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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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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치적 타이틀3. 개인적 면모4. 일화
4.1. 정계 입문 이전4.2. 정계 입문 이후

1. 개요

홍준표 이모저모를 정리하였다. 그 내용이 워낙 방대해 홍준표/여담 문서로 분리하였다.

2. 정치적 타이틀

3. 개인적 면모

4. 일화

4.1. 정계 입문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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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정계 입문 이후



[1] 만약 다음 지방선거에 출마해 재선에 성공한다면 경상남도지사를 35, 36대를 지낸것처럼 대구광역시장도 35, 36대를 지내는 진귀한 기록이 탄생한다. [2] 2011년 한나라당(여당) 대표, 2017년 자유한국당(야당) 대표. 다른 인물의 사례로는 이해찬(2012년 민주통합당(야당) 대표, 2018년 더불어민주당(여당) 대표)의 사례가 있다. [3] 한나라당 때는 집단지도체제 하 대표최고위원, 자유한국당 때는 단일지도체제 하 당대표 [4] 2012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얻은 득표수가 역대 경상남도지사 선거 최다 득표수다. 최고 득표율은 아니다. [5] 홍준표 이전의 비수도권 광역단체장들은 모두 그 지역의 국회의원을 먼저 지내고 광역단체장이 되거나, 아예 국회의원을 지낸 적 없이 바로 당선됐으면 됐지 수도권 국회의원을 지내다가 비수도권 광역단체장으로 내려와 바로 당선된 사례는 단 1명도 없었다. 홍준표 이전의 세 경남지사( 김혁규, 김태호, 김두관)도 모두 국회의원 경력 없이 경남지사부터 먼저 하고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홍준표 이후의 두 경남지사( 김경수, 박완수)도 모두 경상남도 국회의원을 먼저 하고 경남지사가 되었다. 이 기록을 이은 게 서울특별시 국회의원만 지내고 바로 민선 6기 대구시장, 제주지사로 내려온 권영진, 원희룡, 그리고 경기도 국회의원만 지내고 민선 7기 경기지사는 낙선했다가 민선 8기 충북지사로 내려온 김영환이다. 반대로 수도권 지역 국회의원 경력 없이 비수도권 국회의원만 지내고 바로 수도권 광역단체장으로 올라와 당선된 수도권 광역단체장은 홍준표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것도 전라북도 국회의원만 지내고 민선 2기 서울시장으로 올라온 고건이 유일하다. 그리고 경남지사와 달리 대구시장은 대구광역시 국회의원( 수성구 을)을 먼저 하고 당선되었다. [6] 19대 대선 때부터 다수의 네티즌들이 ESTJ일 것으로 예상했었다. [7] 재밌게도 2024년 아시안컵에서의 참사 이후 거침없는 발언을 한 것으로 화제가 된 두 사람이 이경규와 홍준표이다. [8] 그 당시 유신 사태로 지방에서 상경한 학생들은 학교에서 본가로 귀가 조치를 시킨데다가 방송국도 사태로 여러모로 일이 꼬였기 때문에 시험을 보는 것이 힘들 수밖에 없다. [9] 박명수는 합격했지만 홍준표는 원서만 내고 유신사태로 인해 실기 시험을 보러 가지 못했다. [10] 홍준표 본인도 이제는 별명이 안 생기는 게 희망사항이라 말할 정도. [11] 그래서 작은 누나는 늘 홍준표에게 "네가 남자라서 우리 집 대표선수로 공부하는 것이다"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12] 설령 박근혜 정부 시기였다 한들 당 내 비주류라 채용에 이득이 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19대 총선과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에 중앙당과 청와대에서 홍준표를 도와줬다가는 다음 선거에서 공천을 안주겠다며 압박을 넣었었다. 이 때문에 박근혜가 당권을 장악한 2012년부터 탄핵 직전까지는 그 흔한 지원유세 한번 못받아봤다고. [13] 게다가 본인의 성인 洪씨의 한국어 음독이 붉을 홍(紅)과 같은 점도 묘하게 작용하는 듯. [14] 다만 대선 후에 밝힌 바로는 자기가 원해서 노래를 부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미 판 자체가 너무 불리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말은 한 마디도 들어 주지 않았고, 그래서 유세 분위기를 띄우고 부드럽게 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전략을 썼다고 한다. # [15] 이순삼 씨 덕분에 꾸깃꾸깃하던 자신의 인생이 폈다고 말한다거나, 지금도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등 사랑을 종종 표현한다. [16] 다만 특이한 것은 아닌게 지금까지 전통적 성 역할을 중시하는 발언을 자주 한 것을 보면 온정적 성차별주의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17] 유승준의 국내 입국을 차단한 법률이었다. [18] 물론 현재는 63kg까지 늘어서 정상 체중이다. [19] 사실 1950년대생 남성들의 평균 신장이 170cm가 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많이 마르기는 했지만 또래 남성에 비해 결코 단신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20] 다만 이 중 김무성 주호영 바른정당 탈당 사태 당시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다. [21] 정치인은 아무래도 인상 쓰고 싸울 일이 많기 때문인지 대다수가 인상이 날카롭고 험악한 편이다. 일례로 닮았다고 평가받는 김정숙 여사와 박영선을 보면 박영선의 인상이 훨씬 날카로운 걸 볼 수 있다. 그 박영선도 정치인 중엔 비교적 웃는 얼굴상이라는 것. [22] 박원순이 사망하고 페이스북에 그를 추모하는 글을 올렸으며, 추모에 대해 딴지를 거는 네티즌이나 정치인에게 일갈하기도 하였다. [23] 원래 교통사고로 인해 무릎관절에 철심이 박혀있어 군면제 대상이었지만 자원입대해서 병역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4] 해병대는 그 규모상 사단내지 소규모 군단 수준이라 대장 지휘관 보임 필요성이 떨어진다. [25] 얼마나 가난에 시달렸던지 개그맨 시험에 응시한 이유도 과외 아르바이트하는 것보다 돈을 더 많이 줘서 응시한 거라고 한다... [26] 열린우리당이 서울 동북부 지역을 모조리 쓸어가는 와중에도 동북에서 유일하게 홍준표의 동대문구 을만 가져오지 못했다. 이때의 충격으로 당시 상대 후보였던 허인회는 결국 17대 총선 이후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27] 대구광역시청 본관 자리에 있었다. [28] 파푸아뉴기니는 1985년까지 식인 풍습이 남아있던 나라였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29] 참고로 답십리는 자살하면서 홍준표를 물귀신으로 끌고 가려 했던 성완종의 경남기업(...) 본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30] 이 때 경선장에서 편지를 흔드는 홍준표의 모습도 나름 유명세를 얻었다. [31] 당시 김어준의 대선주자 인터뷰가 대부분 그렇긴 하지만 형식적인 중립에 연연하지 않으면서도 인간 홍준표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돋보이는 인터뷰였다. 그 당시 김어준에 대한 호칭은 김 사장! [32] 물론 이것은 오세훈 자체에 대한 실망이 더 컸다고 봐야 한다. 상술한 오세훈과의 관계 참조 [33] 근소한 차이로 서병수가 당선되어서 이 일은 일단락되기는 했다. [34] 한 가지 변론을 하자면 압도적인 표차이로 졌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심해까지 추락한 2017년 초 한국당의 지지율 상태에서는 어떤 후보를 내놓아도 그 점은 변함이 없었다. 당시 국민들은 좌우 가리지 않고 친박이라면 이를 갈고 있었다. 그렇기에 경력이 대선후보급이면서도 박근혜 정부 내내(김두관의 사퇴로 생긴 재보선이 18대 대선과 같은 날에 동시 실시했다.) 경남지사로 있어 중앙정치와 거리가 있었던 홍준표가 자유한국당 소속임에도 24%라는 지지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35] 이날 미우프에서 모두 각자 해당후보를 직접 만났다. [36] 11사단에서는 일반병들에게 피자 150판이 제공되었으나 홍준표가 이것을 듣고 쩨쩨하다며 3천만원을, 연평도의 해병대 부대에 500만원을 쾌척했다. [37] 홍준표의 특징인 정제되지 않고 직설적인 발언이라 더 욕을 먹은 것도 있다. 게다가 당시에는 평화 무드가 조성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고. 사실 지금 보면 홍준표 혼자 맞는 말을 한 것이 되는데도 당시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본인으로서는 굉장히 억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8] 그림은 지지자가 그린 것이라고 한다. [39] 이 건으로 인해 토론회에서 이인선에게 저작권 무시라고 공격당했다. [40] 가장 대치되는 부분이 바로 공공의료에 대한 관점이다. 이재명은 공공의료원 설립 운동이 정계 입문의 계기가 된 반면, 홍준표는 있던 공공의료원도 폐쇄시켰다. [41] 송파구 갑 초선(1.5)+ 동대문구 을 3선(4.5)+ 경상남도지사 재선(4)+ 수성구 을 초선(1. 당적 없이 무소속으로 당선되었으므로 0선이 아니다.) + 대구광역시장 초선(2). [42] 다만 송파구 갑은 서울이긴 해도 보수정당에 상당히 웃어주는 곳이라서 사실상 영남권과 비슷한 수준의 텃밭에 가깝다. 실제로 송파구 갑은 홍준표가 당선된 15대 총선 이후로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보수 정당에 몰표를 던진 곳이다. 다만 저 당시에는 지금처럼 강남3구의 부동산 표심이 막강하진 않았었다. [43] 김종인이야 당연히 홍준표의 복당을 허가해줄 생각이 1도 없었고, 홍준표 역시 김종인 있는 동안은 복당할 생각이 1도 없어 복당 신청서도 김종인이 퇴임하고 나서야 제출했다. [44] 김태형 감독은 두산 감독직을 내려놓은 상태였고, 삼성 역시 아직 차기 감독을 선임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박진만 감독대행이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면서 김태형이 삼성 감독으로 오는 일은 없게 됐다.김태형은 그리고 1년후 롯데로 부임한다. [45]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의 평가가 매우 나빴기에 정치 성향에 관계없이 이 발언에 대해서는 옹호하는 여론이 대부분이다. [46] 또 홍준표는 대구FC의 구단주로서 엄연한 축구인이기에 더욱 시원하다는 반응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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