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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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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군사
2.1. 전술2.2. 잦은 전쟁2.3. 무예
3. 외교
3.1. 대촉 외교3.2. 대위 외교3.3. 동방 외교3.4. 남방 외교
3.4.1. 교주 방면3.4.2. 섬 탐방기3.4.3. 기타
4. 문화, 경제
4.1. 불교 전파4.2. 도굴4.3. 기타
5. 손책의 후계자로서
5.1. 긍정적 평가5.2. 애매한 부분
5.2.1. 조조가 강남을 일찍 노렸다면 유표, 손권은 무너졌을 것이다5.2.2. 조조가 강남을 일찍 노렸더라도 둘이 무너졌을지 어떨지는 회의적이다
5.3. 결론
6. 후계자 문제7. 인재 활용
7.1. 초창기7.2. 말년
8. 성격
8.1. 애주가8.2. 잔인함8.3. 만용8.4. 검소함8.5. 학문8.6. 불행과 불운의 장수(長壽): 너무 오래 살았다
9. 현대의 평가

1. 개요

손권에 대한 평가를 모은 항목.

손권은 70세 가까이 장수하면서 여러 행적을 남긴 데다, 그 행적에 대한 평가도 굉장히 다양하게 나뉘어 구체적인 총평을 내리기 어려운 군주이다. 즉, 손권 역시 유비 조조와 마찬가지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2. 군사

공격과 방어 능력에 차이가 있다. 공격은 뛰어나지 못하다는 게 중론이다. 위나라 방면의 공격으로 환성의 주광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이긴 것이 그가 이루어낸 몇 안 되는 완승 중 하나다. 손권이 스스로 정벌에 나섰을 때는 장제에게 속아서 처참하게 도망쳤고, 장료 장패 그리고 강하의 문빙과 합비 신성의 만총 같은 용병에 능한 장수들에게는 철저하게 패배했다.

그가 친정을 하여 승리를 거둔 전투에서 적장들은 이술, 황조, 주광, 서씨가 주도자를 죽인 규람, 대원의 잔당인 마와 보의 도적 때, 또는 왕릉이 만총의 만류에 지원도 없이 대충 보낸 이름 없는 독장과 같이 평범한 무장이었거나 용병을 모르는 일개 싸움꾼들이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오나라는 남군, 강릉을 차지했음에도 결국 자신들이 소유할 역량이 안 되어 유비한테 넘겨야 했다.

수없는 합비 방면 진출은 그의 대표적인 실패들이다. 합비 쪽은 있는대로 박살나는 상황이라 적벽대전 이후 조조를 잡는 데 실패해서 조조가 세력을 회복하고, 유비가 파촉으로 진출하는 시간을 벌어주게 되었다. 형주 공방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회수 일대 확보[1]를 끝끝내 실패한 육조시대의 국가는 가 유일하다.

손견은 (아무리 원술이 사재를 탈탈 털어 줬다지만) 동탁 휘하의 서량기병을 이겼었고, 한나라의 최정예에 해당할 중앙군의 일원으로 서량 쪽 변장과 한수 토벌에도 참여해봤고, 손책이 강동 평정한 것과 주유가 평지에서 조인이랑 대등하게 싸운 걸 보면 형 세대까지는 전술적 노하우가 전수된 거 같긴 한데 이런 걸 보면 손권 본인의 문제가 없다고 할 순 없을 듯 하다.

그러나 그는 수성을 비롯한 방어 전술에서는 상당한 능력을 보였다. 유수구 전투 당시 그는 전황을 유리하지도 혹은 불리하지도 않게 유지하여 싸움을 장기전으로 이끌었고, 결국 조조를 패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더하여 조조는 손권의 군세를 멀리서 보고는 "손권같은 아들을 가져야 한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부족한 용병술에 대해 변명을 하자면, 출신이 좋아 어려서부터 고등 교육을 받고 또 실전에서도 뛰어난 용병술을 보인 조조나 그를 따랐던 수장들, 대학사 노식에게 사사하는 등 고등교육을 받고 공손찬의 뒷배도 받는 등 현장에서 용병술을 익힌 유비, 타고난 파이터라 싸움 실력만큼은 뛰어났던 아버지 손견[2] 어린 나이부터 원술의 밑에서 종군한 형 손책과는 달리, 손권은 아버지와 형의 노력으로 일구어낸 강동의 군주가 되고나서는 정치에 역량을 집중하였기에 군사 방면으로 경험을 쌓을 일이 없었다.

또 다른 원인은 오라는 나라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도 있었는데, 오나라의 병력 체계는 촉나라 위나라와 달리 세습령병제(世襲領兵制)였다는 것이다. 병호를 따로 할당해서 병역을 부과하는 세병제 자체는 삼국 모두 실행했지만, 오에서는 이 병호를 식읍처럼 신하들에게 분배하여 평시에도 병호를 부려 농지 개간 등에 노동력으로 쓸 수 있게 했다.

이런 방식은 사실상 호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병을 부릴 수 있게 해준 셈이었다. 위와 촉한도 호족연합이라서 중앙권력이 중국의 다른 왕조보다 약하지만 오는 태생이 지방군벌과 지방 호족끼리 할거해서 분할한 특성상 중앙의 권위나 정통성이 한의 계승이라는 프레임을 가진 위, 촉한보다 떨어졌고, 그 탓에 오의 중앙 정부는 호족들에게 특혜 따위를 부여해야만 했던 것이다.

손권이 모든 군권을 가지고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체계가 아니라 손권은 호족들의 동의하에 등극한 우두머리와 같은 존재였으므로 지휘 체제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은 군비를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호족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중앙 정부로써는 곤란한 데다가, 무엇보다도 전투 중에 부하 장수가 싸움을 거절하면 대안이 없는 지휘 체제였다. 위나 촉한의 경우에은 부하 장수가 전투에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면 중앙 정부는 이를 군율로 다스리면 됐지만, 오나라는 군권을 각 호족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방법이 없었다.

손권이 전장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이런 어수선한 체계이기 때문에 그나마 우두머리인 손권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지휘체계가 통일되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다.

2.1. 전술

손권이 자주 활용하였고 결과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작전이 있으니 바로 사항계, 즉 항복하는 척 하면서 방심시키고 기습하기다. 삼국지의 사항계 하면 황개 고육지계가 생각나기에 이것일까 싶겠지만 고육지계는 손권이 낸 계책도 아니고 연의 창작이다. 하지만 그 외에 그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잘 알려지지는 않은 사항계는 많다.[3]

첫째로,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219년 조씨 정권에 양우를 보내 첩자로 활용하려고 한 것이 있다.

둘째로, 228년에 주방에게 거짓 항복의 계책을 실행하라고 명한 사람이 바로 손권이었다. 사항계의 결과로 적의 십만 병사를 쳐부수었고, 결과적으로 조휴는 병을 얻어 죽었다. 물론 세세한 작전을 계획하고 실행한 사람은 주방 자신이었으나, 이 사항계를 명한 것은 손권이었다. 사실상 전술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손권이 거둔 최고의 군사적 성과가 바로 이 석정 전투이다. 10만 명을 격파한 것도 그렇고 조위 친황제 세력의 거두였던 조휴를 몰락시켜 결국 황권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손권이 이 승리를 장기적인 소득으로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이 전투의 최고 수혜자에게는 어마어마한 나비효과였다.

셋째로, 231년에 한 손포의 위나라로의 거짓 항복 또한 사항계였다. 그러나, 이는 만총에게 간파당하여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 했으나, 적의 700 군사를 없애는 데 성공하였다. 마지막으로, 제갈일로 하여금 제갈탄을 속이게도 하였지만 이것은 실패했다.

이처럼 사항계를 활용하는 손권에 대해 호삼성은 자치통감에 주석을 달아 이런 평을 했다.
손권은 오나라의 국력이 위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점을 헤아려서, 위나라를 속이는 기책으로 적을 유인하여 함정에 넣으려고 하였으니, 이는 제갈량이 천하를 두고 다투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2.2. 잦은 전쟁

손권은 강동의 지배자가 된 이래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었다. 적벽대전부터 그가 치렀던 전쟁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손권의 치세에 오나라는 제갈량의 북벌이나 강유의 북벌보다 더 잦은 횟수로 전쟁을 치른 것을 알 수 있다. 방어전을 제외하고 공세만 하더라도 상당한 편. 체급보정 때문에 군사력이 촉한보다 더 강하고, 선박을 이용한 견제를 하기에도 용이하고, 촉한이 국력에서 열세이며 산악길을 통해 공격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이렇게 잦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손권은 양양 북쪽 방면에 대한 공세가 약한 편이었다. 손권전을 보면 241년 여름 4월, 위장군 전종을 파견하여 회남을 공략하도록 하고 작파를 무너뜨리고 안성의 곡식 창고를 불태우고 그곳의 백성들을 거둬들였다. 그다음엔 오의 위북장군 제갈각이 육안을 공격했다.

전종과 위나라 장수 왕릉(王淩)이 작파에서 전쟁을 했는데, 중랑장 진황(秦晃) 등 10여 명이 전사했다. 거기장군 주연이 번성을 포위하고, 대장군 제갈근이 조중(柤中)을 취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5월에 사마의에게 격퇴된 것과 작피전투에서 전사한 장수가 많은 점에서 주공까지는 아닌 것 같다.

명제기를 보면 226년 8월 오(吳)나라의 장군 제갈근(諸葛瑾)과 장패(張覇) 등이 양양(襄陽)을 침공했지만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격파시키고 장패를 참수하였으며 라는 기록도 있다.

마지막으로 조인전을 보면 조비가 위왕이 된 후 조인을 완으로 옮겼을 때 손권이 진소라는 장수를 보내 양양을 점거했으나 조인이 명을 받아 진소를 참수하였다고 한다. 허나 빈 양양성마저 지키지 못하는 것과 오의 북벌 횟수는 촉한보다 많았으나 그에 비해 양양 공격은 사실상 2회(빈집 점거는 제외)에 그친다. 정복할 능력도 없고 그 공략의지도 양동작전이나 먹으면 좋지 그 이상의 정복 의지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또 강하의 북측 절반은 위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문빙이 강하에 있으며 오군을 격파, 견제했고 이 때문에 양양을 노리는데 어려움이 컸다. 손권이 강하로 친정한 적이 있는것도 이런 사정 때문. 사실 형주 공방전을 보면 알겠지만 역사적으로 남조의 북벌은 회수를 장악하고 동진, 서진했다. 대표적인 게 위진남북조 시대 한족 최고의 명장이었던 유송 송무제 동진의 장군 시절 벌인 북벌이 이런 방식이었다.

부자에서는 손권의 전쟁에 대해 '손권이 손책의 기업(其業)을 이어받아, 장자포(張子布)가 있어 복심으로 여기고, 육의(陸議=육손), 제갈근(諸葛瑾), 보즐(步騭)이 있어 고굉(股肱)으로 여기고, 여범(呂範), 주연(朱然)이 있어 조아(爪牙)로 여기고, 임무를 나누고 직책을 받아 사이를 타며 틈을 노리고 군대를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기에, 싸워서 적게 졌고 강남이 편안했다.'라고 기술했다.

다만 끝없이 벌어지는 전쟁에 백성들의 삶이 고단한 건 자명한 이치라서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들을 내리기도 했다.
군사를 일으킨 지 매우 오래되어 백성들은 경작지를 떠났고, 아버지와 아들, 지아비와 아내가 서로 도울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런 상황을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다. 지금 북쪽의 적은 물러나 움츠리고 숨어 있으며, 중원 밖의 지역에는 전쟁이 없다. 각 주와 군에 명령을 내리니, 정책을 느슨하게 하여 백성들을 쉬도록 하라.

이때, 육손은 각지의 식량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장수들에게 농지를 개간하여 확대하도록 표를 올려 명령하도록 했다. 손권은 이에 답했다.

매우 좋은 의견이오. 지금 우리 부자도 직접 공전을 받아 수레를 끌고 온 여덟 필의 말을 넷으로 짝짓도록 하겠소. 비록 그대의 성군에는 미치지 못한다 해도, 백성들과 동등하게 수고를 하려는 것이오.
226년 봄, 영을 내리며
겨울 10월, 육손이 눈앞의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상소를 올려 진술하면서 은덕을 펴고 형벌을 줄이며 세금을 느슨하게 하고 징용을 멈출 것을 권유했다. 또 이렇게 말했다.

"충성스런 말은 전부 진술할 수 없는데, 세상에 몸을 붙이고 사는 신하가 자주 이로운 주장으로 간언하기를 바랍니다."

손권은 이에 답하여 말했다.

"법령의 설치는 악함을 끊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미연에 방비하려는 것이오. 어떻게 형벌을 설치하여 소인들을 위협하지 않겠소? 이것은 먼저 명령을 내리고, 이후에 법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지 법을 범하는 자가 있게 하려는 것이 아니오. 그대는 형벌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는데, 나 역시 무슨 이로움이 있겠소? 단지 부득이 이렇게 한 것일 뿐이오.

현재 그대의 의견에 의하면, 응당 신하들에게 새롭게 자문을 구하고 상의하여 힘껏 따라 할 수 있어야만 하오. 게다가 가까이 있는 신하들이 바른 길로 나가도록 전부 말하여 간언하고, 친척들이 주군의 부족한 면을 보충하고 조언함으로써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고 자신의 충성스럽고 신실함을 밝히는 것이오. 상서에서 말하기를 "내가 당신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굽히고 나를 따르지 마시오." 라고 했소. 내가 어찌 충언으로써 신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겠소?

그런데 그대는 "감히 전부 진술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으니, 어떻게 충성스런 말이라고 할 수 있겠소? 만일 지위가 낮은 신하들 중에서 받아들여 쓸 수 있는 의견을 제시한 자가 있다면, 어찌 사람으로 말을 버리고 채택하지 않을 수 있겠소? 단지 아첨하며 자신을 파는 자에 대해서는 비록 내가 어리석을지라도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소. 징용하는 일에 대해서는 천하기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통일의 공업은 여러분들의 지지에 의지해야만 성공할 수 있소. 만일 강동을 지키며 너그러운 정치를 행한다면, 병력은 저절로 사용하기에 충분할 것인데 또 많이 징용하겠소? 단지 않아서 강남을 지키고 있는 것은 얕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소. 만일 미리 징용하지 않는다면, 아마 때에 임하여 곧바로 쓸 수 없을 것이오. 또 나와 그대는 신분과 명분이 현저하게 다르지만, 기뻐하고 근심하는 것은 실재로 같소.

그대가 보내온 표에서 말하기를, 감히 여러 사람들을 따라 하며 자신을 허용하여 구차하게 재난을 면하지 않겠다고 했소. 이것은 확실히 내가 만족해하는 것이며 그대에게 바라는 것이오."

그리고 손권은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법령 조문을 잘 베끼도록 하고, 낭중 저봉에게 이것을 육손과 제갈근에게 보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삭제하거나 덧붙이도록 했다.
226년 10월, 육손의 징용과 세금, 형벌을 느슨하게 해달라는 청에 답을 내리며
전쟁이 장기간 그치지 않아 백성들은 부역으로 고통을 당하며, 세금이 간혹 거두어지지도 아니하니, 각종 세금을 느슨하게 하고 다시는 재촉하여 징수하지 말라.
234년, 봄 조서
내가 군대를 일으킨 지 50년간, 부세는 모두 백성들에게서 나왔다.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반역하는 자들이 아직도 있으며, 사인과 백성들이 수고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확실해 내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는 일은 부득이한 것이다.
238년, 여일을 처단하고 난 이후의 조서
현재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백성들은 수고로우며 고달프다. 게다가 공로가 있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는 아직 기록되지 않았고,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자는 오히려 구휼되지 못했다.
242년, 황후를 세우고 네 아들을 왕으로 삼을 것을 상주할 것에 대한 조서

손권은 거의 매년 전쟁을 벌였지만, 그 목적은 천하삼분지계처럼 천하를 노리는 게 아니라 각지에서 이득을 챙기려는 성격이 강했다. 비록 형주 양주에 걸터앉아 양측에서 병진하긴 했지만, 손권의 목적은 일격에 기세를 몰아 천하를 평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작피의 역 이후 올라온 상소에 대한 손권의 반응으로도 알 수 있다.
영릉태수(零陵太守) 은례(殷禮)가 손권에게 말하였다.

"지금 하늘이 조씨(曹氏)를 버려서 상주(喪誅)하는 일이 여러 차례 보이고, 호랑이가 싸우는 때에 어린아이가 일을 맡았습니다. 폐하께서 친히 군사를 인솔하시어 혼란스러운 나라를 빼앗고 망하는 나라에 모욕을 주고 의당 형주(荊州)와 양주(揚州)의 땅을 싹 쓸어서 강건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동원하여 강한 사람들은 창을 잡게 하고 약한 사람들은 운반하는 일을 하게 하십시오.

서쪽 익주(益州)의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시어, 농우(隴右)에 진을 치게 하고, 제갈근(諸葛瑾)과 주연(朱然)에게 많은 무리를 주어서 곧바로 양양(襄陽)을 겨냥하게 하시며 육손(陸遜)과 주환(朱桓)은 별도로 수춘(壽春)을 정벌하게 하시고 대가(大駕)는 회수의 북쪽으로 들어가서 청주(青州)와 서주(徐州)를 거쳐 가도록 하십시오. 양양과 수춘이 포위되어 곤궁하게 되고 장안 이서가 촉군과 싸우느라 여념이 없게 되면 허창과 낙양의 군사가 반드시 동서 양쪽으로 나뉘게 될 것이니 이때 아군이 기각지세(琦角之勢)를 만들어 병진하면 중원의 백성들이 반드시 내응할 것입니다.

장수가 서로 마주 대하고 있으면 혹 편하고 마땅한 일을 잃게 되고, 한 부대가 실패하면 세 부대의 군사들의 마음이 떠날 것입니다. 바로 마땅히 그 때 아군이 말마지거(抹馬肢車 : 배불리 먹은 말과 충분히 장비를 갖춘 전차)로 성읍을 휩쓸면서 이긴 기세를 타고서 북쪽으로 쫓아내어 화하(華夏)를 평정해야 합니다.

만약에 모든 군사와 많은 무리를 동원하지 아니하고 전처럼 가볍게 움직이면 크게 쓰이기에는 부족하고 쉽게 누차에 걸쳐서 물러나게 될 것이며, 백성은 피곤하게 되고 위신은 소멸되며, 기회는 가버리고 힘은 다 빠질 것이니 군사를 내보내는 계책이 아닙니다."

손권이 이를 채용할 수 없었다.
오주전 주석 한진춘추

이는 30여 년 전 제갈량이 처음 제시한 천하삼분지계를 오식으로 변용한 버전이라고 봐야 할 것인데, 정작 손권은 이를 채용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채용할 마음이 있었는지나 의문이다. 이 당시 손권의 목적이 칭제건원, 할거였다고 하면 애시당초 이 간언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연히 손권도 처음엔 천하통일을 목적으로 했을 것이다. 노숙이 자기를 황제로 올려 한고조의 사업을 하겠다는 말에 기뻐했고 천하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조비한테 칭신하고 끝까지 뻐기다가 결국 위나라랑 전쟁을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계속 회남에 집착한것만 봐도 나름대로 거길 먹으면 천하통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였을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손권의 이런 천하통일을 위한 군사적 활동은 둔화되었으며 이는 은례의 청을 거부한 것에서도 일 수 있다.

이렇듯 손권은 위와 무던히도 투닥거렸고, 그 횟수는 오히려 유비 제갈량, 강유보다 더하다. 하지만 손권의 전쟁은 제갈량이 구상한 융중대와는 같지 않았다.

2.3. 무예

장료가 항복한 오나라 장수들에게 물었다.

"아까 보니깐 자줏빛 수염을 가진 장군이 있었소. 상체는 길고 하체는 짧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던데, 그게 누구요?"

항복한 장수가 말했다.

"그것은 손회계(孫會稽: 손권)입니다."
헌제춘추

보통 장료 안면인식장애 에피소드로 자주 언급되는 일화지만 여기서 우리는 손권이 무예로 장료에게 인정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 말을 들은 장료 악진과 서로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다가 뒤늦게 추격했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 그런데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장료가 오의 군주인 손권의 얼굴같은 걸 알 리가 없으니 안면인식장애 운운하기 이전에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다.[6]
손권이 매양 사냥을 할 때면 항상 말에 타서 범에 활을 쏘니, 범도 항상 앞으로 돌진하여 말안장을 끌어 잡았다.
장소전
23년(218년) 10월, 손권은 장차 오군으로 가서 직접 말을 타고 능정에서 호랑이를 쏘려고 했다. 말은 호랑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손권은 쌍극을 던졌다. 호랑이가 상처를 입고 물러나자, 항상 따라다니던 장세(張世)가 창으로 공격하여 사로잡았다.
오주전

또한 손권은 사냥을 직접 나섰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그냥 멀리서 깨작깨작 활 쏘는 수준이 아니라 가까이서 헤드샷을 날리는 식의 사냥이었던 걸로 보인다. 이때 호랑이가 손권이 탄 말을 공격하여 상처입히는 지경까지 가니, 장소는 그만 좀 사냥하라며 손권을 또 갈구고, 손권은 마침내 사냥을 그만두겠다는 약속까지 한다.

사실 군주가 사냥을 하는 건 그냥 심심풀이가 아니라 국가 행사나 마찬가지다. 단순히 군주만 혼자 사냥 가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 그들을 호위할 병사들, 필요 물자들까지 대규모로 동원해야 한다. 무엇보다 사냥을 가는 지역의 주민들은 생계가 중단된 상태로 사냥이 끝나기만 기다려야 한다. 심지어 사냥터를 만들기 위해 논가를 갈아엎는 것도 허다해서 백성들에게 가장 민폐를 많이 끼치는 일. 역사적으로 폭군들이 백성들에게 가장 원성이 자자했던 게 사냥이었다. 당장 같은 시대에 조비가 사냥을 지나치게 즐겨서 국가에 해악을 끼쳤고, 한반도 역사에서도 사냥을 너무 즐겨 민폐를 끼친 지도자들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 충혜왕 연산군이다. 괜히 군주가 '나 사냥갈래'하면 충신들이 일어나서 '아니되옵니다!'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치지 않았으니, 이에 범을 쏘는 수레를 만들어 이를 방목(方目)으로 삼고, 그 가운데 덮개를 두지 않고 한 사람에게 몰게 하여, 자신이 직접 가운데 사격하였다. 이때 뒤쳐지던 동물들이 번번이 다시 이 수레를 범접하였으나, 손권은 매양 손으로 쳐내는 것을 즐겨 했다.
장소전

이처럼 손권은 용병은 능하지 못했지만 무예에는 소질이 있었다. 그는 마술馬術과 궁술에 능하여 합비에서 장료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정도였고, 쌍극을 던져 달려드는 호랑이를 물리친 일화와 호랑이를 수레에서 맨손으로 쳐냈다는 기록도 존재할 정도다. 포박자 같은 책에는 부적을 써서 화살이 그를 피해갔다는 표현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손권의 무술로 생각한다면, 이것도 나름 무서운 부분이다.

사실 아버지가 삼국시대에 손꼽히는 명장 손견이고 형 역시 강동의 소패왕 손책이다. 게다가 동생 손익 역시 무예가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동생 손부인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무예는 뛰어났을지언정 형과 아버지에 비해 군재가 떨어진다는 단점이 치명적이었다. 괜히 연의에서 손권이 형과 아버지와 달리 무골이 아닌 것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 것.

그가 발휘한 임기응변의 지혜의 예로는 212년 ~ 213년의 유수구 전투의 일화가 있다. 싸움 중 궁병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화살들의 무게 때문에 배의 한쪽이 무거워져서 기우뚱하자, 배를 돌려 반대쪽에 화살들을 일부러 맞게하여 균형을 맞춘 다음에 탈출하였다. 그리고 이 기록은 연의에서 손견 제갈량에게 뺏긴다.

포박자 잡응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오병(五兵; 병기)을 피하는 방법을 물었다. 포박자가 대답했다. 오 대제(손권)는 개선생( 개상)으로 부터 비결을 전수받았다. 북두(北斗) 글자와 일월(日月) 글자를 붉은 글씨로 쓰면 곧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 황제(손권)는 언제나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선봉으로 나서서 적진을 함락시켰지만 끝내 몸을 상하는 일은 없었다.

3. 외교

3.1. 대촉 외교

형주에 관한 문제와 그에 대한 평은 형주 공방전 형주 공방전의 평 참고.

어찌되었든 형주 공방전으로 인하여 발생하였던 이릉대전 이후, 육손의 편지를 받은 뒤 유비가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이에 손권이 정천을 보내 유비에게 답장하였고 곧이어 유비도 종위를 통해 답장하였다. 이렇듯 친밀함을 쌓으려는 노력을 통하여 두 세력의 우호는 나름대로 회복되었으나, 손권은 아직도 조비와 관계를 끊지 않은 상황이었다.

유비가 죽은 뒤 유선이 그의 뒤를 잇게 되었다. 유비가 남긴 유언에 따라 전권을 위임받은 제갈량의 판단 아래 등지가 오나라를 방문하고 나서야 손권은 장온을 위에 보내어 조비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 후에는 손권의 입장에서 양 국가의 관계가 썩 만족스러웠는지 보즐이나 주연이 촉이 배반했다고 손권에게 진언할 때, 손권은 자신의 가족을 걸고 촉이 결코 그럴 리 없다고 자신하였다.[7] 그런데 이게 훗날 손권 기획, 연출, 감독한 막장드라마를 생각하면 은근히 섬뜩한 복선처럼 보이기도 하는 발언이다.

3.2. 대위 외교

적벽대전 무렵에는 적대적인 관계였으나, 오왕(吳王)으로 책봉받으면서 일단 위에 칭신한다. 그러나 당연히 완전히 복속되지는 않았고 대촉 관계가 안정되자 칭제하여 위의 신하에서 벗어난다. 그 뒤로 위와 전쟁을 반복하며 적대적인 관계였으나, 한편으로는 교환 형식으로 무역을 하는 등 교류는 끊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3.3. 동방 외교

손권은 요동의 독립 세력을 형성한 공손연, 그리고 고구려와도 외교 관계 수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보물과 함께 연왕으로 임명한 공손연은 머나먼 오나라보다는 가까운 위나라에 잘 보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사신의 목을 잘라 위나라로 보내고 보물은 자기가 가졌다.

고구려에서도 공손연과 비슷하게 위나라와 동맹을 맺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는지 사신 호위의 목을 잘라 위나라로 보냈다.

이 부분에서는 손권의 발상이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수 없다. 병법에서 흔히 말하는 遠交近攻( 원교근공)에 맞는 행동이다. 만약 잘되었다면 위로서는 전선을 늘려야 하고 상대할 곳이 완전 양극이니 나름대로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현실적으로 바다 건너 수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는 것은 너무 어렵다는 점이다. 애초에 오나라는 바로 옆에 있는 촉한과도 군사 공조가 제대로 되지 않는 판국이었다. 비록 요동으로 10,000명을 보내고 공손연이 멸망할 때 군사를 보냈으며 239년에는 요동에서 위를 공격하는 등 멀리 있었다해도 도움이 될 여력은 충분히 있었으나 당시 고구려나 공손연 입장에서는 바로 코 앞에 있는 위나라가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는 것.

사실 초반에는 공손연과 어느 정도 이러한 이상적인 우호 관계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32년에 위나라가 오나라와 양다리 걸치는 공손연을 잡으려 했고,[8] 이에 위나라와 척을 진 공손연이 손권에게 과감히 칭신하면서, 그리고 위에서 본 것처럼 도로 손권에게 빅엿을 날리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에는 공손연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정주를 지원군으로 보내는 대인배의 모습도 보여주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공손연이 참패해버려 공손연과의 연계는 끝이 난다.

당시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신하들도 말린 일을 손권이 터무니 없는 고집을 부린 끝에 망신만 당한 셈이다. 고구려와 교린할 때는 "오나라가 위나라보다 강하다."는 터무니 없는 뻥까지 쳐가면서 엮으려 들었으니 될 리가 있나. 섣불리 멀리 있는 나라와 군사 협력을 시도하기보다 위나라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우호 교린을 하는 방향이었다면 차라리 결과가 나았을 것이다.

3.4. 남방 외교

3.4.1. 교주 방면

손권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던 사섭이 죽은 후 여대 사광을 제외한 사섭의 일족을 전멸시킨 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여기서 여대는 안 까이는 곳이 없지만 손권의 경우는 주를 나누면서 사휘를 천대하는 등 사휘가 반란하는데 빌미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수는 사휘가 스스로 화를 불러왔다고 평했으며 교주의 입장에서 쓰여진 대월사기전서에서조차 여대가 사휘를 속여 죽인 일을 욕하고 있지 사휘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토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하고 있다.[9]

사섭이 죽은 후 손권 치하에서 교주는 안정적이지 못했다. 손권은 이릉대전 전인 220년에 동시에 완전히 복속되지 못한 교주에 보즐을 보냈는데 보즐 시절에 이요, 전박이라는 도적이 날뛰다가 여대를 교체해서 보내서 이들이 귀부한다. 여대는 이때까지 사섭이 정리 못한 교주의 무장 집단들을 귀부시키거나, 아니면 두들겨패든가 해서 쓱쓱싹싹 청소하고 있는 마당이었고 이후로도 계속 청소하게 된다. 간단하게 말하면 손권은 한 손으로는 유비와 드잡이 하면서 다른 한 쪽 손으로는 교주에 있는 꼬꼬마들을 쥐어박고 있었단 소리다. 당연히 투입된 병력도 만만치 않았을 것인데 이릉대전 당시 보즐이 가지고 온 교주 병력이 만여명이었으니 그 정도의 병력이 동원된 것으로 보여준다. 여대는 왕금등을 잡아 수도로 압송하고 만 여명을 죽거나 살해했지만 교주의 반란을 완전히 잠재우지 못했고 오히려 사섭의 일족을 건드림으로서 사씨 일족의 반란이 일어나고야 만다.

비록 사씨 일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여대는 설종과 함께 구진의 해석 수천명을 잡아가며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했고 남쪽에 세력을 크게 떨쳐 부남( 캄보디아), 당명( 라오스 남부), 임읍( 베트남 남부)에서까지 손권에게 공물을 보낸 왕들이 늘어났지만 설종전에 쓰인 설종이 올린 상소에 따르면 여대가 황룡 3년(231) 돌아 왔고 많은 반란을 토벌해 교주는 비록 명목상으로는 평정되었지만, 여전히 고량군(高涼)에는 오래된 도적이 있고, 남해(南海), 창오(蒼梧), 울림(鬱林), 주관(珠官) 네 군의 경내도 아직 안정되지 못하여 여전히 도적들이 활동하고 있고, 전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도망친 자와 법을 어기고 달아난 자가 모이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반란세력을 죽이고 사로잡은 여대조차도 교주를 안정시키지 못한 것이다. 이러다 248년 독립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 찌에우 티 찐 부인 육윤이 진압한 이후로는 손권이 죽은 후에도 한동안 잠잠했다.

손권이 죽은 후 뒤를 이은 오의 황제들은 손권을 본받자라고 할만큼 막장 황제들이라 260년대에 탐관오리를 교주 자사로 임명하는 바람에 이번에는 독립이 아닌 폭정에 항거하여 반란이 수 차례 일어나고, 결국 교주는 263년에 위나라로 넘어가[10] 이후 오나라는 위나라의 영역을 이어받은 진나라와 교주에서 맞붙게 되어버린다.

이후 교주는 한동안 진나라의 교지 태수 양직이 다스리면서 오나라의 교주자사 유준을 역관광보내는 활약을 보여주다가, 271년에 비로소 유준의 후임으로 부임한 도황이 대도독 설후와 함께 교지를 함락하고 양직을 잡아 다시 오나라가 교주를 차지한다.

3.4.2. 섬 탐방기

손권이 인구 좀 얻으려다가 한 뻘짓. 뭔가 여러 가지 일이 얽혔기에 손권/남방 개척 문서 참고.

3.4.3. 기타

앞서 교지에서 사섭 일족을 모두 죽인 여대는 구진까지 정복해 사신을 보내 부남( 캄보디아), 당명( 라오스 남부), 임읍( 베트남 남부)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하여 조공을 받은 기록이 있으며 243년 12월에는 추가적으로 부남의 왕 범전이 사자를 보내 예인과 그곳의 특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추가로 있다.

또 황무 5년(226년) 남주이물지에는 페르시아 천축국 남해에서 교류한 사실이 남아있으며 진론이라는 로마 상인이 온 사실이 양서 제이전 천축국전에 나와 있고 오시외국전에도 배를 타고 로마를 갈 수 있음이 나올 정도로 여러 나라와 교역을 했다.

4. 문화, 경제

중국 역사상 매우 중요시되는 강남 개발의 시작을 알린 군주다.[11] 이 때문에 중국 경제사 한정으로 동오 조위 서진에 필적하는 수준으로 다루어진다.

사기에서는 너무 습해서 요절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우왕이 치수를 할 때 9주로 나눌 때 경제력이 황하 지역에 비해 심각하게 떨어진다고 평가 받은 건업 등 양주 지역, 강남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을 손권 대로부터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장굉도 개간을 할 것을 요구하고 제갈근도 손권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개척한 것을 언급하며 육손의 개간 요구에 손권이 직접 나서서 농사를 짓고 심심하면 행정 구역의 재조정이 보이고 건설 얘기가 계속 나오는 등 개간 관련 내용이 넘쳐나며 손권이 죽은 후에도 계속 개간의 얘기가 나오는 등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 후 육조시대를 거쳐 남송 때는 강북의 생산력을 앞서지만 그건 또 나중의 이야기.

경제적 업적의 자세한 내용은 오(삼국시대)의 경제 참고.

4.1. 불교 전파

후한 말 낙양에는 사마르칸트, 파르티아 등지에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승려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게 동탁 삼보의 난을 전후로 유기난, 축율염 등의 승려들은 강남에 와서 모여 살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삼국지/인물의 인물들을 참고.

당시, 착융이라는 도적에 의해 서주 → 광릉 → 말릉 → 예장을 거치며 온갖 막장짓거리를 저지르며 불교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고 손권의 형인 손책도 그에 의해 피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강승회를 만나 양자강 이남에 최초의 사찰인 건초사라는 사찰을 만들어주고 지겸의 경우는 손권의 보호 아래 유마힐경을 번역하는 등 당시, 불교에 있어서는 불모지였던 강남에 불교를 전파하는 데에도 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4.2. 도굴

중국 민간에서는 손권이 도굴을 했다는 전설이 많은데 실제로 조달의 점술 책을 얻기 위해 도굴했다는 내용이 있고 세어에서는 믿기 힘든 얘기지만 장사왕 오예의 무덤을 손권이 도굴했는데 시체가 하나도 썩지 않아서 오예의 후손 오강을 인부가 알아봤다는 내용이 있다.[12]

이거에 관해서 중국의 학자 웨난이 책을 써 손권의 도굴 행위는 장사왕 오예 뿐만이 아니라 남양왕 조타도 있는 등, 이것은 민간 전설이 아니라 실제라면서 그의 행위를 욕했는데 참고링크 손휴가 등극할 때 도굴한 것을 보고 손권도 황제가 됐을 때 부족한 자원을 얻기 위해 도굴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거기다가 세어에서 도굴했다는 말이 있는 오예의 무덤은 배송지가 수경에서 엄청 컸다고 기록했는데도 불구하고 없어졌다며 이것이 모두 손권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하며 조타의 무덤을 얻기 위해 오유와 여유를 보내 도굴을 했다고 주장하며 현재 중국에서 손권이 도굴을 했다는 말은 모두 이 책을 근거로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어찌됐든 그의 도굴 행위로 인해 촉빠들은 그에게 "역시 쥐새끼라 그런지 땅도 잘 파네요"라는 소리도 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런 손권의 묘에도 위기가 찾아오게 되니,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묘자리가 손권의 묘 주위에 정해진 것. 그의 묘자리가 정해지자 주위 묘들을 몽땅 다 파헤치게 되는데 이중에는 손권의 무덤도 있어 파헤쳐질 위기에 처해지나 파헤쳐지기 직전 주원장이 친히 나와 "그도 사내 대장부이니 내 무덤을 지키게 하라."라고 했다.[13] 이에 손권의 묘는 아주 잘 보존된 형태로 지금까지 남게 된다. 지금도 주원장 묘를 보러 가기 위해서는 손권의 묘를 지나가야한다.

4.3. 기타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따르면 개자리 또는 거여목으로도 불리는 목숙(苜蓿)을 먹기 시작한 것이 손권이라고 한다.

손권 유비가 술을 마시다가 개운한 안주가 생각나 주방에 요청했는데 마침 채소가 다 떨어졌고, 주방장은 밖으로 나가 사료로나 쓰이던 목숙을 뜯어다가 모가지가 10개쯤 되는 것인지 술안주로 만들어서 바쳤다. 손권은 맛있다면서 한 접시를 다 비웠고 그 때부터 민간에서 목숙을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유비와 함께 먹었다는 것을 볼 때 시기는 적벽대전 직후로 보인다.

5. 손책의 후계자로서

5.1. 긍정적 평가

불안정한 가업을 안정시킨 최고의 후계자이자 군주. 손권의 가장 큰 약점은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점이다. 사실 손권은 손책이 죽고 그 지위를 승계한 시점에서 고작 18세 소년에 불과한 소년군주였고, 적벽대전을 맞이했을 때도 약관 26세의 젊은이였다. 군주의 나이가 이렇게 어리면 치세일 때도 문제가 일어나기 쉬운데, 당시와 같은 난세에는 약점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가 없다.

막 후계자로 등극한 시점에서 손권의 가장 큰 약점은 명분 부족이었다. 자세히 뜯어보면 손권이 집권할 당시의 이 명분 부족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다. 일단 손권의 지위는 형인 손책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생전 손책의 지위는 공식적으로 토역장군(討逆將軍) · 회계태수(會稽太守) · 오후(吳侯)였는데, 세습이 가능한 지위인 오후 작위는 손책에게 아들인 손소(孫紹)가 있는 이상 손책이 이를 습작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조조에게 세력 승계를 인정받아 공식적으로 토로장군(討虜將軍)·영회계태수로 임명되었으나, 생전에 손책이 구축해두었던 강동의 통치권이라는 것을 공식적인 지위로 내세울 수단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생전의 손책은 친족들에게 자신이 정복한 강동 지방의 군현을 임의로 분할하여 손가의 집권 체계를 만들었다. 이때, 오경[14]을 단양태수로, 사촌형 손분을 예장(豫章)태수, 손분의 아우 손보(孫輔)를 여릉태수로 삼고, 주치[15](朱治)를 오군태수로 만들었다. 문제는 이들을 통솔하는 공적인 지위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저 손책에게 임의로 태수에 임명된 손가 일족, 가신들과의 사적인 연결에 의지하는 취약한 체계로서, 거의 동등한 권한을 가진 태수들을 단순히 손책이 손가의 수장이라는 사적인 권위만으로 묶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체계에서는 언제 누가 배반해서 세력이 하루 아침에 공중분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손권은 이 취약점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심지어 손가 내에서조차 손권의 권위는 완전히 확고한 것은 아니었다. 손권은 15살 양성현장으로 있을 당시 양성현의 관고에서 공금을 횡령해서 부하 주곡이 장부를 조작해 손권을 비호해줬고 그렇다고 해서 전공이 있는것도 아니어서 손책이 원정을 나간 사이 천명도 안되는 군사로 진영을 지키다가 적군에게 기습을 받았고 주태가 심각한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손권을 구해내기까지 했다. 이런 면을 보여줬는데 손책의 가신들이 그를 마뜩치 않게 보는 것도 솔직히 당연한 일이었다. 위에서는 주태가 천한 신분임에도 중용된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는데 솔직히 이 정도까지 해주었는데 무시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것이다.

손책이 직접 유언을 남겼기에 세력을 계승할 수 있던 손권이었지만, 그 위치는 불안했다. 손책이 구축한 체제는 손책 개인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는, 간신히 봉합되어 있는 틈이 많은 체제였고 손권은 실력으로 휘하의 태수들을 제압하면서 성장해야 했다. 대호족들이 손책의 정책에 반발을 가졌어도 오의 군권을 비롯한 많은 실권들은 손책의 심복인 주유 장소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지지가 없을경우 손권은 대권을 이어받기 전에 자신의 목숨을 걱정해야 했을 정도. 손권이 그 전에 많은 전공을 세워서 자신의 입지가 강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여강 공략전에서 원술의 잔여 세력인 유훈을 격파하고 황조군을 격파했지만 이는 대부분 손책과 주유가 모든 판을 짜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까놓고 이 시절 주유, 장소 둘 중 하나만 다른 마음을 품었다면 손권은 그냥 거기서 끝이었을 것이다. 일단 장소 자신도 후계자로 손권의 동생 손익을 추천했는데다가, 나이가 어리는 해도 손책의 장자 손소(孫紹)가 있었으니 이는 손가 내에서도 껄끄럽게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이래서 손권이 주유와 장소의 지지와 지원을 받았지만 그의 위세는 매우 약했다. 심지어 후계구도가 꼬였다던가 파벌이 나뉘어져 싸우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손책이 사적으로 임명한 여릉태수 겸 교주자사인 손권의 사촌형 손보(孫輔)는 공식적으로 평남장군으로 임명된 인물로, 손권과 공적인 지위가 같았다. 손보는 실제로 문제를 일으켰는데, 손권이 뒤를 이은 뒤 얼마 안 되어 조조와 내통하여 항복하려다가 손권이 직접 음모를 제압해야 했다.[16] 그 뒤에는 바로 이술이 손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는 등 손권은 뒤를 잇자마자 이런 사람들을 숙청해야 했다. 이술을 제거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여강군은 이술을 따르고 있던 군소군벌들이 할거하는 상태가 되어 손권의 지배에서 벗어나버렸고, 후일 적벽 당시에도 여전해서 이곳의 수많은 백성들이 뇌서의 지휘하에 뜬금없이 형주에 있던 유비한테 귀부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 문제는 손권이 직접 토벌하면서 세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반란은 차후에도 지속적으로 벌어져 강하를 손에 넣기 직전에도 심한 반란 때문에 퇴각했고, 항상 반란 문제 때문에 일부 병력을 본국에 주둔시켜야 했다. 이는 적벽대전이나 이후의 원정때도 반복된다. 손권은 적벽 당시 자기가 100,000명을 제어하여 들어바칠수 없다고 큰소리쳤지만 그나마 주유가 요구한 50,000명도 들어주지 못하고 30,000명 모았을 뿐더러 그중 10,000명은 중군으로 본인이 가지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

당연히 이는 천자를 끼고 조정의 권위를 장악한 조조에게는 도저히 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점에서 손가의 사적인 연결은 제외하고, 공식적으로 "손권의 지배에 정당성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대인들은 "별로 없다."고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조정에서 인정한 손권의 권위는 일개 잡호장군이며, 회계태수의 지위를 인정한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조조가 공격해오자 항복론이 급격히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손가 내부조차 흔들렸는데 속관들은 장소마저도 항복론으로 기울 정도로 동요가 극심했다. 유표 사후 구심점을 잃고 맥없이 항복한 유표의 형주 세력처럼 손가도 공중분해 될 위험이 컸다. 유표는 죽기 직전에 조정에 표문을 올려 유비에게 형주목 지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이는 당사자인 유비도 모르는 사실이었고 채모 등은 유표가 죽자마자 유종을 후사로 내세우고 곧바로 조조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유종과는 적대적인 유표의 적장자 유기가 강하태수 지위를 유지하며 생존 중이었고, 유비는 남하하여 남군 이남을 차지하려 시도했다. 손책 사후의 상황도 사실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형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손권은 유비와 동맹을 맺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좌장군(左將軍) 예주목(豫州牧)이라는 거물급 지위를 가지고 있는 유비는 헌제의 밀서를 명분으로 하여, 조조가 가진 협천자의 명분을 일전시켜 조조를 조정을 장악하고 황제를 농락하는 역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손권은 유비와 동맹하고 명분을 함께함으로서 이 적벽 대전에서 손오 세력의 구심점을 잡는데 성공한다.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후 유비가 상표하는 형식으로, 손권은 서주자사(徐州刺史) 행 거기장군(行車騎將軍)의 지위를 칭함으로서 손씨 정권은 이전처럼 동등한 지위의 태수들을 손가의 사적인 인간 관계로 다스리는 모호한 형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여기에 손권은 유비, 조조의 공격을 격파하고, 형남을 병탄하고 사섭을 복속시켜 영토를 크게 늘렸다. 이 과정에서 손권의 권위는 더욱 탄탄해졌고, 위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 조비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면서 오왕(吳王)에 봉해진 것은 이미 확고한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촉, 위의 공격을 격퇴한 이후 손권의 권위는 안정기에 들어갔다. 손권과의 관계가 틀어지자 조비는 손권을 오왕에서 폐위하였으나, 손권은 태연하게 오왕이라는 지위를 계속 유지하였고 국내에서도 이미 손권의 지도력은 확고하게 인정받아 반발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즉, 이 시점에서 손권의 오나라는 후한이나, 그를 선양한 위나라의 명분론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독자적인 존속 명분을 확보한 것이다. 게다가 조비가 무리하게 손권을 공격하다가 연전연패하면서 손권의 권위는 더욱 크게 올라갔다.

또 건업(建業)의 개발과 수도 이전, 황무(黃武) 연호의 개원과 유홍(劉洪)이 만든 건상력(乾象歷)의 도입으로 독자성을 더욱 강화한다. 연호를 제정하고 역법을 만든 것은 황제의 통치 행위이므로, 왕호를 칭하고 있기는 하나 그 권위는 황제와 다름 없는 외왕내제 수준이라는 것이다. 229년, 정식으로 황제가 되어 오나라를 건국함으로서 손권은 단순한 호족 군벌 집단을 뛰어넘어 하나의 독립된 왕조를 건국하는데 성공한다. 그래도 일단 형 손책과 그의 아들로 인해 생긴 명분 문제에는 뒤끝이 있었는지 형과 아들을 왕에만 추존하고 그치는데 진수가 이를 손파토로전 평에서 깐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손권은 같은 시대의 원상, 유종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어쩌면 그들보다 훨씬 힘든 불안정한 지위에서 시작하여 개인의 능력으로 이를 모두 극복하고 왕조국가 오나라를 건국하여 황제의 지위까지 올라온 것이다. 조조가 그를 원소와 유표의 아들들과 비교해서 고평가한것은 이런 핵심 요소를 꿰뚫은 평가였던것.

손권이 수성형 군주라고 저평가 받긴 하지만 손권은 엄연히 나라를 건국한 창업군주이자 건국된지 얼마 안된 나라를 수성하였으며 한 명의 군주가 50년 넘게 통치를 했다면 그 자체로 어느 방향으로든지 정치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평화로운 시대도 아니고 툭하면 서로 죽고 죽이고 배신하는 난세였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권모술수와 정치의 달인이라고 봐도 크게 지나친 것은 아닐 것이다.

5.2. 애매한 부분

다만 호족의 복속, 유비와의 동맹 성사 등을 무조건 손권의 공이라고 보기엔 반론의 여지가 있다.

당장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적벽 대전까지 손가 정권의 실질적인 실권자는 주유나 장소였다. 우선 손씨가 손책의 적자인 손소와 장소의 지지를 받은 손익 등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손권으로 후계자가 결정되어 빠르게 결속할 수 있었던 것은 손책이 장소에게 "손권이 제대로 못 하면 그대가 취하라."라고 말했듯이(장소전), 손책의 죽음을 앞두고 중신들 앞에서 손권을 직접적으로 지명하는 절차가 있었고 손책의 가까운 친족들 중 손권 외의 대체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손권의 승계나 호족의 복속은 위에서도 나와 있듯이, 손권의 능력보다는 전적으로 주유와 장소의 지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조조 진영 안에서는 진등이 강동 병합론자의 대표적인 사람이었는데, 조조 진영 내부에 강동 병합론의 여론이 존재하고, 손권의 지배가 아직 확고하지 못한 시점에서 이술, 손보가 조조에게 투항했을 때, 혹은 손권이 성헌을 살해했을때, 그도 아니면 규람과 대원이 유복에게 투항했을때 조조가 개입을 시도했다면 손권이 막아낼 수 있을지의 여부는 회의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조는 손권에게 토로 장군의 작위를 내리고 이술,손보 등 손씨 진영 내 반란 세력의 개입 요구도 무대응으로 일관했으며, 203년엔 서평에 주둔하며 유표와 전면전 직전까지 대치했고, 별도로 장료를 손권-유표 접경 지대인 강하에 보내 여러 현들을 공략하는 등 오히려 손권의 가장 큰 외부 위협 요인이 될 유표를 강력하게 압박한다, 즉 손권의 초창기에는 손권의 능력보다는 조조의 무관심이 손권의 성장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벽지에 가까웠던 강남 지역에서 중앙 정부가 그다지 힘을 쓰지 못했기에, 명분없는 침략 → 영토 확장의 연속이었던 손책의 행보가 가능했으며 손책을 중심으로 하는 사적인 결속체인 손씨 세력이 성립될 수 있었고, 이후 별 다른 명분의 부재에도 무리없이 황제국 체제로 삼국정립이 가능하게 했으나 한편으로 손권 초기 이술, 손보의 반기는 물론 손권의 심우, 성헌 주살 사건이나 적벽 대전 당시 장소 정도의 거물이 항복파에 선 것은 손씨 내부에서 중앙 조정 내지는 중앙 조정을 장악한 조조와의 대립이 무의미하며 조정에 복종해야 한다는 인식 또한 적벽 대전 이전까지 손가 중심의 패권, 혹은 지역주의 성향과 팽팽하게 맞섰음을 보여준다.

적벽 대전 자체도 손권 본인이 항전하자고 해도 씨알도 안 먹히던 상황에서 주유가 결정하자 다른 이들이 따른 사항이고 유비와의 동맹 역시 노숙의 역할이 지대했다. 손권은 유비라는 강력한 반조조 세력의 구심점이 없었다면 애당초 적벽 대전에서 조정을 겁박하는 역적 조조에 맞서 강동의 안녕을 지키는 프레임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5.2.1. 조조가 강남을 일찍 노렸다면 유표, 손권은 무너졌을 것이다

당시 조조진영과 하북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정도인데, 당초 조조는 아마 군사력을 가진 원담의 우세를 점쳤고, 원담의 정통성이 최악이었으니 이기더라도 곧바로 또다른 내분에 휩싸이는 등 혼란 상태가 꽤 오랬동안 지속될 것으로 본 것 같다. 관도전투라는 예상 밖의 반전으로 원상 측의 우세가 확실해지자 신속히 개입에 나선 모양새로 본다면, 그 이전까지 (순유전의 표현따라) 북쪽 전선을 아예 방치하고 남쪽에 전념하려 했으며, 내려가는 김에 손권까지 정리하려 했을 가능성은 꽤 개연성있게 이어진다고 보인다.

어차피 if이긴 하지만 조조의 예정대로 유표와 전면전이 시작되었다면. 일단 한수 이북[17]에서 유표의 영향력을 완전히 걷어내는 것이 일차 목표가 될 텐데, 유표를 한수 이남으로 쫓아낸 이후 선택지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꼭 하북을 정리하는 것만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할지는 의문이다. 이를테면 한수 경계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군선을 건조하는 한편, 진등의 진언에 따라 서주 방면을 통해 만만한 손권을 병합한 뒤 수군을 확충. 양양 / 강하의 양면으로 유표를 포위한다던가 하는 전략도 가능하다.

이때 손권 측에서는 그놈의 심우, 규람, 대원의 반란, 손보 사건 같은게 연이어 터지는 분위기였고, 손권 자신도 워낙 멘탈이 한심스러운 수준이었기에 자력구제는 어렵다고 봄. 조조의 동오 병합을 견제해야 할 강하의 황조는 하구의 참패 이후 죽을때까지 예전만한 역량을 회복하지 못하던 상태였기에 유표가 낼만한 견제패가 몇 개 없다. 강하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것은 황조가 박살난 규모를 봤을때 얼마나 유효할지 의심스럽고, 유비로 한수를 건너 북진하게 하는 것도 훗날의 합비를 생각하면 장사의 유반을 통한 견제도 있긴 한데 태사자의 유무를 배제하더라도, 예장군 자체의 터무니없이 넓고 실속없는 규모 때문에 보급선이 문제가 된다.

원담이 정통성이 워낙 시망이기에 원상,심배를 제끼고 권력을 잡더라도 내부 분열은 물론, 당장 외적으로도 최소한 (자립할 틈만 찾고 있던) 고간이라는 넘어야 할 벽과 맞닥뜨려야 했다.

물론 이런 전략에는 몇가지 매우 사소한 문제점들이 있는데 하북의 원담 / 원상간 내전에선 원담이 승리. 행여나 원상이 이기더라도 오랜 시간동안 어마어마한 고전과 출혈을 강요당한 끝에 간신히 이겨야 하고, 유표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한수 이북지역 방어선을 걷어낸 뒤, 합비 같은 우주방어선을 구축해야 하며, 손권은 유표와 연대할 틈이 없이 신속하게 무너져야 한다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원상의 막대한 재정 적자와 지휘 체계 공백 등을 감안하면 원담이 압도적인 우세에 있던 것이 사실이고, 손권의 경우도 그 입지가 취약하지만, 정말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유표와 연대할 가능성은 아무래도 낮은 데다, 동오 탄멸만 수년간 계획하셨다는 달인 진원룡 선생까지 있었으니 실제로 싱겁게 끝날 가능성이 높다. 말년의 진등이 중앙정계 진출에 유독 눈독을 들였던 것은, 아마 계속 기획안이 뺀찌맞는 상황을 중앙의 영향력을 높임으로서 타개해보자 하는 계산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한수 이북에서 유표의 축출일텐데, 여기는 조조 본인이 친정에 나서는 등 각오가 남달랐고, 그렇게 중원, 강남을 전부 병합한 뒤 하북에 고립된 원담(혹은 고간, 원희)를 축출하는 건 상당히 괜찮은 그림이다.

문제는 군사력상 확실한 우위에 있고, 통령체계도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으며, 수장 개인의 자질로 봐도 (사실상 경력이 전무했던 원상과 달리) 최소한 군사적 유능함만큼은 확실하게 검증되어 있던 원담이 회전 한판에 모든 우위를 상실하고 공중분해되는 병크를 터뜨리면서 조조의 계산이 모조리 뒤틀렸다는 게 아닐까 본다. 결과적으로는 기존 기획을 쓰레기로 만들고 신속한 개입에 나선 것이 신의 한 수가 됐지만서도 원담이 조금만 오래 끌기라도 했다면 빼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는 상태가 됐을듯하다.

손권이 집권하고 있던 양주가 변경에 가까웠다는 오랑캐 땅에 가까웠다는 것이야 사실이지만, 일단 조조 자신부터가 원소의 사망 직후 한판 크게 병사를 일으켰다가 데였던 전력(여양전투)이 있고, 기반세력이 전무했던 원상 측에서 따져봐도, 당장이야 힘들겠지만 결국 취약한 내부 입지를 공고히 하기에 외적(조조)의 침입만큼 훌륭한 떡밥이 없기 때문이다.

하북 전선은 아예 미봉 상태로 방치하면서 원상이 내부 도전으로 몰락하기를 바랐지만, 최대 도전자였던 원담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쳐발리면서 상황이 고작 몇 달만에 종결될 판이 되자 본격 개입에 나선 모양새로 보여. 물론 관도전투는 이변에 가까웠고, 관도전 이전까지는 원담의 압도적 우세에 가까웠으니 혼란기가 최소한 수 년은 가리라 예상했던 것 같다.

"하북을 방치할수록 이득이라 생각했다."면 그 시선은 당연히 유표 쪽으로 옮겨지는데, 실제로 조조는 형/예 경계인 서평현에 주둔했으니 유표와 대판 붙는 것이 필연적인 상황이었다. 문제는 조조에게 수군 전력이 부족하다는 것. 남양 등 한수 이북지역의 점령까지는 어떻게든 가능할텐데, 정작 내려가긴 어려우니 우주방어 외에는 답이 안 나올 듯하다. 물론 매우 번거롭고 돈이 만만찮게 깨지는 일이겠지만 남양 → 여남 → 허도 직격의 위험성을 원천봉쇄한다는 측면도 있으니만큼, 여기까지는 필수적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조조 입장에서의 적대도는 원상, 유표, 손권이 맞는데,

→ 원상이 원담에게 패하고 정통성 시망인 원담이 집권, 알아서 토붕와해 중.
→ 유표를 한수 이북에서 쫓아냈지만, 수군이 없어서 더 내려가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
→ 마침 서주쪽 실권자인 진등은 지금이 손권 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줄기차게 주장 중.

정도로 생각하면 조조가 손권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자연스럽다. 물론 한수 이북을 정리한 시점에서 원상 / 원담 / 고간 중 하나가 내전을 종결시킬락 말락한다 하면 이쪽을 견제하는 선택지도 가능하다. 시작도 하기 전에 원담이 예상외로 맥없이 털리면서 전략 방향 자체가 재설정되었으니 거의 무의미한 논의이긴 한데, 이 무렵 조조가 손권에게 인질을 바치라고 질책하고 손권이 이를 거부한 것이나, 심우, 손보, 규람, 대원 등의 사건, 손권이 조조의 동정에 극히 민감했던 사실 등은 이런 분위기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훗날 조조가 "그때 진등 말 들을걸..." 하고 징징댄 걸 생각했을 때, 중앙정부의 권위를 이용한 압박 전략 → 손가 측 내부 분열 → 적절한 개입으로 손권 멸망 테크트리가 불가능할 것 같진 않다. 손권을 정리하는 사이 내전을 종식시킨 하북에서의 뒷치기 + 유표의 반격으로 200년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전혀 없으니, 실상은 배부른 투정에 가깝다고 봐야겠지만 여양에서 학을 뗀 조조가 남으로 내려가 유표와 싸우기 직전, 압도적으로 불리해 보였던 원상이 회전 한번에 원담을 공중 분해시키는 이변이 벌어졌고, 이게 오히려 조조가 전략을 전면 수정해서 다시 하북에 전면전을 벌이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꽤 재밌는 상황이었다.

5.2.2. 조조가 강남을 일찍 노렸더라도 둘이 무너졌을지 어떨지는 회의적이다

확실히 원담 / 원상 내전이 거의 자기들끼리 하북을 통째로 말아 먹을 정도였으니 이 시점에서 조조가 북부 대신 남쪽을 먼저 손볼까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유표와의 전쟁 너머 손권과의 전쟁까지 내다 보기에는 장애물이 너무 많긴하다.

첫째로, 장강 이남을 제압하기 위해선 수군의 확충이 필수적인데 이 시기에는 현무지 프로젝트로 대표되는 수군의 준비가 이뤄지지 않았고, 여건도 안 되었다.

둘째로, 형주가 훗날에 모래알처럼 무너진 건 사실이지만, 이건 유표가 죽었기에 가능한 거고 만약 유표가 살아있는 시점에서 조조 / 형주 전쟁이 벌어졌다면 유표가 순순히 항복할 것 같진 않다. 더군다나 형주의 대북 전선 사령관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조조의 숙적 유비인데, 채씨 일족 등이 뭔가 과감한 수단을 쓰지 않는 한 생존을 위해서라도 유비를 유표가 적극적으로 지원할 건 뻔하니, 웬만해선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수 년 후의 번 -> 양양 -> 장판 -> 강릉 -> 오림의 신나는 파죽지세는 불가능 했을 것이고. 당시 유비 수하에 누가 있었 는지를 고려하면 더 힘든 게임이였다.

셋째로, 한의 최고 권위를 차지하고도 한에 반기를 든 원씨 일족 + 그들이 가지고 있는 중국의 절반이라는, 거대한 당면 과제를 제쳐두고 먼 남방 오랑캐들의 땅인 오 + 장군직 하나 받아먹고 데꿀한 꼬꼬마 손권에 그렇게까지 집착할 당위성이랄까, 그런게 좀 모자른 느낌이다. 종합해 보자면 설령 조조 vs 유표 전쟁이 벌어지고 여기서 조조가 우세를 차지한다 해도, 완과 남양 일대 내지는 한수 이북을 정리하는 선에서 그냥 끝났을 가능성도 높다.

"원담 / 원상을 내전 상태로 방치하고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면?" 이란 주제는 오히려 유비로서는 흥미로운 if 스토리가 될 것 같은데, 조조 입장에서는 하여간 썩 이익 보는 전개는 아니고 조조는 군사력에서 앞서는 원담이 우세할 것이나 정통성이 최악인 만큼 오히려 승리 이후 더욱 사분오열이 가중되었을 것 정도로 예상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물론 당시 유표가 건재한 상황이었으니 (유표 사후에 보이듯) 형주가 토붕와해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듯 하다

유표를 한수 이남으로 몰아내기만 한 뒤 서주 방면에서 공격하는 시나리오는 회의적인게, 두 개 전선을 미봉 상태로 방치하고 제 3 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취하는 건 하북 평정 이후의 전력으로나 해볼 수 있는 군사적 모험이다. 더군다나 이 시기 회남 / 서주 일대가 본인이 벌인 서주대학살과 원술 + 여포 + 유비 세 깡패와의 싸움으로 초토화 되어 복구도 시원찮은 시점에서 장강 도하를 위한 수군 육성과 그 이후까지 이어지는 보급선을 유지할 전선 기지가 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더군다나 광릉 방면에서의 도하 자체도, 위나라 초기 조비가 두 차례나 실패한 뒤 오나라 멸망 때까지 재시도가 없었던 것을 보면 기본적으로 무리가 있는 전략이다. 물론 당시 그 방면 실무자인 진등이 가능하다고 장담했다면 뭐 할 말은 없는데 이런 여건 이상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보는게 한의 대장군까지 올랐으면서 천자가 있는 수도를 공격하려 한 원소(의 잔당), 고질적으로 후방에서 조조를 괴롭혀 온데다 조공도 끊고 천자놀이를 하며 노골적인 불충을 드러낸 유표, 조조에게 깝치려다 비명횡사한 형 이후 자기쪽에서 데꿀멍한 풋내기 손권이었다.

이 셋 중에서 당장 교전 중인 1, 2를 제쳐두고, 사실상 암묵적 불가침조약 상태인 3을 굳이 먼저 적대시 한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전략적 당위성이 떨어진다. 더군다나 3이 2의 견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18]

또한 이런 인물을 제하고 땅만 보더라도. 사실상 당시 인식하고 있던 중국의 절반인 북방 4주 or 대륙의 중심이자 남방 제압의 요지인 형주에 비해, 양주 방면은 실질적으로도 인식적으로도 너무 멀고 매력이 없는 오랑캐 땅이었다. 당장 지도 상에서 연주 + 예주 + 서주의 당시 조조 지배 영역에 형주나 북방 4주가 아닌, 양주가 덧붙여진 국경을 그려보면 위화감 쩐다. 상식적인 전략론으로 보자면, 이미 허도를 위협할 능력을 잃은 하북보다는 한수 이북 방면을 먼저 정리하는게 사리에 맞다고 보인다. 지도에서 보면 이 시기 조조 / 유표 교전이 벌어진 박망, 무양, 도양 등은 완전히 허도 코 앞인데,이런 위협을 무시하고 북방 공략에만 전념할 수 있는 건 조조 / 곽가(+상대가 유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만 조조 입장에서는 어차피 유표라는 목줄이 걸려 제 쪽에서 먼저 물지 못 하는 유비라는 맹견을 굳이 자기 쪽에서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지만 어쨌든 "하북을 잠시 방치하고, 장강 이북을 공고히 다진다."라는 if 시나리오라면, 여기서 회남 일대의 재정비라는 떡밥도 나올 듯하다. 실제로는 북으로 남으로 정신없이 싸우느라 손을 못 대고 오히려 이주 정책 등으로 철저하게 방치한 회남 방면이었지만, 하북과 한수 방어선으로 남북 사정을 정리하면 그 여력을 이쪽 방면에 투입하는게 맞으니. 당장 데꿀멍한 손권이 이제와서 집적 거릴 수도 없을테니 꽤 여유롭게 재개발이 가능하겠지만 이럴 경우 이후 손가 측이 합비 방면에 공세를 유지하긴 커녕 동관 일대까지 확장된 조조측 영역에 압박을 받았을 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손권의 말릉 천도나 형주 뒷치기 등도 제약이 생기니 역사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상의 직접적인 공격 가능 여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관건은 이런 조조의 압박 전략에 대해 손가 내부가 (지적한) 심우, 손보, 규람, 대원 등의 내분이 극심해져 자멸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인데, 허공 사건 이후 한동안 손가의 게슈타포 식 내부 단속이 강화된 데다가 지역 원로인 장소 / 주유 등이 이미 절대적인 지지를 표명했고 노숙 같은 외부 유입 세력까지 친위로 거느린 손권이 쉽게 무너졌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더군다나 상태가 심각하다 싶을 경우, 손권 쪽에서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내 정통성 인정해 주세요."하고 데꿀거리며 조공이고 인질이고 마구 바친다면[19] 조조가 신이 아닌 이상 그 손권을 위협하는 듣보 A, B, C가 지금 이렇게 자신에게 지극 정성을 다하는 손권 이상의 믿을 만한 파트너인지 꿰뚫어 보는 건 불가능하니, 결국 유야무야 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나마 인척을 맺은 손보가 상대라면 좀 더 마음이 기울었을수도 있다.

손권 개인의 멸망은 가능할 법도 한데, 문제는 결국 군사 진공을 통한 철저한 복속과 장기적인 통치 체계의 개편이 이뤄지지 않는 이상 토후 세력들 대가리 = 간판만 교체되는 셈이고, 여전히 세력권에 들어왔다고 보기는 힘드니까 실질적으로 얻는 것은 적었을듯. 게다가 남양에서 뺨 맞는 유표가 이쪽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또 무슨 짓을 벌였을지 모르고. 다만 위에서 언급했던 것 처럼 회남 일대를 재정비하는 것 만으로도 역사상의 상당한 변수가 될 수가 있었다.

5.3. 결론

손권이 어떻게 평가가 되건 나라를 건국한 창업 군주로서의 역량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도 오나라를 건국하고 안정적으로 운영했다. 이것만으로도 손권은 충분히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당대 제일의 세력인 위나라를 상대로 끝까지 대등한 세력으로 싸워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손권의 능력은 굉장히 뛰어나다고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아버지와 형이 만들어준 세력을 기반으로 했다지만 손가는 천하의 군웅들 중 한 명 정도였으며, 삼국지를 중반까지만 읽어봐도 자기 땅을 지키지 못하고 원소나 조조의 제물로 사라진 군웅들이 수두룩하다. 하물며 아무리 지리적으로 유리했다지만, 갓 성인이 된 어린 나이에 기반을 이어받아 동오를 삼분 천하의 한 축으로 올려놓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오나라를 건국한 손권의 능력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손권이 물려받은 기반을 말하자면, 아직 개발이 진척되지 않은 양주의 땅, 손책 대부터 호족들과 쌓아온 악연, 손책 사후의 불안한 민심(장소전), 떠나려는 인재, 그리고 각지에서 터지는 반란들이야말로 손권이 물려받은 기반이었다.

친척이라는 놈은 조조에게 동오를 낼름 가져다가 바칠 생각을 하고 앉아있었고, 이술은 아예 여강에서 반란을 일으켜 조조와 연계를 꾀하였다. 서쪽의 구원(舊怨) 유표 황조는 건재하고 북쪽에서는 조조가 강동을 병탄할 생각을 하고 앉아있었으며(장굉전), 내부에서는 한때 손권의 목숨까지 위협하기도 했던 산월족이 준동하는 등, 어린 나이에 권력을 물려받은 손권이 마냥 울고만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말 그대로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세력 자체가 공중분해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쯤 되면 물려준 기반이고 뭐고 차라리 새로 시작하는 편이 나을 정도인 상황에서 고작 18살의 나이에 군주가 된 손권은 그 악재들을 다 이겨내고 강동에 뿌리를 잡아 결국 황제 자리까지 오른 것이다. 한 마디로 손권은 조조와 유비에게 꿀릴 것이 없는, 굉장히 비범한 인물이었다.

6. 후계자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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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인재 활용

7.1. 초창기

진수는 <오주전> 평에 손권을 재능 있는 자를 임용하고 지혜로운 자를 존중했다고 평했고 <육손전>에는 육손을 알아본 손권의 안목을 칭찬한다. 정황한장주진동감릉서반정전 진수의 평에서는 반장의 쓰레기 짓거리에도 허물을 잊고 공을 기억한 것을 칭찬했다.

이릉대전 때 군신들이 제갈근을 의심할 때 제갈근을 믿는 것은 당연하다는 손권에 대해서 호삼성은 주를 달아 "손권의 군신 관계는 정성으로 서로 사귐으로써 아첨하는 말이 그 사이에 횡행하지 아니하였으니 강동을 보유할 수 있었던 이유다."라며 진수와 같은 의견을 밝힌다.

오주전 주석의 부자의 평에서도 몸을 굽혀 치욕을 참으면서 손권이 인재를 잘 활용해 이겼다는 말이 된다.

손성 주태, 진무, 능통, 여몽의 경우를 언급하며 손권이 부하를 위함은 인정한다. 하지만 모두까기로 유명한 손성답게 뒤에게다가는 "하지만 이런 세세한 일을 하는 것은 패왕이 할 일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장수들을 위한 것은 맞지만 한 나라의 군주가 하기에는 너무 세세한 일들이라는 것.

위나라의 중신 손자 또한 팽기의 반란 때 강릉성에서의 주연의 활약을 언급하며 손권의 유대감을 칭찬한다.

추가적으로 조비가 손권의 사신으로 온 조자에게 손권이 어떠한 인물이냐고 묻자, 조자는 총명하고 어질며, 지혜롭고, 포부가 크며, 지략이 있는 인물이라고 답했다. 이에 조비가 손권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조자는 평범하며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었던 노숙과 여몽을 손권이 발탁한 것을 예로 들었으며, 마찬가지로 육개도 자신이 올린 상소에서 손권이 인재를 사용할 때 신분에 관계없이 사용했다며 칭찬을 하고 있다. 육개전 뒷면에 있는 것으로 일단 진수는 진짜 있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좋은 내용이라 육개전 뒷면에 나열한다고 적어두었다. 신빙성이 조금 떨어지지만 본전에 있는 기록이고 진수도 좋은 기록이라고 했기에 여기에 적어둔다.

농부 출신인 감택, 목동 출신인 오찬, 서민 출신의 장병, 병졸 출신의 정사 그 외 낮은 집안 출신인 은례 등을 등용하는 등 직위에 신경쓰지 않고 인재를 뽑았으며 또 쌩 양아치에 불과한 반장을 능력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중용하며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주환 감녕[20]을 전투에 활용하는 등[21], 어떤 면에서는 조조 유비보다도 인재에 집착했다. 예컨데 저 두 사람은 자기 휘하 인재가 자신을 떠난다고 하면 순순히 보내주기도 하는 면모를 보인다. 반면 손권의 경우 우악스러울 정도로 인재에 집착했다. 심지어 유찬 같은 경우는 자신의 다리를 잘랐다는 기이한 소식만 듣고 등용한다.

이렇게 인재를 모으는 것만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끼는 것도 다른 군주 못지 않았고 오히려 더 극성일 때도 있었다. 여몽이 병에 걸렸을 당시에는 조금이라도 몸이 나빠지면 자신이 침울해지고, 조금이라도 몸이 나아지면 국가적으로 상을 내리고, 자기가 자주 들리는 게 여몽에게 부담스러울까봐 몰래 집에 구멍을 내서 여몽의 병세를 계속 지켜보기도 했다.

심지어 말년에 막장인 상황에서 주연이 아플 때도 마찬가지의 행동을 한다! 이때는 주연이 좀 먼 곳에 머물러서였는지 직접 들리지는 못했지만, 항상 조문을 내릴 당시에 병에 진척에 대해 묻고, 주연은 상소를 올리며 이에 대답했다고 한다. 주연전에서 손권이 주연을 여몽과 능통 다음으로 아꼈다는 말이 있는 것을 봐서, 능통 역시 기록은 없지만 손권이 비슷하게 대했을 가능성이 높다. 주유 노숙이 죽었을 때도 몹시 슬퍼했으며, 이는 손권의 일생에서 가장 일관되게 나타났던 성격이기도 하다. 정사에서 동급으로 평가된 월왕 구천과는 다르게, 이 양반은 이궁지쟁에는 적어도 인재를 토사구팽시키지는 않았다.

특히 그를 성공시킨 것은 도독들의 인사 관리로 주유 노숙 여몽 육손으로 이어지는 오나라 대도독 라인업은 그 결과. 산월 토벌과 관련해 육손 제갈각, 반준[22] 등을 적절히 임용해 국력을 신장시키는데 성공한다. 그 외에 내정에도 장소 반준, 고옹 등을 공경하여 이후의 오의 번영에 많은 역할을 한다.

반대로《촉서》에서 기록하는 초창기의 모습 중 <제갈량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단 원자에는 제갈량이 손권을 섬기라는 장소의 말에 자기를 어질게 대할 수 있으나 모든 능력을 발휘하지 못 하게 할 것이라며 거부하나 배송지는 여기서 또 주석을 달아 뜬금없이 원환에게 "왜 제갈량이 밑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군주라면 배반할 것처럼 기록하냐?"며(…) 기록에 신빙성을 의심한다. 거기다가 내용 자체도 손권이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게 못 할 것이라고 했지, 손권이 자신을 업신여길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의를 다해 대할 것이라는 투의 칭찬에 가깝다.

물론 이 당시 손권이라고 인재 문제에 실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손책 고대가 무례하다고 해서 죽이긴 했지만, 인망이 높던 전 오군 태수 성헌은 손을 대지 않았는데 손권은 성헌을 어떠한 죄도 없음에도 처형했고, 이는 결국 동생 손익의 죽음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자면, 이렇게 인재에 극성인 초반부 손권의 면모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아낀 인재 상당수가 가문이 한미하거나 외부에서 이주한 가문 출신, 손권의 친위 세력임을 알 수 있다. 양주 호족 다음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한 서주 호족은 서주 대학살을 피해서 양주로 이주한 자들이 대부분인지라 양주 호족보다 발언권이 약했다.

앞서 몇 번 언급했지만 손권은 호족 세력의 맹주로 군주의 위치에 오른 자라서 양주 토착 호족들의 힘이 매우 강했다. 호족들이 사병을 부리는 군사적으로는 유럽식 봉건제나 다름없던 처지가 그것을 반영한다. 따라서 손권은 어떻게든 친위 세력을 강하게 육성할 필요가 있었다.

위에서 칭찬받는 손권 생전의 도독들의 인사 관리에서 유일하게 손권에게 숙청당한 육손이 토착 대호족인 오의 사성 육씨 가문인 것이 과연 우연일까? 심지어 육손은 손권에게 말년까지 절대 충성했는데 말이다.

7.2. 말년

손권의 평을 제대로 깎아먹은 시기이다. 사실 말년에 젊은 시절만 못한 판단력을 보이는 군주는 많다. 애초에 그게 군주제의 특성이기도 하고. 손견과 같은 1세대 군벌 출신이기는 하지만 가장 오래 살아남아서 나라를 만든 유비 조조도 말년으로 가면 맛이 좀 간다. 특히 조조는 원래 예술가 기질이 강했던 사람이 말년이 되자 한층 센티멘탈해져서 이해가 안 가는 행보를 거듭했다.

하후연 장합 한중 공방전에서 악전고투하던 218년 9월, 친정을 결의해 놓고도 무려 반년을 장안에서 허송세월했다. 위왕 즉위 직후 경기, 위황의 난이 일어나는 등 내부가 시끄러워 떠나기가 그랬다면 지원군이라도 보내거나, 이도저도 안 되겠다 싶으면 한중을 포기하기라도 했어야 했지만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하고 내리 반 년을 허비했다. 장합이 탕거에서 장비에게 패배해 이미 병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던 한중 방어군은 결국 유비의 계책으로 하후연을 잃었고 전세는 기울어진다. 그리고 이어진 유비의 한중왕 즉위로 제대로 엿을 먹었다.

이듬해 관우가 형주에서 북진하고 조인이 궁지에 몰리자 조인을 구하겠답시고 우금, 방덕과 최정예 7군을 동원한다. 하지만 우금이 관우에게 패배하고 방덕은 전사, 설상가상으로 각지에서 관우에 호응한 반란이 일어나자 결국에는 패닉에 빠져 과거 원소의 본거지였던 업 천도를 운운하다가 장제, 사마의에게 저지되었다. 대신 서황, 서상, 여건, 은서, 주개를 전부 투입시켜 서황이 관우를 저지하기는 했지만 대치가 이어지자 합비에서 장료를 빼내고 회남에 주둔한 각주의 자사들의 병력, 그리고 자신이 26군을 이끄는 하후돈과 함께 남정하려고 했다.

익주 정벌로 두 차례에 걸쳐 대병이 빠져나간데 이어 청니 대치와 익양 대치, 3군 할양으로 전력이 반의 반 토막난 형주군의 실상을 고려하면 어이없는 대응이었다. 사실 그만큼 관우의 기세가 강성했기에 그런 점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과잉 대응한 면도 없지 않아 있다. 심지어 형주 공방전 항목을 들어가면 알겠지만 합비에서 장료를 빼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손권이 조조에게 놀아나줬으니 망정이지 까딱하면 손권에게 합비를 빼앗길 뻔했다.

유비 관우의 죽음과 손권의 어그로(...) 때문에 이릉대전을 일으키고 대차게 말아먹었지만, 사실 조조와 비교한다면 상식적인 판단을 내렸다. 전성기도 한중왕이 된 말년의 나이였고, 이릉대전은 유비 입장에서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며 육손이 격파하기 전까지는 오히려 유비가 오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그들을 이을 뒷사람들이 이런 실책을 수습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된다. 손권보다 한 세대 위로 손견과 같은 1세대 군벌인 유비와 조조의 경우에는 이를 후대 사람들이 수습 가능한 레벨로 안배하여 남겨놓았다. 조조의 경우에는 휘하 호족들과 군벌들이 오~래 살았고 조씨와 하후씨 무장들도 많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조비 치세부터 조예 치세까지는 어떻게 되었다. 유비의 경우에는 제갈량을 온갖 부문에서 착취하여 만능 관리로 만든 뒤 탁고대신으로 임명했고, 이에 제갈량은 나라를 약 5년여만에 회복시키는 기적을 보여준다.

하지만 손권은 그 수습할 자기 나라 사람들을 자기가 죽이고 패를 갈라놓은 내분이라는 점이 다르다. 사실 손권이 젊었을 때라고 강남 호족들을 마음속 깊이 아꼈던 건 아니었다. 오의 국가 체제를 보면 알겠지만 양주 호족들이 싫은 것도 이해가 갈 정도다. 다만 이궁지쟁 이전까지는 다 갈아버리고 자기 맘대로 하고 싶어도 꾹 참으며 정국을 운영하는 국량이 있었지만, 나이가 들며 이 참을성이 점차 사라졌다. 사실 손권은 말년 이전부터 슬슬 불안한 낌새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저 촉한의 정치를 찬미한 것과 사람들에게 너무 칭송만 받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어, 뛰어난 명사이자 관리였던 장온에게 해를 입힐 방법을 궁리하다 장온이 추천한 글염과 선조와 엮어서 좌천시켰다. 이 사건은 글염과 서표가 탐관오리들과 부정한 자들을 싫어해 직책인 인사 관리를 이용해 관직을 조정했는데, 이들의 조치가 지나치게 급진적이었기에 부정으로 좌천된 사람들이 불만을 품고 손권에게 둘을 참소해 자결 명령을 받은 사건이었다.

인사 정책도 모든 사람이 추천하던 장소를 승상에 임명하지 않을 정도로 사감에 휘둘리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장소는 서주 호족 출신으로 서주 대학살을 피해 양주로 이주한 사람이었지만 이래저래 젊은 시절부터 관계가 영 꼬였던지라 장소가 80이 넘도록 기적적으로 장수한 것과 별개로 편히는 못죽었다.

남방의 해남도, 대만의 원주민들을 병력으로 삼겠다고 침공한 적이 있다. 대만은 대만 원주민인 내성인/본성인 부족들을 생각하면 되고, 당시 해남도는 중국인이 아니라 베트남계 민족들이 살던 곳이었다. 하지만 계속 실패하기만 하자 위온과 제갈직 같이 실무자들에게 그 책임을 뒤집어씌워 죽인 것 역시 흑역사 가운데 하나이다. 황제 즉위 이후에는 여일을 총애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년 여일 사건과 이궁지쟁이라는 대실책은 거의 확인사살 급이었다. <오주전> 진수의 평을 봐도 드러나듯이 의심이 많아 주저없이 죽였고 말년에 더 심해졌으며, 참언을 믿어 아들, 손자 등을 버려 자손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았다면서 오가 망한 것이 손권에게 유래된 것이라고 깠다. 장소전 또한 장소를 대한 것만 봐도 손권이 손책보다 못하다며 디스한다. 여기에 뒤이어 장휴, 고승, 고담이 남쪽 땅으로 유배가서 애석하다는 말까지 있다. 이어서 우육장낙육오주전에서는 육모를 제외한 모든 인물의 평이 다 손권을 까는 평이다!

앞서 손권의 인재 등용을 칭찬하던 호삼성도 결국 후반부에서는 얄짤없다.
아랫 사람은 윗사람에게, 그 명령을 따르지 않고, 그 뜻을 따른다. 손권은 스스로 제 환공보다 뛰어나다고 이르며, 그의 신하를 관자를 근거로 책망했으나, 설사 오에 관자가 있었더라도, 또한 감히 손권에게 생각했던 바를 다 쏟지 못했을 것임은, 육손을 보면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손권의 인재 활용을 욕하는 것이 이런 말년의 막장 행위 때문이다. 모으는 것은 일생이었지만 날려먹는 것은 순식간이었으니.

8. 성격

8.1. 애주가

손권은 술을 좋아하고 자주 마셨으며 술버릇이 심해서 술에 취하면 개가 되는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삼국지연의에는 안나오지만 삼국지 전체에서 최고의 술고래가 손권이다. [23]

게다가 술버릇은 가장 안 좋은 술버릇 중 하나인 다른 사람에게 술 권하기였다.[24] 심지어 무창에서 술을 마실 때는 사람들이 술에 취하자 술을 더 먹이려고 물을 뿌려 깨우기까지 한다. 그러고 하는 말이
오늘 술을 즐겨 마시는데, 오직 술에 취하여 이 조대 위에 쓰러지거든 그때 술 마시기를 그칠 뿐이니라!
이 미친 짓을 보고 장소는 정색하고 밖으로 나간다. 손권이 다시 불러 즐기려는 것에 불과한데 왜 이러냐고 하니 장소는
옛날에 주 임금은 조구에 술 담은 연못을 만들어 밤새도록 술을 마셨는데, 당시에 역시 즐기는 것이라고 여겼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니 손권이 그제서야 부끄러워하며 술자리를 끝내지만 나중에 제갈각을 시켜 장소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는 데 성공한다.

웃긴 건 같은 중신이지만 고옹은 아예 술을 안 마시고 손권도 그에게는 술을 권한 기록이 없다는 것. 오히려 사람들은 술을 먹고 실수하면 고옹이 지켜볼까 두려워 방자하게 구는 사람이 없었고 이에 손권은 심심하다며
고공이 자리에 앉았거든, 사람들이 즐거워하지 못하게 한다.

라고 한 것이 전부로 술 먹이려고 했다는 기록은 없다. 장소는 어정쩡하게 먹어서 손권이 괴롭히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25]

한 번은 술에 떡이 되어서는 우번에게 술을 마시라고 했는데, 먹기 싫던 우번이 바닥에 술취한 척 엎어져 있다가 손권이 떠날 때 쯤 일어나니까 빡친 손권이 우번을 칼로 죽이려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때 손권을 끌어안고 말린 사람은 유기밖에 없었다고 한다.[26] 오죽하면 '내가 취했을 때는 누구를 죽이라고 해도 죽이면 안된다'라고 자기 입으로 명령을 내렸을까?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을 보면 자기 술버릇의 심각함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되지만, 나중에 손호 시절 육개의 상소를 보면 주량을 제한했다는 등의 말을 볼 때 어느 정도 개선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최소한 손호 저놈은 술 안 마신다고 진짜로 사람 죽인 녀석이니 그놈보다는 낫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손권의 술주정으로 볼 만한 일 중 그나마 훈훈한 일은 두 가지 있는데 주환이 술잔을 올리면서 손권의 수염을 만지고 싶다고 하자 만지게 해준 것과 서성 주연 주태를 따르지 않자 술을 마시면서 주태의 상처를 하나 하나 찍은 연의에도 채택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각각 주환 항목과 주태 항목을 보도록 하자.

사실 술 많이 마셨다고 까는 건 아니고 그 뒤에 개가 되어서 까이는 거다. 고생 많이 하고 연회 좋아했던 건 조조와 유비도 마찬가지지만 술 마신다고 개가 됐다는 기록은 없는 걸 볼 때[27] 손권 술버릇이 정말 거지 같긴 했나보다. 또한 주연 묘에서 황제의 연회를 묘사한 그림을 보면, 단순히 술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 악사들이 동원되고 많은 어리광대가 저글링 묘기를 보여주고 있는 등 상당히 화려하게 노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꽤 화려하게 노는 걸 즐긴 듯하다. 어쩐지 이 양반 생각난다.

주연의 무덤에서 발굴된 오나라의 연회를 보면 굉장히 화려해서 평소 검소했다는 손권의 일화와는 대비되는데, 이걸 보면 술자리만큼은 작정하고 크게 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죽하면 삼국지 2차 창작물인 삼국지톡에선 '회식의 황제 손권 子 원샷'이라고 할 정도.

8.2. 잔인함

손성은 아예 오나라가 빨리 망한 것이 손권의 잔인함 때문이라고 평했고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도 손권은 잔인했다고 평했다.

참고로 위에서 진무의 첩을 순장한 것이 손권이 부하를 위함이었다고 한 것도 손성이다. 즉, 진무를 위한 것은 맞지만 너무 잔인하다는 것. 그외에는 심우가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죽인 것과 오군에서 영향력이 큰 성헌을 죽인 등의 행위가 있었으나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말년의 숙청, 육손은 손권에게 죽지는 않았으나 그의 일패인 오찬을 죽여 육손을 죽음으로 이끄는 등 손권의 말년은 암군이라 칭해질 정도로 잔혹했다.

8.3. 만용

아버지의 기운을 물려받았는지 아니면 본받고 싶었는지 그는 일국의 군주임에도 전쟁터에서 자주 선두에 나서거나 직접 참여하여 싸웠다. 합비에서 장굉이 말린 것도, 손권이 장료에게 발린 뒤의 하제의 말도, 호랑이와 맞짱을 뜨는 장소의 말도 모두 이것을 증명한다. 장굉의 말마따나 편장(偏將)이 할 일을 주장(主將)이 한 것이다. 그나마 일신의 무예가 뛰어났다고는 하지만, 일개 장수가 아닌 왕이 선두에 나서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는것은 위험을 재촉하는 일인지라 분명 만용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선성에서 산월 부족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에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싸우러 나갔다가 역으로 산월 부족들의 수많은 병력에 포위당하여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주태가 그를 구하기 위해 싸우다가 창에 12군데나 찔려서 사경을 해맸으니 정신을 차려야 할텐데 손권은 이후에도 무모한 짓을 계속했다.

유수구 전투에서 손권은 앞으로 나서서 싸우자 조조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들었지만 배가 전몰할 뻔했다는 기록이 있어 어찌보면 너무나도 위험한 행위였다. 합비에서 퇴각할 때도 그냥 퇴각했으면 엌 ㅋㅋㅋ 장료노 합비와 튼튼데스네하고 손권의 군사적 재능을 비웃으며 끝내면 되는 문제였는데 이 군주라는 작자가 퇴각할 때 후위대에 있었다. 지 딴에는 군사들 사기 살리려고 그랬을지 몰라도 덕분에 진무는 전사하고 능통의 식객은 전멸하며 손권 본인도 죽을 뻔한 희대의 개그 장면이 탄생한 것. 이때 장료는 손권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는 그저 싸움 실력이 좋은 장수인줄로만 알았는데, 만일 장료가 손권을 알아보았다면 그대로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것이다.[28]

사실 전근대에서는 국가에서 군주를 잃는 것이 무장 하나를 잃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피해고, 죽지 않더라도 군주가 위기에 처하거나 부상을 당하면 바로 군대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고 군주를 구출하기 위해 더 큰 희생이 생긴다. 한마디로 누가 봐도 득과 실의 차이가 명백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 물론 전면에서 싸운 것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고 손권 본인의 무력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일국의 군주가 아니라 원술 산하에 있었거나 이제 막 창립된 군벌이라 손권과는 입장이 달랐다. 게다가 아버지는 실제로 전투 중에 전사했다. 그리고 손권이 아버지와 만큼 뛰어난 야전 사령관이었던 것도 아니다.

물론 이소스 전투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국왕이 직접 기병대의 선두에 서서 싸우며 적을 박살낸 적도 있고, 사자심왕 리처드 1세처럼 국왕이 적진에 뛰어들어 난전을 벌이면서 적을 몰아낸 적도 있으며, 동양에서는 항우처럼 군주급 되는 인물이 일선에서 나서서 적을 박살낸 적도 여러번 있는 건 사실이니 무작정 군주가 선두에 섰다는 것만으로 까이기만 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29] 어쨌든 최고 지도자가 선두에 서면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라간다는 것은 여러차례 역사에서 증명된 바 있고, 특히 숫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는 역전의 계기가 된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손권은 항상 양주 호족 우두머리로서의 모습을 보이며 군대를 선두에서 지휘하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이런 경향이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다만 예시로 거론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력과 전술적 능력만 따지면 거의 올타임 레전드 수준이다. 항우는 전략적 안목이 문제였지 개인적인 용력과 전술적 능력만으로 해결이 가능한 상황에서는 패배한 적이 없었고,[30] 리처드 1세의 경우에는 개인의 무예도 출중했지만 당시 전장에서 플레이트 아머를 걸치고[31] 서유럽식으로 중무장한 기사는 사망률이 현저히 낮은 부류였다는 이점 역시 작용했다. 물론 야파 전투에서 갑옷 없이 슬리퍼(?!) 차림으로 기행을 선보여 적들로부터 ' 악마'라는 명예로운(?) 이명을 손에 넣은 걸 생각한다면 레전드인 건 변함없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라니코스 전투 이소스 전투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달려갔지만, 이때는 성공하면 명백한 이득을 가져올 수 있는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앞장선 것일 뿐, 이미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만용을 부려 전장에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손권은 반드시 군주가 나서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고 개인적인 용력 역시 저런 인간흉기는커녕 자기 아버지나 형과 비교해도 처지는데다 실제로 죽기 직전까지 갔으니 만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센고쿠 시대 다이묘였던 호조 우지야스도 거친 전장에서 평생을 보내느라 몸에 흉터가 상당히 많았는데, 이를 보고 부하들이 그의 무용을 칭찬하면서도 대장 된 자가 이런 상처를 갖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개인적 무용과 지휘력이 뛰어난 야전 사령관도 스스로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만든 만용과 실책을 경계하면서 이런 말을 했는데 뛰어나지도 않은 자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호랑이 잡은 것도 우스개소리로 무력 상승 요인이지 현실적으로 보면 장소 말대로 군주가 사냥하면서 죽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다. 그리고 합비는 손가락 깨물면서 반성이라도 했지 손권은 만류하는 장소의 말을 듣고도 사냥을 계속할 뿐만이 아니라 아예 가운데 덮개를 제거해 오히려 수레로 달려드는 짐승을 쳐내는 것을 즐기기까지 한다(…). 아버지나 형도 이런식으로 위험한 곳에 스스로를 두어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모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8.4. 검소함

전근대 동양에서 군주의 중요 덕목은 '검소함'이었다. 손권은 검소함을 따지면 삼국시대를 초월해 역대 중국의 전제 군주들 가운데서도 순위권의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검소함은 군주의 기본적인 덕목 아니냐, 고작 그런 덕목에 충실했다고 손권을 대단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냐, 는 반론도 있지만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거 하나를 제대로 못하거나 안해서 망한 군주들이 수두룩하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고대사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분립이 철저하고 제도적 견제 장치가 마련된 현대사회에서도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을 악용해 비리를 저지르고 착복을 일삼다 몰락한 관료들과 정치가들이 즐비한데, 하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고대의 전제군주가 권력남용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동시기 군주인 조위의 조예가 말년부터 모종의 이유로 맛이 가기 시작하더니 사치로 깽판을 부려서 나라 사정이 엉망이 된 것이나, 삼국시대를 마무리하고 눈 뜨고 보기 민망한 막장 사치 레이스를 부리다가 처절하게 망한 서진, 삼국 시대 이후 옛 오나라 지역에 세워진 동진을 비롯한 육조 시대의 황제들 상당수가 방탕하게 사치와 낭비를 부리다가 제 명을 못다한 것을 생각해 보자. 후대 조선 세종도 다른 건 몰라도 손권의 검소함을 두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언급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예전 위(魏)나라 임금 조예(曹睿)가 오(吳)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말()로써 주기(朱璣)·비취(翡翠)·대모(玳瑁) 등을 바꾸니, 오나라 임금 손권(孫權)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내가 쓰지 아니하는 물건인데다가 말을 얻을 수 있으니 내가 어찌 아끼리요.' 하고 주어 버렸다. 예전에도 이러하였는데 지금 우리 나라가 왜국(倭國)에 대한 경우야 더욱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세종이 예조판서 신상에게, 세종실록 13년 5월 27일.

조예 집권 이전에는 조조가 사망한 뒤 조비 삼년상 중인데 조공품의 종류와 수량은 예법에 정해져 있음에도 지나친 사치품을 요구하는 사건도 있었다. 거부할 명분이 충분했지만 이런 것들은 손권 자신에게는 기왓장과 돌이나 다름없다며 그대로 들어주었고, 조비가 말을 주며 그 대가로 보석을 달라고 할 때에도 고민도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32]

따라서 손권은 검소함 하나만큼은 역대급이었다. 육개의 상소에서 볼 수 있듯이 궁궐의 노복+궁녀가 100명이 넘지 않았고[33] 백성들 중에 아내가 없는 자에게 자신의 첩을 주기도[34][35] 했으며 홑옷 입은 사람에게는 비단을 주고 길거리에 있는 유골을 매장하기도 했다. 수신기의 말처럼 호화스러운 것이 있던 손휴나 그 이후와는 달리 의복은 소박했고 궁궐에는 조각이나 장식이 없을 정도다. 화핵 또한 손권이 양잠과 농업을 통해 비축한 것을 칭찬하였다. 사실 이 정도면 한 나라의 황제로서는 약간 궁상맞다 느낄 법도 하고, 군주로서 어느 정도는 그 위엄을 드러낼 필요도 분명 있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군주가 이렇게 모범을 보여 검소하게 지내면 신하들도 함부로 사치를 부리기 힘들다. 전근대까지 신하가 임금 이상의 사치를 부리는 것은 신하로서의 예의도 아닐 뿐더러 그 자체로 충분한 숙청사유가 되기 때문이다.

무창에서 건업으로 환도하며 건업궁을 다시 개축하면서도 나무를 베는 것은 국가적인 사업이라며 무창궁의 목재들을 다시 사용하도록 하는 등, 다른 군주들에 비하면 확실히 검소했다. 이것이 심해 인색하다는 수준까지 가 진수는 손책전에서 남긴 평으로 인색하다고 깔 정도였다. 단, 다른데서는 손권을 깐 순위로는 1등을 하는 손책을 인색하게 대했다는 진수의 평에서는 맞지 않다고 주를 달았다. 하지만 손권의 인색함은 자신의 안위만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손권이 비록 잔인하고 만용이 심한 등 결점이 있었지만 그가 백성들에게 쓴 마음 씀씀이를 보면 과연 나라 하나를 세운 황제라고 할만했다. 단지 손책의 사당을 세우려고 도굴하여 재사용하는 등 좀 지독한 부분이 그럴 뿐이다.

8.5. 학문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손권은 문학과 연관이 없는 무장의 이미지가 강한 아버지 손견, 형 손책[36]과 달리 호학의 군주로서의 면모를 스스로 자부하였다.

괄목상대 에피소드에도 나오지만 여몽과 장흠에게 손권은 특별히 박사까지 되라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과거의 것을 많이 알고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는 너희보다 바쁘지만 어렸을 때 주역 제외하고 다 읽어봤고 군주가 된 후에도 삼사와 병서를 정독해서 아는게 많다"고 자부했다. 휘하 무장들의 성품과 천성을 읽고 그에 맞는 교양과 학식을 권하는 면모는 확살히 남다른 면이 있었다고 할 만 하다.
나는 어릴 때 시경, 서경, 예기, 춘추좌씨전, 국어 등을 이것저것 다 읽어, 읽지 못한 것은 주역 뿐이다. 형님의 유업을 이어받은 후에도, 삼사(三史)와 제자백가의 병서(諸家兵書)를 정독해, 스스로는 많이 안다고 자부하고 있다.

경 두 사람은 의지와 성질이 지혜가 밝아 깨달음이 빠르기(朗悟) 때문에, 학문을 하는데 적합한 성격이라 배우기만 하면 꼭 이를 수 있을 터인데도 어째서 하려 하지 않는가? 우선 먼저 손자, 육도, 춘추좌씨전, 국어 및 삼사를 읽도록 하라.

공자께서도 "하루 종일 안 먹고, 잠도 안자고 생각해도 다 무익한데, 오로지 배우는 것은 달랐다(子曰 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以思 無益 不如學也)."고 하셨는데,[37] 한나라의 광무제도 군대를 이끌고 다니면서도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手不釋卷). 조맹덕(조조)도 스스로 "늙어서도 배움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대들은 왜 자기 개발에 힘쓰지 않는다는 말인가?"

8.6. 불행과 불운의 장수(長壽): 너무 오래 살았다

손권은 71세(69세)까지 살았는데, 이는 현대 중국의 평균 수명과 비슷하다. 전근대 시절만 하더라도 40~ 50세가 평균 수명이었으며, 오나라의 요절징크스를 보면 알겠지만 밀림 지역으로 기생충, 전염병, 아열대~열대기후가 창궐하는 동네 특성상 명사들의 평균 수명이 기껏해야 30대~40대(...)밖에 안 된 걸 보면 그 시절 기준으로 90 넘어 산 것이나 다름없다. 저렇게 요절 징크스로 악명이 높은 동오에서 70까지 끈질기게 버틴 걸 보면, 타고난 유전자가 장수 유전자였던 돌연변이였던 모양.

문제는 가족들과 인재들이 줄줄히 요절했다는 점. 손권이 유비 조조같은 1세대 군벌과 달리 2세대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같은 세대인 제갈량이 54세에 죽은 것과 달리 훨씬 더 오래 살았다. 물론 제갈량은 지나친 공무로 과로사(...)한 거라서 그걸 고려해야 하지만. 딱히 요절한 인물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웬만한 인재는 죄다 손권보다 먼저 죽어버렸다.[38] 어떻게 보면 오나라의 요절징크스의 최대 피해자. 오에 국한될 것 없이 일반적으로 지명도 있는 삼국지 대부분의 네임드는 손권이 살아있을 때 죽었다.[39]

특히 그 지독했던 술버릇조차도 이해가 될 정도로 가족사가 처참하다. 초등학생 나이인 11살 때 아버지 손견이 전사하고, 고등학생 나이인 19살 때 형 손책이 자객에게 입은 상처 때문에 죽어서 졸지에 나라를 떠안게 된다. 2년 뒤에 어머니가 사망하고, 또 2년 뒤에 동생 손익이 사망한다. 시기는 불명이지만 동생 손광도 20살 즈음에 사망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부친, 형제, 심지어 자식들까지 전부 자연사를 못하고 50세 이전에 죽었는데 진짜로 혼자만 자연사를 한 셈이다.

친척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손유 215년에 39세의 나이로 죽고, 손교 219년에 죽었다. 손권이 편지에서 손교를 동생이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손권은 182년생이니 손교는 그보다 늦다) 아무리 길어봐야 35~36세이거나 그 전에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손분 210년에 병사하고, 손분의 동생인 손보도 20대에 조조와 내통하려다 들통나서 유폐되었다가 얼마 안 가 죽었다.

결국 손권이 군주가 되었을 때는 그를 도와줄 형제나 친척이 없었고, 후견인 역할을 자청하며 도와주었던 주유마저 36세로, 손권의 나이 28세에 죽었다. 이러니 오나라에서는 손권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마디로 자기 혼자만 운빨인지, 저주인지 모른 채 오래 사는데, 지금껏 자기를 도와주었던 가족, 선배, 친구, 측근들은 자연스럽게 1명씩이 아니라 특정한 시기에 몰아서 막 죽어나가는 상황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우울증성 알콜 중독이었을 수도 있다. 알콜 중독에 풍토병이 창궐하는 강남 지역에 살았음에도 70대까지 살았던 괴물이였다...

더 절망스러운 건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조를 물리치고 나니 주유, 노숙, 여몽 등 도독들을 비롯해서 태사자, 감녕, 능통, 장흠, 주태, 진무, 동습, 정보, 황개, 한당, 서성, 반장 등의 맹장들이 다 먼저 갔다.[40]

황제가 되고 나서도 불행은 그치지 않아 이젠 마누라와 자식들까지 죽어간다. 먼저 첫 아내였던 보연사가 238년에 죽음을 시작으로 장자 손등은 241년에 33세로 죽었고[41], 차남 손려는 232년에 20세에 죽었으며, 4남 손패는 당시 태자이자 3남인 손화와의 불화 때문에 손권이 직접 명령해서 20대 중반에 자결해버렸고, 덤으로 손화도 폐태자시켰다. 후처인 반부인 역시 그녀의 학대에 원한을 품은 후궁, 궁녀들에게 살해된다. 이때 육손을 죽인 건 덤이었는데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사위인 전종도 사망하게 된다.

자식들의 요절 징크스도 있어서 2대 황제 손량은 260년에 18세의 나이로 죽고, 폐태자 손화 제갈각이 옹립할까 두려워한 손준에 의해 자결 명령을 받아 253년인 30세에 죽고, 3대 황제인 육남 손휴도 264년인 30세에 병사했다. 그나마 요절을 면한 5남 손분(孫奮)도 270년에 뜬소문 때문에 손호의 손에 비명횡사했으며 50세를 넘기지 못했다.

공석이 된 승상직에 보즐, 대도독 직에 절친인 주연을 임명했는데, 보즐은 승상직에 임명된 그 다음 해에, 주연은 보즐이 죽은 그 다음 해부터 앓아 눕더니만 결국 249년에 죽었다. 그 이전에는 설종, 감택, 엄준[42] 등도 줄줄이 죽어갔으며, 자신이 그렇게 신임하던 제갈근은 이 셋보다 더 먼저 죽었다. 평생 복잡다난한 관계였던 장소도 그 당시로서는 기적적으로 오래 살았지만 이때쯤 죽는다. 그나마 손권보다 오래 산 거물급은 정봉, 여대, 유찬, 육개, 시의 정도다.

이 꼴을 보고서도 손권은 3년을 더 살다 겨우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는 자기가 맛탱이 가서 많이 죽인 건 제쳐두고, 그야말로 오래 살아서 못 볼 꼴 다 보고 욕 볼 일 다 당한 셈. 말년의 손권은 어쩌면 저 부담감 때문에 미쳐갔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장수를 원망했을지도. 이렇게 보면 정말 운 없는 남자였다.

9. 현대의 평가

유비, 조조와 마찬가지로 손권은 업적과 실책,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군주다. 손권孫權: 탁월한 정치감각과 외교술로 수성을 일구다

이러나 저러나 높게 쳐주는 사람들이 많다. 송나라 때 손권을 제갈량보다 높게 본 하거비 뿐만 아니라 현재 중국쪽 학자들을 보면 유비나 조조보다 손권이 더 훌륭하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전반적으로 기성 삼국지 연구계에서는 손권을 띄워주는 경우가 꽤 많다.

대표적인 손권을 좋게 평가했던 사람은 자치통감을 17번 읽은 것으로 유명한 마오쩌둥이었다.
을 제외하고 이 아니라면 누가 과연 조조에 맞설 수 있었을 것인가?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는 손권이 유비나 조조와는 달리 그 동안 관심을 덜 받아서, 그리고 유비나 조조만 찬양하는 분위기에 신선감을 불어넣기 위해서 조장되는 경향이 좀 있다. 특히 일반인들이 인물 평가를 할 때 정사 삼국지 자료는 거의 인용하지 않고 오직 삼국지연의만 인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 전반적으로 손권은 연의에서는 관심을 덜 받아서 실책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나오지 않은 편이라 이미지 면에서는 이득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국지 팬덤에서는 그에 대한 반발로 손권에 대한 이런저런 연구와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기성 삼국지 논단의 손권 고평가조차 거품이 아니냐는 의견이 생겨나고, 반발이 너무 심해 극단적인 손권 깎아내리기로 퍼지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이 때문에 위빠는 조조를 아예 주인공으로 못박아두고 촉빠는 유비와 제갈량 위주로 찬양을 하지만 오빠는 오나라 시절이 아니라 되려 삼국지 초창기인 손견과 손책을 찬양한다.[43] 오죽하면 위빠는 유비를 까고, 촉빠는 조조를 까고, 오빠는 손권을 깐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

다만 인터넷 팬덤에서도 손권에 대한 비난은 어느 정도는 과한 면이 있다. 왜냐면 손권은 말년을 제외하고는 크게 비난받을 만한 점이 없을 정도로 나라를 잘 운영했던 훌륭한 군주다. 특히 2세대 중에서는 누가 봐도 가장 뛰어난 군주. 조조-유비가 거의 자기가 바닥에서부터 기반을 닦은 반면, (유비에 비하면 조조는 재산과 인척은 꽤 있었지만) 손권은 손견, 손책이 준 기반이 불안한 상태로나마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애초에 손권 대의 영토도 크기만 놓고보면 손책이 물려준 영토에서 큰 변화가 없는 수준이고, 적벽에서 활약한 인재풀도 거의 전부 손견, 손책 대에 신하로 들어와 있었다.[44]

조조, 유비와 비교하면 당연히 2세대에 훨씬 가깝고 나이대도 손권이 이들의 아들 뻘이다.[45] 애초에 유비, 조조의 자식들이 아버지로부터 이미 세운 나라와 당대 제일의 인재 풀을 물려받은 반면 손권은 형에게 물려받은 불안한 기반을 바탕으로 스스로 황제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니만큼 1대 1 비교 자체가 무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삼국의 실질적 형성 때의 군주가 조조, 유비, 손권이라는 점도 언급하지만, 손권이 황제를 자칭했을 때를 기준으로 삼으면 촉은 유선이고, 위는 조비도 아니고 조예의 재위기다.

다만, 일단 손권이 손책으로부터 받은 불안한 기반을 정리하고 창업 군주의 역할도 어느 정도 수행했기 때문에 확실히 2세대이긴 2세대인데 1세대의 면모도 어느 정도 있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단순히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2세대로만 규정하면 강동 손가의 패업을 정리한 손권의 역량을 오히려 한정하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국적인 시야가 떨어진다고 하지만 이는 호삼성, 하거비의 평대로 할거, 칭제 건원으로 손권의 목표를 잡아버리면 완전히 분쇄되어 버리는 문제다. 그러나 할거 부분도 반론의 여지는 많은게, 이미 이릉대전 때부터 조비는 유비와 손권을 저울질하며 남조 양 세력을 밀고 중국을 통일할 마음을 철저하게 가지고 있었다. 비록 왕조 교체와 형제 숙청이라는 혼란기랑 맞물려 오 역시 당장 생존에는 성공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위, 서진의 중국 통일의지를 간파하지 못하고 1강 2약의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멸망의 시발점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손권의 거국적 시야를 결코 좋게 평가하기 어렵다. 제갈량이 다소 무리해서라도 북벌을 계속 감행하며 위와의 국력차를 좁히려고 한 것과 비교해보면, 손권의 할거는 거국적인 시야보다는 보신주의적 행동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여담으로 관우에게 강동의 쥐새끼라 불렸다는 점과, 합비 공방전에서 장료에게 쫓겨다닌 것이 맞물려 오늘날에는 제리라는 굴욕적인 별명으로 불린다.

[1] 얼핏 생각하면 장강만 잘 지키고 있으면 건업 방어는 문제 없는거 아니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장강으로 적이 도하하기 위한 맞은편 회수 일대 교두보를 가지고 있는게 훨씬 위험 부담과 비용이 낮다. 다만 유수오로 어느 정도 대체가 가능하긴 했고, 광릉 일대는 무인지대였으며, 여강 쪽의 장강 변은 손권이 장악했기 때문에 위군의 도하가 마냥 쉬운 것은 아니었다. [2] 물론 일개 장수로서는 뛰어났지만 전략적인 안목이 필요한 사령관으로서 능력은 검증받은 적이 없다. [3] 손권에게는 조조와 같은 권위가 없었으므로 항복을 청하는 호족들은 훨씬 많았을 것이다. [4] 이후 유비에게 대여 [5] 이후 위오는 220년 때 잠깐을 제외하고는 222년까지 우호 관계 [6] 유비야 한때 조조와 함께 헌제를 섬긴 적도 있었으니 조조의 장수들도 교류한 적도 있어서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겠지만 손권은 기본적으로 적으로만 만난 데다가 건업에만 짱박혀 있던 탓에 사신으로 갔던 자나 만날 수 있었지 위의 장수들이 손권의 얼굴을 알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손권은 중앙에서는 완전 듣보잡이었다. [7] 사실 원래 손권이 의도했던 쪽은 이런 구도였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이릉대전에서 양국 모두 와장창이 되고 나서야 그렇게 되었다는 게 문제지. [8] 이 과정에서 전예가 바닷가에서 대기타다가 공손연에게서 말을 사서 돌아가던 애꿎은 오나라 사신단을 족쳤다. 해당 문서 참조. [9] 대월사기전서의 오사련의 평은 사휘 문서 참고. [10] 263년 오나라의 교지태수 손서가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백성들이 우환이 되었다. 마침 오주가 감찰관 등구를 교지로 보냈는데, 등구가 멋대로 30마리의 공작새를 수집해 건업으로 보내자 백성들이 원역(遠役)이 있을까 두려워해 반란을 일으킬 것을 꾀했다. 5월에 군리 여흥 등이 손서와 등구를 죽이고 사자를 위나라로 보내 태수와 군사의 파견을 청하자, 구진과 일남이 모두 이에 호응했다. ─ 『자치통감』 [11] 과장을 좀 보태 중화의 시조가 한 고조라면 남중국의 시조는 손권이라고 볼 수 있다. 강남 등 남중국에 터를 잡은 동진, 남송 등의 남조 국가들은 모두 손오가 개발해 놓은 터전을 기반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손권의 군사적 평가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행정적 평가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대단히 높이 평가받는다. [12] 자세한 내용은 오강 문서 참고. [13] 참고로 주원장의 고향은 난징으로 이곳이 삼국시대 건업이다. [14] 손견의 부인 무열황후 오씨의 남동생. [15] 손견의 부하 [16] 이때 손권이 보여준 단호하고 빠른 대처는 세력의 존속이라는 관점에서는 매우 영민한 행동이었다. 원상이 혈육의 정 때문에 원담을 봐주다가 결국 패망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는걸 생각해보자. [17] 형주, 예주 경계 [18] 형주의 유표를 양 방면에서 견제한다는 시나리오를 제기했는데, 사실 이 역할은 이미 손권에게 아웃소싱 된 상황이니 굳이 조조가 할 필요는 없었다. [19] 훗날 삼국정립 때도 이런 짓을 하는 손권이니... [20] 주환은 성격이 매우 거만해서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는걸 치욕스럽게 여길 정도였고, 감녕은 성격이 깡패같았다고 한다. [21] 물론 이들의 성격적 결함에 비해 지위가 역대급이다 보니 이런 인재의 활용을 까는 역사학자도 많다. [22] 형주 공방전 당시 항복한 그 반준 맞다. [23] 장비의 술버릇은 어디까지나 연의의 창작이다. [24]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냥 진상에 불과한 버릇이겠지만 이 사람은 군주다. 권하는게 아니라 사실상 명령이다. 게다가 심할 정도로 강권하는데다가 술 취하며 개가 되니 사실상 죽기 싫으면 마셔야되는 수준이었다. 연의의 장비가 서주를 빼앗긴 것도 조표에게 술을 강권한 것이 화근이 됐으니 예나 지금이나 높은 사람의 술 강권이 심각하게 여겨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25] 그 외에도, 장소와 고옹 간의 입지도 손권의 태도가 차별화되는 이유일 수도 있다. 장소는 서주의 호족 출신인 반면, 고옹은 오의 사성 출신이기 때문. [26] 정확한 상황과 정사의 전문은 유기 참고. [27] 조조가 적벽대전 전날 밤 술에 떡이 되어 유복을 죽인 이야기는 연의의 창작이다. [28] 우스갯소리로 장료가 안면인식장애라서 손권을 못 알아봤다는 식의 이야기도 있지만, 위나라 장수인 장료가 오나라 군주인 손권의 얼굴을 제대로 봤을 기회는 거의 없었을 테고, 상식적으로 군주가 가라는 도망은 안 가고 직접 후위를 맡을 리가 없다고 여겼을 터이니 손권을 보내준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안면인식장애는 그냥 농담일 뿐이다. [29] 참고로 여기에 있는 자들 중 리처드 1세를 제외하면 모두 왕으로서는 꽝으로 여겨진다. 사자심왕은 적어도 국정을 적임자에게 맡기는 소양은 있었기 때문에 십자군 전쟁과 프랑스 탈환전에서 세금을 많이도 징수했지만 나라가 망하지는 않았다. [30] 항우의 마지막과 관련된 고사성어인 사면초가조차 항우의 무서움으로 보는 이도 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고립무원(孤立無援) 상태에서도 직접 승부를 무서워 했던 거라고. [31] 다만 리처드 1세 시절에는 플레이트 아머가 아닌 사슬 갑옷이었다. 물론 당시로서는 중무장이었다. [32] 그냥 준 것은 아니고, 조비는 근본적으로 예를 모르니 이를 논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비판은 했다. 자기 아버지 삼년상 중에 상주라는 양반이 예법에도 맞지 않는 사치품을 달라고 하니 예의가 없다고 할 만하다. [33] 비교당하는 손호는 멸망할 당시 궁녀만 해도 5천명이었다. 그리고 오나라가 멸망하고 이 궁녀들은 모조리 끌려가서 사마염의 궁녀수는 1만을 찍었다. 이런 극단적인 사례는 아니더라도 황제도 아니고 왕도 아니고 고작 형주라는 지방의 실세에 불과했던 채모가 첩 수백 명을 들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그리고 당대 난세의 대호족들이 보여준 인간 군상을 감안할 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채모 같은 케이스가 분명 더 있었을 것이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손권은 정말 검소한 고대 중국의 전제 군주가 맞다. [34] 전근대 동양사회에서 결혼을 못한 사람의 짝을 지어주는 행위는 국가가 해야 할 복지의무 중 하나였고, 조선 또한 노처녀와 노총각을 결혼시키는 일에 대단히 신경을 많이 썼다. 동시에 인구증가를 통한 국력 향상을 같이 노릴수도 있었다. [35] 첩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보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진짜 손권의 첩이라기 보다는 궁에서 일했던 궁녀일 확률이 높다. 실제로 청나라 일본의 사례를 제외하면, 궁녀들은 법적으로 군주의 첩이었다. [36] 두 사람 다 고명한 학자들이나 문학과 관련있는 인물들을 시기하거나 죽이거나 하는 면모를 보였다. [37]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 일찍이 종일토록 밥을 먹지 않으며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서 생각하니, 유익함이 없었다.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였다." 이는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말로, 간단히 "뭐니뭐니 해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으뜸이다."라는 의미다. [38] 삼국지 전반부의 네임드 들 중 240년 이후에도 살아남은 인물들은 사마의, 손권, 육손, 제갈근, 만총, 고옹, 주치 정도인데, 이들 중 가장 늦게 죽는 것은 손권이다. [39] 3살때 삼국지의 서막인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으며 삼국지 최후의 네임드 캐릭터이자 최후의 승자로 간주되는 사마의도 그보다 1년 먼저 죽었다. [40] 여기서 특히나 주유의 죽음이 상당히 아쉬운데, 주유는 실제 정사에서는 연의에서 묘사된 것처럼 제갈량에 찌질하게 구는 열폭남이 아니고 식견이 넓고 용병술이 뛰어난 장수였다. 게다가 그 손권 역시 주유의 말은 잘 따랐고 손책의 유언에 따라 형처럼 모실 만큼 주유를 높이 평가했다. 그런 주유가 있었다면 손권이 이렇게 막나가는 것을 충분히 막아주었을 것이다. 사실상 손씨 패업의 1등 공신이 주유인것은 손권 본인도 인정한 사실이다. [41] 자신의 후계자이자 주변 사람 모두에게 사랑받는 자식이었는데 죽어버렸으니 손권의 절망도 극에 달했을 것이다. 손등이 멀쩡하게 살아있었다면 이궁지쟁도 없었기에 손권이 곱게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42] 허나 엄준의 경우, 손권이 죽은 이후에도 살아남아 손휴-손호 교체기 시절까지 보았다는 추측도 있다. [43] 이런 시각은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고 도리어 고전적 회귀에 가깝다. [44] 그러나 손권에 대해 옹호하는 측도 이궁지쟁 이야기가 나오면 거의 다 손권을 디스한다. [45] 조조는 손견하고 나이가 거의 비슷하고 조조의 장남인 조앙은 (정확한 나이는 미상이지만) 손권보다 확실히 연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