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고바르드 국왕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1.4px" |
알보인 | 클레프 | 아우타리 | 아길루프 | 아달랄트 |
아리알트 | 로타리 | 로달트 | 아리페르트 1세 |
페르타리트 고데페르트 |
|
그리말트 | 가리발트 | 페르타리트 | 알라히스 | 쿠닝페르트 | |
리우페르트 | 라긴페르트 | 아리페르트 2세 | 안스프란트 | 리우프란트 | |
힐데프란트 | 라치스 | 아이스툴프 | 데시데리우스 | }}}}}}}}}}}} |
랑고바르드 10, 13대 국왕 Perctarit | 페르타리트 |
||
제호 | 한국어 | 페르타리트 |
라틴어 | Perctarit | |
생몰 년도 | 미상 ~ 688년 | |
재위 기간 |
661년 ~ 662년(1차 재위) 671년 ~ 688년(2차 재위) |
[clearfix]
1. 개요
랑고바르드 왕국 10, 13대 국왕.2. 행적
랑고바르드 왕국 9대 국왕 아리페르트 1세의 아들로, 형제로 고데페르트가 있었다. 661년 임종을 눈앞에 둔 아리페르트 1세는 공작들에게 그와 고데페르트를 공동 왕으로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유언에 따라 고데페르트와 함께 왕위에 올랐고 나라를 양분했다. 그는 밀라노에서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받았고, 고데페르트는 파비아에서 아리우스파의 지지를 받았다.그러나 두 사람은 곧 왕권을 독차지하기 위해 내전을 벌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고데페르트는 베네벤토 공작 그리말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말트는 장남 로무알트 1세에게 베네벤토를 맡긴 뒤 파도바로 진군했다. 그는 즉시 성문을 열고 그리말트를 환대했다. 그러나 그리말트는 진작에 딴 마음을 품고 있었다. 얼마 후, 고데페르트는 그리말트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에게 살해당했다. 그 후 그리말트는 밀라노에 군림하던 그를 축출한 뒤 고데페르트의 누이 테오도타와 결혼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밀라노에서 쫓겨난 뒤 아바르족에 귀순했다. 그러나 그리말드가 그를 넘기지 않으면 침공하겠다고 위협하자, 아바르족은 전쟁을 피하고 싶었기에 그를 이탈리아로 내보내려 했다. 그러자 그는 프랑크 네우스트리아 왕국으로 망명했다. 663년, 그리말트는 아스티로 침입한 프랑크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나, 페르타리트를 프랑크 왕국에서 끌어내거나 제거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그러던 671년 고데페르트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 가리발트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귀족들은 어린 아이를 왕으로 모실 수 는 없다며 그를 파비아로 소환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당시 그는 프랑크 왕국의 박대에 환멸을 느끼고 앵글로색슨족이 지배하는 브리튼으로 망명하려 했지만, 여행 중에 신성한 음성이 들려오면서 자신의 적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곧장 파비아로 돌아와 가리발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복귀했다. 그 후 베네벤토 공작이자 그리말트의 장남인 로무알트 1세와 협의한 끝에 그가 무제한의 자치권을 누리는 걸 허용하는 대신 자신의 아내 로델린다와 아들 쿠닝페르트를 파비아로 돌려보내게 했다.
그는 가톨릭 신봉자로, 랑고바르드족이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사력을 다했다. 가톨릭 주교들에게 각자 교구를 맡아서 백성들을 설복시키도록 독려했으며, 왕국 전역에 교호와 수도원을 세웠으며, 밀라노 대주교가 대규모 공의회를 개최하는 걸 허용했다. 678년 아들 쿠닝페르트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며, 680년에는 동로마 제국과 "영원한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이탈리아 분할을 비준했다. 이 협약은 680~6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단성론을 비난한 공의회에 참여한 랑고바르드 사절단에 의해 비준되었다. 이 협약에 따르면, 랑고바르드 왕국은 라벤나 총독부, 로마, 나폴리 등 동로마 제국의 주권 아래 남아있는 영토를 공격하지 않는 대신 이탈리아 대부분에 대한 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아리우스파 세력이 강성했던 이탈리아 북동부 지역의 반감을 샀으며, 랑고바르드 귀족들은 쓸데없는 협약을 맺는 바람에 영지를 늘릴 기회가 사라졌다며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트렌토 공작 알라히스를 새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680년 알라히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바이우바리족의 지원에 힘입어 이를 진압했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발이 두려웠기에 다시는 왕위를 노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사면했다.
688년, 페르타리트는 파비아에서 사망했다. 사후 알라히스가 또다시 정변을 일으켜 쿠닝페르트를 코모 호수 한 가운데에 있는 섬에 세워진 성에 유폐시켰다. 하지만 알라히스의 폭압적인 통치에 분노한 민중이 689년 봉기를 일으켜 그를 죽이고 쿠닝페르트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