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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F. 케네디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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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44C9> 일생 | 생애 ( 1968년 미국 대선 ·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 ||
평가 | 평가 | |||
가족 | 아버지 조셉 패트릭 케네디 · 배우자 에설 케네디 · 장남 조 케네디 2세 · 차남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 형 조셉 P. 케네디 주니어 · 형 존 F. 케네디 · 남동생 테드 케네디 · 손자 조 케네디 3세, 코너 케네디 · 조카 존 F. 케네디 주니어 | |||
역대 선거 |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예비선거) | |||
관련 인물 | 존 F. 케네디 · 마릴린 먼로 · 지미 호파 · 마틴 루터 킹 · 조지프 매카시 · 존 에드거 후버 · 린든 B. 존슨 · 테드 케네디 · 랄프 야버러 · 조지 맥거번 · 에이브러햄 리비코프 · 밴스 하트케 · 케네스 오도넬 · 아서 슐레진저 · 니콜라스 카젠바흐 · 아치볼드 콕스 · 샘 지앙카나 · 카를로스 마르셀로 · 휴버트 험프리 · 유진 매카시 | |||
사건사고 |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 |||
자유주의 · 케네디 가문 · 존 F. 케네디 · 테드 케네디 | }}}}}}}}} |
<colbgcolor=#dddddd><colcolor=#000000> 에설 케네디 Ethel Kenne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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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명 |
에설 스케이컬 Ethel Skakel |
출생 | 1928년 4월 11일 |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 | |
사망 | 2024년 10월 10일 (향년 96세) |
미국 매사추세츠 보스턴[1]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배우자 | 로버트 F. 케네디 (1950년 결혼 / 1968년 사별) |
자녀 | 슬하 7남 4녀 |
학력 | 맨해튼빌 칼리지 (학사) |
종교 | 가톨릭 |
직업 | 정치운동가 |
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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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 운동가.로버트 F. 케네디의 부인이자 미망인인 것으로 유명하다. 남편이 죽은 지 56년이나 된 2024년까지 살다가 96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케네디 가문의 일원 중 두번째로 오래 장수한 인물이다.[2]
2. 상세
1928년 시카고의 부유한 사업가 조지 스케이컬(George Skakel)의 딸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일리노이지만 성장지는 뉴잉글랜드였고 코네티컷의 여학교와 수도원에 다녔다. 1945년 맨해튼빌 칼리지 재학 중에 케네디 가문의 일원이자 로버트 케네디의 여동생인 진 케네디와 동급생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키 리조트에서 로버트 케네디와 처음 만났다. 처음 로버트와 에설은 연인 관계가 아니었지만 1946년 에설이 존 F. 케네디의 하원의원 선거운동을 도와주면서 진지한 관계로 발전했다.1950년 2월 에설과 로버트는 약혼했고 4개월 후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에설은 로버트와 마찬가지로 사교계 명사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귀족적이고 우아하기로 유명했으며 로버트가 많은 정치인과 친교를 쌓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재클린 케네디와 같이 공식적인 행사에 많이 참가하지는 않았고 당시 사회가 요구하던 요조숙녀, 현모양처 같은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재클린과는 사이가 그렇게까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 로버트 케네디와는 금슬이 엄청나게 좋아서 1968년 로버트가 급사할때까지 18년간 무려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거의 1년에 한번씩 아이를 낳을 때가 많았는데, 재클린 케네디는 이에 대해 깊은 거부감마저 가졌다고 한다.[3]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 때문에 케네디 3형제의 부인 중에서는 남편과 가장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고[4] 죽을 때까지도 금슬이 좋았다. 물론 로버트 케네디가 외도를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형인 JFK나 동생 테드 케네디에 비해 비교적 여성 관계가 얌전했을 뿐, 로버트 케네디 또한 잘생긴 외모와 부와 권력을 겸비한 집안 내력(...)은 못 속이는 거였는지, 비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하더라도 수십명이 넘는 배우, 명사들과 섹스를 가졌고 재클린 케네디까지 건드려서[5] 여성 관계가 난장판이었던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에설 케네디도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로버트는 이것을 단순히 육체적인 관계이며 마음까지 사랑하는 것은 에설 케네디 하나 뿐이라고 했기에 에설은 마지못해 로버트의 외도를 용납하였다. 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로버트는 자주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긴 하더라도 집에서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버지였고 1960년대에 흑인 민권 문제 때문에 로버트 케네디와 사이가 깊었던 민권운동가 겸 정치인 존 루이스는 "로버트 케네디와 에설 케네디는 내가 봐온 그 어떤 정치인들 중에서도 가장 사이가 좋았고,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존 F. 케네디 재임 기간 동안에는 "대리 영부인" 수준의 대우를 받았고 존 F. 케네디가 사망한 후에도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남편이 암살당하자 에설은 진심으로 슬퍼했으며 뇌사 상태에 빠진 남편의 생체 유지 플러그를 뽑는 것을 거부하였다.[6] 재클린 케네디와는 달리 에설은 로버트를 잊지 못하고 평생 재혼하지 않았으며 대외 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이후 에드워드 케네디의 선거운동을 돕는 등 제한적인 외부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으며, 2008년에는 케네디 가문의 일원과 마찬가지로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버락 오바마를 지원해 그가 당선될 수 있도록 도왔다.
2024년까지 살아 그의 아들인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가 대선에 출마하는 것까지 보게 되었다. 그가 아들을 지지했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7]
한국시간 2024년 10월 9일 딸 캐리 케네디의 인스타그램에 에설 케네디가 그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게 여생을 보내다 지난 목요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지역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현재 가족들이 함께 돌보고 있으며 그녀가 건강할 수 있게 기도하고 지금은 사생활을 존중해 달라고 밝혔다.
하루 뒤인 2024년 10월 10일 뇌졸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하면서 남편을 떠나보낸 지 56년 만에 하늘에서 남편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유족 측은 에설 케네디를 가슴에 새기고 기도해 달라고 했다.
3. 기타
지난 2009년 에드워드 케네디가 사망한 후 케네디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하나였는데, 케네디 가문의 인사 중 가장 나이가 많았고 전설적인 로버트 케네디가 남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가 너무 많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제작이나 인터뷰 등을 제외하면 거의 활동은 안 했다.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존 F. 케네디의 딸이자 현 호주 대사인 캐롤라인 케네디가 사실상 케네디 가문의 대표격으로 활동한다.
4. 둘러보기
[1]
#
[2]
케네디 가문에서 최장수 기록을 세운 주인공은 에셀의 시어머니이자
존 F. 케네디의 모친으로 케네디 가문의 대모였던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1890~1995)로 백살이 넘게 장수했다. 에셀보다 무려 9년을 더 살았다.
[3]
재클린은 "난 에설 케네디 같은 아이 낳는 기계처럼 살지 않을거에요"라고 존에게 말한 적도 있다. 게다가 재클린은 몇 차례의 유산을 겪은 바도 있었다.
[4]
재클린은 존과 불안한 관계였고,
테드 케네디의 부인인 조앤 케네디는 남편의 상습적인 음주와 섹스 스캔들, 가정폭력 때문에 1970년대부터는 사실상 부부 사이도 아니었다. 에드워드 본인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조앤과의 불편한 관계를 최대한 축소서술했을 정도다. 결국 둘은 1982년 공식적으로 이혼했다.
[5]
케네디 가문 관계자에 따르면 둘은 육체적인 관계까지 가졌으며 더 나아가서 아예 로버트가 에설을 버리고 재키와 결혼하려 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6]
결국 재클린 케네디가 대신 로버트 케네디의 생명 유지 포기각서를 쓰고 플러그를 뽑아줬다.
[7]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가 백신 음모론 이후 케네디 집안에서 내쳐진 것을 보면 지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케네디 가문은 공식적으로 바이든을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