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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 ||
||창업주 ||
스티브 잡스† | 스티브 워즈니악 | 로널드 웨인 |
CEO · 이사회 · 이사회 의장 · 현직 경영진 |
<colbgcolor=#333><colcolor=#fff>
Apple 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 Steve Woznia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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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스티븐 게리 워즈니악 (Stephen Gary Wozniak)[1] |
|
출생 | 1950년 8월 11일 ([age(1950-08-11)]세) | |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콜로라도 대학교 볼더 (중퇴) | |
UC 버클리 ( EE CS / B.Sc.) | ||
직업 | 엔지니어, 교수[2], 프로그래머 | |
신체 | 168cm[3], 84kg[4] | |
종교 | 무종교( 불가지론) | |
가족 | <colbgcolor=#333><colcolor=#fff> 배우자 |
앨리스 로버트슨 (1976년–1980년) 캔디스 클락 (1981년–1987년) 수잔 멀컨 (1990년–2004년) 자넷 힐 (2008년–현재) |
자녀 |
사라 나딘 워즈니악 제시 존 워즈니악 스티븐 게리 워즈니악 주니어 |
|
링크 |
http://www.woz.org |
[clearfix]
1. 개요
왼쪽부터 스티브 잡스, 존 스컬리, 스티브 워즈니악 |
스티브 워즈니악은 Apple의 공동 창업자이자 20세기 본격적인 PC(Personal Computer)의 시작을 연 사람이다. 초기 Apple에서는 스티브 잡스는 단순 경영자에 가깝고, 기술 분야는 스티브 워즈니악이 혼자 다 했다고 봐야한다.
스티브 잡스가 상대적으로 훤칠한 외모를 갖추고, 성격도 그만큼 외향적이며 강력한 쇼맨쉽을 갖춰 얼굴마담 역할을 톡톡히 했던 덕분에, 세상은 워즈니악을 단순한 조연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5] 하지만, 실질적으로 Apple은 이 사람의 손끝에서부터 시작했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6][7]
현존하는 모든 PC의 시조격인 장치가 워즈니악의 손에서 탄생하였고, 잡스와 함께 Apple의 창업으로 이어졌다.[8]
이 개인PC를 초소형화한 개념이 스마트폰이란 것을 상기해 본다면, 사실상 현시대 개인용 미디어장치의 장을 연 사람이라 평가해도 무방하다. 즉, 지금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있는 모든 사용자는 워즈니악 덕분에 간편하고 쉽게 집에서 PC를 이용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좀 과격하게 표현하는 사람은 그리스에는 프로메테우스가 인간 문명을 열었다면, 현대인은 워즈니악이 문명을 열어 주었다고 할 정도다. 그만큼 현대인에게 있어 인지도에 비해 더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는 것.[9] 그런데 워즈니악은 그저 평범하고 소탈한 삶을 지향하고 있으니 아이러니컬하다. 제주도 학생에게 팬 메일을 받았는데 이에 대해 본인의 경험과 철학과 소신을 상대가 상처 받지 않도록 예의 있게 장문으로 사인을 동봉해 작성해 보냈다는 점에서 그의 인격을 알 수 있다. 잡스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대 유명한 해커이기도 했다. 1970~1980년대 해커 중에는 아직도 "더 워즈"(The Woz)[10]의 명성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특히 "블루박스"라 불리는 장치를 개발해 공짜 장거리 전화를 거는 해킹으로 유명했지만 그 외에도 무용담이 많다.
2. 생애
록히드에서 미사일을 개발하던 아버지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의 작업물에 대한 내용은 어떠한 것도 들을 수 없었지만, 아버지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아 어려서부터 공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11] 대학교를 중퇴한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와 마찬가지로, 본인 또한 대학교를 중퇴했으나 바로한 것은 아니고 1968년에 콜로라도 대학교 볼더에 입학한 뒤에 학비 문제로 가까운 데안자 대학교로 1969년에 편입했고 여기서도 1970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 편입한 뒤 1975년에 중퇴하고 휴렛 팩커드(이하 HP)에 입사했다. 주로 했던 작업은 계산기 분야. 후에 1986년,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이 시기 가장 큰 전환점은 친구로부터 장난치기를 좋아하고 전자회로에 관심이 많은 비상한 고등학교 후배인 스티브 잡스를 소개받게 된 것이다. 잡스가 워즈니악의 고등학교의 친구라고 자주 언론에 나와서 한국인들은 이들이 동갑이라 생각하는데 실제로 잡스는 워즈니악보다 5살 어리다. 스티브 잡스를 소개해준 빌 퍼낸데즈(Bill Fernandez)라는 이 친구는 훗날 Apple의 최초의 직원이 된다. 잡스와 워즈니악의 무용담은 아래에서 확인할 것.
고등학교 때부터 전자회로와 계산기에 관심이 많던 워즈니악은 컴퓨터 동호회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고, 잡스 역시 이 동호회에서 활동했다. 1976년 워즈니악은 구형 텔레비전에 연결된 조잡한 회로로만 보이던 Apple I을 동호회 친구들에게 보여주게 된다. 오랜만에 이 동호회에 나타난 잡스는 이 물건이 장사가 될거라 생각하고 워즈니악에게 같이 회사를 차리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워즈니악에게는 이미 HP라는 걸출한 직장이 있었고 여건만 된다면 HP에 PC 부서를 두는 것이 어떻냐고 상사에게 제안하는 중이었기에 선뜻 긍정을 못했지만, 잡스는 자신이 알고있는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서 매일같이 워즈니악과 그의 친구들에게 "HP는 워즈니악 같은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없으니 차라리 워즈니악이 HP를 그만두고 새 회사를 차려 사업은 사업가에게, 개발은 개발자에게 맡기는 게 낫다"라고 설득했다. HP에서 스티브 워즈니악의 개인용 컴퓨터 사업 제안을 여러 차례 거절하자, 결국 HP를 그만두고 스티브 잡스와 동업하여 ' Apple Computer'를 설립하게 된다. 사업비도 워즈니악이 냈다. 중요한 점은 HP를 퇴사하고 애플을 설립한 것이 아니라 애플을 설립하고 HP를 퇴사했다는 것이다. 워즈니악은 Apple II 컴퓨터를 개발하면서도 퇴사에 회의적이었다. 회사의 경영진으로서 아랫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 워즈니악에겐 곤욕이었기 때문이다. 워즈니악의 동창이었던 앨런바움이 엔지니어 일만 해도 괜찮다는 말을 했을때야 비로소 퇴사를 결심하게 된다.
Apple Computer를 세운 이후 부품 조달, 마케팅과 조립 등은 잡스에게 맡기고 거의 개발에만 전념한 듯하다. 대표적으로 Apple II의 설계를 맡았다.
1981년 워즈니악은 자신이 몰던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사고 후유증으로 뇌진탕으로 인한 부분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큰 부상을 입은 치료차 휴직을 하게 되었다. 이때 시에라 온라인에서 만든 미스테리 하우스라는 게임을 하면서 많은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내가 만든 Apple II로 이런 훌륭한 게임을 만들어줘서 감사하다'라고 윌리엄스 부부에게 편지를 보냈을 정도였다. 그리고 휴직을 한 겸사겸사 UC버클리에 재입학하여 Electrical Engineering and Computer Science학위를 받고 회사에 복귀했다.
Apple에 복귀해보니 회사는 Macintosh 사업부와 Apple 사업부 둘로 쪼개져서 서로 경쟁하는 살벌한 환경이 되어있었다. 사내 정치나 경영에 신경쓰지 않고 개발에만 전념하길 원했던 그였기에 충격받은 워즈니악은 모든 주식을 매각해버리고 회사에 사표를 내게 된다.[12] 실질적으로는 그만둔 거지만 지금까지도 Apple에 직원 목록에는 그의 이름이 있다. 본인말로도 자신은 새로운 일을 찾았을 뿐 Apple을 공식적으로 그만둔 적은 없다고 말했을 정도. 다만 Apple 직원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것이, 일주일에 적은 돈을 받는다고 한다. 매년 $120,000 정도 받는 것으로 추정된다. 실리콘밸리에서 임직원이 연봉 $12만이면 엄청 낮은 거다. 이 정도는 대학원 졸업하고 경력 2년 쌓으면 받는 월급이다.
2.1. 근황
현재는 스토리지 회사인 Fusion-io라는 회사의 수석 연구원 겸 Apple 자문 역으로 꽤 성공한 삶을 살고있긴 하지만, 빌 게이츠의 파트너인 폴 앨런이 억만장자가 되었던 걸 볼 때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렇다고 가난한 건 절대 아니고 명색이 애플 공동 창업자인만큼 평생 놀고 먹어도 될 정도의 재산은 있다.[13] 어디까지나 보통 말하는 억만장자(billionare)는 아니다는 얘기. 즉, 십억 달러 그러니까 원화 기준 조 단위의 부자가 아닐 뿐이다. 애당초 벌려면 더 벌수도 있었지만[14] 본인이 큰 돈에 많은 욕심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자선활동으로 많은 액수를 기부해왔다.2006년 자서전을 냈는데, 제목이 "iWoz". 영어권에서 보면 '나는 워즈다' 라는 의미와, iWoz를 iWas(발음대로)로 읽어서, '나는 예전에 ~' 라는 의미가 있다. 중의적인 표현. iMac 등 애플의 i 시리즈에서 따온 제목으로 보인다.
국내에 "스티브 워즈니악"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Apple에서 나올 때까지의 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또한 워즈니악에 관련된 오해들을 풀고 다음 세대에게 "포기하지 말고 계속 도전해라"라는 조언을 해주고자 책을 썼다고 서문에 밝혔다. 그런데 그 오해들이라는 게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거나, 하드/소프트웨어 모두 혼자 만든 Apple I을 함께 만들었다거나 등. 현재는 절판되어 번역판의 새 책을 구하기가 힘들다.
2009년 2월에는 자신이 타고다니는 토요타 프리우스의 전자식 스로틀 조절 프로그램과 브레이크에 문제가 있다고 제기를 해서, 프리우스의 리콜을 이끌어 냈다.
지금은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에 살고있다. 워낙 동네에 공돌이, 특히 컴퓨터 분야 공돌이가 많이 살기 때문에 다들 우연히 워즈니악과 마주치면 "오오 워즈다 오오" 한다고 한다. 또 그렇게 알아봐주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맞아주는 훈훈한 사람이다. 또 블로그에 글을 남기거나 메일을 보내면 그걸 꼬박꼬박 답변해준다고 한다.
구글 직원과 함께 |
갤럭시 넥서스를 미국에 출시되기 전에 소유하기도 했다. 위는 구글 직원들하고 찍은 사진. # 아예 저 옆의 직원 하나는 사과를 베어먹고 있다.
Apple 삼성 특허 분쟁에 대해 캘리포니아 법원에서 평결한 10억 달러가 잘못된 판결이고, 결국엔 기각될 것이라 봤다. 이 인터뷰에서 모든 특허 기술을 서로 교환하고,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세상을 희망한다고 말했다.
WWDC13을 참관 중인 워즈니악[15] |
2015년 10월 개봉한 <스티브 잡스>에 대한 감상 인터뷰가 나왔다. 원작인 전기를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것과 대조적으로 영화를 3번이나 봤을 정도로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iPhone 6 발표 직후 한 인터뷰에서, iPhone 6가 더 커진 스크린을 탑재하면서 자신이 가진 안드로이드 기기를 전부 처분했다고 밝혔다.
2016년 3월에 레딧과 IAMA[16]를 진행했다. 번역1/2 클리앙 번역2/2 오늘의유머
2021년 9월. 립코드 창업자인 알렉스 필딩과 함께 민간 우주기업 '프라이버티어 스페이스'(Privateer Space)를 설립했다.
2023년 9월 2023 세계지식포럼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2023년 11월, 워즈니악이 멕시코의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뇌졸중 가능성이 있다고 외신이 보도했다. # 이후 얼마 되지 않아 퇴원했다고 하며 가벼운 뇌졸중을 앓고 있던 것이 확인되었다.
2024년 6월, WWDC24를 참관하러 Apple Park에 등장하였다. 이날 키노트에서 공개된 Apple Intelligence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굉장히 흥미롭지만, 데모와 실사용 환경은 엄연히 다르니 꼭 직접 써보고 자신의 예상과 다른 점들이 무엇인지 알아본 다음에 판단하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3. 스티브 잡스와의 관계
먼저 아래 내용을 보기 전에 스티브 잡스의 성격장애 문제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잡스는 자기애성 성격장애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이 성격장애가 있으면 기만적, 착취적, 세뇌적 인간관계를 보인다. 주변 사람들을 세뇌하며 만나기 때문에, 이런 사람과 만나면 처음에는 이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싶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당한 세뇌의 기만성을 깨닫게되고 자기가 어떻게 착취적으로 이용당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세뇌에서 깨어나면 다시는 절대 이 인간과 상종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이 배경 상식을 가지고 아래 내용을 읽도록 하자.워즈니악도 잡스도 장난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고 둘 다 기계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둘은 나이를 떠나 마음이 잘 맞는 절친한 관계였다. 한편으로는, 서로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성적이고 효율적인 기술을 만드는 재능을 가진 워즈니악과, 제멋대로이고 예술적인 감각을 갖췄고 인맥을 총동원해서 일을 추진하는 능력이 있는 잡스는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잡스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자기 위주로 가야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관계가 언제나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17]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잡스가 아타리에서 일하던 시절의 일이다. 잡스는 아타리에서 게임기 설계를 단순화한 일을 맡아서 보수로 5,000달러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18] 경영인 자격으로 보수를 받은 잡스는, 실제로 작업을 혼자서 다 한 워즈니악에게 겨우 700달러 받았다면서 워즈니악과 똑같이 나누기로 한 약속대로 반인 350달러만 떼어주고 나머지는 본인이 꿀꺽했다. 윌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 전기에 이와 관련된 인터뷰가 있는데 아이작슨이 잡스에게 이에 대해 묻자 "왜 그런 말이 도는지 모르겠어요. 전 분명 돈을 제대로 주었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이에 당시 아타리 사장이었던 놀런 부슈널은 "우리는 분명 5,000달러를 지급했고, 워즈니악은 350달러만 받은 것이 맞다"며 확인사살했다. 이에 워즈니악은 자서전에서 칩 50개 미만이면 700달러, 40개 미만이면 1000달러로 계약이 되어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 일화는 잡스의 인성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일들 중 하나이다. 다만 워즈니악이 추후 이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잡스가 가지고 간 돈을 전부 사업에 투자했기에 워즈니악은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세월이 지나 한 인터뷰에서 실망감을 표출하기도 한 것을 보면[19] 앙금이 남아있긴 했던 모양.
이런 성격적 차이는, Apple을 떠난 이후에 워즈니악이 잡스를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할 만큼 두 사람을 멀어지게 만들었다. 나중에 잡스가 화해를 시도했고 표면적으로는 화해한 듯 보이지만 워즈니악의 이후 기고글이나 인터뷰 등을 볼 때 잡스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은 듯 하다. 특히 2010년 4월 26일에 뜬 기사를 보면 확실히 화해한 적 없음이 분명하다. 심지어 잡스가 워즈니악에게 자서전 축사를 부탁했는데 거절한 일도 있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 잡스가 죽기 직전에는 화해에 이른 듯하다. 잡스가 사망 직전 워즈니악에게 전화를 해서 Apple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잡스 사후에 워즈니악은 홈페이지에 잡스를 추모하는 사진을 올리기도 했고, 인터뷰에서 잡스를 추억하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와는 별개로 스티브 잡스가 공개적으로 숟가락 얹기를 하는 것은 엄격하게 반박하는 편이다. 일례로 위에 나온 "블루 박스" 에피소드는 잡스가 이 장치와 장치에 관련된 일화를 자신이 한 것으로 포장해서 인지도를 높였다. 실제론 장치는 워즈니악 혼자서 개발하고, 잡스는 판매만 한 것이었다. 애플 I 개발에 자신이 메모리 교체를 포함한, 다양한 제안을 해서 성공했다고 자찬하는 잡스에게 "잡스는 한 것이 없다"라고 비판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분명히 워즈니악은 잡스의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잡스가 워즈니악만이 아름다운 보드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하는 것처럼, 워즈니악 또한 부품을 구하는 일이나, 자본, 케이스 디자이너를 구하는 일, 올인원 패키지라는 발상, 무엇보다 퍼스널 컴퓨터를 파는 사업체를 구상한 일에 대해서 잡스의 공로를 분명히 인정하는 발언을 많이 해왔다.
워즈니악과 잡스의 관계가 틀어진 이유는 잡스가 숟가락 얹기를 시전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잡스가 Apple을 떠난 워즈니악에게 너무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새 제품 보다는 기존 수익을 중시하는 이사회와 충돌이 잦았던 잡스는 Apple의 통제권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으며, 워즈니악에게 Apple 주식을 팔지 말 것을 충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워즈니악이 Apple 주식을 다른 직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보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였다. 잡스는 통제권을 쉽게 포기하는 워즈니악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사이가 틀어진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워즈니악이 Apple을 떠나고 만능 리모컨을 만드는 작업 사업체를 구상하여 그 디자인을 프로그 디자인에 의뢰했는데, 프로그 디자인은 Apple에게만 디자인을 독점 제공하도록 계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안 스티브 잡스는 노발대발해서 워즈니악과 프로그 디자인에 법정 싸움까지 걸려했다. 스티브 잡스는 프로그 디자인과 Apple이 함께 구축한 Apple 브랜드 특유의 디자인이 다른 상품에 유출되고 적용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라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며 여기까지는 정당한 권리 주장이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필요이상으로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워즈니악을 너무 험하게 대한 것이다.
권리 주장만 하고 끝나면 될 것을, Apple 공동 창업자이자 친구인 워즈니악의 새 사업체를 망하게 하려는 듯 노골적으로 법정싸움을 걸고, 심지어 프로그 디자인에게 워즈니악을 위해 준비한 리모콘 디자인의 설계도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스티브 잡스는 여러 인터뷰에서 '정당한 권리주장'이라고 했지만, 아무리 객관적으로 봐도 사적인 감정이 많이 들어간 복수극. 이렇게 워즈니악에게 빅엿을 준 잡스는, Apple을 떠나 NeXT를 운영하는 동안, 열 받은 워즈니악의 인터뷰로 큰 엿을 먹으며 앙갚음 당하게 된다.
이외에 워즈니악과 잡스의 관계가 틀어졌던 것은, 컴퓨터 시스템에 대한 사상 차이도 한몫한다. 워즈니악은 오픈 시스템의 추종자였으며 전설적인 해커다. 워즈니악은 전문가나 하비스트,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 바닥부터 컴퓨터의 모든 것을 자유롭고 신나게 통제할 수 있으며 많은 포트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스티브 잡스는 우아하게 사람의 인지를 반영하도록 의도된 가이드라인을 벗어난 프로그램을 용납하지 않는 통제광이었다.
잡스는 컴퓨터는 사람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야 하며 적절한 추상화 단계가 있으며, 엔드 투 엔드를 통해 우아하고 명확한 가이드라인과 미리 만들어진 창의적인 도구위에서 일반인들도 쉽게 컴퓨터를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OSIX가 잘 정의된 OS 위에 개발되는 프로그램들은 명확한 가이드라인과 권한, 잘 정의된 API를 따라 만들므로 안정성이 높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잡스의 통제광적인 모습은 워즈니악과 애플2를 만들 때도 발현되어 애플2의 포트를 모뎀과 프린터 용도로 두개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로 하였다.
결론적으로 Apple II가 출시될 당시의 컴퓨터는 전문가와 하비스트들의 영역이었으며, Apple II의 소비자들은 해커 정신 아래 많은 선택권과 포트를 원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Appe II의 포트를 2개로 제약하고 통제하려는 잡스의 요구를 무시하고 포트를 확장 가능하게 만든 워즈니악의 선택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현시대에 기계가 동작하는 방식을 추상성으로 적절히 가려 사람의 직관을 따르도록 컴퓨터를 만들며, 모바일 API를 활용하여 주어진 도구 위에 응용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을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비난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 처럼, 사상의 차이이지 워즈니악이나 잡스 중 한명이 틀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쟁사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와 폴 앨런처럼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회사를 설립했다는 점은 비슷하나, 게이츠와 앨런은 둘 다 공학도 + 사업가적인 사람인 반면, 잡스와 워즈의 관계는 철저히 사업가적인 잡스와 철저히 공학도적인 워즈의 관계로 다소 다르다.
4. 한국에서의 인지도
2011년 3월에 한국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잡스가 iPod에서 iPhone으로 한국 대중 사이에서 이름을 알리고 온갖 성공신화로 치장되면서 특히 중장년층 사이에서는 성공한 기업가로서 인지도가 높지만, 워즈니악에 대한 인지도는 거의 전무한 수준이다.
2011년 11월 5일 방영된 무한도전 수학능력 특집에서 이 사람의 이름이 무한도전 vs 서울대 학생부 퀴즈 문제로 나왔는데, 대학생부가 유독 이 문제만은 굉장히 버벅거리면서 맞춰 그의 한국 내 인지도가 낮음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한국 내한 당시 |
이 방문 당시 자원봉사자로 참가해 그의 강연을 들은 제주도의 한 여고생이 영어로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는데, 놀랍게도 워즈니악은 정성스러운 장문의 답장을 보내왔고, 기사가 난적있다. 여고생은 너무 유명한 사람이라 답장은 기대도 안했는데 그의 자상한 인생 조언에 감격했다고 한다. #
파일:잡스 없는 워즈니악.jpg |
2023년 9월 12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방한하여 2023 제24회 세계지식포럼에 연사로 참여했다.
5. 기타
- Apple 컴퓨터를 개발하면서 특허도 몇 개 따 놨는데, 그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US Patent No. 4,136,359 - "Microcomputer for use with video display"로, 컴퓨터를 사용한 CRT상에서의 컬러 그래픽 컨트롤 방법에 대한 것이다. 컴퓨터에 영상 디스플레이 달린 것은 60년대 대형 컴퓨터들부터 있었다. <키보드와 모니터>는 생각보다 무척 이른 시기부터 정립된 형태인데, 뭐라해도 펀치카드로 입력하고 프린터로 출력받는 건 여러 가지로 많이 많이 암울했기에. Apple II와 같은 해 발매된 TRS-80이나 코모도어 PET 같은 물건도 모니터를 통해 영상을 출력한다. 스티브 워즈니악의 특허는 기존의 영상 출력 제어 방식을 개선하고, 무엇보다도 컬러 표현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 컬러 그래픽은 Apple II가 당대에 가장 앞서 나갔던 부분. 코모도어 PET 같은 경우, 수십 개의 범용 논리회로를 짜맞춰서 시스템을 구성해야 했던 애플 같은 영세 벤처와 달리 전용 그래픽 제어칩을 사용해 512x512라는 당시치고 굉장한 고해상도 그래픽을 실현했지만 색상은 흑백으로만 나타낼 수 있었다. 워즈니악이 이 발명으로 2000년에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National Inventors Hall of Fame)에도 오른 것을 생각하면 이 특허의 선진성을 알 수 있다.[20]
- 젊은 시절에 극히 뚱뚱한 비만 체형이었고, 잡스와는 달리 건강관리에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던 사람이다. 그러나 잡스는 56세라는 나이에 요절했음에도 아직 이 사람은 살아있어서 커넬 샌더스처럼 비만의 역설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다만 잡스는 결혼전까지는 극단적인 채식을 해서 영양공급이 매우 나빴었고, 암 투병 초기에도 제대로 된 치료가 아닌, 대체의학을 신봉하여 다소 어긋난 건강관리를 했었기에 단순 비교하기는 부적절하다.
- 굉장한 전자기기 얼리어답터라서 새로 나오는 휴대폰 종류는 Apple이고 안드로이드고 기타 등등이고 편식하지 않고 다 구매해서 가지고 논다.
- 워즈가 여행할 때 가지고 다니는 전자제품들은 이 링크를 가보면 알 수 있다. #
-
처음부터 큰 부자가 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여전히 백만장자긴 하지만 잡스가 Apple 복귀 후
iMac과
iPod이 히트를 쳐서 억만장자가 된 것에 비하면 소박한 수준이다.
리처드 스톨만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이상주의적이고 히피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 Apple에 있었을 당시 워즈 플랜이라고 직원들에게 자신의 주식을 공짜로 나눠주기까지 했다. 잡스는 이걸 좋지 않게 보았다고 한다. 워즈니악이 속고 있다는 말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작 주식을 받은 직원들에게 워즈니악은
호구 취급을 당했다. 심지어 주식을 받은 직원 중 한 명은 빈민이 그려진 불우이웃 돕기 포스터 밑에 '워즈니악의 미래 모습'이라며 낙서를 해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 US 페스티벌 음악회를 연다든가 하는 자선 활동을 했고 지금도 지역사회에 교육 관련으로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또한 클라우드 나인(CL 9)이라는 회사를 만들어서 만능 리모콘[21]을 만든다든가 하는 식으로 여러가지를 하면서 사업성보다는 새로운 기술 개발에 집중했다. 여기서 잡스와 악연이 또 있는데, 워즈니악은 만능 리모콘 디자인을 Apple 제품의 디자인을 담당하던 프로그 디자인사에 맡기려고 했는데, 잡스가 그걸 알고는 프로그 디자인 회사 사장에게 Anything you do for Woz, belongs to me!라는 협박을 가해서 워즈니악과 관련된 업무를 받지 못하게 했다. 언론은 잡스의 옹졸함을 신나게 까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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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인
1971년 AT&T사의 장거리 통화 네트워킹을 해킹해 장거리 전화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장치 "블루 박스"를 제조했고, 심지어는 그걸 가지고 로마
교황한테 공짜
장난전화를 거는 용자짓을 하기도 했다.[22]
교황에게 전화할 때 자신을 헨리 키신저로 소개했다고 한다. 사실 교황과 직접 통화는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더 웃긴 건 당시 전화를 받은 주교가 "여기 새벽이니 한 시간 뒤에 통화하라" 말해서 워즈니악이 한 시간 뒤에 다시 전화를 걸자, 전화를 받은 주교가 "너 키신저 아니지? 내가 조금 전에 키신저랑 통화를 했는데 뭔 소리여"라 응수한 것. 어째 이 블루박스 일화는 잡스의 에피소드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워즈니악의 에피소드가 맞다.
그런가 하면 학교 기숙사 TV 시청실에서 방해전파를 쏴서 시청을 방해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TV 안테나를 이상한 곳으로 옮기면 전파를 껐다고.[23]
또 전화를 걸면 유머를 말해주는 일종의 ARS 서비스인 다이얼조크를 서비스하기도 했는데, 그때 다이얼조크에다 폴란드인 유머를 신나게 하다가, 지역 폴란드인 협회에서 "우리 까지마셈!"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 협회에서 "우리 까지마셈!"라고 말한 사람에게 최고의 폴란드계 미국인 상을 주었다.[24]
- 유명한 말로 "창밖으로 내던지지 못하는 컴퓨터는 믿지 말라(Never trust a computer you can't throw out a window)."라는 말이 있다. #
- Apple Watch를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 #
- 워즈니악의 애플 사원증에는 사원번호 1이 찍혀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잡스가 자신이 2인 걸 못마땅하게 여겨서 0인 사원번호를 발급받았다는 일화도 있다.
6. 매체에서
- 교향시편 유레카 세븐의 등장인물 '워즈'의 모델이 되었다. 퓨쳐라마에선 3010년에 워즈니악 너드 아카데미(Wozniak Nerd Academy) 운영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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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실리콘밸리의 해적들>
2013년 <잡스>
2015년 < 스티브 잡스>
스티브 잡스의 전기 영화에는 반드시, 비중있는 조연으로 출연한다. 극중 묘사는 수염 덥수룩한 털보에, 체구는 조금 비만형이고, 컴퓨터에 심취한 공돌이 타입.
2015년에 나온 스티브 잡스에서는 반동인물로 그려졌는데, 워즈니악이 Apple에서 퇴사한 후 잡스의 넥스트 팀이 Apple에 합병되어 재기를 위해 최초의 iMac을 발표하는 시퀀스에서까지 Apple II팀에 대한 공로를 인정해달라고 잡스와 다투는 모습으로 나온다. 해당 영화는 전기를 바탕으로 했으나 내용은 엄연한 허구이다. 워즈니악은 그러한 일을 한 적이 없다. 물론 작중에서는 이 요구가 정당한데도 거부하는 잡스가 더 문제로 나온다.
- 신입사원 김철수에서 파트너인 잡스와 같이 등장한다 작중 모습은 저돌적인 잡스의 브레이크 역할을 담당하는 파트너로 가깝게 나온다.
[1]
통칭 '워즈(Woz)'.
[2]
2014년부터
시드니 공과대학교 교수로 있다.
[3]
다만 키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4]
동반자였던 스티브 잡스와는 달리 심하게 뚱뚱했는데 젊은 시절에는 당시 미국인 평균 체중보다 훨씬 더 나가는 90kg 이상이었다고 한다.
[5]
미디어가 그렇게 비춘 영향도 없지 않아 있다.
[6]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잡스보다 이 사람이 주역에 더 가깝기도 하다. 보통 이야기에서 실행하는 사람이 주역이고, 그를 꾸며주는 사람이 조연인 것을 생각해 보자면, 역할이 반대임에도 세간의 인식은 또 정반대라는 것도 아이러니다.
[7]
그렇다고 해서 스티브 잡스의 역할을 폄하할 것은 또 아닌 게, 어쨌든 전기상의 이야기로는 잡스가 없었다면, Apple도 없었던건 사실이고, 블루박스처럼 워즈니악 혼자 가지고 놀던 장난감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Apple 창업 이전의 워즈니악은 당시에도 대기업이었던
휴렛 팩커드를 잘 다니고 있었다.
[8]
보통 세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를 알테어 8800으로 보지만, 이는 전자계산기를 개인용 컴퓨터의 시초라 말하는 것과 다를바 없는 수준의 주장이기 때문에, 현시대 일반인 입장에서 보자면 아이러니한 개념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계산기는 컴퓨터로 분류되는데, 학문적으로 자동 연산이 가능한 모든 장치는 컴퓨터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대학의 컴퓨터공학부(과)의 전신이 전자계산기학과(부)인 곳이 대다수인 이유. 과거에는 사실상 둘을 같거나 대체 가능한 개념으로 봤다는 의미다. 연구실 전체를 사용해야 하나의 컴퓨팅 시스템이 완성되는 애니악 같은 물건도 결국 그 용도는 현 시대의 일반계산기와 다름이 없었음을 상기하자. 알테어 8800은 이 애니악을 소형화 하고, 가지고 놀기 편하게 만든 장치다. 지금의 대중이 생각하는
개인용 컴퓨터의 개념과는 100만광년 먼 것. 사실상 일반인이 활용 할 수 있는 개인용 컴퓨터의 시초는 워즈니악의 손에서 탄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9]
워즈니악이 없었더라도 언젠가는 개인용 PC가 세상에 나왔을 터이지만, 수 년 혹은 그 쓸모가 기업에 계속 치중하면 수 십년 뒤에 나왔을 수도 있다. 상류층의 정보독점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왔던 인류의 역사이다. 물론 민주화가 이루어진 마당에 그렇게까지 치달았을 가능성은 현저히 적겠지만, 과하게 비화해서 새로운 형태의 독재가 생겼을 수도 있었다. PC와 인터넷이 등장하기 이전에 정보전달 수단이라고 해봐야 전화와 신문, TV, 라디오가 전부였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예측 가능한 범주의 시나리오기도 하다. 전화를 제외한 나머지는 얼마든지 정부와 기업이 독점하는게 가능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스 사태를 생각해 보면, 인터넷도 아예 예외 범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응수단이 있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 들이기만 해야 하는 전자의 것들과는 결이 다르다.
[10]
"The Wiz"라는 1978년작
뮤지컬
영화 제목을 비튼 것. 여기서 "Wiz"는 바로
오즈의 마법사를 가리킨다. 즉 워즈니악의 별명은 "
마법사"였던 셈.
[11]
11살 때부터 친구들과 전자 장치를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6학년 때 아마추어 무선 자격증을 아버지와 함께 취득했다.
[12]
당시에도 워즈니악과 Apple의 결별은 새로 떠오르는 Macintosh 사업과 Apple II 사업부의 상대적인 홀대 때문이었다고 여겨졌지만, 실제로 워즈니악은 복귀 이후엔 Macintosh 개발에 참여했다. 그러나 Apple II 사업부에서 일하는 개발자들을 위해 잡스에게 직접 말을 해본적이 있었고, 당연히 이는 무시되었다고 한다. 이는 Apple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으로 이어졌다.
[13]
출처마다 말이 다른데 시기에 따라 재산 규모는 천만 달러~1억 달러 수준 사이로 추정된다. 대충 수백 억 원 정도에서 변동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충분히 부유하지만, 초거대 기업의 창업자 치고는 적은 편이 맞다.
[14]
사실 워즈니악이 초기 애플 주식만 계속 갖고있었어도 억만장자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동료 직원, 엔지니어들에게 나눠줬다.
[15]
신형
Mac Pro가 소개된 직후의 모습이다.
[16]
레딧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코너.
[17]
워즈의 아버지가 몇 차례 아들에게 잡스의 배신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워즈니악의 회고에 따르면, 잡스가 남을 무시하는 성격은 누구한테나 그런 거고 그래도 절대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진 않았다고 한다. 반대로 자신은 불만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18]
세계 최초의 벽돌깨기 게임
Breakout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게임기 설계상 칩이 130~170개가 들어가야 작동할 수 있었는데 아타리는 이를 70~100개로 만들길 원했다. 워즈니악은 낮에는 HP에서 일을 하면서 밤에는 개발에 몰두하여 3일간 밤을 지새워서 44개로 완성. 아타리의 경영진은 성과에 감명받아 잡스에게 예정보다 아주 많은 보수를 줬다. 그러나 워즈니악의 디자인이 워낙 압축됐고 복잡해서 아타리의 제조 설비에 적용이 어려워 아타리측에서 생산에 적합하게 수정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100개 가량의 칩이 필요했다.
[19]
워즈니악은 인터뷰에서 만약 잡스가 솔직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면 그 돈을 다 가지라고 했을 것이라며, 왜 자신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20]
Apple II 의 발매 후 3달 가량 지나서
아타리 2600이 출시되었고, 이는 커스텀 칩 하나를 포함해서 Apple II 와 비슷한 수준의 색 표현을 구현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연구되어 온 기기이므로 Apple II 와는 독립적으로 색상 출력을 구현한 것이다.
[21]
제품명은 CORE로, 한때 독일 지맨스에도 OEM으로 납품했던 전적이 있다
[22]
이 공짜 전화에 대한 일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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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이 일화는 잡스가 키노트에서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다. 키노트 도중 키노트를 진행 중인 컴퓨터가 먹통이 돼 화면이 안 넘어가는 대참사가 발생하자 문제를 고칠 동안 이 일화를 다소 코믹하게 소개한 것.
빌 게이츠도 윈도우 98 시연회 때
블루스크린이 뜨자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으로 위기를 넘긴 적이 있었다. 잡스가 키노트에서 소개하기 전에도, 1999년작 영화 '실리콘밸리의 해적들(Pirates of Silicon Valley)'에서 초반에 이 장난을 하는 워즈니악을 보여줬다.
[24]
참고로 워즈니악도 폴란드계이다. 워즈니악은 폴란드계 성 중에 10번째로 흔한 성 보즈니아크(Wozniak)의 변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