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Carmac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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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소프트웨어 공동창업자 | |
<colbgcolor=#00001b><colcolor=white> 본명 |
존 D. 카맥 2세 (John D. Carmack II) |
출생 | 1970년 8월 21일 ([age(1970-08-21)]세) |
미국 캔자스주 쇼니 미션 | |
국적 | 미국 |
직업 | 게임 개발자, 프로그래머 |
학력 | 미주리 대학교 캔자스시티 캠퍼스(1학년 중퇴) |
주요 참여 작품 |
커맨더 킨 시리즈 울펜슈타인 3D 둠 시리즈 퀘이크 시리즈 레이지 |
배우자 | 캐서린 안나 강(2000년 결혼) (2021년 이혼) |
자녀 | 슬하 2명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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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John D. Carmack II. 이드 소프트웨어의 공동 창업자이며 기술 감독이자 게임 프로듀서 및 프로그래머. 1970년 8월 21일 미국 캔자스 출생.
현대 1인칭 슈팅 게임(FPS) 장르의 원조격인 울펜슈타인 3D, 흥행돌풍을 일으키며 FPS 장르를 대중화하는데 일조한 둠, 퀘이크의 핵심 프로그래머다.
당대 게임 개발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온라인에서는 .plan[1]과 /.[2]으로, 오프라인에서는 랜 파티에서 시작한 퀘이크콘에서의 기조 연설이나 언론 인터뷰로 매우 활발한 소통 활동을 했다.[3] 그래서 존 카맥은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PC 게임업계에서 스타 개발자이자 3D 게임 그래픽 프로그래밍 기술의 구루(Guru)로 추앙받기도 했다.
1998년에 시작해 매년 1명씩 선정되는 AIAS(Academy of Interactive Arts and Sciences)에서 2001년에 선정되었다. 시간이 지나서도 관리직으로 넘어가지 않고 여전히 소규모 팀을 유지하면서 현장에서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드 소프트웨어를 퇴사하고 오큘러스 VR에 참여하던 중 페이스북(메타)이 오큘러스를 인수하면서 계속해서 CTO로 근무하였으나, 2022년 12월에 메타를 떠났다.
2. 이드 소프트웨어에서의 업적
1990년, 이드 소프트웨어의 첫 작품인 ' 커맨더 킨(Commander Keen)'을 통해 카맥은 당시 PC 게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부드러운 스크롤을 선보였다. 게임 자체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아류 게임이었다.[4] 커맨더 킨 이후 카맥은 3D 게임 개발로 방향을 돌려 원시적인 FPS 게임인 ' 호버탱크 3D'를 개발했지만 별 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회사 내부에서 '커맨더 킨'의 후속작 및 다른 횡스크롤 게임들을 발매할 동안 존 카맥은 더욱 개선된 3D 엔진 개발에 박차를 가해, 1992년 5월 5일, ' 울펜슈타인 3D(Wolfenstein 3D)'를 발매하였고 그로부터 1년 7개월 후인 1993년 12월 10일, ' 둠(Doom)'을 내놓아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1996년에 발매한 퀘이크에서는 본격적으로 풀 폴리곤을 도입했다.퀘이크 1이 발매된 1996년에는 이전까지 이드 소프트웨어의 얼굴 마담 역할을 하던 로메로가 회사에서 해고된 후였기에 카맥이 대신 소규모 랜파티로 시작한 퀘이크콘 행사부터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이후 퀘이크 2를 개발하던 1997년 즈음부터 카맥은 일반 대중들에게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3D 게임 그래픽 기술의 구루(Guru)로서 추앙받기 시작했다.
2002년 E3에서는 개발 중인 둠 3의 데모를 공개했는데 당시로서는 생소했던[5] 실시간 광원 및 그림자와 노멀맵을 적용한 그래픽을 선보여서 게임업계에 화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둠 3의 출시 연기로 카맥은 게임 그래픽 기술의 Guru로서의 빛이 서서히 바라기 시작했다. 특히 둠 3 출시 전에 둠 3를 아득히 능가하는 비주얼과 신기술들을 선보인 언리얼 엔진 3가 공개됨에 따라 둠 3는 기술적으로 크게 특출나지 않은 게임이 되었으며 둠 3가 출시된 2004년 시점에서는 이미 파 크라이 등 둠 3의 그래픽 기술을 능가하는 게임들이 먼저 출시된 상태였다.
2005년 무렵엔 모바일 게임의 개발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여 둠 RPG를 시작으로 소수의 모바일 게임을 개발하였으나 크게 성공한 게임은 없었다. 추후 iOS용으로 레이지를 개발, 발매하였으나 이 역시 별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했다.[6] 2007년에는 id Tech 5와 함께 메가텍스처라는 기술을 공개해서 또 한번 게임업계의 화두가 되었으나 그 기술로 만들어낸 레이지가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미적지근한데다가 레이지 발매 초기 PC 버전의 치명적 결함, 시대를 역행하는 개념으로 개발된 메가텍스쳐의 기술적 실패로 인해 대중에게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3년에는 이드 소프트웨어를 퇴사 후 오큘러스 VR의 최고 기술 책임자(CTO)로 재직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제니맥스 미디어와 페이스북, 오큘러스 VR의 소송전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3. 게임 개발자로서의 성향
단순함 및 최소주의를 추구한다. 개발자가 너무 많으면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오랫동안 소수정예를 고집하기도 했다. 그 결과 퀘이크 3는 10명, 둠 3는 25명 남짓의 적은 개발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는 언리얼 토너먼트나 하프라이프 2 같은 당시의 경쟁 게임 제작진들에 비하면 1/3 정도의 수준이다. 그러나 2008년 무렵부터 이드 소프트웨어도 이와 같은 소규모 팀을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공격적인 확장을 거듭했고 안정적인 성장을 거듭하기 위해 제니맥스 미디어의 이드 소프트웨어 인수 제안을 받아들여서 제니맥스 미디어의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소프트웨어 개발에서도 개발 효율이나 단순함에 대해 언급을 자주 하는 편이며, "요즘 게임들은 개발하기 너무 복잡하다."는 불만을 여러번 토로한 적이 있다. C++의 경우 복잡하다는 이유로 사용하기를 꺼렸는데, 게임 프로그래밍에 C++가 주류이자 필수가 된 지 이미 한참 지난 시점인 1999년에 출시된 퀘이크 3도 여전히 C로 개발됐고 둠 3 개발 시기에 가서야 C++를 사용했다. 그리고 PC 게임 개발에서 OpenGL이 시대 흐름의 동향에서 밀려나고 Direct3D가 주류가 된지 지났음에도 OpenGL만을 고집했다. 또한, 멀티쓰레드 프로그래밍이 대세가 되어가는 시점에서는 멀티쓰레드 프로그래밍이 복잡하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카맥이 만들었던 둠, 퀘이크 1, 2, 3, 둠 3 엔진의 공개된 소스 코드를 보면 전체적으로 매우 단순한 엔진임에도 알아보기 난해하다. 주석에 상세하게 설명해놓은 부분들마저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이 이유는 표준화된 틀을 만들기보다 대부분이 본인의 편의대로 코딩돼서 단순함과 최소한의 필요에 의해, 해당 게임에만 최적화된 코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용 엔진으로 사용할 수 없고 개량에도 많은 제한이 따른다.
2005년 무렵부터 둠 RPG를 비롯한 모바일 게임에 관여한 것은 복잡함을 벗어나 옛날의 단순함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으며, "결과물이 빠르게 나오는 모바일 게임 개발이 더 재미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성향에 따라 이드 소프트웨어의 게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단순한 디자인도 존 카맥의 영향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이것은 사실과는 다르다. 카맥은 원칙적으로 오리지널 둠 이후 게임 디자인 부문에서는 손을 떼었으며, 이후로도 "게임 디자인은 내 영역이 아니다"라고 일관적으로 주장해 왔다. 따라서 이러한 게임 스타일은 직접적으로 존 카맥이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다른 이드 개발진들의 성향 또한 카맥과 비슷해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카맥은 자신이 만든 엔진이 있기에 가능한 것들을 로메로가 마음껏 연출해 주려는 것이 마음에 들어 자질구레한 부분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깔끔하고 단순하면서도 빠른 엔진을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로메로는 이해했던 것이다. 로메로는 그런 엔진을 이용해 깔끔하고 단순하면서도 빠른 게임을 세상에 전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 게임 요소의 일부를 제거하는 것마저 서슴치 않았다.
처음에 그들은 죽은 나치 군인의 시체를 끌어옮겨 몸수색을 할 수 있게 했다. 원작인 < 캐슬 울펜슈타인>이 그렇게 돼 있었다. 그러나 결과물은 신통치 않았다. "어이구." 시체를 끌어 옮기는 화면을 본 로메로는 불만스러웠다. "저건 게임 효과를 높이는 데 도움이 안 돼. 게임이 느려지잖아. 아이디어는 좋지만, 복도를 달리면서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전부 쓸어버려야 하는 판국에 저런 지저분한 것들을 끌어 옮길 정신이 있어? 저건 없애야 돼. 쓸어버리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다 없애!"
둠 - 컴퓨터 게임의 성공 신화 존 카맥 & 존 로메로 (원제: Masters of Doom)
처음에 그들은 죽은 나치 군인의 시체를 끌어옮겨 몸수색을 할 수 있게 했다. 원작인 < 캐슬 울펜슈타인>이 그렇게 돼 있었다. 그러나 결과물은 신통치 않았다. "어이구." 시체를 끌어 옮기는 화면을 본 로메로는 불만스러웠다. "저건 게임 효과를 높이는 데 도움이 안 돼. 게임이 느려지잖아. 아이디어는 좋지만, 복도를 달리면서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전부 쓸어버려야 하는 판국에 저런 지저분한 것들을 끌어 옮길 정신이 있어? 저건 없애야 돼. 쓸어버리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다 없애!"
둠 - 컴퓨터 게임의 성공 신화 존 카맥 & 존 로메로 (원제: Masters of Doom)
3.1. 게임 스토리에 관하여
Though Romero was somewhat supportive at first, Carmack had other ideas. “Story in a game,” he said, “is like a story in a porn movie; it’s expected to be there, but it’s not that important.” Tom gnashed his teeth. Furthermore, Carmack added, the technology was going to be different this time around.
(전략, 톰 홀이 둠에 영화 같은 이야기를 넣자고 제안한다) 로메로는 일단 그럭저럭 동의했으나, 카맥의 생각은 달랐다. "게임의 스토리는 말이야." 카맥이 말했다. " 포르노 영화의 스토리와 똑같아. 있어야 하긴 하지만, 딱히 중요하진 않다고." 톰은 이를 갈았다. 카맥은 더 나아가 요즘 같은 시기엔 기술이 달라진다며 덧붙였다. (후략, 카맥이 연속해서 진행되는 세계에 대해 제안하고 홀은 거부 반응을 보인다)[7]
둠 - 컴퓨터 게임의 성공 신화 존 카맥 & 존 로메로 (원제: Masters of Doom)
(전략, 톰 홀이 둠에 영화 같은 이야기를 넣자고 제안한다) 로메로는 일단 그럭저럭 동의했으나, 카맥의 생각은 달랐다. "게임의 스토리는 말이야." 카맥이 말했다. " 포르노 영화의 스토리와 똑같아. 있어야 하긴 하지만, 딱히 중요하진 않다고." 톰은 이를 갈았다. 카맥은 더 나아가 요즘 같은 시기엔 기술이 달라진다며 덧붙였다. (후략, 카맥이 연속해서 진행되는 세계에 대해 제안하고 홀은 거부 반응을 보인다)[7]
둠 - 컴퓨터 게임의 성공 신화 존 카맥 & 존 로메로 (원제: Masters of Doom)
게임에서 스토리가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 포르노 영화에 비유했다는 점에서, 게임 스토리와 관련된 실존인물의 발언 중에서는 가장 유명하다. 다만 카맥의 이 발언을 액면 그대로 '게임에서 스토리는 필요 없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출처에서 보듯이 이 발언은 둠 개발 당시(약 1992년)에 나온 것이다. 그 당시의 이드 소프트웨어는 개발 인원이 고작 6명이었던 소규모 개발사였기 때문에, 본인들의 역량 이상으로 너무 많은 시도를 했다가는 게임이 언제 나올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령 제작진의 규모가 컸다고 치더라도, 당시 컴퓨터 사양으로서는 그렇게 세세한 스토리나 연출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해당 책에서도 저 파트 뒤에는 카맥이 1992년 가을에 256색밖에 지원하지 않는 VGA를 가지고 악전고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8] 로메로 또한 프로그래머라서 블록으로 이루어지는 커맨더 킨이나 울펜슈타인의 세계와 달리 둠에서는 보다 자유로운 맵을 만들고 싶어했다고 한다.
게다가 인용문에 나오는 이드 소프트웨어의 간판 게임 디자이너였던 톰 홀(Tom Hall)의 태도도 문제가 있었다. 홀은 기획 단계에서 100장 가량의 풍부한 설정집인 '둠 바이블 (Doom Bible)'[9]을 직접 작성했고 이를 게임에 반영하기를 원했다.[10] 하지만 상술했듯이 이드 소프트웨어가 소규모인데다 당시 하드웨어 환경으로는 썩 훌륭한 시네마틱을 보여줄 수도 없었기에 선택과 집중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 부분의 바로 뒷내용에서는 카맥과 홀의 논쟁에 대해 로메로도 카맥의 말이 맞다고 입장을 바꾸고, 당시 동료였던 제이 윌버(Jay Wilbur)와 케빈 클라우드(Kevin Cloud)까지 카맥의 손을 들어줬다고 한다.
다만 홀도 나름대로의 변명거리는 있었다. 위의 인용문에 나온 것처럼 카맥은 심리스 월드 개념을 제안했고 홀은 '두 존(로메로와 카맥)'의 기술력 때문에 수긍하고 2달 동안 기획서를 작성했지만,[11] 카맥이 다시 전통적인 레벨 디자인으로 돌아가자고 하니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보면 홀이 기술 따위 모르는 책상물림 기획자로 보이겠지만, 홀은 결국 그러면서도 복잡다단한 스토리를 포기하고 카맥의 조언대로 실제 군부대에 대한 서적을 탐독하거나 둠의 발매를 위해 광고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홀이 카맥의 조언을 따르는 듯하면서도 자신만의 설정인 '둠 바이블'을 고집한다는 게 문제였다. 심지어 연출( 레벨 디자인) 면에서는 홀보다 로메로가 더 나았다.[12] 이드 소프트웨어의 팀원들이 로메로의 연출을 본 순간부터 홀의 존재감이 사라졌고, 카맥은 로메로를 따로 불러서는 홀을 해고하자고 제안했다. 홀은 로메로와 절친이었고 로메로는 당시(1990년) 재혼에 성공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터라 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고 카맥을 설득했지만, 울펜슈타인으로 떼돈을 벌고 로메로 본인이 둠의 방향을 결정한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결국 로메로는 홀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 나가달라고 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다음 날인 주주총회에서야 털어놓았다. 결국 홀도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게임은 따로 있음을 인정하고 1993년 8월에 이드 소프트웨어를 나가 어포지에 들어간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카맥은 '지나친 스토리는 게임에 독이 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드 소프트웨어와 한창 경쟁하던 밸브 소프트웨어의 하프라이프 시리즈와 포탈 시리즈가 깊은 스토리와 연출력으로 흥행한 반면 이드 소프트웨어에서 공개한 둠 3나 레이지(게임)는 부진한 성적을 겪자, 카맥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히려 시대에 뒤처졌다며 비판받기도 했다.
This old quote still pops up, but I caveat it today -- there are undeniably lots of games where the story is the entire point, and they can be done well. I do still hold that the most important games have been all about the play, not the story
제 옛날 발언이 계속 돌아다니더군요. 지금은 말이죠, 스토리가 전부이고 또 잘 만든 게임들이 많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스토리보다 (게임)플레이가 가장 중요했다는 제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2019년 11월 14일, 본인의 트위터 (現 X)에서 아카이브
제 옛날 발언이 계속 돌아다니더군요. 지금은 말이죠, 스토리가 전부이고 또 잘 만든 게임들이 많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스토리보다 (게임)플레이가 가장 중요했다는 제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2019년 11월 14일, 본인의 트위터 (現 X)에서 아카이브
카맥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는지 2011년에 nowgamer와의 인터뷰에서는 요즘은 영화나 TV 같은 것에 게임성을 더한 작품들이 나온다면서 전반적인 균형을 언급하기도 했다( 번역본). 하지만 2019년에 다시 트위터로 저렇게 말한 것을 보면[13] 스토리보다 게임성을 중시하는 철학은 그대로인 듯하다.
한편 상술한 Masters of Doom에서 이드 소프트웨어 팀원들과 TRPG인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를 하는데 게임을 파토내는 에피소드가 나온 것을 보면 쓸데없이 튀는 스토리를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14] 다만 이 에피소드는 로메로의 민폐와 카맥의 답답한 성격 중 뭐가 더 문제인지 사람마다 반응이 갈린다.
3.2. 기술 공유 지향
프로그래밍은 제로섬 게임이 아닙니다. 동료 프로그래머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 해서 당신의 지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프로그래밍과 사랑에 빠쳤고,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을 공유하게되어 기쁨니다.
게임 엔진 블랙 북: 울펜슈타인 3D
게임 엔진 블랙 북: 울펜슈타인 3D
존 카맥은 1984년 출간된 ' 해커, 광기의 랩소디'[15]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으며, 기술의 발전을 위해 지식은 공유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카맥이 입버릇처럼 자주 쓰는 "그것이 옳은 일이다"(Right thing to do)라는 문구도 이 책에서 나왔다. 지식의 공유에 대한 믿음은 카맥으로 하여금 자신이 개발한 기술에 특허를 걸어 로열티를 받자는 동료들의 제안을 거부하고 사용자들이 게임의 모드를 만들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고 게임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가 정한 질서를 크게 개의치 않는 그의 성향도 이러한 믿음에 영향을 끼쳤다.
존 카맥은 특허 출원이 기술 발전을 저해한다며 매우 싫어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존 카맥의 기술이 큰 주목을 받던 1990년대 중반, 특허를 내는게 어떠냐는 동료에 말에 "나보고 특허 내라고 하면 회사 그만둔다."고 엄포를 놓은 일화가 알려져 있다.
1995년 울펜슈타인 3D의 소스 코드 공개를 시작으로, 출시한 게임의 소스 코드 중 이드에서 작성한 것을 GPL 하에 공개하고 있다. 1997년에 둠, 1999년에는 퀘이크의 소스 코드를 공개했으며, 이어 2005년에 퀘이크 3, 그리고 2011년에 둠 3의 소스 코드를 공개했다. 퀘이크 3부터 소스 코드 공개 주기가 길어진 이유는, 해당 게임의 소스 코드(엔진)를 라이선스한 회사들이 이른 소스 코드 공개로 피해를 입는 걸 예방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 피해라는 건, 서버/클라이언트 및 네트워크 코드 공개로 인한 해킹 위험성도 있지만, 너무 일찍 무료로 공개하게 되면 라이선스를 위해 비싼 돈을 지불한 업체가 호구가 되기 때문이다.[16]
비록 누구나 소스 코드를 볼 수 있도록 공개되었으나, 그것을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것은 아니다. GPL로 공개되었으므로 이 코드를 사용해 게임을 만들었다면 그 게임도 공개해야만 하는 제약이 있다. 소스 코드를 공개하기 싫다면 여전히 이드 소프트웨어에 라이선스비를 지불해야 한다. 원래 프리웨어와 오픈 소스는 다른 개념이다. 프리웨어는 아무나 무료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이지만, 오픈 소스는 말 그대로 소스가 공개만 되어 있을 뿐 라이선스에 따라 사용 조건이 있고 그 조건을 피하기 위해서는 원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또 공개된 소스 코드를 이해하려면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을 이용한 C++, OpenGL, Win32 API에 대한 지식이 필요할 것이다.
3.3. 하드웨어에 대한 비평
존 카멕은 한참 게임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던 당시, 닷플랜 과 슬래시닷의 포럼을 통해 3D 가속 카드와 관련된 발언들을 많이 했다.1999년 9월 2일, 닷플랜을 통해 지포스 256을 두고 웃긴 이름의 지오메트리 가속 카드지만 원시적인 베타 드라이버로 테스트했음에도 불구하고 리바 TNT2에 비해 40% 이상 빠르며 그 어떤 그래픽 카드도 이 프레임률 수치를 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
2000년 5월 17일, 닷플랜에서 엔비디아, ATI, 3dfx, 세 회사가 잘못하고 있는 점을 비판을 하기도 했다. 엔비디아는 독점 기술에 대해, ATI는 드라이버 안정성에 대해, 3dfx에 대해서는 부두 5라는 그래픽 카드 이름이 부두 4와 다른 그래픽 카드라고 대중들에게 오해를 살 수 있는 이름이며, 지오메트리 기능이 없다고 비판했다.[17]
2000년 8월, 슬래시닷에서 퀘이크 3 드림캐스트 버전 관련 드림캐스트와 플레이스테이션 2의 성능 논쟁에 대해 드림캐스트의 더 나은 백엔드 필터, 자동 밉매핑 및 더 넓은 텍스처 공간으로 인해 일부 유형의 게임이 더 좋아 보일 수는 있지만, 플레이스테이션 2의 성능이 더 강력하다고 말했다. 차세대 플레이스테이션 2 게임들은 이 증가된 성능을 과시할 수 있을 것이며, 세가가 드림캐스트의 가격을 인하하고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플레이스테이션 2에 대해 '혁명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이말이 소니가 좋은 기계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고도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스테이션 2는 본인이 완벽하게 납득한 방식이 아닌 일련의 절충으로 설계되었다고도 말했다. #
2001년 2월 22일, 닷플랜에서 지포스 3에 대해 환상적이라며, 성능 면에서 인상적인 것은 부두 2 이후로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포스 2는 지포스 256의 성능 향상판일 뿐인 반면 지포스 3는 아키텍처가 크게 변경됐기 때문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게 좋았을 거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2002년 2월 11일, 닷플랜에서 둠 3를 돌리려면 지포스 4 MX를 사지 말라며, 엔비디아의 그래픽 카드 명명 규칙이 혼란스럽게 한다고 혹평을 했다. 지포스 4 MX에는 지포스 3부터 도입된 프로그램으로 제어할 수 있는 셰이더 프로세서가 없었다. 그래서 성능과 그래픽 효과 측면에서 지포스 3보다도 못했다.
또한 게임기에 대해 주로 제한적인 성능과 어려운 제작 환경 때문에 비판을 많이 했는데 특히 플레이스테이션 3에 대해 유독 많은 혹평을 남기며 플빠의 공적이 되었으며,[18] 상대적으로 호평해 왔던 엑스박스 360에 대해서도 디스크 3개로 게임 발매시 과도한 로열티를 부과한다며 'DVD 용량은 충분치 않다'는 단골 떡밥을 다시 환기시킴과 더불어 마이크로소프트의 사업 정책을 비판했다.
존 카멕이 2006년 퀘이크콘 때 한 인터뷰에서 플레이스테이션 3와 엑스박스 360, 두 게임기를 비교한 걸 들어보면 엑스박스 360을 지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 PC의 성능이 가장 좋다는 논지로 말했다. 그러나 하드웨어 사양을 제외하고 개발 환경만 따지면 엑스박스 360의 개발 환경이 무척 편하다며 매우 호평하기도 했다. 그래서 레이지도 엑스박스를 기준 플랫폼으로 제작했다. 또 2009년 퀘이크콘 기조 연설에서 PhysX 물리 연산 가속 카드에 대한 질문의 답변으로 코어가 여러개 있는 CPU나 세분화된(Fine-grained) 컨텍스트 전환 및 스케줄 기능을 얻은 GPU( GPGPU)가 더 잘 작동할 것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2011년 들어 PC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는 정확히 말하자면 PC 그 자체보다는 PC 제조사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픽 카드의 성능은 충분히 빠르니 하드웨어 회사들이 소프트웨어 회사들을 더 적극적으로 지원하란 인터뷰를 한 바 있다.( 브링크 관련돼서 한 말 같다.) 또한 15년간 고수해왔던 OpenGL에 대해 Direct3D가 더 좋지만 Direct3D로 전환하기 위해 코드베이스를 갈아엎는 노력에 비해 이점이 의심스러워 그냥 쓴다는 발언도 했다.
2013년 2월 22일, 플레이스테이션 미팅 2013에서 플레이스테이션 4가 PC 기반 아키텍처이며 GDDR5 SDRAM 8GB 등 일부 사양이 공개되자 그는 트위터에서 플레이스테이션 4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없지만 소니 엔지니어들이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과거 동세대 게임기들이었던 플레이스테이션과 세가 새턴, 닌텐도 64에 대해서도 평가했는데 새턴은 비정상(nuts)이었고 닌텐도 64는 실리콘 그래픽스 스타일 픽셀은 기술적으로 시기상조였다며 플레이스테이션이 동세대 게임기 중 최고의 설계라 평가하기도 했다. # #
4. 로켓 개발
2000년부터 아르마딜로 에어로스페이스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로켓 제작에 매진했다.[19]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X Prize 컵에 대한 기사를 읽었고, 완전히 필이 꽂혀서 바로 로켓 개발에 착수했다고 한다. 그에게 동기 부여를 했던 X Prize 컵은 2004년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 폴 앨런의 막대한 자금력을 등에 업은 다른 팀이 우승했지만 그 이후로도 로켓 개발을 지속했다. 결국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8년과 2009년, NASA의 챌린지 프로그램을 통과하며 85만 달러의 상금을 획득하였다. 하지만 2013년까지 들어간 개발비만 800만 달러는 족히 넘었다. 게다가 모든 개발비는 카맥의 주머니로부터 빠져나갔다.취미 생활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탓인지 오랫동안 애지중지하던 개조한 페라리를 모두 팔고 로켓 부품 수송을 위해 밴 한 대를 구입하여 굴렸다. 그러나 회사가 점점 어려워지더니 결국 2013년 1월 로켓 개발을 접었다.
5. 오큘러스 VR 합류
2013년 8월 7일, VR HMD 업체인 오큘러스 VR의 CTO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2013년 11월 22일, 이드 소프트웨어에서 퇴사했다. 이드 소프트웨어에 기술 자문으로 계속 남고 싶었지만 일이 그렇게 풀리지 않았고, 관심사를 나눠서 집중하기 힘드니 잘 된 것 같다는 글을 트위터에 남겼다.2014년 8월, 마인크래프트의 노치가 페이스북의 오큘러스 VR 인수 후 마인크래프트의 이식이 취소되자 짜증을 낸 트윗에 '코드만 주면 다시 잘 돌아가게 해 줄게'라는 답변을 남겼다.
오큘러스 리프트 개발에 참여하다가 결국 아예 오큘러스 VR로 이직하는 과정에서, 회사 재직 당시 이드 소프트웨어를 인수하여 모회사가 되어있던 제니맥스 미디어 측의 핵심 기술들과 인력들을 무단으로 빼돌려[20] 제니맥스 미디어에게 소송을 당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경영적인 위법 행위는 인정되어 오큘러스 VR은 제니맥스 미디어에 손해배상을 하게 되었지만 기술적인 위법 행위는 사전에 카맥이 열심히 흔적을 뜯어고친 탓에 인정받지 않아서[21] 본인은 손해배상에서 빠져나갔다. 물론 본인으로 인해 오큘러스 VR이 입은 손해가 있으니[22] 본인이 직접 피해를 안 입었을 뿐 사실상 피해를 입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여담으로 이때 카맥은 제니맥스 미디어를 향해 "제니맥스 미디어 재직 시절 재니맥스 미디어에서 충분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았다"며 맞고소를 놓았는데 이건 제니맥스 미디어와 비공식 합의로 무산되었다. 여하튼 오큘러스 VR 소송전에서 물질적으로는 되레 이득 본 사람이지만, 도덕성 면에선 꽤 큰 타격을 입었다.
2019년 11월에는 인공지능 개발에 시간을 투자하기 위해 오큘러스 VR의 CTO 자리에서 사임하고 자문역으로 물러났다가 2022년 12월 17일 메타에서 퇴사하였다. 퇴사하면서 밝히기를 기존에 오큘러스 VR의 CTO 자리에서 사임한 이유는 내부 다툼에 피로해져서라고 밝혔다.
6. 기타
- 2011년작 레이지를 마지막으로 게임 개발 현장에서는 사실상 물러난 상태라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언급이 점점 줄어들었으며, 2020년대 이후의 신세대 게이머들 중 대부분은 존 카멕이 누군지도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 어린 시절 애플 컴퓨터를 접한 후 진로를 프로그래머로 정했다. 하지만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반대가 극심했는데, 카맥의 어머니는 아들이 아이비 리그 명문대에 진학해 교수 또는 대기업의 고액연봉자가 되기를 원했다. 이렇게 어머니와 마찰을 겪으며 카맥의 성격은 점점 어두워지고 공격적으로 변해갔는데, 14살 때 애플 컴퓨터를 손에 넣기 위해 테르밋과 바셀린을 섞은 끈끈이를 유리창에 부착해 테르밋의 고열로 녹이는 방식으로(!) 인근 학교에 침입[23]했다가 걸려서 소년원에 1년 동안 다녀오기도 했다. 참고로 적발된 사유는, 같이 간 친구 한 명이 뚱뚱해서 창문에 끼는 바람에 센서에 걸렸기 때문이다.
- 소년원에 들어가 있을 당시 정신감정을 맡은 의사는 그의 무감정함에 많은 신경을 써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소년은 다리 위로는 뇌밖에 없는 것 같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말은 '다리와 뇌 사이에 아무것도 없으니 ' 심장이 없는 (무감정한) 자'라는 뜻이다.
- 소년원을 나온 후 고등학교에 입학한 동시에 집에서 나와 혼자 생활하게 된 카맥은 섀도포지, 레이스 등의 게임을 만들어 소매점에 직접 판매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이후 대학교에 입학하여 2학기 정도 있다가 자퇴한 후 소프트디스크 잡지사의 부록 게임을 만드는 부서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게임 프로그래머 인생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카맥은 존 로메로, 에이드리언 카맥, 케빈 클라우드 등 대표적인 초기 이드 소프트웨어 멤버들을 만났으며, 때마침 어포지 사(현재의 3D 렐름즈)의 CEO인 스콧 밀러의 사업 제안을 받고 소프트디스크 사를 퇴사한 존 로메로, 에이드리언 카맥, 톰 홀과 함께 이드 소프트웨어를 공동 설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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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견 이름이 데이지인데
둠가이의 애완토끼 이름도 데이지다.
- 부인인 '캐서린 안나 강'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둘은 1997년에 처음 만났고, 2021년에 이혼했다. 처음 만났을 때 안나 강은 이드 소프트웨어 사무실에 방문하여 "여성 퀘이크 대회의 스폰서를 맡아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했고, 존 카맥은 그에 응했지만 기껏해야 수십명 정도의 작은 랜파티 수준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안나 강이 주최한 퀘이크 대회에는 2,000명의 사람들이 운집했고, 카맥은 그녀의 능력에 감명받아 반했다는 이야기. 둘은 2000년에 결혼하여 2004년에 첫째를, 2009년에 둘째를 보았다. 캐서린은 이렇게 카맥과 인연을 맺은 후 게임계에 뛰어들어 머시니마 분야에서 크게 활약하기도 했다.
- 집중력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이드 소프트웨어의 초창기 시절 프로그래밍에 심취하여 화장실 외에는 컴퓨터 앞에서 한시를 떠나지 않고 먹고 자고 하면서 며칠을 보냈다고 한다. 이를 지켜보던 존 로메로가 장난기가 발동해서 카맥이 있는 옆 방에서 대놓고 포르노를 틀어서 그를 컴퓨터와 떼어내 보려 했는데 카맥은 시끄럽다며 잠시 코딩을 멈추었다가 '음...' 하는 특유의 콧소리를 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컴퓨터 앞에서 하던 작업을 계속 했다고 한다.
- 비디오 게임 사이트인 루리웹에서는 레이지의 플레이스테이션 3 버전 30프레임 소동이나 플레이스테이션 3의 개발 환경에 대한 불만을 표한 사건 때문에 플빠들로부터 3류 프로그래머로 불리곤 했다. 그런데 누군가 오타였는지 잘 몰라서였는지 '13류 프로그래머'라고 지칭한 것이 크게 흥해서 'n류 프로그래머'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으며(n 값은 인기와 평판에 따라 오르내린다) 현재는 18류 또는 그 이하까지 내려가는 등 여러가지로 말장난의 소재가 되고 있다. 신작 레이지 개발과정에서 플레이스테이션 3의 블루레이 용량을 추켜세웠는데 정작 발매된 게임에서 텍스쳐 로딩이 개판이자 2^10류 프로그래머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이에 휘말려서 코지마 히데오 등 다른 개발자까지 'n류 개발자'라는 별명이 붙기도 한다. 하필이면 레이지 PC판이 엉망일 때 존 카맥이 "PC를 게임 개발의 기준 플랫폼으로 보지 않는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해서 더 까였다.
- 퀘이크 2에서는 숨겨진 이스터에그 공간 중 하나에서 (페라리와 함께한 사진, 둠 로고 등이 있음) 그의 머리가 나오는데 아이템으로 취급된다. 최대 체력을 1 올려주는 아드레날린 8개를 한꺼번에 먹는 취급이라 존 카맥 머리를 먹으면 최대 체력 8이 올라간다. 거의 최후반부에 입수하는 아이템이라 그동안 아드레날린을 많이 모아주지 못했다면 큰 도움이 된다.
- 둠 3에 목소리로 출연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둠 3의 생존자 항목 참고.
- 퀘이크 1을 제작할 당시인 1995년에 실리콘 그래픽스/인터그래프사의 인터뷰 28HD96라는 1920×1080 해상도가 지원되는 28인치 16:9 와이드스크린 모니터를 사용했다. 2010년대 이후로는 이정도 모니터 크기나 해상도가 보편화되어 있으나 저 당시에는 4:3 비율의 14인치 640×480 해상도 모니터가 많이 사용되던 시기였다.
- 메타버스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메타버스가 있길 원하지만 특정 개념을 지칭하는게 아닌, 여러 기술의 집합체로써의 개념에 가깝기 때문에 함부로 다뤄서도, 함부로 지칭되어서도 안된다고 그 이유를 전했다. #
- 그의 첫째 아들은 2020년 처음 본 SAT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 존 카맥은 자기 아들이 매우 자랑스럽다며 트위터를 통해 아들 자랑을 했다. #
- 고사양의 폭력적인 게임을 만들지만 정작 본인은 닌빠 기질이 농후하다. 미야모토 시게루를 매우 존경하고 있으며, 평소 즐기는 게임의 대부분이 닌텐도 게임이라고 한다. 이건 간단하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임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존 카맥 본인의 믿음과도 관련 있어 보이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이드 소프트웨어 게임이 퀘이크 3라는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반면 대난투 스매시브라더스 DX는 왜 재미있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말도 했는데, 사실 스매시브라더스 시리즈가 평이나 인기가 좋은 시리즈이긴 하나 대전 격투 게임 중에서도 생소한 스타일의 작품이다보니 취향에 따라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작이 다른 대난투에 비해서도 마니악하고 복잡한 고인물 게임이라 그럴지도. 별개로 그가 가장 최고로 뽑는 게임은 세가의 소닉 더 헤지호그 시리즈라고 한다. 사실 그가 만든 폭력적인 게임도 닌텐도 게임과 비슷하게 직관적인 컨트롤을 꽤나 신경쓴 편이다.
- 애플빠 기질도 농후하다. 어린 시절에는 애플 2 컴퓨터를 훔치다가 소년원을 간 적도 있고 미디어에 노출된 사진을 보면 당대의 최신 애플 컴퓨터가 같이 찍혀 있는 경우가 많다. 둠은 macOS의 전신인 NeXT로 개발되었고 존 카맥은 이것을 자랑하고 싶어 "Developed on NeXT computers"라는 로고를 둠 실행 화면에 넣으려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다. Macworld 2001 Tokyo 행사에서는 스티브 잡스의 소개와 함께 무대에 나와 직접 둠3 관련 기술 데모를 시연하기도 했다.
- 본인이 직접 페이스북에 밝힌 이야기에 따르면, 스스로 10대 시절 애플팬으로서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의 이야기에 빠져 살았고, 다른 사람들의 부탁은 거절해도 잡스의 부탁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들어줬다고 한다.
- 아이폰 출시 이후로 매번 아이폰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스티브 잡스에게 아이폰에 서드파티 앱을 허용해야 한다고 설득한 인물 중 한명이다. 카맥은 OS X 기반인 아이폰은 다른 폰들보다 뛰어난 보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드파티 네이티브 앱을 허용해도 된다고 설득했다. 이에 서드파티 앱은 웹 앱만 허용하려고 했던 잡스는 "존, 너는 똑똑하니까, 니가 직접 OS를 만들어보던가?(You're a smart guy John, why don't you write a new OS)?”라고 말했고, 카맥은 이때 마음 속으로 "좆까 스티브(Fuck you, Steve)." 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어쨌든 나중에 잡스는 아이폰에 서드파티 네이티브 앱을 허용하게 된다.
- 게임스탑 주가 폭등을 약 세 달 앞둔 2020년 10월 14일 존 카맥은 한 투자자로부터 당시 주당 12불이었던 게임스탑 주식이 심상치 않으며 역사에 남을 숏 스퀴즈가 될 것이라는 정보를 제공받았다. 카맥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아 큰 기회를 놓쳤다. 1999년, 당시 나스닥 상장을 앞뒀던 엔비디아로부터 기술 자문 위원 자격을 인정받아 많은 IPO 주식을 제공받았다. 그러나 카맥은 이를 받고 상장이 되자마자 팔아버렸다. 2024년 11월 기준으로 엔비디아의 주가는 상장 첫날 시초가의 3600배를 넘는다. 또한 1990년대에 OpenGL에 열광해 SGI의 주식을 샀다가 큰 손실을 입기도 했다. 주식을 통해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과거의 일화들을 공개한 카맥은 '나는 주식보다는 기술로 먹고 사는 게 낫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
[1]
닷플랜. FINGER 프로토콜을 위한 사용자 설정 파일. FINGER란 원격으로 호스트의 사용자 상태를 알려주는 인터페이스이다. 사용자 루트 디렉토리에 .plan 파일을 생성해 놓으면 그 사용자에 대한 FINGER의 결과로 .plan의 내용물을 출력한다. 주로 사용자의 업무 진척 상황을 적어뒀고, 존 카맥의 .plan 초반에도 그렇게 사용했다. 그러나 존 카맥의 .plan이 온라인 소통 통로가 되면서 그는 마치 블로그처럼 사용했다. 그래서 .plan하면 으레 존 카맥의 온라인 소통 통로로 더 알려져 있다. 참고로 현재 FINGER 프로토콜은 사용자 계정 정보를 탈취할 수 있다는 보안 취약점 때문에 대부분의 서버는 서비스를 꺼 둔 상태이다.
[2]
슬래시닷. 너드들을 위한 중요한 뉴스 사이트라는 슬로건으로 시작한 인터넷 서비스로 뉴스와 포럼 토론 같은 소셜 서비스 기능이 혼합된 사이트였다.
[3]
현재는 게임 개발자들의 커뮤니티 활동이나 오프라인 게임쇼 또는 게임 파티 같은 것들이 흔하지만 당시로서는 게임 개발자의 적극적인 커뮤니티 활동이 적었다.
[4]
실제로 커맨더 킨 1편은 평소 닌텐도 게임의 광팬이었던 이드 소프트웨어의 팀원들이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3를 PC로 이식하여
닌텐도에 보냈지만 돌아온 대답이 '훌륭한 작업물이나 우리는 PC 시장에 관심이 없다'여서 마리오 PC판의 엔진에 캐릭터와 레벨 디자인을 바꿔서 발매한 것이었다.
[5]
그 전에도 해당 기술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미 노멀맵은 1999년에 출시한 3D 마크 2000에서 보여준 바 있었고, 2001년작 블레이드 앤 다크니스처럼 실시간 광원과 그림자를 이미 채용해서 출시한 게임도 이미 시중에 나와있었다.
[6]
여담으로 iOS용 레이지는 구기종 호환성을 위한 것이었는지 구형 기술로 어디까지 구현 가능한가를 알고 싶어 테스트라도 해본 건지 아니면 그러한 행위에서 재미라도 찾으려던 건지는 알 수 없으나, 굳이 OpenGL ES 2.0을 놔두고 OpenGL ES 1.1 기반으로 구현했다고 한다.
[7]
전체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8]
하지만 결국 그 256색을 가지고 점점 어두워지는 효과를 내는 데에 성공했다. 플레이어의 위치를 즉시 계산하여 가장 가까운 시야에서 가장 먼 시야로 갈수록 명도가 낮아지게 만든 것이다. 대체로 빨간색을 썼기 때문에 현실감은 다소 떨어졌지만 도리어 사악해 보이는 효과를 냈다고 한다.
[9]
여기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10]
처음에는 카멕도 이를 긍정적으로 여겼는지 알파 버전에 해당 설정안을 적용하려던 흔적으로 보이는 "포커 치는 해병들"이 남아 있다.
#
[11]
"네가 심리스 월드로 하자고 해서 2달 동안 딱 거기에 맞춰서 기획서를 쓴 거잖아! (“But I’ve spent the last two months writing a design document based entirely on that seamless world you wanted!”)
[12]
상술한 Masters of Doom에서 로메로가 며칠 야근하며 만들어낸 연출이 나오는데, 오늘날 완성되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둠의
스테이지 1 시작 장면(음침하고 낮은 실내, 창 밖으로 보이는 산맥 등)과 완전히 동일하다.
[13]
시점상
둠 이터널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14]
D&D에서 로메로가 '데모니크론'이라는
위험한 책을 가지고 노는 바람에 다른 팀원들의 캐릭터가 죽어서, DM을 맡고 있던 카맥이 로메로를 시험하려고 악마를 불러내서 '그 책을 나에게 주면 소원을 들어주마'라고 했다. 문제는 로메로가 '책을 드릴 테니 대가로 존나 쩌는 걸 주세요'라고 했고 카맥은 자신들이 진행하던 시나리오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인 '다이카타나'를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다이스 갓이 배신하는 바람에 함선이 악마들에게 파괴되는 결말로 끝났다(…). 방은 침묵과 비탄에 빠졌고 로메로가 무르면 안 되냐고 했지만 카맥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이다. 몇몇 부분에서 눈치챘겠지만 악마들에게 함락당하는 부분은
둠 시리즈의 배경에 영향을 줬고, '다이카타나'는 훗날 이드 소프트웨어에서 나온 쫓겨난
존 로메로가 만드는 게임
다이카타나의 유래가 되었다. 또한 로메로가 D&D에 쓴 자캐의 이름은 '
퀘이크'였는데 로메로는 이를 기반으로
퀘이크 시리즈의 초안을 구상하기도 했다.
[15]
Hackers, Heroes of the Computer Revolution. 스티븐 레비 저. 이전 번역명: 해커스, 세상을 바꾼 컴퓨터 천재들
[16]
특히 퀘이크 3 엔진이 약 11개 정도의 게임들에 사용되었으니 공개를 늦게하게 된 것이 당연하다. 언리얼 엔진 4 이후로 기본 소스 코드 공개에 무료 라이선스 정책도 있고 수 많은 무료 오픈 소스 엔진들이 즐비한 지금에는 저개 무슨 말인가 할 수도 있으나 당시에는 그랬다.
[17]
재밌게도 20년이 넘게 지난 2022년 시점에서도 (이미 철수한 3dfx를 제외하고) 저 비판은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엔비디아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독점 기술들을 바탕으로
경쟁사가
하드웨어 깡스펙상으로 비슷하거나 더 높은 제품을 내놓는다 한들 무시한 채 고가 가격정책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ATI를 인수한 AMD의 경우 20년이 넘게 지난 현 시점까지도 여전히(...) 드라이버 안정성에 대해서 매번 혹평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18]
하지만 플레이스테이션 3의 프로세서가 복잡한 병렬 연산으로 성능을 뽑아내는 해괴한 구조 때문에 개발자들로부터 까일 만한 명분을 준건 사실이다.
CELL-Broadband Engine 항목 참조.
[19]
흥미롭게도
스페이스X의 창업자인
일론 머스크와 매우 비슷한 행적이다.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익힌 게임마니아 출신으로, 20대에 사업으로 큰 부를 축적한 뒤 그 자본으로 로켓 개발 회사를 설립한 부분까지 매우 흡사하다.
[20]
이드 소프트웨어를 제니맥스 미디어에게 넘기는 과정에서 '제니맥스 미디어 산하에서 만든 모든 기술은 제니맥스 미디어의 적법한 소유물이다'라는 조항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었고, 오큘러스 리프트는 프로토타입인 '리프트' 시절부터 이것에 관심을 보인 카맥의 소개로 제니맥스 미디어 측으로부터 인적, 물적 지원을 빠방하게 받아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오큘러스 리프트의 개발 토대는 제니맥스 미디어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제니맥스 미디어의 흔적이 강했다.
[21]
재판 결과 개발 기록이 일부 누락되었음이 발견되어 고의로 개발 기록을 지웠다는 의심은 샀지만 그럼에도 명확한 물증으로 잡을 만한 건수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22]
하지만 이 사건은 카맥이 독단적으로 행한 게 아니라 오큘러스 VR의 창업주인 팔머 럭키와 공동으로 저지른 사건이었다. 자세한건
오큘러스 리프트의
기타 문단이나
제니맥스 미디어의
오큘러스 VR과의 소송전 문단을 참고.
[23]
사제 폭탄을 제조했다는 루머도 있지만 유리창을 녹인 쪽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