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고교철권전 터프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은 미야자와 키이치(고교철권전 터프)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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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 메이지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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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이토 히로부미 | 구로다 기요타카 | 야마가타 아리토모 | 마쓰카타 마사요시 | |
<rowcolor=#c3c965>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이토 히로부미 | 마쓰카타 마사요시 | 이토 히로부미 | 오쿠마 시게노부 | |
<rowcolor=#C3C965>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이토 히로부미 | 가쓰라 다로 | 사이온지 긴모치 | |
<rowcolor=#C3C965> 제13대 | 제14대 | |||
가쓰라 다로 | 사이온지 긴모치 | |||
[[다이쇼 시대| 다이쇼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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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제17대 | |
사이온지 긴모치 | 가쓰라 다로 | 야마모토 곤노효에 | 오쿠마 시게노부 | |
<rowcolor=#C3C965>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제21대 | |
데라우치 마사타케 | 하라 다카시 | 다카하시 고레키요 | 가토 도모사부로 | |
<rowcolor=#C3C965>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제25대 | |
야마모토 곤노효에 | 기요우라 게이고 | 가토 다카아키 | 와카쓰키 레이지로 | |
[[쇼와 시대| 쇼와 시대
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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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와카쓰키 레이지로 | 다나카 기이치 | 하마구치 오사치 | 와카쓰키 레이지로 | |
<rowcolor=#C3C965>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
이누카이 쓰요시 | 사이토 마코토 | 오카다 게이스케 | 히로타 고키 | |
<rowcolor=#C3C965> 제33대 | 제34대 | |||
하야시 센주로 | 고노에 후미마로 | |||
[[쇼와 시대| 쇼와 시대
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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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제37대 | |
고노에 후미마로 | 히라누마 기이치로 | 아베 노부유키 | 요나이 미쓰마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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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후미마로 | 도조 히데키 | 고이소 구니아키 | 스즈키 간타로 | |
[[쇼와 시대| 쇼와 시대
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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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제43대 | 제44대 | 제45대 | 제46대 | |
시데하라 기주로 | 요시다 시게루 | 가타야마 데쓰 | ||
<rowcolor=#C3C965> 제47대 | 제48-51대 | 제52-54대 | 제55대 | |
아시다 히토시 | 요시다 시게루 | 하토야마 이치로 | 이시바시 단잔 | |
<rowcolor=#C3C965> 제56·57대 | 제58-60대 | 제61-63대 | 제64·65대 | |
기시 노부스케 | 이케다 하야토 | 사토 에이사쿠 | 다나카 가쿠에이 | |
<rowcolor=#C3C965> 제66대 | 제67대 | 제68·69대 | 제70대 | |
미키 다케오 | 후쿠다 다케오 | 오히라 마사요시 | 스즈키 젠코 | |
<rowcolor=#C3C965> 제71-73대 | 제74대 | |||
나카소네 야스히로 | 다케시타 노보루 | |||
[[헤이세이 시대| 헤이세이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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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제74대 | 제75대 | 제76·77대 | 제78대 | |
다케시타 노보루 | 우노 소스케 | 가이후 도시키 | 미야자와 기이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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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모리히로 | 하타 쓰토무 | 무라야마 도미이치 | 하시모토 류타로 | |
<rowcolor=#C3C965> 제84대 | 제85·86대 | 제87-89대 | 제90대 | |
오부치 게이조 | 모리 요시로 | 고이즈미 준이치로 | 아베 신조 | |
<rowcolor=#C3C965> 제91대 | 제92대 | 제93대 | 제94대 | |
후쿠다 야스오 | 아소 다로 | 하토야마 유키오 | 간 나오토 | |
<rowcolor=#C3C965> 제95대 | 제96-98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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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기이치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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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919년 10월 8일 | ||
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現 도쿄도 도쿄도 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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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7년 6월 28일 (향년 87세) | ||
도쿄도 시부야구 | |||
재임기간 | 제78대 내각총리대신 | ||
1991년 11월 5일 ~ 1993년 8월 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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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가족 |
미야자와 유타카 (부친) 미야자와 히로시 (동생) 미야자와 요이치 (조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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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녀 | 미야자와 에마 | ||
학력 |
도교고등사범학교 부속 소학교 (졸업) 무사시 고등학교 심상과 (졸업) 무사시 고등학교 고등과 (졸업)[1]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 /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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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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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 |
히로시마 선거구 (참) 주고쿠 권역 비례대표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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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선수 |
2 (참) 12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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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대수 |
3-4, 5-6 (참)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중) |
||
약력 |
고등문관시험 합격 대장성 관료 오히라 마사요시 비서관 이케다 하야토 비서관 참의원 의원 제12-13·17-18·29대 경제기획청장관 중의원 의원 제32대 통상산업대신 제103대 외무대신 제44대 내각관방장관 제88-89·제105-107대 대장대신(부총리 겸직) 제28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제18대 농림수산대신 제56대 우정대신 제15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78대 내각총리대신 초대 재무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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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관료 출신 정치인. 제78대 내각총리대신이자 55년 체제의 마지막 총리이다.2.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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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도에서 태어났다. 본적지는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2] 아버지는 야마가타 기선에서 근무하고 있었지만, 정계 진출을 꿈꾸면서 고향에 텃밭을 다져놓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42년 대장성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누마즈 세무서장을 거쳐서 전쟁이 끝났을때는 대장성 본청에서 전쟁 보험 업무를 담당했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에서 오히라 마사요시와 함께 츠시마 주이치 대장대신의 비서를 지냈고 1949년에는 이케다 하야토 대장대신 밑에서 비서관으로 있으면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준비 교섭을 맡았다.
그런데 이케다가 1950년, " 중소기업들이 도산하는 한이 있어도 정리할 기업은 정리해야 한다. 쌀이 없으면 보리로라도 버텨라."라는 실언 때문에 파문을 일으켜 대신직을 사임하자 미야자와도 따라서 1952년 대장성을 사직했다. 미야자와 본인은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이케다가 적극 정계진출을 권함에 따라 본적이 있는 히로시마현 선거구에 출마해 1953년 정계에 입문했다.[3]
1962년 이케다 내각에서 38세 젊은 나이로 국무대신인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첫 입각해 소득배증계획과 고도경제성장 플랜 구성에 참여했고, TV 토론회에 자민당 대표로 자주 얼굴을 내밀어 고도경제성장 시기 자민당의 떠오르는 신진 경제통 정치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통상산업대신, 외무대신, 자민당 총무회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자민당에서는 이케다의 직계로서 이케다의 파벌을 물려받아 일찍부터 총리 후보로 꼽혔다.[4] 다나카 가쿠에이가 사임한 후 후임 총리로 하마평이 떴고 오히라 마사요시 사후에도 후보에 올랐지만 다나카와 사이가 썩 좋지 않은 탓에 대신 자파의 2인자였던 스즈키 젠코에게 양보해야 했다. 대신 스즈키 젠코는 미야자와에게 관방장관 직을 맡겼다. 이때 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와 함께 자민당내의 뉴리더로 불리며 세 사람의 동맹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대까지 유지되었다.
굉지회(宏池会) 내에서 미야자와를 밀어내려는 다나카 로쿠스케[5]와 소위 "1.6 전쟁"[6]이라는 후계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다나카 로쿠스케가 당뇨병이 악화되 사망하게 되면서 미야자와가 굉지회의 새 회장이 되었다.
나카소네 총리가 어쩔수 없이 서방국가들과 플라자 합의를 하면서 엔화의 가치가 치솟는 엔고현상이 일어났고 이는 일본 경제, 특히 수출에 악영향을 미쳤다. 나카소네의 경제정책을 비판해오던 미야자와에게 나카소네는 "그럼 당신이 하던가" 하면서 대장대신 취임을 요청했고 미야자와는 대장대신으로 취임해 엔고잡기에 나섰다. 하지만 미국과 빈번히 협의하고 시장에 전폭적으로 개입에도 불구하고 엔고는 멈출 줄을 몰랐다.
이런 가운데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총리에서 물러나자 뉴리더들간의 동맹이 깨지면서 아베 신타로, 타케시타 노보루와 총리직을 놓고 승부를 벌였다. 그러나 나카소네가 껄끄러운 미야자와 대신 타케시타의 손을 들어주어 미야자와의 총리 꿈은 다시 멀어졌다.[7]
다케시타 내각에서는 부총리 겸 대장대신으로 취임해 재정건전화 차원에서 소비세 도입을 추진했지만 리크루트 사건이 터지면서 미공개주식의 양도 문제로 인한 비리 혐의로 장관 직에서 물러났다.
|
1991년, 가이후 도시키가 물러나면서 마침내 소원하던 총리 취임을 이루었다. 무려 71세 나이였다. 자민당내 주요파벌인 굉지회의 영수이자 재무전문가이면서 국제통이기도 했기 때문에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기대는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케시타가 배후에서 실권을 행사하는 탓에 미야자와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총리 재임시 자위대의 유엔 평화유지군 참가를 공식적으로 추진했다. 이는 평화헌법의 적용을 놓고 논란을 일으켰고, 하필이면 파견된 자위대 병사가 죽었는데 미야자와는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의 임기는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되는 차였다. 경제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잃어버린 10년을 막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긴 했다. 1990년부터 닛케이 지수와 토픽스 지수가 급락하였고, 뒤이어 1991년 들어서는 부동산 가격도 하락세에 접어들기 시작하여 거품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미야자와는 이런 현상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공적자금을 투입해 불량채권을 조기에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 본인이 1965년도 올림픽 불황도 공적자금 투입으로 불을 끈 경험도 있었으니 단기에 끝낼수있으리라 본것이다. 그러나 정계는 물론이고 재계 및 금융계까지 공적자금 투입을 반대해서 결국 미야자와도 공적자금 투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에서는 공적자금 투입이 하나의 금기가 되어서 부실채권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도 손 놓고 바라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각에서는 이때 재빨리 공적자금을 투입해 불량채권을 정리했다면 버블 붕괴에 따른 잃어버린 10년의 충격이 덜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결국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게 생긴 것.
또한 리크루트 사건으로 인해 정치개혁을 추진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다케시타의 입김때문에 스스로 포기해버려서 결국 1993년 내각 불신임안에 제출되었고 자민당은 분열해 내각이 총사퇴하고 의회가 해산되었다.
사실 꼭 1년 전에도 미야자와의 총리직은 위태위태했다. 당시 위에서 언급된 자위대 유엔 평화유지군 참가와 사가와 규빈 사건이 겹쳐지면서 지지율이 폭락하는 바람에 총리자리를 내줄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당시 제1야당이었던 사회당이 1989년 참의원 선거 정국과 달리 여당 비판 표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데다가, PKO법을 둘러싸고 사회당과 공명-민사당이 잡음을 일으키면서 전선이 흐려지는 바람에 투표율이 크게[8] 저조해진 덕에 승리를 거둔 것. 그렇게 간신히 총리 자리를 지키긴 했지만, 행운의 여신은 이번에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이어 열린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하타 쓰토무, 오자와 이치로의 신생당과 하토야마 유키오의 신당 사키가케,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일본신당등이 약진하면서 자민당은 과반이 붕괴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결국 대패하면서 야당 연립내각의 호소카와 모리히로에게 총리자리를 내주게 된다. 재미있게도 이때 미야자와가 자민당 제15대 총재였던 고로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15대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연결되어 "자민당의 도쿠가와 요시노부"로 불렸다. 이후 1994년 자민당이 제법 힘겹게 정권을 되찾은 후에도 지속적으로 연립정권을 구성하면서 미야자와는 자민당 단독 정권 시대의 마지막 총리가 되었다.
이후 무라야마 내각에서 부총리 겸 외무대신으로 입각한 자민당 총재 고노 요헤이가 주미 대사직을 제안했으나 거절했고 오부치 게이조 총리 취임 후 대장대신직을 제안받았다. 당초 미야자와는 거절했지만 90년대 후반 전대미문에 아시아 전체 경제위기로 인한 오부치 총리대신의 간곡한 요청으로 대장대신 직을 수락하고 경제회복에 노력을 기울였다.[9][10] 모리 요시로 내각에서도 대장대신[11]을 유임했다.[12]
|
2006년 1월 29일 NHK에 출연한 모습 |
이 당시 미야자와의 경제회복 정책은 대량의 감세와 그것을 메꿀 국채발행이 핵심이었다. 이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때 결실을 보아 잃어버린 10년을 잠시나마 극복하게 되는 요인이 되긴 했지만 이 때 재정건전화 대신 대량의 국채남발이 관행화되어서 일본 경제를 위기로 모는 주범이 돼버렸다. 물론 도호쿠 대지진 이후 밝혀진 바로는 국채의 95%가 국내에서 사들여졌다고 할 정도로 일본의 저축율이 엄청나게 높다고는 하지만 현재 일본의 높은 국가부채가 바로 이 사람 부터 시작했다는 의견이 있어 그의 다소 친 동아시아(친한, 친중)적인 성향과 더불어 비판받는 평가도 많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미야자와에게 정계은퇴를 권했고 미야자와는 결국 재선을 포기하고 정계에서 물러갔다. 지역구는 조카인 미야자와 요이치에게 물려주었다. 정계에서 물러난 뒤에는 2002 한일 월드컵 유치에 참여하기도 했고, 경제 부분에서 조언도 하다가 2007년 87세를 일기로 도쿄도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미야자와 기이치 장례식 전경 |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53 - 1955 | 정계 입문 |
|
1955 - 2007 |
합당[13] 정계 은퇴 사망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3 | 제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히로시마 선거구 |
|
189,326 (24.03%) | 당선 (2위) | 초선 |
1959 | 제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
309,153 (38.45%) | 당선 (1위) | 재선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히로시마 3구 | 71,337 (16.3%) | 당선 (1위) | 초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2,940 (13.8%) | 당선 (2위) | 재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8,811 (18.1%) | 당선 (1위) | 3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5,543 (18.4%) | 당선 (1위) | 4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0,972 (17.8%) | 당선 (1위) | 5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4,168 (20.5%) | 당선 (1위) | 6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1,719 (18.3%) | 당선 (1위) | 7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6,660 (20.6%) | 당선 (2위) | 8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2,982 (17.7%) | 당선 (2위) | 9선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23,885 (25.0%) | 당선 (1위) | 10선[14] | ||
1996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히로시마 7구 | 95,045 (47.33%) | 당선 (1위) | 11선 | |
2000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주고쿠 비례블록 | 16,943,425 (28.31%) | 당선 (1위) | 12선 |
5. 여담
- 영어에 굉장히 능통했다. 국회 정회 시간, 의원회관에서나 공무로 출장가는 경우 꼭 미국, 영국의 신문(특히 경제신문)을 읽었다. 또한 영자로 된 신문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때 영어로 생각해서 정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렇게 능통하게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 비결은 독학으로 사전을 씹어먹으면서 공부했다는 식의 이야기로 전해진다. 영어와 관련된 일화로는 어느날 국회에서 영자신문을 읽고 있는데 한 후배 국회의원이 "일본 국회의원이면 일본 신문이나 좀 읽으시죠"라고 말했는데, 미야자와가 "국회의원이면 영자 신문 정도는 읽어야지"라고 응수해서 되려 그 의원이 깨달음을 얻고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는 말도 있다. 이 사례의 주인공이 하마다 야스카즈의 아버지이자 중의원 현역시절 예산위원장이었던 하마다 고이치이다.[15]
- 일본 극우 세력이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선 시종일관 반대했다. # 즉, 일본 자위대가 해외에서 무력을 쓸 수 있도록 하여 사실상 군국주의 부활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에 맞선 것. 보수본류 파벌 출신답게 꽤나 온건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를 시인하고 사과한 고노 담화가 그의 시대에 나온 것도 그런 성향과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나카소네 야스히로에 이은 두번째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17]를 한 것도 1992년 11월 그의 재임 시절 일이라는 것은 아이러니.
- 마지막 제국대학 출신 총리이다. 정확히 말하면 '제국'을 지우고 신제 대학으로 개편하기 전 졸업한 총리로는 마지막이다. 신제 도쿄대학 출신 후배들 중 총리를 지낸 인물은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현재까지 유일하다.
-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도쿄대학이 배출한 3대 천재[18]라는 평을 듣는다. # 이렇게 미야자와 자신이 정계에서 도쿄대학 법학부 천재 출신으로 워낙 유명하다 보니 자신도 이런 삶이 당연하다 생각하여 관료나 의원, 전문가 등 상대방 학력에 대해 궁금할 때는 꼭 "학부는?" 이라 물어봤다고 한다. 즉 상대방이 사회에서 이정도급으로 활동하는거면 자신처럼 당연하게 도쿄대학 출신일거란 가정하에 학력을 물어봤다는 것이다.
- 여배우 미야자와 에마의 외조부이다.
- 한국 국회에서 연설한 최초의 일본 총리다. 종군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직후였다.
6. 둘러보기
[1]
당시에는 예과에 해당되는
구제고등학교였다. 현재는
무사시대학.
[2]
지역구도 후쿠야마시를 관할하는
히로시마현 제7구였다.
[3]
정계에 처음 입문했을 때는
참의원 의원이었고, 참의원으로 재선까지 지낸 직후에
중의원 의원으로 옮겼다.(1953년~65년까지는 참의원, 1967년~2003년까지 중의원으로 있었다.)
[4]
참의원으로 재직하던 시절부터 자유민주당
뉴리더로 각광받는 인물이었지만, 참의원으로는 훗날 총리대신이 되기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했기에, 참의원 재선 막바지 무렵부터 중의원으로 이동을 요청받았다. 1965년 참의원 임기가 만료되고, 2년 동안은 전직 국회의원 신분으로 각료에 있다가, 1967년에 중의원으로 이동했다.
[5]
다케다 료타 전 총무대신의 백부다.
[6]
미야자와 기이치의 喜一에서 1, 다나카 로쿠스케의 六助에서 6이라서 1.6 전쟁이라 불렸다. 1.6전쟁은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vs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静六)의 대결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하며, 오자와vs가지야마의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7]
나카소네 재정 당시
아베 신타로도 물을 먹었는데, 총리에 끝내 오르지 못한 아베에 반해 미야자와는 총리를 지냈으니 그나마 나은 입장.
[8]
1992년 참의원 선거에서 50.7%의 투표율이 나왔다. 참고로 1989년 참의원 선거 투표율은 65.8%
[9]
일본 내각총리대신 출신이었던 정치인들은 보통 새로운 내각이 성립되어 내각 국무대신 자리를 요청 받으면 거부하고 당 부총재 같은 명예직을 받으려 한다. 하지만 새로운 내각총리대신이 대장대신(現 재무대신) 자리를 요청하면 받는 경우(
다카하시 고레키요, 미야자와 기이치,
아소 다로)가 있을 만큼 정계, 관계에서 알아주는 최요직이다.
[10]
당시기사
[11]
2001년 중앙성청 개편으로 대장대신에서 재무대신으로 직책 명칭이 바뀌었다.
[12]
이렇게 8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내각에서 가장 실권이 있는 각료인 대장대신, 초대 재무대신으로서 활약하며 헤이세이의
다카하시 고레키요라고 불렸다.
[13]
일본민주당과의 신설합당
[14]
일본의 마지막
중선거구제.
[15]
이 사람은 야쿠자 출신의 다혈질로 청년단 활동을 하다 정치인이 되었다.
[16]
다나카 가쿠에이는 미야자와에 대해 "그는 일류
비서관은 되겠지만, 일류 정치인은 못 된다"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또한 뉴리더 세 명중 미야자와 기이치는 당 총재로서는 0점, 총리로서는 100점이라 평가받았다.
[17]
다만 신사에 합사된 '일본 유족회'의 공약 관련 압력에 따른, 미리 알리지 않은 참배.
[18]
다만 기사에는 미야자와 말고 나머지 두 명에 대한 소개를 기자가 적지않아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없다. 그렇지만 현지 일본에서는 미야자와 기이치와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 두 명은 확실하게 정계 내 도쿄대학 출신 천재로 평가받는다.
분류
- 일본의 남성 정치인
-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 일본의 부총리
- 일본 내각관방장관
- 일본 재무대신
- 일본 외무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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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농림수산대신
- 일본 우정대신
- 일본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 자유당(1950년) 국회의원
- 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제3대 일본 참의원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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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1대 일본 중의원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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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3대 일본 중의원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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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6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0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1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2대 일본 중의원 의원
- 1919년 출생
- 2007년 사망
- 도쿄도 구부 출신 인물
- 당 대표/일본
- 자유민주당(일본) 총재
- 공무원 출신 정치인
-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 정치인
- 도쿄대학 출신
- 고등문관시험 출신
- 일본의 정치인 자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