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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02:52:24

이연복

<colbgcolor=#455746><colcolor=#eee156> 이연복
李連福[훈음] | Lee Yeonbok
[2]
파일:이연복 인터뷰 프로필.jpg
출생 1959년 7월 11일 ([age(1959-07-11)]세)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
거주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국적
[[대만|
대만
중화민국
]][[틀:국기|]][[틀:국기|
속령
중화민국
]] →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68cm, 왼손잡이[3]
가족 남동생 이연희(1970년생)[4]
배우자 이은실
아들 이홍운(1980년생)[5], 딸(1981년생)
사위 정승수
손녀, 손자(2016년생)
반려견 생일이[6]
소속 목란 (총괄오너셰프)[7]
한국호텔관광실용전문학교 (석좌 교수[8])
종교 개신교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9]

1. 개요2. 상세3. 생애
3.1. 소년기3.2. 청년기3.3. 후각 상실3.4. 일본 시절3.5. 목란 개업3.6. 방송 출연3.7. 은퇴 이후 계획
4. 여담5. 주요 프로그램
5.1. 방송 중5.2. 방송 종료5.3. 게스트5.4. 책5.5. CF
6. 수상 경력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중식 요리사, 교수, 방송인.

2. 상세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08112715260130003800-001.jpg
2008년 (서울의) 한국 중화요리 4대 문파를 기사화하면서 소개한 사진. 이연복은 사진 맨 오른쪽에 있다.[10][11] 당시 사진을 찍었던 권혁재 사진 전문 기자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화요리 4대 문파의 대가를 한 자리에 모아 사진을 찍을 때였다. 그때 모인 14명 중 한 명이었다. 한 자리에 모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모여 사진을 찍었다. 당시 서로 간에 미묘한 기 싸움이 있었다. 누가 앞에 서고 뒤에 설 것인가의 자리배치, 대가들에겐 그 순서를 정하는 일도 어려웠다. 당연히 뒤에 있을수록 급이 떨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겨우 배치를 해서 사진을 찍다 보면 슬금슬금 앞으로 나서는 대가 몇 때문에 대열이 흐트러지곤 했다. 당시 이연복은 스스로 제일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었다는 후문이 있다.

여담으로 후술되어 있다시피 당시 같이 사진을 찍었던 셰프들 중 SBS Plus 강호대결 중화대반점이라는 요리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한 여경래, 유방녕, 그리고 여경래의 동생 여경옥이 이쪽 출신이다.

이연복은 4대 문파 출신이었지만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업계에서 인지도는 크게 없었는데, 한국 중식연맹회장을 맡고 있는 여경래 대가는 한 인터뷰에서 "명실상부 현재 최고의 중식 스타이며, 중식의 2차 전성기를 이끌고 있고 그만큼 왕성하게 활동해서 중식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고 2019년 기준 한국의 5대 중식 주방장을 뽑을 때 한 명으로 지목했다. 나머지 4명은 후덕죽, 왕육성, 여경옥 그리고 자신을 지목했다.

이연복은 안 그렇게 보여도 올해로 무려 [age(1959-07-11)]세로, 동갑 연예인으로는 배우 김미숙, 이보희, 차화연, 이문세, 김흥국, 이성미가 있다. 그리고 상당한 동안이다. 얼굴 피부뿐만 아니라 손도 굳은살 없이 보드랍다. 왠지 치유력이 좋아 베인 상처도 금방 낫는다고 한다.
대한민국 국적으로 귀화했고, 화교학교를 다녀서 중국어가 유창하며, 화교 커뮤니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므로 현재의 이연복은 화교가 아닌 화인이다.[12][13]

3. 생애

3.1. 소년기

중화민국 국적의 재한 화교 집안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화민국 산둥성 무핑(牟平)[14] 출신이며 어머니는 중화민국 산둥성 라이양(莱阳) 출신이다.

서울시 왕십리에서 태어난 화교 2세 출신이었다.[15] 이연복의 부모가 태어났던 당시 중국 본토는 국공내전이 끝나기 이전 중화민국 체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중화민국(대만) 국적이 되었다.

이연복은 성인이 될 때까지 중국 산둥성에 가본 적도 없다고 밝혔다. 과거 대한민국은 자국민의 공산권 국가 방문을 매우 엄격히 제한했는데[16] 1980년대까지는 재한 화교들도 중국을 방문하기 힘들었다. 당시 냉전의 영향으로 화교들도 허가 없이 중국(공산당 체제)에 입국했다간 다시 대한민국에 재입국이 힘들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 중식당이 잘 안 돼 가세가 기울자, 사립인 화교 초등학교의 높은 학비를 견딜 수 없었다. 어릴 적 짱깨라는 놀림도 자주 받았다. 6학년 때 중퇴를 결심, 13살의 나이로 처음 배달가방을 들었다. 당시엔 철가방이 없어 나무 가방으로 배달을 했다고 한다. 재질이 재질이라 매우 무거웠다고. 그리고 그 당시에는 랩을 감아주고 이런 게 없었기 때문에, 가다가 엎으면 욕은 욕대로 먹고 음식값만 물어줘야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버지 지인 가게에서 견습을 했으나, 직원들이 사장 똘마니라고 왕따를 시키자 다른 중식당에 취직한다. 17살에 명동 사보이 호텔 중식당 <호화대반점>의 막내로 들어간다.

호화대반점 총주방장이자 한국 중식1세대이자 한국 중화요리계 최고령 요리사 장홍기 밑에서 중식 조리와 다양한 코스 요리 및 고급 음식을 배웠다. https://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6425

일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둘째 칼판에 오른다. 재료를 칼로 썰고 다듬는 담당이다. 대형 중식당 요리사는 재료를 익히는 불판, 면이나 빵 요리를 담당하는 면판 등으로 분업화되어 있다. 위 사진이 실린 기사에 따르면 저 당시에는 칼판이 가장 위세가 좋았다고 한다. 반면 오늘날에 제일 대우 받는 것은 불판. 현재 위에 중화요리 어벤저스에서 가장 유명한 불판장은 유방녕 셰프.

일손이 필요할 때면 자기 친구들도 호화대반점에 취직되도록 다리를 놔줬다. 그러다 어느 날 주방 파벌간 패싸움에 휘말리면서 그만뒀다. 평소 의리로 도와줬던 사람들이 반대로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는 모르는 척 해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방송이나 술이 좀 취하면 당시 얘기를 하는 듯하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었는지 성격이 상당히 세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그래서 어릴 때 식당에서 외상 손님에게 밀린 돈을 받는 험한 일도 도맡아 했다고 한다. 이 날카로웠던 성격과 인상은 청년기 때까지 계속 이어지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아내와 함께 중식당을 열었을 때부터 현재와 같이 성격과 인상이 유순해졌다고 한다.[17]

3.2. 청년기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낸 후 1980년 22살 때 선배의 추천으로 주한 대만 대사관 조리장에 지원했다. 최종 후보 3인이 실기 면접을 보았는데, 이 때 자신을 최연소 조리장으로 합격시켜준 중국 요리 동파육은 지금까지도 운명의 요리라고 한다. 대사관 근무로 안정적인 수입이 생겨 생활이 평탄해지고 한국인 아내와 결혼하여 가정도 꾸렸다. 또 대사관은 연회를 자주 여는데, 매번 다른 손님에 또 매번 다른 요리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되었다. 주한 대만 대사관에서 약 8년간 조리장으로 근무했다.

3.3. 후각 상실

1984년, 26살 때 축농증 수술의 후유증으로 후각을 잃었다. 이는 부비동 뼈를 들어내고 통로를 만드는 구식 수술을 할 때 신경을 잘못 건드려서 생긴 부작용이다. 미국에서 들어온 튜브 시술법을 사용하게 되면서 후각 상실 위험성이 크게 줄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능성은 남아 있어서 수술 전에 분명히 고지한다.
대만 대사관에서 일할 때였다. 대만 대사가 1년에 한 번씩 자기 나라로 들어가는데 내 코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 그땐 대만 의료 기술이 한국보다 나았다. 당시 대수술을 했다. 수술하고 났는데 그 뒤부터 냄새가 안 나더라. 지금도 아예 못 맡는다.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셰프 편)
요리사로서 후각 상실의 문제는 치명적이다. 인간이 맛을 구별하는 능력은 미각보다는 후각에 훨씬 많은 영향을 받는다. 비유하면 눈이 먼 화가, 귀가 먼 음악가인 것이다. 미각이 구별하는 맛의 영역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고, 나머지는 모두 후각으로 인해 느껴지는 맛이다. 실제로도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으면 식욕이 돈다. 감기에 걸리면 입맛이 없어지는 것도 후각이 마비되어서 미각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중국 요리의 핵심이라고 할수 있는 불맛은 맛이 아닌 냄새다.

이후 이연복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미각 촉각만을 사용하여 요리하면서 후각을 대체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수증기를 손으로 만져서 조리가 진행된 정도를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후각을 잃은 대신 미각이 발달하여, 음식 맛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간 조절을 더 정확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18] 마이웨이 3화

이 이야기는 원래 무덤까지 갖고 갈 생각이었는데, 기자 한 명에게 몰래 언급했더니 기사를 내어 일파만파 퍼지는 바람에 공개되었다고 한다. 냄새도 못 맡는 주방장이 하는 식당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손님들이 뚝 끊길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후각을 상실했음에도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내는 주방장이라는 소문이 퍼지며 식당이 더욱 잘 되었다고 한다. 한 번 퍼지고 난 이후에는 본인도 스스럼 없이 밝히게 되었다.

2015년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후각을 잃기 전에 익숙하지 않았고 많이 맛보지 못했던 서양 식재료인 트러플, 올리브오일처럼 향으로 유명한 것은 맛을 알 수 없다고 밝혔다.

3.4. 일본 시절

일본에 있던 친구의 권유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 친구가 '너 일본 오면 지금 월급의 10배는 받는다'며 권유하였고, 혹해서 일본으로 향했다고 하는데 일본어도 제대로 배우고 가지 않아 말도 제대로 못하고 힘든 생활을 겪으며 매일 후회했지만, 이후 일이 잘 풀려 진짜로 월급을 엄청나게 받았다고 한다. 한화로 700만원 가량을 월급으로 받았다고 하니 지금으로 쳐도 상당한 수입인데, 2년만의 수입으로 살인적인 땅값으로 유명한 일본에 자가를 마련했을 정도였으며 그때 인연으로 일본행을 권유한 친구와는 아직도 잘 지낸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일부러 경력을 숨기고 다시 설거지부터 시작하였고, 야간업소의 주방장으로 일을 하며 돈을 모으다가 도일 4년만에 투자를 받아 도시락 가게를 창업했다. 이 시기 한중일 손님의 다양한 입맛을 주변과 차별화된 메뉴로 사로잡는다.[19] 또한 웃으면서 손님을 접객하는 일본 특유의 서비스 정신을 배우게 된다. 처음에는 드나드는 손님에게 일부러 인사하였으나, 나중에는 그것이 진심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 오사카에서는 10년 간 체류했다. 당시 자녀들은 한국에 거주했다고 한다.

한편 일본 시절 파칭코를 배우는데, 대사관 시절의 월급인 몇만 엔씩을 매일 딸 정도로 잘 쳤다. 그러나 돈을 물 쓰듯 쓰고 담배도 많이 피우면서 점점 폐인화되는 것을 느껴 그만두었다.

3.5. 목란 개업

1998년 대한민국으로 돌아와서 중식당 ' 목란'을 개업한다. 식당 이름의 유래는 중국의 설화 주인공인 화목란.[20]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대신해 군대에 갔던 화목란의 이야기가 마치 어린 나이에 배달통을 들어야 했던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느껴져 상호명으로 생각해 두었던 이름이라고 한다. 그 당시에는 중국집 배달통은 나무 가방이었다. 장난 아니게 무거웠다고. 실제 철가방은 무거운 철이 아니라 알루미늄 합금판으로 만들며, 오늘날의 배달통은 플라스틱으로 만든다.

목란은 한국 자영업자의 설움인 월세 인상에 쫓겨 몇 차례나 위치를 이전했다. 수요미식회 짬뽕 편에서 월세 스트레스를 언급한 적이 있다.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최현석에게 반쯤 농담으로 셰프 몇이 힘을 합쳐 건물을 같이 올려 각자의 레스토랑을 개업하자고 했는데, 그에 동참하며 이 분 혼자만 눈빛이 농담이 아니었다. 썰전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서장훈이 임대 기간이 끝나고 정 마땅한 곳이 없으면 연락해 달라고 명함을 건네기도 했다.[21]

가게 목란은 2024년 기준 서울시 연희동에 있다. # 본래 임대료에 쓸 돈으로 맛에 투자한다는 신념으로 번화가가 아닌 외진 주택가에 자리했지만, 365일 24시간 예약이 폭주하면서 위치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게 되었다. 가게 관련 내용은 아래를 참조.

3.6. 방송 출연

2011년 올리브 쿠킹 타임에 출연해서 마지막 5회 동안 중국 요리를 선보였다. 2006년 4월 17일자를 시작으로 생활의 달인에서 중화요리의 달인으로 몇 차례 출연하였고, 2014년 O'live 오늘 뭐 먹지에 출연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2015년 냉장고를 부탁해 최현석 대신 게스트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방송 출연을 시작한다. 40여 년이라는 경력, 장난과 농담을 좋아하는 예능감으로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잇따라 섭외된다.방송인들로부터 예능 감각이 있다는 평을 받았다. 해피투게더에서 이홍렬 개그맨의 피가 있다는 평을 했다. 해당 방송분에서는 박명수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빠르게 츳코미를 넣는 것을 볼 수 있다.

방송 출연 후 가게가 유명세를 얻게 되면서 월 매출이 2,000만원 이상 하락하는 곤욕(?)을 치른다. 목란은 원래 코스 요리를 즐기는 단골 손님으로 자리가 꽉 차는 식당이었다. 그런데 방송 후에는 다양한 중식 메뉴에 익숙하지 않은 손님들도 몰리면서 짜장면, 탕수육과 같은 식사류만 시키는 경우가 많아 객단가가 떨어지면서 매출 감소를 겪는다. 강레오도 방송으로 유명해진 셰프들의 식당은 매출 하락이 심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방송으로 인기가 오른 후 여러 광고에 출연하자 과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수요미식회에서 밝힌 바로는 월세가 올라 힘들다고 한다. 매출은 줄고 월세는 올라 이중고.

하지만 다행히도 2015년 말부터는 "예약이 너무 힘들다 보니 손님들이 단단히 벼르고 찾아와서 각종 요리를 다 맛보고 가시면서 오히려 전보다 매출이 늘었어요."라고 밝히기도 한다. 예약이 얼마나 힘드냐면 전화 500통은 기본으로 깔고 가야 한다. 운 나쁜 경우는 1000통을 돌려도 안 된다. 200~300통 돌려서 예약을 잡으면 운 좋은 케이스. 심지어 예약 방법에 대한 글이 네이버에 찾아보면 나온다.

예약 방법 관련된 글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론상으로는 언제든 예약 가능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원하는 예약 날짜 한 달 전, 그것도 1일 또는 16일 이틀만 예약이 가능하다. 직접 방문해서 펑크가 나면 예약이 가능하지만 실제론 불가능하다. 죄다 200통씩은 전화 돌리고 오는 판국인데 그거 아까워서라도 펑크 내기 어렵다. 당연히 예약 자체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어려우니 한 번 갈 때 어지간히 쓰고 올 수밖에 없다. 인당 8만원 하는 스페셜 코스에 동파육을 시키는 것이 사실상 거의 기본 코스다 보니, 2명이 가도 최소 20만 원은 찍고 나오니 당연히 매출이 오를 수밖에 없다.

본인이 직접 주방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 목란은 월요일이 휴무일이며 이 때 방송 촬영을 한다. 냉장고를 부탁해는 격주 간격으로 월요일에 2주 분량을 한꺼번에 촬영한다. 따라서 한 번만 촬영을 쉬어도 냉부 촬영은 한 달에 한 번밖에 되지 않는다. 그 외 인터뷰 같은 것은 식당 영업이 끝나고 자정을 넘어가는 시간대에 한다. 정말 부득이한 일로 식당을 비울 때는 본인 다음 가는 실력의 2인자가 주방을 잡는데 바로 사모님이다. 보통은 계산대 옆이 사모님 포지션이고 남편을 사장이 아니라 주방장으로 부른다.

유명 셰프가 있는 식당들의 운영은 대부분 비슷한데, 일단 해당 셰프 얼굴을 보기가 굉장히 힘든 것이 특징이다. 운영 시간을 매우 줄여서 한정된 양의 음식만 팔든가, 아니면 보조 요리사들을 대거 고용해서 늘어난 고객을 응대하고 유명 셰프는 거의 얼굴마담만 하든지 하는 형식이다. 목란은 후기에서도 보면 알다시피 이연복의 얼굴을 보는 경우가 매우 많고, 이연복이 있든 없든 요리의 맛이 별로 변화가 없다는 특징이 있다.

방송 출연 자체는 본인이 즐겁기 때문에 계속 하고 있다고 한다. 막상 목란 식구들은 아무도 방송 출연을 원치 않는다지만, 본인은 이미 중식 요리사로서 열심히 살아오면서 이룰 것은 다 이뤄냈고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방송은 취미 비슷한 것으로 설사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자칭 맛 칼럼니스트인 황교익은 이연복의 방송 출연 계기를 두고 "그냥 좀 심심하셨던 것 같다."라고 추측했다. 이미 업계에서 탑 티어인 데다가 홍보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는 고급 재료는 물론이고 냉장고에 있는 싸구려 저질 재료로도 순식간에 고급 중화요리로 둔갑시키는 마술과도 같은 실력을 선보인다. 그 덕에 쟁쟁한 셰프들 중에서도 2연패를 달성했다.

여담으로 자신의 SNS에 잊을 수 없는 요리 프로그램을 뽑으라면 냉장고를 부탁해를 뽑을 것이라고 밝혔다.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하는 셰프들은 정말 실력파들이고, 자신도 겸손해진다고.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요리를 한 입장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기술이 계속 나온다고 한다. 모토가와 아츠시가 특별 출연했을 때 처음 보는 요리법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요리의 길은 멀고 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어쩌면 고든 램지 제이미 올리버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맛깔스럽게 잘 이끌어준 김성주 안정환의 재주에 존경을 표한다고 했다. 그리고 연예인들을 섭외하는 제작진들의 섭외력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는 짤막한 글을 올렸다.

3.7. 은퇴 이후 계획

은퇴한 후에는 유기 동물을 거두어 보호하는 시설을 운영하며 노년을 보내고 싶다고 한다.

구조된 유기견을 입양한 그는 유기견과 동물권을 주제로 한 어린이책 개는 용감하다 #쪼잔한 녀석들[22]. #에 추천사를 쓰기도 했다.

지금도 쉬는 날에는 아내와 함께 유기견 보호센터에 봉사활동을 다닌다(MBC 스페셜 셰프테이너 편). 또 목란 주차장에는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밥그릇도 있다. 그런데 돌보던 길고양이가 다른 사람에게 폭행을 당하고 죽은 일이 있어, 야생동물 학대죄에 대한 토론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관련 기사. 이연복도 분노가 컸는지 평소의 온화한 모습과 달리 폭행범에게 ' 너 내가 잡으면 똑같이 해준다'는 일갈을 날렸다. 이에 인터넷상에서는 동물을 죽인 폭행범을 비난했다.

수제자 두 사람에게 가게를 내주고 세를 받아 노후를 살고 싶다고 방송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중화대반점에 데리고 나온 수제자들을 언급한 것이라면 둘 다 독립했고, 이후 방송에서도 딱히 노출되는 수제자는 없다.

부산에 분점을 냈는데, 이연복과 부인, 아들이 돌아가면서 부산에 내려가서 운영하다가 2022년 폐점했다.

그 외에 중식 레시피를 단순화하여 소자본으로 창업할 수 있는 프랜차이즈의 구상을 내비친 적도 있다.

교자란이라는 만두 브랜드를 시작했다.

4. 여담

5. 주요 프로그램

5.1. 방송 중

5.2. 방송 종료

5.3. 게스트

5.4.

5.5. CF

6. 수상 경력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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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음] 이을 [2] 중국어로는 Lǐ Liánfú(리롄푸). [3] 각종 요리 프로그램에서 왼손으로 칼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방탄소년단의 멤버 의 브이로그에서도 언급된다. [4]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231112_0002518133 [5] 목란에서 같이 일하고 있으며 직급은 부장. 2017년 원나잇 푸드트립에 동반 출연. 2019년 2월 5일~2월 6일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파일럿과 2019년 4월 28일 정규 편성으로 아버지와 함께 출연. 목란 부산점 대표 겸임하였으나 부산점은 2022년 4월 30일에 영업을 종료하였다. 2024년부터는 공동대표로 임명한듯 하다. [6] 아들과 딸의 생일날에 입양했다. [7] 2024년 현재는 아들 이홍운 셰프에게 대표자리를 물려주고 총괄셰프로 이동한 듯 하다. [8] 2016년에 취임하였다. [9] 구독자명은 이연복의 '복'을 따와서 복덩이라고 직접 지었다. 사실 처음에는 복덩어리였으나, 사람들에게 친숙하면서도 한 글자 차이로 부르기 쉬운 복덩이로 변경하여 부르게 된 듯. [10] 이 기사에서 4대문파는 아서원, 호화대반점(사보이호텔), 홍보석, 팔선(신라호텔)을 가리킨다. 이연복은 4대 문파 중 호화대반점 출신이다. 2015년 기준, 팔선만 영업 중이다. [11] 한편 생활의 달인에서는 기존의 4대문파에 더해 봉황(밀레니엄서울힐튼호텔), 금룡(쉐라톤워커힐호텔), 서궁(더팔래스호텔), 대려도를 신 4대 문파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 '신 4대 문파' 중에서는 금룡과 서궁, 대려도가 영업 중이다. 봉황은 타이판으로 바뀌었으며(코스 이름에 '봉황'이 남아있다), 대려도는 2015~6년 휴점했다가 다시 영업 중. 물론 4대 문파니 5대 주방장이니 다 방송을 타면서 알려진 그들만의 설정이지 식당을 찾는 일반인들과는 별로 무관한 얘기다. 게다가 서울 수도권 기준이며 전국이 아니다. [12] 한국에서는 중국계 혈통이 있으면 전부 화교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지만 중화권에서는 아예 다르게 구분한다. 중국 국적이나 대만 국적을 유지하는 해외 이민자가 화교이다. 현지 국적을 가지고 현지 문화에 깊이 동화되어 현지인의 정체성을 가졌으며, 중국계 커뮤니티에 별로 참여하지 않는 경우에는 화예이다. 배우 하희라가 화예에 속한다. [13] 여담으로 대한민국으로 귀화한 화인이어서인지 방송에서 화교 관련 컨텐츠. 특히 중국 음식으로 다큐멘터리를 촬영할때 다른 화교 요리사들이 주로 나오고 그는 나오지 않는다. [14] 이곳은 현재는 옌타이 시의 옆동네인 현급시로 사실상 옌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5] 이후 일본에서 10년간 생활했으며 40살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고 중식당 목란이 자리 잡으면서 대한민국 국적으로 귀화했다. [16] 비단 공산권 뿐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일부 국가를 방문할 때에도 반공교육 이수가 필수인 등 해외 한 번 나가려면 상당히 귀찮은 절차를 거쳐야 했다. [17] 다만 흔적은 남아있어서 아래에도 나와있지만 자신이 책임지던 길고양이들을 누군가 때려죽인것을 보고 범인에게 제대로 일갈을 날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18] 비슷한 영역으로 시각장애인들은 앞을 볼 수 없는 영향으로 사물 및 상황을 구분하기 위해 노력하여 상대적으로 비장애인들보다 청각과 후각이 뛰어나게 된다. [19] 일본 손님이 오면 달달하게, 한국 손님이 오면 매콤하게 요리했다고 한다. [20] 화목란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21] 알려져 있다시피 서장훈은 건물주이며 시세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임대료를 저렴하게 받고 있다. [22] 어린이들 사이에서 알아주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박현숙의 신간, 구조된 유기견들끼리 싸우고 우정도 나누는 이야기 [23] 1박 2일에 출연했을 당시 이 이야기를 하면서 "배부를 때 간을 보면 간이 잘 안 맞아. 음식은 배고플 때 해야 맛있게 나오는 거야."라고 언급했다. [24] 1박 2일 시즌 3에도 주안상 특집에 전문 셰프로서 출연해, 셰프부 대결에서 마늘을 한 방에 다져버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다. [25] 이연복 셰프가 첫 대결부터 대놓고 칼판으로 마늘을 찍어서 다지는 모습을 보여줬음에도 다른 셰프들이 괜히 마늘을 칼날로 빠르고 얇게 썰어가면서 다지는 것이 아니다. 요령 없이 무작정 따라하기에는 능숙하게 해내는 이연복 셰프처럼 한 방에 다지기가 힘든 기술이기 때문. [26] 실제로 비슷한 경력을 가진 여경래도 철가방에서 시작했지만, 이미 그때부터 일과시간이 끝나면 손으로 직접 요리를 베껴그리고 선배 요리사들의 도움을 받아 레시피 과정을 직접 작성하며 공부해왔기때문에, 이때부터 경력을 세는것이다. 직접 칼이나 냄비를 손에 안쥐었다고해서 요리를 안배운건 아니라는것. [27] 어디까지나 이연복은 아는 중식당이 장사가 안되어서 '이연복이 다녀온 식당' 수준의 인지도를 줄 생각으로 같이 사진을 찍어준것이지 스승이니 제자 같은 사칭을 하라고 한게 아니었다. 이러한 행위는 심해서 '이연복 스승 체인점'까지 나왔다고 한다. [28] 네티즌들은 이연복이 입장을 밝혔을때 이연복의 나이가 64세인걸 감안하면 스승이 진짜로 있다고 가정할시 스승의 나이는 최소 75~80세 정도 되었을 것인데 80세 되는 요리인이 은퇴를 하지 어떻게 현역이겠냐며 이연복의 유명세를 사칭해서 체인한 업체들에 대해 비판중이다. [파일럿] [30] 2015.03.19 방영분. 당시에는 자막에 이라고 오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