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늑대와 향신료/실제 중세시대와의 비교
1. 개요
전작인 늑대와 향신료와 마찬가지로 실제 중세시대의 생활상이 상당히 잘 반영되어 있다. 애초에 18권과 늑대와 양피지를 쓰게 된 게 막달라에서 잠들라에 써먹을 자료들을 모으다가 이쪽이 더 어울릴 꺼 같다고 했으니 당연히 잘 반영되어 있겠지만. 전작에서는 경제쪽에 집중 되어 있다면, 중세시대 가톨릭 교회의 타락과 종교개혁을 모티브로 잡은 작품이다 보니 종교와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등장한다.작중의 모티브가 되는 시기는 다음과 같다.
- 십일조가 적극적으로 거둬지기 시작했고 관문의 수가 상당히 많은 지역에 건설되었다. (12세기)
- 기초적인 손해 보험이 퍼지고 있다.(12세기 이후)
- 북방 십자군이 종료되었다.(13세기 말, 혹은 15세기 초)
- 영국에서 석탄이 채취되며 이를 활용하기 시작했다.(15세기 초)
- 영국과 교황 간의 갈등으로 새로운 교회의 출현이 진행된다.(15세기 초)
- 교회의 타락으로 종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15세기)
- 많은 배들이 먼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늑향 18권, 15세기 초)
2. 도시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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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프를 소개하면서 '국왕과 싸워 자유를 쟁취한 도시'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중세시대의 도시국가들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한 작중에서 시정참사회와 관련된 내용이 짤막하게 언급되는데 이는 실제 도시의 시참사회의 구성과 동일하다. 자세한 내용들은
늑대와 향신료/실제 중세시대와의 비교 문서 참조.
대주교의 계략은 알았으나,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여전히 남는다. 위병들은 시정 참사회의 지시 없이는 움직이지 않을 터이고, 자치도시인 아티프의 시정 참사회는 도시귀족과 대상인으로 조직되어 있다. 그런 그들은 하이랜드에게 교감을 표하고 있지 않았던가?
『늑대와 양피지』 1권 2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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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교회가 시정참사회와 함께 도시 운영에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교회는 시정을 관장하는 시정참사회와 함게 마을의 운영에 큰 영향을 끼치는 곳이다. 교회의 규정에 따르면 마을 주민 모두에게 걷는 세금은 다양하다. 주교가 생각을 바꿀때 마다 많은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늑대와 양피지 2권』
이는 중세시대 교회의 역할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의 교회는 현재와 같은 단순한 종교 단체가 아닌 왕, 영주와 더불어 하나의 권력을 가진 집단이었으며, 교회는 도시에 행정, 복지등을 담당하며 자치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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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도시의 구역 이름을
교구별로 분류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중세시대 도시 구역 식별 방식을 묘사한 것이다.
『아아. 교회에 포장된 물건을 들고 뛰어가는 이들이 그 사람들이다. 이 골목의 이름 앞에 붙은 교구가 14개이고, 그 교구마다 장인 혹은 상인들이 각각의 직인조합을, 몇몇 이들은 마음의 평온을 위해 서로 모여서 만든 형제단들을 만들었는데 그 수가 꽤 많아. 이곳에도 모두 합치면 약 50개 정도는 될거야. 그 외에도 각자의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이 교회로 모여들고 있어서, 무척이나 분주한 상황이지.』
『늑대와 양피지』 2권
『역사속의 도시』
도시는 초기에 경제적으로 긴밀한 결합이 이루어지고, 통치에 있어서 단일한 지배자에 의해 지배되던 지역만을 포괄했지만 점차로 경제적인 변화와 함께 확대되었다. 시장에는 시장교회와 함께 시참사회건물이 축조되고, 영업종사자 개인이나 조합들의 건물이나 점포 등이 늘어나게 되면서 점점 더 비좁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시장의 수도 도시의 성장과 함께 증가하였다. “구시장”, “신시장” 등의 명칭은 처음 생겨난 시장 외에 새로운 시장들이 출현했음을 보여준다. 그와 함께 뤼네부르크의 성 미하엘처럼 교회나 수도원의 마당에는 사실상 오래 전부터 시장이 열려왔다. 교회마당이 교역의 장소로 즐겨 이용된 것은 도심 내의 공간적인 여유 때문만이 아니라, 교회지배자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이와 함께 시장은 특화도 이루어졌다. 이미 존재하던 시장들과 나란히 특별한 목적하에 개설되었던 시장도 추가되었다. 이들은 우선 취급되던 물품의 이름에 따라 불리웠는데, 예컨대 시장의 명칭으로 빵시장, 우유시장, 생선시장, 말시장, 닭시장 등이 등장한다.
시장에서 도시로. 독일 중북부지역 중세도시의 형성과정에 대한 사례연구 ##. 박흥식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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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곳곳에서 도시 내 시장의 개시를 알리는 종소리의 존재가 언급된다. 이는 실제 중세 도시들에서 시간을 알리기 위해 치는 종소리를 말한다.
중세 도시에서 사람들은 닭이 홰치는 소리, 처마 밑에 둥지를 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외곽 지대 수도원의 종소리, 하루의 시작을 알리거나 시장의 개장을 알리기 위해서 시장 광장에 새로 설치된 종각에서 울리는 차임벨 소리에 눈을 떳다.
『역사 속의 도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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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무역도시인 아티프에 쇠사슬 관문이 설치 되어 있으며 이는
해적이나 외침을 막기 위함이라는 장면이 등장한다.
"제일 큰 관문은 이 강을 두 밤쯤 더 내려간 곳에 있지. 세관 옆에 있는 것도 저런 오두막이 아니야. 근사한 종루가 있는 석조 요새가 맞은편 강변의, 그 또한 높다란 석탑과 거대한 사슬로 연결돼 있지. 머리 위로 이어진 사슬 밑을 지날 때에는 마치 지옥의 심판을 받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니까."
"사슬?"
뮤리가 어리둥절해 한다.
"사슬로 이어져 있으면 배가 어떻게 지나가?"
수수께끼를 즐기듯 뱃사공이 웃자, 난감해진 뮤리가 내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게 목적인 거에요."
그렇지. 거기에서부터 바다까지는 단숨에 나갈 수 있으니까. 먼 바다에서 오는 해적들이 내륙으로 들어오지 못하게끔. 여차하는 순간에는 사슬을 늘어뜨려 방어를 하는 거지. 해적 놈들에게 경고가 되기도 하고. 이 도시를 공격하기만 해봐라, 이 사슬에 묶어 노예로 삼아 주마, 라고."
(중략)
뱃사공이 말한 그대로의 것이 상상한 것보다 더 한 박력으로 드리워져 있는 모습은 과연 놀라웠다. 금고를 묶을 만한 정도의 사슬이 아니라, 고리 하나하나가 뮤리의 팔뚝을 꿸 수 있을 만큼 거대하다. 그런 것이 촤악 연결되어 머리 위에 늘어져 있다.
『늑대와 양피지』 1권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금각만에 설치된 쇠사슬이 모티브로, 사실 쇠사슬로 적진을 막는 다는 것은 이미 330년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지정 되었을 때 부터 사용된 방식이나 가장 유명한 것은 15세기에 설치된 쇠사슬 일 것이다.[출처4]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메흐메드 2세가 오스만의 수도 아드리아노폴리스(현 에디르네)에서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다는 소식에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로마 제국의 해군 총 사령관이자 베네치아 공화국 용병인 가브리엘레 트레비사노(Gabriele Trevisan)의 제안에 따라 1453년 4월 2일에 골든 혼에 쇠사슬을 설치한다. 해당 쇠사슬은 트레비사노의 지휘아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에 위치한 에우게니오스 탑과 골든혼 건너편 갈라타 지구의 방파제 위의 탑에 연결 되었으며 쇠사슬 중간 중간에는 굵은 통나무를 엮어서 쇠사슬이 가라 앉지 않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메흐메드 2세가 배를 육로로 옮기는 전략을 실행함에 따라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3. 시대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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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청어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데, 실제 중세 유럽에서 청어는 일상 식품으로 사용될 정도로 많이 잡힌 물고기다.
한자동맹이 흥하고 쇠락한 데에는 청어의 수확량 변화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자세한 내용은
한자동맹 항목 참조.
그런 후 우리를 태운 배는 수많은 다른 배를 따라 선창으로 향했다. 배가 너무 많아서 차례를 기다리게끔 되어 있다. 모든 배가 이곳에서 짐을 내리고, 그 대신 말린 청어와 소금에 절인 청어[2]를 산더미처럼 싣고 돌아간다고 한다. 마침내 선창에 다다르자, 뮤리는 그곳에 쌓인 생선을 보더니 이번에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생선과 함게가 아니어서 좋았어. 이제 소금에 절인 생선이라면 보기도 싫어."
청어는 얼마든지 잡히기 때문에 값싼 식재료다. 동절기에는 해안에서 산중까지 모든 가정의 식탁에 연신 올라가 사람들의 비명을 부른다. 매년 겨울이면 신세를 지는 생선은 이곳에서 뭍으로 올라온 것일 수도 있겠다.
『늑대와 양피지 1권』 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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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출항하는 이들이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뱃머리에
성모 마리아와
천사의 상을 새기기도, 항해 중에 가호를 빌기도 한다."라는 내용이 언급되는데, 이는 중세시대
선수상이 탄생하게 된 원인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사람들은 선박에 성인의 이름을 붙이고, 선수에는 성모상이나 천사상을 조각하여 항해의 가호로 삼는다.
『늑대와 양피지』 1권 144p
이물 장식으로 아름다운 여인 조각상이 애용되었던 것도 바다의 신을 노하게 하지 않겠다는 표현이다.
[지평선] 진수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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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과자를 맛있게 먹는
뮤리의 모습에 "설탕 조림 과일이 많은 것은 오랜 시간 배위에 머무르며 여행을 다니는 이들 중, 돈이 많은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라는 대사가 등장하는데,
중세시대에는
설탕은 대항해를 통한 원정무역을 통해서만 얻을수가 있는 무척 비싼
조미료였다. 15세기 무렵엔 설탕 1kg가 소 2마리 가격이었다고 한다. [출처2] 따라서 재력가가 아닌 이상 설탕을 쉽게 얻을수 없었으며 이때문에 중세시대의 귀족들은 부를 표현하기 위해 설탕으로 예술작품을 만들어 손님들에게 선보이기도 했다.
설탕은 또 후추와 마찬가지로 고급 조미료였다. 정교하게 세공된 모습으로 왕이나 귀족이 참석하는 자리를 장식하기도 했다. 이런 설탕 장식이 오늘날 웨딩케이크의 기원이 됐다. 설탕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중세 유럽으로 널리 전파됐다. 존스홉킨스대학 시드니 민츠 교수(인류학과)는 '설탕과 권력'에서 “ 영국의 헨리 3세는 1226년 윈체스터 시장에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산 설탕 3파운드(1.4㎏)를 구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 에드워드 1세 재위 시절인 1288년에는 왕실의 설탕 소비가 6,258파운드(2,800㎏)에 이를 정도로 소비가 급증했다”고 적었다. 이집트의 술탄은 1040년 라마단 기간에 73,300㎏의 설탕을 썼다. 설탕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설탕의 고향은 뉴기니, 이슬람 거쳐 유럽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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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자는 굉장히 어려운 반면, 일반 평민들이 쓰는 속어가 따로 있다는 발언이 나오며 교회문자로 씌여져 있는《
우리 신의 말》을 속어로 번역해 사람들에게 나눠주어 깨우침을 얻도록 하겠다는 콜과 하이랜드의 계획이 등장하는데 이는 교회문자로 사용되던
라틴어와 백성들이 쓰는
영어(혹은
프랑스어)를 의미한다.
성전은 교회문자로 쓰여 있어요. 오래전 옛날, 예언자의 말을 기술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교회가 세상에 널리 퍼지는 바람에 원전을 읽지 못하는 성직자가 대거 출현했지요. 그런 점에서 신께서 사람들에게 내려 주신 것이 교회문자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중략) 아무튼, 성전은 그 교회문자로 쓰여 있지만, 교회문자는 평소 쓰이는 문자는 아닙니다. 세속어라 불리는 평소 쓰이는 문자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늑대와 양피지』 1권 101p
그리고 세속어라 불리는 문자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대목은 중세 유럽의 문맹률이 높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에 어느 정도였냐면 라틴어를 익히는 것이 필수였던 성직자들 또한 중세 초반까지는 문맹에 가까웠으며, 일부 성직자들은 미사 집전하다 성경 구절에서 막히니 '읽었다고 칩시다!' 라고 말하고 미사를 이어나갔을 정도였다고.
실제 중세 유럽 사회는 알았다. 당시는 문맹이 결코 수치가 아니었다.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것은 오히려 기사에게 용맹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심지어 귀족들 가운데서도 글을 전혀 읽고 쓸 줄 모르는 경우마저 있었다. 예를 들면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카를 대제)는 그렇게 문화를 장려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알파벳을 쓸 줄 몰랐다.
『홍익희의 유대인경제사 3: 동방무역과 금융업 중세 경제사 上』
중세 말기까지 문맹률이 98%였다고 하는데[4] 왕족과 귀족 중에도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니, 일반 민중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실질가치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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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가
뮤리의 귀와 꼬리를 숨기기 위해 돌돌 싸매고 다니다,
사춘기에 접어 들 무렵 "우리는 악마에게 씌인 거라서 남들에게 알려지면 이곳에서 떠나야 돼."라는 발언을 하는데[5] 이는 중세시대 어린
장애인들을 비롯해 몸이 다르게 생긴 사람들을 배척했던 중세시대를 반영한 것이다.[6][7]
그중 하나가 어린이 마녀재판이다. 독일 뷔르츠부르크 문서실의 기록에 따르면 1627~1629년에 10세 이하의 어린이 27명이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하고, 1647~1655년에는 어린이 5명이 마녀로 몰려서 죽었다. “당시 거리에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 넘쳐났고 이 불쌍한 아이들을 처리하기 위해 마녀사냥을 아이들에게도 적용한 것입니다. 특히 장애아나 기형아는 마녀나 악마의 자식으로 간주돼 더 배척됐습니다.” 쌍둥이는 여자가 여러 명의 남자와 잠을 잤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해 가문의 수치로 여겨 버림받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는 이처럼 미신을 숭상하는 사고가 머리에 깊이 박혀 있는 미혹의 시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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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는 사람은 요긴하게 쓸 수 있고 문서를
필사하는 사람은 더욱 요긴한 존재다. 그 작업은 다른 사람들이 상상 이상으로 힘든 것으로
수도원에서는 고행의 하나로 여겨질 정도다. 자원하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은 데다, 그중에서도 끈기가 있고 실수 없이 할 수 있는 자를 뽑자면 더욱 찾기 힘들다."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는 중세시대 필사의 어려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몇 개월에서 몇 년간에 걸친 필사는 힘든 작업이었다. 말 그대로 밭갈이에 비유됐다. 심지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참회의 방법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 필사하였는가'로 천국으로 가는 길을 계산하기도 하였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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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이탄[8]과 석탄이 윈필 왕국에서 주로 채취된다고 나오는데 실제 영국에서 석탄 산업이 유럽에서 가장 먼저 발달한 것과, 이어지는 설정이다.
석탄은 그리스·로마 때부터 사용된 기록이 있으나, 영국에서 석탄 이용이 조직적으로 시작된 것은 14세기 초기부터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에 이룩한 산업혁명 기간 중에 석탄산업이 확립되었다. 산업혁명의 역사가 바로 석탄을 사용하는 증기기관의 발명 및 그 이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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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옥[9]이 등장하고, 이탄과
석탄의 중간정도라는
하이랜드의 설명이 등장한다. 참고로 흑옥으로 유명한 지역은
잉글랜드 지방으로 하이랜드가 고향을 느끼게 한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 호박이 숯으로 변한 것이라고도 한다. 닦으면 호박처럼 모래와 양모를 끌어당기지만, 불에 지피면 호박과는 달리 녹지 않고 타오르지. 냄새는 이탄(泥炭)과 석탄의 중간 정도. 나에겐 고향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는 거지.』
『늑대와 양피지』 2권
(흑옥의) 유명한 산지는 영국 요크셔(Yorkshire)지방의 항구도시 휘트비(Whitby)로, 기원전 1400년에 채굴을 실시한 기록이 있다. 현재 상업적 규모로의 채굴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휘스비 흑옥(Whitby jet)"의 지명도를 활용하여, 산지와는 관련이 없어도 그 같은 명칭으로 판매되는 예도 있다. 현지의 흑옥은 쥬라식층(the Jurassic)으로부터 채굴된다. 이것은 또한 스페인, 프랑스, 독일과 러시아에서도 발견되지만, 휘트비산 흑옥보다 경도가 낮고 더 탄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4. 사건 관련
- 십일조를 이유로 윈필 왕국과 교황간의 알력싸움이 진행되고 있으며, 윈필 왕국의 국왕이 자신만의 종교를 만들려고 한다는 설정이 있는데 이유는 다르지만 헨리 8세의 행적과 유사하다. 헨리 8세는 아라곤의 캐서린과 관련된 이혼 문제로 교황측과 틀어졌으며 종교개혁 성향 성직자 귀족들의 지지를 배경으로 수장령(Acts of Supremacy, 首長令)을 선포, 이를 반대하는 주교 2명을 처형하기에 이른다[10] 그후 "교황은 로마의 주교인데 왜 영국 내정에 간섭하냐?"라며 교회를 독립시켜 버리는데, 이 사건으로 탄생한 것이 영국 국교회다.
- 작중에서 토트 콜이 작성한 우리 신의 말 민중어 번역본에 높으신 분[11]의 개입으로 "하느님은 돼지이고, 그 가르침은 돼지 멱따는 소리와 같다."라는 문구가 작성 되었음이 밝혀지고 토트 콜은 신을 기만한 죄로 처형될 위기에 놓이게 된다. 실제 역사에서 비슷한 사례로 "간음하지 말라"를 "간음해라"라고 번역해 영국을 발칵 뒤집어 놨던 킹 제임스 성경이 있다. 물론 킹 제임스 성경의 경우엔 누군가의 악의적인 서술이 아니라, 발간 중 실수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 조금 다르지만.[12]
5. 가톨릭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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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의 독백에서 "성무(聖務)는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이는 실제 중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업무라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성무는 소금과도 같은 것이다. 계절의 변화, 인생의 중요한 순간 등. 일상생활에서 교회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늑대와 양피지』 1권 220p
그리고 윈필왕국이 성무정지를 당했다는 말이 언급된다. 성무 정지란 공동체 구성원 전체에 대한 성사 참여를 금하는 조치로, 파문과는 조금 다르다. 결혼식이나 갓난 아이에게 내리는 축복,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하지 못한다고 언급된 것은 이를 반영한 대목이다.
교황은 이와 함께 앞으로 교황이 축복하지 않은 자를 선출하면 성무聖務 정지와 파문破門성무 정지를 당하면 교회가 한 국가나 지역에 대해 성무 정지를 내리면 그 구성원 누구도 성사를 받을 수 없고 공식 미사도 일절 금지된다.을 당할 거라고 위협했다. 프랑크 왕자들의 발목을 확실히 잡아둔 것이다.
『스토리 세계사 5 [중세편Ⅱ]』오
-
작중에서 정교의 모습은 당시 엉망진창이었던
중세 교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조카와 조카딸을 가졌고, 심지어
교황도 자식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당시에는 말단
신부부터, 교황,
추기경들도 공공연하게
첩을 두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실제로 두었다.
중세에 사제들은 고해성사, 결혼식, 장례식 등 일체의 일상적인 일들을 담당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했다. 이러한 사제들 중에는 인간의 영혼구제보다는 어리숙한 농민들의 눈과 귀를 속여서 치부(致富)에 목적을 둔 사이비 진리들을 늘어놓는 경우도 많았다.
사제들의 타락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의사, 변호사, 서기, 심지어는 상업이나 금융업까지 겸해서 돈벌이에 열을 올리는 사제도 있었다. 또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노름을 하는 자는 보통이었고, 여자를 얻어 살림을 하기도 했다.
이야기 세계사 1권
1000년경 유럽 교구 사제는 대부분 기혼자였다. 기혼 주교의 수는 그보다는 적었지만 드물지 않게 찾아볼수 있었다. 브리타뉴 지방의 돌(Dol) 주교와 그의 아내는 공개적으로 딸들의 결혼을 축하했고, 그녀들에게 주교 관구에 딸린 토지를 증여했다. 밀라노의 대주교들은 개혁자들의 독신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들의 수호성인인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주교도 결혼을 했고, 그가 자기 주교 관내의 사제들에게 영구히 결혼을 허락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상) -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 中 -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이었던 체자레 보르자를 추기경까지 시켜주었다.
- 교황 바오로 3세는 세 아들과 두 딸의 행복한 아버지였고, 율리오 2세는 수많은 애인과 몇몇 남친이 있었다. 마르틴 루터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충격을 받은 것도 바로 율리오 2세 당시 성직자들의 성적 타락과 면벌부 판매 때문이었다고 한다.[출처3]
- 1208년 프랑스 남부 랑그독 지방에 부임한 본당 신부 피에르 클레르그의 경우에는 그의 달변과 권력과 협박을 이용해 마을의 모든 여성들과 자유로운 성관계를 가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출처1]
이런 배경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시작으로 유럽의 평민들에게 성매매를 하는 주교와 결혼한 사제를 배척하라고 축구하면서 부터 조금씩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고, 현재까지 가톨릭은 개신교와 달리 성직자가 독신을 유지하도록 교회법으로 규제하는 중이다.
다만 이건 가톨릭 교회 안의 라틴 예법을 따르는 지역의 이야기고, 이후 합쳐진 동방 예법을 따르는
동방 가톨릭에서는 아직까지 기혼자가 사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동방 가톨릭 뿐 아니라
동방 정교회도 포함되는) 동방 예법에서도 기혼자가
주교품까지 오를 수는 없다.
- "안 그래도 관문이 너무 많아서 세금 낼 거리가 많은 데다가, 교회가 십일조를 걷고 있어서 이로 인해 장사꾼들이 부담을 느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실제로 중세시대에는 영주가 통행세를 명목으로 관문을 촘촘하게 설치하기도 했다. 그리고 십일조의 경우에는 중세교회가 교구민(敎區民)으로부터 수입의 1/10을 징수한 것을 일컬어 십일조라고 불렀는데 본래 박해받던 그리스도교가 테오도시우스 대제 이후 국교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십일조는 세속법으로 강제되게 된다. 이후 프랑스 혁명을 거쳐 유럽에서 속권과 교권이 더욱 엄격하게 구분되면서, 세속법에 의한 십일조 의무는 폐지되고 교회법적 의무로 남게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십일조 자체는 21세기 기준으로도 폐지되지 않았다.
가톨릭에서든
개신교에서든. (가톨릭에서는 교무금이라고 부른다) 다만 가난한 신자의 경우 본당
신부나 담임
목사와 상담하면 면제될 수 있고, 부유한 신자가 아예 대놓고 무시하더라도 세속법으로 터치하는 게 불가능할 뿐이다. 개신교에서는 10분의 1을 내라고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반드시 10분의 1을 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형편에 맞게 내며, 보통 30분의 1 정도를 권장하는 편.
『
성공해서 이름을 떨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교황님의 횡포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정책과, 자의적으로 하느님의 가르침이 이용되고 있는 현 상황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하이랜드님처럼 확실한 신앙심에 감동했고, 저런 분이 통치를 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힘이 올바른 신앙을 위해서 사용된다면 매우 기쁜 일일 것입니다. 게다가…』
『게다가?』
『십일조가 강화된다면, 뇨히라에서 구매하는 다양한 물건들의 가격도 오르겠죠? 반대로 십일조가 폐지된다면, 뇨히라의 온천장이 벌어들이는 수익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늑대와 양피지 1권 中
『게다가?』
『십일조가 강화된다면, 뇨히라에서 구매하는 다양한 물건들의 가격도 오르겠죠? 반대로 십일조가 폐지된다면, 뇨히라의 온천장이 벌어들이는 수익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늑대와 양피지 1권 中
한편 중세의 교회는 중세 유럽인들의 생활과 의식을 지배하였다. 중세 교회의 주된 수입은 군주나 귀족에 의한 기부금과 개인 수입의 10%를 거두어들이는 세가 있었다. 또한 높은 지위의 성직자들은 일반 귀족들과 같이 장원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귀족처럼 농민에게 부과금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교회 수입은 봉건 사회의 세속적 질서와 깊이 관련되었기 때문에 교회의 권위는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따라서 10~13세기에는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클뤼니 대수도원의 개혁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또한 교회는 성직자 임명, 이단과의 투쟁 등을 통해 권위를 인정받으려 했다.
『1월의 모든 역사』 中
이처럼 교회 수입은 봉건 사회의 세속적 질서와 깊이 관련되었기 때문에 교회의 권위는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따라서 10~13세기에는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클뤼니 대수도원의 개혁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또한 교회는 성직자 임명, 이단과의 투쟁 등을 통해 권위를 인정받으려 했다.
『1월의 모든 역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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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콜이 많이 먹는 뮤리에게 한소리 하자 뮤리가 반박하면서 분노, 대식, 색욕, 물욕, 질투, 오만, 나태를 언급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칠죄종이다.
『도대체, 아버지가 전별금을 주셨을 텐데, 왜 그렇게 인색해? 그리고 많이 먹는 게 죄라면, 인색한 거는?』
『읏』
평소에는 이쪽의 설교를 흘려들으면서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으니 상황이 안 좋아졌다. 분노, 대식, 색욕, 물욕, 질투, 오만, 나태, 큰 죄에는 들어가진 않지만, 인색도 죄에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늑대와 양피지 1권 中
다만 실제 가톨릭 교리에서는 조금 복잡한데, 예를 들어 색욕의 유혹은 그 자체로는 죄가 아니며, 다만 색욕이 행동으로 드러났을 때나 유혹 자체를 즐겼을때 죄가 되며, 세부적으로 얼마나 중대한 것이였는가에 따라 대죄가 되는 개념이다. 마지막 부분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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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프에 세워진 석조 교회를 보며 기부자의 이름이 새겨진 돌들을 볼수 있다는 콜의 대사는 성전 건축에 기부한 기부자들의 이름을 벽돌에 쓰는 가톨릭 문화를 반영한 것이다.[15] 중세의 기부 문화는 오늘날과는 그 개념이 다른데, 21세기의 기부는 기본적으로 기부자의 '호의'이다. 반면 중세의 기부는 기부를 받는 자의 '권리'이다. 중세인의 관념에서 볼때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X라는 재산이 있다고 친다면, 이 X를 초과하는 재산은 타자에게 돌아가야 할 권리를 자신이 착취한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아무리 중세라도 이런 개념을 철두철미하게 지킨 사람은 소수였지만, 받는 자의 '권리'라는 개념에서 해석하여야, 귀족들의 거대한 기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중세인들은 사회가 개인들의 산술적인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를 이룬다고 해석하였고, 따라서 개인의 구원과 공동체의 구원 역시도 이분법적으로 딱딱 구분되지가 않았다. 또한 교회에 대한 기부와 빈자에 대한 기부 역시도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는 않았다. 교회는 공동체의 구원에 대한 필수적 존재이고, 따라서 성당 건물에 대한 기부 역시도 빈자에 대한 기부와 동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빠르게 잡아도 17세기 후반까지 개신교권에서도 통용되던 믿음이다.
어떤 공동체든 판가름할 수 있는 시금석은 공동체 주변부의 빈곤한 구성원들을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일찍이 그리스도가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다"라고 경고하긴 했지만, 종교개혁기는 빈자들과 나머지 공동체의 관계를 재규정하고 그들을 구제할 실질적 해결책을 고안하는 문제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개념으로서의 가난과 구원 드라마의 참여자로서의 가난한 사람들은 중세 가톨릭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략) '자선(charity)'은 오늘날처럼 단순히 불우한 이들을 향한 이타심을 뜻했던 것이 아니라, 모든 동반자들에게 하느님의 호의를 돌려주는, 사회관계가 바로 잡힌 상태를 뜻했다. 빈자들에게 적선하는 것은 자애로운 행위, 결국 기부자 본인이 구원받는 데 도움이 되는 선행이었다. 빈자들에게도 이번 생과 다음 생에도 기부자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할 자선 의무가 있었다.
Peter Marshall, 「종교개혁」
중세교회 교인들이 기부하고 헌금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나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돈 주고 구원을 구입하는 것이다. 거래 상대는 하나님이다. 죽은 다음의 생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중세시대 헌금의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1339년 뉘른베르크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Konrad Gross가 도시 한 가운데 Heilig-Geist-Spital이란 것을 세웠다. 그대로 번역하면, ‘성령병원’이다. 이 병원설립 문서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나를 위해 현세의 것들을 하늘의 것과 교환하려 한다.” (물론 이 당시만 하더라도 일반인을 위한 병원이 아니었다.)
무슨 뜻일까? 죽은 다음 천국 가기 위해 이 땅에서 번 돈으로 병원을 세웠다는 말이다. 땅에 없어질 돈으로 영원한 생명과 교환하겠다는 이 생각이 바로 중세교회의 생각이었다. 당시 헌금과 기부, 적선은 바로 이런 생각에서 행해졌다.
원문에서 인용되지 않은 부분에는 오류가 있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가톨릭이든 루터교회든 기부의 동기에는 개인의 성화(聖化)와 이웃에 대한 가르침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애초에 가톨릭에서 의화의 증대 요인에 속하는 선행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으로서의 선행이라 가르친다. 따라서 루터교회의 믿음과 비슷하게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간이 구원된다고 믿는다. 가톨릭의 기부와 루터교회의 기부를 대비시키는 것은, 작성자가 루터교회
목사인 것을 감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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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심문관을 언급하며 "들리는 소문만큼 야만적이지 않다."라는 발언이 등장하는데, 이는
마녀사냥과 구분되는 의미에서의 이단 심문을 말하는 것이다. 중세에서 근대동안 마녀사냥을 통한 희생자 숫자는 이단심문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이를테면
개신교권인
스코틀랜드의 마녀사냥 희생자 숫자는 1590년부터 1680년까지 약 4,400명으로, 비슷한 시기에 이단심문으로 악명 높았던 스페인은 1540년부터 1700년까지 826명을 이단으로 처형했다. 스페인 이단 심문이 가장 강경한 시기로 꼽히던 1480년부터 1530년까지의 희생자는 Helen Rawlings의 저서 The Spanish Inquisition를 토대로 최대한으로 올려잡아서 2,000명으로, 연간 40명에 해당한다. 두 나라의 인구수를 감안하면 이단심문과 마녀사냥의 희생자 수는 그야말로 압도적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악명 높은 스페인 이단 심문은, 실제 역사에서는 오히려 엉성하던 초기[16]에
유대인 출신 개종자와
무슬림 출신 개종자에 대한 과도한 의심으로 희생자가 속출했고, 체계화되어 본격적으로 교회와 국가의 관리를 받은 16세기 중반부터는 의심이 줄어들어 희생자가 급격히 감소했다.
이단심문관에 대한 소문은 종교개혁 시기 이후 각 국가에서 적국의 광신성에 대한 프로파간다로 과장되었는데, 이를테면 영국에서는 " 스페인에서 이단심문으로 40만을 학살했다"는 괴소문이 돌았고, 같은 원리로 스페인인들은 " 영국인들이 불쌍한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한다"며 이를 갈았다.
따라서 타이밍적으로 보자면 소설 본문에서 이미 이단심문관에 대한 과장된 소문이 도는 것은 오류 혹은 소설적 과장으로 볼 여지는 있다. 실제 역사에서 종교개혁 이전의 이단심문은 알비파에 대한 심문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 경우 알비파에 대한 심문은 고기를 먹이거나 맹세를 시키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육식과 맹세는 알비파의 가르침에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유죄에 대한 정황상의 증거만 있고 물증이 갖추어지지 않을 경우 제한적으로 고문이 행해졌다.
『교황께서 이단의 칙서를 내렸다고 하지만, 당장 목을 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단심문관의 조사가 먼저겠죠.』
『아, 그거 알아. 마녀들을 화형시키는 녀석이지?』
온천을 찾은 손님에게서 들은 것일 거다.
『항간에 들리는 소문처럼 야만적이지는 않아요. 』
늑대와 양피지 1권
15세기 후반에 시작해 1560년경 이후 가속이 붙고 18세기 전반에 막을 내리기까지, 유럽에서 약 10만 명(대부분 여성)이 마녀술 죄목으로 고발당했다. 이 가운데 대략 4만명이 사형에 처해졌는데, 이 수치는 같은 기간에 종교적 비정통 혐의로 처형된 이들의 수보다는 훨씬 많고, 살인죄나 중절도죄처럼 물증이 더 확실한 범죄를 저질러 사형당한 이들의 수보다는 훨씬 적다.
Peter Marshall, 「종교개혁」
공정성을 지키기 위하여 심문관 3명이 재판 1건을 진행한다. 심문관이 1명이라면 분명 독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심문관 3명은 서로를 견제하고 균형을 잡는 역햘을 했고 대안과 해결책을 제시했다. 동료 심문관의 행동에 대해 로마에 보고했는데, 피고인을 잔인하게 대하거나 무시했을 때 불만을 토로했다. (중략) 만약 피고인이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심문관들은 목격자에게서 정보를 더 모으고 감옥에 정보원을 심거나 시험을 한다. 전형적인 시험 방법은 맹세를 하게 하거나 육류를 먹게 하는 것인데 이를 받아들이면 피고인은 무죄가 될 수 있다.
John Vidmar, 「101 Questions & Answers on The Crusades and The Inqui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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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토트 콜에게
박사라고 칭하는
하이랜드의 모습이 등장하고, 토트 콜은 이 말에 깜짝 놀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간 별일 없으셨는지요. 하이랜드님』
『콜 박사도 변함없어 보이네.』
자신보다 어린 나이의 하이랜드는 독특한 가는 목소리로, 이쪽을 의도적으로 박사라고 불렀다. 박사라는 칭호는 교회에서 주는 권위 있는 것으로, 그 칭호를 가진 자가 있는 곳은 대학 정도가 될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자신이 박사라는 칭호를 가질 리가 없지만, 하이랜드가 그렇게 말한다면 정말로? 가 된다. 시중을 드는 이들과 스테판의 얼굴색이 붉어져 갔다.
늑대와 양피지 1권 中
일단 중세 시대 대학에서 박사, 그것도 신학박사가 되기 위해선 몹시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일단 교양학부 과정을 모두 마치는데 6~8년이 걸렸으며, 거기서 12~13년을 더 공부해야 했고, 논문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12시간 가까이 직접 프리젠테이션을 해야 했다. 또한 중세 대학에서는 35세 이전에는 박사학위를 줄 수 없게 명시해두었다. 따라서 무척이나 젊어 보이는 토트 콜이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스테판과 주위 인물들은 토트 콜이 " 천재에 가까운 두뇌를 가진 인물"이자, 35세 이전임에도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 엄청난 권력의 후견인이 있는 거물"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17]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선 학부 과정을 마친 후 12년 또는 13년을 더 공부해야만 했다. 그 기간 내에 학교에 머물 필요는 없었다. 그러므로 40세 이전에는 신학박사가 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실제로 학칙으로 35세 이전에는 누구에게든 학위를 수여하지 않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상) -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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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하이랜드 왕자가
주교와 대립하는 장면에서 인내심 싸움(根競べ)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 단어의 발음이
콘꾸라베(こんくらべ)다.[18] 교회의 집무실 장면에 등장하는 단어이면서, 집무실의 문을 걸어 잠근다[19]는 언급이 등장하는 걸로 봐서 콘클라베를 염두에 둔 말장난으로 추측된다. 다만 정발본에서는 외래어 번역의 한계로 인해 이 말장난을 살리지 못했다.
거기에 적힌 경전의 가르침에 이끌려 읽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 인내심 싸움(根競べ)에서 부하이자 동료인 주교들의 생각이 바뀌는 것을 막고자, 다음 단계를 이행하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중략)
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둘러보고 인원을 헤아리고 있자, 주교 측 시종이 집무실의 문을 걸어 닫고 돌아왔다.
늑대와 양피지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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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작품을 읽으면 중세의
가톨릭 교회에서
성경의 번역이 금지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 교황 성하의 이름으로 고한다."
묵직하고 불문곡직하게 만드는 독특한 음성에 이어 한 장의 양피지를 내보였다.
『늑대와 양피지』 1권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의 번역에는 반드시 교회의 인준을 받도록 했던 것에 가깝다. 실제 역사의 루터가 마주쳤던 논란은 '성경을 번역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아니었고, '인가되지 않은 번역본'의 보급에 있었다. 다만 루터가 처했던 이러한 상황과, 아래에서 인용된 잉글랜드의 특수한 상황이 맞물려, 성경의 번역 자체가 금지되었다는 오해가 영어권에 많이 퍼졌다.
신교의 신화에 따르면, 종교개혁자들은 마치 찬장 뒤에서 잊혀진 채 썩어가던 물건을 찾아낸 것처럼 성서를 '발견'했다. 사실 중세 기독교는 성서를 열렬히 탐닉했고, 신학자들은 유용한 지식 일체를 망라하는 백과사전으로 여겼다. 종교개혁 이전에 평신도를 위해 성서를 토착어로 옮긴 번역본들이 없었다는 것도 진실이 아니다. 다만 중요한 예외인 잉글랜드에서는 15세기에 롤러드파가 교회 전통에 맞서 자기네 번역본으로 신자들에게 호소하자 화들짝 놀란 주교들이 그 번역본을 전면 금지했다. 지금도 왕왕 거론되는 또 다른 오해는, 개혁가들이 사람들에게 성서를 읽혀서 그들 스스로 성서의 의미를 해석하도록 이끌려고 했다는 것이다. 개혁가들은 성서의 '명료한 진리', 이제껏 성서를 읽을 기회가 없었을지라도 올바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명백한 진리가 있다고 믿었다. 당대의 다른 성서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성서는 서문과 난외 주석으로 독자를 인도하고자 했다. 16세기에 성서를 읽으면서 삼위일체론, 그리스도의 신성, 유아세례 등을 마음대로 해석하는 기독교도를 유죄 판결했다는 점에서 신교 당국과 가톨릭 당국의 차이는 없었다.
Peter Marshall, 「종교개혁」[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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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트 콜이 먹을 것을 사달라는 눈치를 주는
뮤리를 보며 옛 선지자가 악마의 유혹을 받았다는 말을 하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이는
예수가 사막에서 겪었다는
광야의 유혹을 떠올리게 한다.
『사치는 우리의 적입니다.』
『절제하면서 삶을 즐길수 있다고 생각하지마.』[21]
노려보던 뮤리는 곧 미소를 머금었다.
항구에는 도시의 시벽과 이어진 길가를 따라 노점이 빽빽이 늘어서 있다.
ㅡ 하느님, 저를 지켜주소서.
마음속으로 금욕을 굳게 맹세한 것이었다.
『늑대와 양피지』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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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뮤리의 고백을 받고 당황하던 콜이 신학적 물음 중에 바늘머리 위에서 천사가 몇 명이나 춤을 출수 있냐는 질문이 있다는 독백을 한다. 실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이라는 책을 통해 "여러 명의 천사가 한 장소에 있을 수 있나?"라는 질문을 던졌고, 윌리엄 실링우드(William Chillingworth)가 1637년에 출간한 책 『
프로테스탄트 종교』에서 ‘바늘 끝 위에서 몇 명의 천사가 춤출 수 있을까?’로 바꿔 소개하면서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은
구원에 힘을 쏟는 대신 뜬 구름 잡는 소리만 했다며 비판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리고 이는 현재도
개신교에서
가톨릭을 공격할때 쓰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늑대와 양피지』 1권 269p
- 작중에서 교황 대사, 대주교, 주교, 부사제 등이 등장하며 이들의 복식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는데, 실제 그들이 입는 옷을 묘사하려 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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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대사의 등장과 함께 새하얀
수단을 입고 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여기서 교황 대사는 12~13세기 무렵부터 등장한 "교황 특사(Papal legate)"를 의미하며, 교황 특사는 대개
추기경이나
주교가 담당했다.
"다, 당신은..."
하이랜드는 숨을 삼키고, 나도 시선을 모았다. 주교와 대주교가 일제히 의자에서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고 하느님께 경의를 표한다. 병사 사이에서 앞으로 나온 이는 장년의 한 남성. 새하얀 수단을 입었고, 그 위에 강렬한 진홍빛 염색으로 교회의 문장이 그려져 있다. 저 옷을 입은 자는 온갖 권력자에게 통행의 안정을 보장받고 모든 법률에서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를 속박하는 것은 단 하나. 하느님의 가르침뿐이니까.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의 지상 대리인, 교황의 전권을 위임받아 세계를 순회하는 교황대사이니까.
『늑대와 양피지』 1권 240p
로마에서 특별히 파견된 '교황 특사'는 교황의 명령을 전달, 시행했다. 이 명령은 교황에게 정당한 판결을 받고자 하는 소송 당사자에게서 로마로 쏟아져 들어온 수백 건(나중에는 수천 건)의 소송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상) -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 中 -
아티프라는
자치도시에는 주교좌가 설치되어 대주교가 있으며, 이 대주교는 금빛 자수가 새겨진
수단을, 그 아래의 주교들은 자색 수단을 입고 있는 있고 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실제 주교 이상은 자주색(Roman purple)으로 만들어진 수단을 입는다.
긴 탁자에는 자수가 도드라진 자색 수단을 입은 사제들이 7명쯤 앉아 있고, 서기 두 사람이 양피지를 펼치고 있다. 탁자의 정점, 벽에 걸린 거대한 교회 문장 밑에는 금빛 자수가 놓인 수단을 입은 대주교가 있었다.
그들 뒤로는 각자의 시종인 청년들이 두어 명씩 대기하고 있다. 교회의 잡무를 보면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부사제이거나, 교회의 운영을 맡은 교회 참사회에서 고용한 평신도 비서이리라.
『늑대와 양피지』 1권 -
작중에서 등장하는 주교좌(主敎座)는 주교가 앉는 의자를 지칭하는 단어이면서 주교좌가 있는 성당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가 어릴 적에 레노스라는 도시에는 아직 교회가 없었는데, 지금은 북방 일대 신앙의 큰 중심지라 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다른 교회의 주교를 임명하는 특권을 쥔 주교좌가 설치되고 대주교가 권한을 휘두른 지 어언 10년이다.
『늑대와 양피지』 1권
주교좌란 원래 교회의 의식 때 주교가 앉는 의자를 말한다. 따라서 이 의자는 주교의 권위나 가르침 혹은 직위를 나타낸다. 그러기에 주교좌성당이란 주교의 좌가 있는 성당을 말한다.
주교좌 성당은 교구의 중심 교회로서 주교가 직접 관할하며 미사도 집전한다.[22] 주교는 교구 내 어느 교회에서도 머물 수 있으나, 상주하는 특정한 교회를 지정하여 영구적으로 관할하는데, 이 성당을 주교좌 성당(대성당)이라고 한다.
『 천주교 용어사전』 주교좌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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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하느님의 존재증명"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다. 이는 대표적인
유신론 논변인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말한다.
그보다 더 강력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반증은 좀체 없으리라.
하지만 신앙이란 좀 더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뭐랄까, 그렇지가 않아요. 하느님이 실제로 천상에 계시느냐 하는 그런 존재론적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이 세상에는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그런 가르침을 준 것이 두 분입니다."
『늑대와 양피지』 1권 173~174p
6. 경제 관련
- 1권에서 시참사회가 동전 부족을 이유로 태양의 은화와 딥 동화와의 환율을 1:30으로 고정 했는데 이는 현대의 " 고정환율제"를 말하며 중세에는 금과 은을 공용으로 하는 복본위제가 보편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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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에 대한 설명으로 "대수의 법칙"이 언급된다.
한편, 항구에선 선박의 문장을 내건 술집에서 배의 이름과 금액이 기록된 큰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의 상인들이 온종일 그 종이 앞에서 손을 잡고 기도하고 있다. 종이의 맨 위에는 거친 필체로 뭔가가 쓰여 있다.
하느님의 뜻대로.
그 술집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은 배가 가라앉는지에 대한 내기였다. 가끔은 보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배의 소유자는 화물의 총액의 2할에서 1.5할을 상대에게 건네고, 배가 가라 앉으면 상대에게서 화물의 총액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배가 가라 앉지 않으면 건넨 돈은 모두 상대가 갖게 된다. 즉, 5번에 한 번 정도 항해 중인 선박이 가라앉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침몰은 해적에게 피랍되는 횟수도 포함된다.
마을 밖으로 눈을 돌리면 푸르스름한 잿빛 하늘이 있었는데, 바람이 강한 날엔 해안가의 마을 사람들이 바다 쪽을 향해 지붕 위에 서 있는 것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탐욕으로 가득 차 새하얀 파도 거품 위를 달리는 어리석은 상선을 찾기 위함이다. 바람에 휘청거려 난파되거나, 암초를 만나 좌초 혹은 침몰하면 표류한 짐을 건져 한몫 챙길 수 있다. 다만 큰 규모의 상회와 영주 사이에는 약속을 정해, 법적으로는 표류한 물건은 선박 주인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결코 사람을 구조하려 하지 않는다. 까다로운 선주라면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살아나기 위해선 몸에 금화로 칭칭 감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겠으나, 금화를 칭칭 감고 있다면 침몰하는 것이 손해다.
오오, 이 세상은 지옥. 모험의 끝.
원양 항해를 뜻하는 자에겐, 하느님의 축복이 있으라.
『늑대와 양피지』 2권
그렇다면 보험은 어떠한 원리로 작동하는 것일까요? 주사위를 한 번 던졌을 때는 어떤 숫자가 나올지 예측하기 어려워요. 그러나 두 번, 세 번, …, 백 번 던지는 식으로 계속하여 횟수를 늘리다 보면 각 숫자가 나올 확률이 비슷해져서 6분의 1에 가까워집니다. 이를 '대수의 법칙'이라고 해요. 보험도 이 법칙의 영향을 받지요. 각 개인의 위험 발생 가능성은 불확실하지만,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하면 어느 정도 일정한 확률을 구할 수 있거든요. 보험회사는 확률을 통해 적절한 보험료를 구한 다음, 사람들에게 보험료를 받아요. 이 돈을 잘 관리하다가 누군가에게 사고가 발생하면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이지요.
또한 상기된 보험의 내용또한 실제 14세기경 제노바의 해상보험을 차용한 설명이다. " 하느님의 뜻대로"라는 문구는 14세기 제노바의 보험 서류의 첫문구로 사용되었던 "하느님의 이름으로 아멘(In nomine D. Amen)"을 뜻하며, 배가 가라 앉지 않으면 보험금을 전액 돌려받지 못한다는 것도 이를 차용한 내용이다. 참고 자료로 실제 중세시대에 사용되었던 해상보험 한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347, 23 Ottobre. "In nomine D. Amen. Ego Georgius Lecavellum civis Janue confiteor tibi Bartholomeo Basso filio Bartholomei me habuisse et recepisse a te mutuo gratis et amore libras centum septem Janue. Renuncians exceptioni dicte pecunie ex causa non habite, non recepte, non numerate et omni juri. Quas libras centum septem Janue, vel totidem eiusdem monete pro ipsis, convenio et promitto tibi solemni stipulatione reddere et restituere tibi aut tuo certo nuncio per me vel meum nuncium usque ad menses sex proxime venturos, salvo et reservato, et hoc sane intellecto, quod si cocha tua de duabus copertis et uno timono, vocata S.Clara que nunc est in portu Janue parata, Deo dante, ire et navigare presentialiter ad Majorichas, iverit et navigaverit recto viagio de portu Janue navigando usque ad Majorichas et ibi applicuerit sana et salva, quod tunc et eo casu sit presens instrumentum cassum et nullius valoris ut si facta non fuisset. Suscipiens in me omnem risicum et periculum dicte quantitatis pecunie quousque dicta cocha aplicuerit Majoricis, navigante recto viagio ut supra. Et etiam si dicta cocha fuerit sana et salva in aliqua parte, usque ad dictos sex menses, sit similiter presens instrumentum cassum et nullius valoris ac si factum non fuisset. Et similiter si dicta cocha mutaverit viagium sit dictum instrumentum cassum et nullius valoris ac si factum non fuisset. In dictum modum et sub dictis conditionibus promitto tibi dictam solutionem facere, alioquin penam dupli dicte quantitatis pecunie tibi stipulanti dare et solvere promitto cum restiutione damnorum et expensarum que propterea fierent vel sustinerentur litis vel extra, ratis manentibus supradictis et sub ypotheca et obligatione bonorum meorum, habitorum vel habendorum. Actum Janue in Banchis in angulo domus Carli et Bonifaci Ususmaris fratrum, anno dom. nat. MCCCXXXXVII ndit. XV secundum cursum Janue, die XXIII Octobris circa vesperas. Testes Nicolaus de Tacio draperius et Johannes de Recho filius Bonanati cives Janue. |
1347년 10월 23일. “ 하느님의 이름으로 아멘. 본인 제노바 시민인 Giorgio Leccavello는 Bartolomeo의 아들인 그대 Bartolomeo Basso에 대해서 무상으로 그리고 호의에 기초한 대차에 의해 107 제노바 libra를 수취하고 소 유한 내용을 고백한다. 본인이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 수취하지 않 았다는 것, 그리고 불특정한 것이었다는 이유에 의한 동 금액에 대 한 모든 법적 항변을 포기한다. 상기의 107 제노바 libra 또는 그것에 상응하는 동 금액은 본인 또는 본인의 지명인에 의해 그대 또는 그대의 명백한 지명인에게 상환, 변제될 것임을 엄숙한 계약으로 합의 약속한다. 그것은 앞으로 개월 이내에 (지불하는 것으로 한다.) (그러나 이 하의 조건하에서는) 유보 또는 보류될 것이며 또한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즉 2층의 갑판과 하나의 키를 갖추어 이미 제노 바항에 정박하고 있으며 상기의 마요르카까지 진항 및 항해할 Santa Clara , 라고 불리는 그대의 선박이, 바른 항로로 제노바항에 서 마요르카항까지 진항 및 항해하고 무사안전하게 접안했을 때, 그 때와 그 경우에는 본증서는 무효가 되고, 보험계약이 작성되지 않았 던 것처럼 효력을 잃는 것으로 한다. 상기선박이 상기와 같은 바른 항해에 의해 마요르카에 도달하기까 지의 상기금액에 대한 일체의 위험과 위험사고는 본인에게 귀속된 다. 또한 만약 상기 선박이 상기의 6개월까지 다른 장소에 안전하고 무사하게 도착한 경우에도 본증서는 무효가 되고, 계약이 작성되지 않았던 것과 같이 효력을 잃는다. 또 같은 경우로 만약 상기선박이 항해를 변경한 경우에도 상기 증서는 무효로 그것이 작성되지 않았 던 것처럼 효력을 잃는다. 상기의 형식과 조건 하에서 본인은 상기의 지불이행을 약속하며, 위반이 있을 경우, 상기금액의 2배 금액을 계약자인 그대에게 건네 어 지불할 것을 약속한다. 또한 법내 또는 법외적 소송으로 인한 손 실이나 비용 등을 포함하여 변제할 것을 약속한다. 상기 내용의 이 행을 위해서 현재 소유하고 있거나, 또한 장래에 소유할 본인의 재 산을 책임의 담보로 한다. 제노바의 Carlo 및 Bonifacio Ususmaro형제 집의 일부인 은행에 서 주 탄생 1347년 제노바력 15년 10월 23일 저녁 무렵 작성됨. 증 인, 모직물상 Nicolaus de Tacio 및 제노바인 Bonanato의 아들 , Johannes de Recho." |
출처 : 중세 제노바의 해제조건부 보험계약의 재고찰 - 지중해지역연구 제 9권 제 2호(2007. 10): 65-89. |
7. 기타
마르틴 루터 | 카타리나 폰 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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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뇨히라의 온천장에서 손님을 상대하는 무희의 존재가 언급된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 춤을 추는 무희가 있었는지 확인했냐는 거지? 일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그 정도는 알고 있다며 가슴을 펴면서 뮤리는 주장했다.
뇨히라에선 춤추는 자리가 열리면 밝고 천진난만한 뮤리가 가장 빛났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손님은 직업이 춤을 추는 것인 무희에게 관심을 거두고, 미소를 지으며 고기, 빵 등을 주면 맛있게 먹는 순진한 뮤리만 상대하게 된다. 그런 모습에 자신의 영역을 침해한 것으로 생각한 무희들과 싸운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늑대와 양피지』 1권
이 이야기는 중세 독일 온천장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중세의 대표적인 필사 장인이자, 8명의 교황을 섬긴 비서이기도 한 포조 브라촐리니(Poggio Bracciolini)가 독일 바덴 지방의 온천장에서의 체험기를 보면 생생하게 묘사가 되어 있다.
포조는 그곳에서 일종의 수영복 같은 것을 발견했는데, 수영복이라고 하기에는 신체를 거의 가리지 못했다. "남자들은 그저 가죽으로 된 앞치마 비슷한 것을 걸쳤고, 여자들은 린넨 소재의 단순한 원피스 같은 것을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게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피스 같이 생긴 것의 양쪽이 절개되어 있어서 가리지 않은 목과 가슴, 팔과 어깨가 그대로 다 드러나더군요." 포조가 살던 이탈리아에서라면 큰 문제가 되고 어쩌면 폭력사태로까지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이 바덴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곳 남자들은 자기 아내가 낯선 자들과 부딪쳐도 그런 일로 기분 상해하지 않더군요. 그런 일에 별로 개의치 않으면서 모두 가급적 그냥 좋게 받아들입니다." 포조는 그들이 플라톤이 말하는 『국가』에 정통한 것만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하기는 그곳에서는 모든 재산이 공동 소유지요."
바덴의 사교생활의 관습이 포조에게는 모두 꿈만 같았다. 마치 유피테르[23]와 다나에[24]가 살던 사라진 세계가 재림한 것 같았다. 수영장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으며, 용모가 아름답고 태생도 좋은 몇몇 소녀들이 여신과도 같은 모습과 몸짓으로 음악이 연주되는 내내 물 위를 둥둥 떠다녔다. "그들은 옷자락을 뒤에 조금 끌면서 물에 둥둥 떠다녀서 사람들이 그들을 날개 달린 베누스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포조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소녀들은 자신들을 빤히 쳐다보는 남자가 있으면 그에게 뭔가를 장난스럽게 요구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면 요구를 받은 남자들은 화관과 함께 동전을 던져주곤 했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예쁜 소녀에게 던져주었다. 소녀들은 남자들이 던져주는 것을 손으로 직접 받기도 했지만 때로는 옷자락을 넓게 펼쳐서 받기도 했다. "나도 종종 동전과 화관을 던져주었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1417년, 근대의 탄생」 p.219~p.220
- 작중에 " 오른손엔 저울, 왼손에는 성전이군요."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티아를 패러디 한 것이다. 대한민국 대법원 앞에 서있는 여신상이 바로 유스티티아.
[출처4]
『터키에서 읽는 로마사』.
[2]
중세 북유럽 일대에서는 주식이었던
청어를
훈제 하거나, 소금이나 식초에 절여 먹었다. 이유는 간단한데 보관기술이 떨어졌기 때문. 그 유명한
수르스트뢰밍도 소금에 절인 청어를 삭힌 음식이다.
[출처2]
『경제로 읽는 교양 세계사』
[4]
다만 지역에 따라서는 조금씩 퍼센테이지가 달랐다.
프랑스 지역과
이탈리아 지역의 경우에는
수도원이 학교의 역할을 하기도 했고
대학도시들의 등장으로 인해 일부 대도시의 문맹율은 60%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5]
늑대와 양피지 1권 2막 中 - 뮤리는 철이 들기 전까지, 온천장의 방에서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밖에 나갈 때는 얼굴 이외를 천으로 둘둘 감고 있었다. 주위에는 몸이 약해서 따듯하게 해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실은 귀와 꼬리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철이 들고 난 후, 어머니인 호로는 뮤리에게 흐르는 피는 악마 들린 것이라며, 만약 그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 자신들은
뇨히라에 머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했었다.
[6]
그런데 1600년대면 중세가 끝난지 대략 150 년이 지난 이후다. 당장 아래 예시의 시기도 종교전쟁이 한창이던 17세기의 사례다. 또한 장애인 탄압은 근대인들이 만들어낸 편견이란 이야기도 적잖게 나온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798012
[7]
작가의 의도 자체는 중세의 장애인 혐오를 반영하여 서술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실제 중세 시대를 반영하자면, 호로의 존재가 기독교적 질서를 훼손하는 야만인들의 신이기 때문이라는게 이치에 맞다.
[8]
泥炭, peat. 이탄 석탄화도에 따른 분류에서 석탄화 초기 과정의 것. 쉽게 말해 석탄이 된지 얼마 안된 물질을 말한다.
[9]
일명 패갈탄(貝褐炭)으로 불리는 준광물. 반짝거리는 외형 때문에 치장물에 사용되기도 했다.
[10]
토머스 모어와 존 피셔.
[11]
정확히는 아티프의 교회 주교좌.
[12]
근데 또 여기서 공통점이 있는데 토트 콜은 이런 번역본으로 처형당할 뻔 했는데 마찬가지로 킹 제임스 성경 편찬에서 실수를 한 식자공은 300파운드라는 무거운 벌금을 선고받은 바 있다.
[출처3]
유로저널 오피니언.
[출처1]
『몽타이유 - 중세말 남프랑스 어느 마을 사람들의 삶.』
[15]
이는 21세기에도 있는 문화이다.
[16]
16세기 초반까지.
[17]
물론 바로 다음에 토트 콜이 "농담하지 말라"고 이야기 한다.
[18]
콘클라베의 일본의 표기는
가타카나로 コンクラーヴェ이다.
[19]
콘클라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투표 진행 땐 문을 걸어 잠근다.
[20]
오해할까봐 덧붙이자면, 가톨릭 신학자가 아니라 영국 워릭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이다.
[21]
참고로 전작인
늑대와 향신료에서도 뮤리의 엄마인 호로가 "절제란 걸 모르는 구나"라는 로렌스의 말에 "
식욕은 대부분의 것을 없애 주지만,
금욕은 뭔가를 만들어 내는 일도 없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22]
예를 들어,
명동성당은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이다.
[23]
고대 로마의 최고 신. 다신교 시대에는 로마의 국신(國神)이기도 했다.
[24]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
페르세우스의 어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