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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 | 해체된 사단 |
대한민국 이라크 평화·재건 사단 {{{#ffffff 大韓民國 伊拉克 平和·再建 師團}}} ROK Joint Support Group for the Iraq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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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에 평화를! 조국에 영광을! | ||||||
창설일 | 2004년 2월 23일 | |||||
해체일 | 2008년 12월 20일 | |||||
상징명칭 | 자이툰부대(Zaytun Division/Tîpa Zeytûnê) | |||||
소속 | 대한민국 육군 | |||||
상급부대 |
대한민국 육군본부 육군특수전사령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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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 | 사단 | |||||
역할 | 이라크의 평화 유지 및 재건 | |||||
초대 사단장 | 예) 대장 황의돈(육사 31기) | |||||
해체 전 사단장 | 예) 대장 박선우(육사 35기) | |||||
위치 | 이라크 쿠르드자치구 아르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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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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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3일] 우리는 이라크로 간다 - 자이툰 부대 병력교대 72시간 (2007) |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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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빌 재건 사업을 하고 있는 자이툰 부대 공병대대 장병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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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에서 저격 훈련 중인 자이툰 부대 소속 특전사 대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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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툰 병원에서 현지 주민을 치료하는 의무대대 군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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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툰 부대 방문객을 호위하는 헌병대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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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경찰을 교육하는 특전사 대원 |
대한민국 국회는 2003년 4월 2일 국군부대의 이라크 전쟁 파견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한민국 국군은 의료지원단인 제마부대와 건설지원단인 서희부대를 파병했으나, 미국 정부는 한국에 2003년 9월, 전쟁으로 파괴된 국가를 재건한다는 목적하에 더 많은 전력을 파병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요청을 받아들인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2월 23일에 평화 유지와 재건을 임무로 하는 자이툰 부대를 3,000여명 가량의 사단으로 창설하여 이라크 다국적군의 일원으로서 파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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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툰 부대 방문 당시 한 병사를 끌어안은 노무현 전 대통령[1] |
대한민국에 적대적인 아랍 저항단체에서는 이 부대를 이라크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며 2004년 6월 한국인 김선일이 유일신과 성전이라는 테러단체에 납치되어 피살되었음에도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이라크 철군을 거부했다. 한편으로 당시 미국 국방부 장관 도널드 럼즈펠드가 2004년 10월 10일 이 부대를 방문하여 격려하였고, 노무현 대통령도 12월 8일 이 부대를 전격 방문하였다. #, # 특히 노무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존재가 대한민국 외교에 큰 힘이 된다."는 입장을 내놨다.[2]
2007년 12월 28일, 국군부대의 이라크 파견 연장 및 임무종결계획 동의안에 따라 1년 더 파병이 연장되면서 사령부 부서인 민사처가 민사협조본부로, 재건지원대대에 경비대대가 통합되었다. 병력 감축에 의해 650여명으로 줄어들었으나, 독자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소장 계급의 지휘관의 지휘를 받았다. 초대 사단장은 정보 병과 출신의 육군소장 황의돈 장군이었다.
2008년 12월 20일 자이툰 부대는 쿠르드자치정부에 자이툰 병원 및 자이툰 교육대를 포함한 주둔지 부지와 운용하던 건설 장비 대부분 및 물자 등 3만6472개를 넘겨주고 쿠르드 자치구 아르빌에서 철수하였다.
3. 예하부대
초기에는 사단 사령부와 사령부 직할대, 육군 제1100건설 공병지원단 서희( 2003년 4월 15일 창설)와 제320의료지원단 제마( 2003년 4월 30일 창설), 그리고 각각 특전사 인원이 주축인 2개 민사(또는 재건지원) 대대와 각 특공대에서 차출된 대원들로 구성된 1개 경비대대, 그리고 장갑차 중대가 편성된 11민사 여단(111, 112 재건지원대대, 113경비대대)과 12민사여단(121, 122 재건지원대대, 123경비대대)으로 구성되었다. 사단 사령부의 경비는 해병대 지원병으로 구성된 1개 경비 중대가 맡았다. 해군은 의무 병과 와 UDT/SEAL 인원을 보냈다. 부대의 총 규모는 약 3,600여명이었다. 공군은 자이툰 부대와 독립된 제58항공수송단 다이만 부대를 편성, 자이툰 부대에 군수 및 병력을 공수하여 지원하였다.3.1. 사단직할대
3.2. 제11민사여단
- 제111재건지원대대(육군 특전사)
- 제112재건지원대대(육군 특전사)
- 제113경비대대(육군 특공대)
3.3. 제12민사여단
- 제121재건지원대대(육군 특전사)
- 제122재건지원대대(육군 특전사)
- 제123경비대대(육군 특공대)
3.4. 제1100건설공병지원단 서희
2003년 4월 15일 창설된 공병부대로 명칭은 993년, 고려-거란과의 국경 분쟁 시 탁월한 군사외교 능력을 발휘한 서희 장군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는 당시 북한의 핵 개발 재개 선언으로 위기가 고조되고 파견 결정 시 국민의 여론 대립 등 국내외의 복잡했던 과정을 반영한 것이다. 최초 부대원들은 570여명으로 당시 육군 제9군단 예하 제1118야전공병단[5]을 모체로 구성되었다.[6] 자이툰 부대 본대보다 먼저인 2003년 10월 20일 출국해 이라크 나시리야에 전개한 이후 탈릴 공항 내 애더 기지에 주둔지를 마련하고 이라크 전쟁으로 파괴된 정수장, 변전소, 상하수도 배수관 등 사회기반시설 복구 및 도로 12개소, 학교, 병원 등의 공공시설을 복구했다. 또한 도시 내에서 1만8천585발의 폭발물을 발견, 해체하고 동맹군 기지 내에 있던 폭발물 22만여 발을 처리하기도 했다.
2004년 7월, 자이툰 부대가 아르빌로 전개하기 전에 미리 이동한 다음, 자이툰 부대 주둔지 공사를 실시해 부지 평탄화, 경계 시설 설치, 숙영지 설치 등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이후 9월 자이툰 부대가 아르빌에 본격 전개하자 사단 예하 공병대대로 통합되었다.
2008년 철수 때 까지 아르빌 지역에 학교 68개, 보건소 16개, 심정이나 관개시설 87개, 치안시설 15개, 마을회관을 비롯한 공공시설 82개 등 모두 280여개의 시설물을 새로 짓는 등 아르빌 지역 사회기반시설 건설 및 자이툰 부대 주둔지 시설유지 보수 임무 등을 수행했다.
3.5. 제320의료지원단 제마
2003년 4월 30일 창설된 의무부대로, 부대명은 사람의 체질과 성격에 따라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조선 말기 한의학자 이제마의 이름에서 따왔다. 최초 100명의 의료진으로 편성된 제마부대는 공병부대인 서희부대와 같이 이라크 나시리야 애더 기지에 전개해 지역주민 4,073명과 미군 등 동맹군 2,600명을 진료하고, 관할지역을 매일 1차례씩 방역하는 노력이 성과를 거둬 이 부대가 설립한 야전병원인 '제마병원'이 나시리아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자이툰 부대가 본격 전개하자 제마부대도 아르빌로 합류해 사단 예하 의무대대로 통합된 이후 2004년 11월27일 아르빌 지역의 유일한 현대식 종합병원인 자이툰 병원을 개원했다. 이후 4년간 인술을 펼쳐 현지인 88,805명을 치료했다. 또 자이툰 부대 장병과 동맹군 등 외래환자 132,027명과 1,773명을 수술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하루 평균 진료 환자만도 130명을 넘었다. 또 격오지 마을을 대상으로 100여 차례나 순회 진료에 나서고 15만 여점에 이르는 의료물자와 장비를 현지 병원과 의료기관에 무상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3.6. 경비대대
특공대 대원들로 구성되었다. 제2작전사령부 예하 특공여단 201, 203, 205의 특공대대가 한 대대씩 돌아가며 각기 6개월간 이라크 자이툰사단의 경비대대로 임무수행을 하였다. 이 경비대대는 11민사여단, 12민사여단에 각각 1개 대대씩 존재하였고 육군 특전사의 재건지원대대와 함께 각 민사여단의 핵심적인 임무수행을 하는 중요부대였다. (113경비대대, 123경비대대)4. 지원부대
2대의 C-130 수송기를 사용하여 대한민국-필리핀-태국-인도를 경유하여 쿠웨이트 알리 알 살렘 공군기지까지 왕복하며 수송지원을 시행하였다. 2004년 8월 자이툰 부대 파병과 함께 창설되어 2008년 12월 19일 마지막 귀국 비행을 끝으로 4년 3개월간의 임무를 마치고 해산되었으며, 임무 기간동안 병력 4만3천여명과 군수물자 4천600여t을 수송했으며 지구 86바퀴에 해당하는 총 340만km를 비행했다.5. 출신 인물
5.1. 사단장
볼드체는 대장 진급이 된 사단장. |
역대 이라크 평화·재건 사단장 | |||||
역대 | 이름 | 계급 | 임관 | 비고 | 기타 |
초대 | 황의돈 | 예) 대장 | 육사 31기 | 前 육군참모총장,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 |
2대 | 정승조 | 예) 대장 | 육사 32기 | 前 합동참모의장,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제1야전군사령관 | |
3대 | 황중선 | 예) 중장 | 육사 32기 | 前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 |
4대 | 윤영범 | 예) 소장 | 육사 33기 | 前 청와대 국방비서관 | |
5대 | 박선우 | 예) 대장 | 육사 35기 | 前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
5.2. 장교/부사관
-
강점숙
의무대대 간호과장 역임.
-
김성진
11민사여단 참모장을 역임했다.
-
유욱상
12민사여단 연락장교를 역임했다.
-
조동연
참모장교로 근무하여 합참의장 표창장을 받았다.
- 이동규
여단 중대 지휘관으로 근무하여 국방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5.3. 병사
- 서한국(응원단장)
6. 기타
6.1. 근무환경
6.2. 파병현황
- 파병기간/파병부대현황: '04.9 ~ '08.12, 특전사 9개진 23개 대대 임무수행
- 1진: '04.8 ~ '05.6 / 특전사 1여단 5대대, 7여단 33대대, 13여단 71 · 72대대
- 2진: '05.2 ~ '05.12 / 특전사 3여단 13대대, 9여단 51대대, 특임단 21대대, 11여단 65대대
- 3진: '05.8 ~ '06.6 / 특전사 3여단 12대대, 7여단 32대대, 1여단 2대대, 9여단 55대대
- 4진: '06.2 ~ '06.12 / 특전사 11여단 63대대, 13여단 73대대, 11여단 61대대, 특임단 23대대
- 5진: '06.8 ~ '07.7 / 특전사 3여단 15대대, 1여단 3대대, 특임단 23대대
- 6진: '07.3 ~ '07.11 / 특전사 1여단 11대대
- 7진: '07.9 ~ '08.5 / 특전사 9여단 53대대
- 8진: '08.3 ~ '08.9 / 특전사 7여단 31대대
- 9진: '08.5 ~ '08.12 / 특전사 7여단 35대대
6.3. 사단가
사막의 모래폭풍 앞을 막아도
평화와 재건위해 일어선 우리
내일처럼 땀흘리며 아픔도 함께
쿠리 쿠리 넘버원 넘버원 꽃피는 우정
우리들은 자랑스런 대한의 건아
세계 평화 선봉에 선 자이툰 사단
숨 막히는 사막열기 온몸 태워도
평화와 재건 위해 오늘도 뛰네
사랑으로 실천하며 기쁨도 함께
쿠리 쿠리 넘버원 넘버원 희망의 등불
우리들은 자랑스런 대한의 건아
세계 평화 선봉에 선 자이툰 사단
평화와 재건위해 일어선 우리
내일처럼 땀흘리며 아픔도 함께
쿠리 쿠리 넘버원 넘버원 꽃피는 우정
우리들은 자랑스런 대한의 건아
세계 평화 선봉에 선 자이툰 사단
숨 막히는 사막열기 온몸 태워도
평화와 재건 위해 오늘도 뛰네
사랑으로 실천하며 기쁨도 함께
쿠리 쿠리 넘버원 넘버원 희망의 등불
우리들은 자랑스런 대한의 건아
세계 평화 선봉에 선 자이툰 사단
6.4. 신천지 작전
앞서 언급된 제1100건설공병지원단 서희부대와 제320의료지원단 제마부대가 이라크 북부 아르빌에 전개할 자이툰 사단의 주둔지 건설 등을 위해 2004년 7월 19일~21일 까지 당시 주둔지이던 나시리야 탈릴 공항 애더기지에서 바그다드를 경유해 아르빌 까지 약 700여㎞를 이동한 작전이며 신세계로 향한다는 의미에서 부여한 작전명이다.서희 · 제마부대 92명의 선발대 병력과 30여 대의 차량이 3개 제대로 나눠 이동할 때 스트라이커 장갑차 18대와 AH-64 아파치 헬기 등으로 무장한 미군이 한국군 이동로 전구간을 호위하고 이탈리아 등 동맹군들이 한국군 이동로 내 담당 작전 구역에서 이들을 컨보이했다. 이동 작전 준비기간에 김선일 피랍 사건이 발생해 작전이 1주일 연기되기도 했고 저항세력들의 활동이 뜸한 새벽에 이동 작전을 해야 해 피로도가 누적되기도 했으며, 이동 작전 중 키르쿠크를 벗어난 지 1~2시간 만에 폭탄 테러가 발생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피해 없이 성공적으로 아르빌에 도착했다. 이후 1주일 뒤 나머지 부대원들은 수송기 등 공중기동을 통해 아르빌에 전원 전개함으로써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 작전에는 최초로 차량위치 추적시스템(SVTC)을 활용해, 당시 경기도 광주시 특전교육단에 위치한 자이툰 사단사령부에서 작전 진행 상태를 실시간으로 확인해 효율적인 지휘 통제가 이뤄지기도 했다. 제3국에서 한·미 연합, 나아가 다국적군이 연합 RSOI를 전개한 것은 처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 작전에서의 귀중한 경험을 바탕으로 후술할 파발마 작전도 무사히 완수할 수 있었다.
6.5. 파발마 작전
2004년 9월 3일부터 20일까지 쿠웨이트 미군 기지인 캠프 버지니아에 대기 중이던 자이툰 사단 선발대 1제대와 후발대 2, 3제대가 작전지역인 이라크 북부 아르빌로 이동 전개한 작전. 작전명인 ‘파발마’는 고통받고 있는 이라크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자는 취지에서 이름 붙여진 것이다.자이툰 사단 1제대 400여 명과 이들이 탄 차량 150여 대가 2004년 9월 3일 캠프 버지니아를 먼저 출발해, 3박 4일 동안 남부 나시리야, 중부 바그다드, 사마라, 북부 티크리트를 거쳐 목적지 아르빌 까지 총 1,118㎞를 이동했다. 이동에 앞서 자이툰 부대는 사단장 이하 전 부대원들이 삭발을 감행해 작전 성공의 결의를 다졌고, 캠프 버지니아 등에서 차량 이동 훈련과 즉각 상황 조치 훈련 등을 수행해 작전에 앞서 철저한 준비를 했다.
이동로 전구간에 미군 AH-64 아파치 헬기, 무장 험비, UAV 등의 장비로 공중과 지상 엄호를 받았고 이외 동맹군의 전투기 까지 투입되어 삼엄한 호위 속에서 이동했다. 이동 과정에서 뜨거운 기온과 열악한 도로사정 등으로 수송 차량의 내연기관 고장, 브레이크 과열, 타이어 펑크 등을 겪었고 이동로 상의 각 지역마다 활동 중이던 저항세력이 RPG-7과 박격포 등으로 차량 행렬을 기습하자 이에 대해 즉각 조치 사격을 실시하거나 이동로 상에 IED가 매설되어 있는 것을 발견해 이동 중 전 차량이 긴급 정지하는 등 여러 돌발상황이 발생했지만 이를 잘 이겨내고 피해없이 무사히 아르빌에 도착했다. 이후 2, 3제대도 5~7일 간격으로 이상없이 C-130 수송기를 이용해 아르빌로 이동하면서 작전은 종료되었다.
파발마 작전은 창군 이래 대한민국 국군이 실시한 최장거리 최대규모 작전이다. 특히 이 작전 기간 동안 자이툰 부대의 이동 구간에서는 저항세력들의 적대행위가 40회 발생해 미군 등 동맹군 6명이 희생될 만큼 위험한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면 1,000㎞가 넘는 여정을 단 한 명의 인명피해 없이 완수한 것은 사실상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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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국군의 날 특집 - 자이툰부대 100일간의 기록 (2005) |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이후 국방부에서 보도자료를 통해 작전 성공사실을 브리핑하면서 엠바고가 풀리자 각 언론사에서 관련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또한 KBS에서 2005년 국군의 날 특집으로 방영한 다큐멘터리 '자이툰부대 100일간의 기록'을 통해 이 파발마 작전 과정이 생생하게 소개되기도 했다.
7. 사건사고
- 2004년 11월 16일, 자이툰 부대 내 코리아센터에서 페인트 작업 중이던 한국인 근로자 1명이 폭발한 페인트통에 맞아 두개골이 함몰되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 2004년 12월 노무현 대통령 방문[8] 겨우 10시간 전, 홍모 상병(당시 22세)이 경계근무 도중 오발사고로 같이 경계를 서던 쿠르드족 민병대의 헤멘 바카르를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헤멘 바카르는 복부에 총상을 입고 나흘 만에 사망했으며, 군은 유가족에게 1만 달러의 보상금과 배우자의 취업, 기타 지원을 해 주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석연치 않은 점이 많이 있는데, 처음 브리핑 때는 총기점검 중 오발사고가 발생했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경계근무 중 장난을 치다 사고가 발생했다고 말을 바꾸었다. 또한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긴 하나 사실은 현지인과 말다툼을 하던 도중 실랑이를 벌이다가 오발 사고가 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게다가 사고 발생 후 5개월이 지나서야 발표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이 일었다. 국방부의 주장에 따르면 헤멘 바카르는 홍 상병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고 하며, 유가족들도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탄원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홍 상병은 과실치사로 1년 6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은 후 항소 상태라고 하나, 그 이후의 내용은 언론상에 밝혀진 바 없다.
- 2005년 5월 29일 오후 11시(한국시간 30일 오전 4시)와 11시 5분에 걸쳐 자이툰 부대 주둔지 외곽에 포탄 4발이 떨어져, 자이툰 부대를 겨냥한 첫번째 공격을 받았다. 사건 이후 7월에 포탄 공격을 한 테러범이 이라크 당국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피격 당시 영내에도 포탄 2발이 떨어졌다는 사실이 뒤늦게 언론에 알려지기도 했다.
* 2005년도에 이라크에 파병한 일본 육상자위대원[9]들과 자이툰부대 육군 장병이 우정을 과시하며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 때문에 소동이 빚어졌다. 한글을 읽을 줄 모르는 육자대원들이, 자이툰 부대원이 든 "독도는 大韓民國 땅입니다."라는 팻말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인데 누가 보면 영락없이 육자대가 독도가 한국땅임을 인정하는 듯한 모양새가 되는 셈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이 사진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언론에도 언급되었으며 이 때문에 한일간 외교문제로 비화되기까지 했다. 이후 사진을 찍은 두 명의 육자대원은 본국으로 소환되어 조사받았는데 자신들은 한글을 몰라서 팻말의 내용이 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필사적으로 강변했다고 한다. 한편 한국군에서도 이런 문제는 외교 갈등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파병을 다녀온 부대원들에게 간부들이 이 소동을 전파하면서 이런 짓 하지 말라고 교육하기도 했다.
- 이라크 현지시간인 2006년 2월 15일 오후 12시 35분경 자이툰 부대원이 몰던 군용차량에 아르빌 지역 공무원이 치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 대한민국 시간으로 2007년 5월 19일 오후 6시 45분경(오후 1시45분 현지시간) 자이툰 부대 오모 육군 중위가 영내에 있는 자이툰병원 의무대 이발소에서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이 사건을 조사한 국방부 조사본부는 2007년 6월 4일 타살이 아닌 자살로 결론 내렸다.
8. 여담
- 자이툰 부대 소속 군인 중 일부는 이슬람에 입교하기도 했다.
- 만화가 김보현의 작품 ' One day in iraq'는 이 시절 자이툰 부대원들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일단 만화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작중 에피소드는 단 두개이며 절반 이상은 전역자들의 인터뷰와 쿠르드족에 대한 설명 등으로 채워져있다.
- 이뿐만 아니라 한국군 자체가 이때 파병으로 준비한다고 방탄복과 방탄모와 관련해서의 성능문제와 급하게 준비하느라 두돈반의 방탄화 그리고 작전차량에 대한 병력의 작전수행에서의 복지기능 제공이 미비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특히 방탄복과 방탄모는 MBC와의 보도 논쟁으로 매우 시끄러웠고 거기서 보여준 국방부의 아마추어급 대응태도는 군의 폐쇄성과 군의 개인장비 사업에 대한 문제점을 다시 한번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10] 게다가 차후에 자이툰 부대가 운영하는 기동차량인 두돈반 등의 작전차량 장비운영에서 전투수행도 안함에도 불구하고 작전효율성을 포함한 복지기능 미비로 작전효율이 심각하게 떨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등 전반적으로 한국군이 보병전투 관련 사항에 대해서 준비가 부족했는지 다시 한번 드러나기도 했다. 이라크에 파병되는 자이툰 부대를 위해 개발된 속칭 '자이툰 방탄복'의 수량도 부족해 구형 방탄복을 착용하고 작전에 나서기도 했다. #
- 당시 일반 병사로 의무복무를 하던 젊은이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파병 선발을 위해서는 부모 동의서도 받아야 했지만 선발되면 현지 부대 임무에 대한 교육을 받고 6개월간 파병을 갔다온 후 24박 25일의 장기 휴가와 1200만원을 넘는 파병 수당[11]을 받을 수 있어 치열한 경쟁률을 기록했다. 물론 현지에서는 빡빡한 인력과 더운 기후 환경으로 매우 힘든 복무환경이었다고 한다.
- 4진 1차의 작전이 종료즘에 12민사여단이 해체되었다. 당시 해체상황에서 민사여단의 장비 및 보급 물자는 터키를 통하여 해로로 수송이 되었고, 인력들은 전세기를 통해서 귀국하였다. 해체 당시에 일부 인원들은 육로를 통하여 터키로 물자 수송 및 호송이 고려 되었으나 해당 내용은 실행되지 않았다.
-
이들이 지어준 에르빌 공군 기지는
순교자 솔레이마니 작전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1]
노무현/여담 항목에 나와있는 내용으로 정확히는 병사가
노무현 대통령을 안은 채 '들어올린' 돌발상황을 포착한 사진이다.
[2]
당시는 북핵문제가 심각하게 흐르던 무렵인데 노무현 대통령은 대화를 통한 해결을,
조지 워커 부시 미국 대통령은 강경책을 구사해 한미간에 다소 갈등의 긴장이 흐르던 시기였다. 이후 노무현 10주기 추도식에 참여한
조지 워커 부시가 추도사에서 자이툰 부대 파병 건을 술회하면서 사의를 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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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지원병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바그다드 주이라크 한국대사관을 경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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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영상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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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해체. 일부 예하 부대는
제1115공병단에 흡수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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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제1117공병단,
제1101공병단,
제1113공병단 등의 공병부대 예하 대대 일부가 교대로 모체 부대로 선정되어 타 공병부대 파병 신청 병사들과 함께 파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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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툰 부대에 대한 병력이동 및 군수지원을 위해 공군에서
제5전술공수비행단 예하 제58항공수송을 창설하였으며, 다이만 부대는 제58항공수송단의 별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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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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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속 육자대원들은 모두
수염을 기르고 있는데, 일본 정부가 남성들 대부분이 수염을 기르는 현지 풍습을 감안해 현지인들과 친밀도를 높이기 위해 파병되는 남성 자위관들에게 수염을 기를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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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당시 방탄모 관련은 당시
이상호 기자 항목에 나와있듯 오히려 의혹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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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진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