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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멕시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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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멕시코 전쟁
Mexican–American War
Intervención estadounidense en México
파일:ダウンロード.jpeg-1.jpg
시기 1846년 4월 25일 ~ 1848년 2월 2일
장소 텍사스 공화국, 알타칼리포르니아, 누에보메히코, 멕시코 북부, 멕시코 동부, 멕시코 시티
원인 미국의 서부 확장 야욕
교전국 [[틀:깃발|]][[틀:깃발|]][[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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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멕시코
]][[틀:깃발|
깃발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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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틀:깃발|]][[제임스 K. 포크|]]
[[틀:깃발|]][[틀:깃발|]][[윈필드 스콧|]]
[[틀:깃발|]][[틀:깃발|]][[재커리 테일러|]]
윌리엄 B. 아이드
[[틀:깃발|]][[틀:깃발|]][[산타 안나|]]
전력 73,532명 82,000명
피해 1,733명 전사
4,152명 부상
11,505명 질병 및 사고사
5,000여 명 전사
수천 명 부상
20,000여 명 질병 및 사고사
민간인 4,000여 명 사망
결과 미국의 승리
영향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체결
• 멕시코의 북부 영토 상실
뉴멕시코가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변경
멕시코 정부의 텍사스 미국 가입 승인
산타 안나 실각
• 멕시코 정국 혼란과 내전 지속
• 미국의 서부개척시대 시작
미국서 신규 영토의 노예제 갈등으로 내전 발생

1. 개요2. 배경
2.1. 루이지애나 구입2.2. 멕시코의 등장과 텍사스 문제
3. 전개4. 결과5. 여담6. 같이보기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1846년부터 1848년까지 벌어진 미국 멕시코의 전쟁이다. 멕시코에서는 '멕시코에 대한 미국의 무력간섭(Intervención estadounidense en México)'이라고 한다.

2. 배경

2.1. 루이지애나 구입

1803년 갓 독립한 신생국가 미국은 미시시피 강의 해운 이용을 위해 프랑스 뉴올리언스를 매입하고자 의회의 승인을 받아 프랑스에 특사를 파견했다. 이들 특사단은 당시 프랑스의 제1통령이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만났고 이때 나폴레옹은 뉴올리언스뿐만 아니라 루이지애나 전체를 매도하게 되었다.

이유는 나폴레옹 입장에선 나폴레옹 전쟁 아이티 혁명 등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제대로 된 식민지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황열병 때문에 당시 루이지애나 인구가 충분하지 못해서 개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어차피 루이지애나에서 이렇다 할 수익을 내지 못하고 미국의 확장 야욕은 강하니 언젠가는 빼앗길 공산이 컸다. 그래서 헐값이라도 받고 팔자는 결정을 내렸다.

특사단은 의회가 허락해 준 권한을 넘어서는 이 통 큰 제안을 받아들이고 귀국했는데 이후 미국에서는 갑론을박[1]이 일어났으나 당시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덕에[2] 루이지애나 매입을 인준했다. 이 루이지애나 지역은 땅주인 프랑스도 대체 얼마나 되는지 감이 안 잡히는 데다 전혀 관리가 안 되는 측량도 안 된 광활한 미지의 세계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ational-atlas-1970-1810-loupurchase.png
검은색 테두리 안의 땅이 당시 매입한 루이지애나다.[3]

미국 영토는 거의 두 배로 늘어나게 되었다. 제퍼슨은 이러한 업적을 기념하고자 스스로 명한 묘비문에 해당 내용을 담았다.

이후 미국 서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에게 루이지애나 대륙은 프랑스로부터 합법적으로 매입한 땅이었고 자기들이 개척해야 할 영토였다. 대신 그 땅에 잘 살고 있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구석으로 쫓겨나는 비극적인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서부개척은 불과 30여 년만에 한계치에 도달했다. 그리고 서부지역의 불분명한 경계선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와 국경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2.2. 멕시코의 등장과 텍사스 문제

독립과 동시에 유카탄 반도 이북의 모든 스페인 식민지의 영유권을 획득하여 지배하고 있던 멕시코로서는 동부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본래 선벨트 중부와 서부 및 멕시코 북부의 고원 지대는 건조지대라서 대규모의 관개 시설 없이는 제대로 농사를 짓고 인구를 부양하기 힘든 지역이었고 누에바에스파냐 시절 스페인 식민 당국은 어차피 아메리카 각지에 꿀땅도 남아도는데 굳이 사막 지역을 개간할 이유는 없다는 이유로 해당 지역의 개발에 소홀하였다. 19세기 초반 캘리포니아와 그 주변 방대한 영역을 포괄하던 알타칼리포르니아(Alta California) 준주의 인구는 겨우 85,000여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였다. 테하스(Texas) 준주의 경우 코만치족과의 충돌 문제로 스페인어 사용 인구는 겨우 7,000여 명에 불과하였고 이마저도 대부분 루이지애나 인접 지역에 밀집해 있었다.

1820년, 즉 멕시코가 독립하기 불과 1년 전에 이 지역의 공식적 통치국가였던 스페인 정부로부터 텍사스 일부 지역을 불하받은 미국인 이민자들이 텍사스에 들어와서 정착촌을 건설한 상태였던 것이다. 신생국가 멕시코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이민자들과 협상 끝에 스페인어를 쓰고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조건으로 불하권을 인정받았으며 이후 멕시코의 정치불안을 틈을 타서 미국인 이민자들은 텍사스로 빠른 속도로 이주를 하기 시작하여 인구가 늘어나게 된다.

결국, 필연적으로 조건 따위는 씹어먹은 미국인 이민자들과 멕시코계 주민들, 멕시코 정부와의 충돌이 잦아지면서 미국과 멕시코 양국은 모두 이 지역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미국은 텍사스를 3천만 달러에 구매하고자 했으나, 멕시코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는 동안 멕시코의 중앙정치 혼란은 가속화되었고 그 틈을 타서 텍사스의 미국인 이주민 세력은 계속되는 이주로 강해졌는데[4] 텍사스 인구의 90%가 미국인 이주민들이었다.

중앙정치의 혼란을 잠재운 멕시코 대통령 산타 안나는 텍사스 이주민 세력에 최후통첩을 내리면서 무장한 미국 이주민들은 무장해제 후 텍사스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주민 세력은 이에 반발하여 대반란을 일으켰고 텍사스 공화국을 세웠다.

산타 안나가 직접 지휘한 멕시코군은 알라모[5][6]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진격했으나 정작 산 하신토( 샌 재신토) 전투에서 텍사스 반군에게 대패하고 포로로 잡혀서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하는 조약을 맺고 풀려났다. 그러나 산타 안나가 잡혀 있던 사이 멕시코 정부는 그를 대통령직에서 파면시킨 상태여서 산타 안나의 조약엔 효력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대통령에 당선이 된 산타 안나는 이를 이용하여 텍사스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다시 군대를 보내 제압하려 했으며 텍사스 측은 이에 저항하면서 양측의 산발적 충돌이 계속됐다.

신생 텍사스 공화국 내부에서 독립파와 연방합류파의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연방합류파가 승리하여 텍사스는 미국의 주로 합류하기로 하고 미국 역시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문제가 커졌다. 한마디로 멕시코 입장에서는 미국이 제멋대로 반란군들이 강점한 자국의 영토를 가져가 버린 셈이었고 미국은 "이웃의 독립국가가 요청을 해서 이를 받아들였을 뿐이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열받은 멕시코는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으나[7] 당시 미국은 대외정책에서 내부적으로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텍사스 공화국의 전쟁 당시에도 미국은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들이 겹치면서 당시의 미국 대통령 제임스 포크는 팽창론자로서 공공연히 태평양 출구인 캘리포니아까지 확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파였다. 1846년 4월 25일, 양군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고 미군 16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게 되자 미국은 이를 빌미로 멕시코에 전쟁을 선포했다. 사실 멕시코는 미국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아 최대한 충돌을 피했으나 미군이 전쟁선포 떡밥을 만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국경에서 집적대면서 충돌을 일부러 일으켰다. 이 충돌이 멕시코 국경 너머에서 벌어진지라 반전주의파였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멕시코에 선전포고를 하러온 포크 대통령에게 충돌이 벌어진 장소를 정확히 지도에 찍으라고 했지만 이에 불응하자 반전주의파는 협상을 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반전주의파의 힘이 너무 약하고 미국 내에서는 만장일치로 멕시코에 대한 전쟁을 지지하면서 선전포고가 이루어지고 전쟁이 시작된다.

3. 전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emember_Your_Regiment,_U.S._Army_in_Action_Series,_2d_Dragoons_charge_in_Mexican_War_1846.jpg

개전과 동시에 리오 그란데의 국경에서 미군이 일제히 강을 건너며 공세를 개시했다. 당시 멕시코 북부 건조 지역은 점과 선 형태로만 행정력이 닿던 수준이었고[8] 멕시코의 인구와 산업이 밀집되어 있던 중부 지역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편이었다. 개전 초기부터 여러 주요 전투에서 미군에게 패배하면서 사실상 국경방위는 실패한 상황이었다.[9] 굳이 북부 지역만이 아니라더라도 인구도 적고(당시 멕시코는 890만, 미국은 2,320만) 장비나 훈련 면에서도 뒤떨어지는 멕시코군이 미군의 전면공세를 저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개전 초 미국의 공세는 캘리포니아에 초점을 맞추었다. 7월 7일 미 해군 프리깃 슬루프함이 몬테레이에 지상군 일부를 상륙시킨 것을 시작으로 전면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멕시코는 캘리포니아의 미국 정착민들의 대반란으로 인한 캘리포니아 공화국 건국까지 겹치며 이내 수세에 몰렸다. 게다가 미군을 요격하기 위한 멕시코군의 반격이 미국의 재커리 테일러 장군에 의해 좌절되었으며, 이내 로스 앙헬레스(로스 앤젤레스)가 포위되었다. 12월 16일에는 애리조나의 주도 투손이 함락되었으며 1847년 초에 캘리포니아에서 애리조나, 뉴멕시코 전역에서 미국의 승리가 확실시되었다.

태평양 출구를 확보했음에도 멕시코가 항복하지 않자 미국은 멕시코 본토로 육군 총사령관 윈필드 스콧이 직접 지휘하는 본격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압도적인 해군 전력을 활용한 미군은 멕시코 영토 남단이며 수도 멕시코 시티의 동쪽에 위치한 최대항구 베라크루스에 지상군을 기습적으로 상륙시켜 베라크루스를 함락했다. 그 다음엔 제2전선을 형성하여 멕시코 시티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주력부대도 이에 호응하여 북쪽에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멕시코 측에서는 미국이 멕시코 중부로 내려오면 아이티 혁명 이후 아이티를 재차 침공했던 프랑스군마냥 질병으로 떼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애초에 배멀미를 앓으며 섬나라에 온 아이티 침공 당시 프랑스군과 달리 보급체계가 잘 갖추어졌고 별 저항을 받지 않고 멕시코 북부 영토를 뚫고 온 미군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Battle%2Bof%2BChapultepec%2B-%2BMexico%2BCity%2B1847.jpg

1847년 9월 13일 수도 멕시코 시티의 관문인 차풀테펙 전투에서 멕시코 수비군이 약 2,600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내며 참패하여 마지막 방위부대마저 붕괴된 반면 미국의 공격부대는 불과 200여 명의 피해를 입었고 지체 없이 수도 멕시코 시티로 침공했다. 결국 9월 15일 멕시코군과 민병대의 결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시티가 함락되어 멕시코 정부는 피난갔으며 멕시코군은 포로 포함 약 7,000명의 인명피해를 내면서 재기불능에 빠졌다. 사실상 이 전투로 전쟁의 승패가 확실하게 갈렸다. 미 해병대 찬가(Marines' Hymn)의 첫 구절 "몬테수마의 궁전에서 트리폴리의 해변까지(From the Halls of Montezuma, To the shores of Tripoli)"에 나오는 '몬테수마의 궁전'이 바로 이 차풀테펙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6명의 멕시코 유년 사관생도들 또한 끝까지 저항하다가 모두 전사하면서 멕시코에선 이들을 "소년 영웅(Niños Héroes)"으로서 현재까지도 기념하고 있다.

멕시코에선 이후에도 군인은 물론 국민들까지 들고 일어나 결사항전을 지속했지만 미군이 계속해서 공격해오면서 각지에서 계속 참패만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멕시코에게 피해만 늘어나며 불리해졌다.[10] 이렇게 더는 승산이 없고 미국의 점령지만 늘어나는 꼴이 되자 결국 멕시코 정부는 항전을 포기하고 항복이나 다름없는 협상을 미국에 제의했다.

4. 결과

1848년 2월, 양국은 과달루페 이달고 협정을 체결하여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냈다. 멕시코는 텍사스의 미 연방 합류를 인정했으며 미국이 애초부터 주장한 이 지역의 국경을 리오 그란데 강으로 삼는 것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멕시코는 미국에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유타 주, 네바다 3주 전체와 뉴멕시코, 애리조나 주의 대부분, 콜로라도 주의 절반 이상과 와이오밍 주 서남부 지역, 캔자스 오클라호마, 텍사스 주의 일부에 달하는 거대한 영토를 겨우 1,500만 달러에 강제로 팔아야만 했다.[11]

파일:cb8727c2933aa413e8bb537f83e46954.jpg

미국과 멕시코가 전투를 벌인 지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exican_Cession_in_Mexican_View.png
흰색 지역이 멕시코 미국에 넘긴 영토이다.
미국은 계속해서 멕시코 북부 주 영토까지 노렸는데 위 지도상의 멕시코-미국 국경 지대의 갈색 영토는 미국이 프랭클린 피어스 시기인 1853년 메시아 지역의 국경이 불명확하다는 명분을 앞세우며 전쟁으로 합병하지 못한 캘리포니아 반도 등을 병합하려고 했으나 멕시코의 반대로 그 중 국경 지대의 땅 일부만 1,000만 달러를 주고 매입한 지역으로, 이 사건을 '개즈던 매입'(Gadsden Purchase)[12]이라고 부른다.

파일:external/www.doopedia.co.kr/247223.jpg

미국은 계속해서 윌리엄 워커 등의 필리버스터를 파견하여 멕시코의 바하 캘리포니아, 소노라, 치와와 북부 주 및 테우안테펙 지협 영토까지 노렸으며 더 나아가 미국 주변의 안정이라는 명분 하에 유카탄 공화국, 리오 그란데 공화국 등 멕시코 내의 분리주의를 적극 조장하고 지원했다.

한편 미국은 남쪽의 멕시코 말고도 북쪽의 영국(오늘날의 캐나다)와도 오리건 지역[13]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양국의 경계를 두고 미국은 "북위 54도 40분 아니면 전쟁!(Fifty-Four Forty or Fight!)"[14]을 주창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때문에 영국과 전쟁 직전까지 갔으나 당시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시끄러웠던 영국과 텍사스 문제로 멕시코와의 전쟁이 임박한 미국 모두 한 발짝 양보하면서 타협점을 찾았고, 1846년에 오리건 조약으로 북위 49도선을 양국의 경계로 확정지었다[15]. 그렇게 북쪽 국경 문제를 확정지으면서 양면전쟁 위험을 없앤 미국은 안심하고 멕시코에 전력을 쏟아부었고 그 결과 막대한 영토를 뜯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미국의 오늘날 광대한 본토가 완성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이로써 미국은 대서양 태평양에 걸친 북아메리카의 땅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가를 완성했으며 서부개척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되면서 그 후 무서운 속도로 본격적인 발전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훗날의 일이긴 하지만 이 전쟁에서 멕시코로부터 획득한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텍사스 주 모두 구리, 금, 석유[16], 우라늄 등 온갖 광물자원들이 쏟아져나왔으니 미국은 자원의 축복까지 받았다.

한편으로는 남북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 전까지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노예주와 자유주들이 이 전쟁에서 얻은 새로운 주들을 "노예주로 하느냐? 자유주로 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갈등을 빚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 얻게 된 땅들 중 (북부 출신 이민자들이 인구의 다수를 점한) 캘리포니아 등 서부 해안은 북부의 편을, 텍사스는 남부의 편을 들었고 이는 남북 전쟁까지 이어졌다. 아직 주로 승격되지 않아 노예 관련 법이 없었던 영토들은 양측에서 그 소유를 주장했다.

반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멕시코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잃어버린 영토는 240만km2[17]로 1836년 텍사스 독립 이전의 영토 중 절반도 넘는 55%의 강역을 잃었다. 또 강력한 중앙정부를 제창하던 대통령 산타 안나는 패전 책임으로 실각해 버리고 멕시코는 강력한 중앙정부파가 아닌 지방분권적인 연방형성파에 의해 주도되었다. 미국 남북 전쟁으로 강력한 중앙정부를 형성한 것과 비교되는 일이었다. 이후 멕시코에서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형성되지 못하고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전쟁의 명분 문제와 별개로 멕시코는 이 전쟁에서 매우 심각한 졸전을 펼쳤다. 일개 반란군에게 국가 원수인 산타 안나가 포로로 잡힌 것부터 시작해서 멕시코 고원지대에서 펼쳐진 지상전에서마저 대패를 거듭하는 등 처음부터 끝까지 엉망진창으로 진행되었다. 비교하면 수십년 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 육군은 쿠바와 필리핀 등에서 현지 원주민들의 민심 이반, 섬 지역에서 미국 해군의 압도적인 화력 우세 인한 스페인 해군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미국 육군에 맞서 나름 선전하였으나 결국 보급과 질병 문제로 항복하였다. 심지어 중대 단위의 멕시코 비정규군 기병대가 숫적으로 두 배나 더 많은 미군을 격파한 산 파스쿠알 전투의 사례를 생각하면 산타 안나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 없다. 오늘날 멕시코인들도 미멕전쟁 당시의 미국을 비판을 하되 차마 그 산타 안나를 국부 혹은 선량한 피해자로 평가하지는 못하고 대신 멕시코 혁명 당시 미군을 골탕먹였던 판초 비야를 국부 삼아 추앙하는 편이다.

5. 여담

6.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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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1901,
파일:의화단 기.svg 의화단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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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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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된 반대는 연방당(Federalist Party)에서 나왔는데 이유인 즉 연방헌법은 대통령(행정부)에게 타국과 이러한 거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기에 의회의 권한을 침해하는 월권행위였다. [2] 월권행위는 인정하나 미국에 너무나 이득이 되는 거래이기에 지나칠 수 없었다고 했다. [3] 더 정확하게는 루이지애나 구입 직후 영토가 빨강, 파랑, 진한 초록과 진한 초록 부분 바로 위에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현재 캐나다령인 지역까지였다. [4] 특히 독일계 이주민들에게 텍사스가 새로 농장을 건설하기 딱 좋은 땅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독일에서 미국으로 유입된 이주민들이 마차를 타고 텍사스에 대규모 정착하기 시작했다. [5] 미국사의 테르모필레 전투라고 할 수 있는 전투였다. 그 유명한 데이비드 크로켓을 포함한 개척민들로 구성된 186명의 민병대가 성당을 개조해 만든 알라모 요새에서 10배 이상이나 많은 3천명의 멕시코군을 상대로 며칠 동안 분전하다가 모두 전멸했다. 미국에서는 관련 영화도 여러 차례 나올 정도로 유명한 전투. 이스라엘의 마사다 요새 전투처럼 미국에서 죽기 살기로 싸운다는 대명사가 되었는데, 덕분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클라이맥스 전투에서도 밀러 대위가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는 최후 방어 거점을 '알라모 요새'라고 부른다. 제프 롱의 소설 디센트에서는 헤이들들에게 포위된 용병들 중 한명이 알라모처럼 싸우자! 라고 외치는데 옆에 있는 멕시코계 용병이 바로 좆까! 라고 외치는게 압권(...). [6] 이 전투를 그린 영화로는 알라모(1960년, 2004년 작)와 데이빗 크로켓이 있다. [7] 나중에 멕시코가 미국에게 패배하면서 미국의 강요로 외교관계가 회복되었다. [8] 상황이 이랬으니 미국인 이민자들이 마음 놓고 들어와서 대놓고 멕시코 정부의 명령을 무시할 수 있었다. [9] 수십명 단위 소규모 전투에서는 멕시코 비정규군 기병들이 미군을 상대로 전과를 올리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대규모 전투는 전부 다 패했다. [10] 당시 멕시코 군대와 민병대의 게릴라전을 미군이 초토화 전술로 무력화했다. 이 초토화 전술에선 당연 멕시코인들에 대한 살인, 약탈, 강간, 방화가 흔하게 일어났다. [11] 한편, 이와는 별개로 미국의 강경론자들은 " 멕시코 전체를 미국에 병합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만은 미국 내에서도 너무 막나가는 주장으로 여겨져서 무시되었다. [12] 멕시코에서는 메시야 매각(Venta de La Mesilla) [13] 동쪽으로는 로키 산맥, 남쪽으로는 캘리포니아, 북쪽으로는 러시아령 아메리카, 서쪽으로는 태평양과 접한 지역으로 오늘날의 오리건 주를 비롯해서 워싱턴 주, 아이다호, 브리티시컬럼비아 일대를 포함한다. [14] 당시 러시아령이었던 알래스카의 최남단 위도가 북위 54도 40분이었다. 다시 말해 알래스카까지 국경을 위로 끌어올려 캐나다 서해안을 모조리 잡아먹겠다는 것이었다. [15] 멕시코와는 다르게 외교를 통해 평화롭게 끝냈느냐면, 영국은 아무리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고생했다고해도 엄연히 당대 최강대국이라서, 신흥 공업국이던 미국의 입장에서 상대하기에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과 30년전에 백악관까지 불탔을 정도로 영국군에게 탈탈 털린 과거가 있는지라서 영국에게는 다소 저자세로 나온 것이다. [16] 사우디아라비아보다 37년이나 앞선 1901년에 석유가 발견되었다. [17]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으로 1,500만 달러에 강매한 알타칼리포르니아 준주 전체 + 산타페데누에보메히코 준주 일부 지역 140만km2 + 텍사스 공화국이 영유권을 주장한 산타페데누에보메히코 준주 대부분, 치와와 주, 코아우일라 주, 누에보레온 주, 타마울리파스 주 일부 지역 60만km2 + 테하스 준주(= 텍사스 공화국) 40만km2. [18] 당시 미국은 닥치고 이민을 받았기 때문에 불체자든 아니든 심각한 범죄 경력이 없었다면 이민도 잘 받아주면서 미국 국적도 쉽게 부여했다. 미국이 이민에 통제를 걸기 시작한 건 20세기 중반 이후부터다. [19]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한 현실적인 이유는 그동안 영국과 프랑스에게 돈을 빌려주고 외상으로 물건을 제공한 미국의 자본가들이 영국 & 프랑스가 독일의 맹공으로 고전했기 때문에 세계대전에서 독일에게 패배하게 된다면 빌려준 돈을 못 돌려받을까 우려한 것이었지만 이 전보가 참전 여론을 부채질한 것도 사실이다. [20] 애초에 당시 뉴멕시코는 주 승격이 되지 않았기에 자치권이 별로 없었다. [21] 엥겔스는 공산주의에 매료되기 이전이었던 10대에는 골수 독일 민족주의자였다. 미국-멕시코 전쟁 직전 멕시코는 상술한 것처럼 텍사스 내 독일계 멕시코인 이민자들을 탄압하려 했고 결과적으로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독일계 이민자들의 처우가 훨씬 개선되었는데 독일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반색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해당 발언은 그의 독일 민족주의 성향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앞서 부르주아 혁명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평소의 그의 신조가 어우러져 나온 결과물로 해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