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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족원 의장 |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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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2fa7> 일본국 제28대 참의원 의장
니시오카 다케오 西岡武夫 | Nishioka Takeo |
|
|
|
<colcolor=#c3c965> 출생 | <colbgcolor=#ffffff,#191919> 1936년 2월 12일 |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 |
사망 | 2011년 11월 5일 (향년 75세) |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 |
학력 | 와세다대학 교육학부 (사회학 / 학사) |
가족 |
아버지 니시오카 다케지로 어머니 니시오카 하루 장녀 니시오카 히데코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1]
|
의원 선수 | 11 (중), 2 (참) |
의원 대수 | 30, 31 , 32 , 33 , 34 ,35 , 36, 38, 39, 40, 41 (중), 19-20, 21-22 (참) |
지역구 |
구 나가사키 1구 →
나가사키현 제1구 (중) 비례대표 (참) |
약력 |
나가사키 신문 편집 위원 신자유클럽 간사장 중의원 의원 (제30-41대) 문부 정무 차관 제111-112대 문부 대신 ( 다케시타 개조내각, 우노 내각)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신진당 간사장 자유당 부당수 참의원 의원 운영 위원장 제28대 참의원 의장 |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2. 생애
1936년 2월 12일 일본 제국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에서 나가사키 민우신문(1959년 나가사키 신문으로 합병)을 창간한 언론인이자 나가사키현지사와 중의원 의원을 지낸 니시오카 타케지로(西岡竹次郎, 1890-1958)와 여성참정권 운동을 했던 시민운동가 니시오카 하루(西岡ハル, 1905-1983)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니시오카 하루는 남편이 종전 이후 공직추방을 당하자 대신해 신문사를 경영했고, 이후 남편이 정계에 복귀해 1951년 나가사키현지사에 당선되자 남편 대신 중앙정치에 진출, 1953년 제3대 참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전국구 후보로 당선되었다.니시오카는 어릴적부터 정치가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나라를 대표하는 정치인을 장래희망으로 삼았다. 본래 그는 카이세이중학교에 재학하고 있었으나 선거시 자신을 도와줄 인맥을 쌓기 위해 고향인 나가사키시로 돌아와 나가사키현립 나가사키히가시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교 졸업 이후에는 와세다대학 교육학과 사회학부에 입학했다.
1963년 부모가 다져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무소속으로[2] 구 나가사키 1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3] 당시 같은 20대의 나이로 당선된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와 함께 "20대 트리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후 미키 다케오의 번촌정책연구소에 가입해 자민당 청년국장, 문교부 회장직을 맡았다.
1976년 록히드 사건을 계기로 고노 요헤이, 야마구치 도시오, 타가와 세이이치 등 자민당 내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보수 정치 쇄신"이란 모토를 내걸고 신자유클럽을 창당한다. 니시오카는 신자유클럽에서 초대 간사장을 맡았고, 동당은 그해 연말 치러진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에 불만을 품고있던 중도보수 지지층을 끌어모아 17석의 당선인을 배출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신자유클럽의 정책을 놓고 고노와 타가와 등의 인사는 혁신 야당으로서의 선명성을 중요시했으나, 니시오카와 야마구치는 보수야당으로서의 최소한의 정통성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고노를 비롯한 당 내 지도부와 마찰을 빛었고, 1979년 7월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직전에 신자유클럽을 탈당했다.[4] 이후 1979년 10월 치러진 제35회 중원선과 1980년 7월 치러진 제36회 중원선에서 무소속으로 연거푸 당선된 이후 1980년 12월에 자민당에 복당했지만, 1983년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했다.
1986년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했다. 복귀 후엔 미야자와 기이치의 굉지회에 소속되어 문교족 의원으로 경력을 쌓았다.[5] 1988년 12월 27일 다케시타 노보루 개조내각 발족당시 문부대신으로 첫 입각에 성공했다. 탈당에다 복당 후 한차례의 낙선을 겪으며 입각이 늦어졌는데, 국회의원으로 첫 임기를 시작한지 무려 25년만에 처음으로 입각한다. 리쿠르트 사건으로 인해 다케시타 개조내각이 5개월만에 총사퇴했고, 새로 출범한 우노 소스케 내각에서도 문부대신에 유임되었다. 그러나 우노 내각도 우노 총리의 스캔들에 이어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총사퇴했다. 결국 두 내각에서 내내 문부대신직을 유지했으나 합쳐서 7개월밖에 대신직을 수행하지 못했다. 재직 중 추진하였던 입시 개혁도 중단해야했다. #
대신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자민당 세제조사회장과 총무회장직을 맡았다. 그러면서 다시 당내에서 정치 쇄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 12월 굉지회가 리쿠르트 사건 당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근신중인 가토 고이치의 복귀를 타진하며 당시 총무회장인 니시오카에게 당직에서 물러날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니시오카는 이에 반발해 해당 요청을 거부했고, 그는 자민당 집행부에 의해 총무회장에서 해임된 직후 굉지회에서도 제명 처분을 받았다.
한편 당시 총재였던 미야자와가 가이후 도시키를 회장으로 하는 정치개혁추진협의회를 설치해 당 내 개혁을 도모했으나 소극적인 태도로 여론의 비난을 받았고,[6] 당내 갈등 속에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단독 과반수 미달이란 결과를 얻으며 55년 체제가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니시오카는 복당 13년만에 정치개혁을 내세워 또다시 자민당을 탈당하나 싶었지만, 일단 1993년 6월에 자민당 의원들이 탈당해 신생당이나 신당 사키가케를 창당하는 데에는 합류하지 않았다. 그리고 굉지회에서 제명되었지만 무파벌 신분으로 자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다. 당선 이후 정치 개혁을 요구하며 당 집행부를 맹렬히 비판했고, 당 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간사장 가지야마 세이로쿠가 결속 모임을 만들자 옥상가게를 세웠다고 비판했다. 결국 6개월만인 1993년 12월 본인도 자민당을 탈당해 자유개혁연합을 거쳐 1994년 12월 보수 야당인 신진당이 창당될때 그곳에 합류했다.
니시오카는 신진당에서 국회대책위원장과 간사장직을 맡으며 당 대표인 오자와 이치로를 보좌했고 오자와와 가까워지며 실세로 활약했으나,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본인은 나가사키 1구에서 승리하나 신진당이 참패했다.신진당의 선거 패배로 당내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고, 1997년 12월 신진당은 해산되고 만다.
1998년 1월 오자와 이치로와 가토 무쓰키, 노다 다케시 등의 인사가 자유당을 창당하자 부당수 자리에 취임했다. 같은해 2월 다카다 이사무 나가사키현지사가 3선 도전을 포기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하자 야당의 추천( 자유당, 신당평화, 스포츠평화당)을 받아 현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다만 정계 입문 후 35년간 중앙에서만 정치를 했는데 왜 갑자기 뜬금없이 현지사를 출마하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자민당과 신당 사키가케의 추천을 받은 가네코 겐지로에게 밀려 낙선했다. 지사선거 낙선 직후 지역구 보궐선거에 출마해 중의원으로 복귀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본인이 사퇴해서 치러지는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하는게 모양세가 나빠보였는지 노다 다케시 간사장이 반대하는 바람에 출마를 포기했다.
2000년 4월, 자유당은 자민당과의 연정 유지를 놓고 분열하고, 결국 연정 유지를 주장한 세력은 자유당을 탈당해 보수당을 창당한다. 니시오카는 보수적 성향이지만, 두번째로 자민당을 탈당하고 또다시 자민당에 기웃거리는것은 모양세가 나빠보이고, 또한 본인의 보궐선거 출마를 막은 노다 간사장과 사이가 나빠서인지 자유당에 잔류한다. 2000년 5월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본 지역구인 나가사키현 제1구에 출마했지만, 민주당 타카키 요시아키 의원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2001년 제1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대표 후보에 입후보한 후 당선, 자유당 참의원 의원회장직을 맡았다. 2003년 자유당과 민주당과의 합당(민유합병)에서는 보수주의라는 소신을 지켜야한다는 이유로 합당에 불참의사를 나타냈으나, 오자와 등의 인사들의 설득으로 합당에 참가하였다. 민주당에서는 와타나베 고조와 함께 보수파 중진의원으로 활동했고, 2007년 참의원 운영위원장에 취임하였다. 2007년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대표 재선에 성공했다.
2010년 7월 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이후 에다 사쓰키의 뒤를 잇는 참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참의원 의장 재직 시절에는 간 나오토 총리의 국정운영을 비판했다.[7] 그는 참의원 의장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기자회견을 열거나 민주당 당대표 선거시 오자와 이치로를 견제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2011년 9월 30일 니시오카는 임시국회 본회의 진행 과정에서 숨이 가빠지거나 비틀거리면서 직원의 도움을 받아 의장석에 앉는 모습을 보이는 등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모습을 보였다. # 또한 같은해 10월 30일에는 입안 대상포진으로 발성에 문제가 있어 본회의에 불참했다. 민주당의 고시이시 아즈마 간사장은 니시오카의 건강 상태는 양호하다고 발언했고 니시오카 자신도 산케이신문에 지금이야말로 필요한 것은 총리대신의 각오라는 칼럼을 기고하며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해 11월 자택에서 쓰러져 도쿄 미나토구 토라노몬 병원[8]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중 11월 5일 오전 2시 24분 폐렴으로 인해 향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종2위와 동화대수장이 수여되었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63 | 정계 입문 |
|
1963 - 1976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76 |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
|
1976 - 1979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79 - 1980 |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
|
1980 - 1994 | 복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4 | 신당 창당을 위한 탈당 |
[[자유개혁연합| 자유개혁연합 ]]
|
1994 | 창당 |
|
1994 - 1997 | 신설합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7 - 1998 | 정당해산 |
|
1998 - 2003 | 창당 |
|
2003 - 2010 | 합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10 - 2011 |
참의원 의장 취임으로 인한 탈당 사망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구 나가사키 1구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50,673 (13.5%) | 당선 (4위) | 초선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64,429 (16.6%) | 당선 (1위) | 재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4,569 (13.1%) | 당선 (3위) | 3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7,594 (18.0%) | 4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98,242 (20.3%) | 당선 (1위) | 5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75,063 (15.9%) | 당선 (3위) | 6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9,383 (16.7%) | 7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56,799 (11.5%) | 낙선 (6위)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22,412 (23.7%) | 당선 (1위) | 8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4,362 (18.3%) | 당선 (2위) | 9선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5,750 (18.1%) | 당선 (1위) | 10선[9] | ||
1996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나가사키현 제1구 |
|
84,464 (41.07%) | 당선 (1위) | 11선[10] |
1998 | 1998년 나가사키현지사 선거 | 나가사키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95,376 (36.7%) | 낙선 (2위) | |
2000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나가사키현 제1구 |
|
63,248 (27.85%) | 낙선 (3위) | |
2001 | 제1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비례대표 | 8,187,804 (7.72%) | 당선 (9위) | 초선 | |
2007 |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
23,256,247 (39.48%) | 당선 (31위) | 재선[11] |
5. 여담
- 카이세이중학교 재학 시절 동급생인 가수 겸 배우 미와 아키히로와 친분이 있었고, 니시오카의 생애 말년 까지 두사람의 인연은 깊었다.[12] 미와는 니시오카의 터프한 성격과 행동, 그리고 그의 순수함이 매력이었다고 회고했다.
- 예의범절과 국회의원으로서의 책무, 몸가짐에 엄격해 " 일본 국회의사당의 본회의장은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매우 신성한 장소"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가치관을 잘 드러내는 일화가 있는데, 참의원 운영위원장을 맡던 2007년 8월 "교복을 입고 국회 견학을 오는 아이들도 있는데 의원들의 복장이 너무 가벼워서야 되겠는가"라며 "다음 국회에선 쿨 비즈[13] 합의를 폐기하고 본회의장과 위원회실에서 의안 심의를 할 때는 넥타이 착용을 의무화하자"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국회에선 2004년부터 3년째 시행되고 있었으며 심지어 참의원은 1951년 8월에 넥타이를 하지 않아도 좋다는 합의가 있었기에 여당뿐 아니라 다른 야당과 민주당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결국 니시오카는 자신의 제안을 철회했다.[14][15]
- 전술한 바와 같이, 한여름에도 슈트와 넥타이를 풀로 착용하고 국회의원 업무에 임했다.
- 그의 장녀인 니시오카 히데코는 현재 나가사키 1구 중의원 의원으로 재직 중이며, 아버지의 비서를 지내며 정계에 입문했고 희망의 당 - 구 국민민주당을 거쳐 현재는 신 국민민주당 소속이다.
[1]
참의원 의장 취임으로 인한 탈당. 본 당적은
[2] 자민당의 추가공인을 받았다. [3] 당시 만 27세의 젊은 나이로 당선되었다. [4] 신자유클럽을 탈당한 니시오카와는 달리, 야마구치는 1986년 당의 해산 전까지 당에 남아있다 자민당에 복당했고,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한 뒤 무소속과 신진당 등 야당 의원으로 활동했으나 1995년 정치 자금 횡령 혐의로 구속된후 1996년 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떠났다. [5] 일본 국회 문화, 교육 상임위에서 경력을 쌓은 의원들을 문교족이라고 부른다. 훗날 몇몇 자민당 문교족 의원들은 역사 교과서 문제, 학교 행사에서의 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문제에서 강경한 입장을 주도한다. [6] 회장인 가이후 역시 총리 시절 적극적인 정치개혁 정책을 세웠다가 당 중진들의 반발로 내각 총 사퇴라는 결과를 맞이한 적이 있었다. [7] 2011년 국토교통대신 마부치 스미오와 내각관방장관 센고쿠 요시토의 불신임의안이 부결되자 "책임은 관방장관이 더 크다" 라며 간 내각의 인사를 비판했다. [8] 일본 정제계 인사들이 자주 치료차 들렀던 병원으로, 오히라 마사요시 전 총리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9]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 [10] 1998.2.7 의원직 사퇴 (나가사키현지사 선거 출마) [11] 2010.7.30 참의원 의장 취임으로 인한 탈당
2011.11.5 임기 중 사망 [12] 참고로 니시오카와 미와는 나가사키시 출신으로 같은 동향 사람이기도 했다. [13] 무더운 여름에 정장 대신 반팔 착용을 권장시 하는 정책이다. 영미권에서는 쿨 워크(Cool Work)라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다. [14] 한편 니시오카의 반 쿨 비즈 정책이 해당 정책을 도입시킨 현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에 대한 보복 심리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었다.(두사람은 신진당-자유당 시절부터 함께 정치를 하다 자유당-보수당 분당 시점에서 가치관 문제로 서로 갈라섰다) [15] 그러나 니시오카는 평소에도 감색 블레이저와 회색 바지를 입고 오는 의원들을 비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쿨 비즈에 대한 비판은 본인의 소신이기도 했다.
[2] 자민당의 추가공인을 받았다. [3] 당시 만 27세의 젊은 나이로 당선되었다. [4] 신자유클럽을 탈당한 니시오카와는 달리, 야마구치는 1986년 당의 해산 전까지 당에 남아있다 자민당에 복당했고,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한 뒤 무소속과 신진당 등 야당 의원으로 활동했으나 1995년 정치 자금 횡령 혐의로 구속된후 1996년 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떠났다. [5] 일본 국회 문화, 교육 상임위에서 경력을 쌓은 의원들을 문교족이라고 부른다. 훗날 몇몇 자민당 문교족 의원들은 역사 교과서 문제, 학교 행사에서의 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문제에서 강경한 입장을 주도한다. [6] 회장인 가이후 역시 총리 시절 적극적인 정치개혁 정책을 세웠다가 당 중진들의 반발로 내각 총 사퇴라는 결과를 맞이한 적이 있었다. [7] 2011년 국토교통대신 마부치 스미오와 내각관방장관 센고쿠 요시토의 불신임의안이 부결되자 "책임은 관방장관이 더 크다" 라며 간 내각의 인사를 비판했다. [8] 일본 정제계 인사들이 자주 치료차 들렀던 병원으로, 오히라 마사요시 전 총리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9]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 [10] 1998.2.7 의원직 사퇴 (나가사키현지사 선거 출마) [11] 2010.7.30 참의원 의장 취임으로 인한 탈당
2011.11.5 임기 중 사망 [12] 참고로 니시오카와 미와는 나가사키시 출신으로 같은 동향 사람이기도 했다. [13] 무더운 여름에 정장 대신 반팔 착용을 권장시 하는 정책이다. 영미권에서는 쿨 워크(Cool Work)라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다. [14] 한편 니시오카의 반 쿨 비즈 정책이 해당 정책을 도입시킨 현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에 대한 보복 심리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었다.(두사람은 신진당-자유당 시절부터 함께 정치를 하다 자유당-보수당 분당 시점에서 가치관 문제로 서로 갈라섰다) [15] 그러나 니시오카는 평소에도 감색 블레이저와 회색 바지를 입고 오는 의원들을 비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쿨 비즈에 대한 비판은 본인의 소신이기도 했다.
분류
- 일본의 남성 정치인
- 일본 참의원 의장
- 일본 문부과학대신
- 제30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1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2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6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0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1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19대 일본 참의원 의원
- 제20대 일본 참의원 의원
- 제21대 일본 참의원 의원
- 제22대 일본 참의원 의원
- 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신자유클럽 국회의원
- 신진당 국회의원
- 자유당(1998년) 국회의원
- 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자유민주당(일본) 청년국장
- 1936년 출생
- 2011년 사망
- 나가사키시 출신 인물
- 와세다대학 출신
- 종2위
- 욱일대수장
- 폐렴으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