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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5:31

앙겔라 메르켈/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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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FF9A00,#FF9A00>생애 <colbgcolor=#fff,#1f2023> 생애
평가 평가
역대 선거 제16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 제17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 제18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 제19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사상 진보적 보수주의 · 기독교 민주주의
정책 탈원전 · 난민 수용 · 대연정
지역구 포어포메른·뤼겐-포어포메른·그라이프스발트 1구
사건사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 외국 정상 에마뉘엘 마크롱 · 프랑수아 올랑드 · 니콜라 사르코지 · 마거릿 대처 · 보리스 존슨 · 테레사 메이 · 데이비드 캐머런 · 조지 W. 부시 · 버락 오바마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 블라디미르 푸틴 · 시진핑 · 아베 신조 · 쥐스탱 트뤼도
관련 독일 정치인 헬무트 콜 · 게르하르트 슈뢰더 · 올라프 숄츠 · 아르민 라셰트 · AKK · 프리드리히 메르츠 · 아날레나 베어보크 ·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기타 앙겔라 메르켈 내각 · CDU · 동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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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 2016년 독일 뮌헨 총기 난사 사건 · 2016년 독일 열차 테러 · 2016년 베를린 트럭 테러 · 2016년 쾰른 집단 성폭행 사건 · 2021년 독일·베네룩스 폭우 사태
기타 유로화 사태 · 그리스 경제위기 · 유럽 난민 사태
파일:파란색 깃발.svg 보수주의 }}}}}}}}}


1. 개요2. 생애
2.1. 정치 입문 전2.2. 정치 입문, 총리 당선2.3. 메르켈 내각2.4. 위기
2.4.1. 자신에게 봉착한 외교적 위기2.4.2. 난민 문제2.4.3. 사면초가: 터키와의 관계와 내부와의 마찰
2.5. 그래도 아직은 메르켈2.6. 2017년 선거, 불완전한 승리2.7. 2018년 제4차 내각 출범2.8. 정계 은퇴 선언2.9. 2019년2.10. 2020년2.11.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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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전직 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생애

2.1. 정치 입문 전

파일:Angela Merkel_young.jpg
젊은 시절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총리가 되기 전까지의 경력이 굉장히 독특하다. 일단, 동독( 독일민주공화국) 출신이다. 다시 말해 독일연방공화국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최초의 동독 출신 총리이다.[1]

결혼 전 성은 카스너(Kasner). 폴란드인인 루드비크 마리안 카지미에르차크(Ludwik Marian Kaźmierczak, 1896~1959)가 그의 할아버지다.[2] 그러므로 전 본명은 앙겔라 도로테아 카스너다. 현재는 앙겔라 도로테아 메르켈이다. 아버지는 베를린 교외 출신의 루터교회 목사였고, 어머니는 함부르크 출신의 영어교사였다.

아버지가 동독으로 발령나면서 앙겔라 메르켈이 갓난아기일 때 부모를 따라 동독으로 이주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옮겨 가던 시절에 그의 가족은 특이하게도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한 케이스.[3] 이에 따라 앙겔라 메르켈은 동독에서 성장하고 경력을 쌓게 된다. 할아버지가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당원(동독의 공산당)이었다고 하나, 메르켈 가족은 동독의 지배층으로 출세하기에는 별로 도움이 안되는 상황이었다. 종교에 냉담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목사의 가족이라는 점은 불리한 조건이었고, 또 외가가 서독에 있어 서독의 외가와 종종 왕래하기까지 한 것도 한 이유가 된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까지 앙겔라 카스너는 종종 함부르크로 가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외가 친척들이 동독을 방문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을 아버지가 사목하는 동베를린에서 북으로 80km 떨어진 브란덴부르크 주 템플린(Templin)[4]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보냈다. 목사의 아내라는 이유로 교사 출신인 그녀의 어머니는 동독의 학교(모두 국립)에서 일할 수도 없어서 당시 대다수 동독 여성들과 달리 직업 없이 가정주부로 있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사민주의 성향이 강한 어머니 역시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활약하는 등 가족들은 집안에서도 정치적 입장이 분분했다고 한다.

청소년기에는 대다수 동독 학생들처럼 공산당의 청년단에 가입하여 성년식을 하지 않았고, 도리어 루터교회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 때문에 불리한 위치에 처할 수도 있었지만 공부를 워낙 잘해서 명문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입학하여 물리학을 전공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거듭된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의 입당 요구를 거절하고, 다른 이들을 감시해 보고하라는 슈타지의 협력 요구도 거절했다. 이런 양심적 행동 덕분에 동독 출신임에도 전혀 커리어에 손상을 받지 않고 통일 독일의 정계에 성공적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 동독 출신 정치가들 중 상당수가 슈타지와 어쩔 수 없이 협력했다가, 통일 이후 그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 국민의 분노의 대상이 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해 버린 것과 매우 대조적인 상황.

카를 마르크스 대학교(지금의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울리히 메르켈과 1977년에 결혼해 성을 메르켈로 개명하였다. 1978년에 물리학 학사 학위를 받자마자 메르켈은 동베를린의 베를린 독일 과학원[5] 물리화학 연구소에 들어가 남편과 함께 일하며 박사과정을 밟게 되나, 둘 사이 관계가 틀어져 1982년에 이혼하였다. 이혼 후에도 학위과정을 계속해 1986년 양자화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6]하였다. 화학 분야 최고 권위지라고 인정받는 JACS에 쓴 논문도 있어서 정치 이전에 학자로서도 나름대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었다. 1986년 함부르크에 사는 외가 쪽 사촌 결혼식이 있었는데, 그녀는 번듯한 직업이 있었기 때문에 동독 당국으로부터 서독 방문을 허가받는 특권을 누렸다. 돌싱으로 살다가 1990년 독일의 통일을 맞이하였다.[7], 물리학에만 빠져살던 메르켈은 1989년 동독의 신생정당인 민주개혁에 가입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다음해에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고 민주개혁은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에 합병되었고,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메르켈도 기민당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1998년 동료 화학교수인 요아힘 자우어와 재혼했다. 재혼 후에도 계속 전 남편의 성을 쓰고 있고[8][9], 박사학위 소지자이기 때문에 이름 앞에 Dr.가 붙는다. 독일을 포함한 서방 권에서는 자신의 공식 명칭에 Dr. 같은 게 있다면 그걸 불러주는 것을 대단히 좋아한다고 한다.[10] 특히 독일어권에서는 박사학위 소지자에게는 이름 앞에 항상 Dr. 칭호를 붙여주는 것이 예의이자 관례이다.[11]심지어 독일은 운전면허증 등 공식 신분증에도 Dr. 칭호를 표기해 주며, 본인 명의로 발행하는 공문에도 Dr. 칭호를 표기할 수 있다.[12]
파일:20191126_222637.jpg
2019년 12월 베를린에서 개최된 유엔 국제회의에서 연설하는 앙겔라 메르켈. 이름 앞에 Dr. 가 붙어있다.

2.2. 정치 입문, 총리 당선

헬무트 콜에게 발탁되어 1991년부터 1994년까진 독일 여성청소년부 장관을, 94년부터 1998년까진 환경, 자연보호, 원자력부 장관을 지냈다. 2000년 4월 10일 부터 기민당 최초로 여성 의장을 지냈고[13] 2005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의석 수를 줄였지만 기민당도 의석수가 줄어들었다. 당초 기민당의 압승이 예상되었지만, 토론회에서 사민당 소속 현직 총리였던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메르켈에게 토론회에서 판정승을 거둔데다가, 선거 막판 부가가치세를 인상하면서도 정작 기업에 대한 세금을 깎아주겠다는 공약이 논란이 되어 중산층 이하 시민들의 지지율을 깎아먹었다. 결국 원내 제2당인 사민당과 내각 구성을 협력하는 좌우 대연정을 구성하여 2005년 11월 22일부터 독일의 제8대 총리를 지내고 있다.

취임 초기엔 독일 사회에서 꽤 신기하게 여겼다고 하는데 남성적인 매력이 있는, 강인한 인상의 정치인을 좋아하는 독일 정서에서는 대단히 의외의 인물일 수밖에 없다. 물론 메르켈 역시 여성으로서는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좋은 편이긴 하다.

2009년 총선에서 자민당의 약진과 사민당의 대참패에 따라 우파진영이 더 많은 의석을 확보하면서 사민당을 뺀 새로운 연정을 구성, 계속 총리로 재직하게 됐다. 당시 사민당 총리 후보로 나와 메르켈과 겨룬 이가 2019년 기준 독일 대통령인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다.

2013년 총선에서 메르켈 총리의 기민당(CDU)-기사당(CSU)이 사민당과의 '대연정구성'에 성공, 메르켈 총리의 3연임이 확정됐다. 만약 4년 임기를 채울 경우 11년 7개월간 집권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를 제치고 유럽 최장수 여성 총리가 된다.

2014년,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우크라이나 위기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미국 양측 강국들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하자 양측을 중재하느라 진땀 빼고 있는 상황.

2014년 12월 기민당 전당대회에서 승리하며 총리로써 4선의 고지에 올랐다. 이때 이례적으로 사회민주당을 상대로 디스를 했는데, 이는 11월의 튀링겐 주에서 기민당이 튀링겐 주 선거에서 승리했음에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좌파당-사회민주당-녹색당이 적적록대연정으로 기민당을 물 먹인 것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메르켈 총리는 튀링겐 주에 좌파당이 집권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주 총리를 줘서는 안된다고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참고로 현재 독일의 연방하원의 경우에도 사회민주당, 좌파당, 녹색당 3당의 의석은 기민-기사연합보다 의석수가 많다. 즉, 연방하원에서 흑적연정이 깨지고 적적록대연정이 이루어지면 당장에서도 메르켈은 정권을 내줄 상황이다. 아무래도 의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14]

2017년 총선이 다시 치러졌고, 자유민주당(FDP)이 의회에 복귀함과 동시에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제3당으로 의회에 처음으로 진출하였다. 숱한 어려움 끝에 사회민주당과 다시 흑적연정을 설립했으며, 이젠 적적록대연정이 이뤄진다고 해서 정권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선 벗어났다. 다만 독일을 위한 대안이 야당 중에선 세력이 가장 큰지라 AfD의 대표가 의회 내 야당 전체의 대표[15]가 된 것은 골칫거리.

2.3. 메르켈 내각

2010년대 초반 이탈리아, 그리스,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발 유로존 위기가 터지자, 이 문제와 기타 등등의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와 결혼이라도 한 것처럼 꼭 붙어다니며 친근감을 과시했는데, 이를 언론에선 '메르코지 체제'라고 불렀다. 실제로 당시 유럽 지역의 많은 시사 만화가들은 이 둘을 레이건-대처와 마찬가지로 부부로 표현한 만평을 쏟아내기도 했는데, 이 체제의 요점은 한마디로 '다른 EU국가들에게 긴축정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특히 국가부도 직전까지 몰려서 유로 존 위기의 근원점이 된 그리스에 대하여 강도 높은 긴축재정을 직접적으로 요구했다.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 긴축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안까지 제시했다. 당연히 그리스 입장에서는 기분이 안좋은게 사실 요구라기보단 명령에 가까웠는데, 그리스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그리스 정부의 부채를 대납해주기는커녕 아예 유로 존에서 퇴출시킬 생각까지 하고 있었기 때문. 한마디로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날로 국가 파산으로 모자라, 유로 존까지 강퇴당하는 신세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가 마냥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하는 건 문제가 있는 것이, 막장 상류층의 탈세와 부정부패, 아테네 올림픽으로 대표되는 엄청난 낭비, 여기에 유로 존 자체의 모순 등 결과적으로 그리스가 만들어낸 문제에 유로 존까지 끌어들이는 구도였기 때문. 그리고 그리스 정부가 독일이 직접적으로 개입을 해오기 전까지 제대로 된 위기 극복을 위한 대책을 세우고 추진했는가도 생각해봐야 한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과거사 청산을 위해 계속해서 노력중이지만, 나치 아돌프 히틀러의 딱지가 아직까지 붙어 다니는 독일 정부의 적극적인 해외 개입에 대해, 유럽 국가들이 독일편을 들고 그리스를 욕할 지경이면 그리스가 어지간히 진상이라는 이야기다.

긴축재정의 칼끝이 향한 이탈리아 또한 이러한 정책에 반발했다. 이탈리아 신문인 일 조르날레(Il Giornale)에서는 메르켈이 이탈리아 등 남유럽 국가의 경제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두고 '이탈리아는 메르켈의 제4제국에 편입되었다'고 표현하였다. 히틀러는 당시 나치 독일 체제를 제3제국으로 표현하였는데, 여기서 따온 표현이다. 한마디로 메르켈 총리를 아돌프 히틀러와 동일시한 모욕.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일 조르날레의 소유주인 파올로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전 총리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동생이라는 것. 그 악명 높은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동생이 형을 평소 열심히 까던 외국 정치가에 대해 내린 평가라면 대충 답이 나올 것이다.

2012년 9월 12일 그리스를 방문하여 안도니스 사마라스 총리와 환담하며 "긴축정책을 지지한다. 유로 존에서 남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했다. 반면 같은날 아테네에서는 독일 좌파당의 대표와 시리자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손을 잡고 수만 명이 바리케이트 밖에서 시위를 벌였다.

한편, 2012년 단짝처럼 지내던 사르코지가 프랑스에서 재선에 실패하고, 그와 비교적 대척점에 있는 중도좌파 사회당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가 당선되자 메르켈이 EU에서 고립되는 것 아니냔 언론의 섣부른 예측도 나왔다. 이에 메르켈은 혼자서나마 꿋꿋이 버티며 올랑드의 당선 바로 다음날 전화를 걸어 긴축정책에는 변화가 없을 거라고 못 박는 등 유럽연합 구조조정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다행히도, EU 경제에서 독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고, 프랑스의 새 대통령 올랑드 또한 '어느 누구의 압력도 없이 스스로' 프랑스 재정적자를 줄이는 고강도의 긴축재정을 실행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메르켈은 일단 사르코지 없이도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어쩔 도리가 없는 게 프랑스의 경우에도 PIGS처럼 부패 쩔고 유로존의 한계로 적자가 누적되며 부채가 쏟아져 들어오는 형태의 막장은 아니지만 역시 상당한 규모의 국가부채를 갖고 있어 자칫 디폴트할 위기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 사실 이 문제에서 조금이라도 비껴간 국가는 선진국 중에 미국 정도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르켈 자신이 실각하지 않는 이상 유럽연합 긴축정책의 기조는 꺾이지 않을 듯하다.

이를 두고 '메르코지'에 이은 '메르콜랑드'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물론 사르코지 때만큼 보조를 맞추는 것은 아니지만 유럽연합의 두 대국의 지도자가 일단 손발을 맞추었다는 의미다.

그 후에는 지지율이 급속히 높아지면서 60%대를 기록하고 있었지만 연이은 지방선거 패배와 자민당의 지지율 부진으로 인해 3선 여부가 불투명 했었다. 하지만 사민당 대표가 이탈리아 총선 결과에 비아냥거리는 등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잦다보니 3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다가 탈세 스캔들이 터지면서[16] 다시 정국은 혼미 중. 하지만 이번에는 사민, 녹색당과 좌파당과의 연립이 무산되면서 사실상 3선이 확정되었다.[17] 그래서인지 제18대 독일 연방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대패해서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고 좌파진영이 과반을 확보했음에도(기민/기사련은 승리하긴 했지만 과반수는 확보하지 못했다. 311/630석) 흑녹연합이나 흑적연합이 이루어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2.4. 위기

2.4.1. 자신에게 봉착한 외교적 위기

메르켈이 독일 총리로써 임기를 시작한 2005년부터 2010년까지는 (적어도 유럽 입장에서는) 2008년 세계경제위기를 제외하고 그다지 크나큰 위기가 없어 독일과 유럽정치를 운영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2011년 아랍의 봄을 기점으로 유럽 주변에 크림 위기, 브렉시트 등 대형 악재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이에 대처해야 하는 사실상 유럽 연합의 지도자로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2014년 러시아가 유로마이단을 구실로 크림을 강제 병합하자, 이에 대한 대처 부족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사실 우크라이나 사태가 같지 않을 동유럽 국가들 입장에서는 징병제를 선포하는 등 대처를 하고 있지만, 당장 러시아에 실질적으로 군사적으로 대응하기에는 군사적, 정치적 후폭풍이 크고, 그렇다고 해서 유럽연합의 실질적인 역량을 고려해 아무것도 안하자니 유럽연합 입장에서는 주변국이 위기에 빠지는데도 방관한다라는 이미지만 심어줄 수 밖에 없다.

NATO 발트 3국에 군사를 배치시키고[18] 무역제재를 연장하고 있지만, 러시아가 중국과 손을 잡으면서 경제제재의 효과가 미미하다는 분석이 많다. 실질적으로 군사적,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여유가 전무한 유럽 입장에서는 현재 상황에서 적당한 유화책으로 타협하면서 러시아가 추가적인 도발을 하지 않도록 경계만 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핵미사일을 '베를린 사정거리'인 칼리닌그라드에 배치하는 등 맞대응을 하고 있다.

여기에 그동안 유럽연합에 불만을 느낀 영국이 2016년 국민투표로 탈퇴를 결정하고, 2016년 터키에서 발생한 쿠데타를 구실로 에르도안 정부가 서방에서 벗어나 급격히 친동구권, 독재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내외적인 정치적 위기를 해결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2.4.2. 난민 문제

메르켈 내각의 가장 큰 난관 중 하나다.

시리아 이라크의 내전으로 수백만 명의 난민이 유럽과 터키로 몰려들었는데 메르켈과 유럽연합은 시리아 난민을 모두 수용하겠다고 밝혀왔다. 이탈리아, 그리스 등 1차 도착 지역 각국의 경제 상황이 막장이라 대규모로 수용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야 하며 또한 난민은 국제 사회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 당시에는 도덕적이고 인도적인 행동으로 (일부의 반대는 있을지언정) 엄마 리더십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내전이 장기화되고 100만명에 달하는 난민들을 점점 통제할 수 없게 되면서 지지율이 하락하는 추세다. 난민 수용에 대해 유럽 국가들 사이에 내분은 특히 영국의 EU 탈퇴, 브렉시트를 부추기고 있고 옆동네 프랑스에선 샤를리 엡도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충격적인 파리 테러가 일어남으로써 메르켈의 난민 포용 정책은 동력을 잃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메르코지 체제일 때만 해도 메르켈은 독일 다문화 정책의 실패를 선언하기도 하며 다문화 정책의 수정 필요성을 인정했으나,[19] 이후 네오나치 3인방의 터키인 및 독일 경찰 살해 그리고 은행 강도짓으로 충공깽에 빠지며 네오 나치 척결에 나서고 있다. 보수주의자가 네오 나치 척결에 나선다고 의아해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 나치 문제에 관해선 개막장이 아닌 이상 보수건 진보건 단호하게 대처한다. 제2차 세계대전기에도 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기독교를 지향하는 진영과 ② 공산주의(사회주의)와 계획경제, 반종교주의를 지향하는 진영, ③ 국가사회주의와 통제경제, 반종교주의를 지향하는 진영, 세 개의 진영이 있었고 ①, ②이 연합하여 ③을 꺾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당장에 보수주의자들의 우상인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만 하더라도 히틀러 나치 독일과의 평화 협정에 반대했고 나치 독일과 맞서 싸워야한다는 강경론자였다.[20]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나서기 이전부터 독일정부는 네오 나치를 계속 예의주시하며 어떻게든 해산시키기 위한 명분을 찾고 있었는데, 이젠 빼도 박도 못 하는 대의명분이 생긴 셈.[21]

한편, 독일 국내에서 북아프리카 및 아랍계로 보이는 청년들이 쾰른의 연말 송년 행사에서 집단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심지어는 여자 경찰에게까지 성희롱을 저질렀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엔 난민 정책으로 타임지 올해의 인물에까지 선정된 메르켈 총리가 반난민 기운 고조로 연내 퇴임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일부 나오기도 했다.

이런 압박 속에 메르켈 총리도 결국 난민 규모를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유입되는 난민 수를 가시적으로 줄이고 필요하다면 국경 통제도 할 것임을 시사했는데, 역시 난민 유입에 대한 독일인들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은듯. 이와중에 독일 고위층에서 난민의 이번 쾰른성폭행 문제에 대해서 공표하지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는게 밝혀져 독일내 신 나치주의적 성격을 띄는 주장들과 시위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 와중에 메르켈은 난민 '안전지역' 설치를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 러시아와 친아사드 세력 입장에서는 안전지역이나 비행 금지 구역이나 다 그게 그거. 게다가 이제는 카다피 정권이 내전으로 붕괴되면서 정권을 장악한 반군 세력들끼리 권력을 놓고 내전이 다시 벌어진 리비아(비슷한 테크를 탔다)까지 내전을 피해 난민들이 배를 타고 유럽으로 밀려들고 있다.[22]

2016년 7월 들어서 독일에서 1주일에만 4차례의 민간인을 상대로 한 무차별 테러 행위가 발생하여( 2016년 독일 열차 테러, 2016년 독일 뮌헨 총기 난사 사건 참조) 메르켈과 그녀의 온정적 난민 정책에 관한 비판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이 4건 중 3건이 난민 출신자들에 의한 소행이었고 나머지 한 건은 IS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가해자는 앞선 범인들과 같이 중동계의 이슬람교도였다. 정부는 난민들과 난민 정책을 비난하지마라고 하고 있다지만 며칠에 한번꼴로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가는걸 보아온 독일 국민들은 이미 메르켈에게 사태 해결의 책임을 질것을 요구중이며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다. 하지만 메르켈은 "우리는 할 수 있다"면서 난민 포용정책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메르켈 입장에서 난민들에게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독일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국가적 이미지 개선 차원인 것이 크다. 현재 독일의 순수한 국가적인 역량만 따지자면 얼마든지라도 당장 난민들을 추방시키거나 감시, 격리할 수도 있겠지만,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추방시키거나 감시, 격리하던 때가 어느 때 일어나던 일인지 생각해본다면 단순히 도덕적이느냐 아니느냐를 떠나 독일 역사, 특히 법치적으로는 현재의 독일 헌법 차원에서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당장 독일이라는 나라가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 국제 사회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았으며, 그리고 그 도덕적인 잘못에 대한 반성을 전제로 새로 시작한 것이 현대 독일이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최근 일어나는 테러에도 독일 정부가 난민들에게 포용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결코 독일이 이상적인 면을 지키고 노동력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독일에게 역사적, 사회적인 굴레가 되어버린 나치에 대한 도덕적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23]

반대로 그녀의 난민정책에 반대하는 독일 내부 여론의 입장에선 독일이 단순히 이미지 개선만을 위하여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국제 문제에 까지 전면적으로 나설 필요는 없다고 반론할수 있다. 적어도 난민 문제 만큼은 콕집어 독일 한 나라만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고 '독일이 국제사회에 빚을 지고 있으니 모든 국제 인권 문제에 다 나서야 한다'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보여주기 차원에서 난민 문제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겠다고 나서고 있는 양상인데 그럴바엔 차라리 직접적인 책임이 있음에도 유대인에게 했던 것 만큼 확실하게 사과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던 아프리카 식민지들의 피해에 대한 배상과 인정, 완벽하게 청산하지 않은 과거사에 대한 매듭이나 확실하게 짓는 것이 더 진정성 있는 이미지 쇄신이라고 할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과거사 청산과 난민 문제는 별개로 봐야할 인권 문제이다. 사실 직접적으로 불편을 겪어야 하는 시민들 입장에선 불만이 많을수 밖에 없겠지만, 정치적으로 따졌을 때 독일이란 나라 전체의 이미지 차원에서 보면 난민 문제로 온 유럽이 떠들썩한 상황에 독일이 구세주 역할을 자처하는 것 만큼 이슈거리가 되기 좋은 기회도 없긴 하다.

이는 현재 독일이 겪고 있는 난민 문제에서 엄청난 딜레마가 되어 버렸는데, 준비도 완벽하게 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많은 수의 난민을 단기간에 받아들여 버렸고, 이제와서 내치자니 위에서 언급한 역사적인 과오까지 있는 나라라서 세계인들의 눈초리도 있거니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는 시대착오적 행보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는지라 정치인들 입장에서도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역량은 충분하지만 그렇게 할 명분이 없다는 것. 그러나 지방 선거에서 분노한 독일 일부 국민들이 대안당에게 표를 주며 극우정당이 메르켈의 정치적 고향에서 선전하는 역효과가 났기 때문에 반대 여론이 많은 유화정책만으로 이 이상 밀어붙였다간 다른 의미로 역사의 재림에 기여하게 될 판이라 기존의 난민 정책에 있어서 변화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사실 연이은 테러 이후 부터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메르켈의 아군 정당 측에서도 보수파 정치인들이 난민을 너무 성급하게 많이 받았다고 메르켈을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이런 기류는 2016년 9월 지방선거에서도 이어져 메르켈의 기독교민주연합이 사실상 2연속 패배라고 할만한 성적을 얻었는데 베를린 선거의 경우 사회민주당(21.6%)이 1위를 달리는 가운데 기민당(17.5%)은 2당을 차지했지만, 이는 기민당 역사상 역대 베를린 주의회 선거 성적 중 최악의 지지율이었다. 그리고 사민당은 베를린주 선거 이후 연방의회에서 대연정을 맺고 있는 기민/기사 연합당 대신 좌파세력인 좌파당(15.6%)·녹색당(15.2%)과 연정을 구성했다. 그 외 메르켈 본인의 지역구인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의회 선거에서는 심지어 19%의 지지율을 얻으며 대안당에게 패배해 3위로 밀려났는데 이 역시 역대 최악의 지지율이었다. 반면 극우정당인 대안당은 14.1%로 베를린 주의회에 사상 최초로 진출하고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의회 선거에서도 메르켈의 지역구에서 메르켈을 이기고 2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낳으며 처음으로 16개 지역구 중 10개 지역에서 주의회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불과 1년전까지만 해도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메르켈이 선거에서 이런 결과를 거둔 것은 독일 내의 반발여론이 단편적인 지지율 급락에만 그치지 않았고 선거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는 분석.

때문인지 메르켈의 정치적 파트너들도 메르켈에게 책임을 요구하며 난민정책의 수정을 요구하였다. 베를린 주의회 선거 이후에는 메르켈 본인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최초로 난민정책의 시행에 미흡한 점이 있음을 인정했다. 여전히 반난민 정서에는 반대하지만 수년전으로 시간을 돌릴수 있다면 더 많은 대비를 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하는 동시에 본인이 밀었던 정치 구호 '우리는 해낼 수 있다(Wir schaffen das)'가 많은 반발을 불러온 것을 언급하며 반복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6년 12월 7일에는 결국 부르카 제한적 금지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대 난민 정책에도 어느 정도 방향 전환이 이루어 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12월 초에 난민 캠프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그것도 EU 변호사의 딸인 마리아 라덴부르거(Maria Ladenburger)가 17세 아프가니스탄 난민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된 사건이 드러났기에 그에 대한 여론의 분노를 메르켈도 묵과할 수 없었다는 분석도 있다.[24]

하지만 후술되어 있듯 2017년 들어 여전히 대안으로 평가받는 주류 대세는 극우정당이 아닌 대연정 파트너인 좌파 사민당이었다. 애초에 대안당은 원내 1, 2당은 커녕 원내진출이 뉴스거리가 될 정도라 당장 메르켈의 대안으로 평가받기에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메르켈 역시 연임할 가능성이 유효하다는 분석이 여전한데다, 최대 적수인 사민당 슐츠 후보의 경우도 유럽의회 의장 출신으로 친EU 성향이라 반이민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평가받는다.

2.4.3. 사면초가: 터키와의 관계와 내부와의 마찰

독일 코미디언 얀 뵈머만[25](Jan Böhmermann)이라는 인물이 공영 ZDF TV의 토크쇼에서 터키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의 얼굴이 작게 들어간 터키 국기 앞에서 에르도안이 어린이 포르노를 보면서 소수민족과 기독교인을 탄압한다는 내용의 시를 낭독하여 터키에서 파문이 불었다. 뵈머만은 방송 당시 이 시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지만, 낭송을 강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터키 정부가 독일에 뵈머만에 대한 수사를 요구하고 나섰고, 메르켈은 뵈머만에 대해 검찰 수사를 허용했다고 밝혔다. 언론 탄압을 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터키의 부당한 요구에 굴복했다는 비판이 야당을 포함하여 이웃 서방 국가들에서 제기되고 있다. 기사 1 메르켈 총리는 이날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뵈머만이 유죄라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의 권리가 우선인지, 언론의 자유가 우선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사법부의 영역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엄밀히 따지면, 독일 형법 103조는 외국 국가원수 등을 모욕할 경우 정부가 범죄 혐의 조사 여부를 판단하고 형사소추 절차를 거쳐 최장 3년, 특히 비방이나 모독 혐의가 인정되면 최장 5년 징역형에까지 처할 수 있게끔 법 규정이 있다. 기사 2 하지만 이 규정은 있기는 했어도 써먹은 선례가 없었던데다 이번 뵈머만의 행위가 상식적으로 허용되는 수준의 풍자인지, 아니면 지나친 모독 행위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메르켈은 내부에서도 논란이 적잖은 이 규정을 오는 2018년까지 폐지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미 항구 떠난 배.

메르켈은 현재 터키 쪽에 유럽으로 몰려오는 난민 해법을 크게 의존하는 상황이라서 터키 정부의 요구를 받아주면 국내의 지지를 잃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터키 정부의 도움을 받는 게 쉽지 않게 되는, 코뚜레 꿰인 송아지와 같은 처지에 빠졌다.

2.5. 그래도 아직은 메르켈

메르켈의 총리 연임은 힘들거란 예상도 있지만, 그래도 현 여권 내에 메르켈에 버금가는 거물 정치인이 없고, 그녀의 권력 의지도 강해 결국 4선 연임에 성공할 것이라는 전망도 적지 않다고 한다.

실제 2016년 9월 지방선거 패배에도 불구하고 주요 선진국 각지에서 준동하는 극우파의 거센 파고에 '인본주의적 포용정책'으로 맞선 메르켈과 독일의 사례가, 2016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반이민을 내세우며 극적으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시대를 맞아 미국이 독점하던 자유주의적 헤게모니를 대체할 거의 유일한 "영향력 있는 대체재"로 주목받으면서 메르켈의 국내 지지율도 반등세를 보이고 있으며, 2016년 11월에는 지지율이 다시 50% 이상으로 회복됐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메르켈은 11월 20일 공식적으로 4연임 도전을 천명했다. 직후인 12월 초엔 향후 대규모 난민수용은 제한하겠다며 난민 정책에도 일부 수정을 가해 반난민층을 일부 끌어안는 모션을 취해 여론은 4연임이 유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으며, 메르켈은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헬무트 콜의 16년 최장재임 기록도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2016년 12월 19일 2016년 베를린 트럭 테러라는 초대형 악재가 터지며 다시 반난민 열풍이 거세게 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고, 실제 극우계열 정당 대안당은 신나게 메르켈 정권을 디스하였다. 그러나 큰 영향은 없었는지 2016년 12월 말 지지율 60%대를 다시 회복하며 오뚝이 같은 저력을 과시했다. 거기에 기민당의 가장 강력한 적수인 사민당에서 메르켈의 대항마를 내세우는데 난항을 겪고 있는 양상이어서 메르켈에게는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2017년 새해 벽두 독일 언론은 메르켈이 헬무트 콜의 16년 집권 아성을 넘보기에 충분하다고 진단하고 있다. # # 그리고 2017년 트럼프 정권이 들어서면서 미국 내부가 극단적으로 갈라지고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도 영 좋지 않은데, 이민국가인 미국에서 반이민을 내세우고 당선된 트럼프 정권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있는 점도 메르켈 내각엔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엉뚱한데서 메르켈에게 악재가 터졌는데, 사민당이 메르켈 대항마로 유럽 연합에서 잔뼈가 굵은 마르틴 슐츠 유럽의회 의장을 당대표 겸 총리후보로 영입했고, 슐츠가 참신한 이미지와 검증된 외교력을 바탕으로 10여년 만에 사민당을 여론조사 1위로 올려놓는 등 돌풍을 일으키고 있어 향후 4선 총리가 되는 대신 주도권은 사민당에 뺏기느냐, 아니면 건국 이후 첫 적적녹 연정이 성사되어 총리직을 내려놓게 되느냐의 기로에 놓이게 될 듯 싶다. 좌파 사민당과 극우 대안당의 성장으로 메르켈 연임이 위협받고 있다는 기사. # 다만 현재 독일은 극우정당이 있긴 하나 여전히 주류는 대연정에 참여한 좌파 사민당과 메르켈이 소속된 기민/기사 연합당이기 때문에[26] 극우 열풍이 불고 있다는 기타 유럽 국가들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27] 이에 대해 가끔 유럽 내에서는 독일이 이제는 가장 정상국가 같다는 자조어린 논평도 나오는 편.[28]

2.6. 2017년 선거, 불완전한 승리

그리고 2017년 5월 치러진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주의회 선거에서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기독민주당이 맞수인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에 승리하면서, 상승세를 탄 메르켈이 2017년 9월 24일 치러질 제19대 독일 연방하원 선거에서 승리하고 연정을 구성해 총리직을 계속 수행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후 치러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선거에서도 승리[29] 를 이어가며 기민당 독주체제를 구축했다. 독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주의 민심은 여전히 메르켈의 리더십을 신뢰하는 것으로 풀이되었기에 메르켈의 4연임이 확실시되고 그럴 경우 헬무트 콜 의 16년 장기집권 기록에 필적한다. 현지에서는 스웨덴 사민당의 타게 엘란데르(23년간 장기집권)에 메르켈이 필적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는 중.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4연임이 유력해졌다. 다만 지난 총선보다 8.8%나 감소했으며 1당 자리는 유지했지만, 전후 두번째로 저조한 득표율을 차지했기 때문에 실망스러운 성적을 냈다. 녹색당이나 사민당이 연정 구성을 거부하면 재총선을 치르게 된다. 저조한 득표율의 원인은 친이민 정책에 따른 지지기반이 이탈한 것으로 보고있다. 기존의 지지기반이 반이민 정책, 반EU를 외치는 극우정당에게 돌아서게 되었고, 결국엔 제3당으로 독일연방의회에 입성하게 되는 일을 만들게 된다. 극우정당이 독일 연방의회에 입성한 것은 아돌프 히틀러 나치 정당이 입성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극우정당이 나치이후로 처음으로 제3당으로 돌풍을 일으켰다는 것은 여러의미로 독일의 방향성 측면에서 많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따라서 여성 정치인으로 엄청난 4연임 장기집권의 역사를 썼지만, 메르켈이 안고 갈 숙제는 많아보인다.

2017년 10월 8일, 자민당 - 녹색당과의 자메이카 연정을 공식화하였다. 기사 메르켈에 대한 지지율은 49%로 높은 편이지만, 메르켈이 4년 임기를 다 채우기 전에 사임해야 한다는 여론도 1/3 정도가 존재한다. 기사

2017년 11월 20일 자메이카 연정 협상이 결렬되었다. 현지시각 19일 오후 6시까지를 협상기간으로 제시했던 크리스티안 린트너 자민당 당수가 기한을 넘기자 협상 중단을 선언한 것. 이제 메르켈은 소수정부를 구성하거나 대통령에게 의회해산 및 재선거를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슈피겔, 독일의 소리 등 현지 언론은 연정 협상 전 메르켈이 '안정적인 정부를 최우선으로 할 것'이라고 언급했던 것을 지적하며 재선거 가능성을 더 높게 보고 있다. 어찌됐든 간에 이번 협상 결렬은 안 그래도 많은 의석을 잃어 위태위태한 메르켈의 지도력에 또 한 번 치명타를 가한 것으로 평가된다. 12년간 쌓아 온 유능한 협상가, 안정적인 지도자라는 이미지 또한 희석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앙겔라 메르켈의 정치적 운명이 금방 끝날것이라는 예측은 섣부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선거를 할경우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이 약진할것이라는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부담감을 각 정당들이 모두 느끼고 결국 타협을 하게 될것이라는 전망이 현재로선 우세하다. 사민당이 대연정에 참여하거나 혹은 자메이카 연정 협상이 냉각기를 거친후 재개될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물론 시간이 걸리며, 재선거를 치른다 해도 일단 메르켈의 총리지명을 시행한 후에야 의회를 해산할수 있기 때문에 재선거 시나리오로 가더라도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자민당의 이탈 이후 메르켈은 제1차, 제3차 내각에 이어 세 번째로 사민당과의 대연정을 노리고 있다. 전직 사민당 당수인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도 사민당을 설득하고 있는 듯. 사민당 입장에서는 떨떠름하지만 재선거를 한다 해도 지지율이 올라간다는 보장이 없기에 대놓고 거절하지는 못하고 있다.

결국 2018년 2월 7일, 사민당이 대연정을 수용하면서 대연정이 꾸려졌다. 기사 다만 사민당 당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투표가 마지막 관문으로 남아있는 상황.대연정 예비협상 과정에서도 사민당 내부의 반발이 적지않았고, 총선 당시 20.5% 였던 사민당 지지율이 본협상을 거치며 17%까지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난 점에서 46만여명의 사민당원들이 대연정을 승인할지, 아니면 야당으로 남기를 선택할지 여부는 현재 시점에서 판단하기 이르다. 하지만 기민련과 메르켈이 협상 과정에서 재무, 외무장관을 내주는 등 많은 양보를 했기에 승인될 것이라는 전망이 다소 우세하다. 반대로 기민련 당내에서는 특히 재무장관을 내준 것[30]에 대해 너무 많이 퍼준 것 아니냐는 비판 또한 나오고 있다.

2.7. 2018년 제4차 내각 출범

2018년 3월 4일 사회민주당 당원투표에서 대연정 안건이 66%의 찬성률로 통과됨에 따라 제4차 내각 출범이 확정되었다. 기사

제4차 내각에서 사민당은 재무부·외무부·법무부·노동부·환경부·가족부 장관직을 가지게 되었고, 기민련이 경제부·국방부·식품농업부·교육부·보건부, 기사련이 내무부·개발부·교통디지털부 장관직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메르켈은 유럽 난민 사태로 인한 CDU/CSU 연합 해체 위기에 몰려 CDU-사민당 만으로는 과반에 미달하기 때문에 총리를 그만두거나 자민당과 연정을 해야 할 위기다. 결국에는 연립 파트너인 기사련(CSU) 출신인 내무부 장관이 메르켈의 난민 정책에 반발해서 사퇴를 선언하자, 메르켈은 연정을 이어가기 위해서 개방적인 난민 정책을 폐기하고 결국에는 국경을 더 닫을 것이라고 했다.

연정파트너인 사민당 안드레아 날레스 대표와 자매정당인 기사련 호르스트 제호퍼 대표(내무장관)가 연정 탈퇴를 위협하는 등 계속해서 연정이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독일 통일 이후 처음으로 하원을 해산해서 조기 독일 연방하원 선거를 시행할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조기총선은 2018년 11월이나 2019년 4월 둘 중 하나에 발생할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후 메르켈 본인이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물론 불출마를 선언한 상태에서도 조기총선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인데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논리로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본인은 불출마하고 대신에 의회 해산한 사례는 1960년대 일본 중의원 해산 시에도 여러번 보였다.[31]

2.8. 정계 은퇴 선언

2018년 10월 열린 헤센 주 지방선거가 끝난 직후, 한국시간 10월 29일에 슈피겔지 속보로 메르켈 총리가 동년 12월에 열리는 기독민주연합 대표 전당대회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다만 총리직은 2021년 총선 전까지 유지한다고 한다 기사 메르켈은 그간 총리직과 기민련 대표직을 겸직하는 걸 중요하게 여겨왔기 때문에 기민련 전당대회 불출마 선언은 파격적이란 평가다. 더군다나 아직까지 후계자를 따로 키워오지 않았던 터라 더 의외다. 메르켈이 이런 결단을 내린 이유는 연정이 불안정한데다가 최근 치러진 바이에른주 의회 선거에서 자매정당인 기사련[32]이 득표율 하락으로 2007년을 제외하고 매번 차지하던 단독 과반에 미달하고[33], 헤센 주 의회 선거에서도 기민련의 득표율이 10% 넘게 떨어진[34]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조기총선 가능성도 제기되는 가운데 메르켈은 차기 총선에도 불출마가 유력하다는 분석이라서 이번 임기를 마지막으로 정계를 은퇴할 가능성도 높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기사

잠시 뒤 기민련 당수 연임 포기 및 차기 총선 불출마를 명시적으로 선언하며 정계 은퇴가 확실시된다. 유럽의회 의원 등 유럽연합 고위직에도 나서지 않겠다 밝혀 확인사살. 다수당 대표가 국가의 행정수반이 되는 의원내각제 하에서의 독일 정치시스템에서 메르켈의 13년 집권도 조만간 종말을 맞게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에 향후 독일 정국방향이 어떻게 전개[35]될 것인지 지켜봐야할 듯. 12월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안네그라트 크람프-카렌바우어 기민련 사무총장[36]이나 기민련 부대표를 겸하는 아르민 라셰트 NRW 주 총리 등 측근 인사들이 후임 대표로 선출된다면 메르켈도 본인이 공언한 대로 (의회해산 없이) 남은 하원의원 임기인 2021년 9월까지 총리직을 유지할 것이나, 프리드리히 메르츠 전 기민련 원내대표[37] 등 그녀의 정적들이 후임 대표가 될 경우 메르켈이 총리직을 유지하긴 어려울 전망이다.

현지시각 12월 7일 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 사무총장[38]이 후임 CDU 대표로 선출되었다. 크람프-카렌바우어 신임 대표의 경우, 현직 연방하원의원이 아닌 탓에 총리 자리에 바로 오르기엔 모양새가 썩 좋지 않다.[39] 더군다나, 전술했듯 크람프-카렌바우어 대표는 메르켈 측 인사라 메르켈 총리가 본래 임기인 2021년까지는 총리직을 지킬 전망이다. 카렌바우어는 총리직을 거부했다.

또, 카렌바우어에 이어 2020년 8월에는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 출신 마르쿠스 죄더 바이에른 주 총리도 연방총리직 도전을 거부했다. #

2.9. 2019년

2019년 1월에는 메르켈 총리가 딱히 큰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물 밑에서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1:1 정상회담을 하여, 2019년 1월 23일 독일의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프랑스의 명시적 동의를 받아내는 (독일 입장의) 쾌거를 이룩했다. 한국[40], 이탈리아, 캐나다 상임이사국 증원을 반대하는 국가들한테는 당혹스러운 상황이다.[41]

2019년 1월 24일에는 2019년 베네수엘라 정치 위기가 발생하자, 재빨리 니콜라스 마두로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고 후안 과이도를 적법한 대통령이라고 인정했다. 메르켈 총리가 특정 외교 사안에서 강력하게 한 쪽 편을 드는 의사를 밝힌 건 매우 드문 일이다.

2019년 4월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고, 유럽연합 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이 기간에 모친상을 당했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

2019년 6월 2일 대연정을 지지하던 독일 사민당 대표 안드레아 날레스 유럽의회 참패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대연정이 위협받고 있다. 이에 그 존재감이 점점 커지고 있던 사민당 내 좌파는 대연정에 부정적이고 사민당내 주류파 또한 대연정을 해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개각, 정책방향 수정등 각종 개혁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2019년 가을에 치러지는 사민당 전당대회에서 대연정에 대한 중간투표가 있어 메르켈 총리로서는 상당히 궁지에 몰렸다.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면 대연정 붕괴 후 조기총선이 치러져 실각하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사민당 입장에서도 여론조사에서 기민련, 녹색당과의 경합은 커녕 대안당과 3위를 다투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당장 연정 붕괴를 추진할 가능성은 낮긴 하다. 결국 3개월이나 지난 시점에서 아무런 영향이 없는 걸로 봐서 어떻게 대연정을 유지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 듯 하다.

2019년 9월 6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베이징에 방문하여 리커창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정상회담 차원으로 만났다. 그런데 메르켈 총리는 베이징 한복판에서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와 관련하여 홍콩 시민들의 자유로운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중국공산당정면으로 비판했다. 기사 9월 4일 조슈아 웡이 앙겔라 메르켈한테 공개 서한을 보낸 것에 대해 메르켈 총리가 적극 응답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이에 대해 리커창 중국 총리는 폭력을 종식하려는 홍콩 행정부의 노력을 지지한다며 소극적인 입장만을 발표했다. 기사 중국 인민일보, 환구시보 등 관영 언론들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베이징에서 대놓고 홍콩 시위대를 지지한 것을 두고 '쇼일 뿐'이라며 평가 절하하고 관련 내용을 검열하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사

2019년 9월 9일 독일 알텐슈타트의 시장으로 독일 민족민주당(NPD)의 슈테판 악슈가 뽑혔다. 문제는 이 당의 경우 나치당의 후손이라는 것. 이 때문에 독일 기민당 중앙당에서는 거세게 비판했다. 기사

12월 3일.총리 재임한지 14년 만에 첫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방문하였다. # 24일부로 독일 총리 재임 기간이 2번째로 긴 총리가 되었다. #[42]

2.10. 2020년

신년사에서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유럽의 관계가 냉각된 근본적 원인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

코로나19가 독일 내 급속도록 퍼지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확산 사태와 관련해 처음으로 남긴 대국민 메시지에는 상당히 부정적인 전망이 포함됐다. # 뒤이어 주치의가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본인도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다소 지장은 있지만 업무는 정상 수행 중이다.

확진자는 많이 발생했지만 철저한 방역 탓에 확진자 수를 감소시키는 데 성공하게 되면서 기민당쪽으로 다시 지지율이 올라가고 있다.

6월 4일(현지시간) ARD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독일 국민 71%는 메르켈 총리의 직무수행에 만족한다고 응답했으며 메르켈 총리가 속한 정당 기독민주당( CDU)의 지지율도 상승세다. 이런 가운데 독일 공영방송 ZDF에 출연해 5선에 도전하지 않고 정계 은퇴 의지가 확고하다는 뜻을 단호하게 밝혔다. 이날 공영방송 ARD와의 인터뷰에서도 같은 의견을 내비췄다. #1 #2

7월,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함께 유럽연합 코로나19 기금 운용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리더십을 발휘했다. #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이 추가적인 보조금 지급[43]을 요청했지만 재정 상태가 아직 나쁘지 않은 북유럽 국가들이 이를 반대하면서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는데 양측을 설득해 당초보다 기금 규모를 축소하는 선에서 마무리한 것.

9월 15일. 코로나19 확산 사태가 " 반유대주의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

11월에는 대연정을 유지중인 사민당의 요구따라 여성 임원할당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직원이 2천명 이상인 상장 기업 중 임원이 3명 이상인 기업은 이제 무조건 1명 이상의 임원 자리를 여성에게 할당해야한다. #

2022년부터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비닐봉지 배포를 금지하기로 했다. # 얇은 비닐봉지나 재사용 가능 봉투는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에 대해 독일 일부 환경단체에서도 실효성이 낮은 보여주기 정책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2021년을 앞두고 언론에 먼저 배포한 신년사에서 지난 15년간의 재임 기간에서 올해가 가장 어려웠던 해였다고 평가하고 코로나19 위기는 새해에도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

2045년에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계획을 확정했다. #

2.11. 2021년

1월 16일 열린 기민련 대표 선거에서 메르켈의 정치적 라이벌을 자처하던 강경 우파 성향의 프리드리히 메르츠[44]를 누르고 메르켈과 같은 중도 우파 성향의 아르민 라셰트가 승리했다. # 9월에 열릴 제20대 독일 연방하원 선거에서 기민련-기사련이 다시 예상대로 승리한다면 라셰트가 메르켈의 후임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9월 총선 이후 메르켈은 퇴임하므로, 이렇게 되면 헬무트 콜에 이은 총리 집권 기간 기록을 가지게 된다. 참고로 헬무트 콜의 총리 집권 기간은 16년 26일이다. 2021년 11월 22일에 메르켈은 16년 재임을 채우게 된다. 참고로 콜은 메르켈과 달리 5선에 도전했으나 게르하르트 슈뢰더한테 참패했다.

한편, 메르켈 본인은 총선 기간동안 총선 개시 행사와 마지막 행사에만 참여해 후임 총리 후보인 아르민 라셰트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고 전반적인 총선 관여는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

메르켈은 6월 24일(현지시간) 독일 연방하원에서 한 마지막 정부 업무보고 연설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과 관련해 조심스럽게 낙관해볼만 하다"면서도 "하지만 여전히 살얼음판"이라고 말했다. 참고로 이는 16년간 재임한 메르켈 총리의 마지막 대의회 연설이다. #

제20대 독일 연방하원 선거에서 자신의 후계자인 아르민 라셰트 기민련 당대표를 총리에 취임시킬 수 있을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다.[45]

퇴임을 앞두고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처음으로 공개 선언했다. 그간 본인이 페미니스트냐는 시민단체와 여성운동가들의 질문에 모호하게 답변하면서 진보 성향 시민들에게 비판을 받아왔는데 이것에 대해 “페미니즘은 근본적으로 사회참여와 삶의 전반에서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나는 ‘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한 것. #

9월 26일 치러진 제20대 독일 연방하원 선거로 기민/기사련이 대패함에 따라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고 사민당의 올라프 숄츠가 후임 총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산술적으로는 기민/기사련과 녹색당,자민당의 자메이카 연정도 가능하지만 총리 후보인 라셰트에 대한 비호감도가 아주 높고, 녹색당 당원이 압도적으로 사민당 쪽을 선호함[46]에 따라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상황.

다만, 차기 내각 수립까지 과도정부 총리(Geschäftsführende Bundeskanzlerin/Caretaker Chancellor)를 맡게됨에 따라 크리스마스 전까지 연정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헬무트 콜 총리의 기록을 경신하고 퇴임할 수도 있게 되었다.[47] 특히 신호등 연정이든 자메이카 연정이든 연방정부 단위 최초의 3자간 협상이라 그렇게 될 가능이 높다고 점쳐지고 있다. # 하지만 11월 24일에 신호등 연정협상이 공식 타결되고 올라프 숄츠가 늦어도 12월 둘째 주까지는 총리직에 취임하는 것으로 결정됨에 따라 1주일 남짓한 차이의 최장기간 총리 재직 기록은 깨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2021년 11월 22일은 넘겨서 16년 재임은 채우게 되었다.

12월 2일 열린 퇴임식에서 “증오, 폭력, 음모론 등 가짜정보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 나서 달라”고 촉구했다. 또 올라프 숄츠 총리 지명자가 이끌 새 정부에 “많은 성공을 거두기 바란다”고 덕담을 남겼다. 여담으로 군악대 음악으로 동독 출신 펑크록 가수 니나 하겐의 노래인 '당신은 컬러필름을 잊어버렸어요'를 선택했는데, 총리직 취임 이후 처음으로 이날 자신이 동독 출신임을 강력하게 어필하는 선택을 하면서 주목받기도 했다. # 그리고 다른곡중에선 가수겸 배우이신 힐데가르트 크네프의 '나를 위해 붉은 장미비가 내려야해요'와 찬송가 ' 하나님 당신을 찬양합니다'를 선택하였다.
독일연방공화국 총리 퇴임식 중 국가연주[48]

임기를 마친 날인 12월 8일, 연방 의회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와 함께 방문자석에 착석하여 올라프 숄츠 부총리가 총리로 선출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

그런데 당초의 정치쪽과 거리를 두겠다는 정계 은퇴 선언과 달리 베를린 중심 대로인 운터덴린덴에 마련되는 퇴임 후 사무실에 전문 비서, 사무원, 사무실 관리자, 운전 기사 등이 포함된 직원 9명을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

[1] 정확히는 태어나기로는 1954년 7월 17일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났기에 동독 태생은 아니다. 하지만 태어난지 불과 3개월만에 아버지에 의해 동독으로 가게 되었고 갓난 아기 때부터 동독에서 살았으니 동독에서 태어난 것과 큰 차이는 없다. 유년기와 청년기의 대부분을 동독에서 보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동독 출신으로 분류되는 것. [2]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싸운 바 있던 그는 원래 당시 독일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포즈난(Poznań)에서 살았지만 이후 독일 본토로 이주하여 경찰로 살았으며, 1930년 성을 독일식인 카스너로 고쳤다. 이후에도 폴란드의 본가와 비교적 자주 교류했다. 오늘날 폴란드의 구 독일 제국령 지역들은 독일의 지배에 따른 영향으로 현재도 소수나마 루터교회 신자들이 존재한다. [3] 동독 자료에 따르면 1951년부터 1965년까지 총 62만 2,767명의 독일인이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했다. 즉, 메르켈의 가족도 그러한 케이스인 셈 [4] 후일 자신의 연방하원 지역구가 되는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와도 멀지 않다. [5] Deut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 zu Berlin. 동베를린에 있었던 동독 최고의 과학 연구소였다. 독일 재통일 이후 해체. [6] '단일결합이 끊어지는 것을 수반하는 핵붕괴반응, 그리고 그 반응속도상수의 양자화학 및 통계학적 측정'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7]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날, 환호하면서 서베를린에 난입했던 다른 동독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소에 가던 사우나에 있었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기 때문에, 이제 독일의 통일에 어떠한 장애도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8] 부부동성임에도 특이한 케이스에 속하는데 (보통은 결혼 대상자나 제 3의 성씨로 개명하거나 결혼 전 성으로 바꾼다.), 박사로써 연구 커리어를 유지하기 위해 택한 것으로 보인다. [9] 반대로 결혼 이후에도 처녀 시절 성을 유지하는 여성들도 있는데, 재닛 옐런처럼 처녀 시절에 쌓아놓은 연구 커리어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남편 성으로 개명하지 않는 학자들이 대표적 케이스. 아니면 이방카 트럼프 첼시 클린턴처럼 친정이 정치가문이거나. [10] 원한다면 보딩패스에 Mr./Ms./Mrs. 대신 Dr.를 적을 권리도 있다. [11] 여담으로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이 대통령이 아닌 이승만 박사로 더 많이 불렸다. [12] 근접한 문화권의 오스트리아에서는 복수의 박사학위자는 Dr.를 학위 숫자대로 불러준다고 한다. 혹 박사 학위가 세 개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이름 앞에는 'Dr.Dr.Dr.' 라는 호칭이 붙는 식이다. 물론 일평생 하나도 받기 힘들 수도 있는 것이 박사학위인지라 그럴 일은 별로 많지는 않지만서도. [13] 이때부터 2018년 대표직 사임까지 만 18년 동안 의장직을 수행했다. 물론 독일은 내각제 국가이고, 내각제 국가에서는 총선 승리로 총리에 등극할 경우 메르켈처럼 당 대표직을 오래 유지하는 경우도 많다. [14] 참고로 전술했다시피 메르켈은 동독출신으로 동독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가진 인물이다. 특히 독일공산당 및 그 후신인 좌파 당에 대한 경계심과 증오심이 꽤나 깊은 인물로 메르켈정권에서 좌파 당은 헌법보호국에게 엄청난 표적수사에 시달리고 있을 정도다. 이를 생각하면 딱히 의외의 반응은 아니다. [15] Leader of the Opposition. 내각제 국가에서 야당 중 최다 의석을 가진 당의 대표를 이렇게 부른다. 예를 들자면 영국 노동당의 대표 키어 스타머. [16] 독일인들은 기본적으로 메르켈의 절약정신 및 긴축 위주 경제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인 문제까지 용납하는 것은 아니다. [17] 사민+녹색+좌파당의 지지율을 합하면 기민/기사+자민당의 지지율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좌파당이 구 동독집권당인 통일사회당의 계보를 잇는데다가 슈뢰더 정권 시절 사민당의 우경화에 반발한 당원들 상당수가 좌파당으로 탈당한지라 그리 사이가 좋지 못하다. 다만 지방선거에서 가끔씩 연립정권을 수립하는 일은 있다. [18] 다만 독일 내에서는 외무장관인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가 나토가 지나치게 군사적으로 나서는 것을 비판했다. 출처 [19] 물론 경향성 차이지 실제 세부적인 정책이 대폭 수정되는 정돈 아니었다. 애초 반 난민 열풍이 불기 전부터 이민은 어느 나라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심각한 사회문제 야기에도 계속 이민자를 받겠다는 것도 현실성을 고려하지 않은 망상에서 비롯된 좌파적 이상주의일 뿐이다. 특히 EU 체제내에서 그것도 중심국가 포지션으로 무역 이득을 챙긴 나라가 독일이라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른 유럽국가에까지 난민수용을 강요한 건 도가 지나쳤기에 결국 브렉시트로 이어졌다. [20]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여러 독립 운동 세력들이 분화되어 있었지만 제국주의, 전체주의 일본에 맞서서 한국독립운동세력이 좌우로 분화되어 있었다. [21] 당장 나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았다면 그리스의 모럴 해저드를 막기가 배는 어려워졌을 것이다. 나치 청산을 칼같이 하고도 여기저기서 원칙대로 긴축을 하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빌린 돈 갚기 싫은 남유럽 얼간이들에게 나치 드립을 당하는 판에 청산을 안 했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22] 그래도 리비아는 시리아보다는 사정은 좀 낫다. 카다피 독재 정권 붕괴 후 권력 주도권을 놓고 내전을 벌이던 각 정파 세력들이 최근 유엔 아프리카 국가들의 중재하에 통합 연립 정부 수립에 합의하는 등 어느 정도 문제가 평화롭게 해결될 기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리아는 이슬람교의 교리를 멋대로 해석,왜곡하여 테러와 학살을 저지르는 테러리스트 학살 집단인 다에쉬 알카에다 등을 제외하더라도 아사드 정부나 시리아 반군이나 각자 타도를 외치며 양보할 기세를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23] 이는 이스라엘 비판 문제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24] 다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굳이 제노포비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난민들이 모두 범법자나 테러리스트인 것은 아니다. 실제 난민촌에서 테러를 계획하던 사람을 난민들이 붙잡아 독일 경찰서에 신고한 적도 있었다. 신고자 왈 "난민에게 은혜를 베푼 독일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두고 볼 순 없었다. 100년 후 우리 후손들은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출처. [25] 나치를 비판한답시고 나치를 코스프레해서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26] 2017년 기준 합계 지지율이 여전히 60%를 넘고 있다. 게다가 좌파당/녹색당 같은 다른 좌파정당들의 지지율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27] 솔직히 다른 유럽 국가들도 2010년대 들어 극우정당이 강세라지만 결과만 놓고보면, 유럽 주요국 중 두번째로(첫번째로 집권이 유망하던 이탈리아의 북부동맹은 연립여당으로 서유럽 최초 극우집권에 성공했다.) 서유럽 집권이 유력시되던 프랑스 국민전선의 르펜도 2017년 프랑스 대선에서 결선투표 결과 상대주자인 마크롱에게 대패했다. 반난민 정책에선 그나마 호응을 받을지 몰라도 나머지 정책에서 영 중도층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 [28] 사실 독일 자체가 한번 히틀러를 본인들 손으로 올려놓은 전적이 있어서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극우성, 차별성 레토릭에 대해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29] 이 선거에서 사민당이 원내 과반을 내주며 당시 주총리 한네로레 크라프트가 물러나고, 후일 기민련의 당대표가 되는 아르민 라셰트가 주총리에 올랐다. [30] 사실 메르켈 1기(2005~2009) 때도 재무장관은 사민당이 가져갔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기민-기사련 226석 vs 사민당 222석으로 의석수가 거의 비등했던데다, 범좌파(사민당-녹색당-좌파당)가 과반을 차지했던 상황이었다. 거기다 사민당이 " 기민련 기사련은 법적으로 다른 당이니 사민당이 원내 1당이고, 따라서 총리는 사민당에서 나와야 한다"는 강짜까지 놓으면서 사민당을 달래기 위해 재무장관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당시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여차하면 총리 지명투표가 무기명투표로 치러짐을 이용해 좌파당에서 이탈표를 끌어내 정권을 연장하려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31] 다만, 총리가 의회 해산에 대한 그야말로 전권을 가진 일본에 비해 독일의 의회 해산 발동 조건이 조금 더 까다롭기 때문에 꼭 같은 선상에서의 비교는 어렵다. [32] 바이에른에만 출마하며, 나머지 주에서는 기민련이 출마 [33] 바이에른은 독일 전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다시 말해 기민련/ 기사련에 대한 지지가 가장 굳건한 지역이다. 단독 과반이 처음으로 무너진 것은 아니지만, (2008년 주선거때 2석 차이로 과반 확보 실패), 2007년은 근소한 차이로 실패했고 2017년은 18석 차이로 과반에 미달하니, 그만큼 충격이 크다. 다만, 보수성향 소수정당인 자유유권자당(Freie Wähler, FW)과 연합할 경우 넉넉히 과반 확보가 가능하며, 실제로 FW와 연정협상 중이다. [34] 헤센 주는 금융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을 포함하고 있어 바이에른만큼은 아니지만 보수세가 강력하다. 이 곳에서도 1999년부터 19년 동안 기민련이 주 총리직을 맡아 왔다. 기민련은 40석으로 1당 지위는 유지했으나 직전 선거에 비해 의석은 7석, 득표율은 11%p 줄었다. 다만, 기존 연정파트너인 녹색당(29석)이나 연방정부 연정파트너인 사민당(29석)과 연정 시 과반의석인 69석을 정확히 맞출 수 있어 정권연장 자체는 어렵지 않다. 헤센의 경우 극우정당 AfD가 이번 선거에서 처음으로 원내에 진입한 케이스라 우파정당인 기민련의 지지가 그만큼 깎이는 건 당연한 수순이나, 메르켈 총리는 모두 자신 탓이라며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35] 비단 독일만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 메르켈이 유럽 내에서나 세계에서나 그동안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해왔기 때문에 후임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유럽과 세계의 흐름이 좌지우지될 수 있다. [36] 메르켈 본인도 당대표가 되기 직전의 직책이 당 사무총장이었다. 지금은 하원의장을 지내고 있는 볼프강 쇼이블레 당시 대표가 2000년 정치자금 스캔들로 중도하차하며 당시 사무총장이던 메르켈이 후임 대표가 되었다. [37] 메르켈이 총리가 되기 전 그를 연방하원에서 축출했고, 그는 메르켈이 은퇴하는 2021년에서야 하원에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38] 자를란트 주 총리 [39] 하지만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헌법)상 총리가 반드시 연방하원의원이어야만 한다는 명시적 규정은 없다. [40] 다만 한국은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을 반대할 뿐, 상임이사국 증원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다. 자세한 것은 커피 클럽 문서 참조. [41] 그러나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UN헌장 개정 사안으로 UN 헌장은 안보리 5개국 전부를 포함한 12개국 이상 동의가 있어야 한다. 프랑스의 동의만 받았을 뿐 아직 갈 길이 멀다. [42] 1위 기록은 헬무트 콜 총리가 가지고 있다. [43] 보조금은 상환 의무가 없다. [44] 메르켈의 전임 당대표인 볼프강 쇼이블레(당시 연방하원 의장)의 총애를 받으면서 원내대표까지 지냈다가 이후 메르켈에 의해 밀려났다. [45] 현대 서구권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권교체 없이 후계자에게 정권을 넘겨주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46] 선거 직후 여론조사 기준 자민당은 41:51로 사민당과 기민련 모두 선택 가능한 수준이지만 녹색당은 81:16으로 압도적으로 사민당과의 신호등 연정을 원하기 때문 [47] 정확히는 12월 19일에 16년 27일 재임이 되어 경신할 수 있다. [48] 전임자와는 다르게 덤덤한 표정으로 퇴임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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