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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02:42:02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씨랜드 화재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영국 잉글랜드 근처의 초소형국민체인 시랜드 공국에서 발생한 화재에 대한 내용은 시랜드 공국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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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
씨랜드 靑少年修練院 火災事故
Sealand Youth Training Center Fire Accident
파일:external/www.civiltech.co.kr/sea_land_01.jpg
<colbgcolor=#bc002d> 발생일 1999년 6월 30일 0시 30분
발생 위치
,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백미리 씨랜드 청소년수련의 집,
,(現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밸미길 242-23 야자수마을카페),
유형 화재
원인 모기향에 의한 발화(공식)[1]
부실공사로 인한 누전[2]
인명피해 <colbgcolor=#bc002d> 사망 23명[3]
구조 521명
재산 피해 알 수 없음
소실 면적 컨테이너 2·3층 전소

1. 개요2. 피해3. 건물 구조4. 원인5. 화재 진압6. 피해 급증 원인
6.1. 허술한 소방안전시설6.2. 인솔교사들의 무책임한 행동6.3. 공무원들의 비리와 근무태만
7. 수습 과정8. 수사 및 처벌9. 사고 이후10. 사상자11. 유사 사례12. 영향13. 관련 자료1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피우지도 못한 아이들의 불꽃을 꺼버리게 누가 허락했는가 언제까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반복하고 살 텐가
H.O.T.의 노래 아이야! (I Yah!)의 가사. 이 노래는 해당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 , Sealand Youth Training Center fire)는 1999년 6월 30일 0시 30분 경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백미리 궁평항 인근의 '씨랜드 청소년수련의 집'이라는 청소년 수련원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 사고다.

2. 피해

당시 씨랜드 C동 건물에 있던 인원은 다음과 같다.
사망자는 다음과 같다.
파일:1231232.jpg
<화재사건당시 301호 배치도> 출처:KBS2 NEWS
참사 당일, 소망유치원생이였던, 김모양도 301호 투숙인원이었으나,자리가 좁다는 이유로 6세 동생들방에 옮겨 자는바람에, 화를 피했으나 그때의 참사로, PTSD에 시달린다고 한다. 9.사고이후 문단참조

이 참사의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이자 4달 뒤인 10월 30일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가 일어나면서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피해를 입고 말았다.[12]

3. 건물 구조

해당 수련원은 1998년 초부터 영업을 시작해 1999년 3월 수련원 인가를 받았으며 총 부지 면적은 11,606m² / 건축면적은 2,576m²로써 A, B, C동으로 분리되었다. 당시 A동은 658m²로 강의실 및 식당, B동은 156m²로 생활관/관리사무실/양호실/휴게실로 각각 이루어졌으며 특히 화재가 난 C동 건물은 1,762m² 규모로 1층 콘크리트 건물 위쪽 2~3층에 컨테이너 52개를 쌓아 외벽은 흰색 목재, 지붕은 샌드위치 패널로 마감된 건물로서 생활관 겸 지도자 숙소로 사용되어 총 59개 객실에 63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컨테이너부터 값싼 제품을 썼다는 것인데 해당 컨테이너는 두께 1.6mm 철판으로 열전도성이 강했으며 그 이음새에 용접도 아닌 실리콘을 바르고 목재나 샌드위치 패널 등 인화성 물질로 감싸져 있었고 화재 경보기는 작동을 멈췄고 소화기도 텅텅 비어 있어 초동진압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특히 건물 지붕에 사용된 샌드위치 패널은 한쪽 면에 벽체로 사용되는 철판이 빠져 내부의 스티로폼 단열재가 그대로 노출된 형태였고 각 방의 벽재도 스티로폼 단열재 위에 합판[13]만 올린 부실한 자재에 벽지만 대충 발라 때운 것이었다. 이렇다 보니 불길이 단시간에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번진 것은 물론, 단열재가 불에 타면서 대량의 유독가스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컨테이너를 쌓아서 건물을 완공하는 데는 단 15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수련원 대표는 토지 실소유주 김 모씨였고 수련원장은 토지 임대자 박 모 씨가, 영업은 황 모 씨가 각각 맡았다. 게다가 수영장 자리는 원래 양어장 자리였는데 1987년에 시설주가 양어장을 수영장으로 불법 변경해 벌금을 문 바 있었으며 1997년에도 무허가 소규모 놀이동산을 차려 장사하다 적발된 바 있었다.

4. 원인

사고 하루 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원인 규명에 2~3개월이 소요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7월 2일에 갑자기 화재의 원인이 모기향 불이었다고 발표했으며 그게 잘못 엎어지면서 별도로 유치원측에서 놔둔, 모기향 옆에 대나무피크닉가방과 아이들에게 입힐 성인Y셔츠를 리폼한 18벌 캠프유니폼를 함께두었는데 그게 가연성 소재로 된 건물 내로 불길이 번지고 매캐한 독가스를 뿜어지면서 피해가 커졌다고 했다. 이후 법원 판결에서도 모기향이 화재의 원인으로 판단되었다.[14]
누전에 대해서는 누전차단기가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천장 배선 가운데 합선 흔적이 있지만 주위에 탈만한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누전 가능성은 배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사고 3일 만에 철저한 검증 없이 화재 원인을 발표한 데에 대한 의구심을 품었고 7월 6일 한국화재보험협회 실험에서 모기향을 피운 채 이불과 신문지를 놓고 2시간 동안 바람을 불어넣었지만 불이 붙지 않았다. 7월 9일 MBC PD수첩〉에서도 비슷한 조건으로 실험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전부터 전기가 들어왔다, 안 들어왔다 했다는 목격자의 증언으로 보아 전기 누전을 원인으로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거라고 대다수가 입을 모았다. 모기향 화재인 것과 전기누전 화재인 것은 사고 책임 소재에서 큰 차이가 있는데 전자라면 모기향을 피운 소망유치원장에게 책임이 넘겨지고 후자라면 관련된 공무원들 여럿이 징계된다.[15]

한편 유가족들은 사건 발표 다음 날에 분노한 채 국립과학수사연구소까지 갔으나 전투·의무경찰에 의해 가로막혔고 수사 상황을 알기 위해 화성경찰서[16]까지 갔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7월 23일엔 김종필 국무총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정부중앙청사까지 갔으나 버스째로 견인당했다.

정부의 엉터리 화재 원인 규명에 분노했던 유족 중에는 1988 서울 올림픽 여자 하키 은메달리스트 출신으로 대통령 훈장까지 받은 학부모 김순덕이 있었다. 그녀가 분노해 체육훈장을 반납하겠다고 나서자 그제서야 김종필 총리와의 1:1 면담 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김 총리는 그 자리에서 재수사를 약속했다. 그러나 재수사는 결국 없었다. 심지어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정부 방침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결국 김순덕은 거듭되는 대형 참사 속에도 달라지지 않는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의 현실에 분노하며 자신의 훈장을 반납했고 자신의 가족들과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다.

5. 화재 진압

특히 많은 희생자가 난 사유들 중 가장 큰 원인은 사고 지역이 무선통신 난청 지역이라 신고가 늦었다는 점이다. 1999년 당시는 핸드폰이 보급되고 있는 시기긴 했지만 아직 보급 초창기여서 도시를 벗어나면 통화가 터지지 않는 음영 지역이 많았다. 즉, cdmaOne 기지국이 충분히 깔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산소방서에 신고가 접수된 건 사고 1시간 후였고 소방서에서 씨랜드까지의 거리는 70km나 돼서[17] 고속도로에서 가능한 한 빠르게 질주를 해도 40분은 잡고 가야 하는[18] 긴 시간이 걸렸다.

고속도로처럼 선형 좋은 도로도 40분인데 사고가 난 곳은 전형적인 농어촌 지역 비포장 산길에다 선형도 안 좋았으니 제 아무리 소방차가 신호 다 무시하고 달리고 새벽이라 교통량도 적었다고 한들 가는데 당연히 시간이 엄청 걸리는 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수련원 쪽으로 열려 있는 도로는 중형 승용차 1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도로 폭이 좁아서 아예 소방차가 들어가지도 못했고[19] 다른 쪽 도로에는 수련원 측이 사유지라고 주장하며 쳐 놓은 철조망 및 쇠말뚝 등이 있었기 때문에 출동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화재 발생과 동시에 소방차가 출동했다고 쳐도 결국 화재 현장과 소방서의 거리가 멀어서 화재 발생 후 40분 이상 지나고 나서야 도착하게 되었다.[20] 관련 기사 결국 동원된 소방 인력만 553명[21]에 소방차 등의 차량도 67대가 넘게 동원됐지만 3분 만에 물은 동이 나고 유독가스와 화염, 그리고 건물 붕괴 위험 등으로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에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끝내 어린이 19명을 포함한 23명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22]

6. 피해 급증 원인

6.1. 허술한 소방안전시설

화재를 처음 눈치챈 사람은 당시 학원 캠프 현장답사를 위해 씨랜드를 방문했던 송영규 용호체육관 관장이었다.

3층 천장에 연기가 퍼져나가는 걸 목격한 그는 재빨리 근처에 있는 화재경보기를 눌렀지만 화재경보기가 울리지 않았다.

결국 송관장은 있는 힘껏 목소리를 내서 불이 났다고 외쳤고 깊은 잠에 들어 있었던 아이들과 교사들은 깊은 오밤중에 불이라는 말에 혼비백산하여 잠에서 제대로 깨지도 못한 채 정신없이 움직였다.

다행히 후술한 소망유치원을 제외한 다른 유치원, 학원,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같이 있었기에 송관장의 비명을 듣고 얼른 일어나 침착하게 아이들을 인솔하였으며 302호에 남아 있던 소망유치원 아이들도 아이들을 발견한 송관장과 다른 선생님들이 달려와 구조하여 총 521명의 아이들은 무사히 구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1호가 호실의 소망유치원생 18명이 전원 사망한 까닭은 그 아이들이 씨랜드 3층의 한 개 방에 다 같이 자고 있었는데 불길이 급격히 번진 데다 어린이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인솔교사들이 무책임하게 대응했기 때문이다. 당시 해당 유치원의 인솔교사들은 314호에 투숙했다고 증언하였으나 문제는 314호가 그 유치원생들이 취침하던 301호의 바로 맞은 편 방에 위치한 데다 최초 발화 지점도 301호였다는 것이다.[24]

6.2. 인솔교사들의 무책임한 행동

314호의 인솔교사들은 충분히 화재 상황을 재빨리 알아챌 수 있는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을 알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와 상반되는 증언도 있었는데 당시 3층에 있었던 사람들은 314호에선 사람이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애초에 314호가 아닌 아예 건물 밖에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조사 끝에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는데 바로 소망유치원 인솔 교사의 대부분이 밖에서 소망유치원 원장 천경자의 남편 김태천의 주도로 불을 피워두고 삼겹살 소주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25] 즉, 교사들은 처음부터 아이들과 동떨어져 있었으며 화재가 발생했어도 술에 취할 대로 취해 있어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교사들이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26] 반면 전 소망유치원 원장 측은 후술할 2009년 <조선일보> 기사 인터뷰에서 본인을 포함한 인솔교사 3명 전원이 크리스천이라 술을 안 마셨다고 했고 수련원 314호에 있었을 적에는 아픈 아이들이나 연락 온 어머니들이 혹시 없는지 교사들과 이야기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남겨진 302호의 아이들은 다른 선생님들에 의해 전부 구조되었으나 301호에 있던 어린이들은 그대로 질식해 목숨을 잃고 말았으며 초등학교 교사 한 명과 레크리에이션 강사 3명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불길 속으로 몸을 던졌다가 함께 변을 당했다. 3층에서 투숙했던 소망유치원 외에 2층에서 투숙했던 부천 이월드영어학원 소속의 유치원생 1명도 희생되었다.

이렇듯 유아교사는 교사 업무 중에는 어린이들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 기본 도리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으로부터 3년 후 발생한 광진구 어린이선교원 흉기난동 사건에서도 유아교사들의 자질 향상이 아직 멀었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다.[27]

6.3. 공무원들의 비리와 근무태만

뿐만 아니라 수련원 측은 운영 과정에서 시공[28] 및 감리회사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먹이고 화성군 공무원들은 이를 묵인, 비호하였고 충격적이게도 김일수 화성군수가 불법 운영에 개입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뇌물을 먹였으니 씨랜드의 수련원은 불법적인 구조로 운영이 가능했었고 안전검사도 가뿐히 무시할 수 있었다.

건물도 콘크리트 건물 1층 위에 컨테이너 52개로 가건물을 조합해서 운영하고 있었는 등 아주 부실공사가 따로 없었는데 그야말로 삼풍백화점은 저리 가라였다.

게다가 건설비와 운영비 절감을 위해 장부만 철근콘크리트로 되어 있었을 뿐 52개의 조립식 컨테이너 박스를 콘크리트로 된 건물 1층 위에 한 쪽에 13개씩 총 26개를 2개 층으로 쌓아 올린 가건물이었다.

정상적으로 지은 건물은 통상 불이 나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반면 여기는 아무래도 임시건물이다 보니 화재가 발생하면 건물이 쉽게 붕괴될 수밖에 없는 취약한 구조였고 어린이 중 일부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채 참변을 당했다고 목격자들은 진술했다.

방 천장 등은 인화성이 강한 물질들인 스티로폼 나무로 장식된 외벽이 불쏘시개 역할을 한 탓에 불길이 순식간에 확산되어 건물 전체로의 확산은 시간문제였으며 설상가상으로 건물 내부에 지독한 유독가스까지 가득 차는 바람에 숨도 전혀 못 쉴 지경이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수련원 밖으로 연결되어 있는 비상구라고는 길이가 50여m인 본 건물 양끝에만 위치해 있어 많은 어린이들이 밖으로 쉽사리 빠져나가기가 어려웠다.

스티로폼 같은 가연성 소재로 인테리어를 한 것도 모자라 전기설비도 무자격자들이 시공하였다.

이러니 불이 나면 쉽게 번지고 이 과정에서 유독가스까지 추가로 발생한 데다 정전까지 되는 바람에 건물 내부가 한순간에 혼란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런 불법 구조 탓에 소방차가 밖에서 물을 뿌리더라도 건물 안으로 제대로 들어가기 어려워졌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덧붙여서 컨테이너로 만든 허술한 건물이었던 데다 화재로 컨테이너 자체도 많이 약해져 있어서 물이 있어도 물을 뿌리기도 힘들었다.[29]

전술했지만 소화기나 화재경보기 등의 방화(防火) 시설 점검도 뇌물을 받았으니 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다.

심지어 당시 국민의 정부 역시 책임 대상으로 거론되었는데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후 범정부적 차원에서 '규제 완화'를 실시하면서 건축물 관련 법령이 느슨해졌고[30] 이것이 위법 행위를 키운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에 행정자치부는 형식적인 검사와 현장 소홀에따른 책임을 물어 공병익 오산소방서장을 직위해제 시켰다.

게다가 야외 수련 활동은 초·중·고등학생(초등학교 5학년 이상 되어야 참여 가능) 대상이기 때문에 현재는 교육당국에서 유치원생들에 대해서는 숙박이 필요한 야외 수련 활동은 절대 못하도록 지침을 두고 있다.[31]

하지만 리베이트 살포 등 수련원측의 과열경쟁에 유치원의 잇속 챙기기로 지침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이 과정에서 안전은 아예 묵살되면서 결국 철모르는 어린 꼬마애들을 화마의 소굴에 재운 꼴이었다.[32]

특히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소망유치원은 참사 전날 서울강동교육청에서 개최한 '여름방학 생활지도를 위한 원장회의'에서 유아 숙박 수련 활동 금지를 시달을 뻔히 받고서도 교육 당국의 지침을 무시하고 합숙을 강행했다.[33]

한마디로 눈가림식 설비 점검, 수련원 및 유치원 측의 잇속 챙기기[34], 안전불감증이 겹친 참사였으며 뒤늦은 후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돈에 눈이 먼 어른들이 꽃다운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가 버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7. 수습 과정

피해자들의 상당수가 체격이 작고 골격이 아직 굳지 않은 유아들이라서 거센 불길로 인해 시신의 상태가 안 좋아 국과수 측이 신원 확인에 2달이나 걸릴 거라고 예상했지만[35] 치아 대조 및 유전자 감식, 병원 진료기록 확인 등으로 사고 발생 3일 만인 7월 3일에 완료되었다.

반면 소망유치원생이 묵었던 301호의 맞은 편에서 자고 있던 마도초등학교 학생들이 대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묵고 있던 2개의 방에 각각 1명씩 인솔교사가 같이 묵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도초등학교 측 인솔교사는 불이 나자 침착하게 학생들을 대피시킨 뒤 다시 들어가 다른 어린이들을 구조한 덕분에 몇 명의 어린이들이 더 살았다. 후에 두 인솔교사는 탈진해 쓰러졌고 소방관들이 한 명을 구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김영재 교사(당시 38세)는 이미 숨을 거두었다. 레크리에이션 강사 서태용(당시 21세), 채덕윤(당시 26세), 박지현(당시 23세)[36]도 아이들을 구하러 갔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영결식 때 정부로부터 의사자로 인정받았다. 사태를 처음 파악한 송영규 태권도 학원 관장 부부도 아이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반면 , 당시 302호에 묵었던 김은성(당시 남, 7세)군은 화재당시 자신의 동생과 함께, 탈출하여 뒷쪽 인근야산으로 대피해서 변을 피했다. 김군의 증언으로는 당시 선생님들끼리 밖에 나갔다는 진술을 PD수첩에서 하였다.

소망유치원 원생 오상민 군은 아버지가 가구제조업을 하는데, 동생의 후기와 왠지모를 '난민 수용소' 같다는 생각을 하고 불참했다가 화를 면했다.

이 두 교사, 세 젊은 강사들의 희생, 송영규 관장 부부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씨랜드 참사 희생자가 23명 초과로 늘어났을 것이다.[37] 반면 소망유치원 교사들은 한동안 세인으로부터 비난받았고 2009년 <조선일보>를 통해 해당 유치원 원장과 인솔교사 중 1명의 근황이 전해진 바 있었다.( 기타 기사)[38]

화재가 모두 진압되고 소방관들이 유치원 아이들이 갇혔던 방에 도끼로 문을 깨고 강제로 들어갔을 때 문에는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 수없이 있었으며 아이들의 시신은 모두 창문 아래쪽에 모여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소방관은 유치원생인 어린이들이 느꼈을 공포를 자신도 느꼈다고 했다.

8. 수사 및 처벌

경찰이 조사 과정에서 씨랜드-화성군청 간 온갖 비리 사실이 있었음을 밝혀내면서 전국적으로 분노에 찬 여론이 폭발했다. 해당 시설 건축주 겸 수련원장 박재천[39]을 비롯해 공무원, 화성군수까지 구속영장이 신청되었고[40] 사건 당일 술을 마셨던 인솔 교사들도 모두 구속되었으며 부지 소유주 김씨는 불구속 입건되었다.

최고 책임자 김일수 전 화성군수는 이 사건으로 인해 군수직에서 사임하였으나[41] 무혐의로 풀려난 뒤 지역유지로 잘 살고 있다. 2005년 인터뷰 한때 경찰에서 몇 번이나 검찰에 기소 요청을 했지만 모두 기각당했으며 더욱 무서운 것은 화성군수가 조사 받던 중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자 화성군수님을 보호하겠다는 화성농촌문제 연구회와 지역 4H 소속원들이 주축이 된 지지자 300명이 몰려가서 병실을 지키면서 기자들을 내쳤다. 심지어 "씨랜드 사건이 비극이기는 하지만 군수님에게 모든 비난을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억지주장을 하기까지 했다. 반면 씨랜드 원장 박씨는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및 금고 5년, 전 소망유치원 원장 천씨는 금고 5년이 각각 선고됐는데 이들은 각각 징역 1년과 금고 4년으로 감형됐다가 2001년에 출소했다.

화성 동부(병점, 동탄, 봉담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늦고 소외되어 있는 서부 지역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주목이 덜 되는 편이다. 게다가 1달 후 탈옥범 신창원이 검거되고 임창열 경기도지사 뇌물 사건 등이 일어나면서 관심이 금방 줄었고 일부 언론과 국민들이 보상금 더 받으려고 질질 끈다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인허가를 담당했던 공무원 이모 씨도 어려움을 겪었다. 당초 해당 인허가 신청을 접수한 담당 공무원 이모 씨는 실사 결과 컨테이너를 얹은 부실하고 취약한 형태의 건물이라 허가를 내주지 않았는데 이후 씨랜드 쪽의 갖은 회유와 협박에 시달렸다. 이모 씨의 상급자들도 빨리 허가를 내주라고 압력을 가했고 나중에는 조직폭력배까지 동원해 협박했다, 씨랜드 회장인 박모 씨는 "니까짓 게 군수도 아닌데 시키는 대로 하지 말이 많냐", "안 되면 안 되는 법을 찾아오라" 등의 폭언을 행사하는 바람에 결국 이모 씨는 다른 민원부서로 옮겨야 했고 허가는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해당 공무원은 이러한 전말을 비망록에 남겨 양심선언을 했으며 이 사건이 터진 후 수사를 받으면서 이 비망록이 관계자 처벌에 결정적 기여를 했지만 상급 공무원들이 그 건으로 줄줄이 사법 처리를 받게 되자 조직 내에서 내부고발자라는 냉대를 받으면서 끝내 그 다음 해에 쓸쓸하게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다. # 말이 명예퇴직이지 사실상 해임된 거나 마찬가지다. 퇴직 이후 그녀는 인터뷰에서 "'참 공무원'이 아니라 스스로를 '어린 생명을 잃게 만든 죄인'이라 생각하며, 평범한 엄마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제대로 된 원인 및 진상 규명 없이 1999년 8월 10일 유가족들은 배상책임 대상에 대한 배상/보험청구권을 경기도 및 화성군청에 위임하는 등으로 합의하고 말았다.

사고 이후에도 샌드위치 패널을 쓰고 소방시설이 미비한 일부 불량 청소년수련원들이 법망을 피해 한동안 존재했으며 창고 등 다른 건물도 샌드위치 패널 등 내장재 관련 법안에 손을 대지 않았다. 당시에도 이미 전문가들은 샌드위치 패널의 위험성을 보고하고 있었고 인구밀집시설의 내장재를 난연재로 바꾸어야 한다고 정부에 수차례나 요청했는데 정부는 이를 묵살하고 화재 대비를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이로 인해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와 천안초등학교 축구부 합숙소 화재참사, 청도 버섯공장 화재,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등이 발생했다. 씨랜드 참사가 발생한 지 무려 6년이나 지난 2005년에야 참여정부에서 '청소년활동진흥법 시행령'이 제정되면서 청소년수련원 시설에도 샌드위치 패널을 건축 자재로 쓰지 못하게 규정했지만 이마저도 2005년 이후 건물에만 적용되고 그 이전에 완공된 건물에는 여전히 샌드위치 패널이 사용되고 있었다.

결국 2008년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야 건물 및 차량의 내장재가 불연재 또는 난연재로 바뀌게 되었다. 다만 이명박 정부도 건설경기 부양과 서민 주거환경 개선이라는 목적으로 도시형 생활주택으로 규정된 건축물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하여 드라이비트 공법을 장려한 죄값이 있는데 2017년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의 화재규모를 키운 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약 씨랜드 참사가 일어난 직후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관련 법령을 다시 이전으로 돌리기라도 했다면 더 많은 생명을 잃은 사건을 비롯한 1999년 이래의 수많은 화재 참사들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상술했듯이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자 정부와 국회 차원에서 외환위기를 극복한다는 명분 하에 적극적인 규제 완화 정책을 펼쳐 기존에 있었던 화재 관련 규제들이 대부분 없어져 버리면서 그 틈을 타 씨랜드 같은 부실한 건축물이 곳곳에서 만들어졌다.

9. 사고 이후


10. 사상자

사망자 어린이들은 1999년 당시 만 5세~6세로[69] 2024년 기준으로 생존해 있었다면 만 30세~31세가 되었을 것이다.
파일:추모비.jpg 2001년, 서울시 송파구 성내천로35번길 53 송파안전체험관에 세워진 씨랜드 희생자 추모비

파일:김영재교사추모.jpg
전라남도 목포시 산정로224번길 11 목포고등학교에 세워진 김영재교사추모비
파일:김영재추모2.png

11. 유사 사례

아래는 샌드위치 패널 등 임시건물에서 일어난 화재 사고들을 서술했다.

12. 영향

13. 관련 자료

14. 둘러보기

대한민국의 화재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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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의 대형 사고 및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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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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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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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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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30일
56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1999년 6월 30일
23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1998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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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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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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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0월 21일
32 성수대교 붕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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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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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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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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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고
1973년 5월 16일
22 영일 건널목 열차 추돌사고
1972년 12월 24일
30 파크로버호 침몰 사고
1972년 12월 2일
53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1972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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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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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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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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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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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창녕 기관선 - 남지교 충돌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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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월 1일
41 서문시장 화재
1966년 1월 18일
22 중구 남산동 판자 아파트 화재
1964년 7월 29일
95+ 서해 어선단 실종 사고
1963년 10월 23일
49 여주 조포 나룻배 침몰 사고
1963년 6월 25일
70 거제 장승포 산사태
1963년 1월 18일
140 연호 침몰 사건
1962년 9월 7일
36 한남동 나룻배 침몰 사고
1960년 3월 2일
62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1960년 1월 26일
31 서울역 압사 사고
[ 195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59년 7월 17일
67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고
1957년 2월 22일
21 한강 미 공군 C-124A 추락 사고
1956년 1월 12일
66 태신호 화재
1955년 3월 2일
42 부산역 열차 화재
1953년 11월 27일
29 부산역전 대화재
1953년 1월 31일
56 오산 건널목 추돌 사고
1953년 1월 25일
66 행운환 침몰 사고
1953년 1월 9일
330 창경호 침몰 사고
1952년 11월 16일
25 강릉 공항 미 공군 C-46D 추락 사고
1952년 10월 16일
44 양평 미 공군 C-119C 추락 사고
1951년 7월 11일
94 제5편리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30+ 제13호 침몰 사고
1950년 6월 30일
23 부산 미 공군 C-54G 추락 사고
[ 194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49년 10월 5일
71 평해호 침몰 사고
1949년 8월 18일
51 대강 터널 질식 사고
1948년 6월 8일
150 미군 독도 오폭 사건
1947년 8월 19일
23 태양환호 침몰 사고
1946년 11월 13일
42 영등포역 열차 충돌 사고
1946년 10월 22일
59 어청도 기뢰 폭발 사고
1945년 9월 29일
73 대구역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8월 24일
549​~𔁳,000+
우키시마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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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국립과학수사연구원)와 대법원의 결론. 팩트로는 모기향이 맞다. [2] 유가족과 전문가, 인근 주민들이 내린 결론. [3] 인솔교사 1명, 씨랜드 소속 레크레이션 강사 3명 포함. [4] 서울특별시강동송파교육지원청에 의해 당일 강제 폐원 조치되었으며 사고 이후에는 일반 상가로 존재하고 있다. 송파구 동남로6길 16(문정동 30-16)에 있었는데 이 건물에는 사고 이후에도 소망유치원의 간판 흔적이 남아 있다. 이후에는 유치원 자리에는 점집이 들어섰었는데 없어졌다.당시 소망유치원 햇님반 신지연(여, 28)는 무자격자 교사라는게 밝혀졌다. [5] 언론 기사나 두산백과 기록하곤 달리 안양 소재의 유치원이 아니라 군포시 당동 소재의 유치원임이 확인되었다. [6] 송내뉴서울아파트(경인로 53번길 46) 위치. 현재도 운영 중이다. [7] 부천 이월드영어학원도 불법운영한 것으로 드러나왔다. 혜지담임 이경아씨와 원장 홍경희씨도 구속되었다. kbs뉴스기사 [8] 당연히 상기 유치원들을 다 합쳐서 47명이다. [9] 이학원 원장 김이동(41, 남)으로부터 119에 최초신고가 접수되었다. 꼬꼬무 씨랜드편에 인터뷰했던 분이셨다. [10] 이학원 원장 정은지원장이 송영규 관장의 처형이다. [11] 희생된 유치원생 중 18명은 소망유치원생이었으며 나머지 1명은 2층에서 투숙했던 이월드영어학원 원생이었다. [12] 4개월 터울로 발생한 이 두 사건으로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피해를 당하자 씨랜드 사건으로 소망유치원에 다녔던 일곱 살짜리 아들 김도현 군을 잃은 1988 서울 올림픽 하키 여자부 은메달리스트 김순덕은 대한민국에 환멸을 느껴 현역 시절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과 메달을 모두 반납하고 뉴질랜드로 영구이민을 떠났다. 15년 후 또다시 청소년들이 대거 희생당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터지자 그녀의 뉴질랜드 이민이 재조명되었다. [13] 그나마도 제대로 된 MDF나 O.S.B 같은 제품이 아니라 톱밥을 압축해서 만든 저급한 제품이었다. [14] 출처: 2000도1858. 실제로 이 사고 이후 충청남도 천안시 농가에서도 모기향 때문에 불이 나 인명피해가 났다. [15] 물론 비리는 별개로 처벌받아야 하지만 모기향이 원인으로 지목되는 순간부터 원장에게 비판이 가해질 것이니 언론들도 자연스럽게 원장을 비판할 것이고 공무원들은 그만큼 빠져나올 탈출구가 생기는 셈이다. [16] 이때의 화성경찰서는 경기도 오산시에 있었다. [17] 당연히 직선거리가 아니라 도로사정 상 거리이다. 이 거리는 서울특별시의 가장 동쪽에 있는 강동구에서부터 인천국제공항까지의 거리나 부산광역시부터 경주시까지의 거리다. 어째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냐면 당시 오산소방서에서 화성군까지 다 맡았기 때문이다. 원래 오산은 화성군의 중심지였고 당시 화성군청도 오산시에 있었으나 오산은 화성의 동편에 치우쳐 있었다. 사고 장소는 화성에서도 서쪽 끝인 데다 직선거리로도 30km 이상이었다. 가장 가까운 파견소(현재의 119지역대)는 9km 거리에 있었으나 정규 소방관이 단 1명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전부터 계속 인원을 충원해야 한다는 보고를 올렸으나 상부에서 묵살되었고 결국 씨랜드 화재 참사로 이어졌다. 화성소방서는 그로부터 9년이 지난 2008년에야 생겼다. 2020년대에도 인력 부족으로 고통받는 소방인데 1999년에는 오죽했을까. [18] 사고 지점과 현재 화성소방서 본서가 위치한 향남읍 기준으로도 30분 정도가 걸린다. 그나마 지금은 고속도로가 깔려 있기 때문에 제한속도를 무시하고 달리면 참사 당시보다는 훨씬 빠르게 도착할 수 있다. [19] 사고 직후 소망유치원 원생 희생자 유가족들이 화재 현장을 돌아보기 위해 서울 송파구가 대절한 대형 버스를 타고 현장 입구로 향했는데 버스가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길이 좁아서 유가족을 태운 버스가 현장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대형 버스가 진입하지 못했으니 버스보다 차폭이 더 넓고 육중한 소방차가 들어갈 리는 만무했다. 이 도로 상황을 본 유가족은 "수련원에 들어가는 정문(입구)부터 이렇게 허술한데 어떻게 당국의 허가를 받은 것이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 모습은 2021년 12월 9일에 방영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자료 화면으로도 등장했다. [20] 게다가 소방서 소속 차량이 노후 차량이었던 관계로 출력이 낮아 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제 속도를 낸다해도 브레이크가 먹통되어 달리는 흉기가 된다. [21] 소방관 249명에 공무원 200명 등등. 경찰도 50명 이상이 동원되었다. [22] 결국 행정자치부는 칼을빼 형식적인 소방검사와 현장 대응 소홀에 따른 책임을 물어 공병익 오산소방서장을 직위하기도 했다. [23] 고장나서 작동이 아예 안 됐다는 설도 있다. [24]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故 이용마 기자가 현장취재하였다. [25] 다만 이것도 추측에 불과하고 공식적으론 그날 밤 화재 당시 소망유치원 교사들이 어디에 있었으며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는 지금도 불명이다. 증언이 워낙 제각각인 데다가 행적을 확인해줄 건물 내외 CCTV도 없었기 때문에 건물 밖에 있었는지, 만일 안에 있었다면 어디 있었는지 확실하게 알려진 게 없다. 다만 딱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날 밤 교사들이 아이들의 곁을 지키지 않고 을 마셨다는 것과 화재 발생 당시 314호실 안에는 사람은 커녕 그 근처에는 누구도 없었다는 것이며, 그것만으로도 이 교사들은 이번 사고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26] 후에 소망유치원 원장은 " 선생님들이 회의 중이어서 불이 난 것을 알지 못했다."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만 늘어놓기에 급급했다. [27] 당시 교회 식당에서 아이들 곁에서 점심식사를 지도하고 있던 교사는 방문 목적이 불분명한 외부인이 지하주차장과 연결된 출입문을 열고 불쑥 들어오자 무섭다는 생각과 빨리 원감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앞서 아이들을 식당에 방치하고 1층으로 올라갔고 주방 아주머니도 무섭다는 생각에 범행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식칼을 주방에 방치하고 아이들을 그대로 둔 채 도망치듯 1층에 올라갔다. [28] (주)그린종합건설 [29] 소화기의 강력한 수압에 의해 건물이 붕괴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불타는 도중에 2층 컨테이너가 일부 주저앉고 말았다. [30] 1997년 외환 위기 직후여서 대한민국의 경제가 매우 안 좋았기 때문에 경제를 조금이라도 살려 보자는 취지하에 실시했던 거다. 그러나 당장의 경제 회복에 주안점을 두다 보니 반드시 필요한 규제들까지 경제 살리기라는 명분 하에 완화되어 버렸다. [31] 유치원생들은 나이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자칫 작은 부주의라도 엄청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데다 위기 대처 능력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중학년(3~4학년) 이하의 학생들한테는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수련 활동을 안 시킬 뿐더러 학생들도 그러한 수련 활동을 꺼리는 편이다. 비단 일선 학교뿐만 아니라 종교 단체( 성당이나 교회 주일학교, 사찰 등)에서 시행하는 숙박형 수련회라든가 여름/ 겨울 캠프의 십중팔구도 고학년(초등학교 5학년 이상)부터 참여하도록 지침을 두고 있다. [32] 게다가 일부 극성스럽고 막장스런 부모들은 자녀의 여름/겨울 캠프 등을 시행할 것을 유치원 측에 요구하기도 했으며 심하면 아예 유치원을 옮기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기도 했다. 2010년대부터는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 등이 터지자 학부모들이 학교에서의 단체 체험학습이나 수련회, 수학여행 등에 자녀를 보내기 불안하고 부담스럽다며 대신 학기 중 가족체험학습을 신청하거나 아예 자녀 몰래 수학여행을 뒤따라가는 경우도 나타났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지금하고는 완전히 딴판이었음을 알 수 있다. [33] 문제는 이러한 지시가 단순 권고 내지는 계도 수준에 불과하다 보니 원장들이 말을 안 들었다는 것이다. [34] 당시 씨랜드수련원이 인기 있었던이유가, 리베이트가 성행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다 [35] 사고 직후 피해자 가족들이 아이들을 확인하러 국과수로 찾아왔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측에서 시신 훼손이 너무 심해 부모라도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라며 가족들을 만류했다고 한다. 이는 청해진해운 세월호 참사와 대구 지하철 참사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세월호는 시신이 물속에서 썩어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하고 대구 지하철은 아예 화장장 수준의 초고열로 전동차가 전소되어 전동차 내에 유골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36] 이 3명은 당시 초등학생들에게 래프팅을 가르쳤다고 한다. [37]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송영규 관장은 301호에 있던 아이들을 다 구하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후 김영재 교사의 출신 고등학교인 목포고등학교와 마도초등학교를 주축으로 장학 활동 등 김영재 교사를 잊지 않기 위한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나 현재는 확인되는 것이 없다. 한편 그의 모교인 목포고등학교에서는 추모비를 건립하고 매년 추모 행사를 통해 고인을 기린다고 한다. [38] 당시 소망유치원 원장이었던 천경자 원장은 유치원 일을 접고 종교에 귀의했으며 인솔교사였던 한 교사는 어린이집에서 하는 야외 견학이나 현장 실습 체험에는 빠진다고 전해졌지만 평생에 걸쳐 속죄하기에는 이미 그들은 너무나도 큰 업보를 지어서 대부분의 여론은 싸늘할 뿐이었다. [39] 이 인간은 "왜 건물을 이렇게 올렸냐?!"고 물어보자 돈 아끼려고 그랬다고 진술했다. [40] 다만 관련 혐의로 잡혀갔지만 그 부분은 무혐의가 되었고 다른 비리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되었다. [41] 이후 빈 자리는 같은 해 12월 재보궐선거에서 우호태가 당선되어 승계하였지만 후임 군수 역시 시장으로 재선 후 비리로 인해 낙마하였다. [42] 반면 김영재 교사의 영결식은 마도초등학교 교정에서 먼저 거행됐다. [43] 예외적으로 김영재 교사와 채덕윤 강사는 용인공원묘지와 수원공설묘역에 각각 안장되었다. 이후에도 매년 추모식이 끝나면 유족들이 아이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아이들의 유골이 뿌려진 동해로 갔다. 10주기 당시 동해에 찾아갔다고 보도된 기사 다만 15주기인 2014년에는 세월호 참사 등을 고려해 생략했다고 한다. # [44] 그마저도 2쪽은 사진 한 장만 달랑 있다. 실질적으로 내용이 담긴 페이지라고는 고작 5쪽밖에 되지 않는다. [45] 애초에 정부기관이 책임지고 발간했어야 할 백서를 사고 피해 당사자들이 직접 수고를 들여가며 대신 발간해야 했다는 것 자체가 이번 사고에 대한 정부의 대처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보여준다. [46] 당일로부터 이틀 전에 시로 승격되었다. [47] 사망자 23명에 대한 법적보상비+특별위로금 포함 총계 약 554억 [48] 어린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심정은 누구나 다 똑같았겠지만 특히 그녀는 국가대표 선수였던 만큼 누구보다도 배신감과 원통함이 사무쳤을 것이다. 자신은 국가의 이름을 건 운동 선수로서 국가를 위해 헌신했지만 국가는 아들을 지켜주지도 못하고 한을 풀어주지도 않은 것이다. 이렇게 정부가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여 그녀의 재수사 요청조차 묵살했으니 대한민국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건 당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9] 故 고가현&나현 자매. 사고 당일이 쌍둥이 딸들의 생일 3일 전이었다. 당시, 쌍둥이들은 수두를 앓고 수련회캠프를 가지않을려고 했었으나, 참석하고 싶다는게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50] 1963년 생. 당시 명인제약에 근무하고 있었다. 사건 당일에는 영어학원 교습중, 아내로부터 참사 비보를 들었다고 한다. [51] 의도가 좋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과 사건사고를 다루는 다른 방송에게 맡겨야지 본 방송이 굳이 사용해야 할 소재는 아니라는 의견으로 갈렸다. [52] 화마 속에서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구출한 송관장 부부에 대해 백지영은 '영웅'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그가 재빨리 이 사태를 알리지 않았거나 송관장 부부의 노력이 없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송영규 관장은 처음엔 아이들이 전부 무사히 구출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가 301호실에 있었던 18명의 아이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듣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자신이 미처 그 301호실의 아이들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것이 사건으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상당한 PTSD로 남았다고 한다. [53] 다만 이야기 친구 3명 모두 방송 초반에는 사건에 대해 잘 모르는 듯한 반응을 잠깐 보였는데 아무래도 당시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 된 낙후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인 데다 얼마 못 가 다른 이슈들의 임팩트로 인해 빠르게 잊혀졌다는 점도 있고 특히 비비는 사건 발생 1년 전인 1998년에 태어났으므로 사건에 대해 어렴풋이 들어보기는 했을지 몰라도 사건이 터진 해가 2살 때라 이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54] 이날 출연한 이야기 친구 3명 중에서 백지영의 감정 표현이 가장 강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지영도 한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인데 이 사고로 희생당한 어린이들의 연령대가 방송 시점 기준으로 백지영의 딸의 나이(5세)와 비슷했다. 자신의 자녀와 비슷한 나이대의 어린이들이 못된 어른들의 부주의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더 크게 공감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백지영 자신도 옛날에 유산으로 한 번 아이를 잃은 아픔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어린이들이 희생되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항상 안타까워한다고 알려져 있다. 백지영한테 묻혔지만 MC 장성규도 두 아들을 둔 아빠이다 보니 눈물을 참으면서 진행을 이어가는 장면이 종종 잡혔다. [55] 세라 양이 캠프 전날부터 잊지 않고 챙겼을 정도로 가장 아끼던 잠옷이었다고 한다. [56] 특히 이 프로의 방송을 첨부터 꾸준히 잘 봐 온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장도연이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힘들어한 적도 없었다. 그만큼 너무나 화나고 슬퍼할 사건이니 세일러문 잠옷으로 시신을 확인한 이야기는 결국 자막으로 대체되었다. [57] 이때 출연자들 외에 제작진들도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녹화가 지연되었다는 후문이 있으며 당시 상황을 증언하던 김세라 양의 아버지도 이 부분을 이야기하다가 끝내 울음을 터트리면서 인터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58] 중간에 화재 전과 후의 수련원을 촬영한 자료 사진을 보다가 종잇장처럼 구겨진 2, 3층 컨테이너의 모습에서는 3명 모두 "이딴 곳에서 아이들을 재우다니..."라며 경악하며 분기탱천했다. 덧붙여 욕설이 나간 부분은 당시 수련원장이 돈을 아끼기 위해 건물을 부실하게 지었다고 증언한 대목이었다. [59] 당시 30대였던 부모들은 2024년 기준으로 50대 후반~60대 중반이 되었으며 희생된 어린이들의 연령대는 당시 6~7세였으므로 만약 생존했다면 2024년 기준 30대 초반으로 한창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할 연령대며 개중에는 결혼도 해서 가정도 꾸리고 손자 손녀를 안기고도 남을 나이다. 그리고 꼬꼬무에 나왔던 출연자 중 장도연, 타블로 같은 경우에는 참사 당시 중고등학생이었기에, 이웃 동생이었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피해를 그대로 전해 들었을 수도 있다. [60] 2009년에도 전력이 있었다 [61] 문정동 30-16. 소망유치원은 이 건물 2층에 있었다. 사건 이후에도 이 건물 자체는 남아 있고 상가로 활용되고 있으며 건물 외벽에 소망유치원 간판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62] 사고 이후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난 전 여자 하키 국가대표인 김순덕의 아들. [63] MBC뉴스 아버지 인터뷰당시 정상적으로 선교 아버지라고 나오는데, PD수첩에서는 허순화의 아버지 허경범이라는 엉뚱한 이름의 자막의 표기가 되었으니 시청에 주의. [64] 이 둘은 한국어린이안전재단의 설립자이자 현 대표인 고석의 딸인 일란성 쌍둥이 자매로, 생일인 7월 3일을 불과 사흘 앞두고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고 자매는 당시 수두를 앓고 있었는데, 캠프를 미참석하려고 했으나, 가고싶다는 만류가 화근이 되었다. [65] 원래는 여름캠프 참가를 희망하지 않았던 원생이었고 송이 양의 어머니도 아이가 감기에 걸렸다면서 캠프 참가를 만류했으나 아버지의 "감기 따윈 가서 뛰놀면 낫는다"는 말로 인해 캠프에 참여하게 되어 참변을 당했다. 해당 사고 이후 송이 양의 아버지는 "어린 딸을 사지로 보낸 것에 대해 그저 용서를 구하는 것을 되풀이할 뿐,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66] 1965년생. 천경자 원장의 남편으로, 당시 국가정보원 서울지부에서 24시간 근무 후 이틀을 쉬는 경비원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비번날이었던 사고 당일 인솔 교사들의 회포를 풀기 위해 맥주하고 소주, 삼겹살, 수박 등을 사들고 찾아갔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따라서 김 씨는 사고 당시 인솔 교사들에게 술자리를 제공하여 말썽을 일으키는 바람에 국가정보원 측으로부터 7월 2일 부로 사직 처리되고 말았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낯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후 근황은 불명. [67] 2층에서 유일하게 희생된 원생. 해당 학원 측에서는 화재 당시 방 안에 있던 모든 원생들을 깨워서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고 발언했으며 이 중 김혜지 양이 대피하면서 소지품인 가방을 두고 나왔던 사실을 떠올려 다시 가져오려고 223호로 돌아갔다가 불길에 휩싸여 변을 당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68] 피해 원생의 부모는 주변 아이들과 곧 잘 어울리며 붙임성 있고 다부진 성격에 집안의 웃음꽃이나 다름없던 막내 딸인 혜지 양의 사고 소식을 접한 충격과 슬픔 및 시종일관 변명을 거듭하며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던 이월드 학원 관계자들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부천이월드 원장 홍경희(당시 38, 여) 원장과 혜지담임 이경아(?,여) 씨는 아이들을 인솔하지 않은혐의로 구속되었다. [69] 1993~1994년생 [70] 그 뒤 동생인 윤두나( 지연)도 작중 초반에 학교 일진들이 일부러 불을 질러 화재가 난 건물 안에 갇혀 생을 마감했다. [71] 이 참사로부터 1년 후에는 추풍령 경부고속도로 연쇄추돌 참사가 터지면서 수학여행이 2년씩이나 취소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72] 위에서 언급한 공릉미술학원 원생이었다고 밝혔다. [73] 오늘의 주요뉴스 영상을 보면 자막이 평소보다 2배는 크게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사고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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