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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1 02:20:41

후안도


진서(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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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흥 · 서원 · 완전부 · 기승진 · 유계종 · 여법량 · 여문현 · 여법진 · 주석진 · 육험 · 사마신 · 시문경 · 심객경 · 공범
78·79권 「이맥전(夷貊傳)」
임읍 · 부남 · 중천축국 · 사자국 · 고구려 · 백제국 · 신라 · · 부상국· 하남왕국 · 탕창 등지 · 무흥국 · 형옹주·예주만 · 고창 · 쿠처 · 우전국 · 파사국 · 연연
80권 「적신전(賊臣傳)」
후경 , 왕위, · 웅담랑 · 주적 · 유이 · 진보응
(1) 본명이 주철호(周鐵虎)로 당태조로 추존된 이호(李虎)를 피휘하여 무(武)로 개칭되었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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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0275d><colcolor=#fff> 侯安都
후안도
작위 부천현자(富川縣子) → 서강현공(西江縣公)
→ 청원군공(淸遠郡公) → 계양군공(桂陽郡公)
→ 진집현후(陳集縣侯)
후(侯)
이름 안도(安都)
성사(成師)
생몰 520년 ~ 563년
부친 후문한(侯文捍)
출신 시흥군(始興郡) 곡강현(曲江縣)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왕승변 토벌2.3. 북제군 방어2.4. 소발의 난2.5. 왕림 토벌2.6. 진천 옹립2.7. 공신으로서 받은 대우2.8. 유이 토벌2.9. 오만과 몰락
3. 사후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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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조시대 남진의 장수로 자는 성사(成師).

2. 생애

2.1. 초기 생애

시흥군(始興郡) 곡강현(曲江縣) 출신으로 예서에 뛰어났고 고금을 잘 연주했으며, 경사를 섭렵했고 오언시를 매우 화려하게 썼으며, 기마궁술에도 뛰어났다. 뒤에 양나라의 시흥내사 소자범에게 벽소되어 주부가 되었다.

후경의 난이 벌어지자, 후안도는 3,000명의 병사들을 모았다. 진패선이 후경에 대항하고자 거병하여 건강(建康)을 구원할 때 후안도는 진패선의 휘하로 들어갔고 채노양(蔡路養)을 공격하고 이천사(李遷仕)를 물리치고 후경을 평정할 때 모두 공을 세웠다. 뒤에 후안도는 효원제로부터 맹렬장군(猛烈將軍),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로 제수되었고 부천현자(富川縣子)에 봉해졌으며, 식읍 300호를 받았다. 또한 진패선을 따라 경구(京口)에 진수했고 난릉태수(蘭陵太守)로 제수되었다.

2.2. 왕승변 토벌

555년, 진패선이 왕승변을 토벌하고자 할 때 진패선의 다른 장수들은 모두 이를 알지 못했고 후안도와 계책을 논의했다. 후안도는 수군을 이끌고 경구에서 출발하여 석두(石頭)로 향했고 진패선은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나락(羅落)을 따라 후안도와 합류하였다. 후안도의 배가 석두성으로 도착하려고 할 즈음, 진패선이 진군을 멈추자 후안도는 두려워하여 진패선에게 말했다.
오늘 역적질을 한 것은 이미 사실이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는 반드시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뒤에서 무엇을 더 바라려고 하십니까? 만약 실패하면 모두 죽을 것인데, 뒤에 가면 목이 잘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남사』, 「후안도전」

그러자 진패선이 말했다.
후안도가 나를 꾸짖는구나!

진패선이 후안도의 말을 듣고 진군을 재개한 한편, 후안도는 석두성 북쪽에 도착하여 배를 버리고 상륙했는데 왕승변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석두성은 성가퀴가 매우 높고 험하지 않아서 후안도는 직접 갑옷을 입고 칼을 찬 다음 병사들과 함께 왕승변의 침실로 잠입했다. 이때 진패선의 군대 또한 도착해서 청사 앞에서 왕승변과 전투를 벌인 끝에 왕승변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공을 세워서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남서주제군사(都督南徐州諸軍事), 인위장군(仁威將軍), 남서주자사로 제수되었다. 이후 진패선이 두감을 토벌할 때 후안도는 건강에 남았다.

2.3. 북제군 방어

한편 서사휘(徐嗣徽)와 임약(任約) 등이 북제군을 끌어들여 석두를 점령하고 건강으로 침공하자, 후안도는 성문을 닫고 깃발을 뉘었다. 그리고 성 안에 있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성벽에 올라 적의 형세를 보는 자들은 참수하겠다!

그리고 밤에 북제군이 석두로 물러나자 후안도는 병사들에게 몰래 방어구를 만들라고 명하였다. 아침에 서사휘가 이끄는 기병이 다시 침공하자, 후안도는 3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성문을 열어 출병하였다. 북제군은 후안도의 공습에 대패하여 건강을 침공하지 못했다. 이후 진패선이 돌아오자 후안도는 수군을 이끌고 북제군의 식량 수송을 차단하였으며, 또한 진군(秦郡)을 습격하여 서사휘의 책성을 함락하고 서사휘의 가족은 물론 군수품을 노획하였다. 그 중에는 서사휘가 썼던 비파와 서사휘가 길렀던 매가 있었는데, 후안도는 이것들을 서사휘에게 돌려보내면서 다음의 서신을 보냈다.
어제 아우님의 처소에서 이것들을 얻었는데 지금 아우님에게 돌려주겠소.

후안도의 서신을 본 서사휘는 매우 놀라서 화친을 청하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한편 후안도는 채석(採石)을 점령하던 북제의 잔당을 공격하기도 했다.

556년, 후안도는 다시 양산(梁山)에 주둔하여 북제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이때 서사휘 등이 다시 단양(丹陽)을 침공하고 호숙(湖熟)에 이르자, 진패선은 후안도를 불러들여 고교(高橋)에서 북제군을 방어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경단(耕壇) 남쪽의 전투에서 후안도는 기병 12기를 이끌고 적진을 돌파하여 북제의 의동삼사 걸복무로(乞伏無勞)를 사로잡았고 북제의 장수 동방로(東方老)를 찔러 말에서 떨어뜨렸으나 북제의 기병이 도착하면서 동방로를 사로잡지는 못했다.

북제군이 장산(蔣山)을 통과하자, 후안도는 다시 용미(龍尾)에서 북제의 장수 왕경보(王敬寶)와 전투를 벌이면서 사촌동생인 후효(侯曉)와 수하 장수인 장찬(張纂)에게 하여금 돌격을 명했으나 후효는 창에 찔려 말에서 떨어졌고 장찬은 전사하였다. 후안도는 재빨리 후효를 구출하고 북제의 기병 11명을 죽인 뒤 장찬의 시신을 거두고 돌아와서 북제군이 감히 나서지 못했다. 한편 진패선이 북제군과 막부산(莫府山)에서 전투를 벌일 때 후안도는 1,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하(白下)에서 북제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후안도는 다시 부하들을 이끌고 섭산(攝山)에서 북제군을 추격하였다. 후안도는 이때의 전공으로 작위가 후(侯)로 올라갔고 식읍 500호가 늘어났다. 또한 평남장군(平南將軍)으로 진호되었고 서강현공(西江縣公)으로 개봉되었다.

2.4. 소발의 난

557년, 후안도는 예장(豫章)으로 출병하여 예주자사(豫州刺史) 주문육을 도와 진패선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소발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후안도가 도착하기 직전에 주문육이 이미 소발을 참수했고 더불어 소발의 장수 구양위와 부태(傅泰) 등을 사로잡았지만 여효경(余孝頃)과 소발의 아들 소자(蕭孜)만은 아직 예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효경과 소자는 2개의 성을 이어 여효경과 소자가 각각 하나의 성을 차지했고 또한 함선들을 많이 만들고 강을 끼며 포진하고 있었다. 후안도는 밤에 예장에 도착하여 여효경과 소자의 군함들을 불태웠고 주문육과 함께 상륙하여 진군하였다. 여효경이 후방을 차단하자, 후안도는 군사들에게 소나무를 베어 울타리를 치도록 명한 다음 천천히 진군하여 연전연승한 끝에 소자의 항복을 받아냈다. 여효경은 신오(新吳)로 도망쳤다가 아들을 인질로 보낸다는 조건 하에 강화를 청했다. 후안도는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진호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더해졌다.

2.5. 왕림 토벌

이후 후안도는 무창(武昌)에서 주문육과 합류하여 왕림을 토벌하고자 출병하였다. 출병하기 직전 대신들이 신림(新林)에서 후안도와 주문육을 전별했는데, 이때 후안도는 말을 달리다가 다리를 건널 때 물 속에 빠지거나 성내에 앉다가 망루에 빠져서 당시 사람들은 이를 상서롭지 못한 징조로 여겼다. 후안도가 무창에 도착할 때 왕림의 장수 번맹(樊猛)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주문육 또한 예장에서 무창으로 도착하였다. 한편 진패선이 양나라의 마지막 황제 경제 소방지로부터 선양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후안도는 탄식하며 말했다.
우리는 이번에 틀림없이 패배하여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벌이고 말 것이다!
『자치통감』, 「진기(陳紀) 1」

후안도와 주문육은 서로 통솔이 맞지 못했고 부하들끼리도 서로 싸우는 바람에 점점 협조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후안도의 군대가 영주(郢州)에 도착했을 때 왕림의 장수 반순타(潘純陀)가 성에서 노를 쏘며 관군을 요격하자 후안도는 분노하여 진군하여 영주성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한편 왕림이 엄구(弇口)로 도착하자, 후안도는 영주의 포위를 푼 뒤 군사들을 총동원하여 돈구(沌口)로 출병하여 왕림을 막으려고 했으나 강풍을 만나서 진군하지 못했다. 왕림이 동안을 점령하고 관군이 서안을 점령하며 며칠 동안 대치하다가 비로소 교전을 벌였지만 결국 후안도는 대패하였다. 후안도와 주문육, 서경성(徐敬成)은 모두 왕림에게 사로잡혀 유폐되었으며, 왕림은 긴 쇠사슬로 이들을 모두 묶어 선창에 둔 뒤 자신이 신임하는 환관인 왕자진(王子晉)에게 그들을 감시하도록 명했다.

558년, 왕림이 분성(湓城) 백수포(白水浦)에 도착할 때 후안도 등은 왕자진에게 감언이설을 하고 후한 뇌물을 주었다. 여기에 넘어간 왕자진은 낚시를 핑계 삼아 밤에 후안도, 주문육, 서경성을 육지로 올려보냈다. 이들은 풀숲에 숨었다가 영지로 돌아왔다. 이후 이들은 수도로 돌아와 무제에게 죄를 줄 것을 청했지만 진패선은 이들을 모두 사면하고 그들의 관작을 복구하였다. 뒤에 후안도는 단양윤이 되었으며, 도독남예주제군사(都督南豫州諸軍事), 진서장군(鎭西將軍), 남예주자사로 전출되었다.

559년, 후안도는 주문육의 후속부대로 출병하여 여효매(余孝勱)와 왕림의 장수 조경(曹慶), 상중애(常衆愛) 등을 공격하였으며, 궁정호(宮亭湖)에서 송문(松門)으로 출병하여 상중애의 후방을 추격하였다. 한편 주문육이 웅담랑에게 살해당하자 후안도는 곧바로 회군하여 전함들을 탈취했으며, 왕림의 장수인 주경과 주협(周協)이 돌아가려고 하자 그들과 전투를 벌여 물리치고 주경과 주협을 사로잡았다. 여효매의 아우 여효유(余孝猷)는 왕림에게 돌아가려고 했지만 주경과 주협이 후안도에게 사로잡히자 결국 후안도에게 투항하였다. 후안도는 다시 금기주(禽奇洲)로 진군하여 조경과 상중애 등을 물리치고 그들의 함선을 불태웠다. 상중애는 여산(廬山)으로 달아났다가 도중에 살해당했다.

2.6. 진천 옹립

후안도가 남환(南皖)으로 회군하던 도중 무제가 붕어하였다. 후안도는 임천왕(臨川王) 진천을 따라 조정으로 돌아와 대신들과 함께 진천의 즉위를 논의하였다. 이때 진천은 겸양의 태도로 나섰고, 태후 장요아 북주에서 귀국할 예정인 형양왕 진창의 사정을 고려하여 영을 내리지 않고 있었으며, 대신들도 의견 조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자 후안도는 다음과 같이 대신들에게 일갈했다.
지금 사방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멀리 있는 형양왕을 기다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임천왕 전하는 천하에 공이 있으시니 마땅히 함께 임천왕 전하를 세워야 합니다. 오늘의 일을 나중에 호응하는 자는 참수하겠습니다!

후안도는 말을 마친 뒤 칼을 찬 채 궁전으로 들어가 장요아에게 옥새를 내놓게 했으며, 진천의 머리카락을 직접 풀어준 뒤 진천에게는 무제의 붕어를 애도하게 하였다. 이날 진천이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2대 황제인 문제였다. 후안도는 사공(司空)으로 옮겼고 거듭 도독남서주제군사(都督南徐州諸軍事), 정북장군(征北將軍), 남서주자사가 되었다.

이후 왕림이 책구(柵口)로 침입하자, 후진, 서도와 함께 왕림의 침공을 방어하고자 무호(蕪湖)에 주둔하였다. 당시 대도독은 후진이었지만 군대의 지휘와 경략은 모두 후안도가 맡았다. 560년, 왕림이 패배하여 북제로 달아나자, 후안도는 분성(湓城)으로 진군하여 왕림의 잔당을 토벌하였다.

이후 진창이 북주에서 귀국할 때 문제에게 서신을 전했는데, 서신의 내용이 불손해서 문제가 서신을 보고는 기뻐하지 않았다. 문제가 후안도를 불러 말했다.
태자가 곧 돌아오니, 나는 번왕이 되어 노후를 보낼 곳을 찾아야겠소.

그러자 후안도가 말했다.
예로부터 천자를 대신한 적이 있었습니까? 소신은 삼가 감히 조칙을 받들 수 없습니다.

후안도는 말을 마친 뒤 자신이 직접 진창을 맞이할 것을 주청했으나 장강을 건너던 도중 진창이 익사하면서 이는 무산되었다. 후안도는 청원군공(淸遠郡公)으로 진봉되었고 위세와 명성이 중해지면서 후안도보다 뛰어난 대신들은 없었다.

2.7. 공신으로서 받은 대우

한편 후안도의 부친 후문한(侯文捍)이 시흥내사(始興內史)를 지내다가 죽은 뒤 문제는 후안도를 불러들여 수도로 돌아오게 하고 후문한의 죽음을 알렸다. 뒤에 후문한을 산기상시(散騎常侍),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추증하고 후안도의 모친을 청원국태부인(淸遠國太夫人)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후안도의 모친을 수도로 맞이하려고 했지만 모친이 고향에 남겠다고 굳게 청하자 결국 계양군(桂陽郡)의 여성현(汝城縣)을 노양군(盧陽郡)으로 나누고 형주(衡州)의 시흥군(始興郡)과 안원군(安遠郡)을 나누어 동형주(東衡州)를 설치한 뒤에 후안도의 사촌동생 후효를 자사로 삼고, 후안도의 3남인 후비(侯秘)의 나이가 9살이었기에 후비를 시흥내사로 삼고 아울러 고향에서 기르도록 명하였다. 그해에 후안도를 계양군공(桂陽郡公)으로 개봉하였다.

이후 북주와 남진이 상주(湘州)에서 충돌할 때 후안도는 후진의 후속부대로 출병하였다.

2.8. 유이 토벌

후안도가 상주에서의 출병을 끝낸 뒤 동양군에서 유이가 반란을 일으키자, 후안도는 다시 유이를 토벌하고자 출병하였다. 유이는 관군이 전당강(錢塘江)을 거슬러 올라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후안도는 육로를 통해 제기현(諸暨縣)을 거치고 영강현(永康縣)으로 출병하였다. 여기에 놀란 유이는 결국 도지령(桃枝嶺)으로 달아나 산골짜기에 성채를 세워서 관군을 막으려고 했다. 후안도는 연성을 쌓고 진군하며 직접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도중에 화살을 맞았지만 오히려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전투를 지휘했으며, 산을 따라 제방을 세웠다.

이듬해인 562년, 비가 내리면서 빗물이 제방에 가득 차자, 후안도는 함선들을 이끌고 제방으로 들어가서 유이의 성루를 파괴하였다. 유이는 차님인 유충신(留忠臣)과 함께 진안(晉安)으로 달아났으며, 후안도는 유이의 처자를 사로잡고 유이의 인마와 무기들을 모두 노획한 뒤 부대를 정돈하여 돌아갔다. 또한 시중(侍中), 정북대장군(征北大將軍)이 더해졌고, 백성들이 예궐하여 비석을 세우고 후안도의 공적을 칭송하도록 청하니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2.9. 오만과 몰락

후안도는 왕림을 토벌한 이후 자신의 공적이 가장 크고 사직의 안정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하여 점점 오만해져갔다. 후안도는 문무에 뛰어난 선비들을 널리 초빙하여 기마와 궁술을 훈련하거나 시를 짓게 하고 그 성적에 따라 상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저개, 마추, 음갱(陰鏗), 장정견, 서백양, 유산(劉刪), 조손등(祖孫登), 소마하, 배자열 등이 후안도의 빈객이 되었다. 후안도의 부하 장수들은 대부분 법도를 따르지 않았고 추궁을 당하면 후안도가 대부분 비호해주었다.

문제 또한 후안도를 점점 경계하기 시작했는데, 559년 중운전(重雲殿)에 화재가 났을 때 후안도가 병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나자 문제는 여기에 대해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또 한번은 연회를 열 때 후안도가 배석했는데, 후안도가 이때 문제에게 말했다.
지금의 생활은 임천왕이셨을 때와 비교하면 어떠십니까?

문제는 처음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후안도가 누차 묻자 이에 대답했다.
제위에 오른 것은 천명이지만 명공의 힘에 입은 바도 있소.

후안도는 문제의 대답을 듣고 만족했지만 문제는 속으로 후안도를 미워했다. 후안도는 또한 자신의 일족에게 연회를 열 생각으로 문제에게 황제의 휘장과 그릇을 빌려달라고 주청했는데, 문제는 후안도의 주청을 받아들였지만 더욱 기분이 언짢았다. 다음날, 후안도가 궁전에서 빈객들과 연회를 열 때 자신은 황제의 자리에 앉고 빈객들은 신하들의 자리에 앉았다. 또한 표문이 도착하면 후안도는 봉함을 열고 자신이 글귀를 추가로 넣기도 했다.

이후 주적이 조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때 조정 내에서는 후안도가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문제는 주적을 토벌하고자 후안도 대신 오명철을 파견했다. 한편으로 문제는 사자들을 보내 후안도의 부하들을 심문했고 모반의 정황을 찾으려고 해서 후안도는 여기에 큰 불안을 느꼈다. 후안도는 자신의 별가 주홍실(周弘實)을 사인 채경력에게 보내 궁중의 일을 묻게 했고, 채경력은 이 일에 대해 문제에게 후안도가 모반하려고 했다고 상주하였다.

563년, 문제는 후안도가 자신의 통제를 받지 못할 것을 염려해서 후안도를 도독강오2주제군사(都督江吳二州諸軍事),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강주자사로 제수하였다. 그리고 후안도가 건강으로 돌아올 때 문제는 가덕전(嘉德殿)에서 후안도에게 연회를 베풀어주는 한편 후안도의 부하 장수들을 상서조당(尙書朝堂)에 집결시켰다. 후안도는 좌우의 병사들에게 붙잡혀 구류되었고, 후안도의 부하 장수들은 무기를 빼앗긴 뒤에 풀려났다. 문제는 후안도의 죄상이 적힌 채경력의 상주문을 공표한 뒤 후안도를 사사시켰다.

3. 사후

사후 문제는 후안도의 장사를 후하게 지내도록 명했으며, 후안도의 집안을 사면하였다.

571년, 선제 진욱이 후안도를 진집현후(陳集縣侯)로 추증하고 식읍 500호를 내렸으며, 아들인 후단(侯亶)을 후안도의 후사로 삼았다.

4. 여담

진패선이 건강에서 장수들과 연회를 열 때 두승명, 후안도, 주문육이 배석했다. 이때 세 장수들은 술을 권하며 자신의 공적을 자랑했는데, 진패선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들은 모두 뛰어난 장수들이지만 모두 단점이 있소. 두공(杜公)은 뜻은 크지만 식견이 어두우며, 아랫사람에게는 친근하지만 윗사람에게는 오만하며,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면서 자신의 결점은 숨기지 않소. 주후(周侯)는 친구를 사귈 때 사람을 가리지 않지만 남을 너무 성심껏 대하며, 위험할 때는 의심하고 대비하지 않소. 후랑(侯郞)은 오만방자하여 만족할 줄 모르며, 경박하고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오. 모두 스스로를 보전하는 도리가 아니오.

결국 진패선의 말이 이들의 최후에 들어맞게 되었다는 것이 남사와 진서에 전하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