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한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진동한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KBO 리그 우승반지
|
||||||||||||||||||||||||||||||||||||||||||||||||||||||||||||||||||||||||||||||||||||||||||||||||||||||||||||||||||||||||||||||||||||||||||||||||||||||||||||||||||||||||||||||||
1985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3번 | ||||
결번 | → |
진동한 (1984~1989) |
→ |
박홍철 (1990~1994) |
{{{#000000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12번}}} | ||||
팀 창단 | → |
진동한 (1990~1992) |
→ |
김충민 (1993) |
}}} ||
|
|
진동한 陳桐漢 | Dong-han Jin |
|
출생 | 1961년 6월 4일 ([age(1961-06-04)]세) |
경상북도 영일군 (現 포항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경북고등학교 (
졸업) 고려대학교 ( 체육학 / 학사)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84년 1차 지명 ( 삼성) |
소속팀 |
삼성 라이온즈 (1984~1989) 쌍방울 레이더스 (1990~1992) |
지도자 |
장충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97~2001) 개성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5~2006) 서울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06~2007) 도산초등학교 야구부 (2008~2013)[1] 울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14~2016) 저니맨 외인구단 감독 (2017) 포항대해초등학교 감독 (2018~2019) |
본관 | 여양 진씨[2] |
[clearfix]
1. 개요
|
삼성 라이온즈 시절 |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활동했다. 언더핸드 투수로 양일환 - 이태일 - 박충식으로 이어지는 삼성의 잠수함 투수로 이태일에 이어 2번 잠수함이었다.
2. 선수 경력
1961년 6월 4일 경상북도 영일군(現 포항시)에서 아버지 진대락(陳大洛, 1899 ~ 1977. 1. 11)과 어머니 안동 권씨 권남득(權男得, 1909. 10. 20 ~ ?)[3] 사이에서 2남 3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경북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1984년 삼성 라이온즈에 1차 지명으로 입단했다. 1987년 12승을 올리는 등 최고의 한 해를 보냈지만 이후로 성적이 하락해, 1990년 신생팀 쌍방울로 현금트레이드되었고 1992년 끝내 은퇴했다.
전성기는 짧아 통산 성적은 그저그런 수준. 그러나 아직까지 이 선수가 회자되고 있는 이유는, 그 유명한 해태 타이거즈 버스 방화 사건의 발단이 된 선수였기 때문이다.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 광주경기 때 3회에 구원투수로 등판하여 7회말까지 잘 막고 덕아웃으로 들어오다가 해태 팬이 던진 소주병에 머리를 맞고 교체되었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투수는 김시진으로 교체되었고 이후 김시진이 불을 지르며 역전패했다. 한창 잘 던지고 있던 선수가 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교체되고 경기마저 패하자 삼성 팬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3차전 대구 경기에서도 삼성이 역전패를 당하자 분노한 삼성 팬들은 경기 후 해태 구단버스에 불을 질러 분풀이를 한 것. 이 구단 버스 방화사건은 한국프로야구 관중 난동 사건하면 늘 언급이 되며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4]
은퇴 후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스카우트로 있었다. 그 후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장충고 감독[5], 개성고 감독[6], 서울고 코치[7], 구미 도산초등학교 코치를 거쳐 도산초 감독, 울산공고 감독, 저니맨 외인구단 감독을 거쳐 포항대해초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했었고[8]
현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유소년야구단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3.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84 | 삼성 | 2 | 5 | 0 | 0 | 0 | - | 1.80 | 1 | 0 | 5 | 0 | 1 | 1 | 1.20 |
1985 | 24 | 81⅔ | 4 | 2 | 0 | 0.667 | 2.98 | 74 | 3 | 31 | 24 | 36 | 27 | 1.25 | |
1986 | 24 | 109⅓ | 9 | 4 | 4 | 0.692 | 2.88 | 99 | 8 | 44 | 37 | 42 | 35 | 1.28 | |
1987 | 28 | 144 | 12 | 6 | 2 | 0.667 | 2.81 | 144 | 8 | 56 | 34 | 56 | 45 | 1.34 | |
1988 | 18 | 54⅓ | 2 | 3 | 1 | 0.400 | 4.64 | 63 | 2 | 23 | 10 | 28 | 28 | 1.56 | |
1989 | 18 | 43⅓ | 1 | 3 | 1 | 0.250 | 8.52 | 71 | 7 | 27 | 11 | 47 | 41 | 2.19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90 | 쌍방울 | 1군 기록 없음(소속팀 1군 미참가) | |||||||||||||
1991 | 26 | 111⅓ | 5 | 8 | 0 | 0.385 | 5.09 | 115 | 15 | 64 | 45 | 66 | 63 | 1.53 | |
1992 | 25 | 49⅓ | 1 | 6 | 1 | 0.143 | 6.20 | 60 | 8 | 28 | 20 | 42 | 34 | 1.70 | |
KBO 통산 (9시즌) |
165 | 598⅓ | 34 | 32 | 9 | 0.515 | 4.12 | 627 | 51 | 278 | 181 | 318 | 274 | 1.46 |
완투, 완봉기록 | ||
연도 | 완투 | 완봉 |
1985년 | 1완투 | 0완봉 |
1986년 | 2완투 | 0완봉 |
1987년 | 2완투 | 0완봉 |
1998년 | 1완투 | 1완봉 |
1991년 | 3완투 | 2완봉 |
KBO 통산 | 9완투 | 3완봉 |
4. 관련 문서
[1]
감독과 코치를 맡은 기간이 언제인지는 확인불명
[2]
어사공파(御史公派)-신광군파(神光君派)-현감공파(縣監公派) 27세 상(尙) 항렬. 족보명은 진상한(陳尙漢).
[3]
권영우(權寧佑)의 딸이다.
[4]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봉연,
김종모,
김성한,
송유석 등이 술회하길 야구장비, 옷 등이 불에 타버렸으며 송유석은 월급 20만원을 찾아 좌석 밑에 넣어놨으나 이 역시 활활 잘 타고 말았다.
[5]
부임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고교야구 전국대회 8강에 오르지 못했다. 장충고 야구부는 2003년
유영준 감독 부임 이후 전성기를 맞았다.
[6]
2006년
황금사자기 8강 진출 이외에 실적을 내지 못했다.
[7]
2007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제자 이형종의 눈물의 역투에도 불구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에 끝내기 안타를 맞고 패했다.
[8]
현역 시절 배터리로 호흡을 맞췄던
이만수가 피칭머신을 기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