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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5 11:11:38

김남일/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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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경력

1.1. 프로 이전

1977년 5월 1일,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인천송월초등학교 3학년 때이던 1986년부터 축구를 시작해 부평동중학교를 거쳐 1993년, 인천 축구부 최고 명문 학교 부평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교 1학년 당시 부친의 사업 실패와 선배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축구를 잠시 포기했으나, 조모의 뒷바라지[1]로 다시 팀에 복귀한 그는 1년 후배들인 서기복, 안효연 등과 함께 팀을 '무적'의 자리에 위치하게 하며 고등학교 레벨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이름을 날렸다. 남다른 시야, 체력 등으로 인해 고교 시절 맹활약을 펼쳤고, 이회택 감독의 눈에 띄어 한양대학교로 진학하게 됐다. 1학년 때이던 1996년, 1996 AFC 청소년 선수권대회에 차출되어 6년 만에 대한민국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올림픽 대표에서 경쟁자로 뽑히는 이관우, 고종수 등에 비해 투박한 볼터치로 인해 슬럼프를 겪다가 이회택 감독의 조언을 받고 수비형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하며 다시금 두각을 나타내다가, 3학년에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을 준비하는 허정무 감독의 눈에 띄어 A매치에 데뷔하기도 했다.

1.2. 전남 드래곤즈

1.2.1. 2000~2002 시즌

한양대를 졸업한 후, 2000년 K리그 드래프트에 신청해 1차 지명에 전남 드래곤즈에 지명되며 대학시절 은사와 재회하게 됐다.

대학시절부터 뛰던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면서 점차 출전시간을 늘리며, 간헐적으로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에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프로 2년차에 거스 히딩크 감독이 국가대표팀에 부임하게 됐고, 수석코치인 핌 베어벡이 그의 투지와 수비력을 높게 사 히딩크에게 추천했고, 그때 받은 기회를 잘 살려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으로서 일조하게 됐다.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쉬페르리그 알타이 SK 등 유럽에서 구체적인 이적 제안이 왔으나, 빅리그가 아니면 이적시킬 수 없다는 구단과 감독의 만류에 일단 전남에 잔류하게 된다. 이 시기 월드컵을 통해 범국민적 인기를 끌던 그로 인해 그가 뛰던 경기는 드래곤 던전뿐만 아니라 원정 구장도 구름 관중이 몰리며 K리그 최고의 스타로 거듭났다.

1.2.2. -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시즌을 마치고, 구단과 함께 유럽 이적을 추진했지만, 정식 비드는 없고 루머만 계속돼 직접 유럽으로 건너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결과는 입단 제의를 받지 못했고, 비슷한 나잇대의 송종국이나 박지성, 이영표 등이 진출한 에레디비시로 눈길을 돌렸다. 송종국이 이적한 페예노르트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고, 구단 관계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들어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베르트 판마르베이크 감독의 눈에는 확실히 들지 못했고, 주급 약 800만원이라는 적은 조건에, 위성 구단인 하위권팀 SBV 엑셀시오르에서 반 시즌 임대하는 조건이었다.

1.2.3. SBV 엑셀시오르 (임대)

엑셀시오르에서 8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으나 제한된 경기동안 나름대로 역할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엑셀시오르가 강등당하며 시즌을 마감하자 페예노르트로 복귀하였고, 활약이 불충분하다고 여겼던 페예노르트가 완전 이적 계약을 맺지 않아 다시 전남 드래곤즈로 복귀하게 된다.

1.2.4. 2003 시즌

2003년 6월 친정팀 전남으로 복귀, K리그에서 그의 인기와 실력은 여전히 최고 수준이었으며 복귀 후 제대로 리그 경기도 뛰지 않은채 올스타전 멤버로 뽑힐 정도였다. 비록 유럽에서 실패했지만, 그의 수비력과 경기를 보는 시야는 성장하여 리그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리그 후반기부터 뛰었음에도 리그 23경기 6골 1어시스트를 기록, 팀을 리그 4위와 대한축구협회 FA컵 준우승을 이끌었다. 개인적으로도 자신의 커리어 유일의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1.2.5. 2004 시즌

약 2년 전부터 이어진 혹사에 대한 댓가가 비로소 2004년부터 터진다. 오른발가락과 발목이 계속 부상이었으나 부상을 안고 경기 출전을 강행했다. A매치, 리그에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2004 아테네 올림픽까지 차출되어 쉴새없이 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올림픽을 앞두고 치른 라싱 클럽과의 평가전 도중 오른발을 접질려 골절 부상을 입었고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한채 그대로 입국, 시즌을 날렸다. 결국 리그 10경기에 출전하는 등 부상을 달고 산 시즌이 되었다.

1.3. 수원 삼성 블루윙즈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2대 감독으로 부임한 차범근 감독의 러브콜을 받았다. 차붐은 당시 수원의 중원을 이루고 있던 김진우 - 손대호로 이어지는 수비적인 중앙 미드필더 조합, 또는 김진우- 김두현으로 이어지는 공수를 겸비한 조합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에[2][3] 반년간 김남일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전남으로서는 FA가 가까워지는 시기에 몸값이 폭등하였고 명문 구단으로 이적하기를 원하는 김남일을 잡기 어렵다고 판단, 결국 수원으로부터 조병국+ 고종수를 받고 김남일을 내주게 된다.

1.3.1. 2005 시즌

2005년부터 김남일은 노쇠화가 진행되고 있는 김진우의 자리를 대체할 선수로 영입된다. 수원의 중앙 미드필더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활약하게 되었으며 이름값도 있으며 실력도 있는 선수이기에 수원 팬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으며 패스 및 공격전개, 그리고 중거리슛 등의 발전을 이루게 된다.

1.3.2. 2006 시즌

2006년에는 수원의 주장으로 임명되면서 K리그와 FA컵 더블 준우승을 이끌게 되었다. 2006년 1월부터 2월까지 진행된 아드보카트호의 전지훈련 기간에는 부상으로 하차한 송종국을 대신해서 주전으로 기용되기도 했었다.

1.3.3. 2007 시즌

그렇게 활약하던 와중에 2007년 중반부터 수원의 수비진들이 단체로 드러눕게 되자 임시로 3백의 중앙수비수로 뛰기도 했는데 생각외로 준수한 모습을 보이자[4] 수비수들이 부상에서 복귀한 후에도 차붐이 중앙수비수로 뛸 것을 권유하자 언론을 통해서 "중앙수비수로 뛰기 싫음."이라고 디스를 하며 감독과 불화를 보이게 된다.

김남일이 부상 당하자 구단은 일본에 치료목적으로 보내주게 된다. 하지만 일본에 넘어간 김남일은 다수의 일본구단에 이적협상을 시도하여 수원팬들에게 좋지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1.4. 비셀 고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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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시즌이 종료된 후 FA가 된 김남일은 해외로 이적을 모색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FA 규정에서 '자유계약으로 구단에 입단하여 입단시 계약금을 받은 선수가 해외이적을 희망할 때에는 먼저 소속 구단과 합의를 해야 한다'라는 부분이 있었으나 김남일은 이 규정을 무시하고 빗셀 고베와 먼저 합의를 하게 된다.[5][6] 원래는 빗셀 고베로부터 이적료를 챙길 수 있던 수원은 이 건으로 인해 제한적인 자유계약[7]으로 김남일을 풀어주게 되었고, 김남일은 빗셀 고베로 이적해 2년간 활약했다.

1.5. 톰 톰스크

1.5.1. 2009-10 시즌

파일:attachment/Kim_Tom_Tomsk.jpg

이후 빗셀 고베와 계약이 만료 되고 2009년 12월 김남일은 1년+1년, 연봉 100만 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러시아 리그의 톰 톰스크에 입단해 2010 남아공월드컵 전까지 6게임 연속 풀타임 출전 하는 등 총 9경기를 뛰며 무난한 활약을 하였다.

2010 월드컵이 끝난 후에 사우디아라비아 리그 알 샤밥에 입단할 예정이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계약이 취소되었고 다시 톰 톰스크로 복귀했지만 쩌리 신세로 전락하여 국내 복귀를 타진했다. 고향팀인 인천 유나이티드 FC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루머가 계속 돌았으나 김남일이 K리그로 복귀할 경우 선수에 대한 소유권을 수원 삼성이 쥐고 있기에 인천이 김남일을 영입하고자 하려면 먼저 수원에 이적료를 지불한 후에 김남일과 개인협상을 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인천이나 김남일이나 서로를 원하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적 협상은 원활하지 않았다.

수원 팬들에게 있어서는 팬들에게 지지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팀의 주장을 맡으며 팀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선수였으나 빗셀 고베 이적 당시 팀과 불화를 일으키며 나가버린 것 때문에 그랑블루들에게 까이고 있다. 말년의 평안을 위한 고향팀 이적설이 뜰 때에도 가는 건 상관없는데 이적료는 내놓고 가라라고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결국 인천 유나이티드 허정무 감독의 끈질긴 구애 끝에 고향팀인 인천에 입단 확정. 인천과 협상 당시 연봉 5억을 요구했다는 기사가 떠 '풀타임도 뛰기 힘든데 무슨 연봉 5억이냐'라며 인천팬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인천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정확한 연봉 수치는 불명이지만 최종협상 때 김남일측에서 연봉부분을 많이 양보했다고 한다.

1.6. 인천 유나이티드 FC

1.6.1. 2012 시즌

파일:인천 김남일.jpg
당연히 수원 팬들은 '드디어 돌아오는구나'라며 이를 갈았다. 게다가 인천의 새로운 홈구장인 숭의 아레나 파크에서 처음으로 벌어지는 경기가 인천 vs 수원의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그랑블루와 하이랜드는 연합하여 김남일이 골 잡을 때마다 '배신배신 김남일'을 외쳐주고 지폐와 비슷하게 생긴 P2P 쿠폰을 뿌려댔다. 그렇게 경기 내내 디스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경기가 끝난 후 원정 온 수원 서포터들 앞으로 찾아가서 인사를 했다. 일부 수원 팬들은 인사하러 온 김남일에게 계속 배신배신 김남일을 외치기도 했지만, 또 일부 팬들은 인사하러 온 김남일에게 박수를 쳐 주기도 했다.

이후 허정무 감독이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시즌 도중 사퇴하는 불상사가 벌어졌긴 했지만, 김남일 영입은 신의 한 수까지는 아니어도 영입은 된다는 게 팬들의 중론이었다.

1.6.2. 2013 시즌

2013 시즌 리그에서의 플레이는 매우 준수하다. 특히 김봉길 감독 체제가 완전히 정착한 이후에는 리그 최고 수준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공수에서 두루 활약하고 있다. 인천 경기를 보면 김남일의 위치 선정 능력은 K리그에선 거의 신의 수준에 다다랐다. 뿐만 아니라 커리어 말년에 완전히 축구에 눈을 떠서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방향을 선택해 적절한 패스를 찔러주는 모습을 보면 K리그 뿐만 아니라 대표팀 역대급을 논해도 좋을 만큼 탁월하다. 다만 국가대표 입장에서 본다면 김남일의 개안이 늦었다기보단, 수원을 택한 이후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천에 이르기까지 경기력 면에서 좋을 게 없었다고 보는 게 맞다. 한창 때 김남일은 활동량, 수비력, 패스를 다 갖췄고 김남일의 출전 여부에 따라 국대 경기력이 요동치던 무서운 미드필더였다. 이 때의 활약으로 2014 월드컵 최종예선 대표팀에 선발되기도 했다.
2013년 12월 23일 프로축구연맹은 FA 취득 193명 명단을 공개했다. 이 중 축구팬의 관심을 끈 인물은 단연코 전북의 이동국과 인천의 김남일, 설기현이었다. 이들은 머잖은 장래 은퇴를 앞둔 노장인데다 고액 연봉자이지만, 팀에서 활약상은 물론 상징성까지 지녀 프런트로서는 섣불리 떠나보내기도 반드시 잡기도 고민스러운 상황이였다. 다만 이동국은 전북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할 것이 확실해 보이고 전북 또한 리빌딩에 들어갔다지만 주포 이동국을 놓치지는 않을 것이란 게 중론이었는데 문제는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인천이 과연 김남일을 잡을 수 있을 것인지 여부였다.

2014년 1월 3일 인천은 김남일과 재계약을 포기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곧바로 전북 이적설이 떴다. 전북은 2013 시즌 내내 허리가 구멍으로 지적받으면서, 수비 라인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려 사실상 허리를 생략한 공수 2선으로 진영을 짤만큼 수비형 미드필더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8] 야심차게 영입한 김정우는 오랜 부진 끝에 임대를 갔고 노장 김상식마저 은퇴하면서 중원이 무주공산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김남일을 탐낼 이유는 충분했다.

그러나 전북 프런트는 김남일 영입설에 대해 일단 부인했다. 물론 축구팬들은 공식 발표가 나오기 전 의례적인 멘트일 뿐 김남일 이적을 확실시하고 있었다. 1월 4일 이미 인천과 김남일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김남일 영입은 전북 최강희 감독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루어졌다는 기사가 나왔다. 2014년 1월 6일 전북은 김남일 영입을 공식 발표했다.

여담으로 인천 팬들은 이 소식을 접하고 두번 OTL을 외쳐야했다. 인천의 프랜차이즈 스타감을 돈 몇 푼에 내치냐며 여론이 극도로 나빠지자 덜컥 설기현을 잡아버린 것이었다.

1.7. 전북 현대 모터스

1.7.1. 2014 시즌

그러나 노쇠화가 온 건지 전북에선 인천 시절만큼의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다.[9] 패스 미스가 잦아졌고 김남일이 부상으로 교체 아웃되자 오히려 경기력이 더 좋아질 정도로 폼이 떨어졌다. 그리고 재활기간에 브라질로 간 것에 대해 전북 팬들에게는 까임을 받고 있다.[10] 김남일의 부진 때문에 전북은 6개월만 뛰고 군대를 가야 하는 신형민을 데려왔다.

2014 시즌은 기대만큼 큰 활약을 보이진 못했지만, 중요한 경기에 출전하며 이동국과 함께 팀의 베테랑 플레이어로써 경기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26라운드 경남 FC와의 경기에서는 프리킥을 헤딩으로 연결해, 결승골이자 10년 만의 리그 골 기록을 올렸다. 김남일 개인 기록으로 보아도 6년 만의 골이었다.[11]마침 이날 중계방송은 KBS의 담당이었고, 경기 후 인터뷰를 위해 아내인 김보민 아나운서가 계속 경기를 관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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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김남일과 수훈선수 인터뷰를 시작하기도 전에 기쁨의 울음을 터트린 김보민 아나운서와 포옹하며 홈팀의 팬들에게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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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시즌, 전북이 리그 우승을 했는데 이것이 김남일에게는 첫 리그 우승이다.[12] 프로 생활 15년 만에 처음으로 리그 우승한 것이라 그에게는 더욱 의미가 크다. 지금 내 나이에는 애를 돌봐야 한다고 말해 유부남의 현실을 알려주기도 했다.

2014 시즌 종료 후 자유계약자가 되었고, 2015 시즌부터는 지도자를 보장하는 조건을 포함하여 일본의 교토 상가 FC로 이적하게 되었다. #

본래는 14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하려고 했으나 계속 뛰게 되었다.

1.8. 교토 상가 FC

1.8.1.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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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상가 이적 후 훈련장에서 찍은 사진. 옆에는 같이 이적했던 황진성이다.

2015 시즌 초중반까지 팀의 주전 미드필더로 뛰었으나, 김남일의 영입을 주도했던 와다 마사히로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인해 경질된 이후에는 한동안 출장 기회를 잡지 못했다.[13] 하지만 후반기에 다시 출장 기회를 얻었고, 11월 14일 토치기 SC전에서 팀의 J2리그 잔류를 결정짓는 골을 넣는 등 활약을 펼치며 나름대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리그에서의 성적은 27경기 1골이었다. 같이 영입되었던 황진성과는 달리 김남일은 상대적으로 경기 출전 수가 더 많았다.

1.9. 현역 은퇴

여담으로 한일월드컵 주전급 멤버들 중에선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게 되었다. [14] 교토 상가 FC와의 계약 해지 이후, 잠시 현역 연장 의사를 밝히기도 했지만 결국 2016년 4월 은퇴를 발표했다. 이로서 2002 월드컵 23인 멤버 중에선 현영민만이 프로 경력을 이어나가다가 2017년에 현영민이 은퇴함으로 이제 2002 월드컵 멤버들의 현역 시절은 한국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2.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로서 전성기는 2002년 월드컵 4강 진공청소기 시절과 2008년 동아시아컵 당시 MVP를 수상하던 시절이었다.

반대로 국가대표 커리어에서 최고의 오점은 2010년 월드컵 당시 나이지리아전에서 보여준 백태클 반칙. 그 외에 2003년 아시안컵 예선에서, 오만 원정 경기 중 절묘한 백패스로 실점을 야기해 1-3 패배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15]

2.1. 청소년 대표팀

2.1.1. 1996 AFC 대한민국 청소년 선수권대회

한양대 1학년 시절 국내에서 열린 청소년 선수권대회 멤버로 선발되며 국가대표로서 첫 대회에 참가하게 됐다. 박이천 감독이 이끄는 팀은 6년 만에 대회에 우승을 차지했고, 김남일은 조별리그 이란전 선취골을 넣는 등 로테이션 멤버로 4경기에 출전하며 우승에 기여했다.

2.1.2.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한양대 재학 중 이회택 감독의 지도를 통해 수비형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하고 대학 레벨에서 두각을 보이자,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대학교 4학년 당시,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2000 시드니 올림픽 예선에 꾸준히 출전했으나, 정작 대회 본선 18인 명단에 들지 못하며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다.

2.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2.1.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
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거스 히딩크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스태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이후 부임한 거스 히딩크 감독이 그를 출장시킨 2002 CONCACAF 골드컵에서 미국전 패배할 때와 체코와의 원정 평가전에서 0-5로 참패를 당할 때 최악의 모습으로 패배의 원흉으로 찍혀서 일부 팬들로부터 '김남일과 같은 기본기도 안된 선수보다는 윤정환과 같은 기술이 좋은 미드필더, 또는 한국팀의 붙박이 주전이던 김도균을 써야 한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히딩크 감독은 김남일을 꾸준히 아끼며 출장시키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로는 한국 선수들 중에서 드물게 모험을 할 줄 아는 적극적인 사고를 가졌고 그것이 창의적인 플레이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16] 그리고 꾸준히 국가대표팀에서 기회를 얻으며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상대를 잘 마크한다'고 하여 히딩크 감독으로부터 진공청소기라는 별명을 얻으며 팀의 주전으로 도약하게 된다. 월드컵 직전 열린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당대 최강의 팀과의 맞대결에서 전혀 밀리지 않고 오히려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 축구팬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 경기에서 지단을 맨마킹하면서 놀라운 테크닉을 부리는 지단의 돌파를 막아내는 명장면을 만들어냈고, 박지성의 동점골을 만들어주는 환상적인 침투 패스를 어시스트했다.[17][18]

2002년 월드컵에서 3-4-3 포메이션의 4의 미드필더 중 중앙에 위치하여 활동량과 좋은 스피드로 활약하며 공격 가담을 하지만 나이도 있어서 스피드가 빠르지 않은 유상철의 뒤를 받쳐서 상대의 공격을 1차적으로 저지하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게 되었다. 이 때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 플레이로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곱상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터프한 플레이와 거침없는 입담으로 여성 팬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특히 김남일은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빠른 스피드와 집요한 대인방어, 이영표 송종국이 오버래핑 나가고 빈 자리를 메울 폭발력 있는 활동량과 체력과 축구지능을 필요로 했었다.

16강전에서는 토티에게 머리를 가격당하는 악질적인 반칙을 당하였으나, 경고에 그쳤고[19]
파일:토티 김남일 얼굴 가격.gif

8강 스페인전 전반 초반에 엔리케 로메로의 악질적인 태클로[20]
파일:2002 월드컵 스페인전 로메로가 김남일 발목 밟아버리는 장면.gif
김남일이 실려나가자 수비형 미드필더로 이동한 이영표는 애초에 제 포지션도 아닌지라[21] 중원에서 확연히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독일전 역시 나서지 못했는데 이로 인해 유상철이 수비형으로 내려가며 결국 효과적인 공격을 하지 못하고 1대0으로 패배하게 된다. 이렇듯 전성기 그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했고 대체자원이 흔치 않았다.

2.2.2.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히딩크가 떠난 이후 움베르투 코엘류 조 본프레레 체제에서도 역시 붙박이 주전이었다. 특히 본프레레 감독은 스리백을 쓰면서도 윙백, 윙어에 심지어 을 쓰는, 극단적인 닥공 축구를 펼쳤는데, 유일한 볼란치이자 중앙에 위치한 김남일은 후방에서 상대의 모든 공격제어를 도맡아할 정도로 대체 불가한 자원이었다.

아시안컵에서도 역시 이 전술을 그대로 들고 나왔고, 김남일은 전 경기에 선발 출전하면서도 8강 이란전 후반 역전 골을 터트리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팀은 8강에서 그대로 8강 6등으로 탈락하고 말았다.

한 달후인 2004 아테네 올림픽에 와일드카드로 선발되었으나, 대회 직전 부상으로 낙마하고 만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부상을 달고 살기 시작했고, 오른발 부상은 그의 커리어 내내 따라다니는 악령이 된다.

2.2.3. 2006 FIFA 월드컵 독일

1 이운재
C
· 2 김영철 · 3 김동진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김진규 · 7 박지성 · 8 김두현
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설기현 · 12 이영표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백지훈 · 16 정경호
17 이호 · 18 김상식 · 19 조재진 · 20 김용대 · 21 김영광 · 22 송종국 · 23 조원희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딕 아드보카트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스태프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홍명보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기동


딕 아드보카트 체제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핌 베어벡 감독 시절과 허정무호에서 각각 1대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당시 김남일은 수비력은 물론 공격전개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쳤기에 그가 없으면 대표팀 전력이 흔들릴 정도의 핵심자원이었다.

2008년 중반 들어 베테랑에 접어들어가며 예전과는 활동량이나 전체적인 피지컬의 하락세를 겪었고 2008년 9월 북한과의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포함하여 최악의 경기력으로 팀을 패배의 위기로 몰아넣었다.[22] 이 경기 이후로 김남일은 허정무 감독의 눈 밖에 나게 되어 대표팀 전력에서 완전히 제외됐고 주장 완장도 후배인 박지성에게 내주는 수순에 이르렀다. 주장으로서의 입지는 박지성에게,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입지는 기성용, 김정우에게 각각 내주게 되며 그 이후로 대표팀의 경기 스타일은 그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다.[23]

2.2.4.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1 이운재 · 2 오범석 · 3 김형일 · 4 조용형 · 5 김남일 · 6 김보경 · 7 박지성
C
· 8 김정우
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이승렬 · 12 이영표 · 13 김재성 · 14 이정수 · 15 김동진 · 16 기성용
17 이청용 · 18 정성룡 · 19 염기훈 · 20 이동국 · 21 김영광 · 22 차두리 · 23 강민수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허정무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스태프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태하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월드컵 진출 확정 이후 플랜B 전술 계획으로 인해 김남일은 2009년 9월 1년 만에 대표팀에 겨우 복귀하였고, 2010년 월드컵 최종 명단에도 승선했다. 다만 복귀 이후에는 미드필더 진에는 기성용, 김정우 등 젊은 선수들의 성장세와 본인의 하락세와 맞물려서 백업으로 내려갔다.[24] 셀틱 이적 초기에 기성용의 폼이 허정무가 따로 한마디 했을 정도로 떨어져 있어서 승부의 윤곽이 드러났다 싶으면 즉시 기성용을 빼고 김남일을 투입시켰다.

조별리그 1차전 그리스 전에서 74분, 2차전 아르헨티나 전에서는 46분 교체 출전하여 무난하게 경기를 마쳤다. 그러나 조별리그 마지막 3차전 경기인 나이지리아전에서도 교체 출전했는데, 수비연계가 전혀 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급기야 후반 22분 경에 상대로부터 뺏은 공을 빠르게 전개하거나 걷어내지 않고, 공을 끌다가 공을 걷어내려던게 그대로 무리한 백태클이 되면서 PK를 헌납, 결국 동점골로 이어지면서 맹비난을 들었다. 분명 페널티 박스 안이었기에 빠르게 공을 처리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던게 화근. 그 실책으로 인해서 경기흐름은 순식간에 나이지리아 쪽으로 넘어갔으나 다행히도 나이지리아 선수들이 잇따른 범실을 저지르면서 2:2 무승부로 가까스로 16강에 진출하였다.[25][26][27]

이후 16강 우루과이전에는 출전하지 못했고 몇년간 대표팀에서 멀어졌다.

2.2.5. 이후

2013년 5월 16일 발표된 2014 브라질 월드컵 최종예선 6차전 레바논전 대표선수 명단에 포함됐다. 2010년 월드컵 이후 35개월 만에 최강희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에 재승선한 것. 구자철, 기성용이 경고 누적 및 부상, 박종우 FIFA의 징계로 나갈 수 없게 된 반사이익을 누리기는 하지만, 인천 이적 이후 보여준 뛰어난 플레이가 아니었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를 기회로 어려워 보였던 센츄리 클럽에 가입할 기회를 잡았으나 레바논전 이후 부상으로 우즈베키스탄-이란과의 최종예선 마지막 2연전에는 출전하지 못했고, 당시 대표팀은 경기력의 졸전으로 썩 좋은 소리도 못 들었다. 이래저래 말년이 아쉬웠던 케이스였다.

2.2.6. 은퇴에 대한 본인의 생각

2014년 5월 브라질 월드컵 특집방송[28]에 나와서 '100경기까지 2경기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한 마음으로는 센추리 클럽에 가입하고 싶다' 라는 마음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나이도 만 37세였고, 사실상 은퇴 직전의 커리어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독일의 미하엘 발락처럼 국가대표 경력은 특별한 상황이 없는 한 98경기에서 끝날 것으로 예상되었고, 2016년에 현역에서 은퇴하면서 그대로 마무리됐다.[29]

3. 기록

3.1. 전남 드래곤즈

3.2. 수원 삼성 블루윙즈

3.3. 전북 현대 모터스

3.4.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3.5.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3.6. 주요 개인 수상

3.7. 통산 기록

3.7.1. 국가대표

2017년 9월 5일 기준이다.
연령 출전
U - 17 0 0
U - 20 4 1
U - 23 19 1
A 대표 98 2
종합기록 121 4

4. 플레이 스타일


한국 축구 역사에서 수비형 미드필더 전문 선수 가운데에서는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라 봐도 무방하다. 진공청소기란 별명답게 투지넘치는 플레이를 바탕으로 몸싸움과 태클에 적극적이고 대인마크에 능했으며, 전술 이해도 역시 높았다. 뿐만 아니라 적재적소에 찔러주는 전진패스 또한 일품이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와의 친선 경기때 박지성에게 찔러준 전진패스가 그의 작품. 프랑스전 김남일 패스 박지성 골 전북시절 김남일 이동국 결론적으로 진공청소기라는 별명때문에 마치 수비만 잘하는 선수처럼 떠올리기 쉬우나 실제론 활동량, 위치선정, 투쟁심, 패스능력 등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을 모두 갖췄던 정상급 미드필더였다. 2010년대 선수들로 비교하자면 기성용의 패스와 시야 + 리즈시절의 볼 간수 능력만 뺀 김정우다.

또한 당시 한국 선수들이 대체로 그러했듯이 주발은 오른발이었지만 왼발 사용 능력도 상당히 뛰어났다. 롱패스를 뿌릴때 각이 안나와서가 아닌 자연스럽게 왼발을 쓰는 경우도 꽤 많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볼 터치를 비롯해 볼을 다루는 능력 자체는 분명히 투박했고 월드컵 이전에는 공을 잡을 때마다 팬들이 제발 다른 선수한테 넘겨라고 할 정도로 패스 정확도가 떨어졌다. 네덜란드 출신인 히딩크가 추구했던 토탈사커에서 투쟁심 넘치는 수비형 미드필더의 역할이 매우 컸고 워낙 강팀이 많은 월드컵에서는 어찌되었든 수비를 전문적으로 해줄 미드필더가 필요했기 때문에 히딩크호에서는 그의 장점이 극대화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1차 빌드업은 홍명보를 위주로 이뤄졌기에 김남일이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한것도 그의 장점을 살리는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월드컵 이후에는 온더볼과 패싱 능력 역시 성장하며 말그대로 한단계 스탭업하여 이후 K리그에서 정상급 미드필더로 활약할 수 있었다.

해외 리그에 임대로 진출했을때는 명성과 월드컵 직후 실력을 감안했을때 아쉬운 활약을 남겼는데, 아무리 스탭업 했다하더라도 해외 리그에서 필요로하는 온더볼 능력에 비해선 아쉬움이 있었다.[30]


[1] 이 일화는 2003년에 TV동화 행복한 세상에 방영되었다. # [2] 차붐은 김두현의 신체조건으로는 중앙 미드필더 싸움에서 활약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김두현을 뒤로 빼거나 측면으로 돌렸으며, 심지어 김두현을 3-5-2의 윙백으로 쓰기도 했다. [3] 손대호는 김진우에 비해 수비범위가 넓기는 했으나 정작 수비력에선 지나치게 거칠기만하고 부족함을 드러냈고 패스 능력도 썩 좋지 않았다. [4] 그때나 지금이나 국대 중앙수비수는 욕먹는 자리였던지라 팬들 사이에선 국대에서도 중앙 수비수로 뛰는거 아니냐는 말이 나왔는데 베어벡 감독은 부정했다. 베어벡은 김진규 강민수를 중용했다. [5] 고종수 또한 FA가 된 후 이 규정을 무시하고 교토 퍼플상가와 이적협상을 하다가 수원 구단으로부터 임의탈퇴를 당하는 등의 불이익을 받았다. 다만 이 때 규정이 개정되어 해외 이적시는 이적료가 없지만, 돌아와서 K리그 타 팀 이적시 그 팀은 원 소속팀에 이적료를 주도록 바뀌었다. [6] 더 큰 문제는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떠나면서 당시 팀 사정이 어려웠던 수원을 떠나지 않겠다고 공언하면서 그대로 빗셀 고베로 갔다는 점이다. 죄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유승준과 같은 케이스라 보면 된다. 이 이후로 김남일은 수원팬들 사이에서 '김배신'이라는 칭호를 획득하게 되었다. [7] 하지만 국내로 돌아올 때의 권리는 수원이 계속 쥐게 된다. [8] 사실 K리그에서 몇 년째 정상급 공격수 못지 않게 수비형 미드필더도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9] 사실 인천에서 전북으로 온 선수들 치고 현재까지 전북에서 잘하고 있는 선수는 정혁, 한교원 말고 거의 없다. 정인환은 인천 시절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해 김기희, 알렉스 윌킨슨에게 밀렸고, 이규로는 전광환을 밀어내긴 했으나 공수 어디서도 잘한 부분이 없어 김기희가 라이트백을 보게 만들 정도였다. [10] 원래 1월 가기로 결정났던 것인데 시기가 절묘했다. [11] 아이러니하게도 이날 경남 골키퍼 김영광을 훗날 성남 FC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나게 된다 [12] 시즌 도중에 은퇴하고 코치가 된 최은성에게도 첫 리그 우승이다. [13] 후임 감독은 수석코치였던 이시마루 키요타카였는데, 처음에는 젊은 선수들 위주로 팀을 재편하려는 과정에서 김남일을 비롯한 베테랑 선수들과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후 베테랑들을 다시 중용하면서 서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14] 교체 선수까지 포함하면 현영민이 마지막이다. [15] 사족이지만, 월드컵 나이지리아 전이 끝난 후 김남일을 보며 말하는 허정무 감독과, 능청스럽게 웃는 김남일 선수가 함께 찍힌 사진도 있다. 의외로 코믹하게 찍힌 사진이라 신문사측이 그대로 실었다. [16] 출처. 상술됐듯, 김남일은 포워드와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다가 수비형 미드필더로 전환됐던 만큼, 공격의 기회를 보는 능력을 눈여겨 봤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뭉쳐야찬다 3기때 나온 얘기론, 훈련때 김남일이 골을 넣으면 그게 단독 기회라 해도 히딩크는 바로 훈련을 중단시키면서 철저하게 포지션을 지킬 수 있도록 지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7] 이 때 김남일이 부상을 입힌 선수가 지네딘 지단으로 당시 유행했던 김남일/어록에서도 언급된다. 물론 우스갯소리. [18] 추가로 이 경기에서 지단이 부상을 입은 프랑스는 세네갈 쇼크를 비롯해 1무 2패에 무득점 굴욕을 당하며 디팬딩 챔피언의 위상을 잃어버렸다. [19] 히딩크호/이탈리아전 참고 [20] 공과 상관없이 발목을 스터드로 찍어버렸다. 퇴장감인 반칙을 하고도 경고조차 받지 않았는데, 아직도 이 경기가 편파판정이었다고 주장하는 스페인 사람들과 국까들은 이 판정은 지 입맛대로 쏙 빼놓고 언급하지 않는다. 히딩크호/스페인전 문서 참조 [21]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영표가 무슨 수비형 미드필더를 보냐고 반문하겠지만 당시 히딩크 감독은 이영표와 이을용이 함께 뛸 경우 이영표를 중앙에, 이을용을 측면에 기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22] 페널티 박스에서 반칙을 범해 PK를 내줘 선제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후 기성용의 동점골로 경기는 간신히 1-1 무승부로 끝났다. [23] 이 결정은 신의 한 수인 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한가? 캡틴 박 체제 이후로 허정무호는 경기력에서 반전을 일으키며 완전히 달라졌고, 이후 최종예선에서 무패로 남아공 월드컵 본선에 안정적으로 직행했다. [24] 김남일이 없는 1년간 본래 자리인 수비형 미드필더는 활동량이 풍부한 김정우가 완전히 주전 자리를 꿰찼고, 기성용은 빌드업 때문에 절대 뺄 수가 없는 핵심 자원이어서 김남일이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기에는 무리였다. 본인도 다시 대표팀으로 돌아온 이후로는 주전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는 모양이다. [25] 만약 후반 20분 경에 야쿠부 아이예그베니가 결정적인 찬스를 날려먹지 않고 그대로 득점을 한 상태에서 후반 22분에 나온 PK까지 성공시켰다면 대한민국은 나이지리아와 똑같이 승점 3점으로 조별리그를 마무리 했다. 문제는 대한민국이 아르헨티나에게 1:4 대패를 당했기때문에 아르헨티나와 1점 차이로 석패한 나이지리아에게 득실 차에 밀려 조별리그를 탈락할 뻔했다. [26] 다행히도 비긴 상태로 16강에 올라가서 망정이지, 나이지리아가 한골을 더 추가해서 패배했다면 그야말로 희대의 역적이 되었을 것이다. 이기고 있었고 경기흐름도 우리나라가 쥐고 있었던 터라 점수차만 잘 유지했어도 이길만한 경기였는데 본인이 다 된밥에 재 뿌리는 짓을 한지라, 거기서 졌다면 본인이 가장 큰 원인제공을 한것이기 때문에 우루과이전의 이동국은 비교도 안 될정도로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비긴채로 경기가 끝난게 김남일 본인에겐 천운이었던 셈. [27] 여담으로 이 경기에서의 김남일도, 우루과이에서 빅찬스를 날려먹은 이동국도 후반부 용병으로 교체투입 돼서 실수를 범한 지라, 월드컵 성적에 관계없이 허정무감독의 용병술은 큰 비난을 받았다. [28] 김남일은 브라질 월드컵에 KBS 해설로 참여했다. 당시 전북에서 부상으로 회복 중이었기에 팀에서 특별히 허가해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톡톡 튀는 발언으로 유명한 것에 비해 언변 자체는 이영표에 비하면 말끔하고 수려하지는 않아서 메인으로는 쓰지 않았다. [29] 만약 99경기였다면 친선경기의 가비지 타임에 한 번 교체로 나와서 100경기를 채울 수도 있었겠으나 98경기인 이상 좀 무리였다. [30] 다만 해외 리그에서의 아쉬운 활약에는 팀의 상황이나 전술적인 면도 고려할 필요는 있다. 클래스를 떠나 스타일만 보면 젠나로 가투소 역시 김남일과 흡사하게 가끔 옆자리 피를로 빙의한 듯 대단한 패스를 보여주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투박하고 수비적인 역할에 강점이 있던 선수였다. 밀란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클래스적으로나 실력적으로나 그렇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안첼로티의 전술과 피를로 옆자리에서의 역할 등이 맞물려 AC밀란에서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페예노르트로 잠시 임대갔던 시기를 돌이켜보면 전술적으로는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로 나쁘지 않았으나 그 옆에서 빌드업을 도맡아 해줄 선수도 똑같이 수비적인 롤로 채우다보니 자연스레 국내나 국대에서와 달리 김남일 본인이 패스를 직접 담당 및 역습에서 해야할 역할이 늘어났다. 그러나 그런면에서의 강점은 그리 강하지 않은 선수였고 임대라는 한계 등이 겹쳐 해외 경험은 짧게 끝날 수 밖에 없었다. 김남일이라는 선수의 플레이 스타일적 차이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해외로의 진출이 많지 않았던 2000년대 초기라는 점 등이 겹쳤다는 것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