사적으로 협상국을 밀어붙이고 언론 검열로 인해 좋은 낭보들만이 속속 날아들자, 독일인들 사이에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겨났다. 독일인들의 기대치는 하늘을 뚫어갔고 전쟁 목표는 날로 높아져갔다.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는 1914년 9월에 독일이 동쪽과 서쪽으로 크게 영토를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벨기에를 영구적으로 합병해야 하며 러시아에 제정을 폐지하고 친독 위성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재상은 프랑스의 영토 양도, 독일 중심의 거대한 중유럽 경제권 형성, 중앙아프리카의 거대한 식민지 건설 등 장밋빛 청사진을 내놓았다. 경제인 협회는 대놓고 점령지 주민들의 권리 박탈과 추가 합병을 요구했다. 그러나 노동계는 기존의 방어적 전쟁 입장을 고수했다.[35] 하지만 재상은 평화협상을 주장하면서도 여론에 떠밀려 전쟁을 계속해나갔고, 이는 좌파와 우파 진영 모두에게서 재상의 진의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사회민주당 내부에서는 균열이 일어났다.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추가 전쟁예산 통과에 반대표를 던진 첫 제국의회 의원이었다. 1915년 3월에는 오토 륄레가 그에게 합류했다. 또 1년이 지나자 무려 20명에 달하는 사회민주당 의원들이 이들과 뜻을 함께했다. 이들은 사회민주당 내의 또다른 야당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소위 '사회민주주의 노동연합'을 형성해 사회민주당 내부에서 지속적인 반전 목소리를 냈다. 결국 리프크네히트와 륄레는 당을 떠났고 그의 추종자들도 1916년 3월 24일에 사회민주당에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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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힌덴부르크 루덴도르프 육군최고사령부
의회 최대 정당이던 사회민주당에 균열이 쩍쩍 가던 와중에, 중공업계와 보수파들이 재상을 공격하면서 내각은 더 큰 위기에 빠졌다. 이들은 이미 1915년부터 영국의 무역 봉쇄에 맞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확대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재상은 인기없는 참모총장 팔켄하인을 전쟁영웅 파울 폰 힌덴부르크 에리히 루덴도르프로 교체해 그들의 후광을 빌리기를 바랐지만 되려 이들이 재상의 신중한 전쟁 전략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몀해지면서 더욱 궁지에 물렸다. 이들은 오히려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옹호했고 영토를 공격적으로 합병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베트만홀베크 재상은 갈수록 인기를 잃어갔다. 독일은 사실상 군부 독재 국가로 바뀌어갔다. 독일의 실질적인 권력은 황제도 내각도 아닌 육군최고사령부로 옮겨갔다. 군부가 폭주하자 의회는 초당적으로 예산소위를 결성, 의회가 휴회하더라도 여기에서 전쟁과 외교를 논의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육군최고사령부가 전쟁에 모든 가용노동자들을 동원해 전국민을 군사화하겠다는 미친 계획을 드러내자 의회는 노동자들에 대한 제한을 걸어 군부에 제동을 걸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군최고사령부의 권력은 엄청났다. 육군최고사령부는 재상과 내각의 반대에도 결국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했다. 하지만 독일의 상황은 날로 나빠졌다. 영국의 해안 봉쇄, 전쟁경제 전환의 부작용, 운송 차질 등으로 심각한 식량 부족과 기아, 폭동이 일어났다. 그 악명높은 순무의 겨울이 바로 이 시기의 일. 정치적으로도 다시 끓어올랐다. 좌파 자유주의자들은 1917년 3월 국민자유당, 사회민주당, 중앙당과 힘을 합쳐 제국의 의회국가화를 추진했다. 베트만홀베크는 최대한 난국을 수습하려 노력했지만 정작 빌헬름 2세는 1917년 4월 7일 그에게 애매모호하게 부분적으로만 힘을 실어주면서 큰 도움을 주지 않았다. 수많은 세력들이 난립했고 독일 정계는 수렁에 빠져들었다.

전쟁에 지친 노동자들 사이에서 대규모 파업이 시작됐다. 사회민주당내 좌파 인사들이 주도한 사회민주주의 노동연합을 모태로 창설된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이 큰 인기를 끌었다. 독립사회민주당은 심지어 그 모체인 사회민주당보다도 더 인기가 많아졌다. 정부와 군부가 평화 협상에 미온적이자 중앙당의 에르츠베르거는 의회에서 평화 결의안을 추진했고 좌파 자유주의자, 국민자유당, 중앙당, 사회민주당 등 정당을 초월해 평화에 대한 갈망을 드러냈다. 의회가 초당적으로 협력해 평화를 요구하자 재상은 이들을 중재하려 시도했는데, 이런 재상의 태도에 불만을 품은 군부와 육군최고사령부는 황제에게 재상을 잘라버릴 것을 강요했다. 보수당부터 사회민주당까지 재상을 압박하는 와중에 군부마저 재상에게 등을 돌리자 더이상 버틸 수 없었던 베트만홀베크는 1917년 7월 31일 사퇴했다.

베트만홀베크의 후임은 게오르크 미하엘리스 재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육군최고사령부의 횡포와 군부독재에 저항할 만한 재목이 아니었다. 군부가 평화를 반대했기 때문에 의회의 평화결의안은 1917년 교황의 공허한 평화 요구만큼이나 쓸모가 없었다. 되려 의회가 합병 없는 평화를 요구하자 이에 자극받은 극우 세력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볼프강 카프를 중심으로 창당된 독일 조국당은 1918년 무려 30만 명의 당원을 동원했고 독일은 더 많은 영토를 얻어내야 한다고 대중들을 선동, 소위 '힌덴부르크식 평화'를 주장하며 전쟁 의지를 불태웠다. 정부가 조국당을 뒤에서 지원하자 미하엘리스는 의회의 신임을 잃었다. 미하엘리스가 쫓겨나자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이 새 재상이 되었다. 그는 의회의 목소리를 무시하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군부와의 충돌을 피했고 의회에 권력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독일 11월 혁명 이후에도 군부는 동쪽의 점령지를 포기하기를 거부했고, 이는 결국 독일이 서방 협상국들과 그나마 나은 조건의 평화협상을 체결할 마지막 기회까지 제 발로 걷어차버린 셈이 되었다.

8.4. 11월 혁명과 제정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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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유럽 국가들이 그랬듯이 독일 또한 애국주의에 고취된 청년들의 자원병 열풍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 독일은 200만 명이 넘는 젊은이를 잃었다. 전쟁으로 인해 독일은 피폐해졌고 장군들에 의한 군부독재 체제가 성립되었다. 의회는 힘이 전혀 없었고 황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전 말기에 이르러 몇 차례의 합리적인 휴전조약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군부는 이를 거부했는데, 군사적으로 현 상황을 이겨낼 수 있다는 허황된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참패였고 군부도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사회민주당, 좌파 자유주의자들, 중앙당은 연합을 결성해 육군최고사령부에 맞서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정당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상당했다. 1918년 1월 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협상 중단으로 수십만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필리프 샤이데만,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오토 브라운[36] 등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파업 지도부에 합류했으나 부르주아 정당들은 파업을 반대했다. 그와중에 1918년 8월 8일 아미앵 전투에서 협상국 군대가 동맹국 군대를 박살내며 독일의 패배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오자 의회는 마침내 중앙당의 도움을 받아 헤르틀링 재상을 쫓아내기로 결정했다.
파일:Ausrufung_Republik_Scheidemann.jpg
파일:Bundesarchiv_Bild_183-R12318,_Eysden,_Kaiser_Wilhelm_II._auf_Weg_ins_Exil.jpg
<rowcolor=#fff> 의회 발코니에서 공화국을 선포하는 샤이데만[37] 네덜란드 망명 직전의 빌헬름 2세[38]
동시에 헤르틀링과 정부도 혁명을 막기 위해서는 정부가 어쩔 수 없이 양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내 1918년 8월 14일 그 군부마저도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인정했고, 9월 29일 휴전 제안을 작성할 것을 의회에 요구했다. 당연히 전쟁과 패배의 책임을 군부가 아닌 의회에 돌리려는 시도였다. 이미 반쯤 허수아비가 되어버린 황제는 의회와 군부의 압력을 받아 패배를 인정,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독립사회민주당, 진보인민당, 중앙당이 연합을 구성하고 바덴 대공국 막시밀리안 폰 바덴 왕자가 재상을 맡았다. 군부는 그 와중에도 정부에게 미국의 우드로 윌슨에 중재를 요청해 붕괴 일보 직전인 독일군을 살려야 한다고 압박을 넣었다. 10월 말 빌헬름 2세는 루덴도르프는 해임했지만 힌덴부르크는 유임시켰다. 1918년 10월 26일, 의회는 10월 개혁을 통해 공식적으로 제국의 의회국가화를 단행했다.[39]

물론 개혁으로 제국을 살리기엔 너무 늦었다. 10월 24일 영국 함대에 맞서 출항해 끝까지 싸우다 죽으라는 군부의 지시는 독일 제국 해군 입장에서 당연히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이들은 결국 11월 3일 킬 군항의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며칠 만에 독일 11월 혁명으로 발전했다. 독일 곳곳에서 노동자 평의회가 결성됐고 쿠르트 아이스너 바이에른 왕국을 멸망시킨 뒤 바이에른 자유국을 선포했다.

혁명의 열기는 수도 베를린마저도 강타했다. 노동자 무력혁명을 두려워한 바덴 재상은 황제의 퇴위를 발표하고 독일 재상직을 사회민주당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넘겼다. 같은 날 오후 필리프 샤이데만은 공화국을 선포했고 스파르타쿠스 연맹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독일 자유사회주의공화국을 창설했다. 황제는 상황 수습을 위해 자발적으로 퇴위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11월 10일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대부분의 독일 군주들은 반강제적으로 퇴위했고,[40] 카이저 빌헬름 2세의 공식적인 퇴위 선언은 망명 2주 뒤인 1918년 11월 28일에나 이루어졌다. 이로써 독일 제국은 1871년 건국된 이래 불과 47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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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이센도 폴란드인, 소르브인 등이 있었지만 아예 독일인이 절반도 되지 않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비하면 독일인 비중이 훨씬 높았다. [2] 빈 회의 이후 독일 연방 내에서의 모습이다. [3] 독일 최북단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대한 독일어권 덴마크의 영유권 분쟁. [4] 프로이센은 새로 얻어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아예 프로이센에 병합하길 원했지만 프로이센의 세력 확장을 꺼렸던 오스트리아는 이 지역을 연방국가화시키고자 했다. [5] 프로이센과 맞서 싸운 남독일 국가들과도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견제했다. [6] 스페인 왕위 계승을 두고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충돌하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비스마르크의 천재적인 외교술 덕분에 아무도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돕지 않았고 강군 프로이센과 달리 준비가 부족했던 프랑스군은 쉽게 털려나가고야 말았다. [7] 1848년 혁명 당시 민중들의 황제 추대를 거절한 것과는 극명히 대조되는 부분. 당시 프로이센 국왕은 민중들은 감히 황제를 추대할 수 없다면서 거부했지만, 고귀한 군주들이 황제로 추대했을 때에는 '관대히' 받아들였다. [8] 교황은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이는 악마의 행위이므로 파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9] 이를 전후로 비스마르크 - 자유주의자 협력 체제가 보수 중심으로 재편됐다. 이를 그래서 'Innere Reichsgründung', 즉 '내부 제국 건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 '제2의 건국'. 다만 1873년 이래의 불황이 실체없는 존재라는 비판도 있기에 학계에서도 논란이 많은 단어이기도 하다. [10] 특히 국민자유당 의석이 크게 줄어 비스마르크가 국민자유당 없이 중앙당과 협력해도 국정을 운영할 수 있게 되어버렸다는 것이 국민자유당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11] 이미 루돌프 폰 베니히센 등 국민자유당 주류는 사회주의 탄압법 통과에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라스커 등 일부 당내 좌파 세력이 이에 우려를 표하고 반대를 표시했는데, 당의 분열을 우려해 결국 찬성으로 선회했다. [12] 중앙당, 진보당, 사회민주당은 이 법안에 반대했다. [13] 실제로 국민자유당은 프로이센 동부의 독일화 정책에 찬성하는 등 우파적인 성향을 띠었다. [14] 당시 독일의 외교 관계는 크게 프랑스 - 독일 간의 갈등과 그레이트 게임으로 대표되는 영국 러시아 간의 싸움이라는 2개의 상수를 제외하면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15] "외교란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라고 그가 말한 것처럼, 독일은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고 남쪽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도 동맹을 맺었으며 영국과도 동맹 내지 우호적 중립의 관계를 맺었다. 독일이 확장을 멈추고 유럽의 균형자로서 행동해야 이익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 비스마르크의 생각이었다. [16] 빌헬름 2세를 우상화하며 그가 추진하는 '사회적 제국'에 대한 프로파간다를 홍보하는 선전물이다. [17] 이는 1896년 함부르크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이 원인이었다. [18] 뷜로 재상이 주도한 정책이었기에 이걸 '뷜로 관세'라고도 부른다. [19] 물론 이는 독일 내에서 폭력적인 시위로 이어졌고, 범독일협회 등 우익 단체들이 탄생해 독일 민족주의를 부르짖기도 했다. [20] 심지어 막스 베버 프리드리히 나우만 같은 자유주의자들마저도 지지했을 정도니 얼마나 독일인 사이에서 제국주의가 폭넓게 퍼져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21] 빌헬름 2세는 러일전쟁을 앞두고 러시아의 극동 정책에 휘말리기 싫었기에 최대한 러시아와 거리를 두었다. [22] 이 사건은 오히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협력을 공고히 했으며 지중해 내에서 영국과 러시아가 이권 합의에 이르는 계기가 되었다. 여러모로 독일의 외교적 고립을 자초한 최악의 악수. [23] 프랑스에 동화된 로렌과는 달리 알자스에서는 독일어를 썼다. 그래서 1차 대전 이후 알자스-로렌을 되찾은 프랑스는 전간기 동안 가혹하리만치 알자스를 자국에 동화시키려 했다. 물론 2차대전 이후 프랑스 신정부는 알자스에 대한 강제동화 정책이 실패임을 인정하고 강제동화 정책을 철회했다. [24] 20년 전인 1890년에는 불과 11억 마르크에 불과해 20년 만에 34억 마르크가 증가한 수치였다. [25] 독일 제국 말기 국민자유당를 이끈 당수였다. [26] 특히 베른슈타인은 제국주의자이기까지 했기에 더더욱 다른 사회주의자들에게 지지를 얻지 못했다. [27] 다만 알자스-로렌 지방에는 정국이 반대로 돌아갔다. 여기서는 알자스-로렌 의회를 차지한 중앙당, 사민당, 좌파 자유주의자들이 정부의 개혁안을 거부한 뒤 자신들이 직접 개혁안을 수정, 보완했다. [28] 다만 이 근로자 보험은 오히려 근로자와 고용주 사이의 관계를 더욱 굳건히 만드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불러오기도 했다. [29] 사회민주당 110석, 중앙당 90석, 국민자유당 45석, 진보인민당 41석, 독일보수당 41석, 독일제국당 14석, 독립폴란드당 10석, 농업동맹 5석, 알자스-로렌당 9석, 기독사회당 3석, 폴란드 가톨릭당 4석, 독일-하노버당 5석, 폴란드 인민당 3석, 독립 보수당 3석, ELD 1석, 독일개혁당 3석, 바이에른 농민동맹 2석, 농민동맹 2석, 폴란드 궁정당 1석, 덴마크인의 당 1석 총 397석이다. [30] 의회는 처음으로 내각 불신임 투표를 하기까지 했다. 1913년 자베른 사건 당시 정부와 군 지도부가 알자스 로렌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자행된 군인들의 불법 행위를 은폐하려 들자 이에 대해 불신임 투표를 했던 것. [31] 물론 아예 싸우기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영국과 독일은 발칸 지역에서 협력하기도 했다. 1912년 발칸의 국가들이 노쇠한 오스만 제국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고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의 패권을 두고 싸우자, 영국과 독일이 개입해 발칸의 혼란을 가라앉히려 들었다. [32] 7월 위기 당시에는 러시아와 프랑스에 최후 통첩을 보냈는데, 러시아에는 총동원령의 철회, 프랑스에는 공식적인 중립 요구와 포게젠산맥의 툴, 베르됭 할양을 요구하는 무리한 행보를 보였다. [33]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파울 폰 힌덴부르크 에리히 루덴도르프 두 장군의 신화가 세워진 것으로 유명하다. [34] 사실 무제함 잠수함 작전 자체는 이미 1915년에 시작했으나 미국의 강력한 항의로 중단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재상은 재개를 반대했지만 군부와 의회, 대중들의 압박이 거세지자 별 수없이 재개했던 것. [35] 노동계는 전쟁 초기부터 일관되게 국내 정치 개혁, 즉 사회적 정치적 평등, 무제한적인 결사의 자유, 정치 체제의 민주화를 요구했다. [36] 중국에서 주로 활동한 공산주의자인 코민테른 요원 오토 브라운과는 동명이인 [37] 사회민주당 정치인 필리프 샤이데만은 1918년 11월 9일 독일 의회 서쪽 발코니에서 공화국을 누구와의 협의도 없이 선포했다. [38] 1918년 11월 10일 망명 직전의 빌헬름 2세를 찍은 사진으로,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에 서있는 모습이다. 왼쪽에서 네 번째, 사진 중앙에 있는 사람이 빌헬름 2세다. [39] 참고로 10월 15일에 프로이센 하원은 이미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제를 폐지한 상태였다. [40] 가장 마지막까지 버틴 왕공은 슈바르츠부르크존더샤우젠 후국의 군터 빅터였는데 11월 25일에 퇴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