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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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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42년 1월 25일
강원도 춘천도호부 남산외일작면 가정리
(현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1]
사망 1915년 1월 29일 (향년 73세)
중화민국 펑톈성 관전현(寬甸縣) 방취구(芳翠溝)
(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콴뎬 만족 자치현)
본관 고흥 류씨[2] #
가족 아버지 류중곤(柳重坤)
양아버지 류중선(柳重善)
어머니 고령 신씨 부인
장남 류해동(柳海東)
차남 류제함(柳濟咸)
자 / 호 여성(汝聖) / 의암(毅庵)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의병 운동의 전개4. 이후의 행보5. 기타6. 평가
6.1. 긍정적인 평가6.2. 부정적인 평가
7. 그 외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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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 위정척사파, 유학자. 최초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은 그의 조카 며느리이다.

춘천 출신이지만 주로 제천 등지에서 활약을 했기 때문에 제천시에서도 한방 도시와 함께 많은 홍보를 하는 인물이다.

2. 생애

1842년, 강원도 춘천부(현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3] 출신. 춘천 출신이지만 주로 제천 등지에서 활약을 했기 때문에 제천시에서도 한방 도시와 함께 많은 홍보를 하는 인물이다.

아버지 유중곤(柳重坤)과 어머니 고령 신씨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되던 해 족숙(族叔)인 유중선(柳重善)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이후 양가(養家)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양가의 증조부 유영오가 화서 이항로와 교분을 맺고 있던 터라 선생은 화서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화서학파의 위정척사, 존화양이 사상에 심취한다.

강화도 조약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47명의 화서학파 인물들과 함께 복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를 올려 조약 체결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3. 의병 운동의 전개

1893년에 제천 장담(長潭 : 현 봉양읍 공전리 장담마을)으로 이사했으며, 이곳이 유인석이 이끄는 의병 활동의 근거지가 된다. 이후 을미사변이 터지고 단발령까지 겹치자 전국적으로 의병 항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유인석 역시 이에 대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제2차 의제 개혁 직후 '변고'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1895년 5월 2일, 3일 양일간에 문인사우(門人士友) 수백 명을 모아 놓고 장담에서 대규모의 강습례와 향음례를 거행하면서 사실상 의병 항쟁의 준비 단계를 밟는다.

유인석의 문인들인 이춘영과 안승우가 1896년 1월 12일, 김백선의 포군을 주축으로 경기도 지평에서 거의한 뒤 제천으로 진격하여 군수 김익진을 축출하였다. 이후 단양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일시적으로 격퇴하였으나, 반격이 지속되자 유인석은 이들을 영월로 모두 모이게 하였고, 여기서 의병들의 간청으로 의병장에 오르게 된다.

이후 충주성을 점령하고 충주부 관찰사 김규식을 중앙의 명을 받아 단발령을 시행했다는 이유로 살해하였고 제자인 이범직을 시켜 단발령을 시행하던 천안군수 김병숙도 살해했다. 그다음엔 단발령을 시행하던 평창군수 엄문환도 살해했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에 지쳐 충주성을 버리고 제천으로 퇴각했다. 이후 단발령이 철회되고 김홍집 내각이 축출되자 거의 명분이 없어졌으므로 대한제국 정부에서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전언이 내려왔다. 그러나 정부가 특히 일제 침략 세력이 완전히 구축되지 않는 한, 또한 망국 개화 정책을 중단하지 않는 한 의병 항전을 계속할 것이라며 항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제천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는 제천성을 상실했다. 이후 의병들을 이끌고 소규모 전투를 행하면서 서북으로 간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관군의 압박이 이어졌으며, 이후 서간도로 망명한다는 결정을 내리고는 의병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다. 일제의 영향력이 없다는 것도 좋은 이유였지만, 동시에 유인석은 청의 군사적 원조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간도에서 무장 세력은 불법인지라 그곳 관리는 무장 해제를 요구했으며, 결국 유인석은 9월 28일 혼강(琿江)변에서 의병진을 해산한다.

4. 이후의 행보

1897년 3월에 일시적으로 귀국하였으나 곧 다시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후 1900년에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다시 귀국하였다.[4] 이때부터 황해도 평안도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향음례, 강습례를 수시로 열어서 존화양이 의식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고취시켰다. 1906년, 31대 연성공 쿵링이의 지원으로 청나라 망명을 추진했으나 그의 다릿병이 심해져서 포기하였다.

1909년 6월 연해주 의병 세력의 통합체인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 창의군이 결성되고, 그는 이상설, 이범윤, 이남기 등에 의해 대한13도의군 도총재에 추대되었다. 바로 그는 포고문 '통고13도대소동포을 반포, 만백성이 일치 단결하여 최후의 한사람까지 일본을 상대로 한 구국전을 벌일 것을 선언하였다. 이어 거병을 선언, 병력을 이끌고 두만강으로 쳐들어오려다가 실패, 조선-러시아 국경지대에서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10년 10월 2일 한일 합방 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블라디보스토크 지역과 인근 연해주 지역에 거주한 일부 한인 지식인들은 신한촌(新韓村)의 한민학교에 모여 한인대회를 개최하고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성명회라는 단체이름의 뜻은 '적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聲彼之罪 明我之寃)'는 뜻이며, 성명회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중이던 유인석을 초빙하여 성명회의 총대(대표)로 추대되하였다. 당일로 성명회 취지문을 발표하여, 조국 광복의 그날까지 일제와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0월 성명회 대표로 취임한 즉시 한일 합병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조선인 동포와 양심적 중국, 러시아 지식인들의 서명을 부탁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알릴 계획을 세웠다. 이어 중국, 러시아 인근에 산재한 주요 독립운동가와 일부 외국 지식인들의 호응으로 8,624명의 서명을 받았다. 그는 서명록은, 열강에게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천명하고 그 지지와 후원을 요청하는 '성명회 선언서'의 부본으로 8624명의 연명 서명을 첨부되어 미국, 러시아, 중화민국 등 각국 정부 및 입수한 신문사로 발송되었다.

대한제국의 국권피탈 이후에도 그는 조선 땅으로 진군하는 독립운동을 계속하였고 이상설 등과 두만강 연안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좌절되었다. 일본 외무성은 러시아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한편 러시아에 사절을 보내 외교적 교섭을 추진, 연해주 일대의 조선인 항일 운동 해산 및 추방을 여러차례 요구하였다. 일본의 거듭 요청으로 이상설, 이범윤, 이규풍, 김좌두 등의 항일 운동가들과 유인석의 문하생들은 일시 체포 투옥하고 러시아의 13도의군의 해산통고를 받고 와해되고 말았다.

유인석은 후일을 도모하고 이들의 석방을 조건으로 13도의군을 해산했으며 수화종신(守華終身)할 것을 주장하고, 이에 따라 그 자신도 연해주를 떠나 만주로 갔다. 1911년 10월 10일 청나라 후베이성 우창을 시작으로 신해혁명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인석은 당시까지만 해도 만주족의 청나라가 무너지고 한족 중심의 중화 왕조가 다시 들어설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신해혁명이 한족 중심의 성리학을 기초로 하는 전제군주제가 아닌 서구식 공화제에 입각하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불안한 감정을 품게 되었고, 이후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퇴위하고 한족 중심의 새로운 중화 왕조가 아닌 자신이 혐오하던 서양의 공화정을 골자로 하는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쑨원의 양보로 중화민국의 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를 비롯해 중화민국의 고위 관리들에게 후술한 우주문답의 초고가 될 서한을 보내 공화정을 버리고 다시 중화 왕조를 세울 것을 촉구했다. 허나 그의 반동적인 사상에서 기초한 의견은 위안스카이를 제외한 고위 관리들이 무시하게 되면서 낙담한다.

1913년 2월 그는 서간도로 가는 길에 블라디보스토크의 프시에트에 잠시 체류하며 중화론적 화이관에 입각해 동서양의 문물제도 등을 문답체의 형식으로 논술한 《우주문답(宇宙問答)》을 저술, 간행하였다. 1914년 3월 봉천성(奉天省) 서풍현(西豊縣)으로 옮겨서 생활하고 서간도 망명 생활에 들어갔다. 그해 5월 흥경현(興京縣) 난천자(暖泉子)로 옮겼다가 다시 봉천성 관전현(寬甸縣) 방취구(芳翠溝) 부락에 도착하였다. 1915년 1월 29일에 만주 펑톈성(奉天省) 관전현(寬甸縣) 방취구(芳翠溝)에서 병사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5. 기타

사람은 하루라도 임금이 없을 수 없고 또 삭발한 머리로 참람된 황제는 황제라고 할 수가 없어 아직 선왕. 선조의 황제로 칭한 제왕을 황제로 하여 천하의 참된 임금이 나오기를 기다린다고 하셨으니(중략) 내가 그 의리를 지킨다. (중략)

우리나라는 중화가 되었다 할 수 있는데 우리 군왕을 왜국이나 서양 사람들이 칭하는 황제와 동등반열로 하므로 임금을 높이기 위해 황제라 칭하거나 연호를 안 썼다.(중략) 그러나 이제 강제로 합방되어 우리 황제 지위를 폄하하고 연호를 폐하므로 우리 임금 존숭의 뜻으로 썼다.
'의암집'
江華洋亂  강화양란 강화도에서 발생한 서양인들의 난동
昇平世久恬嬉存 승평세구념희존 태평성대 오래도록 편안히 지냈는데
報急沁城洋祲昏 보급심성양침혼 서양인 침범 소식 강화에서 전해오네
都民鳥散震宸念 도민조산진신념 백성들 줄행랑쳐 달아나고 임금께서 근심하니
壯士雲興重國恩 장사운흥중국은 선비들이 불끈 일어나 나라 은혜 갚으려네

6. 평가

6.1. 긍정적인 평가

유인석은 의병장들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장기적으로 투쟁한 인물이다. 그는 을미의병 때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항전했고,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뒤 의병 해산 칙령을 내렸을 때 거의 모든 의병장들이 부대를 해산하는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해산을 거부하고 투쟁을 지속하다 여의치 않게 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했다.

이후 1907년 고종이 퇴위하고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그는 연해주로 망명한 뒤 이범윤 계열과 최재형 계열의 극심한 대립으로 분열해버린 독립운동세력을 통합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고, 이는 성과를 거두어 13도 의군이 창설되어 잠시나마 통합된 조직으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추진하게 했다. 그 후 한일병합이 선포된 뒤 일제의 압력으로 인해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서간도로 이동한 뒤 후학을 양성하며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다 끝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유인석의 문인으로서 독립운동에 뛰어든 대표적인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6.2. 부정적인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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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석은 자신의 최고 신념이었던 위정척사까지도 더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된 1910년대 이르러서도 유교적 복고 세계관을 결코 버리지 않았으며, 그것만이 정의이고 반드시 다시 구현해야 할 사회 정의이자, 정확히 말하자면 '진리'라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어찌보면 위정척사의 대표격인 최익현보다도 더 극단적인 복고를 외쳤던 인물이었다. 결국 전체적으로 평가하면 격동의 시대에서 뒤쳐지고 구시대적인 자신의 길만을 고집했다가 실패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유인석은 신분제도, 중화사상 지지로 비판받으면서 그중에서 위선적인 행동과 위법행위를 저지른것이 가장 심하게 비판받는다. 먼저 관찰사 김규식, 천안군수 김병숙, 평창군수 엄문환을 처형한 것이다. 물론 유인석이 평생 중화론적 세계관을 고수하고 개화를 극도로 증오한 것을 고려해 볼때, 그가 김규식, 김병숙, 엄문환을 처형한 것은 모순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이 세 관료가 단발령을 강행했다는 것 자체가 인륜을 파괴하고 조선을 금수의 세상으로 만드는 최악의 범죄 행위라고 봤다. 이는 그가 '의암집'에서 " 을미사변은 조정 대신들이 처결해야 할 문제지만 단발령은 모두의 문제다."라고 밝힌데서 짐작할 수 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단발령은 중화 질서를 유일하게 간직한 조선을 서양 오랑캐와 비슷한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었고, 공맹과 주자가 이어온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비록 존왕양이를 숭상하는 입장이었지만 고종의 연호인 '광무'와 순종의 연호인 '융희'를 "개화파가 붙여준 연호"라는 이유로 단호히 거부했던 그였기에, 왕이 임명한 관료라는 사실보다 단발령을 시행해 '조선을 금수로 만들어버린' 자들을 처단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유인석은 위선적인 행동과 위법행위는 당시에도 비판 대상이었다. 관찰사 김규식, 천안군수 김병숙, 평창군수 엄문환을 친일파로 몰고 있지만 실제론 김규식, 김병숙, 엄문환은 일본과 내통한 정황이 없고 유인석이 그들을 살해한 이유도 그저 단발령을 강행했다는 이유뿐이다. 당시 김규식과 김병석, 엄문환은 지방 관원으로 당연히 중앙의 명령에 따르는 입장일 뿐인데다 단발령 시행과 친일은 관련없는 사안인 만큼 유인석이 관료들을 살해하고 다니는 건 어떠한 정당성도 없는 반역에다 살인 행각일 뿐이다. 이런 건 존왕양이 정신의 척화사상에 위배된다. 아무리 그래도 동학도를 배척했으면서 자신도 동학도와 같이 지방관료를 그것도 악질 탐관오리가 아닌 황제가 임명한 일반 관료를 함부로 처형하였기에 같은 척사파이자 존왕양이파인 최익현보다 더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최익현도 유인석과 마찬가지로 수구적이었지만 역신과 매국노가 아닌 이상 황제가 임명한 일반 관료는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게다가 유인석은 의병 활동 당시에 평민 출신의 의병 지휘관인 김백선을 독단으로 처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사건 자체는 조금 더 복잡한 사건이었는데, 김백선이 항명한 안승우는 유인석과 달리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양반 가문 출신의 의병장으로 후에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의병장이었다. 김백선의 원군 요청을 안승우는 '대장을 옹위해야 하는 중군의 소임 때문에 병사를 함부로 뺄수 없다.'며 무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크게 패한 김백선은 격분하여 원군을 안 보냈다며 안승우의 면전에서 칼을 빼들고 항명하다가 군기 문란죄로 처형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칼을 빼들고 항명하였다고 해도, 김백선의 지휘계통상 직속상관인 안승우가 처벌할 일이지 총사령관도 아니고 옆부대 지휘관인 유인석이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래서 이는 명백한 직권남용에다 공식적인 재판이나 절차에 따르지 않은 사적제재와 살인에 해당한다. 이는 당시 갑오개혁으로 개선된 형법 기준으로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게다가 유인석은 김백선을 처벌하면서 '그대는 본시 한낱 포수에 불과한 상민이었거늘, 어찌 분수를 모르는가? 여봐라! 저자를 군령위반 죄로 다스려서 포살하라!' 라며 의병들이 보는 앞에서 이를 그대로 이야기하며 처벌하는데 사실 어딜봐도 단순히 군령위반으로 처벌했다기 보다는 신분제를 중시했던 유인석의 한계가 강하게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단순히 유인석이 양반 신분을 이용하여 싫어하는 평민 출신 지휘관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고 평민을 대놓고 아랫것으로 여긴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로 인해 제천 의병 등 다른 평민 출신 의병들이 유인석의 행위에 크게 반발해 대거 이탈하면서[5] 의병은 결국 패배하게 된다.

사실 일본군에게 패퇴할 당시 김백선은 원군을 요청했지만 안승우는 대장을 호위해야 하는 중군의 소임 때문에 원군을 보낼 상황이 못 되었고, 그래서 대신 다른 의병장들이 원군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보내겠다고 해놓고 결국 보내지 못했거나, 기껏 보낸 원군이 정작 전투를 기피하고 퇴각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때문에 자기 휘하의 병사들을 대거 잃고 패하여 분노한 김백선은 알려진 대로 본영으로 돌아가 안승우에게 칼을 빼들며 따지며 분노했고, 진작부터 김백선을 곱지 않게 보던[6] 유인석은 군율 위반을 이유로 김백선을 처형했다. 또한 당시 상황상으로 안승우가 지키는 지역은 방어에 유리한 제천성으로 일본군에게 빼앗길 경우 허리가 잘리는 모양이 되어 심각하게 불리해질 수 밖에 없으며, 실제로도 김백선 처형이후 일본의 재공세에 함락되어 안승우도 부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처형당하게 될 정도로 공세가 강하게 집중된 지역이었다. 군 지휘계통과 당시 상황을 고려했을때, 처형까진 아닐지언정 처벌이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즉시처형이라는 가혹한 조치로, 의병 내의 양반과 평민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평민 출신의 포수들과 농민들이 김백선의 처형에 반발하며[7] 양반 의병장 지휘에서 대거 이탈하여 독자세력을 만들었고 이는 가뜩이나 허약한 의병세력의 분열을 초래하여 의병이 실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유인석이 "나라가 망하더라도 공맹과 주자가 이어간 오랜 질서를 지키는 것이 중하다."는 사고관을 끝까지 고수한 데서 비롯되었다. 군사적으로 유능한 평민들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외적에 대항하는 것은 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김백선의 일을 그대로 묵과해버린다면 차후에도 비슷한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평민이 양반을 우습게 보는 등 신분질서가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다. 개화파를 조선을 금수로 만든 역적으로 여기고 개화파가 실시한 갑오개혁을 결코 인정하지 않은 그는 갑오개혁으로 인해 신분제가 철폐된 것 역시 결코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김백선을 처형한 건 유인석의 입장에선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 의병은 단합해도 승패를 장담할수 없는 상황에서 유인석이 독단으로 김백선을 처형하는 월권행위를 저지르고 본인의 봉건적인 사상을 그대로 드러내어 의병들의 반감을 크게 사게된것은 의병의 단합을 파괴하는 행위였으며 이는 의병을 실패하게 만드는데 큰 원인을 제공한터라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실책이다.[8]

7. 그 외

유인석이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암살한 뒤 일제 형사들에게 취조를 받을 때 '의병 총대장'으로 거론한 김두성과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안중근은 김두성이 강원도 출신이며, 허위, 민긍호, 홍범도, 이범윤, 이은찬, 신돌석 등이 그의 휘하에 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김두성의 직함이 ‘팔도총독’이며, 이는 전국의병의 총대장이라고 한다. 또한 자신은 김두성으로부터 ‘특파독립대장'에 임명되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밝혔다. 유인석은 강원도 춘성군 출신이며, 당대의 거유(巨儒)였고, 13도의군 도총재로 추대되는 등 연해주 의병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만큼 그가 김두성일 가능성은 분명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또한 안중근은 일제의 심문을 받을 때 형사가 유인석과의 관계를 묻자 다음과 같이 밝혔다.
유인석은 작년(1908년) 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다. 유는 그때 15세 가량의 남자를 데리고 있었다. 금일의 국가형세에 대해 선생의 가르침을 받겠다고 말했더니 ‘어떻게든 애국하여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을 뿐 많이는 말하지 않았다. 귀가 어둡고 눈이 약해 매우 노쇠하였다. 학자의 풍모로 다언(多言)을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므로 그냥 떠났다. 노쇠한 그는 다만 일본인을 미워할 뿐이며 세계의 대세 동양의 백면(百面)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뿐 결코 금일의 형세에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한인 중에는 본국에서 학자가 왔다 하여 모두 가서 여정을 위로하나 금일 동지에 있는 한인은 그와 같은 완고하고 시세에 어두운 사람과는 의사가 합치하지 않으며, 다만 노인이므로 경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경시의 심문에 대한 안응칠의 공술(제2회)'

안중근은 여기서 유인석을 완고하고 시세에 어두운 사람이라고 비판적으로 평했지만, 독립운동 방략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를 예방한 사실만큼은 밝혔다. 또한 그는 '유음석(劉陰錫)'의 제자인 이진룡을 찾아가 이토를 사살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고 진술했다. 여기서 유음석은 유인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안중근은 유인석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가명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직후, 이상설은 유인석에게 편지를 보내 피신을 권유했다. 이에 유인석은 거주지를 옮겨 이종루(李鍾壘)의 집에서 유거하면서 다음과 같은 답신을 이상설에게 보냈다.
대감이 매우 근심해 주어 지극히 감동될 뿐이다. 대저 왜놈들이 후간(候簡)을 보내 정탐하는 데 이르게 되면 정세는 혹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등박문(伊購博文)을 죽인 것은 내가 그 계획을 아는 것이 아니지만 억지로 나로부터 했다고 한다면 혹 되겠는가. 대체로 인석이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이석대(이진룡의 이명) 역시 오지 않았을 것이며, 이석대가 오지 않았으면 안응(安應)도 형세가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혹 나로부터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와 이석대를 여기에 오게 한 것은 이등박문(伊購博文)의 소행이다. 그 놈이 죽은 것은 그 자신으로부터이지 어찌 다른 사람으로부터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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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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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근의 발산리와 함께 고흥 류씨 집성촌이다. [2] 27세손 석(錫) 항렬. 유관순 열사 및 유관순 열사의 오빠 유우석(柳愚)과 같은 항렬이다. [3] 인근의 발산리와 함께 고흥 류씨 집성촌이다. [4] 이때 중국에서 반일운동가로 활동하자 그에게 분노한 일본에서 암살자들을 파견하여 암살을 시도했으나 유인석이 사전에 도주하는 바람에 실패한다. [5] 특히 제전의병의 핵심적인 간부였던 민의식과 서석화가 가장 심하게 반발하며 김백선이 처형된 다음날에 바로 휘하 병력들과 함께 의병을 이탈했다. [6] 당시 유인석 진영에서는 김백선이 유인석이랑 의병 수뇌부와의 갈등이 심하여 자기가 이끌던 포수들과 함께 독립을 한다느니, 심지어 김백선이 윗선을 다 엎어버리고 자기가 대장이 되려 한다느니 하는 소문까지 돌았다. [7] 특히 조선의 신분제는 1894년에 법적으로 폐지되었기에 유인석이 이를 알면서도 김백선을 양반에게 항명한 죄로 처형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의병 지도부가 월권행위를 저지른 유인석을 처벌하지 않다보니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8] 초반에 제천의병의 숫자가 3500명이었는데 이 사건 이후로 유인석이 의병을 해산시킬때까지 남아 있었던 제천의병이 초기의 10%도 안되는 219명에 불과했다. 특히 다른 의병들도 유인석에게 협력하는것을 끝까지 거부했고 유인석이 의병을 해산시킬때까지도 협력하지 않았다. 이만큼 유인석의 행위가 의병들한테서 분노를 크게 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