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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2:06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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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Հայաստանի Հանրապետություն
Republic of Armenia
아제르바이잔
Azərbaycan Respublikası
Republic of Azerbaijan

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고대2.2. 중세2.3. 근세2.4. 근대2.5. 현대
2.5.1. 나고르노카라바흐 영토 분쟁2.5.2. 아르메니아군 장교 피살사건2.5.3.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2.5.4. 2021년 이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국경 분쟁2.5.5. 2022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국경분쟁2.5.6. 아르차흐 봉쇄2.5.7. 2023년 아르차흐 분쟁2.5.8. 아르차흐 분쟁 종료 이후
3. 교통 교류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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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외교관계를 설명하는 문서이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던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 시기와 소련 치하 자캅카스 SFSR 시기에 연방 구성국으로 함께 가맹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두 국가는 근현대사 내내 분리된 시기마다 수교는 커녕 국경 확정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이 쌍방간에 전쟁과 학살을 반복하는 불구대천 원수로 남아 있다.[1]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아르메니아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고대부터 지중해에 기반한 세력과 이란 고원에 기반한 세력 사이의 세력 다툼이 일어나는 각축장으로,[2] 강대국 사이의 전란에 여러차례 휘말리던 파란만장한 역사를 통해 동서 문화의 영향을 골고루 받았다. 아르메니아의 이웃국가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보다는 동쪽에 치우쳐 있었고 이러한 연유로 지중해 문화권보다는 이란 문화권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아르메니아와 조지아가 로마 제국 문화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국교화되던 당시에도 캅카스 알바니아(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 일대)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으로 조로아스터교가 계속 번성하였다. 물론 일부 알바니아인들이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로 개종하는 경우도 적지는 않았는데, 이들은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내 우디인이라고 하여 알바니아 사도교회를 믿는 소수 민족의 직계 조상에 해당한다.

2.2. 중세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가 6세기 내내 전쟁으로 국력을 많이 소모한 상황에서,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인 무슬림들이 사산조 페르시아를 무너트리고 곧이어 동로마 제국의 이집트와 시리아 일대를 비롯한 상당부분을 정복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일대 역시 아랍 무슬림들에게 정복되어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지중해 문화권과 연계가 깊었던 아르메니아인들과 이란 고원 문화와 훨씬 더 가까운 사이였던 캅카스 알바니아인들의 역사는 이슬람 제국의 지배 하에서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아랍 무슬림들의 정복 이후 서쪽의 기독교인들의 유대가 깊었던 아르메니아인들의 경우 상당수가 동로마 제국으로 이주하였으며, 그 결과 동로마 제국에서는 아르메니아계 황제들의 이른바 마케도니아 왕조가 이어지기도 했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아르메니아계 황제들은 아르메니아계 군소국가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의 중흥기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은 동로마 제국 사회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중흥기가 지나고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나톨리아 북동부에서 남부 방향으로 이주하여 이른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세우고 십자군들과 적극 협력했던 역사도 있다.

캅카스 알바니아인들의 경우 조로아스터교도 신도들이 아랍 무슬림들에게 저항하다가, 항복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가 다시 배교했다가 등등을 반복하는 과정을 거듭했는데, 이런 반순니-반아랍 봉기 세력들은 호람딘으로 불리곤 했다. 이들 호람딘으로부터 후일 사파비 제국의 전신이 되는 사파비야 수피 교단이 갈라져나오게 된다.

2.3. 근세

아제르바이잔 일대에서 발흥한 사파비야 키질바시 세력이 이란 고원 일대를 통일하고 사파비 제국을 건국한다. 사파비 제국의 샤한샤들 입장에서 키질바시들은 시아파 근본주의자들로서 전쟁터에서는 매우 용감하게 싸우는 정예 병력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이 새로 정복한 이란 현지의 순니파 신도들과 폭력적으로 충돌하는 경우가 많아 골치를 썩는 상황이었다. 또한 이들 키질바시들은 신비주의를 추종하는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언제 다시 샤한샤들을 위협할 지 모르는 양날의 도끼와도 같았다. 아바스 1세는 아제르바이잔인 키질바시들의 세력도 견제하는 차원에서 제국의 수도를 이스파한으로 천도하고 아르메니아 고원 일대의 아르메니아인 약 30만여 명을 이스파한 근교로 강제이주시켰다. 강제이주 과정에서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추위와 굶주림, 질병으로 사망하기도 했으나, 일단 정착지가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이들 이스파한 근교의 아르메니아계 이란인들이 오스만 제국 및 여타 유럽 국가들과 무역을 주도하며 사파비 제국의 세입을 크게 증대시키게 되었다.

사파비 제국은 골수 시아파 근본주의 국가로서 오스만 제국과 공식적으로 적대하던 관계였다. 이러한 연유로 사파비 제국의 시아파 무슬림들과 오스만 제국의 순니파 무슬림들과의 교류는 상당부분 제한되었고, 사파비 제국의 순니파 무슬림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추방되거나 아니면 오스만 제국 내 시아파 무슬림들이 사파비 제국으로 추방당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다른 한편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은 무슬림이 아니라 기독교인이었기에 양국 사이의 순니-시아 종파 갈등과는 관계가 없었으며, 오스만 제국 내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아르메니아인 상인 커뮤니티가 번성하던 상황이었다. 사파비 제국은 이란 고원에서 생산된 생사를 이들 아르메니아인들을 통해 오스만 제국으로 수출하였고,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은 다시 이를 가공하여 비단으로 만들어서 다시 지중해 너머 유럽인 상인들에게 판매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사파비 제국의 멸망 이후 이란 고원과 캅카스 남부에는 아프샤르 왕조, 잔드 왕조, 카자르 왕조 등이 들어서면서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 고원 일대는 기독교인들을 노린 노예사냥이 지속되면서 황폐화되었다. 18세기 말 아제르바이잔 일대에서 발흥한 카자르인들이 다시 캅카스 일대와 이란 고원 일대를 통일하였으나...

2.4. 근대

19세기 초반 러시아 제국이 캅카스 방향으로 남하하면서 카자르 왕조로부터 조지아 동부 그리고 오늘날의 아르메니아과 아제르바이잔에 해당하는 지역을 정복하였다.

러시아 제국에 막 정복되었을 당시 아르메니아 고원 일대는 관개(irrigation)가 힘든데다가 잦은 전란의 영향으로 농경보다는 조방적인 목축이나 유목이 주로 이루어지던 상황이었다. 러시아 제국 측에서는 아르메니아 고원 지대의 유목민들이 농민들로 대체될 경우 세입이 증대될 것을 기대하여 아르메니아인들의 이민을 적극 장려하기 시작했다.[3] 이러한 식민 과정을 거치며 아르메니아 및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인구 구성은 아제르바이잔인 무슬림 위주에서 아르메니아인 등 기독교인 주류로 변하였다. 이 식민이라는 어휘의 사용이 다소 애매한 것이, 아제르바이잔인들 입장에서는 식민이지만 아르메니아인들 입장에서는 고향을 돌려받은 셈이었다. 반면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일대는 카스피해와 가까운 것도 있고 해서, 현지 무슬림들에 의해 벼농사가 이루어지던 지역이라 러시아 입장에서도 굳이 다른 지역에서 농민들을 이주시킬 필요까지는 없었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일대의 인구 구성은 무슬림과 기독교인 비율의 별다른 큰 변화 없이 이어지게 되었다.

2.5. 현대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인 바쿠에 가면 1918년 3월에 아르메니아인들이 벌인 아제르바이잔인 학살 및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당시에 아르메니아군이 저지른 학살로 인해 희생된 아제르바이잔인들의 사진과 24시간 내내 꺼지지 않은 가스불을 켜놓은 거대 추모비가 있다. 특히 아르메니아군이 아제르바이잔계 민간인을 대상으로 학살을 저지른 정황이 명확한데다가, 아제르바이잔 및 튀르키예와 사이가 나쁜 그리스 불가리아, 이라크, 시리아, 키프로스 같은 다른 주변 국가들도 뭐라고 딱히 반론을 하지 못해 아르메니아로서는 화가 나는 상황. 하지만 아제르바이잔도 이 전쟁 당시 자국에서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자행한 전쟁범죄에 대한 논란이 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도 아제르바이잔에게 징징대지 말라며 맞불을 놓는다. 이런 이유가 맞물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마찬가지로 정황 증거가 명백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애써 무시한다. 그리고 아르메니아가 유엔결의안을 주도해 내놓으려 하면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당시에 아르메니아군이 아제르바이잔계 민간인들에게 자행한 호잘르 학살(Xocalı soyqırımı)을 언급하면서 매번 결의안을 방해한다.

아르메니아는 1918년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후, 보복으로 아르메니아 곳곳에 있던 아제르바이잔인들을 학살한 바 있다. 150만 명이 학살당한 아르메니아인보다 적다고 하지만, 1890년대만 해도 예레반에 아르메니아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살던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이 학살로 사라졌듯이 수만명 이상이 학살당했기에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이 학살을 명령한 스테판 샤후먄(Ստեփան Շահումյան, 1878년 10월 13일 ~ 1918년 9월 20일)[4]은 바쿠 코뮌 창설의 주역이었기 때문에 소련 치하에서는 아제르바이잔에서도 혁명가 대우를 받았었으나 아제르바이잔 독립 이후에는 ' 예레반 아돌프 히틀러'로 비하될 만큼 평가가 박해졌다. 이 당시 아르메니아인은 말 그대로 아제르바이잔인들을 인종청소했다. 물론 아르메니아는 이게 소련 허락을 맡고 레닌도 인정했으니 소련 책임도 있다고 항변한다. 아르메니아인 민족주의로 인해 샤후먄이 영웅화되고 있으니 아제르바이잔 역시 민족주의적으로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인정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다만 이 학살로 오스만 제국 영내 아르메니아인들이 또 보복 학살을 당하여 2만 명 이상이 1918년 이후 학살당한 역사도 있으니 아르메니아로서도 우리도 보복 학살을 당했다고 이거 따지자고 같이 맞불을 놓기도 한다. 바쿠에 있던 샤후만을 비롯한 26인의 정치위원 기념묘지는 아제르바이잔 정부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아제르바이잔의 한 언론은 이 묘지의 시신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샤후만을 포함한 아르메니아인 5명의 시신은 있지도 않았으며 살아서 도망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더불어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당시 호잘르를 비롯한 아제르바이잔 곳곳에서 민간인을 학살했기에 비난을 받고 있다. 물론 학살은 아제르바이잔이 숨가이트 학살(아르메니아 주장으론 200명 이상 학살)을 먼저 벌였지만 아르메니아가 분풀이성으로 아제르바이잔인 학살을 벌인 건 맞는 사실이고 학살 규모에서 군대로 학살한 호잘르 학살 규모(공식적으로도 360명 이상 학살, 아제르바이잔은 613명 학살 주장)가 더 크다. 국제 사회에서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당시 학살 여부에 대해서 아르메니아나 아제르바이잔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들어주지는 않으며 양국 모두 가해행위를 한 당사자로 판단하면서 되도록 중립을 견지하고자 한다.[5] 튀르키예의 유럽 연합 가입을 지지한 영국에선 아제르바이잔인 학살에 대해서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르메니아와 아르메니아를 지지한 프랑스 그리스를 윽박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이 아제르바이잔에게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특히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이후 벌어진 쿠르드인 독가스 학살 주범인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영국이 저지른 학살에 얽매이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거론하는 것도 있다.

경제적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는 곡창지대와 여러 지역에서 나오는 농작물 덕분에 굶주리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자본 투자가 완전히 막혀있기에 아르메니아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태이다. 아르메니아 본국은 경제적으로 그다지 풍족한 나라가 아니며, 나고르노카라바흐로 가려면 육상으로만 가야하기에(튀르키예와 아제르바이잔은 여길 인정하지 않기에 비행기로 절대로 못 간다. 아제르바이잔은 비행기로 간다면 격추시킨다고 이를 갈고 있다.)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해외에 진출한 아르메니아인들이 본국에 송금하는 투자금으로 겨우 버티는 실정이다. 오히려 아르메니아 문제 덕분에 이웃한 조지아가 유라시아 철도 및 운송과 자원 파이프 라인을 주워 먹어 덕을 봤다. 대표적으로 바쿠에서 출발해 조지아 트빌리시를 거쳐 튀르키예의 제이한에 도착하는 일명 BTC 파이프라인의 등장. 이 파이프라인이 유럽에 석유,가스를 공급하는 유일하게 러시아가 통하지 않는 구간이다보니 푸틴 밸브 잠가라 스킬이 먹히지 않기 때문에 유럽입장에서 꽤나 중요한 파이프라인이다. 그래서 유럽연합과 튀르키예에 아제르바이잔의 입지가 강화되었고, 나아가 아르메니아로선 경제적으로 국제 투자가 부진한데 튀르키예와 유라시아 튀르크권 나라들이란 막대한 시장을 외면할 수도 없기 때문에 다국적 기업들이 아르메니아에 투자하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 꽤 큰 기업이 아르메니아에 공장을 짓고 투자하려고 했는데 오너가 아르메니아계 미국인이었다. 하지만 회사 간부들은 그러다간 유라시아권 투자와 이전에 유라시아 나라들에 세운 공장까지 보복당한다고 결사반대했고 상업성이란 명목에서 결국 없던 일이 된 적도 있다고 한다.

1988년 소련 통치 시기에도 두 나라 간의 분쟁이 있었다. #, #

2016년 나고르노카라바흐 충돌이 일어났다.

2020년 7월 12일에는 국경지역에서 아르메니아 군인들과 아제르바이잔 군인들이 교전을 벌인 바있다. # 12일에 시작된 교전은 계속되었다. # 아제르바이잔 수도인 바쿠에선 수천명의 시위대가 국기를 흔들며 아르차흐 공화국을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그리고 이는 동년 9월 말부터 양국간의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격화되자 양국 모두 외부세력의 지원을 받으려 했다. 일단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튀르키예, 이스라엘의 지원을 더욱더 요구하고 했으며 전세가 불리해진 아르메니아는 미국 정부에 아르차흐에 평화유지군 파병과 주둔을 요청하는 방안을 미국 정부에 보냈다. 하지만, 미국이나 러시아나 구경만 하는 편이었고[6] 결국 아르메니아는 연전연패에 시달려 2020년 11월 10일 패전 선언이나 다를 거 없는 평화협정에 서명해 아르차흐 상당수 지역을 다시 아제르바이잔이 차지하게 되었다.

2020년 11월 11일 램지 테이무로프(Rəmzi Teymurov) 주한국 아제르바이잔 대사는 인터뷰에서 이번 전쟁 이후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국의 국민들이 평화와 공존을 가지기 바란다고 밝혔다. #

2021년 9월 아르메니아가 인종차별에 관한 국제협약 위반 혐의로 ICJ에 아제르바이잔을 제소했다. #

2022년 3월에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에 국교 정상화를 제안했다. #

2023년 11월 13일 프랑스가 아르메니아로 군수물자를 보내고 그것을 조지아가 승인하여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조지아와 프랑스를 비난하였다. #

2023년 11월 17일 미국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회담 장소에 아제르바이잔이 불참 선언을 하였다. 그 이유는 미국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난하는 메시지를 남겨서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 #

2023년 11월 18일 아르메니아의 총리인 니콜 파시냔은 아제르바이잔이 군사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

다음날 니콜 파시냔은 아제르바이잔과 평화협정 초안에 동의하였다. #

아제르바이잔은 미국과 프랑스 등의 서방의 중재 없이 아르메니아와의 평화를 모색하겠다라 하였다.. #

2023년 11월 24일에 아제르바이잔의 총리 일함 알리예프는 서방과의 친선을 이어가는 아르메니아를 보고 "아르메니아는 전 세계적으로 몇몇의 후원자들을 섬기려고 노력하는 몇 안 되는 실패하고 의존적인 국가들 중 하나이다."라고 밝혔다. #

2.5.1. 나고르노카라바흐 영토 분쟁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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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rmenia-Azerbaijan-border-ENG.png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관계가 최악인 주된 이유는 소련 치하에서의 무리한 민족분리 행정구역 편성이 가장 큰 이유이며, 이는 곧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불러 일으켰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국제법상 아제르바이잔 영내에 속한 영토 분쟁 지역이며,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국제 사회는 물론 아르메니아로부터도 국가로서 승인받지 못한 미승인국이다. 이후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2017년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공식 명칭을 변경하여 2023년까지 존속했다가 아제르바이잔에 멸망했다.

소련 치하에서 민족 월경지이자 자치주로 편성된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본디 오랜 역사 동안 아르메니아계와 아제르바이잔계가 뒤섞여 있었기에 민족간 경계선이 확정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양국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을 벌이며 서로가 영토 확장 및 보전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고, 볼셰비키 계열의 붉은 군대가 남캅카스 지방을 다시 무력 침공하면서 소모적인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소련의 개입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승인에 의하여 전쟁의 주된 원인이 된 나고르노카라바흐 1923년 7월 7일 아제르바이잔 SSR의 자치주로, 나흐츠반 1924년 2월 9일에 아제르바이잔 SSR의 자치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아제르바이잔계가 다수였던 나흐츠반과 달리,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제정 시기에 대규모로 정착한 아르메니아계가 다수였기에 이러한 행정구역 책정은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후 1930년에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를 역임한 아가시 한잔을 비롯한 아르메니아계 주요인사들은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 SSR와의 통일을 일방적으로 주장하였다. 하지만 모스크바 중앙정부에 의해 아르메니아 측의 강경한 요구들은 일방적으로 묵살되었다. 이후에도 아르메니아계는 아제르바이잔 SSR령 자치주 지위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198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의해 소련 구성 공화국의 자치권이 대거 향상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는 1988년 2월 20일에 아르메니아와의 통합을 결정하였고, 이는 무력 충돌을 야기하여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9년 12월 1일, 아르메니아 최고 소비에트는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에 합병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1991년 9월 2일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아르메니아계가 아제르바이잔 SSR로부터의 독립과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한 아제르바이잔은 동년 11월 26일에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자치주 지위를 폐지하였다. 동년 12월 10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가 보이콧한 가운데에서도 국민 투표를 통해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독립이 결정되었다. 해당 투표는 아제르바이잔 측의 동의 없이 강행되었기 때문에 UN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1988년 2월 20일부터 발발한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소련 해체 이후에도 이어져 1994년 5월 12일에 비로소 정전 협정을 맺었다. 전쟁의 결과로 아제르바이잔은 기존의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영역 대부분과 기존의 아제르바이잔령 (區)였던 아그담(Ağdam), 재브라이을(Cəbrayıl), 퓌줄리(Füzuli), 캘배재르(Kəlbəcər), 라츤(Laçın), 구바들르(Qubadlı), 쟁길란(Zəngilan)의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 무력 점령한 영토는 아르메니아계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이 실효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영토를 수복하기 위한 아제르바이잔과 이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는 아르메니아 간의 갈등 상황이 계속되어 왔다.

그 외의 소규모 월경지로는 아르메니아 게가르쿠니크주의 월경지인 ' 아르츠바셴(Արծվաշեն) / 바슈캔드(Başkənd)', 아제르바이잔 아그스타파구의 월경지인 ' 야라둘루(Yaradullu / Յարադուլլու)', 가자흐구의 월경지인 ' 바르후다를르(Barxudarlı) / 바르후다를루(Բարխուդարլու)' 및 ' 소풀루(Sofulu / Սոֆուլու)' 그리고 ' 유하르애스키파라(Yuxarı Əskipara) / 베린보스케파르(Վերին Ոսկեպար)', 나흐츠반 새대래크구의 월경지인 ' 캐르키(Kərki) / 티그라나셴(Տիգրանաշեն)'이 있다.

2.5.2. 아르메니아군 장교 피살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2012년 8월 31일, 헝가리 당국이 아제르바이잔 정부로부터 처벌한다는 약속을 받았다면서 2004년에 나토가 주최한 유럽 군사 교류행사로 열린 헝가리 부다페스트 군사학교에서 같이 언어 연수를 받던 아르메니아군 장교인 구르겐 마르가랸(Գուրգեն Մարգարյան)을[7] 도끼로 살해한 죄로[8][9]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아제르바이잔군 대위였던 라밀 새패로프(Ramil Səfərov)를[10] 수형자 이송 협약에 따라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송했다. 문제는 이송된 뒤 교도소에 넣었으면 문제될 게 전혀 없었을 것이고, 가석방한 뒤 불명예 전역을 시켰어도 일단 벌은 줬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그가 이송되자마자 아르메니아인을 죽인 영웅으로 대접하여 훈장도 수여하고 살인죄로 복역한 것을 군 복무로 인정해 8년간 못 받은 급료와 아파트까지 수여한 뒤 소령으로 진급까지 시키는 막장짓을 해 버려 전 세계를 경악시키고 아르메니아의 여론을 크게 자극했다. 거기에 2년 뒤에는 중령으로 진급시켰다.

파일:external/www.horizonweekly.ca/Ramil_Safarov_killer_baku1.jpg

아르메니아 시위대가 들고 있는 저 사진에서 왼쪽이 가해자 새패로프. 오른쪽은 피해자 마르가랸.

새패로프는 헝가리군 심문에 계획적으로 살인한 게 맞다고 밝히면서도 "만약에 상대가 아르메니아 민간인이었다면 난 건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적어도 난 군인이니까요. 하지만, 두 놈 다 아르메니아군이니까요. 그 새끼들은 전쟁을 일으켜 내 동족들을 죽이고 우리나라 땅까지 빼앗아갔지요. 그런 군복입은 놈들이라 이 일을 벌인 겁니다. 난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놈만 죽이고 한 놈을 못 죽인게 아쉽네요."라고 발언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애초에 군인이라도 저항하지 못하는 자를 죽이는 건 전시에도 금지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궤변을 합리화할 그 어떤 명분도 없었다.각주에 나온대로 아제르바이잔과 혈맹이라던 튀르키예군 장교조차도 당시에 밤중에 자고 있는 사람을 도끼로 죽이는 건 군인으로 자랑할 일이 아니다고 일갈하던 말이 제대로 맞은 말이었다. 결국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헝가리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헝가리와 아제르바이잔의 거래로 8년만에 석방된 것이다.

새패로프를 석방시킨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는 당연히 국내외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았는데 새패로프를 석방하면 아제르바이잔이 석유 수입가를 낮춰주겠다고 약속했다라는 아르메니아 비난을 헝가리 야당이 인정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지금도 헝가리의 현역 총리 오르반은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분노한 당시 세르지 사르키샨 아르메니아 대통령은 즉각 헝가리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으며, 두 나라 사이에 또 전운이 감돌게 됐다.

아제르바이잔은 여전히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당시 아르메니아군의 전쟁범죄에 대해 따져들고 튀르키예나 주변 나라들은 편들어주지 않아도 모른 척 하거나 별 반응이 없다. 게다가 유로마이단 같은 훨씬 크나큰 주변 상황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 나라들에서는 이 사건이 묻혀지고 있다.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은 항의시위를 벌였고 미국 정계도 일단 비난했다. 백악관안전보장회의 대변인 토미 비에터(Tommy Vietor)는 오바마 대통령은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라밀 새패로프가 본국으로 귀환하자마자 그를 사면해 준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했다며, 새패로프에 대한 사면 결정은 역내 긴장 완화와 화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현재의 노력에 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미국 측의 실망을 아제르바이잔 측에 전달하였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토미 비에터는 “미국 측은 헝가리 정부가 새패로프를 아제르바이잔으로 송환한 조치에 대한 해명을 요청한 상태” 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산하 민스크그룹의 공동 대표인 러시아와 프랑스는 이 사안을 두고 아제르바이잔과 협약한 자원 개발에 피해가 갈까 그리 비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곧 미국에서도 유로마이단 다에시 같은 문제로 묻혀져 버렸다. 이란도 비난했지만 가해자 새패로프가 시아파 무슬림이라 시아파 무슬림이 다수인 이란으로서도 난감해했고, 아르메니아와 사이좋은 우방이면서도 이란도 아제르바이잔 인구 다수인 아제리인들이 아제르바이잔 본국보다 훨씬 더 많은 1000만명이 넘게 사는 나라인만큼 아제르바이잔을 적국으로 돌리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강력하게 따지진 못했다. 결국 사건은 흐지부지 잊혀져 아르메니아나 해외 아르메니아계 반발 및 시위를 빼면 이제 해외 언론에서도 관련 기사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피해자 마르가랸은 아르메니아에서 소령으로 2계급 추서되고 명예로운 전사자로 기려졌으며 흉상이 만들어지고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유족들도 전사자 가족으로 대우받아 보상금 및 보훈 혜택을 받았고 헝가리 정부도 관리소홀에 대한 책임으로 유족에게 사과 및 손해배상을 했다. 그러나, 헝가리는 2020년 터진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했다.

하지만 아들이 이렇게 날벼락 같이 억울하게 참살된 것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 아르투쉬 마르가랸은 2013년 구르겐 추모관이 설립된 뒤에 아들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살해한 작자가 영웅 취급당하는 것에 항의하며 자살까지 시도했다가 겨우 응급조치를 받아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은 보란듯이 2017년에 새패로프를 대령으로 진급시키며 아르메니아에 강한 도발을 시전했다. 거기다가 그해 4월 1일에는 아르메니아에 기습 공격을 가했다. 하필 그날이 만우절이었기에, 외신은 만우절 장난인 줄 알고 보도를 안 했다가 진짜인 것을 뒤늦게 알고 4월 3일에 보도했다.

어이없게도 이 살인범은 정작 온 나라가 전쟁상태로 돌입한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진짜 애국자라면 오히려 이럴 때 자진해서 전선에 나가야 했다는 점에서 이 자가 실제로는 애국 코스프레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요 살인범은 인스타그램 유튜브를 통해 "전쟁은 나빠요" 이러면서 자신과 가족들(아내 슬하 1남 1녀) 사진이랑 자기가 살고 있는 바쿠 근처의 관광지 인증샷만 인스타에 열심히 올려 댔다. 하지만 정치적인 문제도 있기에 그런 그를 꼭 보내라는 것도 아니었고[11] 전쟁이 아제르바이잔에 유리해진 상황이라 처음에 아르메니아에게 고전할 때만 해도 그에 대한 부정적 인식(아제르바이잔에서)은 많이 사라졌다. 결국 이 전쟁에서 아르메니아가 사실상 항복을 해버리고 아제르바이잔이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다시 얻으면서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은 사라지게 되었다.

2.5.3.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결국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다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자세한 경과는 항목 참조.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패배 이후 20년동안 와신상담하여 아르메니아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아르메니아보다 아제르바이잔이 국가 체급이 월등함에도 전쟁에서 패배했던 이유를 외교 실패에서 왔다고 분석하여, 아르메니아와 사이가 좋지 않으면서 첨단 기술을 보유한 이스라엘과 바쿠 유전을 바탕으로 친교를 다져 여러 분야에서 지원을 받았으며, 캅카스 지역에 영향력을 투사하고자 노력하던 튀르키예와도 친교를 굳혔다. 또한 캅카스 지역의 no.1 플레이어인 러시아의 군사 무기를 도입했다. 때마침 아르메니아의 친러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균형 외교를 시도하자 러시아는 아르메니아를 위험 국가로 판단했고 사실상 아제르바이잔의 전쟁 강행을 묵인했다. 코로나로 인해 아르메니아의 외교, 물리적 고립이 심화되자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을 걸었고 승리할 수 있었다.

아르메니아는 사실상 항복하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지역에서 자국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키고 라츤 회랑과 장게주르 회랑의 상호개방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담은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다. 승전국인 아제르바이잔은 완전항복을 받아내 영토 전체수복을 달성했다고 자평하였으나, 패전국인 아르메니아가 아르차흐 당국과 계속 교류하는 한편 장게주르 회랑 문제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갈등이 계속된다.

2.5.4. 2021년 이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국경 분쟁

아제르바이잔은 패전국인 아르메니아가 딴소리를 하며 장게주르 회랑 문제에 전향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에 공개적인 불만을 계속 표출하였고, 여전히 아르차흐 공화국[12]과 공식적인 대외관계를 이어가는 것을 휴전 무효로 규정하며 나아가 이를 1991년 알마아타 협정[13] 위반으로 보고 아르메니아와의 국경 협정을 한 번도 체결한 바 없다며 본토 도발에 나선다. 국경 획정이 없는 상태에서 아제르바이잔의 아르메니아에 대한 영토 클레임은 예레반 칸국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무한대이다.

2021년 5월 12일부터 아제르바이잔 군인이 아르메니아 국경을 넘어 수 킬로미터 안으로 들어오면서 분쟁이 시작되었고, 2021년 8월 기준 아제르바이잔 측 전사자는 1명, 부상자는 3명이고 아르메니아 측 전사자는 5명, 부상자는 29명이며 포로와 민간인 부상자는 각각 6명, 1명이다.

2022년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여기서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빠져나가자 아제르바이잔군이 아르차흐 공화국 곳곳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이슈로 전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어 국제적으로 묻혔다. 3월말에 아제르바이잔군이 전면적 침공을 가하여 파루흐(Farukh, 아르메니아어: Փառուխ, 아제르바이잔어: Fərrux)가 함락되었다. 그나마 인구 100명도 안되는 작은 마을이었기에 아제르바이잔군은 물러났다고 러시아 측이 주장했으나 고립되어 4월 10일까지도 아르메니아에선 파루흐에 대한 소식이 두절되어 통신도, 육로도 막혔다고 한다.

2.5.5. 2022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국경분쟁

일자별 교전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2022년 8월, 중재국인 러시아는 기존 휴전 협정이 구체적이지 않았음이 교전 재발의 원인이라 판단하고 양국간의 관계 정상화 초안을 새로 작성하기로 한다.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의 중재를 빌미로 아르차흐의 지위 논의를 무기한 연기하자는 내용을 삽입하려 하였으나 아제르바이잔이 자국 내정 문제인 카라바흐 문제에 관한 어떠한 것도 아르메니아와 논의하지 않을 것이라 발표하며 재개전이 확정된다. 아르메니아측에 따르면 러시아는 이 결렬 이후 새로운 초안을 내지 않고 때려쳤다. #

2022년 9월 14일에는 아르메니아에 주둔하던 러시아 평화유지군 기지가 아제르바이잔군의 공격을 받는 영상이 공개되었으나 러시아는 개입하지 않았다. 이는 인계철선 역할로 의도된 러시아군이 입은 피해이자 아르메니아 본토에 대한 타격으로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상호방위조약 4조에 의해 러시아군이 응전을 했어야 하는 사항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9월 공세로 여기서 힘을 쓸 여력도 없고 앞선 관계 정상화 초안 결렬 문제로 이 사태를 예견했다는 듯이 이 사건을 불문에 부치고 무시하였다. 아르메니아가 아르차흐 문제에 대해 명시적으로 빠지든지, 아니면 본토를 밀리든지 둘 중 하나밖에 남지 않은 셈이 되었다.

2022년 10월 7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침탈을 원점으로 돌리기 위해 아르메니아는 다시 한 번 실질적인 항복, 형식적인 평화 협상에 동의한다. 프라하에서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EU 이사회 의장 샤를 미셸의 중재로 니콜 파시냔 총리와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이 만나 회담을 열었다. 양국은 알마아타 선언을 기반으로 한 국경을 인정하기로 선언문에 못을 박았다. # 이로써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가 아르차흐를 공식적으로 포기했다고 인식하였고, 중재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이 선언에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이 이후 아르메니아는 공식 석상에서 아르차흐라는 표현 대신 나고르노카라바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내정 개입으로 트집 잡히지 않도록 휴전 협정에 관해서만 클레임을 제기하는 것으로 자체적인 가닥을 잡은 듯 하게 되었다.

2.5.6. 아르차흐 봉쇄

일자별 사건은 해당 문서 참고.

2022년 12월 12일부터 아제르바이잔은 관변단체를 동원해 라츤 회랑 직접 점령[14]을 간보기 시작, 2023년 4월 23일 국경수비대를 보내 검문소를 세우고 회랑 통제권을 장악해 예정보다 2년 앞서 국경 주권을 자의적으로 수복한다. 물론 이는 휴전 협정 위반이다. 하지만 담장 너머에서 러시아 평화유지군은 구경만 할 뿐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2023년 5월 22일, 아르메니아 총리 니콜 파시냔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포함한 아제르바이잔의 86,600제곱킬로미터 넓이의 국토 주권을 인정할 준비가 됐고, 아제르바이잔도 아르메니아의 29,800제곱킬로미터 넓이의 국토 주권을 인정한다고 이해하고 있다"라 발언하였다. # 아제르바이잔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라츤 회랑을 막았다고 판단하고 구체적인 숫자를 적시해 가며 표현한 것으로 보이나, 아제르바이잔은 봉쇄 명분으로 무기 밀수와 영내 반군 적대행위 문제를 걸었기에 무시하였다.

5월 26일 블라디미르 푸틴, 일함 알리예프, 니콜 파시냔은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만나 3자 회담을 했다. #

2023년 8월 30일,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 마리아 자하로바는 라츤 회랑에서의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역할에 대한 비판을 하는 아르메니아인 기자에게 '아제르바이잔의 주권을 인정한 아르메니아의 책임이며, 러시아 평화유지군은 문제 없다' 대답하였다. 여기에 대해 아르메니아 외교부가 장문의 반박 성명을 냈다. #

2.5.7. 2023년 아르차흐 분쟁

결국 9월 들어 아제르바이잔이 본격적으로 아르차흐로 쳐들어갔다. 속수무책인 아르차흐 방어군은 무너지고 러시아군은 구경만 하는 와중이라 겁에 질린 아르차흐 거주 아르메니아인들이 급히 아르메니아로 대피하고 있다. 아르메니아가 아무리 러시아를 닥달해도 우크라이나 전쟁에 매달리는 러시아는 그저 평화유지군을 보내 피난민 안전이나 지키는 정도일뿐.

마침내, 2023년 9월 28일, 아르차흐 공화국의 대통령 삼벨 샤흐라마냔(Samvel Shahramanyan)은 국가 해산 법안에 서명한다. 이에 따라 미승인국 아르차흐 공화국은 2023년까지만 존재하며, 2024년 1월 1일부로 공식적으로 소멸하고 아제르바이잔에 흡수된다. 예레반에선 반발시위가 거세졌지만 지금 아르메니아로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다. 국제적 관심도는 여전히 우크라이나에 집중되었고 아르메니아를 지지하는 나라들은 도무지 들어올 수도 없고 지원도 못하고 러시아와 이란은 미국과 유럽 경제제재인 나라이므로 이들 나라들을 통해 지원물품을 전달받을 수도 없다.

아제르바이잔이 2023년 9월 29일 부로 아르차흐 공화국 수도였던 한캔디에 입성하여 이로서 29년전 아르메니아가 수만여명 사망자를 내가면서 얻은 아르차흐 공화국은 역사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2.5.8. 아르차흐 분쟁 종료 이후

어쨌거나 양국의 오랜 원한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비승인국 문제를 비롯한 영토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양국간 화해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2023년 12월 7일(현지시간) AP, AFP 통신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이날 공동 성명을 내고 "오랫동안 기다려온 평화를 달성할 역사적 기회가 있다는 견해를 공유한다"며 "주권 및 영토보전의 원칙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관계를 정상화하고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양국은 또 "두 나라 간 신뢰 구축을 위한 실질적 조치를 취하는 데 합의했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합의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대탈출에 나선 가운데 성사된 것이다. # 또한 12월 26일에는 양국 정상들이 독립국가연합(CIS) 회의에서 만나 평화협정에 관한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

다만 아르차흐 분쟁 이후에도 아제르바이잔이 2020~2023년 사이 점령한 국경지역 영토가 아직 반환되지 못한 상태다. # 반대로 아제르바이잔도 1992년 아르메니아에 의해 점령당한 가자흐 구의 7개 마을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며, 아르메니아 정부는 이 마을들을 돌려주려 하지만 현지에 거주중인 아르메니아 주민들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

이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2024년 NATO 정상회의에서 미국의 중재 하에 3자 회담을 가졌다. #

3. 교통 교류

그야말로 적국 그 자체로, 양국 사이엔 교통편조차 없다. 소련 시대까지만 해도 두 나라를 이어주는 교통편이 있었으나 소련이 해체되어 양국 간 분쟁이 일어나면서 사라졌다. 2019년까지는 국경에 온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 국가에 보내주는 것이 전부였으며, 그마저도 2020년에 사라졌다.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인 및 아르메니아계 외국인[15]의 입국 및 중간기착도 원칙적으로 용인하지 않는다. 아르메니아는 특별입국허가를 사전에 받는다는 전제로 아제르바이잔인의 무비자 입국을 허용한다지만 사실상 비자가 특별입국허가로 대체된 것 뿐이다.

워낙 인적 교류가 적으니 그럴 일이 많진 않겠지만 만약 로미오와 줄리엣 신세라면 어느 한 나라에서 만나는 건 아주 어렵고 차라리 제3국인 조지아에서 만나는 게 낫다. 두 나라 사이에 교통로가 끊긴 이상 어차피 인접한 조지아나 이란을 경유해야 하는데, 조지아는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 모두에게 1년간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고 양국 모두와의 교통로에도 별다른 위험 요소가 없다.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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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표적인 원수지간인 인도-파키스탄 관계 폴란드-러시아 관계조차 아아관계에 비하면 정말 양호한 편에 속한다. [2] 고대 로마 vs 파르티아, 동로마 제국 vs 사산조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 vs 사파비 제국 [3] 같은 이유에서 러시아 제국은 볼가 강 유역의 비옥한 초원 지대에 자리잡은 칼미크인 유목민들의 영토를 빼앗아 독일계 이주민들에게 넘겨주었던 바 있다. [4] '스테판 샤우먄(Степан Шаумян)'으로도 알려져 있다. [5] 특히 아제르바이잔은 튀르키예와 관계가 좋은데, 튀르키예가 나토 가입국이라 아르메니아 편을 들기에는 미국과 유럽 모두에게 꺼림칙한 구석이 있다. [6] 미국 입장에서는 이스라엘과 튀르키예의 존재 때문에 아르메니아를 도와주기도 애매했고, 미국 내부에서도 유대인들이 아르메니아를 돕지 못하게끔 적극적으로 로비를 시전하였다(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유대인들은 오래전부터 아르메니아인들과 사이가 나빴고 이스라엘이 아제르바이잔과 우방이 되고 아아전쟁에서도 아제르바이잔을 적극 지지, 지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거기다 그 당시 미국 대통령도 도널드 트럼프였기 때문에 아르메니아가 미국의 도움을 받을리 만무했다. 러시아 역시 2018년도 이후 노골적으로 친서방 노선을 타는 아르메니아가 못마땅하기도 했고, 튀르키예와의 관계를 의식하여 아르메니아를 제대로 도와주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아르메니아 입장에서는 러시아에 소극적인 항의조차도 할 수 없다. [7] 사망 당시 중위로 만 25세. 소령으로 추서됐다. [8] 구르겐 마르가랸이 잠자고 있는 사이에 도끼로 20번 이상 난도질해 살해했다고 한다. 마르가랸의 룸메이트였던 헝가리군 장교 쿠티 벌라지(Kuti Balázs) 중위의 증언에 따르면 "자고 있는데 뭔가 퍽퍽 소리가 나서 보니 이미 죽은 마르가랸을 도끼로 난도질하고 있었다. 마르가랸의 목이 잘려져 뒹굴고 있었고 확 잠이 깨서 비명지른 나를 보더니 '걱정 마, 자넨 아르메니아 그 찢어죽일 새끼들이랑 무관하니까, 전혀 건드리지 않겠소.'라고 느긋하게 말했다. 난 침대에서 나와 그 자리에서 달아났다." 새패로프는 마르가랸을 죽이고 나서 다른 아르메니아 장교인 하이크 마쿠치얀(Հայկ Մակուչյան)중위까지 죽이려 했지만 문을 잠가서 들어가질 못했다.이 둘에 대해 이름까지 알 정도로 준비를 다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라밀 새패로프는 마쿠치얀 중위 이름을 크게 외치며 문을 열라고 했으나, 잠에서 깨어나 대답한 것은 마쿠치얀의 룸메이트인 리투아니아군 중위였다. 그는 욕설을 퍼부으며 밤중에 무슨 짓이냐고 따져들었고 옆방에서 소리에 잠이 깨서 문열고 나온 세르비아군 우크라이나군 중위가 피묻은 도끼를 든 그를 보고 놀라 소리치며 미쳤냐고 탓하자 "난 아르메니아놈의 피만 원할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멍때리던 우크라이나군 장교가 "그 말은 아르메니아인을 이미 죽였다는 거요?"라고 말하자 그렇다고 답변했다. 이때, 쿠티 중위가 깨워 우르르 뛰쳐 나온 여러 국가 장교들에게 새패로프는 어떤 저항도 없이 순순하게 붙잡혔다. 이 가운데, 튀르키예군 대위도 있었는데 그도 쿠티 중위의 말을 듣고 아연실색하면서 "도끼로 아르메니아인을 죽였다는 거요?"라고 영어로 새패로프에게 질문했고 그렇다는 답변을 듣더니 그 대위는 "나도 아제르바이잔 역사를 듣고 알아서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땅을 잃고 동족을 많이 잃어 그들을 미워하는 걸 잘 알고 있소. 그리고, 그 증오를 이해하긴 하지만, 밤중에 자고 있는 사람을 도끼로 죽이는 것은 군인으로서 자랑스러운 게 아니잖소!"라고 어이없어 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가운데 오래안가, 새패로프는 신고를 받고 들어온 헝가리 경찰에게 연행되었다. 헝가리 측 조사에서도 그는 처음부터 아르메니아 장교들을 노리고 도끼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새패로프의 룸메이트인 우크라이나군 대위는 어머니 장례 때문에 귀국해서 새패로프는 도끼를 방에 숨겨와서 준비를 했다. [9] 하마터면 마르가랸처럼 죽을뻔한 하이크 마쿠치얀도 정신적 충격을 받아 마르가랸의 장례식에 참여하고 한동안 요양을 해야했다. 나중에 군으로 복귀한 그는 2012년에 새패로프가 석방되었다는 말을 듣고 분노했다... 그는 2020년 전쟁 당시 중령 계급으로 참전해 가벼운 부상을 입고 살아남았지만 인터뷰에서 수만여명 동족 목숨으로 찾은 땅을 다시 빼앗긴 게 너무나도 슬프다고 탄식했다. [10] 1977년생. 살인 당시 27세. 석방 당시 35세. [11] 무엇보다도 그가 최일선에 투입된다면 당연히 아르메니아군의 최우선 표적이 되어 공격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만일 전쟁영웅 취급받는 그가 아르메니아군의 공격에 의해 사망하면 당연히 아제르바이잔군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기에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그를 전투에 내보내지 않은 것도 있다. 게다가 아르메니아군이 원거리에서 새패로프를 사살만 하면 모를까, 생포하게 된다면,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아르메니아군이 이 작자를 처형하는 것을 넘어 시신조차 가만히 놔둘 리 없을 것이다. 시신을 난도질하고 돼지우리에 처박거나 돼지을 바른다는지 등의 모욕 행위도 같이 할 게 뻔하니, 아제르바이잔 입장에서 전선에 내보내고 싶어도 도저히 내보낼 수 없을 것이다. [12] 아제르바이잔 입장에서는 반국가 군벌 전범들이다. [13] 구소련 공화국들이 상호 경계를 확정한 협정. [14] 이미 아제르바이잔의 땅으로 확정은 되었으나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관할하고 있었다. [15] 그나마 이쪽은 아르메니아 국적자보다는 취급이 아주 조금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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