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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08:37:30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펠리페 스콜라리에서 넘어옴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Kuwait_FA.png

22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CBF_logo.svg.png

54대, 59대
파일: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44대
클럽
파일:주빌로 이와타 로고.svg

6대
파일:첼시 FC 로고.svg

28대
파일:광저우 헝다 타오바오 엠블럼.svg

36대
}}} ||
브라질의 축구 감독
파일:10000069941.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Luiz Felipe Scolari
출생 1948년 11월 9일 ([age(1948-11-09)]세)
브라질 히우그란지두술주 파수푼두시
국적
[[브라질|]][[틀:국기|]][[틀:국기|]] |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1]
신체 180cm
직업 축구 선수 ( 수비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SER 카시아스두술 (1973~1979)
EC 주벤투지 (1980)
노부 암부르구 (1980~1981)
센트루 스포르치부 알라고아누 (1981)
감독 센트루 스포르치부 알라고아누 (1982)
EC 주벤투지 (1982~1983)
GE 브라지우 (1983)
알 샤바브 FC (1984~1985)
GE 브라지우 (1986)
EC 주벤투지 (1986~1987)
그레미우 (1987)
고이아스 EC (1988)
알카디시야 쿠웨이트 (1988~1990)
쿠웨이트 대표팀 (1990)
코리치바 FC (1990)
크리시우마 EC (1991)
알 아흘리 SFC (1991)
알카디시야 쿠웨이트 (1992)
그레미우 (1993~1996)
주빌로 이와타 (1996~1997)
SE 파우메이라스 (1997~2000)
크루제이루 EC (2000~2001)
브라질 대표팀 (2001~2002)
포르투갈 대표팀 (2003~2008)
첼시 FC (2008~2009)
FC 부뇨드코르 (2009~2010)
SE 파우메이라스 (2010~2012)
브라질 대표팀 (2012~2014)
그레미우 (2014~2015)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 (2015~2017)
SE 파우메이라스 (2018~2019)
크루제이루 EC (2020~2021)
그레미우 (2021)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 (2022)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2023~2024)
기타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 (2022~2023 / 기술이사)
국가대표 없음

[clearfix]

1. 개요

브라질 축구인.

브라질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트로피를 들어올린 감독으로, 2002 월드컵에서 브라질 대표팀을 이끌고 전승 우승으로 조국에 다섯 번째 피파컵을 안겼으며, 또한 포르투갈 대표팀을 지휘하여 유로 2004 준우승과 2006 독일 월드컵 4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첼시에서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경질당하고, 2014 월드컵에서는 브라질 대표팀을 이끌고 4강까지는 올라갔으나, 정작 그 4강전에서 독일에게 1-7이라는 기록적인 참패를 당하며 지도자 경력에 큰 흠집을 남겼다.[2]

2. 감독 경력

2.1. 1980년대

1981년 센트루 스포르치부 알라고아누(CSA)에서 은퇴 후 1년 뒤인 1982년 CSA의 감독으로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한다. 감독직에 부임하자마자 CSA를 브라질 알라고아스 주 주별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그 후 주벤투지, 브라질 지 펠로타스, 알 샤바브 FC (사우디아라비아), 그레미우, 고이아스, 알카디시야 쿠웨이트(쿠웨이트) 등 브라질과 아랍 리그를 전전하는 저니맨 생활을 했고 그레미우 시절에는 히우그란지두술 주 주별리그 우승을 하기도 했다.

2.2. 1990년대

그러던 도중 1990년 쿠웨이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어 걸프 컵을 우승하고 1991년에는 크라우시마 감독으로 브라질로 돌아와 브라질의 FA컵인 코파 두 브라질 우승을 차지하며 자리를 잡아가는가 싶더니 1년도 채 안되어 UAE의 알 아흘리, 1992년에는 다시 쿠웨이트의 알카디시야 쿠웨이트 감독으로 활동하며 아랍에서 감독직 생활을 이어갔다.

1993년 브라질의 그레미우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1993년부터 1996년까지 4년동안 그레미우에 머물면서 리그 우승 1회, FA컵 우승 1회, 주별리그 우승 2회를 차지 했고 1995년에는 남미의 챔피언스리그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차지 하며 명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언론으로부터 브라질 특유의 공격축구를 하지 않고 수비에 중점을 두는 실리축구를 한다면서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파일:gramper.jpg
1997년 일본 축구 잡지에 J리그 외국인 감독들을 전국시대의 무장 의상으로 합성한 사진.[3]

1997년에는 일본의 주빌로 이와타 감독으로 부임했다. 리그 11경기만 지휘한채 4개월만에 감독직을 사임했다. 하지만 이 시즌에서 이와타는 J리그 우승을 했는데, 이것의 기초작업을 놓았다고 평가받고 있다. J 리그시절 등록명은 페리뻬 (フェリペ) 4개월만에 사임한 이유는 성적 부진이 아니라 브라질의 상파울루 리우 데 자네이루를 연고로 둔 명문팀을 맡는게 오랜 꿈이었는데, 상파울루를 연고로 둔 파우메이라스에서 오퍼가 왔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후 이 팀에서 1997년부터 2000년까지 팀을 지휘하며 정규리그와 주별리그에선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1998년 FA컵 우승을 차지했고 1999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차지 하며 1999년 남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3. 크루제이루 EC

2000년부터 크루제이루 EC의 감독으로 활동하며 2001년에는 미나스제라이스 주 주별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능력을 발휘했다. 이 공적으로 브라질 대표팀 감독에 오른다.

2.4. 브라질 대표팀 1기

파일:felipe2002.jpg
셀레상을 정상으로 이끌다.

2002 한일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 잇달은 졸전으로 사상 최초로 월드컵 남미예선 탈락에 빠질 뻔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 중도 부임하였다.[4]

당시 남미에는 10개 팀이 참가, 홈 앤 어웨이로 풀리그로 치르면서 4장의 티켓과 1장의 플레이오프 티켓이 걸려 있었는데, 브라질은 처음에 루솀부르구의 지휘 하에 예선을 치렀으나, 계속해서 무재배를 하는 등의 졸전을 벌이다가 결정적으로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남자축구에서 카메룬에 8강에서 2-1로 패하여 8강에서 탈락한 후 루솀부르구는 잘리게 되었다. 루솀부르구의 후임으로 잠시 이메르송 레앙이 국대 감독을 맡았으나,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4위에 그치는 심히 부진한 성적으로 해임되고 다시 스콜라리에게 기회가 온다.[5]

스콜라리는 대대적인 개혁을 이루는데, 팀 케미스트리에 해가 되는 호마리우를 과감히 제외시키는 등 명성보다 실력 위주로 대표팀을 선발한다. 이때 지우베르투 시우바 카카가 발탁되어[6] 세계적인 선수들로 거듭난다. 그리고 전통의 4-2-4 포메이션을 버리고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는 3-4-3 포메이션으로 전환하며 철저한 실리축구로 일관한다. 브라질 내부에서는 전통적인 팀 컬러를 잃었다며 비판을 받았고, 팬들은 호마리우를 발탁하라며 시위를 벌이고, 당시 카르도수 대통령까지 나서 부탁했으나, 스콜라리는 요지부동이었다.이 때문에 협박이 잇따르자 경호원까지 붙었을 정도. 이 당시 1998년 브라질 국대를 이끌었던 자갈루마저도 스콜라리를 비난했다.

이렇게 극심한 반발도 있었지만, 스콜라리는 성적으로 대답하며 브라질을 본선에 진출시킨다. 턱걸이로 진출한 FIFA 월드컵이기에 전문가들의 우승 전망은 낮았으나, 본선에서는 히바우두 - 호나우두 - 호나우지뉴로 이어지는 이른바 3R 스리톱의 대활약으로 환상적인 경기력 끝에 전승 우승을 차지하며 고국 브라질에 통산 5번째 별을 선물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우승을 하긴 했지만, 이 당시 스콜라리 감독은 백업 선수들로 호나우두와 히바우두와 클래스 차이가 나는 선수들인 루이장과 에디우손이라는 선수들을 뽑았다. 물론 지오반니 에우베르 마르시오 아모로소가 남미 지역예선에서 기회를 줘도 부진했고 루이장과 에디우손은 기회를 줬을 때 알짜배기 활약을 해서 그랬겠지만, 만약 호나우두 히바우두가 도중에 부상이나 경고 누적, 퇴장 등의 변수가 생겼을 때 이들을 가지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지 미지수다. 그러나 다행히도 당시 브라질은 초공격팀이라고 불린 만큼 수비진과 골키퍼 라인도 3R 못지않게 막강했기 때문에 상당한 커버는 가능했을 것이다.

2.5. 포르투갈 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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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독일 월드컵 3·4위전에서 독일에게 패한 후 낙담하는 호날두를 위로하는 스콜라리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의 성공 이후, 한일 월드컵에서 졸전 끝에 조별리그 탈락한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을 리빌딩할 감독으로 선임된다. 1990년에 등장한 포르투갈 골든 제네레이션의 끝물에서 팀을 대대적으로 리빌딩한 스콜라리는 브라질에서 귀화한 데쿠와 신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중용하며 유로 2004에서 결승까지 올라가나, 그리스의 수비 축구에 막혀 아쉽게 준우승에 그친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3전 전승으로 가볍게 통과한 뒤, 16강에서 네덜란드, 8강에서 잉글랜드를 꺾으며 포르투갈을 40년 만에 4강에 올렸다. 비록 4강전과 3·4위전에서 모두 패하며 4위에 그쳤지만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월드컵 본선 11연승과 12경기 연속 무패 기록을 세운다.[7] 잉글랜드를 상대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유로 2004에 이어 또다시 8강에서 물을 먹였다. 스콜라리의 팀에 3연속으로 탈락한 잉글랜드의 감독은 모두 스벤예란 에릭손이었다.

유로 2008에서는 조별리그 1위로 올라갔으나, 8강에서 준우승팀 독일을 만나는 바람에 3-2로 패해 탈락했다. 유로 대회 도중에 아브람 그랜트 감독이 경질된 첼시 감독 부임이 확정되었다.

2.6. 첼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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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우승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국대 감독으로 유로 2004 준우승, 월드컵 4위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스콜라리는 여러 빅클럽의 구애를 받게 되었다. 2008년 6월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에 의해 아브람 그랜트 감독의 후임으로 첼시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 기간은 3년이고, 스콜라리로서는 처음으로 유럽의 빅클럽을 맡게 되었다. 첼시뿐만 아니라 맨체스터 시티의 구애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선수단 장악에 실패, 첼시의 실점, 패배 관련 기록 같은 안 좋은 기록들을 전부 갱신하며 레코드 메이커, 히스토리 메이커, 역사라리 등등 안 좋은 별명만 남긴채 2009년 2월 한 시즌도 못 채우고 하차했다.

애당초 첼시는 감독의 무덤이기도 했고, 구단주의 간섭과 선수단 입김이 너무 강해서, 아무리 월드컵 우승에 유로 준우승이라고 해도, 유럽 클럽 감독 경험이 일천한 스콜라리가 맡기는 힘든 팀이었다. 그리고 스콜라리가 원한 선수들[8]도 영입하지 못했다. 또한 폼이 떨어진 애제자 데쿠를 영입해서 거의 매 경기 주전으로 돌리는 바람에 라커룸 분위기도 어수선 해지고, 팀의 살림꾼이던 마이클 에시엔이 한동안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하면서 초반의 상승세를 이끌어 가지 못하고 시즌 도중 경질당했다.

재밌으면서도 강력한 축구를 원하던 로만 구단주에 맞추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겠지만, 기존의 스쿼드에서 별로 변경된 것도 없으며 스콜라리 입맛에 맞는 스쿼드가 아님에도 갑작스런 스타일 변경을 시도한 것이 문제였던 듯. 주전급 선수로는 데쿠와 보싱와 정도가 영입되었으나, 이는 그 당시 스콜라리 감독이 추구하려던 포메이션에선 반드시 영입해야 할 선수는 아니었다. 스콜라리 감독은 데쿠를 플레이 메이커로 기용하고 호비뉴를 세컨드 스트라이커 혹은 윙포워드로 기용하는 시스템으로 기민하고 공격적인 포메이션을 구상했던 듯 하나 호비뉴의 영입 실패로 인해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스콜라리 감독 또한 팀내 분위기를 장악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고(체흐, 발락, 드록바 등의 반발) 전술적으로도 특색이 없거나 다소 의아한 용병술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 마디로 이 시절 스콜라리는 자기가 생각한 팀을 만들기는 커녕, 선수단의 노골적인 항명에 시달려서 성적은 그럭저럭 냈지만, 구단 안팎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특히 영국의 극성스러운 언론들은 이런 불화를 뻥튀기를 해서 보도했고, 그러자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격노해 결단을 내린 것.[9]

디디에 드록바는 부임 초기부터 잔부상에 시달렸고 부상에서 회복된 이후에도 대놓고 항명하면서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와 직접 접촉해 스콜라리와 함께 일 못하겠다며, 이적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EPL 최고의 골잡이었던 니콜라 아넬카도 윙어로 뛰라는 스콜라리의 지시에 항명했다. 이런 주전들의 항명에 시달린 스콜라리도 드록바와 아넬카를 타 팀으로 보내고 인테르 아드리아누를 데려오자고 제의했지만 결국 이 둘 대신에 스콜라리가 나가게 되었다. 스콜라리는 2017년 한 인터뷰에서 "아넬카 때문에 첼시에서 쫓겨났다"며 아넬카를 원망했다.[10]

그렇지만 이런저런 내부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초기 스콜라리 하의 첼시는 재밌으면서도 강력한 축구로 잘 나가는 듯 보였다. 4-1-3-1-1 대형으로 네명의 미드필더들이 부채꼴 진형을 이루며 아름다운 패스플레이를 구사하며 포츠머스를 4-0으로 격파하고, 미들스브로를 원정에서 5-0으로 대파하는 등의 활약으로 리그를 평정했고, 8라운드까지 6승 2무로 1위를 달렸다.

그러나 결국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반영한 듯 첼시의 자랑이던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86경기 무패라는 대기록이 2008-09 시즌 프리미어 리그 9라운드 경기에서 리버풀에게 패배[11]하며 깨지고 리그 내 성적도 서서히 하락했다. 아스날에 또다시 홈에서 2-1 역전패를 당하고, 중하위권의 뉴캐슬-웨스트햄-에버튼[12]-풀럼에 줄줄이 무승부에 그치더니 2009년 새해에는 맨유 원정에서는 3-0 참패를 당하며 경질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2009년 2월 1일 리버풀 원정에서 2-0으로 패하고 7일 헐시티와 홈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한 후 방점을 찍으며 전격 해임되었다. 고참 선수들과의 불화 및 구단주의 성급함으로 해임된 것. 첼시에서의 스콜라리의 총 전적은 20승 11무 5패로 승률은 55.56%였다. 전임 무리뉴가 전해에 2위로 리그를 마쳤고, 승률이 66%, 후임 히딩크가 72%의 승률을 거둔 것을 보면 확실히 스콜라리는 첼시에서 죽을 쑨 것은 맞다. 그나마 챔스 진출권에는 걸쳐 있어서 무리뉴호 첼시의 15/16시즌, 그레이엄 포터의 22/23 시즌 정도로 팀을 박살낸 것은 아니었다.[13]

후임으로는 거스 히딩크가 선임되었고 첼시는 리그를 3위로 마쳤다. 스콜라리가 경질될 당시 첼시는 14승 7무 4패로 리그 4위였는데, '빅6'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2010년대였다면 그럭저럭 선방했다고 할 수 있지만 2000년대에는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이었다. 로만 아브라모비치 인수 직후인 2003년부터 2009년까지 6년간 첼시는 항상 우승을 노려왔으며 최종 순위는 언제나 우승 혹은 준우승이었다. 준우승과 챔스 4강이라는 준수한 성적에도 무리뉴와 로만이 마찰을 겪었고, 무리뉴의 후임 아브람 그랜트 맨유와 승점 2점차로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첼시를 구단 사상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시켰음에도 우승 트로피가 없다는 이유로 경질되었을 정도다. 비유하면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라리가 4위에 머무른 격이다.

나중에 스콜라리는 2016년 안토니오 콘테가 첼시에 부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첼시는 세계적 감독이 와도 어려운 자리다" 라 평했다. 그리고 콘테는 첫 시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순항했으나 결국 두번째 시즌을 마치고 지휘봉을 내려놓으며 스콜라리의 우려가 틀리지 않음을 증명했다.

2.7. FC 부뇨드코르

이후 우즈베키스탄 FC 부뇨드코르감독으로 부임했다. 뜬금없이 이 팀을 맡은 이유는 이 팀의 구단주가 대통령 일가라서 당시 아챔 우승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팀에 입단한 히바우두를 앞세워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노렸으나, 포항 스틸러스와의 8강전에서 2차전 연장 혈투까지 가는 끝에 결국 4-5로 패해 좌절되는 등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다. 첫해는 우즈벡 리그 우승을 했고, 2년차에는 못하고 우즈벡을 떠났다.

2.8. 브라질 복귀

그 뒤로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 SE 파우메이라스 감독으로 선임되며, 다시 브라질 리그에 복귀, 2012년 FA컵인 코파 두 브라질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리그에서 18위로 강등당하며 경질되었다.

2.9. 브라질 대표팀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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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으로 끝난 세번째 월드컵

이후 자국에서 열리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의 사령탑으로 다시 선임되며 기대를 모았다. 전임 감독이 마누 메네지스였는데, 2012 런던 올림픽에서 멕시코에게 금메달을 헌납했기 때문에, 재계약을 못하고 경질되었다. 게다가 브라질은 개최국이었기에 개최국으로서는 홈에서 반드시 우승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고, 우승 해 본 감독을 찾다 보니 스콜라리가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2013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5전 전승 14득점 3실점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하며 역시 스콜라리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고 맞은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를 2승 1무 조 1위로 통과하고[14], 16강에서 칠레를 승부차기로 꺾은 뒤 8강에서는 콜롬비아에 2-1 승리를 거두며 4강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후안 카밀로 수니가에게 니킥을 당한 네이마르의 부상과 티아고 실바의 경고 누적 결장이라는 악조건 가운데 4강에서 독일을 만난 결과 1-7이라는 기록적인 대참패를 당하고, 이어진 3·4위전도 네덜란드에 0-3으로 완패하며 4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브라질 축구 역사상 단일 월드컵 최다실점이라는 불명예는 덤. 그래도 02년 월드컵 이후 최고 성적이었지만 브라질 언론과 팬들이 과거 업적들과 상관없이 그런 끔찍한 결과를 낳은 사람을 더이상 인정할리 만무했고 결국 스콜라리는 당연히 지휘봉을 내려놓게 된다.[15]

다만 스콜라리가 "실력이 떨어지는 프레드, , 헐크 등을 의리로 뽑았다"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당시 사정을 보면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프레드는 해당시즌 브라질 리그 득점왕에, 전년도에 있었던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던, 당시로서는 브라질에서 제일 나은 공격수였고[16], 헐크 역시 의리축구 운운할 수준은 아니다. 그 외에 조, 펠리페가 기대 이하의 선수인 것은 맞지만 대부분의 감독들도 경기에 뛸 일 없는 후보의 후보 선수들은 자기 제자를 선발하곤 한다.

하지만 스콜라리호는 팀 빌드업을 이끌 미드필더의 부재를 빌드업 능력이 출중한 수비수들로 해결하려는, 한정된 자원에 비해서 매우 훌륭하다 할 만한 플랜 A에 비해 플랜 B를 전혀 준비하지 않았기에 이런 참사를 겪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당시 스콜라리는 상당히 분기탱천한 자국민들에게 개인적인 사과 성명까지 발표했을 정도였다.

2.10. 그레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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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이랑의 비극 이후 계속되는 부진

워낙 엄청 비난을 받아 축구계에서 은퇴하는 거 아니냐 했지만, 18년 만에 다시 그레미우의 감독이 되었다. 그레미우 시절 리그 우승 및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같은 화려한 성적을 거뒀기에 그레미우 팬들에게는 아직도 반응이 좋은 편이다. 그러나 2015년 5월 성적 부진으로 그레미우에서 경질당하고 말았다. 월드컵 우승도 경험했던 감독 치고는 행보가 너무나도 씁쓸하다.

2.11. 광저우 헝다

2.11.1. 2015년

2015년 5월 광저우 헝다 감독을 맡고 있던 파비오 칸나바로 2015년 AFC 챔피언스 리그 성남전에서 무를 캔후 전격 경질되었다. 리그에서는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나, 4월들어 계속 무승부를 기록하자 구단주가 감독 초짜인 칸나바로의 능력에 의구심을 가지고 6개월만에 경질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바로 데려온 감독이 바로 그레미우에서 나온 스콜라리였다.

스콜라리는 오자마자 호비뉴 파울리뉴를 유럽에서 데려와서 팀의 외국인 라인을 손봤다. 호비뉴는 사실 실패한 영입이었지만, 파울리뉴는 스콜라리 아래서 갱생하여 2017년에 바르셀로나로 갈 수 있었다.

이렇게 시즌 중도에 부임했으나, 2015시즌 중국 슈퍼리그 우승과 함께 중국축구협회에서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11월 21일 알 아흘리를 상대로 1:0 승리를 하며 AFC 챔피언스리그까지 우승하며 더블을 달성했다. 1995년과 1999년 남미의 챔스인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에 이어 양 대륙 대륙대회 우승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2.11.2. 2016년

그러나 좋았던 기억도 잠시 2016년, 스콜라리 감독이 이끄는 광저우 헝다는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조별리그에서 광탈하는 수모를 겪었다. 1차전 포항 스틸러스와의 홈 경기에서 광저우는 모래알 조직력을 드러내며 0:0으로 유기농 무를 캐고 말았고 2차전 시드니와의 경기에서는 상대의 자책골이라는 행운을 얻고도 1:2로 패배했다. 3차전 우라와 레즈와의 경기에서도 2:2로 무재배에 그쳤고 4차전에는 그 우라와 레즈에게 0:1로 패배했다. 5차전에서 포항 스틸러스를 상대로 모처럼 2:0 승리를 거두었지만 시드니 FC와 우라와 레즈가 서로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결국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되었다. 전 대회 우승팀이 조별리그에서 광탈하는 수모를 남겼기에 현재 광저우 팬들 사이에서는 스콜라리를 경질해야 한다는 목소가 높았으나, 리그에서 선전하기 때문에 경질은 아니다.

리그 내에선 19승 7무 4패 승점 67점으로 리그 연속 우승에 성공했고, FA컵도 최용수가 지휘하는 장쑤 쑤닝을 이기고 우승컵을 차지했다. 적어도 아챔의 부진으로 몰락의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닌 듯.

2.11.3. 2017년

2017년에도 중국 슈퍼 리그에서는 초반에 흔들리더니 5월이 지나자 연승으로 1위로 올라왔다.

다만 아챔에서는 예전에 보여주었던 광저우의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16강에서 가시마 앤틀러스와 1승1패로 동률을 이뤘으나 원정 다득점으로 겨우 8강에 올라왔다.

2017년 8월 22일, 라이벌 상하이 상강과의 아챔 8강전에서 파울리뉴의 이적으로 인한 조직력 공백을 극복하지 못하고, 4:0으로 참패했다. 9월 12일 벌어진 2차전에서는 5-1로 승리했으나 승부차기에서 패해 탈락. 마찬가지로 직후에 열린 FA컵에서도 똑같은 상하이 상강에게 패해 탈락하였다. 두 경기의 문제점은 바로 공격의 핵인 파울리뉴의 부재.

최근에는 아시아에서 월드컵에 나갈 수 있는 팀을 감독으로 맡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2017년 9월 말 카를로 안첼로티 바이에른 뮌헨에서 해임되자, 광저우 헝다 측은 안첼로티 측과 접촉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스콜라리는 11월에 끝나는 계약을 두고 그다지 재계약에 관심이 없는 듯, 안첼로티에게 "중국 리그는 한번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라고 맡아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시즌 종료를 거의 앞둔 10월 말, 재계약을 안한다고 못박았으며, 월드컵에 나갈 팀을 알아보고 있다던데, 진짜로 한국 국대에 관심 있는 듯.
파일:guangzhou_scolari.jpg
광저우의 리그 7연패를 확정한 후 기뻐하는 스콜라리

10월 22일, 구이저우 즈청을 5-1로 대파하고 슈퍼리그 2017 시즌 우승을 확정지으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스콜라리로서는 3연속 우승으로 2014년 월드컵의 흑역사를 조금이나마 만회한 셈이다.

11월 6일 고별 기자회견에서 일단 고향 브라질로 가겠지만, 중국에 되돌아 올수도 있다는 여지의 말을 남겨 현역 복귀의 길은 열어두었다.

2.12. 광저우 헝다 이후

러시아월드컵 종료 후 ''대한축구협회에서 스콜라리에게 조만간 정식으로 감독직 제안을 할 것"이라는 브라질발 기사가 떴다. 기사 다음날 스콜라리의 대리인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 독일과의 경기를 인상깊게 본) 스콜라리 감독은 한국행을 원하며, 감독 선임을 요청했다"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된 더 자세한 내용은 벤투호/선임 과정 문서 참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외에도 현재 이집트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접촉 또한 이뤄지고 있는 중이라고 전해진다. # 일각에서는 국대 감독으로 명예회복을 하고 싶지만 협상력이 없으면 헐값에 팔릴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니 의도적으로 복수의 팀과 협상을 한다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다만 한국팀 감독이 되기는 어려워 보이는데 스콜라리 본인이 책정한 연봉 수준은 축협이 정한 기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39억 원에 달하기 때문이다.[17] 현재 상황을 생각하면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서 본래 받던 연봉보다 더 받겠다는 의향으로 보인다. #

2.13. SE 파우메이라스

2018년 7월 27일 SE 파우메이라스 감독을 맡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

시즌 초반에는 5위권에서 있었으나, 10월에는 1위로 올라왔다. 결국 우승함으로써 명장 실력 어디 안 감을 보여줬다.

하지만 2019년 9월 2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탈락하면서 경질당했다.

2.14. 크루제이루 EC

경질 이후 2020년 크루제이루 EC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2021년 상호 합의하에 계약을 해지했다.

2.15. 그레미우

2021년 7월, 그레미우 감독으로 부임했다. 계약 기간은 2022년 12월까지.

2021년 10월 11일, 계약 해지에 합의했다.

2.16.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

2022년 5월,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 감독으로 부임했다.

부임 당시 16위었던 팀을 6위으로 상승시키며 여전히 명장임을 보여줬다.

그리고 2022년 9월 6일, 2년 연속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기록한 SE 파우메이라스를 누르고 2005년 이후 17년 만에 팀을 결승으로 올려놨다. 그리고 스콜라리 매직이 이번에도 이어지나 했으나 결승전에서 아쉽게 CR 플라멩구에 0-1로 패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2022년 11월 13일에 시즌이 끝나며 감독직 은퇴를 발표했다. 후임 감독으로는 수석코치였던 파울루 투하를 임명했다. 다만 축구계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고 구단의 테크니컬 디렉터로 보직을 변경했다.

2023년 6월 16일, 테크니컬 디렉터직에서 물러나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를 떠났다. #

2.17.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2023년 6월 16일, 은퇴 번복 후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감독으로 부임했다. 계약 기간은 2024년 12월까지. #

2024년 3월 21일,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

3. 전술 철학

브라질 출신 감독답지 않게 수비형 축구를 한다. 일단 현대 축구의 경향인 선수들의 피지컬, 조직력 (특히 수비력)을 중시한다. 이는 개인기와 공격력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브라질 스타일과는 다른 것으로 현지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2002년 당시에도 3백 + 윙백의 조합으로 수비축구를 했으나, 당시 브라질의 공격라인이 사기적이었기 때문에 만나는 팀마다 두들기며 우승을 할 수 있었다.[18] 유로 2008에서도 포르투갈의 4백에 미드필더인 주앙 무티뉴와 프티가 가담하여 매우 수비적으로 운용했다. 광저우 헝다에서도 김영권을 중심으로하는 수비진에 황보원이나 정즈, 파울리뉴와 같은 미드필더들이 수비에 적극 가담하게 만들었다.

공격에 있어서는 헤더를 중시하며, 사이드 어택과 빠른 역습을 중시한다. 다만 공격엔 특별히 지시를 내리지 않아서, 공격력이 좋은 포워드가 있으면 팀은 승승장구하지만, 이들이 막히면 답이 안나오는 실정. 이는 2002년과 2014년의 대조적인 결과로 설명이 된다. 거기다가 2002년에는 스콜라리의 스타일이 대부분의 유럽팀에 생소했지만, 포르투갈이나 첼시를 맡으면서 2014년에는 이미 유럽에 대부분 알려진지라, 독일과 네덜란드가 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

또한 선수 관리도 남미 감독답지 않게 카리스마형이며 이 때문에 선수단 입김이 센 첼시시절에는 선수단과 마찰이 심했다. 브라질 국대 감독 시절에는 여친이나 배우자와의 동침도 금지할 정도로[19] 정신 집중을 중시했으며 사생활에 문제가 있는 선수는 기용하지 않았다.[20] 그리하여 첼시 시절엔 대부분의 기존 주전선수들과 사이가 나빴다. 다만 훈련 강도는 비슷한 카리스마형 감독인 펠릭스 마가트 박종환과는 달리 그다지 세지 않았으며 첼시 시절에는 당시 주장이던 존 테리도 훈련이 너무 적다며 스콜라리를 언론에다 디스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를 전적으로 따르는 선수가 많은 것을 보면 리더십이 있는 모양이다. 예를 들어 데쿠는 스콜라리가 경질된 후, "스콜라리 때문에 첼시에 왔다"며 불만을 표시했고, 스콜라리가 2013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브라질 국대로 발탁한 파울리뉴는 스콜라리의 구애를 받고 토트넘에서 두말않고 유럽에서는 거의 한물 간 선수들만 가는 막장 리그로 폄하되는 중국으로 갈 정도였다.

미네이랑의 비극을 겪은데다가 첼시에서 참담히 실패했기 때문에 EPL팬들이 많은 한국팬들에게 평가가 낮은 편이다. 이런 팬들은 스콜라리를 선수빨 감독이라고 폄하하는 경우도 있는데, 좋은 선수를 데리고도 성적을 못거두는 감독이 수두룩 하다는 것을 보면, 스콜라리를 폄하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스콜라리는 리그보다는 토너먼트같은 단판승부의 대가이다. 2002년 월드컵때 독일을 제외한 팀 최소실점 팀이며 21세기 들어서 지금도 재현하지 못한 7경기 전승 우승이라는 대기록까지 세우게 됐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우승)의 브라질과 유로 2004(준우승)의 포르투갈은 선수 네임밸류만으로 좋은 성적을 장담할 수 있는 팀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팀들이 좋은 성적을 거둬 선수 네임밸류가 올라간 것으로 보는게 더 합당하다. 2002년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브라질 대표팀 역사상 최악의 성적이 예상되던 팀이었고, 2004년의 포르투갈은 이미 2년 전 월드컵에서 골든 제네레이션이 대부분 노쇠화되어 은퇴한 후 그 그늘에 가렸던 이후 세대가 주전이었고, 그나마 골든제네이션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2년 전 2002년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에서 광탈한데다가, 포르투갈의 차세대 골잡이로 기대되던 엘데르 포스티가는 EPL에 갔다가 토트넘에서 죽쑨 다음에 이후 2류선수로 전락했고, 호날두는 당시 19세의 풋내기여서 좋은 성적이 기대되는 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팀은 대성공을 거두었다.[21] 마찬가지로 광저우에서도 중국인 주전들이 모조리 노쇠화된데다가, 맨시티식의 운영을 하는 광저우의 성공을 본 다른 중국 구단들도 황사머니를 시전하여 남미-유럽에서 수준급 선수를 데려오면서 상위권팀들의 전력이 평준화되었으나, 광저우는 스콜라리 지휘 아래에서 3연패를 했으니, 스콜라리가 선수빨 감독 혹은 운장이라는 주장은 좀 무리한 주장이다.[22][23]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4.3. 수훈

5.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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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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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탈리아 국적법에서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에콰도르, 페루, 브라질, 베네수엘라, 칠레, 멕시코, 캐나다, 미국 등 과거에 남/북아메리카 국가들로 이민을 갔던 이탈리아계 이민자 후손들이 원한다면 이탈리아 국적을 쉽게 딸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스콜라리도 이를 통해 쉽게 이탈리아 국적을 취득했다고 한다. [2] 이후 3위 결정전에서도 네덜란드에게 0-3 완패를 당하며 무려 두 경기만에 브라질의 단일 월드컵 최다실점(14실점)이라는 불명예 기록을 세웠다. [3] 뒷줄 왼쪽이 카를로스 케이로스 당시 나고야 그램퍼스 감독, 오른쪽이 스콜라리, 아래는 오스발도 아르딜레스 당시 시미즈 S펄스 감독 [4] 당시 남미 예선이 역사상 지옥급 난이도이긴 했다. [5] 2002 월드컵 남미 예선은 올림픽과 코파 아메리카를 전후로 계속되고 있었다. [6] 시우바는 주전이었지만, 카카는 백업. 그것도 코스타리카전 1경기만 나왔다. [7] 이후 루이 판할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5승 2무,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3승 2무로 12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했다. 다만 무패 기간 동안 11승 1무였던 스콜라리와 8승 4무였던 판할은 차이가 난다. [8] 대표적으로 호비뉴. 호비뉴 본인이 첼시 이적을 원했고 실제로 첼시 이적이 기정사실화 되었지만 협상의 지지부진과 막판 호비뉴의 변심으로 이적이 무산됐다. 그 이후 호비뉴는 맨시티행. [9] 실제로는 이 경질에는 당시 스카우트이자 구단 운영의 전반을 꽉 쥐고 있던 피에트 데 비세르의 입김이 확 작용했다. 당시 피에트 데 비세르가 훈련장에서 스콜라리와 선수들의 훈련 상황이나 여러 이슈를 체크했던 적이 있는데, 그것을 보자마자 "저자는 경질해야 한다." 라고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 발언한 것이다. [10] 아넬카의 경우 이후에도 여러 군데에서 트러블을 일으켰을 정도이긴 했다. 이후 카를로 안첼로티도 첼시에서 경질당한 이후 "첼시에서 죽이고 싶은 선수가 있었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선수도 아넬카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일 정도. [11] 특히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라파엘 베니테즈가 수비라인을 극도로 끌어내리고 역습축구를 선보이니 스콜라리의 첼시는 맥을 못 추는 모습을 보였다. [12] 08-09 시즌 5위로 마쳤지만 전반기까지만 해도 슬로우스타터답게 부침이 심했다. [13] 15/16 시즌에 무리뉴 하에서 15위까지 내려간 첼시를 구원하기 위해서 다시 히딩크가 왔지만, 히딩크도 별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첼시는 이 시즌에 10위로 리그를 마친다. 무리뉴가 망쳐놓은 팀을 맡았다 독박쓰기는 했지만, 히딩크가 항상 기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며, 2010년대 들어와서는 흑역사(터키 대표팀의 유로 예선탈락, 네덜란드의 월드컵 탈락)가 더 많다. [14] 1무도 브라질의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남미가 아닌 팀인 멕시코한테 0:0 무승부로 승점 1점을 헌납하고 말았다. [15] 당시 브라질의 목표는 무조건 닥치고 우승이었다. 더구나 이 월드컵의 이름이 브라질 월드컵이라는 점도 기억하도록 하자. 그리고 우승도 우승이지만, 브라질 국민들은 단순한 우승도 아니고 공격적이고 전승 우승만 원한 국민들이라서 이런 참사가 발생된 것이다. [16] 월드컵을 앞두고 당한 부상에서 완벽하게 회복하지 못한 탓에 가진 실력보다 현저히 낮은 모습을 선보였다. [17] 게다가 실제 인건비는 39억이 아니라 60억 정도 봐야 한다. 스콜라리 정도 되는 감독이면 자기 코치진 다 끌고 오기 때문에 그쪽 연봉도 줘야 하는데, 2014 브라질 월드컵과 그레미우에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광저우 헝다까지 잔류한 스콜라리 사단의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18] 당시 브라질 국대의 공격을 담당한 선수가 세명 뿐이 지만 그 세명이 호나우두, 히바우두 그리고 호나우지뉴였고, 수비적이라 해도 윙백이 카를로스, 카푸였다 워낙 선수들 공격력이 사기적인 스쿼드인지라 수비중심의 전술이 밸런스를 맞춰 준 셈이다. [19] 다만 이 얘긴 2002년 당시 얘기고 2014년에 브라질 대표팀 감독으로 복귀했을 땐 이 분도 나이가 들어 좀 유해졌는지 "너무 아크로바틱 체위로 해서 무리하지만 마라(...)"고 하기도 했다. [20] 그런데 성폭행을 비롯한 추문이 따르는 호비뉴을 총애했었다. [21] 유로 2004에서 스콜라리호 포르투갈은 조별리그에서 강팀 스페인을 이겼고, 8강에서는 잉글랜드와 경기에서는 승부차기 끝에 승리, 4강에서는 네덜란드를 이겼다. 다만 스콜라리는 그리스의 늪축구에는 의외로 약해서 조별예선과 결승에서 각각 두번 다 패했다. [22] 일부에서는 스콜라리가 중국리그라서 쉽게 3연패를 했다고 주장하는데, 당시 스콜라리와 경쟁하던 감독들이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마누엘 펠레그리니, 스벤예란 에릭손, 거스 포옛, 펠릭스 마가트, 로저 슈미트, 최용수 등의 한국의 해축빠들에게도 잘 알려진 쟁쟁한 감독들이었다. 경쟁 감독 이름들만 보면, 스콜라리가 중국 리그에서 쉽게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상황은 절대 아니다. [23] 비슷한 케이스로 동시기 같이 활약하였던 비센테 델보스케 2014 브라질 월드컵 폰치노바 쇼크, 유로 2016 16강 탈락으로 인해 레알 마드리드 갈락티코스 1기 시절과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2010 남아공 월드컵 유로 2012에서의 화려한 선수단의 네임밸류로 선수빨 감독 혹은 운장이라는 오명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델보스케 사임 이후 갈락티코스 1기와 스페인 대표팀의 성적이 델보스케 재임시기보다 상대적으로 부진하였고, 이는 델보스케의 감독 역량이 결코 낮은 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장 델보스케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레알에서는 챔스 2회 우승, 라리가 2회 우승를 안겨주었고, 스페인 대표팀에서도 2010 남아공 월드컵 유로 2012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면서 사상 최초의 메이저대회 3연속 우승이라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델보스케는 축구 감독으로서 유일하게 챔스, 월드컵, 유로, 리그를 모두 우승한 인물이다. [24] 쿠웨이트 FA컵 [25] 프레미우 크라키 두 브라질레이랑: 브라질 세리 A 시상식 [26] 본인도 이탈리아계이다. 스콜라리라는 성이 애당초에 이탈리아의 성이다. [27] 서유럽 선수들은 국적에 관계없이 대부분 영어를 구사하지만, 브라질 축구선수 중에 영국에서 뛰지 않으면 영어를 전혀 못 하는 선수들이 많다. 한편, 프리미어 리그의 역대 비 잉글랜드 출신 감독들은 대체로 영어로 인터뷰를 어려움 없이 진행한다. 대표적으로 아르센 벵거, 주제 무리뉴, 스벤예란 에릭손, 펩 과르디올라 등이 이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