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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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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五大洋集團自殺事件
파일:1021_954_5522.png
1991년 검찰에서 재수사 중인 사진
<colcolor=#000> 발생일 1987년 8월 29일
발생지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북리 산 210[1]
유형 집단자살
원인 사이비 종교
사망 32명
위치

1. 개요2. 사건의 전개
2.1. 박순자와 오대양의 창립2.2. 박순자의 실체2.3. 박순자의 사업 실패와 사채2.4. 집단 자살
3. 오대양 사건의 의혹과 밝혀진 내용4. 여담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 당시 뉴스데스크 보도 내용[2]
SBS 그것이 알고싶다》 '오대양'편 1부 https://vimeo.com/814822045
SBS 《그것이 알고싶다》 '오대양'편 2부 https://vimeo.com/814822153
국민소득이 2천 달러나 되고, 문맹률이 10% 미만인 나라에서는 도저히 생길 수 없는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발생했습니다.[3]
사건 당일 박성범 KBS 9시 뉴스 앵커의 오프닝 멘션 중에서.
수해[4]와 또 노사분규[5]로 우리는 무척 어수선한 여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8월을 마무리짓는 이 마지막 주말에 엄청난 비극이 우리를 또 경악시키고 있습니다.
사건 당일 손석희 MBC 뉴스데스크 앵커의 오프닝 멘션 중에서.
1987년 8월 29일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북리에 위치한 (주)오대양 공장에서 일어난 집단 자살 사건.

2. 사건의 전개

2.1. 박순자와 오대양의 창립

파일:81zr0100mws5n3ut31ku69lmx3gtadox.jpg

사건의 발단은 박순자(1939년생, 당시 48세)가 오대양이라는 사이비 종교와 기업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교주 박순자는 광주 S여중, 대전 D여고를 졸업하였으며 학적부에는 「중간이하 성적의 말수적고 얌전한 학생」으로 기록돼 있다고 하며 1974년 횡격막에 병이 생겨 고통받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병이 회복되는 일을 겪었다고 주장했으나 사이비 종교 특성상 거짓말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어쨌든 박순자는 신 덕분에 병이 나았다고 믿었는지 신학교를 다니다가 여호와의 증인에 입교했고 다시 기독교복음침례회인 권신찬· 유병언 구원파에 출석하기도 했다.

박순자는 구원파에서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을 데리고 이탈하여 1984년 5월, 대전에서 시한부 종말론을 따르는 사이비 종교 겸 회사인 오대양을 직접 만들었다. 참고로 오대양이라는 교명은 박순자가 "나는 오대양을 지배할 사람으로, 앞으로 전 세계를 주관하게 될 것이다."라고 공언한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먼저 1984년에 민속공예품 제조사 오대양을 만든 뒤 수입품 판매장을 만들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민속 공예품 제조로 대통령상은 물론 88올림픽 공식 협력 업체로 지정되면서 회사의 명성은 커져 갔고 대전 용인 등의 공장을 사들이면서 사업을 확장했으며 제조 사업 외에도 유치원, 양로원, 고아원 건물을 사들이거나 임대해 사회 사업을 하였는데[6] 시설을 당시로선 최신식으로 꾸며 고아를 잘 키우는 모습을 보였기에 당시 대전에선 오대양의 평판이 아주 좋았고 박순자는 성공한 여성 사업가이자 여성의 워너비로 평판이 좋았다.

2.2. 박순자의 실체

사실 박순자는 신도들의 자녀를 고아로 위장해 이들을 세뇌하여 아이들에게 "부모는 없고 너희는 고아이며 박순자만이 진짜 어머니"라고 가르쳤으며 심지어 아이들에게 "부모를 찾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소리도 공공연히 했다. 더불어 신도 및 그 자녀에게 공동생활을 강요했고 그 과정에서 신도들을 사람답지 않게 통제했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부부에게는 각방을 쓰게 하고 금욕 생활을 강요하며 외출도 금지했다. 2주에 한 번씩, 그것도 많은 사람들끼리 단체로 외출하는 것만 허용했고 외출 후에는 반드시 외출 시에 같이 나간 상대방의 바깥에서의 모든 행적을 일일이 보고하도록 했다고 한다.[7]
"정상적인 사람들이 들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생활을 했더라구요. 처음에 애들이 와가지고 돈을 줘도, 애들이 돈을 쓸 줄도 모르고 뭐가 뭔지도 몰라요. 자기 어머니 보고는 '원예과 아줌마'라 부르고, 자기 아버지로 표현할 때는 '대리'라 그래요. 뭐 성을 붙여서 김대리면 김대리, 이대리면 이대리, 그런 식이더라고요. 도저히 이해가 잘 안 가고, 우리 애들이 나보고 아빠, 뭐 엄마 이러는 것도 우습게 쳐다봐요."
전직 서초경찰서 형사 이재문 씨의 증언[8]

그리고 매월 한 번씩 '반성의 시간'이라는 것을 가졌는데 이때 신도들은 한 달 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실토하고 규율을 어겼음이 드러나면 벌이라는 명목으로 가차 없이 집단구타를 당했다. 일례로 딸이 어머니가 잘못한 것을 처벌한다면서 어머니를 두들겨 패고 어머니는 이것을 감사해하는 황당한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오대양 사건 이후 사건의 열쇠를 쥔 것으로 주목받았던 오대양 총무 노순호, 기숙사 가정부 황숙자, 육아원 보모 조재선 등이 이미 사건 발생 전에 반성의 시간에서 규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오대양 직원에게 살해된 뒤 암매장당했던 것까지 밝혀졌다.

박순자는 사채를 써서 엄청난 빚을 끌어모아서 용인에 공장을 세우고 공예품을 만들었으나 매출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직원들을 죄다 용인의 공장에서 합숙시켰다. 또 학사원의 원생이 대외적으로는 고아라고 선전했으나 실제로는 직원의 자녀였으며 양로원의 노인들도 대외적으로는 독거노인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직원의 부모였다. 박순자는 이걸 들키지 않기 위해 부모 자식간을 의절해 버리는 작업의 일환으로 십계명을 운운하면서 자식들로 하여금 부모를 구타하도록 시켰다.

굉장히 황당할 수도 있지만 신자와 그 자녀는 이를 충실히 수행했으며 자식에게 매를 맞는 부모는 이런 행위를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여 매를 맞으면서 기뻐했고 이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할 경우 박순자는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것이므로 은혜롭게 죽었다고 선전했다.

이런 황당한 짓거리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오대양을 믿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렇듯 박순자는 대외적으로는 대단히 인망 있는 인물로 보였기 때문에 오대양의 전성기에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2.3. 박순자의 사업 실패와 사채

1986년 4월 일본의 모 전자 부품 생산업체와 합작해 당시로선 대단한 거액인 7억 원을 투자해 전자제품을 만들려고 했지만 사기[9]를 당했고 사업은 실패했다.[10]

이 손실을 메꾸기 위해 박순자는 신도들에게 사채를 많이 끌어오라고 명하고 신도들은 자신의 일가친척에게도 돈을 빌려서 박순자에게 바쳤다.[11] 그리하여 박순자가 신도들을 굴려 끌어모은 사채는 약 89억 원에 달했는데[12] 갚지는 않고 사채만 끌어 쓰니 당연히 채권자에게 독촉과 사채 이자가 쌓여갔다.

그러다 1987년 8월 16일에 박순자에게 5억 원을 빌려준 이상배라는 사람이 빌려준 돈을 갚으라고 독촉하려고 부인과 함께 오대양 공장을 찾았다가 신도들에게 집단구타당하다 못해 채권포기각서까지 강요받자 분을 참지 못하고 경찰에 오대양을 고소했다.[13]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이들의 만행을 더 이상 참다 못한 다른 채권자도 박순자와 오대양을 고소했으며 경찰은 사기 혐의로 박순자를 조사했고 사회에서 주목받게 되었다.

이미 엄청난 사채 이자를 더는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경찰과 언론의 압박까지 계속되자 박순자는 전 신도들과 자신의 가족을 포함한 80명과 함께 오대양 용인 공장으로 모이라는 지시를 내렸다.[14] 그리고 그 중 자신과 자녀들, 가장 투자자금을 많이 끌어모은 신도들을 합해 총 32명만을 골라 식당 천장에 올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공장 창고 안의 구석 공간에 4일 동안 숨겼다.[15]

2.4. 집단 자살

1987년 8월 29일 오대양 직원 김영자[16]는 용인의 공장에 왔다가 내려앉은 숙소의 천장을 보고 이상히 여겨 식당 쪽으로 갔는데 식당 천장에서 숨져 있는 박순자를 포함한 32명을 발견하고 마침 가족을 찾으러 공장에 온 박순자의 남편 이기정에게 알렸다. 이후 박순자의 남편 이기정이 경찰에 오후 4시 무렵에 신고해 집단 변사가 세상에 알려졌다.[17]

사건 현장을 발견한 사람들과 담당 형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천장 위의 상황은 단순히 참혹함은 물론 그 이상을 넘어 매우 기괴한 모습이었다. 왜냐면 천장 위에 있던 빈 공간에는 코와 입이 휴지로 채워져 있었고 속옷 또는 잠옷 차림을 하고 있던 시신이 각각 이불을 쌓아 놓은 것처럼 각각 19명, 12명씩 쌓여 있었으며 그 먼 곳에는 공장장인 이경수가 속옷 차림으로 서까래에 목을 맨 채 죽어 있었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일어날 법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사건 현장 정리 중 사망자들이 쓴 것으로 보이는 메모가 발견되었는데 "사장이 독약과 물을 가지러 갔다."거나 "xx도 지금 매우 고통을 받고 있다.", "xx가 꿈을 꿨는데, 그곳이 지옥이라고 하더라.", "남자는 다 잡혀가고 여자들은 다 헤어지고..."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으며 이 메모와 부검을 통해 추정한 사망 시각은 발견 전날과 발견 당일이었다.

메모 내용과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은 말 못할 상황 때문에 처음에는 타살당했거나 사람들이 집단으로 음독하고 죽은 것으로 추측했지만 경찰의 부검 결과 독극물은 나오지 않았고 대신 하이드라민이라는 신경안정제 성분이 발견되었다.[18] 모든 시신은 경부 압박으로 인한 교살이 사망 원인이었고 결정적으로 이들 모두 교살로 인한 저항 흔적이 아예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메모지 뒷면에는 메모에 대한 답변을 이경수[19]가 작성했는데 다음과 같다.
반대다. 완전 도전이다. 넘기면 개발비[20] 불게 하는 거다.[21]
모두 나를 팔았기 때문이다. 절대 입 닫아라.[22]
이미 의식 없으시다.[23]
네 시간 전부터 다섯 명 정도 갔다.[24]
너만이 깨물어라.
처음 계획하고 온 거다.
성령 인도로
너도 버텨라.[25]
오늘 중으로 거의 갈 것 같다.[26]

결국 경찰은 가장 먼저 박순자가 공장장 이경수에게 자신을 교살시키고 뒤이어 이경수가 김길환과 여자들을 교살시킨 뒤 박순자의 두 아들들이 철골 서까래에 줄을 매고 자살하고 이경수가 교살된 시신을 2개의 더미로 나눠서 쌓아 놓은 뒤 마지막으로 이경수 스스로가 목을 메어 자살했다고[27] 판단했으며 사망자들이 스스로 멀미약과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 즉 자의적으로 한 타살로 결론을 내렸다.[28]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렇게 쉽사리 죽을 수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건이 일어난 날짜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이었고 현장에 있었던 경찰들이 천장 온도를 재 봤더니 70도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게다가 통풍도 제대로 안 되는 천장 내부였다 보니 도피 기간인 4박 5일 동안 이미 신도들은 열사병 탈수에 시달려 반쯤 혼수상태였을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저항할 힘도 없었을 것이다.

현장 감식 결과 식량이었던 쇠고기라면 5박스가 그대로 있었으며 김영자가 갖다 준 주먹밥도 20여개가 그냥 버려져 있었는데 이는 심한 탈수로 식욕마저 없어진 상태라는 뜻이었다. 특히 시체 중 교주 박순자의 시체의 부패가 제일 심했던 걸로 보아 박순자가 가장 먼저 죽었을 것이며 사이비 종교 신도들의 특성상 교주를 따라가고자 했던 마음이 컸을 것이다. 더군다나 박순자가 도피 전에 신도들에게 돈을 최대한 끌어모아 바칠 것을 지시했던 탓에 가장 열성 신도였던 그들은 빚이 어마어마했다. 3~4억원 이상의 빚을 가진 경우가 절대다수였는데 당시는 주택복권 1등 당첨금이 1억원, 은마아파트 1채가 3천만원에 월급을 100만원 받으면 잘번다, 부럽다는 소리를 듣던 시절이었다. 소비자물가 기준으로 현재와 비교해 보면 1인 당 10억 원 이상의 빚을 졌다는 얘기다. 거기다 소비자물가 기준으로 해서 저 정도지 집값으로 비교하면 차이가 몇 배 이상 커진다. 더불어 당시 일반 시중은행 이자(연 이율 10%대)로 갚아도 1년에 몇년치 급여를 내줘야 될 판인데 사채까지 대량으로 끌어모은 이상 아무리 열심히 과로해서[29] 투잡, 쓰리잡 뛰어봤자 파산 신청은 확정적이었다.

즉, 일반인으로서는 갚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액수였다. 살아남아도 평생 빚쟁이로 사는 암울한 상황이었고 당시에는 파산 제도 등이 미비했음을 감안하면 이미 살 의지도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렇게 믿고 따른 교주의 죽음과 빚쟁이로서 살아남아도 이도 저도 할 수조차 없다는 마음이 겹쳐 집단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며 사실 이것 외에는 이 비상식적인 상황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당시 발견된 메모 중 매일 주먹밥을 갖다 준 김영자가 남긴 "이렇게 숨어있지만 말자. 사장님이 나서서 해결하면 모두가 나아질 것이다."라는 내용의 메모가 있었다고 한다.[30] 김영자는 주먹밥과 함께 이 메모를 박순자에게 전달하려고 식당 천장을 계속해서 노크했는데 한동안 반응이 없다가 이경수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로 나타나 그녀에게 화를 냈다. 이때는 이미 이경수가 박순자의 지시를 받아 천장에 숨은 이들을 살해하고 있었다. 시신들은 부검 후 발견 이틀만에 화장됐다.

하나 사망자의 사망 정황은 드러났지만 이 사람들이 집단으로 왜 자살했는지는 명확히 드러난 바가 없었던지라 경찰 당국은 사건의 열쇠를 쥔 것으로 보이는 오대양 직원 11명을 공개 수배했다. 결국 1991년 7월 수배 중이던 오대양 직원 중 6명이 자수하면서 대전지방검찰청에서 재조사되었고 검찰 수사 결과 1987년의 경찰 수사와 동일하게 32명의 집단자살 사건으로 결론이 났다.

2.4.1. 사망자 명단

여자 28명, 남자 4명으로 총합 32명이다. 볼드체 표시가 남자다.

3. 오대양 사건의 의혹과 밝혀진 내용

세간에는 죽은 사람들이 자의가 아닌 타의로 자살을 강요받았고 심지어 타인의 손으로 살해당했다는 주장이 확산되었다. 당시 앵커였던 손석희는 임의대로 집단 타살이라고 방송했다. # 또 국회의원 박찬종이 1991년 7월 19일 기자회견을 이용해 박순자가 한때 몸담았던 구원파와 그 신도가 경영하던 모 회사가 사건의 배후라는 의혹을 제기하여 일파만파 번지기도 했다.

구원파가 사건에 개입되었을 것이라고 의심한 사람들은 박순자가 실제로는 구원파를 이탈하지 않았고 모종의 이유 때문에 구원파를 이탈한 척하며 오대양을 차렸다고 주장했다. 박순자는 구원파의 대전 지역 자금조달 책임자였고 오대양은 외부의 돈을 끌어모으려는 구원파의 위장 계열사로 구원파 신도가 경영하던 모 회사의 자금을 마련하고자 박순자가 오대양을 차리고 신도들에게 거액의 사채를 끌어오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오대양이 세간에서 주목받고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구원파나 모 회사가 박순자와 다른 31명을 살해했다는 것이 당시 세간에 떠돈 타살 의혹의 골자였다. 당시 언론에서도 제기되었던 내용인데 실제로 오대양과 구원파 계열 사업체간 자금 거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내역이 일부 확인되기도 했다.

하지만 박순자가 오대양 설립 이전에 물품 대금을 구원파 교인에게 사업관계로 송금한 사실이 있는데 이는 정상적인 거래일 뿐 오대양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점이 밝혀졌다. 거액의 오대양 사채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갔냐는 관심에 대해 수사 결과 어디론가 유입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오대양이 고율의 사채 이자를 갚는 데 쓰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 오대양 사채의 행방, 그것이 알고싶다 내용 위의 의혹은 송금 관련 오해와 오대양에서 구원파 관련 회사에 몇 차례 정도 인형을 구매한 적이 있는 점, 박순자가 한 때 구원파에 잠시 출석한 점이 있었던 점 등이 지나치게 확대해석된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로 오대양 사건은 1987년과 1988년, 그리고 1991년에 정권(전두환, 노태우)이 바뀔 때마다 세 차례나 재조사받은 결과 외부 세력과 관련이 없는 집단 자살로 동일하게 결론이 났고 구원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으로 종결되었다. 당시 언론들에 의해 유병언 전 세모 회장 역시 오대양 사건의 배후로 그려지고 그로 인해 구속 및 형을 살았다는 보도가 많이 쏟아졌는데 사실이 아니다. 실제 수사 결과 오대양 사건 관련해서는 전부 무혐의였으며 그와 전혀 다른 별건 수사인 과거의 이미 불기소된 상습사기죄로 4년형을 선고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대양 사건의 배후처럼 지목되기도 했다. # 상습사기죄는 돈을 빌려주고 못 받았다는 내용으로, 이에 대해서도 유병언 전 회장은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고 살아 있는 동안 기회가 될 때마다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두고 당시 유병언 전 회장과 오대양 간의 혐의점을 찾지 못하자 뭐라도 체포할 혐의가 필요해진 상황에서 별건 수사인 과거의 불기소된 사건을 억지로 들춰내어 혐의를 씌우고 형을 살게 했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기도 한다. #

후일에는 이 사건을 두고 월간조선[31], SBS 그것이 알고싶다[32], 시사정경[33] 등의 언론에서는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은 언론의 지나친 보도 경쟁과 일부 정치인의 정치적 이용 등이 어우러진 사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구원파는 2014년 당시 금수원을 진입하려던 검찰에게 오대양 문제와 연관 없음을 정확히 밝히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를 보면 과거의 이 누명이 그 때까지 그들에게 상처받고 억울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34] #, #, #

이로 인해 인천지방검찰청은 실제 공문을 통해 오대양 사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과거 검찰에서 철저하게 수사했고 해당 사건이 구원파와 관계 없다고 다시 한 번 밝혀 주기도 했다. #

또 일부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모처에서 살해당하고서 공장 식당의 천장으로 옮겨졌다고 주장했지만[35] 사건 현장을 감식했던 경관은 현장의 상황상 다른 곳에서 살해되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일축했다.[36]

검찰도 1987년에 경찰이 결론을 내린 대로 32명 중 박순자를 포함한 29명은 목이 졸려 살해당했고 박순자의 두 아들과 공장장 이경수는 목을 매 죽었다고 판단했다. 당시에 사건을 수사한 검사였던 박영수 변호사는 2014년 인터뷰에서 "현장을 봤다면, 타살 의혹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라며 타살설을 강하게 부정한 바가 있고 # "국회에서 5공 비리 청문회 때 재조사가 있었죠. 저도 법무부에 6개월간 비공식적으로 파견돼서 그 조사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국회 조사에서도 오대양 사건에 유병언씨가 연루됐다거나 5공 인사들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의혹의 출발점이 되는 타살에 대한 새로운 증거도 없었고요. 1991년 조사는 그 해 7월 오대양 관계자 6명이 경찰에 자수하면서 시작된 것인데, 그 조사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991년 당시 유병언씨를 검찰이 구속했지만 유씨의 구속은 오대양 사건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상습사기 혐의였습니다."라고 인터뷰한 내용도 있다. #

그리고 오대양 사건 당시 현장에 있던 최후의 목격자인 할머니가 실종되었다는 보도들이 있었고 이로 인해 굉장히 많은 추측들이 제기되었지만 이후에 할머니는 딸이 모시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

한편 박순자의 남편인 이기정 당시 충청남도청 건설국장도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으나 이 사람은 사건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기정은 사건 이후 사표를 내고 처남과 함께 박순자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4. 여담

5. 둘러보기

역대 대한민국의 대형 사고 및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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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0월 21일
32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3년 10월 10일
292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3년 7월 26일
68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6월 10일
20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 사고
1993년 4월 19일
34 논산 정신병원 화재
1993년 3월 28일
78
1993년 1월 7일
28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
1992년 10월 22일
28 대양하니호 침몰 사고
1991년 11월 3일
22 인제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11월 4일
21 소양호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9월 1일
25 영동고속도로 섬강교 버스추락사고
[ 198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89년 9월 17일
24 전북 모래재 버스 추락 사고
1989년 7월 27일
79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1988년 3월 25일
22 안양 봉제공장 화재
1987년 11월 29일
115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년 8월 29일
32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1987년 6월 16일
29 극동호 유람선 화재 사건
1986년 7월 30일
21 고창 거룻배 전복 사고
1985년 1월 11일
38 양강교 버스 추락사고
1984년 3월 24일
29 영덕 시루봉 CH-53 추락 사고
1984년 1월 14일
38 부산 대아호텔 화재 사건
1983년 10월 9일
25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년 9월 1일
269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4월 18일
25 대구 초원의집 화재
1982년 6월 1일
53 청계산 C-123 추락사고
1982년 4월 26일
62 우순경 사건
1982년 2월 5일
53 제주 C-123 추락사고
1981년 11월 22일
33 부산 금정산 버스 추락사고
1981년 5월 14일
55 경산 열차 추돌사고
1981년 2월 28일
24 대림호 침몰 사고
1980년 6월 5일
23 광주 지하살롱 화재 사고
[ 197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79년 10월 27일
26 은성탄광 화재
1979년 4월 14일
44 함백 탄광 폭발사고
1978년 7월 23일
33 한강대교 버스 추락 사고
1977년 11월 11일
59 이리역 폭발사고
1976년 10월 28일
34 동해 어선 조난 사고
1976년 5월 18일
23 답곡리 버스 추락사고
1976년 2월 28일
32 화천 버스 추락사고
1974년 11월 3일
88 대왕코너 화재사고
1974년 6월 28일
28 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
1974년 2월 22일
159 YTL30호 침몰 사건
1973년 8월 12일
32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고
1973년 5월 16일
22 영일 건널목 열차 추돌사고
1972년 12월 24일
30 파크로버호 침몰 사고
1972년 12월 2일
53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1972년 8월 1일
26 의암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12월 25일
166~191 대연각호텔 화재
1971년 10월 13일
20 남원역 열차 추돌사고
1971년 5월 10일
80 청평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5월 10일
31 질자호 침몰 사고
1970년 12월 15일
326 남영호 침몰사고
1970년 11월 5일
31 의암호 선박 전복 사고
1970년 10월 14일
46 모산 수학여행 참사
1970년 8월 21일
25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참사
1970년 4월 8일
33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196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69년 9월 17일
37 창녕 기관선 - 남지교 충돌 사고
1969년 1월 31일
41 천안 열차 추돌사고
1968년 10월 30일
48 산청 버스 추락 사고
1968년 1월 8일
41 함양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10월 16일
42 금릉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9월 15일
29 삼양수산 원양어선 침몰 사고
1967년 4월 8일
80 서울 청구동 C-46 추락사고
1967년 1월 19일
39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1967년 1월 14일
93 한일호-충남함 충돌 사고
1967년 1월 1일
41 서문시장 화재
1966년 1월 18일
22 중구 남산동 판자 아파트 화재
1964년 7월 29일
95+ 서해 어선단 실종 사고
1963년 10월 23일
49 여주 조포 나룻배 침몰 사고
1963년 6월 25일
70 거제 장승포 산사태
1963년 1월 18일
140 연호 침몰 사건
1962년 9월 7일
36 한남동 나룻배 침몰 사고
1960년 3월 2일
62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1960년 1월 26일
31 서울역 압사 사고
[ 195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59년 7월 17일
67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고
1957년 2월 22일
21 한강 미 공군 C-124A 추락 사고
1956년 1월 12일
66 태신호 화재
1955년 3월 2일
42 부산역 열차 화재
1953년 11월 27일
29 부산역전 대화재
1953년 1월 31일
56 오산 건널목 추돌 사고
1953년 1월 25일
66 행운환 침몰 사고
1953년 1월 9일
330 창경호 침몰 사고
1952년 11월 16일
25 강릉 공항 미 공군 C-46D 추락 사고
1952년 10월 16일
44 양평 미 공군 C-119C 추락 사고
1951년 7월 11일
94 제5편리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30+ 제13호 침몰 사고
1950년 6월 30일
23 부산 미 공군 C-54G 추락 사고
[ 194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49년 10월 5일
71 평해호 침몰 사고
1949년 8월 18일
51 대강 터널 질식 사고
1948년 6월 8일
150 미군 독도 오폭 사건
1947년 8월 19일
23 태양환호 침몰 사고
1946년 11월 13일
42 영등포역 열차 충돌 사고
1946년 10월 22일
59 어청도 기뢰 폭발 사고
1945년 9월 29일
73 대구역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8월 24일
549​~𔁳,000+
우키시마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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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북리 707-1로 지번이 변경되었다. 도로명 주소는 남사읍 삼인로 47-1로 할당되어 있다. 이후 이 공장 자리에는 1989년 플라스틱 전자기기 부품업체인 세화정밀이 들어섰다가 2008년 경에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텅 비게 되었다. [2] 이 당시 앵커는 손석희 아나운서, 전화 연결을 하는 기자는 이인용 기자다. 사건 초기라서 손석희 아나운서가 사건을 보도하면서 박순자가 31명의 어린이들을 죽였다고 오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3] 사실 이 발언은 엄밀히 말하면 틀린 것으로, 사이비 종교의 폐해는 국민 소득이나 교육 수준이 높아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미국인들을 상대로 발생한 인민사원 집단자살 사건이나 일본 옴진리교 관련 사건사고들은 선진국에서 일어난 유사 사건이고 당시 사이비 종교에 홀린 사람들 중에는 사회에서 엘리트라 할 만한 수준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사건이 이례적으로 비상식적임을 강조하기 위한 멘트 정도로 보면 된다. [4] 水害(물 수, 해할 해), 홍수로 인한 피해를 뜻하며 이 뉴스에서 말하는 수해는 태풍 셀마다. [5] 역사상 최대 규모의 노동운동인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말한다. [6] 전부 '학사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7] 이런 생활이 오래 지속되었던데다 사채 문제도 겹쳐서 사건 생존자들은 바깥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갈 곳도 딱히 없었기에 결국 다시 모여서 제 2의 오대양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후술될 '반성의 시간' 명목으로 자행된 폭행도 오대양 시절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8] 이 사람은 당시 오대양 암매장 관련자들이 집단 자수를 하도록 도와준 인물로, 이 관련자들 중 한 명인 김도현이라는 사람의 먼 친척이기도 했다. 집단자살 사건 이전 김씨가 채권자 폭행 사건으로 구속중이었을 때 갈 곳이 없던 김씨의 가족들을 집에 데려와 기거하게 했다고 한다. [9] 일본 사업자 내지는 일본인 야쿠자에 의한 사기였는지, 이런 사업을 소개시킨 한국인( 재일 한국인 내지는 재일 한국인 야쿠자 멤버 포함)에 의한 사기였는지는 불명이다. [10] 단, 민속 공예품을 만들었던 공장을 보면 작업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 미리 만들어 놓은 공예품을 사 놓았다는 당시 취재 기자와 담당 형사의 증언을 보건대 사업 실패도 거짓말로 추측된다. [11] 단순히 오대양을 믿는 것을 떠나서 당시 박순자는 은행 계좌를 통해 매달 신도가 보낸 돈의 무려 30~40%의 이자를 돌려주는 정책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당연히 돈에 혹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오대양에 돈을 맡기게 될 수밖에 없었고 마침 오대양의 평판도 좋았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미 눈치를 채고 돈을 빼내려고 해도 때는 늦어 오대양에 의탁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12] 법무부가 국회에 제출한 오대양 사채내역 보고서에 따르면 수입금 111억 가운데 차용금이 89억, 사업매출금이 17억, 은행대출금이 5억으로 되어 있음. [13] 더 소름끼치는 사실은 이 구타 현장에 이상배 부부의 큰딸 부부도 있었는데 이들은 부모가 맞고 있는 걸 방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14] 보통의 폰지사기범은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잠적하거나 해외로 도피하지만 박순자는 이 사건 이전부터 이미 언론에 알려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에는 숨을 곳이 없었고 국외여행허가제를 실시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해외도피도 쉽지 않았다. 밀항선을 타고 일본, 대만, 홍콩으로 가거나 월북을 하는 것이 방법이었는데 그게 한두명이면 모를까 수십명 단위로 하면 눈에 띄니 일을 벌인다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15] 이 사람들은 나중에 출동한 경찰에 의해 전원 무사히 구출되었다. 당시 생존자에 의하면 교주에게 선택받지 못했다는 걸 알았을 때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배신감과 동시에 천장 위에 올라간 사람들이 부러웠다고 한다. 정작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살아남았고 선택받은 사람들은 그 지옥 같던 천장 속에서 지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았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16] 박순자와 식당 천장에 숨은 32명을 위해 매일 주먹밥을 갖다줬다. [17] 사건 전날에는 당시 용인 공장을 수색 중이던 경찰에 의해 창고의 빈 공간 뒤에 숨어 있었던 49명이 발견되었는데 다행히 이들은 전부 무사히 구조되었다. [18] 항히스타민제의 일종인 디펜히드라민으로 추정되며 강한 졸음 유발 효과 때문에 수면유도제로 쓰인다. [19] 그런데 사건의뢰에 따르면 김명순이 작성했다고 한다. [20] 그것이 알고 싶다 오대양 편에서 사건을 취재했던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헌금을 뜻하는 내부 은어라고 한다. 박순자가 잠시 구원파에 있었던 당시 한 신도가 헌금을 바치면 죄가 사해지고 마음이 편해지니 사람이 '개발'되는 것이 아니겠냐면서, 헌금이나 십일조 등의 용어 대신 '개발비'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간증을 했었다고 한다. [21] 정확히 무슨 뜻이었는지는 불명이다. 다만, 경찰에 순순히 응하면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선 벗어나지만 교단 내 중요인물이 경찰의 취조 중 돈 문제를 발설할 가능할 가능성이 높고 이는 교단의 붕괴로 이어지니 결국엔 교단에 대한 도전이나 다를 바 없고 자신은 반대한다는 말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22] 무슨 의미였는지는 불명이다. 다만, 자신을 팔았다는 말은 사채를 끌어다 쓸 때나 사업 빚이 늘어날 때 자신을 앞세우거나 더러운 짓을 맡게 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23] 박순자가 이미 사망한 후라는 얘기다. [24] 박순자, 장남, 차남, 딸, 경수 외의 다른 공장장인 김길환이 사망했다. [25] 너만이~버텨라 까지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에서 공개된 내용이다. [26] 오늘 안에 천장에 올라간 32명 모두 사망할 것이라는 뜻이다. [27] 이경수의 시신이 무릎을 구부린 채 매달린 탓에 이것을 타살의 증거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발받침이 없거나 줄을 묶을 곳이 낮을 때 무릎을 꿇는 등으로 자살하는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쉽게 믿을 수는 없겠지만 초등학생이 태권도 도복 띠로 문고리에 목을 매 자살한 사례와 무릎 높이도 채 되지 않는 개울에 엎드려 자살한 사례도 있다. [28] 아래 사망자 명단 중 이경수, 김길환, 김명순, 곽남옥 4명이 주도해서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며 중간쯤 덩치가 큰 김길환을 단단히 결박한 뒤 살해하였으며 남은 사람들을 살해한 뒤 두 여성들도 살해되었다. 이들 중 곽남옥은 사망자 명단에는 학사 보모로 나와 있으나 간호사 출신이라고 한다. 시신의 입과 코가 휴지로 막혀 있는 것은 곽남옥이 처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29] 당시에는 주6일제, 연간 2900시간 노동이 평균적인 직장환경이었다. 당연히 투잡 뛸려면 이것보다 더 많이 일해야 된다는 것이다. [30] 하지만 이미 채무 문제로 방송까지 나왔고 애초에 돌려막기식으로 돈을 메꾸면서 사업하던 것이 터졌으니 사장이라고 묘수가 있을 리가 없다. 그나마 남은 것이라고는 당시 대전 가수원동에 있던 시설물이 전부였을 텐데 이 시설이 박순자의 소유라고 해도 이를 매각해도 채무를 해결하는 데에는 턱없이 모자란 액수다. [31] 1992년 2월호 기사 '유oo은 과연 그렇게 악질인가?', 1992년 8월호 기사 '유oo 세모사건의 축소지향', 1999년 9월호 기사 '내가 왜 오대양 사건 背後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야 합니까?' [32] 1992년 7월 5일 1부 및 7월 12일 2부. [33] 1993년 3월호 기사 '(주)세모의 兪oo 6共의 희생羊이였는가?' [34] 추가로 1999년 인터뷰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흠칫 놀라면서 『오대양 사건 때 줄줄이 사람 죽은 것과 관련된 사이비 종교 집단 아닌가』하는 식으로, 「뿔 하나씩은 달린 사람들」로 보는 반응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역시 강한 인상만이 오랫동안 忘却을 피해가는 두뇌 습성상 「오대양∼세모∼兪炳彦∼私債」와 같은 단순 이미지가 기억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 월간조선 1999.9 [35]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 탁명환이 1991년에 CBS에서 이를 제기한 바가 있다. [36] 게다가 시신들이 발견된 천장바닥이 석고보드인 데다 그나마 다닐 수 있었던 콘크리트 구조물도 폭이 좁아서 경찰들도 시신들을 수습하고 증거물을 찾으러 다닐때 지붕과 연결된 철근을 잡고 다녀야 했고 어떤 경찰은 석고보드를 밟았다가 식당 솥 위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축 늘어지기에 다른 곳에서 살해하고 나서 몰래 숨기는 것도 힘들다. [37] 다만 인민사원은 이것보다도 더했다. [38] 사건이 모티브일 뿐이기에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원하면 비추천. 맹인인 주인공 화자의 독특한 서술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찾아보자. [39] 현장의 구조 특성 및 발견된 여러 보존식품류(라면 외에도 바로 섭취 가능한 이유식도 발견되었다.), 생리대,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건에 사용된 새끼줄과 실뭉치 등 여러 증거를 밝히고 있다. [40] 정명석 JMS를 썸네일로 내세웠고 실제로 8회 중 3회나 분량을 배정해서 정명석이 메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다른 사이비 종교들도 다루었다. 아가동산, 만민중앙교회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