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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22:30:34

잉베이 말름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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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베이 말름스틴
Yngwie J. Malmsteen
파일:맘스틴옹.jpg
<colbgcolor=#000><colcolor=#fff> 본명 라르스 요한 윙베 란네르베크
Lars Johan Yngve Lannerbäck
출생 1963년 6월 30일 ([age(1963-06-30)]세)
스웨덴 쇠데르만란드 스톡홀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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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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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소속 스틸러 (1981 - 1984)
알카트래즈 (1983 - 1987)
부모 아버지 렌나르트 란네르베크
어머니 리그모르 말름스텐
배우자 에리카 노르베리 (1991 - 1992)
앰버 돈 랜딘 (1993 - 1998)
에이프릴 말름스틴 (1999 - )
신체 190cm[1], 75kg
혈통 스웨덴계 미국인
종교 루터교회
활동 기간 1978년 – 현재
사용 악기 기타, 보컬[2]
장르 네오 클래시컬 메탈, 헤비 메탈, 하드 록
레이블 폴리도르, 폴리그램, 엘렉트라, 유니버설, 맨스콧
이명/별명 잉위 맘스틴, 김기동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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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guitarontheedge.co.uk/malmsteen_1.jpg|width=100%]]
파일:김기동.jpg
▲ 전성기 시절의 모습 김기동으로 유명한 짤

1. 개요2. 유년 시절3. 음악 활동4. 디스코그래피5. 비판
5.1. 반론
5.1.1. 싸구려 속주광?5.1.2. 오만?5.1.3. 독선?
6. 사용 장비
6.1. 기타
6.1.1. 일렉트릭 기타6.1.2. 어쿠스틱 기타
6.2. 이펙터6.3. 앰프6.4. 그 외
7. 여담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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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은 하지 않는다. 나는 연주만 한다.[3]

1. 개요

스웨덴 스톡홀름 출신의 헤비메탈 기타리스트. 1963년 6월 30일 출생. 하드록/헤비메탈 분야에서 기타 연주의 판도를 완전히 바꿀만한 혁명을 가져왔다고 평가받는 기타리스트는 몇 안되는데, 지미 헨드릭스 에디 밴 헤일런잉베이 말름스틴이 그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실력의 척도는 천상계 원탑 레벨중 하나로 꼽힐 정도..

풀네임 영어식으로 잉베이 조핸 말름스틴(Yngwie Johann Malmsteen, /ˈɪŋveɪ ˈmɑːlmstiːn/).[4] 스웨덴어식으로 '라르스 요한 윙베 란네르베크(Lars Johan Yngve Lannerbäck)'. '잉베이(Yngwie)'라는 이름은 스웨덴어 이름 윙베(Yngve)를 영어식으로 바꾼 이름이고, '말름스틴(Malmsteen)'이라는 성씨는 모친의 성씨였던 말름스텐(Malmsten)에서 따왔다.[5] 그런데 국내에는 영어 발음을 대강 추측해서 옮긴 잉위 맘스틴이라는 잘못된 표기로 오랜 기간 통용되어 왔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는 이 통용 표기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원발음에 가까운 잉베이 말름스틴이라는 표기로 정착되고 있다.[6][7] 과거 그가 방한 기념으로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했을 때, 본인에게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면 되냐고 물어봤더니 직접 '잉베이'라고 불러달라고 답했다.[8]

헤비메탈 기타계에 클래식적인 연주법과 작곡 방법을 대거 도입하고, 스윕 피킹 및 온갖 고난도 속주 테크닉을 선보여 헤비메탈 기타 연주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9] 피킹의 터치감과 정확성/안정감이 지구상에서 최고 라인 중 한 명으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그 정도로 잉베이의 연주 난이도는 매우 어렵고 힘들다. 기본 음계가 클래식 선율인데다가 빠른 음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은 물론 모든 음을 매끄럽고 부드럽게 표현하기에 엄두조차 안나는 것. 최상급 레벨을 지향한다면 거쳐야 할 관문 중 하나.

오버드라이브나 디스토션으로 가득 메꿔놓고 갈기는 기초가 안 잡힌 플레이어들에게는 그의 한 구절도 흉내를 못낼 정도... 이것을 테스트 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과거 레슨 영상 "Yngwie Malmsteen REH Video Hot Licks"에 첫 부분부터 따라해보면 알 수 있다. 코드와 스트로크, 메이저 스케일 배우고 실용음악학원 졸업하는 보통의 취미생들은 호기롭게 독학하려다 지혼자만 할 수 있는거 가르쳐 준다고 약파는거 아닌가 라고 할정도의 레벨이다.


대표곡 중 하나로 꼽히는 Far Beyond The Sun 연주 영상.

또한 바로크 메탈[10]( 클래식적 선율에 속주 기타 연주를 중요시하는 장르)을 헤비메탈계의 주요 장르로 부각시키고 발전시킨 이 분야의 시조격인 인물이다. 또한 현대 속주 기타의 계보를 올라가면 이 사람 없이는 대화가 성립이 안 될 정도. 그러한 공적 때문에 80년대 뿐만 아니라 록 음악/ 헤비메탈 장르에서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있는 기타리스트 중 하나로 추앙받고 전세계적으로 그를 숭배하는 엄청난 과 추종 기타리스트들이 있다. 하지만 또 그 때문에 그런 팬들만큼 안티와 까가 많은 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 물론 이건 후에 거론될 본인의 성격이 자초한 것도 있다.

80년대 그의 엄청난 속주 연주는 당시엔 그야말로 얼이 빠질 정도로 충격적이라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켜 그를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 기타의 신으로 추종하는 수많은 들을 만들었다. 특히 당시 하드 록의 테크닉과 속도감에 굶주려있던 일본과 그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았었던 대한민국 메탈헤드 사이에서는 서양에 비교해도 넘사벽일 수준으로 그를 추앙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기타리스트들의 테크닉이 극도로 상향평준화된 현재에 와서는 기타 잘 친다는 사람이라 쓰고 기창이라고 읽는다이면 잉베이 말름스틴 곡을 어느정도 흉내내는게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이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속주였다. 솔로 데뷔 앨범 ' Rising Force'가 나왔을 때 리치 블랙모어( Highway Star의 그 사람이!)는 ''어떤 할일없는 놈이 레코드를 빨리 돌리는 장난을 한줄 알았다"는 소감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고 실제로 당시의 현역 기타리스트들 중에는 '이건 불가능한 연주다. 페이크다.'라고 단언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록 음악/ 헤비메탈 기타리스트들은 얼마나 빨리 속주를 할 수 있는가로 실력을 판정받기도 할 정도였다. 마치 1970년대 기타리스트들에게 Highway Star가 처음 발표 되었을 때 만큼의 충격을 1984년에 다시 일으킨 것. 토니 매칼파인, 크리스 임펠리테리, 비니 무어, 마이클 안젤로 바티오, 폴 길버트[11] 등등의 내로라하는 기타리스트들 조차 이때는 잉베이 앞에선 명함도 못내밀 수준이었다. 속주를 딱히 내세우지 않아도 웬만한 기타리스트면 속주를 다 할 수 있지만, 이 중에서도 잉베이는 속주에 고유한 개성을 넣었다는 점이 독창적. 특히 일본의 어설픈 들은 그를 게리 무어, 에디 밴 헤일런과 함께 80년대 세계 3대 기타리스트로 얘기하기도 하고[12], 더 오버한 멍청이들은 지미 헨드릭스, 에디 밴 헤일런, 잉베이 말름스틴을 세계 3대 기타리스트라고 얘기하기도 했다.[13] 오죽하면 일본 본토에선 잉베이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王者(2번 문단의 왕자. 프린스가 아니다!)라고 일컬을 정도. 확실히 일본에서 인기는 언터쳐블이다. 아시아권에서나 좋아한다는 들의 인식과는 달리 북미, 남미, 유럽 등지에서도 수많은 들과 추종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그와 맞먹거나 능가하는 인기와 영향력을 가진 기타리스트들도 여럿 있기에 기타리스트 인기 투표 순위나 위대한 기타리스트 목록을 발표할 때면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일이 가끔 있는 정도라 메탈헤드가 아니라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헤비메탈이라는 장르에서 잉베이 말름스틴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속주 기타리스트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뮤지션이 바로 이 사람이니.

하지만 록 음악의 자유로운 실험 정신을 죽이고 기타리스트들의 속주 묘기 대행진 서커스로 만들었다는 비판, 기타 연주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들리고 곡 구조도 항상 뻔한 매너리즘의 극한이라는 비판, 엘리트 기타리스트들과 그들의 비르투오소적 면모만을 부각시켜 록의 저항 정신을 함몰시키고 음악의 진입 장벽을 크게 높여 메탈의 대중적 인기를 저하시켜버렸다는 비판들이 제기되어 차차 수많은 안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다른 기타리스트들의 실력을 깎아 내리기만 하는 그의 몇몇 부적절한 언행, 밴드에서 독재자로 활약하며 다른 멤버들의 연주를 억누르며 함부로 대하고 해고한다는 소문, 또 전성기 이후 매너리즘에 젖어 자기복제성이 강한 영 좋지 않은 퀄리티의 결과물을 낸 등등의 이유 때문에 최근엔 칭찬보단 안티성 글들이 더 많아 보이기도 한다.

2. 유년 시절

최초로 락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 건 TV에서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를 보았을 때라고 하며,[14] 나중에 "7살 때 지미 헨드릭스가 죽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지미 헨드릭스가 죽은 그날, 기타리스트 잉베이 말름스틴이 태어났다"[15]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헨드릭스의 영향에 대해 지겹도록 질문을 받을 때 마찬가지로 지겹도록 똑같은 답을 하는데 그가 주장하는 건 분명히 헨드릭스의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보고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게 된 건 사실이지만[16] 헨드릭스 본인의 연주나 음악적인 성향에는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건 누구나가 인정하는 사실. 헨드릭스는 분명히 블루스, R&B에 강한 베이스를 둔 기타리스트이다. 하지만 잉베이의 곡 중에 나오는 돌출적인 비브라토나 클라이맥스로 이끌어가는 방식은 분명 지미 핸드릭스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근데 지미 헨드릭스 영향을 간접적으로라도 안받은 일렉트릭 기타리스트가 있나? Far beyond the Sun에서 클라이맥스 부분을 잘 들어보라. 단순히 장르의 구분을 가지고 영향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말하긴 어렵다. 또한 그는 자서전 [Relentless]에서 락 뮤직에 대해 가장 먼저 듣고 빠져있던 건 다름아닌 딥 퍼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7세 때 지미 헨드릭스에 충격을 먹고 8살 생일에 선물로 받은 딥 퍼플의 앨범 Fireball이 인생 첫 LP였고 잉베이는 개인적으로 이 앨범을 딥 퍼플 앨범 중에서도 최고로 치고 있다.

1979년 잉베이는 밴드를 만들기로 하며 멤버를 모집하게 되는데 이때 Marcel Jacob을 만나게 되었고 둘은 꽤나 같이 붙어있게 된다. 잉베이에 따르면 당시 Marcel은 자신의 스타일로 연주하게끔 연습을 시키고 또 같이 곡작업 등도 많이 했다고 한다. 80년 이후 둘은 헤어지게 되었고 Marcel은 스웨덴의 또 다른 위대한 락 밴드 Europe의 원조 멤버가 된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했다. 잉베이에 따르면 Marcel은 무책임하고 자기 멋대로여서 2집 Triology 투어 도중 그냥 무단 이탈을 해버렸는데 이때 잉베이의 집에 들러서 장비며 녹음했던 테입이며 죄 가지고 스웨덴으로 튀었다고 한다. 이후 Marcel은 제프 스캇 소토와 Talisman을 함께하며 이후 96년 잉베이의 앨범 Inspiration 제작 때 다시금 만나게 되었는데 결국 이때도 비슷하게 행동해 이후 잉베이는 손절했다고 한다.

말름스틴은 록에서는 리치 블랙모어[17]와 울리 존 로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직접적으로 네오크래시컬 스타일에 영향을 준 것은 리치 블랙모어는 아니라고 한다.[18] 그는 키보드가 클래시컬한 어프로치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고 밝히며 그 이유로 "기타나 바이올린 기타 현악기는 노트 하나를 연주 하는데 양손이 필요하지만 키보드는 한 손만으로도 가능하며 때문에 속주도 키보드가 더 편하다."라고 밝혔으며 특히 제네시스 토니 뱅크스가 이런 이유로 오히려 클래식컬한 어프로치에 더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클래식에서는 바흐, 파가니니, 안토니오 비발디에게 영향 받았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특히 바로크 메탈의 토대를 마련해준 리치 블랙모어에 대해서는 무한한 존경심을 보낸다.

데뷔 초에는 리치 블랙모어의 헤어스타일, 의상, 무대 퍼포먼스까지 모두 그대로 따라할 정도 였고, 96년 발매한 Inspiration 앨범 트랙 10곡 중 5곡이 리치 블랙모어의 곡이다.[19] 리치에 대한 존경심 때문인지 리치 블랙모어의 레인보우 출신 보컬들과 다 같이 밴드 혹은 프로젝트를 하였다. 대표적으로 알카트라즈 시절 땐 레인보우 2대 보컬인 그레이엄 보넷, 개인 밴드 라이징 포스의 보컬은 조 린 터너, 그리고 프로젝트로는 로니 제임스 디오과 같이 작업을 했었다.

파일:external/i48.photobucket.com/DEEPPURPLE3.jpg

리치 와 잉베이

이미 10살 때부터 Track On Earth란 밴드를 하기도 하며, 클래식 연주법에 대한 관심도 일찍 시작되어, 특히 속주로 유명했던 19세기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의 곡을 기타로 많이 카피했다고 한다.[20] 이 시절 활동하던 아마추어 밴드의 이름 중에 훗날 재활용되는 Rising Force가 있다.

3. 음악 활동

1982년, 지금은 프로그레시브 메탈계에 매진하고 있는 유명한 락 제작자 마이크 바니에게 자신의 데모 테입을 보냈고, 마이크 바니[21]는 그의 재능을 인정, 그를 미국에 불러들인다.

사실 잉베이는 어떻게 보면 모두가 꿈꾸는 ' 아메리칸 드림'이란걸 명확하게 이뤄낸 이민자이다. 마이크 바니에게 뽑혀서 미국으로 간 뒤에는 1주일만에 수퍼 스타, 초신성, 요주의할 신인으로 단 한번에 성공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니 아메리칸 드림의 표본이라 할만 하다. 그래서 간혹 인터뷰에서 보면 미국을 거지 같은 나라라고 까는 이들한테 하는 말이 '이 나라가 얼마나 기회와 희망의 나라인지 인지못한다'라며 비판했다. 메탈계 거물급 프로듀서 마이크 바니가 스웨덴까지 와서 그의 기타실력을 보고 그를 데려갔으니 잉베이 입장에선 기회와 희망의 나라라고 할 법도 하다. 데뷔 후에도 하루에 3시간은 연습한다고[22] 밝힌 적이 있다.

잉베이는 처음엔 Steeler라는 밴드에 가입했지만 사실은 녹음이 다 완결된 뒤에 기타 파트만 오버더빙으로 들어간 것이라 정식 멤버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때문에 잘 들어보면 곡과 기타 연주가 따로 노는 경향이 강하다.



그 뒤 레인보우 및 MSG를 거쳐 온 명 보컬리스트 그레이엄 보넷에게 오디션을 받고 알카트라즈의 기타리스트로 가입, 밴드의 데뷔작인 No Parole From Rock N' Roll을 내면서 사실상 최초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는다.
이 앨범은 매우 훌륭한 앨범인데, 완전히 속주에 함몰되지 않고 락적인 템포에 충실한 잉베이의 기타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데다가, 당시 최고의 기량에 도달한 그레험 보넷의 열차화통같은 쩌렁쩌렁한 파워풀한 목소리도 큰 매력을 말한다. 특히 이 앨범은 사실상 잉베이가 직접 작곡을해 성공시킨 첫 앨범이기에 스스로도 상당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앨범이기도 하다. 상쾌한 Island in the Sun, 박진감 넘치는 리듬파트와 솔로가 돋보이는 jet to jet 비장한 인트로와 소름돋는 솔로가 일품인 kree nakoorie, 구슬픈 분위기의 suffer me 등등 어느하나 버릴 곡이 없는 매우 훌륭한 앨범이다. 일본에서 라이브를 한 영상도 있는데, 잉베이의 팬이라면 84년 도쿄 라이브는 꼭 보자. 하지만 리더인 보넷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과의 의 불화로 잉베이는 두번째 앨범을 낸 뒤[23], Alcatrazz 에서 쫒겨났다. 후에 잉베이는 인터뷰에서 Alcatrazz 공연이 끝나고 보넷이 "That kid stole my show" 라며 화를 냈다고 했다. 많은 밴드가 보컬이 리더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공연의 인기를 새파랗게 어린 기타리스트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인기를 독차지하며 무대를 장악하니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것이고 열등감도 있었을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그레이엄 보넷의 인터뷰는 다르다. 리치 블랙모어를 연상케 하는 외모와 플레이, 모든 레인보우의 곡을 줄줄 꽤고 있는 잉베이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지만, 잉베이 자체가 너무 자의식 과잉이었다는 것이다. 무대에서 자기 파트가 아님에도 휘젓고 돌아다니고, 노래 부르고 있는데 의미없는 애드립을 남발하며 나대기 좋아하는 기타리스트에게 여러 번 경고 했지만 들어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무대에서 잉베이 솔로 중 기타 코드가 그레이엄 보넷의 발에 걸려 뽑히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실수라고 사과하는 리더이며 대선배인 그레이엄 보넷에게 불같이 대들다가 결국 잘렸다는 것이다.

사실 그레이엄 보넷은 그 후 임펠리테리 밴드의 리더가 아닌 멤버로서도 잘 지낸 걸 보면 나이 어린 기타키즈에게 열등감 같은 걸 가질만한 인물은 아닌것 같고, 잉베이의 선천적 무례함이 원인으로 생각된다. 어찌 됐든 일찌감찌 이들은 무대 뒤에서 불화가 있었고 이후 잉베이는 자칭 탈퇴, 사실상 쫓겨나게 된다.[24]

그 후 자신의 솔로 밴드를 결성하고 역사적인 앨범 Rising Force를 발매한다.[25]
Rising Force의 발매는 전 세계 락 기타계를 뒤흔드는 쇼킹한 사건이었으며, Guitar Player Magazine에서 최고의 락 앨범 상을 수상하고, 그래미상에서도 최고의 락 연주부분에 노미네이트 된다. 그리고 올해 최고의 기타리스트에 선정되어 기타플레이어 표지에 밴 헤일런과 더불어 최고의 기타리스트 모델로 장식되며 그의 이름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이 앨범은 알카트라즈 시절 그의 존재를 확실히 알아본 일본에서 추진한 프로젝트로 연주곡으로만 원래 이뤄질 앨범이었는데 요청으로 보컬곡이 2개가 들어갔고 알카트라즈와 불화 이후 이 앨범에 매진하며 발매가 되었고 일본 유일 발매가 아니라 세계로 뻗어가며 갑자기 이 앨범이 1집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의 황금시대가 개막된다.


전성기 시절인 1985년 Rising Force 일본 라이브. I'll See the Light Tonight[26]

본격 1집 Marching Out으로 전 세계에 충격과 제대로 된 신고식을 확실히 치르게 된다. 단숨에 수퍼 히어로가 된 그는 이후 계속해서 멤버 교체라는 난재에 부딪히게 된다. 제프와는 관계도 좋고 상당히 잘 지냈지만 당시 제프는 루디 사르조와의 프로젝트를 위해 떠나버렸고 2집 Triology에선 마크 볼즈와 함께 하게 된다. Trilogy 역시 수많은 네오 클래시컬 메탈의 대표곡이 포진되어 있고 좋은 평을 받는다. 잉베이는 마크의 실력이 상당히 출중해 마음에 들어했지만 점점 행동이 이상해 졌으며 끝내 박자, 음이탈등 심각한 상황이 연출되며 투어 중간 해고를 하게 된다. 이때 투어는 결국 제프가 임시로 마무리를 하게 된다. 후술하겠지만 3집 Odyssey가 발매되었을 1988년 당시 바로크 메탈 (현재는 네오 클래시컬 메탈)의 선구자이자 대명사였던 그의 속칭 '웅장하면서도 진중한 바로크 클래식 느낌'의 작품과 거리가 멀어진 흔한 헤비메탈 사운드에 실망한 팬들이 많아지기도 했다. 일부 팬들은 기존의 "Rising Force (1984)", "Marching Out (1985)", 그리고 "Triology (1986)"을 초창기 3부작으로 칭하며 진정한 네오 클래시컬 메탈의 명반들로 꼽기도 한다.

3집 작업을 위해 매니저와 논의를 하던 중 "요새 조 린 터너 형은 뭐해?"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매니저가 "전화 해 볼게."하며 다시금 레인보우출신의 보컬과 함께하게 된다.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앨범이지만 실제로 잉베이는 이 앨범을 굉장히 별로라 생각하며 심지어 애착도 별로 안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가장 노력을 덜 들인 앨범 중 하나라고 한다. 이때도 보컬 조와 불화가 일게 되는데 잉베이에 따르면 앨범 녹음 당시 이미 모든것이 다 완성된 상황이었고 조는 그저 가사 몇가지 바꾼것 뿐인데 여기저기 인터뷰에서 마치 자신이 가사를 다 쓴 것처럼 하고 다녀 상당히 기분나뻤다고 밝히고 있다. 그 외에도 "조의 목소리는 너무나 Commercial하다. 그리고 추임새 Oooo baby, 같은 것들이 오글거린다. 우리 메탈밴드인데!"라고 하는 등 안 좋은 이야기가 많다. 암튼 사실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앨범인 Odyssey가 1988년 탄생하며 또 다른 전성기를 구가하지만 스스로는 가장 안 좋아하는 앨범이라고 한다. 이유는 모든 것을 본인이 키를 쥐고 움직이는 스타일인데 이때 잡음도 많았고 어머니의 암투병 및 사망. 아래 언급되는 87년도 교통사고에 의한 팔부상, 형의 사고사 등 고통스러운 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더 가관인건 이때 잉베이는 비로소 자신의 금전적 상황을 알게 되는데 말 그대로 매니저의 농락으로 거지였다. 이때 새 매니저와 만나고 그의인생은 다시 역전한다.

이후 1989년에는 이혼한 아버지의[27] 제안으로 엄청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냉전시대 꿈꾸기도 힘든 소련 라이브. 이때 잉베이의 앨범이 상당히 인기가 있었고 그에 힘입어 바로 레닌그라드 라이브를 감행하게 된다. 꽤나 성공적인 공연을 했고 이후 앨범으로 발매되기도 했다. 이 라이브에 대해서 잉베이는 "사실 서방국가 출신 음악가들 중 최초의 구 소련 라이브 하면 사람들이 모스크바 음악 평화축제가 처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라이브가 사실상 최초이다."라고 말한다.[28][29]

오른팔을 2번 다친적이 있었는데 한번은 교통사고를 심하게 당해서 오른팔을 평생 못쓸 정도였다. 우여곡절 끝에 재활 및 복귀를 성공하였다. 그 다음은 첫번째 아내와 결혼 전, 아내의 어머니가 자신의 딸과 잉베이를 헤어지게 하기위해 경찰에 허위신고를 하여 체포되는 과정에서 또 한번 팔을 다치게 된다.[30]

4. 디스코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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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비판

인기도 많지만, 그만큼 싫어하는 사람도 매우 많다. 이는 단순히 잉베이의 매우 독선적인 성격과 거침없는 독설 뿐만이 아니고, 그의 연주 스타일 자체에 대한 불호 때문이다.

굉장히 많은 앨범을 만들어오면서 때론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일렉기타 연주가 클래식적 오케스트레이션에 그림 같이 녹아들어가는 앨범을 만들기도 하고, 때론 이전에 영향받은 락 선배들의 곡들을 리메이크하기도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거의 변하지 않고 매번 똑같은 매너리즘이 강한 음악을 쭈욱 해오며 지금까지도 그대로 활동하고 있다.[31]

잉베이는 제프 스콧 소토 같은 뛰어난 보컬리스트를 가끔 발굴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자기 기타 연주만을 부각시키기 위해 다른 악기 파트의 역량을 억눌러 그의 앨범에선 기타 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한다는 얘기도 듣곤 한다. 사실은 리치 블랙모어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카리스마 뮤지션에게는 늘 따라붙는 이야기로 어느 정도는 그런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잉베이가 헤비메탈 씬에 남긴 또다른 업적[32] 중 하나가 바로 헤비메탈 키보드계의 신기원을 연 옌스 요한슨을 발굴한 것. 총 4년 동안 4장의 정규 앨범을 만들었는데, 이때 잉베이의 주요 트랙에는 옌스의 현란한 키보드 솔로, 심지어 잉베이와의 속주 배틀이 들어가는 트랙도 적지 않다. 베이스 또한 아주 잘 들리는 공연도 많다. 하지만 이 마저도 대 선배 리치 블랙모어 존 로드가 60년대 말에 이미 선 보였던 것이기에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상당히 개인적인 호불호를 표현하는 게 심한 사람이라 많은 존경을 받는 기타리스트들을 함부로 깎아내리기도 한다. 조 새트리아니의 트랙을 듣고 쓰레기같다고 표현한 적도 있으며(물론 연주자가 새트리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들었을 때 이야기다.), 슬래시의 솔로를 듣고 벤딩의 음감이 형편없다고 비판한 적도 있다.근데 슬래시는 원래 이론에 약한사람 아닌가? 또는 제프 벡의 불후의 커버곡 'Cause We've Ended as Lovers'(스티비 원더 작곡)를 듣고 '훌륭한 곡이지만 기타리스트가 벤딩을 제대로 못해 빛나지 못한 곡'이라 한 건 충격과 공포.[33] 특히 너바나를 위시한 얼터너티브 록/ 그런지 록 밴드는 영 심드렁해 하고 기타 연주를 장난으로 안다고 엄청나게 비난하지만 이건 잉베이 뿐만 아니라 올드 스쿨 메탈 뮤지션이라면 대부분 싫어한다.[34] 이러 저러한 다소 극단적인 감상 때문에 거만하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물론 까칠한 성격이라는 건 팬들도 인정하는 사실. -잉베이가 평가한 기타리스트들

처음엔 꽤 잘생긴 얼굴로 팬이 많았지만 요즘은 나이가 먹었는지 많이 뚱뚱해져서 뚱베이 말름스틴(혹은 뚱베이 살찜스틴)이라고 까이기도 한다. 99년 내한 당시 모 음악잡지에서는 '화이트 B.B. King'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매너리즘의 진행과 함께 여러 가지 면에서 욕을 먹기도 했다. 우선 기타톤 자체가 제한적[35]이고 사용하는 스케일과 모드[36]가 언제나 그게 그거라는 것. 또한 프레이즈 역시 몇 가지를 돌려쓰는 감이 강하다.

한국과 일본에서 인기가 많고 특히 그 인기의 측면이 ' 속주'라는, 고음병과 같은 요소를 다분히 지닌 유치한 부분에 기인하다보니 여러 가지로 저평가를 당하는 측면이 있는데, 미국 쪽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있으며 어느 지역에서 인기가 있다는 수준을 넘어 이미 세계적인 인지도와 명성을 가진, 한 시대를 풍미하며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거장 테크니션이다. 연주자 중에서도 잉베이가 후대 기타 키즈들에게 끼친 영향력과 그의 테크닉에 한해서는 나쁜 평가를 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런데 2010년 중반 정도를 기점으로 누구도 부정 못하던 테크닉 부분에서조차 많은 비판을 듣는 중이다. 기타 테크닉도 피지컬이 관련되는 부분이라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예전만큼 속도가 안 나오는건 어쩔수가 없는 현상이며, 젊은 시절에 비해 테크닉적인 퇴보를 특히 뚜렷하게 보이는 기타리스트들이 있는데, 잉베이도 그 대표적인 한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속주실력은 여전하다듯이 전성기 시절과 똑같은 BPM으로 연주하려고 하는데[37], 아무래도 예전만큼의 정확도와 깔끔함이 안 나와서 말이 많다. 최근 2019년의 콘서트 영상을 보면 심각할 정도로 망가져 있는 모습이다. 왕년의 테크닉을 아직도 보존하고 있는 동세대 비르투오소들도 있고 혹은 속도를 잃었다 해도 원숙미 있는 연주를 보여주는 기타리스트들도 있는데 이 사람은 여전히 매너리즘에 가까운 연주를 하면서도 테크닉마저 망가져서 아쉬운 부분이다.

5.1. 반론

말름스틴은 사실 여러가지 면에서 억울하게 욕을 먹는 면도 있는데, 20년이라는 기나긴 활동기간 동안 많은 루머와 반박되어 온 비판이 많다. 몇몇을 정리 하자면…

5.1.1. 싸구려 속주광?

"말름스틴은 완급 조절을 모르고 연주에 필(Feel)을 가미할 줄 모르는 '싸구려 속주 기타리스트'다. 존경 받는 건 속주를 숭앙하는 한국이나 일본 같은 아시아일 뿐, 본토에서는 별로다?"
시대가 지나고 말름스틴이 이러한 억울한 평을 받아 기타 좀 빨리 연주하는 돼지 정도로 비웃음거리가 되는 때도 많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사람의 데뷔 앨범 Rising Force는 (물론 이쪽 바닥 한정해서) 지미 헨드릭스 Are You Experienced 밴 헤일런 Van Halen급으로 전설로 회자되는 혁명적인 앨범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기타 당시 대중음악계의 주류였던 하드록의 과도기를 넘어서서 기타가 가진 연주능력의 한계와 스타일을 대폭 확장하여 연주의 판도를 뒤집어 엎은 명반으로 기타 속주 연주의 계보를 논할 때 이 앨범이 없이는 시작조차 성립이 안 될 정도이다. 해외에서는 평이 아시아 만큼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헤비메탈계에서 잔뼈가 굵은 명인 기타리스트 잭 와일드가 말름스틴의 자서전에 썼던 평을 읽어보자.
"세상에는 좋은 기타리스트들이 많고, 또 위대한 기타리스트들이 있다. 하지만 그 위에는 판도를 바꾸는 이가 있다. 지미 헨드릭스 에디 밴 헤일런이 그랬듯이, 잉베이도 그 중 하나다. 단순히 연주력의 완성도, 컨트롤, 장인정신의 이유가 그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의 프레이징, 비브라토, 톤, 그의 필링과 열정이 전체적인 음악성에 녹아들어 그를 특별하고 독특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기타리스트들은 그저 빨리 연주하기만 하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지 않지만, 잉베이는 다르다.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비발디 파가니니가 21세기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궁금하다면 그 이상 찾지말라. 그들의 모든 것이 잉베이의 음악에서 숨 쉬고 있고, 또 웃고 있다."

말름스틴이 토니 매칼파인이나 크리스 임펠리테리, 에디 밴 헤일런 등과 함께 속주 기타의 시대를 열었고 또 속주 기타리스트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장인 건 맞고, 유니크한 기타톤과 플레이, 음의 배치가 중시되는 현재에 봐도 잉베이는 독보적인 부분이 많다. 프레이즈가 한정적이라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속주를 빼고 봐도 잉베이는 초고수 반열에 드는 기타리스트다. 2004년도 G3 공연 당시 조 새트리아니는 인터뷰에서 '솔직히 테크닉만큼은 우리 셋( 스티브 바이, 조 새트리아니, 잉베이 말름스틴) 중 잉베이가 가장 뛰어나다'라고 했을 정도다.[38] 무엇보다, 그 정도로 기교가 요구되는 곡을 잉베이만큼 라이브에서 완벽하게 뽑는 기타리스트는 드물다. 그런 점은 사실 대중음악의 아티스트들 대부분과는 수준차가 나고, 클래식쪽의 전문 연주자와 비교되어야 할 정도다. 잉베이 본인 역시 클래식 연주자와 같은 대우를 받기를 원하고 있고...[39]

또 말름스틴이 억울하게 욕 먹는 부분은 바로 필도 없고 무조건 빨리 연주하는 게 미덕인 줄 아는 기타리스트라는 평이다. 전혀 그렇지 않은게 1984년에 나왔던 데뷔 앨범 Rising Force만 들어봐도 잉베이의 곡들은 전체적으로 빠른 솔로잉이 자주 등장하는 편이지만, 기타를 연주한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겠지만 잉베이는 노트의 강약조절을 상당히 잘 하는 편이다. 종종 느린 부분의 솔로나 인트로 파트도 비브라토와 노트배치를 적절히 잘 활용하여 느릿느릿하게 연주하면서 필링을 가져가는 경우가 많은데 과거에 잉베이가 10대 시절에 녹음한 블루스 데모 테입을 들어보면 속주에만 치중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어떤 노트와 진행까지 고려해서 연주해야 하는지 기본이 확실히 정립되어 있고 상당히 그루브하게 연주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잉베이의 스타일이 빠른 솔로를 선호해서 그런거지 잉베이는 기본적으로 느린 곡도 잘 연주하는데다가 당시에 기타리스트들이 갖지 못한 대단한 속주 테크닉까지 갖춘 기타리스트라는 점이다. 또한 1집에 수록된 Icarus Dream Suite, Evil Eye, Black Star 등등을 보면 기존의 대중음악이 갖추지 못한 클레식 음악을 재해석하여 자기만의 음악으로 가공하여 내놓은 것에 대해서 당시에도 에드워드 반 헤일런이라던지, 랜디로즈 등장때도 기타계에도 상당한 충격이 있었지만 잉베이의 등장은 그와는 전혀 다른 수준의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당시 기타리스트들 사이에서도 잉베이의 등장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져다 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986년 전세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메탈 밴드들이 Hear n' Aid - We're Stars 라는 곡을 공동작업 할때도 잉베이는 기타리스트 자격으로 혼자 녹음에 참여했는데 당시 기타리스트들 사이에서도 잉베이는 굉장히 주목받았고 믿을 수 없이 뛰어난 기타리스트라고 칭송이 자자했다. 그만큼 잉베이는 데뷔 이후 80년대 중후반부터 엄청나게 인정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디테일하게 보면 잉베이의 음악이 단순히 솔로만 무차별적으로 연주하는게 아닌 곡의 기승전결이 확실하고 멜로디가 아름다운 곡이 많고 대부분 잉베이를 신날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은 잉베이의 고차원적인 테크닉과 음악세계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그리고 이 '필'이라는 것도 상당히 애매한 개념인것이, 비판자들이 항상 말름스틴을 까면서 에릭 클랩튼, 비비 킹 등등 서정적이고 느릿한 블루스 연주에 강한 선배 기타리스트들을 들먹인다. 만약 그렇다면 필이라는 것이 클래시컬 선율을 하모닉 마이너 스케일로 속주 연주하면 없는 것이고 펜타토닉으로 느릿하게 연주하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프란츠 리스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같은 피아노 작곡/연주자들의 음악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필이 없는 것인지?

물론 록 자체가 클래식과 똑같은 기준을 지녔다고 보긴 힘들기 때문에 즉흥성과 연주자의 개성은 제쳐두고 지나치게 빠른 속주,딱딱 떨어지는 정확한 기교만을 절대적으로 중시하는 태도 또한 잘못된건 마찬가지다. 일단 록, 로큰롤의 근본적인 기원과 정신에 대해 생각해보자. 척 베리와 더불어 로큰롤의 전설중 한명인 로큰롤 피아노 연주자 '리틀 리차드'는 클래식과 로큰롤의 피아노연주는 다르다고 주장하며 피아노에 발을 올리고 쿵쾅거리며 거칠게 연주했다. 이들은 매우 빠르고 정확한 기교와 테크닉보다는 블루스적인 필(즉흥성과 개성)이나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 저항정신 등을 강조했다.

그러나 록의 관점에서 본 록 특유의 '필'이라는 개념이 즉흥성이나 연주자가 지닌 개성,창의력 등이 연주에 드러나는것이라면 잉베이는 엄밀히 말해 그닥 비판받을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비판 항목에 서술된 잉베이의 "프레이즈를 돌려쓰고 똑같은 톤 등 매너리즘에 빠진 연주"가 위의 비판에 기름을 부었다고 볼수도 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잉베이가 상대적으로 약간 그런 경향이 있다는것이고, 사실 즉흥성,개성 면에서 잉베이는 보통 기타리스트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뒤떨어진건 아니다.

그리고 위의 유년시절 항목에서 알수있듯 잉베이의 음악적 뿌리와 지향점은 블루스, 로큰롤보다 클래식에 훨씬 더 가깝다. 좀더 정확히는, 사실 잉베이 이전까지 모든 일렉트릭 기타리스트의 뿌리는 지미 헨드릭스부터 시작하는 블루스, 로큰롤 기타리스트들였고 지금도 대다수의 기타리스트는 지미 헨드릭스의 프레이즈를 익히며 블루스의 필을 기본으로 자기 음악을 쌓아간다. 잉베이는 선배 리치 블랙모어에서부터 시작해 에디 밴 헤일런이후 완전히 본궤도에 올라온 블루스,로큰롤 영향력 없이 순수하게 정통 클래식 음악을 뿌리로 삼는 근본부터 완전히 다른 기타리스트인 것이다. 그래서 블루스의 근간인 즉흥, 필, 그루브(나쁘게 말하면 뽕)보다는 장인적인 정확성,테크닉과 멜로디를 좀 더 중시하는게 잉베이로썬 오히려 당연한 거다. 굳이 '록 기타연주자'라는 테두리가 아닌 '기타 연주자'라는 포괄적인 개념에서 보자면 잉베이는 단순히 뛰어난 기타리스트가 아니라 상술한 리치 블랙모어,에디 밴 헤일런의 계보를 넘어 완전히 블루스,로큰롤에서 독립한 새로운 종류의 기타리스트인 것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잉베이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록,메탈씬에서 블루스,로큰롤 시대에 만들어낸 기본기와 사상을 연마하며 실력을 키우는 기타리스트들이 대다수인데, 잉베이란 음악가의 근본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의 표면적인 스피드와 기교만을 숭배하고 따라하는 후배 기타리스트들의 행태가 이같은 부당한 오해와 까임을 만들어 낸 것이라 볼수 있겠다.

속도적인 측면에선 최근엔 그를 능가하는 속주 기타리스트도 많이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의 능력은 외계인급이라고 얘기한다. 기타를 연주하는 연주자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오른손 피킹자세가 굉장히 안정적이며 과한 움직임이 없이도 분명하게 연주할 수 있는 교과서적인 효율성을 자랑한다. 또한 기타리스트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을 만큼 굉장히 훌륭한 비브라토를 가졌다는 점인데 수많은 기타리스트들 (거스리 고반, 폴 길버트, 잭 와일드 등)도 잉베이의 비브라토가 매우 훌륭한 수준이라고 평가한다.[40] 또한 라이브에서도 실수가 거의 없이 연주실력은 완성도가 매우 높으며, 대부분 메인 리프를 제외하고는 매번 즉흥연주로 연주를 한다. 이러한 부분은 대중음악보다는 클래식에 좀 더 가까운 장인적인 면으로 볼 수 있다. 락밴드의 경우 특정 장르[41] 이외에는 곡의 파워, 리듬감, 그루브를 중시하고 세세한 표현에는 신경쓰지 않거나 쓰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은데,[42] 잉베이의 경우 밴드보다는 기타 솔로에 가깝다보니 아주 디테일하게 잘 맞는 연주를 수행할 수 있다. 그의 음반을 들을때는 세세한 것 하나까지 신경써야 참맛이 느껴진다.

다만 김태원은 잉베이 이후 기타리스트들이 많이 망가졌다고 간접적인 비판을 했다. 하지만 정작 김태원은 당시에 자신도 잉베이 말름스틴의 영향력 그늘 아래에 속주 연습을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 속주와 음악적 스케일을 극복하지 못해 좌절했다는 인터뷰를 통해 밝힌 적이 있었다. 한국은 일본과 유사하게 서구의 블루스가 대중문화에 유입되기 전부터 엔카, 트로트 등의 애가(엘레지)가 블루스의 감성이 유입되기 전부터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때문에 록 음악의 발전이 서구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로 인해 서구나 일본의 록 씬과는 달리 연주자들의 위치가 지극히 낮고 그로 인해 연주자의 개성이나 톤보다는 연주력과 스킬부터 우선 보고 뽑는 환경이 정착한 점까지 겹쳐 이른바 테크니션에 대한 환상이 다소 높았다. 그로 인해 8090년대 독보적 테크닉의 기타리스트였던 잉베이 맘스틴이 한국의 락 음악계에서 가진 영향력은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런 문제는 같은 시기 미국의 하드 록,메탈 씬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 영향을 많이 받았던 쪽이 LA 메탈, 글램 메탈 계열로 이 시기 밴드의 속주 경쟁 때문에 장르 전체의 질을 떨어뜨렸다는 비판도 크게 받았다. 거기다 하필이면 잠깐의 전성기 이후 너바나의 등장으로 그런지,얼터너티브 록의 등장으로 한방에 쓸려나가버리면서 후대에 실력대비 꽤나 억울하게 비난받은 기타리스트들도 적지 않은 편.[43]

5.1.2. 오만?

"말름스틴은 자존심이 높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기에게 영향을 준 선배도 무시하고 동년배 기타리스트들도 함부로 깎아 내리는 오만불손한 인간이다?"
반쯤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와전된 소문이 너무 많다는 것. 우선 정통 메탈 계보에 있는 선배들에 대한 예우는 와전된 소문과 달리 아주 깍듯이 한다. 말름스틴은 분명히 딥 퍼플에 영향을 아주 크게 받았다고 수 백번쯤은 인정을 했다. 유년기에 딥 퍼플 초기 앨범 fireball의 모든 곡을 카피 할 수 있도록 연습했다고 회고 할 정도. 실제로 리치 블랙모어가 말름스틴에 대해 평하길, "이상한 녀석이고 음악도 솔직히 난 잘 이해를 못하겠는데, 실력은 확실하고 나한테는 정말 깍듯이 대해줘서 아주 좋은 후배"라고 말할 정도로 선배에 대한 예우는 확실하게 하는 편이다. 실제로 지미 페이지같은 별 접점이 없을 거 같은 선배라도 테크닉은 부족했지만 헤비메탈의 사부님격 되는 분이라고 무한한 존경을 표현한다. 한 인터뷰에서는 '지미 페이지는 매력적인 사람이고 말 할 필요도 없는 전설이야. 정말 위대한 앨범에서 아름다운 곡들을 쓰셨다'라고 평하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랜디 로즈는 자서전에 자기 서명 까지 남길 정도로 극찬을 했고 밴 헤일런도 거의 숭배하는 수준으로 존경한다. 더군다나 음악적으로는 영향을 받았을것 같지는 않았는데도 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를 자기가 제일 존경하고 친하게 지내는 선배라고 언급했다. 특히나 더블 트랙 솔로에는 브라이언 메이 선배를 당해낼 수 없다고 인정했다. 지미 헨드릭스에 관해서는 '수많은 기타리스트들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고 당대 클랩튼이나 블랙모어도 디스토션 사운드를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헨드릭스처럼 자유자재로 혁명적인 사운드를 낸 사람은 없고 단순히 기타 연주 뿐 아니라 굉장한 연출력, 천재 작곡가이기도 하다. 또 그는 짧은 활동 기간에 비해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음악들 들으면) 모든 걸 가진 반신의 영역에 계시다' 라며 연신 그를 높게 평가했다. 이 말고도 마이클 솅커, 울리 존 로스 등등 여러 기타리스트에 대한 찬사를 남긴바도 있어, 흔히 말하는 살아 있는 기타리스트들은 다 까는 모두까기 인형이라는 이미지에선 몇 광년 쯤 떨어진 뮤지션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람한테 까인걸로 유명한 조 새트리아니도 사실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마음에 드는 새트리아니 곡에는 아주 칭찬을 하고 싫어하는 건 깠다. 이건 스티브 바이도 마찬가지이고.

다만 빈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지미 헨드릭스에 대한 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기가 그렇게 영향 받지 않았으면 대선배고 뭐고 "그렇게 영향 안 받았는데요?"식으로 솔직히 이야기 하는 편. 실제로 프랑스 매거진에서 한 블라인드 테스트 중 기타 자체를 시작하게 된 건 지미 헨드릭스지만 지금처럼 연주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건 리치 블랙모어의 연주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잘 모르는 밴드에 대해 인터뷰를 물어보면 보통은 자기가 최대한 아는 대로 좋게 좋게 말하는 뮤지션들이 많지만 말름스틴은 정말 "진짜 모르는데요?"라고 대꾸할 정도로 솔직하게 답한다.

위에도 언급됐듯이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이라, 자기가 듣고 싶은 음악만 듣고 살아서 의외로 모두 다 아는 밴드를 자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도 없다는 경우가 많다.[44] 그 때문인지 싫어하는 건 엄청나게 싫어한다.

1. Ibanez(아이바네즈)나 Jackson 같은 슈퍼스트랫을 혐오한다.
우선 플로이드 로즈 브릿지를 기타의 고유의 음을 죽이는 최악의 발명품이라 싫어하고, 줄과 프렛 간격이 낮은 것도 싫어하며, 또 일단은 하이 게인 험버킹[45] 픽업 기타의 바디에서 나오는 울림의 특징을 없앤다고 혐오한다.[46] 그러나 정말 무조건적으로 혐오하는것은 아니고 그의 노래 중 하나인 Forever one은 본인 스스로도 아이바네즈로 녹음하였다고 언급하였으며 당시 인터뷰에도 그 기타의 사운드를 좋아한다라고도 밝힌 바 있다.

2. 프로 기타리스트가 기본기가 부족하면 비판한다.
잉베이가 다른 기타리스트들을 평가할 때의 핵심 잣대이다. 그의 비판이 마냥 부당하다고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기타 연주가 생업인 프로 연주자가 기본적인 벤딩 음도 못 맞춘다면 통렬하게 비판한다. 또한, 속주 테크닉이 깔끔하지 않으면 차라리 하지 말라고 평한다. 대표적으로, 슬래시처럼 송 라이팅과 리프 메이킹은 잘하지만 기본기가 매우 부족한 기타리스트들을 아주 싫어한다. 혹자는 지미 페이지 헨드릭스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하지만 말름스틴에게 그들은 하늘같은 선배들이다. 게다가 그들이 활약했을 때는 제대로 된 연주 기법이나 훈련 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시대적 한계가 있었다는 이유라도 있다. 그러나 슬래시 같은 기타리스트들은 기타 연주 기법과 교육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시대에 들어서도 기초 부실이 눈에 띈다. 이는 연습 부족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다. 고음이나 기본기만으로 보컬의 실력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듯 테크닉만으로 기타 플레이를 평가하는 것은 무리이기는 하다. 그러나 돈을 받고 음악을 하는 프로 연주자인데 연주의 기본기가 부족한 것은 절대 자랑이 아니다. 자세한 건 슬래시 항목 참조. 사실 이것도 왕년에 제프 벡이 이미 했던 짓(그것도 상대는 리치 블랙모어!)
3. 스티브 바이나 톰 모렐로와 같은 아밍 주법이랑 이펙트 페달로 기타 고유의 소리를 왜곡하는걸 싫어한다.
이래서 스티브 바이 음악을 처음에는 아주 혐오했다. 이런 노이즈가 어떻게 음악이 될 수 있냐면서. 게다가 스티브 바이는 말름스틴이 혐오해 마지 않는 아이바네즈 슈퍼 스트랫을 애용한다. 바이의 지인이 되고 그의 음악에 대해 좀 더 이해를 하고 나서는 그렇게 험한 소리는 안 하지만 꼭 '아, 이 친구는 그 아이바네즈랑 험버킹 픽업만 버리면 완벽한데 말이야!'라는 평은 곧 죽어도 한다. 2000년 중 후반으로 추정되는 프랑스 매체에서 한 블라인드 테스트에서도 '바이는 좋은 친구야' '그를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라며 동시에 '벤딩 자체가 너무 음정이 안 맞고 난 그게 싫어. 난 비브라토가 음정에 맞지 않은 솔로는 들을 수가 없어. 미안해 스티브' 라고 평하며 싫어하는 건 싫다고 표현했다.

여담으로 그의 취미중 하나가 유명 기타리스트의 기타를 수집하는 것인데 스티브 바이한테도 한 대를 받았다. 같은 모델이 아닌 직접 바이가 연주 하던 기타이며 그만의 적절한 기타 보관 방법에 의해 다뤄지고 있음. 잉위의 기타 자랑

4. 얼터너티브/그런지/ 펑크 록 같은 악기 연주를 (본인 시각에서는) 대충 하는 것 같은 밴드를 혐오한다.
말름스틴만 이런 경향을 보인 것은 아니고 80년대 한 끗발 날렸던 헤비메탈 하드 록계열의 밴드 대부분과 많은 솔로 기타리스트들이 보이는 특징이다. 본인들 입장에서는 악기를 형편없이 연주하고 파워 코드 3개로 음악을 만드는 게 어떻게 새로운 흐름으로 받아들여지고[47] 그게 어떻게 자신들의 음악을 몰아 냈는지 억울해 하는 입장이라 더더욱 억하심정으로 엄청나게 싫어한다.[48] 어떤 식으로 말하냐면, '요즘 유행하는'(그러니까 90년대 초중반 쯤) 음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으니까, "좋게 말하는 힘들 것 같다"면서 운을 띄더니, 펄잼이라는 그룹의 기타리스트가 어디에 나와서 기타를 이렇게 치면 된다라며 레슨을 하는 걸 봤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잘못된 것이었다, 그 기타리스트는 누구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꼰대스러운 편견인 경우가 많으나 이는 다른 굳이 잉베이 뿐만 아니라 위에서 말했듯 다른 기타리스트들도 이런 발언 또는 주장을 했던 경우가 많으니 잉베이만 까대는건 무리가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게 확실한 사람이라 자기 코드에 맞으면 엄청나게 칭찬하고 안 맞으면 아주 싫어하는 성격이다. 이건 사실 건방지다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고집세고 까다롭다라는 평이 더 적절하다.

5.1.3. 독선?

"잉베이 말름스틴은 독불장군이라 밴드 멤버를 하대하고 자기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싫어한다?"
이것도 2번과 같이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비판이다. 하지만 이건 잉베이가 가지고 있는 솔로 프로젝트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어느정도가 이해가 가능한 행동이다. 잉베이는 이것에 대해 이러한 인터뷰를 남긴 적이 있다.
모든 작곡이랑 편곡을 내가 하고, 베이스라인이랑 드럼 라인, 보컬 멜로디도 사실상 내가 작곡합니다. 즉,내가 밴드 멤버에게 바라는 건 나의 지시를 잘 따라주는 것이고 그래주지 않으면 솔로 커리어의 의미가 없지요. 나는 오히려 몇몇 밴드 작곡은 멤버 혼자 다 하지도 않으면서 밴드명은 멤버 이름 하나로만 해놓는게 좀 불공평하고 뻔뻔하다고 생각해요.누가 봐도 오지 오스본 저격이다

잉베이 밴드 출신의 연주자나 보컬들이 이후 그의 무대에 세션으로 서는 걸 볼 때, 그리고 인터뷰에서 공격적으로 잉베이를 공격하지 않는 점을 보면 멤버를 하대하는 내용은 약간 부풀려진 감이 있다. Rising Force의 보컬이었던 제프 스콧 소토와 조 린 터너의 인터뷰에 의하면, 잉베이의 성격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은 언론에 의해 부풀려 진 게 적지 않고 실제로는 예의가 바른 사람이라고 한다. 단 제프 스콧 소토의 단독 인터뷰 중 하나를 보면 평소에는 젠틀하다가도 자신의 위치인 라이징 포스의 리더를 다른 멤버가 침범하면 불같이 화를 낸다고 한다. 85년 도쿄 라이브에서 제프가 마이크를 잡고 MC를 봤었는데 나중에 잉베이가 '리더인 내 역할을 침해하지 말라'고 엄청 화를 냈다고. 보컬로 지냈던 팀 리퍼 오웬스 또한 "자신에게 잉베이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내 입에서 '그 새끼는 아주 XXX야!!!'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잉베이는 적어도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었다. "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링크

정리하자면 말름스틴에게 있어서 솔로 프로젝트란 자기가 모든 걸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즉, 솔로 프로젝트의 밴드 멤버는 일종의 세션이고 프로젝트 내의 지위와 발언권은 그것을 주도하는 사람에게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 이러한 견해와 성향 차이 때문에 합작을 하는데 익숙한 전 밴드 멤버들과 과거에 불화가 있었다.

말름스틴이 얼마나 솔로 프로젝트에 진심이냐면 자기 솔로 데뷔 앨범 Rising Force의 베이스는 굳이 세션을 구하지 않고 본인이 쳤다. 그래서 이러한 트러블을 피하고자 최근에는 자기 성향을 잘 아는 멤버들을 찾아 오랫동안 함께하고 있다.

6. 사용 장비

파일:Yngwie_Malmsteen_2008_Tour_Setting.jpg
잉베이 말름스틴의 2008년 투어 장비 세팅

6.1. 기타

6.1.1. 일렉트릭 기타

1986년 일본 투어에서의 솔로 연주.
후술할 The Duck 스트라토캐스터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엄청난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빠이다.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해왔던 올림픽 화이트 색상 스트라토캐스터[49]의 별칭은 "The Duck"(오리)인데, 그 이유는 기타 헤드 부분에 도널드 덕의 스티커가 붙여저있기 때문이다.[50] 그 외에도 바디에 붉은색으로 'Play Loud'라고 적힌 종이와 (위 영상이 찍힌 시점에는 아직 붙이지 않았었지만) 페라리 로고 스티커도 붙어있는 것이 특징.

그 외에 그가 사용하는 스트라토캐스터들의 특이한 점은 하나 더 있는데, 지판의 프렛 사이사이를 마치 빨래판 모양처럼 둥근 모양으로 파내는 스캘럽 작업을 해놓았다는 것이다.[51] 스캘럽 작업을 하게되면 기타 현을 운지할 때 손가락이 지판에 직접 맞닿지 못하고 줄을 누르기만 한 채로 허공에 떠있게 되는데, 일반적인 기타 플레이에 익숙해져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이질적이고 불안정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52] 이미 이러한 악기들에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잉베이는 이러한 특징을 이용해 프렛을 누르는 세기를 조절하여 다른 일반적인 기타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폭과 속도로 비브라토를 했다고 한다.

픽업 또한 그가 직접 펜더제 스톡 픽업을 기반으로 픽업 코일의 굵기를 바꾸는 등 여러 개조를 적용한 물건을 사용했었으며,[53] 어느정도 커리어를 진행한 이후에는 본인 명의의 시그니처 픽업들을 여럿 발매한 바 있다. 커리어 중반까지는 디마지오HS-3를 사용했으나 HS-3의 음량 관련 문제로 시모어 던컨과 계약해서 시그니처 픽업인 YJM Fury를 개발, 사용하고 있다. 둘 다 싱글형 험버커 픽업으로, 깨끗하고 빈티지한 전형적인 스트랫 사운드는 아니지만 노이즈가 적고 하드한 사운드부터 유려한 네오 클래시컬 메탈 스타일 솔로까지 소화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두 픽업의 음색이 좀 다르기 때문에 잉베이 팬들 사이에서 선호가 갈리지만, 아무래도 잉베이의 전성기인 80~ 90년대를 대표하는 HS-3의 음색을 좋아하는 사람 쪽이 더 많은 편.

기타 너트의 재질도 일반적으로 펜더 기타에서 많이 사용하는 본 너트, 합성 본 너트가 아닌, 황동 재질 너트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잉베이 시그니처 스트라토캐스터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황동을 너트에 사용한 기타들)는 개방현을 쳤을 때 금속성 섞인 소리가 더 강하게 들리는 것이 특징이다.
파일:Fender_CS_Yngwie_Malmsteen_Signature_Stratocaster_VW.png
펜더 커스텀 샵에서 발매된 잉베이 말름스틴 시그네쳐 스트라토캐스터[54]
펜더 커스텀 샵이 처음 출범하고 가장 최초로 아티스트 시그니처 모델을 받은 두 사람 중 한 명이다.[55] 다만 그의 시그니처 스트랫이 그가 가장 선호하는 70년대 스타일 라지 헤드스톡, 불렛 트러스로드, 전 지판에 깊게 파인 스캘럽 등을 완전히 갖추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자세한 이야기 및 그의 시그니처 스트라토캐스터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블로그를 참고해 볼 것.

위의 사실들을 쭉 읽었고, 어느 정도 기타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알 수 있겠지만 사실 잉베이의 시그니처 모델은 스트라토캐스터의 탈을 쓴 메탈 머신에 가깝다. 실제로 그의 기타 톤은 펜더 스트랫 특유의 날카로움이 덜하고 메탈 기타의 묵직한 톤과 스트랫 특유의 소리 사이의 무언가다. 평해보자면 펜더 냄새가 나는 메탈 기타에 가깝다. 단순히 사운드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외 여러 하드웨어적 사양들도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라는 껍데기만 가까스로 유지한 채 최대한 본인 취향에 걸맞게 개조된 버전이라 오리지널 스트라토캐스터와 디자인적, 사양적 차이가 꽤나 있는 편.

6.1.2. 어쿠스틱 기타

6.2. 이펙터

파일:Yngwie_Malmsteen_2022_Pedalboard.jpg
잉베이의 2022년도 투어 페달보드
2022년 기준, 사용하고 있는 이펙터는 다음과 같다. 보스제 페달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

과거에는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페달보드에 풀 사이즈 퍼즈 페이스를 들고 다니기도 했다. # #

6.3. 앰프

파일:Yngwie_Malmsteen_Marshall_Amp_Wall.jpg
자타가 공인하는 마샬 앰프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기타리스트 중 한 명이다. 라이브를 할 때마다 항상 뒤에 쌓아두는 마샬 앰프 + 캐비넷의 벽은 경이롭기까지 한 수준.

주로 Marshall JTM45, 1987같은 플렉시 계통 앰프들을 사용했는데, 2011년에는 마샬에서 시그니처 앰프인 Marshall YJM100 앰프가 나오기도 했다. 이 시그니처 앰프 역시도 100W 플렉시 계통 앰프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차이점이라면 어마어마한 게인을 걸어서 기타 톤을 만들어내는 잉베이 특유의 톤 메이킹 스타일을 보조하기 위해 앰프 그 자체에 내장 노이즈 게이트가 달려있으며, 그 외에도 오버드라이브 회로 기반 부스트 스위치와 리버브도 함께 달려있다.

6.4. 그 외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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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베이의 기타 콜렉션
* 기타월드지에서 그의 자택에 방문하여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겸사겸사 그의 기타 콜렉션들이 영상을 통해 공개된 적이 있다. 거의 대부분이 스트라토캐스터인 한 편, 중간중간 깁슨제 기타들이나[57] 스티브 바이, 브라이언 메이 등 동료 음악가들에게 선물로 받은 기타들도 보인다. 이 콜렉션에서의 최고 백미는 영상 5분 9초부터 등장하는 1954년에 생산된 오리지널 스트라토캐스터인데, 잉베이의 설명에 따르면 이 스트랫은 1954년 3월에 제작된 개체로, 가장 최초로 제작된 10대의 스트라토캐스터 중 한 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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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련 문서



[1] 여느 북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키가 무척 크다. 191cm였던 전성기 시절의 로저 워터스와 키가 비슷하다. [2] 실로 사기적인 기타 실력과는 달리 보컬에 대한 평은 매우 좋지 않다. 전문 분야도 아닌 것을 자기 마음대로 밴드를 굴리려고 억지로 보컬을 맡은 것이기 때문. [3] '건방지다'는 이미지를 굳히게 된 발언이기도 한데, 발화의 의도가 잘못 전달되었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다른 인터뷰들에서의 대답들은 딱히 연습시간을 정해놓은 것이 아니고, TV를 보거나 어디를 갈 때도 옆에 기타를 두고 수시로 연주한다(play)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기타 연주 자체가 일상 생활이다는 말이지 연습 따윈 안 한다는 뜻이 아니다. 잉베이 밴드에서 보컬을 지냈던 팀 리퍼 오웬스의 언급처럼 악기를 항상 옆에 두고 연주가 직업이면서 취미 생활이라 그 모습을 봐왔던 사람들은 프로 연주자로서 잉베이의 노력에 대해서는 절대 폄하하지 않는다. 링크 존 맥러플린과 함께한 인터뷰 중에서 나온 말로 인터뷰 마지막에서 9번째 앞부터 언급한다. 그말에 대한 맥러플린의 반응이 압권. [4] 영어의 L 발음은 초성을 제외한 자리에서는 설측 치경 연구개 접근음(또는 설측 연구개 접근음)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실제 Malmsteen의 영어식 발음을 들어보면 마음스틴에 가깝게 들린다. 필름의 영어식 발음이 피음과 가깝게 들리는 것과 마찬가지. [5] 스웨덴어에서도 영어식에 가까운 잉베이~잉비 말름스틴으로 발음한다. https://ko.forvo.com/word/yngwie_malmsteen. [6]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윙베 요한 말름스텐'을 표준 표기로 정하고, 영어식으론 문서명과 같은 '잉베이 말름스틴'을 제시했다(2013년 4월 12일 진행 정부ㆍ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 2013년도 제8차 실무소위원회 심의). [7] 사실 과거 '잉위'라고 불린건 완전히 잘못된 발음이지만 '맘스틴'은 오히려 '말름스틴'보다 현지 발음에 더 가깝다. 영어 표기법으로 읽다보니 '말름스틴'으로 된 것이지 발음만으로 따지자면 '맘스틴'이 오히려 더 정확한 발음이다. [8] 그 외 인터뷰 영상을 보더라도 영어식에 가까운 '잉베이 (제이) 말름스틴'이라는 발음을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련 영상. [9] 그 이전까진 헤비메탈/하드 락 기타리스트들은 블루스 기반으로 한 스타일이었고, 기타에 클래식을 처음 도입한 건 딥 퍼플의 리치 블랙모어였고 그걸 완성시킨 인물이 잉베이 말름스틴이다. [10] 바로크 메탈이라는 표기는 잘못됐다. 일본에서 파워 메탈을 편의상 멜로딕 스피드 메탈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예. 단 바로크 메탈이라는 표현은 한국에서만 잘못 사용되고 있다. 당시 리스너들이 이것을 바로크 음악과 비슷하다고 표현해버려 이게 그대로 표현이 들어와 정착한 사례. 정확한 표기는 네오 클래시컬 메탈이라고 부른다. 다만 파가니니, 리스트 쇼팽 등의 영향이 큰 다른 록커들과 달리 잉베이의 경우는 바흐의 영향이 워낙 두드러지므로 바로크라고 해도 크게 틀릴 건 없다. 뭐 바흐빠로서는 존 로드가 대선배이지만 [11] 폴 길버트는 극한의 테크니션으로서 잉베이와 비슷한 이유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 다만 폴 길버트를 예시로 드는 것은 좀 어폐가 있는데, 84년 당시 길버트는 이미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아직 기타리스트로서 성장하고 있던 18세 소년이었다."내로라하는 기타리스트"라기보단, "무시무시한 유망주" 정도 위치. 이해에 GIT 입학, 이듬해에 동기들과 함께 레이서 엑스를 결성하면서 성장했으니, 라이징 포스 발매 당시 완성된 기량을 갖고 있던 잉베이에게 상대가 안되는 건 당연하다. 실제로 길버트는 잉베이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저때 충격을 받은후("It lit a fire under me"라고 표현) 속주를 편하게 하기 위해 피크를 잡는 법도 바꿨다. 잉베이의 데뷔에 자극받아 실력을 키우고 우리가 아는 "그 폴 길버트"가 된 거니, 잉베이 데뷔 당시에 상대가 안됐다는 건 당연한 소리. 전성기 기준 잉베이와 길버트는 극강의 테크니션이란 과 속주달인이란 점이 비슷할 뿐 정확한 스타일도 다르고 장단점이 다르기 때문에 우열을 가리는게 의미가 없다. . [12] 원래는 마이켈 솅커. 잉베이의 등장 이후에 바뀌어 들어갔다. 또한 잉베이 빼고는 매번 바뀐다. 조지 린치가 들어가는 경우도 있음. [13] 여기서 3대란 기타 연주 주법의 3대 혁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미 헨드릭스는 뭐 따로 언급 할 필요도 없고 밴 헤일런은 '양손태핑', 잉베이는 '스윕 아르페지오'를 도입해 새로운 연주 스타일을 열었다.라는 정도로 이해하자. [14] 정확히는 지미 핸드릭스의 부고를 알리는 방송이었고, 연주 장면은 그의 자료화면이었다. [15] 당시 영상. 1970년이라 그런지 화질이 좋지 않다. [16] 그 당시 어린 잉베이가 보았던 것은 이빨로 연주하고 기타에 불지르는 영상이었다. 잉베이도 공연에서 이따금씩 이빨 피킹을 선보이기도 한다. [17] 리치 블랙모어는 지미 헨드릭스에게 동시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기타리스트이므로, 리치 블랙모어의 직계 후계자를 자처하는 잉베이 또한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18] "I still adore him(Richie Blackmore)...... but my classical style of playing.......didn't come from him" "오히려 클래식컬한 영향은 제네시스가 더 컸다." -Relentless- [19] 정작 리치 블랙모어는 잉베이를 평가해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항상 나에게 공손하고 예의를 표하고 나도 그가 인간적으로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나는 대체적으로 나의 추종자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고 그다운 대답을 하였다. [20] 바이올린 역시 주니어 콩쿠르에 나갈 정도로 연습했었다. 그러나 입상 경력은 없음. [21] 쉬라프넬 레코드사 사장으로, 제이슨 베커를 발굴해서 마티 프리드먼에게 소개시켜준 후 캐코포니의 앨범을 제작했고, 그 외에 그렉 하우, 크레이그 골디, 글렌 휴즈, 조지 린치, 비니 무어, 토니 매컬파인, 제이크 리, 폴 길버트, Racer X 등 7-80년대 메탈씬의 1/4은 그를 거쳐갔다. [22] 하루에 연습하는 3시간은 실전처럼 연습하는 시간으로 보인다. 보컬이었던 팀 리퍼 오웬스 인터뷰(링크)에서 잉베이 주위에는 항상 기타가 있고 수시로 연주를 하며 자신이 지금까지 만났던 어느 기타리스트보다도 기타 연주 자체를 즐기는 사람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23] 라이브 편집반이므로 실제로는 앨범 한 장 만들고 나간 셈 [24] 하지만 잉베이는 자서전에서 반대로 이야기 하고 있으며 특히 그레이엄 보넷의 목소리는 정말로 훌륭하지만 술에 쩌들어 라이브도 잘 못하거나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심지어 기타코드를 누군가 고의로 뽑아 놓았다고 기억한다고 섰다. [25] 아마 시절 사용했던 밴드명 [26] 옌스 요한슨의 인트로가 추가되어, 본 노래는 4분쯤부터 나온다. 보컬리스트는 이후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는 제프 스캇 소토. [27] 군인이었고 어느날 러시아어를 공부하더니 구 소련에서 일하고 있더란다. 알고보니 스파이었다나 뭐라나. [28] Yngwie Malmsteen: Relentless: The Memoir 잉베이 자서전 [29] 다만 빌리 조엘이 1987년 중순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의 레닌그라드)에서 6회의 공연을 하고 같은 해 10월 그를 취합한 라이브 앨범(Концерт)을 발매한 적이 있기는 하다. [30] 과잉진압이라고 생각이 들겠지만, 이 어머니라는 작자가 잉베이가 자신에게 총을 겨누어 협박했었다고 신고했다. 그래서 경찰들은 무장을 했을 것이라 판단하고 과잉진압을 한 것. 첫번째 아내와 결혼은 하였지만 결국 이혼. [31] 그의 매너리즘에 대한 지적에 대해, 인터뷰에서 '클래식 연주자들은 한 곡을 십 수 년간 다듬어서 월드투어를 하기도 한다'라는 말도 했다. 잉베이의 클래식 음악계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발언. 실제로 연주자들은 했던 곡을 다시 치는 경우도 많지만 그만큼이나 새로운 레퍼토리를 장착하려 애쓰는 경우가 훨씬 많다. 굳이 말하자면 솔로 레퍼토리 자체가 많이 없는 마이너한 악기의 경우는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정도.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 등의 몇 년간 레퍼토리를 보면 잉베이의 이 발언은 그냥 헛소리다. [32] 사실 이런 것까지 업적이라고 표현하는건 어폐가 있다. 그렇게 따지면 로니 제임스 디오. 그래험 보넷을 보컬로 기용한 리치 블랙모어, 무명의 로버트 플랜트를 기용한 야드버즈 출신의 지미 페이지, 알카트라즈를 만들어 잉베이를 데려다 유명하게 만든 그래험 보넷 등이 훨씬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이들이다. [33] 플레이어가 제프 벡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몹시 당황스러워하는 것이 백미 [34]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이 그토록 싫어하던 얼터너티브/그런지 록이 광풍이 휩쓸던 90년대에. 당시 이들은 얼터너티브 록/그런지의 요소를 따라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대부분이 제대로 된 융화를 하지 못하고 음악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실패한 앨범들이 부기지수였다. [35] 잉베이가 쓰는 스트라토캐스터는 이미 일반적인 스트랫이라고는 볼 수 없을만큼 과도하게 개조되어서 본래의 소리가 많이 변형된 상태인데다가 저 톤을 찾고 카피하는데에 걸린 시간이 5-6년 정도 된다. [36] 간단히 말해서 자주 쓰는 음의 조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37] 전성기 때는 특히 앨범버전이 원래 빠른 곡을 라이브에서 기교까지 섞어가며, 더 빠르게 연주하기로 유명했었다. [38] 여담으로 G3 중 가장 어리다. 조 새트리아니 - 1956년생, 스티브 바이 - 1960년생, 잉베이 말름스틴 - 1963년생. [39] 그리고 본인의 매너리즘에 대해서 그렇게 변명하고 있다. [40] 비브라토는 일정 수준에 오른 프로급 기타리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표현법이다. [41] 기교 자체를 매우 중시하는 프로그레시브 메탈, 아방가르드 메탈, 데스 메탈의 몇몇 하위 장르 등 제외. [42] 특히 펑크 쪽에서는 '못하는 게 컨셉'인 경우까지도 왕왕 있다. [43] 미국은 물론 전세계의 미디어에서 헤비메탈 뮤지션을 희화화할때 가장 많이 끌어올리는 이미지인 글램 메탈, LA 메탈의 양아치 컨셉이 잉베이와 같이 묶인 것도 잉베이가 유독 희화화가 심한 이유이기도 했다. 하술하겠지만 잉베이는 어느정도 개인적인 명예때문에 그런 이미지를 고수한 것 뿐이지 글램 메탈이나 LA 메탈과는 1도 관계 없는 사람이다. 그냥 그 시기에 가장 속주에 뛰어난 기타리스트였던 탓에 이들이 잉베이를 쫓아가기 위해 속주에 매달리다가 음악의 질을 훼손하는 상황까지 왔을 뿐이지 그게 잉베이 잘못은 아니니까. [44]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장르의 음악을 다 듣지는 못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자면 2013년에 드림 시어터의 보컬리스트인 제임스 라브리에가 존 페트루치와 함께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솔로밴드에서 이번에 낼 앨범은 최근에 유행하는 모던 멜로딕 데스 메탈과 메탈코어의 영향력이 물씬 느껴질거라면서 최근에 유행하는 밴드들의 이름을 줄줄이 말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존 페트루치가 끼어들면서 그거 밴드이름을 즉석에서 지어낸것이 아니냐며 잠깐 의문을 표하기도 했었다. 드림시어터는 잡식성으로 메탈과 메탈 이외의 장르도 골고루 다루는 밴드인데도 모르는 아티스트/음악이 있는것. 잉베이는 메탈 뮤지션 중에서 음악 편식이 상당히 심하고 빈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 더욱 부각돼서 나타난다. [45] 애초에 험버커를 그렇게 썩 좋아하지 않는데 하물며 EMG나 디마지오에서 내놓는 하이 게인 험버킹은 더더욱 싫어한다. [46] 밑의 '펜덕후 항목'에 걸려있는 유투브 영상을 보면 그의 기타 컬렉션 중에 Ibanez 스티브 바이 시그너쳐 젬 기타가 있는데 이것은 바이가 직접 선물한 기타라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47] 펑크, 그런지, 얼터너티브 항목 참조 [48]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영미권에서 헤비메탈의 시장이 축소됨에 따라 어떻게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이 자신들을 몰아냈는지 이들의 음악을 연구하기 시작하고 얼터너티브 록의 사운드 포징을 헤비메탈에 씌우려는 당시의 시류에 편승하려는 시도를 했다.하지만 이러한 형식의 음악적인 시도는 대부분 음악적인 평가에서 죽을 쑤었고 더더욱 자신들의 전성기의 평가에서 멀어져갔다. 대표적으로 메탈리카 Load, Reload. 근데 이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일부 펑크/코어 계열 밴드들이 80년대 스타일의 헤비메탈, 하드록 밴드들을 꼰대, 구닥다리, 유행에 뒤쳐진 노친네들 취급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일부 메탈코어 밴드들에게 메탈 밴드 혹은 하드락 밴드라고 하면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49] 본래 올림픽 화이트 색상이었으나, 오랜 사용으로 인해 피니쉬에 사용된 래커 도료에 황변이 일어나면서 거의 샛노란색에 가깝게 바뀌었다. [50] 참고로 이 기타는 스쿨밴드 시절 그가 참관했던 드러머 오디션에 왔던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던 기타였다. 그 친구는 드럼보다 기타를 더 좋아했다고 하며 잉베이는 이때 공연 후 그 기타를 구매하여 그의 커리어 대부분 동안 사용하였다. 해당 기타는 1972년에 생산된 스트라토캐스터로, 현재는 펜더에서 잉베이 시그니처 모델들을 여럿 만들어주면서 은퇴하였다. [51] 이 스캘럽 작업은 리치 블랙모어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있다. [52] 이 느낌을 두고 마치 작두 타는 느낌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53] 실제로 잉베이 말름스틴 시그니처로 연주를 해보면 일반적인 싱글형 픽업 스트랫들에 비해 노이즈는 적고 게인이 잘 먹는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54] 해당 모델은 그가 소유한 60년대 후반 스트라토캐스터의 사양을 기반으로 했기에 위의 The Duck과는 불렛 트러스로드가 없는 등 사양 차이가 어느정도 있다. 펜더 USA에서 나온 정규 시그니처 모델은 불렛 트러스로드가 있는 등 좀 더 70년대 스펙에 맞추어진 편. [55] 나머지 한 명은 에릭 클랩튼이다. [56] 펜더에서 직접 잉베이를 위해 만들어진 오버드라이브 페달. 현재는 펜더의 이펙터 라인업이 물갈이되면서 단종되었다. [57] 잉베이 본인 유튜브 채널에 깁슨 플라잉브이를 연주하는 쇼츠가 올라왔는데 잘 보면 싱싱싱 조합에 트레몰로 브릿지까지 박힌 비범한 물건이다. [58] 바로크 풍의 와이셔츠는 자기 가문에 내려오는 스웨덴 귀족 의상으로 미국에서 활동중에 뵙지 못하고 죽은 어머니가 살아 생전에 미국에 가는 잉베이보고 단정하게 멋진 옷 입고 부자나라에서 기 죽지 말라고 준 것, 포기하지 못할 만 하다. [59] 미국 시민은 아니지만 역시 미뽕 성향의 영화인인 롤란트 에머리히 역시 상당히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다. [60] 주마다 다르겠지만, 연방세만 내고 주정부에서 따로 세금을 걷지 않는 텍사스를 예로 들더라도 잉베이 수준의 고소득자는 약 40% 가량의 소득세를 지불해야 하는데, 자국인 스웨덴에 비교해도 결코 적은 수준이 아니다. [61] 마이크 베세라가 보컬로 있던 시절에 앰버가 베세라와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62] 사실 펜더가 잉베이 시그니처를 최초로 낸 시기가 솔로로 성공하고도 좀더 뒤인 1988년이라, 이미 1982년부터 일류 기타리스트로 지명도를 얻기 시작한 잉베이가 그 사이 다른 기타를 안 썼을리가 없다. 솔로 데뷔전 잉베이는 꽤 여러 회사의 기타를 썼고 심지어 그가 그렇게 혐오한다는 험버커 달린 기타도 잘만 썼다. 데뷔 초창기에는 일본 브랜드인 Aria Pro, 심지어 ESP의 랜덤 스타를 쓰기도 했으며 레스폴이나 플라잉 V의 일제 카피를 쓰기도 했다. 펜더와의 계약 전엔 쉑터의 엔도서로도 활동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