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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07:37:51

클라우디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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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로마의 유력 가문, 씨족명
1.1. 개요1.2. 유래와 어원1.3. 평판과 가문 이야기1.4. 주요 분파1.5. 가문 내 전통1.6. 성씨에서 이름으로 바뀌다
2. 로마 황제3. 니트로 플러스 참마대성 데몬베인에 나오는 안티 크로스 중 한 명

1. 고대 로마의 유력 가문, 씨족명

CLAVDIVS
The gens Claudia/Clodia

1.1. 개요

코르넬리우스[1], 율리우스, 발레리우스, 아이밀리우스[2], 파비우스, 만리우스 등과 더불어 고대 로마 초창기부터 내려온 전통의 명문 귀족( Patrici) 가문으로, 코르넬리우스, 유니우스 씨족 등과 마찬가지로 씨족 내 마르켈루스, 아셀루스, 칼비우스 등 평민(Plebs) 분파들도 존재했다. 로마 제국의 첫 번째 세습 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4번째 황제인 클라우디우스로 유명하며, 로마 건국 이래 교차검증이 가능한 유일무이한 스폴리아 오피마라는 대업을 배출한 씨족 가문이기도 하다.[3]

1.2. 유래와 어원

시조 때부터 병기 표기로 클로디우스, 클로디아를 사용했다. 유니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우스, 파비우스, 아이밀리우스, 율리우스 씨족 가문과 달리, 초기 로마 건국과 왕정 시대부터 합류하지 않은 로마 최초의 귀화 성씨 귀족 가문이다. 현대 서양 학자들의 공통된 발표에 따르면, 아예 다른 민족의 귀화 가문은 아닌, 라틴-사비니계 토착씨족이라고 한다.[4]

시조는 사비니족 출신의 부유한 유력자 아투스 클라우디우스(아티우스 클라우수스/아투스 클로수스)이다. 이 사람은 로마와의 평화를 지지했으며 기원전 504년 5,000명에 육박한 자신의 일족 전체를 데리고 로마로 집단 이주했다. 이때 그는 로마에 온 후 라틴식으로 개명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사비누스 레길렌시스라는 로마식 이름을 취했다고 한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가 B.C. 509 ~ B.C. 503년까지 6년 동안 4번이나 콘술에 선출될 당시, 로마 인근의 라틴계 씨족 중 무려 5,000여명의 일족을 데리고 가문의 가부장인 아피우스의 인솔 아래 로마로 이주한 라틴-사비니계 가문인 만큼, 귀화 직후부터 로마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화정에서 유력한 귀족 대우를 받았고 원로원 의석까지 받았다. 따라서 건국 당시 ~ 왕정 시대부터 활약한 씨족 가문이 아님에도 대대로 원로원에도 선출되었고, 심지어 기원전 495년에는 집정관까지 당선되었다.

클라우디우스라는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이중 대중들에게 유명한 주장이 “라틴어 형용사 claudus(발을 저는)에서 따왔다”는 주장이다. 이는 라틴어 발음이 비슷한 것을 볼 때 꽤 설득력 있어 보이는데, 고대사 학자들은 이 주장보다는 고대 사비니어원설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모든 로마 고대기록상 클라우수스는 로마로 귀화하면서 고대 사비니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개명했고, 클라우디우스라는 성씨는 애당초 사비니식에서 라틴식으로 차용한 성씨였다고 명시됐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시조때부터 Claudius와 Clodius를 혼용해 사용하면서 au와 o를 병기해 사용했는데, 씨족 내 본가 역할을 한 풀케르 집안은 선동정치가 클로디우스 등장 전부터 클로디우스를 병기혼용해 표기하기도 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세간에서 말하는 이름의 유래와 달리 고대 사비니어 중 closus(라티움의 그리스 정착민)가 유력한 어원인 것으로 보고 있으며, 사비니어 어원설의 “클로수스”가 성씨 어원으로 거의 확실해 보인다. 단, 어원과 별개로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그리스혈통이 아니었고 클로수스는 그리스계 외의 정착민도 포괄한 단어였다. 따라서 이를 착안한 어원일 확률이 높아 보인다.

1.3. 평판과 가문 이야기

독일의 고대 로마사 권위자이자 파트리키 플레브스, 노빌레스 내의 플레비스 가문 연구 등으로 이름 높은 사학자 니부어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인물들은 귀족적이며 고집이 세고 강인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클라우디아, 클로디우스로 대표되는 몇몇 인물들의 오만한 발언과 불법 행위 등을 이유로, 클라우디우스 씨족 사람들은 "평민들에 대한 극심한 증오심", "거만함 속의 반항심과 법의 경멸" 등으로도 악평이 쏟아졌다고 한다. 이는 파트리키, 플레브스 계급의 모든 클라우디우스 가 지파들이 모두 얻은 악평이었다.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평판이 최악이 된 것의 시작은, '장님'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계기를 연 이는 시조 아투스 클라우수스(클로수스) 혹은 아티우스 클라우수스라는 사비니식 본명으로 유명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아들(혹은 손자), '10인 위원회'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때문이었다. 그는 기원전 471년, 기원전 451년 집정관을 역임하고 기원전 451년, 기원전 450년 10인 위원회 위원을 지낸 인물로 존경과 악명을 동시에 떨쳤고, 로마 공화정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독재자였다. 그는 머리가 비상하고, 권모술수가 뛰어났는데 기원전 451년 10인 위원회가 성공적으로 로마를 통치한 뒤 해체될 때, 홀로 사임하지 않고 선거운동을 벌여 큉크티우스, 킨킨나투스, 숙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육촌뻘 친척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두번째 10인 위원회를 만들어 로마를 귀족정으로 변모시키려고 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부하이기도 한 평민계급의 집안 식구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에게 아름다운 처녀 베르기니아를 노예가 낳은 딸로 유괴됐다고 주장하게 하고, 재판을 조작해 로마 내 파트리키vs플레브스 사이를 최악으로 몰아갔다. 따라서 그의 몰락 후, 또 다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를 막고자 한 목적으로 12표법으로 알려진 로마 최초의 성문법이 탄생했는데, 이를 제공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10인 위원회가 강제 해산된 직후 뻔뻔하게 포룸에 나타나서 자신이 정당했다고 호소했다. 따라서 그 자리에서 공화정기 로마인들에게 '누구도 자유시민을 노예로 삼을 수 없다.'는 헌법을 어긴 악마로 손가락질 받고 고발됐다가, 수감 직후 분에 못 이겨 자결했다. 따라서 그가 몰락한 뒤, 남은 클라우디우스 가문원들은 계급에 상관없이 12표법의 원인을 제공한 자들이자, 로마에 굴복해 스스로 귀순했음에도 뻔뻔하게도 로마를 집어 삼키려고 한 이방인 집단이라고 귀족, 평민 모두에게 증오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럼에도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람들은 반성하고, 사과 할 뿐 로마인들에게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았다. 이는 이 가문원들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여타 다른 귀족들이 변명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 것과 많이 달랐다.

그들이 이렇게 한 행동은 무식해보이고, 때론 뻔뻔해보여도 비겁해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 그들은 언행일치된 모습을 보이고, 특정 집단을 모아 선동하는 행동도 하지 않아, 반대파들조차 비난만 할 뿐 그들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10인 위원회를 이끈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와 그 숙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친척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의 동반 몰락 후엔 되레 로마의 구원자로 활약했다고 찬사를 받았다. 악인이며 귀족정을 꿈꾼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아들뻘 조카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와 그의 아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는 가족 성씨를 사비누스에서 크라수스로 바꾸면서 반성했다. 이들 중 아피우스의 아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는 조부와 달리 12표법을 절대가치로 여겼다.[5] 그리고 그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는 자신의 조부와 달리, 클라우디우스 가문 남녀 구성원 모두가 가진 타고난 용기와 욕을 먹어도 엄격함과 절제력으로 이겨낸 정신력을 바탕으로 로마 시민권에 대한 확장, 귀화 조건 완화, 도시 국가 로마의 이탈리아 국가화의 기반을 닦고 해방노예들의 원로원 입성 허용, 귀순 가문 처우 개선 등을 주도했다. 이는 그가 이끈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파비우스 가문,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반대에도 밀어 붙여 평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게 된 이유가 됐다. 그 결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귀족, 평민 지파에 상관없이 불과 4대 만에 엄격함 외에는 상당히 양심적이고, 애국심이 대단하며,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일관된 이들로 평가받아 존경을 잃지 않았다. 이는 악명을 떨친 공화정과 제정 시대 내내 상당했던 몇몇 가문들과 달랐다.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악명과 존경을 동시에 받았던 것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원로원에서 "선거때마다 해방노예를 양산해 표를 모은다"고 스키피오 가문을 위시한 동료들에게 풀케르가 비난 받은 일화가 대표적이다. 이때 원로원은 이를 "추잡하고 비양심적이다"라고 깠는데, 이런 비난에 사과한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되레 크게 욕을 먹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른 귀족가문들은 이런 일을 벌임에도 안 하는 척하면서, 자기 가문 노예와 사돈에 팔촌 노예들에게까지 자유를 주고 아예 탈세를 하고, 로마 인근의 집을 헐값에 사들여 선거구를 장악하는 등의 더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사과도 안 하고 깨끗한 척 했기 때문에, 이는 공격받고 시정을 약속한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차라리 양심적이라는 평까지 듣게 했다.[6]

이런 가문의 역사에서 그들이 악명을 떨친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기원전 2세기 로마 정국 속에서 옵티마테스의 대표이면서도, 포풀라레스 파벌에서도 그 발자취가 명확한 특징 때문이었다.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공화정 중기 풀케르 가와 마르켈루스 가를 중심으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붕당과 대립했다. 그리고 공화정 말기에는 가문의 주요 구성원들이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 속에서 일부는 골수 옵티마테스로, 일부는 중립, 일부는 심정적 포플라레스 행보를 보였다. 이는 카이사르의 내전에서도 그랬는데, 카이사르의 반대편에 서면서도, 네로 가문처럼 권세에서 밀려난 이들은 카이사르파를 지지하는 행보를 보인 태도는 원로원 안에서 반대파들이 그들을 증오한 이유가 됐다. 그런데 이는 로마 원로원에서 대개의 지파 성씨 귀족들이 경쟁을 펼치면서 보인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점에서 사실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씨족 가문들도 그들의 운명을 놓고, 최대한 여러 쪽에 줄을 놓고 이런 셈법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허나 공화정 초기부터 얻은 악명과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경쟁한 코르넬리우스 가문으로 대표된 정적들은 이를 빌미로 그들을 계속 비난했다. 설상가상 호민관이 되기 위해 스스로 평민 양자로 들어가, 정치깡패를 이끌며 카이사르의 긴 팔을 자처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같은 이들까지 등장해, 영향력이 큰 키케로 등에게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더 큰 비난을 들었다. 그러니 가문의 악명은 사라지지 않았다.

때문에 대립의 당사자였던 스키피오 가문의 클리엔테스 폴리비오스의 <역사>, 키케로의 일기,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 등 우리가 살필 수 있는 당대의 주요 기록[7] 속에 적힌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이들이 지지받은 지역에 대한 평은 당연히 최악일 수밖에 없게 됐다. 그렇기에 이를 감안해, 클라우디우스 씨족에 대한 악평은 어느 정도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구성원들이 잔인하고 오만하기만 했다면, 클라우디우스 씨족이 선거로 고위 정무관을 뽑던 공화정기 내내 세력과 인기를 유지하고, 수백년 동안 사랑 받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우스, 파비우스, 유니우스, 마니우스 , 칼푸르니우스, 아이밀리우스, 율리우스 가문보다 후발 주자임에도 공화정 로마의 수많은 고위 공직을 맡았다. 수에토니우스는 저술 당시 이미 사라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해 언급할 때 아우구스투스와 그 가족들의 업적과 악행을 서술하면서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본래 이 가문 출신인 티베리우스 황제 편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그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이전까지 클라우디우스 씨족이 “28명의 집정관, 5명의 독재관, 7명의 감찰관, 6번의 개선식, 2번의 약식 개선식”을 기록한 명문이라고 소개하면서, 아우구스투스 일가가 권력을 세습하기 전부터 그 위세가 대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 로마에서 가장 먼저 건설된 아피아 가도(Via Appia), 수도교인 아피아 수도교(아쿠아 아피아)는 클라우디우스 씨족 출신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입안하고 직접 총감독을 맡거나, 계획을 입안해 지었다. 그는 엄격함과 유연한 사고를 갖춰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명성을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우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했고, 해방노예 아들과 이탈리아인들의 시민권 취득을 쉽게 할 수 있는 사회개혁을 입안 후 통과시켜 도시국가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로 확장되는데 필요한 토대를 만들었다. 별명처럼 그는 말년 시력을 잃은 와중에 로마 원로원의 안이한 태도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아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에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로마의 대표적인 명장으로 활약했다.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의 맞수이자 시라쿠사의 정복자로, 네로는 메타우루스 전투에서의 승리로 유명했다. 카이쿠스의 손자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한니발과 싸우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장렬히 전사해 로마군에게 슬픔과 감동을 줬다. 하지만 이 사람의 아버지이자 해군제독인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그의 여동생인 클라우디아는 되려 말실수, 전략상 패착을 하여 각각 무능한 장군, 개념없는 귀부인으로 지탄을 받고 가문의 체통을 크게 실추시켰다.

그라쿠스 형제 중 형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장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그라쿠스 아내 클라우디아의 조부인 감찰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도 유명하다. 가이우스, 아피우스 부자는 엄격하고 고지식해, 평민들에게 "가혹하다"고 불평을 들었음에도, 파트리키 계급 출신답지 않게 공익과 평민들의 생존을 위해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을 지지했다. 따라서 감찰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후일 반대파에게 탄핵될 당시, 그라쿠스 형제를 지지했던 평민들의 도움으로 누명을 벗고 명예회복 후 무죄를 선고받았다.

로마 내전기에는, 해군제독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후손 중 기원전 79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막내아들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악명을 떨쳤다. 그는 여러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람 중 그 악명이 독보적이었다.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는 본래 파트리키 귀족 중에서도 최고의 명문가인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원이었지만, 원로원파 대신 민중파로 활약했고, 잘생긴 외모에도 고결함이라곤 1도 없는 위인으로 유명했다. 그는 젊을 적 루쿨루스의 원정군에 파업을 유도하여 루쿨루스가 지휘권을 폼페이우스에게 빼앗기게 만드는 시초를 제공했고, 유부녀인 카이사르의 아내에게 매료돼 짝사랑한 그녀를 보기 위해 보나 데아 여신 축제날 여장을 하고 카이사르 집까지 찾아가는 기행을 벌였다. 그는 호민관 당선을 위해 신분을 버리고 평민귀족인 외가쪽 친척 푸블리우스 폰테이우스 양자로 스스로 들어가 평민 계급이 됐다. 이때 그의 계획에 도움을 준 이는 놀랍게도, 보나 데아 스캔들로 떨떠름한 사이가 된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클로디우스의 평민계급 변경과 클로디우스 자녀들의 귀족계급 유지를 이례적으로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이때부터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이름을 희석시키고자, 병행표기로 사용한 클로디우스로 가문명을 바꿨고 선동정치가로 로마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상술했듯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보나 데아 스캔들로 얽히고 섥힌 관계가 됐지만, 카이사르의 도움 아래 민중파 선봉장이 된 직후 호민관에 오른 뒤 원로원을 골머리 앓게 했다. 그는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외가인 평민귀족 가문들과 연대해, 호민관 직을 놓치지 않았고, 임기 내내 카이사르의 편이 되어 로마 민중들에게 클로디우스 곡물법 등 포퓰리즘 정책으로 카이사르의 지지율을 높였다. 그래서 형, 조카, 리비우스 가로 입양간 숙부 등이 포진한 원로원파와 원수가 됐고, 지나친 선동 정치, 정치깡패 운영으로 악명이 떨치게 된다. 하여 그는 기원전 52년 1월 18일 반대파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의 손에 암살당한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친아버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젊을적부터 폼페이우스, 소 카토, 키케로, 장인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 등이 포진한 원로원파 대신 카이사르파의 젊은 일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또래인 안토니우스, 쿠리오, 데키무스 브루투스 등과 달리 이름은 덜 알려졌으나, 카이사르 해군제독로 맹활약했고 갈리아 속주화 첫 작업을 상관 카이사르의 지시로 맡아 신임을 받았다. 그는 카이사르 피살 뒤 그 양자 옥타비아누스 대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지했고, 법무관 시절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풀비아와 반 옥타비아누스 운동을 하다가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 장남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나폴리, 시칠리아, 그리스로 도망쳐야만 했다. 그러다가 옛 카이사르파가 화해하면서, 사면받고 돌아왔는데 아내에게 홀딱 반한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으로 강제 이혼 후 두 아들을 홀로 키우다가 병사했다.

공화정 말기부터 제정 초기까지 옥타비아누스는 혈연의 도움으로 클라우디우스 씨족을 자신의 지지자로 끌어들였다.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소 옥타비아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결혼해 두 딸 대,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아들 마르쿠스를 낳았고, 마르쿠스는 요절하기 전까지 아우구스투스의 첫번째 후계자였다. 또한 옥타비아누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는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본가격인 풀케르 가문에서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으로 입양된 인물이었고, 풀케르 가문 출신의 또 다른 인물이 발레리우스 가문의 메살라 가에 입양돼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과 결혼해 황실 일원이 된 까닭에 풀케르 가문 또한 내전 기간부터 옥타비아누스의 지지자가 되었다. 반면 네로 가문은 본래 카이사르를 지지했음에도 안토니우스 쪽을 지지하다가, 리비아가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하면서 그를 지지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리비아의 전 남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병사한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아내 리비아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인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 이후, 양자로 키우면서 네로 가문을 사실상 장악하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사실상 하나의 가문으로 결합하게 됐다. 따라서 네로 가문의 경우, 당대부터 클라우디우스 가문에 속하면서도 아우구스투스가 리비아와 결혼한 이후부터는 율리우스 가문 내 카이사르 가와 똑같은 집안으로 인식됐다.

종가격 가문인 풀케르 가문은 내전기 당시 아우구스투스를 지지했음에도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아우구스투스에게 단단히 찍힌다. 이때 가주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간통죄의 무고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사람의 아들들은 수도 로마에서 사실상 추방되거나 함께 처벌받아 집안이 풍비박산난다.[8] 그래서 풀케르 가문은 이후 몰락귀족이 되고, 로마 안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잃고 만다. 풀케르 가문은 3세기 초 아피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딸이 에트루리아 지방의 볼테라 출신 원로원 의원과 결혼해 낳은 푸피에누스가 원로원 의원, 수도 장관을 거쳐 황제가 되면서 아주 잠시 그 이름을 로마사에 남길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완전히 소식이 없다. 이렇게 풀케르 가가 다른 공화정기 귀족 가문과 달리 이름을 날리지 못하게 된 틈을 노려, 클라우디우스 가 전체를 이끄는 수장 자리는 아우구스투스 일가로 불린 네로 가문 몫이 된다. 한편 평민 지파 마르켈루스 가문은 아우구스투스의 어린 조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가 되며 잠시 기세를 펴는 듯 했지만 마르쿠스가 요절한 후 유력한 인사를 배출하지 못했다.

1.4. 주요 분파

시조 클라우수스 인솔 아래, 일찍부터 로마로 건너온 클라우디우스 씨족들은 ‘오래된 클라우디우스’ 가문으로 불렸는데, 이들은 로마 일곱 언덕 중 카피톨리노와 아니오에 많이 거주했다. 또 이 씨족 가문은 로마 귀화 당시부터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에 모두 걸쳤기 때문에 특이하게 공화정 시대부터 분파 가문들의 신분이 다양함에도, 모든 지파가 그 전통을 공유, 유지하는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 그 예로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뒷머리를 뒷목덜미 아래로 길게 기르는 스타일 역시 클라우디우스 씨족 남성들의 특징 중 하나였다고 하며, 로마로 대규모 이주 후 로마 시민권을 받았을 당시부터 로마 내 일곱 언덕 중 하나인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가문의 가족 공동묘지로 배정받고, 아니아 북부 지역을 가문과 그 일원들의 거주지로 배정받았다고 한다.

상술한 것처럼 하나의 가문이라는 인식이 강한 특징이 있었음에도, 시조 이래 각 출신 인물이 중시조로 일찍 분파 후 귀족 가문 지파와 평민 가문 지파로 나뉘었다. 이중 귀족 신분에 속한 분파 가문으로는 사비누스, 크라수스, 레길렌시스, 켄토, 카이쿠스, 풀케르, 네로 가문 등이 있었다고 하며, 평민 가문으로는 마르켈루스, 아셀루스, 칸니아, 키케로(칼비우스)[9] 가문 등이 존재했다. 여러 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 중 공화정 말까지 존속한 대표 가문으로는 풀케르, 네로, 마르켈루스 가문이 유명했는데, 이 가문 출신 사람들은 결혼, 입양 등을 통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 황실을 구성했다.

사비누스 가문은 오래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원류로, 씨족의 본원이 사비니족에서 따왔던 것을 상징한 종가격의 가문이다. 이 가문의 시작은 시조 아티우스 클라우수스, 즉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사비누스 레길렌시스였으며, 이 시조 일가의 대부분 구성원들이 크라수스라는 이름으로 갈라져 나오기 전까지 사비누스라는 코그노멘으로 유지하며 애용했다. 따라서 고대 로마의 씨족 연구를 한 학자들은 클라우디우스 씨족이 au와 o를 병기표기했던 것과 사비누스 가문을 종가로 여긴 전통을 가리켜, 이들이 로마에 귀순, 귀화해 로마인이 된 이후에도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했던 예로 언급하고 있다.

레길렌시스 가문은 오래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또 다른 핵심 분파로, 또 다른 고대 로마의 오래된 씨족 포스투미우스 일가도 함께 소유한 코그노멘이었다. 이 ​어원은 클라우디우스 씨족들이 거주했었던 사비니 정착촌 레길리움[10]에서 따온 이름이다.

크라수스 가문은 사비누스 가문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지파로, 사비누스 가문이 대체 사용한 코그노멘이었다. 그리고 이 가문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집안이 클라우디우스 씨족 내 귀족 지파들의 원류 카이쿠스 가문이다. 카이쿠스 가문은 가이우스의 아들 장님 아피우스에서 시작됐고, 그 장남인 기원전 268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루수스가 이었다. 그러나 루수스는 뒤를 이을 아들을 남기지 못했고, 조카 중 한명을 입양하지도 않아 그 대는 일찌감치 끊긴다.

풀케르 가문은 아피아 가도의 건설자인 아피우스 카이쿠스('장님')의 차남 푸블리우스로부터, 켄토 가문은 3남 가이우스로부터, 네로 가문은 4남 티베리우스를 중시조로 이어지는 가문이다. 아피우스 카이쿠스 이전에는 '사비누스'('사비니 출신'), '크라수스'('뚱보' 또는 '멍청이', '눈치없는 답답이') 등의 가문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기 때문에, "사비누스=크라수스=카이쿠스=풀케르=켄토"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차남에서 분가된 풀케르 가문은 루수스, 켄토 가문과 달리 카이쿠스 아들 중 가장 번성해 따로 봤고 실제로도 풀케르 가문 사람들은 첫 풀케르 별칭을 쓴 푸블리우스를 자신들의 중시조로 여겼다.

풀케르 가문은 차남 푸블리우스가 맨처음 코그노멘으로 자신의 별칭 "풀케르(잘생긴)"를 개인 코그노멘으로 삼고 시작됐다. 가문 전체 역사상 가장 융성한 분파 가문답게, 공화정 역사상 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 전체를 상징한 집안이다. 시조 아피우스의 개인이름을 푸블리우스, 가이우스, 티베리우스와 돌려가며 애용했고, 클라우디우스 가문 종가 특유의 AV(au), O(o)를 병기표기해 클라우디우스/클로디우스를 병기 사용했다. 처음으로 풀케르를 코그노멘으로 사용한 푸블리우스는 기원전 249년 집정관을 지냈고, 그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212년 집정관을 지내고 2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해 한니발에 맞서 로마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다가 피투성이가 돼 장렬하게 전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명성과 위엄 모두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두번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여동생 클라우디아, 남동생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귀부인, 해군제독 신분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후손 중 한명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가 선동정치가로 여러 번에 걸쳐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클라우디우스 가문 전체의 평판을 "거만하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꼰대" 등으로 알려 체면을 구겼다. 그렇지만 이 가문은 물의를 일으킨 인물들을 배출했음에도 다른 가문원들은 제 역할을 다해 그 위세가 대단했다. 더욱이 풀케르 가문은 손도 꾸준히 넉넉해 차남, 삼남을 리비우스, 발레리우스 가문에 입양보냈다. 풀케르 가문은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당주였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아우구스투스의 정적으로, 간통죄 혐의를 뒤집어쓰고 숙청되면서 그 위세가 제정 성립 이후 크게 꺾여 몰락귀족으로 전락한다. 그럼에도 3세기, 이 가문의 외손 푸피에누스가 이 가문의 이름을 이어 원로원 고위직을 차지하고 제위까지 오르며, 그 외조부 아피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이름을 아주 잠시나마 세간에 다시 알릴 수 있었다.

켄토 가문은 카이쿠스의 삼남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를 중시조로 하여 분가한 가문이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루수스,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동생이나, 분가 이래 중시조 가이우스는 두 형, 동생보다 훨씬 잘 나갔고 이 사람의 도움 아래 원로원에 들어온 평민귀족들도 많아 명성이 대단했다. 그는 부친 카이쿠스처럼 집정관, 감찰관 등을 지냈고, 대 그라쿠스 삼촌의 추천으로 기원전 213년 독재관까지 지냈다. 허나 이 가문은 가이우스 이후 장군, 총독, 제독을 배출했음에도 첫 켄토인 가이우스에 버금가는 대단한 사람을 배출하지 못했고, 기원전 1세기 이후 로마 관보에서 가문의 코그노멘은 보이지 않는다.

네로 가문은 분가한 중시조 티베리우스 때부터 바로 위의 세 형과 달리 집정관을 배출하지 못했다. 사비니어로 "용감한 자", "과감한 자", "활기찬 자"를 뜻했음에도 이 가문은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활약한 집정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외에는, 법무관 또는 일반 원로원 의원만 배출했던 집안이었다. 첫 네로인 티베리우스는 유일하게 카이쿠스 아들 중 집정관에 오르지 못했고, 다른 선출직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는 이 사람의 장남 티베리우스도, 차남 푸블리우스도 비슷했다. 그러나 이 가문은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를 통해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결합,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이라는 형태로 완성되면서, 어떤 클라우디우스 가문보다 가공할 만한 힘을 갖고 그 이름을 영원히 남긴다. 왜냐하면 네로 가문은 로마 제정 최초의 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구성해 아우구스투스 다음의 세 황제를 배출하고, 한명을 입양해 두 명의 황제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로 네로 게르마니쿠스 가문인데 그 시조는 대 드루수스이다. 그러나 네로 가문과 네로 게르마니쿠스 가문은 나눌 필요가 없는 상태였고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로마인들에게 그들은 카이사르 가문이라고도 불렸다. 이 가문에 속한 남성으로는 제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11]와 그 양자이자 후계자인 제5대 황제인 네로[12]가 있으며,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칼리굴라) 황제 역시 본래는 이 가문 남성이다.

마르켈루스 가문은 풀케르 가문 못지 않게 위세가 대단했던 지파였지만, 평민에 속했다. 코그노멘의 어원이 마르쿠스에서 따왔던 만큼, 지파의 시조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라는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용장 마르켈루스를 비롯한 가문 내 남성들은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애용하고 이를 대를 이어 물려줬다.

키케로 가문은 호민관 클라우디우스 키케로를 배출한 또 다른 평민 지파로, 칼비우스 가문으로도 이용한 것이 확인되므로 칼비우스 가문으로 해석되는 경우도 많다. 참고로 이 집안은 우리가 흔히 아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는 전혀 관계없다.

1.5. 가문 내 전통

'빛(光)'을 뜻하는 루키우스는 로마인들에게 애용된 이름으로, 오늘날에도 루카 등으로 여전히 사랑받는데, 정작 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 전체에게는 오래 전 가문 내 모든 구성원들의 투표를 통해 철저히 금지하는 개인이름이 되었다. 왜냐하면 '루키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남성 2명이 노상강도와 살인죄를 선고받으면서 공공도덕과 명예를 중시여기는 가훈을 어겼기 때문인데, 루키우스 클라우디우스라는 사내가 귀족 지파 태생인 탓에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은 귀족지파들에게 더 금지되어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제정 시대 이후 클라우디우스 황제때 오스티아 항구 건설 후 특별법, 그리스어 교사를 위한 시민권법에 따라 클라우디우스 성씨를 하사받은 제정 시대 클라우디우스들은 원류 후손들과 달리 금지된 루키우스를 개인이름으로 버젓이 사용했다.

1.6. 성씨에서 이름으로 바뀌다

제정 중반까지도 3세기의 황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등 가문명이 클라우디우스인 많은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귀족이나 황족 클라우디우스들의 클리엔테스 또는 그 후손이거나[15],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형제처럼 아예 야만족 출신 등 하층민의 자칭일 수도 있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를 시조로 했던 귀족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후손은 3세기 이후 대가 끊겨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위세를 잃고 완전히 몰락해 로마 내에서 이름을 날리지 못한 것으로 추측된다[16]. 단, 푸피에누스 황제는 모계로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비문이 있고 관련 연구조사들이 나왔기 때문에, 이 가문의 경우 몰락했음에도 혈통적으로는 최소 3세기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전혀 관련없어 보이지만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누스 2세 율리아누스 황제의 풀네임에도 클라우디우스가 들어간다. 이 시기쯤 되면 황제의 이름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율리우스, 플라비우스 등 정통성에 도움이 될 만한 온갖 고대 가문 및 인물들의 이름을 갖다 붙이게 되었기에 큰 의미는 없다.

현대 이탈리아를 비롯한 라틴 문화권과 기타 서구권 국가에서도 클라우디우스 가문에서 비롯되었거나 가문명을 그대로 사용한 이름들이 남아 있다. 바로 남성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 클라우디오, 클로드, 클로디우스, 아피오 등이 그것이며, 여성 이름으로 사용되는 클라우디아 클로디아 역시 클라우디우스 가문에서 시작된 이름이다.

2. 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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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니트로 플러스 참마대성 데몬베인에 나오는 안티 크로스 중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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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키피오, 술라 등이 이 씨족 출신이다. 공화정 시기 최고의 명문 씨족으로 역대 콘술 중 30% 이상이 코르넬리우스 씨족에서 나왔다. [2]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의 친정 칼푸르니우스 가문과 함께 2대 왕 누마를 시조를 주장한 오래된 귀족 가문이다. [3] 반전설 시대를 포함하면 코르넬리우스 가문도 해당되지만 교차검증이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의문이 있다는 평이다. 단, 군사적 대업을 달성했어도, 정치적 이유로 허락받지 못한 크라수스까지 포함하면, 리키니우스 씨족도 포함되므로 교차검증된 유이한 가문이 된다. [4] 애당초 로마 건국집단은 사비니계 라틴족이며, 왕정 시절 제위를 차지한 왕 중 사비니계도 있었다. 당장 건국때부터 합류한 발레리우스 가문, 초기 로마왕국 시절 사비니 혈통 왕들의 후손들인 칼푸르니우스 가문과 마르키우스 가문, 카이사르의 외가로 유명한 아우렐리우스 가문, 가장 오래된 씨족으로 로마건국부터 시작된 파비우스 가문, 세르기우스 가문 등이 사비니계 귀족 가문 중 유명하다. 이 외에도 칼비우스 가문 등도 사비니족 출신 가문인 것이 최근 밝혀졌다. 이런 배경으로 로마 시대 귀족, 평민 중 사비니계를 굳이 타민족으로 취급해야 되느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5] 그럼에도 장님 아피우스의 아버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조상이 얻은 악명 때문에 독재관 임기를 채우기 전에 신녀와 반대파에게 모함을 받아 자리에서 추방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6]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장인으로, 명문귀족이면서도 그의 개혁 초기 주요 후원자이기도 했다. [7] 공화정기를 그리워하고 제정에 적대적이던 이후 역사가들의 서술도, 마찬가지 이유로 어느 정도 가감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8]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람인 양자 티베리우스, 드루수스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엄청난 후원을 하며 티베리우스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상징으로 적극 홍보했다. 그러면서 티베리우스의 친동생이자 , 조카딸의 남편인 드루수스를 율리우스 가문으로 완전히 입양해 가공할 만한 가문을 완성코자 했다. 따라서 아피우스의 억울한 죽음과 풀케르 가의 몰락은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야망으로 벌어진 일로 추정된다고 한다. [9] 기원전 453년 호민관에 오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키케로를 배출했는데, 이 사람의 또 다른 코그노멘 표기가 칼비우스였기 때문에 칼비우스 가문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10] 정확히 이탈리아의 어느 곳에 위치한 마을인지 확실하지 않다. [11]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12] 원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13] 티베리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은 라틴, 에트루리아와 초기 이탈리아 남부의 오스카 일대에서 모두 유래된 이름이었다. 따라서 로마 내에서 클라우디우스 가문 외에도 아이밀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씨족에게도 애용된 남성 프라이노멘이었고, 이탈리아 일대 평민들에게도 공화정 시대부터 애용됐다. [14] 제정 초기부터 전통적인 개인 이름(프라이노멘)을 잘 사용하지 않고 가문 이름이나 별명을 앞에 쓰기도 하는 흐름이 생겼다. [1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맏사위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가 대표적이다. [16] 최근 연구에서 발표됐듯이, 푸피에누스 집안의 경우에도 친가와 외가가 푸피에누스 부친 대에 와서야 원로원에 재입성했다고 밝혀졌다. 따라서 이 황제의 외가인 풀케르 가문 역시 당주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간통죄를 뒤집어 쓰고 숙청된 이후 완전히 위세를 잃었던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