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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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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내 김지선
사건사고 삼성 X파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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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머그에서 정리한 노회찬의 일생

1. 학창 시절2. 노동운동가 노회찬3. 정치 활동
3.1. 진보정당 재건을 꿈꾸다3.2. 민주노동당 마지막 당선자3.3. 새로운 시작, 진보신당3.4. 통합진보당에 합류하다3.5. 정의당 활동3.6. 4.13 총선 준비 과정3.7. 제20대 국회 활동3.8.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
4. 사망

1. 학창 시절

파일:노회찬_학창시절.jpg
△ 학창시절 노회찬

1956년 8월 31일 경상남도 부산시 초량동에서 아버지 노인모(魯麟模, 1924. 9. 30 ~ 2010. 2. 27)와 어머니 원주 원씨 원태순(1929. 12. 31 ~ 2020. 10. 25)[1]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노태복(魯泰復, 1894. 7. 15 ~ 1927. 8. 2) 대까지 함경남도 정평군에 묘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정평군에 세거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부모님은 함경남도 흥남시 출신으로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했으며 전쟁 직후 서로 만나 결혼해 둘 사이에 노영란(魯玲蘭, 1954. 9. 5 ~ )[2], 노회찬(魯會燦), 노회건(魯會建, 1959. 7. 15 ~ )[3] 남매를 두었다고 한다. 유복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문화적으로 풍족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부산 초량국민학교[4], 부산중학교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부터 첼로를 배워 수준급의 첼로 실력을 자랑한다. 정치 초년생 시절에는 '첼로를 켜는 정치인'으로 어필을 많이 해서 90년대 초반에는 노회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첼로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치적 이념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고, 노회찬 본인도 이를 수용하여 정치인으로서 인지도가 올라간 후에는 첼로에 대한 얘기를 꺼리고 있다. 학창 시절 음악뿐만 아니라 펜싱과 육상에 뛰어났다고 한다.

1972년 부산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하여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5] 이때부터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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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학생 시절의 모습

경기고 재학 시절에는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반독재 투쟁에 참여했다. 유인물을 만들어서 배포하는 일을 하며 이 시기부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7] 이 시기 다양한 책을 접하며 함석헌, 선우휘, 백기완 등 재야인사들과 만나게 된다.[8] 당시 경기고 동기 중에는 이종걸 황교안이 있다. 황교안은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맡은 적이 있는데, 이종걸과 노회찬이 반독재 유인물을 뿌리고 다닌 걸 생각하면 참 대조적이다. 또 1년 선배로는 정두언 전 의원이 있다. 나중에 박근혜 정부 말기 탄핵 정국에 "황교안 대행과 고교 동창인 점은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두언 전 의원이 학교를 한 해 일찍 들어가 이종걸, 황교안, 정두언 모두 1957년생이고 노회찬은 고입 재수로 1956년생이라 이들보다 한 살 많다.

1976년,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 입시에 낙방했다. 그는 곧바로 군대에 지원해 입대한다. 군복무를 마친 뒤 1979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 후 민주화운동을 계속 하던 중 5.18 민주화운동에 크게 충격을 받는다. 그는 조직화된 노동자가 앞장서야 근본적인 변혁이 가능하다는 판단하에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고려대학교 재학 중인 1982년 영등포 청소년 직업학교(현 서울산업정보학교)에서 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 등을 따서 용접공으로 현장 노동자들 틈으로 섞여들어가, 일명 '학출'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9] 이 당시에 노회찬이 일했던 현장 중에는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구간 건설현장도 있었다. 훗날 헤럴드경제 인터뷰에서 이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2호선을 탈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제가 용접한 철제 빔이 땅 속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10]

노회찬은 1980년대 초중반부터 시위를 조직하고 노조를 결성한 죄로 수배되었다. 그는 꽤 긴 시간 동안 수배자 신분으로 도망다녔다.

2. 노동운동가 노회찬

파일:김지선노회찬.jpg
△ 동료 노동운동가이자 아내 김지선과 노회찬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
인민노련

1987년 6월 항쟁 이후, 노회찬은 인천, 부천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단체들을 연합하여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을 출범시키는 데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인민노련은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를 목표로 활동했으며,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인민노련은 당시 노동현장에 뿌리를 둔 조직 중 가장 전위적이고 가장 큰 조직이었다. 인민노련은 기존의 민족해방파 제헌의회파가 너무 교조주의적이고 이상론에 머물러있다고 비판하며 보다 실질적인 노동계급 운동을 표방했다. 이에 따라 인민노련은 현재 PD 계열의 원류로 평가된다.

1989년 12월, 인민노련 결성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검거되었다.[11] 인민노련 멤버들은 이 당시 법정에서 자신들을 사회주의자라고 떳떳히 밝혀 큰 파문이 일기도 했다. 당시의 공판 자료를 엮은 책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pdf 파일로 다운 가능)

재판 결과 2년 6개월 징역형과 자격정지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92년 4월 1일 만기출소했다.

3. 정치 활동

3.1. 진보정당 재건을 꿈꾸다

파일:history08.jpg
△ 민중대통령 백기완 후보 선거운동본부

노회찬은 90년대 초반에 정계입문을 했다. 이는 그가 속한 인민노련의 노선 변화와 관련이 있었다.

인민노련은 90년대에 들어 동구권의 붕괴와 소련 해체를 경험하면서, 이제는 제도권으로 나와서 활동해야 한다고 노선을 전환하게 됐다. 인민노련은 합법 정당 운동을 위해 한국사회주의노동당(약칭 '한국노동당') 창당위원회로 전환하게 되고, 한국노동당은 1992년 민중당(1990년)과 통합하며 통합민중당을 이룬다.

1992년 3월 24일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가한 통합민중당은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다. 몇몇 지역구에서는 선전했으나 모두 당선권과는 멀었다. 좌절한 민중당의 지도부는 당을 해산했으며, 한국노동당 계열 인사들은 진보정당 재건을 위해 '진보정당추진위원회'(약칭 진정추)를 결성한다.

1992년 4월 1일 출소한 노회찬은 진정추에 합류한다. 진정추는 1992년 말에 있었던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백기완 무소속 후보를 지지했는데, 노회찬은 백기완 선거대책본부에서 조직위원장을 맡았다.[12]

대통령 선거 이후 진보정당추진위원회는 백기완 선본에 참여한 다른 진보정치단체들과 통합을 위한 협상에 돌입했다. 협상은 굉장히 쉽지 않았는데, 1995년 9월 24일, 민중정치연합[13]과의 통합이 성사되어 ' 진보정치연합'(약칭 진정련)으로 재편되었다. 관련자료 노회찬은 통합된 진보정치연합에서 김철수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았다.[14]

그리고 95년에는 '반3김'을 구호로 내세운 개혁신당[15] 창당준비위에 가담했다. 이 정당은 그해 10월 창당하여 민주당과 결합하여 통합민주당을 이루었다. 노회찬 역시 통합민주당에 합류하였고, 강서 을을 지역구로 총선을 준비했지만 사면복권이 안 되어서 실패. 매일노동뉴스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원외인사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16]

당시 원외인사로 활동하던 노회찬은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대중역사서를 집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하였다. 유시민 거꾸로 읽는 세계사와 같은 책들에 비하면 그 수명은 참으로 짧았지만, 이색적인 이력.

3.2. 민주노동당 마지막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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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9월 한겨레21에 실린 민주노동당 노회찬

제도권 정치를 향한 노회찬의 발길은 진보정치연합의 대표로 권영길의 대선 출마를 지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같은 흐름은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을 거치며 성공적으로 안착. 이후 2000년 민주노동당 초대 부대표와 2002년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을 거쳐 2004년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17]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노회찬은 일반 시민들에겐 무명에 가까운 진보인사였는데, 총선 때 자주 있던 각종 토론 프로에 나오며 촌철살인과 함께 일명 대중을 웃기는 유머러스한 콘셉트의 토론으로 단숨에 유명인이 되었다.[18] 뉴스, 신문에서 노회찬에 대해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노회찬 신드롬이 분 것. 노회찬의 활약이 도움이 되어 원래 민주노동당 예상 비례당선권인 5-6번을 훌쩍 넘어 본인번호인 8번까지 당선이 되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비례대표 득표율을 13%나 기록하였다.
"간신히 3%대를 유지하던 자민련의 정당득표율은 자정쯤 2.9%로 떨어지고 맙니다. 이후 2.9%와 3%사이를 오락가락하기 2시간. 김종필 후보와 노회찬 후보의 당락도 덩달아 엎치락뒷치락 한 2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새벽 2시가 지나자 2.9%는 3%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차이는 불과 0.1%. 결국 0.1% 때문에 보수정객 김종필은 퇴장하고 노동운동가 출신 노회찬은 한국 정치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2004년 4월 16일 MBC뉴스, 17대 국회의원 중 최후로 당락이 확정된 김종필과 노회찬의 낙/당선을 알리며. 출처
당선 이후 대중적인 인지도의 유명 진보 정치인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2004년 당선 이후 처음으로 발의한 법안은 호주제 폐지 법안이었다.[19]

2005년 8월 18일 삼성 X파일 사건의 떡값 검사 리스트를 공개했다. 기사

3.3. 새로운 시작, 진보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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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신당 대표 취임식

이후 NL-PD 갈등이 심해지면서 2008년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창당했다. 심상정과 함께 진보신당 공동 당대표를 맡았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신당 후보로 노원구 병에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홍정욱에게 3% 차이로 밀려 낙선했다. 통합민주당 김성환 후보가 16%의 표를 가져간 것이 뼈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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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승수 당선 축하자리에서의 빗자루 기타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때 한명숙과의 단일화를 거부하고 완주한 것 때문에 일부 야권 지지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당시 한나라당의 오세훈이 민주당의 한명숙을 불과 0.6%차로 이겼는데, 노회찬이 가져간 표가 3%대였으니 단일화가 이뤄졌다면 오세훈이 낙선했을 것이라는게 비판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주장으로 한명숙이 민주당 구청장 후보들보다 27만여 표를 적게, 오세훈이 한나라당 구청장 후보들보다 26만여 표를 많게 얻은 상황에서 한명숙이 2만 6천여 표(0.6%) 차이로 패배했으니 이는 명백하게 노회찬의 출마 여부와 관계 없이 한명숙이 기존의 민주당 지지층에게서 표를 얻지 못해 패배한 것이다.[20] 노회찬은 딱 진보정당 고정 지지층만큼의 표를 얻었고, 사표방지 심리 때문에 한명숙에게 표를 준 진보정당 지지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노회찬이 한명숙과 단일화를 했더라도 노회찬의 3%가 고스란히 한명숙에게 녹아들었을 리는 없다.

이를 계기로 과거 상부상조하며 세력을 유지 및 확장하던 민주당과 진보정당 세력은 서로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이전부터 진보정당 지지층 내에서는 "보수정당이 강하니 민주당과 진보정당이 연합하여 이겨보자"는 주장 자체에는 공감하면서도 "민주당 및 그 지지자들이 스스로 지지기반을 확충할 생각은 않고 만만한 진보정당에게만 표를 내놓으라고 한다"며 민주당과의 연합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꽤 있었는데, 5대 지선 후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이 서울시장 선거의 패배와 그 책임을 노회찬(및 진보정당 지지자들)에게 돌리는 행동을 하면서 진보정당 지지층의 주장에 매우 부합하는 사례가 만들어졌기 때문. 이를 시작으로 싹을 틔운 민주당 지지층의 진보정당을 향한 일방적인 공격은 문재인을 필두로 한 팬덤 정치의 등장으로 더욱 심화되었고, 노회찬이 세상을 떠난 후 2020년에 열린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으로 더불어시민당을 내세우면서 정의당의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더더욱 격화되었으며, 놀라우리만큼 똑같은 사태가 더 크고 중요한 무대에서 다시 한 번 재현되며 정점을 찍고야 만다.[21]

당시 안 그래도 민주당의 성의없는 단일화 협상 태도에 실망했던 노회찬은 선거가 끝난 후에도 자신 때문에 민주당이 졌다는 악의적인 공격을 받자 "내가 투명인간이냐?"면서 대놓고 불편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훗날 나꼼수에 게스트로 출연해 밝힌 바에 의하면 민주당은 선거 기간 동안 자신에게 전화 한 통 걸지 않았다고 밝히며 "물러나려고 해도 물러날 명분조차 안 주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무엇보다 2년 전 2008년 총선에서 민주당의 김성환 후보가 노회찬과 단일화를 해주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민주당 지지자들의 노회찬을 향한 비판은 적반하장이었다.[22]

사족을 덧붙이자면, 노회찬은 위와 같이 불편한 심경을 토로하긴 했으나 오세훈의 당선에 대한 책임만큼은 누구보다도 통감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50%의 지지율을 얻었다면 오세훈의 당선을 막았을텐데 그러지 못했고, 어찌됐든 지지율이 낮았던 것은 본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당 지지자들의 거센 공격도 억울하지만 귀담아 들었고, 이는 2년 후 2012년의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심상정 예비후보가 일찌감치 사퇴하는 데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대선은 진보정의당을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이미 야권은 2012년 총선에서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지도력에 휘둘리며 위기에 몰려있었고, 혜성같이 등장한 안철수가 국민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얻는 바람에 그 위기상황에 내부분열마저 일어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야권 내 약자 정당인 진보정의당에게 (분풀이를 겸하며) 향할 수 있었고, 5대 지선에서 이를 먼저 느껴본 노회찬이 대선을 통해 당을 홍보한 것 이상의 역효과를 맞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수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이정희가 3차 방송토론을 앞두고 사퇴해 진영을 막론해 거센 비난을 받았던 걸 보면 진보정의당은 노회찬의 선택 덕에 논란을 피해갔음은 물론, 박근혜의 당선에 대한 야권의 책임론에서도 당당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노회찬은 민주노동당과의 합당을 밀고 나가다 결국 부결되면서 심상정, 조승수와 함께 진보신당을 탈당하고 통합진보당 창당에 참여했다.

3.4. 통합진보당에 합류하다

파일:노회찬 플래시몹.jpg
△ 대형유통매장 노동자 서울역 플래시몹

2011년 12월 통합진보당의 대변인으로 선임되었다. 노회찬정도의 중량감있는 인사가 대변인직을 맡는게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있었는데, 심상정 공동대표에 따르면 "이번 인선은 진보정당 통합을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서 너그럽게 국민의 사랑을 받고 총선에서 승리하는데 헌신하려는 본인의 결의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기사

노회찬 본인은 " 유시민 공동대표가 농반진반으로 대변인을 해보라고 해서 생각해봤는데 정말 그렇게 해도 되겠다 싶어 대변인직을 수락했다"고 한다. 기사 10년동안 대표, 부대표,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안 해본 게 없는데 대변인만 못 해봐서 해보고 싶었다고. 인터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 서울특별시 노원구 병) 국회의원을 지냈다.

3.5. 정의당 활동

2012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이 터지자 2012년 9월 13일 심상정, 유시민, 조준호 등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탈당했다. 기사

2012년 10월 21일 조준호와 함께 새로 창당되는 진보정의당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기사
△ 삼성 X파일 사건 떡값검사 공개

2013년 2월 삼성 X파일 사건의 떡값검사(일명 떡검)들의 실명을 공개한 혐의로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유죄를 선고받고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2005년 노회찬은 이상호기자가 입수한 도청녹취록 속에 있는 삼성측 뇌물을 받은 검사들 중 7명의 실명을 공개했는데, 이로 인해 2011년 10월 28일 서울중앙지법으로부터 징역 4개월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고, 2013년 2월 14일 대법원에서 원심을 확정받으면서 의원직을 상실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2013년 재보궐선거에서 안철수가 노원구 병 지역구에 출마하자 노회찬은 “가난한 집 가장이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올 생각을 해야지 왜 집안 식구들 먹는 걸 뺏으려고 합니까?”라고 성토하며 우회적으로 안철수의 부산 출마를 권유했다. 아내인 김지선 노원구 병에 출마하자, 지역구를 사유화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결국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당선되었다.

2014년부터 정의당에서 제작하는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 고정멤버로 출연했다.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동작구 을에 출마하였다. 새정치민주연합, 정의당, 통합진보당, 노동당 이 4당이 후보 단일화로 막판까지 시끌벅적하였다. 통합진보당 후보가 노동당 김종철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하였고, 새정치민주연합의 기동민 후보가 노회찬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해 마지막에는 나경원 VS 노회찬 VS 김종철의 3자 대결로 갔지만 결과는 노회찬 48.7%, 새누리당 나경원 49.9%로 나경원 후보가 아슬아슬하게 당선되었다. 참고로 이때 김종철 후보 표를 합치면 50.1%가 되어 나경원 의원을 이길 수 있었다.[23]

2015년 결선투표제로 치러진 정의당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였다. 1차 선거에서는 큰 표 차이로 1등을 차지했지만 2차 선거에서 심상정 의원에게 역전을 당해 낙선하였다. 당시에 상당수가 노회찬이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덕분에 노회찬의 캠프 쪽에서 방심한 반면 심상정의 캠프에서는 필사적이었다고 한다.

3.6. 4.13 총선 준비 과정

2015년 11월경에는 다시 서울특별시 노원구 병 지역구로 이사해 총선을 준비한다고 알려졌다. 국민의당 안철수, 그리고 새누리당 이준석의 3파전 양상이 예상되었다.[24]

그러던 중 창원 성산 출마설 기사가 나왔다. 노유진의 정치카페 84편에 따르면, 창원시 성산구의 경우 지역과 정의당 경남도당의 출마요청이 있어 고심을 하고 있었다. 또 같은 방송에 따르면 광주 광산구 출마 역시 요청 받았다고 힌다. 2016년 1월 30일 전국위에서 결국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출마가 결정되었다. # 하지만, 해당 지역구에는 현역의 새누리당 강기윤, 더불어민주당 허성무[25], 민주노총 소속의 손석형[26] 후보가 이미 있다. 국민의당 후보 출마설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야권 단일화는 필수로 보인다. 허성무는 이에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손석형과는 민주노총 지지 후보 투표로 단일화 투표가 진행 중이다. 두 번의 단일화와 본선거, 모두에서 승리하여야 당선되는 상황이라 매우 어렵다.

MBC경남의 여론조사에서는 야권 단일화를 이룰 경우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로 노회찬이 24.6%로 가장 앞섰다. #

2월 20일, 민주노총 단일화 후보 투표에서 승리했다. 당초 예상보다 훨씬 박빙의 승부였다고. #

더불어민주당 허성무 후보와의 단일화 여론조사가 3월 27~28일 양일간 진행될 예정이다. #

더불어민주당 허성무 후보와의 단일화 후보 투표에서 승리했다. 양측 합의로 조사결과는 비공개하기로 했다고 한다. #

2016년 4월 3일 선관위로부터 야권단일후보라는 홍보 문구를 지적 받았다. 아직 국민의당 후보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결국 당일 선거 결과에서 51.5%로 여유있게 승리하며 당선됐다.[27]

3.7. 제20대 국회 활동

당선 이후, 정의당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

2016년 9월 22일, 태광그룹 이호진 전 회장의 병보석 의혹을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박범계 의원과 제기하면서 법원의 엄정한 조사를 촉구한다. 이것이 선견지명이었던 것이 2년 후인 2018년 " 황제 보석" 사건으로 모두 사실로 밝혀지면서 다시금 회자되게 되었다. 사법부와 대기업이 반박했던 의혹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

11월 11일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게이트 긴급현안질문에서 "속단하지 말라"는 황교안 국무총리의 반론을 '속단'이 아니라 뒤늦게 안 '지단(遲斷)'이라며 맞받아쳤다. #[28]

2017넌 1월 6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의 발의자 중 한 명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는데, 해당 안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막기위한 취지로 발의된 것이나, 성폭력 무고죄 고소를 성폭력 수사 종결 후로 미룬다는 부분이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발을 사기도 했다.

2017년 이낙연 총리 후보자의 인준 투표 중 신 새누리당의 조원진 의원이 여당 상대로 마구 항의를 했는데 그걸 조금 떨어진 곳에서 페이스북으로 라이브 중계를 했다. 근데 이때 모습이 안 찍는 척 안 보면서 조 의원을 찍는 게 언론에 잡히면서 노 룩 라이브라는 평가를 받았다. 나중에 기자가 왜 안 보면서 찍었냐고 물으니 찍고는 싶었는데 보고 싶진 않았다고.

법원행정처 안경환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혼인무효소송 관련 판결문을 상대방 여성의 개인정보가 노출된 상태로 공식 요청을 받은 지 불과 8분 만에 자유한국당 의원들에게 제출했음을 공표했다. #

2017년 5월 30일 정의당 원내대표직에 재신임되면서 1년을 더 원내대표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노회찬, 심상정 의원 말고는 다 비례대표인 정의당의 상황을 감안하면 20대 국회 내내 원내대표직을 수행할 가능성이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감방에서 인권침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며 UN 인권위에 제소하자, 2017년 10월 19일 감사원 국정감사 도중 이에 반박하며 직접 누워보였다. 일반 재소자들의 수용면적은 신문지 2장 반 크기인데 박근혜는 그보다 10배나 더 넓은 면적의 방에서 지내고 있으므로 인권 침해는커녕 오히려 분에 넘치는 특혜를 누리고 있음을 직접 신문지 2장 반 위에 누워서 몸으로 보여주었다. 이때 지역구 신문인 경남도민일보를 들고나와서 시연을 했는데, 물 들어온 김에 노젓는 깨알같이 경남도민일보 페북 포스팅은 덤. 기사 야구팬들은 눕동이라고 불리는 KIA 타이거즈 김기태감독을 떠올렸다.

2017년 11월 24일 '사회적 참사법' 표결 불참으로 논란이 생겼다. 세월호 사고 및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수정안이 이날 본회의에서 통과했는데, 노회찬 의원은 이 표결에 불참했다. 게다가 노회찬은 당일 국회 구내식당에서 국수를 먹은 인증샷을 트위터에 올렸었다. 그래서 국회에 있으면서 왜 표결에는 불참했냐는 논란이 나왔다. 다음 날 트위터에서 해명하였다. 요는 통과를 축하하는 잔치국수 인증샷이라는 것이다.

17년 말부터 노회찬 의원의 경남도지사 출마와 관련된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일부 민주당, 정의당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경남도지사로 차출할 사람들중에 마땅한 사람이없으니 노회찬을 경남도지사 후보로 추대해서 민주진보 단일 후보로 내세우고 경남을 탈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정작 지방선거 국면이 다가오자 친문재인 핵심인 김경수 의원의 경남도지사 출마가 확실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묻히고 말았다. 결과는 넉넉하게 김경수 후보의 당선.

2018년 7월 5일부터 유시민이 하차한 썰전에 진보 논객으로 출연을 시작했다. 현역 국회의원으로는 이례적인 일인데, 과거 논객들이 총선, 재보선 출마를 이유로 줄줄이 하차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현직 국회의원이 고정적으로 나선다는 것은 타 프로그램과 비교해봐도 흔치 않은 상황이다. 어차피 다음 총선이 2020년이기 때문에 부담없이 출연한 것으로 보인다. 탈당 사실이 알려졌지만 정의당 평당원으로 유명했던 유시민의 후임이다 보니 정의당의 홍보 차원에서 지속성을 유지할 수가 있게 되었다. 첫 출연부터 자유한국당 안상수 비대위 준비위원장을 탈탈 털어서 이름 값에 맞는 활약을 했다.

그러나 드루킹 특검팀이 최근 노회찬 의원에 대한 계좌추적에 착수 보도와 함께 그 이후 드루킹이 노회찬에 4,600만 원 줬다고 특검에 진술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고 또 관련자들의 진술과 그러한 진술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썰전 시청자들은 실망감과 분노한 반응을 보였고 썰전 시청자 게시판에 노회찬 의원 하차하라는 의견도 나오고있다. 특히 유시민이 하차하고 노회찬 의원이 진보 논객으로 출연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채 드루킹 불법 정치자금 수수의혹이 터지면서 썰전 제작진도 곤혹을 치르고 있다. 썰전 제작진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의혹을 조사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특검 수사를 예의주시하고있다”며 “이번 주(7월 19일 밤 11시)는 정상 방송된다”고 확인했다. JTBC 홍보 관계자도 “최종 조사결과가 나온 상황이 아니다”면서 “노 의원은 16일 썰전 녹화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

3.8.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

2018년,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이 불거졌다. 김경수 송인배 등이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닉네임 드루킹에게 여론조작을 지시했다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결국 2018년 5월 21일 여당과 야 3당간의 합의로 특검법안이 통과되었다.

2018년 7월 특검 수사 중에 전혀 뜻 밖의 의혹이 짙게되는데, 드루킹 측이 노회찬 측에 5,000만원 상당의 불법 정치자금을 전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 이에 노회찬은 드루킹으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강력히 부인하였으나 # 결국 불법 정치자금 수수가 사실임을 유서를 통해 인정했다. 다만 대가성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특검의 수사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허익범 특별검사팀은 7월 17일 새벽 1시 5분, 노회찬 정의당 의원에게 5,000만 원을 전달한 혐의(정치자금법 위반)와 이 돈 중 4,190만 원을 돌려받은 것처럼 증거를 위조한 혐의(증거위조)로 ‘ 경제적 공진화 모임(경공모)’ 핵심회원인 도 모 변호사를 긴급체포했다. # 특검팀의 박상융 특별검사보는 체포된 도 모 변호사가 2016년 드루킹과 공모해 특정 정치인[29]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정치자금을 전달·교부한 혐의, 수사 과정에서 혐의 부인 내용을 담은 위조 증거를 제출해 무혐의 처분을 받게 한 혐의 등을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

드루킹 일당은 노회찬 측에 5,000만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2016년에 이미 경찰의 수사를 받으나 당시에는 "돈이 실제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반면 허익범 특검팀은 노회찬 측에 드루킹의 돈이 실제로 전달됐을 것으로 판단하여 재수사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특검팀은 2016년 경찰 수사 때, 도 모 변호사가 자금 출납 자료 등 각종 증거물을 위조해 제출한 것으로 보고 있었다.
7월 18일, 허익범 특검팀은 드루킹로부터 노회찬 의원에게 불법 정치자금 4,600만 원을 줬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 박상융 특검보는 금품 수수 의혹이 제기된 정치인을 소환 조사하겠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조사할 필요성이 당연히 있다”고 밝혔고 "(금품을) 전달한 측 관련자들의 진술과 그러한 (진술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확보해, 도 변호사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며 자금 조성과 전달 과정의 흐름 역시 계좌추적을 통해 파악했다고 말했다. # 실제 특검팀은 노회찬 의원이 2013년에 떡값 검사 실명 공개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후 강연으로 연명할 적에 경공모 측으로부터 강의료 명목으로 수천만 원을 받았다는 진술과 함께 관련된 회계장부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

그러나 7월 20일에 법원은 노회찬 의원에게 정치자금 5천만 원을 불법 기부하는 데 깊숙이 관여한 혐의를 받는 드루킹의 핵심 측근인 도 모 변호사(61)에 대한 영장실질심사에서 "긴급체포의 적법 여부(긴급성)에 의문이 있고, 증거위조 교사 혐의에 관하여 법리상 다툼의 여지가 있음을 고려할 때 구속의 사유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

7월 23일, 노회찬 의원은 노모의 아파트 복도에서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노회찬 의원은 자신의 유서에서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로부터 모두 4,000만 원을 받았다"라며 금품 수수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라고 밝혔다. 이어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라면서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위 내용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대한민국 정치자금법 때문이다. 정치자금법에서는 회원들의 모금을 단체의 이름으로 특정 정치인한테 후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반대로 어느 단체의 자금을 개인의 이름으로 위장하여 특정 정치인한테 통칭 "쪼개기 후원" 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오직 '자발적 의사'에 의한 '개인'의 기부만 가능하며 액수는 기명의 경우 1인당 500만 원, 1년 누적 2,000만 원까지 가능하고, 익명 기부는 1인당 연 10만 원까지 가능하다. 애당초 드루킹한테서 노회찬이 4,000만 원을 받았다면 자금의 성격에 상관 없이 기부액수 초과로도 정치자금법 위반이다. # 사건 초기에 자신의 혐의를 부인한 것은 #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대법원까지 확정된 판결문에 의하면 노회찬은 2016년 3월 7일 2,000만 원, 같은 해 3월 17일 3,000만 원, 총 5,000만 원 상당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 노회찬 의원은 유서에서 4,000만 원을 받았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여러 증거를 고려하면 실제로는 5,000만 원이 전달되었다고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치자금법이 제도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
우리나라의 정치자금법이 과할 정도로 모금을 제한하는 이유는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금권선거의 폐단과 이른바 차떼기 대북송금 특검 문제가 터져나오면서, 트럭에 현금을 가득 채워서 트럭째로 불법 정치자금을 넘겨주는 추태를 막고자 2004년에 현재와 같이 개정됐다.[30] 법을 지금과 같이 개정한 취지도 좋고 필요성도 인정되나 현행법은 현역 정치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불리하게 여겨질 측면이 있다. 현역 국회의원의 경우 2018년 현재, 매년 세비로 약 1억 4,000만 원을 받고 후원금으로 매년 1억 5,000만 원까지 모금할 수 있으며 선거가 있는 해당 년도에는 추가로 1억 5,000만 원을 모금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정당에 지급되는 국고 보조금은 첫 50%는 교섭단체(20석 이상 정당)들이 나눠 받고 나머지 50%만 의석 수대로 나눠 받는다. 정치후원금은 정책개발비, 보좌관 인건비, 국회의원 개인의 생활비 뿐만 아니라 지역구 사무실 임대료, 상근 인력 인건비, 관리비, 공무 수행에 필요한 사람들 만나고 다닐 때 드는 교통비, 밥값 등 정치활동 전반에 걸쳐 쓰이고, 선거를 앞 둔 경우에는 선거 명함, 펼침막, 차량 운행비, 문자메시지 발송비, 공약개발비 등으로 쓰이기도 한다. 다른 특별한 직업이 없는 낙선 정치인인의 경우 합법적 모금이 가능한 다음 선거 예비후보등록 시기까지 버티기 위해서는 입법 활동과 관련된 비용을 제외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부대비용 중 일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나 현행법 아래에서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 정치자금법은 국회의원 예비후보의 경우 1억 5,000만원까지 후원금을 모금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으나 (정치자금법 제12조 4항) 선거법상 예비후보 등록은 총선 120일 이전부터 가능하기 때문에 정책과 공약을 개발하고 검토하고 지역사회의 유권자와 만나면서 자신을 홍보하고 다닐 자금을 4년 내내 안정적으로 확보한 현역 국회의원과 비교해 준비 기간도 너무 짧고 액수도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그들의 공약은 현역 의원들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고 선거도 적은 비용으로 치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행 정치자금법이 사실상 낙선/재야/소수정당 정치인들에게 페널티로 작용할 수 있으므로 이를 개정할 필요가 있다. 국고 보조금 분배를 교섭단체가 먼저 가져가는 것을 폐지하고 전액을 의석수에 따른 분배로 변경, 개인이 후원할 수 있는 금액의 상한선을 상향조정, 단체의 모금을 통한 후원을 합법화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단 사용의 투명성을 강제하는 조항을 잘 정비해야 한다.
현행법상 1인의 후원자가 정치인에게 1년 동안 기부할 수 있는 정치 자금의 총액은 무려 2,000만 원이며[31], 10만 원 이하 소액 정치후원금은 전액 세액공제 혜택을 주며 제도적으로 다수 유권자의 합법적 정치후원을 장려하고 있다. 이는 정치인의 능력이나 비전에 따라 합법적인 범위내에서 충분한 정치자금을 조달할 수 있음을 뜻한다.[32] [33] [34] 일부에서는 이 금액도 작다고 주장하며 미국의 예를 들지만, 미국/정치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슈퍼팩들의 거액 기부, 이익단체들의 로비, 가진자들 위주의 기부로 인한 정경유착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상태이다. 예를 들어 만약 1인이 1인의 정치인에게 1년 동안 후원 할 수 있는 정치자금 지원액의 한도를 높게 설정한다면, 일반적으로 많은 유권자의 후원을 받는 정치인보다 후원자들의 수가 적더라도 부자 유권자 위주의 후원을 받는 정치인이 정치자금 확보에 상대적으로 유리해진다. 또 정치자금 후원액수 상향조정하고 단체의 후원을 허용한다면, 이는 현역 정치인이나, 기성정당에 더욱 유리해질 공산이 크다. 상대적으로 정치인에게 더 많은 자금을 후원할 수 있는 여력은 소수의 부유층 혹은 이익집단이 더 크기때문에 그들이 지지하는 현역 정치인 혹은 기성정당이 더 많은 금액을 모금하기 용이해진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치신인, 신생정당들과 기성정치인, 기성정당들 간 후원금 모금 격차는 더욱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정치자금법을 완화한다면 다수 국민들의 정치참여 장벽을 더욱 높히는 부작용을 낳을 우려가 크다. 노회찬 전 의원 역시 생전에 금단현상으로 괴롭다고 해서 아편을 다시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며 정치 자금법의 완화의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한 바 있다.

현역정치인이 정치후원금을 받는 근본적인 이유는 정치활동으로 인한 수익이나 합법적 후원외에는 현역 정치인의 자금 형성에 제약을 가지는 점[35] [36]을 보완하기 위함이다. 또한 현역의원의 정치후원금은 오로지 선거만을 위해서 사용하는것이 아니라 본인이 정치활동을 하는 합법적 분야 전반에 걸쳐 사용할 수 있으며 현역의원은 정치인을 지망하는자나 낙선자와 달리 현재 정치업무를 수행하고 있는사람들로서 합법적 정치자금의 모금 필요성이 현역의원 이외의 사람보다 높다. 현직 의원이 아닌 전직 의원이나 정치지망생 경우에는 현직 의원보다 자유로운 수익활동을 할 수 있다. 더불어 현역의원의 경우 차기 선거의 출마 여부와 관계없이 적어도 현역의원의 정치활동수행을 목적으로 정치활동의 모금을 할 수 있으나, 출마 희망자나 전직 의원들은 업무수행과는 관련이 없으므로 그들이 정치후원금을 받을 필요성은 오직 선거에 공식적으로 출마한 이 후에 성립될 것이다.[37] 따라서 만약 예비후보자에게 현역의원과 똑같은 모금을 허용한다면 현역의원들에게 오히려 역차별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현행 정치자금법은 차떼기, 박스떼기로 대표되는 금권선거와 불법 정치자금의 폐단을 근절하고, 합법적인 범위내에서 최대한 평등한 조건으로 선거 및 정치자금을 운용하자는 취지로 개정되었다. 따라서 정치자금법의 금액 상한 기준 완화와 단체의 의한 후원을 허용한다면, 제2 혹은 제3의 차떼기, 박스떼기가 부활할 우려가 크다. 소수의 이익집단 혹은 소수의 후원인이 거대한 자금력을 이용하여 특정 후보에게 후원금을 몰아주는 행위는 결국 정치인이 해당 소수 이익집단이나 개인에 포섭되어 그들의 특수한 이익에 따라 행동을 강제당하는 상황이 초래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일부 소수의 후원금이 전체 후원액의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보다, 소액 후원인들에게 혜택을 주어 다수 국민들의 합법적 정치후원활동을 장려하는 현행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 더욱 투명한 정치활동을 보장하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며. 종국적으로 돈 안드는 선거제도 및 선거문화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노회찬 전 의원은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인해 2013년 2월 19대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노회찬이 드루킹 측으로부터 4,600만원을 받았다는 시점은 2016년 3월로 이는 20대 총선으로부터 대략 한 달 전이며, 당시 노회찬 전 의원은 창원 성산구의 출마 한 상태로서 최소 예비후보자 신분이었다.[38]

갑작스런 노회찬의 사망으로 난항 수준이 아니라 관련 수사가 종결까지 될 수도 있는데 일단 특검은 '진상 규명' 에 주력하기로 하고 수사를 계속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기사 단, 조사를 하더라도 "공소권 없음(사망)"으로 처리된다. 허익범 특별검사 비통하다며 유감 표명을 했다.

한편 드루킹이 검찰조사 중 자신이 건네준 건은 강연료 4,000만 원뿐이며, 불법 정치자금이라고 주장했던 4,600만 원은 거짓 진술이었다고 말을 바꾸었다. ( 관련기사) 그러나 이는 드루킹이 본인의 처벌을 피하기 위한 진술일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로 불법 정치자금죄는 돈을 받은 사람뿐만 아니라 돈을 건넨 사람에게도 처벌을 할 수 있다. 드루킹이 진술을 번복한 시점은 노회찬의 사망 이후이며 즉 노회찬의 사망으로 인하여 양자간 수사가 불가능하므로 본인만 진술을 번복한다면, 노회찬이 사망하지 않았을 때보다 혐의 입증이 상대적으로 어려워지므로 진술의 번복은 피의자인 드루킹에게 유리한 카드이다. 두 번째로 그것이 드루킹의 주장처럼 정령 합법적이고 아무 문제 없는 강연료였다면 노회찬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이유가 없다.

드루킹 재판의 1심 법원은 드루킹이 노회찬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준 것이 맞다는 판결을 내렸다. 드루킹, 1심서 3년 6개월…법원 "노회찬에 돈 준 거 맞다" 재판부는 드루킹이 2016년 3월17일 창원을 방문해 노회찬의 아내를 통해 노회찬에게 현금 3,000만 원을 건내주는 등 여러 객관적 증거에 의하여 2차례에 걸쳐 5,000만 원을 전달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결하였다.

2019년 3월 20일 18대 대선· 19대 대선 대선 무효소송인단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한 모 씨는 드루킹의 변호인 김형남 변호사와 함께 오전 당일 서울남부지검에 노회찬 의원의 부인 김지선 씨에 대해 정치자금법 위반 공범 혐의로 고발장을 제출했는데 "드루킹의 발언에 따르면 노 의원에게 정치자금 5,000만 원을 줬는데 이 중 3,000만 원은 부인을 통해 전달됐다"면서 "특검에서는 계좌추적과 장부 대조를 통해 조사를 해야하는데 그 과정이 없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수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

4.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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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 전 의원 장례식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유서 중

2018년 7월 23일 오전, 투신 자살했다는 기사가 각 언론사에서 일제히 보도되었다. # 7월 23일 오전 9시 38분경 서울 중구 약수동의 한 아파트[39] 현관 앞에 쓰러져 사망한 채로 발견되어 경비원이 112에 신고하였다. 같은 아파트 17-18층 사이 계단에 남긴 노회찬의 외투 안에서 지갑, 신분증, 명함과 함께 유서(휴대폰의 미발신 문자메시지)가 발견되어 조사 중에 있으며 유서의 내용은 ' 드루킹으로부터 금품을 받았으나 청탁은 받은 적이 없으며 가족(아내)과 당에 미안하다'는 취지인 것으로 알려졌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되었다.

7월 18일에 4박 6일의 일정으로 미국으로 출국했다는 기사를 보면,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귀국한 지 몇시간도 되지 않아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23일 오후 유서가 공개되었다. 유서는 당에 남긴 것과 유가족에 남긴 것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당에 남긴 유서 1통은 공개되었고, 유가족에 남긴 유서 2통은 유가족 뜻에 따라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아래는 공개된 유서 전문.

2018년 7월 23일 정의당에서 노회찬의 유서를 일부 공개하였다. 유서 전문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로부터 모두 4천만원을 받았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 이정미 대표와 사랑하는 당원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 정의당과 나를 아껴주신 많은 분들께도 죄송할 따름이다.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2018.7.23. 노회찬 올림
유서는 노회찬 본인 자필이라고 경찰에서 발표하였다. 기사 하지만 자필이라는 경찰의 발표를 보도했던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장윤선 기자의 이슈파이터에서 자필 유서가 아니라 문자 메시지가 임시 저장된 것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장윤선 기자: (유서가) 컴퓨터 워딩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컴퓨터가 아니라 노회찬 대표가 늘 들고 다니던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를 비서실장에게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전송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게 임의 저장 방식으로 남아 있는 것을 경찰이 확인해서 김종철 비서실장에게 건넸고 그것을 확인해서 당 내부에서 내용을 확인한 다음에 기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브리핑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중략) ... 민동기 기자:그 워딩도 자필이 아니라 워딩이다더라 왜 기자들은 확인을 하지 않았나 #영상보기 6분 10초에 나옴

노회찬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인해 드루킹 특검 노회찬 관련 수사를 잠정 중단했다. 동일하게 투신자살한 노무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이 종결될 예정이며 특검은 나머지 사안들에 대해서는 진상 규명을 위해 수사를 계속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시신은 발인 후 화장되어 남양주시 마석에 위치한 마석 모란공원에 안치된다.

노무현 유서가 컴퓨터에 저장된 것과 마찬가지로 휴대폰에 임시저장된 것이 유서라는 점에 진짜 본인이 작성한 것일지 의혹이 제기되었다. 또한 투신자살이라기에는 아파트 창틀의 높이가 140cm로 너무 높다는 것, 창문과 시신 발견 지점의 거리가 8m나 된다는 것 등을 근거로 타살설이 돌기도 했다. # 이에 노무현 자살과 함께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종결되어 이득을 본 측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조용히 덮혔다. 동시에 고인들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장례는 본래 '정당장'으로 5일간 실시하기로 하였으나 국회의장 문희상의 발언으로 '국회장'으로 승격되어 7월 26일부터 이틀 동안 국회에서 영결식이 진행될 예정이다. 빈소는 연세 세브란스 장례식장이고 지역구였던 창원 등에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

노회찬의 빈소엔 여야를 비롯한 정치계와 정부 인사, 노동계, 연예인 등 각계 인사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조문 열기가 대단했는데[40] 사망 당일인 23일에만 3,000여 명이 방문했고 이어 24일에는 5,600여 명, 25일에는 12,000여 명, 추도식이 열린 26일에는 28,000여 명이 방문했다. 이는 방명록에 근거한 것이라 실제 방문한 조문객은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 생전에 그를 좋아했던 많은 시민들의 추모와 조문이 이어졌고 서울의 빈소뿐 아니라 고인의 생전 지역구였던 창원을 비롯한 전국에 세워진 분향소에서도 시민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 그리고 27일 열린 영결식에는 3,000여 명의 시민이 참석한 것으로 추산된다. # 전국의 빈소에는 72,300여 명의 조문객들이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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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봉관(元鳳官)의 딸이다. [2] 남편은 김녕 김씨 김세권(金世權)으로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 해양융합공학과 석좌교수이다. [3]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주식회사 생명과학 대표로 있다. [4] 이경규와 같은 학교 출신으로 훗날 냄비받침에서 만나게 된다. [5] 당시에는 명문고 입시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중학교 4학년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사족이지만 그가 재수해서 들어간 해는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이전 마지막 입시였다. 경기고등학교를 비롯한 모든 서울시내 고등학교 입시가 폐지된 건 1974년부터이다. 또 화동 교사 마지막 졸업생이기도 하다. 고교 동기로 고승덕, 황교안, 이종걸, 김기준, 김용덕 대법관이 있다. 72회는 졸업생 720명 중 450여명이 서울대에 진학했다. [6] 그래서인지 생전 노회찬의 말투를 들어보면 동남 방언 억양이 강하게 섞인 서울 말씨를 사용한다. [7] 1970년대까지는 고등학생들이 반체제 투쟁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다. 노회찬 의원이 이런 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모 TV프로에서 직접 얘기한 적이 있는데, 본인이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에 의문점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8]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재야인사들을 만날 때 늘 전화로 만나고 싶다며 자신의 이름만 말하고 가서 직접 만나 고등학생 신분인 그를 확인한 후 적잖게 당황했다고. [9] 70년대에는 전태일의 분신자살로 지식인들이 큰 충격을 받아, 자신들의 지위를 내던지고 용접이나 선반공 자격증을 따서 현장에 들어가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를 '학생 출신'이라 하여 '학출'이라 불렀다. 여담으로 이쪽에서 전설적인 인물이 바로 1994년 신한국당 입당하면서 우파 정치인으로 전향한 김문수였다. [10] [단독 인터뷰]노회찬이 입을 열면 정치가 쉬워진다 (헤럴드경제, 17.09.01) [11] 여담이지만 이때 노회찬과 같이 검거된 사람 중에는 무려 차명진(...)이 있다. 기사 [12] 출처 [13] 사노맹의 후신 그룹들 중 하나로 여겨지는 ND계열 조직 [14] 출처 [15] 현재는 새로운미래에 있는 정태근, 그리고 바른미래당에 있었던 무소속 김성식도 이 정당 출신이다. '제3의 정치세력'을 표방했지만, 진보정당이라기보다는 국민의당과 가까운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는 정당이었다. 이들은 이회창 총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나 실패. 그 뒤로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16] 매일노동뉴스를 발행하던 시절, 경영난으로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했다. 훗날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 은행사에서 카드를 좋은 조건으로 발급해주겠다고 찾아왔는데, 다음날 전화로 신용불량 이력때문에 카드 발급 대상이 아니라고 통보해왔다고... 오마이 기사 [17] 비례대표 8번이었다. 그리고 자민련의 비례 득표율이 0.179073329%(...)만 높았어도 그는 낙선이었다. 참고로 이 '반올림해서 0.2%'가 모자라 낙선한 자민련의 비례대표 1번은 김종필. 참고로 이때 10선에 실패한 김종필은 충격받아 정계를 은퇴한다. [18] 당시 민주노동당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된 노회찬의 일기에서도, TV토론 몇 번 나오니 순식간에 민노당과 자신의 인지도가 상승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19] 출처: 한겨레 기사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민법중개정법률안(노회찬의원등 10인) [20] 5대 지선 문서에도 상세히 설명돼있지만 당시 민주당은 시장 선거에서만 패배했을 뿐 시의원 106석 중 79석, 구청장 25석 중 21석을 쓸어가며 대승을 거두었다. 심지어 구청장과 시의원은 민주당을 찍고 시장은 오세훈을 찍은(즉, 민주당을 지지할 생각은 있지만 한명숙은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의 수가 노회찬의 총 득표수를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이었으니, 한명숙의 득표력이 민주당 소속 구청장 후보들의 평균만 됐어도 한명숙은 노회찬과 관계 없이 낙승할 수 있었다. [21] 진보정당 후보의 득표 수와 관계 없이 민주당 후보의 득표력 부족으로 인해 보수정당 후보가 승리했다는 점마저 같다. [22]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이때 서울시장 선거에서 노회찬과 한명숙의 단일화로 오세훈이 낙선했다면 무상급식 캐삭빵과 2011년의 서울시장 재보궐선거도 없었을 것이고, (어쨌든 후일 애초에 정계로 진출할 욕심이 있었다고 평가받게 되는) 박원순 안철수의 정계입문이 더 늦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23] 김종철 후보가 현재 정의당 소속이며 정의당 입당 뒤에 노회찬 의원의 비서실장을 맡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24] 결론적으로는, 정의당의 노회찬 대신 더민주의 이동학이 나와 3파전이 되었다. 정의당에서는 주희준 후보가 예비등록을 하긴 하였으나, 당선가능성은 굉장히 낮다고 평가받았다. 참고로 이 시기 노회찬 의원은 범야권후보면서 자기 지역구에 출마한 안철수에게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25] 이후 민선 7기 창원시장을 거쳐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해당지역에 출마해 국회에 입성하였다. [26] 통합진보당, 현 무소속. 19대 총선에는 48%로 석패하였다. [27] 단일화 두 번과 본선에서까지 모두 승리한 것이다. [28] 훗날 유시민 썰전에서 프랑스 축구선수를 말했다고 드립을 쳤다. [29] 박 특검보가 언급한 특정 정치인은 노회찬 의원을 지칭한다. [30] 공직선거법, 정치자금법, 정당법과 동시기에 개정 [31] 정치자금법 제11조(후원인의 기부한도 등) [32] 대통령 선거의 경우 후원자는 개별 후보자에게 1,000만 원까지 후원 가능,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개별 후보자에게 500만 원까지 후원 가능 [33] 국회의원·국회의원후보자등 및 당대표경선후보자등의 후원회는 각각 1억 5,000만 원(후원회지정권자가 동일인인 국회의원후보자등후원회는 합하여 1억 5,000만원)을 후원받을 수 있다.더불어 경우에 따라서 선거가 있는해에는 정치자금법 제13조(연간 모금·기부한도액에 관한 특례)에 의하여 연간 모금·기부한도액의 2배를 모금·기부할 수 있다. [34] 원내 정당에 경우에는 합법적으로 국고에서 정당에 선거자금을 지원하고 있으며, 선거에서 일정 득표율 이상 지지를 얻으면 후보자의 선거비용 전액 혹은 반액을 국고에서 보전해준다. [35] 헌법 제 43조 국회의원의 겸직금지 [36] 국회법 제 25조 품위유지의 의무 [37] 선거에 출마할지 출마하지 않을지 확실치 않는 상황에서 정치후원금을 허용한다면, 정치후원금의 국고보조와 후원금 세액공제등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38] 후보자 등록 기한인 2016년 3월 24일, 25일 이 후에 받았다면 노회찬 전 의원의 당시 신분은 예비후보자가 아닌 후보자이다. [39] 속보를 내던 일부 방송사가 처음엔 노 의원 자택으로 알렸으나, 곧 모친과 남동생이 거주 중인 아파트로 정정했다. 노회찬의 생전 거주지는 노원구 상계동. 노회찬은 사망하기 전날 자택에 잠깐 들러 부인에게 '어머니를 뵙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외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아파트는 2007년 동호공고 폐교 시도 사건으로도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40] " 대통령이 보낸 조화도 있고, 국회의원도 있고, 기업인도 있고, 청소부도 있고, 장애인도 있고. 노인도 있고, 어린아이도 있고...이런 장례식은 처음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기자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