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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스펜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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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탄생 및 유년기3. 성인 이후4. 찰스 왕세자와의 만남5. 약혼 발표6. 찰스 왕세자와의 화려한 결혼식7. 결혼 후에도 이어진 지나친 관심8. 불행한 결혼생활 및 이혼9. 비극적인 죽음10. 전 세계의 추모 물결

1. 개요

다이애나 스펜서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탄생 및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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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성공회 유아세례식에서 부모와 함께
1961년 7월 1일, 영국 노퍽 엘리자베스 2세 별장 샌드링엄 하우스에서 올소프 자작 존 스펜서와 올소프 자작 부인 프랜시스 로슈의 3녀로 태어났다. 샌드링엄 하우스는 엘리자베스 2세가 외조부 퍼모이 남작에게 내어준 곳으로, 아버지가 백작위를 물려받기 전까지 외갓집이기도 한 이곳에서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1]

이름은 먼 조상인 존 처칠의 외손녀이자 베드퍼드 공작부인이었던 다이애나로부터 따왔다. 베드퍼드 공작부인 다이애나 또한 조지 2세의 아들 프레더릭 왕세자의 유력한 왕세자비 후보였고, 외할머니 말버러 공작부인 사라 처칠도 아끼는 손녀를 왕실로 시집보내기 위해 애썼으나, 결국 그 자리는 독일 출신 공주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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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어린 시절은 대체로 불행했다. 다이애나의 부모는 후계자가 될 아들 출산[2], 나이 차이[3]로 인한 성격 차이 등으로 인해 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매일같이 큰 소리로 다투었고 어머니 프랜시스는 자주 울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유모가 지나치게 자주 바뀌는 등 모든 것이 불안정했다. 어머니의 외도로 아버지가 어머니의 뺨을 때려서 울리는 것을 문 뒤에 숨어서 지켜볼 때도 있었다. 결국 다이애나 스펜서가 6살이 되던 1967년에 다른 남자와 집을 나가버린 프랜시스로 인해 두 사람의 별거가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어머니와 함께 런던에서 지냈으나 양육권 문제로 인해 다시 아버지가 사는 노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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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정식으로 이혼한 것은 다이애나가 8살 때의 1969년이었다. 아버지 존은 7년 후 1976년 재혼했으며, 이에 다이애나를 포함한 4남매는 아버지를 크게 원망했다. 아버지 존 스펜서는 그 시대 상류층 남성들이 그러하듯 체면과 명성을 비롯해 다른 일을 언제나 굉장히 중요시하던 사람이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귀족 남성들은 집안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도리였다. 다이애나의 시할머니 엘리자베스 왕대비도 어린 시절 아버지와는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은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의 저택에서는 늘 파티가 열렸다. 그래도 아버지 존 스펜서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다이애나의 빈 마음 속이 온전히 채워지지는 못했다. 이로 인해 새어머니인 레인과도 친해지지 못했고, 그녀를 산성비라고 불렀을 정도로 사이가 극악이었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9대 스펜서 백작이 된 레인의 사치스러운 씀씀이에 분노한 남동생 찰스 스펜서는, 훗날 아버지가 사망하고 백작이 되자마자 그녀를 쫓아내 버렸다. 처음부터 새어머니의 것이었다고 증명할 수 없으면 짐도 챙겨가지 못하게 했으며 그녀의 고용인들도 예고 없이 모조리 해고했을 정도였다. 4백만 파운드와 메이페어의 주택을 내주기는 했지만, 스펜서 남매가 계모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일화이다.

14살이던 1975년, 친할아버지 7대 스펜서 백작 앨버트 스펜서가 사망하자 당시 올소프 자작이었던 아버지가 백작위를 계승했고, 역대 스펜서 백작들의 가족저인 올소프 저택에 입성했다.

명문 사립학교 노퍽의 리들스워스 홀과 켄트의 웨스트 히스 여학교[4]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두 학교는 광대한 자연에 둘러싸인 멋진 환경 속의 장엄한 저택이었다.

학창 시절의 다이애나는 스포츠 만능으로 수영 테니스, 댄스를 잘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과목을 좋아했으며, 그 중에서도 발레 피아노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다이애나가 입학하고 얼마 뒤 학교에 커다란 홀이 생겼는데, 이 되면 그곳에서 몰래 음악을 틀고 몇 시간씩 발레 연습을 하곤 했다. 다이애나는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짓궂은 학생이었다. 여담으로 같은 반 친구 중 한 명이 틸다 스윈튼이었다.

다이애나는 학교를 다닐 때는 로맨스 소설을 즐겨 읽었으며, 특히 유명 작가 바버라 커틀랜드의 소설을 좋아했다.[5] 의붓손녀가 자기 소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초기작 몇 권을 보내줬다고 하며 다이애나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하자 한동안 서운해했다고 한다. 참고로 딸인 레인에 대하여 5대 서덜랜드 백작의 딸이거나, 켄트 공작 조지의 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에 푹 빠져 학업 성적이 나빠진 나머지 번번이 낙제까지 했을 정도로 항상 동화 속 왕자님과의 낭만적인 사랑을 꿈꿨다고 한다. 이에 다이애나의 언니들과 친구들은 자신이 언젠가는 대단한 사람의 아내가 될 것이라는 포부에 가득 차있는 그녀를 공작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놀렸다고 한다.

3. 성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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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는 소질이 없어서 중등학교 졸업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종 학력은 중등학교 중퇴였다. 영국의 교육과정 중학교 고등학교 구분없이 아예 중등학교로 통합되어 일원화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초졸인 셈이다. 중학교 3학년 나이까진 학업을 이어나가기는 했다.

언니들과 남동생은 모두 명문대인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우등생인데 본인만 성적이 좋지 않아서 열등감을 느꼈으며, 이 역시 그녀의 소극적인 성격에 한 몫을 했다. 다만 프랑스어는 수준급의 실력을 자랑했다고 한다. 서양인들은 프랑스어를 습득하기 유리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빅토리아 시대를 다룬 소설 등의 작품에서 어렵다는 묘사가 빈번하게 나올 정도로 습득하기 까다로운 언어다. 그 예로 소설 소공녀의 주인공 세라 크루가 프랑스어 수업 시간에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자 아이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학력이 짧았던 탓에 제대로 된 정규 직업을 갖지는 못했으며, 상류층 아이들이 다니는 핌리코의 유치원에서 시간제 보모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다른 사람을 돌보고 도와주는 일이 적성에 맞았고, 이 일을 하면서 존재감을 인정받고 행복을 느낄 정도로 아이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치원 교사의 말에 따르면 진심으로 아이를 좋아하는 것이 느껴졌고, 풀이 죽은 아이가 있으면 옆에 가서 위로해주곤 했다고 한다. 먼저 시집갔던 두 언니가 아이가 있는 또래 귀부인들을 소개시켜줘서 그들의 베이비시터로도 일했다.

이것이 와전되어서, 평범한 유치원 보모가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으로 마치 한 방에 인생역전을 한 것처럼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았다. 스펜서 가문은 귀족이고 워낙 부유한 덕분에, 다이애나는 고등학교 중퇴 후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해 런던에 아파트를 얻어 친구와 살 때도 그 아파트가 다이애나 소유라 친구들에게 방세를 받았다고 한다. 이 아파트는 다이애나의 외할아버지인 퍼모이 남작이 손주들을 위해 그 땅값 비싼 런던에서 1명당 1채씩 마련해 준 것이다. 이렇듯 다이애나가 짧은 처녀 시절 동안 시간제로 여러 일을 한 것은 일종의 취미생활에 가까웠다.

4. 찰스 왕세자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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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의 남동생 앤드루 왕자 소꿉친구라 어릴 때 몇 번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다이애나는 그가 영국의 다음 왕이 될 후계자라 조금 관심을 가지고 본 적이 있었다고 하며, 후에 본인의 남편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둘의 나이 차이가 13살이나 차이 났고, 굳이 따지자면 앤드루 왕자의 신붓감 후보로 더 유력한 상황이었다.

원래 찰스의 신붓감 후보로 고려되었던 여성은 다이애나의 큰언니인 사라였으나, 사라가 기자들에게 엘리자베스 2세와 찰스에 대해 뒷담화를 한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왕족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결국 신붓감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다이애나와 찰스가 서로를 제대로 인지하면서 처음 만난 것은 다이애나가 16살 때의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 정도로만 넘어갔다. 그러다 3년 뒤에 다시 만난 자리에서 찰스는 다이애나의 자상함과 아름다움에 호감을 가지고 교제를 시작했다. 이후 시도때도 없이 기자와 파파라치 귀족 유치원의 보모로 일하던 다이애나에게 달라붙어 왕세자와의 관계를 캐물었고, 연애 기간 내내 각종 언론들과 파파라치들이 다이애나에게 열광했다. 쏟아지는 세간의 폭발적인 관심이 절정에 달할 무렵,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찰스는 다이애나와 12번 만난 후 청혼했다고 한다.

5. 약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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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2월 24일, 왕실은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 두 사람의 약혼을 공식 발표했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남이자 장차 미래의 국왕이 될 왕세자가 과연 어떤 여성을 아내로 맞이할지가 최고 관심사였다. 친정인 스펜서 가문은 다이애나가 왕세자의 약혼자가 되자 광영으로 여기며 크게 기뻐했다. 국민들 또한 스펜서 가의 셋째딸인 19살의 어린 다이애나가 찰스의 신붓감이자 미래의 왕비로 적합하다고 찬성했다. 다이애나는 자신의 마음을 다 알기도 전에,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자신을 둘러싼 주위의 흥분감 속에서 찰스의 곁에 남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6. 찰스 왕세자와의 화려한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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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월 후인 7월 29일, 20세의 나이로 전세계 수억 명의 인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찰스 왕세자와 함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 뮤지션 마이크 올드필드가 작곡한 <Royal Wedding Anthe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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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는 데이비드 & 엘리자베스 에마누엘 부부가 디자인했다. 드레스에 장식된 수천 개의 진주와 스팽글은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7m의 긴 트레인으로도 유명한데, 당시 결혼식장인 성당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릴 때 너무 긴 트레인 때문에 들러리들이 고생했다고 한다. 결혼식을 마치고 버킹엄 궁전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릴 때도, 마부들이 트레인을 정리해 주느라 입장이 지체되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찰스도 트레인을 함께 정리해 줬다. 더군다나 드레스의 재질은 '실크 태피터'라는 상당히 잘 구겨지는 재질이였는데, 결혼식장까지 함께 마차를 타고 동행한 다이애나와 친정아버지 스펜서 백작은 드레스의 풍성함과 트레인 길이로 인한 부피 압박으로 꾸깃꾸깃한 상태가 될 정도였다고. 이 때문에 결혼식 영상에서도 디자이너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드레스의 주름을 펴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후 옅은 아이보리색 웨딩드레스가 화이트를 앞서기 시작했고, 어깨 부분의 풍성한 퍼프 소매, 긴 트레인은 1980년대 전 세계 여성들의 로망이 되었다.

여담이지만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티아라를 대여하지 않고, 대대로 친정 스펜서 가문에 물려 내려오는 티아라를 썼다. 본래 엘리자베스 2세는 큰며느리 다이애나가 결혼식 때 친할머니 테크의 메리의 주얼리 컬렉션 중 하나인 러버즈 낫 티아라를 쓰길 바랐지만, 티아라 위에 있던 수십 개의 진주 장식 때문에 무게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 러버즈 낫 티아라는 결혼 이후에 다이애나가 공식 석상에서 자주 착용하면서 거의 그녀의 상징으로 대두되었으나, 정작 다이애나는 이 티아라가 두통을 유발한다고 착용할 때마다 힘들어했다고 한다.

20세기 신데렐라로 불리며 새로운 왕세자비가 된 다이애나를 본 세계인들은, 그녀의 매력과 아름다움에 열광했다. 많은 사람이 이 부부가 앞으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이애나가 입은 의상과 착용한 장신구는 당대의 패션을 선도하는 유행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고, 당시 영국 왕실은 더할 나위 없이 가족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7. 결혼 후에도 이어진 지나친 관심

결혼식은 끝나도 파파라치들은 다이애나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그녀를 괴롭혔다. 파파라치의 지나친 사생활 침해가 계속되자, 이를 보다못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직접 나서서 언론사 편집인들을 불러 회견을 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당시 언론 담당 비서였던 마이클 시어가 "지나친 사생활 침해가 다이애나를 실의에 빠트리는 바람에 그녀가 집 밖을 나가는 일조차 두려워하고 있다" 라고 말하자, 뉴스 오브 더 월드의 편집장은 오히려 "왕세자비는 왜 시종을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가게로 사탕을 사러 가기 위해 외출을 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여왕이 인내심을 깨고 "그렇게 오만 방자한 말은 내 평생 처음 듣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여왕의 이례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다이애나를 향한 언론의 관심은 더 커져 갔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사진을 찍힌 여성 인물이 된다. 실제로 이것은 타임이나 뉴스위크 같은 대중지에서 다이애나를 표현할 때 자주 인용되는 문구이다. 다이애나는 20세기 통틀어 그 어떤 연예계 스타나 정치인보다도 더 많은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그만큼 사진도 많이 찍혔다. 그녀는 말 그대로 파파라치들의 돈줄이었다. 친분이 있었던 마이클 잭슨,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보다도 많은 사진이 찍혔으니 말 다했다. 21세기에 접어든 현재에도 이 정도로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는 인물은 전무하다.

다이애나에게 쏟아지는 이런 대중의 관심은 영국 왕족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당황한 사람들 중에는 남편 찰스 왕세자도 있었다. 찰스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제외하고는 생애 단 한 번도 사람들의 관심도에서 다른 사람에게 뒤쳐진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어린 아내가 찰스보다 훨씬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찰스 왕세자 부부 동반으로 타국을 방문할 때면 "나는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수행해 온 사람"이라고 기자들 앞에서 너스레를 떨었다. 사람들은 '찰스가 어린 아내에게 대중의 관심을 빼앗기고도 나이 차이가 많은 남편답게 대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실상은 겸손한 척 질투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8. 불행한 결혼생활 및 이혼

사실 다이애나는 결혼 전에도 찰스가 카밀라 파커 보울스 불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약혼이 발표된 후였던 데다 친정 식구들도 결혼을 강요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다이애나 본인 역시 찰스의 이런 생활을 젊은 시절 잠깐의 바람 정도로만 생각하며, 마지막엔 본부인이자 왕손들의 생모가 될 자신에게 되돌아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약혼 당시 인터뷰에서 진행자가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게 맞냐"고 질문하자 찰스 왕세자는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인터뷰어: And I suppose in love? (두 분 사랑하시는 거 맞나요?)
다이애나: Course. (당연하죠.)
찰스: Whatever in love means…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약혼 인터뷰 中
찰스는 '왕위'와 '사랑'이라는 2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했다. 그래서 어리고 순결한데다 세상물정 모르고 귀족 영애인 성공회 신자 다이애나를 순종적인 아내로서 선택한 것. 심지어 다이애나와의 신혼여행 중에도 카밀라가 선물한 커프스를 달았다. 다이애나는 당연히 "카밀라와의 관계를 끝내라."고 여러 번 요구했다. 그러나 찰스는 오히려 "괜한 걸로 트집 잡아 오해한다."며 뻔뻔하게 카밀라와의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에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다이애나는 거식증 폭식증을 앓았다.

다이애나는 첫 아이 윌리엄 왕자 임신한 후 심한 입덧으로 고생했는데, 이 때문에 여러 공무에 참석하는 것이 무척 고역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영국 왕실의 딸들과 며느리들 중에서는 다이애나만큼의 심한 입덧을 했던 여성이 없었기 때문에 ‘오, 이상하네? 우리는 그런 적 없었는데?’라는 반응만 보이고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임산부 입덧은 워낙 편차가 심해서, 아예 입덧이 없는 사람이나 가벼운 소화불량과 울렁거림으로 끝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심한 여성들은 극심한 구토와 탈수를 겪으며, 전근대에는 입덧하다 죽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거의 아무런 배려를 받지 못했다. 참고로 다이애나의 큰며느리 캐서린 미들턴 역시 입덧이 매우 심했던 걸로 유명한데, 캐서린의 경우는 세상이 바뀌기도 했고, 다이애나라는 선례가 있는데다가, 남편 웨일스 공 윌리엄의 적극적 도움도 있어, 입원도 하고 공무도 빠지는 등 훨씬 많은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남편 찰스는 폴로 사냥 등의 사교활동을 하러 집을 자주 비웠다. 그 역시 일종의 가정 생활을 누리고 싶어해서 많이 돌아다니지 않겠다고 했지만, 경험이 없으니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게 흐지부지되고 만다. 더군다나 다이애나의 어머니 역시 다른 남자와 외국에서 새 살림을 차린 지 오래였기 때문에, 임신한 그녀가 심적으로 의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러한 생활이 반복되자 우울감과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다이애나는 찰스에게 매달려 "너무 괴롭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는 아내가 엄살을 부린다고 생각해 "그만 좀 하라"고 핀잔을 준 후 집을 나섰고, 이에 다이애나는 자의로 계단에서 몸을 던졌다. 본인이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로. 다행히 배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정도로 그쳤고 뱃속의 아기는 무사했으며, 대경실색한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는 한달음에 달려와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온 찰스는 이 사실을 모른 척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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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출산 후 퇴원하는 다이애나 비
시간이 지나 만삭이 된 다이애나는 언론의 압박과 전 국민이 숨 죽이고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 모두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느껴져 1982년, 유도분만으로 윌리엄을 출산한다. 심한 난산이었으나 후계자인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뻤다고 한다.

다이애나가 15년 간의 왕실 생활을 하며 괴로워했던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왕족들 때문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딱딱하고 감정 표현을 지나치게 절제했다. 다이애나의 회고록에 따르면, 다른 왕족들은 감성적이고 진심으로 국민들을 대하는 다이애나를 골칫덩어리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들은 외부인 출신 며느리인 다이애나 스펜서와 사라 퍼거슨을 은근히 소외시켰으며,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것에도 두 며느리를 번번이 제외시켰다. 왕족들은 찰스와 비교도 안 될 만큼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다이애나에 대해 비밀리에 악의적인 타블로이드 기사를 내도록 지시했으며, 왕실이 결정한 일도 마치 다이애나가 문제인 것처럼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데에 바빴다.

다이애나의 왕실 생활이 계속될수록 왕궁 내에 그녀의 적들이 많아졌다. 찰스 왕세자의 귀족 친구들은 타블로이드에 다이애나를 향한 악의적인 기사를 내도록 지시했고, 궁정인들은 다이애나의 전화를 도청했으며, 휴지통을 뒤져 그녀가 사용한 서류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녀를 감시하는 궁정인들의 행보와 숨 막힐 듯하고 폐소공포적인 왕실 생활에, 다이애나의 불안감과 우울함은 고조되었다. 다이애나는 찰스 뿐만이 아니라, 은근히 자신을 따돌리는 왕족들과 가식적이며 허울뿐인 군주제에 불만을 품었다. 다이애나는 그녀가 국민들을 만날 때 혹은 공무를 수행할 때에도 다른 왕족들과는 달리 그녀의 마음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말과 행동만을 했다. 가식적인 왕실에 질려버린 다이애나는, 훗날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감정 표현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개인'으로서 자라날 수 있도록 가르쳤다.

후에 다이애나가 1995년 마틴 바시어와의 인터뷰 도중에 말했듯이, 왕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저 참거나 혹은 꼭두각시처럼 조용하게 왕세자의 옆을 지켜주지 않는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이애나는 다른 왕족들과는 다르게 통통 튀었고, 자꾸만 왕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그녀는 "왕실은 다이애나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왕비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이를 보아 그녀가 왕실 내에서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지를 알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목한 가정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결혼하기 전부터 다이애나의 시이모인 마거릿 공주는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이 결혼이 절대 좋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이런 마거릿 공주의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마거릿 공주 역시 사랑하던 상대인 피터 타운센드 공군 대령과의 결혼이 왕실의 반대로 끝내 무산되고, 조카인 찰스 3세 역시 당시엔 카밀라 파커 보울스의 결혼은 허락되지 않았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지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조카의 심정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찰스 3세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 카밀라와 재혼했지만 마거릿 공주는 끝내 피터 타운센드 대령과 결혼하지 못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다이애나는 시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에게 찰스와 카밀라의 불륜을 호소하기에 이르지만, 다이애나의 간청을 들을 때마다 엘리자베스 2세는 말로만 "왕세자는 구제불능이구나."라는 대답만 반복할 뿐, 찰스에게 어떤 제재도 하지 않았고 그들의 불륜을 방관했다. 유일하게 시아버지 필립 공만이 다이애나의 하소연을 들어 주고 아픔을 위로해 주었다. 내연 의혹이 있거나 의혹이 아닌 사실이라 해도 이혼을 죄악시하는 보수성 때문에 쇼윈도를 유지하는 영국 왕실과 귀족 문화에 다이애나 스펜서는 순응하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에 불륜 가정폭력을 목격했던 탓일지도 모른다.

영국 왕실은 왕세자 부부의 화목한 모습을 바라는 대중을 위해 끊임없는 언론플레이를 했고, 다이애나는 언론플레이에 맞춰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일을 반복하였다.

다이애나의 관심은 왕실 내부가 아닌 외부로 향하기 시작했다. 왕세자비라는 지위로 대외 활동에 나선 다이애나에 대한 영국 국민의 인기는 매우 높아졌고, 왕실은 찰스 왕세자를 대신해 인기를 독차지한 다이애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제하며 다이애나를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분노한 다이애나는 더 이상 참고만 있지 않았다.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파커 보울스가 보란 듯이 승마 교관이었던 제임스 휴잇과 맞바람을 피우는가 하면, 왕실 근위병 및 경호원들과 연애를 하며 염문설을 뿌리기 시작했다. 다이애나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옹호하는 측에서는 다이애나가 맞바람을 피운 것이 찰스와 카밀라의 불륜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또한 왕실에서 애초에 다이애나를 쉽게 놔주지도 않았을 것이고 다이애나가 찰스와 합의 하에 이혼하는 등의 방법도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맞불륜이 다이애나가 할 수 있었던 최후의 방법이었다고 주장한다. 한편 비판하는 측에서는 다이애나가 맞바람을 피운 사실에 대해 문제 삼거나, 다이애나의 맞불륜 상대 중에 유부남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남편의 불륜으로 아내인 자신이 피해자의 심경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부남과 불륜을 저질러 죄 없는 그의 아내에게 자신이 겪은 고통을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정당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왕실 전기 작가의 손을 빌려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과 왕실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모두 폭로, 고발하는 책을 출판하고는 1992년 12월 9일부터 별거에 들어갔다.

1990년대가 되자 찰스와 다이애나의 불화설이 조금씩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 시작했다. 이 때를 틈타 찰스의 귀족 친구들은 마치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을 망친 주범이 다이애나인 것처럼, 마치 다이애나가 편집증을 앓고 있는 것 마냥 왜곡된 내용의 기사를 토해냈다. 결국 10여년 간 참고 있던 다이애나는 폭발했고, 그것이 책을 집필하게 한 이유였다. 별거에 돌입한 다이애나는 비교적 자유로워졌으나, 그녀를 향한 파파라치와 각종 언론들의 폭발할 것 같은 관심에 그녀의 마음은 점점 피폐해졌다. 결혼생활 정리와 의전 문제를 마무리 짓느라 시간이 흐르는 동안, 1995년 11월 BBC와 인터뷰한 다이애나는 "왕실과 남편이 체면치레를 위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며 대놓고 비난의 칼날을 세웠다.

결국 1996년 8월 28일 최종적으로 찰스와 이혼했다. 이혼 이후 다이애나와 찰스 왕세자 사이의 충돌은 전혀 없었다. 아예 두 사람은 별다른 접촉 자체가 없었다. 1997년 3월에 장남 윌리엄 관련 행사로 서로 마주친 적은 있긴 했지만, 다이애나는 찰스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 이후 찰스 왕세자는 비통한 표정으로 장례식에 참석했다. 다만 다이애나가 진짜로 이혼을 원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많다. 오히려 엘리자베스 2세가 이혼을 지시하기 전까지는 다이애나가 이혼을 거부했다는 말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후술하듯 이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다이애나의 BBC 인터뷰 역시 다이애나가 원해서 성사된 인터뷰가 아니라, 기자의 사기와 협박으로 이루어진 인터뷰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훗날 BBC와의 1995년 당시 인터뷰 비화가 공개되었다. 다이애나의 남동생인 찰스 스펜서 백작은 마틴 바시어라는 무명 언론인을 다이애나에게 소개해 인터뷰가 가능하도록 도왔다. 하지만 이후 스펜서 백작은 바시어가 자신과 다이애나 비에게 거짓말과 위조된 서류 등을 토대로 신뢰를 얻어 인터뷰를 따냈다고 말했다. #. 한편 당시 무명이었던 마틴 바시어는 이후 미국으로 넘어가 마이클 잭슨과 인터뷰를 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이후 부적절한 발언으로 징계를 받는 등 물의도 많이 일으켰다고 한다. 잭슨의 전 매니저는 2003년 바시어의 인터뷰가 6년 뒤 잭슨의 사망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보조 수단이던 약물이 그날 이후엔 필수품이 됐다는 것이다. 바시어는 2017년 BBC로 돌아와 종교 담당 에디터로 있다가 이 인터뷰 비화 관련 보고서가 BBC에 제출되기 몇 시간 전에 건강문제를 이유로 퇴사했다고 한다.

2021년 5월, BBC 직원이던 마틴 바시어의 사기 행위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 이로 인해 BBC에 수신료 삭감과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바시어는 다이애나가 방송 내용에 전혀 불만을 품지 않았으며, 두 사람은 방송 후에도 친구로 지냈다고 주장했다. # # 두 아들에게 마음속 깊이 미안함을 느끼지만 이 인터뷰가 다이애나 비를 고립시키고, 편집증을 부추겼다는 윌리엄 왕자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후로 다이애나비 인터뷰로 거둔 수익금 142만 파운드(약 22억 3천만원)를 기부했다. #

이전부터 살던 켄싱턴 궁전에 계속 거처할 권리와 함께 1,7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고액의 위자료를 받았다. 이 금액은 2018년 기준 가치로 따져도 260억에 달하는 돈. [age(1996-08-28)]년 전이니 그 가치는 배 이상이다.

찰스 왕세자와 재혼한 카밀라 파커 보울스는 웨일스 공비 칭호를 얻기는 했으나, 콘월 공작부인(Duchess of Cornwall)으로 불린다. 영국 헌법부에서는 "찰스 왕세자가 즉위한다면 카밀라가 왕비(Queen consort) 칭호를 쓸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하원과 국민 여론이 반대했다. 왕실은 카밀라가 'Queen consort'보다 한 단계 낮은 'Princess consort' 칭호를 쓰도록 했다. 하지만 2018년 기준으로 이 내용에 관련된 언급이 모두 삭제됐고, 찰스가 왕이 되면 Queen Consort를 쓸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2020년 3월, 왕세자 측은 찰스가 왕위에 올라도 카밀라가 Princess Consort를 사용할 것이라고 재확인 하였다. #

그러나 2022년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승하한 직후 버킹엄 궁전에서 공식적으로 카밀라 파커 보울스를 'Queen Consort'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훗날 공개된 다이애나의 인터뷰에 의하면 이미 결혼 직후부터 불편한 나날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2004년 당시 MBC 뉴스데스크 보도 내용, 원본 영상. (해당 인터뷰는 다이애나가 사망하기 5년 전인 1992년에 촬영된 것이다.)

9. 비극적인 죽음

영국 시간으로 오전 7시(한국 시간 오후 3시)쯤에 방송된 BBC의 추모방송. 느린 영국 국가와 함께 유니언 잭 게양대에 반기 형태로 걸린 영상과 함께 'Diana, Princess of Wales(다이애나 왕세자비) 1961-1997'이라는 자막을 송출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원래라면 왕가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내보내야 하는데 유니언 잭을 내보냈다고 댓글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이혼하기 전에는 이 깃발을 썼으나 이혼 후에는 이 깃발을 쓴다. 관에도 덮어진 깃발이 바로 이것. 이 방송은 녹화되어 CNN에서 다시 내보냈다.
(여자 아나운서)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뉴스 스튜디오에서 마틴 루이스가 전해드리겠습니다.
( 마틴 루이스 앵커) 여기는 런던에서 전해드리는 BBC 텔레비전입니다. 프랑스 정부는 오늘 새벽 5시에 다이애나 공비가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버킹엄 궁전 측에서는 곧 소식을 확인했습니다.
" 아름다움과 명성과 부를 한몸에 지닌 화려한 일생이었지만 단 하나, 행복만은 그녀를 비켜갔습니다. 영국 왕실의 다이애나 비가 오늘 교통사고로 숨졌습니다. 올해 나이 36살. 그의 곁에는 세계적인 헤롯백화점 사주 알파예드가 타고 있었습니다."
박대석 앵커의 1997년 8월 31일 일요일 KBS 뉴스 9의 오프닝 멘트
"8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늘 지구촌의 톱 뉴스는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의 사망 소식이었습니다.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지 1년 만에 다이애나 비는 오늘 새벽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졌습니다. 그녀와 함께 차에 타고 있었던 이집트의 억만장자 애인도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20살에 왕세자비가 된 후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숱한 얘깃거리를 안고 살아온 다이애나 비는, 마치 프랑스 영화 슬픈 피날레처럼 36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권재홍 앵커의 1997년 8월 31일 일요일 MBC 뉴스데스크의 오프닝 멘트
다이애나가 이혼한 후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파파라치의 카메라를 피할 수 없었다. 다이애나는 파파라치를 피하기 위해 변장까지 했지만 완벽히 따돌릴 수 없었다. 다이애나는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서 파파라치 1명을 잡아 두들겨 팼고, 파파라치의 사진기를 압수하여, '마틴'이라는 유명한 영국 파파라치에게 접근금지명령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 그러자 마틴은 적반하장으로 "그까짓 사진 좀 찍히는 게 무슨 대수라고요! 다이애나보다 내가 더 고통스러운 처지에요!"라고 망언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다이애나의 사진값은 그야말로 천정부지였다. 연인으로 알려진 알파예드는 이집트 출신으로, 런던 해로즈 백화점과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풀럼 FC를 운영하는 백만장자 모하메드 알파예드의 아들로 다이애나가 연인 사이인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집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아닌 파키스탄 출신의 하스낫 칸이 연인이었다고 한다. 다이애나가 도디 알파예드와 요트에서 밀회를 즐기는 사진은 1997년 당시 돈으로 30억 원에 팔렸다. 1997년 기준이다. 2023년 가치로 무려 5,875,528,722원 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이러니 파파라치들 눈이 뒤집어진 것.

아예 사진과 영상을 조작해서 판매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다이애나가 애인의 등 위에 타고 말처럼 몰고 다니는 영상이 유출된 사건이 있었는데, 돈을 노린 조작이었던 것으로 판명되기까지 했다. 관련 보도 또한 오토바이, 차, 요트, 헬리콥터까지 총동원된 도촬 작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운명의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 00시 20분, 리츠 파리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이 제공한 메르세데스벤츠 W140 S클래스에 탑승한 다이애나와 알파예드를 파파라치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갔다. 00시 23분, 벤츠는 파파라치들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속력을 높였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퐁드랄마의 지하차도 기둥에 충돌하고 만다. 사고 당시에는 시속 180km가 넘는 과속을 했다고 잘못 알려졌으나, 이는 사고 충돌로 계기판이 고장난 것이었고 경찰 조사 결과 터널의 제한 속도인 50km/h의 약 2배에 달하는 110km/h 정도로 달렸던 것으로 예상된다고 발표되었다. (부검 결과, 면허취소 수준의 만취 상태였던) 운전사 앙리 폴과 도디 알파예드는 충돌 순간에 즉사했으나, 다이애나와 경호원 리스 존스는 아직 살아 있었다.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다이애나가 의식을 잃기 직전에 "Oh my God."이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런데 파파라치들은 그녀를 신속히 구출하거나 신고하기는커녕 그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들이대며 플래시를 마구 터뜨려댔다. 심지어 더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다이애나가 앉아있는 조수석 뒷편 좌석의 문을 열고 중태에 처한 다이애나의 손 위치를 함부로 조정하는 짓까지 했다고 한다. 00시 30분, 충돌 약 10분 뒤에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으며, 경찰 도착 5분 후 구급차가 뒤이어 도착했다. 하지만 구조대가 도착한 뒤에도 파파라치들은 현장을 촬영하기 바빠 구조를 더디게 했다.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프랑스 경찰의 증언에 따르면, 계속 몰려들어 사진을 찍어대는 파파라치들을 저지하기 위해 증원 요청을 해야 할 정도였다고.

1시 00분, 심하게 파손된 차량 상태로 인해 다이애나는 사고 발생 30분이 지나서야 차에서 꺼내졌지만 사고의 충격으로 심장에 급격히 가 차오르는 쇼크 증세를 겪고 있었고 이 때문에 심정지가 온 상태였다. 사고 현장을 우연히 지나다 다이애나에게 최초로 응급처치를 했던 프랑스 의사 프레데릭 마일레츠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다이애나에게 눈에 띄는 외상은 없어서 다이애나가 괜찮을 줄 알았다고 했다. 참고로 인터넷에 떠도는 다이애나 사고 장면으로 알려진 사진은 가짜이다. 다이애나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뉴스 오브 더 월드 등 현장에 있던 파파라치들로부터 사진을 받은 매체들은 사고 현장을 담은 사진들을 삭제해 내보내지 않았다. 다만 2004년 미국 방송국 CBS에서 다이애나 사망 사고와 관련된 다큐를 방영할 때 당시 찍힌 사진이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심폐소생술로 다이애나는 간신히 맥박이 약하게나마 다시 뛰긴 했지만, 후술할 프랑스 응급의료 서비스인 SAMU는 어째서인지 20분 후에나 도착했고, 현장 이탈 또한 20분이나 지나고 이뤄졌다. 뿐만 아니라 바로 근처의 병원이 아닌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병원으로 천천히 이송됐다. 이 때문에 다이애나의 사망이 교통사고로 인한 게 아니라 암살 때문이라는 음모론이 제기됐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심박이 거의 멎은 다이애나를 더 전문적인 설비가 있는 큰 병원으로 안정적으로 이송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해명했다.

결국 사고 발생 약 2시간 만에야 다이애나는 병원으로 이송될 수 있었지만, 현지 의료진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이애나는 04시에 사망선고를 받게 된다. 외상은 왼쪽 뺨에 난 상처 정도만 있을 정도로 심하지 않았지만, 머리와 가슴에 심한 내상을 입고 있었다. 특히 사고 당시의 충격으로 인해 내장파열이 심했다고 한다. 정상인이라면 중앙에서 왼쪽을 향해 있어야 하는 심장오른쪽으로 이동해 있을 정도였고, 폐정맥과 심벽도 크게 손상되었다고 한다. 또한 부검 결과, 사망선고가 04시에 내려졌을 뿐이지 다이애나는 사고 발생 약 20분 만에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파파라치 등 때문에 다이애나가 병원으로 늦게 이송된 점은 안타깝지만, 부검 결과에 따르면 사고로 입은 부상이 심각했으므로 이송이 제대로 신속히 이뤄졌다 해도 의료진이 다이애나를 소생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20세에 왕세자비가 되어 15년 간의 불행한 결혼을 끝내고 막 자유로워진 다이애나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언니들은 물론이고 모친보다 먼저 죽었다. 어머니 프랜시스는 36세의 이른 나이로 사망한 딸과는 달리 2004년에 6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 점은 시외할아버지인 조지 6세[6]가 1952년 2월 6일에 폐암으로 형이자 자신의 큰시외할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와 모친이자 자신의 시외증조할머니인 메리 대왕대비보다 먼저 죽는 것, 즉 윗형제와 모친보다 먼저 죽는 것과 유사하다. 또 시이모인 마거릿 공주도 2002년 2월 9일에 언니이자 자신의 시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와 모친이자 자신의 시외할머니인 엘리자베스 왕대비보다 먼저 죽었다. 36년 61일의 짧은 삶이었다.

파파라치들은 과실치사, 사생활 침해, 구조거부죄( 선한 사마리아인 법)로 체포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체포 당시 머그샷과 이름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무죄를 받았고, 주범 격의 3명에게 상징적인 의미로 1유로의 벌금이 선고되었다. 하지만 세간의 비난에서까지 벗어날 순 없었고 이들 파파라치 중 1명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정신 못 차린 잡지사들은 죽어가는 다이애나의 사진을 사겠다고 파파라치들에게 비밀리에 수억 원의 돈을 제시했다가 CNN에 의해 폭로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다이애나의 남동생 찰스 스펜서 백작이 "파파라치들에게 인정사정없이 다이애나 사진만 찍게 한 신문사들이여, 기어이 당신들의 두 손에 우리 누님의 피를 묻히게 되었구나!"라며 매우 격앙된 비난을 하였다. 유족뿐 아니라 대중도 다 같은 마음이어서, 이 영상(1분 11초)을 보면 다이애나 비 사후에 추모 인파를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 기자를 향해 "너희가 다이애나를 죽였어, 너희는 쓰레기들이야!"라며 분통을 터뜨리는 한 남성이 나오는데,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동감의 뜻을 나타내며, 같은 자리에 있던 여성은 "그 망할 카메라 좀 꺼!"라며 촬영기자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사후 그의 아버지 모하메드 알파예드는 그의 아들과 다이애나의 죽음에 영국 왕실, 특히 다이애나의 시아버지인 필립 공이 배후에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사실 영국 왕실가 사람들 중 다이애나가 힘들 때 위로해 준 유일한 사람이 필립 마운트배튼 공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크게 설득력이 없다. 참고로 알파예드는 매우 성공적인 사업가지만, 영국 유럽에서의 현지 평판이 원래 매우 나쁜 인물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폭이 유력 기업을 소유한 꼴이었다. 그래서 다이애나가 그 아들인 도디 알파예드와 연인 의혹이 있다는 것에 더욱 왕실의 분노를 샀다. 윌리엄 왕자와 해리 왕자도 어머니가 다른 남자, 심지어 무슬림과 재혼 할지도 모른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게다가 도디 알파예드는 유명한 바람둥이에 마약 중독자였다. 영화 제작자 신분으로 헐리우드의 스타급 여배우들과 두루 알고 지냈는데 영화 촬영장에서 스탭들에게도 자신이 하던 코카인을 나눠주는 일을 저질러 제작사 대표에게 쫓겨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의붓 숙부에 따르면 어디를 가든 에이전시에서 보내준 모델들에 둘러싸여 지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전 세계에 있는 그의 별장들을 순회할 때마다 각 지역의 모델들을 불러서 파티를 즐겼다고 한다. 첫번째 결혼을 8개월 만에 끝내는 바람에 구설수에 오르자 "재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으나, 미국 출신 모델인 켈리 피셔와 약혼했고 아이를 가질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피셔와의 결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아버지이자 헤로즈 백화점 소유주인 모하메드 알 파예드의 휴가 초대를 받아들인 다이애나와 만나고 교제하게 되면서 피셔에게 일방적으로 파혼을 통보했다. 이에 피셔가 기자회견을 열어 파혼당했다고 울며 도디에게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통보한 바람에 영국의 전 매체가 다이애나가 어떻게 저런 파렴치한과 사귈 수 있느냐며 대대적으로 비난하는 보도를 내기도 했다.피셔가 소송을 제기한 게 무색하게도 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디는 다이애나와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피셔는 결국 소송을 취하했다.

아직도 그다이애나의 죽음에는 많은 음모론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세계에서 알아줄 정도로 높은 수준인 프랑스의 응급의료서비스 SAMU가 다이애나에겐 즉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른 국가의 응급의료시스템이 훈련된 구급대원을 사고현장에 파견해 이송 중인 환자 상태의 악화를 방지 또는 지연시킬 목표로 피동적 대응을 한다면, SAMU는 현장에 구급대원만이 아닌 의사를 동행시켜 악화 방지, 지연 뿐만 아니라 환자 상태 파악, 진단과 그에 따른 조치 등 좀 더 적극적인 의료 대응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이애나 사고 당시엔 1시간이나 걸렸다는 것이다.

다이애나의 교통사고가 영국 왕실 & 정보부의 공작이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 제시하는 다른 의혹들은 영어 위키백과 문서를 참고하자.

그리고 다이애나가 사망한 1997년 만들어진 '다이애나비 추모 기금'이 있으며 2013년 윌리엄 왕자 부부와 해리 왕자 부부가 함께 활동한 '왕립 재단'에 불입되었으며 수년간 모금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유산이나 기부금을 통해 자금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

사실 다이애나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한 건 전적으로 찰스 3세의 불륜과 이를 방관한 왕실 탓이지만 다이애나의 죽음까지 그들의 탓이라고 보긴 어렵다. 사고의 정황을 보면 왕실에서 개입한 흔적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파파라치들을 피하려다가 난 사고이기 때문에, 결국 다이애나가 제대로 된 응급조치도 못 받고 사망하게 된 이유는 파파라치의 만행 탓이 절대적으로 크다. 사고로 빈사 상태에 빠진 다이애나를 구조하긴 커녕 사진을 찍어대기 바빴던 기자들이 죄다 유죄를 선고받으면서 법원에서의 공식 판결도 그렇게 나왔다. 이렇다보니 자신들도 다이애나 못지않게 어릴 때부터 파파라치들에게 시달려왔고 끝내 어머니까지 불행하게 잃고만 다이애나의 아들들인 윌리엄 왕세자 해리 왕자는 세월이 흘러, 장성하여 자신들도 결혼하고 자녀들을 낳은 이후에는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자녀들을 절대 언론에 내세우지 않고 그럼에도 따라다니는 기자들에게 대놓고 경고를 남길 정도로 적대하고 있다.

10. 전 세계의 추모 물결

"Above all we give thanks for the life of a woman I am so proud to be able to call my sister, the unique, the complex, the extraordinary and irreplaceable Diana whose beauty, both internal and external, will never be extinguished from our minds."
"나의 누나라고 부를 수 있어 자랑스러웠던, 한 여인의 삶에 감사를 표합니다.
독특하고 복잡하고 특별하고 유일무이했던 다이애나.
내적, 외적으로 모두 아름다웠던 그녀를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남동생이자 현 제9대 스펜서 백작 찰스 스펜서,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읽은 추도사의 마지막 부분.
다이애나의 갑작스러운 사고사는 세계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특히 다이애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대단했던 영국 국민들의 상실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영국 국민들 한 명 한 명 모두 다이애나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다. 다이애나의 행보는 왕실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발이 강했던 노동자 계층이나 서민 계층, 심지어 왕정 폐지를 주장하는 공화주의자 계층에게도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이 영상은 역사상 최초의 리액션 비디오라고 부르기도 한다(1997년에는 해당 용어가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영상을 찍고 있는 인물은 친구들과 우노 카드게임을 하는 중 새로 산 캠코더가 잘 되는지 테스트 중이었으며 어머니로부터 전화로 다이애나의 교통사고 소식을 접해 TV를 틀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아직 사망 뉴스가 나오지 않았던 2:17에 보면 사고 자동차를 보면서 세계에서 가장 사진에 많이 찍히는 자동차(will be the most photographed car in the world)가 될 거라고 농담하는 부분이 보이는데 이건 당시 다이애나의 별명이 세계에서 가장 사진에 많이 찍힌 여성(the most photographed woman in the world)이었기 때문이다. 해당 영상을 보면 다이애나가 차 사고로 심각하게 부상당했다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는 오히려 괜찮을 거라고 웃어넘기는 반응이었지만, 그녀의 부고를 전해듣자마자 전부 경악을 넘어 충격으로 할 말을 잃고 뉴스만 봤으며 영상 속 기자도 차마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울먹였다. 당시 영국인 상당수의 반응이 대동소이했다.
여왕 폐하, 당신이 그녀의 죽음에 마음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Show us your care!)
익스프레스
우리의 여왕 폐하는 어디 가신 것인가? 폐하의 조기는 도대체 어디 있는가?(Where is our queen? Where is her flag?)
더 선
군중이 왕정으로 돌아서고 있다.(The mood is turning anti-Royal.)
인디펜던트
여왕은 우리처럼 애도를 표하기 위해 나와야 한다.(The Queen should be here to show her respect, like US.)
마지막까지 모욕. 어딜 가든 조기가 게양되어 있다. 버킹엄 궁전만 빼고.(The final Insult. Everywhere you look there are flagpoles with flags at half mast. Except Buckingham palace.)
영국 왕실의 미지근한 반응에 분노한 영국 언론의 헤드라인
다이애나에 대한 국민적인 추모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다이애나의 죽음을 애도하는 어마무시한 수의 꽃다발이 생전에 거주하던 켄싱턴 궁전 앞에 쌓이기 시작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lowers_for_Princess_Diana's_Funeral.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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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켄싱턴 궁전 정문 앞에 쌓인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꽃다발들}}}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가 머물던 버킹엄 궁전 앞에도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항의의 표시로 꽃다발이 쌓여갔다. 그렇지만 왕실은 찰스 왕세자와 이혼하여 왕실을 떠난 다이애나의 죽음에 무반응의 태도로 일관했다. 이는 정확히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할지 몰랐다'가 맞을 것이다. 왕위 계승 서열 순위 1위인 왕세자가 왕세자비와 이혼한 사실도 흔한 상황이 아닌데다, 이혼한 뒤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왕실은 전례 없는 상황에서 장례를 치러야 했다.

이미 다이애나는 왕실 일원이 아닌 일반인이었기에 여러가지로 예법상 문제가 되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가령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다이애나의 운구가 지나갈 때 고개를 숙여 인사한 것도 엄밀히 말하면 예법에 어긋난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주는 자신보다 아랫사람의 장례에서 상복을 입거나 목례, 절 등으로 예를 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군주보다 윗사람은 선대 군주 뿐이며, 부모마저도 선대 군주가 아니라면 현 군주의 신하일 뿐이다.

하지만 당시 국민 정서상, 여왕이 그런 부분에서까지 예법을 지켰다면 오늘날 영국에 왕실은 남아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게다가 여왕은 당시 살아있던 어머니인 '퀸 마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에게 참석하지 말 것을 주문받았던 데다 그녀의 이혼녀 증오의 역사는 유명한데, 반면 그녀의 딸 마거릿 공주와 외손주 찰스 3세 앤 공주는 예외라는 것에서 내로남불 소리를 들었다. 여왕 본인도 인기가 많던 며느리를 견제했고, 찰스를 말리기는 커녕 카밀라를 마음에 들어했기에 중재를 요청했던 다이애나를 겉으로만 들어주는 척 했고, 사실상 방관했었다. 이 때문에 더욱 더 어쩔 줄 몰랐을 듯.

이런 상황에서 다이애나를 감싸준 사람이 바로 시아버지 필립 공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이애나의 사망 소식이 알려졌을 때 시신과 장례 수습을 가장 앞장서서 주관한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생전에 불화가 가장 심했던 전 남편 찰스 3세(당시엔 왕세자)였다. 다이애나의 사망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여왕을 비롯한 왕실 일원 모두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 평소처럼 교회로 나가는 일정을 수행한 반면에, 찰스만 왕실 일원들 가운데 직접 다이애나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프랑스 파리로 곧장 날아가 시신 수습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심지어 이 과정에서 여왕과 찰스 모자가 서로 의견이 갈렸던 탓에 언쟁까지 벌어졌지만 어찌되었든 찰스의 의견이 최종적으로 관철되기는 했다.

다만 윌리엄 해리가 받을 충격을 생각해서 이 둘은 데리고 가지 않는 것에는 동의했다고 한다. 정작 어린 해리는 어머니의 마지막을 확인하러 아버지와 같이 파리에 가고 싶어했다고. 찰스는 다이애나의 언니들과 함께 파리로 가서 시신을 확인하고 런던으로 운구하는데 진두지휘했으며, 비록 이혼했지만 한때 자신의 아내이자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에 대한 마지막 예우를 하고 싶었는지 기존의 관례를 깨고 왕실 문양이 새겨진 깃발로 관을 덮은 채 파리 병원에서 시신을 운구하도록 지시하였다.

사고 발생 당시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여왕과 왕실 일가는 다이애나의 사고사 소식을 듣고도, 이혼으로 왕실에서 나간 사람이니 그녀의 죽음은 친정 스펜서 가문의 일이라며 무대응했고 스펜서 가문의 가족장으로 진행하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직 전남편 찰스 3세(당시엔 왕세자)만이 해당 대응에 크게 반발하며 다이애나의 장례를 웨일스 공비로서 국장이자 왕실장으로 대접할 것을 요구했다. 이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왕실은 조기 게양은커녕, 여왕이 부재 중임을 나타내는 관례대로 버킹엄 궁전의 왕실기도 게양하지 않았다. 국가적 중대사가 발생하고 국민들의 추모 열기가 높아지는 상황에서도 왕실은 런던으로 돌아오지 않고 밸모럴 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러한 왕실의 반응은 영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왕실의 차가운 반응에 대해 엄청난 상실감을 느끼던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왕실이 다이애나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는 여론이 떠올랐다. 앞서 각 언론사들의 헤드라인으로 보았듯이 진보 보수의 성향을 가리지 않고 언론들도 모두 맹렬하게 여왕과 왕실에 대해 비판을 쏟아냈다. 이 과정에서 앞서 보았듯 사생활 보호를 간청했던 다이애나의 뜻을 어기고 경쟁적으로 보도했던 영국 언론들에 대해 영국 국민들은 매우 강렬하게 비판했다. 이로 인해 왕실에 대한 영국 국민의 분노는 극도로 커져갔으며,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가 이례적으로 밸모럴 성에서 휴가 중이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찾아가서 "다이애나의 죽음을 왕실이 추모해줄 것"을 권유하며 여왕을 설득했다.

결국 왕실은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여 다이애나의 장례식을 왕실장으로 치르고 전 세계에 텔레비전으로 방영하도록 했으며 1997년 9월 4일에는 다이애나 스펜서를 추모하는 대국민 메시지를 방영하였다. 이 사연을 엘리자베스 2세의 시각을 중심으로 다룬 영화가 2007년 개봉한 < 더 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치세 동안 크리스마스 정기 메시지를 제외하고 대국민 연설을 진행한 것은 총 5번으로 1991년 걸프전, 1997년 다이애나 스펜서 사망, 2002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사망, 2012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때 진행했다.
1997년 9월 4일, BBC1에 방영된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국민 메시지

당시 왕실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여론은 수백 년 만에 최악을 찍었으며, 왕정 폐지의 지지율이 사상 처음으로 50%에 육박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지금은 다시 10% 안팎으로 폭락했다. 시간이 지나며 불만이 사그라든 것도 있지만, 영국 왕실도 자신들의 씀씀이를 대폭 줄이는 등 지지율 회복을 위해 많이 노력하였다. 물론 태생 잘 태어나서 세금 먹는다는 논란은 끊이질 않지만, 찰스 3세의 불륜녀인 카밀라 파커볼스도 반감을 어떻게든 줄이기 위해 책잡히지 않으려고 정말 처신에 노력한다. 하지만 아직도 다이애나를 기억하는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마녀'라고 불리며 찰스와 함께 왕실에서 제일 인기가 없다. 심지어 찰스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사후 왕위를 계승하는 것에 반대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영국인들은 아직도 다이애나의 비극적인 결혼 생활과 죽음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있다. 다이애나 비의 죽음을 기점으로 조금 더 개방적인 분위기로 왕실을 개편해 왕실 지지율을 올린 엘리자베스 2세에게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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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 필립 마운트배튼, 윌리엄 왕자, 다이애나의 남동생인 스펜서 백작, 해리 왕자, 찰스 3세
다이애나의 왕실장 영상. 노래는 버니 토핀이 개사하여 엘튼 존이 부른 추모곡 Candle in the Wind 1997. 엘튼 존은 생전 다이애나 스펜서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당시 추모 방송에서 그는 이 노래를 피아노로 연주하며 부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한국 역시 김영삼 대통령이 김용태 비서실장을 통해 애도를 표시했고 주영한국대사관도 다이애나의 장례식에 조화를 보냈다.

다이애나의 장례식은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1997년 9월 6일 치러졌으며, 유해는 그녀의 친정이 있는 올소프에 안장되었다. 다이애나의 남동생인 스펜서 백작이 살고 있으며 일반인도 예약을 하면 들어가 둘러볼 수 있다. 7월에서 8월까지만 개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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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의 무덤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2011년 4월 29일, 다이애나의 장남인 윌리엄 왕자는 어머니를 떠나보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약혼자 캐서린 미들턴과 결혼식을 올렸다. 세간의 해석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인생에서 가장 경사스러운 의식을 통해 극복하려고 한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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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다이애나 & 찰스 3세의 약혼 반지
(오른쪽)캐서린 미들턴 & 윌리엄 왕자가 물려받은 결혼 반지
우선 윌리엄이 언론에 결혼을 발표하면서 약혼자인 캐서린 미들턴의 손가락에 끼워준 사파이어 반지가 아버지 찰스가 어머니 다이애나에게 청혼하면서 주었던 약혼 반지였다. 이 반지는 원래 차남인 해리가 물려받았으나, 윌리엄은 청혼을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다이애나의 유품인 시계와 교환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혼식이 있기에 앞서 윌리엄은 올소프에 있는 어머니의 묘소에 캐서린과 함께 참배했다.

윌리엄과 캐서린의 결혼식 당일 강론한 리처드 샤트레스 주교는 다이애나의 10주기 추도식에서도 강론했으며,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추모곡을 열창한 가수 엘튼 존이 결혼식 하객으로 초청받았다.

또한 예식 때 부른 성가 <전능하신 주 하느님>은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불렸던 곡이기도 하다. Cwm Rhondda로도 알려져 있는 웨일스 민요가 원본이다.

사고 현장이었던 퐁드랄마 지하도 위에는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금빛 불꽃 모양의 조형물이 1999년에 세워졌다. 사람들은 윌리엄의 결혼식 날 여기에 꽃다발을 헌화하며 다이애나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마이클 잭슨 HIStory World Tour를 진행할 때 다이애나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날 예정되었던 공연을 취소하였다. 그리고 곧 진행된 투어를 다이애나에게 헌정한다는 의미로 ' Heal the World'를 공연할 때 그녀의 사진을 3분 간 게시하였으며, 추모의 의미로 'Gone Too Soon'을 불렀다.

사망 다음날이 버브 The Drugs Don't Work 싱글 발매일이었는데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곡 분위기나 가사 [7]가 당시 영국 국민들이 다이에나 비를 잃고 느낀 비통한 감정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발매 당시 영국 UK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버브의 유일한 UK 1위 곡이다.


[1] 훗날 리모델링 중인 샌드링엄에서 그녀가 키를 재던 문을 발견한 남편 찰스 3세가 그 문을 떼와서 선물해 줬다고 한다. [2] 영국의 귀족은 아들 승계가 원칙이다. 다이애나가 태어나고 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아들인 찰스가 태어났다. [3] 아버지 존 스펜서가는 어머니 프랜시스 로슈에게 띠동갑 연상이었다. [4] 상류층 여학생 100여 명만을 모아 교육하던 소수정예의 귀족학교였다. 이후 재정난으로 1997년에 매각되어 이름도 바뀌고, 학습 부진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남녀공학이 되었다. [5] 이 사람은 '로맨스 소설계의 대모'라는 호칭도 있을 정도로 영국 로맨스 소설계에 영향을 많이 미친 인물이자 현재까지 마니아 팬층도 두터운 작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의 딸이 바로 앞서 말한 새어머니 레인 맥코크데일. [6] 다이애나가 태어나기 9년 전에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7] 리처드 애시크로프트가 11살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추모하며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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