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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半 跏 思 惟 像
반가사유상은 반가부좌를 틀고(半跏) 현세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한 상념에 잠긴(思惟) 미륵보살을 표현한 모든 형태의 불상을 가리키는 유물명이다. 반가(半跏)는 본디 땅바닥에 앉아서 하는 반가부좌(半跏趺坐)의 줄임말이지만, 여기서는 의자에 앉아 오른발을 왼 무릎에 얹은 자세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영어로는 Bodhisattva in pensive position 또는 Pensive Bodhisattva라고도 한다.
2. 상세
우리나라에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반가사유상은 국보 1962-1, 1962-2, 1964(각각 구 제78·83·118호), 보물 제331·643호 등 여러 점이 있는데 본 문서에서는 이 중 대중적으로 유명한 국보 제78호와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을 중점적으로 설명한다.각각 국보 제78호, 제83호에 지정된 이 두 불상은 삼국이 한창 피 터지게 싸우던 시기인 6~7세기 만들어진 유물로,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운 고대 불교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여느 문화재들과 달리, 이 두 불상은 ' 사유의 방'이라는 전시관 하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만큼 특별하고 귀하게 취급받고 있다. 두 불상 모두 위대한 걸작이지만 굳이 우열을 논하자면 83호가 평가가 조금 높은 편이다. 화려함의 정도는 78호가 앞서지만 옷 주름이나 손가락 등의 세밀한 표현기법과 사실성, 입체성의 기준에 있어 83호가 더 훌륭하다고 평가받으며 도무지 국적을 종잡을 수 없는 78호와 달리 83호는 신라로 의견이 모아진 상태라 연구에도 용이하다.
또한 일본 고류사의 목조반가상과의 유사성 등을 토대로 삼국시대의 한일관계 연구에서도 칠지도, 목화자단기국 등의 문화재와 더불어 가장 의미 있게 논의되는 유물이기도 하다. 또한 사이즈 역시 10 cm 가량 83호가 더 크기도 하고 무게는 112.2kg으로 37.6kg인 78호보다 3배 가량이나 더 많이 나간다. 한국사 교과서의 표지나 내용에 수록된 사진에서도 78호보다 출현 빈도도 훨씬 높고 대중적 인지도 역시 더 높다. 83호가 더 수법이 뛰어나기 때문에 학자들은 78호가 6세기 후반, 83호는 그보다 반세기 더 늦은 7세기 초반 즈음에 만들어졌다고 추정한다. 해외 박물관에서도 83호의 전시 요청이 훨씬 많고 실제로 83호가 훨씬 많이 출국하기도 했다. 요즘은 문화재 보호 등의 이유로 거의 뜸해졌지만. 참고로 문화재 보험 가격은 78호가 약 300억, 83호가 약 400억 정도로 측정되었다.
국보 78·83호 두 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의 불교 문화재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보러 온다.'는 마니아 그룹까지 생겼다. 박물관 큐레이터가 유물을 설명해주는 ' 큐레이터와의 대화' 시간에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유물이다. 모 회사원은 "반가사유상을 보고 있으면 영혼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라고 말했으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본래 2개 모두 한 번에 보여줄 수도 있지만, 문화재의 특성과 관리로 인해 보통 6개월에 한 번씩 로테이션을 도는 것처럼, 한 불상이 6개월 동안 전시되는 동안 나머지 하나는 수장고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문화재연구소로 옮겨져 연구대상이 되거나, 또는 보존실로 모셔져 특수 약품 처리를 받으러 간다. 그러나 2020년 8월 25일부터 2021년 2월 14일까지 국보 78호 반가사유상과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을 각각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내 1층 특별전시실과 3층 불교조각실에 나누어 전시 중이니 두 유물을 모두 관람하고자 한다면 이 기간 내에 방문하도록 하자. 2021년 2월 3일,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주요 업무계획을 발표하며 2층 기증관 입구에 440m2 전용공간을 만들어 두 반가사유상을 동시에 전시하겠다고 밝혔다. 10월 28일 전시를 위해서 약 100일간은 전시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공식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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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2일부터 전용 전시 공간인 '사유의 방'에서 두 반가사유상을 동시에 볼 수 있게 되었다. 연합뉴스, 국립중앙박물관 공식 유튜브1, 국립중앙박물관 공식 유튜브2
해외 문화 교류로 외국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총 9번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특히 2013년 10월 말에는 세계 최대급 박물관으로 꼽히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신라 특별전 전시를 위해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반출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13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협약을 맺고 2013년 10월부터 2014년 2월까지 신라 특별전을 열기로 하면서 국보, 보물 26점을 포함, 130여 점의 신라 문화재를 보내기로 했다. 이어 국립중앙박물관이 문화재 반출 신청을 했는데 문화재청은 일부 문화재를 제외하는 조건으로 조건부 허가를 해줬다. 이때 그 제외한 일부 문화재에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포함됐는데 문화재청은 이 반가사유상이 지금까지 지나치게 자주 해외로 반출됐었으며(이전까지 8번 반출) 이렇게 자주 반출되다보면 호암 금동관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으로 반출됐다가 파손됐던 것과 같은 사례들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반출을 반대했다. 특히 이 무렵 임명된 변영섭 문화재청장의 반대가 컸다고 한다.
2013년 4월, 문화재심의위원회가 열렸는데 여기서는 운송 및 포장을 더 보완하고 앞으로 이런 장기간의 대여를 자제하라는 조건으로 반가사유상을 포함해 문화재 전부를 반출해도 된다는 허가를 내렸다. 그런데 7월,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가 '조건부 허가'를 했기 때문에 반가사유상 포함 3점[1]을 제외한 나머지 23점만 반출을 허가한다고 국립중앙박물관에 통보했다. 그러자 이번엔 청와대와 문화재청의 상급기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난리가 났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신라 특별전에는 뒷이야기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이었던 시절인 2009년에 이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박물관 관장에게 한국관의 규모가 너무 작은 거 아니냐고 물어봤고 이에 관장은 앞으로 규모도 키우고 특별전도 하겠다고 화답했던 것. 그 이후 열린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첫 한국 특별전이 이 신라 특별전이었던 것이다.
그런 신라 특별전의 핵심 유물인 반가사유상이 제외되자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매우 아쉬우며, 이 유물 없이 특별전을 해야 할지 검토해보겠다며 사실상 반가사유상을 보내주지 않으면 특별전을 열지 않겠다는 뉘앙스의 입장을 보내왔다. 결국 모철민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수석과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세계 유명 박물관에 한국 유물을 전시하는 좋은 기회인데 왜 반대하냐며 변영섭 문화재청장을 설득하고 나섰고 변영섭 청장도 이런 상황에서는 버틸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반가사유상은 반출 허가가 떨어졌다. 그리고 3달 후, 변영섭 청장은 숭례문 부실 복원에 대한 책임으로 경질됐다.
한 번 해외로 나갈 때는 문화재 보험에 들게 된다. 이 정도 국보급 유물이 해외에 나갈 때는 보통 빌려 가는 국가 정부에서 직접 보험금 지급 보증을 서는 경우가 많다. 이때 보험금이 1990년대 말에 이미 약 300억 원, 2013년 미국 반출 때는 약 500억 원으로 책정되었다. 하지만 통상 보험평가액은 실거래 금액의 10분의 1 정도로 산정함을 고려한다면 이 반가사유상 2점은 수천억 원을 호가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불상들의 역사성과 작품성 등을 따진다면 실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이 두 불상은 공통의 의문점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출토지가 어디인지 확실히 모른다는 것이다. 가장 완성도 높고 유명한 국보 78호와 83호 두 문화재는 직접 발굴해 소장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도굴한 것을 박물관이 거액의 돈을 주고 사 온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학계에서는 78호에 대해서는 신라 제작설이 약간 우세하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한 정도고, 83호는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상당히 높게 보고 있다. 둘 다 아직까지 100% 확신할 수 있는 증거는 없으나 대략적으로 통일신라 이전의 것이라는 것만 확실하다고 결론지었다.
3. 국보
3.1. 국보 (1962-1), 구 제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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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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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명칭 | 한글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1)[구분번호] |
한자 |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1962-1) | |
영어 | Gilt-bronze Pensive Maitreya Bodhisattva(1962-1) | |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 |
수량/면적 | 1구 |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
시대 | 삼국시대 6세기 초반[3] |
무게 37.6kg, 높이 81.5cm. 국보 제78호의 경우 일본인 골동품상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에게 바쳤던 것을 총독이 조선총독부 박물관(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신라 제작설이 가장 우세한 편이긴 하지만 백제와 고구려 제작설도 상당히 심도 있게 거론되고 있다. 특히 신라 제작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경상북도 봉화군의 석조 반가사유상의 하반신 옷주름이 판박이다.
신라 제작설의 경우에는 신라에서 불교, 특히 미륵사상이 가장 유행했다는 사실과 이로 인해 삼국 모두 반가사유상을 제작하긴 했지만 신라에서 특히 유행해 많이 제작되었다는 점이 주 근거로 활용된다. 그리고 출토 장소가 명확하진 않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출토되었다는 증언이 존재하는 점[4], 백제 제작설이 언급되는 보물 331호 반가사유상이 인체를 길쭉하게 표현한 것에 비해 78호 역시 다른 신라계 반가사유상 유물들과 체형 묘사가 닮았다는 점이 있다.
한편 백제 제작설의 경우 이 불상의 양식이 83호처럼 전형적인 신라 양식이 아닌 백제 양식에 가깝다는 점(정작 그 가깝다는 백제 양식은 무얼 말하는 지 실체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 논거로 활용되며 고구려 제작설 역시 이 상이 전형적인 북위의 양식을 따르는데 이 양식이 고구려에서 널리 유행했다는 점을 주 논거로 활용한다. 실제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지낸 강우방 박사는 78호 사유상에 대해서 문화 전파경로와 고구려에 전해진 북위 불교미술 양식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고구려 불상으로 판단한 바 있다.
3.2. 국보 (1962-2), 구 제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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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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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명칭 | 한글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구분번호] |
한자 |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1962-2) | |
영어 | Gilt-bronze Pensive Maitreya Bodhisattva | |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 |
수량/면적 | 1구 |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
제작시기 | 삼국시대 7세기 초반[6] |
무게 112.2kg, 높이 90.8cm. 국보 제83호에 대해, 일제강점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입수 기록에는 "국보 83호는 1912년 당시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이 일본인 골동품상에게 2600원(지금 돈으로 약 4억 7천만원[7])을 주고 구입했다."라고 적혔다.
이 작품이 출토된 지역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으며, 옛 백제 지역( 충청도 지역)의 사람들과 옛 신라 지역( 경상도 지역)의 사람들은 서로 자기 고장의 유물임을 주장하며 다툰다.
출토지가 불분명하게된 이유는 이 불상이 체계적인 발굴조사 과정을 통해 발굴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도굴꾼들이 찾아낸 장물이었기 때문이다. 도굴꾼들의 우두머리인 가지야마 요시히데는 이 불상의 출토지에 대해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1912년에 83호 불상을 사들인 이왕가 박물관의 일본인 관장은 "경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짐작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널리 알린 세키노 타다시는 1933년 발표한 논문에서 경주시 남쪽 오릉 부근 폐사지에서 출토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학자인 이네다 하루미즈는 1915년 발표한 논문에서 1910년 충청도 벽촌에서 발굴되었다고 주장하는 등, 불상의 출토지에 대한 주장이 엇갈린다. 두 불상 모두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모의고사에서 특정 지역을 연결하면 오답으로 처리되며, 삼국시대라고 뭉뚱그린 경우에만 정답으로 인정된다. 공무원 수험서 역시 확실한 제작지를 알 수 없다고 서술된 경우가 많다. 현재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는 경주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나와 있다.
83호는 신라에서 제작했을 가능성이 매우 유력하다. 83호의 신라 제작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우선 83호와 매우 유사한 일본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본 고류지의 창건자가 신라 계통 도래인 성씨인 하타씨를 쓰는 하타노미야츠코 카와카츠(秦造 何勝)이며, 《 일본서기》에 623년 신라에서 온 귀한 불상을 이 절에 모셨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또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재질이 한반도에서만 자라는 적송 소나무인데, 적송 소나무는 특히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 많이 자란다. 정밀 분석 결과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소나무가 경북 봉화군에서 자라는 소나무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과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가진 83호 금동반가사유상 역시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데 크게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는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어 일본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고, 일본 사학계도 이를 인정한다.
또다른 근거로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의 반원 세 개를 이어붙인 모양을 한 보관(삼산관, 三山冠)은 신라에서 제작된 반가사유상에서만 고유하게 발견되는 형태이다.
또한 그동안 경상도 지역에서 출토된 다른 반가사유상과 공통점이 있다는 것도 중요한 근거다. 1966년 경상북도 봉화군 북지리에서 발견된 석조반가사유상(보물 997호)과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의 옷주름이 매우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비록 북지리 반가사유상은 하반신 부분 일부분만 남아있지만 오른다리 아래의 옷주름 양각 묘사는 거의 판박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초기부터 신라 권역이던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 유산리[8]에서 출토된 양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역시 옷주름 양각 묘사를 비롯해 전체적으로 밀접한 양식임을 알 수 있다. 2018년 4월에는 강원도 영월에 있는 신라 절터인 흥녕선원지에서 신라에서 제작된 금동반가사유상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석조가 아닌 금동으로 제작된 반가사유상 중에서는 그 출처가 명확하게 밝혀진 유일한 금동반가사유상이다. 흥녕선원지 금동반가사유상은 신라 반가사유상 고유의 특징인 '삼산관'을 쓰고, 전반적으로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을 축소한 형태라 83호의 신라 제작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위 서술과 같이 일제강점기 당시 경주에서 출토되었다는 증언이 여럿 있었던 것도 신라설에 힘을 보탠다. 상술했다시피 충청도에서 발굴되었다는 당대 증언도 없진 않지만 경주에서 출토되었다는 증언이 숫적으로 훨씬 우세하다.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신라특별전에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전시되었다는 점은 83호의 신라 제작설을 정론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한 고증으로 유명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측이 국립중앙박물관과 문체부에 수차례 요청한 끝에 83호의 전시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고로 당시 83호의 지나친 해외반출을 우려한 문화재청은 메트로폴리탄에 78호를 대신 전시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메트로폴리탄 측에서는 신라특별전에 백제의 유물일지도 모르는 유물을 어떻게 전시하겠냐며 반문했다는 일화가 있다.
참고로 83호에 있어서 백제 제작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요 근거는 남북국시대가 아닌 삼국시대에 백제나 고구려가 아닌 신라가 이렇게 세련된 걸작품을 만들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잘못되었다.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금속공예작품을 봐도 백제에 밀리지 않는 솜씨를 자랑한다. 신라 금관 세트나 두 쌍의 감은사지 사리함 등이 그 증거다. 감은사지 사리함은 비록 삼국통일 직후 작품이지만 고구려 백제의 멸망 직후에 만들어졌기에 그들의 기술과 인력이 통일신라 사회로 녹아들기 전이다. 중국과 거리가 먼 특성상 신라가 국가 발전과 중앙집권화가 가장 늦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 반가상들의 제작년대로 추정하는 6세기~7세기에는 이들의 문화가 여전히 고구려, 백제보다 뒤떨어졌다고 볼 근거가 전혀 없다.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본래 얼굴을 알 수 있는 금칠 일부 복원버전 by 문화유산기술연구소 |
사실 자료 부족으로 많은 부분을 추론에 의존하고 있는 고대사 연구의 특성상 이 정도 근거면 충분히 교과서에 정론으로 실리고도 남는다. 하지만 지역 학계의 이기주의로 인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에 대한 논쟁의 결론이 나지 않고 있는 점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현재 중고교 교과서에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 아예 교과서에 싣지 않은 경우도 많다.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유산인 금동반가사유상이 우리나라 교과서에서조차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다는 점은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국립중앙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금동반가사유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라거나 유력하다고 서술한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 일부 문서에는 83호가 신라에서 제작되었다고 명시적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전국역사교사모임'이 저술한 『처음 읽는 일본사』에서는 일본 고류지 반가사유상의 소나무가 경북 봉화군의 것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백제의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공영방송인 EBS의 대표 국사 강사 최태성도 금동반가사유상이 백제에서 제작되었다고 가르쳤다. 다만 최태성은 이후의 강의에서는 삼국시대에 제작되었다고 정정하여 가르친다. 여하튼 최근에는 이러한 서술이 많이 정정되고 있는 추세다.
실제 선덕여왕의 얼굴이 반가사유상의 모델이라는 주장이 있다. #
3.3. 국보 (1964), 구 제1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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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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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명칭 | 한글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4)[구분번호] |
한자 |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1964) | |
영어 | Gilt-bronze Pensive Maitreya Bodhisattva | |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리움미술관 |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 |
수량/면적 | 1구 | |
지정연도 | 1964년 3월 30일 | |
제작시기 | 삼국시대 6세기 후반 |
국보 제118호는 제78호, 83호와 달리 출토지가 명확하며 1944년 평안남도 평양시 평천리에서 공사 중 출토됐다. 다만 땅 속에 오래 있었는지 녹이 많이 슬었고 불에 탄 흔적도 있는 등 훼손이 많이 보여 상기한 두 반가사유상에 비하면 상태가 불량한 편이다.
평양에서 출토됐기 때문에 고구려 제작설이 우세하지만 명시적 증거는 없기 때문에 일단 문화재청은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공식적 분류상으로는 삼국시대로 분류하고 있다. 그래도 이 불상의 존재만으로도 반가사유상이 꼭 백제와 신라에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고구려에서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 가치가 매우 높다.
이 불상은 삼성전자 전 회장인 이건희가 소유했던 것으로 유명하며 지금도 리움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4. 반가사유상의 성격과 의미
상이 표현하는 대상이 정말로 미륵보살이 맞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논란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 고뇌하는 모습, 혹은 출가를 막 결심한 모습을 나타낸 표현이라고 하여 태자(太子)사유상이라고 하기도 한다. 사실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이라는 설의 발원지인 일본에는 관음보살 반가사유상도 있다. 현재는 미륵보살이라는 설이 가장 대중적이지만 일부 권위 있는 학자들이 반대 의견을 내기도 한다.불상 전파에는 크게 두 가지 경로가 있다. 불교의 본산이던 인도에서 바다를 따라 동남아와 중국 남부를 거쳐 한국, 일본에 전해지는 경로와, 인도에서 북쪽 중앙아시아를 통해 티베트 위쪽의 실크로드(사막, 고원)를 거쳐 육로로 전파되는 경로다. 전파 경로에 따라 인도 내의 발상지와 종파가 다른데, 여기서 불상의 모습이 여럿으로 갈린다. 가령, 유명한 간다라 지역 불상은 헬레니즘 영향을 많이 받아 고대 그리스 석상 양식의 특징을 많이 가졌다면, 마투라 지역이나 굽타 왕조의 불상에서는 인도인 석상의 영향을 받은 모습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여러 불상과 미륵 반가상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
때문에 옷이나 관, 그리고 손가락의 특징에 따라 불상의 성격을 추측하는데, 문제는 반가사유상이 취하는 자세가 석가모니불이 보리수나무에서 번뇌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으로도 볼 수 있고,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사유하는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경우 일부 반가사유상은 불상에 태자사유상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전자가 맞다고 공인되며, 일부 반가사유상은 혼란기인 위진남북조시대에 미륵 신앙 유행과 함께 등장하였으므로 미륵불일 개연성이 상당히 높다. 그러나 한반도의 반가사유상은 어떤 불교 교리와 연관되어 등장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에 여러 학설이 분분하지만 공통으로 삼국 시대에 등장한 왕즉불 사상인 호국 불교에서 출현했다고 본다. 전쟁이 이어지던 삼국시대에서 미래에 부처가 혼란한 세상을 구원한다는 미륵불 신앙이 유행한 것이다. 왕실에서도 이를 수용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신라는 왕족들의 이름을 석가모니 가족들의 이름과 동일하게 지었다. 왕자의 이름을, 불교에서 성왕으로 묘사되는 전륜성왕에서 따오기도 했다.
특히 신라는 화랑을 미륵불의 화신으로 여겼으며 화랑들이 전투를 했던 영역에서 거대 반가사유상이 발견된다. 경북 '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보물 제997호)은 하반신만 남아 있지만, 이 하반신을 통해 전체 모습을 추정하면 복원 추정 높이 2.5m로 세계에서 가장 큰 반가사유상이며, 옷주름 형태가 83호 금동반가사유상과 매우 흡사하다. 삼국의 반가사유상이 미륵불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남아 있는 기록과 유행하던 신앙, 혼란한 시대상을 통해 추측건대 한반도에서 기술적, 심미적으로 완성된 형태의 반가사유상이 많이 발견된 것은 미륵불을 통해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염원했던 민중의 바람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10]
5. 일본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과의 연관성
좌측이 한국의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우측이 일본의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다. |
불상 전체가 소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일부 부분에는 일본에서만 자라는 녹나무를 쓴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전해진 재료를 가지고 일본에서 만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쇼토쿠 태자가 신라에서 받아온 귀한 불상을 모셔 절을 지을 것을 명하고, 이 명을 받는 사람이 신라계로 추정되는 도래인인 하타씨(秦氏) 일족의 하타노미야츠코 카와카츠(秦造 河勝)였기 때문에 신라에서 온 불상이라는 설이 더 강력하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하타씨의 시조인 유즈키노키미(弓月君)는 진시황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신찬성씨록과 일본서기에 백제에서 귀화했다는 기록이 나오므로 백제계 도래인으로 보기도 한다. 진시황의 후예라는 이야기는 자칭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건 하타 항목 참고.
그러나 메이지 시대, 약 100여 년 전쯤 고친 얼굴 부분이 달라졌다. 미묘한 차이라고 볼 수 있지만, 결국 그 미묘함이 한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만드는 것이므로, 이는 일본의 이 상을 평할 때 반드시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점이다. 또한, 한국의 반가사유상과 매우 비슷하지만 다른 부분도 관찰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언론 기사 등을 통해 종종 일본의 국보 1호라고 소개 되는데, 정확히는 '미술품 조각 부문의 제1호'다. 덧붙여 역시 한일간 역사 논쟁 유물 중 하나인 칠지도는 '미술품 고고(考古)자료 부문의 제15호'다. 일본 현지에 가보면 고류지 반가사유상이 국보 1호라는 걸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다. 일본 인터넷에서 국보1호를 검색해 봐도 이 고류지 반가사유상을 국보 1호로 소개하는 사이트와 서적들이 많다.
고류지에서는 이 반가사유상 외에 국보로 지정된 반가사유상이 하나 더 있다. 구분을 위해서 위의 반가사유상은 보관미륵, 뒤의 반가사유상은 우는 미륵 혹은 보계(상투)가 높이 틀어져 있어 보관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보계 미륵이라고 부른다.
반가사유상을 비롯한 고류지의 여러 국보급 불상들은 절 내부의 전시관격인 '신레이호덴(新霊宝殿)'에서 전시하고 있으며 교토를 찾는 관광객들이 손쉽게 찾아갈 수 있다. 절 자체는 입장료가 없지만 신레이호덴은 800엔 입장료를 받는다.
6. 이외의 다른 반가사유상 유물 목록
-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 경주 송화산 석조반가사유상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반가사유상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보물 제331호)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보물 제643호)
- 김천 양천동 금동반가사유상
-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
- 수염이 그려진 금동반가사유상
- 안동 옥동 금동반가사유상
- 양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 영월 흥녕선원지 출토 금동반가사유상
- 하버드 미술관 소장 신라 금동반가사유상
- 황룡사 금동반가사유상 머리
7. 여담
- 국립중앙박물관은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처럼 국보 반가사유상 두점을 박물관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만들기 위해 별도의 브랜드 사업 예산을 편성하고 특별전시실인 사유의 방을 마련하여 두 점을 동시에 전시하였다. 이는 전례가 없던 파격적인 일로 전국적 관심을 받았다. 또한 대외적으로 이를 홍보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에 27m에 달하는 초대형 반가사유상 디지털 영상을 걸었다 #
- KBS 1TV의 교양 프로그램 천상의 컬렉션 4회에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대표 문화재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 얼굴 부분에다 담배를 합성한 짤방이 유행한 적이 있다. 부처님마저도 답답해서 담배를 꺼내야 할 정도로 답이 없는 상황에서 그 심경을 묘사할 때 쓰였다.
- 경북대학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997호 '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은, 양식 면에서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매우 흡사하다. 국보 제83호를 확대해서 돌로 만들었다면 딱 이 석조반가상처럼 되었을 것이다. 1966년 발견된 이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은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의 신라제작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석조반가상은 상반신과 발이 인위적으로 파괴되고, 현재 하반신과 연꽃 모양 발 받침대만이 남았다. 그런데 이 하반신만 해도 높이가 160 cm라 상반신까지 있었으면 말 그대로 심히 크고 아름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북대 박물관 제7전시실에서 항시 전시 중이니 대구에 거주하고 있는 반가사유상 덕후라면 일부러라도 가서 꼭 볼 것을 추천한다. 실물로 보면 그 웅장함과 섬세함에 입을 다물 수 없을 것이다.
- 굽시니스트가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 반기문을 풍자할 때, 시사인 455호 '반총장어의 생태'편에서 반가사유상으로 패러디하기도 했다.
- 한 아티스트가 사탕을 먹고있는 '반가감유상(半跏甘惟像)'로 패러디했다. #
- 2017년 1월 7일, 일본 교토(京都)시의 한 절에 있는 청동 반가사유상이 1000여년 전 한반도에서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일본 연구진의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NHK가 보도했다. #
-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2013년 11월 4일부터 2014년 2월 23일까지 진행한 신라시대 유물전에 몸소 다녀오시기도 했다. 이 전시회의 부제가 'The Kingdom of Gold', 즉 '황금의 왕국'이었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이 훼손 우려를 이유로 반출에 난색을 표했던 일이 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뉴욕으로 갈 수 있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도 이 반가사유상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해 전시회 알림 포스터의 표지모델(?)로 등장시켰을 정도.
- 고대에 제작된 한국과 일본의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은 재질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2018년 1월 31일. 연합뉴스에 의하면, 국립중앙박물관은 오사카대학을 비롯한 일본 연구기관과 함께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진행한 반가사유상 과학 조사 연구의 결과를 담은 보고서 '한일 금동반가사유상'에서 한국과 일본에 있는 금동반가사유상 43점의 성분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 한국 반가사유상은 구리·주석 합금이나 구리·주석·납 합금, 구리·납 합금이 많고, 순동제는 단 한 점도 없다고 분석됐다. 반면, 일본에서 만들어진 금동반가사유상은 구리만 넣은 순동제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인해 소재지는 일본이지만, 불상을 만든 나라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었던 간쇼인(觀松院) 반가사유상과 나치(那智) 경총(經塚·경전을 묻은 무덤) 반가사유상의 성분이 한국 불상과 유사해 한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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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에는 한일국교 정상화 50주년을 계기로 한국의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주구사 목조반가사유상을 공동 전시하는 특별전을 국립중앙박물관과 도쿄국립박물관에서 각각 열었다.
뉴스 영상 두 불상 모두 한일 쌍둥이 반가사유상에 밀리는 각국의
2인자 반가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판매하는 굿즈 가운데 하나인 미니어처 반가사유상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RM이 자신의 작업실에 놓인 반가사유상 미니어처가 공개되면서 팬들의 must-have 아이템이 됐기 때문. 국립중앙박물관 문현상 파트장에 따르면 해당 제품은 재고도 다 매진되었고 주문제로 4차 제작에 들어갔으나 이 역시 70%가 예약이 된 상태라고 한다. 기사 2022년 1월 기준 6차 제작까지 진행됐으며 예약 주문조차 어려운 상태라고 한다. 영상
- 118호 반가사유상의 경우 보존 상태나 예술성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국보로 지정될 수준은 아니지만, 이 반가사유상의 경우 평양 근교에서 발견되었기에 고구려의 것으로 거의 확실시되고, 남한의 지리적 여건상 현재 대한민국이 보유 중인 고구려 유물이 많지 않은데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 반가사유상은 사실상 유일한 수준이라 그런 점을 모두 고려하여 국보에 지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이 유물이 신라나 백제의 문화재였다면 이 정도의 가치로는 국보나 보물이 아닌 지역문화재로 지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보기보다 비율이 과장되어 오른팔의 길이가 길다. 당장 똑같은 자세를 취하려 할 때 허리를 더 구부려야 비슷해지는데 그렇게 되면 반가사유상 같은 완만한 등이 나오질 않는다.[11]
[1]
나머지 2점은 국보 제91호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국보 제195호
토우장식 장경호
[구분번호]
번호제가 폐지되어 동명의 유물들과 구분하기 위해 이름에 번호가 따로 붙었다.
[3]
이 반가상은 고구려, 백제, 신라 제작설이 모두 존재한다.
[4]
영주 초암사(草庵寺)라는 절에 있었다는 설이 있다
[구분번호]
[6]
78호와 달리 이 반가상은
신라 제작설이 학계 정설이며 고구려 제작설은 아예 없다.
[7]
이전에 지금 돈으로 20억원이라고 쓰여 있었으나, 인플레이션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보다 쌀 가격을 기준으로 잡는 편이 더 현실에 가까운 금액이 나온다. 당시 쌀 한 가마를 살 때 가격이 1원으로, 2600원이면 쌀 2600가마를 살 수 있는 돈이다.
[8]
이후 물금면에서 양산읍으로 옮겨져 지금은
유산동(양산)이다.
[구분번호]
[10]
출처: 2015년 한림대 사학과 고고미술사학회 학술집에서 내용 요약. 여러 논문을 참고해 만든 것으로 모든 참고문헌을 다 열거할 수 없어 학술집 이름을 대표로 남김. 강우방과
황수영 그리고 국립박물관 서적들을 주로 이용
[11]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당시 참선의 자세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