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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01:42

서주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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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주 대학살(徐州 大虐殺)은 조조의 서주 침공 당시 조조가 행했던 학살이다.

한국, 일본, 중국의 《 삼국지》 팬덤에서는 주로 서주 대학살이라고 부르나[1] 역사학자들이 공식적으로 쓰는 용어는 아니다.

2. 특징

조조는 도겸에게 아버지 뿐만 아니라 친동생과 기타 일족들을 모두 잃었다고 한다. 조씨 일가를 핵심 군부로 기용했던 그에게 있어 일족의 몰살은 커다란 인적 손실이었고, 개인적으로도 분노하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1차 침공 당시 조조는 도겸의 관할지인 서주에 쳐들어갔지만 이기지 못했고, 서주의 백성들을 학살한 후 돌아갔다. 이 당시 기록에 따르면 시체로 사수 강이 메워졌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백성의 시체만이 아닌 군대를 포함한 서술이다. 이때의 피해자들 중에는 서주 토박이 외에 전란을 피하여 서쪽의 관중에서 이주해 온 피난민들도 포함될 개연성이 있다.

지휘관인 조조가 용인하였는지, 주도하였는지, 혹은 통제 불가능한 병력이 학살을 저질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정사 삼국지》에서 조조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한 진수마저 서주 대학살은 "살육"이라는 단어로 묘사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고, 해당 글자는 가치평가와 무관하게 사실 서술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후대의 저술가인 강발상(康發祥)이 이르길, "승조(진수의 자字)의 〈위지〉에선 늘 회호(回護)함이 많았는데, 여기선 학살함이 많았다고 말하며, 직필(直筆)했다". 고 적었다.

2차 침공 때 조조군은 다시 대규모 학살을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의 기록을 보면 낭야(瑯邪)와 동해(東海)의 여러 현을 공략하여 평정시켰으며(도겸전) 동해군의 담현 동쪽에서 조표와 유비의 요격을 격파한 이후 같은 동해군의 양분을 함락하면서 지나가는 곳에 잔륙한 곳이 많다(무제기)고 하여 살육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단지 잔륙한 곳이 많았다는 기록만 있기 때문에 이 당시에 얼마만큼의 피해가 있었는지는 전혀 상고가 불가능하며 잔륙한 것이 단순히 도겸 일당 밑에 있는 군사시설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다수의 민간인 지대에 대한 피해인지도 파악이 불가능하다. 다만 서주침공 전반에서 조조군의 민간에 대한 배려는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설령 군사시설만 공격했더라도 민간에 대한 피해가 있었으리라는 점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외 조조의 3차 침공이라고 할 수 있는 198년의 여포 토벌전에서 조조가 또 다시 팽성국을 도륙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팽성 도륙은 조조가 유비와 함께 진행한 원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소위 '서주의 구원자' 유비 또한 이 학살의 책임소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3. 학살의 이유

《정사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는 성격이 매우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친구인 원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비인간적인 만행들을 눈에 안 띄게 자행했다면, 조조는 자신의 감정에 매우 솔직했던 편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아들을 낳으려면 손중모 같은 자를 낳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인데, 그 이후에 아차했는지 '원본초, 유경승의 아들들은 개돼지와 같구나'라고 덧붙였다. 덧붙이긴 했어도 당시 후계 분쟁을 벌이고 있었던 본인의 자식들인 조비와 조식을 저격한 발언인 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인데 당시 군중에는 조비가 같이 종군하고 있었으므로 조비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 외에도 호관에서 농성 중인 고간의 군대가 항복하지 않자 모조리 파묻어버리겠다고 말했다가 조인의 충고를 듣고 철회하는 것처럼 조조는 몇몇 미디어에 나오는 모습처럼 냉혈한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솔직한 다혈질에 더 가까웠다. 따라서 부모의 죽음에 분노한 조조가 홧김에 학살을 지지했다는 설이 자주 통용된다.

그러나 조조가 학살을 지시한 기록이 없다는 점, 조조군의 주요 구성이 황건적 잔당인 청주병으로 이뤄진 점 등을 감안하면, 조조가 점령지에서 휘하 군의 통제력을 유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나, 혹은 군대의 잔혹행위를 방관했을 가능성은 모두 존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4. 학살의 규모

정확하게는 도겸과 팽성에서 맞붙을 때 생긴 '사망자 수만명' 외엔 얼마만큼의 큰 피해가 서주에서 있었는지는 모른다에 가깝다. 정사 삼국지에서 서주에서 조조가 맞싸운 상대들이 입은 피해 규모를 설명하는 것은 오로지 삼국지 도겸전과 순욱전 주석 조만전의 기록 뿐이다. 나머지는 그냥 어느 현이나 성을 도륙해 큰 피해를 입혔다 정도에 그치고 정확한 피해 수치는 잘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조조의 이른바 서주 학살에 대해서 무슨 서주 전체가 다 도륙되어 주민들이 몰살당했다고 우기는 것은 좋지 않다. 사실 서주는 이후 서주 각지에 도적이 들끓고 남쪽 회수 인근의 백성들이 조조의 소개를 거부하고 강동의 손권에게 도망가고 나서 더 황폐화되었지, 조조의 서주침공 직후만 보더라도, 진등의 말로는 아직 서주는 호구가 백만이라고 하는데다가, 실제로 유비가 조조를 배신하고 2차로 서주에 돌아왔을때 유비에게 병사 수만명을 모아줄 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조조의 서주 침공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조조의 서주 침공은 주로 북서주를 타격한 것이지 회수 남쪽 남서주는 비교적 그 타겟에서 벗어난 편이다.

서주의 학살에서 그나마 숫자를 추론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은 바로 팽성에서의 학살이다. 《 후한서》의 저자인 유송시대의 범엽은 이 사건에 대해 '죽은 자가 수십만 명에 달하였다'라고, 그 규모의 광대함을 강조하지만, 기록의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 《후한서》의 해당 부분은 《삼국지》에 주석으로 달린 《조만전》의 문장과 매우 흡사한데, 저술 시기는 《조만전》이 앞서므로 《후한서》가 《조만전》의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전대의 《조만전》에서는 수십만 명이 아니라 수만 명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후한서는 수치 서술에서 곤양대전 등 대단히 과장된 수치를 제시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으므로,《후한서》에 나오는 수십만 명이라는 규모는 범엽이 수사학적으로 쓴 문구이지, 정확한 수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북위의 역도원이 쓴 《수경주》에서는 규모가 10만 명으로 나오는 것이나 무엇보다 범엽과 거의 동시대 사람인 배송지가 원 사료들을 직접 보고 원 사료의 원문들을 그대로 《삼국지》에 주석으로 달았음에도 범엽이 달았던 식의 수십만명 기록을 달지 않았다는 점 역시 약점이 되며, 범엽의 서술에 과장이 들어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 중 하나이다.

따라서 결국 현재로썬 삼국지 본전과 조만전, 오서의 기록을 종합하는 것이 팽성과 사수 인근의 피해자를 추정하는데 가장 도움이 된다 할 수 있다.
초평(初平) 4년 (AD 193)에 조조(太祖)는 도겸을 정벌하고 십여 개의 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팽성(彭城)에서 도겸과 크게 싸웠다. 도겸의 군대는 패한 후 도주하였는데, 죽은 자의 수가 수만 명이나 되었으며, 사수(泗水)는 시체로 막혀 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도겸은 물러나 담현(郯)을 지켰다. 조조는 양식이 부족하였으므로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삼국지 도겸전

우선 도겸전에 따르면 십여개의 성을 공격해 취한 조조는 팽성에서 도겸의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고 한다. 여기서 죽인 도겸의 군대로 인해 사수가 막힌 것이고 민간의 피해는 사실상 없던 것으로 기록된다.

반면 오나라의 프로파간다인 조만전의 경우에는 서술이 다르다.
조만전(曹瞞傳)에 이르길 경사(=서울)에서 동탁의 난을 만난 이래로, 백성들이 동쪽으로 흘러 이주해가 팽성(彭城) 사이에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태조가 오는 것을 만나자, 사수(泗水)에서 남녀 수만 명을 구덩이 파 묻어 죽이니, 강물이 흐르지 않을 지경 이었다. 도겸이 군사를 거느리고 무원(武原)에 주둔하니 태조가 진격할 수 없었다. 군사를 이끌고 사수 남쪽에서부터 추려(取慮), 저릉(雎陵), 하구(夏丘)의 여러 현을 공격하고 모두 도륙(屠戮)했다. 닭과 개도 모두 없어지고, 텅빈 읍에는 다시 지나가는 행인도 없었다.
조만전

여기서는 반대로 도겸은 팽성이 아니라 무원이라는 곳에 주둔했을 뿐이며 조조군이 사수에서 죽인 남녀가 수만명으로 사수에서 죽은 사람은 모두 민간인이 학살 당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조만전은 도겸과 조조가 팽성에서 싸운것을 은폐하고 모두 조조의 민간인 살육극으로 결론지으면서 조조야 말로 피에 굶주린 살인마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얼핏보면 그냥 같은 얘기를 하는거 같지만 실은 수만명의 사람이 살해된 것을 두고 도겸전은 오로지 군대의 손실을 얘기할 뿐이고 조만전은 오로지 민간의 손실을 얘기할 뿐이니 살육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이다.
태조가 팽성(彭城)으로 진격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이자 도겸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저항하였고, 청주자사 전해(田楷)가 와서 도겸을 구하려고 하니 태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도겸전 주석「오서」

그러나 도겸전 주석 오서를 보면 조조가 팽성 인근에서 벌이는 살육이나 도겸과 조조의 전투가 둘 다 기록이 되어 있다. 즉 오로지 군대만 살상했다는 도겸전과 오로지 민간인만 살육했다는 조만전의 기록은 둘 다 극단적으로 치우친 면모만 취사선택하여 기록한 것임이 여기서 드러난다. 따라서 이를 봤을때 팽성에서의 전투와 주변 취락에 대한 약탈, 학살 등으로 인해 군대와 민간인을 합쳐 수만여명이 죽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 외 사수 인근 나머지 군현에서 닭이나 개도 없어졌다거나 모두 도륙했다는 조만전의 기록, 팽성 인근에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오서의 기록을 보건데 인근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과 학살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 경우에는 정확한 피해 상황을 알 수는 없다. 다만 팽성 인근이 큰 피해를 입었기에 이 지역 인근도 큰 피해를 입었다고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5. 해석

5.1. 당시의 여론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인권 사상이 오늘날처럼 발달한 것이 아닌 고대의 역사가들에게는 민중에 대한 대량학살보다는 자기와 같은 신분의 귀족 유명인사를 한 두 명 죽이는 것이 더 크게 악행의 이미지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수의 《삼국지》나 《후한서》 등의 기록을 보면 서주에서의 대학살보다는 오히려 현대에는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명사인 변양을 살해한 일이 크게 언급되어 있고, 진궁 조조를 배신하고 여포를 끌어들인 사건에 대한 설명, 진림의 격문 등에는 서주에서의 대학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진림을 비롯한 당대의 귀족들은 백성에 대한 학살보다는 명사를 죽인 것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조조의 최대 정적인 원소의 《격주군문》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물론《격주군문》이라고 조조의 악행이 싸그리 다 언급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조조가 서주에서 자행한 학살이 다른 군웅들을 원소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유용한 수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손권이나 유비, 진림 등의 지적에서도 서주의 학살 사건이 직접 언급되는 바는 일절 없다. 조조의 반대자들은 조조가 벌인 행위 전반의 잔혹성을 지적할 뿐으로서, 당대 지배계층에게 이 학살만이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지 않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오히려 진림의 격문에서는 백성을 탄압했다며 천명을 거스른다는 내용보다는 조조의 선대인 조등 조숭을 두고 대대로 썩어빠진 가문이라며 비난하는 내용이 더 많다. #

진림의 격문에 서주 대학살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중요하지 않았던 사건이라 말할 수는 없는 의견도 있다. 위에 설명되어 있듯이 조조의 학살을 강조하면 도리어 군웅들이 조조에게 두려움을 품고 싸우려 하지 않을 수도 있는 데다가, 또한 원소는 서주 침공 당시 장수 주령을 보내 지원했으므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언급을 피했을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주령을 보내 지원한 것은 '조조가 차마 저런 짓을 저지를 줄은 모르고 지원한 것'이라고 원소가 말하면 되는 부분이다. 애초에 조조는 초기에 원소의 지원을 받고 성장하며 협천자까지 하는 데 성공했는데, 조조를 지원한 문제에 대해 원소는 상술한 논리, 즉 '조조가 그럴 줄은 몰랐지'로 대응했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할 때 주령을 보내 지원한 것도 같은 논리로 '조조가 민간인 학살하라고 지원한 게 아니었는데 조조가 지 맘대로 학살했다'라 말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를 통해서 적어도 당대 지식인들의 시점에서는 서주에서의 학살이 명사 살해보다는 중요도가 낮은 사건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조조를 호의적으로 평가했다고 평가받는 진수는 《삼국지》 <무제기>에서 서주 학살에 대해서는 '잔륙'(殘戮, 학살했다)이라고 기술했는데, 《정사 삼국지》에서 유일한 표현이라 종종 가치평가가 담겨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나 범위를 넓혀서 반고의 《한서》를 살펴보면 번쾌와 역상이 동원(東垣)을 殘하였다는 언급이 나온다. 殘이 잔인하다라는 뜻이 있어 가치 판단을 담은 서술처럼 느껴지지만 殘戮에서 殘은 죽인 사람이 많았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라 가치 판단을 담고 있지는 않다.

다만 유송 시대의 인물인 배송지는 '남녀 수만 명을 사수에서 갱살(坑殺, 구덩이에 넣고 파묻어 죽임)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모두 도륙하니, 닭이나 개조차 다 없어지고 폐허가 된 읍에는 다시는 행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2], '죄 지은 도겸 때문에 그 속부(屬部)를 잔멸시킨 것은 잘못이다.'[3]라는 다른 사서 혹은 역사가의 평을 주석으로 인용했다. 손성 배송지의 경우 당대 역사가들 가운데서도 당대 인물들에 대해서 이런 부분에까지 도덕적인 평가를 내리며 비판하는 경향이 강하여 이런 평가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부분을 보건데 당대의 귀족들이나 역사가 중에서도 이 일에 대해서 도덕적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런 사람들이 아에 없었다면 손오에서 학살을 비롯한 조조의 도덕적 결함을 비난하는 프로파간다인 《조만전》이 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학살이나 군대에 의한 약탈 그 자체는 삼국시대에 드문 일이 아니었으며, 도성(屠城)이라고 하여 공성군에게 격렬하게 저항한 성이나 요새지의 성민들을 소탕해야 할 적대세력으로 보고 공성 끝에 학살하는 일 역시 전근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흔했다.[4] 후한말과 삼국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도 몇몇 인물들(공손찬, 원소, 도겸, 손씨 3부자)은 본인들의 근거지에서는 지역의 영웅으로 여겨저서 최소 수십년, 최대 수백년까지도 추앙받았던 전적이 있다. 조조는 워낙 중국 전역을 돌아다녔기에 스케일이 이들보다 더 큰 것이지, 기본적인 여론 기조는 이들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5.2. 역사적 해석

학살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 조만전》은 오나라인이 쓴 서적으로, 그 자체가 조위에 대항하는 손오의 프로파간다물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은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를 비롯한 서구학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지적받고 있는 바, 서주 회남 인근의 황폐화로 이 지역에서 이주한 북방인들과 대규모 이주를 맞이한 강남인들, 손권을 비롯한 손오 정권은 조조의 학살을 그의 도덕적 결함으로 판단하고 이를 유용하게 사용할 작정이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역시 조조에게 피해를 입은 서주, 회남인들을 오나라가 회유하고, 나아가 이런 북방인들을 받아들인 오나라 공동체가 내부결속을 이루기 위한 로컬적인 프로파간다는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중원 전체가 이런 기조에 동조하고 있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주의해야 할 점은 어느 한 지역의 로컬에서 발생한 문제가 중원 전체로 파생되면서 그 여론을 항상 공유한다고 보는 시각을 가져선 안된다는 것이다. 로컬에서 발생한 참사의 경우 그 로컬 주민들에게는 굉장한 트라우마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가령 광무제 공손술 정권을 멸망시키면서 벌인 학살은 그 참상으로 인해 10여년도 안 되어 다시 광무제에 대한 반란을 부를 정도로 익주 로컬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겼으며, 촉한 정권 멸망시나 성한 정권 멸망시에도 익주에서 학살을 벌인 오한의 예가 지속적으로 언급될 정도로 수백년 이상 익주 주민들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익주 바깥에서 광무제를 추앙하며 이 부분이 문제가 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수천년 후에 증국번의 후난성 출신 군대 상군이 태평천국의 수도 남경을 함락하고 대량 학살을 벌였던터라 오늘날까지 난징 주민들의 증국번과 후난인에 대한 감정은 똑같이 남경에서 대학살을 벌인 일본인들과 동급이라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다른 지역 주민들이 이를 문제삼는 경우는 드물다.[5] 심지어 같은 사천분지 내에서의 평가인데도, 장헌충의 경우 그가 학살을 일으킨 성도에서는 잔인한 학살자로 보지만 그가 근거지로 삼았던 사천 다른 지역에서는 영웅으로 볼 정도로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전혀 다를 지경이다. 즉 이런 악명이 로컬 이상을 넘는건 전근대에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이다.[6] 하물며 중국이라는, 한 주가 국가권력급 위세와 크기를 자랑하는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7]

마찬가지로, 서주에 대해서도 부형들이 받은 치욕 때문에 조조의 편에 서지 않을것이라 언급하는 순욱의 언급이라던지, 조조에 대항한다는 이유 만으로 서주에 대해서 별 다른 보호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던 유비에게 수만명씩 서주 주민들이 모아주는 대목을 보면 서주 로컬이 조조에게 엄청난 반감과 분노를 가졌을 수 있음은 체감할 수 있다. 이들을 받아들이며 대놓고 이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프로파간다를 썼을 오나라에서 《 조만전》이 나오는 흐름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위에서 서술된 진림이나 원소가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면 이보다 이 문제에서 더 자유롭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당장 유비 또한 서주를 구원하겠답시고 내려온 주제에 서주를 떠난 이후엔 평생동안 이 주제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없는데, 사실 유비 역시 조조가 진행한 세번의 서주 침공 중 세번째 침공에 조조의 휘하장수로 조조가 팽성을 도륙하였을때 그 학살의 행렬에 같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무제기와 선주전을 보면 3차 침공 당시 조조의 팽성 학살에 유비가 참여한 정황이 매우 명백하다.
布復為袁術使高順攻劉備,公遣夏侯惇救之,不利。備為順所敗。九月,公東征布。冬十月,屠彭城,獲其相侯諧。

여포가 다시 원술을 위해 고순(高順)을 시켜 유비를 공격하게 했다. 공이 하후돈(夏侯惇)을 보내 유비를 구원하게 했으나 불리했고, 유비는 고순에게 패했다. 9월, 공이 동쪽으로 여포를 정벌했다. 겨울 10월, 팽성(彭城-서주 팽성국)을 도륙하고 팽성상(相) 후해(侯諧)를 사로잡았다.
무제기
曹公自出東征,英雄記曰:建安三年春,布使人齎金欲詣河內買馬,為備兵所鈔。布由是遣中郎將高順、北地太守張遼等攻備。九月,遂破沛城,備單身走,獲將士妻息。十月,曹公自征布,備於梁國界中與曹公相遇,遂隨公俱東征


조공은 친히 출병해 동쪽을 정벌하고 (주10) 선주를 도와 하비에서 여포를 포위했다가 사로잡았다. (영웅기) 건안 3년(198년) 봄, 여포는 사람을 시켜 금을 지니고 하내(河內-사례 하내군)로 가서 말을 사오게 했는데, 유비의 군사들에게 약탈당했다. 이로 말미암아 여포는 중랑장(中郎將) 고순(高順), 북지태수(北地太守) 장료(張遼) 등을 보내 유비를 공격했다. 9월, 마침내 패성(沛城)을 격파하자 유비는 홀몸으로 달아났고, (고순 등은) 그의 처자식을 사로잡았다. 10월, 조공(曹公)이 친히 여포를 정벌했다. 유비는 양국(梁國-예주 양국) 경계에서 조공과 만났고 마침내 조공을 따라 함께 동쪽을 정벌했다.
선주전

이런 로컬에서 있었던 일들이 강회(江淮)[8] 지역을 넘어서서 중화 전체에 유의미하게 퍼졌는가는 의문으로 현대에도 교통과 통신이 멀리 떨어고 정보 역시 부족하며 문화적,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운 지역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일이 많듯이 과거에는 그 격차가 훨씬 심했으므로, 한 지역이 다른 지역에 대해서 제대로 된 정보를 받거나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다 소식을 듣더라도 그 정보가 그대로 전해질지도 의문이라 잘해봐야 북형주 주민들이 유비를 따라 탈출했을 당시의 막연한 불안감 외에 다른 것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서주에서의 학살도 서주 로컬, 나아가 강회지역 전반에 퍼진 조조에 대한 악명을 설명하는 일은 될지라도 그런 악명을 중원 전반의 일로 소급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조씨 정권은 서주나 회남, 강회 지역에서는 상당한 악명을 얻었으나 그 외 다른 중원 지역에서는 지역을 재건한 영웅으로도 여겨졌기 때문이다. 예컨데 《한진춘추》에 기록된, 시해된 조모에 대한 낙양 주민들의 추모 내용만 봐도 낙양 주민들은 동탁에 의해 파괴된 낙양을 재건하고 다시 이 도시를 수도로 삼은 조씨 일가에 대해서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는 지금도 낙양 지역에서 동탁을 싫어하고 조조가 영웅 취급 받는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조조가 잔인했다는 주장을 넘어서 이러한 잔인함 때문에 통일에 실패했다, 위나라가 단명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간혹 존재하는데, 조조의 잔인성과 그것이 백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또 다시 살펴봐야 할 문제이다. 어디까지나 위나라가 무너진 것은 무슨 민중을 해했다는 악명을 쌓은 조씨 정권에 불만을 가지고 민중 봉기 같은 것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조위 정권 내부에서 조씨의 세력을 누른 내부 경쟁자인 사마의의 반란으로 촉발된 것이기 때문이다.

5.3. 현대의 평가

서주 대학살이 상대의 전투 능력을 말살하기 위한 초토화 작전이라는 식의 의견도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임용한 교수가 있다. 링크. 중세 몽골의 학살이나 조선시대 여진 촌락에 대한 예방전쟁 같은 것과 비슷하게 보는 듯 하다.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사한 것은 전략적인 목적에 의한 학살이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상대의 결집을 불러와 결과적으로 패전 혹은 무시할 수 없는 적성세력의 등장이라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 고려의 여진 정벌전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적 목적에 의한 학살인가, 아버지를 잃고 눈에 뒤집혀서 벌인 만행인가, 둘 다인가는 알 수 없으나 임용한은 첫째가 주된 이유라고 보는 듯 하다. 여기서 이전 시대의 전쟁에서 이런 일(집단살해)은 자주 있었다는 것이며, 임용한도 도덕적으로 옹호할 수 없으나 당시 전쟁은 그랬다라고 넘어가는 듯하다. 물론 만약 조조가 전술적인 판단하에 행했다면 르메이 미군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의 민간인들도 생산 활동으로 전쟁을 수행하니 일본 주요 도시들에 있는 민가들을 폭격해야했던 것과 비교할 수 있다. 다만 임용한은 학자라는 입장 때문인지는 몰라도 모든 행동에 최대한 합리적인 동기를 부여해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그 원균에 대해서도 나름 억울하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양반이다. #

그러나 이런 '전략적 판단'은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정작 본거지인 연주의 통제도 불가능할 정도로 서주에만, 그것도 학살에만 집중했던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게다가 1차 서주 출정 당시에는 본인도 상대적으로 열세인 전력으로 승패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가족들에게 일이 잘못되면 장막에게 가서 의탁하라고 했을 정도인데, 전략적으로 사고했다면 도겸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시점에서 학살로 시간을 보낼 게 아니라 빠르게 철수를 하고 본진을 지켜야 했을 일이다. 윗 항목의 조숭 일가의 몰살 기록 부분에 나와있듯이 서주 대학살 당시 조조는 본인의 친부와 친인척들이 서주 지역에서 도겸의 휘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오늘날에도 가족을, 그것도 부모를 살해한 원수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것은 변함이 없지만, 효의 사상이 더 강했던, 유교 이념이 지배하던 후한 말의 시절에는 증오심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조조가 감정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일가 친척의 죽음에도 냉철하게 전술적인 판단을 내려 초토화 전략을 시행했다기보다는 조조가 본인의 친부와 친인척들의 비참한 죽음에 눈이 뒤집혀져서 저지른 일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결국 현대에 조조가 새롭게 평가받기 시작하고, 또 인권 사상의 대두로 인해 민간인에 대한 잔혹행위가 용서받지 못할 범죄로 규정되면서, 기존에는 비중이 컸던 명사 살해에 대한 반감이 줄어드는 대신 비중이 덜했던 그의 악행이 새롭게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조에 대한 반감은 어디까지나 한 황실을 핍박한 권신이었던 점과 명사 살해가 주요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 역시, 학살이 흔했던 고중세의 군벌들에게 현대적인 잣대를 들이댄다는 비판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한편, 시간이 흘러서 현대 사회에서는 가족의 복수를 명분으로 굳이 죽일 필요 없었던 민간인들을 하나하나 죽인 조조의 모습이 마치 정성 어린 효도와 같다며 "서주대효도" 라는 드립을 치기도 한다. 물론 여느 드립이 다 그렇듯 진지한 학술적 평가에서보단 가벼운 농담으로써의 사용이 더 많은 표현이다.

6. 삼국지연의》에서의 서술

2차 삼국지 매체의 원조인 《 삼국지연의》에서도 사실 이 사건에 대한 설명을 10회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마침내 순욱, 정욱을 남겨 견성, 범현, 동아 3현을 수비하게 하고 그 나머지들은 다 죽이려고 달려서 서주로 왔다. 하후돈, 우금, 전위가 선봉에 섰다. 조조가 명령을 내리길, 성(도시)을 얻으면 성 안의 백성들을 모조리 도륙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도록 하라.

구강의 태수 변양은 도겸과 교분이 두텁고 서주의 어려움이 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병사 5,000명을 이끌고 구원하러 왔다. 조조는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하후돈으로 하여금 길가에서 그를 가로막게 하고 죽였다. 당시 진궁은 동군의 종사였는데 도겸과도 교분이 두터워 조조가 군사를 일으켜 원한을 갚아 백성들을 모두 죽여 없애려 한다는 말을 들어, 별밤이 오기 전에 와서(또는 급속히 와서) 조조를 보았다. 조조는 (진궁이) 도겸을 위하여 중재인이 되고자 함을 알았기에, 보려하지도 않으려 했으나, 옛 은혜[9]를 없애지도 못하니, 다만 부득이하게 초빙하여 군막 안에 들여 만났다.

진궁이 말하기를:

"지금 명공께서 대군으로 서주에 임하여, 존부(尊父, 부친)의 원한을 보복하며, 도착한 곳에서 백성들을 다 죽여 없애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아무개는 이로 인해 이곳에 일부러 와서 진언합니다. 도겸은 인인군자(仁人君子)이지, 이익을 좋아해 탐내고 의리를 저버리는 무리가 아닙니다. 부친께서 살해당하신 것은 바로 장개의 악행으로, 도겸의 죄가 아닙니다. 게다가 주와 현의 백성들이 명공과 무슨 원수진 것이 있습니까? 살육은 상서로운 일(또는 선한 일)이 아닙니다. 바라건데 여러 차례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조조가 노하여 말하길:

"공은 나를 버리고 갔는데, 지금 무슨 면목으로 다시 만나는 것이오? 도겸이 내 가족을 죽였으니, 맹세코 당연히 쓸개를 뽑고 가슴을 도려내어, 내 원한을 풀 것이오! 공이 설사 도겸을 위해 유세하더라도, 만일 내가 듣지 않으면 어찌할 것이오?"

진궁은 작별을 고하고 "나도 도겸을 볼 면목이 없구나!"라고 탄식하며 말을 몰아 진류태수 장막에게로 갔다.

한편 조조의 대군은 가는 곳마다 인민들을 살육하고 분묘를 파냈다. 도겸은 서주에서, 조조가 군대를 일으켜 보복하고 백성들을 살육한다는 소리를 듣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말하였다. "내가 하늘에 죄를 지어서, 서주의 백성들이 이 큰 재난을 받게 했구나!"

遂留荀彧、程昱领军三万守鄄城、范县、东阿三县,其余尽杀奔徐州来。夏侯惇、于禁、典韦为先锋。操令:但得城池,将城中百姓,尽行屠戮,以雪父仇。当有九江太守边让,与陶谦交厚,闻知徐州有难,自引兵五千来救。操闻之大怒,使夏侯惇于路截杀之。时陈宫为东郡从事,亦与陶谦交厚;闻曹操起兵报仇,欲尽杀百姓,星夜前来见操。操知是为陶谦作说客,欲待不见,又灭不过旧恩,只得请入帐中相见。

宫曰:"今闻明公以大兵临徐州,报尊父之仇,所到欲尽杀百姓,某因此特来进言。陶谦乃仁人君子,非好利忘义之辈;尊父遇害,乃张闿之恶,非谦罪也。且州县之民,与明公何仇?杀之不祥。望三思而行。"

操怒曰:"公昔弃我而去,今有何面目复来相见?陶谦杀吾一家,誓当摘胆剜心,以雪吾恨! 公虽为陶谦游说,其如吾不听何。"

陈宫辞出,叹曰:"吾亦无面目见陶谦也!"遂驰马投陈留太守张邈去了。

且说操大军所到之处,杀戮人民,发掘坟墓。陶谦在徐州,闻曹操起军报仇,杀戮百姓,仰天恸哭曰: "我获罪于天,致使徐州之民,受此大难!"

10회에는 이런 구절이 있는데 《삼국연의》 본문, 정사마냥 시체로 강이 막혔다거나 하진 않지만 살육에 대해서 분명하게 여러 차례 기술하고 있다. 사실 저 구절이 없다고 정사에 비해서 축소 기재되었다고 보기도 힘든 것이, 정사도 전문을 인용해보면 알겠지만 '도겸전'을 제외하고는 시체로 강이 막혔다 하는 기술은 없기 때문이다. 도겸의 저 통곡도 조조가 자신 대신 백성들을 살육하는 것에 대한 통곡이다.

아니 오히려 《연의》의 묘사를 보면 나관중은 조조군이 '처음부터 다 죽이려고 서주에 왔다'고 하며, 조조의 명으로 만일 성을 함락시키면 그 안에 있던 백성을 다 도륙한다고 쓰고 있다. 또한 조조가 서주 백성들을 다 죽이려 하자, 진궁이 와서 말려도 조조는 분노로 눈이 돌아가 진궁의 조언을 내치는데, 이 과정에서 진궁의 입을 빌어 조조가 아버지의 복수를 한답시고 조조와 원수진 것도 없는 무고한 서주 백성들을 모조리 죽이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거기에 서주에서 일어나는 조조의 학살에 대해선 진수가 썼던 '杀戮(살육)'이라는 단어를 써서 분명하게 기술함으로서, 《정사 삼국지》에서 진수가 했던 표현과 동일한 강도로 '조조는 가는 곳마다 무고한 백성들을 살육했다'고 확실히 서술하고, 도겸의 말을 빌어 '이것은 서주 백성들이 받고 있는 큰 재난'이라고 묘사한다.

따라서 전근대시대 사람인 원말 명초의 나관중 입장에서도 조조가 한 황실을 핍박하고 명사들을 죽이는 것만을 악행으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서주 대학살 역시 엄연히 '조조의 사악한 악행'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는 《연의》의 주인공이자 '의로운 자'인 유비가 중과부적인 상황임을 알고도 서주를 구원하는 것을 대조되는 구도를 짜는 것으로서 확실히 재확인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후로는 서주 대학살이 일절 언급되지 않는다. 유비나 원소나 손권 등이 이후 조조를 비난할 때도 서주 대학살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진짜 역적은 누구인가'라며 정통성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이렇다보니 《연의》만 읽은 사람들은 이후에 나오는 더더욱 충격적인 사건들(ex. 동승의 의대조 사건, 장판파 추격전, 복황후 시해, 허도 대화재와 길막·길목의 난…) 때문에 오히려 서주 대학살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한다.[10][11]

정확히는 동승의 의대조 사건 직후에 조조가 밀조를 받고 역적을 치러 왔다며 우기자, 유비가 '역적에게 밀조를 내릴 리가 없잖나. 밀조는 여기 있다'면서 동승의 의대조를 읽다가 열받은 조조의 전투개시 선언에 묵살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이렇게 백성들의 학살이 얼마나 중죄인지 다루는 장면은 유비가 자립하기 직전인 장판파 추격전이 사실상 마지막이며, 이후 삼국정립이 완성된 이후로는 위나라에서 길막·길목의 난처럼 대규모 항쟁이 벌어져도 추가 언급 없이 넘어간다. 흥미 위주로 진행되는 연의 특성상 핵심 주제가 '백성을 위해 일어선 영웅'에서 '천하를 통일해 평안을 가져다 줄 영웅'으로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7. 창작물에서

정사 삼국지를 비롯한 역사서들이 조명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 사건은 서서히 알려졌지만, 그마저도 '군웅할거의 난세 속에서의 일반적인 학살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가 재평가되면서 이 사건 역시 재조명되었으며, 재조명됨에 따라 이 사건은 조조의 대표적인 악행이자 치부로써 부각되었으며, 이는 조조에 대한 재평가의 기류를 막게 되었다. 이 사건은 여백사 사건과 결합함으로써 조조라는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 바뀌게 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조조에 대한 해석인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12]이다. 조조를 냉혈한이 아닌, 기존의 연의를 중심으로 해석된 '냉정하고 포부가 크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호걸'이라고 해석되는 매체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이 사건을 은근슬쩍 축소시키거나 언급을 하지 않고 넘어간다. 심한 경우 아예 없었던 일 취급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13] 연의 해석에 미화를 안 넣으면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한 번 눈 돌아가면 미쳐 날뛰는 또라이 정도의 해석이 나온다.

또한 정사에 대한 분석이 진행되며 제갈량의 고향이 서주의 양도현 출신이고 제갈 가문이 본래 서주의 호족 가문이었으나 훗날 형주로 이주한 배경에 이 서주 대학살이 간접적으로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제시되면서 근래의 작품에선 제갈량이 이미 대세가 된 조조가 아닌 굳이 기반도 잃은 유비에게 천거한 이유를 제갈량이 서주 대학살의 피해자였으며 이에 조조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위해 유비의 군사가 되었다는 식으로 재해석 되기도 한다.

7.1.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침공만 다루고 학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 침공도 제대로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여포가 쳐들어와서 도겸 측에서 사자로 보낸 장비에게 쿨하게 화친에 응하는 척 하고 물러가는 것으로 나올 뿐이다. 오히려 이후 원술이 서주를 침공했을 때 서주 지역이 불바다가 되고 백성들이 살해 당하는 등 서주가 파괴되는 모습이 더 상세하게 나온다. 이 때문에 이후에 유비가 신야에 있을 때 박망파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조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였을 때 백성들에게 도망가라고 써놓은 방문에 "조조가 오면 다 죽는다"고 써붙여 놓는데, 이 만화를 통해서만 삼국지를 접한 사람들은 '아무리 유비가 좋고 조조가 싫다 한들 살던 집도 버리고 따라갈 정도인가?' 하는 의문이 들다가 뒤늦게 이 사건을 알고 신야 백성들의 그 선택을 이해하게 된다.

7.2. 카츠마타 토모하루 삼국지

1부에서 부모가 살해당한 소식을 접한 조조가 분노하면서 군대를 보내 서주에 있는 모든 것들을 몰살하라고 명령을 내리는데, 이윽고 장면이 전환되며 서주의 백성들이 조조군의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근거지를 잃고 떠돌이 신세로 의탁해 있었던 유비 또한 이 소식을 들은 뒤, 서주 백성들이 자신을 부르는 절규가 줄곧 들리는 것 같지만 지금은 그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매우 안타깝게 언급하기도 했다.

7.3. 소노다 삼국지

조순의 부음 소식을 들은 조조가 그야말로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데, 이 만화 최고의 명장면 충 하나이다. 서주 대학살 자체는 간략하게 묘사되지만, 학살로 인해 서주를 떠나는 어린 제갈량을 등장시켜 복선을 깔아놓는다.

7.4. 고우영 삼국지

분량 면에서 아주 간략하게 지나가 버린다. 하지만 묘사상으로는 조조의 학살이 인디언을 학살한 솔저 블루 베트남전 밀라이 학살에 대놓고 비유된다. 참고로 원작이 연재될 시기는 1970년대로, 아메리카 원주민은 그렇다 치고 베트남전의 학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시절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주 명쾌하게 서주 대학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셈이다.

7.5. 이문열 평역 삼국지

저자는 온갖 부분에 확인도 안 된 정사 드립을 하며 작가의 사평을 집어넣지만, 유독 이 조조 대학살에 대해서는 전혀 평을 내리지 않는다. 장면 묘사에서도 조조의 직접적인 학살 묘사는 빼고, 다른 인물들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하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서술한다. 심지어 조조 사망 장면에서 꽤 긴 분량을 들어서 조조의 인생을 평가하면서, "조조가 시대를 넘어 역사의 악역이 될 이유는 모자란다."고 말하는데, 시대의 악역이 될 차고 넘치는 이유인 이 서주 대학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다. 이 작품이 작가가 조금이라도 조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시도때도 없이 정사 타령하면서 조조빠 티를 다분히 드러낸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의도적으로 서주 대학살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배제하면서 그 시대에는 다들 그랬는데 왜 조조만 뭐라고 하냐며 물타기를 한다.

7.6. 김경한 삼국지

조조가 무리하게 온 서주를 들쑤시며 집집마다 학살을 일삼는 통에 수 많은 명사들이 피난길에 오른다. 이 때 제갈량이 김경한 삼국지에 첫 등장을 하는데 형인 제갈근 손책을 찾아가고 일족들을 제갈량에게 맡기면서 제갈량은 제갈씨 일족의 수장이 된다. 이 때 형주로 피난을 떠나는 제갈량은 그야말로 피눈물을 흘리는데 조조를 반드시 죽여버리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도 예외없이 조조의 잔악무도함이 여과없이 묘사되어 있다. 다만 조조쪽 변호도 들어가 있는데 이 배경을 알기 위해 조조가 바라본 조숭이 묘사되어 있다. 조조는 조숭이 아무리 병신 취급을 받아도 우리 아버지니까 최고라며 항상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런 아버지가 살해당하자 눈깔이 뒤집히고 이성을 잃어 이 학살을 저지른 것으로 나온다. 조조에 대해 우호적이지만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 정확히 짚고 넘어가며 그 예시중 하나가 바로 서주대학살이다.

7.7. 화봉요원

조조와 곽가, 특히 암흑병법을 주창하는 곽가가 그 어느 매체보다 악랄하게 나와서 서주 대학살을 벌이는 이유부터 기가 막히다.

조숭은 그냥 서주 지나가다 병으로 죽었고, 조조의 가족 중 그 누구도 도겸과 그의 부하들에게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았으나(하후돈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 곽가의 암흑병법에 매료된(…) 조조는 조숭의 죽음을 도겸군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위장하여 도겸군이 조숭을 죽였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조숭의 복수를 명분으로 서주를 공격해 서주 군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여 악명을 천하에 떨치는 황당한 계책을 마음에 들어하여 웃으면서 받아들여 시작된다.
서주의 양민들을 무자비하게 1만 명 가량 도륙한 것은 사실이나, 조조가 새로 얻은 군사인 곽가의 암흑병법으로 30만을 학살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설명된다. 서주 군민들에게 조조군의 잔혹성을 각인시킴으로써 저항할 의지 자체를 상실시켜 버리자는 어마어마한 뻥카.[14] 곽가 자신이 '대의를 위한 희생'을 결코 마다하지 않는 암흑병법을 구사하는 책사이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한편 제갈량[15]은 1만 명에 달하는 학살의 희생자들을 보고는 그들을 부여잡고 '눈물조차 다 말라버렸다'고 독백하면서 심리적으로 조조 세력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되고, 직후 제갈량이 요원화를 끌어들이고 조조군을 방해하면서 수경팔기간의 대립이 시작된다. 얼핏 보면 서주 대학살의 진상을 '그거 사실 뻥임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여'로 일축해 버리는 황당무계한 전개지만, 합리적으로 따져 보면 은근슬쩍 말이 된다는 것이 함정(…) 애초에 서주 대학살 자체가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된단 말이 나올 만큼 막장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설명이 조조의 악행을 미화하려는 의도는 없이 곽가와 제갈량의 상반된 캐릭터성을 드러내고 여기에 따른 갈등을 표현하기 위한 묘사에 가깝기에, 매니아들 사이에서 거부감이 적었던 점도 있다. 오히려 이 학살로 인해 화봉요원의 조조와 그 조조를 뒤에서 휘두르는 곽가는 그 어떤 매체에서보다 더욱 잔인하고 사악하며 악랄하게 나온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7.8. 드라마 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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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삼국에선 위와 같이 조조가 자신의 군은 '서주를 점령하면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드라마 삼국이 주요 인물의 행동에 대해 재해석을 상당히 많이 한 작품인 만큼 조조가 수십만을 다 죽인다는 이유도 새로 달아놓았는데, 다름아닌 군량 부족이었다. 조조군은 관도대전 승리 후 하북을 제패하기 전까지 계속 군량 문제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럴 듯한 재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명령을 내린 직후 여포가 연주를 공격했다는 정보가 도달하였고, 결국 조조군이 철수해버린지라 조조의 명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사실 저것도 좀 이상한 점이 있는데, 점령하면 남녀노소를 다 죽이라는데 거기에 있는 병사가 아닌 사람도 다 같이 죽이란 소리다. 그 사람들은 병사가 아니니 포로도 아니다. 역으로 조조의 냉혹함과 잔혹함을 보여주는데 자기 이득이 안 되면 수십만 정도는 그냥 죽여도 된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7.9. 대군사 사마의

드라마 시작시점이 서주 대학살 이후라 언급으로만 나온다.

사마의가 조비에게 조조가 가장 염려하는건 백성들의 민심이라고 하자 조비가 도겸이 조부를 죽이자 분노한 아버지께서 서주성을 도살했다고 하며 그런 아버지가 민심을 염려할거같냐고 대답한다. 그러지 사마의는 그때의 조조는 단순한 군벌이었지만 지금은 천하를 다스린다는 목적이 생겨 민심을 생각 할 수밖에 없다고 대답한다.

7.10. 삼국지 시리즈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선 대놓고 등장하진 않으나, 유심히 살펴보면 유추해 볼 단서들이 있다.[16] 예를 들어 삼국지 10에선 189년 시랑군림 시나리오와 194년 군웅할거 시나리오에서 서주 휘하의 소패성과 하비성의 인구가 엄청나게 감소하여 있다.

하비의 인구는 217,000 → 77,000
소패의 인구는 99,000 → 31,000

특히 소패의 인구가 너무 적어 194년 시나리오에서 소패의 군주로 있는 유비는 이벤트를 꺼도 국력이 너무 허약해 차라리 방랑군을 편성해 다른 곳으로 이사가는게 나을 지경이 된다.

삼국지 12 PK의 '서주변천' 시나리오의 경우엔 아예 대놓고 조조가 서주에 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을 명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순욱은 조조를 말리나 듣지 않자 "후대에 학살로 평가 받을 거다."라며 탄식하는 대사를 한다.

삼국지 14에서도 조숭 참살, 유비 소패로, 서주 선양 이벤트로 재현된다. 조숭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안 조조가 격노해 도겸과 그 수하들은 물론이고 서주 백성들에게까지 보복성 공격을 가하고 미축이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면서 조조의 군세가 서주의 신민들을 몰살시키고자 침공한다고 언급한다. 이에 유비가 서주를 구원하며 서주 선양 이벤트로 도겸에게 서주를 물려받을 수 있다.

7.11. 삼국지 공명전

도입부에서 어린 시절 제갈량이 서주 대학살 때 조조군을 피해 달아나다가 서주를 구하러 온 유관장 삼형제를 몰래 지켜보는 모습을 통해 훗날 제갈량이 삼고초려를 하는 것에 대한 개연성을 부여한다.

7.12. 삼국지 조조전

"서주 보복전"이라는 미션이 있으며 조조가 주인공인만큼 학살 관련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사적인 감정을 앞세워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대하여 조조의 책사들과 유비 모두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저돌적인 이미지가 있는 하후돈도 출전하기 전에 말을 걸면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다소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유비측의 입장에서 하는 타 게임들은 당연히 조조군이 우세하는 양상으로 나오지만 조조가 주인공인 이 게임에서 그대로 나오면 당연히 전투가 싱겁게 되므로 오히려 도겸군의 병력이 훨씬 많다.[17] 심지어 도겸군은 스토리상 침공당하는 입장임에도 오히려 적극 아군을 향해 공격한다. 제8턴 시작 때 유관장 및 조운 4부대가 지원군으로 등장하고, 여포가 복양을 공격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도겸과 화목할지 아니면 계속 공격할지 선택지가 뜬다. 어느 선택지를 골라도 나중에 백은갑옷을 얻게 된다.
반면 《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조조만이 주인공이 아닌지라 유비전, 도겸전 등 다른 주인공 입장에서는 그 묘사가 잘 드러나 있으며, 대학살 후 장소, 노숙, 제갈 일가 등이 조조를 피해 피신을 가는 모습이 나온다. 특히 제갈량전에서는 제갈량이 출사하고 타도 조조의 기치를 세운 근본적인 이유가 서주 대학살의 복수로 그려질 정도.

7.13. 창천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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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항로》에서는 서주 대학살이 확실미묘하게 그려진다. 일단 시체가 강을 메울 정도로 쌓인 모습이 두 페이지나 할애하여 묘사되고, 관우가 이를 보고 충격을 받고는 격노하며 "이런 게 무슨 왕의 패업이냐"고 일갈하는 장면을 넣는 등 대학살의 광경 자체는 아주 직접적으로 묘사된다.[18] 하지만 정작 조조의 의도 자체는 '아버지가 죽었다니 씁 어쩔 수 없지 도겸은 어차피 천하로 향하는 길의 방해물이니 조져버리겠다'(순욱의 독백) 정도로 묘사되고, 대학살의 원인은 약탈과 살육밖에 모르는 청주병을 무장시켜 주력으로 삼아 진격시켰기 때문인 것으로 나온다. 이미 출발 전부터 하후돈이 '청주병은 아직 도적떼 그 자체고 니 명성은 땅에 떨어진다'라고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주병이 조조 맹덕에게서 중황태을의 꿈을 보았다면 조조는 청주병들의 것이다'라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운다. 이 대학살에 대해 유비는 '놈들에게 있어 전쟁은 땅따먹기고 일단 땅을 잔뜩 차지한 다음 거기에 원하는 천하를 그려 넣으려는 것이다'라고 짧게 평하고, 곽가는 '원래 패업은 힘으로 하는 거고, 조조 당신은 적이었던 청주병을 흡수하고 그 힘만을 중시해서 대 살육조차 단순히 병력의 힘이 드러난 것으로 치부했다'면서 '여기까진 좋았다'라는 맛이 간 평가를 내렸다(…).[19] 즉 굳이 요약하자면 서주 대학살에 대해 사적인 복수심이니, 광기니 하는 이유가 아니라 '청주병이라는 무자비한 병력을 풀어놓으면 일이 이렇게 되니까 이렇게 됐다' 같은 무미건조한 설명을 덧붙인 셈이다. 우스운 것은 조조의 캐릭터가 비정하고 잔인하기보다 선악을 초월하고 오명조차 신경쓰지 않기에 가장 합리적인 길을 택하는 침착한 초인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점.
이를 니체의 위버멘쉬 개념을 통해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는데, 역사에서의 조조의 대학살은 위버멘쉬가 되지 못할지언정 창천항로의 등장인물로서의 조조의 인물상은 (현실의 조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어느 정도 이러한 이해에 타당성이 있다. 행위 자체에 있어서 선악을 위시한 기성의 잣대를 거부하고 스스로가 창출한 새로운 가치를 드러내는 자를 위버멘쉬로 칭하며, 최소한 창천항로에서의 조조는 기존의 선악과 별개로 가장 합리적인 (비록 이 합리가 창천항로의 스토리 내부에서만 핍진성을 가지며, 작품의 외부세계에선 그 어떤 가치잣대에 비추어도 말이 되는 부분이 없다고 할지라도) 선택지를 골라 양질의 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서주 대학살도 인의도덕 같은 고리타분한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천하 통일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조조라는 식으로 넘기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평가는 실제 조조의 인물상과 거리가 멀다. 조조는 당대의 관습적/절대적 가치관이었던 유교의 충과 효라는 개념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 편의적으로 수단화한 사람이지, 그걸 뛰어넘는 어떤 새로운 이념이나 비전을 제시한 적이 전혀 없다. 당장 서주 대학살을 자행한 명분부터가 자신의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효 이데올로기였고, 구현령을 발표하면서 선언했던 '아무리 불인불효할 지라도 능력만 있다면 그것에 상관 없이 인재로 뽑는다'란 구호가 무색하게 자신에게 사사건건 반항하는 공융을 불효죄로 숙청했다. 또한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한 황실을 옹호하는 충신'이라는 충 이데올로기를 등에 업을 수 있었는데, 이는 조조가 원소 산하의 그저 그런 군벌에서 당대 최고의 권력자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당대의 지배적 가치관을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철저히 이용한 조조를 '구시대를 혁파하는 개혁가'라고 고평가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물론 정치적 차원의 윤리와 개인적 차원의 윤리는 별개의 문제라는 게 마키아벨리를 효시로 하는 근대 정치 철학의 시각이기에, 정치가로서 조조에 대한 판단은 다소 다를 수 있겠지만, 인간 조조는 절대 위선자란 혹평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서주대학살은 효의 가치를 내세운 의미있는 행보가 아니라 그냥 분풀이였다. 위 장야신의 평가에도 나오지만, 이건 그냥 말도 안되는 짓이었다. 연고지인 연주를 완전히 장악하기도 전에 서주를 침공했고, 군사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점령에 실패하자 그 지역의 무고한 백성을 수십만이나 학살했다. 이로 인해 연주에서 민심도 나빠지고 (민심 악화와 별개지만) 반란도 일어나서 연주를 거의 통째로 뺏길 뻔하고, 서주에서 민심은 당연히 최악이 되고 오히려 향후 최대 라이벌이 되는 유비에게 "인의"란 이미지까지 씌워주었다. 굳이 따지면 군사/경제의 기반이 되는 백성들을 학살해 서주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고 볼 수 있지만, 잃은 것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점령해봤자 인프라와 인구가 줄어든 서주를 안정화해야하는 건 본인이니까 이득이라고 볼 수도 없다. 즉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순수하게 미쳐 날뛴 것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려니까 저런 억지 해석이 나온 것이다. 조조는 분명 천재였지만, 감정기복이 심하고 인간적인 결함도 있는 사람이었다.

2020년대에는 이러한 창천항로 내에서의 조조와 서주 대학살에 대한 해석보다는 단순하게 서주대학살을 묘사한 장면을 표현할때 위 짤이 쓰이는 편이다.

7.14. 삼국전투기

학살 묘사자체가 아예 안 나오며, 그저 침공을 했다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표현하고 어거지로 대강 넘겼다.

비판을 받자 나중에 사마의 사후를 묘사할 즈음에 지나가는 투로 살짝 언급된다… 지만 사실 <북해 전투5>에서 폭발한 조조가 서주에 사는 쥐새끼 한 마리, 풀 한 포기 안 남기겠단 발언을 하긴 했다. 직접 표현은 안 됐지만. 근데 여담으로 이 부분 자체가 조조를 띄우기 위해 도겸을 찌질이로 만든 경향이 있다.[20] 정사 기록을 따르면 애초에 도겸이 조조를 친 건 찌질해서가 아니라 공손찬과의 동맹 때문이었다.[21] 또한 작가의 착각인지, 고의인지 모르겠지만 10여 성을 뺏긴 것도 또한 가을이라 기술되어 있으므로 조숭이 죽은 후이다. 애초에 1차 학살 자체가 조조가 도겸을 공격하였으나, 도겸의 수비가 굳어 어쩌지 못하자 후퇴하면서 화풀이 겸 학살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겸이 겁을 먹어 조숭 가지고 협박하다가 실수로 죽였다는 건 어폐가 있다. 애초에 위진세어와 오서가 충돌했는데, 오서의 기록을 무시하고 위진세어의 기록을 따랐다. 위진세어의 설명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역사서가 아니다.[22] 이는 제갈량의 북벌 논란에서도 제기 되었듯이 작가가 사서간 애초에 위진세어는 사서도 아니다 내용이 충돌하면 그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내용이라도 지 입맛에 따라 고른다는 면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다만 진궁이 조조를 비판하며 말렸으나 듣지 않자 결국 실망하고 배신하는 전개를 넣어 조조에게 비판적인 내용을 넣기는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전쟁에 명분이 없다는 거지 학살이 동반되었다는 묘사는 들어가지 않았다.

7.15. 진삼국무쌍 시리즈

단 한 번도 서주 대학살을 다루지 않고 있다. 이미 조조를 야심차고 고독한 패왕으로 묘사하다 보니까 그의 이런 캐릭터에 해가 될 수 있는 서주 대학살 묘사를 의도적으로 안 넣는 걸로 보인다. 그나마 서주에서 싸우는 것도 조조가 세력을 확장할 때 도겸이 괜히 걸려든 걸로 묘사된다. 단, 6편 서주 전투 촉편에선 진지 대화에서 서주 병사들이 조조군을 가차없는 자들, 귀신 같은 존재라 칭하며 공포에 떠는 것으로 조조군의 잔학함을 간접적으로 묘사했다. 요코야마 삼국지 수준의 묘사라고 보면 된다. 진삼국무쌍 6편 드라마 CD에서도 언급된다. 6편처럼 한 줄기 스토리로만 진행되는 8편에서는 의외로 좀 더 직접적 묘사를 해준다. 시즌패스 3 노숙 IF 시나리오에서는 오나라가 서주를 손에 넣는 스토리가 나오는데, 서성이 서주 출신이라는 떡밥을 써먹어서 예전에 조조가 서주를 유린한 적이 있어서 자신도 서주 사람들이 위나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잘 알기에 직접 설득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고 서주가 오나라에 붙게 하는 식으로 서주 대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7.16. 토탈 워: 삼국

조조 세력의 첫 딜레마로 언급된다. 역사처럼 서주 침공을 감행할 수 있지만, 사방이 위험 천지인 세력의 위치를 고려해서 도겸에 대한 복수보단 세력을 성장시키는 선택을 할 수 있어 서주 침공의 발발 여부는 플레이어의 판단에 넘겨지는 것. 한편 유비 세력 또한 역사처럼 도겸을 도울지, 아니면 돕지 않고 힘을 기를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첫 딜레마이다.
세 번째 DLC인 배신당한 천하 트레일러에서는 조조가 아버지 조숭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분노하여 자신의 검을 바라보고서는[23] 이후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주로 쳐들어가는 모습으로 끝난다. 이때 분노로 굳어있으면서도 한쪽 입가가 살짝 올라가 있는 표정을 볼 수 있다.

7.17. 삼국지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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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의 인물은 제갈량. 이 시점에선 겨우 13세.
삼국지톡에서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서주를 침공한 조조가 전황이 불리해지자 그냥은 못 간다고 저지른 일로 나온다.

그리고 서주에 붉은 비가 내리는 연출과 함께 창천항로의 묘사처럼 시체로 강을 메운 연출을 보여주었다. 조조의 인기가 높은 작품이지만, 여백사 살해 사건과 이 서주 대학살은 가감 없이 직설적으로 그려냈다. 게다가 이 작품에서는 군웅들이 아닌 서주의 평범한 백성들의 시각에서 대학살의 참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잔혹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낭야중학교 학생들이 " 어떤 미친 놈 죄 없는 민간인을 죽이겠어?"[24]하고 마음을 놓고 있다가 화를 당하며, 위의 사진에 나온 '시체가 강을 메운 광경'은 학살 당시 13살의 어린 소년으로 낭야중학교에 월반을 했던 제갈량이 목격한다. 창천항로에서 이 광경을 유관장 삼형제가 목격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
이 끔찍한 광경을 본 제갈량은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며 쓰러졌고, 이 사건을 계기로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뒤에도 조조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그를 평생토록 증오하게 된다. 형 제갈근도 당시 쓰러진 어린 제갈량을 두고 이 아이는 너무나 영특하여 이 지옥을 결코 잊지 못할 거라고 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다.[25]
조조군의 병사들도 이런 무자비한 살육으로 인해 심신이 피폐해진 모습으로 묘사되어 언데드 비스무리한 몰골이 되었다. 유비는 이들을 보며 "이들도 한때는 백성이었으니 조조에게 협박이라도 당했나 싶었지만 아니었구나"라며 한탄하는 장면을 통해 조조군 하나하나가 이 학살의 책임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26] 조조 본인조차도 아서스 메네실을 연상시키는 피폐한 모습으로 눈에 핏발을 세우고, 학살을 결심하더니 이후로는 광기에 빠져 완전히 망가진 몰골로 등장하고 있다. 전장에서 조조를 다시 만난 유비는, 조조를 향해 " 한때 당신은 내 영웅이었으나, 지금의 당신은 영웅도 악당도 아닌 괴물이다"라고 매서운 비판을 가한다. 여러 모로 '학살의 참혹함을 매우 리얼하게 그려냈다'는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파트를 기점으로 조조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이 추락했다.[27] 이후 조조는 관도대전 편에 들어서야 인기를 일정 수준 회복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영향을 받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한편 이미 서주에서 귀환한 조조가 '아직 도겸을 끝장내지 못했으니 다시 한 번 서주를 치겠다'고 선언하여, 서주 대학살이 실제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음을 몰랐던 독자들은 '이 미친 짓을 한 번으로 끝낸 게 아니란 말이냐'고, 알고 있던 독자들도 '1, 2차를 합쳐서 묘사했던 게 아니었단 말이냐'고 함께 경악했다. 이 일로 순욱 진궁도 조조에게 크게 실망하는데, 그나마 순욱은 자신이 조조를 다시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지만, 진궁은 이미 여백사 일가족 살해 사건으로 조조의 본색을 봤던 터라 그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고 돌아서서 조조를 죽여 없애기로 작정한다.
다만 2차 학살은 1차처럼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조조가 서주성을 공격하는 장면으로 간략하게 넘어간 뒤 다른 인물에 의해 간접적으로 언급된다.[28]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연속으로 두 번이나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은 지나치게 자극적일 수 있으니, 이미 1차를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한 만큼 2차는 묘사를 다소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략적으로도 크나큰 실책이라는 것을 상세히 묘사한다. 당장 이 일로 진궁과 장막은 조조에게 등을 돌렸고, 연주 전체가 반기를 들어 순식간에 갈 곳이 없어지며, 최대 동맹인 원소 또한 불똥이 튀는 걸 막으려고 조조와 연을 끊는다. 이로써 조조는 근거지도 동맹도 잃어 한때 완전히 끈 떨어진 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장기적으로는 순욱과 이때부터 어긋나고 제갈량, 노숙을 비롯하여 서주 출신의 여러 인재들이 각지로 흩어져서 반 조조 세력에 임관하는 나비 효과를 낳는다.
연의에서 서주 대학살이 이후로는 언급이 안 되는 것과 달리, 삼국지톡에서는 꾸준히 조조의 최대 악행으로 재차 언급이 된다. 여러 모로 역대 삼국지 관련 창작물 중 서주 대학살을 사서의 기록에 가깝게 묘사한 작품이다. 시즌 6 관도대전 3화에서 진궁이 유비를 조조와 싸우게 하기 위해 그를 부추기려고 "조조는 시체들로 서주 강물을 막은 괴물이면서 황제를 구한 영웅으로 이미지 포장 및 세탁을 한다."고 욕하며 같이 싸우자고 하지만 그 의도를 알아차린 유비가 단호하게 나오자 한 발 물러난다.
관도대전 24화에서 조조의 부인인 정영옥은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겠다는 조앙을 말리면서 "네가 조조의 아들이 맞긴 하구나. 뼈빠지게 키워놨더니 되고 싶은 게 사람 백정이냐?"고 다그친다.[29] 조조가 서주에서 벌인 학살은 가족마저 손사래를 치는 악행임이 꾸준히 묘사되고 있다. 가후 역시 조조를 '시체로 강을 메우는 색골'이라고 비판하며 그런 아비에게서 태어난 조앙을 안타까워했다. 그래놓곤 쏴죽인다
관도대전 30화에서는 여포의 뒤치기로 서주를 잃은 유비를 따라 조조에게 망명한 미축에게 조조가 높은 관직을 주면서 서주의 민심 좀 잘 달래주라고 요구하는 한편 서주 대학살을 매우 가볍게 여기고 있음을 드러낸다. 조조 曰 "근데 말입니다? 우리가 큰 그림을 봐야지! 쬐그만 원한은 잊고! 함께 나라를 바로잡아야지 않겠소?" 시체로 강을 메립하다시피 한 게 쬐끄만 원한? 애초에 죽는 날까지 서주 대학살에 대해 반성이나 후회가 없던 양반이니 당연한 거지만…
관도대전 37화에서는 하후돈이 유비를 구하러 왔다가 왼눈에 화살을 맞자 화살을 뽑아 직접 눈알을 삼켜버린다. 그리고 그것을 이전을 비롯한 조조군 장졸들이 환호하자, 유비는 경악하면서 서주 대학살은 실수도 아닌 조조 개인이 원하여 조조군 전체가 기꺼이 그 명령을 따르고 실천한 짓임을 깨닫는다.
서주를 빼앗아 점거하던 여포 세력을 토벌한 후 조조가 유비와 함께 서주 백성들을 만나러 나오자 백성들이 환호하여 조조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권력자인 이 몸에게 니들이 별 수 있냐.'며 비웃었지만, 정작 서주 백성들은 유비에게만 환호하고 조조는 안중에도 없어서 조조는 어이를 상실한다. 관도대전 60화에서는 아예 말에 앉아있는 조조를 밀치며 낙마시키는 상황이 벌어지고, 병사들이 칼을 빼들며 조조를 낙마시킨 백성들을 베려고 하자 황급히 말린다. 물론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백성들에게 역으로 린치당해 자기가 죽을까봐 무서워서 그런 것이다. 조조는 벌벌 떨면서 병사들에게 "여기는 적진 한복판이란 말이다!"라고 소리치기까지 한다.

이 장면들을 통해 서주 백성들은 절대 서주 대학살을 잊지 않았으며, 병사들은 그때처럼 조조가 명령하면 망설이지 않고 다시 서주 백성들을 죽여버릴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30] 이 와중에 유비는 조조의 심리를 눈치채고 황급히 자기는 한 거 없고 조조가 여포로부터 서주를 구했다고 립서비스를 해주나, 얕잡아보던 유비의 무서움을 깨달은 조조가 하비로 가려는 유비를 수도인 허창의 자기 옆집에 잡아놓게 된다.
제갈량이 19세로 성장해 재등장한 76~78화 에피소드에서는 제갈량의 PTSD가 됐으며, 고향을 작살내놓고 벌은 안 받고 오히려 잘 나가는 조조의 행보에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며 거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청소년 시기를 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도대전 83화에서는 80~82회에 나온 논영회 에피소드 때 조조가 자신과 유비를 영웅이라고 칭하자, 집에 돌아가면서 서주 대학살은 무슨 밥상에서 물 엎은 것처럼 여기고 있냐며, 영웅은 무슨 얼어죽을 영웅이냐고 속으로 독설을 퍼붓는다.
적벽대전 33화에서 유비가 신야성 백성들을 거둘 때, 원래는 유비가 '피난이 아닌 퇴각이니 따라오면 안 된다. 그대들은 조조의 백성이니 조조가 그대들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리려 했으나 피난민 행렬에 있던 한 노파가 서주대학살 당시의 참상을 기억해내고 '죽는 한이 있어도 따라가겠다'고 외친다. 유비를 따라간 형주 백성들 중에 서주 대학살 생존자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정황을 반영한 묘사이며, 제갈량도 이들이 어린 시절 자신과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유비에게 피난민을 거둘 것을 진언한다. 다만 유비군도 빠듯한 상황이었기에 유비는 이들을 양양성까지만 데려다 주기로 하였으나, 채씨 남매가 자기 백성을 버리고 조조에게 투항하려 하는 바람에 실망한 형주 백성들이 추가로 유비군 행렬에 합세하였고 유비는 이들까지 데리고 남하하기를 결심한다.
다른 삼국지 매체들에서는 대부분 잊혀지는 것과 달리 삼국지톡에서는 잊을 만하면 언급이 되면서 조조의 흑역사이자 치부임을 지속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러한 묘사에 대해 너무 자주 나온다며 싫어하는 독자들도 있다. 허나 유비가 조조에게 실망하고 적대시한 계기가 된 사건이며[31] 후일 유비 진영에 합류하는 제갈량의 인생을 비틀어버린 사건이며, 오나라에도 당시의 피해자가 상당히 많이 있기 때문에 못해도 적벽대전까지는 지속적으로 잊을 만하면 언급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비판은 본 작품에서 조조의 악행을 부각시키거나 조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이 나온 것에 대한 반발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논영회조차 조조를 까는 방향으로 재해석해서 유비가 서주 대학살 얘기를 꺼내며 "영웅은 얼어죽을"이라는 식으로 조조를 조롱하자 댓글창에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조는 죽을때까지 후회하지 않은 일이지만 다른 인물들은 양심이 찔리긴 한 모양이다. 조조의 사촌인 조홍은 시즌 9 27화에서 조비가 아버지를 까자 술을 부어버리고 “너같은 코찔찔이 해피하게 해주려고 내가, 우리 모두가! 천년만년 저주 받을 인간 백정짓 한줄 아냐고!” 라고 일갈할때 배경으로 흑백의 서주 대학살 현장이 나온다.

7.18. 여자 제갈량

초반 프롤로그로 다뤄지며 피난 가는 제갈량과 제갈근이 조조에 대한 원한을 품고 남매가 함께 조조의 군대를 불살라버리겠다고 맹세한다.

7.19. 박봉성 삼국지

국산 삼국지 만화의 숨겨진 명작 취급 받는 박봉성 삼국지는 2000년대 초 작품답지 않게 참신하고 정교한 해석을 시도하는 부분이 여럿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서주 대학살이다.
조조가 서주 백성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충실하게 제시하고 직접적으로 '서주 학살 사건'이라고 언급할 뿐만 아니라, 학살로 인해 극도로 악화된 서주 민심을 묘사하는 한편, 이 때문에 조조가 유비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고 파악한다. 작중 조조는 순욱과 곽가의 경계도 마다하고 유비를 살려두는데 서주 백성들의 민심을 얻은 유비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통치를 안정시키려는 한편 유비를 조조의 앞잡이 정도로 부각시켜 이미지를 추락시키려는 심산이었다.
조조군이 여포를 쫓아내고 서주에 입성하자 분위기는 매우 흉흉했다. 서주 주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고 야유 소리가 들리는 와중, 개선 행진을 벌이는 조조의 말이 돌팔매질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돌을 던진 것은 전쟁통에 아들을 잃은 한 노파로 그 노파는 "네놈 손에 죽은 수만의 원귀들이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거늘… 그 더러운 발로 감히 이 서주 땅을 밟으려 하느냐! 내 아들의 목숨을 살려내라. 이 살인마!" 하고 일갈하다가 조조군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다.
유비는 노파를 구해주며, 조조에게 노파의 잘못을 용서해줄 것을 요청한다. 조조는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서주 백성들이 조조를 적대시하지 않게 달래달라고 넌지시 제안한다. 유비는 제안을 받아 백성들을 위무하며, 서주성에 온 군대는 조조의 군대가 아니라 천자의 군대라는 명분을 드는 한편 '이 군대는 나 유비의 군대나 마찬가지인 셈'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민심을 흡수해 버린다. 이는 조조의 계산과는 어긋난 결과로, 조조는 백성들에게 인망이 있다는 유비를 적당히 민심 수습용으로 써먹으려던 것이었으나 유비는 이를 역이용해 서주가 자신의 땅임을 못박아 버린 꼴이 된 것이다. 조조는 결국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에 분을 삭인다. 유비라는 인물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자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후 서주성에서 유비 삼형제와 재회한 미축은 서주 백성들의 엄청난 환호에 조조가 내심 놀란 눈치라고 평하며, 여포와의 싸움이 끝나면 조조도 서주를 유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장담한다.
학살 자체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서주 주민들이 조조에게 갖는 감정, 그에 얽힌 조조의 노련한 정략과 유비의 맞대응을 대조시켜 라이벌적인 면모까지 부각시킨 데다가 유비에 대한 조조의 경계심 역시 설명해 내었다는 점에서 높은 만화적 완성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2000년대 초에 이러한 해석이 등장해 설득력 있게 전달되었다는 것은 놀라울 정도다.

7.20. 기타

진순신 소설 《제갈공명》에서는 제갈량이 조조에게 출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가 어렸을 적에 겪은 서주 대학살을 설명한다.

작가 권오석의 소설 조조라는 소설에서도 서주 대학살이 언급되었다.

평설 인물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 도겸이 백성들을 인간방패로 내세우고 뒤에 숨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복수를 갈망하던 조조가 도겸의 목을 따러 가는데 방해가 되자 백성까지 죽이면서 전진했기 때문에 학살이 발생했고, 도겸은 더이상 안 되겠다 싶어 유비를 불렀는데 유비는 백성들을 뒤에 숨겨 보호했기 때문에 손건, 미축이 근거지까지 버리고 유비를 따라나선 계기가 된 것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이건 조조와 유비만 돋보이기 위한 전형적인 영웅관 위주의 해석이고, 현실적으로는 말장난에 가까우니 주의하자. 도겸이 어떻게 백성들의 뒤에 숨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백성들을 왜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리도 없기 때문이다.[32]

침착맨은 개인 방송에서 이 사건에 대해 서주 대효도라는 드립을 날렸다. 정확히는 침착맨 팬카페의 한 유저가 '아버지가 죽었다고 그렇게 길길이 화를 내며 끝장을 보려 한 것은 대단한 효심이다'라며 '서주 대학살이 아닌 서주 대효도라고 불러야 옳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소개한 것. 침착맨 본인은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다가, 이후에는 조조가 저지른 학살을 전부 '효도'라고 돌려서 조조를 까는 식으로 써먹었다.[33]

Fate/Grand Order 진궁 전쟁에선 냉혹하게 판단하지만 이건 전투에 있어서는 그 편이 효율적이기 때문이고, 민간인을 상대할 때처럼 전투와 관계없는 상황에서는 나름대로 예절을 지키는데 조조를 따른 이유도 그 역시 자신과 비슷할 거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조는 그 둘을 나눠 생각하지 않는 인물이라 필요 이상으로 냉혹, 잔인하고 많은 희생을 내자 그날로 공사 구분 없는 인간이라 진저리를 치며 우정을 깨고 떠났다고 했는데, 그 공사 구분 없이 벌인 잔인한 사건이 정황 상 이거로 추정된다.

삼국지 가후전에서는 진규가 가후의 동문으로 나오며, 서주가 난세의 피난처 역할을 하므로 이 어마어마한 인구를 잘 정착시켜 서주의 힘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운다. 진궁은 이 책략을 빌려 조조에게 서주를 얻는다면 천하를 얻기 쉬워질거라고 말하며 조조 역시 장차 동탁과의 싸움이 격해지면 서주로 몰려드는 피난민들은 더욱 많아질테니 일리있는 계책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진궁이 서주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조조의 의사와는 별개로 독단적으로 주민들을 도륙하며 가는데, 이것이 서주 대학살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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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에서는 한국처럼 '徐州大虐殺'(서주대학살)이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약간 다르게 '徐州大屠殺'(서주대도살)이라고 표기한다. 바이두 백과사전. ' 도살'이라는 단어가 짐승에 대한 살육이 아닌 살인에 쓰여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중국어에서 도살은 제노사이드의 뜻도 포함된다. 그래서 난징대학살이 중국어로 '南京大屠殺'(남경대도살)인 것이다. [2] <순욱전>에 인용된 《조만전》의 문장이다. [3] <무제기>에 인용된 동진시대 역사가 손성의 평가이다. [4] 그 관대하다는 살라흐 앗 딘조차도 공성 이후 학살을 진행한 바가 있다. 3차 십자군 당시 아크레 공성전이 끝나고 살라흐 앗딘은 예수의 십자가와 1천 명의 기독교도 포로를 반환하고 20만 디나르의 몸값을 내는 조건으로 리처드 1세가 사로잡은 수비대 2,700명을 살려줄 것을 요구했고 리처드는 이를 수락했다. 하지만 살라딘은 예정된 날짜까지 돈을 주지 않았고 화가 난 리처드는 살라딘이 보는 앞에서 포로들을 학살했다. 이에 살라딘도 분노하여 보복으로 케사리아에서 사로잡은 십자군 포로들을 여자를 제외하곤 모두 처형했다. 이처럼 지휘관의 입장에 따라서 함락된 성의 성민들이 저항했다는 이유로 학살된 경우는 흔했다. 사실 성의 저항이 오래될수록 공성군 입장에선 이쯤되면 정규군과 성민들의 차이가 없이 다 적인 경우가 많은데다가 공성이 매우 힘든터라 공성군 역시 독이 바싹 오른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5] 당장 저장성 출신의 장제스나 증국번과 같은 후난성 출신의 마오쩌둥조차도 모두 증국번을 존경했다고 한다. 특히 마오쩌둥에게는 증국번은 동향 선배이자 롤모델 가운데 하나였다. [6] 멀리 갈 것도 없이 겨우 10만 제곱킬로미터 면적을 가진 20세기 후반~21세기 초 현대 한국에서 지역마다 영웅으로 삼는 정치인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당한 갈등을 빚었던 사례가 있을 정도로 지역간 지역 갈등의 문제나 다른 지역의 문제는 남일로 치는 시각은 지금에서조차 매우 흔하다. [7] 사실 중국 내부가 몇몇 산맥이나 큰 강 정도가 장애물이라서 통일을 유지하는 것이며 이런 상황에서도 분구필합, 합구필분(分久必合 合久必分.)이라는 상황은 자주 나왔다. [8] 강( 양쯔강)과 회( 회하) 일대, 넓은 의미로는 강남과 회남 지역, 좁은 의미로는 장강과 회하 사이의 지역, 즉 지금의 장쑤성 안후이성의 중부 지역을 말한다. [9] 《연의》에서 조조가 동탁 암살에 실패했을 때 진궁이 조조를 구해준 걸 뜻한다. [10] 결국 서주대학살이 악행으로 인지되었다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흠결을 남길만한 사항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11] 간혹 학살을 일으킨 나라는 100년 이상 못갔다고 하는데 대량 학살을 저지른 원나라나 청나라는 100년 이상 버텼고 이들 국가들도 학살보다는 정치적인 문제로 망했다. [12] 실제 자료에는 이 모습에 제일 부합하는 사람은 숙적 원소이다. 원씨 가문이 멸문 되었을 때 자기 어머니가 있었다는 소리가 있고, 테러를 일으키려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들키지 않게 사용한다. [13] 서주 대학살을 전략적으로 내세우기에는 무리가 크고, 그렇다고 이를 반영했다가는 조조는 쓰레기가 되기 굉장히 쉽다. 그리고 사람 좋은 유비는 정작 정말로 목숨 걸고 백성을 구한 영웅이라는 구도가 만들어져 버린다. 이를 유비의 야망이라고 치부해도 위선이든 야망이든 눈 앞에 사람을 구하는 행동은 올바른 행동이니 욕하는 것도 이상하다. 애초에 유비를 비난하기 위한 잣대를 그대로 조조에게 적용시켜버리면 조조는 악인이라 하기에도 모자란 존재가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14] 조조의 부하 장병들이 그렇게 많은 수를 죽였다고 소문을 퍼뜨리면 주군의 명예가 더럽혀진다고 만류하지만 곽가는 되려 수를 더 부풀린다… [15] 여기서 제갈량은 10대 초반이었던 현실과 달리 수경팔기로 장성한 나이로 설정되었다. [16] 주로 유비가 저평가되고 조조가 매우 고평가되던 과거에는 이런거 조차 없었으나, 조조의 악행이 본격적으로 수면위로 올라오는 현대에 들어서는 서주 학살이 실제 이벤트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물론 과거 시리즈는 이벤트가 거의 없거나 큼직한 이벤트만 뜨던 점도 감안은 해야할 것이다. [17] 훗날 장판파 전투 등 스토리상으로 조조군이 우세여야 할 다른 전투에서도 이런 양상을 보여준다. [18] 여기서 일행은 기가 막히는 광경을 목격하는데, 시체가 강을 메운 덕분에 강줄기들이 평야로 흘러가서, 수량이 풍부해져 그걸로 농사 짓는 주민들을 보고 '조조의 정치는 (타인의) 피로 백성들을 살찌우는 것인가'라고 분노하게 된다. [19] 곽가가 부정적으로 평가한 부분은 '이렇게 검증된 청주병이라는 살육 병기를 보유하고도 대놓고 천하를 따먹지 않고 법이니, 농정이니 하는 내정에 힘쓰면서 시간 죽이는 이유가 뭐냐'라는 내용이다(…) 선 정복 후 내정의 기초를 모르느냐 [20] 다만 정사에서 도겸은 탐관오리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나름 고증에 맞긴 하다. 그러나 도겸이 조조와 싸웠고, 조숭이 이 과정에서 살해 당했기에 의도적으로 과한 폄하를 받는다는 지적도 있다. 서주 대학살의 결과로 이어지는 아이러니함을 낳았지만, 예전부터 서주에 살던 사람들은 물론 난을 피해온 난민들까지 정착해 살았다는 걸 보면 적어도 서주를 잘 다스린 인물인 건 맞다. [21] 공손찬과 도겸이 같은 라인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유비가 도겸을 도우러 가면서 언급하기는 했다. 같은 라인끼리는 도우며 살아야 한다나… [22] 곽반이 지은 필기 소설집이다. [23] 잘 보면 슬쩍 웃고 있다. [24] 후속 화들에서 조조는 서주 백성들을 벌레 취급하면서 '남김없이 몰살하겠다'고 단언하며, 자기 입으로 '서주는 내가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실수도 뭣도 아니고 명백하게 그리할 의지를 가지고 행한 짓이며, 그에 대해 일말의 죄의식도 없고, 서주 백성들은 모두 죽어 마땅하며 자신이 그들을 몰살해도 된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후에 각주로 ' 조조는 죽을 때까지 서주 대학살을 후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어넣어 확인사살을 했다. [25] 이는 후에 이릉 전투를 앞두고 '촉의 적은 위이기 때문에 오를 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제갈량의 의견에 정당성을 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학살이 벌어지기 불과 몇 분 전까지 제갈량은 내심 조조에게 출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주 출신의 인재들이 다른 지역으로 피난가고서 반 조조 기치를 내세우는 다른 세력에 가게 된 원인이 조조에게 있음을 묘사하는 연출. [26] 훗날 유비는 서주 전투에서 하후돈이 화살에 꿰뚫린 눈을 씹어먹으며 장수들과 웃으며 각오를 다지는 모습에 제정신이 아니라며 서주 대학살은 조조의 독선만이 아닌 부하들의 맹목적인 충성심도 함께한 것임을 깨닫는다. [27] 본격적인 학살 장면이 묘사되기 전까지는 조조에 대한 동정론도 어느 정도 있었으나, 학살 장면 묘사를 기점으로 몇몇 동정론자들도 전부 돌아섰다. [28] 각주로 학살을 또 벌였다고 적혀있기는 하다. [29] 조조와 정부인의 파국을 묘사한 29화의 덧글 중에는 '조조가 밖에서 학살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가족들에게는 잘 해줘서 참았으나 기어이 자기 자식을 병크로 죽게 만든 시점에서 정부인에게 조조는 짐승만도 못한 놈이 됐다.'는 내용이 공감을 받았다. 이외에도 작중에서 정부인은 조조가 불륜을 저지르던 학살을 저지르던 언젠가 천벌받을 거라며 화가 난다기 보다는 같이 산 세월이 얼만데 자기에게 막 대하는 것이 허탈하다는 말도 하였다. [30] 조조가 서주는 자신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당했던 기억을 잊지않았음을 깨닫는 해당 컷에서 "잊겠냐?"라는 모든 독자들의 마음을 정리해주는 짧고 굵은 한마디가 베스트 댓글로 올라갔으며, 다른 베스트 댓글도 "너 같으면 잊겠냐. 강을 시체로 매웠는데?"라거나 "어떻게 잊냐 그걸"이라고 서주 백성들이 자신이 아닌 유비에게 환호를 보내는 걸 이해못하는 조조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31] 정사에서 유비가 한중왕에 등극할 때 쓴 한중왕표에서 조조를 동탁과 형님, 아우 할 학살자라고 깠다. 손권도 조조의 학살과 정벌은 정도가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32] 애초에 (말도 안되지만) 설령 인간방패설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인간방패로 삼은 인간들을 주저없이 썰어버렸다는 점에서 조조의 잔학함이 감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서주대학살의 가해자가 조조 1인에서 조조와 도겸으로 확장되는 것 뿐이고, 수십만의 백성을 학살한 주체는 여전히 조조다. [33] 장판파 전투 당시 조조의 병사들이 조운과 미부인을 포위하고 다가오는 것을 묘사할 때 "병사들이 효도하러(…) 오는데…"라고 하는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