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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d50000> 짜끄리 왕조 | |||
<rowcolor=#d50000>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라마 1세|라마 1세 (푸타욧파 쭐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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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2세 (푸탈릇라 나팔라이) |
[[라마 3세|라마 3세 (낭끌라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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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4세 (몽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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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d50000>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라마 5세|라마 5세 (쭐랄롱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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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6세 (와치라웃) |
라마 7세 (쁘라차티뽁) |
[[라마 8세|라마 8세 (아난타 마히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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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d50000> 제9대 | 제10대 | |||
[[라마 9세|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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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10세 (와치랄롱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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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미폰 아둔야뎃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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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e800><colcolor=#D50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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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7년 12월 5일 | ||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1] | |||
사망 | 2016년 10월 13일 (향년 88세) | ||
태국 방콕 방콕노이구 | |||
재위기간 | 태국 국왕 | ||
1946년 6월 9일 ~ 2016년 10월 13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e800><colcolor=#D50000> 가문 | 마히돌 가문 | |
이름 |
프라밧솜뎃 프라 파라민다라 마하푸미폰아둔야뎃 마히탈라티벳 라마히보디 짜끄리나루보딘드 사야민다라티랏 보롬마낯보핏 (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บรมชนกาธิเบศร มหา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มหาราช บรมนาถบพิตร)(푸미폰 아둔야뎃: 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 भूमिबल अतुल्यते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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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아버지 마히돈 아둔야뎃[2] (1892 ~ 1929) 어머니 시나가린드라 (1900 ~ 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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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누나 갈야니 바다나 (1923 ~ 2008) 형 라마 8세 (1925 ~ 1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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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시리낏 끼띠야꼰 (1932 ~ / 1950년 결혼)[3] | ||
자녀 |
장녀
우본랏 라차깐야 (1951 ~ ) 장남 라마 10세 (1952 ~ ) 차녀 마하 짜끄리 시린톤 (1955 ~ ) 삼녀 쭐라폰 왈라일락 (195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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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바칼로레아 (
문과 /
합격) 로잔 대학교 ( 법학[4] /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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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상좌부 불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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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실기이자 국왕기로서, 노란색은 국왕을 상징한다. |
태국 짜끄리 왕조의 제9대 국왕.
2차 세계대전 종전 이듬해인 1946년부터 2016년까지 무려 70년 동안 재위했는데, 생존 당시 기준 세계의 군주들 가운데서 가장 오랫동안 재위했던 국왕이었다.[5]
일촉즉발의 정치적 위기의 순간마다 중재자 역할을 맡아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해 태국 국민들로부터 대왕[6]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한국 시각 2016년 10월 12일,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결국 다음 날인 10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외아들 마하 와치랄롱꼰(มหาวชิราลงกรณ) 왕세자가 왕위를 승계하여 새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렇게 태국 근현대 역사는 라마 9세의 영향력이 짙고 태국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성군이자 명군이었기 때문에, 태국에서 왕실에 대해 험담을 하는 것은 절대 금기로 여겨지게 되었다.[7] 아들인 라마 10세의 경우에는 사생활이나 인성 논란이 있긴 하지만, 라마 9세를 비롯해 전통적으로 왕가에 충성해 왔던 태국인 정서 특성상 이것을 공개적으로 다루는 일은 거의 없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무궁화대훈장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이다. 1981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태국 방문 당시 받은 것이며, 그의 재위 기간에 태국군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을 도왔다.
2. 칭호
푸미폰 국왕의 공식적인 칭호는 다음과 같다.
태국어: 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รมินทรมหา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 มหิตลาธิเบศรรามาธิบดี จักรีนฤบดินทร สยามินทราธิราช บรมนาถบพิตร
라틴 문자 표기(RTGS): Phra Bat Somdet Phra Poraminthra Maha Phumiphon Adunyadet Mahitalathibet Ramathibodi Chakkrinaruebodin Sayaminthrathirat Borommanatbophit
한글 표기: 프라 밧 솜뎃 프라 뽀라민트라 마하 푸미폰 아둔야뎃 마히딸라티벳 라마티보디 짜끄리나르보딘 사야민트라티랏 보롬마낫보핏
라틴 문자 표기(RTGS): Phra Bat Somdet Phra Poraminthra Maha Phumiphon Adunyadet Mahitalathibet Ramathibodi Chakkrinaruebodin Sayaminthrathirat Borommanatbophit
한글 표기: 프라 밧 솜뎃 프라 뽀라민트라 마하 푸미폰 아둔야뎃 마히딸라티벳 라마티보디 짜끄리나르보딘 사야민트라티랏 보롬마낫보핏
이름의 뜻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출처
- 프라: '짐'처럼 높은 사람이 3인칭으로 스스로를 호칭하는 말. 산스크리트어의 '바다'에서 유래되었다.
- 밧: 발(足). 산스리트어의 '빠다'에서 온 말. 이는 각종 인도 유럽어의 발을 뜻하는 foot, pod 등과 어원이 같다.
- 솜뎃: '군주' 크메르어의 쌈닷(សម្ដេច).
- 뽀라민트라: '위대한'. 산스크리트어의 파라마 + 인드라.
- 마하: '큰'. 산스크리트어.
- 푸미폰: '땅의 강함'. 산스크리트어로 땅(bhumi) + 강함(Bala)의 합성어.
- 아둔야뎃: '비교할 수 없는 힘'. 산스크리트어로 비교불가능한(atulya) + 힘(teja).
- 마히딸라티벳: '마히돈 왕자의 아들'.
- 라마티보디: '라마, 비슈누의 현신이며 위대한 심판자'. 산스크리트어로 라마 + 아디 + 파티의 합성어.
- 짜끄리나르보딘: '짜끄리 왕조의 지도자'.
- 사야민트라티랏: '시암의 왕'.
- 보롬마낫보핏: '위대한 요람의 지배자'.
3. 생애
1947년 5월 5일에 국왕 대관식이 실시되었다.
미국 유학 중이던 아버지 마히돈 아둔야뎃(1892 ~ 1929) 왕자와 어머니 시나가린드라(1900. 10. 21 ~ 1995. 7. 18)[8]의 차남으로 MIT와 하버드 대학등의 소재지인 메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1927년 12월 5일에 태어났다. 마히돈 왕자는 학업을 마치고 1928년에 태국에 돌아왔지만 다음 해인 1929년에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시나가린드라는 가족들과 함께 1933년 중립국인 스위스로 이사했고, 푸미폰은 로잔에서 1945년까지 유학 생활을 했다.
친형인 아난타 마히돈 왕자는 1938년에 라마 8세로 즉위했을 때 대관식을 위해 태국에 잠깐 들렀을 뿐, 동생 푸미폰과 마찬가지로 학업을 마치기 위해 스위스로 돌아갔다. 라마 8세가 귀국한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이었지만, 재위 1년 만인 1946년 6월 9일 의문의 총기사고로 사망했다. 라마 8세의 사고 이후 동생 푸미폰은 1946년 6월 9일에 라마 9세로 즉위했다. 라마 8세의 의문사에 관해서는 공식적으로는 사고나 자살이 아닌 타살로 판결되었으며, 해당 사건에 가담한 것으로 판명되는 3명이 처형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푸미폰 국왕 배후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기는 하지만, 워낙 민감하기 때문에 태국 사회에서는 금기시되는 주제이다.
라마 9세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섭정을 임명한 후 다시 스위스에서 유학 생활을 거쳤다. 이후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는데, 여기에서 주 프랑스 태국 대사의 딸이자 자신과 오촌인 시리낏 끼띠야꼰을 만났다. 시리낏도 태국 왕족인데 국왕은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의 손자이고, 왕비는 라마 5세의 증손녀다. 한국식으로는 당숙-당질녀 관계.
3.1. 업적
1992년 수찐다 크라쁘라윤을 위시한 군부가 '검은 10월 사건'을 일으켜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하자, 방콕 시장 잠롱 스리무앙이 주도하여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경찰 병력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총기를 발포해 유혈 사태가 벌어져 국제 여론이 악화되었는데, 이때 라마 9세는 수찐다와 잠롱을 왕궁으로 소환했다.
<color#222> 당시 뉴스 캡처[11] |
파일:external/img.news.sina.com/U113P5029T2D386710F24DT20110808222632.jpg |
<color#222> 2011년에 총리가 된 잉락 친나왓[12]이 어진에 절을 올리고 있다.[13] |
라마 9세는 전국을 도시 단위가 아닌 마을 단위로 직접 돌아다니며 왕실 프로젝트를 통해 전 지역을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고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유명한 사례가 국경 지대의 절박하게 살아가는 농촌 마을이 마약 재배로 살아가는 것을 딱하게 여겨, 태국 제1의 커피 재배지로 전환시키는 프로젝트. 이 왕실 프로젝트는 불교적 '담마라자'[14]를 동반한 어진 왕으로서 마땅히 하는 것이며, 동시에 입헌군주제 하에서 최대한으로 왕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밝힌 바있다. 또한 이 왕실 프로젝트의 영향 하에 태국 대부분의 병원들은 왕실의 재산을 내어서 지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외에도 라마 9세는 1,000여 건이 넘는 농업관련 기획을 주도하고 토지개혁을 위해 왕실 소유지를 제공하는 등 태국의 농업 진흥을 위해 헌신의 노력을 다했다. 또한 그 결실 중 하나로, 태국 과학기술성이 인공강우와 관련하여 구름씨 뿌리기 국제기술특허를 가지고 있게끔 개발을 주도했는데 그 덕에 가뭄이 극심할 때 인공강우를 성공시켜 친히 비를 내리게 만들기도 했다.[15]
3.2. 문제점
그러나 재위기간이 70년이나 되는 만큼 당연히 지금까지 업적과 행보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앞서 말한 수찐따 내각을 실각시킨 사건은 푸미폰 국왕이 승인하지 않은 쿠데타 여섯 번 중 한 사례에 불과하다. 라마 9세 재위기간 동안 쿠데타는 15번 있었는데 이 중 9번은 왕실의 이해관계에 따라 승인을 받았다. 태국에서는 쿠데타조차도 군주의 승인을 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태국 정치에서 군주는 입헌군주정의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국왕의 역할을 훨씬 뛰어넘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행위자로서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지, 라마 9세가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뜻이 아니다. 라마 9세는 긴 재위기간 동안 70년대부터 꾸준하게 신성화된 절대적 권위를 이용해 능수능란하게 쿠데타를 승인, 혹은 거부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그 결과 태국 헌정과 민주주의는 허울만 남았다.이처럼 군부와 푸미폰 국왕이 연합함은 소위 '성군'이라는 평판이 과연 사실인지 심각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애초에 성군은 민주주의와 양립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성군이란 자신의 권력으로 나라를 이롭게 한 군주를 부르는 명칭인데, 민주주의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와 선출된 대표자들에게 부여되고 세습군주는 어떠한 권력도 쥘 수 없으며 단지 상징으로 존재할 뿐이다. 정상적인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임금은 손에 쥔 권력이 없으니 당연히 성군도 될 수 없다.[16] 타국과 비교하자면, 영국 노동당 당수 제레미 코빈은 열렬한 공화주의자로서 2015년에 국가 God Save the Queen 제창과 여왕에게 무릎 꿇고 손등에 키스하는 추밀원 의원 충성선서를 거부했다. 왕실은 이런 그의 신념을 인정하고 거부를 수용했다. 태국에서 그러면 얄짤없이 코얌꿍.
이와 관련하여 라마 9세가 군주권 강화를 위해 쿠데타를 정략적으로 활용한다는 비판도 있으며 심지어는 이를 방조했다는 의혹도 국외에서 제기되고 있다. 2006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 친나왓 총리가 이끄는 내각과 의회를 해산하고 총리는 해외로 망명했는데, 군부가 내세운 쿠데타 이유는 탁신의 부패 스캔들 때문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왕실과 군부를 위시한 기득권 세력과 불편한 관계였던 탁신을 내쫓는 데 두 집단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는 의견도 있다.
요컨대 태국 정치에서 라마 9세가 미친 영향이란 세습통치자와 군부의 기회주의적 결탁과 그에 따른 민주주의의 질식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수준이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태국 민주주의의 정체와 퇴보에는 라마 9세가 그 결정적인 책임을 피해갈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국왕 푸미폰에 관한 비판이 해외 언론에 보도되는 등 점차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물론 대다수는 태국 국민들이나 태국 정치 혹은 풍습이 결합돼서 나타나는 시너지 효과지만 태국 내에도 엄연히 전 국왕 푸미폰을 비판하는 세력이 존재한다. 다만 옐로우 셔츠나 레드 셔츠가 아니라 지하 세력이 비판을 하는데 지하에서 활동하지 않으면 모조리 잡혀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국의 몇몇 지하세력은 타국에서 활동하기도 하며 태국 정부는 이들을 잡으려고 혈안이다.
이들은 전 국왕 푸미폰이
- 미국의 꼭두각시였고[17]
- 실상은 그다지 좋지 않은 아버지였으며
- 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18]
- 가장 부유한 왕족들 중 하나임에도 태국은 여전히 전체적으로 생활수준이 높은 나라가 아니며
- 권력이 있고 국민을 배려한다 말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이를 잘 실행치 않는다[19]
이외 다른 비판점들도 많지만 상당부분은 군주가 행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나 정치인들의 행동들 중 푸미폰 전 국왕이 엮인 것뿐이기 때문에[20] 푸미폰 전 국왕의 문제가 아니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1970년대 타놈 끼티까촌의 귀국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혹 뚤라(탐마삿 학살) 등을 방조하며 극우 추종자들의 행동을 멈추려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은 비판받아야 할 점이라 주장한다. 올리버 스톤이 방콕 국제 영화제에서 푸미폰 국왕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강요받아서 보이콧하려던 적도 있고 국왕이 키우는 개를 비웃는 이미지를 올렸다가 6일동안 징역형에 처한 사람도 있다 # #(태국어 주의)[21]. 물론 푸미폰이 직접적으로 연루된 사건은 아니지만 그만큼 태국 왕실이 너무 신성화, 절대화 되어있음을 뜻하고 또 사람들이 푸미폰 국왕 스스로가 마음에 안드는 국민은 내버려둔다는 인식을 갖게끔 만드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잘못된 정보들이 있긴 했지만 주성하 기자가 태국이 북한과 비슷한 풍경을 보였다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는 이유로 태국 대사관에서 항의 공문을 받은 적도 있다.
후술하겠지만, 후계자 교육에 실패했다. 라마 10세는 왕세자 시절 전근대 왕족들조차 엄두도 낼 수 없는 기행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자 자리에서 폐위 시키지 않았고 결국 군주로 즉위했다.[22]
3.3. 개인적인 면
미국에서 출생했고 스위스에서 유학할 때부터 재즈 음악을 좋아해 색소폰과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하며 음악적 재능을 자랑하며 앨범까지 냈다. 50여 곡 이상의 재즈 스탠다드 스타일 곡들을 작곡하고 1960년대 뉴욕에 가서 스윙시대 전설적인 클라리넷 연주자 베니 굿맨과 협연하며 재즈에 대한 열정을 과시했다. 또한 태국어를 포함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산스크리트어 등 5개 언어가 유창해 손수 영어 서적을 태국어로 번역했으며, 정기적인 사진 전람회를 여는 사진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왕실 프로젝트 때에도 카메라를 항상 갖고 다닌 것이 그의 젊은 날의 아이콘으로 그려지곤 한다. 그리고 젊은 시절에는 요트 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다.미국의 경제지 포브스에 따르면 2008년 재산이 350억 달러로 세계의 군주들 가운데서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의 칼리파 국왕(230억 달러), 3위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국왕(210억 달러), 4위는 브루나이의 하사날 볼키아 국왕(200억 달러), 5위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무하마드 국왕(180억 달러), 6위는 리히텐슈타인의 한스 아담 2세 대공(50억 달러), 9위는 모나코의 알베르 2세 대공(14억 달러), 14위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국왕(6억 5천만 달러) 순이었다. 푸미폰의 재산이 급등해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태국 왕실이 방콕 등지에 소유하거나 명목상의 부동산이 공개되어 새로 집계된 결과 전년도 추정액보다 7배가량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23] 또한 국왕이 소유하고 있는 은행이나 시멘트 회사의 물건을 집중적으로 이용하는 이유 중 하나다.
원체 이 정도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외국인들은 태국에서 어떤 사업을 하건 49% 이상 소유권을 얻을 수 없고, 업무용 이외의 부동산을 소유할 수 없다는 태국 법률에 근거한다. 이 때문에 외국 자본은 태국 현지인과 손을 잡고 사업을 할 수밖에 없는데, 가장 믿을 수 있는 상대가 바로 태국 국왕. 이 때문에 왕실은 땅 짚고 헤엄치면서 돈을 번다. 여기에 정유, 백화점, 철도, 페인트 등은 사실상 왕실 독점.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만나 회담을 가진 적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단한 미인인 시리낏 왕비를 보고 혼자 신이 나서 만찬장에서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셔댔다. 이에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그만 마시라고 눈치를 주고 태국 외무장관도 걱정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박정희는 술을 마시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박정희가 발언할 차례가 되자 다들 혹시 술주정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여 긴장한 눈으로 박정희를 쳐다보았는데 다행히도 박정희는 술취한 기미 없이 발언을 마쳤다. 그런데 자리로 돌아와서 또 술을 마셨다고 한다. 아래는 이동원 외무부장관의 회고다.
1966년 2월, 외무장관 시절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태국을 방문, 태국 국왕의 환영만찬에 초대되었을 때의 일화다. 태국 왕가의 '부미볼'[24] 왕과 시리낏 왕비는 당시 30대의 젊은 부부였다. 특히 시리킷 왕비는 미국의 <라이트>[25]지 표지모델로도 나온 적이 있을 만큼 세계적인 미인으로 소문나 있었다. 아무래도 그날 박 대통령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관례에 따라 시리낏 왕비가 옆에 앉았는데 그는 그 분위기에 한층 고무된 듯 했다. 칵테일 리셉션하면 대개 잔을 입에 대는 정도로 끝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그날 따라 권하는 대로 덥석 덥석 받아 마시는 것이었다. 또한 옆의 시리낏 왕비에게 자꾸만 권하며 잔을 부딪치고는 또 다시 들이키고... 시간은 얼마 흐르지 않았는데도 벌써 그는 평소 주량의 배 이상을 마셔버렸다.
내심 난, 혹 저러다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불안해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국왕 옆에 앉아 있던 육 여사로부터 눈총이 날아왔다. 한마디 하라는 눈치였다.
"각하, 오늘 너무 드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나 쇠귀에 경읽기였다.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비우더니 내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보란 듯이 한 잔 더 따라 들이켜버렸다. 마치 평생 술 구경도 못해본 사람 같았다. 갑자기 오른쪽 귀가 뜨거워서 돌아보니 코만 외상[26]이었다.
"이 장관, 아까부터 박 대통령을 지켜보고 있었소. 내가 이제껏 외상으로서 외국의 국가원수를 모셔봤지만 저렇게 술을 많이 드시는 분은 처음이오. 실수야 없겠지만 언제 쓰러질지 걱정이오."
디너 스피치 시간이 되어 태국 국왕의 환영사가 끝나고 박 대통령이 답사할 차례였다. 그날 초대된 모든 내외귀빈의 눈은 모두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그 눈 속에는 과연 박 대통령이 쓰러지지 않고 일어설 수 있을까, 아니면 몇 걸음까지 걸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숨어 있었다. 드디어 궁금증에 부응이라도 하듯 박 대통령이 탁자를 누르며 일어섰다. 그런데 수많은 눈의 열망과는 달리 그는 전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또박또박 단상으로 걸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리곤 또렷한 목소리로 할 말 다하고 단정한 몸매로 다시 돌아와 앉고선 다시 앞에 놓인 잔을 들이켰다.
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 고려원(1992) 59~60쪽.
내심 난, 혹 저러다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불안해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국왕 옆에 앉아 있던 육 여사로부터 눈총이 날아왔다. 한마디 하라는 눈치였다.
"각하, 오늘 너무 드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나 쇠귀에 경읽기였다.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비우더니 내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보란 듯이 한 잔 더 따라 들이켜버렸다. 마치 평생 술 구경도 못해본 사람 같았다. 갑자기 오른쪽 귀가 뜨거워서 돌아보니 코만 외상[26]이었다.
"이 장관, 아까부터 박 대통령을 지켜보고 있었소. 내가 이제껏 외상으로서 외국의 국가원수를 모셔봤지만 저렇게 술을 많이 드시는 분은 처음이오. 실수야 없겠지만 언제 쓰러질지 걱정이오."
디너 스피치 시간이 되어 태국 국왕의 환영사가 끝나고 박 대통령이 답사할 차례였다. 그날 초대된 모든 내외귀빈의 눈은 모두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그 눈 속에는 과연 박 대통령이 쓰러지지 않고 일어설 수 있을까, 아니면 몇 걸음까지 걸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숨어 있었다. 드디어 궁금증에 부응이라도 하듯 박 대통령이 탁자를 누르며 일어섰다. 그런데 수많은 눈의 열망과는 달리 그는 전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또박또박 단상으로 걸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리곤 또렷한 목소리로 할 말 다하고 단정한 몸매로 다시 돌아와 앉고선 다시 앞에 놓인 잔을 들이켰다.
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 고려원(1992) 59~60쪽.
3.4. 태국 최장 재위 군주
엘리자베스 2세(재위 44년째)와 라마 9세(재위 50년째), 1996년 10월 28일[27] |
즉위 60주년인 2006년에는 이를 축하하는 성대한 행사가 국가적으로 거행되었다. 우선 태국 전역에서 노란색 티셔츠와 함께 '국왕 폐하, 만수무강하소서'라는 문구가 적힌 손목띠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승려 8,400여 명이 라마 9세를 위해 기도했으며, 탄신일 이틀 전에는 정당들이 일주일간 정쟁을 중단하기로 결의했다. 의회도 6월 9일을 국경일로 지정해 분위기를 달궜으며, 이날에는 세계 각지의 24개 군주국에서 국왕, 왕비, 왕세자, 왕족들이 왕실 만찬에 참석해 역사상 보기 드문 장관을 연출했다.
즉위 70주년인 2016년에도 이를 기념하는 국가적인 경축 행사가 거행되었다. 국왕이 추진했던 태국 랏차부리 주의 관개시설 준공식을 시작으로, 태국 중앙은행은 재위 70주년을 기념하는 70바트 기념 화폐를 발행했고, 방콕의 왕궁 인근에서는 쁘라윳 짠 오차 총리와 각료 및 군 장성들이 승려 770명과 함께 탁발 의식을 치렀다. #
태국의 역대 모든 왕조를 통틀어서 이 정도로 장기간 왕좌를 유지한 국왕이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역사서 한 편이 쓰인 셈이다.
워낙 고령이다보니 2007년과 2009년, 2011년에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해 병원에 입원하며 치료를 받고 퇴원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기에, 그때마다 국민들은 국왕의 쾌차를 바라며 성심껏 기원했다. 이는 푸미폰 국왕이 오랜 세월 범접하기 힘든 성군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던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왕세자의 즉위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아래 항목을 참조 바람. 하지만 워낙에 고령인 데다 2014년 10월에는 복강경을 통한 담낭(쓸개) 제거술까지 받은 것으로 확인되어 앞으로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상태라 국민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특히 매년 생일 때마다 군중에게 답례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지만 2014년과 2015년에는 그것마저도 불참할 정도로 악화되자 국왕의 건강 상태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 2015년 12월 14일, 입원한 병원에서 신임 법관을 접견하는 모습이 방송되어 용태가 호전된 듯 보였다. # 접견식 때 모습
그러나 2016년 초에 폐렴 증세가 재발했고 중순에 들어서 더더욱 상태가 나빠져 공식 석상에서도 차례로 불참하고 병원에 가서 요양 치료 중이라고 하며, 나중엔 인공호흡기를 부착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
3.5. 사망
결국 2016년 10월 13일 13시경,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태국 현지시간 19시에 사망 소식이 왕실 언론으로 통해 알려졌다. #태국 정부는 모든 일정을 중단하고 1년간의 추모 기간을 선포했으며, 앞으로 30일 동안 오락활동을 자제하고 검은 옷을 입을 것을 국민에게 촉구하였다. 태국 웹사이트, 언론사, 모든 방송사들이 흑백으로 처리되고 있으며, 해외에 있는 태국 대사관도 조기를 게양했다. 학교도 하루 임시휴교에 들어갔다. 한달간 모든 방송사의 자체 프로그램 송출을 중단시키고 국영 방송이 제공하는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하도록 지시했다. 외신에 대해 추모객 수를 줄이는지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며, 방송 송출을 중단했다. #
유튜브와 구글에서 '왕실모독' 게시물에 대한 상시 감시에 나선다고 한다. # 페이스북은 왕실모독 게시물을 단속한다는 태국 정부의 압력을 수용했다. #
태국 프리미어 리그 2016시즌 잔여경기가 취소되었으며 태국 FA컵 4강경기가 취소되어 우승팀은 추첨으로 결정한다.
10월 마지막 주에 후아힌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ATP 챌린저 대회도 취소되었다.
11월 5일부터 6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던 <2016 JYP NATION IN BANGKOK> 역시 취소되었다.
국민들도 푸미폰 국왕이 있는 방콕 시리라즈 병원 앞에 병원 건물을 응시하였으며, 병원 근처까지 걸어서 온 사람들도 있다. #1, #2
해외 각국의 정상들의 추모가 이어졌는데, # ##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도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도 김정은의 명의로 애도를 표했다.
같은 불교 국가 부탄은 14일을 '애도의 날'로 지정, 조기를 게양하고 학교와 관공서 문도 닫았다. 또 부탄 내 불교 사원에서는 앞으로 7일간 특별 기도회가 열린다.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 국왕은 사망한 푸미폰 국왕을 위한 기도회를 주도하였으며, 장례행사에 직접 참석하기 위해 태국을 방문했다.
15일 왕궁에 전국에서 상경한 수만 명의 애도 인파가 몰려들었다. # 22일에도 왕궁 앞 사남 루앙 공원에서 애도를 가졌다. # 29일부터 국왕의 시신이 안치된 왕궁에서 일반인에게 첫 개방하였다. #
그 와중에 마하 와치랄롱꼰 왕세자와 쁘렘 띤나술라논(เปรม ติณสูลานนท์) 추밀원장을 비난한 태국 여성이 왕실모독법에 의해 기소되었다. # 다행히 왕가를 노골적으로 겨낭하지 않아서 무혐의로 처리했지만, 70년대 이래 절대화된 존왕주의적 민족주의로 인해 국왕의 섬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과 검은 옷을 입지 않는다고 해서 린치 같은 집단행동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 그래서 정부에서 강요하지 않는다고 해명한 일이 있었으며, 현지 언론들도 집단행동에 비판했다. #
미리보는 장례식 장례식 준비는 마하 짜끄리 시린톤 공주가 맡는다. # 2017년 10월에 거행될 장례식에는 태국의 왕족이 사후에 돌아가는 곳으로 알려진 수미산을 형상화 한 50.49m 높이의 목조 조형물이 설치될 예정이다. #
차기 국왕은 2017년 10월 중순쯤 대관식을 거행할 전망이며, 즉위 전까지는 쁘렘 띤나술라논[29] 추밀원장이 섭정을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30] 그러나 2016년 10월 18일, 최소 15일간의 추모 기간이 지난 뒤라면 국왕 즉위 절차가 시작되기 적절할 것이라고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밝혔다. #. 왕세자가 있는데도 왕위를 비운 채 섭정이 1년 동안 대행하는 것에 대한 정치적 불안을 최소화하려는 태국 정부의 선택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인 분석이다.
태국 정부가 정식으로 '대왕(the Great)' 칭호를 올렸다. # 이러한 추모물결이 범죄율까지 낮추는 효과를 불러오게 된다. #
장례식은 2017년 10월 26일에 거행되며, 공휴일로 지정된다. # 방콕의 왕궁 부근에 마련된 장례식장에서 국내외 조문 사절 및 승려, 왕족 등 7,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이 주재하여 공식 다비식을 진행했다. 장례식장 주변에 운집한 시민 20만 명이 푸미폰 국왕을 애도했다. #
4. 가족관계
왕실 가족 사진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우본랏 라차깐야 | 1951년 4월 5일 | 생존 ([age(1951-04-05)]세) |
슬하 1남 2녀 |
1남 |
라마 10세 (Rama X) |
1952년 7월 28일 | 생존 ([age(1952-07-28)]세) |
5번 결혼 슬하 5남 2녀 |
2녀 | 마하 짜끄리 시린톤 | 1955년 4월 2일 | 생존 ([age(1955-04-02)]세) |
미혼 무자녀 |
3녀 | 쭐라폰 왈라일락 | 1957년 7월 4일 | 생존 ([age(1957-07-04)]세) |
슬하 2녀 |
와치랄롱꼰 왕세자가 푸미폰의 외아들인 만큼 오랫동안 그가 차기 국왕이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감정 기복이 심했고[31]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등 사생활에 추문이 잇따라 시리낏 왕비 한 사람과 60년간 해로한[32] 푸미폰과 대비되어 평판이 매우 좋지 못하다. 국왕과 왕실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어려운 태국이었으니 망정이지, 군주와 왕실에 대한 비판이 자유로운 유럽 왕실이나 태국보다는 비교적 비판이 자유로운 편인 일본 황실에서 와치랄롱꼰(라마 10세) 같은 기행이 있었다면 군주제가 폐지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태국 고위층조차 상당수가 수십 년 동안 왕세자의 왕위 계승반대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왕세자의 여동생 짜끄리 시린톤 공주의 여왕 즉위를 바라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지경. 하지만 이렇게 되더라도 문제가 있는 게, 시린톤 공주는 미혼이라 왕위를 이을 자녀가 없다. 이 때문에 왕세자가 즉위하지 못하고 시린톤 공주가 왕위를 계승하더라도 시린톤 다음은 인기가 없는 왕세자의 자녀가 다시 이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33]
그러나 왕세자에게 자녀들이 있고 또 합법적 계승자인 아들이 1명 있으므로 계승권은 뒤로 밀린다. 원래 왕세자에게 아들은 5명이나 있는데 둘째 부인에게서 얻은 4명은 영국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계승권이 없다. 현 계승권자는 셋째 부인의 아들. 자세히 말하면 와치랄롱꼰 왕세자는 결혼을 3번 했는데(2번 이혼), 첫째 부인에게서 딸 하나, 둘째 부인에게서 4남 1녀, 현재의 왕세자빈에게는 아들 하나를 얻었다. 참고로 둘째 부인의 자녀들은 어머니와 함께 영국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태국으로 돌아온 딸 1명[34]만 빼고는 왕족 작위가 박탈되었다. 이때 확실한 것은 합법적으로 이혼하기 이전에 둘째 부인이 런던으로 갔다는 것이고, 이후에 왕세자가 런던으로 가서 딸은 데려왔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국외에서 오가는 내용이며 태국 국내에서는 아직은 쉬쉬하고 있다.
위키리크스의 폭로에 따르면, 라마 9세는 파킨슨병과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왕위계승자인 와치랄롱꼰 왕세자는 에이즈나 C형 간염 등의 혈액 관련 불치병을 앓고 있어서 왕세자의 누이들이 왕위계승권을 노린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태국 왕가 대 끊길 판 이런 와중에 친정 식구가 연루된 대형 부패 스캔들로 인해 2014년 12월 13일 스리라스미 왕세자빈이 왕세자와 이혼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왕세손의 미래도 불투명해진 것으로 전망되었다. 기사 하지만 국왕도 왕세자도 나이가 있기에[35] 왕세손을 바꿀 마음은 더 이상 없는 것으로 보인다.
2019년 3월 총선 앞두고 라마 10세의 누나인 우본랏 라차깐야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고 총리 후보로 나서 태국 왕실 출신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파장이 클 것이라 전망이다. # 그러나 와치랄롱꼰 국왕이 누나의 총리 출마 반대 의사를 밝힘으로써 우본랏 공주의 출마는 철회되었다. #
5. 기념물
태국 거리나 관공서, 학교, 병원 등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으로, 거대한 초상으로 라마 9세 혹은 왕실 구성원에 대해서 기념물을 조성한다.태국 해군의 구축함이 푸미폰 아둔야뎃급으로 명명되었다. 태국의 항공모함 차크리 나루에벳 및 상륙함정을 제외하고 배수량이 가장 큰 사실상 태국 해군의 주력이다. 1번함인 HTMS 푸미폰 야둔야뎃 함은 한국의 대우조선해양에서 건조하였으며, 2017년에 진수하여 2018년에 태국 해군에 인도되었다. 함번은 DDG-471이다.
방콕에 라마 9세 수퍼 타워를 건설하려 했었다. 2022년 완공 예정이었으나 건설 자체가 취소되었다.
[1]
보스턴 광역권에 있는 도시로 하버드 대학교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가 위치해 있다.
[2]
라마 5세의 아들.
[3]
라마 9세의 5촌 조카딸이기도 하다. 라마 9세의 조부 라마 5세가 시리낏의 증조부다.
[4]
물리학에서 전과
[5]
엘리자베스 2세 여왕보다 5년 6개월 먼저 즉위하여 약 6년 먼저 사망했다.
[6]
짜끄리 왕조에서 대왕 칭호를 받은 왕은 세 명이다. 오늘날
태국의 개국군주인
라마 1세 풋타엿파쭐라록 대왕과 외세로부터 독립을 지켜낸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 그리고 라마 9세 푸미폰 대왕. 특히 푸미폰은 살아있을 때 대왕의 칭호를 받았다.
[7]
만약 이를 어겼다간 왕실모독죄를 적용해 공식적으로 처벌하는 것이 가능하다. 왕가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지폐도 구겨서 보관하면 경찰이나 시민들의 경고를 받을 수 있으며, 돈에 낙서를 하거나, 던지거나, 고의로 훼손시키는 모든 행위는 아예 처벌 대상이다. 아예 구겨진 돈을 다림질을 해서 펴서 보관하기도 한다. 이는 외국인들에게도 얄짤없이 적용되는 법이다. 일례로 어느 한국인 사업가가 태국인들과의 언쟁 끝에 화가 난 나머지 태국 화폐를 집어던진 적이(!) 있었는데, 이를 고발하여 왕실모독죄로 구치소에 수감된 적이 있다고 한다.
[8]
아들 둘이 국왕이 되었지만 칭호는 왕대비(Queen Mother)가 아니라 왕대빈(Princess Mother)에 머물렀다. 남편이 왕자 신분으로 사망해 왕자비였을 뿐 왕비가 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1995년 94세를 일기로 사망.
[9]
그래서 평생동안 오른쪽 눈에
의안을 끼우고 살았다.
[10]
태국 헌법에서는 불교 신자만 국왕으로 인정한다.
[11]
영상은
프랑스 방송 자료다.
[12]
2006년 쿠데타로 쫓겨난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막냇동생이다. 잉락도 2014년 5월 쿠데타로 실각했으며, 그 배후에는 왕실과 추밀원이 있다고 강력히 의심받는 중이다.
[13]
새로운 내각이 출범할 때 총리와 장관들이 국왕의 초상화에 엎드려 절을 올리는 것이 공식적인 의례이기도 하다.
[14]
팔리어로 법(法)의 왕(王)이란 뜻이다.
불법(佛法)을 수호하고 그 가르침으로 통치하는 이상적인 왕을 가리킨다. 상좌부 불교가 태국의 주류종교가 된 13세기 이후로 태국 역대 왕조의 임금들은 '담마라자'의 이미지에 기대려 하였다.
[15]
다만 이걸 푸미폰이 구름씨 뿌리기를 생각하고 개발했다고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16]
물론
입헌군주제의 군주도 상징으로써의 역할이 있으니 이 역할을 잘 수행하면
명군,
성군이라는 칭호가 붙을 수는 있다. 그런 방식으로 불리는 경우가 거의 없는게 사실이지만(...). 단, 민주주의를 이룩하면서도 치적을 남겨 성군 칭호를 받을수 있는 경우가 단 하나 존재하는데 바로
국왕 본인이
민주화를 성취시키거나 최소한 수용하는 경우이다.
부탄의
국왕인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이 그 예시. 전제군주로써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겼으니 일반적인 의미의 성군이 맞고 동시에 민주주의를 지키는 경우이다.
[17]
냉전 시대에 그런 경향이 뚜렷하게 보였다고 한다. 지금도 태국이 친미 국가이긴 하지만, 이 당시에는 상황이 상황인 만큼 생각해봐야 할 여지가 있다. 2020년에는
반중을 중심으로 뭉친
밀크티 동맹이 형성되면서 태국 존왕주의자들은
반미 성향을 강하게 띄고 있다. 주 태국 미국 대사관 앞에서
태국 민주화 운동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주장하는 수준.
[18]
위의 쿠데타 방임이나 지지도 그렇고, 실제 태국에는 형법 112조에 국왕이나 왕가를 비판하면 안된다는 조항이 있다. 이를 위반하면 최대 15년까지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
[19]
예를 들어 푸미폰 스스로는 자신이 신이 아닌 그저 사람이라고 방송으로 보낸 적이 몇 번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잡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손을 놓다시피 한 것을 지하세력은 비판한다.
[20]
예를 들어 구름씨 뿌리기와 인공강우를 국왕이 직접 발명했다고 미화한다거나
[21]
해당 글은 태국의 지하 세력이 운영하는 블로그다. 그러나 태국의 유력 언론사들은 이런걸 싣질 않으니...
[22]
물론 후계자라는 자리가 정말
답도없는 실책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웬만해서는 교체되기 힘든 자리라는 점은 염두에 두자.
찰스 3세도 엄청난 비판거리에도 불구하고 70년간 후계자 자리를 굳건히 지키다가 결국 즉위했다. 거기다 찰스 3세는 3남 1녀 중 장남이지만 라마 10세는 1남 3녀 중 장남이자 외아들이다. 영국의 경우 찰스 3세부터가 여왕의 아들인데다, 현재는 아예 왕실법으로 절대적 맏이 상속제를 시행할 정도로 여왕 즉위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거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당시의 장자상속 원칙에 따라 찰스 3세가 당시 장남이었으므로 왕세자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이에 비해, 태국 왕실은 공주의 계승이 불가능한 건 아니고 국왕이 후계를 지명하는 데 입김을 발휘할 수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아들 우선의 장자상속제를 채택하고 있는데다 여왕 즉위 자체가 전례가 없었고 여성 즉위에 대한 보수파의 반대도 극심했다. 그러므로 멀쩡히 살아있는 외아들을 놔 두고 다른 자식을 후계자로 내세울 명분도, 국민적 공감대도 없었으므로 후계자 교체는 아예 가능성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23]
물론 실질적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이 넘사벽으로 1위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회사이지만 사실상 왕족의 사유회사로 취급하는 아람코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태국의 국왕은 명함도 못 내민다.
[24]
'푸미폰'과 달라 의아할 수 있다.
태국 문자 표기는
표기 심도가 깊어 실제
태국어 발음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라마 9세의 휘 앞부분은 'ภูมิพล(bʰūmibl)'로 쓰고 [พู-มิ-พน(pʰūː.mí.pʰōn)\]으로 읽는다. 로마자 표기는 전자를 기준으로 한 'Bhumibol'로 알려져 있기에, 이를 다시 한글로 옮겨 '부미볼'이 된 것. 오늘날 태국어의 한글 표기는 발음을 기준으로 하므로 '푸미폰'이다.
[25]
라이프지의 오타로 추정. 시리킷 왕비는 1962년 1월 12일자 라이프지에 모델로 나온 적이 있다.
[26]
1959년 2월부터 1971년 11월까지 무려 12년간 외상으로 재임한 태국 20대 외상 타낫 코만(Thanat Khoman/นายถนัด คอมันตร์, 1914-2016)을 말한다.
[27]
전술 했듯 라마 9세는 유학 생활로 영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와의 회담에서 통역이 따로 필요 없었다. 우연찮게도 라마 9세와 엘리자베스 2세 둘 다 재위 70주년 되는 해에 사망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28]
쉽게 말하자면 라마 9세가 즉위하던 해 태어났던 사람이 2016년 기준 70세인 셈. 때문에 현재 태국 국민 대부분은 푸미폰 왕 재위시절의 사람들이다.
[29]
태국의 군인이자 전 총리로, 2019년 노환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막후에서 태국 정계를 주도하는 인물 중 으뜸이었다.
[30]
해당 기사에는 추밀원장의 이름이 '틴술라논다'로 잘못 나왔다.
[31]
이건 성격이 급하다 정도가 아니다. 단적으로
일본과의 외교에서 정말 심각한 사고를 쳤던 전례가 있었다. 일본 방문 중에 자신의
정부(情婦)에게 국빈대우를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가
일본 정부가 거부하자 온갖 패악질을 일삼아서 당시 운전기사만 수차례 교체되었고, 나중에 일본에서 사절이 오자 왕세자 자신이 조종하는 기체를 포함하여 F5 전투기 5대를 동원해서 일본사절이 탄 비행기가 태국 공항에 들어오는 것을 막은 적까지 있다. 일본도 군주가 있는 입헌군주국이지만 군주나 왕족이 저 정도 사고친 적이 없었기에 경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개망나니
후미히토 일가마저도 타국에 대한 외교적 결례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32]
공식적으로는 시리낏 왕비와 해로한 푸미폰 국왕이지만, 그렇다고
부부의 금실이 좋았던 것은 절대로 아니다. 푸미폰 국왕 본인의 문제라기보단 왕비의 문제와 더 가깝긴 하지만 40년 넘게 별거 중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며, 시리낏 왕비의 공공연한 외도 또한 문제가 된다. 사실 이 부분은 태국 내에서는 절대로 언급될 수 없는 소재인데, 왜냐하면 공주들의 출생 문제가 걸리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왕비를 포함한 왕족들은 왕자의 왕위 계승을 지지한다.
[33]
국왕의 첫째 자녀인 우본랏 공주는 미국 국적자인 피터 레드 젠슨과 결혼해서, 그녀의 자녀들은 계승권이 없다.
[34]
이쪽은 할아버지인 푸미폰이 왕족 작위를 정식으로 부여해주었다.
[35]
라마 10세만 해도 즉위했을 때의 나이가 6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