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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F. 케네디/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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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44C9> 일생 생애 ( 1968년 미국 대선 ·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평가 평가
가족 아버지 조셉 패트릭 케네디 · 배우자 에설 케네디 · 장남 조 케네디 2세 · 차남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 형 조셉 P. 케네디 주니어 · 형 존 F. 케네디 · 남동생 테드 케네디 · 손자 조 케네디 3세, 코너 케네디 · 조카 존 F. 케네디 주니어
역대 선거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예비선거)
관련 인물 존 F. 케네디 · 마릴린 먼로 · 지미 호파 · 마틴 루터 킹 · 조지프 매카시 · 존 에드거 후버 · 린든 B. 존슨 · 테드 케네디 · 랄프 야버러 · 조지 맥거번 · 에이브러햄 리비코프 · 밴스 하트케 · 케네스 오도넬 · 아서 슐레진저 · 니콜라스 카젠바흐 · 아치볼드 콕스 · 샘 지앙카나 · 카를로스 마르셀로 · 휴버트 험프리 · 유진 매카시
사건사고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파일:노란색 깃발.svg 자유주의 · 파일:Coat_of_Arms_of_John_F._Kennedy.png 케네디 가문 · 파일:존F케네디-투명.svg 존 F. 케네디 · 파일:테디 K.svg 테드 케네디 }}}}}}}}}

1. 개요2. 청년기3. 정계 진출의 야망
3.1. 상원 위원회에서의 활동3.2. 마피아와 노동조합의 공격수3.3. 존 F. 케네디의 선거 매니저
4. 법무장관 시절
4.1. 법무장관으로서4.2. 케네디 대통령의 측근으로서4.3. 케네디 암살 이후
5. 상원의원 시절
5.1. 1964년 상원의원 선거 출마5.2. 상원에서
6. 1968년 대선 출마7. 암살과 사망8. 사망 이후
8.1. 로버트 케네디의 장례식8.2. 정치적 동지들의 운명8.3. 가족들의 생애
9. 관련 문서

1. 개요

The Greatest President America Never Had | RFK: America's Lost President
Each time a man stands up for an ideal, or acts to improve the lot of others, or strikes out against injustice, he sends forth a tiny ripple of hope, and crossing each other from a million different centers of energy and daring, those ripples build a current that can sweep down the mightiest walls of oppression and resistance.
한 사람이 이상을 옹호하고, 다른 사람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 행동하고, 불의에 맞설 싸울때마다 그는 작은 희망의 물결을 내보내고, 서로 다른 수백만개의 에너지와 대담함을 교차시킵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가장 강력한 억압과 저항의 벽을 무너트릴 수 있는 흐름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로버트 F. 케네디
미국의 정치인 로버트 F. 케네디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이다.

2. 청년기

1925년 매사추세츠 주의 부유층 거주지인 브룩레인[1]에서 조셉 P. 케네디와 로즈 케네디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셉 케네디는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으로, 대공황 시기 보스턴 마피아와의 밀주 거래, 주식 되팔기 등의 수단으로 큰 부를 축적한 상류층이었고 민주당의 고위 정치인이었던 조 피츠제럴드[2]의 딸 로즈 케네디와 결혼해 정계 진출의 야망을 키우던 인물이었다. 조셉 케네디는 그런 야망 하에 아들들에게 시사 잡지 읽기, 토론하기 등 여러 심층적인 교육을 시켰고 로버트도 거기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셉 케네디의 유망주는 어디까지나 장남 조셉 P. 케네디 주니어와 차남 존 F. 케네디였고, 로버트 케네디는 상대적으로 아버지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로버트 케네디는 어릴때부터 조숙하고 사회와 미국사에 관심이 많은 아이로 자랐다.

1939년 고향 인근의 포츠머스 수도원 겸 고등학교로 진학해 학업을 계속했으나 미국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과목에서 부진했다. 형 조셉 P. 케네디 주니어에 비해 말 수도 적고 주목받을 일도 별로 없는 유년기를 보냈다. 1943년 평범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로버트 케네디는 잠깐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1944년부터 1946년까지 미 해군에서 이등병으로 잠깐 복무하고 1946년 제대와 동시에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하버드 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공부에 열중하기보다는 존 F. 케네디를 보좌하는데 더 열중했는데, 이는 아버지로부터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한 유년기의 영향으로 형에게 인정받고자 한 심리가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하버드 대학교 졸업 이후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여행하며 이스라엘의 건국을 옹호하는 칼럼을 쓰고 신생 국가 파키스탄과 인도를 방문해 네루 총리, 리아콰트 알리 칸 총리를 만나는 등 견문을 쌓고, 1948년 버지니아 대학교 로스쿨에 입학, 1951년 졸업해[3] 본격적인 사회생활 커리어를 쌓는다.

3. 정계 진출의 야망

3.1. 상원 위원회에서의 활동

로버트 케네디가 군에 입대한 것은 1944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때 쯤이었고, 로버트는 실제 전선에 투입되지 않았다. 이는 아프로디테 계획 도중 항공기 폭발로 전사한 큰형 조 케네디 주니어나, 태평양 전선에서의 영웅적인 행적으로 지명도를 얻은 작은형 존 F. 케네디와는 대비되는 것이었다.[4] 이 때문에 로버트 케네디는 형들에 비해 공로를 쌓아 언론에 주목을 받고 정계에 진출해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할 기회가 없다는 열등감을 가졌다.

1951년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다. 법무부 보안 부서에서 일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요구로 곧 한 상원의원의 보좌관이 되었다. 아일랜드인 커뮤니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아버지는 비록 당적은 다르지만 같은 아일랜드인 커뮤니티에서 친분이 있었던 위스콘신주의 상원의원 조 매카시 밑에 들어가 일하도록 했다. 조 매카시 의원은 " 매카시즘"이라는 말의 어원이 된 것으로 유명한 호전적인 반공주의자였다. 로버트 케네디는 조 매카시가 일하는 상원 위원회에서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상대방을 공격하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로버트는 매카시 의원이 너무 공격적으로 공산주의를 공격하며 민주주의를 해치고 있다고 생각해 불편함을 느꼈고, 조 매카시 의원과의 개인적인 친분은 유지했지만 얼마 안가 1953년 7월 보좌관 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케네디 가문의 측근인 케네스 오도넬(Kenneth O'Donnell)[5]과 래리 오브라이언(Larry O'Brien)[6]은 로버트 케네디에게 1954년 매사추세츠 주 법무장관 선거 출마를 권했지만 로버트는 거절하고 그해 2월 같은 민주당의 상원 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1956년 대선 때에는 민주당 후보자인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보좌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1956년 민주당 전당대회 때 매사추세츠 주 대표단 중 한명이었으며, 존 F. 케네디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 것을 지지했으나[7] 스티븐슨은 더 확실한 개혁파인 에스테스 키포버를 더 선호하였기 때문에 로버트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로버트 케네디는 가정을 꾸렸다. 1950년 상류층의 자제였던 에설 스카이컬과 결혼해 아이를 11명이나 낳았고, 대가족이 지내기에 집이 너무 좁아지자 침실이 13개, 방이 13개 있고 욕실도 몇개씩이나 달려있는 워싱턴 D.C. 교외의 대저택으로 이사했다.

3.2. 마피아와 노동조합의 공격수

영화 "아이리시맨"에 묘사된 청문회장 로버트 케네디의 모습[8]
1957년은 로버트 케네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1957년 1월 30일 미국 상원은 미국 거대 노동조합의 비리와 노사관계 등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 위원회인 미국 노사관계부정 조사 선별위원회(United States Senate Select Committee on Improper Activities in Labor and Management)를 설치하고 존 L. 매클레런(John L. McClellan) 상원의원을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매클레런은 명목상 선별위원회 위원장이었지만 노사 관계를 조사하는데 관심이 별로 없었고, 자신이 보좌관으로 임명한 로버트 케네디에게 거의 전권을 부여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매클레런 위원회의 의사진행자이자 사실상의 위원장으로 맹활약했고, 로버트의 전략대로 이는 미국 미디어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때 로버트의 나이는 불과 32살이었다.

30대 초반의 로버트는 매우 혈기왕성했고 사회 문제에 큰 정의감을 가지고 행동했다. 전미 최대의 운송 노동조합 팀스터스(Teamsters)의 조합장 데이브 벡(Dave Beck)과 지미 호파는 로버트를 철부지 없는 애송이 취급했는데, 로버트는 그런 호파의 행동에 더욱 격분해 청문회장에서 호파를 강하게 추궁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철저한 조사로 받은 자료를 토대로 지미 호파의 부정부패를 추궁했고, 그때마다 호파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헌법에 따라 나에게는 묵비권이 있다"라는 식으로 넘겼다. 로버트 케네디는 지미 호파의 태도에 어이 없어하며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청문회는 크게 인기를 끌어서, 120만명의 미국인들이 생방송으로 로버트 케네디의 청문회를 시청했다고 한다. 로버트 케네디의 행보는 그 자체로 논란이 되었다. 첫번째로 그는 미국 정치에서 거의 금기시되었던 영역이었던 마피아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후벼 파들었는데, 조셉 P. 케네디는 이것이 로버트 케네디의 정치 인생에 큰 위협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9] 두번째로 "노동조합" 그 자체를 공격한 로버트 케네디는 좌파 정치가가 노조를 그렇게 가혹하게 공격하는게 맞냐는 논란을 일으켰다. 세번째로 상대에게 욕을 하며 상대방이 이미 유죄인것처럼 몰아붙이는 로버트 케네디의 수사는 많은 법관들에게 법조인으로서 매우 부적절한 처신이라고 비판받았다. 네번째로 배리 골드워터와 같은 일부 공화당원들은 로버트 케네디가 전미자동차노조 같은 다른 노조에 대해서는 강력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지미 호파를 비롯한 부패한 노동조합의 악명과 마피아와의 유착은 이미 미국인들에게 잘 알려져있던 바, 로버트 케네디의 위신은 올라갔고, 1957년 말 AFL-CIO는 지미 호파가 이끄는 팀스터스의 여론이 너무 나빠지자 팀스터스 조합을 AFL-CIO 산하 노조 자격 지위를 박탈하기까지 이르렀다. 뒤이어 1959년 로버트 케네디는 의사진행자로서의 직권으로 팀스터스 및 다른 노동조합과 연루된 마피아 보스들을 잡아넣기 위해 청문회에 불렀으며, 샘 지앙카나(Sam Giancana), 카를로스 마르셀로(Carlos Marcello) 같은 저명한 마피아 보스들이 붙잡혀와 로버트 케네디의 질책을 받았다.

로버트 케네디의 영웅적인 행보는 미국 사회의 여러 금기였던 노동조합과 마피아의 유착관계를 전면에서 폭로하는 중요한 시도 중 하나였고, 이 청문회를 통해 로버트 케네디는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로 거듭났다. 1960년 위원회가 해산된 후 로버트 케네디는 자신의 행적을 담은 책 "우리 내면의 적"(The Enemy Within)을 퍼냈는데 이 책도 꽤 히트를 쳤다고 한다. 이런 케네디와 노조의 일화와 같은 지미 호파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명화 " 아이리시맨"이다.

3.3. 존 F. 케네디의 선거 매니저

파일:RFK 1960.webp
대선 유세 도중 차에 걸터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로버트 케네디
1960년 3월 메클레런 위원회의 해체로 로버트 케네디는 자연인으로 돌아갔지만, 얼마 안가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돕기 위해 정계로 되돌아왔다. 로버트 케네디와 존 케네디는 형 동생 사이였지만 나이 차이가 8살이나 되어서 어릴 때에는 그닥 친하지 않았고[10] 데면 데면한 사이였다고 한다. 1946년 하원의원 선거와 1952년 상원의원 선거 때 존 F. 케네디를 돕긴 했지만, 이때 로버트의 역할은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957년부터 1959년까지의 열정적인 청문회 활동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은 로버트의 위상은 이전과 같지 않았고, 존 F. 케네디는 믿을 수 있으면서 능력도 출중한 인물로 동생 로버트 케네디와 테드 케네디를 최측근 삼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존 F. 케네디의 측근 수준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함께한 동반자이자 문고리 권력으로까지 분류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1960년 미국 대선의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경쟁자는 북부 민권파에게 지지를 받고 있던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과 남부의 압도적인 지지와, 민주당 기득권의 조직력에 기대고 있던 린든 B. 존슨 상원 원내대표였다. 휴버트 험프리는 초기 흑백 인종 평등을 지지하던 일부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았지만 존 F. 케네디에 비해 자금이 부족해지면서 금방 경선을 그만두어버렸다.[11] 린든 존슨은 험프리와 달리 만만치 않은 상대였는데,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과의 끈끈한 유착 관계를 통해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케네디의 약점을 미리 다 파악했고 상원 원내대표의 신분으로 민주당 기득권의 표심을 뒤흔들기 충분한 인물이었다. 존 F. 케네디는 예비선거에서 크게 이겼지만 존슨의 강경한 태도를 물리치기 위해 존슨과 어느정도의 타협을 하는 상황이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공격적인 성격의 존슨으로부터 존 F. 케네디를 방어하고 역공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사석에서 존슨을 "더럽고 추잡한 동물"이라고 부를 정도로 혐오하였으며, 존슨이 아닌 다른 사람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우는 것을 선호했다. 존 F. 케네디는 워싱턴 주의 상원의원 헨리 M. 잭슨을 보다 선호했고, 로버트는 자신과 친분이 있던 UAW 노동조합 리더인 월터 뤼터(Walter Reuther)를 부통령 후보로 내세우자고 주장했다.[12] 미주리 상원의원 스튜어트 사이밍턴(Stuart Symyngton)도 가능성 있는 선택지였다. 그러나 조셉 P. 케네디는 헨리 잭슨과 월터 뤼터 모두 남부의 지지를 받기 충분하지 못하다며 로버트의 제안에 반대했다. 일설에 따르면, 린든 존슨은 존 케네디의 여성 문제를 들이밀며 로버트에게 자신을 부통령 후보로 추천하라고 겁박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이런 경위로 로버트의 희망과 달리 존슨은 케네디의 러닝메이트로 선정된다.

로버트 케네디는 본선에서도 존 F. 케네디를 위해 핵심적인 유세자로 활약했으며,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존 F. 케네디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그리고 존 F.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그의 역할은 더욱 부각되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내각 구성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관여했는데, 대표적으로 J. 윌리엄 풀브라이트 외교위원장을 인종주의적이라는 이유로 국무장관 후보직에서 탈락시키고 딘 러스크를 국무장관 자리에 앉힌 것을 들 수 있다.[13]

4. 법무장관 시절

이렇듯 케네디의 인사 처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로버트 F. 케네디는 놀랍게도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의 법무장관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로버트 케네디의 나이가 겨우 34세였고 무엇보다 존 F. 케네디의 친동생인만큼 족벌정치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형 존 케네디보다도 더욱 강한 흑인 민권에 대한 입장으로 남부에서 인기가 없었고, 린든 B. 존슨과 개인적으로 사이가 나빠 상원 내에서 지명될 가능성이 낮았다.[14] 존 F. 케네디는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 인준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리처드 러셀 주니어 상원의원에게 무기명 투표를 호명 투표로 바꾸라고 하는가 하면 공화당 소속의 C. 더글러스 딜런(C. Douglas Dillon)을 재무장관으로 임명하는 식으로 공화당 상원의원들을 달래 어찌어찌 상원 인준투표안을 처리했다.

이 때문에 로버트 케네디가 법무장관에서 물러난 후 대통령이 자신의 친인척을 장관, 대사, 보좌관 등의 고위직에 앉힐 수 없게하는 법률이 새로 제정되었다. 이 법률로 인해 로버트 케네디만큼 야욕이 컸던 힐러리 클린턴 빌 클린턴 행정부 때 법무장관 자리를 탐내다가 법에 위반되어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대신 클린턴 케어를 추진하다가 대중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로버트 케네디 때문에 만들어진 친인척 채용 금지법 때문에 재러드 쿠슈너 이방카 트럼프에게 공직을 줄 수 없었다.

4.1. 법무장관으로서

빈 회의실에 혼자 있는 로버트 케네디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단순히 존 F. 케네디의 동생이자 측근으로서만 활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피아와 부패한 노동조합 리더들을 때려잡은 상원 청문회 스타 시절의 경력을 살려 미국 법무부에 영구히 영향을 미칠 이정표들을 만들어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법무부 장관은 부각되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로버트 케네디는 이례적으로 전면에 나서면서 정권의 간판 인사처럼 활약했다.[15] 이는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 때문이기도 했는데, 후버 국장은 케네디 형제를 멋모르는 부잣집 자제들로 안좋게 보고 따로 파일을 만들어 케네디 형제의 스캔들을 모조리 정리해두었다. 그러다보니 존 F. 케네디는 정권의 호위무사 역할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것이 로버트 케네디였다. 즉 단순한 장관이 아니라, 형의 "정치적 경호실장" 역할을 했던 셈.[16] 역사적으로 워터게이트 사건 같은 큰 사건이 터지지 않는 이상 법무장관이 기억되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도 로버트 케네디는 법무장관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편이다.

또한 로버트 케네디는 그와 동년배인 3~40대의 젊은 법학자들을 많이 기용했다. 대표적으로 로버트 케네디는 바이런 화이트(Byron White, 1917년생), 니콜라스 카젠바흐(Nicholas Katzenbach, 1922년생)를 차관으로, 하버드 로스쿨 교수로 로버트와 일면식이 있던 아치볼드 콕스(Archibald Cox, 1912년생)를 송무차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딱딱한 인상인 미국 법무부를 젊고 텔레제닉하며 활기찬 분위기로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들은 다소 보수적이었던 법무부를 진보적인 법률의 수호자로 바꿨는데, 로버트 케네디의 인사들은 대법원에서 기본권과 관련된 안건을 다룰 때 정부가 기본권을 옹호하는 선례를 만들고, 흑인 민권과 투표권을 보장하며, FBI가 다루지 않는 노동조합 비리와 마피아 수사를 적극적으로 개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더 나아가 이들은 후일 워터게이트 사건 때도 진상을 규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 로버트 케네디의 동료이자 친구였던 아치볼드 콕스는 1973년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루는 특검팀을 이끌며 닉슨을 효과적으로 압박한 것으로 아주 잘 알려져있고, 바이런 화이트 차관은 후일 대법관이 되어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대통령 직권으로 증거를 은폐하려던 리처드 닉슨의 시도를 차단했다.[17] 이는 로버트 케네디가 단순히 이미지 정치만을 하지 않은 노련한 정치가였음을 잘 보여준다.

법무장관으로서 로버트 케네디가 보인 성과 역시 찬란했다. 그는 자신이 청문회장으로 끝내지 못했던 무자비한 마피아와의 전쟁을 시작했는데, 1964년 지미 호파가 검거되어 징역 8년과 벌금 1만 달러를 선고받았고 유죄 혐의는 더 늘어나 최종적으로는 총 13년 형을 선고받았다. 마피아에 대해서는, 미국 국적을 버려 탈세를 시도했던 많은 마피아 보스들을 미국 밖으로 추방시켰다. 특히 남부 마피아의 보스 카를로스 마르셀로를 납치하듯 끌고가 헬기에 태운 후 과테말라 정글 한복판에 버리고 갔다는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이 시기 마피아에 대한 법무부의 구속영장 청구 및 유죄 판결은 800% 증가했다.

또 시민권을 사수하려는 그의 노력도 여러모로 빛을 발했다. 1963년 조지 월리스 앨라배마 주지사가 흑인의 대학교 입학을 거부했을 때 로버트 케네디는 법령을 통해 연방군을 출동시키고 카젠바흐 법무차관을 보내 조지 월리스를 설득하게 하였다. 그의 법무장관 재임 기간동안 흑인 시민권 관련 부서는 60% 늘었고,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과 협력해 시민권 법률을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흑인 시민권을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업적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휴버트 험프리와 로버트 케네디의 역할이 입법 과정에 있어 적지 않았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비행청소년 문제를 연방 차원에서 다루는 위원회인 PCJD[18]를 설치해 청소년 인권도 개선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최근에는 로버트 케네디의 법무장관으로서의 능력이 다소 과대평가되어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로버트 케네디가 존 에드거 후버에게 마틴 루터 킹 도청을 허가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왜 로버트 케네디가 루터 킹 도청을 허락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일설에 의하면 마릴린 먼로와의 섹스 스캔들과 관련된 자료를 후버가 입수했고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음모론이 있다. 물론 확실한 증거는 없으므로 어디까지나 음모론일 뿐이다. 몇몇 흑인 민권 운동가들은 로버트 케네디를 "세상 물정 모르는 청년"으로 생각했다. 1963년 5월 24일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와 로버트 케네디의 만남은 좋지 않게 끝났으며,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들은 로버트 케네디가 가톨릭/아일랜드계로서 겪는 편견과 흑인으로서 겪는 실질적인 혐오와 차별을 착각하고 있다고 호되게 비판하였다. 케네디 가문의 일원인만큼 그의 이미지가 어느정도는 "신화"라는 지적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4.2. 케네디 대통령의 측근으로서

로버트 케네디는 법무장관으로서만이 아니라 케네디 대통령의 측근으로서도 여러모로 활약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쿠바 미사일 위기 때의 행보이다. 로버트 케네디는 일반적으로 온건파로 잘 알려져있지만, 사실 그가 초년생 시절 상관으로 모신 조지프 매카시의 영향은 안 받을 수 없어서 쿠바와 공산주의의 문제에 있어서는 강경하게 대응했다.[19] 일부 음모론에 따르면 로버트 케네디는 피델 카스트로를 암살하는 데 적극적이었다고 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반박하는 자료도 많이 때문에 신뢰하기는 힘들지만 쿠바 침공을 지지한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1962년 10월 16일 각의에서 관타나모에서 메인함 사건같은 것을 조작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매파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핵무기를 사용하자는 초강경 입장은 완화하며 적당히 문제를 이끌어나갔다. 로버트 케네디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대표해 10월 27일 주미국 소련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Анатолий Добрынин)과 비밀 접견을 가지고 군사적인 충돌을 회피할 것을 약속했다. 존 F. 케네디는 로버트 케네디의 중재자로서의 행보에 고마워했다.

1961년 베를린 봉쇄 당시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해 위기를 해결하도록 조언하기도 했고, 일본을 방문해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했다. 일본 방문 도중에는 전공투와 총돌하기도 했는데 로버트 케네디는 전공투 대학생을 무대로 올려보내 즉석 토론을 가졌고, 많은 일본 언론들이 로버트 케네디의 모습을 칭찬했다. 이정도면 비공식 대사이자 대통령의 분신으로서 훌륭한 소임을 다한 셈.

이 외에도 U.S. 스틸의 가격담합[20]을 저지하는데에도 로버트 케네디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의 사망이 꽤 지난 지금은 응오딘지엠 제거나 마릴린 먼로와의 스캔들 같은 케네디 대통령의 어두운 면도 드러났고, 여기에 로버트 케네디가 관여 혹은 방관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 비슷한 이유로 헨리 캐벗 로지 남베트남 대사도 평가가 깎였다.
파일:JFK RFK LBJ.jpg
존 F. 케네디, 로버트 케네디, 린든 B. 존슨
린든 B. 존슨 부통령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존슨을 동물과 같은 감각을 지닌 정치꾼으로 보았고, 자수성가한 부자였던 존슨은 케네디를 북동부의 싸가지 없는 재벌 2세 정도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는 이런 일화도 있었다. 존 F. 케네디, 로버트, 테드 케네디, 조셉 P. 케네디 그리고 린든 존슨 부통령이 백악관에 모여서 아침을 먹었는데, 린든 존슨이 느닷없이 "로버트, 네 형도, 네 동생도, 네 아버지도 다 나를 좋아해.[21] 그런데 왜 너만 날 싫어하는거지?"라고 쏘아붙여 아침식사 자리가 썰렁하게 되었다. 존슨과 로버트 케네디는 백악관 내에서 정치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대립했으며 서로를 극도로 싫어했다. 존 F. 케네디도 린든 존슨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슨이 퇴근하면 로버트 케네디와 같이 부통령 뒷담화를 까는 것을 취미삼았다.

1964년 대선을 앞두고 로버트 케네디는 린든 존슨을 부통령 자리에서 제거하고 다른 러닝메이트를 세우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별로 입장이 다소 갈리는데, 중론은 존 F. 케네디는 린든 존슨을 부통령 직위에서 제거하는데 확신을 가지지 않았고 로버트 케네디가 강력하게 린든 존슨을 자리에서 제거하자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존 F. 케네디가 1963년 11월 암살당하면서 백악관 권력의 무게추는 로버트 케네디 쪽에서 린든 B. 존슨 쪽으로 확 기울게 되었고, 로버트 케네디는 백악관에서 거의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4.3. 케네디 암살 이후

1963년 11월 22일 늦은 점심 시간에 로버트 케네디는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로부터 형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존 에드거 후버는 로버트 케네디가 질문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끊어버렸다.[22] 충격을 받은 로버트 케네디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에어포스원을 타고 워싱턴으로 돌아온 재클린 케네디 여사와 린든 B. 존슨 부통령, 랄프 야버러 텍사스 상원의원을 접견했고[23] 형의 사체를 확인하는 유족으로서 작업을 마쳤다. 그보다 2년 전에는 아버지 조셉 P. 케네디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기에 로버트 케네디는 하루 아침에 케네디 가문의 수장이 되어야했다. 케네디 가문의 수장이 된 로버트 케네디는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를 잃은 조카 캐롤라인에게 손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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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에서[24]
1963년 11월 25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찍힌 사진은 많은 미국인들을 눈물짓게 만들었다. 침통한 표정으로 서있는 로버트 케네디와 테드 케네디, 그리고 관에 담긴 것이 자기 아버지인 것도 모른채 어른이 시키는대로 천진난만하게 경례를 하는 존 F. 케네디 주니어는 아직도 1960년대 하면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떠오르는 장면으로 기억된다.

로버트 케네디는 CIA가 암살에 연루되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존 매콘(John McCone) CIA 국장에게 CIA나 FBI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있냐고 물었다. 존 매콘 국장은 아니라고 답했고 로버크 케네디도 CIA가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다며 CIA 개입설을 부정하였다. 케네디 암살을 진상규명하기 위해 설치된 워런 위원회의 보고서를 받은 로버트 케네디는 워런 위원회를 신뢰하며, 케네디 암살이 리 하비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이 맞다고 단언하며 음모론을 일축하였다. 이는 현재까지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음모론을 반박하는 일화로 제시된다.[25]

형을 잃고 가문의 수장이 되어 슬픔과 압박감을 모두 받은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도 실질적인 문제는 로버트 F. 케네디의 가장 큰 정적이었던 린든 B. 존슨이 이제는 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는 백악관에서 로버트 케네디가 행사했던 영향력이 끝장나고, 내각에서 쫓겨나는것도 시간 문제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일단 린든 존슨은 정국 안정 차원에서 케네디 대통령의 내각을 유지시켰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정치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법무장관직을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해 케네디 대통령 사후 2달간은 카젠바흐 법무차관에게 모든 업무를 위임했고 법무장관직으로 복귀한 이후에도 몇가지 중요한 업무를 제외하면 카젠바흐 차관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면서 발을 빼는 모습을 보였다.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동정 여론이 거세짐에 따라 로버트 케네디를 부통령으로 세워야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전국 여론조사에 따르면 민주당원 중 75% 가량이 로버트 케네디를 존슨의 부통령 후보로 선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일부는 1964년 대선에 로버트 케네디가 나서서 형의 유훈을 이어받아야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린든 존슨이 필생의 적인 로버트 케네디를 부통령으로 삼을 일은 없었다. 존슨은 대신 케네디 대통령의 매부인 사전트 슈라이버[26]를 부통령 후보로 삼을까 고려하기도 했지만 로버트 케네디가 이에 반대했다. 게다가 로버트 케네디가 부통령 후보가 되면 남부 유권자의 33%가 존슨을 찍지 않을 것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며 당 내에서도 회의적인 여론이 높아졌다.

결정적으로 로버트 케네디가 부통령 후보직을 거부했으며, 오히려 정계에서 완전히 떠나거나 매사추세츠 주지사로 출마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존슨에게 자신이 남베트남 대사 직을 하겠다고 요청하기도 했지만 존슨이 이를 거부하였다.[27] 로버트 케네디의 측근이나 역사학자인 아서 슐레진저(Arthur Schlesinger)는 로버트 케네디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부통령 대신에 상원의원이 되어 우선 민주당원들 사이에서 지지 기반을 충실하게 쌓아야한다고 조언했고, 케네디는 방향을 틀어 1964년 중간선거의 상원의원으로 출마하기로 결정한다.
로버트 F. 케네디의 1964년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28]
그럼에도 196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기조 연설자로 참석해 20분이 넘는 민주당원들의 우레같은 기립박수를 받았는데, 이는 로버트 케네디가 민주당원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존슨도 로버트 케네디를 향한 당원들의 엄청난 환호로 주눅이 들었고, 케네디의 측근이었던 헨리 M. 잭슨 상원의원이 손을 휘저으며 이제 박수는 그만 쳐도 된다고 당원들을 말렸을 정도였다.

5. 상원의원 시절

5.1. 1964년 상원의원 선거 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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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에서 유세하고 있는 존슨 대통령과 로버트 케네디
1964년 8월 민주당 전당대회를 이틀 앞두고 로버트 F. 케네디는 자신이 내각에서 떠나 뉴욕주를 대표하는 미국 상원의원직에 출마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1964년 9월 2일 그는 법무장관 직에서 사퇴하고, 선거를 두 달 앞두고 상원의원 선거전에 돌입했다. 그의 동생 테드 케네디 역시 1961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후 임기만료로 1964년 재선을 노리던 상황이었기에 두 형제가 동시에 선거에 출마한 초유의 상황이었다.

로버트 케네디가 별다른 연고가 없는 뉴욕주의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한 것은 뉴욕주가 가지는 정치적 상징성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동생 테드 케네디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당선으로 의원직을 사임한 자리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으로 출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로버트 케네디도 처음에는 매사추세츠 주지사에 출마하거나 잠시 정계에서 물러날 것을 고려했다. 본래 뉴욕주에 출마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민주당 후보는 스키낵터디 시장을 역임한 3선 하원의원 새뮤얼 S. 스트래턴(Samuel S. Stratton)이었다. 스트래턴은 1962년 주지사 선거 때 민주당 경선에 나섰다가 떨어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뉴욕주 민주당원들에게는 비교적 친숙한 인물이었던 반면, 로버트 케네디는 선거날까지 뉴욕주에 주소지를 두지고 않았기 때문에 당내 개혁파에게 로버트 케네디의 뉴욕주 상원의원 출마는 큰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로버트 케네디는 로버트 F. 와그너 주니어 뉴욕시장이나 15선 중진인 찰스 버클리(Charles A. Buckley) 하원의원 같은 당 기득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고, 린든 존슨 대통령도 로버트 케네디의 뉴욕주 상원의원 출마를 막지 않았다. 그 결과 196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968표 대 153표로 압도적으로 스트래턴 의원을 꺾고 뉴욕주 상원의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64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로버트 케네디가 맞붙은 공화당 후보는 5선 하원의원을 거쳐 1958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참패를 뚫고 당선되어 주목을 받았던 케네스 키팅(Kenneth Keating)이었다.[29] 케네스 키팅은 공화당원으로 꽤 온건한 성향을 지닌 의원으로 당시 대선에 나섰던 보수파 배리 골드워터에 대한 지지를 거부해 뉴욕의 중도파에게 소구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키팅 의원은 로버트 케네디가 뉴욕에 살지도 않으면서 출마한 것을 두고 "의원직 하나 얻으려고 뉴욕으로 내려온 기회주의자"라고 맹공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에 맞서 "만약 뉴욕 사투리 잘 쓰는걸로 상원의원을 뽑는다면 물론 제가 지겠죠. 하지만 능력으로 뽑는다면 전 절대 뒤지지 않을 겁니다"라고 재치있게 대응했다. 또한 같은 날 1964년 미국 대선이 치러졌는데, 공화당 후보로 베트남 핵폭을 주장한 강경파 배리 골드워터가 출마하며 북동부 지역에서 공화당 지지율이 급락한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점차 판세는 케네디 쪽으로 기울었다.
<rowcolor=#000> 1964년 미국 상원의원 선거 (뉴욕주)
후보 득표수 비고
정당 선거인단 당락
파일:공화당(미국) 엠블럼.svg 케네스 키팅
(Kenneth Keating)
3,104,056 2위


43.40% 낙선
파일:민주당(미국) 엠블럼.svg 로버트 F. 케네디
(Robert F. Kennedy)
3,823,749 1위


53.47% 당선
- 그 외 후보 223,776 낙선
3.13%
총 투표수 7,151,581


탈환
무효표 수 152,909
최종 개표 결과 로버트 케네디는 380만표를 얻어 310만표를 얻은 케네스 키팅을 70여만표 차이로 여유롭게 앞질렀다. 백분율은 53.5% 대 43.4%로 10%p 차이였다. 그러나 같은 날 치러진 대선에서, 존슨은 뉴욕주에서만 490만표(68%)를 득표했는데, 이는 대선에서는 존슨을 뽑고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공화당 케네스 키팅을 뽑은 사람이 꽤 됨을 보여주었다. 매사추세츠 사람인 로버트 케네디가 뉴욕 주 상원의원으로 출마하는 것에 어느정도 불편함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5.2. 상원에서

1965년 1월 제89대 미국 연방의회 개원과 함께 로버트 케네디는 의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초선 의원이 되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사우스다코타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 오클라호마 상원의원 프레드 해리스, 노동운동가 돌로레스 후에르타(Dolores Huerta), 노동운동가 세자르 차베스(Cesar Chavez) 등과 동맹을 맺었고 1961년 당선되었던 동생 테드 케네디에게 상원 정치술을 역으로 배웠다. 비슷한 시기, 케네디 가문과 친한 역사가 아서 슐레진저가 존 F. 케네디의 대통령직을 다룬 <1,000일: 백악관의 JFK> (A Thousand Days: John F. Kennedy in the White House)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공전의 히트를 친 이 책은 케네디 일가에 대한 대중의 견해를 호의적으로 바꾸면서 로버트 케네디의 정치 경력에도 꽤 도움이 되었다.[30]

로버트 케네디는 연설 능력이 좋아서 대중에게는 인기 있었지만 잘난척하는 성격 때문에 동료 상원의원들과는 사이가 그냥저냥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도 입법 활동이나 지역구 관리를 하기보다는 미국인들이 겪는 어려움을 직접 경험하고, 이를 토대로 입법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대통령 같은" 활동을 더 많이 했다. 이는 로버트 케네디에 대한 인기를 높여주었다. 다른 미국 정치인들과는 달리 현장을 찾고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헌신적인 의원이라는 이미지가 생긴 것이다.

그는 상원의원 신분으로 종종 어려움에 처한 흑인 커뮤니티, 미국 원주민 커뮤니티, 도시 빈민가 등을 적극적으로 방문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즉각적인 빈곤의 해결을 촉구하였다. 마틴 루터 킹과 같은 민권운동 리더들도 로버트 케네디의 이런 태도에 호응하며 케네디 의원의 동맹자가 되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도시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기업이 나서서 재개발을 해야한다는 다소 보수적인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대기업을 규제하는데에 앞장섰다. 특히 1960년대 금연 사업과 자동차 벨트 의무화 등에 로버트 케네디가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

6. 1968년 대선 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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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변가의 로버트 케네디.webp
해변에서[31]
I run for the Presidency because I want the United States to Stand for the reconciliation of men,
저는 미국이 국민의 화합을 이끌어내길 원하기 때문에 대통령에 출마합니다.
선거용 책자의 첫 말
1968년 대선을 앞두고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하자, 민주당 내에서는 존슨을 로버트 케네디로 교체해야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1972년에 안전하게 출마하자는 테드 케네디의 말에 설득되었고 자신의 측근인 사우스다코타의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을 형식상 출마시켜 자신의 지지층을 규합시키는 정도로만 1968년 대선에 관여할 생각이었다.

존슨의 유일한 반대자는 베트남 전쟁 즉각 철수 공약으로 히피와 신좌파에게 지지를 받았던 미네소타 주의 재선 상원의원 유진 매카시였다. 경선 시작 전까지만 해도 존슨은 7 대 1의 비율로 매카시를 여론조사에서 앞질렀다. 그러나 1월 30일 구정공세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여론이 심각하게 나빠졌고, 매카시가 반전좌파를 규합하는 효과적인 풀뿌리 선거운동을 전개하며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매카시가 42% 대 49%로 존슨을 추격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존슨이 붕괴되기 시작하자 로버트 케네디는 초조함에 빠졌다. 존슨이 불출마한다 치면, 1968년 대선에 당선되는 사람은 무조건 1972년에 재선에 나설 것이고, 그러면 1976년까지 기다려야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케네디는 어쩔 수 없이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4일 후 자신의 입장을 뒤집고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유진 매카시와 베트남 전쟁 반대파는 이러한 로버트 케네디의 행동을 기회주의적인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한편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로버트 케네디와 유진 매카시의 양방향 공격을 버틸 수 없었고 이주일 후 경선 사퇴 및 3선 포기를 선언했다. 그 즉시 존슨의 부통령이자 당 내 기득권의 지지를 받고 있던 휴버트 험프리가 유력 주자로 떠올랐다.

로버트 케네디는 1968년 5월 인디애나 주 프라이머리를 시작으로 네브래스카, 오리건, 캘리포니아, 사우스다코타 등의 프라이머리에 참여했다. 인디애나 주에서 케네디는 패배가 예상되었으나 의외의 승리를 거두었고, 케네디 대세론이 불기 시작했다. 오리건 주에서 유진 매카시에게 패배해 이 추세가 약간 꺾이기도 했으나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에서의 대승으로 로버트 케네디는 뉴욕 프라이머리 승리를 통해 당내 기득권과 유진 매카시를 동시에 압박하고 대선 후보 지명을 받을 계획이었다.

7. 암살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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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68년 6월 5일 자정, 캘리포니아 예비선거 승리를 확인하는 자축 연설을 한 직후 팔레스타인 이민자 시르한 시르한에게 급작스럽게 피격되면서 중태에 빠졌다. 총알이 뇌를 정확히 관통했기 때문에 소생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고, 결국 26시간 후 사망하면서 형에 이어 암살에 희생된 두 번째 케네디가 되었다. 사건의 자세한 전개와 정보는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문서를 참조.

8. 사망 이후

8.1. 로버트 케네디의 장례식

파일:로버트 케네디의 장례식.webp
로버트 케네디의 장례식, 1968년 6월 8일
로버트 케네디의 장례식은 그의 사망 이틀 후인 6월 8일 뉴욕 성패트릭 성당에서 치러졌다.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한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상주 역할을 맡은 테드 케네디는 전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역사가 아서 슐레진저, 보좌관 케네스 오도넬과 카터 버든, 노동운동가 월터 뤼터, 전 법무차관 니콜라스 카젠바흐,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과 에이브러햄 리비코프, 밴스 하트케 등 케네디와 생전에 친하게 지냈던 정치가와 사적인 친구, 가족 등 1만명을 선발해 장례식에 참가시켰다. 로버트 케네디의 유해는 성패트릭 성당에서 옮겨져 워싱턴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는데, 이 1만명을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싣고 가느라 기차 수십대를 동원하며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32] 게다가 로버트 케네디의 관을 실은 기차는 뉴욕에서 워싱턴을 이동하면서 거의 10분에 한번씩 멈춰서야했는데, 수많은 미국 시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철도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장례미사를 마치고 8시간 뒤 워싱턴 주에 위치한 알링턴 국립묘지에 도착한 뒤 하관예식을 진행했고, 로버트는 5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형 존의 묘역 바로 옆에 위치한 묘에 안장됐다. 테드 케네디는 형의 하관식이 진행되는 내내 눈물을 보였고,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과 동료들이 눈물을 흘리며 하관예식을 지켜보았다.

8.2. 정치적 동지들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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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연설하는 조지 맥거번
조지 맥거번은 1970년 로버트 케네디를 어렵게 만든 경선 제도를 개혁하는 위원회에서 활동했는데, 이를 맥거번-프레이저 위원회라고 부른다. 맥거번-프레이저 위원회는 "슈퍼 대의원" 제도를 신설해 기존에 무시되어왔던 흑인, 여성, 청년에게 공정한 참정권을 부여하고, 무엇보다 당원이 직접 대통령 후보를 결정할 수 있게 하면서 미국 정치 제도에 혁명을 불러왔다. 오늘날까지도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이 맥거번이 제안한 대통령 후보 당원 직선제 제도를 선택하고 있으므로[33] 그와 로버트 F. 케네디의 영향력이 오늘날까지도 크게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지 맥거번은 로버트 케네디의 유훈을 잇는다는 의미로 일짜감치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케네디의 유권자 블록인 흑인-소수자-여성-빈민층에 이어 유진 매카시의 지지층이었던 지식인, 반전좌파 대학생, 신좌파 그룹 등을 잇는 광범위한 반기득권 유권자 블록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풀뿌리 운동의 결과, 맥거번은 당 내 거의 대부분의 기득권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휴버트 험프리를 꺾고 1972년 대선 후보로 선출되어 케네디의 설욕에 성공했다. 하지만 험프리를 비롯한 민주당 기득권은 맥거번 대신 리처드 닉슨을 지지하였으며 닉슨은 안정적인 경제와 데탕트로 대표되는 외교 성과를 내세워 맥거번을 대책 없는 급진좌파 후보로 매도했다. 그 결과 맥거번은 불과 38%, 17명의 선거인단을 얻는데 그치며 역대급 참패를 당하였다. 맥거번은 198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이후 정계를 은퇴하였다.

한편, 에이브러햄 리비코프 등 로버트 케네디와 친밀했던 다른 상원의원들은 원내 진보파를 대표하며 활동을 벌이다가, 1980년대를 전후해 대부분 은퇴하였다. 이로서 로버트 케네디의 그림자는 사라졌고, 케네디/매카시 - 맥거번 - 테드 케네디로 이어지는 미국 진보주의의 유산은 오늘날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진보파가 잇고 있다.

노동운동가 월터 뤼터는 1970년, 케네디가 죽은지 2년 후 사망하였다. 세자르 차베스의 영향력은 로버트의 사망 이후 점차 커졌다. 그는 1972년 조지 맥거번을 지지하면서 그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며, 그보다 2년 전에는 캘리포니아 상추 제배 농민의 파업을 주도하며 영향력을 과시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차베스의 영향력은 캘리포니아를 넘어 계속 커졌고 이후에도 노동조합 UFW를 이끌며 민주당과 노동조합 진보파의 원로로서 대접받았다. 다만 1980년대부터는 노동조합의 분열과 소송전 때문에 다소 어렵게 살았다. 그는 현대 히스패닉 민권운동, 미국 가톨릭 좌파의 시초로서 재평가받고 있다.

법무장관 시절 로버트 케네디의 동료였던 바이런 화이트는 1962년부터 1993년까지 무려 31년간 대법관을 지내며 중도적인 판결을 이끌어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판결은 워터게이트 사건 때 닉슨의 증거인멸 시도를 차단한 판결일 것이다. 로버트 케네디 밑에서 일했지만 미란다 대 애리조나, 로 대 웨이드, 가족계획연맹 대 밥 케이시 시니어 등 중대한 판결마다 보수적인 입장에 서 중도파로 분류되었다. 아치볼드 콕스 송무차관은 케네디 암살 후 하버드 대학교에 잠깐 돌아갔다가, 1973년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사하는 특별검사로 임명되어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리처드 닉슨은 아치볼드 콕스 특검 설치에 광분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카젠바흐 법무차관은 케네디 암살 후 정계를 은퇴해 IBM에서 일했다.

8.3. 가족들의 생애

케네디의 사망 이후, 일부 케네디 지지자들은 테드 케네디를 대선 후보로 내보내자고 주장했지만 테드 본인이 거절하면서 불발되었다.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이 로버트 케네디의 남은 지지자와 대의원을 수습하고자 했으나, 맥거번은 로버트 케네디에 비해 전국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었고 카리스마도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흑인이나 소수인종, 도시 빈민 등 케네디를 지지했던 핵심 유권자들은 맥거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일부 민권 세력은 독자 후보를 내보내기까지 했다. 결국 맥거번은 전당대회에서 대통령이 되는데 필요한 표를 얻지 못하며 험프리, 매카시에 밀려 3위로 낙선했고 이것으로 로버트 케네디의 꿈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8월 전당대회에서 휴버트 험프리 유진 매카시 지지자들의 격렬한 반대 속에 대다수 대의원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1월 본선에서 패배하였고, 이는 로버트 케네디가 1968년에 출마했다면 당선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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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 사자" 테드 케네디
이후 테드 케네디도 대통령의 꿈을 꾸고 1969년 러셀 롱(Russel Long)을 누르고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로 당선되며 대통령 자리에 근접하나 싶었더니, 1969년 7월 18일 " 차파퀴딕 사건"에 휘말리며 결국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34] 1980년 대선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의 보수적인 정책에 반발해 민주당 예비선거에 딱 한번 출마하긴 했지만, 존 F. 케네디나 로버트 F. 케네디와는 비교도 안되는 허접한 캠페인을 벌였다는 평가를 받았고[35] 초기 60%에 달했던 지지율을 모두 까먹고 예비선거에서 카터에게 패배했다. 그래도 1980년대 레이건의 보수화 경향에 맞서면서 오늘날 오바마 케어로 알려진 보편적 건강보험 제도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입법 기록만큼으로는 미국 역대 최고의 상원의원 중 한명으로 꼽히곤 한다.

로버트 케네디의 장남인 조 케네디 2세는 1980년대 미국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아버지에 비해 존재감이 옅었고 결국 1990년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정계를 은퇴했다. 장녀 캐서린 케네디 타운젠드는 메릴랜드 주의 법무장관을 지냈고, 2002년 중간선거에서 매릴랜드 주지사 선거에도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5번째 아들인 크리스토퍼 "크리스" 케네디는 2018년 중간선거에서 일리노이 주지사로 출마했고 당선 가능성도 높게 점쳐졌으나 민주당 경선에서 J. B. 프리츠커에 밀리며 꿈을 이루지 못했다. 손자이자 조 케네디 2세의 아들인 조 케네디 3세는 2020년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에 출마하지만, 에드 마키에 밀려[36] 45% 밖에 받지 못했고 2022년부터 아일랜드 대사로 재직하는 중이다. 이처럼 로버트 케네디의 자식들이 뚜렷한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케네디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감소하게 된다. 로버트 케네디가 오래 살아서 이들의 육성에 힘썼다면 달라졌을 지도 모를 일이기에 대중의 아쉬움이 크다.

2023년 들어 뜬금 없이 존재감이 높아지고 있는데 그의 차남이자 백신 음모론자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가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밝히겠다며 2024년 미국 대선 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케네디 가문은 그의 지지를 거부하고 조 바이든을 지지하라고 촉구하고 있으며, 로버트 케네디의 첫째 딸 캐서린 케네디 타운젠드는 아예 내다버린 자식 취급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이후 지지율이 적으면 6%, 많으면 15~18%까지 기록하고 있고, 18~34세와 무당층에게는 지지율 1위를 기록하기도 하는 등 여전히 "로버트 케네디"라는 이름값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9. 관련 문서


[1] 마이클 두카키스도 여기서 태어났다. [2] 보스턴 시장을 역임했으며, 1916년 매사추세츠 상원의원 선거에서 헨리 캐벗 로지 시니어에 대항해 출마했다가 떨어졌다. [3] 성적은 125명 중 56등. [4] 여담으로, 로버트의 동생 테드 케네디 한국 전쟁 당시 징집되어 전선에 파견되어야했다. 하지만 형들과 달리 전사를 우려했던 테드 케네디는 아버지의 인맥을 이용해 알프스 산맥에 주둔하는 주프랑스 미군 부대로 빠져 사실상 병역기피를 했고, 군 복무 도중 밥먹듯 알프스 산을 유람하고 스키를 타는 호화생활을 누려 욕을 무진장 먹었다. [5] 존 F. 케네디의 1963년 11월 텍사스 카퍼레이드를 강력하게 추진한 인물로 알려져있다. 로버트 케네디와도 친한 관계였는데, 케네디 형제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50대의 나이로 급사했다. [6]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DNC 의장이었던 그 사람이다. 워터게이트 사건 때 민주당사를 습격해 전화기에 도청을 설치하려고 한 일당이 바로 래리 오브라이언을 표적으로 삼아 도청을 시도했다. [7] 당시 유력한 부통령 후보군은 북동부의 존 F. 케네디 상원의원, 당 기득권의 지지를 받는 로버트 와그너 뉴욕시장, 당내 개혁파에 속했던 에스테스 키포버 상원의원이었다. [8] 잭 휴스턴이 로버트 케네디 역을 분했는데 별로 안닮았다. 잭 휴스턴이 전형적인 미남상이라면 로버트 케네디는 다소 호불호를 타는 개성있는 미남상이라 그렇다. 영화 "호파"(1992)에서의 로버트 케네디가 더 원본과 닮았다. # [9] 당시에는 피오렐로 라과디아 토머스 E. 듀이처럼 마피아 문제를 적극적으로 처리한 정치인들도 있었지만 그 수가 많은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잔뼈가 굵은 정치가였기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케네디 가문은 보스턴 마피아와 유착 관계로 유명했기 때문에 케네디 가문이 마피아와 불화를 굳이 빚을 필요가 없었고 존 F. 케네디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마피아에 비교적 유하게 대했다. [10] 테드 케네디는 더해서 존 F. 케네디와 나이 차이가 15살이나 났다. 세명 모두 정계에 입문하면서 서로 친해졌고 그 이전에는 같은 가족이라는 인식만 있었지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11] 휴버트 험프리는 자신이 버스에서 샌드위치로 끼니 때우며 선거운동할동안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F. 케네디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함께 편하게 전용기를 타고 이동했다며 불평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2] 로버트 케네디는 메클레런 위원회 의사진행담당자로서 UAW에는 비교적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13] 맥조지 번디도 고려되었는데, 너무 젊다는 이유로 탈락했고 대신 국가안보보좌관 자리에 앉게 되었다. [14] 무기명 투표로 인준안을 처리했으면 찬성표가 40표도 안나왔을거라고 한다. [15] 미국은 연방제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법무 관련 일은 주 정부 단위에서 처리하며 그래서 한국과 달리 미국은 교육부나 법무부, 주택도시건설부 같은 부서가 할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작은 정부"를 강조하는 공화당의 선거용 단골 공약이 교육부 폐지이며, 법무부는 건국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설치가 안되었다가 19세기 후반에 겨우 신설되었다. 다만 도널드 트럼프나 헌터 바이든 같은 대통령 및 그의 친인척들의 논란이 많이 불거지고 있는 2020년대에는 메릭 갈랜드 같은 법무장관들이 정권의 호위무사로서 유독 주목받기도 한다. [16] 제도적으로도, 미국의 법무부 장관은 한국과는 달리 검찰총장의 역할을 겸임하면서 평소에도 법무부 장관으로서 호칭되는 일은 거의 없고 '어터니 제너럴' 즉 총괄 법률대리인' 정도로 불릴 정도로 대통령, 정부의 법률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는 위치이다. 한국에서도 한동훈 법무장관이 법무장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큰 전권을 휘두르자 그가 로버트 케네디를 롤모델로 하는게 아니냐는 분석이 일부 나오기도 했다. # [17] 이를 두고 로버트 케네디의 영혼이 리처드 닉슨을 무너트렸다는 평가도 나온다. 영화 <닉슨>에서도 그렇고 이 때문에 닉슨의 몰락을 다룰 때 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을 의식하는 닉슨을 묘사하는 것은 일종의 클리셰가 되었다. [18] President's Committee on Juvenile Delinquency and Youth Crime [19] 다만 존 에드거 후버처럼 다른 문제를 모두 재쳐놓고 좌파 운동권을 때려잡는 식의 접근법은 반대했다. [20] 1962년 US 스틸을 주도로 한 여러 제철기업이 톤당 6달러를 인상한다고 하자, 케네디 대통령이 가격 담합을 저지하기 위해 6달러 인상을 막은 사건을 의미한다. [21] 존 F. 케네디와 린든 존슨의 사이는 영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치적 동반자로 서로 존중은 하는 사이였고, 조셉 P. 케네디는 존슨을 부통령 후보자로 삼을 것을 강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테드 케네디는 중진의원들에게 언제나 태도가 공손했기 때문에 존슨이 유일하게 좋아한 케네디 가문의 일원이었다. [22] 로버트 케네디는 후버가 이런 행동으로 자신과 자신의 형을 조롱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23] 존 코널리 텍사스 주지사는 케네디를 관통한 총알에 맞아 치명상을 입어 수술을 받던 중이었다. [24] 베일을 쓰고 있는 사람이 재클린 케네디, 양 옆에 테드 케네디와 로버트 케네디가 서있다. [25] 테드 케네디 역시 워런 위원회의 주장을 신뢰했다. 단, 케네디 가문의 측근이자 그들의 전기작가인 아서 슐레진저에 따르면, 로버트 케네디는 여전히 무엇인가 불만이라는듯 보고서 자체를 읽지는 않았다고 했는데, 아마도 심리적으로 존슨이나 CIA 등이 연루되어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던듯 하다. 여담이지만 존슨 대통령의 경우 쿠바 개입설에 무게를 실었다는 것이 밝혀진 상태이다. [26] 1972년 대선 때 조지 맥거번의 러닝메이트였던 그 사람 맞다. [27] 존슨은 남베트남 대사로 헨리 캐벗 로지를 유임시켰다. [28] 연설은 10분부터 시작된다. [29] 1958년 중간선거는 58년 단기공황의 영향으로 공화당의 인기가 급락해 공화당이 역사적인 참패를 했는데, 뉴욕에서만큼은 넬슨 록펠러돈을 쳐바르면서 현직 애버럴 해리먼 주지사를 꺾고 당선, 상원의원 자리도 수성했다. [30] 아서 슐레진저는 <용기있는 사람들>의 대필작가로도 잘 알려진 테드 소렌슨, 케네디의 공보비서관 피에르 샐린저 등과 더불어 "케네디 신화"를 창조한 인물 중 하나로 지목되는 인물이다. 논란은 많지만 기본적으로 훌륭한 역사가로 케네디에 대한 중요한 저작들을 다수 남겼다. [31] 1968년 5월 24일 암살 2주일 전 오리건의 태평양 해변가에서 찍힌 사진으로, 로버트 케네디의 사진 중 가장 인상적인 사진으로 꼽힌다. 케네디 가문에 대한 열등감이 심하기로 유명한 리처드 닉슨이 이를 따라한 사진도 있다. # 오른쪽은 로버트 케네디의 부고 소식을 알리는 시사잡지 <Life>의 표지로 역시 유명한 표지이다. [32] 슐레진저는 당시 상황을 "비극적이면서 웃긴 상황"이라고 했다. [33] 한국의 경우, 2002년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이 미국의 순회경선 제도를 따와 당원이 참여하는 지역별 순회 경선을 도입한 것이 시초이다. [34] 차파퀴딕 사건이란 새벽에 파티를 마치고 젊은 여비서와 드라이브를 하던 테드 케네디가 술 기운에 차를 바다에 빠트렸는데, 여비서를 구하지 않고 혼자만 탈출하고 경찰에 신고도 안해 여비서를 죽게 만든 사건을 의미한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은 테드 케네디가 여비서와의 섹스 스캔들을 숨기려고 일부러 죽게 만든게 아니냐고 의심했고, 테드 케네디는 이 사건으로 거의 정계 인생이 끝장날뻔 했지만 케네디 가문의 인맥빨로 간신히 상원의원직만큼은 유지했다. 그러나 이 여파로 기껏 얻은 원내총무직도 로버트 버드에게 잃었고 대통령 선거 출마는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35] 자신이 대통령에 왜 출마하는지에 대한 간단한 답도 못해서 횡설수설을 하고, 차파퀴딕 사건 의혹을 제기하는 기자에게 고함을 지르는 등 표를 깎아먹을 짓만 골라했다. [36] 에드 마키는 30년동안 의회에서 진보주의를 대표한 인사로, 어릴 적 가난하게 살았지만 자수성가했고 의회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모습을 보여줘 AOC 등 당내 좌파로부터 지지를 받는 존경받는 정치가였다. 반면 조 케네디 3세는 말 그대로 케네디 이름 석자 빼곤 내세울게 없는 인물이었다. 낸시 펠로시 등 민주당 당권파가 조 케네디 3세를 지지하긴 했지만 오히려 이것이 역효과를 불러일으켜 민주당 소장파가 지지한 마키가 재선에 성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