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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계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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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발단3.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빨리 좀 고쳐주세요4. 극적인 해결5. 관련 일화
5.1. 일화의 진위 여부
6. 기타7. 평가

1. 개요

宗系辨誣

명나라의 《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를 이자춘이 아닌 이인임으로 잘못 기록한 문제를 수정해줄 것을 요구하기를 1394년(조선 개국)부터 1588년(선조 시절)까지 자그마치 2백 년 동안 계속된 외교분쟁이다.

'종계'란 종가의 혈통을 말하고, '변무'란 사리를 따져서 억울함을 밝힌다는 뜻이다.

2. 발단

공양왕 재위 시절의 고려는 거의 간판만 겨우 걸고 있는 상태였고, 고려 조정은 사실상 이성계 정도전 일파에게 장악당한 상황이었다. 이 때 이성계에게 축출당한 반이성계파 사람들 중에는 명나라로 망명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 중에 윤이(尹彛)와 이초(李初)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 둘은 이성계에게 앙심을 품고 명나라 조정에다가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인데 이인임은 공민왕을 시해했고, 아들인 이성계는 우왕, 창왕을 시해했다"란 거짓 보고를 올렸다.[1] 어찌됐든 신하된 신분으로 본인이 섬기던 왕을 여럿 갈아치웠다는 건 어떤 명분이 있다 해도 유교사회에서 큰 흠이 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2] 더구나 명나라는 유교사회의 총 본산이라 할 수 있는 국가였고, 조선은 그 명나라의 유교사회를 주 사상으로 성립된 국가였다. 그런 명나라에게 나라를 연 개국군인 이성계와 그 아버지가 전에 섬기던 군주들을 3명이나 시해했다고 인증하는 것은 유교국가인 조선의 왕가의 명분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유지되는 동안 창업군주로서 신성불가침의 위치였던 이성계의 명예를 지키고, 이성계와 이인임이 부자 관계도 아니었으므로 조선 조정으로서는 이 두 기사를 반드시 수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고려의 내부 사정을 명확히 알 수 없었던 명나라에서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고 이를 그대로 기록에 남겼다. 이성계는 정도전과 한상질을 명나라로 보내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고, 명나라 내에서도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는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정도전 일행은 별 탈없이 귀국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성계 즉위 후에 발생한다. 1394년[3] 홍무제가 사신 황영기를 통해 "옛날 고려 배신 이인임의 후사 이성계의 지금 이름 이단(李旦)이..."란 구절로 시작하는 국서를 전달한 것이다. 이성계와 조선 조정은 이 국서를 받아들고는 당연히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당연히 거짓말로 알고 있을 줄 알았고, 수정해달라 했을때 대화도 잘 됐으니 별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국서에 저러한 내용을 썼으니 날벼락과 다름 없었다.

그래서 국서의 다른 부분에 정탐병을 파견했다는 것과 같은 억지 트집을 잡는 내용이 있었기에 이를 해명하면서 함께 "신과 인임은 본래 같은 이씨가 아닙니다. 신이 국정을 맡은 뒤부터 인임이 저지른 불법을 모두 다 다루려 하다가, 도리어 그 당류의 미움을 받아서 윤이와 이초가 귀국길에 도망하여 함부로 거짓말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라 설명하는 주본을 올렸다.

이때 명나라에서도 별다른 말이 없었기 때문에 이후 조선에서는 이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1402년[4] 조온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다음 명나라의 조훈조장에 "신 이방원(李芳遠)의 종계(宗系)가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 하였다."는 구절이 있음을 보고했다. 예전에 마무리 지은 걸로 안 사항이 고쳐지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태종은 곧장 이빈을 명나라 예부로 파견하여 왕실의 족보를 상세히 보고하고 종계를 변무해달라는 주본을 다시 한 번 올린다.

한편 조선의 주본을 전달받은 명의 예부 상서 이지강은 이 사실을 조선 측에서 온 사신들과 논의한 다음 영락제에게 주청을 올렸다. 사정을 들은 영락제는 "예전 기록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한다"라는 하교를 내렸고, 기록을 잘못한 자들을 불러들여 처벌하게 한 다음 조선의 사신들을 위로했다. 이후 명나라에서 돌아온 이서와 민무휼은 이 사실과 함께 상황이 마무리 됐다는 보고를 올렸다.

3.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빨리 좀 고쳐주세요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도록 조선에서는 영락제가 하교를 내려 고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1518년(조선 중종 13년, 명 정덕 13년) 명나라에서 주청사[5]로 다녀온 남곤과 이계맹이 "여전히 고쳐지지 않았으며, 이번에 《대명회전(大明會典)》이라는 기록서를 편찬하는데 초본을 보니 거기 태조께서 홍무 8년(1375)에서 홍무 25년(1392) 사이에 고려의 네 왕(4왕,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을 시해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공민왕 빼면 다 맞는데? 라는 보고를 올려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이에 중종과 대신들은 과거 태조가 올렸던 조본, 태종이 올렸던 조본과 영락제가 윤허했고 이에 사례한 표 등의 자료 등을 모아 남곤을 주청사로 임명하여 명나라로 다시 파견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명의 예부와 대신들은 처음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조선에서 태종 문황제[6]의 성지를 받은 사실까지 찾아서 오자 비로소 정덕제에게 주청이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든 정덕제는 "선조의 오명을 씻으려는 조선 국왕의 성효(誠孝, 효성)가 가상하다"는 말과 함께 조훈을 좇아 조선 왕실 종계 문제의 개정을 윤허했다. 하지만 종계 문제만 윤허받았을 뿐, 4왕 문제는 반영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조선 조정에서도 대책을 논의하여 우선 종계 문제를 윤허한 것에 대해 사은사를 보내고 4왕 문제는 시기를 봐서 다시 한 번 주청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7]

1529년(조선 중종 24년, 명 가정 8년) 대명회전의 재편수가 추진되면서 조선 조정은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고치겠다는 구두약속만 받은 수준이었고, 재편수는 오류를 고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에 꾸준히 명에 사람을 보내 종계 개정을 확실히 하고자 했고, 명의 예부에서도 영락제와 정덕제의 성지(聖旨, 임금의 뜻)를 근거로 사관에게 지시를 내렸다는 답변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중수대명회전》[8]의 편찬이 진행되고 있으면서도 조선 왕실의 종계 문제는 개정된다는 소식이 없었다. 애가 타들어가던 조선 조정은 이에 대해 될 때까지 사신을 계속 보냈고, 명종조에 이르기까지 60년 동안 기회가 되는 대로 주청사를 보냈다.

먼저 중종 대에서는 명 예부에서는 "선(先) 황제의 성지가 있었으니 해줘야 하지만, 몇 년은 걸리는 일이라 시간이 걸린다"라는 식의 핑계를 대며 질질 끌었다. 4왕 문제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결국 중종은 종계가 개정되었다는 소식만 하염없이 기다리다 승하했다.

이후 1551년(조선 명종 6년, 명 가정 30년) 명종이 직접 대신들에게 다시 한 번 주청해보자는 전교를 내리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다만, 대신들은 아직 교정본이 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주청사를 보내면 명의 신경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어 기다릴 것을 청했다. 문제는 이 교정본이 간행되지 않았던 이유가 편수는 거의 다 끝냈지만 양이 워낙 방대하다보니 당시 황제인 가정제가 아직 읽어보는 중이라 간행하라는 칙령이 안 내려왔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명에 다녀오는 사람들을 통해 동향을 입수하려 했지만 좀처럼 명쾌한 정보가 나오지 않다보니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이로 인해 명종 재위 기간 동안 "잘 수정되고 있는 듯하니 주청사는 보내지 않는게 좋겠다", "이미 늦었다. 바로 보내서 확인을 받았어야 됐다"로 조정이 갑론을박을 하고 있었다. 특히 사신을 계속 보내면 심기가 불편해진 명 측에서 영락대전과 다른 기록에 이 일을 상세하게 남기는 것 아니냐면서 우려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결국 간만 보자는 식으로 몇 번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면서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으나, 결국 명종도 종계가 개정되었다는 소식만 기다리다 승하했다.

이후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선조 역시 이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이었다. 명에서 온 사신을 접견할 때 이 문제를 거론했고,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주청사를 보내어 보다 확실한 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1573년(조선 선조 6년, 명 만력 1년)에 이후백과 윤근수를 주청사로 삼아 파견했을 때는 태종 문황제라고 지칭한 것에 대해 가정제 시절에 이미 성조로 추존되신 분인데 아직도 태종이라고 하느냐는 식의 트집만 잔뜩 잡히고 돌아왔다. 개정 약조는 받아내긴 했지만 4왕 문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고, 예부에서 쓴소리만 잔뜩 듣고 돌아왔으니 주청사들은 이를 보고하며 죽을 죄를 졌다면서 선조에게 사죄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선조도 "과인이 미처 신경쓰지 못한 불찰이다"라 한탄하며 쓴맛을 달래야만 했다.

이후 1575년(조선 선조 8년, 명 만력 3년])에 다시 한 번 주청사를 보내 중수대명회전, 속칭 《만력회전(萬曆會典)》에 종계 개정의 일이 수록됐다는 답변을 들었고 선조는 굉장히 기뻐했다. 하지만 문제는 '답변'만 들었고 정말로 해결이 되었는 가에 대해 확인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꾸준히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고 선조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4. 극적인 해결

1584년 선조는 대제학 황정욱을 종계변무사, 홍성민을 부사로 임명했고, 주청사를 임명하면서 이번에도 성사시키지 못하면 극형으로 다스리겠다는 최후통첩을 내렸다. 이로 인해 신하들과 역관들은 벼랑 끝에 몰린 심정으로 명나라로 떠났다. 이미 여러 차례 명에게 기약없는 약조만 받고 돌아온 전례가 있었기에 대부분 이들이 죽으러 가는 것과 다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관 홍순언이 중수대명회전 조선 편을 필사한 내용을 보니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라는 부분이 사라졌다. 이 일행이 조선 왕실의 숙원이던 종계변무를 성사시키고 돌아온 것이다. 선조는 마침내 몇백 년 묵은 골칫거리가 해결됐다는 것에 크게 기뻐하며 전국에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귀국한 19명의 사신들을 공신록에 올려 치하했고,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봉하여 큰 상을 내렸다.

그리고 4년 뒤인 1587년(선조 21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간 유홍이 명 예부상서 심리에게 중수대명회전의 조선편을 요청했다. 처음에 심리가 거절하자 유홍은 이마에서 피가 터지도록 땅에 머리를 찧으면서 애걸했다고 한다. 그러자 심리는 결국 조선 편이 수록된 중수대명회전을 한 권 내주었다. 선조는 크게 기뻐했으나 당장은 명에서 불쾌해 할 것을 우려해 공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듬해인 선조 22년에 명에서 완성된 만력회전[9]을 한 질 보냈고, 조선은 200년에 걸친 숙원을 마침내 이뤄냈다.

5. 관련 일화

숙종 때 편찬된 사역원 역사와 유명한 역관들의 일화를 기록한 책인 '통문관지(通文官志)'에서는 이 극적인 문제 해결이 역관 홍순언의 활약 덕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0]

당시 홍순언이 명종 임금 시절 역관 자격으로 명나라 연경에 사행[11]을 갔을 때 통주란 곳에서 홍등가에 들린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어떤 아름다운 기녀를 보고 그녀를 불러 접대를 받으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소복을 입고 방에 들어와 있었다. 홍순언이 이를 의아하게 여기고 사연을 물었다. 이 여인은 원래 절강성 출신으로 대갓집의 규수였으나 가족을 전염병으로 모두 잃었는데, 부모의 관을 고향으로 모셔가서 장례를 치러야 하나 장례 비용이 없어 이를 마련하기 위해 기방에 몸을 팔았다는 것이었다.

이에 홍순언이 불쌍하다고 여겨 남녀 관계를 맺지 않은 채 3백금을 마련하여 장례 비용을 대주기로 결심했다. 여인이 '이름을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면 돈을 받을 수 없다'면서 사양하기에 그는 홍씨 성의 역관이라는 말을 남기고 기방에서 나왔다. 사행에 동행하던 다른 사람들은 홍순언을 가리켜 멍청하다고 비웃었다. 문제는 이 돈이 공금(...)이었기 때문에 홍순언은 공금 횡령죄로 투옥되고 만다. 그리고 1584년, 주청사를 보내며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역관의 목을 치겠다고 왕이 엄포를 놓자, 역관들이 돈을 각출해 홍순언이 횡령한 공금을 갚아주는 대신 죽을 게 뻔한 자리인 수석 통역관 자리를 떠맡겼다. 어차피 투옥된 상황에서 일이 잘 풀리면 좋고 혹 잘못되어도 한이 되진 않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물론 홍순언 역시 이 제안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한편 홍순언에게 도움을 받은 여인은 이후 예부시랑 석성에게 의탁했다가 그의 후처가 됐다. 석성은 이 때 후처가 조선인 역관에게 큰 도움을 받은 일화를 전해듣고는 크게 감명을 받았고, 그 후부터 조선에서 사신이 오면 홍 역관이 사행길에 왔는지를 계속 수소문했다. 그리고 석성이 찾던 그 홍씨 성을 가진 역관이 1584년 주청사와 함께 명으로 찾아온 것이다.

소식을 들은 석성은 북경성의 조양문까지 사람을 보내 후한 대접을 했다. 통상적으로 대국인 명나라의 신하들은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던 까닭에 사신 일행은 많이 당황했다. 그리고 몸종 수십 명과 함께 어떤 귀부인이 나타나 홍 역관을 찾았는데, 홍순언은 놀란 나머지 사신단 사이로 숨으려고 했다. 석성이 '그대가 통주에서 은혜를 베푼 것을 기억하시오? 우리 부인이 하던 말을 들어보니 그대는 천하에 의로운 선비입니다. 이제라도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크게 놓이게 되었소."하고 저택에서 크게 잔치를 열고 부인이 직접 잔에 술을 채워 홍순언에게 올렸다.

물론 이렇게 끝났으면 미담 정도로 끝났겠지만, 중요한 사실은 석성이 당시 예부상서[12]였다는 사실었다. 즉, 조선의 종계변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부서의 총 책임자였다. 그동안 조선의 사신들은 예부의 관리들을 만나 형식적인 답변만 겨우 받고 돌아오거나, 아예 고관들에게 무시당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하지만 석성은 홍순언의 의기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후처의 일도 있었기 때문에 보은하기를 원했다. 그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사신단에게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종계 문제에 개입했다.

그동안 예부에서는 명나라에는 '그런 자료가 없다, 조선이 가져온 자료를 믿을 수 없다'면서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는데 상서이던 석성의 개입으로 2백 년 동안 묵혀두었던 문제가 단 한 달만에 처리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다른 대신들은 "옛날 기록들을 고치는 것은 안 그래도 번거로운 일이다. 게다가 당대에 수정되지도 않은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이제 와서 외국의 말만 듣고 그걸 고쳐야 하는 이유가 있나?"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해당 일을 책임지는 것이 예부이고 해당 부서의 상서 석성이 "과거에 영락제와 정덕제께서 내리신 성지도 있고, 잘못된 정보가 있으면 고치는 것이 맞다"라며 적극적으로 주장해서 그 결과 다시 한 번 개정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사실 허락은 예전에도 두 차례 받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명의 예부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미뤘기 때문에 이뤄지지 않았고, 이번에는 허락까지 나온 데다가 예부의 수장인 상서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나서니 수정 자체도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그 결과 1584년 조선의 사신들은 종계 문제와 사왕 문제가 수정된 대명회전의 필사본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홍순언이 돌아올 때, 부인이 10개의 상자에 각각 비단 10필을 담고 말하기를 "이것은 첩이 손으로 짜서 공(公)이 오시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하였다. 그는 사양하여 받지 않고 돌아왔는데, 압록강(鴨綠江)에 이를 때 깃대를 든 자가 쫓아와 그 비단을 기어이 전하고 돌아갔다. 그 비단 끝에는 모두 '보은(報恩)' 두 글자가 수놓여 있었다. 결국 서자 출신 역관인 홍순언은 중인 신분이었지만 가장 큰 공로자였기에 면천허통 조치가 내려졌고, 당릉군(唐陵君)으로 책봉됐다. 역관으로서는 최초의 공신 작호를 받은 것. 이후 홍순언이 있던 마을을 가리켜 보은단동(報恩緞洞, 현재 서대문구 미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석성과 홍순언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예상보다 빠르게 패퇴하자 명나라는 왜군와 손을 잡고 대륙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의심을 했다.[13] 그때 병부상서(국방부장관 격 관직)가 석성이었고, 석성이 가장 적극적으로 조선을 변호하여 원군 파병을 결정했다고 한다. 당시 기록에는 '조선이 어육[14] 신세를 면한 것은 모두 석 공과 당릉군 덕분'이란 말까지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일화는 배한성의 고전열전 난중일기에서 따로 3회씩이나 편성하여 전하고 있다.

여담으로 석성은 심유경과 함께 국제 사기를 추진하다가 결국 1597년 발각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는 조선 왕에게 편지를 보내 구명 활동을 부탁하였으나 당시 선조로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재개한 판에 만력제를 자극할 수 없었고, 미안해하면서도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석성은 옥사했다.[15] 대신 석성의 아들 석담과 그 가족들의 이주를 받아줬으며, 이들은 황해도 해주에 자리를 잡아 석성은 해주 석씨의 시조가 된다. 선조는 그 뒤 석담을 수양군에 봉하며 석성을 칭송했다.

이 일화와 매우 비슷한 이야기가 최인호의 장편 소설 상도에도 실려있다. 홍등가에서 처음 손님을 받는 소녀를 거금들여 구해주고 이 때문에 몰락했다가 소녀가 고관대작의 부인이 되어 은혜를 갚는다는 흐름이 매우 비슷하다. 차이라면 홍순언은 공금이고 임상옥은 빌린 장사 밑천이라는 점과 은혜를 갚기 위해 찾는 과정에서 홍순언은 본인이 다시 중국으로 가서 재회하지만 상도는 사람을 조선으로 보내 팔도를 뒤진다는 점이다.

5.1. 일화의 진위 여부

다만 홍순언의 일화는 실록을 비롯한 정사에서 기록되지는 않은 야사이다.

일단 이 시기 예부 상서는 석성이 아니다. 석성이 예부 상서라는 이야기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는데, 연려실기술에 종계변무와 관련된 만력제 시기 예부 상서들의 이름은 하나 둘이 아니다. 만력제 시기의 기록을 보면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언급되는 예부 상서가 계속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부 상서 육수성(陸樹聲)이 대답하는 제사에 , “성지를 받들어보니, 그 나라의 전후 주사(奏詞)를 상세히 황조실록(皇朝實錄) 안에 편찬하여 넣으라 하셨사오니, 새 회전에는 조지를 기다려서 이어서 편수할 적에 더 넣을 것입니다.”
예부 상서 만사화(萬士和)의 제사에, “조선 국왕의 그 선조의 원통함을 가슴 아파해서 재삼 변명하여 아뢰기에 이르렀다. 다만 전에 이미 명백한 조지를 받들었으며, 제왕의 말씀이 한 번 나오면 미덥기가 사철과 같으니 누가 감히 더하고 감함이 있으리요. 마땅히 그 나라의 전후의 주사(奏詞)를 황조실록에 편찬해 넣는 한편, 그것을 초록하여 사관에 회부하고, 회전 편수를 기다려서 기재하는 것이 타당하다.”
예부 상서 서학모(徐學謨) 등이 말하기를, “만약 회전이 완성되면 곧 나누어 주도록 아뢸 것이니 칙서를 내릴 필요는 없다.”
17년 만력 12년 갑신에 주청사 황정욱이 돌아올 때에 가지고 온 예부 상서 진경방(陳徑邦) 등의 제사에, “개정하여 편찬한 문사는 어람을 거치지 않습니다. 간행하면 초고를 가려 뽑아서 보일 것이며, 성지를 받들어 그대로 써서 왕에게 줄 것입니다.” 하였고
유홍이 명 나라 서울에 갔는데 예부에서 회전은 어람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주기가 어렵다고 하여, 유홍이 꿇어 앉아서 청하기를 마지 않고 땅에 머리를 두드려서 피가 흐르니, 상서 심리(沈鯉)가 여기에 감동되어 갖추어 아뢰어 사신이 오는 편에 부쳤던 것이다.

그나마도 실제로 편찬이 진행되는 도중이었던 서학모의 전임 예부 상서들인 마장강, 반성, 왕석작(王錫爵) 등의 이름은 제외된 것이다. 실제 발언과 재임 기간 등을 고려하면 서학모와 그 후임인 진경방이 예부 상서를 역임하고 있던 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고, 이 와중에 수정되었을 것이다.

사실 기록들을 뒤져보면 석성은 모두 시랑으로 기록된다. 또한 석성이 정말로 예부 시랑을 지낸 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무렵 석성 장거정을 둘러싼 치열한 정쟁 속에서 사임해서 이렇다할 직위가 없던 상황이었다. 석성이 공부 상서에 임명되면서 중앙 정계에서 다시 언급된 시기는 1587년으로 이미 대명회전이 발간된 이후이다. 이후로 석성은 1590년 호부 상서, 1591년 병부 상서를 역임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직하기 전에 예부 시랑을 지냈을 수도 있지 않는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석성과 관련되어 확인할 수 있는 자료에서 시랑을 지낸 것은 병부 좌시랑 단 하나 뿐이다. 시기적으로도 안 맞지만 병부 좌시랑이 종계변무에 얼마나 관여할 수 있었을지 의문스럽다.

사실 석성과 관련해서 더욱 유명한 일화는 이미 언급된 임진왜란 시기이다. 실제로 석성을 조선에서 높이 평가한 것은 종계변무가 아니라 임진왜란 파견 관련이었고, 석성이 주도적으로 조선 파병을 이끌었던 것은 기록된 사실이다. 실제로 통문관지와 연려실기술의 원전으로 보이는 정태재의 '국당배어'에는 해당 사건이 임진왜란 출병 시기의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홍순언이 공금을 돌려서 구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없다.[16]

그리고 홍순언은 실록에서 계속 언급되는 인물이다.
박영준(朴永俊)·김귀영(金貴榮)·노수신(盧守愼)·김계(金啓)·민기문(閔起文)·유희춘(柳希春)이 모두 승문원에 모이고 영상과 좌상도 이어 이르렀다. 존시사(尊諡使)와 존호사(尊號使)의 문서를 살펴본 뒤에 다시 의논하여 확정하고, 주상이 중국 사신을 접견할 때에 종계(宗系)의 악명(惡名)을 변정(辨正)하는 일에 대해 대략 먼저 말로 하고 이어 단자(單子)로써 자세히 기록하여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영상이 예조 판서 박영준에게 단자를 기초(起草)하게 하고 좌상이 조금 다듬어서 김계에게 주어 통사 홍순언(洪淳彦) 등을 시켜서 한어(漢語)로 번역하여 단자를 만들어 예조에 주어 아뢰도록 하였다.'''
-선조 5년 9월 11일 갑오 1번째기사 1572년 중국 사신이 올 때 종계 변무하는 일을 논의하다

즉, 홍순언은 선조 초기에도 꾸준히 대표적인 역관으로 언급되고 있다.

즉, 홍순언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크게 없다. 실제로 번역을 홍순언이 계속했고, 1584년의 경우는 상통사로 언급되는 등 종계변무 시기의 역관의 대표로 보인다. 즉, 홍순언은 역관의 대표로 상을 받은 것이다. 홍순언이 공신 2등을 받았다고 하지만, 홍순언은 7명의 2등 공신 중 한 명이고[17], 사실 3등 공신인 이산해, 기대승, 정철, 유성룡 등은 실제로 사신으로 간 인물들이 아니라 요청문을 쓰는데 참여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중인에게도 공신으로 책봉한 것은 선조가 정말로 기뻐했기 때문인 동시에, 특이한 인물이기 때문이다.[18]

6. 기타

왕실의 조상이 중국 측의 착오로 잘못 기록된 사례는 여러 건 존재한다. 이전 시대인 신라 때는 김씨 왕실의 조상이 중국 진나라(秦)에서 유래했다는 기록도 삼국지 동이전에 기록된 것부터 시작해[19] 중국에 알려졌고, 진한을 진나라의 진 자를 따서 진한(秦韓)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수백 년 뒤 신라에 역수입되어 문무왕릉비에도 신라 김씨 왕실의 조상으로 진백(秦伯)이 거론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귀화한 도래인 가문 하타씨(秦氏)도 자신들을 진시황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20] 다만 조선의 종계변무와 달리 신라 측에서는 이러한 기록에 대해 딱히 정정해줄 것을 요청하지 않았다.

세간에서는 선조의 묘호가 선종에서 선조로 바꾼 이유로 임진왜란 극복의 공로를 꼽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로는 왜란보다 종계변무 해결을 더 큰 공로로 꼽았다는 사실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조선 왕조에서는 중요하게 생각한 문제였다. 숙종 때도 왕통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책을 모두 폐기하라는 요청에서 "그 옛날 종계변무로 인해 명나라를 여러번 다녀오면서까지 치욕을 씻은 것처럼 그 책을 찾아서 거짓말을 씻어내는 것을 조금도 늦추면 안됩니다"라는 식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물론 종계변무에 참여한 신료들도 큰 영광을 얻었다. 예를 들어 주청사로 명나라를 찾아간 이자(李耔)는 이걸로 가문에서 사불천위를 받았다.

제2차 종계변무가 일어난 적이 있었다. 광해군 시기 허균이 천추사로 중국에 가서 구입해 온 명나라 문인 오원췌(伍員萃)의 저작 <임거만록(林居漫錄)>에서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결과가 반영되지 않고 예전대로 이성계(李成桂)의 계보가 과거 그대로 수록되어 있는가 하면, 뜻밖에도 광해군이 그의 형 임해군(臨海君)의 자리를 빼앗아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고 광해군에게 보고한 후 관련 책자를 조정에 가지고 오라는 명을 받았으며, 1615년 보고한 상으로 광해군에게 전 20결과 외거 노비 4명을 하사받았다. # #

제3차 종계변무가 일어날 뻔한 적도 있었다. 영조 시기 청나라가 대청회전을 펴낼때 발생한 일로 대명회전을 참고하려고 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원조 대명회전을 참고할 지 아니면 종계변무로 고친 중수대명회전(혹은 만력회전)을 참고할 지 알 수 없었다는 것. 당연히 조선 입장에서는 후자가 채택되어야 했고, 청나라에 거액의 뇌물을 주면서 로비를 했다. 그리하여 대청회전은 중수대명회전을 참고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철종 대에도 어떤 책에서 같은 내용이 발견되자 이를 수정하는 일이 있었다. 철종 문서 참조.

7. 평가

드러난 정보만으로 보면 명나라가 허위 보고를 곧이 곧대로 믿고 자료를 잘못 기재했고, 황제가 잘못을 인정하고 수정을 지시했음에도 이를 제때 하지 않고 미루는 바람에 발생한 외교 분쟁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정치 및 외교적인 논리도 상당 부분 숨겨져 있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당장 조선은 태조 이성계의 조상이 이인임으로 기재되면서 왕실의 위신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당장 조선 왕실은 이성계의 고조부까지 추존하여 자신의 계보를 밝히고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개정 이전의 기록으로만 보면 조선 왕실의 조상을 조작하고 모시던 왕을 시해했다는 식으로 되어 있어 조선이 주장하는 정통성 자체를 훼손시킬 수 있는 문제였다. 조선 왕실이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각종 자료를 동원하여 반박해도 중국이 그렇게 기록했다는 것만으로도 신뢰도를 인정받을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정통성에 심각한 결격사유가 될 수 있는 사안이었기에 꾸준히 사신을 보내어 바꾸도록 요청했고, 사신이 다녀올 때마다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였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종계변무는 조선에 대해 명이 손에 쥐고 있던 최강의 와일드 카드였다. 조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릴 것이고, 그만큼 명에서는 이를 조선을 뜻대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명에서는 의도적으로 조선이 원하는대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제대로 처리를 안해주는 식으로 조선의 애간장을 태웠다.

사실 명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실록의 내용을 고치는 것은 상당히 중대한 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한 왕조의 정사를 다룬 실록의 내용을 바꾸는 것은 왕조국가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종계변무와 관련된 기록은 왕조의 개창자인 태조의 실록과 관련된 일이다.[21] 또한 대명회전은 일종의 행정 법전이다. 이 문제가 결국 1584년이 되어서야 해결 가능했던 것도 대명회전의 개정판이 1587년에 나왔기 때문이다. 청구야담 같은 야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홍순언과 석성의 드라마틱한 에피소드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일각에서는 대명회전을 다 새 판본으로 다시 찍으려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든다는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는데, 명나라에서 그걸 핑계로 대며 미뤘을 가능성은 있으나 실제로는 비용 문제는 거의 없는 편이다. 대명회전 180권 중에서 한권의 일부만 고치는데 많은 비용이 들리도 없을 뿐더러, 1393년에 찍은 책을 200년이나 계속 쓰고 있을리가 없다. 노후화 되어 폐기되고 증쇄해서 다시 배포하는 과정이 최소한으로도 수차례 있었을텐데, 이인임 석 자를 이자춘으로 고치는 간단한 오탈자 교정 작업을 가지고 비용 부담이 들어서 못 해주겠다느니 어쩌니 운운했다면 이는 단지 해주기가 싫은 것이었을 뿐이다.

2008년경 미국 지명위원회가 '독도는 한국령'이라고 표기함에 따라 일본이 데꿀멍했던 일을 종계변무와 연결지은 칼럼도 있다. 지나친 도식화와 싱거운 결론이 아쉽지만 종계변무에 대하여 간결하게 잘 소개하고 있으니 한번 읽어 볼 가치는 있다.

사실 이 종계변무 문제는 윤이·이초의 옥사에 출발했고, 불만을 품게 된 급진 사대부들이 마침내 온건 사대부들을 숙청하기 시작한다.[22] 명나라와의 외교는 그렇다 쳐도 외세를 끌어들여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던 음모였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내내 이 사건을 일으킨 고려 왕조를 비판한다. 이로 인해 공양왕도 얼마 못가 목숨을 잃게되었다. 실제로 공양왕조차도 도저히 봐줄 상황이 아니어서 윤이이초지난의 주동자들을 색출하라고 했다. 다른 한편으론 위화도 회군도 실은 명나라와 비밀 문서를 들며 이것이 왜 나쁘냐고 하지만 정작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연려술기술 등에선 실은 명나라가 아닌 이성계 본인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했다는 이야기로 반론을 한다. 실제로 이는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원나라의 힘을 빌린 것과 매우 유사한 상황이고, 더욱이 온건 사대부들 측도 고려와 명과 관계를 정상화하려고 노력을 했다. 실제로 윤이이초지난의 주동자들을 색출하려고 했을때 정몽주는 무리한 색출은 금물이라고 했고, 반면 공양왕을 비롯한 이성계 측의 급진 사대부들이 주동자를 색출했다.

이 사건이 가진 또다른 의의는 오늘날 이성계 여진족설을 반박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 중 하나라는 점이다. 이성계를 무고할 거라면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것보다 여진족이라고 떠드는 쪽이 몇 배는 파괴력이 있고, 명의 입장에서도 이성계를 여진족이라고 봤으면 고려인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진족의 뒤를 이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시절에도 대명회전 원본으로 적을지 논의는 했지만 조선 왕실이 우리와 같은 여진족의 후손이라는 말은 꺼내려고도 들지 않았다.

다만 학계에서 내리는 평가는 의외로 거의 평일색에 가까운데[23][24] 별 실리 없는 명분에 집착한 것에 불과했다는 대중적 평가와 의외로 통한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심지어는 한 술 더 떠서 여건이 어떻든 간에 결국 <조훈조장(祖訓條章)>의 기사 그 자체는 손도 못댔으니까 아예 실패했다는 견해까지도 있는 판국이다.[25][26][27]

[1]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전자는 완전히 거짓이지만, 후자는 현대에 평가하자면 거의 사실이긴 하다. '공식적으로' 죽인 건 공양왕이 더 맞지만,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이성계였다. [2] 퇴위 이후에 우창비왕설로 우왕과 창왕을 '애초에 가짜 왕이자 역적'으로 만들었지만, 어쨌든 둘 다 퇴위 당시에는 왕씨 성을 가진 고려왕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이성계는 그들을 한때 주군으로 섬겼다. [3] 조선 태조 3년, 명 홍무 27년 [4] 조선 태종 3년, 명 영락 1년 [5] 중국에 주청(奏請, 임금에게 아뢰어 청하다.)할 일이 있을 때 보내던 사절. [6] 영락제의 현재 묘호는 성조이지만 원래 묘호는 태종이었다. 성조는 훗날 추존된 묘호. 그리고 이 점은 나중에 명나라 측에게 꼬투리가 잡히는 원인이 됐다. [7] 이렇다할 확답을 받지 못해 귀국한 주청사 남곤은 일 처리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소장 사림인 김정에게 격한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이 김정의 동료이자 친구인 자가 바로 조광조이다. 조광조는 개인적으로 남곤과 친했지만 이때 별 말은 하지 않았고, 남곤을 크게 보지도 않았다. 이 일에 앙심을 품은 남곤이 1년 뒤 기묘사화를 일으켜 복수했다고 하기에는 지나친 비약이다. [8] 중수(重修): 낡고 헌 것을 손질하며 고치다. [9] 중수대명회전이 만력제 때 완성되었으므로 속칭으로 만력회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10] 연려실기술 별집인 '사대전고'의 '역관' 파트에도 기록되어 있다. 역관에 관한 다른 재미있는 일화도 많으니 한번 읽어 보자. 비록 연려실기술 자체가 야사인 데다, 실록이 번역된 오늘날에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절하되기는 했지만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11] 使行, 사신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길을 떠남. [12] 대한민국으로 치면 외교부장관 교육부장관, 문화체육관광부장관, 국가기록원장을 겸직하는 장관직이다. 명의 상서(조선 식으로는 판서) 자리는 중국 전체에 6명(이, 호, 예, 병, 형, 공)밖에 없는 고위 관직이고, 유교 문화권에서 "예"의 범주로 처리하는 일은 매우 많았다. [13] 그당시 명나라는 선조가 망명의사를 피력하자 수행인원 수를 크게 제한했으며, 피난 중인 사람이 진짜 조선 왕이 맞는지 선조의 얼굴을 아는 사람을 보내 확인을 시키기도 했다. [14] 魚肉, 다진 생선살을 뜻하는 말로, 짓밟히고 으깨어진 상태를 뜻하는 비유. [15] 이는 류성룡이 이순신 구명에 나서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16] 실제로 감히 공금을 빼돌렸다면, 조선왕조실록에도 언급이 나왔을 것인데, 해당 기록은 전무하다. [17] 1등공신은 윤근수, 황정욱, 유홍이다. 이들은 사절단의 대표역이고, 유홍에 대해서는 상단에도 언급이 있다. [18] 임진왜란 시기에도 선조는 호성 공신에 온갖 사람들을 다 집어넣었다. 심지어 말을 다룬 마의도 포함되어 있을 정도. 또한 공신으로 책봉되면 당연히 봉군된다. [19] 원문에 따르면 진수는 진한에 살던 몇몇 노인의 증언을 옮긴 것이다. [20] 현 일본 학계에선 여러 기록을 조합해본 결과, 실제로는 신라 출신 도래인이었고, 기록에 착오가 있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인 상태다. 하타 문서 참조. [21] 다만 실록의 내용을 고치는 것이 절대 금지되어 있던 조선과 달리, 명나라는 이미 편찬한 실록을 고치는 것이 가능했다. 실제로 명나라의 태조실록은 건문제 때 처음 편찬되었으나 영락제 때 영락제에게 불리한 기록을 삭제할 목적으로 개수되었다. [22] 이색 우현보 권근 등, 많은 유신(儒臣)들이 이 사건에 관계되었다는 이유로 청주로 유배당했다. [23] 조선시대 대중국 역사변무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분명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성규의 다음 지적은 조선 전기의 종계변무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긴 하지만 대표적 견해라 할 수 있다....막대한 경비를 지출하며 중국을 공식 비공식으로 설득하여 대체로 만족할 만한 반응을 얻으면 조선은 ‘전례 없는 대경사’를 강조하며, 중국에 다시 감사의 사절을 파견하는 한편 대대적인 자축행사를 갖는 것이 관례였다. (...) 물론 필자 역시 ‘낭비’가 당시의 정치적 안정 또는 체제 이념의 강화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었던 것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정략’ 또는 ‘이념’의 문제였지 실제 정치가 아니라면, 그토록 많은 정력을 조선의 군신들이 정치가 아닌 ‘정치놀음’에 소모한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혹평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런 ‘정치놀음’은 정작 진정한 ‘경세제민’을 통한 정치와 체제의 안정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004[28]...이성규는 역사변무를 일종의 정치놀음으로 보았다. 선조는 변무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수정된 내용이 찍힌 『대명회전』을 입수한 다음, 조선이 부모도 군왕도 모르는 짐승과 오랑캐의 나라에서 인륜이 행해지는 예의의 나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음에 감격했다. 이성규는 “당시 조선의 지배층들이 이 문제의 해결을 곧 왕조 존립의 명분 확보로 생각하였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고 하면서,005[29] 역사변무를 통치를 위한 ‘명분확보’ 용으로 파악하면서, 그것을 ‘공허한 정치의 낭비’ 또는 ‘정치놀음’으로 귀결시켰다. 변무의 의미를 ‘왕조의 명분 확보를 위한 정치놀음’으로 본 이성규의 의견에 대해 아직 본격적인 재론이 없는 듯하다. (<조선시대 대중국 역사변무의 의미>, 252) [24] 조선은 많은 물력을 동원하여 힘겹게 종계변무를 이루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말하며 명나라의 은혜에 거듭 감격했지만, 명나라는 멸망 직전까지 조선에 대한 의혹을 거두지 않았다. 적어도 역사변무 노력의 결과로 조선의 국가 이미지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역사변무가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조선시대 대중국 역사변무의 의미>, 260) [25] 여하간, 처음부터 <祖訓條章>(皇明祖訓)은 改正될 수 없는 것이었고, <대명회전> 또한 조선측의 요구로 改修된 것이 아니라 명측의 필요에 의해 改撰된 것이었다. 다만 조선에서 요구한 사항을 附記하는데 그쳤다. 결국 사실상 조선측의 수십 차례 180여 년간의 종계 변무는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종계 문제로, 조선전기의 조.명 관계는, 명측이 처음부터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조선이 명측에 끌려가는 양상을 보여주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전기 朝·明 관계에서의 宗系 문제>, 215) [26] V. <大明會典> 頒賜 이후의 종계 문제 萬曆 15년(1587년)의 <大明會典>도 문제의 <祖訓條章>의 기사는 그대로 두고 상술한 말미에 附記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조선의 일방적인 요청을 허락한 것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줄 가능성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97)[30] 그러므로 180여 년에 걸친 조선의 변무 노력은 사실상 수포로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전기 朝·明 관계에서의 宗系 문제>, 216) [27] 그래도 조선 입장에서 옹호를 해보자면 조선으로서는 명측의 이러한 종계에 대한 곡해가 너무나 중대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개정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단순한 한 문장을 고치는 것을 떠나 왕조자체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실은 자기 조상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불효를 범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國祖인 이성계는 고려의 4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叛逆兒로서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忠을 요구할 수도 없다는 것으로, 이것은 조선왕실의 名分論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명측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조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측에 주도권을 빼았겼다. 그래서 다른 시기와는 달리 전쟁으로 인해 맺어진 외교 관계가 아니면서도 조선은 명측에 저자세의 굴종적인 외교를 펼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명측의 이러한 고자세에서 나타난 役史曲解는 <明史> <朝鮮傳>에서 뿐만 아니라, 私撰 野乘 또는 稗官小說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전기 조.명 관계에서 최대의 현안문제였던 종계 문제는 미해결된 채 끝나버린 외교문제였다고 하겠다. (<조선전기 朝·明 관계에서의 宗系 문제>, 219-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