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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5:01:34

아리우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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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주요 교리3. 역사
3.1. 전기(318~381) - 로마 제국의 아리우스파
3.1.1. 태동기(318~325) - 니케아 공의회 시기 아리우스파
3.1.1.1. 아리우스와 알렉산드로의 논쟁1: 예수는 피조물인가?3.1.1.2. 아리우스의 주장1의 의미: 예수는 피조물이다.3.1.1.3. 아리우스의 주장1의 위험성: 교회가 피조물을 흠숭해왔다?3.1.1.4. 아리우스의 주장2: 예수는 신이면 안 된다. 인간이 신에게 순종하는 것이 의미있는 것이지, 신이 신에게 순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3.1.1.5. 아리우스의 주장의 결과: 파문3.1.1.6. 아리우스의 이후 행적: 귀환3.1.1.7. 콘스탄티누스의 중재: 총회
3.1.1.7.1. 아리우스의 주장의 핵심: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다.3.1.1.7.2. 보편교회의 대응: 삼위일체3.1.1.7.3. 다른 입장들3.1.1.7.4. 니케아 공의회의 결론: 니케아 신경
3.1.2. 전성기(325~378) - 니케아 공의회에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시기 아리우스파3.1.3. 쇠퇴기(378~381) -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시기 아리우스파: 로마 제국에서의 아리우스파 쇠멸
3.2. 후기(381~8세기 초) - 게르만 왕국의 아리우스파
3.2.1. 중흥기(381~496) - 게르만 왕국에서의 아리우스파 중흥3.2.2. 쇠멸기(496~8세기 초) - 게르만 왕국에서의 아리우스파 쇠퇴와 절멸
4. 후예5. 기타6.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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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리우스파 기독교(Arianism)는 아리우스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발전한 기독교의 한 교파이다.

4세기 초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관구의 사제 아리우스(Arius)가 주창했던 반삼위일체적 신학인 아리우스주의를 따랐으며, 초기 교회에서 아타나시우스파와 함께 양대 종파를 형성했으나 기독교 주류가 된 아타나시우스파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채택하면서 축출되었다.

2. 주요 교리

아리우스파의 핵심은 야훼(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 성자)가 이질적이고 차별적인 존재라고 본 것이다. 사제 아리우스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본질이며 동격인 존재"라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론을 정면 부정하고 그리스도는 성부가 세계의 구원을 위해 만든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격, 혹은 동일한 본질일 수 없고, 오로지 이질적 본질(heterousios)에 불과하다고 주장해 범 아타나시우스계가 내세우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격하시켰다. 아리우스파의 대표적인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러한 내용을 핵심 교리로 삼고 있는 아리우스파 기독교는 삼위일체를 핵심적 교리로 삼는 아타나시우스파 기독교[2]와 공존하기 어려운 이단으로 간주되는 내용이었다. 아리우스파의 교리는 비록 직계후손은 아니지만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 혹은 유니테리언의 교리와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이 아리우스 논쟁이 전 기독교 세계의 대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이 때문에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 기독교를 합법종교로 인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종교가 양분될 위기에 처했다. 본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직 완전히 그리스도화되지 않은 로마 제국에서 태어났던 로마인이라 교리가 어떻게 되든 의례만 잘 지키고 로마 제국만 통합되면 별 상관이 없다는 식의 생각이었던 듯하다.[3] 그러나 결국 교회의 분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최초로 공의회를 열 것을 명하여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주재하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는 황제의 강압 속에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하여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본질(homoousion)"로써 삼위일체가 정통임이 천명되었고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매우 간결하며 일관성이 있고 논리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서에는 예수가 하느님과 구분되는 듯한 구절과 동일시되는 듯한 구절이 모두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복음서의 이런 태생적인 내부 모순점은 결국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의 논쟁, 그리고 이후에도 단성론, 단의론 등 지리하고 피비린내 나는 기독교의 교리 싸움이 전개된 원인이 되었다. 당시 아타니시우스파의 삼위일체론은 이 모순되는 부분들을 표면적으로 봉합시키기 위해 여러 우회 장치들을 사용했다. 이런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 모순을 따지는 것은 일반인들이 판단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들이었다. 반면 아리우스는 교리 자체의 일관성, 통일성, 논리적 무오류를 위해 복음서에서 모순되는 두 내용 중 한 쪽은 취하고 다른 쪽은 무시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파는 이 부분을 맹렬히 파고들며 공격했고 결국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몰았다.

처음에 기독교에 거의 무지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일단 교리 통일이라는 정치적 목적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공의회를 열기 전부터 교회 내에서 훨씬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고 나섰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서 진행된 공의회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의 주장은 난해한 삼위일체론과는 다르게 이해하기 쉽고 간결했고 일관성 있어 보였기 때문에 수세기 이상 세력을 떨쳤다. 게다가 처음에 기독교에 무지하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점차 기독교 교리에 대해 깊이 파고들면서 오히려 아리우스파에 빠지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말년에 아리우스를 측근으로 두었을 정도였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후계자들인 역대 황제들이 아리우스파를 신봉해서 도리어 삼위일체파가 탄압을 받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아리우스파는 유럽에서 침입을 격화하고 있던 게르만족에게도 대대적으로 포교하여 많은 게르만족이 아리우스파를 추종하는 현상마저 일어났다.

아리우스파가 이렇게 위세를 떨치는 가운데 381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소집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삼위일체 천명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를 최종적으로 이단임을 재확인했다.

이에 따라 아리우스파는 제국 전역에서 탄압당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고트족이나 반달족, 랑고바르드족 등 게르만족에게 주로 포교하여 명맥을 이었다. 계속된 교파분쟁의 와중에 게르만족 중 프랑크족이 500년경[4] 삼위일체파로 전향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8세기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가 아리우스파를 믿던 다른 게르만족들을 대거 점령하면서 삼위일체설로 개종하지 않으면 몰살하는 정책[5]을 시행했고 이로 인해 아리우스파를 믿던 게르만의 작센족, 바이에른족 등이 모두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당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대량학살당하면서 아리우스파가 완전히 사멸했다.[6]

3. 역사

3.1. 전기(318~381) - 로마 제국의 아리우스파

3.1.1. 태동기(318~325) - 니케아 공의회 시기 아리우스파

3.1.1.1. 아리우스와 알렉산드로의 논쟁1: 예수는 피조물인가?
아리우스는 원래 알렉산드리아의 신부였다. 320년경 제국의 문화적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서 리비아 출신 사제 아리우스[7]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들고 나온다. 이 도시에서 가장 뛰어나고 인기 있는 사제들 중 하나인 아리우스는 ‘하느님의 말씀인 로고스가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가?’의 여부를 두고 자신의 상관인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데르)와 논쟁을 벌였다. 아리우스는 말씀은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중 으뜸 되는 존재이며,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이 만들어지기 전에 말씀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말씀은 신적인 것이므로 창조될 수 없고, 성부와 함께 영원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가 기독교적 유일신론을 부인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에 반대하여 예수는 신(참된 하느님)이 아니라고 주장했다.[8] 예수가 신이라면 신성을 지닌 존재가 둘이 되므로 결국 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늘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 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하느님(스스로 있는 자 또는 영원한 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분의 아들을 무에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으며, 아들은 창조물입니다. 그가 아버지와 같지도 않고 원래 그가 아버지의 진정한 말씀이나 진정한 지혜가 아니며, 실은 하느님이 만든 하나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고, 그가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과 지혜로써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냥 말씀과 지혜 자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은 하느님의 본질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아들에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는 말씀이 아버지를 정확하고 완벽하게 알지도 못하며, 그를 제대로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그의 본질을 알 수 없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우리를 말씀을 통하여 만들기 위해 그를 도구로 사용하였고, 우리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더라면 그를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계속 아버지였던 것이 아니고, 그가 혼자 계시며 아버지가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는 나중에 아버지가 되었다. 아들은 영원에서 온 것이 아니라 무에서 온 것이다.
- 연회(Thalia) -
[9]
아리우스의 주장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성자(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처럼 영원하지 않다.
2. 성자는 세상의 창조에 앞서서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그렇기에 성자는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다.
3. 성자는 본성상으로 성부의 아들이 아니고, 성부의 으뜸적인 창조물로써 성부의 아들이다.
4. 성자는 성부와 같은 본성에서 난 게 아니라, 그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므로 그의 본성은 성부와 다르다.
3.1.1.2. 아리우스의 주장1의 의미: 예수는 피조물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초기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비록 후대의 정교한 삼위일체론만큼 체계화시키진 못했을지언정, 다소 느슨하게나마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하느님"이라거나, "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하느님"라는 식으로 믿어왔다. 즉 예수도 하느님이시다 하고 믿어왔으며, 그렇기에 예수를 성부와 함께 '흠숭(=숭배)' 해왔다. 그런데 그리스 철학을 배운 아리우스가 " 유일신이면 당연히 하나여야지, 유일신을 주장하면서 어떻게 예수까지 하느님이라 하는가?"라고 신의 단일성을 주장하며, 하느님으로 믿어오던 예수를 하느님의 " 으뜸 피조물"로 간주했다.
3.1.1.3. 아리우스의 주장1의 위험성: 교회가 피조물을 흠숭해왔다?
이런 그의 주장은 유일신 신앙이라는 측면에서 논리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쉬웠으나 그렇게 될 경우 기존 교회의 사제들은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던 거룩한 전승에 대한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동시에, 교회는 "피조물을 흠숭한다."라고 고백하거나[10][11] 예수에 대한 흠숭을 중지해야만 했다. '예수는 하느님'이라는 구절들과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구절들을 어떻게든 다 받아들이려고 용을 쓰고 있던 게 당시의 교회의 삼위일체이었는데, '한쪽 구절들을 무시하자'라는 아리우스의 심플한 주장은 기존의 초기 기독교(아타나시우스파) 사제들이 아리우스의 주장은 너무나 극단적인 주장이라고 역공할 빌미를 제공했다.

알렉산드로는 이에 답변하기를 아리우스의 이론이 말씀의 신성을 부인하므로 예수의 신성이 부인된다고 했다.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해왔는데, 아리우스의 이론에 의하면 교회는 그러한 흠숭을 중지하든지, 피조물을 흠숭하고 있었다고 선언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었다.
3.1.1.4. 아리우스의 주장2: 예수는 신이면 안 된다. 인간이 신에게 순종하는 것이 의미있는 것이지, 신이 신에게 순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더 나아가 문제의 핵심은 또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구원 방식이었다. 알렉산드로의 견해를 옹호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인 아타나시우스의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인류 역사에 들어오시어 우리가 하느님에게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러한 견해가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을 위험하게 만든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느님께 순종하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여셨는데, 만일 예수가 피조물이 아닌 신이라면 그러한 순종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12]
3.1.1.5. 아리우스의 주장의 결과: 파문
결국 그의 말이 쉽기에 받아들이는 아리우스파와 그에 대해 반발하는 파로 나뉘었다.[13] 급기야 아리우스와 그 지지자들이 이집트, 리비아, 트리폴리타니아에서 온 백여 명에 달하는 주교들 앞에서 심문을 받고, 이단으로 파문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알렉산드로가 주교의 권위와 책임에 근거하여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정죄하고, 그를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모든 직분에서 축출함으로써 논쟁은 공개적 성격을 띠었다. 아리우스도 이에 승복하지 않고 시민과 동방제국의 주교들에게 호소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며 반응했고, 게다가 아리우스의 주장 자체는 지극히 간단하고 이해하기도 쉬웠기에 그 가르침은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거리에 대자보가 나 붙고 장터에서 난상토론이 벌어지고, 벽마다 분필로 쓴 온갖 구호가 돌아다니는 등, 그야말로 귀족, 평민 구분 없이 키배 토론 모드에 돌입했다. 또한 아리우스는 여론 몰이에 능통한 자였고, 자신의 견해를 널리 알리기 위해 가요와 동요를 지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14]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교 교회 종교음악의 아버지로 간주하며, 그에게 커다란 경의를 표한다.
가톨릭 신학 사전, '아리우스파' 항목[15]
3.1.1.6. 아리우스의 이후 행적: 귀환
또한 아리우스는 파문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서 니코메디아로 갔고, 그곳의 주교 에우세비우스는 현지 회의를 소집하여 아리우스를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견해를 채택했다. 비슷한 시기에 카이사레아의 주교 에우세비우스(동명이인이다)가 소집한 시리아 고위 성직자들의 회의도 같은 견해를 표명했다.

강력한 백업을 얻은 아리우스는 이집트로 돌아왔고 복직을 요구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알렉산드로는 당연히 거절했고, 그러자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323년 가을에[16] 이르러 이 폭동은 이집트뿐만이 아니라 레반트 전역에서 위험할 정도로 커졌다.
3.1.1.7. 콘스탄티누스의 중재: 총회
얼마 후, 막 제국을 통합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이 사태에 당연히 기겁했고, 이 사태를 끝내기 위해 직접 쓴 서한을 정통파와 아리우스파에게 모두 전달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지역적 신학 논쟁이 점점 커져, 동방교회를 분열시킬 위협을 가져왔다. 당시 기독교 신학의 중심지 중 한 곳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 이 교리 논쟁은 당시 기독교계 전체를 분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3.1.1.7.1. 아리우스의 주장의 핵심: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다.
삼위일체가 본격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되고 고도화 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즌부터였다. 애초에 삼위일체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이며, 아리우스를 꺾기 위해서, 즉 필요에 의해 후대 교회에 의해 정립된 표현이다. 당시 예수는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자신과 엘로힘의 관계성과 존재론에 대해 상세히 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 많은 사람들이 "아리우스주의는 예수를 인간이라고 주장했고 신성모독을 저지른 이단이다"라고 오독한다. 하지만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를 인간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아리우스주의는 예수는 분명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신적 존재이지만, 교회가 관습적으로 설파해온 성부와 동등한 "진정한 하느님"이 아닐 뿐이라는 것이지 예수가 단지 평범한 "인간"이라거나 "구세주"로서의 직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17]

아리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는 참되고 유일한 하느님이 천지창조 이전에 창조한(혹은 창조를 결심한) '첫 번째 피조물'이었다. 그리고 이 유일신은 예수를 자기의 아들, 하느님의 반열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피조물이면서도 하느님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믿고 따르는 그 유일한 하느님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논지가 아리우스의 주장의 핵심이었다.

이것은 예수를 무시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 예수도 참 하느님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간다면 기독교 다신교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은 누구도 부정못할 영원불변한 유일신이어야 되는데, 교회가 예수의 존재를 참 하느님이라고 규정하면서도 하느님과는 별개의 인격체로 구분짓고 그를 흠숭하는 설교를 하는 현상을 지속한다면,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과 모순되며 이는 곧 교리의 근간을 파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예수를 간편하게 하느님의 화신으로 취급하고 그렇기에 삼위일체가 참이 된다고 말해버리면 복음서에 나오는 구세주의 역사가 죄다 원맨쇼가 되어버린다고 여겼다. 아리우스는 성부와 성자 성령이 곧 같은 존재인데, 하나의 본질이 서로 표현양상만 달리 나타났을 뿐이라는 양태론에도 강경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결국 아리우스주의로 말미암아 기존의 교회는 빼도박도 못하고 예수 는 본질적으로 참된 하느님인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대해 양자택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3.1.1.7.2. 보편교회의 대응: 삼위일체
영지주의와 맞서왔던 당시 보편교회는 이번에는 완전히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아리우스주의와 맞서야 했다. 아리우스주의의 장점은 간단하다는 것이다. 결국 보편교회는 유일신교를 표방하는 기독교어떻게 예수를 하느님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같은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주교 아타나시우스가 강력히 반발해 삼위일체를 옹호했는데, 예수가 진정한 하느님이 아니라는 아리우스주의대로라면, 유일신 하느님과 하등한 하느님 예수의 구도가 되어 예수의 존재가 약해지고 인류를 구원한다는 의미도 부실해져 기독교 다신교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분열을 원치 않았던 콘스탄티누스는 중재에 나서며 제국 전역으로부터 교회의 주교들을 소집하여 총회를 열었다. 이 총회에서는 표준적인 정책들의 확립을 필요로 하는 문제들을 다룰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생한 논쟁을 해결해야 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통칭 니케아 공회의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어려운 문제로 화두된 것이 이 아리우스 논쟁이었다.
3.1.1.7.3. 다른 입장들
이 안건에 관하여는 입장을 달리하는 집단들이 존재했다.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설명한다면, 정당성이 인정되고 알렉산드로는 정죄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말씀, 혹은 성자가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많은 주교들을 분노케 했으며, 에우세비우스는 말을 마치지 못한 채 단상에서 끌려 내려왔다.
3.1.1.7.4. 니케아 공의회의 결론: 니케아 신경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은 어느 집단에 소속되지 않고, 박해가 종식된 마당에 교회를 분열시킬 가능성이 있는 논쟁이 발생한 것 자체를 걱정하며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았지만,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의 연설을 듣고 난 후에는 가능한 한 가장 분명하게 아리우스 주의를 정죄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성경구절들만 사용할 경우, 아리우스주의에 대한 반대를 표현하기가 어려워 교회의 신앙을 표현할 신경을 작성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여기서 '신경'이란 세례 예식 때 세례를 주는 성직자와 받는 예비 신자가 서로 묻고 답하는 신앙고백문이다.

마침내 회의에서는 카이사레아의 교회에서 세례 때 사용하누 신경을 기초로 하되, 아리우스주의를 분명히 거부하는 내용이 다수 추가된 신경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콘스탄티누스가 호모우시오스(ὁμοούσιος), 즉 '동일본체'라는 단어를 본문에 삽입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그의 의도와는 달리 또 다른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결국, 아타나시우스파의 주장을 받아들인 니케아 신경이 발표되었다. 니케아 공의회 당시에는 로마 제국 내의 혼란과 이어지는 아리우스파-아타나시우스파 간 의견이 팽팽히 대립했기 때문에, 전체 교회에 대한 구속력은 없었고 지금과 같은 중요성이 있으리라고는 심지어 참석자 본인들도 생각하지 않았다.[19] 그래서 후대의 공의회가 철저히 기록을 남긴 것과 달리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공적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우리와 같은 후대인들이 니케아 공의회의 세부내용과 진행과정을 아는 것은 공의회에 참석했던 사람들 개개인이 남긴 기록들 덕분이다.

3.1.2. 전성기(325~378) - 니케아 공의회에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시기 아리우스파

아리우스주의의 신학은 설명이 논리적이고 간결하다는 매력이 있어 큰 반향을 얻었다. 아리우스파는 당시 로마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 널리 지지자를 얻었고, 저명한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동조자가 많았다. 당대의 유력한 주교인 에우세비우스 등도 아리우스파를 지지할 정도였다.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도 말년에는 아리우스파를 지지했다.

그러나 아리우스파는 결코 주교 사이에서 과반수를 차지한 적이 없었고 결국 서방 삼위일체파는 사르디카(342), 동방 아리우스파는 필리포폴리스(343)에서 따로 대립 공의회 여는 지경에 이르도록 대립이 격심해졌으며, 아리우스파 내부에서도 성부와 성자의 이질 본질과 이질(anomoios)을 주장한 강경한 아리우스파와 성부와 성자의 유사 본질(homoiousios)을 주장한 온건한 반(半)아리우스파로 나뉘어 삼위일체파와 대립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강권을 동원하여 시르미움(351), 아랄라테(353), 메디올라눔(355)에서 아리우스파를 서방에 강요하였으나 아리우스파는 재차 분열하여 시르미움(357)에서 신조를 인정받은 이질 본질 아리우스 강경파, 유사 본질 반(半)아리우스 온건파, 성부와 성자의 유사(homoios)성을 주장한 반아리우스 중도파로 나뉘어 대립한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계속하여 시르미움(358), 안디옥(358), 앙카라(358), 셀레우키아(359), 아리미눔(359), 콘스탄티노폴리스(360) 공의회를 개최하여 중도적 아리우스파로 니케아 신조를 대체,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려 하였지만 아리우스파의 내부 분열은 지속되었다.

전성기 때 아리우스파는 로마 제국의 유권 교파라는 우위에 힘입어 고트족의 사도라 일컫는 불필라(Wulfila)[20]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해, 아리우스주의자로부터 주교 임명을 받았다. 이후 그는 고트 문자를 창제하고 고트어로 성경[21]을 번역[22]하는 등 제국 영토 바깥에 있는 게르만족에 선교를 하여 튜튼의 전통 신앙을 신봉하고 있던 게르만족에 널리 퍼졌다.

특히 성 아우구스티노 이전까지는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의 신학을 따라가는 입장인 경우가 많았으며, 반아리우스주의의 선봉장 역시 성 아타나시오, 그리고 성 바실리오로 대표되는 카파도키아 교부 등 동방교회 교부들이 도맡았다.

발렌스의 삼위일체파와 반아리우스파 탄압으로 아예 동일 본질 삼위일체파 아타나시우스파에 근접한 유사 본질 반아리우스주의가 서로 합세함으로써 이러한 신학적 열세가 계속되었다.

3.1.3. 쇠퇴기(378~381) -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시기 아리우스파: 로마 제국에서의 아리우스파 쇠멸

아리우스파의 지지자들 중에서는 로마 황제들도 있었으며 한세기 가까이 아타나시우스파와 치열한 투쟁을 벌였으나 결국 아타나시우스파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니케아 신경은 구세주가 참 하느님이며 성부와 성자가 동일 본질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자연 성령 성부 성자와 무슨 관계인가?라는 의문이 지속되어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나중에 열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 본질이다"라는 삼위일체론을 일단락지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저 유명한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완성하여 발표한다. 사도신경이 더 널리 알려져 있긴 하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사도신경 이상으로 중요한 신앙고백이다. 사실 사도신경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축약판에 가까우며, 서방교회에서만 사용한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당대에나 후대에나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향후 몇 세기 동안은 '신앙의 완성'으로 평가받았다. 이후 다른 공의회는 없어도 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23]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포되었고,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다시 이단으로 선고되었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동등한 신성을 믿는 아타나시우스파 기독교가 결국 정통파 교회가 되었다. 아리우스파 신자들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니케아파인 테오도시우스 1세 이후 아리우스파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 그라티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 2세 섭정 황태후 유스티나의 후원에 힘입어 세력을 유지하였으나 밀라노 주교의 임명을 두고 다투던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의 중재를 맡았던 평신도 암브로시오, 일명 성 암브로시우스가 아타나시우스파의 열정적인 설득에 세례를 받고 1주일 만에 밀라노 주교로 임명되면서 아리우스파는 치명타를 맞는다.

암브로시우스는 신학을 연구하면서 차츰 아리우스파를 배척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가져온 동방 수사학을 통한 논쟁 능력을 이길 수 있었던 아리우스파가 없다시피 했고 이 과정에서 그의 서방교회 내에서의 위치는 확고부동한 경지에 오른다. 심지어 그의 설교와 논쟁, 이를 통한 설득 능력은 제국 황제에까지 영향을 끼쳐, 그라티아누스 황제까지도 아리우스파에서 아타나시우스파로 전향시켰으며 그 결과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즉 이전까지 로마 황제가 가지고 있던 최고 제사장 자리를 포기하고, 니케 상을 원로원에서 치워버리게끔 했다. 다만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동생이자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인정받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아리우스파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는데, 이는 그의 모후인 유스티나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아리우스파 이단으로부터 제국을 구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은 니케아파, 마그누스 막시무스 반란에 의해 사망(383년)하자, 이탈리아의 실권을 잡은 것은 아직 어린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섭정이었던 아리우스파 황태후 유스티나였다. 이는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이탈리아 침공이 테오도시우스 1세 적절한 개입으로 저지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사망을 기회로 니케상의 복원을 시도한 이교 원로원 의원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의 청원을 막아낸 암브로시오는 이후, 유스티나와 격렬히 대립하기 시작한다.

385년, 유스티나는 근위대가 별도로 예배를 드릴 곳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밀라노 내의 대성당 2곳을 양도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 당시 서로마지역의 근위대는 아리우스파 게르만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실질적으로는 아리우스파 부흥이 목적이었다. 그렇기에 암브로시오는 이를 거부했고, 군대까지 동원한 징발 시도에 대향해 일반 신도들을 모아 바리케이드를 치기도 했다. 이에 유스티나는 암브로시오에게 유배령을 내렸지만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군사적 위협이 차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또 상당한 민중의 지지를 받는 암브로시오에게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아무리 제국의 황제라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기에, 결국 징발령을 철폐하게 되었다.

이러한 양측의 대립은,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탈리아 방위를 위해 파견한 장군 플라비우스 바우토의 사망, 그리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권리를 인정한 협정이 끝난 후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재차 남하하면서 끝이 난다.(387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황급히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달아났는데, 이러한 내전 과정에서 암브로시오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비롯한 황가 일원이 밀라노에서 피신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스티나의 사망 후 암브로시오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까지 아타나시우스파로 전향시키면서 아리우스파의 서방 교회에서의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꺾어놓게 되었다. 로마인들 사이에서 아리우스파 세력은 이 시기에 사실상 사라졌다.

3.2. 후기(381~8세기 초) - 게르만 왕국의 아리우스파

3.2.1. 중흥기(381~496) - 게르만 왕국에서의 아리우스파 중흥

아리우스파가 로마 제국에서는 이단으로 선고되어 쇠락한 반면, 게르만족 사이에서 그 명맥이 이어지게 되었다.[24] 일단 삼위일체보다는 아리우스파의 교리가 더 납득하기 쉬웠고, 로마 황제 교황의 후원을 받는 가톨릭을 신봉하게 되면 게르만 왕들은 로마 황제랑 교황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될 것이니 독자적으로 아리우스 파를 믿어야 할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이 상태에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해 중세가 시작된다. 서로마가 멸망한 후, 서유럽은 주로 아리우스파 종파에게서 비롯한 기독교를 받아들인 게르만계 부족들이 왕국을 건설하였다. 동고트 왕국, 서고트 왕국, 반달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 부르군트 왕국, 헤룰리 왕국, 수에비 왕국, 게피드 왕국, 루기 왕국, 프랑크 왕국, 크림 고트족 등에서 강한 세력을 가지고 북방 게르만족의 민족종교[25]가 되어, 재차 구 서로마 제국 고지의 지배종교가 되었으며, 오히려 삼위일체를 교리로 삼는 서방 칼케돈파(가톨릭)가 또 박해를 받게 될 정도였다.

북아프리카에서는 극단적인 대립 끝에, 반달족을 등에 업은 아리우스파에게 가톨릭 신자들이 보복 학살당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3.2.2. 쇠멸기(496~8세기 초) - 게르만 왕국에서의 아리우스파 쇠퇴와 절멸

하지만 게르만족 왕국들이 멸망하거나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하면서 아리우스파는 몰락하게 된다.

지배자인 게르만족은 아리우스 파를 믿었으나, 피지배자인 다수의 로마인들은 여전히 로마 가톨릭 교도였다. 이들은 수적으로도 우세하였고, 문화적으로도 우월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아리우스 파는 가톨릭 교회와는 달리 광범위한 통합적인 체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리우스파가 동로마와 종교적으로 대립하는 한편으로는 같은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는 게르만족끼리도 싸워서 분란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서로마 제국이 완전히 멸망하고, 서유럽 지역의 종교적 구심점인 서방교회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방교회와 대립하는 구도가 되면서 정치적 상황도 바뀌었다. 이전과는 달리 게르만 왕들에게는 가톨릭을 받아들일 경우 로마 황제의 주도권까지 인정해야 한다는 정치적 부담이 사라졌고, 오히려 스스로 가톨릭의 보호자로 나서 로마 교황의 권위를 등에 업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위에 설 명분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시에 가톨릭을 믿는 서유럽 로마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도 있었다.

이런 정치적 배경에 힘입어 496년에는 프랑크 왕국 클로비스가 가톨릭 교도로 개종[26]하였다. 이렇게 세력을 키운 프랑크 왕국과, 부흥기를 맞아 서방에 다시 영향력을 키우던 동로마 제국이 아리우스파 여러 게르만 왕국을 공격하여 약화시키자, 남은 게르만족 왕국들도 세력 유지를 위해 로마인과의 융합을 도모하여 하나둘씩 가톨릭으로 전향하면서 아리우스파는 더욱 쇠락한다.

487년, 루기 왕국이 헤룰리 왕국에 멸망당하고, 헤룰리 왕국은 493년 동고트 왕국에게 멸망당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534년 반달 왕국, 554년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켰고, 567년에는 게피드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멸망되었다. 그러는 한편 517년에는 부르군트 왕국의 국왕 지기스문트가, 561년~570년 사이에 수에비 왕국의 국왕 아리아미르 또는 테오데미르가, 589년에는 서고트 왕국의 국왕 레카레드 1세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6세기 크림 고트족이 현재의 동방정교회인 동방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616년 랑고바르드 왕국의 국왕, 아달랄트가 랑고바르드 왕국 최초의 가톨릭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최후의 아리우스파 왕 가리발트의 재위를 끝으로 671년 페르타리트가 가톨릭을 국교로 삼고, 8세기 초 쿠닝페르트에 이어 리우프란트 치하에서 완전히 가톨릭화되면서 아리우스파는 모든 기반을 잃고 소멸하게 된다.

아리우스파 세가 강했던 북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이슬람이 진출하자 빠르게 이슬람으로 개종하여[27] 사라졌다.

4. 후예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예수와 신을 분리해서 본 이슬람교의 주장과 유사하다. 다만 이슬람은 예수는 물론 무함마드조차 인간으로 여기지만, 아리우스파의 예수는 하느님보단 훨씬 낮지만 인간보단 훨씬 높은 신적 속성을 갖고 있는 반신(半神)적 존재이다. 종교개혁 당시 반삼위일체론을 펼치다가 화형당한 미카엘 세르베투스와 개신교의 일파 소키누스주의랑 일위론( 유니테리언)과 여호와의 증인 및 크리스트 형제자매회, 단일 오순절교회가 반삼위일체론으로써 아리우스파의 그리스도론과 유사한 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반삼위일체론 교파인 여호와의 증인아리우스를 여호와의 증인 운동을 시작한 찰스 타즈 러셀의 선구자로 여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호와의 증인과 아리우스의 주장은 차이가 있다. 여호와의 증인은 아리우스와는 달리, 카인에게 죽임당한 아벨을 첫 번째 여호와의 증인이라 주장한다.

아리우스는 성부와 성자를 유사본질 즉, 예수가 하느님이기는 하나 열등한 하느님으로 보았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순수한 단일신론(군주신론)으로 예수를 수석 피조물, 미카엘 대천사로써 하나의 피조물 취급하고 있다.[28]

여호와의 증인의 삼위일체 교리는 오히려 유니테리언(일위론)과 가깝다. 그럼에도 삼위일체부정이라는 공통의 뿌리는 갖고 있는 셈. 물론 종교개혁 이후의 근현대 반삼위일체파와 아리우스파는 그리스도론적 신학상으로만 유사성이 있으며 직접적인 계통이 연결되진 않는다.

5. 기타

6. 미디어

아타니시우스파와 대립한 초기 기독교 파벌 세력인 만큼 세계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덕에 기독교 신자와 비신자 가릴 것 없이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고, 엄밀히 말해 사이비 이단으로 간주되거나 이교도 취급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한때는 기독교의 정통 교리로써 기독교의 주류 세력이 되어 로마 제국으로부터 전 유럽과 서양을 차지할 뻔했다가 보편 교회와의 파워 게임에 밀려 몰락하게 된 비사가 후대의 창작자들의 흥미를 자극한 것인지 곧잘 채택되는 소재가 되었다. 간결하고 합리적인 교리가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 것도 한 몫 하는 듯하다.

* 토탈 워: 아틸라에서 동고트, 반달, 알란족의 국교로 등장한다. 또한 고증대로 기본적으로 각각 동서로마의 국교인 그리스 기독교 라틴 기독교 지역에서 약간씩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수도원 건물에서 농업, 목축 건물 수입 보너스 및 추가 식량을 제공하기에 실용적이라 평가받는 편이다.

[1] 이는 이레네우스 영지주의를 지적하면서 언급한, 아들로 칭해지는 존재는 아버지, 아들, 그리고 "입양된 자"뿐이라는 언급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2]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오리엔트 정교회, 네스토리우스파 [3] 사실 각 종교별로 강조점이 다른데 기독교는 믿음, 유대교 이슬람교는 율법준수, 불교는 깨달음 등이다. 그리고 고대 로마 종교에서는 그것이 예식 참례였기에 신앙이 전혀 없어도 종교예식에만 참례하면 해당 종교를 신봉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기독교 박해 당시 분향하는 척만이라도 하라고 종용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4]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다. 기원후 495년설부터 509년설까지 다양하다. [5] 애초에 카롤루스의 정복 전쟁의 명분 자체가 아리우스파를 믿는 이단을 척결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6] 카롤루스의 친 가톨릭 정책은 게르만 신앙을 유지하던 작센족까지 학살을 당하게 되었으며 독일 지방이 급격히 기독교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7] 순교자 안티오키아의 성 루키아노스의 제자였다. [8] 아리우스의 주장은 특히 영지주의를 의식해서 강경한 반(反) 영지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까 영지주의는 천지창조 자체가 어긋난 창조신들에 의해 잘못되었고 예수가 진정한 신격을 가진다고 설명했다면 아리우스는 정 반대로 좀 다른 피조물보다 특별하긴 하나 결국엔 성부인 야훼에게 예수가 종속된 피조물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9] # [10] 만약 이럴 경우 우상숭배라는 비판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11] 아타나시우스파는 아리우스파에게 "너희는 예수를 피조물이라 하면서도 예수를 계속 흠숭하네? 이것들 완전 다신교도들이네." 하며 비난하였고, 아리우스파는 아나스타시우스파에게 "너희는 하느님 외에도 예수를 하느님으로 숭배하네? 이것들 완전 다신교도들이네." 하며 비난하였다. [12] 여기서 "그럼 기독교가 잘못됐네"라고 할 자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그리스도가 참하느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참인간임을 잊지마라. 신학적 입장에서 인간은 하느님께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이후 7세기경에 또 다른 치열한 신학 논쟁을 몰고 온 단의론의 직접적인 기원이 된다. [13] 그리고 이 주축에 성 아타나시오가 위치하기에, 이들은 "아타나시우스파"로 불린다. [14] 출처 <비잔티움 연대기> [15] 그러나 이 문구가 현대 가톨릭이 아리우스를 신학적으로 존경받을 사람으로 본다거나 그의 주장을 이제와서 인정하거나 한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다. 단지 그의 교회음악적인 공적을 인정한다는 의미. [16] 이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경쟁자 리키니우스와 한참 대립을 세우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제국 전체의 완전무결한 통치자가 된 건 일 년 후인, 324년에 이르러서이다. [17] 예수가 신적인 존재라는 것은 아리우스 이전부터 널리 받아들여지던 견해였고, 아리우스 역시 예수를 신으로 보았다. 성부와 동등하거나 혼연일체인 그런 존재라고는 보지 않았지만. [18]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와는 동명이인이다. [19] 니케아 공의회가 폐막한 지 수십 년이 되도록 그런 게 있었는 줄 모르는 주교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이들이 사산 왕조의 왕중왕들에게 박해받던 페르시아 교회의 사람들로, 이들이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사항과 니케아 신경을 받아들인 때는 공의회가 열린 지 85년이 지나 410년이 되어서였다. [20] 작은 늑대란 뜻으로써 라틴어로는 울필라스(Ulfilas) [21] 이 성서의 필사본이 일명 은성서(Silver Bible), 코덱스 아르겐테우스(Codex Argenteus)라 불리며 스웨덴 웁살라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현존하는 게르만족 최초의 문자 기록이자 문학작품이다. [22] 이 고트어 성서는 무삭제 완역판이 아닌 열왕기를 미번역한 삭제판으로 가뜩이나 전투종족인 게르만의 호전성을 더욱 조장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23] 물론 이후에도 신학논쟁은 계속 벌어졌다. 경교, 단성론,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필리오퀘 문제 참조. [24] 서고트족 왕 알라리크, 반달족 왕 가이세리크, 헤룰리족 왕 오도아케르, 동고트의 테오도리크 대왕, 동로마의 실권자 아스파르 등 고대 말 중세 초의 주요 게르만족 우두머리들이 아리우스파 교도였다. [25] 알레마니족, 앵글로색슨족, 프랑크족, 프리시족 튀링겐족, 작센족, 바이에른족과 북유럽의 노르드인은 대체로 게르만 신앙을 믿는 이교도들이었다. [26] 클로비스는 보통 게르만의 전통 종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여겨지지만 아리우스파 개종도 고려했거나, 아리우스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설도 있다. [27] 혹은 기타 칼케돈파 기독교로 개종한다. 사실 무라비트 왕조 무와히드 왕조 전까지는 북아프리카에 많은 기독교도가 살았다. [28] 단 아리우스파 역시 단일신론으로써 예수를, 하느님의 최초이자 최고의 피조물로 여긴다. 창조주와 피조물, 참 신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인 것. [29] 물론 성상 논쟁은 훨씬 뒤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일어나긴 하지만, 당시에도 아주 없던 것은 아니다. [30] 종교다원주의 성향인 유니테리언을 제외하면 현대 반삼위일체 교파들도 성상 및 성화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31] 면담 후 한 신도가 "왜 그렇게까지 마리우스에게 매달리냐"고 하자 곧바로 그를 꾸짖으며 "참회동에서 속죄하라"고 할 정도다. [32] 더 아이러니한건 인노첸시오 1세가 받아들인 알라리크 역시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는 고트족이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