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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6:31:13

한강 방어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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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 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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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방어선 설립 배경3. 방어선의 설립
3.1. 독립기갑연대 제1장갑 수색대대의 화력시위
4. 한국군의 한강 도하5. 부대 배치
5.1. 김포지구5.2. 영등포지구5.3. 노량진지구5.4. 강남지구5.5. 이천-용인지구5.6. 판교지구
6. 경과
6.1. 6월 28일
6.1.1. 노량진 지구6.1.2. 강남 지구6.1.3. 공군 상황6.1.4. 서울시내 상황
6.2. 6월 29일
6.2.1. 맥아더 원수의 한강 방어선 시찰6.2.2. 영등포전선6.2.3. 인천 출동6.2.4. 노량진 지구6.2.5. 강남 지구
6.3. 6월 30일
6.3.1. 영등포 지구6.3.2. 노량진 지구6.3.3. 강남지구
6.4. 7월 1일
6.4.1. 노량진 전투6.4.2. 영등포 지구6.4.3. 강남 지구
6.5. 7월 2일
6.5.1. 영등포 지구6.5.2. 강남지구
6.6. 7월 3일
6.6.1. 영등포 지구
6.7. 7월 4일
7. 대한민국 정부 상황8. 후방 상황9. 마무리

1. 개요

파일:external/wmk.kr/3-3-2_05.jpg
한강철교를 폭격하는 미 공군. 오른쪽의 끊어진 교량은 한강 인도교이다.

한강 방어선 전투는 6.25 전쟁 당시 서울특별시를 점령한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하고 흩어진 한국군 병력을 재편성하며 미군이 참전할 시간을 벌기 위해 대한민국 육군 혼성 수도, 1, 2, 3, 7 사단, 독립기갑연대, 김포전투 사령부 조선인민군 육군의 1, 3, 4, 6 사단과 105 탱크 여단에 맞서 싸운 전투다. 전술적으론 북한 육군이 승리했으나 실질적으론 한국 육군 재편성과 미군 참전시간을 번 한국군의 전략적 승리라고 볼 수 있다. 전투기간은 1950년 6월 28일 ~ 7월 4일로 1주일(7일)이다.

2. 방어선 설립 배경

6월 25일 북한군 38선 전역에 걸쳐 총공격을 단행, 휴식하고 있던 한국군은 충격에 빠졌다. 전쟁 발발후 우리 육군 장병들은 적 전차를 막기 위해 육탄돌격까지 감행하면서 저항했지만 북한 육군의 엄청난 기갑전력과 통신 불능으로 인한 지휘체계의 붕괴, 정보 부족으로 인한 오판 등으로 인해 26일 2시 의정부시[1]가 함락되고 27일 13시 창동 방어선이 붕괴, 28일 6시 미아리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제25연대가 후퇴하면서 28일 12시 수도 서울특별시의 중심부가 적의 손에 넘어갔다.

3. 방어선의 설립

대한민국 육군본부가 직접 통제하는 연대급 이상의 부대가 독립기갑연대 밖에 없는 상태에서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 시흥 보병학교[2]에 서부전선의 모든 부대를 지휘하는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립하고 김홍일 소장에게 시흥지구전투사령관을, 김종갑 보병 대령에게 참모장 직책을 맡긴다. 사령부 인원은 영등포-수원길에서 후퇴하는 장병들을 뽑아서 구성했다.

이때(28일 오전 9시 한강대교 북단에 적 전차가 나타난 시점 기준) 한강이남에 육본의 통제하에 있던 부대는 의정부시에서 육본의 철수명령에 의해 영등포로 후퇴한 기갑대령 유흥수가 지휘하는 독립기갑연대와 미아리에서 철수한 16연대 1 대대(-1), 8연대1•2대대, 전주시에서 급히 올라온 15연대 1대대, 육본 헌병대, 그리고 4개 중대로 재편된 혼성 공병대대밖에 없었다. 이들 부대는 상하로만 연락이 가능했지, 횡으로는 협력이 불가능해서 조직적인 적의 도하차단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김홍일 장군은 위의 부대들로 하여금 적의 도하를 막게 하였고 그사이 미군 참전을 알리는 속보를 인쇄해서 벽에 게시하고 시흥보병학교와 수원 국민학교(육본 임시 주둔지. 7월 3일에는 평택으로 후퇴) 등지에 주먹밥을 쌓아올리고 후퇴한 육군 장병들에게 나눠주먼서 휴식을 취하게 하여 사기와 전투력을 올렸다.

3.1. 독립기갑연대 제1장갑 수색대대의 화력시위

파일:/20160218_207/lc0107536_14557984046512xPNu_JPEG/bandicam_2015-08-04_10-22-46-645_(1).jpg
전날(즉 27일) 오전에 논의되었던 시흥으로의 육본 철수계획에 따라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기로 한 독립기갑연대는 각 일선부대에 파견한 병력을 한남동의 연대본부로 복귀하도록 명령을 내린 다음, 의정부 정면에 지원된 박무열 보병 소령의 제1장갑수색대대 제3중대와 퇴계원 부근으로 출동한 장철부(본명 김병원) 기병소령의 제2기병수색대대의 주력으로 하여금 먼저 강을 건너 대방동에 집결하도록 조치한 바 전날 14:00를 전후하여 제1장갑수색대대는 한강대교를 건넜고, 제2기마수색대대는 한남동의 도선장에서 연대전용의 부선으로 병마가 함께 도하하였는데, 연대본부는 저녁 늦게야 군량미 등 보급품과 함께 우중의 차량기동으로 영등포의 우신초등학교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28일 아침에 연대장 유흥수 대령이 시흥보병학교로 가서 병력을 수습하던 대한민국 육군본부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에게 연대의 집결사항을 보고하였다. 김백일 대령은 유흥수 대령에게 『 장갑차를 노량진의 인도교 입구에 출동시켜 대안을 향하여 화력시위를 하라.』 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유흥수 대령은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1대를 지휘하여 연대본부중대의 화기소대 ― 81㎜ 박격포 3문과 M9 2.36인치 바주카 2문 및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 와 함께 노량진으로 나가, 16:00에 수도사무소 부근에서 M8 장갑차의 37㎜포를 자신이 직접 조준하여 한강 대안에 설치된 적의 기관총좌에 사격을 가하였다. 이렇게 6일간의 한강 방어선 전투의 첫 포성이 울렸다.

4. 한국군의 한강 도하

3일간의 혈전끝에 부대 체계가 사라진 한국 육군은 말 그대로 알아서 살아남아 한강을 도하해야 했다.[3] 이들은 지하 공산주의 폭력조직과 시내 진입한 북한 육군 특공대, 반국가 범죄자와 대한민국을 배신한 일부 보도연맹[4] 등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한강을 도하해야 했다. 아래는 도하 장소 목록이다.

5. 부대 배치

5.1. 김포지구



자세한건 김포반도 전투 참고

5.2. 영등포지구

5.3. 노량진지구

5.4. 강남지구

5.5. 이천-용인지구

5.6. 판교지구

6. 경과

6.1. 6월 28일

파일:external/wmk.kr/inmingunyi_hangang_dohareul_jeojihaneun_guggun_je8yeondae.jpg

위 사진은 6월 28일 한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급편된 혼성공병대대가 나뭇대를 걸치고 노량진 정면을 지키는 모습이다.

09:00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창설되었다.

6.1.1. 노량진 지구

한강선의 병력배치 :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유재흥 준장이 새로이 혼성 제7사단장으로서 노량진 일대에 대한 방어책임을 맡게 되자, 15:00에 사단장은 사단지휘소를 대방동의 수도육군병원에, 그리고 사단수용소를 인접한 성남중학교에 개설하고, 전열재편에 들어갔는데 이때 전날 한강의 교량폭파임무를 수행한 바 있는공병(제1공병단 및 공병학교 병력)과 노량진, 영등포 지역을 통제하던 헌병을 주축으로 하는 혼성 1개 대대가 시흥(지금의 서울 금천구 일대[9]에서 편성되어, 제7사단 정보참모인 이세호 소령의 지휘아래 노량진에 투입되었다. 이들을 사육신 묘소가 있는 39고지와 월파정(통칭「장택상씨 별장」, 노량진역 서쪽 200m)에 점거하여 인도교에서 대방동 삼거리에 이르는 강변에 배치하였는데 이와 같은 경위에 대하여 제1공병단의 엄재완 소령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나는 김포의 공병학교에 교육파견중에 전쟁을 만났다. 전쟁이 발발하자 원대로 복귀하여 26일과 27일까지 부평의 제1공병단 본부에서 대기하였는데, 27일 13:00쯤에 육군본부 공병감실로부터 「트럭 2대에 폭약을 싣고 감실로 출두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래서 다이너마이트 궤짝을 트럭 2대에 가득 싣고 공병감실로 가는데 한강 인도교를 지나려고 하니까 그곳에 폭파장치를 하고 있던 공병학교 교관 구명회 대위가 「15:00에 교량을 폭파할 계획이니, 빨리 돌아오시오」라고 일러주었다.

14:00에 공병감실에 도착하였으나,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구 대위의 말이 생각나서 트럭을 돌려, 다시 한강을 건넜다. 영등포구청 옆의 느티나무 아래에 트럭을 은폐시켜 놓고, 혼자서 부평에 돌아가 기다리고 있자니까, 저녁때에 「 한강철교의 폭파계획이 변경되었으니, 폭약을 싣고 다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어두울 무렵에 박병순 대위와 전유형 중위 등과 함께 폭약트럭을 타고 감실에 다시 들어가니 육본참모부장 김백일 대령의 지휘를 받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김 대령에게 도착신고를 하였더니, 대뜸 「그 폭약으로써 대전차용 폭뢰를 제작하라」고 명령하였다. 내용인즉 그 폭뢰를 시내의 요소에 장치하여 적의 전차를 잡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궤짝 하나에 들어있는 50파운드의 폭약을 나눌 시간이 없어, 궤짝 단위로 화구만 장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급조된 폭뢰를 전유형 중위가 일부병력과 함께 차량에 싣고 미아리 방어선으로 나갔다.

그 뒤로 아무런 명령이 없어서 나는 남은 폭약을 다시 트럭에 싣고 부평으로 돌아가려고 한강으로 나갔는데, 그때 보니까 인도교가 이미 폭파된 뒤였다. 인파로 길이 메워져서 그 폭약처리가 난처하였다. 그래서 폭약의 처리방안을 모색하고 있는데, 운전병의 한사람인 상 중사가「제가 어떻게 하든 폭약을 이대로 가지고 강을 건너볼터이니, 다른 사람들은 우선 맨 몸으로 강을 건너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다른 방안이 없어서, 폭약트럭은 상 중사에게 부탁하고 나는 병력 몇 사람과 함께 한강변을 걸어서 나갔다. 인도교가 절단된 것이 확실하였으므로 배를 구하고자 강변을 배회하는데 동이 틀 무렵에 용산에서 노량진쪽으로 열차가 철교를 건너가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경부복선 중의 하행선 철교위로 건너 08:00에 노량진에 도착하였다. 내 뒤를 따라 ¾ 및 ½등의 차량 몇 대도 건넜는데, 상 중사의 폭약 트럭도 기적적으로 그곳을 지나 노량진에서 만났다.

철교를 지나면서 보니 도폭선 등이 그대로 늘어뜨려져 있어서 사전에 폭파준비는 하였으나 폭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철교가 완전히 절단되지 않은 것은, 나의 판단으로는 당시의 화구에 그 원인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 때의 폭파용 화구는 대개 도화선(Detonating fuse)에 뇌관(Detonating cap)을 연결하고, 또 뇌관에다 도폭선(Detonating cord)을 연결해 폭약에 장치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화구를 그 세 개의 철교에다 각각 장치하였다고 볼 때, 철교들이 서로 인접한 거리(15m∼30m 정도)상, 어느 한 곳이 먼저 폭발하면 ― 도화선의 절단 길이가 동일하지 않거나, 점화시간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 그 폭풍과 진동으로 말미암아 간발의 차이로 나머지 화구가 분해됨으로써 기능을 상실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쪽의 경인하행선이 먼저 폭파됨으로써 이러한 원인으로 중간의 경인상행선은 침목의 일부만 손상을 입게하는 가벼운 폭파가 되었다.

어떻든, 이런 경로를 거쳐 나는 12:00에 시흥군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그곳에는 김백일, 원용덕 대령 등이 병력을 수습중에 있었는데 병력이 500여명 정도 집결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전날 한강교의 폭파작업에 동원된 공병단과 공병학교 병력이었는데, 소령급 이상 장교를 찾아보니, 보병으로는 이세호 소령 뿐이었고 공병으로서 허필은 소령과 나, 그리고 경리장교로서 제1사단 소속의 김 모 소령 등 네 사람뿐이었다.

그래서 이세호 소령을 대대장으로, 허필은 소령을 부대대장으로 하는 혼성대대를 편성케되었는데, 그때 각 중대장은 다음과 같다. 제1중대장―공병대위 김희동, 제2중대장―공병대위 김품호, 제3중대장―헌병대위 석종섭, 제4중대장―공병중위 최영락 동 대대는 지휘소를 대방동 삼거리의 파출소에 정하고, 병력은 중대의 건제 순으로 인도교에서 노량진역을 지나 대방동 정면의 강변에 배치하였는데, 허 소령과 나는 곧 철교 폭파임무를 맡게 되었다.

대대가 강변에 투입된 뒤로 대대장 이세호 소령은 다시 혼성 제7사단의 참모로 복귀하였으며, 부대대장인 허 소령도 수원의 공병감실로 가게 되어, 결국 내가 그 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이 혼성대대로써 방어체제를 갖추어가는 이날 저녁, 제15연대의 제1대대(장, 이존일 소령)가 전주시로부터 급히 증원되었으므로 사단이 이를 수용하여 우선 흑석동고개 부근 수도고지의 북면에 배치하였는데, 이 연대는 25일과 26일에 주력(2개 대대)이 봉일천과 미아리 전선에 투입되고 대부분이 휴가 또는 외출이던 동 대대만이 지역경계부대로 잔류하다가 전날 27일에야 병력을 모아 전주를 출발하였던 것이다.

공병의 철교폭파기도 : 혼성 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아침에 자신이 건넌 철교가 반파상태에서 병력과 일부차량의 통행이 가능하다는 점에 착안하고 적이 이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혼성대대의 공병으로 하여금 이를 완전절단토록 명령하였다. 이에 허필은, 엄재완 소령 등이 공병을 지휘하여 폭약을 확보하고, 이를 절단코자 시도하였으나 복선의 남단에 있는 교대와의 연결부분이 약간 이탈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그 뒤로는 적의 방해를 받게 된 탓도 있으려니와 폭약을 확보할 수 없었던 까닭으로 경인상행선은 완전 폭파되지 못했다.

6.1.2. 강남 지구

전날 6월 27일 기갑연대장 유흥수  대령의 철수조치에 따라, 동 연대의 장철부 소령이 이끄는 제2기병수색대대가 동일 14:00를 전후하여 한남동에서 한강을 건넜는데 대대가 전용 나룻배로 도하하는 도중에 북한군 YAK기의 공습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미 공군의  F-80전투기가 뒤이어 나타나 야크기와 공중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 결과 야크기가 말죽거리 부근의 논바닥에 격추되었으며, 이를 동 대대의 제5중대 3소대장인 김형식 소위 등이 야크기의 추락지점으로 몰아갔는데 조종사는 즉사하고, 통신사만이 중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는데 그를 심문하니 그 자는 한강의 교량을 차단하는 임무를 받고 함경남도 연포비행장에서 출격한 것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그를 응급치료차 현지 경찰에 인계하고 기관총과 권총 각 1정 및 낙하산 1착을 노획하여 대방동으로 집결한 다음, 밤을 새는 중 한강대교를 폭파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대대는 이날 오후에 김홍일 소장으로부터 『말죽거리 부근에 수용진지를 점령하여 철수병력을 수습하라.』라는 명령을 받아, 한남동 나루터를 마주보는 신사리 일대에 진지를 급편 함으로써 병력을 수용케 되었다.[10]

이날 밤 신사동에 주둔한 제2기병수색대대는 한강이북 서빙고, 한남동, 이촌동 일대에 정찰임무 수행하고 복귀. 한강방어선전투 중 한국군이 유일하게 한강이북으로 진출한 사례다.

6.1.3. 공군 상황

대전으로 긴급 이동한 공군본부 이승만 대통령의 명에 따라 T-6 건국기 1대(106번기)가 한강선을 관찰하면서 적의 동향과 아군의 상태를 알아보게 하였는데 노량진 상공에서 북한군 야크기에 의해 날개에 손상을 입고 격추될 뻔했으나 다행히 미 공군 F-80기가 이들을 물리쳤다. T-6기는 수원 비행장에 무사히 비상착륙했다.

또다른 T-6기는 서울에 ' 국군은 한강 이남에 버티고 있으며 곧 반격해 서울을 탈환할 것이니 시민 여러분은 버텨라'란 내용이 담긴 30만장의 삐라를 날리고 별 탈 없이 돌아왔다.

미 공군은 이날부터 본격적인 폭격을 시작했는데 이때 피아를 구분하지 못해 아군을 오폭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특히 한강 이북에 남아있던 제1보병사단의 타격이 컸다.

6.1.4. 서울시내 상황

북한군의 움직임은 없었다. 이날 서울시내에 숨은 국군장병, 경찰, 공무원, 반공인사 검거작전이 실시됐다. 체포된 모든 한국군 장교는 무조건 현장에서 즉결처형을 당했고[11] 나머지는 인민재판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부상당한 한국군 장병들이 후송된 서울대학교 병원에서는 군인과 일반인 구분 없이 학살극이 벌어졌다. 서울대병원 학살사건 참조.

6.2. 6월 29일

6.2.1. 맥아더 원수의 한강 방어선 시찰

맥아더 장군이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였다. 29일 아침에 수원비행장에 착륙한 전용기 ' 바탄'에서 내린 맥아더 장군은 수원농업학교에 설치된 ASCOM(미 전방지휘소)에 들른 후 수원국민학교에 설치된 대한민국 육군본부에 가 채병덕의 보고를 듣고 나서 직접 한강 방어선을시찰하게 되었다. 이때 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작전지휘차 부재중이어서 참모장 김종갑 대령이 통역을 겸한 안내를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헌병사령관 송요찬 대령과 공군 헌병대장 김득룡 중령의 경호 아래 맥아더 원수 일행은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게 되었다. 당시에 맥아더 원수를 안내하였던 김종갑 대령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아래와 같은데 미국 맥아더 기념관에 문의한 결과 맥아더 장군과 국군 병사의 일화는 맥아더 회고록과 미국의 6.25 전쟁 전사 등 맥아더 개인 및 미국 공식 기록과 자료에서 찾을 수 없는, 다시 말해 진실임을 입증할 명백한 근거가 부족한 일화로 신빙성 논란이 존재한다.
그때 내가 안내를 맡게 된 까닭으로 원수와 한 차에 동승하게 되었는데, 차량은 검은 세단이었으며, 운전병 옆의 앞 좌석에는 미 고문단장 라이트 대령이, 그리고 뒷좌석에는 원수와 미 극동군참모장 알몬드 소장, 그리고 내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하여 시흥에서 영등포로 북향하여 우신 초등학교의 수도사단 본부에 들렸다가 사단장과 함께 고개를 넘어 동양맥주공장 부근[12]에 이르니, 적의 120㎜ 박격포탄이 난무하기 시작하였는데, 길 옆에 서있는 버스 1대가 포탄에 맞아 박살이 났다.

이에 라이트 대령이 「위험하니,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원수에게 권유하였으나, 원수는 단호히 「아니, 나는 한강을 보아야겠다 (No. I want to see Han River)」하고 한강행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포탄의 집중으로 더 이상 차량의 진행은 위험하여 부득이 차에서 내려 옆의 맥주공장으로 잠시 대피케 되었다.

적의 박격포 사격이 뜸해진 틈을 타서, 제8연대 병력 일부가 진지를 점령중인 공장 옆의 언덕위에 올라가, 쌍안경으로 한강을 관찰하였다.

이때 원수는 그곳의 개인호 속에서 진지를 지키고 있던, 일등중사의 계급장을 단, 어느 병사를 보자 가까이 다가가서 「자네는 언제까지 그 호 속에 있을 셈인가?」하고 물었다.

이에 그 일등중사가 대답하기를 「각하께서도 군인이시고 저 또한 군인입니다. 군인이란 모름지기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저의 상사로부터 철수명령이 내려지든가, 아니면 제가 죽는 그 순간까지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대답을 나의 통역으로 전해 들은 원수는 그 기개에 크게 감동한 듯, 병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고 나에게 다시 「그에게 말해다오. 내가 곧 동경으로 돌아가서 지원병력을 보내줄터이니, 안심하고 싸우라고」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후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는 도쿄의 연합군 최고사령부[13]에서 본국과의 극비 텔레타이프 회의(타이퍼는 타자기. A와 B가 텔레타잎을 쓴다면 A에서 메세지를 타이프로 쓰면 무선으로 정보가 상대의 기계로 가서 영사기로 상영되고 똑같은 방법으로 대답.)를 통해 일본의 안전이 보장되는 범위 내에서 주일미군의 파병을 허가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또한 이날 낮 이승만 대통령에게 현재까지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의 해임을 요구했다. 이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어 그를 해임했고 후임으로는 그날 미국에서 귀환한 채병덕 총장의 후배인 정일권 소장을 임명하였다. 이 명령은 30일 0시 효력을 발하였다.

적은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다만 적의 포격은 계속되었다.

한편 이날 한강이북의 아군은 대부분 도하를 완료했다.

6.2.2. 영등포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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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차포 소대의 옥쇄 : 영등포 방면의 책임을 맡은 제8연대(장, 서종철 중령)는 정오 무렵에 맥아더 원수 일행이 시찰하고 수원으로 돌아간 다음, 심기일전하여 방어태세를 가다듬었는데 이때 연대에 제18연대 제1대대와 57㎜ 대전차포 1개 소대가 증원되었다.

그런데 동 대전차포 소대에 대한 소속과 증원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제18연대 제1 대대(장, 박철용 소령)는 당초 전 대대가 휴가중이어서 연대 주력과 함께 출전치 못하고 삼각지(용산)의 연대본부에 남아있다가 전날 새벽에 강을 건너, 시흥에서 휴가복귀병력을 수습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제18연대 역시 수도경비사령부의 건제부대였으므로 제8연대를 증원케 된 것인데 이에 연대장 서종철 중령은 동 대대를 안양천 동안에 배치함으로써 새로이 연대의 좌일선으로 삼아 이로 하여금 김포쪽에서 적 급습에 대비토록 하고, 연대의 제1, 제3 양대대로써 여의도정면 방어에 주력케 하였다.

그리고 대전차포 소대는 제3대대의 화기 중대장이 이를 지휘하여, 영등포의 동양맥주공장 남쪽의 고개에 포좌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혼성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의 영등포 정면에도 전력의 보강을 보기는 하였으나, 아직은 1개 연대의 실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정오를 넘어서자 적이 뗏목을 타고 하중리 나루터 부근에서 여의도의 북단인 율도(밤섬)로 산발적인 도하를 시작하였다.

 이때 대안의 당인리에 방열된 적포가 그들의 도하를 지원하였는데, 연대는 이 적화를 제압하고자 하였지만 연대의 중화기인 81㎜ 박격포로서는 그곳까지 사거리가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연대는 낮 동안 적의 여의도 비행장으로의 접근을 막은 다음, 해가 진 뒤에 그들의 적 진지를 복멸키로 하였다.

즉, 제3 대대의 화기 중대장인 김인식 중위가 대전차포 소대를 여의도로 추진하여 화력으로 급습토록 한 것이다.

이에 동 소대가 어둠 속에서 포 4문을 끌고 여의도의 서북쪽 구릉지대로 들어가, 적진을 향하여 회심의 일탄을 가하였는데, 이것이 연대정면의 적진에 작렬된 첫 포탄이었다.

그러나 아군의 환호성속에서 연달아 10여발을 사격하였을 무렵, 적의 포화가 그 포진지에 집중됨으로써 2시간 동안 여의도의 서북단 일대는 불바다가 되고, 동 소대는 마침내 한명도 남지 않고 전사하고 말았다.

이 동안에 율도에 도하거점을 확보한 적이 그들의 포화에 힘입은 듯이 김포가도쪽으로 공격함으로써 여의도 백사장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이에 동 가도의 제방에 연하여 1m 간격으로 호를 파고 진지를 점령한 장병들은 각자 허리띠를 풀어서 옆 사람과 연결하여 설렁줄을 만들어, 서로 독려하면서 도하하는 북한군을 막아내었다.

6.2.3. 인천 출동

당시 이 지역의 군경은 모두가 각 전선 지원차로 출전한 터이라 이의 제압에 손을 쓸 수 없는 실정이어서, 자칫 그곳이 무법천지로 변할 우려가 없지 않았다.

따라서 이 사태가 수원의 육군본부에 급보됨과 동시에 진압이 요청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19:00에 시흥지구전투사령부로 하여금 인천에 병력을 파견하여 이를 진압토록 조치한 바 동 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혼성 제7사단의 수용소에 집결한 제20연대장을 불러『1개 중대를 뽑아 인천으로 출동시켜, 폭동을 진압하라.』라고 명령하였다.

이와 같은 명령을 받은 20연대장 박기병 대령은 곧 파견병력의 차출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이때, 26일 밤에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의 통합지휘하에 봉일천 부근에 투입된, 동 연대 제3대대(장, 박희동 소령)의 제12중대가 이날 새벽에 행주에서 강을 건너 18:00에 시흥역 부근에 집결대기중임을 알게 되었다.

연대장이 동 중대의 대오를 점검한 즉 중화기는 모두 강북에 유기하는 바 되었으나 병력과 경장비는 온전한 편이어서 이를 인천으로 출동시키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날 밤중으로 동 중대가 인천을 향하여 밤길을 재촉하게 되었는데 뒷날, 당시 중대장 강영걸 대위는 당시의 상황을 술회하기를, 『이날 아침에 행주에서 강을 건넌 중대가 종일 길을 헤멘 끝에 저녁무렵에야 시흥에 도착하여 비로소 대한부인회가 제공하는 주먹밥 한덩이씩으로 우선 허기를 메우게 되었다.

시흥역 부근에 집결하여 그곳에서 밤을 새우려고 하는데 연대장 박기병 대령이 와서 「피곤하겠지만, 지금 곧 인천으로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트럭 5대를 지원받아 한밤중에 병력을 분승시켜, 인천으로 떠나, 그 이튿날 30일 새벽 03:00쯤 인천시가 전방(경인가도상) 2㎞ 지점에서 하차, 도보로 시내에 들어갔다.

이른 새벽 시내에 들어서자, 곳곳에 붉은 벽보가 나붙어 있어, 일견하여 무법천지였다.

민간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한 즉, 인천 형무소가 파괴되고, 탈옥한 죄수들이 지방좌익분자와 합세하여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만국공원 정상에 벽돌로 지은 건물를 점령하여 본부로 정하고 1개 소대를 그곳에 예비로 확보하는 가운데, 나머지 병력으로 시가에 붙은 벽보를 떼면서 탈옥한 죄수들을 색출하였다.

형무소에 갔더니, 당초 동 형무소에 소총 31정이 있었다고 했으나 회수된 것은 10여정 뿐이었다.

그날 오후에 옹진반도에서 철수한 일부 경찰이 집결하였다.

경기도 경찰국에 협조를 구하여 군경이 합동으로 치안확보에 나서,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다.

그때 나는 부두의 유류고와 육군 피복분창 등의 요소 확보에 주안을 두고, 병력을 분산배치하는 한편, 우리가 타고 갔던 트럭 5대에 휘발유의 후송에 전력하였다.

그렇게 하여, 7월 2일까지 인천의 치안을 맡고 있다가 다시 명령에 따라 소사로 이동하여 독립기갑연대 병력과 함께 적을 막은 다음 3일에 철수하여 평택으로 갔다.』라고 하였다.

6.2.4. 노량진 지구

 전날에 이어 공병이 철교폭파에 대한 노력을 계속한 바 있으나 성공치 못하였는데, Church 준장의 요청에 따라 13:00를 전후하여, 오키나와의 Kadena (가수납)기지에서 출격한 미 제5공군의 B-26 폭격기가 철교의 중간단선을 폭격하기도 하였지만 그도 별무성과였다

※ 참고 : 당시 항공 폭격의 정확도를 고려시 경부선 복선철교의 추가 폭파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절단되지 않은 철교에 피아의 관심도가 증대되어 가는 가운데 아군의 복장으로 가장한 적의 편의대가 산발적으로 도하를 기도하였다.

적의 도하정찰 : 적은 낮에 한강의 북쪽 인도교 입구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늘어선 전차의 화력엄호아래 작은 목선을 이용하여 분대규모로 도하를 기도하였다.

그들은 아군이 수도고지와 △39일대에 방어의 중점을 두고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음인지 흑석동과 본동사이의 강변능선("도당재", 현 십용사 기념탑지)과 동작동―흑석동 지경의 능선쪽으로 사각을 찾아 도하하였는데, 이는 그들 주력의 도하에 앞서 엄호거점을 마련하는 동시에 아군이 방어선에 대한 병력배치상태를 탐지코자 하는 정찰로 보였다.

사단의 병력증강(혼성 5개 대대) : 이에 사단은 오후에 시흥 사령부로부터 급히 증원된 제1연대(장, 이희권 중령)와 제9연대(장, 윤춘근 중령)의 혼성 각 1개대대 및 제20연대(장, 박기병 대령)와 제25연대(장, 김병휘 중령)의 혼성 각 1개대대, 그리고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의 제3 대대로써 담당지역의 방어력을 보강하였다.

그런데 이들 증원부대 가운데 제1, 제9, 제20, 그리고 제25연대는 의정부 정면에 투입된 병력으로써 전날 아침에 광나루에서 강을 건너 수원에 집결하여, 밤을 새워 재편을 끝내고 이날 낮에 열차로 시흥에 추진되었으며, 제15연대 제3대대는 봉일천 지구에 증원되었다가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과 함께 철수하여 전날 오후에 수색에서 난지도로 건너 도하한 다음 영등포에서 밤을 지내고, 이날 아침에 시흥에 집결한 것이었다.

이에 사단장은 노량진―영등포 도로의 북쪽 강변지역에는 제1연대를 증원하여 그 정면의 공병혼성대대와 방어책임을 나누어 맡도록 하는 한편, 동작동―노량진 도로 남쪽에 연하는 고지대의 확보에 주력키로 하고 다음과 같이 병력을 배치하였다.

제9연대 혼성대대 : 동작동―흑석동 사이의 능선 
제20연대 혼성대대 : 흑석동―본동 사이의 능선 
제15연대 제1대대 : 수도고지 북록(수원지 남쪽) 
제25연대 제2대대 : 수도고지 서북록(사육신묘 남쪽) 
제15연대 제3대대 : 수도고지 서쪽 당산(△76)

강변의 초일전 : 이리하여 제9연대(장, 윤춘근 중령)는 제1대대장 유환박 소령이 통합지휘하는 증강된 1개대대로써 대방동의 사단수용소로부터 상도동으로 진출하여 무명고지 ㉮ (현 국립서울현충원 뒷산)에 올라서 보니 눈 아래 동북쪽으로 뻗어내린 능선(동작동―흑석동 지경선)이 끝 닿는 강변의 무명고지 ㉯ (명수대초등학교 동쪽 300m 구릉)를 소대규모가 점령하고 진지를 급편중이었다.

 이에 동 대대가 예기를 몰아서 능선을 휩쓸어 나아가 단숨에 그들 적을 섬멸하고 말았으나 곧 강 북쪽으로부터 적의 포화가 집중되었으므로 그곳에서 한 걸음 물러나 ㉮ 고지의 정상에 진지를 편성하였는데, 이날 밤에 야음을 타서 적이 다시 도하하여 ㉯ 고지를 수중에 넣었다.

한편 제20연대(장, 박기병 대령)는 26일에 미아리에 투입된 제1대대(장, 김한주 소령)만이 수습되었던 것이나, 전날의 도하과정에서 그나마 병력이 분산되어 이날 수도고지 부근에 증원된 것은 2개중대 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이 역시 먼저 수도고지 정상으로 진출하여 강변을 굽어본바 흑석동―본동고개 너머의 "도당재"일대에 증강된 소대규모가 도하거점을 마련코자 호를 파고 있음이 확인되었으므로 김용옥, 최동근 양대위가 거느리는 2개중대 200여명이 대대장 김한주 소령의 지휘하에 이를 척결키로 하였는데, 처음에는 적이 배수의 진을 치고 있음에 착안하여 분대규모로써 탐색공격을 몇 차례 시도하였으나 적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이에 대대장이 대대원을 횡대로 전개토록 한 다음, 대대 나팔수로 하여금 돌격나팔소리를 우렁차게 울리게 하면서 돌격을 호령하니 중대장 김용옥 대위가 선두에서 바야흐로 석양을 등에 지고 백병을 휘몰아 쳐서 그 적을 모조리 물 속으로 밀어넣고 말았는데, 이윽고 어두운 그림자가 노들의 수면을 뒤덮어 이 일전의 막을 내리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소련제 Maxim 기관총과 Czecho식 기관총 등 총기 수정을 노획하기도 하였으나, 뒤 이어 강 건너의 마주 보이는 대안에서 겨누어진 적의 전차포와 야포가 집중된 까닭으로 탄약보급 등 지원이 뒤따르지 못한데다 대대의 유일한 무전기마저 파괴됨으로써 그 전사면에서 더 지탱치 못하고 고지 정상으로 철수하였다가 이어 사단수용소로 집결하였다.

이 동안 수도고지의 북록에서는 별다른 접적상황은 없었다.

제15연대 제1대대(장, 이존일 소령)는 전날의 진지를 계속 확보하고, 제25연대 혼성 제2대대(장, 배운용 소령)는 그 서쪽 능선에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였는데 이 대대도 전날 한강을 건너는 와중에서 분산을 면치 못하여, 시흥에서 수습된 병력이 2개 중대 규모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제15연대 제3대대(장, 최병순 소령)는 10:00에 명령에 의하여 사단수용소에 집결한 다음, 전 연대 S-3 보좌관인 장영종 중위를 대대 S-3로 맞아들이고, 400여명의 대대원으로써 화기중대가 없는 3개 중대로 재편성하여 제25연대 제2대대의 서쪽 당산(△73)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노량진―영등포 도로의 북쪽 강변지역을 맡았던 공병혼성대대(장, 엄재완 소령)는 제1연대 혼성대대의 증원에 따라, 대방동 파출소의 본부를 월파정으로 옮겨, 한강대교 입구―노량진의 우반부를 담당케되었으며 제1연대의 혼성대대는 당초 제3대대가 그 골간이었으나 대대장 김황목 소령이 사단의 G-3로 전보된 까닭으로 동 부대대장 강완채 대위를 대대장으로 대대교육관 김상옥 대위를 부대대장으로, 김기영, 전상재의 양중위를 중대장으로 하는 2대 중대로 재편되어, 노량진역의 서쪽에서 대방동 삼거리에 이르는 그 좌반부를 맡게 되었다.

6.2.5. 강남 지구

한편 신사리의 제2기병수색대대는 한강 남쪽강변으로 침투, 교두보를 설치한 1개중대규모의 적을 기습, 궤멸시켰다. 한강방어선 설립 이후 아군이 거둔 첫 승리였다.

6.3. 6월 30일

이날 미 공군의 B-29 폭격기는 한강철교에 폭탄을 투하했다. 그러나 경인상행선은 일부 침목이 날아갔을 뿐, 완전히 절단되지 않았다.

6.3.1. 영등포 지구

전날 밤 여의도를 사이에 두고, 피아가 공방의 혈전을 치르는 동안, 날이 밝았는데 적이 이 정면의 제8연대(장, 서종철 중령)의 진지를 깨지 못한채 일부로써 여의도의 비행장( 여의도공항)을 장악케 되었다.

이에 서종철 연대장은 눈 앞의 여의도에 적의 진지가 굳혀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제3대대에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1개 중대를 여의도에 투입하여 적을 격멸하고 비행장을 확보하라.』 이 명령을 받은 동 대대장 박태운 소령이 곧 제11중대(장, 김광해 대위)를 비행장에 투입한바, 격전 끝에 이 적을 구축하고 비행장을 점령한 다음, 그 주변에 호를 파서 경계진지를 급편케 되었다.

그러자 강 건너의 마포와 신촌에 방렬된 적포가 이 중대의 행동을 감시한 듯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적의 포화가 여의도 일대에 수없이 집중되었는데, 이때에 동시 발휘된 포병 위력은 연대장 서종철 중령 자신이『한국전쟁의 전 기간을 통하여, 북한군으로부터 받은 가장 치열한 포격의 하나』라고, 회술할 정도로 광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대대가 동 제11중대를 철수시켜 본진으로 수용키로 하였으나, 그 포화에 움직일 수가 없었던 탓으로 제방의 진지로 철수하지 못하고 여의도 비행장 내의 격납고속으로 대피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적의 포격으로 말미암아 이윽고 격납고가 화염에 휩싸이게 됨으로써 중대장 김광해 대위가 산화하는 등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고 말았다.

따라서 종일토록 이 여의도는 누구도 그 주인이 되지 못한 가운데에서 서로 화력만을 교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날 사단본부에도 이렇듯 치성한 적의 포화가 우주한 까닭으로 사단장 이종찬 대령은 지휘소를 동양맥주공장으로 이전하였다.

6.3.2. 노량진 지구

제9연대 혼성대대의 공방전 : 날이 밝자, 적이 전날 밤에 확보한 ㉯ 고지를 발판으로 그들 포병의 지원아래 다시 도하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 고지에 병력을 증강하여 거점을 강화하는 가운데 ㉮―㉯의 능선의 일부까지 장악함으로써 동작동―흑석동의 강변도로를 분단하는 한편, 점차로 그 추봉을 ㉮ 고지의 정상으로 지향하며 접근하려 하였다.

이에 ㉮ 정상의 제9연대(장, 윤춘근 중령)가 선제로 진전출격하여 능선을 따라 오르는 적과 일진일퇴를 벌임으로써 그 적의 급습을 막았는데,

오전중으로 미 공군의 제19폭격전대 B-29 15대가 강 북안의 제방을 따라 집결병력과 도하주정을 중점적으로 공격한 바 있으므로 연대는 이에 힘입어 그들 적을 몰아 ㉯ 고지 부근에서 정착케 하였다.

그리하여 연대는 강안지역에 발판을 마련한 적과 종일토록 사격전으로 응수하였는데, 여기에서 얻은 포로의 진술에 의하면 그들은 제3사단(장, 소장 이영호) 제8연대에 소속된 대대라고 하였으며 이날부터 그들 사단의 주력이 한남동―서빙고에서 말죽거리 정면으로 도하공격을 시작한 점에 비추어 보면 그들은 그 주력의 도하에 대한 측방엄호를 위하여 아군의 주의력과 화력의 견제수단으로 취하여진 양공책이 아닌가 믿어진다.

제15연대 제3대대의 수훈 : 한편, 수도고지 정면에서는 전날 저녁 제20연대 제1대대의 철수로 인해 발생한 간격으로 이날 새벽에 적이 다시금 강을 건너 "도당재"에 침투함으로써 이에 사단은 제15연대 제3대대(장, 최병순 소령), 제25연대 제2대대(장, 배운용 소령)로 하여금 이들이 강안에 교두보를 굳히기 전에 격멸토록, 불시에 양 대대가 상도동에서 대오를 전개한 다음 제15연대 제3대대를 선두로, 전날의 제20연대 제1대대와 같이, 수도고지―도당재 능선을 따라 공격한 결과 10:00를 전후하여 또 한번 그들을 강물 속에 쓸어넣고 말았는데, 이때의 상황에 대하여 이 공격을 지휘한 대대장 최병순 소령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전날 밤 23:00에 적이 인도교의 교각주위로 배를 저어 도하한다는 보고를 받고, 노량진에 나가보니 이미 흑석동 고개(현 십용사비가 세워진 곳) 부근에 붙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단지휘소로 가서 사단장 유재흥 준장에게 보고하였더니, 사단장이「적이 많이는 못건넜을 것이니, 즉각 공격하여 격멸하라!」고 명령하였다.

당시에 우리 대대는 성남중학교에 대대본부를 두고, 제10중대를 그곳에 예비로 확보하고 있던 터이므로, 나는 이 중대를 선두에 내세워 공격키로 하였다.

새벽 04:00를 기하여 상도동으로 중대를 추진하여 수도고지 흑석동 고개의 능선을 따라 정면공격케 하고 진지에 배치중인 제9, 제11 양중대로써 측방에서 화력지원토록 한 바 예기로써 몰아치니, 적이 당황하여 강물로 뛰어내렸는데 거의가 어복의 신세를 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미처 물속에 뛰어들지 못한 10여명을 포로로 잡고 갖가지 무기를 노획하였다. 소총류가 100정, 기관총이 4∼5정, 권총이 20여정, 그리고 수류탄이 300여발이나 되었는데, 트럭 2대로 실어나를 정도였다.

11:00를 전후하여 전장정리를 끝내고 나서 성남중학교의 교정에서 그 노획무기의 전시를 한 다음 15:00에 다시 그 무기들을 수원으로 이송하였다.
그때 대대의 손실은 사상자를 합쳐서 30여명이었다.

이와 같이 양 대대가 기염을 토하여 적의 촉수를 자르는 가운데 노량진―본동 일대의 민가와 능선의 굽이를 따라 적의 직사포의 사각을 이용하여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계속되는 주간도하를 막았다.

그런데 이날 이른 아침에 미 제5공군의 제3폭격전대의 한 폭격기가 서울의 북쪽 근교의 교통망을 차단폭격하던 중, 아침 한강의 중간철교위에 목판을 깔면서 건너는 전차와 차량종대를 포착하자 이를 폭격하여 동 단선철교의 남쪽에서 셋째번 경간을 절단함으로써 적 전차의 도하기도를 무효화시켰다고 하였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적이 이날 새벽에 수도고지 부근에 도하한 것은 이들 전차의 통행을 위한 교판작업을 엄호코자 한 것으로 판단되어진다.

사단장의 조치 : 이렇게 하여, 낮 동안 수도고지 부근에서는 적의 급습을 막아내었으나, 제9연대의 ㉮ 고지 정면에서는 이날 중으로 강 남안에 올라붙은 적이 1개 대대 규모로 추정됨으로써 동 연대로서는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저녁에 이와같은 보고를 받은 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적진이 더욱 굳어질 것이라고 내다보고 동 연대로 하여금 이를 격퇴토록 엄명하는 한편, 종래 수도고지 일대에 방어의 중점을 두었던 방침을 바꾸어 그곳의 제25연대 제2대대를 ㉮ 고지―수도고지 사이의 능선으로 뽑아돌려, 동 연대를 지원하면서 동 연대와 함께 일관된 진지를 확보토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전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날부터 시흥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오류동 전선에 대한 방어책임을 맡게 된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의 요청에 따라, 동 연대의 제1대대(장, 이존일 소령)를 오류동으로 전진케 하는 한편, 제20연대 제1대대(장, 김한주 소령)를 다시 수도고지 부근으로 추진하였다.

6.3.3. 강남지구

북한군은 이날 10시 남산에 배치된 포병의 호위를 받으면서 청담리로의 도하를 다시 시도했다. 반포리 뒷산에 진지를 판 선견대는 적의 기마대대의 서쪽 진지를 공격 하였다. 엄청난 포격에 말들은 늘라 우왕자왕했고 결국 제 2기마수색대대는 과천의 2사단 사령부로 후퇴하였다.

당시 제2기마수색대대 3중대장 박익균 중대장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전투가 벌어지자, 적이 언제 숨어들었는지 기관총으로 우리의 좌측방을 위협하는 가운데, 배들이 강을 건너 남안으로 올라붙었는데, 적의 치열한 포들에 말이 먼저 놀라 (이때까지 병사의 승마 훈련만 끝났을 뿐, 말 자체는 전투소음에 대한 음향훈련이 되어있지 않아, 포성과 포탄의 파편에 동요되었던 것으로)고삐를 풀고 달아나고 말았다. 말을 붙잡으랴, 적을 막아내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도무지 싸움이 되지 않았다.
전투가 그 모양으로 얼켜들자 김포지구에 출동하였다가 돌아 온 최영화 소위는 분기가 치솟아 홀로 적중으로 돌격을 감행하여 장렬히 전사하는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그때에 달아난 말들이 귀소본능에 따라 한강을 헤엄쳐서 한남동으로 가는 데에는 정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말이 적진으로 향하였으나 차마 총으로 쏘아 죽이지는 못하였다. 나중에 들으니 내 말이 당시 한남동의 연대본부 근처에 있던 내 집으로 찾아가, 미처 피난하지 못한 집사람들을 매우 놀라게 하였다는 것이다."

12:00 기마대대의 후퇴를 본 3연대장 최수창 중령은 적의 기세를 꺾기 위하여 1대대를 선두로 반하여 1개 중대규모의 적 선견대를 격멸하고 적을 모래사장으로 쫓아내고 강을 막 건넌 75mm포 5문과 장갑차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적의 포화와 계속된 증원으로 결국 3연대는 과천으로 후퇴하고 제 5연대가 말죽거리~우면산 일대에 진지를 설치하였다.

6.4. 7월 1일

이날 북한군은 서부전선 전체에 걸쳐서 총공세를 시작했다. 김포비행장을 재점령한 북한군 6사단은 오류동을 향한 총공격에 나섰고 서울의 북한군 3사단은 여의도 북단에 교두보를 세웠으며 이촌동의 적은 동작동 강변에 교두보를 강화, 15연대를 공격했고 신사리의 적은 이날 밤 제5연대를 공격하였다.

6.4.1. 노량진 전투

이날,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의 방어정면인 이 지역의 강안에 올라붙은 적을 격퇴키로 한 노력은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으나, 현 전선은 그대로 고수하였다.

제9연대(장, 윤춘근 중령)는 전날 밤의 사단의 명령에 따라 날이 밝은 다음인 10:00에 목표 ㉯ 고지를 지향하여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대안에서 노려보는 적의 포화에 행동의 제약을 받게 되어, 오히려 병력손실만을 보게된 나머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 고지의 본진으로 반전하고 말았다.

그리고 역시 전날 밤에 사단장으로부터 『㉮고지―수도고지의 능선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25연대 제2대대(장, 배운용 소령)는 대대장의 진두지휘하에 2개 중대로써 수도고지 부근에서 목표능선으로 나아가다가, 밤 사이에 동 능선에 숨어든 적 1개분대규모와 격돌케 되었으나 이를 단숨에 무찌르고 목표를 점령하였는데, 대대가 그 능선위에 올라서는 순간에 강 건너로부터 박격포탄이 쏟아져서 대대장 배운용 소령이 전사하는 등 적지 않은 병력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에 선임자인 제8중대장 김백영 대위가 대대를 지휘하여, 우측으로 제9연대 제1대대와 좌측으로 제15연대 제3대대와 나란히 고수태세로써 날을 보내었다.

한편, 노량진역 부근을 중심으로 강안에 배치된 공병대대의 지휘소인 월파정에 아군복장을 한 적 1개 분대규모가 침투하여 이를 탈취하려 하였는바 이들과 전투중에 동 대대장 엄재완 소령이 흉부에 관통상을 입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동 공병대대는 안양으로 철수하고, 제20연대 제1대대가 사육신묘를 중심으로 재배치되어, 적이 철교쪽으로 도강하는 것을 막게 되었는데 동 묘소가 있는 고지정상에 자리를 잡은 연대 지휘소에 적의 포탄이 집중됨으로써 S-2인 김상칠 중위가 전사하고 S-3인 박정식 중위가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또한 강완채 대위가 지휘하는 제1연대의 혼성대대는 중대장 전상재 중위가 전사하는 혈전을 벌인 끝에 여의도의 비행장쪽에서 급습하는 적을 막았는데, 밤에는 복선철교위에 기관총으로 무장된 기관차가 나타나 철교에 교판부설 작업을 실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동 대대가 보유한 60㎜ 박격포 2문으로써 그들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적이 이렇듯 철교의 입구쪽으로 공격력을 증강하여 동 철교를 감제하는 사육신묘와 월파정을 확보코자 한 것은 이 복선철교상의 교판작업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뒷날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적은 전날 아침에 철교의 중간단선으로 전차를 도하시키려다가 미 공군의 항공폭격으로 좌절되자, 이날부터 서울 시민과 철도 선로반원을 강제로 동원하여, 29일에 공병이 그 남쪽 교대의 연결부분을 파괴한 경부복선철교에 새로운 교판부설 작업을 실시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이날 수도 육군병원의 제7사단 지휘소가 적에 노출된 듯 전날의 수도사단과 마찬가지로 포화가 집중됨으로써 더 이상 지탱치 못하고, 한걸음 물러나서 그 남쪽 600m 서울 공업중학교에 지휘소를 다시 개설하게 되었다.

6.4.2. 영등포 지구

이날 04:00부터 대안의 적 제4사단(장, 소장 리권무)이 마포와 하중리 나루터에서 본격적인 도하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적은 이 공격에 있어서, 의정부시 점령의 선봉이던 제16연대(장, 대좌 박승희)가 동두천에서 아군 제1연대(장, 함준호 대령)와 제5포병대대로부터 입은 타격이 적지 않았던지, 동 연대를 예비로 돌리고, 이번에는 그간 그들 사단의 예비로써 후속한 제5연대(장, 대좌 최인덕)를 새로이 선두에 내세운 것으로 판단되었다.

북한군은 뗏목과 나룻배에 병력과 장비를 분승시켜 여의도로 도하하였는데, 이 섬의 일각인 율도에 전진거점을 강화한 다음 여의도 모래사장을 휩쓸면서 제8연대(장, 서종철 중령)의 정면인 김포가도의 제방으로 육박하였다.

이리하여 동 제방의 전사면에서 호를 판 장병들과 치열한 사격전이 벌어진 바, 호 속에 엄폐된 아군이 방어에 유리한 형세였으므로 그 지리를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수적인 우세만을 믿고 여의도의 광활한 개활지로 밀어닥치는 적에 불퇴전의 결의로 맞섬으로써 그 제1파를 격퇴하였다.

그러자 적의 포격이 제방을 연한 진지에 집중되어, 제3대대의 화기중대장인 김인식 중위가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는데, 이에 즉시 제10중대장 나병서 대위가 화기중대를 통합하여 끝내 진지를 버티어냄으로써 적은 이날 종일 단 한사람도 제방 위에 올라서보지 못하였다.

6.4.3. 강남 지구

이날 혼성제2사단장 임선하 대령은 한미장교연락전장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후임으론 이한림 대령이 부임하게 되었다.

전날 제3연대가 종일 혈전 끝에 제5연대와 교대하고, 과천쪽으로 물러나게 되었으며 제16연대 역시 우면산을 중심으로 새로운 방어선 급편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날 새벽 사단 공병대대의 S-3인 양수철 중위가 이끄는 제16연대 수색중대 75명이 말죽거리로 추진되어 제5, 16 양 연대의 제한점인 말죽거리 도로를 경계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 수색대가 어둠 속에서, 북한군의 보급추진임무를 맡은 차량 5대가 말죽거리-시흥리 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것을 포착하여, 이를 급습한 결과 군관 4명을 포로로 잡는 한편 차량들을 노획 하였는데, 그 차량은 한남동에서 나룻배로 건넌 것으로써, 아군이 한강 북쪽에 유기한 것이었으며, 거기에 실려 있는 것도 한국군의  건빵 등 비상식량이었다.

이들 차량은 이미 한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선견대의 보급추진을 위하여 뒤따르던 중이라고 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전날 밤중으로 북한군의 일부가 이미 제5연대의 방어선을 뚫고 잠입하여 말죽거리를 지나 판교 쪽으로 빠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일부가 방어선을 뚫고 후방으로 들어간 상태에서, 강안진지를 계속 지키게 된 사단으로서는 염려가 없지도 않았으나, 북한군 주력을 막기 위하여 일단은 95고지- 우면산 진지를 계속 지탱하였다.

이날 밤 적2개 연대는 말죽거리를 중심으로 3방면에 걸쳐 우면산~95고지의 5연대를 공격하였다. 아군 5연대는 2시간 동안 공격한 적 제 1파를 막아냈으나 그후 2400시 쯤에 적 제2파의 공격 당시 연대장이 다리에 관통상을 입음으로써 후송되었는데 이로 인해 아군의 사기와 방어의 유연성이 떨어짐으로써 결국 과천으로 후퇴하였다.

6.5. 7월 2일

이날은 비가 매우 많이 와서 미 공군은 한강철교 경인상행선을 폭격하지 못했다. 북한군의 포격은 심해졌다. 한 한국군장교는 이때를 회상하면서 6.25 당시 받은 포격 중 최대라고 표현했을 만큼 엄청났다. 북한군은 예상하지 못한 미군의 참전에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발악했다.

6.5.1. 영등포 지구

 이날 동양맥주공장의 혼성수도사단 지휘소가 시흥의 보병학교로 이동하는 가운데 여의도에서의 처참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전날 밤에 적의 일부가 다시 비행장을 점거함으로써 제8연대(장, 서종철 중령)의 방어진지정면에 다가서서 집요하게 전선돌파를 시도하였다.

이에 연대는 제1대대(장, 이철원 소령)로 하여금 이 적을 물리치도록 한바 동 대대가 제1중대(장, 김인걸 대위)를 뽑아 비행장으로 출격케 하였다.

그리하여 이 중대가 진지를 박차고 탄우속을 헤치면서 비행장으로 진출하여 종일토록 혈전을 벌인 결과, 적을 간신히 율도쪽으로 격퇴하였는데 이 동안에 동 대대장 이철원 소령을 비롯하여 중대를 진두지휘하던 중대장 김인걸 대위와 또한 이 중대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박격포 사격을 지휘하던 제10중대장 나병서 대위가 적의 포화에 산화하였다.

6.5.2. 강남지구

혼성제2사단장 이한림 대령은 전날 밤 말죽거리 정면에서 제 5연대가 적의 공격을 받게 되자, 그간 과천에서 사단 예비로 있던  유해준 중령이 이끄는 보병학교혼성연대를 옥안봉(373고지 말죽거리 남쪽 5km) 북면의 194고지(말죽거리 남쪽 3.5km)로 이동하여, 북한군의 침로로 예상되는 말죽거리-시흥리 도로를 사수하도 조치하였다.

이에 동 연대가 말죽거리 상공에 치솟는 교전의 불꽃을 바라보면서 과천-말죽거리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달려가, 이날 새벽 목표인 193고지의 동쪽에 이르러, 마침 시흥리 쪽으로 동남향 중인 일단의 차량종대를 포착하게 되었다.

그 종대는 앞뒤로 장갑차의 엄호를 받는 트럭 30여대로 편성된 보급품 수송대였는데, 전날 밤에 제5연대의 진지를 돌파한 북한군 보병의 일부가 시흥리 쪽으로 침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본 연대는 60mm 박격포로써 선두와 후미의 장갑차를 겨냥하여 단발에 격파함으로써 종대의 전후를 화력 차단한 다음, 일제히 내달아 공격하니, 북한군은 차량을 모두 내버린 채 길 건너의 평촌 마을로 잠입하는 것이었다.

이에 마을을 포위하고 수색전을 벌인 결과 20여명을 사살함으로써 적을 일망타진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고 연대는 곧 차량을 모두 파괴하고, 193고지로 반전하여 진지를 급편 하였다. 낮 동안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미 공군기의 위협을 받아, 그곳에서 종일 적을 기다리기만 하였으나, 해가 뜬 뒤로는 더 이상 적의 움직임을 볼 수 없었다.

6.6. 7월 3일

마침내 한강방어선이 돌파되었다. 오전 6시 북한은 전날 미 공군이 기상악화로 한강철교 폭격을 중단한 사이 한강철교 경부복선의 어긋난 부분을 긴급보수해서 T-34탱크 4대를 도하시켰다. 탱크가 도하했다는 소식에 각 부대에는 동요가 일어났고 결국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모든 부대에게 시흥군으로의 후퇴를 명령했다. 영등포는 이날 1200에 함락되었다. 2사단은 과천 부근에서 지연전하다가 군포장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적은 시가전에서 꽤 큰 피해를 입었는지 이날은 활동을 더이상 하지 않았다. 사령부는 이날 오후 수원으로 퇴각했다. 독립기갑연대와 2사단이 타부대가 후퇴하는 사이 전선에서 시간끌면서 지연전하기로 걸정되었다.

6.6.1. 영등포 지구

이 정면의 제8연대(장, 서종철 중령) 역시 한강철교도 적의 전차가 건너게 되고, 또 오류동쪽에서 경인가도를 따라 들이닥친 적이 영등포 시내에서 연대의 배후를 교란하게 함으로써 이 전선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연대장의 부상 : 이른 새벽부터 영등포 일대에 적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이에, 구청(구) 부근의 연대 전방지휘소에서 철야한 연대장 서종철 중령은, 적의 포탄이 동 지휘소 주위에 작렬하자, 그들의 도하공격이 재개되었다고 판단하고, 즉시 지프를 급히 몰아 제1선(김포가도의 제방)으로 달려갔는데, 그가 미처 제방에 다다르기 전에 적의 포탄이 강타하게 되어, 차량이 대파되면서 연대장은 다리에 파편상을 입게 되었다.[14]

이때에 마침 이와 같은 심상치 않은 포성을 듣고, 후방지휘소에서 달려간 부연대장 이현진 중령이 도중에서 연대장을 구하여 시흥으로 후송케 되었는데,
이 무렵 그 일원에서는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가운데에서 전선의 상황은 미처 확인되지 않았으나, 삼삼오오로 발길을 남쪽으로 돌리는 장병들이 보이기 시작한 바, 이미 전황이 결정적으로 기울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리하여 연대장을 대리하여 연대의 지휘를 맡게된 부연대장이 다시 구청(구) 부근으로 달려갔을 때에는, 그곳의 연대본부요원 수명이 쓰러져 있어, 벌써 적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 역력하였다. 이에 동 전선의 파탄을 확인한 그는 다시 시흥쪽으로 가서 안양천의 지류인 마장천( 도림천)의 교량(구청 서남쪽 2.2㎞)에서 병력 수습에 나섰다.

전선의 철수 : 3일 아침이 되면서 연대의 전선이 무너짐과 때를 같이하여 대안의 적이 여의도로 도하함으로써 마침내 영등포 일원을 첨령게 된 것으로 추단되나, 이때 김포가도의 제1선에 버티고 있던 제3대대장 박태운 소령이 피력한 바에 의하면, 동 대대의 철수상황은 이러하다고 한다.
『이날 아침,우리 등 뒤쪽인 영등포 구청쪽에서 전차소리가 나더니, 해가 뜰 무렵 우측의 노량진―영등포―김포 삼거리에 전차 1대가 들어섰다.
시내쪽에서(부평쪽에서 온 듯) 제방위로 올라선 모습으로 포신을 돌려 우리에게 사격을 가하였다.

그래서 특공대 2개조로써 그 전차를 향하여 육박공격한 결과 그것을 파괴하고, 밖으로 기어나온 적의 전차병 2명을 사살하였다.
그런 상태에서 시내가 소연한 가운데 얼마를 지나니까, 어디선가 기적소리가 들렸다. 쌍안경으로 살펴보니, 한강철교위로 기차가 건너오고 있었는데, 무개 화차 10여량을 기관차가 뒤에서 밀었고, 화차 위에는 커다란 물체가 여럿 실려있었다.

자세히 보니 전차였는데, 모두 13대였다. 그 기차가 철교를 지나 노량진쪽으로 들어온 뒤 2시간쯤 지나니까, 영등포 시내가 차량의 소음으로 요란하였다. 그래서 일이 틀렸다고 판단하고, 철수키로 하였다. 박격포 중화기는 파묻고 모두가 경편한 단독무장으로 철수하였는데, 영등포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서쪽의 안양천쪽으로 우회하여 그 천변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였다.

제방을 따라 얼마만큼 가다가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려, 주위를 살펴보니 바로 제방밑에 야포가 보였다. 그 곁에 우의를 입은 병사가 있길래(그날은 비가 좀 뿌렸다)「그 어느 부대냐?」하고 물었더니, 「18연대다!」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우리 제18연대가 아직도 건재해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는데 다음 순간 자세히 살펴보니, 북한군이었다. 북한군 제18연대(제4사단)였던 것이다.

거기서 우리의 철수대오가 흩어졌다. 각개로 분산되어 시흥에 이르니, 읍내는 텅비어 있었다.
그곳에서 연락 장교 박근창 소위와 함께 가까스로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여 본 즉, 그 사이에 50여명이 간데가 없어지고 말았다.
안양에 가니 헌병들이 보였으며, 오후 늦게 수원에 집결하였다.』

어쨌든 적의 전차에 의하여 연대지휘부가 피습됨으로써, 6일동안이나 단 한명의 적병도 아군의 방어진지인 제방을 밟는 것을 허락치 않았던 한강선이 결국 무너지게 되고 만 것이다.

6.7. 7월 4일

이날 8시 적은 탱크를 앞세우고 경부국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수원 이남의 경부국도는 후퇴하는 군경과 피난민, 물자와 차량으로 막혔다. 시흥에서 군포장에서 그리고 안양에서 독립기갑연대와 제2사단 5연대 3연대 18연대가 각각 2시간동안 적을 막았으나 결국 뚫렸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 평택으로 후퇴하였다. 공병감은 수원화성 북문을 폭파해서 북한군의 진군을 막으려 했으나 문화재 보호를 이유로 취소하였다. 이날 2400시 수원은 함락되었다. 수원화성 북문에서 한국군 1개 중대가 저항했으나 적의 포화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미 스미스부대는 북 오산에서 진지를 팠고 한국군 독립17연대는 안성에 진을 쳤다.

이날 UN군으로 참전한 호주 공군은 평택역을 오폭, 역을 통째로 날려버림과 동시에 그곳에 집결 중이던 귀중한 대한민국 국군의 몇 안되는 탄약들을 거의 다 파괴하였다. [15]

7. 대한민국 정부 상황

28일 정부는 대전 충청남도청으로 이전하였다. 이날 밤과 다음날 낮까지 서울을 탈출한 정부 구성원들은 대전에서 재건된 정부에 집결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새벽 4시 3등열차 2칸을 타고[16] 이날 9시 대구에 도착, 서울이 함락되지 않았다는 소식에 북향을 결정하여 12시 대전역에 도착했다. 이때 이기붕 시장은 북행은 너무 위험하다고 말렸고 마중나온 이영진 충남도지사는 북행을 찬성하는 가운데 미 공군이 참전한 소식을 듣고 대전에 정부를 재건하기로 결정, 충남도지사 사저로 향했다.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및 국방부 장관은 27일 오후 수원역으로 피난갔고 부통령 이시영은 28일 1시 김두봉이 보낸 특사의 협조 요청[17]을 거부하고 상황을 파악, 즉시 짐을 싸고 일가족과 한강다리를 넘었는데, 이때가 폭파 30분 전인 2시였다. 국회의장 신익희는 국회부의장 조봉암과 함께 대통령을 면담하러 갔으나 실패하고 곧바로 가족들을 데리고 열차 편으로 남하했다. 조봉암은 서울에 남아 다른 국회의원들의 피난 비용을 마련해주고 북한군에게 넘어가선 안 되는 공문서들을 소각한 후 북한군의 서울 진입 직전에 새벽차를 타고 서울을 탈출했다. 조병옥 박사는 28일 오전 신사리 나루터로 간신히 도하에 성공했다. 이 밖에도 대부분의 정부 각료들과 국회의원들은 27일에 서울을 빠져나왔으나 김규식, 안재홍, 조소앙 등 유력한 정계인사들과 50여 명에 달하는 국회의원들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 했고, 결국 북한군에 의해 강제로 납북당했다.

정부는 이때 간신히 한강을 넘은 사람들에게서 서울에서 지하 공산당원들과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한국군 패잔병들과 경찰, 공무원들을 솎아내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듣고, 이들을 제거해야 후방이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려 수원 이남 모든 지역에서 전국의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모든 좌익 성향 재소자들 보도연맹원들을 일제히 제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대한민국 육군본부는 28일 오전 수원 국민학교로 이전했다.[18]

해군본부 한국은행 금괴 후송에 협조한 후 진해의 통제부사령부에 전권을 임시 위임한 후 조직 해산 및 개별적으로 대전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공군본부는 27일 23시쯤 여의도 비행장의 아군 비행기들과 함깨 대전비행장으로 이전했다.

한국은행은 임직원들이 목숨을 걸고 서울 함락 직전까지 서울 본점 금고에 있던 정부 보유 금괴 1.1톤과 은괴 2.5톤을 대전을 거쳐 진해 해군요항부 창고로 가까스로 이송했다.[19] 도쿄 지점에게 그곳에 있는 2,000만 달러 어치의 외환보유고 처분권을 전부 위임하고[20] 그 후 대전지사로 철수, 임시본부를 세웠다. 임시본부를 세운 직후 유통되지 않은 채 서울 본점 금고에 보관되어 있던 105억 원 어치의 조선은행 원 발행물량과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 있던 조폐기를 폐기하지 않았음을 뒤늦게 파악하고 위조지폐를 이용한 북한의 경제교란을 막기 위해 도쿄지점을 통해 GHQ의 협력을 얻어 새로운 대한민국 원 은행권을 발행한다.

우체국은 우정본부를 대전 우체국으로 이전했다. 그런데 당시 외국으로 송신이 가능한 전화와 전보기가 대전 우체국에 있는지라 곧 군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주한미국대사관과 미군사고문단은 27일 저녁 수원농업학교로 이동했다.

맥아더장군의 미 전방 사령부는 28일 수원 농업학교에 설치되었다. 사령관는 처치 소장.

8. 후방 상황

KBS 중앙방송국은 28일 새벽 군에서 제공한 트럭 편으로 한강 인도교 폭파 직전 탈출, 28일 오후 출력 500w의 대전방송국에서 방송을 재개했다. 대전방송국은 또한 VOA, NHK,평양방송 등 외국방송을 청취해서 당시 외부세계와 거의 단절되었던 정부에게 귀중한 전략적 정보를 제공하여 전쟁국면에서 정부가 전략적 결정을 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KBS는 7월16일 대구로 이전했으며, 대한 학도의용군이 6월 30일 대전에서 창설되었다. 서울에서 피난온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자원입대한것이다. 이들은 주로 정훈, 정보분야에서 일을 했다.

9. 마무리

대한민국 국군 북한군을 6일이나 막아내 미군 참전의 시간을 벌었다. 한편으로 이 전투에서 한국군은 북한군이 보유한 전차에 대한 공포증을 상당부분 털어버리고 귀중한 대전차전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정부가 대전에서 부활[21]할 시간을 만들어 후방의 안전을 보장하는데 성공했다.

참고로 당시 북한군의 예정대로 전쟁이 진행이 되었다면 한국군은 훨씬 더 큰 타격을 입었을 터였으나, 정작 춘천-홍천 전투에서 한국군 6사단에 의해 북한군 제2군단이 발이 묶이고 2사단은 아예 전력의 40%를 손실, 사실상 전열에서 이탈하는 일이 발생해 계획에 차질이 생겨 서울과 춘천 양쪽의 북한군이 어물쩡거리게 되었고 김포사령부의 영관급 지휘관들의 분전덕에 김포지역에서의 북한군의 진출이 저지당하였기에 한국군은 재편제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서부전선이 붕괴된 상태에서 동부전선까지 무너졌다면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병력과 화력이 부족하지만 목숨바쳐 싸운 김포사령부와 6사단의 분투 덕분에 한국군은 서부전선을 재편제할 시간을 얻었다. 자세한 건 춘천-홍천 전투 문서를 참고.


[1] 시로 승격 된 것은 1963년으로 당시에는 양주군 의정부읍 [2]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의 시흥은, 현재의 시흥시가 아니라 당시의 시흥군 동면 시흥리를 의미한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3] 그래도 대부분의 병력은 중대 단위로 도하할 수 있었다. 사실 중대 단위 이상으로 병력이 모이지 않았다면 살아서 강을 건너기 어려웠겠지만. [4] 보도연맹 대다수는 공무원들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적당히 이름적힌 사람들이고, 실제로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5] 전쟁 발발전 남산학교장에 임명된 후 시흥의 육군보병학교 대위 지휘참모과정(구.고등군사반)에 입교하여 파견교육을 받던 중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급히 김포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북한군이 김포로 몰려오자 탈출하여 부산으로 튀었다가 헌병들에게 체포됐다. 그러나 군사분야에 정통한 한국인 정보통이 필요했던 미군 극동군사령부에서 계인주를 적격으로 점찍어서 그의 신병을 인수해 가버리는 바람에 천운으로 사형집행을 면할 수 있었다. 그후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미군에게 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등 도움을 주며 미군 수뇌부 측의 신뢰를 얻었고, 미군이 계획한 인천상륙작전의 팔미도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래도 이미 저지른 군무이탈죄 때문에 대한민국 육군으로부터는 불명예 제대당했으나 민간인 신분으로 계속 미군 극동군사령부에서 조력자로 일했고, 미군 극동군사령부가 운용했던 켈로부대의 부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런 공로를 한국군에서도 인정했는지 1951년 11월에 그를 사면해줬고 육군 장교직으로 복권도 시켜줬으나 계인주는 한국군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미군 극동군사령부에서 일하다가 1953년에 예편했다. [6] 전 15연대장, 훗날 국회의원까지 됨. [7]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편입 [8] 서부전선에서 사단급 이상의 부대 중 유일하게 부대 건제를 유지한 부대다. 1사단을 제외한 한강 방어선에 투입된 다른 사단들을 보면 모두 "혼성"이 붙어있는데, 이는 병력 원소속과는 상관 없이 낙오병이 모이는대로 당장 필요한 부대에 대충 찢어다 보내서 편성시킨 부대였기 때문이다. 의정부 축선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은 타 사단과는 달리 1사단은 파주-봉일천 일대에서 성공적인 방어전투를 치렀기에 한강 도하 과정에서 병력이 흩어졌음에도 빠르게 재집결 및 재편성이 가능했고, 덕분에 유일하게 제11, 12, 13연대의 원 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싸울 수 있었다. [9] 이 문서에서의 시흥은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 지역이 아닌, 금천구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지역(관악구, 광명시, 안양시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한다. [10] 김홍일 소장이 본 대대를 이곳으로 뽑아 돌린 것은 동 대대가 과천-말죽거리 일대에 승마훈련장을 두고 있던 터이므로 동 지역에 대한 지형에 익숙할 것으로 판단한 까닭으로 보인다. [11] 제네바 협약 위반으로, 전쟁범죄에 속한다. [12] 현 영등포공원 자리 [13]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태평양 지구 사령부이다. 6.25의 연합군(UN군) 사령부는 7월 7일 도쿄에서 창설됐다. [14] 이 부분은 다른 기록도 있다. 육사 8기생 회고록 "노병들의 증언"에 실린 8연대 소속 중대장 안태갑의 증언에 따르면 8연대장은 전투가 심해지자 엉덩이를 권총으로 쏘아 적탄에 의한 상처로 위장하고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이 사실이 연대에 알려지자 연대의 전선이 와해되는 결정타가 되었다고 한다. [15] 이들이 아군을 오폭한 이유는 이들은 한강 이북의 모든 목표물의 공격하라고 명령받았는데 금강을 한강으로 오해해서였단다. [16] 이때 동승자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대통령과 영부인의 내외국인 비서관들, 경무대 경찰서 경찰서장과 경찰관들, 보건사회부 장관과 이기붕 서울특별시장이었다. [17] "이승만 대통령이 달아났으니 이제 당신이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김일성 수상과 즉시 정상회담을 하고 한국군에 즉시 전투중지 명령을 내리라"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18] 이때 정보국 문관 박정희는 한국군이 가장 불리하던 이날 28일 서울의 인민군이 아닌 수원의 육본으로 찾아가 충성심을 입증했고 현역으로 복귀, 소령 박정희가 되었다. [19] 이 금괴과 은괴들은 전황이 더 악화된 8월 1일 미군 수송선 편으로 뉴욕에 있는 연방준비제도 금고로 이송되었다가 1955년 대한민국이 국제통화기금에 가입할 때 출자금으로 쓰인다. [20] 당시 달러 처분권은 상공부 장관, 한국은행장, 외환국장등 약 10명에게 있었는데 법률 상 이들 중 한명만이 반출을 명령해도 집행해야 하는 구조라서 이들 중 한명 이라도 북한군에 체포되어 협조할 경우 피땀어린 2,000만 달러가 날라 갈 수 있으므로 북한군이 납치 못 할 도쿄지점에 위임한 것이다. [21] 거짓말은 아닌게 6월 28일 대전에 위치한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과 보사부장관, 서울시장 이기붕, 충남도지사 이영진밖에 없는 참담한 구성이었는데 한강선에서 시간을 벌고 피난민을 호위해서 정부 구성원들이 모일 시간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