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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03:36:24

노블레스 오블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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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비판
2.1. 신분제를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2.2. 포퓰리즘 관점에서2.3. 도덕적 의무 부여의 타당성
3. 반론4. 한국에서5. 이면6. 예시7. 매체에서8. 여담9. 관련 문서

1. 개요

귀족의 혜택을 누렸다면, 귀족의 의무를 다해야겠지요.
던전앤파이터, 사라 웨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 귀족은 의무를 진다"는 뜻의 프랑스어 표현이다.

이 표현은 프랑스의 작가 겸 정치가인 레비 공작 피에르 가스통 마르크[1]가 <격률과 교훈>[2]이라는 책에서 처음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와 권력은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수반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주로 사회 지도층 혹은 상류층이 사회적 위치에 걸맞은 모범을 보이는 행위를 표현하거나 그것에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표현이다.[3]

2. 비판

2.1. 신분제를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

원 출처인 프랑스는 물론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자주 거론되는 특이한 단어이다. 정확히는 과거 유럽권에서 종종 언급되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된 단어인데 한국에서는 소위 사회기득권층의 사회적 의무를 부각하는 단어로 유독 많이 쓰고 있다.

지금은 이 단어가 한국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이유는 우선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단어 자체가 ' 귀족이라는 특권신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기득권층에 대한 의무 강화를 요구하더라도 그들을 굳이 귀족으로 칭해줄 이유가 없으므로 자연스럽게 사장된 것이다. 아프리카의 식민지배를 겪은 국가들이 식민지배를 했던 영국, 프랑스 등의 국가에게 사과와 반성, 경우에 따라 배상을 요구할 때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강조하지 ' 백인의 짐을 져라'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4]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단어는 1808년 처음 언급되는데 이는 이미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지 20년 뒤의 일이다. 즉, '귀족은 의무를 다한다'는 말은 혁명의 영향으로 귀족의 지위를 잃고 타격을 받은 당대 프랑스 귀족계층이 자신들의 특권 내지는 신분을 옹호하기 위해 만든 고안한 말에 가깝다. 그 이전에는 귀족이 귀족인 이유는 의무를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영민을 지배할 권한을 받은, 지상의 권리대행자인 군주로부터 그 특권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대 유럽에서 저 말이 그닥 많이 쓰이지도 않은 것이다. 근대에 와서 신분제가 부정되는 시기가 된 뒤에 낡아가는 귀족제도를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유럽 귀족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많이 거론하는 게 유럽 귀족들의 참전인데[5], 유럽의 귀족은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 군을 지휘하는 직책[6]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참전하여 군을 지휘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재산을 불리거나 빠르게 출세할 수 있는 그들만의 특권에 가까웠다. 그렇기 때문에 1차, 2차 세계대전 때도 많은 양측 지휘관 및 장교들 중에 귀족 출신이 많았고 에르빈 롬멜 같은 평민 출신 장교가 차별받았다.[7]

일본의 다이묘, 사무라이 계급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사무라이 센고쿠 시대 다이묘 간 영지전에 참전하거나 임진왜란에 참전한 건 무슨 대단한 사회적 의무의 실천이 아니라 전쟁 자체가 그들 계급의 존재이유이고 빠르게 출세하고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지름길 이었던 것이기 때문에 참전한 것이다. 유럽의 귀족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 의무가 주군에 대한 봉건계약의 이행[8], 주군에 대한 충성[9]을 뜻하는 것이라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들의 참전이 흔히 노블리스 오블리주 하면 떠올리는 사회적 책임을 다한 것이라거나 사회고위층의 자기희생 같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일본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긍정적인 의미로 많이 언급하는 편이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명분으로 일본의 황족이나 왕공족 남성들이 군복무를 하는 것이 의무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왕족 취급이었던 구대한제국 황실(이왕가)도 예외는 아니라 이우 일본군 장교 복무 중에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폭 피해로 사망한 일이 유명하다. 한국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 개념이 유명한 것도 일제강점기의 영향일 가능성이 높다.

2.2. 포퓰리즘 관점에서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인 느낌이 강하다는 이유로 이 단어의 사용이나 그에 입각한 일체의 개념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정치인, 기업가의 아들이나 서민 김모씨의 아들이나 똑같이 병역법 앞에 동등하게 국가에 대한 의무를 지는 대상인데 왜 전자의 것을 더 가치를 부여해 주냐는 식이다.[10] 선민사상적인 느낌도 있고, 부자가 되어야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는 식의 성공지향적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다. 백인의 의무 또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악용된 사례다.

위에 언급한 실용적인 이유에서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은 비판도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 자체가 기득권 계급과 그렇지 않은 위치의 계급 격차를 인정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시민 사회에서 의무와 권리는 항상 똑같이 다니게 되므로, 기득권층의 이런 의무는 결국 그들이 기득권을 가지는 것을 합리화시키고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흔한 좋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좌익 계열에서도 싫어하는 개념이다.[11] 다른 면에서 자유지상주의 자본가, 신자유주의를 대변하는 우파들도 극히 싫어하는 개념이다. 전통적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귀족 계급을 대변하는 보수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개념이며[12] 귀족이 없(던)는 국가에서는 '사회 지도층'들의 의무로서 강조된다.[13] 그러나 실질적으로 상류층의 부담을 늘리는 정책에 상류층이 기꺼이 동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일부 유명 부자들의 기부 행위로서 실천되는 정도이다.

2.3. 도덕적 의무 부여의 타당성

타인에게 사회적 의무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는 이렇다. 기본적으로 사회가 제공해 준 여러 가지 혜택을 받아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돌려줄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사회적 의무'의 범위를 모호하게 설정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가령 어떤 관점에서는 부자들은 일을 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물건을 판매하거나, 일자리를 창출해 줌으로써 이미 사회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주고 받는 계약이 끝났는데, 왜 사회가 무언가를 더 요구하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국가가 복지를 비롯한 정책에 쓰는 재원들의 대부분은 고소득층과 대기업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데, 만약 편법없이 세금을 냈다면 사회적 의무는 그걸로 끝난 것이지 그 밖에 법으로 규정되지도 않은 도덕적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과도하다.

고소득층이 지니고 있는 부가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창출된 것'으로 보는지, '국가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전자라면 사회로부터 받은 게 없으니 돌려줄 도덕적 당위도 없다. " 보이지 않는 손" 이론에 입각하자면 경제 활동을 활성화해서 이미 베풀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한편 후자라면 사회에 기부할 도덕적 당위가 생긴다. 일반적으로 우파에서는 개인의 성공을 개인의 몫으로 온전히 돌리고, 좌파에서는 사회의 역할을 강조하는 편이기에 각각 전자, 후자의 관점을 선호하곤 한다.

3. 반론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용어는 1800년대 프랑스에서 등장했지만, 그 개념은 인류사에 계속 존재했다. 로마 제국의 상류층들은 노예와 다르다는 자부심으로 사회적 의무를 다하려고 했고[14][15] 칼레의 시민들은 사회적 책임을 위해 희생하려고 했다.[16]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타인에게 강요한다면 문제가 크겠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본래 상류층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발적으로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자발적으로 행하는 경우 신분과 옳고 그름 없이 그냥 사람으로써 그들의 권리라고 볼 수 있다. 현실 속에서 모두가 평등하면 좋겠지만 실제론 빈부격차가 존재하고 어려움과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을 '엘리트주의'나 '선민 사상'으로 비판한다면 실제로 기여하려는 마음을 위축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드라마 동화 속의 상류층 선행은 그냥 좋은 일이라 넘어가고, 실제 상황에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위선이라고 느낄 수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일정 부분 비판은 타당할 수 있으나, 이 비판이 지나치게 엄격해지면 오히려 자발적인 기여마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특히 상대방에게 강요가 아닌 자발적으로 돕는 것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모든 이를 완벽하게 공평하게 도울 수 없지만, 선행을 베푸는 것에 엄격하게 비판한다면 사회의 기부 문화와 나눔 문화 등이 저해될 수 있고 이것이 큰 사회적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4. 한국에서

나 고경명은 진실된 마음의 노인이며 백발의 하찮은 선비로서, 한밤중에 닭소리를 듣고 수많은 고난을 견딜 수 없어 중류의 노를 치고 외로운 충성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이는 한갓 견마가 주인을 그리워하는 정성을 품었을 뿐이요, 모기가 태산을 짊어지는 미약한 힘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향할 것이니,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군중에게 맹세하노라.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들이 천둥이 울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하며, 수레를 뛰어넘고 관문을 뛰어넘을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비처럼 모이니 이는 절대로 강박해서 응하거나 억지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신하로서의 충성된 마음이 지극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다. 위급존망의 날에 처하여 감히 하찮은 몸을 아끼겠는가. 처음부터 의병이라 칭한 이상 직분에도 매이지 않으며 병졸은 곧은 것으로서 장렬함을 삼았으니 강하고 약함을 따질 것도 없다. 여러 사람이 모여 의논을 하지 않고도 그 뜻이 같았으며 원근의 양반과 백성들은 소문을 듣고 일제히 분발하였다.
아! 우리 열읍 수령과 각 처의 사민(士民)들아! 충심이 어찌 임금을 잊을 것이며 의리로서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니, 혹은 무기를 빌려 주고 군량을 도우며, 혹은 말을 달려 전장에서 앞장서고, 또 혹은 분연히 쟁기를 던지고 밭두둑에서 일어나리라. 제 힘이 미치는 데까지 오직 의로 돌아가서 능히 임금을 위해 난을 막는 자가 있다면 그와 더불어 행동하기를 원한다.
-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의 격문. 성리학적 근왕사상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잘 보여준다. 고경명은 과거에 급제하여 정3품 통정대부까지 오른 골수 양반이다. 전쟁 발발 시점에서는 이미 파직되었던데다 노년기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수 격문을 쓰고 의병을 모아 일본군에 맞서다 전사했다. 선조실록 81권, 선조 29년 10월 21일 갑신 3번째 기사에 사관이 달아놓은 각주에 따르면 그의 격문은 전시체제하에서 모범을 보인 사대부와 신민의 태도를 잘 보여준 명문으로 인정받아, 전쟁 후반기까지 여러 곳에서 인용되며 영향을 떨쳤다고 한다. 출처: 제봉선생집 권7, 정기록, 마상격문

한국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지 않는 상류층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제강점기, 6.25 전쟁 5.16 군사정변 후 군사 독재를 겪는 등 혼란스러운 근현대사를 거친 한국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대부분 흙수저에서 시작한 특권층과 부와 권력을 합법적으로 세습한 금수저들의 사회적 위치에 걸맞은 책임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이 그 원인으로 꼽힌다.

이러한 의견이 나쁜 것을 모두 일제의 탓으로 돌려 면피하는 것이고, 애초에 조선시대 유교 이념 자체부터 문제라고 보는 시선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유학의 이념은 오히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중국과 조선 등 유교 사회에서 상위 계층을 사대부, 군주의 지향점을 군자라고 부르는 까닭은 적어도 원론적으로 이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들과 온전한 의미의 양반 사대부들은 경연과 죽을 때까지 하는 공부 및 수양을 통해 자신들이 먼저 유교의 사서오경을 깨우치고 성리학적으로 심성을 맑게 닦아서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 그에 따라 백성들을 교화할 자격을 얻는 것으로 생각했다.[17] 향약만 봐도 조선의 지배계층이 얼마나 피지배계층을 의식했는지 알 수 있다. 조선 사회를 양천제 위주로 보는 학자들은 양반 역시 양인이므로 적어도 15세기에서 16세기 초반까지는 양반들이 양인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다고 보고 있다. 병역비리나 면제악용 등 기피현상을 보여 비판받는 대한민국의 상류층과는 대조적이게도 당시 조선 고급 관료들의 자제들 중 일부는 특수군의 일반병[18]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또한 역사적으로 봤을 때 국란기에 전 재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하거나 환란기 정세에 뛰어드는 이들은 대부분 지역 유지나 양반층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그러하였으며[19], 구한말 최익현 등 의병장들도 대부분이 이름난 양반 실력가들이었다. 우당 이회영 일가는 대대로 정승, 판서를 지낸 명문이자 당대 최고의 부잣집이었으나 일제에 국권이 피탈되자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망명한 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독립운동을 하던 6형제 중 다섯이 아사, 병사, 옥사 등으로 사망하였으며, 광복 후 형제 중 이시영만이 살아서 귀국하여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꼭 프랑스 혁명 직전의 프랑스 귀족들 같은 막장 사례와 비교하지 않아도, 조선의 지배층은 동시기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사회적인 책임의식을 가진 편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한 의식의 기반이 바로 유학에서 지향하는 엘리트주의적 모범이기에 "유교적 전통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500년간 조선 사회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항상 잘 지켰느냐 여부는 전혀 별개의 얘기지만 표면적인 이념의 성격은 그러했다.

영국 귀족의 전쟁 수행과 같은 상무정신을 기반으로 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한국사에서도 동일하게 있었다. 신라가 바로 그것으로, 삼국사기 열전들을 보면 삼국시대 신라 귀족층은 대대적으로 전투에 참여해 수많은 희생을 낳았으며, 화랑도의 임전무퇴에서 알 수 있듯이 전장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 권장되는 일이었고, 실제로 수많은 신라 귀족층이 전투에 투신해 죽었다. 김유신 본인 역시도 젊은 시절 고구려와의 낭비성 전투에서 자살 돌격에 가까운 작전을 수행한 적이 있었고, 나이가 70에 달한 시기에도 젊은 장수들 대신 고구려 수도 앞까지 접근하는 위험한 작전을 자원해 나서기도 했다. 신라 문화에서 귀족층은 모범을 보여야 했기에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이 당군과의 전투에서 살아 돌아오자[20]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아들을 참할 것을 청했고 의절했으며, 문무왕이 죄를 면하게 하였으나 끝끝내 용서하지 않아 김유신 사후 매소성 전투에서 김원술이 치욕을 되갚았음에도 김유신의 부인이자 김원술의 어머니 또한 끝내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기에 김원술은 관직을 버리고 세상을 비관하며 살았을 정도였다. 이렇게 귀족층이 병사보다 먼저 나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신라의 특기할 만한 사회 분위기는 역사학자들의 신라의 삼국통일의 원동력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바람직한 것은 둘째치더라도, 신라 장군 아들이 황산벌에서 사기를 올리기 위해 죽은 사례들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할 만하다. 그리고 어느 성웅께서도 모두가 질 것이라고 생각한 바다에서 대장선에 타서 직접 전투하며 적들을 격퇴한 바 있다.

사회 상류층이 국란이나 전란이었을 때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은 아니었다. 유명한 경주 최 부자집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평시에도 고귀한 의무와 덕행을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먼저 스스로 실천한 가문은 적지 않았다. 임술농민봉기 동학 농민 운동 등 사회가 혼란한 시기에도 이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양반들의 저택들은 농민군이나 심지어 초적들까지도 그들의 덕행을 알았기 때문에 보호했고[21] 오늘날까지 몇몇 유서 깊은 종갓집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근현대에도 기득권층 중에서도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유일한 박사, 김용환, 언급한 이회영이나 전형필처럼 훌륭한 인물도 있고, 최근에야 선행들이 알려진 함태호 명예회장도 있다. 백범 김구의 자손들 역시 대대로 대한민국 공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다. 언급한 최부자집 가문의 최준 선생도 가문의 거대한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었으며, 광복 후에도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22]을 세워 민족의 교육에 기여하였다.

따라서 서양 중심 또는 현대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상과 세세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한국 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대중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하므로 성급한 일반화는 삼가야 할 것이다.

물론 과거와 달리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이 일어났을 때 기부된 금붙이들을 처리하겠다고 나섰던 대기업 및 재벌들이라는 반례는 있다. 당시 형편이 어려웠던 이들조차 결혼반지나 돌반지 등 그야말로 평생 가져가야 할 보물이나 가보들마저 앞장서서 기부했는데, 정작 이 보물들을 처리하겠다고 나선 대기업 및 재벌들은 이 기부 물품들을 해외에 저렴하게 팔아버리고 바로 비싸게 구매하는 방식으로 부가세 포탈에 이용했다. 당연하지만 안 그래도 외화가 부족해서 파산이나 다름없었던 당시 상황을 더 악화시키면서까지 자기 배를 불리는 행위였으며, 까놓고 말해 나라 팔아먹는 짓이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라 그냥 당연히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선인 법적 의무도 대놓고 어기는 것이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안 지킨 게 아니라 그냥 범죄다.

5. 이면

상류층 가운데 사회적 의무를 지키는 경우도 있지만, 아래 몇 사례를 보면 비도덕적인 행동을 보이는 경우도 자주 확인할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유럽 왕실이 정말 모범적인 엘리트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기대를 하는데 역시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걸 보여준다.

엘리자베스 2세는 철면피스럽게 빈민기금에 궁전 난방할 비용을 달라고 징징댄 사실이 폭로되었고, 웨일스 공 윌리엄은 집 수리에 450만 파운드(한화로 78억 원)를 써서 비난을 받고 구설수에 올랐다. #

후안 카를로스 1세 국민들을 등쳐먹고 애인이랑 코끼리 사냥을 하다가 엉덩이뼈가 부러졌다는 사실이 폭로되어 국민들의 비난을 받고 결국 퇴위해야 했다. 후임으로 즉위한 현 국왕 펠리페 6세의 매형은 수뢰와 횡령 혐의로 구속되었다. #

스웨덴 칼 16세 구스타프 문란한 성생활로 인해 곤욕을 치렀다. 이 문제는 후계자인 왕자들도 마찬가지라 크나큰 스캔들 거리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전 여왕 베아트릭스 히틀러유겐트 단원이었던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와 결혼해서 네덜란드인들의 엄청난 분노를 샀다가 빌럼 알렉산더르를 낳고 나서야 여론이 해소되었다. 1980년에는 율리아나 여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대관식 준비 겸 초호화로 궁전을 개축하려고 했다가 집 없는 암스테르담 시민들의 분노와 폭동을 유발하기도 했다. # 현 국왕의 왕비인 막시마 소레기에타 아르헨티나에서 독재자에게 아부했던 호르헤 소레기에타가 아버지라서 하마터면 네덜란드-아르헨티나 간 관계가 험악해질 뻔했고, 네덜란드 내에서조차 비판하는 여론이 있다.

사실 자세히 보면 혼란기에 사고 친 왕족들도 많다. 국왕 경력이 있던 영국의 에드워드 8세 나치적인 성향이 있어 2차 대전 기간 동안 바하마 총독으로 쫓겨났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왕족들은 전쟁을 일으키는 데 동조했고, 전쟁이 패전으로 끝나자 다시는 왕좌에 복귀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유럽의 왕족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잘 실천한 게 아니라 비교적 잘 실천한 왕족만이 살아남은 것이며, 아무리 이전까지 잘했다고 해도 국민 사정도 나쁜데 깽판을 쳤다가 왕실의 위상과 존재가 위기에 처하는 것은 스페인의 예로만 봐도 분명하다. 영국의 예를 봐도 분명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고위층이 가진 도덕적 의식이 선행된 게 아니라 고위층들이 시대의 변화에 맞춰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고, 그것이 의무화되어 도덕적 의식으로 정착한 사례에 더 가깝다. 한 마디로 적당히 "우리가 잘해주면 쟤네들이 우리를 위협하진 않겠지"가 기본 사상이다. 그리고 애초에 왕족은 병역 의무가 주어진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닌 각종 의전에 대한 급부다.

이처럼 실제적인 상황과 체감하는 상황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 기자들로 인해 일단 논란이 생기면 충분한 사실 확인 없이 기사가 쓰여지고 점점 부풀려지고 확산되지만, 정정 보도는 잘 하지 않고 대중의 뇌리에 남지도 않는 반면 선행에 관한 기사는 별로 쓰이지 않고 이슈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해외의 사례와 비교하는 경우 더욱 그러하다. 국내에 들어오는 상당수의 해외 기사는 독자 취재보다는 그 국가의 기사에서도 특히 화제가 되는 기사를 그대로 베껴서 번역하거나 바탕으로 쓰여지는데 한국에까지 전달될 정도로 이슈가 된 선행 관련 기사는 그 나라에서도 드물기 때문에 화제가 된 것이고, 한국애서도 조회수가 높게 나오니 기사로 쓰여진 것이다.

반면 논란이 되는 해외 기사는 한국에서 기사를 써도 비교적 화제가 되지 않으니 실제로 일어난 사건 대비 한국까지 알려지는 비율이 선행 관련 기사보다 낮다. 실제로 한국발의 그런 선행류 기사들, 예를 들면 김영란법 같은 소식이 중국에 들어가자 중국 네티즌들은 한국을 본받자는 둥 우리와 똑같은 반응을 이어갔다. # 100번의 성공보다는 1번의 실패가, 100번의 실패보다는 1번의 성공이 기억에 남고 회자되는 것과 같은 선택적 의식이다.

해외 역시 선행과 악행의 상대치가 국내와 비슷하다 해도 나라도 많고 사람도 많으니 선행이 일어난 절대치는 국내보다 많을 수밖에 없는데, 어느 특정 국가의 선행이 어느 정도라고 인식하고 기억하기보다는 막연히 뭉뚱그려서 해외에는 선행이 많이 일어난다고 여기게 된다. 따라서 해외 뉴스를 보면 실제보다 과장되게 인식해 살기 좋다고 느끼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행의 문제가 아니라 기득권층의 책임의 이행 문제다. 일례로 기업 과세 등의 예를 보면 미국의 경우 워렌 버핏 등의 부자들이 부자세를 증세하자고 주장하고, 또 트럼프가 환경부담금을 부담 않겠다고 했으나 지방 자치단체, 기업들은 그래도 환경부담금을 내겠다고 발표했다.

6. 예시

6.1. 김만덕

조선 후기 제주도의 유명한 여성 거상으로, 엄밀히 말하면 천민 출신이었기에 '귀족'은 아니었으나, 상업을 통해 자수성가하여 번 돈을 사회에 기부한 케이스이다.

김만덕은 1795년 제주도에 태풍이 불어 사람들이 굶어 죽어간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재산을 제주도 관가에 기부했다. 이 소식이 정조에게도 전해지자 정조는 그녀를 일종의 명예관직인 의녀반수에 봉하고 상을 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사후 유언을 통해 양아들의 기초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제주도 빈민들에게 기부했다. 이 때문에 제주도에서는 만덕할망[23] 등으로 높여 불린다.

6.2. 광해군

왕위에 오른 후의 행적은 처참하지만[24] 세자 시절 그가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전쟁이 일어난 후 보여줬던 모습들은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자세한 것은 광해군 문서 참고. 특히 임진왜란 때 자신의 아버지 선조는 무책임하게 권한을 광해군에게 넘기고 의주로 도망가기 바빴으나 반대로 당시 나이가 18살로 젊은 나이였던 광해군이 책임감을 지고 활약하여 이후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모시고 적극 지지하는 데 큰 원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선조 자신의 이미지가 떨어지고 왕위에서 일찍 물러날 것만 같아지자 광해군을 질투하며 견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6.3. 일부 대한제국 황족

대한제국 황족 일부는 독립운동을 적극 혹은 소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흔히 이태왕으로서 호의호식했다고 알려진 고종 광무제는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에 끝까지 반대했고 헤이그 특사사건 이후 측근들을 통한 소극적인 저항보다는 연해주로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통해 직접 독립운동을 지휘하고자 다양한 시도를 했다. 익문사를 창설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안중근이 소속되었던 대한의군을 창설하고 독립운동가들에게 밀지와 내탕금을 하사하는등의 여러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다. 퇴위 이후부터 망명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7번의 망명 시도가 있었는데 비록 모두 실패하였지만, 의병 활동을 격려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순조로웠던 마지막 망명 시도에서 고종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실패하였다. 황제의 독시에 광분한 백성들은 황제의 국장에 맞춰 3•1운동을 일으켰다.

그의 아들이었던 의친왕도 비슷한 행보를 보였는데 고종보다 조금 더 대외적이었다. 그는 창씨개명도 반대, 광복되는 조국에서 평민으로 살겠다고 공언하였으며,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대한제국 황족은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되어 일본 황실에 편입된 후 왕족 대우를 받으며 호의호식하였고 일제의 군에 복무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해방 이후 황실 복권을 노리며 공작을 펼치기까지 하였으나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 이들이 대한민국에 공헌한 것이 전무하기 때문에 여론의 환영을 받을 수 없었다. 당장 같은 가문 출신의 이승만 전 대통령부터 조선왕실 극렬 반대론자였다.

6.4. 이회영 일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 명문가
우당 이회영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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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ddd> 성명 서훈 내역 비고
첫째
이건영
건국훈장 애족장 (1999)
이규룡 건국훈장 애국장 (1990) 이건영의 장남
둘째
이석영
건국훈장 애국장 (1991)
이규준 건국훈장 애족장 (2008) 이석영의 장남
셋째
이철영
건국훈장 애국장 (1991)
넷째
이회영
건국훈장 독립장 (1962)
이은숙 건국훈장 애족장 (2018) 이회영의 처
이규학 대통령표창 (1982)
건국훈장 애국장 (1990)
이회영의 차남
장해평 건국훈장 독립장 (1963) 이회영의 차녀
이규숙의 남편
이규창 건국훈장 독립장 (1968) 이회영의 3남
다섯째
이시영
(대한제국) 훈3등팔괘장 (1910)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49)
초대 부통령
이규창 건국포장 (2008) 이시영의 장남
여섯째
이호영
건국훈장 애족장 (2012)
조정구 건국훈장 애족장 (2019) 이규학의 장인
정이형 건국훈장 독립장 (1963) 이규창의 장인
신익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국민훈장 무궁화장 (1962)
매제 신재희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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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때 영의정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후손인 이회영 가문은 대대로 정승, 판서를 배출하여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고 불린 명문가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되자 전 재산[25]을 처분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만주 한인촌 건설에 이바지했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약 3,500명[26]의 독립군을 배출하였다. 여기서 배출된 독립군이 청산리 전투의 주역들이었다. 그러나 10년도 되지 않아 자금이 모두 떨어져 궁핍한 생활을 겪었고, 결국 6형제 중 5명이 광복 이전에 사망한다.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만이 광복 후 살아서 귀국할 수 있었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6.5. 유일한

상인의 아들로서 어렸을 때 미국 유학을 떠났을 정도로 넉넉한 형편으로 태어나기도 했고, 미국에서 자립하면서 고학력을 취득하고 사업가의 길에 들어서는 등 자수성가형 면모도 가진 인물이다. 고국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지기 위해 제약업을 선택하여 유한양행을 세우고, 50세의 나이에 무장독립투쟁에 뛰어들기도 했다. 광복 후에도 기업 활동을 계속하면서 세금은 빼먹지 않고 내되 정치자금은 한사코 내지 않으며 자신이 물러나고 난 뒤 자신의 가족이 회사에 남아 있으면 회사에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경영에서 물러나기 전 가족을 전부 해고하고 물러났으며, 물러난 이후에는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사후 전 재산을 사회와 교육에 기증하는 등 사회 공헌에 힘썼다.

6.6. 칼레 시민

파일:칼레1.jpg
<칼레의 시민> - 오귀스트 로댕[27][28]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예시로 꼽히는 이 일화는 백년 전쟁 시기에 배경을 두고 있다. 영국과 오랜 시간 맞서 싸우던 프랑스의 칼레 시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하자 에드워드 3세는 사절단에게 "모든 칼레 시민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에 그동안 저항한 죄를 물어 6명의 대표를 처형하겠다."는 말을 전한다. 전 시민이 살기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 6명은 누가 되어야 하는가 의견이 분분하던 가운데, 도시의 최고 부호였던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제일 먼저 자신이 죽겠다고 나섰고, 그 모습을 본 많은 칼레의 고위층이 스스로 죽음을 자청하여 그중 6명이 뽑혀 나왔다. 교수대에서 사형 당하기 직전, 이들은 오랜 세월 임신하지 못했었던 영국 왕비가 임신에 성공해 왕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요청하면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 전설은 특히 19세기의 애국주의를 고취하는 차원에서 활용되어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그 카이저에 의해 '칼레의 시민'이란 희곡으로 쓰여지기도 했으며, 칼레 시청은 조각가 로댕을 압박하여 같은 이름의 동상을 제작하게도 했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사실은 칼레의 시민 이야기의 유래가 중세 극작가 Jean Froissart의 허구에 의한 것이며, 역사적 사료 중에는 칼레의 여섯 시민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는 등 역사적 사실이 아닌 창작이라는 것이 정설이라고 한다.

칼레의 시민 이야기가 이 표현의 기원이 된 것도 아니다. 'Noblesse oblige'라는 표현은 19세기 프랑스 극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의 희곡 '골짜기의 백합(Le Lys dans la Vallee)'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 일리아스에서도 유사한 개념이 언급되는 등, 즉 고대 로마 시절부터 쭉 존재했었던 개념이 통일된 표현으로 정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7.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침몰 당시 1등실에 탑승한 부유층 중 일부는 남아서 선원들을 돕고 자리를 양보했다. 대표적으로 뉴욕의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한 백만장자인 스트라우스 부부는 남편인 이시도르가 노인이라 구명정에 탑승할 수 있었음에도 탑승을 거부하였으며 그의 부인인 아이다도 함께 남았다. 구명정에 탑승할 수 있었던 여성 상류층 승객 중 일부는 앞장서서 노를 젓기도 했으며 특히 로테스 백작부인은 높은 신분이었음에도 구조된 이후 카르파티아호의 간호하는 승무원들을 도왔으며 3등실 승객들에게도 차별없이 친절하게 대하여 주었다고 한다.

항해사들도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끝까지 배에 남았으며 자진해서 남아 순직한 6등 항해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선임 항해사가 자처하여 후임 항해사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6.8. 영국 왕실

일반적으로 영국 왕실과 귀족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9] 특히 전시에 귀족들이 자원하는 모습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아예 왕실 내부 규율에 왕실과 왕실에 속한 귀족들은 죄다 자체적으로 징병검사 후에 예외 없이 장교로 군대에 징집을 시키기로 규정되어 있다.[30][31] 이 의무는 여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귀족 자제들이 주로 가는 영국 최고 명문사학인 퍼블릭 스쿨 중 하나인 이튼 칼리지 출신으로만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5,619명이 참전해 1,157명이 전사했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4,690명이 참전해서 748명이 전사했다. #[32] 이는 유서 깊은 명문 대학교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일례로 케임브리지 대학교도 1차 대전에 13,878명의 학생/교직원이 참전하여 2,470명이 사망했다. 전쟁 동안 대학의 운영은 거의 마비됐으며 재정 상태가 안 좋아지자 1919년 공립대학으로 전환됐다. 오죽하면 대영제국의 몰락의 원인 중 하나가 이렇게 엘리트 계층이 원체 많이 죽어서라거나, 전후 작위 수여가 다른 시기보다 많았던 것이 이때 대가 끊긴 귀족 집안이 너무 많아서[33] 그 벌충용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해군사관학교 출신[34]으로 장교 출신인 찰스 3세[35]와 그의 동생인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포클랜드 전쟁 당시 헬리콥터 파일럿으로 참전했으며[36], 찰스 3세의 아들인 웨일스 공 윌리엄 육사를 나와 육해공을 모두 순시하고 공군 헬기 조종사로 복무하다가 엘리자베스 2세가 왕실 전속 부관으로 불러들였고 말썽 피우고 다니는 서식스 공작 헨리 왕자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장교로 참전했다. 물론 호위 병력으로 SAS가 줄줄이 따라다녔지만 국방부는 "부대원들이 테러리스트들의 표적이 될 수 있으므로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고 발표[37]했다고 한다.

군 복무를 위해 훈련을 받던 왕자들은 "아, 내가 옛날에 그 왕자를 발로 뻥뻥 차고 다녔지!"라고 말하고 싶었던 선임들 때문에 하나같이 괴롭힘당했다고 한다. 일례로 해군사관학교 교장이 지나가다 한쪽 구석에서 생도였던 왕자가 훌쩍거리길래 왜 우느냐고 물어보니까 '선임들한테 갈굼당해서'라고 대답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실제로 해군사관학교에 재학했던 에드워드 8세 찰스 1세의 사형장면을 재현하기 위해서 동급생들이 창문 틀에 목을 걸어놨고, 조지 6세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선배와 동기들의 괴롭힘이 심해 말더듬 증상이 심해졌다. 해먹에 묶여있어서 지나가던 교관이 구해줬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2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차량 정비 장교 보직[38]으로 돌아다닌 건 꽤 유명하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여왕은 1926년생으로 나치 독일의 영국 공격이 한창이던 1941년에는 겨우 15세였고 공주였기 때문에 당연히 실질적으로 참전했다기보다는 전시에 왕실도 대중들과 함께 고통 분담을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봐야 한다.

게다가 영국의 귀족들은 봉건제하에서 귀족들에게 부과된 병력 동원의 의무가 완전히 사라진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소(小) 윌리엄 피트가 추진한 세제 개편을 별 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바로 귀족들이 가진 부동산에서 발생한 소득에 대해 부과하는 소득세. 프랑스 혁명의 원인 중 하나가 토지 보유를 대가로 부과된 병력 동원의 의무가 사라진 귀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려는 시도가 좌절되면서 악화된 프랑스 정부의 재정 상태였고, 아시아 대륙의 귀족들이 하나같이 보유한 재산에 대해서 과세받는 것을 격렬하게 저항했다는 점에서[39] 영국 귀족들은 엄청난 결단을 한 것이다. 다만 영국 귀족들이 정말 백성을 끔찍히 아껴서 이를 실천했다기보다는 프랑스 혁명 비슷한 민중 혁명을 예방하거나, 나폴레옹의 유럽 제패 등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의 양보라고 봐야 타당하다.[40]

고인이 된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 지뢰 제거 운동 등 반전 운동에 앞장서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이 점 때문에 그녀의 죽음이 죽음의 상인이라고 불리는 무기 상인들의 테러라는 음모론이 나오기도 하였다.

6.9. 미국 상류층

비단 귀족만이 아닌 빌 게이츠 워렌 버핏 등의 부유층들도 자선사업 활동을 벌이면서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기도 한다. 미국의 상류층들은 기부를 사회적 의무이자 또 하나의 투자 수단으로 본다. 즉, "사회에서 이득을 봤으니 당연히 그 부를 돌려줘야 하며, 이는 우리 회사의 이미지를 좋게 심어주어 결과적으로 우리 회사는 더욱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철저한 비즈니스적인 마인드로 접근한다. 미국은 자선사업이 아니라 기부를 통해서 세금감면 혜택을 받는데, 그 절세율이 상당하기 때문에 미국의 부자들이 기부를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부자들이 쉽게 사회에 환원되기 힘든 세금 대신 쉽게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기부를 통해 기업 및 개인의 이미지 개선 및 인지도 상승을 꾀하고, 미국 정부는 반대급부적으로 부자들이 얻은 소득이 사회로 환원이 되니 결과적으로는 상부상조인 셈이다.

이에 대해서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 같은 해외 부자들이 거액의 기부를 하며 자선 재단을 만드는 것도 내막을 들춰보면, 세계 최고 부자였던 존 데이비슨 록펠러같은 상속세 회피를 위한 유서 깊은 탈세 방법의 일환이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겉으로는 기부하는 척하며 속으로는 그에 따른 잇속을 챙기려는 부자들의 기부법도 들통나고 있다.

다만 기부 관련 비판에선 기부가 탈세의 방법으로 악용될 수 있지만 본래 기부 자체는 세금 회피를 위한 행위가 아니고 합법적인 세액 공제를 통해 사회에 기여하도록 장려하는 제도다. 일부 사레 때문에 상류층의 모든 기부를 의심하면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킬 수 있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기부 문화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 물론 실제로 일부 사람들이 기부를 통해 세금 공제를 과도하게 받거나, 기부하지 않고 허위로 기부금을 신고하여 세금을 줄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런 행위는 적발되면 법적 제재를 받아 기부가 아닌 가짜기부로 세금을 더 추징한다. #

6.10. 미군 수뇌부

이름난 미군 장성들도 아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6.25 전쟁에 참전한 제임스 밴 플리트(미8군 사령관)의 아들도 전사했다. 제임스 밴 플리트의 아들은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인민군의 대공포에 격추당해 전사했다. 밴플리트의 아들의 사망 일화는 한국군 장성들의 일대기에서 가끔 볼 수 있는데 그야말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밴플리트는 다음날 위험이 따르는 수색 작전은 중지해달라고 의연한 태도로 말했다. 심지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둘째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는 아버지에게 "만일 포로로 잡히면 자결하겠다"면서 생떼를 써서 6.25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엘리트 장교였지만, 현직 대통령이자 2차대전 원수의 아들이 잡히면 골치 아파지니까 군 상층부에서 일부러 후방으로만 돌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상층부에서 강제한 것이므로 이를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전방이 아니더라도 후방에서 성실히 병역에 임하는 것도 의무를 다하는 일이기도 하고. 제임스 스튜어트도 전쟁에 참가하여 지옥을 경험했음에도 자기 아들을 군대에 보냈다.[41]

존 매케인의 아버지인 존 매케인 주니어[42]는 태평양사령관이었음에도 아들인 매케인이 일선 해군 파일럿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격추되어 포로가 되었다. 북베트남측은 미국에 화해의 제스처로 매케인을 먼저 석방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아버지 매케인은 이를 거절했고 아들 매케인은 몇 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며 갖은 고생을 했다.

커티스 르메이는 본인이 지휘하는 폭격기 편대가 작전에 참여할 때 모범을 보이고자 방공포에 가장 격추당하기 쉬운 선두 기체를 직접 몰고 폭격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심지어 대공사격에 피격당한 적도 있다.

윌리엄 홀시는 4성 제독임에도 전선에서 기함을 타고 함대를 지휘하였던 적이 많았는데 해전 도중 공격을 퍼붓는 일본군 전투기를 보자 장교들이 말릴 틈도 없이 함교 바깥으로 나가 "빌어먹을 쪽발이들!(fucking japs!)"이라며 욕을 퍼붓기도 했으며 아이스크림 배급 시간에 질서를 지키지 않고 새치기를 한 소위를 병들 앞에서 혼내거나, 동양계 선원에 대한 병영부조리(인종차별)를 목격했을 때 꼭지가 돌아서 한 번만 더 그러면 가해자들을 (군사재판에 올려서) 묵사발을 내버리겠다며 선언하기도 했다.

6.11. 장징궈

독재자 장제스의 아들이였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총통이 되었을 때만 해도 그는 김정일처럼 사실상 세습독재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장징궈는 독재를 포기하는 동시에 스스로 대만 계엄령을 해제하여 대만을 민주화했고, 이는 아시아 최초로 경제민주화를 추진하고, 대만 선진화의 초석을 닦았다.

6.12.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자신이 영국의 총리였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자원입대한 장남이 전장에서 사망하는 비극을 겪는다.

6.13. 오토 폰 비스마르크

프로이센 왕국의 총리였던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이 참전했다. 둘째 헤르베르트와 셋째 빌헬름이 기병장교로 참전했으며, 빌헬름은 크게 다쳤으나 살아남았다.

6.14. 노턴 1세

진짜 황제가 아니라 미국의 일반 시민인 자칭 황제지만 노턴 1세는 자기 스스로 칭한 가짜 황제임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매우 충실했다. 백인이 흑인인 자신의 노예를 채찍으로 때리려 하자 때리지 못하게 막은 후 "이자는 짐의 백성이니라!"라고 말하며 때리지 못하게 했고, 중국인들이 미국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자 주기도문을 외워가면서 추방하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43] 비록 괴짜 가짜 황제이지만 진짜 황제의 의무를 다한 셈. 이 덕에 사람들은 그가 객사했을 때 황제 호칭을 부르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7. 매체에서

7.1. 아머드 코어 시리즈

파일:acfa노블레스.jpg

ノブリス・オブリージュ

아머드 코어 4, 아머드 코어 for Answer에서 등장하는 넥스트.

로젠탈의 소수 정예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 로젠탈 내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전력이다.

어셈블리는 4,fa 두 작품에서 거의 동일하며 TYPE-HOGIRE 프레임에 3연장 레이저 캐논 EC-O307AB을 장착한 형태이다.

AC4에서는 티저 무비에 등장해 도심의 노멀들을 쓸어버리는 모습으로 활약을 했다. 본편에서는 단두대로의 행진 미션에서 오메르 사이언스 소속 링크스인 미도 아우리엘과 같이 등장하여 미션에서 주인공을 도와 싸우는데, 처참하게 밀린다. 하드 모드에서는 미션 시작 전에 이미 격파된 상황.

ACfA에서는 아르테리아 카펄스 방어에서 아군으로, 아르테리아 카펄스 공격 미션에서 적으로 등장하는데 꽤나 잘 싸워준다.[44] 실제로 오더 매치에서 붙어보면 중거리에서 라이플로 견제하다가 일정거리로 좁히면 날개 레이저포[45]와 라이플 연동사격/양 날개 레이저 사격을 하고 지근거리에서는 블레이드로 공격하는 패턴을 보여준다.

디자인은 멋있으나, 플레이어가 실전에서 사용하기에는 EN이 너무 후달린다는 단점이 있다. 제너레이터를 바꾸거나, EN 계열 튠을 해서 사용하는 게 좋다.

ACfA에서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어셈을 그대로 하면 중량초과(...)라는 난감함을 보인다. 그렇기에 미션에서 등장하면 한 쪽 날개를 떼고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나마 다행히도 1.30 이후로는 날개포가 강화되어 그럭저럭 할 만한 정도...지만 역시 쓰긴 어렵다. 날개포를 믿고 기동력을 포기하느냐, 날개포를 버리고 기동력을 얻느냐의 문제.

링크스는 AC4에서는 레온하르트, ACfA에서는 제럴드 젠들린. 링크스가 바뀜에 따라 포 앤서 버전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라이플이 다른 것으로 바뀐 상태. 포 앤서 버전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제작자는 레온하르트인데, 이때문에 fA 시점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생각됐으나 설정집에서 고인을 기리기 위해 레온하르트의 이름을 붙여놨다고 언급되면서 사망 확정. 단두대로의 행진 미션에서 레이레너드 진영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전사한 것이 공식 설정으로 보인다.

날개포의 간지와 포스와 위력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 파괴천사(破壊天使)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2009년 8월 코토부키야에서 프라모델로 5200엔에 발매되었다. 근데 하얀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날개포가 하얀색 통짜 사출로 나온 것에 많은 이들이 분개하고 있다.

8. 여담

9. 관련 문서



[1] Pierre Marc Gaston de Lévis. 1764-1830. [2] Maximes et réflexions sur différents sujets, 1808. [3]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대중의 반역>이라는 저서를 통해 우수한 소수는 어떤 탁월한 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지 않을 경우 그 삶은 무의미하다는 견해를 드러낸다. 따라서 고귀함은 요구와 의무를 통해 드러난다고 주장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적인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이를 고대 로마 시절 몰락한 세습귀족과 대비시키며 지식인의 군상으로 꼽는다. [4] 백인의 짐이라는 단어 자체에 백인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전제가 깔려있으므로 굳이 아프리카 국가들이 사용할 이유가 없다. [5]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 왕실의 2차 세계 대전 참전 [6] 족장, 추장, 영주, 기사 등. [7] 세계대전 이후 현대전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다 보니 이런 관점이 서구에서도 약해지긴 했다. [8] 유럽의 귀족, 기사계층 [9] 다이묘, 사무라이 [10] 그런데 의외로 미심쩍은 이유로 병역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사람이 워낙 많아서 돋보이기는 것이 사실이다. [11] 이러한 논리에 대한 좌파적 비판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도 이러한 지배계급의 시혜적 관점에 따른 재분배를 부르주아 사회주의라고 부르며 실질적으로 이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며 그저 지배계급이 노동자 단결을 훼손하기 위한 술책일 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근본적으로 계급에 따른 위계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지배계급이 뭘 해주겠다는 근본적으로 위계를 전제하는 논리를 좋아할 리가... [12] 영국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3] 중도보수나 기독교 보수 세력의 구호로서 흔히 쓰인다. [14] 예종석(2006년), 살림지식총서 261《노블리스 오블리주》,7쪽, 살림출판사 [15] 자부심과 명예를 지키기 위한 동기도 있지만, 비판 항목처럼 로마 시대와 중세 유럽의 귀족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 한 것은 충성심을 고취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봐야 해서 어느 한 쪽으로 보기 어려워보인다. 복합적인 사안으로 보인다. [16] 칼레의 시민은 일부 역사학자들이 과장된 이야기라고 주장하지만 과장된 것이지 사실에 기반한 것으로 여긴다. [17] 중인과 상민 및 천인들을 대할 때는 지배층으로서 떵떵거리면서 사대부 자신들이 유교 덕목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유교(특히 성리학) 위주 국가 체제를 유지할 생각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18] 고위 관료들의 자제들로 편성한 충순위, 충의위 등 부대가 오위 내에 편성되어 있었다. [19] 오늘날까지 구국의 성웅으로 칭송받는 이순신도 지체 높은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20] 이마저도 마지막에 적진에 뛰어들어 죽으려 하였으나 부하 장수들이 말고삐를 빼앗아 쥐며 말린 탓이었다. [21] 대표적으로 안중근의 아버지인 안태훈이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던 젊은 시절의 김구를 보호한 사례가 있다. 더군다나 당시 안태훈은 아들 안중근과 더불어 민병대를 이끌고 동학 농민군과 맞서던 중이었다. [22] 현재의 대구대학교와 다르다. [23] 할망은 할머니라는 뜻 외에도 제주 방언에서 여성을 칭하는 존칭으로도 쓰인다. [24]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 왕위에 오른 인조가 "조선 특유의 사대주의로 청나라한테 난리 피우다가 굴욕을 당했다" 식으로 까이면서 ‘중립외교’를 펼쳤다는 광해군이 고평가받고 있으나 즉위 후의 광해군은 편집증적인 의심과 수많은 옥사를 바탕으로 한 폭압적인 정치를 펴고 잦은 궁궐 건축으로 나라의 재정을 파탄내버린 폭군이자 암군에 불과하다. 그나마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있는 외교 부분에서조차 중립외교를 펼치려 했다는 의도와는 별개로, 그가 추진했던 외교적 정책들이 실제로 당대 조선에 유리하게 작용했는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는 형편이다. [25] 이회영의 형 이석영이 부친 이유승의 12촌 형제인 영의정 이유원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이유원의 사후 상속받은 재산을 처분하였다. 이유원은 조선 최고 부자 중 한 명으로 손꼽혔고 '임금이 있는 한양에서 사는 곳 양주(현재 경기도 남양주)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오르내렸다'고 할 정도였다. 이유원의 재산과 이회영 일가의 명동 일대의 토지 등 전재산을 급하게 처분하여 현 시세로 약 600억 원의 독립자금을 모았는데 실제 가치는 약 2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26] 1930년대 기준. [27] 왼쪽부터 차례대로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t Pierre), 장 데르(Jean d'Aire), 피에르 드 위쌍(Pierre de Wissant)과 자끄 드 위쌍(Jacques de Wissant) 형제, 쟝 드 피엔느(Jean de Fiennes), 앙드리유 당드르(Andrieus D'Andres). [28] 일반적인 위인상이 영웅적인 모습으로 미화되어 제작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인물들의 우울, 공포, 내적갈등 등 심리 묘사가 세밀하여 수작으로 평가된다. [29] 물론 그렇게 이미지메이킹하는 측면도 있다. 여론이 호의적이지 못하고 국민의 지지가 없으면 왕실이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30] 상대적으로 안전한 직책으로 배정받았다고 까는 사람도 있지만 전시에 전방이라면 장교든 보병이든 다 위험하다. 심지어 첫 전투에서 사망률이 제일 높은 계급이 바로 초임 소위라는 통계도 있다. 어느 나라든 장교가 복무기간이 더 길기 때문에 까일 정도는 아닌 듯하다. 무엇보다도 최하 직책에 있는 병사로 입대하면 그 위에 있는 사람들이 가시방석일 것이다. [31] 1차대전 당시에는 영국군에서 중, 소위 등 초급 장교 사망률이 제일 높았다. [32] 이튼 칼리지 방문 중 이 일화를 들은 파스퇴르유업 설립자 최명재가 감명 받아서 세운 학교가 바로 민족사관고등학교다. [33] 영화 킹스맨 시리즈에 나오는 단체 킹스맨이 이렇게 대가 끊긴 집안의 돈이 모여 만들어졌다는 설정이다. [34] 영국은 사관학교의 체제가 정규 4년제 대학인 한국이나 미국의 사관학교와는 좀 다르다. 최소 요구 학력이 고졸이며, 교육 기간은 10개월이다. 즉, 생도 과정이 아니라 후보생 과정이며 그렇다고 학사 학위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입학 조건에서 필수는 아니지만 대개의 생도들이 정규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 들어오고, 복무 중인 현역병들도 꽤 들어온다. [35] 불륜으로 대차게 원성을 사서 그렇지 사실 찰스도 군대도 갔다오고 자선 활동도 활발히 하는 등 왕족으로서의 다른 면모는 흠 잡을 데가 딱히 없다. [36] 당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승인을 요청하는 마거릿 대처 총리를 굉장히 불편하게 생각하며 승인을 했다고 한다. [37] 사실 영국 언론들은 왕자의 안전이나 부대원들을 위해서 이를 보도하지 않았지만 미국 언론에서 보도해 버렸다고 한다. 염병할 양키 놈들. 그놈들은 우리 편인 줄 알았는데! [38] 하지만 실제 보직은 영국군 명예사단장이었다. [39] 일례로는 흥선대원군이 양반들에게 세금을 걷기 위해서 어떤 반발을 감수했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40] 그런데 그마저도 부담하기 싫어서 나라 말아먹은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쨌든 대단한 것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이라고 마냥 폄하할 일은 아니다. [41] 종전 후 제임스 스튜어트는 미 예비 공군 준장까지 오른다. [42] 존 매케인의 본명은 존 시드니 매케인 3세다. 할아버지는 태평양 전쟁 당시 고속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이끌었으며, 종전 직후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대장으로 추서받았던 인물이다. 아버지 역시 태평양 전쟁 당시에 잠수함 함장으로 복무했고, 태평양사령관까지 올라가 베트남 전쟁을 지휘했던 인물이다. [43] 이는 당시 사회 질서와 (좋은 의미로) 상반되는데 당시 미국은 인종 차별적인 베이스가 깔려 있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매우 대단한 행동이다. [44] 어디까지나 FA의 시스템상의 이점을 꽤 많이 받은 편. [45] 놀랍게도 이걸 사용한다! 대다수 유저들은 이걸 스태빌라이저 취급하지만. [46] 비정상회담에 출연한 여러 대륙의 동서양 외국인들도 프랑스인을 포함해서 그 말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47] 높으신 분들이 세상을 걱정한다는 뜻. 중국 한정 초고가 브랜드인 삼성 심계천하 시리즈의 유래도 이 사자성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