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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9:12:08

야간 통행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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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대표적 사례
2.1. 조선의 사례2.2. 대한민국의 사례
2.2.1. 과거
2.2.1.1. 예외2.2.1.2. 통행증
2.2.2. 현재
2.3. 해외의 사례
2.3.1. 미국, 유럽2.3.2. 아시아2.3.3. 남미2.3.4.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 관련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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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간 통행금지()는 밤에 허락받지 않은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통행금지제도를 말한다. 약칭 통금. 현대까지도 밤에 치안이 좋지 못한 곳은 있고 과거엔 더 심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범죄율을 강제로 낮추고자 과거에 많이 시행했던 규범이다. 또, 그 당시에는 어차피 횃불이나 초롱불 외에는 조명이 없고 해 떨어지면 일반인들이 할만한 야외 활동이 거의 없어서 별 반발이 없었다.[1]

영어로는 'curfew'(커퓨)라고 부르며 어원은 프랑스어로 '불을 덮어서 끈다'는 뜻인 'couvre-feu'(쿠브르푀)이다. 중세 시대 영국에서 오후 8시가 지나면 화재 예방을 위해 강제 소등과 통행금지를 명령한 게 유래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단어는 현대에는 공항에서의 야간 이착륙 금지를 뜻하기도 한다. 주로 활주로에 조명이 고장 나거나 항공기 자체의 야간 식별 장비에 문제가 있는 경우, 도심 가까이 있어 소음 피해가 예상되는 경우가 있으며, 도심에 있어서 소음 문제로 커퓨를 거는 공항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김포국제공항.[2] 현재 야간 이착륙 가능한 공항은 인천국제공항, 청주국제공항이 있다. 이때 커퓨는 항공기 야간 이착륙 제한 시간대를 지칭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자세한 내용은 커퓨 타임 문서를 참고하자.

2. 대표적 사례

2.1. 조선의 사례

조선 시대에 인정이 울린 뒤의 남성들은 의원을 부르거나 상을 당하는 등의 예외적인 사정이 있거나 순라군 같은 특별한 직업이 아닌 이상 밖에 나다닐 수가 없었다. 통금이 시작되는 시간을 인정, 끝나는 시간을 파루라고 하는데 태종 때부터 초경 3점(오후 8시)부터 오경 3점(익일 오전 4시 30분)까지 금지였고, 세조 때 이경(오후 9시)부터 오경(익일 오전 3시)까지로 완화되었다. 원래는 명나라의 법을 따라서 파루 때만 종을 쳐서 알렸으나, 통금을 잡는 순관과 통금 시간이다 아니다 마찰이 있었는지 세종 때부터는 인정 때도 통금을 알리는 종을 쳤다.

통금이 지난 이후에 사정이 있어 통행을 하려면 경수소(警守所)에서 허락을 받아야 했다. 허락 없이 이를 어겼다가 잡히면 파루까지 경수소에서 밤을 보내다가 다음 날 아침 곤장을 맞고 풀려났다. 초경(저녁 7시) 이후 돌아다니면 10대, 이경 이후로는 20대 하는 식으로 시간당 10대가 추가되었다.

단, 유교적 문제로 바깥 활동을 자제해야 했던 여성들에게는 바깥일을 볼 시간을 준다고 초경부터 이경이 되기 전(저녁 7시~9시)에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했고, 남자들의 통행은 금지하였다. 한 외국인이 조선에 와서 남긴 기록에 따르면 보통 길거리에 여자는 하나도 없는데, 종이 땡 치면 남자들이 싹 사라지고 여자들만 다닌다고 신기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음양오행설과도 연관이 있는데 남성을 양, 여성을 음으로 보아 양기가 충만한 낮에는 남성이, 음기가 넘치는 밤에는 여성이 활동하기 좋다는 논리였다.

태종 때까지는 통금 시작을 알리는 종을 치지 않았기에 황당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사헌 이원이 몸종과 밤에 길을 가다가 순관 윤종이 검문을 했는데, 통행금지 위반으로 몸종을 체포해 간 것이다. 이원은 삐져서 태종에게 사실상 윤종을 처벌해 주기 전에는 출근하지 않겠다고 상소를 올렸다.

고작 순관에 불과한 윤종보다는 대사헌인 자신의 편을 들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겠고,[3] 통금을 어긴 죄를 물어봐야 곤장 10대였으므로 쉽게 생각한 듯하다. 태종은 증인이 없는 상황이라 내가 결론을 낼 수 없으니 그냥 출근하라고 했는데 이원의 삐짐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자 태종은 이원을 파직했으며 덤으로 윤종도 몸종만 체포하고 대사헌이라고 봐준 죄로 파직되었다. 결국 이원의 목표를 이루기는 이뤘다 어설프게 가라를 치면 안되는 이유
대사헌(大司憲) 이원을 파직하였다. 이원이 통행 시간을 어겨 집으로 가는데, 순관인 호군(護軍) 윤종이 이원의 근수(根隨, 몸종)를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이튿날 이원이 본부에 가서 윤종을 탄핵하고 수일 동안 출근하지 않았다. 임금이 직접 출사하라 하였으나,
"전일에 신이 초경 3점 전에 집으로 돌아가는데, 순관 윤종이 통행 시간을 어겼다 하여 신의 근수를 잡았습니다. 윤종이 초경 3점 이전에 검문하였다면 윤종에게 죄가 있으며, 신이 통행 시간을 어겼다면 신에게 죄가 있으니 이 일을 판단해 주기 전에는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경이 출사하였으면 한다. 경의 말은 이치에 맞으나 내가 그 일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원이 출사하지 않자 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대사헌 이원은 남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위치이건만 통행 시간을 어기고 돌아다니다가 검문당하기나 하고, 윤종도 순관으로서 죄를 지은 사람을 봤으면 잡아놓고 심문했어야 하는데 근수만을 잡았다가 놓아주었으니, 두 신하는 모두 법보다 사사로움이 앞서니 모두 파직하시옵소서."
하여, 이를 윤허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2권, 태종 1년(1401년) 9월 21일

이처럼 조선 시대에 통금은 엄격해서 고위직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누구누구가 통금에 걸렸는데 풀어줬더라라고 왕에게 고발하고, 왕은 그게 사실로 드러나면 위반자는 곤장을 치고 봐준 자도 같이 처벌했다는 기사들이 종종 보인다.

2.2. 대한민국의 사례

2.2.1. 과거

밤 12시에는 동네 앞에도 못 나갔던 야간 통금 시절 | 옛날티비 : KBS Archive
파일:2021110200090_0.jpg
1972년 경찰 기동대에게 통금 위반 혐의로 적발된 여성들
왼쪽 여성은 통금 위반 혐의 적발에 미니스커트까지 입고 있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것들이 다 위법 행위였다. 여성에게는 미니스커트를, 남성에게는 장발을 단속했었던 시절이다.

야간 통행금지 정책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조선총독부에서 ( 더글러스 맥아더 명의로) 1945.9.7일 서울, 인천 등 수도권 지역에서 시작하였고 미군정에서도 이어졌다. 표면적인 목적은 치안 유지였지만, 이 정책 때문에 통금이 시행된 약 36년간 국민들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는 권리를 제약받았다.

처음에는 서울특별시 지역을 중심으로 20시부터 익일 5시까지 야간 통행금지를 시작했다가 나중에 22시부터 익일 4시로 단축되었다. 그러다 6.25 전쟁 직후부터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961년부터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 1982년까지의 통상적 통금 시간은 자정부터 4시까지였다. 다만 1960년 4.19 혁명 당시에는 21시부터 5시까지 통금이 연장되었고 1979년 부산·마산 민주 항쟁 당시와 박정희 사망으로 인한 계엄령이 발동될 때는 밤 22시부터 4시까지 통금 시간을 2시간 늘인 적도 있었다.
파일:통금연장 19791018.jpg
부마항쟁 당시 부산역 대합실에 붙은 포고문을 시민들이 읽고 있는 모습

당시에는 나이 불문 전 연령층이 통금 대상이었으며, 이를 어겼을 경우 거동 수상자로 곧바로 체포해 파출소 등에서 조사를 받고 다음 날 새벽 통금이 풀릴 때까지 유치장에 갇히는 경우가 많았고, 통금 해제와 동시에 약식 재판에 넘겨져 범칙금을 내고 풀려났다. 이 당시에는 과장 좀 보태서 경찰 기관들이 일종의 숙박업소 역할을 했는데, 통금 시간까지 집에 못 돌아갈 거 같은데 근처에 경찰서가 있다면 아예 자진해서 통금 직전에 경찰서로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서내에서 시간 보내다 해제 시간에 맞춰 나가기도 했다. 물론 통금 위반 그 자체는 중범죄가 아니어서 응급 환자가 발생했다는 등 사정을 말하거나 반성하는 모습 좀 보이면 좋게 넘어가 줬으며, 이나 단위에서는 이웃집이나 마을회관, 구멍가게 잠깐 오가는 정도 등은 암암리에 봐주기도 했다. 다만 불행하게도 유신 독재 시절이나 해제 전 전두환 시기[4] 통행금지에 잘못 걸린 소수의 사람들은 공권력에 의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끌려가 부랑자라는 오명을 쓰고 대한청소년개척단, 선감학원,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과 같은 국가 폭력의 희생양이 된 사례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통행금지 바로 직전인 23~24시 사이에는 집에 돌아가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으며 이상 단위에서는 대체로 잘 지켜진 편인데, 존 위컴 장군 한미연합사령관 시절 부인과 야간에 산책을 즐기며 한밤중에 쥐 한 마리 안 보일 만큼 적막하고 방해하는 사람이 없어 편했으며, 한국인들이 야간 통금을 칼같이 지키는 데 늘 놀랐다고 회고한 바가 있다.

최소 1970년대 초중반 출생자라면 자정 시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확실히 기억할 것이다. 파출소나 동사무소에서 내보내는 사이렌 소리인데 자정이면 이미 자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이렌을 울렸다. 동장, 통장의 직권으로 주택가는 볼륨을 좀 줄이기도 했다.
파일:20161004164610120_SP099H6F.jpg
1982년 통금 해제를 축하하는 서울 시내의 커피 노점상

그러다 1982년 1월 5일 전두환 정부 시기 3S 정책의 일환으로 대부분의 지역이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이 영향으로 당시 사람들이 1시에 길거리에 나와 만세를 불렀을 정도였다고 한다.[5] 여기에 신정 연휴까지 겹치면서[6] 실질적으로 마지막 통금은 1981년 12월 31일까지였다.
2.2.1.1. 예외
예외 지역이 있었는데 도서 지역인 제주도 울릉도 1964년에, 충청북도 1965년에 해제됐다. 그 외 주요 고속도로 석탄, 시멘트 등 산업이나 생필품을 운반하는 트럭 등 수송 수단과 경주시(구 월성군 제외), 온양시(구 아산군 제외)[7], 해운대구 등 관광지, 경기도- 충청남도 지역을 제외한 전 도서 지역은 1966년에 해제됐다.

덕분에 유일하게 바다와 접해있지 않은 도(道)였던 충청북도는 접경 지역에 사는 거주민들이 술 마시다가 자정이 가까워질 것 같으면 시/도 경계를 넘어서 충북 지역[8][9] 에서 더 마셨으며, 1970년쯤에 나온 유머 모음집에는 '어디로 데이트 갈까?'라는 물음에 통금이 없으니까 충북으로 가자는 말도 있다. 이외에도 농촌 지역에서는 면 소재지의 경우 사이렌을 울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정 날짜가 되면 그날만 일시적으로 풀어주기도 했다. 주로 경사스러운 날에 주로 해제해 줬는데 부처님오신날, 크리스마스 신정 연휴인 1월 1일~3일이 있었다.[10] 또한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날 역시 임시공휴일로 지정하고 통금을 풀어주기도 했다.

전국이 아닌 일부 특정 지역일시에 해제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여의도 지역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거기서 치렀던 국풍81이나 빌리 그레이엄 목사 대성회 등이 열리던 날은 대형 행사의 여파로 일시적으로 인파가 몰림에 따른 귀가불편 고려 및 정부의 행사 진흥 지원 목적으로 그 지역만 일시에 해제시켜주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일부 식당도 야간 통금 예외가 되었다. 설렁탕 가게와 부산 지역 돼지국밥집이 대표적으로, 설렁탕과 돼지국밥은 음식 특성상 각각 소와 돼지 사골 육수를 계속 우려내야 해 심야에도 영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11] 그래서 검경에서 피의자 조사할 때 배고프면 설렁탕을, 설렁탕보다 돼지국밥이 더 대중적인 부산 지역에서는 돼지국밥을 야식으로 자주 배달시켜 먹었다. 심야에 순찰도는 경찰관들도 설렁탕 및 국밥 배달부는 검문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여기서 유래된 전설이 바로 그 유명한 코렁탕이다.

웃기는 것은 1982년 야간 통금이 풀리기 전까지는 북한이 남한을 이러한 야간 통행금지 제도를 들먹이며 인민 탄압을 이유로 비난하기도 했는데,( #) 이미 북한은 1955년에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북한이 려행증을 명분으로 구군계를 넘을 때도 허락을 받아야 된다는 걸 감안하면 매우 아이러니한 일인 것이다. 단, 중국 몽골은 1990년대까지, 베트남 북베트남에 한해 야간 통금이 통일 전까지 있었다.
2.2.1.2. 통행증
파일:attachment/A20100814170847_00002.jpg
당시 사용한 야간 통행증[12]

합법적으로 야간 통행이 필요한 경우, 야간 통행 허용 스탬프를 찍어주기도 했다. 자정을 넘어 역에 도착하는 열차 편이나 고속버스 막차를 타고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사람들이 주로 적용되었는데, 이 경우엔 해당 역/터미널의 관리 직원이 하차한 승객들에게 찍어주었다.

그 외에도 심야에 환자 등이 발생할 경우는 예외였다. 당시는 119구급대가 발족되기 전[13]이기도 하고 전화기가 부의 상징이던 시절이라 어지간한 집에는 전화기도 없어서 직접 환자를 데리고 병원에 가거나 소방서 등 관공서, 공중전화 부스나 전화가 있는 이웃집 등에 뛰어가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던 시절이었다. 이런 때는 단속 다니는 경찰에게 요청하거나 아예 파출소로 직접 가서 사정을 말하면 경찰이 직접 병원을 연결해 주거나 처음 단속한 경찰이 다른 경찰에게 굳이 사정 설명하느라 귀찮지 않게 즉석에서 야간 통행증을 발급해서 면책했고, 상태에 따라서 아예 경찰 차량에 태워 주기도 했다. 또한 공무원, 의사, 기자, 목사, 군인 등의 일부 특수 직종 한정으로 즉석이 아닌 장기간 효력이 있는 야간 통행증이 발급되었다.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쩌다가 통행증을 얻게 될 일이 있으면 챙겨뒀다가 다른 날 심야에 경찰에게 보여주고 넘어가려다가 날짜가 들켜서 치도곤을 치르는 바보도 많았다고 한다.

2.2.2. 현재

야간 통금이 해제된 현재도 대규모 전염병 확산, 국지 도발 등의 비상사태 한정으로 임시적으로 해당 지역의 민간인에게 야간 통행금지령을 발령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1995년에는 충청남도 부여군 일대에 2인조 무장간첩이 침투하여 부여군 관내에, 1996년에는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하여 강릉 지역에, 2010년에는 연평도 포격전이 발생한 연평도 일대에 일시적으로 실시되기도 했다. 당시의 야간 통금 시간은 통금 제도가 폐지되기 직전 시간인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였다.

한편 대성동마을은 현재까지도 자정부터 새벽 5시 30분까지 야간 통행금지가 유지 중이다. 이 야간 통행금지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발령한 것이 아니라 유엔군사령부에서 발령한 것이다.

2020년 들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으로 방역 정책으로서 야간 통금 제도를 일시적으로 실시했던 국가들을 볼 수 있었으며, 대한민국의 경우 직접적으로 야간 통행을 전면 금지한 적은 없지만 일정 시각 이후부터[14] 5시까지 공연장, 영화관, PC방, 노래방 등 일부 다중 이용 시설의 운영과[15] 각종 요식업소들의 점포 내 취식을 금지하고 해당 시간대에는 포장/배달 영업만 허용하는 방식으로 야간 통행 수요 감소 유도책을 실행한 바 있었다. #

미성년자는 22시부터 9시까지 PC방, 노래방, 오락실, 찜질방에 출입할 수 없는 제도를 통해 간접적인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이는 급증하던 주한미군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새벽 1시부터 5시까지 누구도 영문 밖을 나서지 못하게 했다. 사실 이전에도 종종 실시했었는데, 2010년 해제 이후 범죄가 빈번해지자 다시 실시한 것이다. 그러나 미군 장병들의 잇따른 반발로 지난 2019년 6월 17일 시범적으로 해제됐고 같은 해 12월 17일 완전히 해제됐는데, 당연하게도 이로 인해 미군의 대민 범죄가 증가했다.

현재 북촌에서 외국인관광객들로 인해 야간통행금지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옛날과는 달리 과태료처분으로 끝난다. 적용시간은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10시까지이다.

2.3. 해외의 사례

해외에도 현재까지도 아직 남아있는 사례가 있다.

2.3.1. 미국, 유럽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치안이나 자연환경 문제로 인해 미성년자에 한해서 야간 통금을 실시하는 국가나 지역들이 다소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아이슬란드는 만 12세 이하 어린이는 22시 이후, 만 16세 이하는 24시 이후 외출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

미국에서는 시위가 격화되거나 폭동이 발생할 경우 야간 통금을 실시하는데 샬럿에서 흑인 시위 때문에 야간 통금이 실행된 적이 있다. 또한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는 청소년 폭동이 자주 발생하여 역시 기간 한정으로 청소년 야간 통금을 하고 있다고 한다.

2.3.2. 아시아

일본에서는 보도([ruby(補導, ruby=ほどう)])라고 하여 지역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도도부현에서 제정하는 청소년 관련 조례로 23시부터 4시까지[16] 18세 미만 청소년의 야간 외출을 규제하고 있다. 물론 과거 한국처럼 유치장으로 데려가는 수준은 아니고 야간 순찰 중인 경찰관들이 밤에 돌아다니는 청소년들을 발견하면 밤은 위험하니 어서 들어가라는 주의를 주거나 부모에게 연락하는 정도이다. 그래서 한국의 고등학생 내지는 새내기 대학생들이 일본에 자유여행을 와서 심야까지 돌아다니면 일본 고등학생인 줄 알고 불심검문에 걸리기 쉬운데, 이때 여권을 보여주지 못하거나 제대로 대응을 못 하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긴다.

중국에서는 프랑스의 음악가 장 미셸 자르의 베이징 공연 당시 통행금지 시간 때문에 공연이 다 끝나기도 전에 관객들이 다 나가버린 일화가 있다. 물론 지금은 추억인 상황이지만 일부 소수 민족 지역에서는 간간이 야간 통행금지가 시행되기도 한다.

대만 계엄령 시절에는 야간 통금도 병행했다.

홍콩의 경우 과거 영국령 홍콩 시기 선전과 인접한 변경금구 지역에 야간 통행금지를 시행했는데, 시간은 한국과 같은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였으며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둔 1994년에 해제되었다.

2.3.3. 남미

남미에서는 마약과의 전쟁의 일환으로 일부 오지에서는 어두워진 이후엔 눈에 띄면 사살이라는 극단적인 야간 통금을 시행한 바 있다.

2.3.4.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 관련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필리핀, 에콰도르. 리비아, 페루, 볼리비아, 파라과이, 아이티 등을 비롯한 상당수 국가에서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하였으며 미국에서도 일부 주와 지자체에서 야간 통행금지를 시행하였다. 프랑스 스페인 등의 국가에서는 3~5월 중 아예 통행금지령을 내려 주간 야간 상관없이 분명한 목적이 없는 외출을 금지하기도 했으며 미국 역시 2020년 5월 25일에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흑인 폭동이 격화되었을 때에는 한시적으로 뉴욕 로스앤젤레스 등 일부 도시에서 일시적으로 야간 통행금지가 시행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같은 해 10월 14일 프랑스에서도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인해 하루에 2만 명가량 신규 확진자가 나오면서 파리를 비롯한 일드프랑스 지역, 리옹, 툴루즈, 등 주요 대도시 및 위험 지역에 야간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10월 16일부터 시작하며, 이때부터 지역에 따라 4~6주 동안 오후 9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의 통행이 금지되었다.

북한에서도 코로나 시기 함경북도에서 동절기에는 저녁 8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하절기에는 저녁 9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야간통행금지를 선포했다가 2024년 4월 초 해제했다.[17] 그런데 북한에 전기가 없어서 야간통행금지를 풀어도 밤에 다니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실정이다. # 사실 그것도 2023년 5월 완화된 것으로 기존에는 동절기에는 저녁 6시부터 아침 7시까지, 하절기에는 저녁 7시부터 아침 6시까지 통금이 적용되었다! 통금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잡혀가 벌금[18]을 물고 풀려났다. # 이렇듯 북한의 코로나 시기 야간통행금지는 주민의 생계활동을 제한하고 사회 분위기를 통제하는 기능으로 악용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

3. 여담




[1] 지금도 농촌에서는 해 떨어지면 집으로 귀가하는 경우가 많다. 가로등이 많고 건물 간판이나 내부 조명 때문에 밝은 도시 지역과는 달리 농촌은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기 때문이다. 물론 농촌 인구가 연령대가 높아서 젊은이들처럼 야간에 잘 안 움직인다는 것도 한 몫한다. [2] 제주발 항공기가 23:00 내로 착륙하지 못하면 인천국제공항으로 목적지를 변경시킨다. 김포국제공항의 커퓨는 매우 엄격해서 22:58분에 김포 최종 접근 절차를 진행 중인 항공기도 23:01분 도착이 예상되면 착륙 허가를 안 내준다. [3] 물론 대사헌이 종2품의 초고위직이긴 하지만, 윤종도 정4품 호군이였으므로 '고작 순관 따위'는 아니었다. [4] 1980년 8월 4일~ 1981년 1월 24일 [5] 다만, 경기도와 강원도 한정으로 휴전선에 인접한 육상/해안 지역은 1982년 1월 5일 당시에 통금 해제 제외 지역이었다가 1988년 1월 1일에 통금이 해제되었다. [6] 당시에는 신정(1월 1일 양력설)이 공식적인 설 연휴였다. [7] 당시에는 아산군 온양읍이였고 1986년에 시로 승격했다. [8] 대표적으로 경기도 이천군 장호원읍에서 청미천 하나만 건너가면 나오는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으로 넘어가서 계속 마셨다는 일화가 있다. 공교롭게도 시간이 흘러 2020년도에 코로나19 유행으로 거리 두기 상향이 이뤄지자,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권은 2.5단계로 21시 이후 식당 및 술집이 문을 닫았지만 충북 음성군 감곡면은 2단계로 24시간으로 완화되다 보니 건너가는 사례가 보도되기도 하였다. [9]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현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에서 조천 하나 건너가면 있는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현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도 비슷한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며, 이 시절의 흔적인지 조천교 근처 정중리 일대에 식당들이 여럿 포진해 있는 편이다. [10] 이때는 신정을 연휴 명절로 삼았고, 오늘날 설날인 음력 1월 1일은 '민속의 날'이라고 해서 쉬지 않는 단순 기념일에 불과했다. [11] 2020년 코로나 사태 이후로는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설렁탕집과 국밥집도 24시간 영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점주들이 심야 휴업에 익숙해져 24시간 국밥집은 코로나 종식 후에도 좀처럼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육수를 반드시 24시간 끓이는 집이 많이 줄어들고 첨가물로 보완하는 집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12] 당시에는 대전이 충청남도 관할의 일반시였기 때문에 대전은 서 단위였다. 특별시, 직할시, 도는 국 단위였는데, 당시 직할시는 부산직할시밖에 없어서 부산은 부산직할시 경찰'국'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13] 그 이전에는 병원에서 자체적으로 구급차를 운영하거나 일선 소방서나 경찰관서에서 자체적으로 후송해 주는 방식이었다. 중앙에서 신고를 접수하고 인원을 파견해 후송해 주는 시스템은 1980년 부산직할시에서 야간 통금 시간 응급 환자 수송 센터가 운영된 것이 시초. [14] 시기별로도, 업종별로도 제한이 시작되는 시각은 조금씩 달랐는데 이르게는 21시부터, 늦은 경우는 자정부터 제한이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5] 다만 공연장 및 영화관의 경우 야간 영업 제한 초창기에는 다른 업종들처럼 관리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영화/공연의 시작 시각과 종료 시각 두 가지로 가이드라인을 나눠두는 형태로 통제 방식이 한 차례 수정되었으며, 그래서 2022년 4월 18일 심야 영업 제한 조치의 전면 해제 직전 적용되던 제한 기준은 '영화/공연 시작 시간은 자정 이전까지, 종료 시각은 02시 이전까지'였다. [16] 22시부터 혹은 5시까지, 22시부터 5시까지, 아니면 23시에서 일출까지로 정하는 곳도 있다. 대도시 중에서는 오사카가 예외적으로, 16세 미만은 오후 8시부터 통행을 제한시킨다. 초과 조례(上乗せ条例)라고 부르는 관행인데 위법성은 없지만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래도 청소년 조례는 지켜지는 편. [17] 다만 함경북도가 국경 인근 지대인 만큼 내에서도 시와 군 경계는 아직도 통행이 제한되고 있다고 한다. [18] 최소 5000원(약 6달러). 단, 휴대전화 검열에 걸리면 이보다 더 큰 벌금을 내야 했다. [19] 1980년대만 해도 주 48시간(법정 근로 시간) ~ 64시간(법정 주당 최대 근로 시간) 근무제를 시행했을 시기라서 토요일도 오후까지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나마도 노동법은 당국의 비호 아래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나마 1990년대 이후 법정 근로 시간과 법정 주당 최대 근로 시간이 점점 줄어 2018년 7월 1일부터는 공공 기관과 300인 이상 기업에 법정 주당 최대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었고 2020년부터는 50인 이상에도 적용되었다. [20] 사실 본 에피소드에서도 결국 경찰에 잡힌 기영이 아버지가 사정을 잘 말해서 별 탈 없이 약을 사오는데 성공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