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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대한민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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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조선 개항기1.2. 일제강점기1.3. 해방 이후
1.3.1. 정부 수립 전후1.3.2. 민주화 과정에서의 개신교1.3.3. 근대화 과정에서의 개신교
1.4. 21세기
1.4.1. 이미지 추락1.4.2. 2022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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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개신교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

1.1. 조선 개항기

개신교의 한반도 유입은 서학( 가톨릭)의 전래보다 200년 이상 상당히 뒤늦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16세기부터 예수회의 주도로 동양을 비롯한 해외 선교에 적극적이었지만 개신교가 주류인 영국, 네덜란드, 독일, 미국 등의 북방국가들은 18세기까지 국외 선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이후, 영미를 주축으로 장로회, 감리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방문하기 시작하는데 루터교회 성공회가 주류인 유럽의 개신교 구성과 달리[1] 한국 개신교 교단은 장로회 감리회가 주류가 되었다.

1832년 유대계 독일인 루터교 목사 칼 귀츨라프는 기록이 남아있는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이다. 칼 귀츨라프는 중국에서 선교활동 중에 조선의 소식을 듣고 다른 지원 없이 '혼자' 개인자격으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1000t급 로드 암허스트호에 의사 겸 통역사로 승선하였다. 그 후 황해도와 군산만을 돌아서 1832년 7월 25일, 충청도 고대도 부근에 도착하였다. 비록 수십여 일 밖에 머무르지 않았지만 서양 감자 파종법과 포도 재배를 조선인들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짧은 기간동안 칼 귀츨라프 선교사는 직접 한글을 배워서 귀환 후에는 중국 선교 잡지에 발표하여 독일과 영어권에 조선을 소개하였고 자신이 독자적으로 주기도문을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조선에선 25일을 머문 끝에 지방관과 필담을 나눴지만 책봉국인 중국의 허락없이는 통상을 금한다는 국왕과 조정의 뜻에 따라 조선을 떠나게 된다. 칼 귀츨라프는 해당 교단과 선교회의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고, 선교 중 필요한 비용은 자비로 지출하였으며, 더불어 외부 지원도 없고 조선의 협조 또한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개신교계에서는 영국인 개신교 목사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를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로 보고있다.[2] 토마스는 중국에서 조선인 가톨릭 신자들을 만난 것을 계기로 하여, 1865년 조선에 입국하여 성경을 배포하며 몇달 간 선교 활동을 하였다가 배가 파손되어서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였다. 이듬해인 1866년 병인박해에 항의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향하는 프랑스 함선에 통역관으로 같이 오기로 되어있었으나,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선은 때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상해를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토마스는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다시 조선으로 떠났다. 자세한 내용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참고하길 바란다.

한국 최초의 교회는 1883년 5월 16일 서상륜[3]과 서경조가 황해도에 설립한 소래교회이다.( 출처1, 출처2) 즉 최초의 교회는 조선인 스스로에 의해 세워졌다. 이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믿기 시작하면서 개신교가 조선에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개항기에 이르러 많은 북방국가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면서 대한민국, 조선의 개신교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아펜젤러 언더우드, 호러스 뉴턴 알렌, 스크랜튼, 유진 벨[4]과 같은 선교사들은 배우지 못한 조선인들의 교육 및 계몽을 위하여 삶을 헌신하였다. 이들은 지금의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5], 최초의 서양식 사립학교 배재학당, 숭실학교 등의 근대 학교들을 설립했다. 또한 여성교육에도 뜻을 두어, 여성 선교사인 스크랜튼는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을 설립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배화학당, 숭의여학교, 정신여학교, 삼일소학당 등의 여학교도 설립했다. 연세대학교 설립자로 알려진 언더우드 선교사는 개신교 최초의 조직교회 새문안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 서울 각지에 승동교회, 정동교회 등의 개신교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렇게 개신교가 급격히 확장된 이유는 양반 계층 입장에서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최단 루트가 개신교 선교사를 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고, 오랫동안 소외받았던 일반 민중 및 하층계급 입장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이념이 담긴 기독교 정신과 민주주의적 사상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특히나 평양은 조선 초기 이시애의 군사반란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권력에서 밀려난 비주류 세력이 이루던 북방 지방이었고 양반에 비해서 유교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웠던 상인세력들이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 교세가 빠르게 확장될 수 있었다. 이 덕분에,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조선 개신교의 산실이었다. 안타깝게도 6.25 전쟁 직후 독재자의 가혹한 탄압 탓에 이북 지역의 기독교 전통은 씨가 말라버렸다.

사실 선교 초기부터 주류 양반 계층은 제사를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로 문제 삼는 것 때문에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부정적으로 보았다. 기독교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여겼기에 조선인들은 기독교를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無父無君)' 사학(邪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항 이후 선교 제한이 풀리면서 조선 조정에서도 역시 서양인들을 견제했고, 이 때문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수탈이 심한 지역에 들어가 백성들 대신 지방관들에게 대들어서[6] 지방관들이 전전긍긍했다.[7] 민중들이 개신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포교 과정에서 서양 신문물을 선물하며 선교했기에, 신문물에 거부감이 없는 상인 계층들에게서 환영 받았고, 이전의 천주교처럼 여성들도 신자의 대다수가 되었다.

사실 제사 문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독교 교리들은 성리학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 유림들 입장에서도 거부감이 없었고[8] 그래서 나온 표현이 다름아닌 위군위민(爲君爲民)의 종교. 특히 1907년 평양 대부흥을 기점으로 1907년 경에는 천주교와 신자 수가 역전하게 된다.

한국 개신교의 특징 중 하나인 , 담배를 자제할 것을 권하는 풍습도 이 때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는 불교도 마찬가지라[9] 거부감이 없었다. 특히 성리학의 경우는 원래 , 담배 등을 금지하기 때문에 닮은 점이 많다.
본래 선교사들의 주류 교단인 장로회, 감리회부터가 음주 및 흡연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고,[10] 선교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생활 개선의 일환으로 교육 및 의료 사업 등과 함께 금주, 금연 운동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천주교 근본주의자들은 왕조에 야합한 개신교 선교사들을 문제삼았다. 개신교를 유대교와 야합한 종교라고 비난했듯이 이번에는 유교와 야합한 세속주의적 종교라며 비난했다.더욱이 우리가 실컷 고생하며 개척했는데 낼름 다 먹었다고 비판했다.[11]

사실 천주교는 왕조에 대해 그렇게 저항하는 입장이 아니었고, 교리적 특성만 놓고 보면 오히려 개신교 측이 더 저항해야 옳았겠지만 뭔가 입장이 바뀌어 버린 이유는 황사영 백서 사건 몇십 년 뒤 상황이 반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즉 개신교가 위국위민 종교가 될 시점에 천주교는 나폴레옹 때처럼 근대주의 및 산업혁명과 동시에 다투는 종교가 되고 있었기 때문.

또한 상대적으로 뒤늦게 전파되기 시작한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괜히 왕조를 건드렸다가 라이베리아 같은 일이 터질까 봐 왕조를 상대로 크게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다.

1.2. 일제강점기

일제 시대 신자수는 전체 인구의 1%에 불구했으나 3.1운동을 비롯한 항일 민족 운동에서 많은 족적을 남겼다. 민족 지도자 상당수가 개신교와 선교사의 영향으로 근대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때 개신교에 대해서 나빠진 사회적 인식과 맞물려서 반개신교 진영의 "종교 중에서 개신교가 친일에 가장 앞장선 종교다!"는 왜곡과 선동이 인터넷 상에서 널리 퍼트려졌고 실제로도 친일 활동을 했던 개신교인들도 있긴 했으나, 독립운동가나, 항일을 하던 개신교인도 당연히 많았다.[12] 실제로 교단 차원에서 친일에 앞장선 가톨릭 교회의 이미지를 뒤집어 쓴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 가톨릭은 교단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친일 행각을 벌였다. 105인 사건 같은 굵직한 사건을 일으켰으며 안중근 같은 독립운동가 평신도는 철저하게 박해받았다. 덕분에 독립운동가로 인정받는 성직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아이너리하게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숫자는 적은데, 그건 교단 전체가 친일행위를 했기 때문에 친일로 특출난 인물이 적기 때문이다. #

오히려 개신교에서는 자신들이 독립운동의 한 축이었다면서 항일 민족운동의 역사를 굉장히 자랑스러워한다. 일사각오로 유명했던,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신사참배에 대항했던 목사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고신 교단이 그 예이다. 또한,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6명[13]이 개신교 신자였고, 서울대교구 밀고[14]에 의해 체포된 신민회의 독립운동가 105명 중 92명도 개신교 신자였다. 이런 부분에서 반개신교 진영의 역사왜곡과 전횡이 심해서 역풍을 맞는 사례도 보인다.

결국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던 개신교인은 광복 후에 쫒겨났거나 개신교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기에 후술할 신사참배 문제가 유야무야되기도 했다. 그래도 신사참배는 강압적으로 한 것에 유림 불교 천주교등 타종교나 신앙이 없는 조선인들은 거의 반발없이 모두 받아들였고 오로지 유일신 신앙의 개신교에서만 반발했기 때문에 책임 회피의 여지라도 있지만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던 개신교인들이 욕받이가 되기도 했고.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좌우 대립으로 묻혀진게 크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 개신교의 중요 사건은 저항과 파괴로 볼 수 있다.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받아들인 개신교가 민족 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을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세우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유관순, 안창호와 같은 독립운동가들과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해냈으나, 일제강점기 말기로 갈수록 극심한 탄압을 거치며 많은 수의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인들이 변절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 한국의 개신교는 인터넷상 반 개신교 성향에서 극딜하듯 친일에 적극 나선 것이 아니다.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하여 타종교, 비종교인과 오십보 백보 또는 도긴개긴. 같은 비판과 내부적 반성은 타당하다 할지라도, 아무 근거없이 '개독이 친일에 앞장섰다.'라고 단정짓는 것은 엄연히 역사 왜곡이다. 독립운동을 이끈 교회를 이어받은 신학교나 교회를 주축으로 하는 친일 연구가 현재에도 활발하다. 재밌는 것은, 개신교 학계는 물론 반개신교 성향의 일반인들도 이 자료들을 자주 사용한다는 점이댜.

단적인 예로 일제강점기 내내 가장 극심한 탄압을 받은 종교는 천도교와 더불어 개신교였고, 신사참배에 거부하여 2천 명의 신도들이 체포되고 200여 개의 교회가 강제폐쇄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50여 명의 신자가 순교했다.

개신교는 일제가 1919년 3.1운동까지 구한말 민족사학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개신교계 미션스쿨들을 통폐합시켜왔기에, 서양학문을 토대로 민권 사상등을 가르치는 통로로 여겨왔고 이는 해방까지 계속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중에 16인이 개신교측 인사였는데 이 당시 개신교의 교세는 전체 인구의 1.1~1.3%에 불과했다. 당연히 일제는 개신교를 통치에 방해되는 집단으로 여겼고, 지속적인 감시 대상이었다. 한편 식민지 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도 개신교인을 비롯한 기독교인은 노동조합 참가자, 사회주의자들과 더불어 특별고등경찰[15]의 주 감시 대상이었는데 기독교의 교리상 국가 국가신토 천황 숭배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3.1 운동의 경우처럼 제암리 교회 학살이 전세계에 널리 퍼진것도 한국교회의 희생과 선교사의 덕이었고, 3.1 운동 과정 기독교인 체포자는 전체의 17.6%인 3천여명에 달했었다. 특히 유관순을 비롯한 여성 체포자는 470여명중 309명이 개신교도였다.

일제 강점기에 개신교는 구한말 신문물과 새로운 사상의 유입을 가져왔고 이는 민족의식을 가진 지도자들을 대거 배출하면서 반일의 집결지가 되었다. 1911년 105인 사건의 경우 개신교인이 92명이었고, 사실상 일본은 개신교단을 탄압대상으로 삼았다. 구한말 개신교 인사중 대표적인 인사들은 독립운동가중 상당비율을 차지하는데 이승훈, 양기탁, 이회영- 이시영 형제, 조만식, 여운형, 전덕기, 유동열, 이동휘, 이동녕, 강우규 전도사, 이재명, 김상옥, 김마리아, 유관순, 안창호, 김구, 김규식, 반민특위의 창설자 김상덕등의 인물들은 개신교인이었다. 이는 '개신교의 대표적 인물은 이승만만 있고 나머지는 친일파다.'라는 선동과는 정반대다. 독립운동사 인물들 가운데 개신교 인사들도 민족 해방에 앞장섰다.
 신사참배거부운동(神社參拜拒否運動)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주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신앙수호를 위한 항일운동.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사참배거부운동(神社參拜拒否運動)
한국 개신교의 일제강점기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신사참배 문제이다. 반개신교 성향의 비난이 신사참배를 개신교에서 결의하여 친일에 앞장선 걸로 호도하지만 다른종교는 그다지 저항이란것도 없었고 개신교 조직들이 저항하다 일부는 저항하고 나머지는 굴복한 것이지 앞장서서 나섰다는것은 전형적인 가짜뉴스에 역사왜곡이다.

불교의 경우 딱히 신사참배를 막을 만한 교리가 없었고, 일제 불교의 침투로 교단이 조직은 일본 승려에 장악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특유의 신불습합 문화가 그대로 조선에까지 유입되었고, 천주교는 1936년 신사참배를 승인했는데 일본의 천주교와 교황청에서 세속권력과 지시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유림의 경우 충군애국은 본분이기 때문에 당연히 막을 명분도 없다고 손을 놨으며 대부분의 무종교인들 역시 창씨개명과 마찬가지로 진학 취업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가족들의 안위 때문에 수동적으로 따라갔다.

개신교는 1930년대 초반부터 일관되게 교리에 따라 신사참배를 거부했으며 이러한 종교는 개신교 뿐이다. 당시 조선인구의 1%대의 개신교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자가 나온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당시 이 문제에 유일하게 저항한 종교는 역시 개신교였으며, 신사참배의 경우, 1938년 4월을 기점으로 강압으로 일부 교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교단 차원에서 결국 신사참배를 결의하기로 했다으나 이는 신도들 다수의 의견이 아니다.

그 여파로 해외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강한 교단 내에선 신사참배에 대해 극심하게 의견이 갈리고 권력에 맛본 어용목사들이 하나 둘씩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면서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이 자발적으로 폐쇄하여 불복종하거나, 용인하여 존속하는 결정을 따랐다. 이에 반발한 사람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다. 아예 박헌영처럼 유물론을 받아들여 반기독교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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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결의한 직후, 평양신사를 참배하는 장로회 총회 임원들 모습. 1938년 9월 12일 자 <조선일보> 사진.

이하는 개신교 진보 언론 뉴스앤조이에서 개신교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위해 쓴 칼럼(이종록 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에서 인용된 내용의 일부를 재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소위 "개신교인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야 하는 성경적 이유".
북미합중국의 워싱턴 동상이 있는데 합중국 국민으로는 그 동상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고, 합중국 국기에 합중국 국민으로 누구나 다 경의를 표합니다. 합중국은 기독교국이니만치 기독교인이 대다수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다 우상숭배자로 간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일본 황국신민만이 국조숭모(國祖崇慕)하는 의식에 기독교인이 어찌 참례할 수 없으며 황국(皇國)을 대표한 일본 국기에 경의를 표함이 어찌 기독교인에게 죄가 되겠습니까. 전화위복(轉禍爲福)하는 자 있으나 기독교인은 그러한 의미에서 참배함은 절대로 아니요 국가 의식에 국민의 의무로서 참례(參禮)함이 당연한 줄로 각오(覺悟)하고 시인(是認)한즉 양심이 평안하고 충군애국지심(忠君愛國之心)이 날이 감을 따라 두터워집니다. 사신우상(邪神偶像)은 금수 곤충 어별(魚瞥)의 형상으로 된 것인데 어찌 우리의 조상이 그 우상과 동류(同類)가 될 수 있으랴? 그런즉 신사참배하는 일을 우상숭배라고 한다면 이(此)는 불경죄(不敬罪)에 가깝다고 말하여 둡니다.
《청년》 9, 10호, 1939년 2~3월호. 김승태,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p.410
기독교의 설립자라고 칭할 만한 사도 바울은 자기가 로마 제국의 공민(公民)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반도인들은 일본 제국의 신민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것이 반도인의 유일한 활로입니다. 반도인들은 이 기회에 죽은 과거를 청산하고 산 장래를 위하여 활동하여야 되겠습니다. 선각자가 된 기독교도들은 민중에게 이 활로를 지시할 책임이 있습니다.
《청년》 9, 10호, 1939년 2~3월호. 김승태,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p.432
여기에 일본 측 개신교에서도 당연히 거들고 나섰다.
조선 전도부의 어용적 성격은 1919년 3․1독립운동에 대한 반응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났다. 3․1독립운동을 목격한 와타세는 즉각적으로 '조선 소요 사건과 그 선후책'을 《新人》 4월 호에 기고해, 3․1운동에 참가한 조선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정신이 농후하고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이 없는 유대교도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즉 만일 기독교인들이 산상수훈의 정신을 안다면 그들은 그런 식으로 반행해서는 안 될 것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형제로서 더 포용적으로 내선일체를 대성하는 정신'에 근거하여 행동했어야만 했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건전한 신앙을 근거로 해 건전한 사상'을 배양함으로써 유다주의를 극복하고 '양 민족의 새로운 영적 일치'를 달성하기 위한 조합교회의 조선 전도의 의의를 더욱 강조하였다.
《한국 기독교와 역사》 제5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양현혜, 〈일본 기독교의 조선 전도〉 p.195~196
그러나 위의 문제들은 어디까지나 교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가결했을지는 몰라도 개개인이 모두 신사참배를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당시 신사참배를 했던 목사들이나 교인들 중에서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뉘우친 사람들도 많다. 특히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수많은 유명 목사들이 당시 신사참배한 사실을 공석에서 밝히고 용서를 비는 것이 유행했다.

김재준을 위시하여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인 장로회의 일부 세력들과 조합교회(組合敎會)[16]는 이 당시 친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섰고, 조합교회는 해방 이후 완전히 퇴출되어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현대에도 진보 / 에큐메니컬 교단이 가장 까이는 큰 이유가 바로 신사참배를 가벼이 여겼다는 점이다.( 뉴스앤조이 기사) 참고로 신사참배를 최초로 한 학교는 조선신학교로써, 현재의 한신대학교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을 맺자면 개신교계에선 적지 않은 개신교 신자와 교회가 신사참배 굴복한 문제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당시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고 있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을 기리나 그런 순교자들과 애국자들이 있다하여 타종교와 신사참배를 순응한 당시 식민지 치하의 동포들에게 우월감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많은 변절과 교단적으로 하나님을 배도한 것의 큰 죄를 지은 것은 기독교인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계 과거 반성을 위해 나온 자료들을 반기독교계에서 적극 이용하며 마치 친일종교로 몰아가는것은 씁쓸해한다. 기독교계를 제외하면 국내에서 신사참배에 거부한 것은 불교 교단의 결정과 달리[17] 타종교와[18] 일반 대중들은 당사자들의 투옥은 물론 가족들의 배급, 진학, 직장생활 등을 포기하는 불이익 때문에 그런 시도조차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 문제는 두말할 것 없이 구한말 전래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대한민국 개신교계의 최대의 사건이라고 라고 할 수 있다. 주기철, 이기동, 한상동, 이원영, 손양원등 일부 목사만 거부했고 나머지는 적극적 친일에 나선 과거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주사변 이후부터 전체주의 교육을 강화하며 개신교계 사학들과 갈등을 빚었던 일본 정부는 위에 언급한 대로 상당히 적극적으로 신사참배를 유도했으며, 조선신학교나 숭실학당처럼 신사참배를 따를 수 없는 학교들은 일찌감치 자진 폐교 수순을 밟고 떨어져 나갔다.

결과적으로 친일적 행태를 띄는 교단과 목사들이 살아남아 한국 기독교계의 주요 권력층이 되자 눈치를 보고 있던 중간층들도 자연스레 신사참배에 찬성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반대하는 무리들은 모진 고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신사참배에 거부한 2천명의 신도들이 체포되고 200여 개의 교회가 강제 폐쇄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50여 명의 신자가 일제의 고문으로 순교했는데, 이들은 당시 한국 기독교 세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처음엔 1932년 1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신사참배 사건이 일어났다. 남장로회에서 경영하던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가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에 참가하지 않거나 참가하더라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 도 당국의 엄중 문책을 받았다. 수피아여학교는 배유지(Dr. Eugene Bell)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인데 그가 설립했던 향사리 교회[19] 이 때문에 후일 폐쇄되었다가 해방 이후 복구된다. 한눈에 보는 서현 100년사

그다음 해 9월에는 평양 숭실학교를 비롯한 10여개의 개신교 학교가 평안남도 도지사의 통첩을 무시하고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아 해당 학교가 시말서를 쓰게 되었다. 1933년 9월 18일 함경남도 원산에서도 캐나다장로회 소속 진성여자보통학교가 만주사변 2주년 기념일에 거행된 순난자(殉難者) 위령제에 참석을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다. 이렇게 개신교계 학교에 신사참배가 문제가 된 것은 대륙침략을 계기로 조선총독부가 정신교화 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신사참배 문제가 크게 확대되는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1935년 11월 14일 평양 기독교계 학교의 교장들이 평안남도 지사의 지시에 불복하고 평양신사에 참배하지 않은 사건이다. 식민지 관료로 대만총독부 문교국장을 역임한 바 있는 평남지사 야스타께(安武直夫)는 기독교계 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없었다. 그는 먼저 기독교계 학교 교장들을 굴복시키려 했다. 이해 11월에 들어서서 그는 이 지역 공사립 초등학교장 및 중등학교장 회의를 잇달아 소집하여 회의가 끝나는 날 평양신사에 참배토록 했다.

그러나 기독교인 학교장들은 신사에 참배하지 않았다. 그러자 14일에 개최한 중등학교장 회의에서는 야스타께 지사가 회의 전에 평양신사에 참배한 후 회의를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자 숭실학교장 매큔(G.S.McCune, 尹山溫)과 숭의여학교장 대리 정익성(鄭益成), 순안 의명학교 교장 리(H.M.Lee, 李希滿)는 "기독교의 교리상 따를 수 없다."라고 거부했다. 그러자 평남도 당국과 총독부는 기독교계 학교에 대해 설득, 경고하면서 금후 교장 자신의 신사참배 의향 여부와 학생들의 신사참배 의향 여부를 서면으로 회답하도록 요구했다. 이런 요구의 배후에는 교장의 파면과 강제 폐교의 강경방침이 있었다. 그 결과 매큔에게는 1936년 1월 숭실학교장 및 숭실전문학교장직 인가가 취소되고, 스눅도 1월 22일 숭의여학교장 대리인가를 취소당했다. 이후 총독부는 2월 21일자로 학무국장이 각 도지사를 통해 기독교 각 교파 포교관리자 및 대표자에게 ‘신사와 종교에 관한 건’이라는 통첩을 보내, 신사의 봉사는 종교가 아니며 신사참배는 국민교육상 필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서 막나가는 일제의 강압에 맞서 외국 선교회 계열의 사학에선 여러 논의와 대응이 나왔는데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는 1936년 11월 전주에서 개최된 남장로회 선교사 연례회의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한다면 교육사업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음을 결의했다. 그들은 선교본부에 연락, 해외선교부 총무 풀턴(C.D.Fulton)의 내한을 요청했다. 풀턴은 일본에서 출생한 2세 선교사로서 신도가 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37년 2월에 내한하여, 신사참배를 시키기보다는 학교를 폐쇄할 것을 허락하는 13개항의 소위 ‘풀턴 성명’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이 해 9월에 남장로회 학교들의 폐교 신청이 잇달았는데, 광주 수피아여학교 숭일학교, 목포의 정명학교와 영흥학교가 1937년 9월 6일에, 전주의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군산의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가 각각 9월 8일에, 순천의 매산학교와 매산여학교는 9월 21일에 각각 폐교를 신청했다.

호주 장로회 선교부는 1936년 2월 7일 총무 맥라렌(Ch.I.McLaren, 馬羅連)의 주재 아래 회의를 열고, 산하의 기독교 학교가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결의했다. 그 뒤 선교본부는 교육 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학교를 계속 경영하기를 원했고 또 일본 당국과의 관계개선을 원하여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또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그들은 그 이듬해 1월 특별위원회를 소집, 신사참배와는 관계를 끊되 학교를 유지하려는 모든 노력은 그래도 경주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절충적인 노력은 한계를 드러내고 그해 대부분의 선교부 소속 학교를 폐쇄시켰고 동래 일신여학교는 1940년에 폐교되었다.

캐나다 선교부는 1930년대 초에는 학교의 문을 닫더라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38년에 이르러, 신사에서의 행사는 애국적인 것이요 종교와 관련이 없는 것이라는 총독부 당국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 의식들에 참가하고 학교를 계속 경영하기로 했다. 캐나다 선교부 산하의 기독교 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문을 닫아야 하는 일은 없었다. 1898년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캐나다 장로교회는 다른 세 교단보다는 신학적 입장이 자유로웠던데다 1925년 감리교회·회중교회와 연합하여 캐나다연합교회로 개편된 후 한국에 들어온 다른 세 장로교단과는 달리 신사참배 문제를 타협적으로 처리했다. 선교학교 문제의 타협적 처리는 감리회 선교부도 마찬가지다.

1938년 2월 총독부 경무국은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마련하고 기독교계 기관들에 대해 변질과 개편을 강요하는 한편 기독교 연합기관을 해산시키거나 국제기구와 연결된 기관들에게는 국제기구에서 탈퇴하도록 종용하며 일본 안에 있는 동일 계열의 기구와 통폐합해 나갔다. YMCA와 YWCA, 조선주일학교연합회, 감리회의 청년회인 엡웟회 등 그 대상들을 점차 확대시켜 갔다. 한편 1937년 6월부터 1938년 3월에 걸쳐 일제가 안창호 계열에 대한 탄압을 가하여 수양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180여 명의 지식인들을 검거했다. 이어서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더욱 조성하기 위해 1938년에는 이승만계에 대해 흥업구락부 사건을 일으켜 관련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이는 조선의 기독교 지식인 세력을 외세로부터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기독교회 외곽에 대한 이같은 강압책으로 장로교회를 집중 공격하던 일제는 1938년에 들어 각 노회별로 신사참배를 유도, 강제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친일목사로 돌변한 이승길(李承吉), 김일선(金一善) 등을 내세워 개별적으로 신사참배에 찬성하도록 설득했다. 2월 9일 조선에서 가장 교세가 강한 평북노회가 일제에 굴복, 신사는 국가의식이라 하여 신사참배를 사실상 결의했다. 뒤이어 2-3월 중에 총회 산하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예배당에서 제 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총회 전에 일본 제국 경찰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등 신사참배 반대 지도자들을 사전 구금했을 뿐아니라 선교사들과 총대들에게는 사전에 신사참배 결의를 방해하지 않도록 엄중히 경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이튿날 속회, 신사참배를 불법적으로 가결시켰다. 당시 결의를 지켜봤던 김양선의 구술이다.
“다음날 오전 9시 30분 총회가 재개되었을 때에 교회당 내외에는 수백명의 사복경관으로 완전 포위되었고 강대 아래 전면에는 평남 경찰부장을 위시하여 고위 경관 수십명이 긴 검을 번쩍이면서 기라성같이 자리를 잡고 앉았고 총대들의 좌우에는 그 지방 경찰관 2명씩이 끼어 앉았고 실내 후면과 좌우에는 무술경관 100여명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었다. 그 살벌한 분위기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다.
주기철 목사, 이기선 목사, 김선두 목사등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하는 유력한 교회 지도자들은 사전에 모두 구금되었고 저들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끌려온 27노회(만주 4노회 포함) 대표 목사 88명,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합계 206명이 넋을 잃고 앉아 있을 때에 10시 50분 이미 조작된 각본대로 평양·평서·안주 3노회 연합대표 평양노회장 박응률 목사의 신사참배의 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긴급제안이 있었고 박임현 목사와 길인섭 목사의 동의와 재청이 있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전신을 떨면서 ‘이 안건이 가하면 예라고 대답하십시오’라고 물었다. 이때에 제안자와 동의·재청자의 10명 미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예’라고 대답했고 그들 외의 전원은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은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표시하는 것으로밖에 보여지지 않았으므로 수백 경관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일대 위협을 표시했다.
당황한 총회장은 ‘부’를 묻지 않고 그냥 만장일치의 가결을 선언하였다. 이때에 이런 사태가 있을 것을 예상한 선교회는 약속해 두었던대로 방위량 선교사를 선두로 2,3명의 선교사들이 회장의 불법선포에 항의하는 한편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주장하려고 했으나 경찰관의 강력한 제지로 발언이 막히자 선교사 30명 전원은 차례로 기립하여 ‘불법이오’‘항의합니다’라고 외쳤다. 봉천노회 소속 헌트(B.F.Hunt, 韓富善)선교사는 무술경관의 제지를 뿌리치고 불법에 대한 항의를 외치다가 그들에게 붙들려 옥외로 축출당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소란 속에 총회 서기는 성명서를 낭독하였고 평양 기독교 친목회 회원 심익현 목사는 총회원 신사참배 즉시 실행을 특청하였다. 동일 12시에 부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내로 전국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신사에 참배함으로써 장로교회마저 그들의 불법 강요에 굴하고 말았다.”
장로회 총회에서 이처럼 결정이 내려졌으나 이 날 선교사들은 따로 모여 총회에 항의서를 제출하는 등 몇 차례에 걸쳐 항의했으나 일본 제국 경찰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재 연구로는 서울쪽에선 신사참배에 순응적이었고 오히려 평양지역이 신사참배에 더 반대했으며 선교사들조차 선교회, 교단, 신학교 내부에서도 서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한때 카더라로 알려진 박형룡 신사참배 용인설은 현재 연구론 조선 신학교 폐교전 박형룡등이 만주로 망명한 것으로 나와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감리교회도 신사참배에 순응하게 되었다. 미 감리회 선교부가, 이 참배는 애국적인 것이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정부의 행사라는 일본 정부의 선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자 거의 때를 같이하여 한국 감리회 또한 신사참배를 수용하게 되었다. 1936년 양주삼 총리사는 4월 10일자 「감리회보」에‘신사문제에 대한 통첩’을 게재하여 감리교회가 신사참배를 문제삼지 않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 뒤 1938년 9월 3일에도 양주삼 총리사는 통고문을 내어 교단 안의 여론을 잠재우는 데에 부심했다.
"신사참배는 국민이 당연히 통행할 국가 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라고 한 것을 인식하셨을 줄 압니다. 그런고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든지 신사참배가 교리에 위반이나 신앙에 구애됨이 없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감리회 지도부의 이같은 행태가 교계 전체의 공감을 얻은 것은 아니다. 감리교인들 가운데서도 교단의 정책과는 달리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고난을 겪은 이들이 없지 않다. 이 밖의 여러 교단들도 제대로 항거하지 못하고 순응하는가 하면 교단자체가 해산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교단 지도부의 이같은 훼절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에 불응하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이들이 나왔던 것이다.

침례회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1944년 교단이 강제해산을 당한다. 성결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결국 교단을 자진해산했다. 그런데 교단 인사 중에 황국신민선서 대동아전쟁의 승전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고 창씨개명을 한 인물들이 다수 있긴 하다.

이후 전개로는 이런 상황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나게 된다. 신사참배가 ‘가결’되고 난 뒤에 장로교단 안에서는 개인적인 혹은 합법적인 차원에서 이에 저항하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막아보려는 시도들이 없지 않았다. 평양신학교 학생 장홍련이 평양노회장 김일선의 기념식수를 벌목한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신학생들이 신사불참배 운동을 확산시키려다가 결국 학생 다수와 박형룡, 김인준 교수가 검속된 사건이 있다.

김선두(金善斗) 목사와 박관준(朴寬俊) 장로는 조선총독부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못하도록 일본 정계의 그리스도인들을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김선두 목사는 김두영, 윤필성, 박형룡 등을 대동, 1938년 8월 24일 동경에 도착, 박영출의 안내로 일본 정우회 부회장 외무부장 중의원 의원 마츠야마(松山常次郞) 장로와 군부의 원로 히비키(日疋信亮) 장군(장로) 등을 방문, 한국 교회의 수난상을 진정했다. 그 결과 이를 들은 이들이 동 9월에 조선에 와서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을 만나게 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1939년 1월 안이숙, 박영창을 대동하고 도일하여, 일본 제국의회 회의장에 들어가 진정서를 투척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일본 제국 경찰의 집요한 방해와 일제 신사참배 강요 정책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들 개인적인 차원의 합법적 저항과는 달리 반대투쟁을 조직화하여 ‘거부항쟁’의 단계로 이끈 이들도 있었다. 개인적이든 조직적이든, 저항자들 중에는 수감, 투옥되는 것은 물론이고 순교에까지 이른 이도 있었다.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고 거부자들의 결속을 강화하는 중심 인물로 국내에서는 평안남도 주기철(朱基徹), 평안북도의 이기선(李基宣), 경상남도의 한상동(韓尙東), 전라남도 손양원(孫良源) 등이 있었고, 만주지역에서는 박의흠(朴義欽)·김윤섭(金允燮)·헌트(B.F.Hunt, 韓富善) 등이 있었다.

신사참배 거부항쟁자들에 대해서 당국은 개별적으로 위협, 구금했던 때도 있었다. 1938년 장로회 총회를 앞두고 주기철·이기선·김선두 목사 등을 예비구금 형태로 검속한 것도 그 일례다. 당국은 이렇게 위협과 고문을 가해도 굴하지 않는 주동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영향력이 확산되지 않도록 했다. 이런 경우, 예비검속 형태로 구금하여 정식 재판에 넘기지 않고 고문하고 장기구금했다. 때문에 장기적인 구금으로 순교한 이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이 평양지방법원에서 취급했던 이른바 ‘예수교도의 신사불참배 교회 재건운동사건’이다.

이 사건의 관련자들은 “모두가 조선예수교 장로파 교역자 혹은 독실한 신자들로서 1939년 8월 이래 성서의 이른 바 말세론에 기초하여 머지 않아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된다고 하여 궁극적으로 우리 국체를 변혁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신사불참배 재건총회 조직 준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이를 확대 강화하기 위해 활동하고 또한 여러 가지 불온언사를 함부로 한다”고 했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1940년 9월 20일 새벽을 기하여 전국적으로 신사참배 거부항쟁자 193명을 검거했다. 평양지방 검사국은 1941년 5월 15일에 이기선 목사 등 68명을 송치하고 그 1년 후인 1942년 5월 12일에 그 중 35명을 기소, 예심을 청구하고, 8명은 기소 유예, 나머지 25명은 불기소처분했다. 예심 심리는 3년간이나 계속되어 그 동안 최봉석 목사, 주기철 목사, 최상림 목사, 박관준 장로 등 4명이 순교하여 평양지법 예심종결 결정에서 제외되었고, 이기선 목사 등 21명에 대해서는 1945년 5월 18일에야 예심종결 결정이 났다.

신사참배 거부를 위해 만주로 망명했음에도 일제는 동북삼성(만주)에서도 신사참배가 강요했고, 신사참배 반대투쟁이 있었다. 1936년 10월부터 만주 하얼빈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헌트(韓富善)은 1939년 봉천노회에서 제명된 후 계속 한국인들을 격려하며 항쟁하다가 1941년 10월 하르빈 경찰서에 수감되었고 1942년 6월 강제 추방되었다. 한편 하얼빈 경찰은 헌트를 중심으로 한 이들의 활동에 주목하다가 1940년 3월 19일 약 70여명을 체포, 1942년 2월 3일 재판에 넘겼고, 김윤섭·박의흠·안영애·김신복 등은 수감 중 혹은 풀려난 지 얼마 안되어 순교했다.

국내에서도 본격화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많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투옥되었다. 그들은 치안유지법, 보안법 혹은 불경죄를 적용하여 중형 처벌했다. 주기철을 비롯하여 이영한(李榮漢, 감리), 최태현(崔泰鉉, 안식), 전치규(全穉珪, 침례), 박봉진(朴鳳鎭, 성결), 손갑전(?) 등은 옥사했고, 남은 이들은 해방과 더불어 석방되었다. 오랜 동안 옥에서 시달린 결과 출옥 후에 곧 목숨을 거둔 이도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것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제가 해방 전후에 조선 내의 기독교인들을 살해할 목적으로 명단을 작성하는 단계였는데,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사족으로 일본 측 개신교라고 해서 모두 신사참배에 긍정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과 정반대로 세력이 미약한지라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한데 도키와 다카오키(常葉隆興)[20]를 필두로 한 몇몇 개혁교회 목회자들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요 죽음에 이르는 죄악"(偶像礼拝であり、神に対して死に値する罪であった)으로 규정하고 반성한 바가 있다.

1.3. 해방 이후

1.3.1. 정부 수립 전후

신사참배 거부 건으로 투옥되었다가 해방 직후 출옥하게 된 이른바 '출옥 성도' 계열 인물들이 교계 정화를 부르짖으며 기성 교단에 회개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로 인해 그 동안 은폐되어 왔던 트라우마가 해방과 거의 동시에 터질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특히 고신 교단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신사참배 반대 순수신앙파 장로교 교인과 목사들이 대표적이었는데, 신사참배 문제에 자유롭지 못한 교단들은 잘못을 인정하기 전까지 적극적으로 이들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신학교 교육 과정에서도 조직적으로 은폐 및 왜곡[21]하면서 스스로의 치부를 덮는 데 급급했다. 이 때문에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스스로 평가하는 것조차 '해방과 동시에 본격적인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논한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는 개독교 쪽을 참고.

해방 이후에 전래, 설립되었기에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워서 신사참배에 대해서 가르치는 교단들의 신학대학을 제외한다면, 고신대학교를 제외한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서 관련된 모든 교단의 신학교의 교회역사학에서 고신 교단에 대한 교육을 전혀 하지 않으며, 일선 교회에서도 고신 교단이 아닐 경우 관련 정보를 신도들에게 전혀 가르쳐 주지 않는 것으로 악명높다. 이러한 정보 은폐가 어찌나 심각한지 아예 자체적으로 자료를 정리하고 홍보하는 역사편찬위원회를 고신 쪽에서 따로 꾸려야 했을 정도다. 다만 고신 교단이 비 고신 교단에게 신사참배에 대한 문제를 너무 걸고 넘어져서 역풍을 맞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해방 이후에 설립된 교단들은 신사참배 관련 자료가 없어 연구가 미미한 편인데, 이들에게도 책임을 무리하게 적용시켜서 반발을 샀다.[22]

그러나 신사참배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유야무야 된 것은 북한 김일성 정권의 횡포 때문에 관심이 그 쪽으로 쏠려셔였다.[23] 해방이 되고 북한정권이 들어서면서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가 탄압을 받자, 믿음의 자유를 찾아서 평양에서 활동하였던 종교 관련 인사들이 대거 월남한 역사가 있다. 원래 개신교의 지역적 기반은 38선 이북 지역이었는데[24], 소련군 주둔과 공산정권 수립으로 오히려 일제보다 핍박이 훨씬 심해지자 참다못한 개신교인들이 대거 월남했다. 개신교의 최대 신학교인 총신대학교 장신대학교는 각각 전신이 평양장로회신학교, 평양신학교였다. 숭실대학교의 전신인 숭실학교도 원래 평양에 있었다.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정도로 개신교가 크게 부흥했던 지역들 중 하나였지만 북한의 우익 대학살을 거치면서 지금은 주체사상의 성지로 전락해 버렸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북한 정부가 개신교도들을 비롯한 모든 기독교도들에게 큰 핍박을 가했다. 당시에는 북한에서의 우익과 개신교도들의 교집합이 많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북한이 6.25전쟁을 거치면서 개신교도들에게 크게 대학살을 진행하였다. 현재도 개신교도들을 적대계층으로 분류하고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무조건 정치범수용소로 끌고 가는 등 개신교에 대한 매우 강도 높은 핍박을 진행하며, 이 때문에 외국의 개신교인들이 이를 문제 삼아서 진상조사에 나설 정도이다. 그렇기에 한국 개신교들의 북한에 대한 적대감은 유대인들이 나치에 대해 적대감을 보이는 정도와 비슷하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 이 시기의 일을 물어보면 정치성향과 관계없이 크게 치를 떨 정도로 6.25 전란기는 한국 개신교의 암흑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인들은 북한 정부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다. 북한의 핍박이 신사참배를 요구한 일제의 핍박보다 더 지독했다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 물론 저 말 그대로 신사참배를 완강하게 거부한 성직자들만 끌고 갔던 일제와 달리 북한은 예배를 하는 모습만 보여도 도륙을 했으니 증오심이 그만큼 클 만도 하다. 한국 기독교인들 각자의 정치성향의 차이 때문에 판문점 선언에 대한 견해차가 있지만 그래도 북한의 핍박에 대한 증오심과 남북 통일 이후 북한 수뇌부 처벌에 대한 요구는 공통적이다. 차후 북한 정부 수뇌부가 이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적대감은 유지될 확률이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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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전쟁 직후의 개신교인들의 북한에 대한 분노는 엄청났다. 전쟁 직후의 한국의 보수 정치인들은 개신교인들에게 반공을 내세워서 자신의 지지를 호소할 정도였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당시 이승만 장로 이기붕 권사를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는 포스터[25]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도 한국 보수정치에서 개신교의 지분이 클 정도로 개신교인들이 북한에게 입은 상처는 매우 컸다. 국내 보수 진영이 북한 개신교인을 비롯한 북한 인권 문제에 꽤나 적극적인 것은 개신교인들이 보수 정치에 주는 영향이 꽤나 크기 때문이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과 같은 대한민국의 건국 지도자들은 개신교 정신을 기반으로 개신교 건국론을 주장했고, 이들은 상해임시정부, YMCA, 흥사단에 참여했던 신실한 개신교인들이었다.
반만년 길고 유구한 역사에 처음으로 민주주의 시대를 개막하고 국회를 열게 된 것은 사람의 힘과 사람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고 우리 민족을 사랑하사 대한민국을 탄생케 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대한민국 국회 속기록 제 1권 1쪽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열리던 날,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은 위와 같이 연설함으로서 대한민국이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 연설하였다. 그렇게 한국에는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민주주의, 국민주권주의, 삼균주의를 포함하여 개신교 정신에 입각한 보수적 가치를 내걸고 북한 김일성을 겨냥한 반공 내셔널리즘[26]을 외치기 시작했다.[27]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은근히 불교를 탄압하였는데, 개신교 교회에서는 세금을 받지 않았던 것과 달리 사찰에는 세금을 따로 받고 승려들의 환속을 권장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승려들이 당시 이승만에게 아첨하며 "또 다른 부처님"이라는 망언을 해댔다.[28][29] 지금도 보수적 성향이 강한 한기총에선 이승만 대통령을 국가의 아버지라 추앙하며 조선일보 뉴라이트와 같이 동상을 만들자고 하는 이들도 꽤 적지 않다. 자세한 내용은 근본주의/기독교/개신교, 기독교입국론, 기독교 우파의 개신교 문단을 참조하면 된다.

1.3.2. 민주화 과정에서의 개신교

하지만 개신교계가 반공독재 정권에 편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자세한 것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기독교 좌파 참조. 실례로 6월 민주항쟁 당시 광주직할시에서는 6.29 선언이 있기까지 12일 동안 매일 150명에서 300명에 가까운 군중들이 광주서현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

민주화 운동에 관한 것으로는, 학문적으로 민중신학, 해방신학처럼 기독교 신학을 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진보적인 신학들을 한국 상황에 맞게 해석하여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을 실천한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종교 간의 대화, 곧 다른 종교를 적대시할 대상이 아닌 같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대화하려는 노력을 했으며, 기독교 교파에 따른 전통들의 다양성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기독교의 공동 신조에 근거하여 존중하고 일치하려는 교회 일치 운동으로 교회 분열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산업화가 진행된터라 노동운동 탄압 곧 노동자들의 권리가 자본가에 의해 짓밞혀지는 경우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려는 산업선교가 실천되기도 하였다.[30]

저명한 개신교 신학자 장공 김재준 목사가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스스로 분신한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는 예배/미사를 집전하자, "이 자리는 전태일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가 아닌, 기독교인들의 나태를 추모하는 자리다."라고 설교한 일, "도시산업선교회가 들어오면 도산한다"는 자본가들의 비방과 형사를 보내 감시하는 경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개신교인들에 의해 도시산업선교회를 결성하여 활동한 일이 그 흔적이다.

그러나 이런 진보적 개신교인 역시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그 예로 도시산업선교회는 오늘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직 예장통합 교단 산하에 남아있는 영등포산업선교회가 그 명맥을 미약하게나마 이어오고 있다.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에만 하도 도시산업 선교회 등 친노동운동적인 개신교 단체가 존재했으나 정부의 탄압으로 소멸당하거나 규모가 축소되었다. 다소 예외일 수 있겠으나, 70-80년대 빈민선교활동과 두레 공동체 운동으로 대중에게 알려졌고 10월 유신 반대로 옥고를 치렀다가 뉴라이트 연합 상임 이사가 된 김진홍 목사 같은 경우도 있다.

1.3.3. 근대화 과정에서의 개신교

1970년대 근대화와 새마을운동을 계기로 해서 개신교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교회들이 굉장히 근대적인 이미지를 내세워서 개신교 믿으면 서양식으로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하고[31][32] 이러한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기복신앙적인 면과도 결합하게 되었다. 지금도 도시와 마을 곳곳에 빨간 십자가 교회 철탑이 많이 보이는 이유 중 하나다. 또한 전통 문화들 가운데 개신교 입장에서 부정적으로 보이는 부분들을 없애는데 개신교 영향이 컸다.

1.4. 21세기

1.4.1. 이미지 추락

해방 이후 북한의 탄압을 거치고나서도 근대화를 거치며 교세를 확장한 한국 개신교는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특유의 강경한 태도와 급성장에 급급한 나머지 개개인에 대한 돌봄 부족, 수많은 교회 내부의 비리, 후술할 사건사고들로 인하여 이미지 추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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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 2000년 이수역 역명 논란
사실, 1990년대 다미선교회 휴거 소동과 만민중앙교회 MBC 습격 사건은 이단 사이비 집단에서 일어난데다 인터넷이 널리 활성화되기 전이어서 일부 이단으로 치부하기 쉬웠다. 그러나 2000년 8월 서울 지하철 7호선 개통을 계기로 불거져 나온 이수역 역명을 둘러싼 총신대학교[33]의 행동은 온라인상에서 철도동호인을 시작으로 개신교를 향한 이미지 추락이 시작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수역/역명 논란 문서 참조.
1.4.1.2. 2007년 샘물교회 피랍 사건 이후
불과 2007년만 하더라도 "평양대부흥 100주년" 이라 샴페인을 터뜨리고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던 것과 대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의 분위기가 불과 몇 년만에 변화하였다. 놀라울 것도 없는 것이 이 때만 하더라도 부흥이 실제로 핵심적 화두였었다.[34] 하지만 이 해 개신교의 외적 성공에 겨워 기쁨을 만끽하다가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으로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았다. 피랍된 개신교인들이 극단적 무장단체인 탈레반에 납치된 상황에서 여론은 피랍된 개신교인들에게 상당히 나쁘게 작용했다. 이는 기존의 무차별적이고 타문화 존중이 없는 국내 전도와 해외선교에 대한 염증, 배려심 없고 반성 없는 기존의 한국 개신교에 대한 반발, 그리고 교회 목사들의 각종 불법, 편법적인 행위나 사건, 사고 등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은 온라인에 숨어있던 반기독교 여론이 오프라인으로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도가 급증한 1990년대부터 타 종교에 배타적인 태도로 인한 종교적 논란, 교회의 이름으로 일어난 수많은 사회적 사건사고가 대한민국 내에서 반기독교 여론을 싹트게 했는데, 이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이 반기독교 여론의 싹에 제대로 거름을 쏟아부은 것이다. 20세기 말부터 반기독교 여론이 초기에 형성된 PC통신과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이전에는 교회 내부에서 쉬쉬하고 넘어간 개신교의 문제점[35]이 온라인 상으로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온라인은 이미 반기독교, 특히 다른 교파들보다 반개신교 여론이 대세인 상태였다. 신도 숫자 늘리기에만 집중한 성장 위주의 개신교에 대한 염증과 우려는 이미 나타나고 있는 상태였다. 개신교/대한민국/논란 항목에서 보이듯 신도의 태도에 대한 염증과 반지성적이고 배려없는 전도에서 나타나는 태도의 문제가 공감대를 얻고 공유되면서 반기독교 정서는 이미 수면 아래에 있었다.

심지어 1970년대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 통일운동, 촛불 집회 등 사회 참여에 적극적인 진보 성향의 개신교 교회들( 향린교회 등)마저 그저 같은 개신교 집단이라는 이유만으로 개독교 취급을 받는 상황까지 와 버렸다. 진보적 성향의 정치인이나 인물들 마저도 그저 개신교 신자라는 이유 딱 하나만으로 온갖 공격을 받는 상황이다.

때마침 서점 종교코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기독교 문제 진단서적들이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무신론 관련 서적들도 이 무렵에 국내에 번역되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특히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의 경우 15만부나 팔리는 성공을 거두었다. 전통적인 유교의 무신론적 성향과는 달리 9.11 테러 이후 나타난 리처드 도킨스, 샘 해리스, 대니얼 데닛,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같은 종교에 비판적인 신 무신론(New Atheism)의 영향으로 21세기에는 무신론자도 급증하는 추세이다. 앞서서 설명된 20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무신론자가 되는 추세는 높은 편이다. 서울대에는 무신론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단 20대 무신론자들은 비록 개신교 뿐 아니라 종교라는 제도 자체에도 반대하는 성향을 보이고 명절에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거나 제사를 지내는 행위 역시 유신론적 전통이라고 거부하는 듯.

2007년 한국 개신교 최악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등을 겪으면서, 비로소 개신교 내에서 이런 대책없이 교세를 늘리기에만 급급하는 내실없는 '부흥' 이야기가 다소 사그라들고 암담한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언급한 평양 대부흥 건에 대해서도, "부흥" 자체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면서 이제는 "평양 대각성"이라고 고쳐 불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2009년에 예멘에서 독일인 개신교인 의료봉사 단체와 같이 갔다가 총에 맞아 죽은 한국 여성 엄영선 사건이 철저하게 묻혀졌다. 당시, 개신교계는 엄영선이 선교랑 무관한 의료봉사라고 변명했지만, 2007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때도 하던 변명이다. 게다가, 한겨레와 동아일보 취재로 드러난 것은 엄영선은 침례신학대학을 졸업하고[36] 선교사를 희망하던 만큼, 종교와 거리를 두고 의료봉사를 하러 가기에는 어려웠다. 덕분에 시나이 반도 버스 폭탄테러 사건 때도 또 개신교냐? 비난이 속출했다. 사실, 성지 순례로 가던 것이긴 하지만 해당 교회 목사들이 부상자 치료 및 여러가지 비용을 세금으로 지원해달라고 한 것이 언론으로 보도되면서 엄청난 까임을 듣게 되었다. 2016년에 급기야는 부천 여중생 살인 사건이 발생해서[37] 개신교의 이미지에 제대로 먹칠을 해버렸다.

그런데 2015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08년 대비 개신교 인구가 소폭 증가하고, 가톨릭 불교 인구가 다시 감소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먹고 살기 힘들어진 상황, 앞날이 불안한 상황에서 국민들이 의지할 대상을 찾다 보니 거리가 가까운 교회를 많이 찾게 된 것이 이유라 볼 수 있다.[38]

통계청 자료토대로 나온 기사에 따르면 통계청이 공개한 '인구총조사:성별/연령별/종교별 인구-시군구' 자료에 따르면 2015년 기독교 전체 인구는 총 967만 5,761명으로, 2005년 861만 6,438명보다 약 12%(105만 9,323명)가량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기독교 남자 전체 인구도 10년 사이 더 많아졌다. 2005년 400만 3,536명이었던 남자 전체 인구는 2015년 431만 7,696명으로 약 8%(31만 4,160명) 증가했다. 대략 남성 44.6%: 여성 55.4% 비율이며 약간 여초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기존의 큰 교회 건물 짓기 같은 하드웨어 중심에서 사회 봉사활동을 늘리고 유년, 청소년 교육 중심으로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사

사실 대한민국의 개신교가 바뀌려면 신자들의 의식과 행실도 매우 중요하다. 물론 목사나 교단, 교회 차원의 문제점도 분명 개선되어야 하지만, 그러한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은 결국 신자들이기 때문이다.

2019년부터 전광훈 목사(목사라고는 하지만 교단에서 2019년에 제명당했다) 의 병맛스러운 행동거지 때문에 그나마 멀쩡한 개신교의 얼굴에 제대로 먹칠이 진행 중이어서 비종교인들에게 거센 비판과 함께 욕을 먹고 있다. 급기야 그 전광훈이 이끄는 사랑제일교회 한 나라의 전 분야를 스톱시키는 전대미문의 테러를 저질러 개신교의 평판을 또다시 땅속 깊은 곳까지 추락시키고야 말았다. 자세한 건 전광훈 문서 참조.
1.4.1.3. 2020년 코로나19 집단 감염 사태
2020년에는 코로나19 집단감염의 원인이 신천지 외 일부 개신교의 일탈(성공회 등 교단 차원에서 비대면예배로 전환한 곳도 있고, 개교회 차원에서 비대면예배로 전환한 곳도 많지만, 대면예배를 강행하다 물의를 빚는 곳도 있다.)이라는 점에서 다시 반개신교 감정이 다시 오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 중에서 종로구 집단 감염 원인이 개신교로 밝혀졌다. # 문제는 일부 개신교 교회의 일탈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 ## 유럽, 이슬람 국가들도 감염 방지 위해 종교시설들을 닫는다는 점에서, 신천지랑 다를게 없다며 질타가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경기도 성남시 소재의 은혜의강 교회에서 하루 사이에 40명의 확진자가 추가로 나오면서, 성남시에서 개신교 교회 신도 전체 조사가 들어가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지자체에서 종교예배, 집회 등 단체활동 자제를 부탁했음에도 3월 8일 일요일에 예배가 진행되었고 결국 수도권 집단감염으로는 2번째로 많은 46명의 확진자가 나오게 되었다. # 이 와중에 불법용도까지 밝혀졌다. # 경기도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감염 예방수칙(방역지침)을 지키지 않은 100여개 개신교 교회에 대해 '밀집집회' 예배를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 이 와중에 일제강점기, 군사정권 들먹이다가 오히려 욕 먹고 있다. #

2020년 8월에는 전광훈 목사의 사랑제일교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으로 인한 반개신교 감정이 최고조로 오른 상태이다. 이에 대해 한국교회연합은 정부의 모든 집합행사 금지에 대하여, "세속의 권력이 교회 예배까지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은 종교 탄압"이라 입장 발표를 하고 정부의 집합금지명령을 집단 거부하기로 하면서 기름을 부어버렸다. 이 와중에 "예배 모임이 이웃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 모이지 않는 게 신앙입니다."라며 대면 예배를 비판한 목사의 교회에 찾아와 목사를 폭행한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 11월 26일에는 장위뉴타운 재개발로 인해 사랑제일교회의 명도집행 시도에 교인들이 화염병을 던져가며 막아선 끝에 7시간여 만에 집행이 무산됐다. # # 참고로 2010년대 이후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집회에서는 가스통이나 화염병 같은 화기는 등장하지 않는데 교회 집회에서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개신교발 집단감염이 연쇄적으로 터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권고에 한교연이 종교 탄압을 주장하는 등 매우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어 자기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이슬람보다도 못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실제로 이슬람교가 국교이거나 많이 믿는 나라들도 모스크에서의 집단감염이 심각하다보니 모스크를 강제로 닫았다. 특히 이 와중에 모스크에서 집단예배를 강행한 곳은 공권력으로 강제로 해산시켰고, 정부에서도 모스크가 닫힌 근거로 쿠란의 말씀을 인용하기까지 했다. 다른 종교와 비교해도 3월부터 개신교 직접 확진자는 개신교계 사이비 신천지 포함해서 10,000명 이상이고, 전체 확진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신천지를 제외해도 가톨릭, 불교 직접 확진자는 100명도 안된다는 것을 비교했을 때 개신교 관련 확진자는 매우 큰 수치인 것을 알 수 있다.

SNS에서 주로 '주변 교회에서 몰래 대면 예배를 하는거 같아서 신고했다'는 글(예시)들도 자주 올라오며 # 실제로 신고를 통해 적발되는 경우도 있고 상당수의 교회가 실제로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음이 드러나는 등 교회에 대한 반발감이 커지고 있다. 오죽하면 ‘코로나’를 ‘교로나’로 바꾸어 부르는 이들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이번 사태 계기로 기독교 우파와 정치인의 커넥션이 제대로 드러나는 등 정교분리 훼손에 질타 목소리가 높아진 상황이다. # 게다가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모임에서 전광훈 이단 지정, 명성교회 세습 문제도 지적도 못하고 개신교 내부 자정을 못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2020년 10월 한글날 연휴 기간에는 개신교 선교단체인 인터콥이 연수원에서 3천여 명이 참석한 대규모 집회를 1박 2일간 열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0월 14일 오전 10시 현재 인터콥 집회 관련 확진자는 아직 보고되지 않고 있지만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분산되어 있다는 점에서 만약 이 모임에서 확진자가 1명이라도 나올 경우 8월 사랑제일교회발 집단 감염 사건에 맞먹는 엄청난 피해가 우려되었으나 다행히 코로나 확진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집합금지 행정명령을 위반한 혐의(감염병예방법 위반)로 경찰에 고발되고 방역 당국에 거짓 참석 명단을 제출한 것으로 경찰 조사결과 드러났다. # 결국 2020년 12월에 확진자 발생을 시작으로 전국적 유행에 일조하였다. 인터콥/논란 참조.

11월에는 기도원에서 집단감염이 나오는 등 도시 외에도 농촌에서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인데, 마포구 홍대새교회에서 24일 기준으로 71명 확진된 것으로 나타났다. 방역물품 미비, 교회에서 성가대 연습, 예배 후 소모임으로 간식이나 식사를 섭취한 것으로 확인됐다. # 홍대새교회는 교회 홈페이지에 확진자 발생 사실을 제대로 공지하지 않았다. 교인 단체 채팅방에 상수동 예배당을 폐쇄했다는 공지만 올린 상태다. 최초 확진자 발생도 교회가 공지한 게 아니라, 초등부 교사를 맡고 있는 교인 한 명이 스스로 확진 사실을 공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 이 교회는 성추행으로 삼일교회에서 사임한 전병욱 목사의 교회이다.

12월에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성석교회에서도 100명 이상의 확진자가 나왔는데, 이 시국에 주 4일간 열리는 부흥회7주 연속으로 열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지역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여기에 금천구 독산동의 예수비전교회에서도 집단 감염이 터졌는데, 이 교회 담임목사인 안희환의 전광훈스러운 막장행보와 망언으로 개신교를 향한 평판은 추락을 거듭 중... 결국 안희환 목사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못차리고 집합금지 기간이 끝나자마자 그 다음 일요일인 2021년 1월 10일, 78명이 보란듯이 또 모였다.

5인 이상 모임 금지에도 불구하고 성탄절에도 마치 지하교회처럼 모이다가 집단감염 나타나는 등 신천지보다 심각한 문제로 대두한지 오래이다. 실제로 2020년 12월 23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산성교회에서 어린이들까지 모인 가운데[39]학교 전체가 대면수업이 중단될 수 있다. 이 경우 피해는 고스란히 그 학교에 다니는 모든 아이들이 당하게 된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의 아동 학대에 더 심하게 노출될 수도 있고,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집에서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어른들도 무서워하는 비인두도말 코로나 검사를 아이들이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마스크를 벗고 재롱잔치를 열다가 2021년 1월 10일 현재 178명이 확진되었다. 또한 부산 강서구에 위치한 세계로교회도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시점에 교인들이 1,000명 넘게 참석한 대면예배를 강행했다. # 이 교회는 지자체로부터 6번이나 고발당했음에도 '영적 전쟁'이라며 매주 대면예배를 강행 해왔다. 그리고 이 교회는 당국의 운영중단명령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인 11일 새벽에도 200여 명이 또 모였고, 결국 폐쇄조치되었다. 그럼에도 세계로교회는 1월 17일 교회 앞 잔디밭에 의자를 깔아놓고 200여 명이 보란듯이 또 모였다.[40] 1월부터는 진주국제기도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감염 사건, IM선교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이 발생했다.

게다가 인터넷에서는 정부가 왜 교회를 강제로 닫지 못하게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식의 질타가 이어지고 있어서 반개신교 감정을 넘어 반정부로도 연결되는 상황이다. 실제로 지방자치단체가 교회의 눈치를 보다가 겨우 폐쇄명령을 내렸다는 기사가 떴는데, 지자체장들은 당장 눈앞에 다가온 다음 선거에서 교회 교인들의 표를 의식[41]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더욱이 사랑제일교회, 예수비전교회, 세계로교회만큼이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숫자의 개신교회에서는 문재인 정부를 개신교회와 개신교를 탄압하는 빨갱이 정권, 좌파 정권, 주사파 정권으로 선동하고 있기에[42] 민주당 출신의 지자체장들[43]은 방역수칙을 위반하는 교회들에게 아무 의미없는 경고만 남발하고 행정조치에는 몸을 사리는 성향이 이어지고 있다.[44] 그래서 BTJ열방센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 계기로[45] 다시 정부의 태도가 불분명하다는 것에 꽤나 분노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아무리 방역 수칙을 잘 지킨 교회라도, 이런 다른 교회의 뻘짓도 있고, 대부분의 예배가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예배로 전환되어 개신교도들 사이에서도 꼭 교회에 직접 출석해야 한다는 의식이 약화되었기에 당분간 교인 감소는 불가피해 보인다. 문제는 그냥 불가피가 아니라 당장 개신교인들과 만나지 말자는 목소리가 주류가 되어버린 것이다.

집단 감염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종교 시설이다. 중대본의 코로나 1년 감염원 통계에 따르면 "종교시설 관련 확진자는 모두 5천 791명으로 17%를 차지해 가장 높았고, 이어 신천지 16%, 요양시설 13%, 직장 11%, 가족 지인 모임 10%, 의료기관 8%, 체육/여가시설·교육시설·교정시설 각 4%, 일반음식점/카페·다단계/방문판매·기타 다중이용시설·815 집회·유흥시설 각 2%, 목욕탕/사우나 1%"이다. 신천지도 사실상 종교 시설임을 감안하면, 전체의 33%가 종교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46] 최전선에서 코로나 환자를 담당해야하는 의료 기관이나 이론적으로 고위험군에 속하는 헬스장, 음식점, 카페보다 몇 배나 높은 수치다. 이 중에 절대다수의 비중이 개신교일 것이라는 확증은 없으나, 적어도 이러한 통계 상황에서 종교 시설이 집단 감염의 주범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유독 대면 예배를 주장하며 방역 조치를 위반하는 개신교인들에게 자성의 목소리가 필요해보인다.[47]

문제는 이게 한국만 이러는 것이 아니라 개신교의 영향력이 강한 국가는 대부분 이 지경이라는 것이다. 다만 유럽은 역학조사가 거의 안되고 있고, 강도 높은 락다운을 실시해서 종교 시설을 철저하게 폐쇄하고 있으며, 거리 시위 등 다른 집단 감염 케이스가 워낙 많기 때문에 종교의 영향력이 두드러지지 않고 있어 확인이 어렵다. 실제로 영국은 3월 달에 락다운을 시작해서 6월달부터 락다운을 조금씩 해제했지만 대면 예배는 9월이 되어서야 잠깐 허용했고, 그나마도 11월 2차 유행이 다가오자 다시 폐쇄해버렸다. 하지만 근본주의 개신교의 본고장인 미국은 말할 것도 없다. 대면 예배를 금지시키자 바로 각 주정부 헌법재판소에 소송을 걸어 판결을 받아내고 대면 예배를 재개하고 있으며, 플로리다 등지에서는 "왜 신이 준 숨쉴 권한을 뺏어가는가?"라며 마스크 거부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레딧 무신론 서브레딧 등의 영미권 반개신교 커뮤니티 등지에서 까이도록 까였다. 실제로 완전한 수준으로 코로나를 통제하고 있다는 대만, 베트남, 싱가포르 등은 개신교세가 약한 국가이며, 개신교가 활발한 국가들 중 코로나 19 통제에 성공한 나라들은 호주와 뉴질랜드 정도이다.[48]

게다가 여전히 적그리스도가 코로나19 퍼트린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중요한 점이다. 예시(죽은링크)

코로나19가 종식되더라도 교회에서 다시 나올 가능성이 있다. 특히, 사랑제일교회, 예수비전교회, 인터콥 같은 교회나 단체라면 음모론을 설교하면서 백신 반대 운동에 동참할 수도 있다.

특히, 개신교가 없었다면 지금보다 확진자가 줄어들것이라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 개신교를 향한 싸늘한 눈총이 많이 커진 상태이다. "이제 개신교라면 지긋지긋해"…교회 향한 냉담한 '시선'[49]

개신교 여론조사기관인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낸 '코로나19 정부 방역 조치에 대한 일반 국민평가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교회를 '매우·약간 신뢰한다'는 응답은 21%인 반면 '별로·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비율은 76%로 조사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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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목회데이터연구소의 같은 자료에서는 중대본 자료를 제멋대로 해석해 교회발 감염이 과장되어 있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가령 확진자 접촉 감염을 구분하는 이유는 1차 감염과 이로 인해 재생산되는 n차 감염을 구분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개신교 측에서는 확진자 접촉 감염을 포함시켜 종교 시설의 비율을 11%로 줄이고 있다. 당연히 확진자 접촉의 원인을 파고 들어가면 집단 감염 중 가장 많은 원인을 차지하는 교회의 책임 소재가 높아지면 높아졌지 줄어들지 않는다. 특히나 개신교인들은 휴대폰을 꺼놓거나 음모론을 퍼뜨리며 방역에 비협조하고 있어 미확인 감염경로 비율이 증가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령 광주의 미확인 감염원들을 파고 들어보니 그동안 숨기고 있다가 터져나온 IM선교회-안디옥교회와 연결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

게다가 헬스장, 노래방, 식당 등을 다중이용시설이라고 합치고 12%고 종교시설은 11%니 종교발 감염원이 적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차라리 신천지와 종교 시설을 종교 시설로 통합하는 게 설득력 있지 않을까? 개신교인만을 상대로 특정 시간에만 영업하는 교회와 일주일 내내 영업하는 헬스장, 식당 등 상호 연관성이 전혀 없는 시설들을 합쳐야 비슷한 비율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개신교발 감염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황당한 자료 해석을 통해 국민들의 인식이 과장되어 있고, 이러한 인식의 원인은 교회의 홍보가 부족하다는 주장은 개신교인들이 반성 없이 선민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또한 헌법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를 제약한 것이 아니라, 대면 예배라는 특정 활동을 제약하는 것이다. 온라인을 통해 여전히 예배를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이웃의 안전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코로나 19에서 종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일부' 교회들은 그렇게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은 이를 종교의 자유를 탄압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종교 때문에 십자군 전쟁, 30년 전쟁까지 했던 유럽 국가들도 교회를 닫는 판인데, 코로나 19 시국에서 공공의 안전을 위해 대면 예배를 제약하는 것을 종교 탄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하철에서 불신지옥을 외쳐도 이를 비판하면 종교의 자유를 탄압한다고 주장하던 평소 개신교의 지독한 이기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다.

결국 2021년 조사에서 개신교는 교세와 이미지 모두 크게 꺾였음이 나타났다. 교인도 2014년 전 인구의 21%에서 17%로 줄었으며 불교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하락세를 보였다. 무엇보다 호감도에 큰 타격을 입었다. 무종교인이 뽑은 호감가는 종교에서, 개신교는 원래도 항상 꼴찌였는데, 2021년 조사에서 호감도가 반토막 나며(10%→6%) 압도적 비호감 종교로 등극했다. #

2021년 연말에 오미크론 변이 최초 확진자가 목사 부부인데 코로나19 시국에 선교하러 나이지리아를 다녀왔던 것에서 비판이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방역당국을 무시하고, 80여명을 만났다는 점과 지인의 차량을 탔는데도 방역 택시를 탔다는 거짓말을 했다는 점에서 다시 반개신교 감정이 커지는 상태이다. 다만 기사에서는 해당 교회가 특정 종파나 교단에 속해있지 않고 독자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곳이라고 나오는데, 이런 곳이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교회보다는 개신교계 사이비일 가능성이 크다.

1.4.2. 2022년 이후

2022년부터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었고 개신교 관련 사건사고도 줄어들었기 때문에 반 개신교 여론도 코로나 시국 때에 비하면 줄어들었다.
[1] 예외적으로 네덜란드 스위스는 우리나라와 개신교 구성이 엇비슷하며, 특히 네덜란드는 같은 칼뱅주의란 공통점 때문인지 직접적인 교류가 드문데도 한국 개신교 신학계에서 생각보다 자주 언급된다. [2]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토마스 목사를 선교 중에 사망한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입장이지만 어쨌거나 일단 선교 목적으로 조선에 와서 사망한 것 자체는 맞다. [3] 만주에서 최초의 국역 성경인 누가복음 한글 성경을 출간하는데 참여한다. [4] 스코틀랜드계 미국인이며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1895년 4월 8일 한국에 파송되어 광주·목포 지역에서 활동하며 학교와 병원을 설립한다. 사위인 윌리엄 린튼은 대전 한남대학교의 설립자이며, 증외손자는 대한민국 1호 특별귀화자로 잘 알려진 인요한 박사이다. [5] 경신학교 대학부가 기원 [6] 주로 황해도, 평안도 [7] 아무래도 영남 지방과 기호 지방은 유림의 세가 상당했기 때문. [8] 지금도 일부 개신교 교회에서는 은근히 유교 윤리와 구약 율법에 명시된 윤리가 비슷하다는 걸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9] 여기에 불교는 생명존중사상으로 육식도 금지하고 한국쪽 종파는 연애나 결혼도 금지한다. [10] 사족으로 영미식 장로회와 대륙식 개혁교회의 차이점들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같은 개혁주의임에도 스위스, 네덜란드 등 대륙식은 전통적으로 음주, 흡연에 관대했다.( 근거) [11] 그러나 천주교도 필요에 따라 조선왕조와 어느 정도 통교할 때가 있었고 조선에서도 서학의 일종으로 온건하게 취급해 줄 때가 있었다. [12] 이승만, 안창호, 김구, 유관순, 김규식 등이 있다. [13] 친일에 적극적인 가톨릭 교회는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14] 밀고자는 니콜라 빌렘 사제와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주교다. 가톨릭 교회는 이 사건의 대가로 명동성당 인근의 부지를 얻었고 아직도 소유하고 있다. [15] 일반 사법 경찰과 달리 정치범과 중요 사건을 다루는 경찰조직 [16] '구마모토 밴드'라고도 불리며 미국 동부에서 유래한 회중주의 교회정치를 받아들인 것이 특징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을 통해 들어온 조합교회는 어용교단 노릇을 하면서 한국의 개신교를 분열시키는 역할을 했었다. 태평양 전쟁 직후 군부의 개신교단 강제 통폐합 정책에 따라 조합교회는 다른 교단들을 흡수하여 ' 일본기독교단'으로 바뀌었고, 패전 이후 지금까지도 일본의 대표적인 개신교 교단으로 존속중이다. 다만 현재는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임 고백을 채택하는 등 평화주의적인 교단이 되어 한국 개신교 세 교단(기감, 예장통합, 기장)과 교류한다. [17] 불교는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에 대한 분풀이랍시고 구한말부터 이동인, 이회광처럼 일제에 적극적으로 친일 부역질을 일삼은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교 신자들이 전적으로 친일 일변도로 경도되어 있었다거나(당장 한용운이나 백용성, 만공만 봐도) 불교계가 그걸 등에 업고 호사를 누리며 타종교를 탄압한 것은 아니었다. [18] 전통 민족신앙이라해도 대종교와 분리된 국내 단군교의 경우 적극적 친일이었다. [19] 현재 광주서현교회 [20] 박형룡처럼 존 메이첸의 제자이다. [21] 아예 '출옥 성도들의 광적인 활동과 테러 행위'에 대해 날조된 교육을 하는 곳들도 있을 정도이며, 엔하위키 시절부터 본 문서에 '광적인 활동'에 대한 서술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다. [22] 이는 기독교 자체의 성향도 있는데 회개라는 교리가 있는 기독교 특성상 잘못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면 대체적으로 용서해 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배교행위도 마찬가지이며 가톨릭의 경우 위기 모면을 위한 배교가 아닌 순교를 택할경우 기적이라고 판단한다. 이런 성향 때문에 신사참배결의한 교단과 교역자들의 문제도 잘못을 인정하고 공개사죄를 하면 기존의 직위를 유지시켜주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23] 유야무야된 이유중 다른 하나는 일제가 강제로 통합한 통합 개신교단을 유지해야하나 아니면 다시 각자의 길로 가야하는지 가지고 논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한국고유의 통합교단은 개신교 선교사들로 시작된 오랜 꿈이었지만 그것이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뤄지고 일제가 패망하자 강제로 통합한 힘이 사라지면서 파열음이 생긴것이다. [24] 평양은 가리켜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였다. [25] 장로회가 상대적으로 번성한 대한민국에서 권사는 여자만 받는 직분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는 상태라 이기붕 '권사'라는 직함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감리회는 남녀 모두 권사가 될 수 있다. [26] 이승만 정부는 북한 인민들이 김일성 정권, 즉 공산주의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했고, 임기 기간동안 계속해서 북진 통일을 주장했다. [27] 상대적으로 민주당, 그 가운데 신파는 부통령 장면을 중심으로 가톨릭 신자였고 김대중의 대부이기도 하다. 다만 민주당 구파의 대표 인사인 윤보선 전 대통령은 장로회 신자였다. [28] 고려원 "한국의 불교". [29]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대한민국에서 개신교만 반공을 외친 것은 아니란 것이다. 실제로 공산주의 자체가 종교 자체를 적대하는 경향이다 보니 굳이 개신교가 아니라도 (이승만 정권의 개신교 편향에 대한 불만과는 별개로) 종교인이라면 반공 성향은 매우 당연하게 여겨졌다. [30] 천주교 인천교구가 노동사목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31] 개신교를 믿는 나라들은 모두 잘 산다는 주장도 사실 이때부터 나왔던 것. 물론 반개신교 측에서는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의 예시를 들어 개신교 믿어도 못 사는 나라들이 수두룩했다는 반론을 편다. [32] 새로 그린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편에도 나오는 얘기인데, 한국에서 개신교가 흥한 이유로는 개신교가 미국의 종교이기 때문에 근대적 이미지는 물론, 해방자 이미지가 씌워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서양 국가들에 의하여 식민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침략자들의 종교인 기독교(가톨릭, 성공회 포함)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33]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산하의 신학대학교 [34] 하지만 한국 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 상암 서울 대회에서 옥한흠 사랑의교회 원로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타락을 비판하고 목회자들의 회개를 촉구하기도 했다. [35] 교회 내부 비리나 교회에서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나 논란의 발언들이 익명의 인터넷과 PC 통신을 통해서 노출되었다. [36] 대전신대 출신이 아닌 침신대 출신이다. 또한 생전에 수원 형제침례교회 신자이기도 했다. 출처. [37] 딸을 죽인 아버지가 다름아닌 목사였다. 그것도 사이비, 이단 종파의 목사가 아닌 정통 교단의 목사. [38] 통계청에서 기성 개신교 뿐 아니라 이단 및 신흥교파들까지 싸잡아 집계한 결과라 못 믿겠다고 하는 시각도 없진 않으나 이단을 제외해도 개신교 인구가 가장 많이 나오는 건 비슷하다. [39] 그 곳에 참여한 어린이들이 코로나19에 확진되면 그 어린이들이 재학중인 [40] 이 교회의 담임목사인 손현보 목사는 지하철, 시내버스, 대형마트는 막지 않으면서 교회만 막는다고 정부와 방역당국을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안그래도 상주 BTJ열방센터에 다녀온 사람들이 자신의 소속교회에 이를 숨기고 예배에 참석하는 경우가 많은데다 목사의 자녀들이 저지른 정인이 사건으로 많은 사회적 시선이 교회로 쏠려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41] 실제로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이 역대 대선 사상 가장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것은 참여정부의 지지율이 바닥에 떨어진 것도 있지만, 소망교회 장로인 그에게 개신교인들이 압도적 지지를 보내 준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42] 보수 정권인 이명박 정부 당시였던 2009년 신종플루, 박근혜 정부 당시였던 2015년 메르스 바이러스가 대유행했을 당시의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는 개신교회의 대면 예배 중단을 강력하게 권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수의 개신교회에서 문재인 정부를 강하게 비난하는 것으로 보인다. 목사들 중에서는 개신교 교회 안수집사이기도 한 정세균 국무총리를 잡사라고 폄하하는 경우도 있다. [43] 지난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대구, 경북지역을 제외한 전국을 모두 싹쓸이하다시피했다. [44] 더군다나 상술한 세계로교회의 경우 부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부산은 오거돈의 잦은 논란과 트롤링으로 인해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문재인 정부 출범 이전 수준으로 추락한 실정이며, 민주당은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때 전국에서 당 역사상 전대미문의 압승을 거둔 와중에 부산 지역에서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때보다 저조한 성과에 만족해야 했었다. [45] 단 이 사건은 정부가 어느 정도 대응을 잘 한 편에 속한다. 너무 확진자가 많아서 그렇지. [46] 또한 요양원의 경우, 개신교인들이 단체로 소모임 차원에서 봉사활동을 가거나 요양원에 들어간 이전 신도들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두 집단 간의 연관고리가 있을 확률이 높다. [47] 특히, 목사의 태도가 중요하다. 목사의 말이 절대적 진리인 신도들에게는 대통령 말보다 강력하기 때문이다. 당장 사랑제일교회가 기도 중, 설교 중 "문재인 끌어내리자!" 라고 언급할 때마다 전광훈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광신도들" 아멘!" 하고 외치는 교회다. [48] 윗동네 캐나다는 같은 영미권이지만, 개신교보다 가톨릭이 강세인 점도 있고, 미국보다도 더 강도 높은 입국제한조치와 방역조치를 취해서 그나마 상황이 낫다. [49] 여담으로 해당 기사는 서로 정치성향이 극과 극인 네이버와 다음의 댓글 여론이 일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