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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5:41:30

농림수산성

파일:고시치노키리_White.svg
일본국 중앙성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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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림수산성
農林水産省 | Ministry of Agriculture, Forestry and Fisheries
파일:농림수산성 로고.svg
<colbgcolor=#AD0000><colcolor=#ffffff> 약칭 농수성(農水省), MAFF
설립일 1978년 7월 5일
전신 농림성
대신 에토 다쿠
부대신 사사가와 히로요시
타키나미 히로후미
대신정무관 쇼지 켄이치
야마모토 사치코
사무차관 요코야마 신
소재지
도쿄도 치요다구 카스미가세키1초메 2-1
(東京都千代田区霞が関一丁目2番1号)
내부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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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관방 (大臣官房)
소비 · 안전국 (消費・安全局)
수출 · 국제국 (輸出・国際局)
농산국 (農産局)
축산국 (畜産局)
농촌진흥국 (農村振興局)
경영국 (経営局)
외국 임야청 (林野庁)
수산청 (水産庁)
직원 수 15,077명 (외국 제외)
4,753명 (임야청)
937명 (수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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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역대 대신4. 농림수산성의 저주5. 외국6. 특수법인7.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일본 중앙성청 중 하나. 한국의 옛 농림수산식품부(현 농림축산식품부) + 식품의약품안전처[1]와 유사한 기관이다.

식료의 안정공급의 확보, 농림수산업의 발전, 농림업자의 복지 증진, 농산어촌 및 중간지역 등의 진흥, 농업의 다면에 걸친 기능의 발휘, 삼림의 보존배양 및 삼림생산력의 증진과 더불어 수산의 적절한 보존 및 관리를 꾀하는 것을 임무로 한다(농림수산성설치법 제3조). 약칭은 농수성.

농업 축산업, 임업, 어업(수산업)을 비롯해 식품의 안전하고 안정적인 공급, 농촌의 진흥 등을 관장한다. 광의의 '먹거리' 안전에 대해서는 농림수산성 소비안전국도 관여하고 있지만 협의의 '식품' 안전에 대해서는 후생노동성 의약식품국이 관장하고 있다.

일본 경마의 감독관청이기도 하여, 경주명에 '농림수산성상전'이 붙는 경주도 있다. 지방경마의 경우는 '농림수산대신상전'이 된다. 국영경마 시절에는 경마부가 경마를 주최한 적도 있다.

2. 역사

농림수산성의 변천사
농상무성
농림성
농상성
농림성
농림수산성
농림수산성의 역사는 1925년 농상무성이 분할되어 설립된 '농림성'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초 농상무성은 농업, 어업, 임업, 공업, 광업 등을 모두 관장하는 거대한 기관이었으나, 농업 단체의 농무성 설치 요구로 인하여 1925년 농상무성이 폐지되면서 임업, 농업, 어업은 농림성으로, 상업, 공업, 광업은 상공성으로 분리되어 각각 설치되었다. 그러다가 1943년 상공성에서 경공업, 상업 부문이 분리되어 군수성으로 개조되면서 상공성의 잔여 업무를 농림성이 이어받아 농상성이 설치, 전후에 경공업, 상업 부문이 군수성으로 이관되어 상공성이 부활하면서 다시 농림성으로 원상복귀되었다.

상술하듯이 1925년 설립 당시에는 농림성이었으나 200해리 수역문제 등 수산행정의 중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에 1978년 7월 5일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3. 역대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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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전전 농림대신 (1925~1943)
초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대
오카자키 쿠니스케
3대
하야미 세이지
4·6대
마치다 추지
5·7대
야마모토 테이지로
4·6대
마치다 추지
5·7대
야마모토 테이지로
8대
고토 후미오
9·11·20대
야마자키 타츠노스케
10·16대
시마다 토시오
9·11·20대
야마자키 타츠노스케
12대
아리마 요리야스
13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14·16대
고도 타쿠오
15대
사카이 타다마사
10·16대
시마다 토시오
17대
고노에 후미마로
18대
이시구로 타다아츠
19대
이노 히로야
9·11·20대
야마자키 타츠노스케
전후 농림대신 (1945~1978)
초대
센고쿠 고타로
2대
마츠무라 켄조
3대
소에지마 센파치
4대
와다 히로오
5대
요시다 시게루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6대
히라노 리키조
7대
하타노 카나에
8대
나가에 가즈오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9대
스토 히데오
10대
모리 고타로
12·14·16대
히로카와 고젠
13대
네모토 류타로
15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12·14·16대
히로카와 고젠
17대
타코 이치민
18대
우치다 나오야
19대
호리 시게루
20-21·22대
고노 이치로
23·24대
이데 이치타로
25대
아카기 무네노리
26대
미우라 쿠니오
27대
후쿠다 다케오
28대
난조 도쿠오
29대
스토 히데오
30대
고노 이치로
31대
시게마사 세이지
32·33·34대
아카기 무네노리
35대
사카타 에이치
36대
마쓰노 라이조
37·38대
쿠라이시 타다오
39대
니시무라 나오미
40대
하세가와 시로
41대
쿠라이시 타다오
42대
아카기 무네노리
43대
아다치 도쿠조
44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45대
쿠라이시 타다오
46대
아베 신타로
47대
오이시 부이치
48대
스즈키 젠코
49대
나카가와 이치로
농림수산대신(1978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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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나카가와 이치로
2대
와타나베 미치오
3대
무토 가분
4대
가메오카 다카오
5대
다자와 기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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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가네코 이와조
7대
야마무라 신지로
8대
사토 모리요시
9·12대
하타 쓰토무
10대
가토 무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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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사토 다카시
9·12대
하타 쓰토무
13대
호리노우치 히사오
14·51·52대
카노 미치히코
15대
야마모토 도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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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곤도 모토지
17대
다나부 마사미
18대
미야자와 기이치
19대
하타 에이지로
20대
가토 무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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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오가와라 다이치로
22대
노로타 호세이
23대
오하라 이치조
24대
후지모토 다카오
25대
오치 이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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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시마무라 요시노부
27·40대
나카가와 쇼이치
28·29대
다마자와 도쿠이치로
30대
다니 요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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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야쓰 요시오
32대
다케베 쓰토무
33대
오시마 다다모리
34·35대
가메이 요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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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대
시마무라 요시노부
3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38·39대
이와나가 미네이치
27·40대
나카가와 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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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대
마쓰오카 도시카쓰
42대
아카기 노리히코
43·45·46대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44대
엔도 다케히코
43·45·46대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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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5·46대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47대
오타 세이이치
48대
이시바 시게루
49대
아카마츠 히로타카
50대
야마다 마사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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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52대
카노 미치히코
53대
군지 아키라
54·57대
하야시 요시마사
55·56대
니시카와 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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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6대
니시카와 고야
54·57대
하야시 요시마사
58대
모리야마 히로시
59대
야마모토 유지
60·61대
사이토 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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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1대
사이토 겐
62대
요시카와 다카모리
63·71대
에토 다쿠
64대
노가미 고타로
65·66대
가네코 겐지로
65·66대
가네코 겐지로
67대
노무라 데쓰로
68대
미야시타 이치로
69대
사카모토 데쓰시
70대
오자토 야스히로
63·71대
에토 다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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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농림수산성의 저주

폭넓은 농림수산 행정을 총괄하는 직위이기에 각료로서 중요성이 높지만, 정작 취임한 정치인은 취임 중 불상사에 직면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임하거나 퇴임 후 불행을 맞기도 한다. 그래서 매스컴에서는 '귀문(鬼門)'이나 '저주받은 자리(呪われたポスト)'라 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가타야마 내각의 히라노 리키조 농림대신이 니시오 스에히로 내각관방장관과 대립하다 GHQ의 의향을 따라 가타야마 총리대신에게 파면당한 후, 공직 추방의 쓰라림을 당했다. 히로카와 고젠 농림대신은 제3차 요시다 제1차 개조내각에 대한 요시다 총리징벌 동의안 처리에 결석해 본회의에서 가결되었기 때문에 파면되어 바카야로 해산(バカヤロー解散)에 의한 해산 총선거로 낙선했다. 마지막 농림대신이자 초대 농림수산대신인 후쿠다 다케오 개조내각 나카가와 이치로는 퇴임 5년 후 57세의 젊은 나이로 자살했다. 요도호 공중 납치 사건의 인질 대역으로도 알려진 제2차 나카소네 내각의 야마무라 신지로는 퇴임 8년 후인 1992년에 차녀에게 살해당했고, 그 차녀도 4년 뒤 자살했다. 2019년에는 이와 정반대로, 구마자와 히데아키 전 사무차관이 44세의 히키코모리 아들을 말다툼 끝에 흉기로 살해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중앙성청개편 후 2001년 제1차 고이즈미 내각에서 취임한 다케베 쓰토무는 광우병 문제를 둘러싼 실언으로 비판을 받아 이듬해 내각개조에서 사실상 경질, 후임인 오시마 다다모리도 여러 의혹으로 경질되었다. 뒤이어 제1차 고이즈미 제1차 개조내각부터 제2차 고이즈미 내각까지 역임한 가메이 요시유키는 퇴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쓰러져 사망했으며 2004년 제2차 고이즈미 개조내각에서 취임한 시마무라 요시노부는 이듬해 우정해산 직전 각의에서 중의원 해산에 반대해 서명을 거부, 사표를 제출했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 의해 파면당했다.[2] 부대신에서 승격한 이와나가 미네이치도 퇴임 후에 헌금 문제를 지적받았다. 2005년 제3차 고이즈미 개조내각에서 취임한 나카가와 쇼이치[3]는 무난히 직무를 수행하고 퇴임했지만 4년 후 아소 내각에서 재무대신으로 재직하던 중 G7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했다가 만취상태로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사건을 계기로 쓰라린 낙선을 당하고 2009년 10월 아버지 이치로보다 1살 젊은 56세로 급사했다.

특히 2006년 9월 26일에 발족한 제1차 아베 신조 내각에서는 농림수산대신의 교대가 빈번히 일어났으며 처음 취임한 마츠오카 도시카츠는 국회에서 광열수비문제를 추궁당해 전후 현직 각료 최초로 재임 중 자살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으며, 와카바야시 마사토시의 임시대리에 이은 후임 아카기 노리히코도 자신의 여러가지 의혹으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 패배를 불러왔다는 이유로 2007년 8월 1일 경질,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낙선했다.

그리고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환경대신의 겸임을 거쳐 8월 27일 발족한 제1차 아베 신조 개조내각에서는 엔도 다케히코가 취임하지만 오키타마공제조합금 부정수급의혹을 받아 9월 3일 사임, 재임기간 8일이라는 근래에는 드문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후임은 또 다시 와카바야시. 같은 정권에서 임시겸임을 포함하면 3개월 남짓한 동안 3번째의 농상 취임이었다. 와카바야시는 퇴임후 2010년 4월 2일, 참의원본회의 부정투표 문제로 의원 자리에서 쫓겨났다.

2008년 8월, 오오타 세이이치에 의한 사무소비 문제도 부상해, 재임중에 사고미 부정 전매 사건에 관한 발언이 문제시되었다.9월 19일, 사고미의 부정 전매의 책임을 명확하게 하는 것으로, 후쿠다 야스오 총리에게 사표를 제출. 오오타도 아카기와 마찬가지로 선거에서 낙선했다. 오오타의 사임 후에는 내각관방장관을 지낸 마치무라 노부타카가 임시대리를 맡고 있었으나 아소 내각에서 농림수산대신에 취임한 이시바 시게루는 이 사태에 "누구한테서 사무를 이어받아야 하지?"라며 취임시 인터뷰에서 이를 조롱했다. 2009년 탄생한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아카마츠 히로타카는 이듬해 구제역 문제의 늑장 대응으로 비판을 받아 각료의 태반이 잔류한 6월의 간 내각에서 책임을 지는 형태로 퇴임했다. 후임으로 부대신에서 승격한 야마다 마사히코는 직무 그 자체는 무난히 수행했지만 2010년 9월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총리와 대립하는 오자와 이치로 후보를 지원했기 때문에 불과 3개월만에 퇴임했다. 간 제1차 개조내각에서는 제1차 가이후 내각 이후 21년 만에 농림수산대신을 다시 맡은 카노 미치히코가 직무를 무난히 수행했지만 중국 서기관의 스파이 의혹에 직면해 2012년 6월의 노다 제2차 개조내각의 발족에 따라 퇴임, 군지 아키라가 농림수산대신에 취임했다. 짧지만 직무 자체는 무난히 수행했던 야마다나 스파이 의혹에 직면하기 전의 카노가 1년 이상 직무를 무난히 수행했듯이, 민주당 정권에 들어와서는 불상사에 의한 사임이나 그 후의 불행은 줄어들었다.

이번에는 재직 이후에 불행이 시작되어 2020년 12월 전 농림수산대신이었던 요시카와 다카모리 의원이 뇌물수수 의혹으로 의원 직을 사퇴했으며, 전 도치기 2구의 니시카와 고야 뇌물수수를 가졌다고 인정한 것이다.

2024년 10월 27일, 제1차 이시바 내각의 첫 대신으로 암명된 오자토 야스히로가 중의원 선거에서 20% 가량의 차이로 노마 다케시 의원에게 패배해 석패율 부활없이 현직 대신으로 낙선하였다. 또한 그는 2019년 파파카츠 활동 등으로 기인한 성추문 의혹으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또한 일본국 헌법 하에 지금까지 파면된 국무대신은 5명인데, 그중 무려 3명이 농림수산대신이다.[4]

5. 외국

6. 특수법인

7. 매체에서


[1] 한국도 1995년까지는 일본처럼 농림수산부에서 수산 관련 정책을 담당했으나 1996년에 농림부와 해양수산부가 분리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 해양수산부가 따로 분리된 원인이 다름아닌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다. [2] 그래서 고이즈미 본인이 농림수산대신을 겸직하고 '내각총리대신 겸 농림수산대신'의 자격으로 중의원 해산에 서명했다. [3] 초대 농림수산대신 나카가와 이치로의 아들, 예전 오부치 내각 - 오부치 제1차 개조내각에서 농림수산대신을 역임했었다. [4] 2023년 기준으로 11개의 부처에 대신들이 한명씩 있고 거기에 무임소대신들까지 있으니 대단하다면 대단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