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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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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군 건군기와 비교해서 읽어도 꽤 흥미롭다.
연도 경찰예비대 해상보안청 - 총계
1950년 75,000 10,000 - 85,000
연도 육상자위대 해상자위대 항공자위대 총계
1954년 130,000 6,000 ? ?
1961년 120,000 - 43,600[1] ?
1975년 155,000 39,000 42,000 236,000
1980년 155,000 41,000 44,000 240,000
1985년 155,000 44,000 44,000 243,000
1990년 156,200 46,400 46,400 249,000
1995년 151,200 43,700 44,600 239,500
2000년 148,500 42,600 44,200 235,300
2010년 이후 159,816[2] 45,517[3] 47,097[4] 약 25만명


1. 개요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과는 부흥의 과정도 많이 달랐다. 그러한 이유로 독일군과 달리 일본군의 재창설은 굉장히 민감한 문제라 점령국인 미국은 일본에 군대를 다시 만들게 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독일군과는 달리 일본군은 직접 미 본토( 하와이)를 침략했었으니까.

게다가 당시 미국의 관심은 유럽에 집중되었고 동북아시아는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단적인 예가 1950년 1월에 미국이 선언한 애치슨 선언( 트루먼 독트린). 한국과 대만 등이 방위선에서 빠져서 김일성이 '어 그럼 우리가 저놈 패도 되겠네?'라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애치슨 선언은 한국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보는 의견인 남침유도설의 기반이 되었지만 말도 안 된다는 결론이 나왔다.[5] 세간에 퍼진 일본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재무장을 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며 자세한 내용은 뒤에 서술되어 있다. 다만 한국전쟁이 조직행정 차원에서 자위대의 창설을 가속화시킨 것은 사실이고 북한의 미사일이나 핵 실험이 방위청에서 방위성으로 변하는데 도움을 주긴 했다.

2. 항복 직전

패전 당시 일본 육군은 154개 사단과 136개 여단, 일본 해군은 20개 부대였다. 총 인원은 6,983,000명에 달했으며 2,576,000명이 일본 열도에 주둔했다.

일본은 항복을 하며 경비력 확보를 핑계로 255,000명의 경찰과 227,000명의 헌병부대를 보존하려 했지만 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 이를 거부했다. 이도 안 되자 육군 아이덴티티를 남겨 놓으려고 근위사단 하나를 재편하여 황궁호위경비대로 두려고 했는데 이 꼼수도 안 통했다. 그 때문에 전후 일본 황거 등의 경호는 일본 경찰에서 전담한다.

항복 당시 일본군이 무장해제되면서 5년후 한국전쟁 발발 시점이었던 1950년 6월 시점엔 일본 본토에는 미군 87000명과 국가경찰[6] 3만 명, 자치단체 경찰 93,935명이 전부였다.

3. 1945-1950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본의 비군사화(demilitarization, 비무장화)와 민주화(democratization)를 천명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4년에 미 국무부는 전후계획위원회를 설치하여 일본 점령 후의 정책을 구상했고 종전후 1945년 12월말에 일본군은 거의 해산이 되었다. 1945년 9월 15일에 대본영, 10월 15일에 군령부가 폐쇄되었고 12월 1일엔 육군성과 해군성이 폐지되었다. 전범과 이들과 밀접 또는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해산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구 체제 단체 해산과 추방 등이 이뤄졌는데 육해군의 정규 장교 직업군인이 모두 포함되었다. 다만 군이 해산된 상태였기 때문에 장교나 부사관을 추방할 필요는 없었고 공직에 있던 군인이나 전쟁에 적극 협조한 일반인을 추방했다. 그 규모는 1천명 수준이었다. 11월엔 군인연금까지 폐지되면서 구 일본군 출신들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특히 더글러스 맥아더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총리대신은 일본국 헌법 제9조에 전쟁 포기, 전력 비보유 항목을 넣었다. 군이 재편될 가능성을 없앴는데 보수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일본공산당까지 자위 전쟁을 포기하는 건 지나치다고 반론할 정도였다. 요시다 시게루는 당시 평화헌법을 참의원에서 해당 의원들에 반론하며 해당 헌법을 옹호했는데 정작 1950년대에 이르자 9조의 해석을 바꾸는 식으로 일본을 재무장시켰다. 당시 그의 발언을 보면 이중적인 행동 탓에 스스로도 오락가락하는 게 많았다. 당시 전쟁에 대한 염증이 심했던 일본 민중은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1946년 7월에 국공내전이 다시 일어나고 장제스 중국국민당이 패색이 짙어지면서 중화민국을 반공 기지로 삼으려던 미국의 계획은 차질을 빚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육군성과 해군성을 해체하긴 했지만 일본군 패잔병의 귀환 업무와 기록 보존 등의 이유로 구 일본군의 육군성과 해군성을 각각 제1복원성, 제2복원성[7]으로 개칭해 유지하였다. 그리고 항복 후에도 일본 근해에 남겨진 해상봉쇄용 기뢰 등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군 해군의 소해(掃海)부대는 1만 명 규모의 인원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 때문에 제2복원성(뒤의 후생성 제2복원국)의 경우엔 구군인 추방에서 제외되었다. 소해부대는 1948년 미국의 해안경비대를 본떠 해상보안청으로 설치되었고 밀무역이나 밀입국 등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중국이나 소련, 대만, 한국에서 귀환하는 구 일본군 인원과 히키아게샤의 수송도 맡았다. 수송 문제 등으로 구 해군의 함정 일부를 개조하여 유지하였다. 일본 해군의 군복을 그대로 입었는데 계급장은 떼냈고 부류 기뢰를 총으로 쏴 제거해야 했기 때문에 화기를 상비했다. 어쨌든 이런 일부 잔존 세력이 있긴 했지만 1947년까지 미국의 비군사화 의지는 강했다. 제1복원성과 제2복원성은 후생성 내의 제1복원국과 제2복원국으로 바뀌었다.

일본 재무장의 계획은 대중적 통념과 달리 이미 한국전쟁 전부터 정책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1948년 미 육군장관 로얄은 반공의 방벽을 위해 일본의 경제적 자립을 주장하며 정책 수정을 예고했다. 배상금을 줄이고 공직에서 구 일본제국의 관료나 군인들을 쫓아내는 일이 중단됐다. 레드 퍼지가 이뤄지고 노동정책은 보수적으로 바뀌었다. 1948년에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G2(정보참모부)의 책임자였던 윌로비 소장(Major General)[8]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 근무하던 구일본군 참모장교들에게 재군비 계획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했으며 미 해군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구일본해군 대장 등에게 해군재건계획을 검토하도록 했다.

1949년 10월에 국공내전이 끝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됐다. 1950년 1월에는 애치슨 라인이 선언되고 일본은 전략적으로 중요해졌고 한반도는 제외되었다. 당시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동아시아의 상황에 굉장히 무지했고 소련과 동유럽만 생각했다.[9]

4. 1950-1954

1950년 한반도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터지자 전쟁 수행을 하기 위해 일본에 주둔했던 주일미군의 상당수는 한반도로 파견된다. 당시 일본에 주둔했던 주일미군은 7사단(홋카이도, 도호쿠), 1사단(도쿄, 간토), 25사단(간사이, 주부), 24사단(규슈) 등 4개 사단으로 미 제8군을 구성했다. 한반도와 가장 가까이 있던 24사단이 먼저 7월 3일에 건너가고 7월 18일까지 25사단과 1사단도 넘어갔다. 7사단은 대기했다. 이로 발생할 치안공백을 막기 위해 일본인들로 구성된 경찰예비대의 창설이 고려됐다.

1950년 7월 8일 맥아더는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총리에게 7만 5천명 규모의 경찰예비대 창설을 요구했고 소해부대로 임무를 맡던 해상보안청의 인원도 8천명을 늘리라고 요청했다. 그 해 8월 10일에 경찰예비대령이 공포되고 8월 23일에 1차로 7천명이 입대하였다. 6.25 전쟁에서 전황이 불리해지고 인천상륙작전이 검토되면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홋카이도에 주둔 중이던 미 육군 제7사단마저 한반도로 파견된다. 1950년 9월 10일까지 홋카이도에 1만명의 경찰예비대원이 파견되었으며 이틀 동안 모집소에서 입대수속을 마친 뒤 열차 내에서 사격 훈련까지 받았다고 한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알 수 있는 일.

무장은 미군이 쓰던 기존 총기/장비들을 인수받아 M1개런드와 카빈총 외에 30, 50구경 기관총(M1919, M2), 5인치 로켓 발사기, 60mm 박격포 등이었고 추가로 M-24 경전차, 105mm, 155mm 곡사포 등도 미 본토에서 넘어올 계획이었다. 사실상 군대의 무장이었지만 일본 정부는 재군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8월 10일에 정령260호, 경찰예비대령이 공포, 시행되었다. 이는 의회를 거친 입법이 아니다. 당시 일본 국가경찰[10]에 소속시키지 않고 총리부의 기관으로 소속시켰다. 그리고 설립이 워낙에 급박해 정식 법률이 아닌 정령(한국으로 치면 명령)에 의한 것이라 뒤에 나온 자위대의 위헌시비[11]를 계속 일으킨 원인이기도 했다.
제1조 이 정령은 일본국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고, 공공의 복지를 보장하는데 필요한 한도 내에서 국가지방 경찰 및 자치체 경찰의 경찰력을 보완하기 위하여 경찰예비대를 설치하고, 그 조직 등에 관하여 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법적 면에선 경찰인데 정작 소집 후에는 미군 캠프[12]의 주둔지로 가서 군대식 훈련을 받았다. 8월 13일에 전국의 경찰서에 창구를 설치했고 15일에 응모를 마감 17일에 전국 183개 시험장에서 시험 개시, 8월 23일에 입교를 시작하여 10월 12일날 입교 완료시킨단 계획이었다. 모병 포스터에는 날개 치는 비둘기 옆에 "평화 일본은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라고 썼다. 아래는 응모 조건.[13]
경찰예비대원은 특별직 공무원.
대원은 모두 일정한 숙소에 무료 합숙하며 훈련과 근무에 임한다.
수당은 월 5천엔, 2년 근무, 퇴직수당 6만엔.
경력이나 근무 성적에 따라 간부 채용.
피복/식사는 지급.
연령은 20세에서 35세 남성.
신장은 156cm, 나안 시력 0.3 이상.

당시 경찰관의 월급이 3,370엔이었다. 영화가 60엔, 우동이 20엔인 시대였다. 응모기간이 3일임에도 불구하고 382,003명이 응모했다. 경쟁률은 약 5.1:1 수준이었다. 학력은 고등 소학교(현재의 중학교) 졸업자가 절반 수준이었고 농업 종사자가 40% 수준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일본군 병이나 부사관으로 참전한 경험이 있었다.[14] 장교는 당시에는 추방령 때문에 바로 들어오지는 못 했다. 계급은 전원이 2등경사로 군대로 치면 이등병이었다. 당시 일본군 장교는 추방령 때문에 경찰예비대에 들어오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모든 인원이 그냥 이등병 계급을 일괄적으로 부여받았다. 인원 가운데 대학 졸업자나 분대장등 지휘자를 맡은 경력이 있는 자는 간부 적임자로 선발해 에다지마(江田島)로 보냈다. 일본해군병학교가 위치한 곳이다. 수료자가 올 때까진 중대장, 소대장도 없이 부대를 편성하고 훈련했고 간부 적임자로 뽑힌 사람도 일단 계급은 2등경사(이등병)라 완장만 대대장, 중대장이었다. 그때문에 실질적인 지휘관은 미군 고문관이었다. 무기 관리부터 훈련 스케줄까지 미군이 장악했기 때문에 입소자 중엔 미군 용병이 될 수 없다고 떠나거나 경찰이 아니라 사실상 군대라며 떠나기도 했다.

1950년 10월이 되자 7만 5천명의 경찰예비대가 충원된다. 간부 요원은 경찰 출신으로 충원되었고 구 일본군 출신은 추방령에 따라 배제되었다.[15] 육상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의 탄생 과정은 한국군과 비슷한데 장비나 교육 등에서 미군의 지휘를 받았다. 1950년 12월엔 법제적인 처리가 이뤄져 총대총감(總隊總監) 밑에 전국을 네 곳의 관구대(管區隊)로 구분하였다. 이는 보병 4개 사단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패전 5년 만에 일본에서 육상병력이 탄생한 것이었다. 그 전까지 몇 개월 동안은 연대장이나 부대장 급의 지휘관이 공백인 상태였다. 대원들에겐 카빈소총이 지급됐는데 미국인 고문관이 대여하는 형태였다. 사실 이들의 초기 임무는 군사 목적이라기 보단 주로 폭동 진압 등에 중점을 뒀다. 요시다 시게루는 군이 아니라는 걸 피력했는데 재군비를 하면 군이 6.25 전쟁에 파병될 수도 있다는 소문이 일본에서 돌았다.

구 일본군 출신들이 이 소문을 놓칠리가 없었다. 후생성 소속의 복원국과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역사과에 남아있던 구 일본군 출신들은 경찰예비대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지만 요시다 시게루가 군부를 혐오했고[16] 당시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돼 일본인 사이에선 반전기운이 강했다. 하지만 미군에서 일본인으로 간부의 권한이 넘어가고 조직이 성립되자 경험 문제로 구군인의 재등용이 시작됐다. 이는 한국에서 친일파가 다시 공직으로 복귀하는 과정과 비슷했다. 1950년 11월 30일부로 구군인 추방이 해제되었다. 처음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에 육해군학교에 입교한 자들로 일본 육사58기(1942년 입교)와 해군병학교 74기(1941년 입교) 이후가 해당되었다. 즉 사관생도와 소위만 허락한 것이다. 1950년 말부터 도조 히데키의 비서 출신으로 연합군 최고사령부 역사과에 근무하던 핫토리 다쿠시로 대령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월러비 소장의 지시로 400명의 육군 장교 명부를 준비했는데 그의 계획은 요시다 시게루의 반대와 맥아더의 결단에 의해 일단은 불채용됐으나 1951년에는 뒤집히게 된다. 1951년 8월부턴 그 이전에 입교한 자들도 허용되었다. 좌관급까지 허용됐는데 6.25 전쟁 당시 경험 부족인 지휘관들이 삽질을 하고 구 군인 출신들이 리더십에서 더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맥아더가 해임되고 리지웨이가 6차에 걸쳐 63,805명의 추방령을 해제했다. 문민관료들도 내부부국[17]을 장악하면서 현장은 그냥 군인 출신들에게 맡기잔 얘기가 나왔다.

1951년 6월 1일부로 육사 58기, 해병 74기와 그들의 동기급으로 간부 충원이 이뤄졌다. 이들은 패전 당시에 소위였다. 이들이 일본 자위대 간부후보생 1기들이다. 이어 10월 1일엔 좌관(영관)급도 중령까지 허락되었다. 1952년에는 대령 11명도 특별 추천 형태로 입대하였다.

1950년에 일본 해상보안청은 소해정 21척으로 구성된 특별소해대를 한반도로 파견했다. 일본 해군 대좌 출신인 타무라 큐조(田村久三)가 지휘관이었다. 그는 뒤에 해상보안청 보안감을 지냈는데 이는 오늘날의 해상자위대 막료장에 해당한다. 1950년 10월 17일엔 영흥만에서 MS14호정이 기뢰 제거 작업을 하던 중 배가 침몰하여 1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하기도 했다.

해상경비대는 경찰예비대와 달리 초반부터 대놓고 일본 해군 출신들이 영입되었다. 아니 영입된 수준이 아니라 일본 해군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1952년부터는 미해군의 함정을 대여받아 소해부대 말고 다른 해군 업무도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해외에서 활동한 것도 이때부터가 최초인데, 공교롭게도 조선인민군 인천 앞바다에 부설한 기뢰를 제거하기 위해 구 일본해군 소속 소해정들이 대한민국 영해에서 미해군에 소속되어서 활동한 것이 시작. 말만 경비대지 군대의 기능과 비슷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1951년 8월에는 미군 소련에 대여했던 18척의 PF(초계구축함)와 50척의 LSSL(대형 상륙 지원정)이 반납됐는데 요코스카에 이들 전함이 오자 미국 정부는 일본에 이를 제공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 후 통칭 Y위원회[18]가 설치됐다. 다만 이들은 해군 군벌 소속보다는 친미파나 친영파에 가까웠다. 일본해군병학교 미국이랑 전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적성어인 영어를 가르칠 정도로 따로 놀던 인간들이 있었다.[19]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선 금지했는데도. 특히 해군 시설은 항만과 위치하기 때문에 대규모 주둔지가 필요한 경찰예비대와 달리 물밑에서 일이 찬찬히 진행됐다. 1952년에 해상경비대는 6,038명의 인원으로 해상보안청에서 분리된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강화 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 협정)이 체결됐는데 일본과 제일 대규모 전쟁을 벌였던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이 빠졌고 한국은 들어가지도 못 했다. 이 조약 중에 5조 C항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보장했다. 포츠담 선언 때의 완전 무장해제와는 상반됐다. 6조 A항에선 점령군의 철수를 포함했는데 미군은 협정을 통해 주둔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주일미군의 탄생배경이다. 1952년 4월 28일에 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은 국제사회에 복귀했고, 주권을 회복했다.

1952년에 예비대 본부와 해상보안청 등을 통솔하는 보안청이 설립되었고 경찰예비대는 보안대로, 해상경비대는 경비대로 개편되어 보안청의 관리를 받았다. 이들을 지휘하는 제1막료감부(현재의 육상막료감부)와 제2막료감부(현재의 해상막료감부)를 설치했다. 이는 한국군의 육군본부와 해군본부에 해당한다. 1952년 5월 10일에 제출된 보안청법은 보안대(육상자위대) 병력을 11만, 경비대(해상자위대) 병력을 7,590명으로 증원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당시에 홋카이도에 주둔했던 미 1기병사단도 철수 예정이라 전차, 유도탄 등의 장비가 도입될 예정이었다. 예산은 1,700억엔을 요구했지만 바로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요시다 총리는 보안청장관을 맡았는데 1952년 10월 15일 메이지신궁 경기장에서 열린 보안대 설립기념 열병식에 등청해서 "새로운 국군의 토대가 되라고 했다"가 여론에게 털렸다. 보안대는 11만명 규모였다. 발족을 앞두고 1952년 7월에 일본군 대좌(대령)급 11명이 입대했다. 다만 일본군 장성급에서 흡수된 인원은 없다. 해상자위대의 전신인 경비대는 1953년에 116억엔의 선박건조비를 책정했고 육상과 비교할 때 구 해군 출신을 대거 받아들였다.

물론 구 일본군 출신의 장교가 인원 절대 다수였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강제로 징집당한 병이나 부사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인적으로 연결고리가 될 만큼 인원이 있었다는 것이고 보안대보단 경비대에서 더 심했다. 경비대의 경우 98% 이상이 일본 해군 출신이었다. 보안청 내에는 보안대학교, 보안연수소, 기술연구소 등 교육 및 연구기관이 발족했는데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경험했던 경찰예비대 간부나 요시다 총리는 교육과정의 통합을 요구했다. 물론 구해군 출신들은 별도 분리를 요구했다.그러나 요시다 총리가 강력하게 이 통합 방침을 밀면서 1953년에 통합사관학교인 방위대학교가 세워졌다.

일본의 경제단체인 게이단롄(경단련, 한국의 전경련에 해당)에선 구 일본군 장성들을 싱크탱크 연구원으로 받아들여 재군비계획안을 마련했다. 1953년 2월에 '방위력정비에 관한 시안'이란 계획안을 냈는데 육상 30만, 해상 7만, 항공 13만 규모로 지금의 자위대의 두 배 규모였고 예산이 6년간 2조 9천억엔 규모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묵살됐다.[20] 보안청도 자체적인 계획안을 세웠는데 다 물거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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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쇼와 29년)에 미국과 일본은 상호방위원조조약을 체결했다. 7월 1일부로 보안청은 방위청으로 개칭됐다. 보안대는 육상자위대로 경비대는 해상자위대로 바뀌었다. 방위청이 생기면서 통합막료회의가 세워졌다. 이는 미군의 합참을 본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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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해부터 욱일기 군기로 본격적으로 부활했다. 1952년부터 암암리에 쓰고는 있었지만.
항공자위대의 경우에 1952년에 보안대에서 항공학교를 설치하고 교육을 하면서 시작됐고 경비대에서도 항공부대를 설치했다. 1954년 1월에 항공준비실이 세워졌고 1954년 3월에 방위2법이 제출되면서 항공자위대는 생겨났다. 1945년 이후 9년 간의 항공전력 공백이 있던 탓에 요원이 부족하여 보안대, 경비대 말고 민간의 일본군 군경력자에서도 선발했다.

이로서 경찰예비대, 해상경비대 → 보안대, 경비대(항공학교, 항공부대) → 자위대의 단계를 거쳐 일본은 군사력을 재건 하고 재무장을 하게 되었다.

위의 내용은 1995년에 발행된 국방군사연구소의 '일본자위대 변천과정과 현황'이란 서적을 참고한 것이다. 거기에 1998년 육군사관학교 박재권 교수(1953. 6. 28-, 육사 31기)가 번역한 마에다 데츠오의 '일본군대 자위대'(시사일어사)의 서적 내용을 보충하였다. 박재권 교수는 2010년에 한국일어일문학회장을 맡기도 했다. 현재는 육사 교수진에 없는 걸로 볼 때 전역한 것으로 보인다.

5. 1954-1960

해상자위대는 제국 해군이 쓰던 욱일기를 그대로 사용하는 등 구 일본 해군의 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는 해상자위대의 창설 멤버가 구일본 해군 그대로였기 때문으로, 육군 멤버의 경우 육상자위대 창설때 경찰 간부의 비율과 비례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다른 셈이다. 물론 기존의 해상보안청 소속 인력을 충원하기도 했다.

그래봤자 육상자위대한국전쟁 이후로는 구 일본육군 출신을 다수 입대시켜서 결국 경찰출신을 능가하게 되었다. 일단 군대 비슷한 조직을 꾸려나가기에는 경찰출신 간부들은 완전히 다른 조직운영에 대해서 무능함을 노출했다. 최고위 장성급에선 내무군벌과 구 일본 육군 출신들이 대결했다.

이렇게 전후 처리과정에서 일본 해군이 육군과 판이하게 다른 대접을 받은 것은 강력한 전력[21]의 해군을 유지해 왔던 일본 해군의 노하우를 보존, 활용하려는 미군 측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실제로도 해상자위대는 사실상 구 일본 해군의 계승성이 굉장히 명확하다. 당장 구 일본 해군의 기지였던 구레시등의 부대의 경우 창립연도를 구 일본 해군으로 잡고있다. 해군선옥론이 판칠만 하다

1954년 이후론 게이단렌이나 미국 국방부를 중심으로 방위력 증강안이 나왔다. 미군은 한국과 일본, 대만의 주둔 규모를 축소하길 원했고 그 반대급부로 한국군과 자위대, 대만군의 무장 강화를 원했다. 게이단렌과 방위생산위원회는 육군 15개 사단 30만명, 해군 29만t 7만명, 항공병력 3,750대 13만명이라는 엄청난 규모를 제시했지만 무시됐고 미국의 월터 로버트슨 국방차관보는 육군 10개 사단 32만5천명, 해군 프리깃 18척 등 1만3천5백명, 공군 작전기 800대 3만명 수준을 내세웠다. 일본 정부는 육상 10개사단 18만명, 해상 호위함 74척 등 3만1천명, 공군 항공기 518대 등 3만1800명 수준을 제안했다. 일본 정부의 안인 이케다 시안이 대략적인 증강안이 되었다. 이런 증강에는 1952년 26만이었던 주일미군이 1960년에 4만6천명 수준까지 감축됐다는 배경이 있다.

이후부터 자위대는 헌법 9조의 해석을 두고 점점 확대됐는데 '필요 최소 한도의 무력을 유지하는 것은 헌법 9조가 금지하는 바가 아니다'라는 논리를 주로 사용했다. 필요 최소 한도의 수준은 시대 상황이나 기술 진전 등에 의해 계속 변화되는 요소이므로 자위대의 증강에 구속 조건을 사실상 제거한 셈이다. 다만 선제공격 등의 무기나 교리를 채택하지는 못 했다. 6.25 전쟁이란 특수가 끝나면서 일본의 군수 업계는 자위대의 국산화에 사활을 걸었다.

6. 1960년대

1960년대 일본이 경제호황을 누리면서 제2차 방위력정비계획(1962-1966년)과 제2차 방위력정비계획(1967-1971년)에 가면 자위대의 예산은 거듭 늘어나게 된다. 1956년에 일본 정부의 경제백서는 이미 일본이 전후가 아니라고 선언한 상태였다. 안보투쟁과 같은 대규모 사태를 거치기도 했지만 조직은 계속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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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안보투쟁 당시에 육상자위대는 치안 출동을 준비하기도 했다. 4월부터 치안 출동 훈련이 실시되고 동부방면총감부에서 2만명이 대기 태세에 들어갔다. 도쿄 나카타초에 10만명의 시위대가 몰렸을 때 육상자위대는 긴장하고 계속 대기했다. 6월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일할 예정이었다. 6월 15일에 경찰기동대에게 도쿄대학 대학생인 감바 미치코(樺美智子, 1937-1960)가 압사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그날 밤에 아카기 방위청 장관을 호출했다. 그의 이복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대장성 장관은 적극적으로 자위대를 출동시켜 상황을 진압하라고 했지만 아카기는 반대했다. 만일 그때 출동했다면 자위대 탱크와 데모대가 충돌했고 일본의 분위기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됐을 것이다. 아카기는 만일 자위대가 출동하여 민간인 사망자가 나오면 일본 전역에서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단 이유와 동족 상잔을 일으킬 순 없단 이유로 반대하였다. 결국 일본 정부는 아이젠하워의 방일 연기를 요청하였고 6월 23일 신안보조약이 발효되자 기시 노부스케는 퇴임하였고 이케다 하야토 통산장관이 총리가 되었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이 체결되면서 미일 안보 협력의 체계는 한미일 3국의 군사협력으로 변화되었다. 자위대는 북방의 소련 외에 발발할 가능성이 있는 제2차 한국전쟁도 고려하게 되었다. 1963년도 통합 방위 도상 연구는 한국에서 전쟁 발발시에 주일미군을 따라 자위대가 출동한다는 시나리오이다. 미츠야(三矢) 연구라 불리기도 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미일안보조약의 3개국이 화살 셋처럼 활동한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제복군인들이 작성한 보고서이다. 문제는 이 연구가 한일수교가 복원되기도 전에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극비리에 진행되었는데 1965년에 사토 에이사쿠 내각을 비판하려던 사회당 오카다 하루오 의원이 문서를 입수하여 폭로하였다.

루머 만으로 따진다면 베트남전에 전투요원을 파견하기까지 했다고 하지만, 확인된 사항은 아니다. Cat Shit One 고바야시 모토후미는 이게 루머라고 말하면서도 스스로는 믿는 듯 하다. 고바야시 모토후미 이 인간이 극우혐한인 거 숨기고 있다가 커밍아웃 했던 거 생각해 보면 보나마나 그냥 전형적인 일본 극우들의 뇌피셜로 가득한 일본 대단해 망상이겠지만(...) ( #)

7. 1970년대

1970년대에 이르자 베트남 전쟁도 끝나가고 냉전은 데탕트에 이른다. 특히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것이 일본에 충격을 주었다. 1972년에 일본은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대륙의 중국과 수교한다.[22] 데탕트 직전 1970년부터 1971년까지 방위청 장관은 나카소네 야스히로로 그는 4차 방위력 정비계획의 예산을 5조8천억엔으로 잡았다. 이런 확대에 아시아 각국은 반발한다. 1970년엔 미시마 유키오가 동부 방면대 총감부에 들어와 할복하는 미시마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 때문에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활하려한다고 비판을 받았다. 당시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가 곳곳에 살아있던 탓에 1971년에 유럽을 방문한 쇼와는 봉변을 당했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인해 자위대가 지금까지 눈가리고 아웅 식으로 규모를 확대한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일본에서 떠올랐고 문민통제를 중시하는 미키 다케오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976년에 이르면 방위력을 GNP 1% 수준으로 한다는 방위 방침이 결정되었다. 이는 일단 말로는 그랬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군축에 해당됐고 제복군인이 아닌 민간에 의한 방위방침이었는데 메이지 유신 이래로 일본에서 방위 방침이나 상비군 문제 등은 항상 제복군인의 몫이었다. 미키는 자위대의 조직까지 손볼 생각이었으나 해당 방침을 정한 1976년 10월부터 한 달도 못 되어 퇴진 당했고 후쿠다 다케오가 신규 총리가 되었다. 후쿠다는 매파였고 그나마 미키와 뜻을 같이 할 가능성이 있던 사회당 등의 야당은 자위대 위헌론이란 논리에 빠져 있어 협조하지 않았다. 거기다 제복군인들이 미키의 방침에 적극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후쿠다 내각에 새로 방위청 장관이 된 가네마루 신은 자위대 장군들을 적극 두둔했다. 이때 구리스 히로오미 통합막료장이 초법규 발언을 일으켰고 그 발언으로 사퇴하지만 문민통제에 저항하는데 성공했다. 구리스는 대령 시절에 핵 보유를 주장하는 논문을 쓰기도 했고 통합막료장에 취임하면서 통합막료회의의장이 내각이 아닌 천황에 의해 임명되는 대신과 같은 지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제복군인의 최선임자가 현행 법규를 무시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에 강한 매파였던 가네마루 당시 방위청 장관조차 구리스에게 사임해달라며 안 하면 경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일 이후로도 방위청장이나 방위성 장관은 민간에서 임명돼 문민통제가 잘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들은 단기간에 임명되는 바지사장에 가깝고 실질적인 자위대의 대강은 장군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게 된다. 결국 군축은 실패로 돌아가고 미일안보협력 등의 이유도 군축의 실패에 작용했다.

8. 1980년대

1980년대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로널드 레이건의 조합으로 미일관계가 돈독해졌다. 자위대 내의 매파들은 방위 정책 수정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전수방위나 비핵 3원칙에도 비판이 쏟아졌다. 10여년 전 그가 세운 방위계획은 미키 총리에 의해 백지화됐지만하지만 미키의 계획도 자위대 장성들의 반발로 백지화됐다 1982년에 총리가 되면서 다시 일을 밀어붙일 기회가 생긴 것이다. 나카소네의 취임 후 첫 해외 방문은 대한민국이었는데 노래방에서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어깨동무를 하며 노래를 불렀다. 당시 한일관계 역시 상당히 긴밀한 편이었다. 1983년에는 자위대의 목적을 일본 방위가 아닌 미국의 북서태평양 해양 핵 전력을 지원하는 전초 기지라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 열도가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잘 나타나 있다. 로널드 레이건은 이 발언에 대단히 만족했다. 자위대에 가상 적은 없으며 전수방위에 임한다는 자위대의 견해는 대규모 미일연합훈련으로 사실상 말뿐이었다. 또한 GNP의 1%로 방위예산을 제한한다는 원칙도 삭제되었다. 1987년부터 새로운 방침이 적용되었고 그해 방위예산은 3조5174억엔으로 GNP의 1.004% 수준이었다. 다만 GNP의 증대폭이 더 큰 탓에 실제로 결산에서 1%를 넘지는 않았고 그 이후로도 넘은 적은 없다.

9. 1990년대

90년대 들어 동구권 공산 정권들의 붕괴와 걸프전에 거액의 전비 부담을 한 것을 계기로 국제 협력 강화를 구실로 대외적 활동을 확대하고 있다. 걸프전 당시 거액의 전비 부담을 했지만 정작 병력은 참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제적으로 좋지않은 대접을 받아서 본격적인 군으로의 전환을 모색했다는 말이 있다[23]. 이후 소해활동을 위해 페르시아 만에 해상자위대 소해대군이 파견되었다.

1990년대부터 방위대학교 출신들이 최고위 장관급 장교를 차지하게 되었다.

10. 2000년대

2000년대 들어 미군이 대테러전에 집중하기 위해 태평양 지역의 방위력을 줄이고 그 공백을 동맹국과 연합으로 해결하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기에 극동지역에서 자위대의 역할도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공중급유기 도입이 좋은 예. 현재 자위대는 소말리아 지부티에 해외 파병기지를 두고 있다.

다만 예산 자체는 2000년대에 별다른 증액이 없었다.

11. 2010년대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벌어지자 구조와 피해복구에 많은 자위관들이 투입됐다. #

'자위대의 전수방위 원칙'을 뒤엎는 변화가 시작됐다. 2014년 아베 신조 내각 센카쿠 열도 문제를 중심으로 자위대의 역할변화를 위한 여론조성과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2014년 4월에는 일본 정부는 지금껏 일제 무기 수출의 족쇄 역할을 하던 ' 무기수출3원칙'을 '방위 장비 3원칙'으로 전면 개정하여 족쇄를 풀어버렸다. 이 족쇄가 풀리자마자 미쓰비시는 미국 레이시온사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용 센서를 수출하고, 호주와는 잠수함 개발 연구 협정을 체결하는 등 발빠르게 활동영역을 넓혀나갔다.

2014년 5월, 아베 내각이 각의 해석을 변경함에 따라[24] 사실상 전수방위 원칙을 폐기하고,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 보유를 천명했다. # 한국 정부는 '우리 측 허가 없이는 한반도에 마음대로 못 들어온다'고 해명했지만, 동맹국이 공격받을 경우가 포함된 것이 의미심장하다. 남북한 간 본격적인 충돌이 일어나고 미군이 말려들 경우, 미군 요청으로 자위대가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도 가능해지기 때문. #

드디어 2014년 7월 1일[25], 아베 내각이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헌법해석을 변경하기로 결정해 사실상 일본은 전쟁가능국가가 되었으며, 자위대도 헌법 9조와 전수방위 원칙이 사실상 폐기되어 활동상의 제약이 크게 축소되었다. 이로써 자위대의 태생적 한계는 사실상 사라졌다. #

2014년 10월 8일, 미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도쿄에서 ‘방위협력 소(小)위원회’를 개최, 자위대가 미군을 지원하는 작전 범위를 한반도와 전 세계로 확대하는 내용의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중간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제 자위대는 미군을 지원한다는 전제조건이 붙긴 했지만, 전 세계를 무대로 그 무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

2016년 12월 12일부터 남수단 평화유지군에서 활동하는 육상자위대가 안보관련법을 토대로 무기를 사용하는 '출동경호'와 '숙영지 공동방위'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됐다. # 또,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도 자위대에 무기를 사용해 미국 등 타국 함정을 보호하는 임무를 부여하기로 했다. #

2022년에 우주부대 창설키로 했다. # 도쿄도의 후츄시의 항공자위대 기지에 설치될 예정이라고 한다. JAXA와 연계해 SSA시스템을 운용하며 레이더로 얻은 우주쓰레기와 관련된 정보는 미군과도 공유한다.

사이버 공격을 한 상대국이 확인된 경우 해당국의 물리적 공격이 없어도 자위대가 역공격할 수 있게 하기로 했다 #

2019년부터 5년간 27조 엔(약 267조 원)의 방위비를 투입하기로 했다. #

12. 2020년대

2020년 6월에 중동에서 자국 선박이 이란 혁명수비대와 같은 외국 조직의 공격을 받으면 해상자위대가 무기를 사용해 보호할 수 있다는 새로운 견해를 정리했다. #

자국 인공위성 작동을 전자파로 방해하는 것을 감시할 '제2우주작전대'를 야마구치현에 설치한다. #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계기로 방위 장비 수출을 허용하는 규칙을 정한 '방위 장비 이전 3원칙'의 운용지침을 개정하기로 했다. #

2022년 3월 17일. 방위성이 사이버 공격에 대응하는 부대를 재편성해 기능을 강화한 '자위대 사이버방위대'를 설치했다. 교도통신 보도에 따르면 사이버방위대 인원은 약 540명 규모로 ▲ 사이버 공격 대처 ▲ 사이버 전문 인력 양성 ▲ 실전적 훈련 지원 ▲ 정보통신 네트워크를 관리·운영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

6월 11일. 미군·자위대·호주군이 함께 활동할 때 자위대가 미국과 호주 군함 등을 방어하는 '무기 등 방호'를 실시하기로 했다. #

육상·해상·항공자위대의 부대 운용을 일원적으로 담당하는 통합사령부와 작전을 지휘하는 통합사령관을 신설한다. # 2025년 3월 창설 예정.

12월 16일. 5년 뒤인 2027년도 방위 관련 예산을 국내총생산(GDP)의 2%로 늘리는 내용을 담아 '국가안전보장전략'과 '국가방위전략'(옛 방위계획의 대강), '방위력정비계획'(옛 중기방위력정비계획) 3대 안보 문서를 개정했다. #[26]

2023년 9월. 방위력 강화를 위해 공공인프라를 확충할 후보지로 33개 공항과 항만을 선정했다. #

13. 군종별 역사

위의 항목은 포괄적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각 군종별로 나눠서 내용을 기술한다.

13.1. 육상자위대

13.1.1. 경찰예비대

경찰예비대(警察予備隊, National Police Reser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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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예비대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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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예비대 제1연대.

1950년 8월 10일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포츠담 선언에 의거 설치되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주일미군의 상당수가 한반도로 움직이면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홋카이도 전력에 상당수 공백이 생기면서 일본의 재무장을 준비하던 미국은 군사력 재건에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러면서 경찰예비대를 설치하였다. 경찰이란 이름 때문에 헷갈릴 수도 있지만 실제 일본 경찰과 법적 근거가 다르며 운용도 별도로 이뤄졌다. 다만 초기의 목표는 일반적인 군보다는 폭동 진압 등 준군사조직으로서 경찰에 가까웠다. 이는 미군정이 이끌던 초기의 남조선국방경비대[27]와도 비슷한 목표였다. 최고지휘관은 총리였으며 총대총감부와 그 아래 네 곳의 관구대를 뒀으며 정원은 7만 5천명 규모였다. 인원 모집이 상당히 급박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홋카이도로 가는 열차 내에서 화기학 교육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50년 8월 10일 경찰예비대령으로 인원 소집이 이뤄졌고 8월 13일부터 10월 12일까지 74,158명이 입대했다. 대한민국 육군이 2013년 기준으로 1년 동안 양성교육하는 인원이 20만명 수준인 걸 생각하면 경찰예비대는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7만이 넘는 인원을 단 두 달만에 선발한 것이다. 이들은 2등경사(일병)로 임용되었다. 곧 이어 간부의 임명이 계획됐다. 핫토리 타쿠시로(服部 卓四郎, 1901-1960) 일본군 대령이 참모장으로 임명될 예정이었고 그는 400명 상당의 일본군 간부 출신으로 경찰예비대 간부 명단을 작성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일본군 간부 출신이 들어오는데 부정적이었다. 그때문에 해당 계획안은 취소되고 대신 민간에서 일반공모 800명과 각 관공서에서 200명을 차출하여 간부로 선임한다. 이 과정에 일본 경찰들이 들어온다. 최초의 중앙본부장[28], 즉 현재의 육상막료장에 해당하는 직위에 오른 이는 } 하야시 케이조(林敬三) 경찰감(대장[29])로 도쿄대학을 나온 관료 출신이었다. 여담으로 핫토리의 임용이 실패하면서 구 일본군 출신들은 상당히 말이 많았고 일부는 당시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의 암살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처음 설립 당시에는 치안유지가 주 목표였지만 1950년 11월에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미국은 경찰예비대의 성격을 방위로 전환하게 한다. 1951년에 더글러스 맥아더는 경찰예비대의 무장 강화를 요구하여 미군 4개 사단 규모로 만들 것을 요구했다. 맥아더가 경질되는 통에 일은 꼬이지만 1951년부터 경찰예비대는 치안유지 수준이 아닌 방위병력으로 무장 강화가 점차 이뤄진다. 1951년에는 경전차와 곡사포가 부대에 배치되었다. 1950년 창설 당시만 해도 소총도 미군 고문관에게 대여하는 형태인 것에 비하면 빠르게 재무장이 이뤄진 것이다.

특히 초기에 실시됐던 일본군 출신의 추방이 해제됐는데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부 최고사령관인 매튜 리지웨이 한국군의 장교 가운데 정치적인 이유로 고급장교가 된 이들은 실제 전쟁에서 엉망진창인 리더십을 보인데 비해 일본군이나 국부군 등에서 복무했던 한국군 장교의 경우엔 탁월했다는 점을 들어 일본군 재등용을 검토했다. 1952년 7월에 가면 일본군 좌관(영관)급까지 자위대 입대가 허락된다.

오늘날 자위대에 있는 준위 원사, 이병에 해당하는 계급이 없다. 자위대에 준장은 여전히 없지만. 편성을 보면 현재 방면대가 다섯 곳인데 비해 관구대는 네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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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1946년 조선경비대의 사진인데 경찰예비대와 복장이 비슷하다. 미군정이나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설립과정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13.1.2. 보안대


보안대(保安隊, National Safety Forces)
1952년 10월 15일 경찰예비대를 개편하여 만들어진다. 총대총감부는 제1막료감부로 변화되고 총대총감은 제1막료장이라 불리게 된다. 당시 보안청(현재의 방위성)이 신설되면서 변화했다. 경찰예비대령과 달리 보안청법에선 경찰의 힘을 보충하는 부대란 부분을 삭제함으로 경찰조직이 아닌 국방조직임을 명시하였다. 즉 사실상 군이란 점을 이때부터 눈 가리고 아웅했단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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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대 창설 열병식. 조직 등에 있어선 경찰예비대와 큰 변화는 없지만 용어 등에서 약간 변동이 생긴다. 1954년에 육상자위대가 된다.

딱히 계급이나 편성에서 경찰예비대 시절과는 거의 바뀐 게 없다.

13.1.3. 육상자위대

해당 항목을 참고할 것.

13.2. 해상자위대

13.2.1. 해상보안청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군 해군은 해체되나 소해부대가 일부 남는다. 이들은 해상보안청으로 개칭되어 밀입국 적발과 근처 순시, 기뢰 제거 등의 임무를 맡는다. 다만 이들 모두가 해상자위대의 전신이라 보기는 어려운데 이는 해상보안청이 현재에도 존재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1952년 보안청이 신설되면서 경찰예비대와 해상 병력 일부를 통합하면서 해상보안청에서 일부 기능이 떨어져나갔고 이들이 해상자위대의 전신인 해상경비대가 되었다.

1945년 일본 해군성은 제2복원성으로 개칭되어 군인들의 귀향업무와 일본군 관련 자료를 보존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1946년에는 복원성 내에 제2복원국이 되었는데 일본군 해군 출신들이 득실득실했다. 1947년에 미국은 일본 해상전력의 재정비를 검토하게 된다. 다만 당시에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등을 위해 극동위원회의 조사 등이 있어 순시선의 규모나 속도 등에서 제약을 받았다.

13.2.2. 해상경비대

해상경비대(海上警備隊, Coastal Safety Force)
1952년 4월 26일부터 7월 31일까지 해상보안청 내에 있던 부대로 해상보안예비대라 하기도 했다. 해상보안청 내에 잠시 있긴 했지만 해상보안청의 최고지휘관인 해상보안감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규모는 6천명 수준으로 장교의 99%와 부사관의 98% 이상이 일본군 해군 출신이었다.

13.2.3. 경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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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8월 1일부터 1954년 6월 30일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해상 전력으로 해상경비대의 후신이자 해상자위대의 전신이다. 보안청으로 넘어온 해상경비대의 총감은 제2막료장으로 불리게 된다. 경비대가 되면서 보안청(방위성)으로 넘어오는데 규모가 급격히 커진다. 지역별로 관할하는 각 지방대가 생겼다.

13.2.4. 해상자위대

항목을 참고할 것.

13.3. 항공자위대

항공자위대는 1954년에 방위2법에 의해 생겼으며 전신이 따로 없다. 일본군내에도 육군항공대(陸軍飛行戦隊)나 해군항공대(海軍航空隊)가 존재했을 뿐 별도 군종으로 공군은 없었다.

일본군이 패망한 뒤로 일본군 육군 소속의 육군 항공대 일본군 해군 소속의 해군 항공대의 파일럿들은 민간 항공사에 들어가거나 다른 직종을 찾았다. 그러던 것이 경찰예비대가 세워지고 1951년에 미 육군에서 연락기로 L형 항공기를 불하함에 따라 경찰예비대 내에 하마마쓰(浜松)항공학교가 설립된다. 제1회 L조종학생은 일본군 육군, 해군 항공대 출신의 파일럿이었다. 그후 1952년에 경찰예비대가 보안대로 개편되면서 보안대항공학교가 생겼고 첫 교장은 일본군 육군 중령 출신이었다. 주로 구 육군 출신들이 배치되었고 파일럿 경험자들의 재훈련은 생긴지 얼마 안 된 미 공군이 담당했다. 교육은 대한민국 건군기 군사영어학교처럼 영어로 이뤄졌고 영어 성적이 중요했기 때문에 영어가 안 되는 파일럿들은 떨어졌다.

1953년에 대일군사고문단(対日軍事顧問団)이 설치되고 미국의 군사 원조가 본격화된다. 같은 해 가을에 보안청 내에 제도조사위원회별실이 생겨 항공전력을 준비한다. 방위력정비계획 7차 초안에 항공자위대의 편성 등이 들어가고 다음 해인 1954년도 예산이 반영된다.

1954년 2월에 항공준비실이 세워지고 3월부터 자위관을 모집했다. 공식적으로 1954년 7월 1일에 항공자위대가 생긴다. T-34 멘토 훈련기 56대, T-6 훈련기 63대, T-33A 훈련기 16대 등이었다. 1955년도 기준으로 예산은 102억엔으로 육상자위대의 550억엔의 1/5 수준이었다.[30]
[1] 당시 기사 [2] 2011년 말일 기준 [3] 2012년 말일 기준 [4] 2012년 3월 기준 [5] 애치슨 선언 당시 왜 한국과 대만이 빠졌냐는 것에 대한 추측으로 가장 설득력이 높은게 그냥 별 생각 없이 긋다 보니 어쩌다가 한국과 대만이 빠졌다는 것이다. [6] 1954년에 폐지되었다. [7] 여기서 복원은 무언가를 회복한다는 의미의 復元이 아니라 전시 체제에 있던 군인을 평시 체제로 돌린다는 뜻의 復員이다. [8] 태평양 전쟁 개전부터 맥아더를 보좌해온 고급 참모로 바탄 갱의 좌장격 인물, 후일 맥아더가 파면되고 그도 주군을 따라(?) 군에서 전역했다. [9] 근데 이건 소련도 마찬가지. 실제로 한국전쟁에 적극 참전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10] 일본 경찰은 현재 많이 지방자치경찰화 되었으나 1952년까지는 국가경찰의 형태였다. [11] 물론 자위대는 염연히 헌법 해석과 이에 근거한 법률로 법적근거를 인정받은 일본의 공식적인 국가조직이다. [12] 기존의 주일 미군이 한국으로 대거 배치되면서 고문관과 소수 병력들 일부만 남은 텅 빈 기지였다. [13] 번역은 육사 박재권 교수의 역서 '일본군대 자위대'(마에다 데츠오, 1998, 시사일어사)에 따랐다. [14] 특히 부사관 출신이 많았다. [15] 이 시기에 생겨난 말이 바로 내무군벌이다. [16] 철저히 도조 히데키 때문이었다. 요시다는 1945년에 종전 협상 관련 문제로 헌병대가 40일 동안 구금한 적도 있다. [17] 현재의 방위성. [18] 정식 명칭은 해상경비대 창설 준비위원회이다. [19] 이를 해군 특유의 코스모폴리턴 기질에서 보는 관점도 있다. [20] 1952년에 보안청 예산이 고작 553억엔이었다. 그에 9~10배에 달하는 예산을 요구한 셈. [21] 일본 해군은 2차세계대전 당시 스펙상으로는 세계 3위의 전력으로 총배수량은 4위와 5위였던 프랑스 해군과 이탈리아 해군을 합쳐도 약간 더 많았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문제점 투성이였지만. 자세한 내용은 일본군참고 [22] 한국은 1992년, 미국은 교류는 하지만 정식으론 1980년에 한다. [23] 한국은 비전투 병력 일부가 참여해서 저런 일은 없었다...고 하기는 뭣하고, 생색만 낸다는 눈치를 받았다는게 중론. 물론 전투병력이 파병된다고 했다면 이라크전 파병문제를 능가하는 국론갈등 문제가 벌어졌을 확률이 있다. 당시 운동권의 기세가 장난 아니었기 때문. [24] 구체적으로 1.동맹국이 공격받을 경우, 2.일본의 안전에 큰 영향을 주는 경우, 3.공격받은 국가로부터 명시적 지원 요청이 있는 경우, 4.정부의 종합적 판단, 5.국회의 승인, 6.제3국 영해통과 시 당사국 허가를 얻는 경우 등 6가지를 제시했다. [25] 날짜를 의도적으로 맞춘 것인데 자위대는 1954년 7월 1일에 창설되었다. 60주년에 맞춘 것. [26] 개정내용에는 반격능력보유가 명시되어있어 사실상 재무장이라 봐도된다. [27] 1946년에 미군정이 설치했으며 같은 해 조선경비대로 개칭했다가 1948년에는 대한민국 육군이 된다. [28] 그해 12월 29일에 총대총감으로 명칭이 바뀐다. [29] 본래 경찰감이나 보안감, 육장, 해장, 공장은 중장 계급이지만 막료장은 대장으로 본다. [30] 2010년대에 이르면 육자대의 70%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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