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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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桓豁(320 ~ 377)
동진의 인물로 자는 낭자(朗子). 예주 초국(譙國) 용항(龍亢) 출신. 환이의 삼남이자 권신으로 유명한 환온의 동생이다.
2. 생애
일찍이 명성이 있어 사도부 속관과 비서랑 직책을 제안받았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무군장군 사마욱의 부름을 받아 그의 종사중랑이 되었고, 조정에서 그를 이부랑, 황문랑으로 옮기려 했지만 병을 이유로 전부 사양했다.승평 5년(361년) 4월, 형인 대사마 환온에 의해 면중7군제군사(沔中七郡諸軍事), 건위장군, 신야의성2군태수(新野義成二郡太守)에 임명되었다. 환활은 환온의 명을 받아 허창을 공격해 전연의 장수 모용진(慕容塵)을 격파하고, 그 공으로 우장군으로 승진했다.
영녕 3년(365년) 2월, 감형양옹주제군사(監荊揚雍州諸軍事), 영호남만교위(領護南蠻校尉), 형주자사, 가절에 임명되고, 장군직은 전과 같이 하였다.
영녕 4년(366년) 3월, 환온의 명을 받고 독호 환비(桓羆)를 남정(南鄭)으로 파견해, 성도왕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킨 사마훈 토벌에 참여하게 했다.
영녕 4년(366년) 7월, 전진의 보국장군 왕맹, 전장군 양안, 양무장군 요장 등이 20,000 군사로 형주 남향군(南鄕郡)을 침공했다. 환활이 전진군을 막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신야(新野)에 주둔하자, 전진군은 방향을 돌려 안양(安陽)의 백성 10,000여 호를 노략질하고 돌아갔다.
영녕 5년(367년) 5월, 경릉태수 나숭(羅崇)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완(宛)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킨 남양독호 조홍(趙弘), 조억(趙憶) 등을 격파했다. 전연은 남중랑장 조반(趙盤)을 보내 반란군을 돕게 했지만, 환활은 조반도 격파하고 그를 노양(魯陽)까지 추격한 끝에 사로잡아 도성 건강(建康)으로 압송시켰다. 반란을 완전히 진압한 환활은 완성에 군대를 남겨 수비케 하고, 남쪽으로 돌아가 영주(寧州)와 익주(益州)의 군사 업무를 감독했다.
영강 원년(373년) 7월, 대사마 환온이 사망하자, 정서장군에 임명되고 독교광병전5주군사(督交廣并前五州軍事)로 승진했다.
영강 원년(373년) 11월, 전진의 선소제 부견이 여러 갈래로 군대를 보내 동진의 양주와 익주를 공격했다. 환활은 강하상 축요(竺瑤)에게 군대를 주어 구원하게 했는데, 광한태수 조장(趙長)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명을 내려 축요를 돌아오게 했다. 동진의 양주자사 양량(揚亮), 익주자사 주중손(周仲孫)은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전진군에 대항했지만 결국 패배했고, 주중손 등은 영토를 지키지 못한 죄로 면직되었다.
태원 원년(376년) 3월, 전진이 동맹국인 전량을 정벌하자 거기장군 환충은 연주자사 주서, 환활의 아들인 강주자사 환석수를 보내 전량을 구원하게 했다. 환활 또한 독호 환비에게 군사를 주어 면수(沔水)와 한수(漢水)를 통해 전량을 성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5개월만에 전량의 군주 장천석은 전진에게 패하면서 항복했고, 동진은 모든 구원군을 물렸다. 조정에서 환활을 서정대장군으로 삼고 개부(開府)를 허락했으나, 환활은 상소해 굳게 사양했다. 이때 조정에서 그의 사양을 불허하니, 환활은 서정대장군 직책만 마지 못해 받았으며, 끝내 개부는 하지 않았다.
태원 2년(377년) 봄, 전량 멸망에 위협을 느낀 동진 조정은 중서랑 왕심지(王尋之)를 형주로 보내 환활과 변경의 일을 상담하게 했다. 이에 환활이 표를 올려, 양주자사 모목지는 면북(沔北)의 군사를 감독하게 하고, 연주자사 주서를 남중랑장으로 삼아 면중(沔中)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양양(襄陽)에 진수시킬 것을 건의하니, 조정에서 그의 건의대로 행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환활이 사망했다. 향년 58세. 시호는 경(敬).
조정에서는 그를 사공으로 추증해주고, 돈 500,000전, 베 500필을 하사했다. 또, 사지절을 보내 그의 장례를 돕게 했다. 아들이 20명이나 있었으며, 모두 '석(石)O' 돌림자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