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9:24:25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개변된 역사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등장인물
,
,
,
,
,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독일 (제3제국 → 제4제국)
2.1. 내전2.2. 2차 세계대전
2.2.1. 2차 세계대전의 시작: 양면전선2.2.2. 연합국 결성2.2.3. 독소전의 시작2.2.4. 서부 전선 종결과 첫 선거2.2.5. 소련의 항복과 동부전선의 종결2.2.6. 태평양 전쟁에 본격적 개입
2.3. 그 이후2.4. 변경된 독일군 장비
3. 오스트리아4. 체코슬로바키아5. 폴란드
5.1. 독일-폴란드 전쟁 개시와 종전5.2. 소련과의 전쟁5.3. 전후
6. 프랑스
6.1. 내부혼란과 극우파의 집권6.2. 2차 세계대전의 시작:서부전선6.3. 프랑스의 항복6.4. 전후
7. 영국8. 이탈리아9. 소련
9.1. 겨울전쟁과 소련-폴란드 전쟁 개시9.2. 독소전의 시작9.3. 독소전의 종결
10. 자유 러시아11. 자유 우크라이나12. 헝가리13. 핀란드14. 스페인15. 미국16. 네덜란드17. 벨기에18. 일본19. 유고슬라비아20. 불가리아21. 루마니아22. 중국23. 에티오피아24. 대한민국

1. 개요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 작중 개변된 역사를 정리한 문서.

2. 독일 (제3제국 → 제4제국)

본작의 명실상부한 최대 수혜국. 독일 내전을 기점으로 나치 광기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영국식 입헌군주국이 되며[1][2] 2차 대전의 승전국이 된다. 이후 유럽의 중심이 되어 발전을 거듭해나가 미국, 소련과 함께 세계 3대 강대국이 됐다.

영토는 엘자스-로트링겐( 알자스-로렌), 오이펜-말메디, 북부 슐레스비히는 수복하지 못하였으나[3] 단치히 폴란드 회랑을 포함한 서프로이센, 포젠, 상부 슐레지엔 쥐트티롤을 포함한 오스트리아[4] 주데텐란트의 영토를 획득해 결과적으로는 바이마르 공화국, 더 나아가 제2제국보다 훨씬 영토가 커졌다.

2.1. 내전

폴란드 침공 당일까진 나치 독일로서 실 역사와 같이 흘러갔으나 검은 오케스트라에 포섭된 카나리스 중장의 아프베어의 활약으로 폴란드 침공의 빌미를 만들려고한 SS를 제압한뒤 군부내에서 포섭된 반나치파 인사들이 내전을 일으킨다. 이후 검은 오케스트라는 프랑크푸르트를 접수하고 그 곳을 임시수도로 하여 신정부를 수립하며 독일은 신정부와 나치 정권으로 갈라서게 된다. 그후 포섭된 C집단군의 합세로 독일 서부의 공장지대를 점령하여 장비 부족에 허덕이지 않게 하며, 이후 포섭되었으나 아직은 합세하지 않던 만슈타인 그리고 그가 있던 8군이 신정부측으로 돌아선다. 그리고 신정부측의 디트리히 샤흐트는 나치의 강제 수용소 및 유대인 수용소의 실체를 폭로하며 그간 나치에게 탄압당하던 독일인들의 증언 등 대중을 이용한 여론전을 펼치며 나치의 괴벨스의 여론전 시도를 격파하여 민심을 신정부측으로 돌리게 한다.
이와중에 빌헬름 2세를 옹립하려는 왕당파가 프랑크푸르트 방송국을 점령하고 디트리히를 체포하려 하나 트레슈코프 중령의 도움으로 빠져나가고 역으로 시민군을 이끌고 온다. 영프의 압력으로 왕당파가 차선책에 따라 옹립한 빌헬름 3세는 주인공에게 호감이 있기에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았고, 주인공의 아버지인 얄마르 샤흐트와 디트리히 샤흐트를 각각 재상부 장관과 차관으로 임명해 비상 전시 내각을 지휘할 권한을 부여한다. 그리고 군사쿠데타의 중심인물이던 마켄젠 원수와 괴르델러 박사는 자살을 택함으로써 왕당파의 쿠데타는 삼일천하로 끝났다. 이후 디트리히와 바이츠제커 외무장관이 협상을 위해 런던으로 가 베르샤유 조약을 재이행하라는 달라디에 총리에 대해 난처하던 도중, 이탈리아가 신정부에 선전포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잠깐 협상이 유예된다. 그 틈을 타서 조카의 대부이기도 한 영국 경제계의 대표에게 로비와 함께 영국이 나치 부역 기업 중 일부를 인수하게 해주는 밀약을 제시하고 다시 협상이 재개되자 역으로 세 가지 제안을 한다.
1. 입헌군주정 아래 민주주의 선거를 위한 정부 구성 보장.

2. 독-영 해군 조약 재이행.

3. 로카르노 조약에서 보장한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선 재승인.

이에 벨기에 왕국과 영국이 동의하면서 프랑스에게 엿을 먹이고 호엔촐레른 가문 다시 왕가로 복귀한 입헌군주정을 인정받는 외교성과를 확보한다.

한편으론 미국에 거주하던 루이스 페르디난트 황태자로 하여금 로비로 민수용 석유와 트럭을 네덜란드를 통해 들여와 구입하고, 노동부 장관 쿠르트 슈마허의 지도아래 여성 노동자 안건을 통과시킨다. 더불어 노르웨이에 있던 빌리 브란트가 해외로 망명한 사민주의자, 반나치 과학자 귀환 사전 작업을 논의한다.
11월 15일 출정식 연설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프랑크푸르트 폭격 명령이 폭로되면서 루프트바페 전체가 방위군에 항복하였고, 25일부터 국가방위군과 나치간의 베를린 공방전이 벌어진다. 12월 4일 새벽, 신 총통 관저에서 에르빈 롬멜 중장이 그동안 들었던 신정부 라디오 방송을 떠올리며 결정한 끝에 히틀러와 괴벨스를 사살, 프란츠 할더와 공동 방송 이후 국방군 최고사령관 빌헬름 카이텔이 공식적으로 나치의 항복을 선언하며 내전은 막을 내린다.

2.2. 2차 세계대전

2.2.1. 2차 세계대전의 시작: 양면전선

그러나 내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폴란드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독일을 기습침공하는 원 역사와 정 반대의 일이 일어나 폴란드와 이탈리아의 양면전선에 놓이게 되지만 이탈리아 전선은 25개 사단이 빠졌음에도 발터 모델의 강력한 공세적 방어와 에르빈 폰 비츨레벤 졸전 중인 이탈리아군의 활약으로 막아내고 폴란드 전선에서도 3류 해군 정도는 제압 가능한 전함전력을 가진 국가해군이 빠르게 제해권을 장악해 월경지인 동프로이센의 보급과 증원 문제는 개전 첫날 폴란드 해군을 박살내며 해결되었으며 공군의 활약과 롬멜, 구데리안, 만슈타인 등 실제 2차 대전에서도 연합군에게 공포의 상징이던 독일 명장 올스타 라인업이 투입되어 역으로 밀어붙이기에 이르렀고 그 뒤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의 폴란드 쿠데타를 지지해 단치히 지역을 되찾는데 성공하며 폴란드를 우방으로 끌어들이며 전선을 마무리 짓는다. 그 뒤로는 이탈리아 전선을 유지하며 프랑스와 소련을 각각 영국과 경제 협력을 하거나 소련의 배신으로 침공을 당한 폴란드에 자국의 무기를 지원하는 것으로 연합해 견제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영국 공격이 시작되자 본격적으로 프랑스와의 충돌을 준비한다.

이후 아들러 작전이라는 이름의 공세 작전을 발동시켜 이탈리아군 알프스 방어선을 밤낮으로 5천기에 달하는 공군기와 포병 사격으로 두들기고, 구데리안이 이끄는 독일군은 결국 이탈리아군의 알프스 방어선을 돌파하고 베네치아까지 진격한다.

2.2.2. 연합국 결성

영국군의 남부 잉글랜드 공세 실패로 영국이 위기에 빠지고, 독일은 NKVD의 공작으로 반전여론이 많아 어려움을 겪는다. 이후 주인공의 연설과 소련의 공작 증거가 드러나면서 대소련 전쟁 여론이 강해지는 등 지원군에 대한 장애물이 사라졌고, 독일은 이탈리아 공군을 파멸시킨 루프트바페를 영국으로 파견하기로 한다. 영국에 파견된 루프트바페는 실제 역사에서 피터지게 싸웠던 RAF와 함께 싸우며 프랑스 공군을 점차 밀어내고, 독일은 정식으로 영국과 연합국을 결성한다. 중화민국도 연합국에 가입해 일본을 견제하는 건 덤.

그리고 공세 실패로 위기에 빠진 영국을 지원하기 위하여 롬멜의 별동대를 포위된 런던에 투입하기로 결정. 숙적 프랑스 해군과의 결전을 위해 비스마르크를 중심으로 라이히마리네의 주력함대가 영국 잔여 함대와 함께 영불해협으로 출항한다. 프랑스 해군은 독일 유보트의 무제한 잠수함 공격으로 적지 않은 구축함등 보조함을 서부에 투입할 수 밖에 없었으나 그럼에도 전력은 영독 연합함대보다 강하여 전투에선 신예 전함 리슐리외를 중심으로 독일 해군의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블뤼허와 영국 전함 라밀리즈를 격침시키는 등 우세를 점했고, 막 철수하려는 순간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가 돌진. 프랑스 전함 됭케르크가 격침된다.

됭케르크의 격침에 분노한 프랑스 해군 제독 라보르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비스마르크를 잡겠다고 다시 함대를 돌렸고, 독일 해군과의 근접전을 펼친다. 독일 해군은 근접전에서의 강점[5]을 잘 살려 스트라스부르에 타격을 주고 그 와중 리슐리외의 주포탑 한 기가 무력화되는 등 프랑스 해군도 점점 피해가 누적된다. 그리고 그 틈에 난입한 루프트바페의 400기에 달하는 슈투카들은 격전으로 지쳐있는 프랑스 함대를 향해 짓쳐들어오고, 공습에 스트라스부르가 격침당하고 리슐리외 역시 폭탄과 어뢰를 맞고 무력화, 이후 포격에 격침된다. 프랑스 해군은 오직 구식전함 4척과 남은 전력 일부만 남기고 철수하고, 영독 연합함대는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비록 전함 그나이제나우와 중순양함 아트미랄 히퍼, 블뤼허를 손실한 독일 해군이지만 프랑스 해군은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끝내 영불해협의 제해권을 쥔 연합군은 에르빈 롬멜 장군을 런던으로 출발시킨다.

롬멜은 자신과의 만남을 영국내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윈스턴 처칠을 무시하고 곧바로 전선으로 달려가, 꼼꼼하게 프랑스군의 배치와 취약점을 찾아냈고 드골의 명령으로 런던 포위를 풀고 후퇴하려던 프랑스군을 5천명의 기갑부대로 기습. 강력한 4호 전차로 프랑스 전차들을 유린하고 실제 역사와 똑같이 직접 지휘 차량을 타고 프랑스군들에게 항복을 요구하여 죄다 항복시켜버린다(...) 그렇게 롬멜은 고작 5천명의 기갑부대로 9만명의 프랑스군을 소멸시켜버리고 런던을 해방시킨다. 자신들의 부대원 숫자를 훨씬 넘는 수많은 프랑스군 포로들을 보고 당황하는 몽고메리와 함께 독자들도 왠 엘랑이 본토도 아니고 영국에서 벌어지냐고 당황하는건 덤.

드디어 프랑스가 보나파르트 작전을 개시. 대대적으로 벨기에를 침공하지만, 진군 과정에서 보인 여러 문제점으로 인해 오히려 벨기에의 반격 빌미를 주며 국경 부대들이 패퇴되는 등 졸전을 벌인다. 처음 자신들의 군사 통행권 요청을 거부했다가 구원을 요청한 벨기에가 짜증나는 것을 넘기더라도 프랑스의 졸전 덕분에 벨기에 함락을 전제로 했던 지크프리드 방어선을 중심으로 한 방어계획이 바뀔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탈리아가 협상을 시도하지만 여러모로 문제가 많음에 따라 유고와 이탈리아의 반파시즘 세력과의 협상을 두고 기다리기로 하면서 이탈리아에 의해 자국을 뺏긴 알바니아와 에티오피아의 망명정부에서 청한 요청을 받아들여 이들을 베를린으로 받아들인다. 더불어, 폴란드가 체급차로 무너지면서 동프로이센의 국경까지 소련군이 다가오자 이탈리아에 있던 3개 집단군 중 하나인 룬트슈테트의 집단군을 빼기로 한다.

벨기에의 요청을 받아들여 지크프리트 방어선에서 빼낸, 10만명의 기갑부대로 이루어진 발터 모델의 소방대는 벨기에 전선으로 투입되어 벨기에의 가장 위급한 방어선을 돌아다니며 프랑스군의 공세를 분쇄시켜버린다. 루프트바페 역시 영국에서 돌려져 공군 전력이 무너진 프랑스군을 손쉽게 타격한다.

내전 후 바로 전시경제로 돌아가고 쿠데타와 유대인 인식등 나치의 잔재가 여전하여 내전의 후유증을 여전히 겪고 있다. 그나마 제4제국 수뇌부가 민생경제를 신경쓰고 유고 및 미국을 통한 식량 수입 덕분에 안정적인 식량 사정과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에 국민들도 제4제국을 인정하고 있으며 유대인등 나치 시절 외국으로 나간 독일인들의 귀국도 이어지고 있다. 보수 융커 장교들도 과도한 작전 간섭을 배제하고 현장 의견을 존중한 덕분에 제4제국을 인정해 가고 있지만 폴란드 문제에서 여전히 구시대적 착오를 보이며 나치 잔당 쿠데타에 묵인 내지 암묵적 지지를 보였기에 이들의 죄를 묻는 대신 문민통제가 적극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의 아내 클라우디아의 상징성과 군대 보조인력과 노동력에 적극적으로 여성을 기용하면서 여성의 인권과 권리도 오르는 중이다. 병력동원 역시 무리한 단기전이 아닌, 추가적으로 병력이 필요함에 따라 공장생산량과 사회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시행중이다.

2.2.3. 독소전의 시작

마침내 이탈리아 전쟁을 마무리 되고 있지만, 주인공의 우려에도 소련을 과소평가하고 롬멜과 모델, 만슈타인 등 젊은 장교들의 활약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던[6] 원로 보수 장교들에 의해 독소전쟁이 일어날 조짐을 보인다. 그리고 핀란드와 폴란드의 연합국 참전을 승인하며 룬트슈테트 집단군이 소련에 공격을 하면서 결국 독소전쟁이 벌어진다.[7] 처음에는 쿨리크의 기갑부대를 손쉽게 격파하며 소련군을 비웃지만, 애초에 NKVD의 증거부터 시작해서 모든게 그저 쿨리크를 숙청하고 겸사겸사 독일군도 깊숙히 끌어들인 스탈린의 함정이라 곧 주코프가 이끄는 소련군의 공격으로 룬트슈테트 집단군 50만 명 중 15만, 전차의 50%를 잃는다. 그나마 재빠르게 동프로이센에 예비부대로 남겼던 한스 발렌틴 후베의 부대 등 10만의 병력들이 클레멘스 플렉이 지휘하는 것처럼 88mm PaK 40의 적절한 배치와 지휘관들의 탁월한 지휘 속에 방어전을 펼친다. 이후 복귀한 부대가 재편성 후 투입되었고, 총 25만 명의 사상자를 내며 인민 웨이브를 상대로 동프로이센을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이후 이탈리아 전선이 마무리되어가자 블라스코비츠 집단군만 남겨두고 보크 집단군이 본토로 이동하며, 전시내각은 룬트슈테트 집단군의 실패를 빌미로 군부의 작전을 정부 허가를 받게하는 등 문민통제를 강화한다. 이탈리아로부터 배상금 중 일부로 식량과 민간물자로 받고 유고로부터 면세혜택을 받는 등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되었으며, 프랑스와 소련과는 대치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벨기에의 요구에 따라 네덜란드군이 20만과 함께 10만을 추가로 지원하였고, 그 대가로 C집단군 사령관 비츨레벤이 서부전선군 총사령관으로서 서부 전선 내의 독일-벨기에-네덜란드 연합군을 지휘하게 된다. 독소전쟁을 이용해 프랑스가 다시 한번 아르덴에서 재공격을 가해지자 벨기에군과 네덜란드군에게 Pak40과 88mm를 지원해 방어를 맡기고, 모델의 기갑부대를 소방대에서 역습부대로 전환하여 프랑스군을 막아낸다. 그리고 지크프리트 라인에 30만을 계속 유지시켜 마지노 선의 프랑스군을 견제토록 하고 있으며, 귄터 폰 클루게가 룬트슈테트의 후임으로서 동프로이센을 담당하고 있다.

이전에 헝가리와 했던 약속을 확정하는 비밀회담을 통해 헝가리가 소련에 협력하여 루마니아의 영토를 먹는 것을 묵인하고 루마니아의 연합국 가입 거절 및 헝가리를 비공식적으로 보호하는 대가로 폴란드에 대한 군수지원을 2배로 늘리고, 독일로 수출되는 보크사이트와 석유의 면세조치 그리고 헝가리내 군수공장 80%에서 군수물자를 위탁생산을 받아낸다. 더불어 유고슬라비아에게도 이탈리아 영토 대신 루마니아 영토 일부를 잘라주며 루마니아를 못마땅하게 보던 헝가리의 지지를 얻어냄으로서 추가적인 보크사이트를 확보한다. 이에 따라 루마니아가 연합국 가입의사를 보이자 파시스트 세력인 전위조국단과 독일-폴란드 전쟁 당시 폴란드를 지원한 것을 빌미로 거절한다.

패전국인 이탈리아의 배상금과 같은 연합국인 영국의 자금 지원, 미국과 유고슬라비아와의 무역으로,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전쟁배상금 명목으로 들어오는 식료품 덕분에 내수가 회복되면서 독소전쟁 시작 당시의 피해로 흔들렸던 제 4제국의 지지도가 회복된다. 그리고 여전히 유대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않지만, 소규모의 지원금과 동부 영토에 이주시키면서 차별 인식 해소와 안전 및 생계를 보장한 덕분에 탈출한 이들 외에도 타국에서 차별받던 유대인들이 독일로 이주해 들어오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아인슈타인 박사가 귀국하는 대박이 터진 건 덤.

동부전선에서 루프트바페를 투입시켜 소련의 철도보급을 방해하고 있고, 클루게 집단군과 보크 집단군 그리고 블라스코비츠 집단군은 각각 북부 & 중부& 남부집단군으로 바뀌어 동프로이센과 바르샤바 그리고 크라쿠프에 배치된다.

내각에서는 무기 대금을 체납 중인 폴란드에게 전후 벨라루스 합병과 무기 대금 일부 삭감을 허락해주는 대가로 상부 슐레지엔을 얻으려 하고 있으며, 주인공의 설득으로 종전 후 연이율 2%에 상환기간 50년 그리고 기여도에 따라 금액 삼각을 골자로 한 독일판 랜드리스법을 폴란드에 적용한다. 덕분에 루마니아 건으로 연합국에 대한 불편한 시선을 개선하였고, 소련의 역량을 충분히 느낌에 따라 추가 동원등으로 신속히 프랑스를 정리하고자 서부에 전력을 집중시킨다.

2.2.4. 서부 전선 종결과 첫 선거

소련군이 핀란드 방면에도 집중하자 12월 24일 ~ 26일까지 프랑스에 ' 크리스마스 휴전'을 제안하면서 지크프리트 라인에 있던 20만 병력과 4호 전차들을 빼내 구데리안이 지휘하며 라인란트 지역에 매복, 모델의 10군이 미끼 공격하고 프랑스군이 반격하여 벨기에와 네덜란드군을 물리치면 유인하여 전멸시킨다는 겨울폭풍 작전을 실시한다. 크리스마스 휴전동안 빼내진 지크프리트 라인의 병력 공백을 예비군과 방위군 그리고 위장차량으로 충당하였고, 예상대로 프랑스군이 반격을 가한다. 유인하는 과정에서 독일군 6만을 포함해 연합군 15만이 희생당하지만 폭격기만 1천대에 달하는 공군의 엄호속에 20만 병력 및 1,800대의 4호 전차로 재구성된 구데리안의 부대가 아르덴을 돌파, 벨기에로 침공한 프랑스군을 포위한다. 그리고 미끼 부대였던 모델도 다시 병력을 재편성해 반격하면서 프랑스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엔진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He 177 마개조하는데 엔진 입찰에 보잉이 참가하면서 B-17과 동일 혹은 비슷한 기존에 비해 훨씬 안정적인 엔진을 장착한 HeB-177[8]을 완성시킨다.

이후 소련이 다시 공격하면서 동프로이센의 북부집단군 70만 병력과 폴란드에 있는 150만 병력을 동원해 폴란드군과 연합하여 방어를 하는 중이고 새로 개발된 MP40이 보급되었지만 적군이 너무 많아 30만의 사상자를 낸다. 한편 항복한 프랑스와의 평화협상을 위한 논의 과정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정식 폐기와 배상금 그리고 알자스 로렌을 요구하고, 아프리카 식민지로 에리트레아를 확보해 에티오피아에 매각하기로 영국과 합의한다.

1941년 3월 10일에 공식 선거가 실시되며, 여론조사에서는 각각 기민당 45% 사민당 26%, 자민당 21% 기타 8%로 나와 기민당의 승리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주인공이 선거 당일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의 롬멜 인터뷰를 통해 기민당의 국방부 장관 후보였던 할더의 쿠데타 당시의 행적을 폭로시킨다. 그 결과 기민당이 타격을 입어 총 582석 중 기민당 202석, 자민당 177석, 사민당 145석, 기민당의 자매당인 기민련 26석, 나머지 군소정당이 32석을 가며 자민당-사민당 연립내각이 들어섰고 3월 17일에 전시내각 시절 복원된 국회의사당에서 개회식이 열린다. 그렇게 열린 의회에서 주인공의 전략으로 피해를 본 기민당 뿐만 아니라 사민당등 모든 정당의 의원들이 선거 3일전부터 어떠한 선거 활동도 금지하는 선거 개정법을 가장 먼저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2.2.5. 소련의 항복과 동부전선의 종결

서부전선을 먼저 정리하느라 폴란드에게 맡겨놓았던 동부전선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소련군에게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한다. 만슈타인이 독일의 유기적인 기동전 능력과 소련에 비해 우위인 통신을 무기로 주공없이 기갑집단군을 각 공세 부대로 분산배치하고 각자 소련군을 격파한 후 다시 합류해 하나의 공세선을 이루는 것을 골자로 하여 해방 작전을 실행한다. 주코프는 독일 부대에 농락당해 없는 주공 부대를 찾으려다가 역공세에 당해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고 독일은 우크라이나 서부지역과 벨라루스를 확보한다. 독일의 공세로 돌아섰지만 압도적인 병력을 자랑하는 소련에 비해 수적으로는 열세일 수밖에 없었고 진격을 줄이고 방어전과 심리전을 펼치면서 소련군을 동요시켜서 소련군이 공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간다. 그 후 벨라루스 민스크를 점령하러 공격하는 소련군의 허리를 잘라서 200만의 소련군을 고립시켰고 그 중 중장비는 전부 잃어버리고 160만명이 피해를 보고 40만명만이 맨몸으로 겨우 탈출하면서 소련의 피해는 더 커졌다.

일본이 동남아를 공격하면서 연합국의 아시아 식민지를 유린하고 다니자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시아 전선으로 유보트 잠수함대를 파병하고는 통상파괴전으로 일본의 수송선단을 박살내 일본이 자원 수송을 못하게 하고 일본의 상륙작전을 방해한다. 해군 항공대로는 일본의 주의를 끌기 위해 기습공격을 하면서 루델이 ' 도라 도라 도라'라고 조롱하여 일본의 약을 살살 올리고 있다.

연재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드디어 소련과의 최종결전인 쿠르스크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그 동안 쌓아온 외교적 노력과 전후 처리과정을 통해 폴란드,[9] 핀란드,[10] 프랑스,[11] 미국 의용군,[12] 자유 러시아군,[13] 자유 우크라이나군[14]들이 대소련전 연합군으로 참전하게 되었고 소련군의 모든 방어선을 향해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방어선이 견고하다 싶으면 바로 우회해서 옆과 뒤를 공격하여 난전을 유도, 병력과 장비의 질적 우위를 극대화한 끝에 쿠르스크 전투에서 승리한다. 소련에서는 전투의 패배가 기폭제가 되어 스탈린의 권력이 크게 무너지고 스탈린이 자살하면서 소련에게서 종전을 제의받는다.

평화협상장으로 오는 소련 서기장이 탄 수송기가 자유 러시아에 의해 격추되면서 협상이 결렬되자 의회와 군부에서는 주전 여론이 대세였지만 격추사건의 수상한 정황이 종군기자들을 통해 알려진다. 그 결과 국민들의 전쟁에 대한 여론이 매우 험악해졌고 소련이 발린 상황에서 다른 연합국들도 이미 수백만의 큰 피해를 입은 상태라 소련 중부, 동부까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무리여서 점령 영토 독립 및 할양과 자원을 배상금으로 지원받기로 하면서 종전협정을 체결하여 독소전을 마무리짓는다.

2.2.6. 태평양 전쟁에 본격적 개입

그 후에는 예전에 영국과 합의한 대로 대일전에 참전하기 위해 20만의 독일 육군에 5만의 독일공군, 그리고 우크라이나군과 폴란드, 핀란드에서 보낸 10만의 병력을 합쳐서 35만을 아시아로 파병한다. 발터 모델을 사령관으로 하는 원정군은 일본 육군을 버마에서 베트남까지 파죽지세로 몰아붙이고 이미 파견되어있던 해군은 필리핀 근해에서 영국, 미국과 함께 연함함대를 꾸려서 함대결전을 벌인다. 치열한 전투 끝에 3척 중 2척의 전함을 잃지만 일본 해군을 괴멸시킨다. 그리고는 미국, 영국과 도쿄에 전략폭격을 가해서 일본의 전쟁의지를 깎아내고 항만에 기뢰를 부설하는 동시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펼쳐서 일본의 해상물류를 마비시킨다.

통일 중국이 전후에 독일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을 우려하던 디트리히는 친일 군벌에게 독일 무기가 넘어가서 독일군이 피해를 입은 것을 계기로 장제스 대신 산서군벌 옌시산을 지원해 중국을 남북으로 분단할 계획을 세운다. 필리핀 해전 후 연합군은 분산되어서 각각 단독작전을 펼치는데 육군이 주력인 독일과 동유럽군은 중국 저장, 푸젠성에 상륙해 독일에 우세한 화력으로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뒤처리는 중국인들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밀고 올라간다. 그리고는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국민당 대신 함락시켜서 장제스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뒤이어 산서까지 올라가서 타이위안을 점령하고는 곧바로 중국공산당을 공격해 마오쩌둥을 사살한다.

빠른 종전을 위해 전쟁 수행의 구심점인 천황에 대한 참수작전을 시행해 수뇌부를 제거하려 하지만 저항이 더 격렬해질 수 있다는 영미의 반대에 천황이 벙커에 숨어도 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영국과 협력해서 지진폭탄 톨보이로 일본 연합함대의 기함 야마토급 무사시를 격침시킨다. 중국에서는 정신없이 내달리면서 타이위안, 베이징을 점령하고 만주에서 관동군을 쓸어버리면서 하얼빈을 점령하는데 여기서 731 부대 기밀문서를 노획하고 히로히토가 생체실험에 최종승인했음을 공개해서 히로히토를 악의 축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교토 폭격을 함에도 일본이 항복을 거부하자 영국의 협조를 받아서 지진폭탄[15]을 일본 황궁 방공호에 투하하여 덴노와 수뇌부를 제거한 데 성공했다. 그리고 8월 15일, 마침내 육군이 한반도를 해방시킨다.

마침내 1943년 9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태평양 전쟁이 끝나며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마닐라 회담에서 영미에게 일본 점령을 양보하고 군정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전범재판에 참여할 권리를 얻어내고 친독 성향의 옌시산 정권과 대한민국을 독립국으로 공인받는다. 그리고 저우언라이의 중국공산당, 옌시산의 북중국 연방과 비밀협정을 맺어 중국공산당과 휴전하고 공산당이 양자강과 시안까지 진출하는 것을 용인하는 대신 티베트, 위구르의 방패 역할을 하면서 중화민국을 견제할 것과 북중국에서 빨치산을 완전히 철수시킬 것을 약속받는다. 또한 향후 중국에서 미독소 3파전으로 전개될 냉전을 대비해서 중국 남북 사이에서 지렛대 역할로 한국을 활용할 계획이다.

2.3. 그 이후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독일은 나치가 망쳐 놓았던 경제를 막대한 배상금, 그리고 경제 관료들의 개혁을 통해 극복했으며 프랑스와 석탄철강 공동협약을 체결하고, 유럽 공동 핵개발 기구 이후 유럽연합을 결성하며 유럽의 주도 국가로서의 위치를 확립했으며 아프리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립한 에티오피아, 그리고 중화연방공화국과 대한민국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영향을 바탕으로 핵개발, 인공위성 발사[16] 등 전 세계에서 주도권을 잡는다. 하지만 이런 황금기가 지속되면서 독일 내에서도 우월주의가 다시 등장하여 한 때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만한 사건(사할린과 중국 사이에서 일어난 미국/소련과의 갈등)에서 주전주의가 생겨날 정도였다.[17] 이걸 막기 위해서 디트리히가 다시 정계에 압박을 넣었어야 할 정도였고, 이 사건 이후 독일은 그 기세가 한 풀 꺾였다. 독일의 황금기는 시간이 흐르고 현대 시대에 이르러 국가 간 정보 교환이 늘어날 때 막을 내렸다. 자신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미국의 경제력이 독일을 넘어 전 유럽을 합쳐야 할 수준이라는 것을 싫어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배경으로 위기감을 느낀 독일은 현 체제 유지를 위해 폴란드, 핀란드 등 혈맹과 전략적 동반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연합, 중립에 가까운 영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최대한 합리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함께 2차 세계대전 초기를 보낸 핀란드, 폴란드와는 거의 혈맹에 가까운 우방이며, 한때 적국이었던 프랑스와 거리를 두고 있는 영국과도 둥글게 보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만능인 것은 아니라 주테텐란트를 강탈해간 체코슬로바키아나 루마니아 해체 과정이 공개된 이후의 루마니아와도 불편한 관계이다. 또한 스페인 전쟁에 대해서도 모르쇠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배상금을 내는 수준에서 퉁친 것도 비판받고 있다. 하지만 뭐라고 해도 세계를 세 개로 나누는 축의 하나로 자리 잡는 합리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즉 이 세계관의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독일+ 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트렌티노알토아디제+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폴란드의 포즈난(포젠)과 그단스크(단치히), 실레시아(상부 슐레지엔)을 아우르는 대국으로 거듭났다.

2.4. 변경된 독일군 장비

원 역사의 나치독일군 장비 실태를 알고 있던 주인공의 개입 덕분에 새로 탄생한 독일 국가방위군 주력장비는 긍정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육군의 경우 효율적인 자원관리와 집중 생산을 위해 전차생산의 통폐합이 진행 되었다. 해군은 엄청난 무리수를 요구했던 전력충원계획 ' Z 계획'의 폐지 및 독-영 해군협정의 재이행을 약속함으로서 영국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고 덕분에 라이히스마리네( 국가해군)는 영국 해군의 기술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대신 H급 전함 O급 순양전함으로 보충하려던 충분한 수의 전함함대를 확보하지 못해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몇 안되던 주력함 비스마르크와 샤른호르스트가 뼈빠지게 굴러야 했지만.[18] 엔진문제로 폭격기 전력확충에 골머리를 앓던 루프트바페는 미국 보잉 기술진의 도움을 받아 전략 폭격기를 확보하게 된다.

2.4.1. 4호 전차

주인공의 개입으로 독일군 기갑부대는 1~3호 전차의 생산라인 폐쇄, 모든 역량을 4호 전차 생산에 집중하게 되었다. 특히 4호 전차 초기형이 가진 부족한 대전차 화력과 전면방호력을 해결하고자 판터처럼 전면 경사장갑을 채용한 75mm 장포신포 버전(G형)을 대량 생산, 현 독일 기갑부대의 주력전차로 활약하게 된다.

2.4.2. 5호 전차, 6호 전차

전차가 원 역사에서 어떤 문제점을 가졌는지 알고 있던 주인공은 전차 생산의 선행조건으로 엔진과 구동계의 개량을 지시했다. 특히 최악의 야전정비를 요구하는 교차식 로드휠의 수정을 강조했다.[19]
판터는 무늬만 중형전차인 중전차였던 원역사하고 다르게 진짜 중형전차로 개발되었다.[20]
연재 후반부에 드디어 판터와 티거가 실전배치가 되었으며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과 폴란드군의 주력장비로 등장한다.[21] 이후 아시아에 파견된 연합군 병력에도 투입되었으며 우선적으로 판터가 투입된 뒤 티거가 배치된다. 동남아 전선에서 일본군에게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모두 도망쳐! 강력한 중전차가 온다!![22]전차]]만 상대해도 버거웠던 일본군에게 진짜 전차를 만났을 때 충격과 공포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4.3. 레오파르트 경전차

1호 전차 2호 전차를 대체할 정찰용 경전차로 순조롭게 배치되고 있다. 에티오피아군에도 보내진다. 가볍고 험지돌파력이 좋아서 지반이 약하고 도로가 없다시피한 동남아 정글과 중국에서 요긴하게 잘 써먹고 있다. 일본군은 이 경전차의 나름 강력한(?) 장갑을 보고 중형전차라고 착각하고 있다.

2.4.4. 88mm 대공포

원 역사에서 전지전능한 위력을 발휘했던 88mm Flak의 능력을 알고 있던 주인공의 노력으로 88mm Flak은 스페인 내전때부터 다목적 포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특히 주인공은 스페인 내전 때 88mm Flak를 훨씬 일찍 개량해 대전차방어선을 구축하여스페인 공화국 최정예인 11사단 기갑부대의 BT-5, T-26 등 물장갑 경전차 부대를 상대로 일방적인 학살 수준으로 활약하며 주목받게 되고 그대로 2차대전 전선에서도 요긴하게 쓰인다. 별명은 주인공의 이름을 빌린 '샤흐트 샤흐트 포'[23]

2.4.5. 자주포의 도입

기존에도 자주포가 있긴 했지만, 2호 전차의 차체를 바탕으로 만든 탓에 화력에 한계가 있고, 생산 라인을 4호 전차로 다 통합해서 추가 생산도 여의치 않아, 디트리히의 제안으로 아예 4호 전차의 차체에 15cm 중포를 올려 새로 만들었다. 독일 기갑군의 화력을 담당하는 중요한 포지션이며, 특히 첫 데뷔였던 이탈리아 전선에서 엄청난 화력전을 펼쳐 이탈리아군 방어선을 가루로 만들어버렸다.[24] 별명은 자유를 뜻하는 프라이하이트 자주포.(만슈타인 왈 하늘에서 자유가 쏟아진다...)

2.4.6. Hs 123 급강하폭격기

Ju 87의 등장으로 빠르게 자취를 감춘 원 역사와 달리, 주인공의 개입으로 Ju 87과 병행생산하여 지상군의 CAS를 담당하게 되었다. 사실 시대에 뒤떨어진 복엽기여서 진작에 도태 되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원 역사와는 다른 독일공군의 미칠듯한 제공권 장악력 덕분에, 마치 현대의 A-10처럼 전쟁 말기까지 활약한다.

2.4.7. 전략 폭격기 도입

엔진문제로 골머리를 썩던 He 177 폭격기의 엔진을 보잉에서 제공한 미국제 고출력 엔진으로 교체해 개조한 6인승 전략폭격기를 개발했다.[25] 보잉의 기술이 들어간 만큼 이름 또한 보잉의 B가 더해진 HeB 177로 개명되었다. 연합군의 대 소련 공세인 '해방'작전에서 리미트가 해제된 리히트호펜 공군참모총장에 의해 소련군을 소이탄으로 신나게 불태워 버렸다.
독소전이 끝나고는 차세대 폭격기로 보잉의 제트엔진을 장착한 HeB 299를 도입해서 역시나 리히트호펜이 일본 도쿄에 소이탄을 퍼부으면서 맹활약 중이다.

2.4.8. Me 262

독일공군의 차기 전투기이자 세계최초로 실전배치 될 Me 262 Schwalbe 제트전투기. 연재 후반부 베를린 루프트바페 공군기지에서 첫 시범비행을 하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시범비행을 직접 맡은 아돌프 갈란트의 평가는 'Bf109 5대를 줘도 이놈을 택할 것이며 마치 천사가 등 뒤를 밀어준 기분' 이라 했다.[26] 본역사와 달리 사사건건 간섭했던 히틀러와 괴링이 제거되었을 뿐만 아니라, 최상의 전시공급체제가 운영중인 제4제국 루프트바페인 만큼 Me 262는 별 다른 문제 없이 운영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소련군과의 최종결전인 쿠르스크 전투에서 아돌프 갈란트의 Me262가 소련공군의 에이스 이반 코제두프의 Yak-1을 격추시키며 전선에 등장하게 되었다. 태평양 전선에서는 필리핀 해전에서 일본 함재기를 제대로 농락했다.

2.4.9.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원역사에서 3번함 아트미랄 그라프슈페가 몬테비데오에서 자침한 걸로 유명한 이 함선들은 능력의 한계로 인해 발트 해에서 지상포격지원만 하고 전후에 전부 에티오피아에게 판매되었다. 에티오피아 입장에서는 많이 얇은 장갑만 빼면 11인치(283mm) 함포를 장착한 제대로 된 군함이었고 벨기에와의 전쟁에서 벨기에령 콩고 항구를 봉쇄하며 벨기에의 증원군을 막는데 요긴하게 쓰이면서 원역사보다 높은 평가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에티오피아에게 매각되면서 함명 또한 암하라 언어로 그와데냐(친구)와 네체네티(자유) 그리고 이쿨리(평등)로 바뀌었다.

2.4.10.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영불해협에서의 펼처진 독-영 연합해군 vs 프랑스해군 교전에서 그나이제나우가 격침되고 샤른호르스트는 무리한 근접전으로 11인치 함포가 모조리 박살나 수리과정에서 노획한 프랑스 전함의 4연장 함포( 리슐리외급 3번함, 4번함에 사용예정이던)를 탑재하여 알자스급 전함에 준하는 15인치급의 화력을 확보하게 된다.[27]
샤른호르스트는 일본 해군과의 결전에서 나가토에게 유폭되어 격침된다.

2.4.11. 비스마르크급 전함

영국 해군과의 기술합작으로 1번함 비스마르크와 2번함 티르피츠의 성능이 개량되었다. 원역사에서 단점으로 지적받던 갑판장갑 성능이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고, 영국제 레이더를 장착하여 탐지능력과 사격통제능력이 향상되었다. 엄밀하겐 영독 해군조약을 위반한 함선이지만, 영국 기술자들에게 덩치만 큰 놈이라는 게 알려지며 영독 간 조율을 통해 신생 독일 해군의 보유가 유지되었다. 영불해협에서의 펼처진 독-영 연합해군 vs 프랑스해군 교전에서 무리한 근접전으로 주포가 모조리 박살난 비스마르크 전함은 수리과정에서 노획한 프랑스 전함의 4연장 함포( 리슐리외급 3번함, 4번함에 사용예정이던)의 포신을 장착한 2연장 함포를 탑재, 화력이 약 2배로 강화되었다. 수리가 완료된 1번함 비스마르크는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과 함께 아시아 전선으로 파견되었으며, 2번함 티르피츠는 소련 발트함대에 견재하기 위해 크론시타트 항구를 봉쇄 중이다.[28]
대소전 종전 이후 비스마르크는 이어진 일본 해군과의 태평양 결전에서 나가토급 전함과 난타전을 벌이다가 장렬하게 격침되고, 티르피츠는 발트해에 주둔하고 있던 그대로 무사히 종전을 맞는다. 이쪽 역사에선 미주리처럼 기념함으로 보존되지 않았을까 싶다.

2.4.12. 그라프 체펠린급 항공모함

괴링의 꼬장 때문에 미완성으로 끝난 원 역사와 달리, 주인공의 개입 덕분에 아직 사고뭉치인 신참 파일럿들로 그라프 체펠린급 항공모함은 작전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쓸모없는 근중거리 난타전용 함포들은 철거되었고, 영국해군의 도움을 받아 항공기 운용에 최적화 되도록 개장되었다. 탑재기는 Bf109 함상전투기, Ju87 급강하폭격기, Ar200 뇌격기로 구성되었다. 영국해군의 요청에 따라 그라프체펠린은 전함 비스마르크와 함께 항모전단을 구성하여 아시아 전선에 파견되어 맹활약중이다. 그라프 체펠린의 함재기 수용량의 한계를 독일 측도 인식하고 있어서, 전후에 제트기를 탑재할 수 있는 칸즐러급[29] 항공모함을 건조했다.

2.4.13. 21형 유보트

독일해군의 차기 주력 잠수함으로 등장하며 수중항행에 최적화된 설계와 선내에 에어컨이 설치되는 등 내부 거주성이 대폭 개선된 점이 특징이다. 영국 해군의 요청에 따라 되니츠 제독의 지휘하의 유보트 전단은 필리핀으로 파견되어 일본 해군의 병력수송선과 해상보급로를 박살내고 있는 중이다.[30]

2.4.14. R1 탄도미사일

원역사의 V1 순항미사일의 개발을 건너뛰고 R1(Rakete 1)이란 명칭으로 실전배치된 세계최초의 탄도미사일. 첫 실전 투입시 소련 군항 크론시타트를 향해 3발을 발사했는데 운 좋게도 소련해군 전함 마라를 격침시킨다.[31] 이후, 간간히 레닌그라드에 위치한 군수공장을 타격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연재 후반부인 쿠르스크 전투에선 소련군을 향해 마치 전술탄도미사일 마냥 수십발을 쏟아부으며 소련 북부군을 공격하던 드골의 프랑스 기갑부대를 지원한다.

3.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말에 있었던 안슐루스 때만 해도 원 역사처럼 나치를 열렬히 환영하였으나 내전이 발발하자 신정부에 선전포고하는 대가로 티롤 주를 떼어준다는 히틀러의 협약과 이탈로 발보 원수의 합병 선언이 알려지면서 카를 에글제어가 이끄는 국경수비대가 이탈리아군을 패퇴시킨다. 이후 발보를 대체한 그라치아니 원수가 대규모 공습을 강행해 인스브루크를 비롯한 티롤 주가 파괴되고 폭격 와중에 오스트리아에 내려와 있던 빌헬름 황자가 전사하였다.[32]

이에 나치의 통제 하에 있던 오스트리아 동부에서 민족주의가 폭발하여 폭동이 일어나 자이스잉크바르트를 비롯한 주요 나치 인사들은 주민들한테 끌려나와 맞아 죽게 된다. 레오폴드 휘글 대표는 종전 후 독일 잔류에 대한 찬반 투표 허락을 조건으로 오스트리아 전역을 신정부에 가담시켰고 이탈리아와의 종전[33] 이후에 독일 잔류에 대해 국민투표를 하여 71%의 찬성으로 독일에 잔류를 선언, 정식으로 독일 4제국에 편입된다.

4. 체코슬로바키아

원역사대로 체코슬로바키아 제2공화국 말에 있었던 뮌헨 협정이 채결된 후 주데텐란트와 체코지역은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으로서 독일에 합병당하며 슬로바키아 지역에는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라는 괴뢰정부가 세워진다.

이후 독일에 신정부가 들어섰고 신정부는 즉각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고 동시에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에 폭넓은 자치를 실시한다. 영국, 프랑스의 압박 때문에 괴뢰국 입장을 청산할 기회를 얻고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가 체코슬로바키아 정식 정부로 인정을 받아 정통성을 잇게 되었지만 독일 입장에서는 독일 민족이 대다수인 주데텐란트를 돌려 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34] 협박과 회유를 통해[35] 주데텐란트 영토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독립을 하게 된다. 체코슬로바키아로 유지가 되긴 하지만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루테니아와 남슬로바키아를 헝가리에 뺏긴건 돌려받지 못했고 종전 후에는 독일 주도의 유럽연합에 가입하고 주데텐란트를 계속 돌려달라고 하지만 독일은 계속 무시하고 있다.

5. 폴란드

5.1. 독일-폴란드 전쟁 개시와 종전

폴란드 제2공화국의 독재자였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사후에도 여전히 독재자 없는 독재 정치가 펼쳐지며 나락으로 향하고 있다. 나치 독일이 자작극을 벌인 것에 분노하면서 동원령을 풀지 않는 등 수상한 행보를 보인다. 곧, 실질적 지배자인 리츠시미그위는 내전을 틈타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을 공격해 점령한 후 휴전 협정을 맺어 공고히 한다는 계획을 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내전이 빨리 끝나자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헝가리와 비밀 협약을 맺은 뒤 새벽에 기습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기습공격과 총력전으로 동프로이센의 상당한 지역을 점령했지만 애초에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공격을 가하며 장비부족이 일어난데다가 주인공이 외교로 시간을 끄는 사이 만슈타인의 전략과 롬멜, 구데리안 등 뛰어난 장군들의 활약으로 주력부대가 독일군에게 포위되는 등 역으로 궁지에 몰린다. 게다가 핀란드를 공격하던 소련의 주의를 끌게 되며 불가침 조약도 파기당하고 로크의 사회당이 집권한 프랑스에 의해 토사구팽당하는 등 국가 멸망 위기에 몰린다.

그러자 내부에서 개념이 박혀 있던 시코르스키가 독일과 밀약을 맺으며 소수의 병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후 리츠시미그위와 그 지지자들인 사나치아 그리고 폴란드 귀족인 세임 상원의원들을 체포하여 전범으로 독일에 인계하고, 독일에 영토 배상으로 단치히 회랑과 포젠을 내주고 폴란드는 그다니아에서의 권리와 그다니아-폴란드 본토 간 무역로를 보장받는다는 협정을 마무리하고는 소련군을 상대하게 된다.

5.2. 소련과의 전쟁

한때 러시아의 식민지로서 살았기 때문에 독일과 영국,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소련군에게 결사항전한다. 하지만 소련군 사령관이 주코프로 교체되고 T-34 KV-1이 투입되면서 여전히 암울한 상황.

주코프로 교체된 직후에 첫 대공세는 대숙청의 여파로 인해 지휘체계가 엉망인 소련의 장교진으로 인해 주코프의 역량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해 어찌어찌 막아냈지만, 7월 12일에 시작된 재공세에서 8일여만에 방어선의 핵심인 르부프가 소련의 무지막지한 포격을 동원한 공세에 함락 직전에 처하게 된다. 그래도 120만 병력이 최선을 다해 싸우면서 소련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지만, 결국 체급차를 못 이기고 50만의 사상자를 낸 뒤 바르샤바 근처까지 밀리는 등 동부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한다.

그나마 라스푸티차 덕분에 소련의 공세가 주춤한 틈을 타 30만 병력을 보충하여 총 100만의 병력으로 필사적인 저항을 이어가는 한편, 즉시 독일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처음엔 소련을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연합국 참전이 유보되었지만 소련의 독일 내 여론 공작 증거가 밝혀지면서 생긴 독일의 대소련 전쟁 여론과 소련을 과소평가한 군부의 분위기로 인해 핀란드와 함께 독일의 승인으로 연합국의 일원이 된다.

그러나 국토가 유린당하고 인력이 군으로 집중되는 등 소련과의 전쟁의 피해가 너무나 극심해서 독일에게 배상금으로 지급하던 무기 대금도 한 달을 체납하게 된다. 게다가 인력도 부족하여 여성들조차도 최전선에서 소총을 들고 싸우고 있고, 노인과 나머지 여성들도 보조인력으로 활동하는 중이다. 그나마 독일군이 공군으로 소련의 철도 보급선을 유린하고 독일 육군이 투입되어 전선을 유지시키고, 주인공이 독일판 렌드리스를 발동하면서 급박한 위기를 넘기게 된다.

이후 독일과 해방작전을 함께하여 소련이 400만을 동원해 공격을 개시하자 100만을 동원해 독일과 같이 방어전을 치르고 20만의 피해를 입으면서도 결국 시코르스키 라인의 절반 이상을 회복한다.

5.3. 전후

소련과의 종전협상 결과 벨라루스를 넘겨받고 폴란드-벨라루스 연방을 건국한다. 대신 독일에게 지불해야하는 무기대금의 일부를 할인받는 대가로 상부 슐레지엔을 넘겨주기로 한다. 그리고 무기대금을 조금 깎아서 내고 체면을 차리려고 대일전에 상징적인 규모 정도로만 파병한다.[36]

끝내 살아남는 데 성공한 폴란드는 군부 독재에서 벗어나 의회 민주주의를 재건할 수 있었다. 벨라루스와의 연방에는 다소 잡음이 있었지만 바로 옆의 소비에트 연방을 두고 서로 뭉치는데 동의했고, 폴란드 우월주의의 위험성을 안 시코르스키와 그 동지들은 벨라루스에 대해 유화책을 실시해 유럽연합의 핵심으로 성장했다. 독일과는 우주개발계획에도 협력해 우주비행사를 배출하는 쾌거를 거두었으나 최근들어서 이념 대립이 희미해지면서 벨라루스에서 분리주의가 발생하고 있다.

6. 프랑스

6.1. 내부혼란과 극우파의 집권

급진당인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제3공화국 총리로 지내고 있으며, 경제 공황과 나치 독일의 활동 그리고 프랑수아 드 라 로크가 주도하는 사회당의 활동 등으로 혼란스럽다. 독일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급진당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런던에 파견되면서 베르샤유 조약 유지를 빌미로 배상금을 받아내 경제회복을 노리고자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내전이 터진 독일을 침공하고, 독일 신정부가 영프벨 삼국에 적대 활동 의사가 없다 밝히고 프랑스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영국, 벨기에가 신정부를 지지해버리는 바람에 소득없이 귀환하고 이 탓에 달라디에는 해임, 라 로크와 사회당의 영향력이 커진다.

급진당은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폴란드/이탈리아의 독일침공으로 양면전선이 유지되다가 판도가 독일에게 넘어가자 독일을 협박, 백색평화를 요구하며 체코슬로바키아의 해방과 종전을 무조건적으로 요구하나 주인공과 독일 신정부 수뇌부가 프랑스측이 요구한 명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고 프랑스 내에서도 반전여론이 커지면서 결국 대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포기, 선거에서도 참패하면서 라 로크의 사회당이 아예 집권하게 된다.

프랑스식의 파시즘 성향의 프랑스 극우파가 정권을 차지함에 따라 영국과 독일을 대상으로 한 침략전쟁을 준비중이다. 집권한 라 로크 정권은 샤를 드골을 중용하고 급격히 프랑스군을 확장시키며 군비를 빠르게 늘린다. 그리고 전략 자원을 최대한 확보하면서 독일을 견제하고자 이탈리아 에게 샤를 B1 소뮤아 S-35등 독일 전차들보다 뛰어난 프랑스 기갑부대로 구성된 매 군단을 파견시키면서 다시 전 유럽에 전쟁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독일의 외교활동으로 미국이 이탈리아 지원을 빌미로 무전기를 비롯한 전자장비와 석유의 수출 금지를 내리고 영국이 수에즈 운하 이용 금지 및 경제 제재를 협박하며 매 군단 철수를 요구를 받게 된다.

이에 이탈리아에 있던 매 군단을 철수시키는 등 영국을 안심시킨 뒤 최대한 전략자원들을 모은다.

6.2. 2차 세계대전의 시작:서부전선

마침내 1940년 6월 24일, 영국의 스케퍼플로를 비롯한 주요 군항과 비행장을 잠수함과 뇌격기, 폭격기를 동원해 대대적으로 기습 공격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라 로크의 계략으로, 프랑스 해군은 빈 수송선을 미끼로 이용해 로열 네이비 잔존 해협 함대를 끌어냈지만 오히려 수송선 여러 척을 상실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끝내 해협 함대를 전멸시킨 프랑스군은 영국 남부에 50만의 프랑스군을 상륙시키는데 성공한다. 드골은 영국군의 저항이 거세자, 런던을 우회하기로 결정하고 버나드 로 몽고메리와의 일전을 준비한다.

그러나 몽고메리는 드골의 프랑스군에 맞서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잘 살려 프랑스군을 가로막았고, 드골의 진격은 가로막힌다. 이탈리아가 위기에 빠졌다는 보고를 들은 라 로크는 어차피 독일과의 일전은 예고되었으니 차라리 먼저 200만에 달하는 프랑스군으로 벨기에를 우회하여 독일 루르 지방을 공격하려는, 역슐리펜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문제는 상대는 2차대전의 그 막강했던 전성기 소련군을 틀어막은 방어의 사자, 발터 모델의 등장이 예고되었고, 기동전 전문 장군들은 영국 본토에 발이 묶여 제대로 된 기동전을 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 드는 상황.

이후 처칠과 몽고메리의 무리한 공세를 막아낸 드골은 잉글랜드 중부와 런던을 차단시키는데 성공하지만, 독일 제4제국 루프트바페의 개입으로 비등했던 제공권은 점차 영독 연합군에게 넘어가고, 이에 드골은 라 로크의 런던 공세 명령을 씹고 현 전선을 유지하고 있다.

영불해협에서의 결전에 프랑스 해군은 초반에는 영국 전함 라밀리즈와 독일 해군 중순양함 블뤼허를 격침시키는 등 우세를 점했고 철수하려 했으나 갑자기 비스마르크의 돌격으로 됭케르크가 격침되자 분노하여 다시 함대를 돌려 비스마르크를 격침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을 노린 루프트바페의 급강하 폭격대가 긴 해전으로 지친 프랑스 해군을 급습[37], 리슐리외와 스트라스부르가 격침되고 그 외 많은 함선들이 격침되거나 손상을 입어 프랑스 해군은 무력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50만 중 5만의 사상자를 낸 상황에서 넓어진 점령지에 따른 주둔 병력의 분산 증가와 처칠의 항전의지로 본격적인 사보타주를 시작한 시민들과 점령군 간의 갈등과 점령군의 전쟁범죄로 인해 드골은 전선을 축소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영국에 도착한 롬멜의 기갑부대가 기습을 가하면서 기존의 프랑스 전차와도 대등하게 싸울 정도로 개량된 독일 전차들에게 피해를 입으며 9만명의 병력 손실을 입는다. 롬멜이 와해된 프랑스 군에게 직접 와서 항복시키고 그걸 들은 프랑스 군은 항복하는 어이없는 상황 문제는 저거 원역사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다.

그 동안, 본토에서는 작전명 보나파르트란 이름으로 벨기에 침공이 시작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전훈과 낙후된 명령 및 지시 체계 덕분에 보안에는 성공했지만, 교통체증등 부대간의 혼란이 발생하여 진군이 늦어졌다. 덕분에, 먼저 공격을 시도했던 국경 부대는 다시 재정비한 벨기에군에게 밀려난다.

그래도 병력이 모인 후 압도적인 숫자로 벨기에군을 밀어냈고, 워털루 전투가 있던 브뤼셀 인근에서 벨기에군을 밀어 붙인다. 그러나 이내 영국에서 돌아 온 루프트바페와 차출된 모델의 기갑부대가 지원을 나오면서 패배하게 된다.

게다가 2차 수송선단 역시 유보트에게 전멸하면서 석유 비축분이 많이 떨어졌고, 사실상 해군과 공군의 연료를 전용하면 육군은 3개월치 연료가 남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의 전쟁동안 독일을 경제하기 위해 비밀 협조를 취한 소련과 본격적인 동맹을 고려중이다.

이후 독소전쟁이 벌어지며, 독일군 주력이 소련으로 향한 틈을 이용해 200만 병력과 2천대의 전차를 동원해 아르덴을 다시 공격한다. 그러나 주력이 르노 AMR-33/35등 경전차 위주에 독일제 장비로 무장한 벨기에군과 네덜란드군의 치열한 방어전 및 독일군의 역습으로 30만의 피해를 입는다. 그 와중에도 막심 베이강이 무리한 공격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 엘랑 비탈과 애국심까지 동원하여 과거 1차대전의 참호전을 재현하게 된다. 지크프리트 라인의 독일군을 견제하고자 엄청난 국방력을 동원했던 마지노선에 50만 병력을 유지하는 중이며, 결국 피해탓에 공세를 중지시킨 뒤 참호를 구축한다.

유보트에게 시달린 와중에 영국 해군 군함들이 새로 건조되거나 수리를 마치면서 모든 해상보급로가 차단당한다.이탈리아가 항복하며 모든 식민지를 영국에게 넘겨주자, 연합군 병력을 분산시키고자 FT-17 AMR-33/35로 무장한 알제리의 식민지 부대를 영국령 아프리카 식민지로 진격시키지만 에티오피아의 참전으로 궁지에 몰린다.

결국 연료를 아끼고자 연합국의 크리스마스 휴전 제안을 받아들이며, 전 국방장관인 모리스 가믈랭과 급진당을 중심으로 쿠데타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그래도 소련의 T-34 4호 전차 개량형을 목격한 뒤 S-35의 개량으로 개발되던 S-40에 장갑을 강화하고 장포신 7,5cm 주포를 장착시켜 개발하고, S-35와 함께 소방대로 편성시키는 등 독일의 전술을 연구하여 독일의 미끼 공격을 막아낸다. 라 로크는 프랑스에 유리한 분위기에서 평화 협상을 통해 어떻게든 프랑스를 유지시켜려 하지만 안 그래도 국방장관인 필리프 페탱과 총사령관 막심 베이강을 위시로 한 군부가 정부와 갈등을 벌이며 폭주하는 와중에 승리에 고무된 군부는 독일의 의도대로 170만 병력을 동원해 반격을 지시한다.

이에 라 로크는 드 골에 동조하는 소장파 장교였던 장 드라트르 드타시니을 설득시켜 그의 병력을 예비대로 남기고 가믈랭을 체포하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S-40의 신뢰성이 떨어지고 숫자도 부족한데다가 폭격기만 1천대에 이르는 루프트바페의 엄호를 받는, 20만 병력과 1,800대의 4호 전차로 이뤄진 구데리안 부대에게 포위당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결국 각각 코르트리크와 니우푸르트 근교 해안에 2군과 7군의 20만 병력 그리고 1군의30만 병력이 포위되는 등 보나파르트 작전 당시 투입된 200만 중 간신히 100만을 수습한채 모든 벨기에 영토를 내놓는다.

게다가 알제리와 레바논-시리아에서는 각각 에티오피아군과 영국군의 공격을 받았고, 영국의 넬슨급 전함들의 함포사격과 구식 독일군 무기 및 이탈리아군 노획무기로 무장한 에티오피아군에 의해 리비아의 점령지를 모두 내어준다.

그나마 영국에 있던 드골의 프랑스군은 롬멜과 몽고메리등의 연합군 공격을 방어하며 질서있게 후퇴를 하는 중이다.

결국 소련의 공세를 이용해 휴전을 체결하기로 결정하며, 라 로크와 페탱은 각자 체포되어 연금되었던 가믈랭을 죽이고 실책을 벌인 베이강을 해임시킨다.

이 와중에 독일의 여론전으로 벨기에에서의 실책이 알려지며 내부에는 반전파와 집권당 사회당 사이에서 큰 혼란이 발생하였고, 평화협정에 나오지 않으면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자 하루만에 협상장에 나타난다.

6.3. 프랑스의 항복

라 로크는 오히려 당당한 태도를 보이며 연합국 간의 이해관계와 책임의 차이를 이용해 틈을 벌리고, 자신이 전범으로 연합국에 자진 출두해서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연합국과의 종전 협상을 진행하여 이후에 있을 분쟁을 없애기 위해 유화책을 펼치는 디트리히와 의견이 맞아 추축국임에도 상당히 관대한 협상을 맺게 된다.
식민지의 경우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에 나눠서 거의 다 할양했지만 본토의 경우 알자스만 뜯겼고 알제리를 지켰다.[38] 그리고 전범국답게 비무장을 하려고 했으나 급박한 핀란드 전선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육군 한계가 10만에서 100만으로 대폭 늘어난다.

이후 조약에 따라 핀란드 전선으로 병력을 파견,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소련과의 전쟁에 참전한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병사를 버리는 것이 아닌가 염려했지만 독일 입장에서는 진짜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리 준비했던 대량의 방한물자 등도 아낌없이 돈 받고 지원하였고, 프랑스에서 전쟁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애국 채권 남발로 엉망이 된 프랑스 경제를 강제로 살려낼 겸 독일이 유령회사들을 앞세워 프랑스 군수기업들을 인수하여 공장을 가동[39], 프랑스 정부에 군수물자를 팔아 프랑스군을 무장시킨다. 그 결과, 좋은 의미의 엘랑 비탈을 바탕으로 핀란드에서 롬멜의 작전을 응용하여 소련군을 격퇴하였다.[40] 이 분투 덕분에 프랑스는 상당한 양의 배상금을 탕감받는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원역사에 비해 여러므로 나쁘게 바뀐 편이다. 내독나없에서 프랑스는 갑자기 라 로크에 의해 파시즘화되어 추축국으로 소속이 바뀌며 추축국에서 국력 면에서 보자면 일본과 쌍벽을 이루는데 추축국 중에서는 사실상 일본 다음으로 사악한 국가나 다름없이 묘사되며 전체로 봐도 일본, 소련 다음이다. 최종보스가 소련, 마무리형 보스가 일본이라면 프랑스는 중간보스인 셈. 거기에 원 역사에서 나치 독일과 연합국의 전투가 프랑스와 다른 연합국의 전투로 바뀌었던것을 보면 생체실험이나 유대인 학살을 안 했다 뿐이지 프랑스가 나치독일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독일이 연합국으로 소속이 바뀌면서 연합국에 힘이 더 크게 실리게되니 각 진영의 균형을 맞추기위해 원래 연합국 소속이었던 프랑스를 파시즘화 시켜 추축국에 속하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도 파시즘화되는 과정이 충분히 납득 가능하게 진행되어 이에 대해서는 불만은 없는 편이다. 오히려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진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입장에서는 패전국이 된 것은 물론 어느정도 감경 받았긴 하지만 막대한 양의 전쟁 배상금을 물게 되었고 몇몇 자국의 기업들이 전범기업이 되고 말았겠지만 말이다.[41]

246화에서 드디어 제대로된 T-34, 4호 전차, M4 셔먼등과 동급인 신형 전차가 등장하는데 원 역사의 완성되지 못 한 목업만 나온 G1 전차 명칭이 아닌 원 역사의 SARL42 동급인 S-40 명칭을 유지한 채 그대로 이어받아서 나온다.

6.4. 전후

이후 프랑스도 자연스럽게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의 일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며, 함께 핵무기를 개발하거나[42] 하는 모습 또한 보인다. 그리고 오히려 패배로 털린 것 때문에 군대의 제한[43] 알제리의 자치권 인정 및 각종 혜택을 통한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는데 이는 라 로크 이후 프랑스 정권을 주도하게 된 페탱의 성향[44]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그 결과 원 역사에서는 독립전쟁을 일으켰던 알제리는 프랑스의 일부로 남는 것을 선택한다. 에티오피아의 주도로 아프리카 연합이 설립되었지만 알제리인들은 페텡이 준 자치권에 만족하면서 한동안 평화를 누렸지만, 독일에 끌려가고 있는 상황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프랑스인들이 좌파를 지지하면서 좌파가 새로운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독일이 대전 당시 매수했던 프랑스의 기업들을 통해 좌파 정권을 압박했고, 과거로 회귀하려는 시도에 폭발한 알제리에서 독립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의 상황까지 갔다. 이처럼 대혼란에 빠진 프랑스에서 샤를 드 골이 정치에 진출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정권을 쥐었고, 영연방의 사례를 본받아 프랑스-알제리 간의 관계를 구축했으며 독일과의 화해와 협력을 추구하는 동시에 독일 자본에 침식당한 프랑스 기업을 되찾자는 이중적인 행보를 벌였다. 국민의 지지를 받아 결국 프랑스는 독일에 의존하던 경제 상황을 벗어났고 현재는 대외정책에서 독일과 같이 발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UN 상임이사국으로 인정받고자[45]하는 독자적인 외교 노선 역시 보여주고 있다.

7. 영국

회담장에 파견된 디트리히와 바이츠제커 외무장관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음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였고, 네빌 체임벌린은 무사히 임기를 마친 뒤 핼리팩스 자작에게 총리직을 이임한다. 핀란드가 겨울전쟁에서 승승장구함에 따라 지원을 결정하고 시코르스키의 쿠데타를 지지하며 폴란드에 군수물자를 지원하며 소련을 견제한다. 현 상황에서 독일의 전략적 우방이 되어, 프랑스가 독일을 침공하는걸 견제하면서 전형적인 2차 대전 초기 미국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운명의 6월 24일. 영국의 방패인 로열 네이비 주력함들은 일본에서 받아온 산소어뢰까지 동원한 프랑스 해군 잠수함들의 기습에 의해 스케퍼플로와 포츠머스, 플리머스 등의 항구에서 일시간 무력화되고, 기습의 혼란 속에 겨우 2척의 구식전함이 포함된 해협함대가 프랑스와의 전력차이와 패배를 알면서도 프랑스 해군 상륙부대를 막으려 나선다. 이후 벌어진 영국 해협 해전에서 압도적인 전력 차에도 불구하고 결사항전하여 프랑스 전함 덩케르크를 대파시키고 여러척의 구축함들과 프랑스 함대에 보호받던 수송선들까지 격침시키지만 해협 함대는 괴멸적 타격을 입는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이 모든 것은 라 로크의 계략이었다는 것이다. 라 로크는 영국 해협함대가 자국 상륙선단을 막으러 올 것을 예상하고 병력 없는 빈 수송선들을 일부러 프랑스 함대 뒤에 배치시켜 영국 해협함대를 유인했고, 그 유인한 해협함대를 자국 해군으로 박살낸 뒤에 진짜 병력이 탑승한 프랑스 상륙군 수송선들은 끝내 무사히 영국 본토에 발을 딛으며, 영국은 위기에 빠지게 된다.

드골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영국 남부에 발을 딛는데 성공했지만, 로열 네이비는 초반 기습의 충격에서 벗어나 프랑스 해군 잠수함들을 쫓아내고 설치된 기뢰에 수송선을 일부러 돌격시켜 기뢰를 무력화시킨 뒤, 결국 일러스트리어스, 아크 로열, 후드 등의 강력하고 빠른 기동성을 가진 H기동전단을 출격시키는데 성공하고, 이들은 프랑스 해군을 기동성으로 농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본토에서도 영국군의 항전은 계속되고, 드골은 결국 런던을 우회하기로 결정, 버나드 몽고메리와 대치하게 된다.

몽고메리가 이끄는 영국군은 매우 높은 사기로 전선이 밀려도 훌륭하게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고, H기동전단의 활약 덕분에 프랑스 공군이 프랑스 해군 함대 호위 역할도 맡게 되어 전력이 분산되는 바람에 RAF는 초반 기습의 충격에서 벗어나고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중심으로 프랑스 공군을 공격한다. 실제 역사 속의 영국 본토 항공전의 악몽이 프랑스 공군 파일럿들에게도 재현되는데, RAF 파일럿은 추락해도 주민들에게 따뜻한 환영과 보호를 받으며 기지로 돌아가는 대신, 프랑스 공군 파일럿들은 추락하면 엄청난 적개심을 가진 현지인들의 민심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게 된다.

7월 30일, 전함 5척을 동원한 이탈리아 해군 레지아 마리나가 몰타 섬 공략을 위해 나서고, 영국 지중해함대 앤드류 커닝엄 제독은 이에 항모 글로리어스,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3척의 열세인 전력으로 이에 맞선다. 커닝엄 제독의 기함 워스파이트는 23km 거리에서 비토니오 베네토를 초탄 명중시키는 활약을 보여주고 비토니오 베네토는 그대로 기관부가 당해 속도가 저하된다.
이후 벌어진 사투에서 지중해함대는 전함 버럼을 잃지만 이탈리아 전함 안드레아 도리아를 격침시킨다. 하지만 레지아 마리아는 지중해함대의 중순양함들을 전멸시키는 등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쪽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야밤에 돌파한 H기동전단은 지중해함대와의 오랜 사투로 지쳐있던 레지아 마리나를 쌩쌩한 순양전함과 항공모함(일러스트리어스)으로 공격을 퍼붓고, 레지아 마리나의 전함은 수리 중이던 리토니오 한 척을 남기고 전멸. 몰타 해전은 영국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처칠은 전쟁 참전을 망설이는 영연방 국가들을 설득하고 대영제국의 건재를 과시하기 위해 몽고메리의 주장대로 프랑스군의 방어선 후방에 공수부대를 강습시켰지만, 드골은 프랑스군 점령지 남부에 치밀한 방어선을 설치해둔 상태였고, 이들은 무방비한 영국 공수부대원들을 손쉽게 밀어낸다. 또한 영국군의 공세도 단단한 프랑스군의 방어에 막혀서 실패. 지중해로 투입된 H기동전단이 영불해협을 지켜주지 않는 사이 결과적으로 처칠의 무리한 공세는 40만 대군 중 8만명의 손실을 입는 참패로 끝난다.

결국 공세에서 많은 전차들을 잃은 영국군은 드골의 공세를 막지 못했고, 프랑스군은 브리튼 섬 중부와 런던을 차단하고, H기동전단이 지중해로 빠진 틈을 노린 프랑스 해군이 영불해협에 통상파괴 활동을 벌이며 다시 영국은 위기에 빠진다.

처칠은 씁쓸하게 영연방의 국가들에게 전후 독립을 약속하며 참전을 받아내고, 약속한 자금 지원과 소련에 대항한 공동전선 결성을 약조하며 독일과 연합국을 결성시키며 중화민국을 가입시킨다.
이후 영불해협해전에서 영독 연합해군과 함께 프랑스 해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롬멜의 독일 지원군을 받는데 성공한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점령지 주민들의 사보타주와 롬멜의 독일 부대의 반격으로 런던 포위를 풀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모든 전공을 독일이 가지고 가 버린다...

독일이 헝가리와 비밀 조약을 맺으며 루마니아를 몰락시키는 것에 불만을 가지지만,독일이 롬멜의 부대를 빼내려하자 다른 연합국처럼 헝가리의 손을 들어주며 루마니아의 연합국 가입을 거절한다.

킹 조지 5세급 전함을 새로 건조하고 손상된 함선들의 수리를 마치자 바로 투입하여 프랑스의 해상 보급로를 모두 장악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에 전쟁 배상으로 할양받은 식민지들에 프랑스 식민지군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병력 부족으로 현상유지만 하고 있는 중이다.

롬멜과 몽고메리가 갈등을 빚으면서 본토내의 프랑스군을 반격하지만 드골의 프랑스군이 질서를 유지하면서 후퇴 및 방어를 하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도 프랑스가 식민지 군을 동원해 트리폴리 등 리비아를 점령당하지만 한편으로는 레바논-시리아에 공격을 가한다.

프랑스가 거의 무너질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자 어느정도 여유가 생긴 로열 네이비는 넬슨과 로드니를 지중해에 파견하여 에티오피아군을 지원하였고 독일에게 양해를 구하여 영불해협의 방어를 맡긴 뒤 일본이 아시아 식민지에서 깽판치는 것을 막기 위해 킹 조지 5세, 프린스 오브 웨일스, 리펄스, 일러스트리어스로 구성된 기동함대를 아시아에 파견한다.

그리고 평화회담 논의에서 프랑스에게 군대 해체 및 전 식민지 포기, 브르타뉴 지방 독립, 노르망디 할양등을 보상으로 받으려 하고 있으며 독일과 협의하여 독일이 영국이 점령중인 에리트레아를 받은 뒤 에티오피아에 매각하는 것을 합의한다.

일본 해군과 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미국, 독일과 연합함대를 결성하고 필리핀 근해에서 함대결전을 벌인다. 앞에서 포격전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총 기함이었던 후드가 침몰하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자국 해군의 자존심인 전함을 잃었다는 것에 충격받고 보조함들이 일제 돌격[46]을 하여 결국에는 승리를 쟁취한다. 그리고는 미국, 독일과 함께 도쿄 대공습에 나서고 결사항전을 부르짖는 일본을 위해 지진폭탄 톨보이로 구레 군항에 배치되었던 야마토급 2번함 무사시를 격침한다.[47]

독일이 731 부대에 대한 진실을 폭로해 영국군 포로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음이 밝혀지자 국민들이 격분해 의회가 히로히토에 대한 참수작전을 승인한다. 그리고 방공호에 숨은 히로히토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톨보이에서 업그레이드된 그랜드슬램을 투하하여 방공호째로 날려서 제거한다.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후에는 규슈와 시코쿠 이남의 지역을 군정으로 신탁통치하기로 한다.

전쟁이 끝난 후 클레맨트 애틀리 내각에서 원 역사와 같이 NHS(National Health Service)를 도입해 이미 클라우디아와 사민당의 주도로 먼저 도입한 독일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의료 혜택을 제공하는 국가가 되었다.

그동안 다사다난한 논쟁과 갈등이 있었으나, 옛 식민지들을 비교적 매끄럽게 해방하고 영연방으로 편입시켜 현대까지 옛 식민지들과 깊은 유대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영연방 가입국들을 자산으로 아프리카 연합과도 준수한 외교관계를 유지하면서 독일과 미국 사이에 중도적인 외교 노선을 견지해 국제 질서에서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8. 이탈리아

국왕의 비호 아래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왕국을 장악하고 있으며, 독일 내전에서 이득을 취하려 한다. 내전에서 밀리고 있던 나치 정권에게 오스트리아의 티롤을 할양받기로 약속받고 내전에 참전하였으나 티롤의 국경 방위대[48]에게 패배하고 후퇴하는 등 이탈리아군의 전설을 찍어낸다. 이후 제 4제국은 독일 내전이 끝난 이후 전력을 폴란드에 집중하기 위해 이탈리아 전선에 발터 모델을 전선을 리모델링 하기 위해 배치한다. 그렇게 이탈리아군은 모델의 완벽한 공세적 방어 속에서 갈려나간다. 그래서 티롤을 먹기는커녕 다시 밀려나 버렸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렸는지 단단한 방어선을 구축해서 독일의 공세를 막아내기도 한다. 그 뒤로는 일본,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2차 대전에 참전하며 프랑스의 영국 본토 침공 즉시 몰타와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하기로 한다.

하지만 망명한 히믈러의 위치가 발각되고, 나치 잔당을 지원하며 시도했던 독일내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후 궁지에 몰리자 자국의 해군 활동을 빌미로 프랑스의 재 지원을 얻어낸다. 그러면서 독일의 공격 준비가 임박하여 공군력을 독일 방면으로 돌리는 등 자국 방어준비에 급급하고 해군은 제공권을 빌미로 가만히 있으면서 영국 지중해 함대를 기습할 기회를 잃는다. 이후 프랑스의 영국 본토 상륙소식을 듣고는 급하게 선전포고를 하지만 이미 지중해 함대는 방어준비가 다 된 상태라 뒷북을 친 셈이다...

그리고 마침내 독일군은 무려 5천기에 이르는 공군기들과 포병들로 이탈리아군의 방어선을 밤낮으로 맹폭하고, 결국 이탈리아군의 알프스 방어선은 구데리안이 이끄는 독일군에 돌파당해, 독일군은 이탈리아 공략의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다. 바다에서는 영국 지중해 함대 소속 항모들이 타란토 공습을 벌여 귀중한 전함 리토니오가 전열 이탈한다.

이후 몰타 공략을 위해 전함 5척을 중심으로 한 주력함대를 파견하고, 영국 지중해함대와 처절한 해전을 펼쳐 초반에는 기세에서 밀려도 점차 우세를 점하는 듯 했지만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온 영국 H기동전단의 공격에 전함 5척 전부를 잃고 결국 패배한다.

전함은 리토니오 1척만 남는 등 해군이 전멸한 상황에서 독일군의 공격으로 베네치아가 함락되고, 밀라노까지 밀리는 등 북부 핵심 도시들이 함락당하며 위기상황에 처한다.

이에 따라 국왕과 파시스트당은 자포자기한 무솔리니를 잘라내려 하고, 탄압을 받던 사민당 등 시민세력과 반파시즘 세력들이 목소리가 높이며 전쟁에 회의적인 군부 세력과 협력하면서 독일과 협상을 시도중이다.

결국 밀라노까지 함락을 당하자, 국왕 명의로 쥐트티롤 양도와 10년간 10억 마르크 배상금 지급을 조건으로 협상을 시도하려 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 권력 지키려는 국왕과의 협상 대신 반파시즘 국민해방위원회와 협의를 하여, 모든 식민지 및 쥐트티롤과 군함 상당 수를 양도하고 이탈리아 혁명기간 동안 임시적 휴전 그리고 무솔리니와 힘러, 파벨리치등 전범을 넘기는 대가로 배상금 액수를 조정하기로 합의한다.

그에 따라 독일전선에 있던 이탈리아군이 로마로 진군했고, 그 전에 반파시즘 국민해방위원회의가 봉기를 일으켜 로마를 장악한다. 이에 국왕은 왕가와 함께 로마를 탈출하여 나폴리로 이동했고, 힘러를 비롯한 이탈리아 파시스트 당원들도 도주를 한다. 무솔리니는 로마를 탈출하지 못하고 성난 군중에게 잡혀 참혹하게 죽었고 힘러도 파견된 오토 슈코르체니에게 체포된다. 도주한 국왕은 국민해방위원회가 반파시즘만 낸 것을 뒤늦게 알고는 왕정 유지 대가로 파시스트 당원들을 넘기겠다고 협상을 시도하지만, 이미 국왕의 행태에 분개한 국민해방위원회는 남이탈리아로 진군해 파시스트 당원들과 왕가를 확보한 뒤 국왕을 무솔리니 대신 독일에게 전범으로 넘기기로 한다.

이후 내전이 일어나지만, 주인공이 제안한 여론전과 함께 독일이 국왕의 밀서들을 공개하면서 군주제 폐지 여론이 퍼지고 사실상 국민해방위원회가 무혈 승리한다. 왕가를 비롯해 왕당파와 파시스트당은 나폴리가 함락되자 해외로 나가고자 했지만, 타란토로 도주한 뒤 대기하던 지중해 함대의 배신으로 전원 체포된다.

국왕의 체포 이후에 왕정 폐지에 대해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왕정 폐지 찬성에 원 역사의 찬성율인 54%를 넘어가는 70%정도의 찬성율로 왕정이 폐지되며 왕정 폐지후에 추축국에서 탈퇴한다. 이후, 에티오피아와 알바니아의 독립 인정과 독일과 영국에 쥐트티롤 및 리비아등 모든 식민지 할양, 독일에게 20년간 30억 마르크의 배상금 분납하며 일부는 식량과 민간물자로 지불, 에티오피아와 알바니아에게도 각각 3억 마르크와 1억 마르크 배상, 영국에는 전함 리토리오와 보조함의 절반을 넘기는 조건으로 연합국과 종전협정을 맺는다.

전후 공화국으로 거듭난 이탈리아에서는 배상금을 식량으로 대신하면서 경제가 차근차근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에서 유입된 식재료가 동유럽에 퍼지면서 긍정적인 효과가 일어났다. 이후에도 경제적 격차와 지역감정은 여전하지만 유럽연합 결성 후 이탈리아는 관광업을 통해 재미를 보면서 나름 살기 괜찮은 나라가 되었다.

9. 소련

9.1. 겨울전쟁과 소련-폴란드 전쟁 개시

독소불가침조약이 리벤트로프 암살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자 폴란드 대신 핀란드를 공략하기로 계획한다. 실제 역사대로 핀란드를 압박하고, 마침내 '대답은 붉은 군대가 할 것이오'라는 몰로토프의 말대로 핀란드를 상대로 기세등등하게 겨울전쟁을 일으키나 독일의 지원을 받은 핀란드군과 숙청된 소련군 장교진의 환장의 콤보로 약체 핀란드 앞에서 죽을 쑨다. 이후 폴란드가 독일의 공세에 무너지자 핀란드 방면 소련군을 돌려 폴란드를 침공하고 폴란드를 나눠먹자고 독일에 제안한다.

하지만 이미 독일은 비밀회담을 통해 시코르스키 중장의 쿠데타를 지원해 폴란드 내 쿠데타를 성공시켜 독일과 폴란드의 전쟁이 끝났다. 이번에도 독일이 폴란드에 독일제 무기를 지원하며 폴란드군을 지원하자 결사항전하는 폴란드군에 의해 야심찬 소련군의 공세는 돈좌되었다. 이후 분노한 스탈린에 의해 주코프가 총참모장이 되며 폴란드를 다시 밀어붙이나 전투마다 처참한 교환비를 내고 핵심 방어선은 끝내 뚫지 못한다. 게다가 영국과 전쟁중인 프랑스와의 비밀 협조에 따라 재공세를 준비해야 했기에, 마침내 스탈린을 향한 주코프의 '이대로 가면 죽도 밥도 안된다'라는 탄원에 굴라그 내 장교진이 복직된다.

스페인 내전에서 디트리히와 발터 모델에 원한을 품고 있던 엔리케 리스테르까지 복직시키며 장교진을 확보한 소련군은 250만 병력과 비록, 대부분이 경전차지만 T-34 KV-1이 포함된 전차 1만대의 어마어마한 병력을 준비하고는 총참모장에서 침공군 사령관이 된 게오르기 주코프의 지휘하에 총공세를 실시한다. 폴란드군의 저항으로 100만의 손실을 냈지만, 다시 병력을 보충해 350만(!)의 병력으로 밀어붙여 시코르스키 방어선을 돌파하여 바르샤바 근교까지 도달한다. 결국 체급차를 이기지 못한 폴란드를 끝까지 밀어 붙였고 동프로이센 근처까지 전선이 닿지만 라스푸티차로 인한 보급 문제 때문에 바르샤바등 폴란드 전역의 공세가 느려진다. 그러나 모든 것이 독일을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었고, 스탈린은 신임 참모총장 바실렙스키와 함께 계획을 짠다.

9.2. 독소전의 시작

베리야가 주도한 반전 공작이 디트리히의 치트급 연설로 인해 실패로 흘러가게 되고, 이에 조급해진 베리야[49]는 트로츠키 암살을 성급하게 시도하게 되어서 결국 암살 공작이 실패하고 만다. 격노한 스탈린은 베리야를 숙청하고, 이후 NKVD까지 직접 관리하게 된다.[50] 이후 이탈리아내 독일군이 동부로 오기 전 독일의 참전을 유도하고자 공작증거를 일부러 흘렸다. 그리고 라스푸티차 이전까지 최대한의 보급품들을 전방부대에 전달하며, 숙청 대상인 쿨리크의 미끼부대를 방치한채 바르샤바 공세 중단등 함정을 담당할 부대의 전력을 온전히 남겨둔다. 그리고 독일군이 함정에 걸려들자 공격을 가하고, 동프로이센까지 진격한다. 그러나 독일군의 방어전과 편중된 중공업 정책 때문에 무전기와 차량화 보병의 미비등 불균형적인 구조 탓에 50만의 피해를 입었고, 간신히 방어선을 돌파하기 직전 모든 보급품을 소모하면서 공세를 멈춘다. 게다가 군화와 의약품과 야전병원의 침대등 무리한 동원에 따른 보급품 부족도 심각해 부상병의 사망률이 50%에 달하고 있으며, 루프트바페가 제공권을 장악한 뒤 폴란드군의 사보타주를 간신히 복구한 철도망을 공격하면서 보급 수송에 차질을 빚는다.

피해 복구를 위해 소강상태에 있는 동안, 분위기 반전을 위해 트란실바니아를 확보하려는 헝가리와 협력하여 루마니아로부터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를 받으려 한다. 게다가 굳이 루마니아와 동맹을 맺어 헝가리와 유고를 연합국으로 붙일 생각이 없기에 영토를 얻는 선에서 마무리하려 한다. 결국 루마니아가 압력에 굴복하면서 영토를 확장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지속적인 피해 누적에 따라 일본이 요구하는 소일동맹을 고려하며 중국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면서 중국공산당을 버린다.

서유럽에서의 전투가 격화되고 프랑스가 반격을 가하자 이에 호응하기 위해 동프로이센-폴란드 방면의 500만을 더해 핀란드 방면에도 100만명을 배치하며 공세를 준비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이 바로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조약을 통해 중화민국과의 공식적인 관계 단절과 일본에 자원 지원을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각각 북사할린에 대한 영유권 인정과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침공 지지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몰로토프를 견제하고자 직접 조약에 서명했고 일본과 불가침조약으로 관계를 설정한 것 역시 압도적 병력으로 연합군을 물리치고 유리한 평화협상을 이루어질 시 연합군의 공격을 받는 일본을 기습해 극동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함이기에 연합국이 평화협상을 거부할 시에 동맹으로의 발전을 고려중이다.

그렇게 준비가 되자 키릴 메레츠코프 휘하 극동의 100만 병력으로 핀란드를, 주코프와 쿨리크를 포함해 이반 코네프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및 로코솝스키와 리스테르등 400만 병력으로 폴란드-동프로이센을 공격한다. 그러나 완벽한 계획도 쿨리크의 트롤짓으로 인해 실패하고 120만의 사상자와 50만의 포로를 내며 패배하게 된다. 이 일로 쿨리크는 처형당하고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 대원수직에 오르며 군권을 장악한다. 이후 포로들과 투항자의 가족에 대한 연좌제를 실시하고 핀란드에 역량을 집중한다. 핀란드에서 메레츠코프가 100만 대군을 이끌어 만네르하임 라인을 무너트리고 카렐리아를 함락 직전으로 몰아넣으나, 핀란드의 결사항전과 라스푸티차로 인해 비푸리에서 저지당한다. 이후 독일에서 소련을 저지하기 위해 보낸 루프트바페가 제공권을 장악해서 보급을 끊는 등 활약을 하여 재공세 이후로부터 50만정도의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이 피해로 인해 메레츠코프가 스탈린에게 압박을 강하게 받으면서 프랑스가 오기 전에 핀란드를 끝장내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권터 프린을 위시한 독영 연합군의 호위 하에 도착한 프랑스군에 의해 격퇴당하는 동시에 만슈타인의 해방작전에 말려들어서 포로로만 100만이 잡히는 큰 피해를 입는다. 계속되는 전황의 악화에 주코프를 비롯한 일선 장군들은 불만을 품으면서 점차 스탈린의 리더십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조심스레 쿠데타 모의를 하고 있다. 더군다나 스탈린이 소련군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시도한 민스크 점령도 독일,폴란드의 강력한 저항에 실패하고 오히려 독일군이 라스푸티차 직전에 잽싸게 소련군의 허리를 잘라먹어서 투입된 200만 중 40만만이 맨몸으로 겨우 탈출하면서 스탈린의 권력은 더욱 불안해진다.

9.3. 독소전의 종결

거듭된 참패에도 포기하지 않고 독일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다방면에서 공세가 몰아치고 넓은 평야에서 난전이 펼쳐져 양군의 기본적인 역량 대결로 몰리게 되자 소련군의 장비, 병력의 질, 열악한 통신 등의 열세로 인해 패배한다. 그 과정속에서 스탈린의 맏아들이 전사[51]하고 딸마저도 스탈린을 인간쓰레기라고 비난한다. 실의에 빠진 스탈린은 자신의 주치의가 가져온 독약을 눈치채지만 그 역시 아들을 쿠르스크에서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 쿠데타가 일어나자 흐루쇼프를 쏴죽이고 자신도 독약을 먹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소련에서는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서기장으로 선출되고 독일에게 종전협정을 제의한다. 그리고 협상을 위해 수송기를 타고오던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자유 러시아군에게 격추되어 사망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나 유리 안드로포프가 빠르게 혼란을 수습하면서 소련군 각 부대가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자유 러시아를 막아내고 자유 러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는 전쟁을 계속할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폴란드에 벨라루스를, 핀란드에 콜라반도를 할양하고 우크라이나를 독립시켰다. 추가로 지하자원을 배상금으로 지급하고 우크라이나 산업 시설을 원상복구하는 대신 우크라이나의 식량을 제공받고 자유 러시아와의 '내전'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서둘러 평화협정을 맺고 대조국전쟁을 선포. 자유 러시아와 2차 적백내전에 들어간다.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자유 러시아를 물리쳐 승리로 이끌고 전후 복구에 나선다.

우선 서기장으로 집중되어있던 권력을 당(티토), 위원회(안드로포프), 군(주코프)의 3개로 나눠 삼두정을 정착시키고[52] 스탈린 시대의 폐해를 타파해 성공적 농업 개혁을 이루어냈고 철의 장막이 없어 내부를 다질 여력이 생긴 덕에 순식간에 세계 3대 강국으로 부상, 핵 개발과 우주과학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고 유리 안드로포프의 말년에 다당제와 선거제가 도입되며 사회주의 정권 특유의 경직성과 폐쇄성이 사라지게 되어 해체를 피하고 현대까지 국제연합의 당당한 상임이사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53]

10. 자유 러시아

해방 작전에서 포로로 잡힌 소련군 100만명 중에 전향을 희망한 30만명이 소련에 맞서싸우겠다고 하여 결성되었다. 드높은 전의를 불태우지만 독일 등의 연합국은 이들을 불신하면서 기껏해야 후방치안 정도만 맡기려한다.[54] 그러던중 연합국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소련의 벨라루스 공격[55]으로 급박하던 전세때문에 민스크 공방전에서 정식으로 전선에서 활약하는데 성공해서 연합국에 정식으로 합류하게 된다. 게다가 미국에서 트로츠키의 공산 봉기가 실패하면서 반공주의 광풍이 미국을 휩쓰는 가운데 공공연하게 소련의 전복을 주장하는 자유 러시아가 미국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렇게 든든한 후원자를 얻은줄 알았으나, 미국이 해준다는 지원이 실제로는 그리 대단치 않다는 점을 간파한 디트리히로 인해 연합국의 자유 러시아 승인과 전후 스몰렌스크를 중심으로 폴란드와 소련 사이의 완충지대를 영토로 보장해주겠다는 약속만 받게된다.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이 태평양에 집중하는라 지원 순위에서 크게 밀린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쿠르스크 공방전에 맞춰 연합국이 전 전선에서 펼친 공세에서 의욕적으로 스몰렌스크를 공격하다가 오히려 소련군의 역습에 위기에 빠지지만 모델의 독일군에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하고 다른 전선들의 승리 덕분에 어찌어찌 승리한다. 소련의 완전 전복을 원하는 만큼 적어도 모스크바까지는 함락시키는 것을 갈망한다. 종전협정에서는 자신들의 기여분이 적어서 얻어갈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자 전쟁을 이어나가려고 소련 서기장이 탑승한 수송기를 격추한다. 이후 일방적으로 소련과의 정전을 깨고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중이다. 그러나 연합국 중에서 소련과의 전쟁을 계속하고 싶어하던 나라는 자유 러시아밖에 없었기에 나머지 나라는 모두 소련과 평화협정을 맺어 전쟁을 끝내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물론 미국의 지원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 미래가 그리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42년 가을에 미국의 지원을 대거 받아 야심차게 공세를 가했으나 완전히 실패했다고. 이후에는 미국의 물자만 쪽쪽 빨아먹고 있다고 언급되며 미국에게도 손절당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졌고 결국 맥아더의 요청으로 완벽히 손절당해 케렌스키는 미국으로 도망치고 블라소프는 교수형으로 삶을 마감하지만 주동자들이나 민간인 학살을 지시하거나 가담한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병력들은 가벼운 노동형이나 계급 강등을 당할 뿐 그 이상의 벌을 받지 않는 관대한 처분을 받는다. 여러모로 베트남 전쟁 당시의 남베트남을 연상시키는 엔딩을 맞았다.

11. 자유 우크라이나

소련 측의 책임이 적지 않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인해 소련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대공세를 통해 우크라이나 땅에 들어온 독일군이 원 역사처럼 학살도 저지르지 않자 독일의 주선 아래 폴란드 내의 우크라이나 고토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폴란드의 승인을 받는다. 그리고 저항조직을 결성해서 해방 작전을 실행할 때 내응해 소련군에 출혈을 일으켜 연합군의 우크라이나 점령에 기여한다. 소련과 종전협상을 통해서 소련에서의 독립을 보장받고 소련이 동부에서 뜯어간 산업시설을 돌려받는 대신 곡물을 제공하여 소련군의 식량 사정을 개선하는 것에 도움을 주기로 한다. 한편, 국제사회에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인지 대일전에 10만명이나 되는 대병력을 보낸다.

전쟁이 끝나고 크림반도를 얻지 못한 우크라이나는 독일과 폴란드와의 무역에 집중해왔고, 대 소비에트 전선의 최전방으로서 유럽연합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 나가 비옥한 흑토와 소련의 군수공장을 비롯한 동부의 공업지대를 바탕으로 한 살기 좋은 나라로 남게 된다.

12. 헝가리

친연합국측 중립국. 독일의 아픈 점을 잘 파고들어 중립국으로 최대한 이익을 취한다. 슬로바키아 남부와 루테니아, 트란실바니아 전체를 회복하여 영토가 트리아농 조약 이전에 상당히 가까워졌지만 슬로바키아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유지되고, 부르겐란트는 안슐루스 이후에 독일이 반납하지 않았으며 바나트는 유고와의 조약을 통해 포기하는거로 가닥을 잡는다.

헝가리 왕국이 세워진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 카를 1세를 쫓아낸 뒤 왕 없는 왕국의 섭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트리아농 조약으로 루마니아가 차지한 트란실바니아 회복을 염원하고, 이에 따라 이와 관련되어 독일을 침공한 폴란드와 비밀 협약을 맺는다. 그러나 폴란드가 독일에 밀리자 비밀리에 독일과 접촉하였고, 그에 따라 재군비에 필요한 장비를 독일에 받으며 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독일과 함께 시코르스키의 쿠데타를 지지하며 폴란드에 군수물자를 지원한다. 이후 독일이 이탈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자 곧바로 폴란드와의 비밀 협약에 도우면서 약속한 트란실바니아 회복에 협력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비밀회담을 통해 트란실바니아 전체와 루마니아의 연합국 합류 거절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연합국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폴란드에 대한 지원을 2배로 늘리고, 독일에 수출되는 보크사이트와 석유의 면세 조치 그리고 헝가리내 군수공장 80%에서 독일 군수장비를 위탁생산하기로 한다.[56] 이외에도 바나트 지방도 원했지만, 유고에게 넘기는 대가로 트리아농 조약 파기 및 트란실바니아 합병을 인정받는다. 원 세계에서는 공산화되었지만 이 세계관에서는 에티오피아와 똑같은 이유로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 체제가 공고히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전후에는 합병한 영토의 소수민족들로 인한 갈등이 벌어졌으나 독일의 군수장비 위탁판매를 통해 경제를 살리던 헝가리는 여러 유화책을 제시하며 융화를 위해 노력했다. 트리아농 조약으로 상실한 고토를 모두 되찾지는 못했지만, 헝가리인들이 간절히 바라던 트란실바니아의 회복을 이루어 낸 호르티 미클로시는 헝가리의 영웅으로 남았고 그 덕분에 아들인 호르티 이슈트반 역시 국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왕 없는 왕국의 섭정을 물려받았다. 이후 친독 기조와 유럽연합 가입으로 헝가리 내부의 민족주의도 발전하여 현대에 들어서는 호르티 가문의 실권도 거의 없어졌으나 그럼에도 헝가리인들은 자신들의 존경을 담아 섭정직의 세습을 인정하고 있다. 폴란드와는 굳건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루마니아와는 여전히 앙숙으로서 갈등을 빚고 있다.

연합국에 가입하여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지만 독일과 폴란드를 잘 이용해서 고토를 회복하고 전후에는 독일이 남겨놓고 간 군수공장으로 경제발전을 이뤄 본작의 숨은 수혜국이 되었다.

13. 핀란드

핀란드 공화국을 압박하는 소련이 카르얄라와 라플란드, 올란드 제도를 할양하고 주요 항구를 30년간 조차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면서 전쟁을 벌이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재무장관 배이뇌 탄네르와 외무장관 엘랴스 에르코가 디트리히와 브란트를 접견해 게베어 소총, 대전차 소총 PaK 36 대전차포를 대거 지원받는 밀약을 맺는다. 신정부 편에 선 국방군과 나치가 베를린 공방전을 벌이는 동안 마이닐라에서 소련이 벌인 자작극으로 인해 겨울전쟁이 발발한다. 독일 내전이 끝난 후 소련과의 초전에서 선전하고 독일의 지원을 발표해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자유세계의 지원을 원역사보다 빠르게, 더 많이 받게된다. 겨울동안 선전하고 1940년 2월 말쯤에 소련에게 휴전을 제의하나 망신을 당한 스탈린의 분노에 90만으로 증원된 소련군의 재공세를 받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나, 폴란드가 독일에 의해 궁지에 몰리게 되자 우선순위를 바꾼 스탈린이 대부분의 병력을 폴란드쪽으로 이동시키면서 우선순위와 소련이 얻을 이익이 적은 핀란드는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소강상태 상황에서 니켈을 대금으로 지급하며 독일에게 전투기등 많은 지원을 받게 되었고, 독일에게 연합국 가입의사를 타진한다. 처음엔 소련을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가입이 유보되지만, 소련의 독일내 여론 공작 증거가 드러나면서 생긴 독일내 반소련 여론과 소련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독일군의 분위기로 인해 폴란드와 함께 연합군의 일원이 된다.

이후 소련이 폴란드와 함께 소련-일본 불가침 조약 덕분에 극동에서 정예병 100만을 이동시켜 침공을 가하자 20만을 동원해 방어전을 치렀고, 역량에 밀려 만네르하임 라인이 돌파당하면서 카렐리야를 위협 받는다. 그러나 핀란드에 파견된 루프트바페와 핀란드 공군이 소련공군을 거의 전멸시키고 제공권을 얻어 소련군을 극도로 견제하며 피해를 주고 있으며, 연합국의 증원과 계속된 지원덕분에 희망을 얻어 결사항전 중이다.

한편,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독일과 프랑스의 협상 결과 드골의 프랑스 주력군 100만(정확히는 97만)이 핀란드에 파병됨으로서 전세는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패배감에 휩싸여 탈영까지 일어나는 등 패잔병에 가까웠던 프랑스군은 조국을 지키고자 노인, 여자, 어린아이까지 총을 들고 싸우는 핀란드인들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전의를 불태웠고 드골 장군의 지휘하에 펼쳐진 핀란드-프랑스 연합군은 총 반격을 개시, 소련군을 거침없이 박살내가며 점령당한 핀란드의 영토를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는 공세로 돌아서서 콜라반도를 점령하고 소련과의 종전협상에서 점령지를 그대로 영토로 인정받는 쾌거를 이룬다.

전후 핀란드는 콜라반도와 카렐리야를 바탕으로 빠르게 국가를 재건해 나갔고, 외교적으로는 친독노선을 유지했으나 때에 때라서는 독일의 의견도 반대하는 강단을 보여주었다. 현대의 핀란드는 사민주의가 강한 국가답게 훌륭한 복지를 제공하는 작지만 살기 좋은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반소 감정은 여전했다고 한다.

14. 스페인

스페인 내전으로 스페인 제2공화국이 무너지고 프랑코 정권이 세워진다. 독일 내전 이후에도 내전기의 지원 대가로 나치 독일에 제공했던 이권들을 유지시킨다. 이후 프랑코와 페탱의 친분으로 프랑스 편에 붙는듯 하였으나 실제 역사에서의 독일에 보여준 것과 같이 줄타기를 시전한다. 라 로크의 지브롤터 공격 요청을 상큼하게 씹고, 독일과도 비밀리에 텅스텐 수출 재개와 포르투갈의 텅스텐 구입 중재를 대가로 독립국 유지를 협의한다. 이후 지브롤터를 넘어가는 영국의 H기동전단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이에 대한 경고나 보고도 하지 않은 채 묵인한다. 그리고 독일이 포르투갈에서 수입하는 텅스텐의 일부가 스페인산이란 걸 일부로 유출시키면서, H 기동전단건과 함께 프랑스에게 찍혀버린 탓에 베네수엘라로 석유 수입을 하러 가는 프랑스 수송선들에 대한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까지도 묵인한다.

원 역사에서는 추축국과 연합국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통해 정권을 확립한 프랑코지만, 우선 제2차 세계 대전이 훨씬 빨리 끝나버린 데다가 공화파의 장군이었던 엔리케 리스테르가 소비에트 연방 승전식에서 스페인 공화파의 깃발을 들고 행진하면서 스페인은 다시 한 번 내전의 전운이 감돌고 있다. 어떻게든 로비를 해 보기 위해 디트리히 샤흐트와 에리히 코르트에게 개인적인 뇌물을 보내 봤지만 그것도 실패하고 대전이 끝날때까지 살아 남은 유일한 파시스트 정권이라 수교국 하나 없이 전 세계에게 외면 받으면서 프랑코 정권의 앞날은 현실보다 훨씬 어두워진 상태다.

이후 엔리케 리스테르가 스페인으로 귀국, 민주화 세력과 적극적인 연대를 통해 결국 프랑코 정권을 붕괴시키고 연립정부를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민주화를 이룩한다. 다만 엔리케 리스테르 본인은 이로 인한 연대로 인해 공산당의 세력이 약화된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나 스페인 내전의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사회운동 활동을 하면서 생활하게 된다.

15. 미국

중립법 때문에 원칙적으론 전쟁 중인 국가에 대해 어떤 지원이나 무기 판매를 금하지만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바이츠제커 외무장관의 로비로 민수용 석유와 트럭을 네덜란드를 통해 판매하게 되며 루즈벨트 대통령 역시 신정부를 정식 정부로 인정한다. 핀란드가 겨울전쟁에서 승승장구함에 따라 지원을 결정한다. 프랑스의 라 로크 정권을 파시스트 정권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에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석유 운송 차량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중립법을 근거로 무전기와 석유 수출을 중단하기로 선언한다. 작중 감정에 휩싸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라 로크는 이에 처음으로 분노한 모습을 보인다.

루즈벨트는 독일과 영국에 대한 랜드리스를 고려하지만, 여전히 대공황의 늪이 심한 상황에서 미국에 밀입국한 트로츠키[57]에 의해 사회주의 시위가 격화되면서 랜드리스 포기를 고려 중이다. 더불어 보수파 부통령 존 가너가 대권에 도전하면서 민주당은 분열했고, 미국은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존 가너는 선거 직전에 루스벨트가 대선후보로 부적절하다고 당내 정쟁을 벌이다 끝내 루스벨트의 소아마비 장애까지 공론화시키나 오히려 엄청난 비판을 받고 미국 정계에서 매장당하고, 분열된 민주당을 대신해서 어부지리로 1940년 미국 대선의 승자는 공화당의 웬델 윌키가 된다.

그러나 공화당과 민주당이 각각 53%와 47%로 막상막하의 승부로 간신히 이겼고, 그에 따라 당내 강경보수파와 현 대통령을 포함 온건진보파간의 갈등이 점화되고 있다.

한편, 독일에 온 보잉의 기술자들이 B-17과 동일 혹은 비슷한 엔진으로 He-177을 공동으로 마개조하여 HeB-177 전략폭격기를 완성시킨다.

현재는 웬델 윌키 정부가 노동자 구제책 유지를 발표하고, 공화당은 경기 회복을 위해 아예 중립법을 개정시켜서 연료, 트럭, 식량과 원자재 뿐만 아니라 이젠 무기까지 연합군에 팔기 시작해 전쟁 특수를 누리기 시작하며 대공황의 여파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있다.

일본 해군이 본격적으로 아시아에서 세력을 넓히자, 하와이 진주만에 자국 함대를 대거 배치한다.

이후 로버트 태프트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특사로서 독일을 방문하고, 미국은 연합국이 자유 러시아를 정식으로 인정해주고 소비에트 연방의 전복을 지원해주길 바란다며 만약 이 제안이 성사될 경우 의용병 10개 사단 20만명을 파견하고, 독일 등 연합국 국가에 대한 무기 대여와 채권 구매 의사, 필리핀 인근 해역의 중립화와 일본군 철수에 대해 조정안을 제시하겠다고 제안한다. 또한 자유 러시아군과 자유 우크라이나군 200만 전부의 무장을 일체로 지원하고, 셔먼 중형전차 5000대(!)를 대여해주겠다고 한다. 디트리히 샤흐트는 지금까지 독일이 연합국에 했던 지원을 단숨에 빛바래게 만드는 위엄에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테프트가 내건 지원의 허와 실을 드러내서 그를 물먹인다.[58]

독일 측에서 국방장관 명의로 진주만 공격 가능성에 대한 보고서를 보내주지만 공화당 등의 회의적인 반응으로 인해 묵살되고 1942년 1월 25일,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격함대가 진주만을 공습하고, 이에 분노한 미국은 마침내 태평양전쟁에 뛰어들게 된다.[59] 그러나 연합국에 가입했지만 이때 일본에게 전력을 집중하고자 일본에게만 선전포고했으나 소련에게는 하지 않은 상태로[60] 미국과 소련이 정식으로 전쟁 중은 아니다.

자유 러시아가 소련 서기장이 탑승한 수송기를 격추하자 소련 일부 주전파에 대한 대응 공격 중 발생한 사고로 처리하고 매카시즘 광풍에 휩싸인 공화당 정권이 자신들이 후원한 국가가 친 사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소련 주전파에 대한 대응 중 사고로 처리하고 연합군에 막대한 양의 물자를 무상으로 지원하여 전쟁을 이어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사건의 수상한 정황이 밝혀지면서 동부전선의 주축인 독일의 여론이 반전으로 돌아서고 자유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연합국도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어서 소련과 평화협정을 맺어 붕 뜬 입장이 되어버렸다.

그 후에는 대일전에 집중하면서 필리핀을 중심으로 싸우는데 육전에서는 끈질기게 방어전을 펼치면서 버티고 해전에서는 독일, 영국과 연합함대를 결성해 함대결전을 벌일 때 미국 항모함대가 일본군의 후방을 급습하면서 마지막 일격을 가해 일본 해군을 괴멸시킨다. 그리고는 필리핀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낸다.

하지만 미국이 지원한 자유 러시아가 소련을 공격했다가 참패하자 이를 덮기 위해 대일전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어서 덮으려한다. 그 와중에 사이판을 확보해 일본 본토 도쿄에 가한 고고도 정밀폭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국, 독일과 연합해서 저고도에서 무차별적으로 도쿄에 소이탄을 퍼붓는다.

독일에 의해 731부대의 만행이 공표된 이후에는 미국 전체가 분노. 일본 천황을 살리자고 주장하였던 맥아더를 해임시키고 자유 러시아로 좌천시킨 뒤 아이젠하워를 후임으로 임명한다.이후 꼭지가 돌아버린 커티스 르메이가 오사카를 폭격하여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고, 영국과 독일과 함께 천황을 죽일 계획인 "무너진 태양" 작전[61]을 실행하게 된다.

이후 무너진 태양 작전으로 일본이 항복하게 되자 회담에 참여하여 오키나와, 규슈, 시코쿠를 제외한 일본 본토의 신탁통치를 담당하면서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할양받는다.

전후 미국은 웬델 윌키 대통령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는 역사의 지도자를 꿈꿨다.'라고 말한 뒤 병사하고, 그 뒤는 민주당의 헨리 A. 윌리스가 이어 독일, 영국과의 친분 관계를 이어가고, 반공주의를 넘어 소련과의 화해를 추진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헨리 A. 월리스 대통령은 독일, 영국, 소련과 함께 국제연합(UN)을 창설하고 이를 통해서 세계는 냉전을 피하고 재건과 화합의 길로 가게 된다.

단 UN은 원역사와는 달리 독일, 미국, 영국, 소련을 상임이사국으로 하여,[62] 의사결정에서 상임이사국의 만장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회원국의 투표를 통해 90%이상의 찬성이 이루어지면 통과된다는 추가 조건이 붙었다.

그러나 월리스가 물러난 뒤 자신들의 힘을 깨달은 미국은 다시 공격적 행보를 보여 중국과 사할린을 중심으로 냉전이 도래. 핵전쟁 위기가 닥치지만, UN의 중재로 위기를 피해가게 된다.[63]

현대 미국은 단일국으로서는 독일, 영국, 소련 모두 압도하는 강력한 국가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력 한계로 실제 역사에서의 외교적 영향력은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덕분에 베트남, 이스라엘을 비롯한 원 역사의 악명 대신 아메리칸 드림의 희망적인 국가로서의 면모가 더 남게 된다. 디트리히의 말로는 원 역사의 절대적 패권을 가지지는 못한 대신 베트남 전쟁 같은 국력 낭비가 없어져 국력은 실제 역사 이상일 것이라고.

16. 네덜란드

네덜란드 왕국에 망명한 빌헬름 2세를 모셔가겠다는, 내전중인 독일 신정부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왕당파들과 이를 거부하라는 영프의 압박에 중립유지를 고수하겠다며 거절하는 것으로 첫 등장했다. 히틀러를 비롯한 수뇌부들은 베를린에 포위당했고 공방전이 벌어질 시기엔 자이스잉크바르트를 비롯한 나치 고위인사들도 시민들에게 맞아 죽거나 뿔뿔히 흩어졌기에 실제 역사에서 20만명이 넘게 죽을 일도 없고 안네 프랑크를 비롯한 유대인들도 살아남게 되었다.

그러나 상대만 독일에서 프랑스로 바뀌었을 뿐, 결국 중립이 무시당한채 지크프리트 라인의 우회로로 사용하려는 200만(!) 프랑스군의 침략을 받을 상황이다.

이후 일본 제국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침공하자 분노하여 연합국에 가입하고 전쟁에 참전한다. 그에 따라 20만의 병력을 벨기에에 파견하고, 여왕의 사비를 더해 독일제 군수장비들을 적극 구입하며 재무장을 강화하면서 네덜란드군의 지휘권을 서부전선군 총사령관이 비츨레벤에게 인계한다.

더불어, 네덜란드가 연합국에 참전하면서 빌헬름 2세도 귀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네덜란드도 진저리를 내고있다.

겨울폭풍 작전의 희생양으로서 프랑스군을 유인하는 모델의 독일 10군과 함께 벨기에군과 같이 방어하면서 큰 피해를 입는다. 본토가 공격당하는 벨기에와는 달리 주인공은 프랑스령 식민지로 보상할 생각을 한다.

평화협상 논의에서 프랑스령 기아나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신속한 탈환을 요구한다.

이후 라 로크가 직접 참여하면서 신변 문제에 따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암스테르담으로 회담장이 변경된다.

17. 벨기에

독일 내전을 주시하면서 신정부가 로카르노 조약에서 보장한 영토를 재승인하자 이를 지지한다. 이후 프랑스가 영국을 침공한 시점에서 벨기에 루트를 사용하고자 설득하는 독일에 대해서 1차대전기 독일제국에 당했던 트라우마 때문에 즉시 거부하며 중립을 유지한다. 하지만 독일군이 영국을 돕기 위해 준비한다는 걸 들은 라 로크가 200만(!)을 동원해 벨기에로 돌아가 짓밟고 루르를 점령하려고 함으로 앞날이 어두워진다.

마침내 프랑스의 침공을 받고 밀리지만, 혼란스러운 프랑스 군의 침공 상황 덕분에 먼저 공격을 하여 프랑스 국경부대를 밀어내는데 성공한다. 이후 총동원령을 내리며 방어선을 구축한 뒤, 바로 독일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연합국 가입 의사를 밝힌다.

그러나 40만의 방어병력은 결국 200만의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워털루 전투가 있었던 수도 브뤼셀 근처까지 밀려난다. 그나마 독일이 구원 요청을 받고 공군과 기갑부대를 지원하면서 위기를 넘긴다.

이후 벨기에 시민들이 지원 온 독일군을 환영했고, 독일군에게 최대한 좋은 숙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프랑스와 비슷한 사망자라도 인구가 적은 벨기에에게 불리해졌고 오버슈트라텐 같은 측근 정치를 하던 레오폴 3세는 독일에게 항전의 대가로 추가 지원 병력 30만(!)을 요구한다. 벨기에 수뇌부는 어이 없어 하며 독일내 망명정부 설립도 고려하지만, 은근히 지원을 기대한다.

이후 일본의 트롤링으로 인해 네덜란드가 참전하면서 30만(독일군 10만 + 네덜란드군 20만) 병력의 증원을 받았고, 독일이 지원의 대가로 전선의 총 지휘권을 요구하자 이를 받아들인 의회의 압력에 굴복한 국왕인 레오폴트 3세는 30만 벨기에군의 지휘권을 서부전선군 총사령관 비츨레벤에게 인계한다.

겨울폭풍 작전의 희생양으로서 프랑스군을 유인하는 모델의 독일 10군과 함께 네덜란드군과 같이 방어하면서 큰 피해를 입는다.

벨기에의 불리한 위치를 타파 및 국왕의 요구에 따라 플랑드르 칼레 그리고 벨기에령 콩고 근처의 가봉 프랑스령 콩고를 원한다.

원래 평화 협상은 연합국간의 합의가 있던 브뤼셀에서 열릴 예정이지만 라 로크가 직접 참여하면서 신변 보호 문제로 네덜란드로 바뀐다.

동부전선에 전 병력을 투입해야 해서 여유가 없던 독일이 연합국 측 프랑스 주둔 병력으로 벨기에군 10만을 파견하지만 벨기에군이 행패를 부려서 문제가 되자 독일이 배상금 일부 탕감을 조건으로 겨우 달래고 탕감해준 금액은 콩고에서 사람 손목 잘라가며 얻은 고무로 대신하겠다고 한다.[64]

이후에는 군사 지원도 안하고 계속 문제나 일으키기에 거의 퇴출된 상태나 다름없다고 한다. 연합국이 전쟁에서 이겨도 벨기에는 얻을 수 있는게 없을 예정. 연합국들 입장에선 아시아 전선에서 싸우는 영국-네덜란드-에티오피아와 동부 전선에서 싸우는 독일-폴란드-핀란드와는 다르게 위협이 없어지자마자 바로 실속만 챙기려 드는 벨기에가 아니꼬울 수밖에 없고, 심지어 프랑스조차도 항복 이후 핀란드에 대육군을 파견했으니 벨기에가 밉상일 수밖엔 없다. 실제로 이 이유로 유일하게 갖고 있던 아프리카 식민지인 콩고 지역에서 수탈을 시도했으나 에티오피아를 중심으로 구축된 아프리카 연합에 탈탈 털리고 식민지 해방 및 배상금 지불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완전히 체면을 구긴다. 에티오피아에 무기를 팔지 말 것을 제안했다가 계속 나대면 연합국에서 아예 빼버린다는 말에 깨갱하는 것은 덤. 원 역사에서 일어났던 '위대한 잊기(great forgetting)'[65] 같은 일은 꿈도 못 꿀 듯.

18. 일본

나치 독일과 방공협정을 맺었던 일본 제국은 나치 독일 멸망 후 프랑스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는다.
프랑스 해군 잠수함에 산소어뢰를 제공하고, 프랑스의 영국 침공이 시작되자 이탈리아와 함께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라 로크의 언급으로는 현재 홍콩을 손에 넣고, 대영제국 극동함대를 공격하며 태국을 굴복시키고 싱가포르를 공격 중이며, 스페인과 이탈리아와 달리 제대로 밥값을 하는 중... 마침내 싱가폴을 함락시킨 일본 제국은 영국령 말레이와 싱가포르를 확보. 미국의 무역 제재를 만회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찬드라 보스의 자유 인도 임시정부를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동맹국인 프랑스에도 어떠한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석유를 얻고자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침공하여 네덜란드를 연합국으로 끌어들이는 트롤짓을 저지른다. 덕분에 지원군이 없으면 항복을 고려하겠다고 하는 벨기에에 쩔쩔매던 독일 등 연합국은 네덜란드의 지원군을 얻게 되고, 라 로크는 뒷목을 잡는다.

이후에도 프랑스와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소련에게 일소동맹을 거듭 요구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절반 이상을 점령해 나가면서 정권이 바뀐 미국과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는 중이다.

비록, 동맹은 아니지만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이 체결되면서 북사할린의 영유권 포기 및 소련의 아프간 & 이란 침공 지지대가로 소련의 대중국 지원 포기와 관계 단절 및 소련의 자원 지원을 받게 된다. 그리고 육군과 해군은 각각 소련이 고전할 시 현 점령지 인정 대가로 대소전에 참가하여 사할린과 극동을 차지하고 프랑스가 패망하면 인도차이나를 점령하여 중국과 인도를 압박한다는 기상천외한(...) 구상을 한다. 게다가 독일에게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고서는 말레이와 인도네시아 점령 인정과 중국의 중일전쟁 비용 배상, 중국점령지의 친 일본 자치정부 수립 대가로 휴전과 함께 추축국 탈퇴와 연합국 가입하면서 인도와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의 안전 보장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소련 극동 공격을 제안한다... 이 제안을 독일이 폭로해버리자 항의를 하나 일축당하고, 분노한 스탈린이 자원 수출을 중단하겠다 하자, 독일의 이간질이라 해명을 하나 제안을 주도한 대본영이 고노에 내각에 책임을 전가시키고 이로 인해 고노에 내각이 총사퇴를 하고 그나마 대본영에 말이 통하는 도조가 새 총리로 임명된다. 도조는 소련에 일본이 같은 편이라는 증명과 '동맹을 배신한' 프랑스를 징벌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인도차이나 침공을 시작한다.

한편 유럽전선에서 어느정도 여유가 생긴 영국은 일본해군에 대응하고자 기동함대를 파견하였고 영국해군의 요청에 따라 독일도 잠수함 전대와 항모전단을 아시아에 파견함으로서 독-영해군과 일본해군 간의 전투가 펼쳐지게 되었다. 일본 해군은 영국 해군과의 실론 해전에서 압도적인 항모전력을 활용하여 항모 글로리어스를 격침시키는 활약을 펼치지만 독일 잠수함전대의 울프팩 전술에 전함 히에이가 격침당하고 실론 섬에 상륙할 해군육전대를 실은 수송선단이 궤멸되는 큰 피해를 입게 된다.[66]

원 역사보다 점령하고 있는 영토가 더 넓어서 이를 유지하기 위한 병력이 더 많이 필요하여 자원 부족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되었어도 허덕이고 있다. 게다가 일본의 세력확장에 미국은 연합국에 랜드리스 축소판을 제시하고 필리핀 해역에 일본 선박의 항해를 금지했다.

그러자 일본은 원 역사에서처럼 수능영어 지문보다 어려운 선전포고문을 보내고는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다. 역사가 바뀐 덕분에 원 역사에서는 진주만에 없던 미 해군 항공모함을 포함한 미 함선들을 다수 격침시키는 대성공을 거두고, 3차 공격에서 유류저장고는 파괴했지만 중일전쟁으로 단련된 베테랑 파일럿이 갈려나가고 일본으로 귀환하다가 웨이크 섬에 전투기 갖다준다고 출항해 있던 미 해군 항모 엔터프라이즈를 만나서 다시 한번 파일럿들을 잃었다. 미국은 기습공격에 극대노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본격화된다. 한편, 이때 필리핀 공략도 함께 시도했는데 미군이 후퇴하면서도 끈질기게 저항했고 상륙 과정에서 독일 잠수함대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어 완전히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한편, 진주만 공습처럼 독일이 해군 항공대미국의 복수 겸 기습공격을 하면서 ' 도라 도라 도라'라면서 조롱하자[67] 일본군은 설욕을 위해 독일 해군과 교전을 벌이지만 영국에게 첩보를 받은 독일이 영국과 공조해서 일본 함대를 박살낸다. 이때 제로센의 약점을 알고 있던 주인공이 일본의 선회성능이 좋은 제로센을 상대하려면 닥치고 붐앤줌 전술로 대응하라고 지시하면서 칠면조 사냥처럼 파일럿들은 몰살된다. 영국과 독일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태평양 전쟁이 인도양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동맹이라는 프랑스와 소련, 이탈리아가 종전해버린 상황에서도 포기를 모르고 싸우고 있지만 필리핀도 제대로 떨어뜨리지 못한 상황에서 중국을 밑에서 치고 들어가기 위해 임팔을 공략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이를 위해 무타구치 렌야를 지휘관으로 세워서 임팔 작전을 실행하지만 역시나 보급이 제대로 안 돼서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68] 에티오피아군을 겨우 만나서 전투를 시작하지만 압도적인 화력과 근접전 실력에 패주[69]하고 일선 사단에서는 진격하라는 명령에 불복하고 후퇴하면서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고 버마 주둔군은 그대로 공중분해되고 독일군이 합류하자 순식간에 베트남까지 밀려난다. 베트남에서는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유격대가 들고 일어나고 남방총군 사령관인 기무라 헤이타로가 포로로 잡히면서 남방총군은 완전히 붕괴된다.

육전에서의 계속되는 패전으로 인해 해전에서 결전을 벌여 승리를 거둔 뒤 연합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낸다는 전략을 세우지만 기본틀인 점감요격작전에서 1단계 잠수함 함대와 2단계 항공기가 차례로 괴멸되면서 작전이 시작부터 근본적으로 흔들린다.[70] 이에 동진하는 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해 필리핀 근해에서 연합군과 맞선다는 카미카제 작전을 세운다. 결전병기인 야마토 전함을 투입하고 자살돌격까지 시키며 함대결전을 시도해[71] 샤른호르스트,후드,비스마르크 까지 격침시키는 등 연합군에게 제법 큰 피해를 입히지만 중간에 합류한 프랭크 플레처 제독이 이끄는 요크타운 렉싱턴[72]을 중심으로 한 미 해군 별동대의 기습에 야마토를 포함한 대부분의 함이 격침되며 후퇴하는 함들도 끈질기게 추격해오는 연합국 공군의 공격에 아카기와 호위함대 일부만 살아남는다. 하지만 탈출로에서 미리 존버타고 있었던 독일 유보트들의 어뢰공격을 받으며 (정황상 아카기는 침몰된 듯.) 큰 피해를 입고[73] 일본 제국 해군은 완전히 붕괴된다.

사이판이 함락되면서 본토가 위협받게 되었고 사이판을 거점으로 삼아 도쿄에 소이탄을 퍼붓는 미영독에 의해 시가지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해상을 봉쇄하는 기아작전으로 인해 해상물류까지 마비된다. 그러자 연합군은 모든 해외영토를 포기하고 전쟁의 모든 책임은 일본 정부와 덴노에게 있음을 알리는 최후통첩을 보내지만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는 포기할 수 없다고 결사항전을 부르짖으며 거부한다. 그리하여 결국 더욱 강화된 도쿄 대공습[74]을 맞는다. 이후에 스틸웰의 삽질로 인해 중화민국군이 패배하는 일이 일어나고,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한반도와 만주를 남기려고 하는 일본군에게 이번에는 유일하게 남아 있던 구레 군항에 대대적인 공습을 실시했다. 이 공격에 영국의 그 유명한 지진폭탄 톨보이가 데뷔하는데 현실에서 이 톨보이는 비스마르크급 2번함 티르피츠를 침몰시키는 전과를 세웠던 폭탄으로 여기에서는 야마토급 2번함 무사시를 침몰시키는 성과를 세운다.[75]

관동군은 독일군이 옌안에서 공산당을 토벌하기 위해 잠시 멈춘 것을 보고 공세종말점에 도달했다고 착각하고 제대로 된 방어선도 갖추지 않다가 하얼빈까지 점령당하게 된다. 하얼빈에서 독일군에 의해 731 부대 문서가 노획되었고 생체실험이 덴노의 최종승인 하에 연합군 포로를 대상으로 이뤄졌음이 밝혀지자 일본은 원역사의 히틀러급 악의 축으로 지목된다. 당연히 일본은 덴노가 그러실리 없다며 모든 것은 귀축백인들의 날조라며 헛소리를 계속하자, 이에 격노한 미국의 커티스 르메이와 영국의 아서 해리스가 각각 오사카와 나고야를 폭격하고 독일은 다시 한 번 날린 최후통첩이 거절당하자 교토를 폭격한다. 일본의 정신적 수도인 교토가 폭격당했음에 충격받은 일본 각료들은 항복을 주장하지만 또다시 대본영을 비롯한 강경파의 반발에 어쩌지도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만 끌다 결국 연합국의 톨보이 그랜드슬램을 동원한 폭격에 덴노와 대본영이 거주하던 방공호가 공격을 받고 거주자 전원이 사망묘사도 없이 사망하면서 일본 내부에선 항복해야한다는 주화파와 전쟁을 계속하자는 주전파로 나뉘어 내전을 일으킨다. 대본영의 프로파간다 때문에 전황보고를 듣지 못했던 일본 국민은 대다수가 주전파로 참여하여 주화파는 쉽게 밀릴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내전에 지친 주전파 일부가 주화파로 참여하여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구분할수 없는 싸움이 계속된다. 그러다 결국 황가 측에서 일본인들에게 덴노의 서거 사실을 발표 하게 되면서 이후 정황상 싸울 의지를 잃고 항복한다. 전후 처리 회담에서 연합국은 일본이 본토를 제외한 모든 점령지를 토해내게 하고 규슈와 시코쿠 이남의 땅은 영국이, 나머지는 미국이 군정을 통해 신탁통치하게 된다. 또한 남사할린과 쿠릴열도는 미국에게 할양한다.

이래저래 엄청난 피해를 입은 국가이나 원역사보다 나아진 점이 없는 건 아닌데 일단 그토록 원하던 함대결전이 현실화 되었을 때 함대결전 당시 숫적 열세였던 상황에서도 야마토가 연합군 전함을 혼자서 여러척 격침하고 상당히 많은 피해를 받아내는 등 상당한 활약을 해서 일본군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수훈함이 되기도 했다.[76]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제국주의의 광기를 보여준 국가답게 업보대로 수많은 병사들과 천황까지 사망하고 수도인 도쿄는 물론이거니와 오사카, 나고야, 교토 등의 대도시들이 폭격으로 인해 주요 시설들과 문화재들이 깡그리 날아갔으며, 이후에도 내전으로 인해 안그래도 없던 인구가 더 줄어 국력도 더 쇠약해지고 일본 영토가 둘로 나뉘어 미국과 영국에게 신탁 통치를 당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무는 등 원역사에 비해 인과응보를 제대로 당한데다, 한국전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사라져 원역사처럼 전쟁특수로 인한 재기의 가능성도 완전히 없어져 버리는 등 사실상 내독나없 세계관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가 되었다.결말만 보면 높은 성의 사나이 일본판이다

에필로그에서는 덴노제가 폐지되고 일본 공화국이 되었으며 군정 속에서도 정신 못차린 제국 충성파들과 자신들은 깨끗하다며 과거를 부정하는 공화국파 국민들의 반목 속에 혼란을 겪는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미국은 독일에 도움을 요청하고 반나치즘 교육 덕에 이런 상황에 익숙했던 독일은 일본 정신 재교육을 효과적으로 수행했고 결정적으로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을 본 일본인들이 각성하여 자신들의 손으로 과거를 뉘우치고 청산하기 시작했고 이는 일본 전체의 자성으로 이어져 진정한 민주 공화정을 이룩하고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게 된다.

19. 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독일의 주요 교역국으로서 알루미늄의 재료인 보크사이트 구리 및 농산물등을 수출하고 있다. 이탈리아가 독일에 패하고 있는 시점에 비밀리에 접촉하여 이탈리아의 영토를 먹으려 한다. 그러나 발칸지역의 이탈리아 영토는 크로아티아 자치주와 가깝고, 이들이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요구하는 상황에서 자칫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와의 충돌하는 사태를 우려하며 영토 요구를 처음부터 포기한다. 대신, 독일에 수출되는 상품에 대한 면세 혜택을 대가로 국왕 암살 후 이탈리아에 숨어있던 파벨리치를 넘겨 받기로 협의한다. 그리고 독일이 이탈리아 전쟁에서 승리하며 파벨리치의 신변을 넘기자 약속대로 면세 혜택을 제공한다.

이후 독일의 중재로 헝가리가 트란실바니아를 합병하는 것과 트리아농 조약 파기를 승인받는 대신 세르비아계가 상당히 거주하던 바나트를 받으면서 이탈리아 영토를 할양받지 못한 것을 만회한다.

소련의 패배가 거의 확정되고 나서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국왕이 친위쿠데타를 일으키고 소수민족을 박해하는 과정에서 법률을 마음대로 무효화하고 이 점이 의회파와 왕당파 간의 내전으로 이어지면서 독일에게 다른 골칫덩이를 안겨준다. 이에 독일에게서 입헌정치를 하고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요구받지만 국왕은 이를 거부하자 독일은 아예 유고슬라비아를 갈라놓으려고 크로아티아에 전차, 항공기 등의 장비를 지원하고 있다.

결국 피해가 누적되자 페타르 2세에 대한 책임론이 대두되어 옛 섭정 파블레 공의 중재로 입헌군주정으로 희귀하고 독일의 중재 속에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는 독립되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지역별 민족 구성에 따라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가 합병하였다. 운도 적당히 따라줬고 정세를 잘 이용해서 내전없이 통일국가를 이룰 수 있었지만 시대착오적인 전제정치 때문에 모든 게 어그러져서 나라가 찢어지게 된 셈이다.

20. 불가리아

친소국가로 헝가리와 소련이 루마니아를 압박하며 영토를 빼앗는 것에 가담하여 도브루자를 할양받는다.

그러나 이후 다시 루마니아에게 도브루자를 빼았기고 사회 혼란에 시달린다.

21. 루마니아

독일을 침공한 폴란드에게 석유와 무기를 지원을 한다. 그러나 폴란드가 헝가리를 끌어들이고자 비밀협정을 맺었고, 헝가리는 독일과 비밀리에 접촉을 한다. 독일도 1차대전 시절 남남이 되었지만, 방계라도 호엔촐레른 가문이 통치하고 있기에 비밀리에 접촉한 헝가리 때문에 고민을 한다. 이후 헝가리가 독일과 비밀 협정을 맺은 후 폴란드와 맺었던 비밀 협정 내용을 폭로하자 폴란드의 양다리에 매우 분노하며 폴란드에 대한 지원을 끊는다.

현제 루마니아는 카롤 2세의 통치속에 혼란을 겪고 있는데다가 독일을 비롯해 연합국과 비밀리에 협의하고 소련과 협력한 헝가리 때문에 영토를 빼앗길 운명이다. 헝가리와 소련 그리고 간을 보던 불가리아의 압박이 시작되자 뒤늦게 호엔촐레른 가문의 우위를 운운하며 연합국 가입의사를 보인다. 그러나 이미 헝가리와 비밀협정을 맺은 독일과 역시 독일의 중재로 헝가리와 암묵적 거래를 한 유고를 비롯해 독일의 지원이 절실한 영국과 폴란드 및 핀란드, 그외에 관심이 없는 다른 연합국들의 묵인속에 연합국 가입이 거절당한다.

이에 따라 헝가리에게는 원역사의 북부 트란실바니아 보다 넓은 트란실바니아 전체를, 유고에게는 바나트를, 그리고 소련과 불가리아에게는 원역사대로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 그리고 도브루자를 할양한다.

덕분에 발칸의 강대국에서 소국으로 낮아졌고, 카롤 2세의 실정과도 더해진 탓에 원역사대로 총리인 이온 안토네스쿠와 전위조국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카롤 2세의 폐위시킨 뒤 미하이 1세가 복위된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난 후, 독일과의 협상으로 소련과 불가리아에 강제로 할양했던 영토를 돌려받는다. 이후 독일이 루마니아의 해체에 관여했다는 기밀 서류가 공개 처리 되면서 독일과의 관계는 매우 불편해진 상황.

22. 중국

일본과 전쟁을 치르고 있으며, 내전중인 독일의 신정부에 일찌감치 접근한다. 이후 독일의 제4제국과 외교관계를 회복하고 텅스텐등 희귀자원을 대가로 무기 지원을 받고 군사고문단 파견을 약속받는다. 이후 연합국 가입을 타진했고, 일본 견제를 원하는 독일등 연합국들에게 승인을 받는다. 그러나 프랑스가 적국이 되며 인도차이나 루트가 사라졌고, 일본이 말레이와 홍콩을 일찍 장악하고, 태국이 일본에 굴복하고, 인도에서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독립 봉기가 발생한데다가 소련이 지원을 끊는 등 원역사보다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결국 1941년에 대륙타통작전에 당해 위기에 빠졌다.[77]

그 와중에 산하단체 정도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일과 단독으로 접촉해 승인을 받아내자 언짢아했지만 독일이 지원해준 무기가 군벌들에게 흘러갔고 군벌들이 일부 무기를 일본에게 팔아넘긴 사실을 독일이 알게 되어 추궁하자 꿀먹은 벙어리 신세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독일이 지원해준 판처파우스트가 친일 군벌을 통해 일본군으로 흘러들어가 독일군에게 피해를 주자 독일이 국민당 정권을 지원하는 것에서 산서 군벌인 옌시산을 지원하는 것으로 돌아서며 결국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얻게 된다. 그리고 군사고문으로 온 사람이 조지프 스틸웰...

중국군이 버티고 있던 푸젠, 저장성에 독일군이 상륙해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면 중국군이 뒤에서 일본군을 정리하는 형태로 협력을 받으며 쾌속진격해 수도 난징을 함락시키는데 이때 장제스는 아무것도 하지를 못해 입지가 약화된다. 한편, 옌시산은 산시까지 올라간 독일군과 만나고 독일군은 중국공산당을 반군으로 간주해 홍군을 모두 쓸어버리고 참수작전을 시행해 마오쩌둥 등의 수뇌부를 사살한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를 위시한 일부 공산당이 마가 삼 군벌 지역으로 도망갔고 다른 군벌들은 서로 치고받으면서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조지프 스틸웰의 무리한 작전으로 일본군을 공격했다가 큰 피해를 입고 국민당군이 물러나자 중국 동부에서 군벌들이 장제스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 반장동맹을 결성하기까지 했다.

일본 항복 이후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마닐라 회담에서 옌시산 정권, 위구르, 티베트가 독립을 승인받고 국민당 정부에게는 불행 중 다행으로 반장동맹은 승인받지 못했다. 한편, 공산당은 마가 삼 군벌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틈을 타서 게릴라전을 펼쳐 다른 군벌들을 흡수해 서북지역을 점령했는데 연합국에게 따로 승인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회담 후 옌시산이 화북에서 공산 빨치산을 제거하고 중화민국을 견제하기 위해 공산당과 디트리히와의 만남을 주선하고 공산당은 북중국 연방 내부의 빨치산들을 전면 철수시키고 중화민국으로부터 위구르와 티베트를 지켜내는 방패가 되겠다고 약속[78]하면서 비밀협정이 맺어지면서 공산당은 명맥을 이어나가게 된다.

결국 중화연방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으로 나뉘고 원 역사와는 다르게 오히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일통을 외치는 장제스의 중화민국에 맞서 티베트, 위구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

스틸웰이 물러가고 그 자리를 웨드마이어가 왔지만 결과적으로 자유 러시아 퇴각 이후 반전 기류가 강해진 미국은 중국에의 지원 또한 끊게 되면서 결국 중국대륙은 공산당(저우언라이)-북중국(옌시산)-국민당(장제스)의 3국 균형이라는 작은 세계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옌시산은 말년에는 북중국(중화연방공화국)을 의원내각제로 바꾸고 본인은 대통령[79]이 되어 취미인 총기 개조[80]를 즐기면서 여생을 보냈다. 장제스는 죽기 직전까지 중원일통의 열망을 꿈꾸지만 다른 열강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실패했다.

중화민국은 장제스의 통일 열망에 의해 그의 생전 동안에는 군사독재국가가 되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원역사보다 상식적이고 개방된 나라가 되었으나 소련의 급격한 개혁에는 반발해 공산당 일당독재를 유지하고 있다. 중화연방공화국은 특별한 언급이 없지만 옌시산의 자발적인 의회로의 권력 이양으로 삼중국 중 가장 안정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23. 에티오피아

이탈리아에게 침략당해 식민지화가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가 독일과 연합국에게 패전한 직후 독립했으며, 약소한 배상금을 받는다. 주인공이 그라치아니를 인계하면서 연합국에 참전하였고, 독일과 연합국이 지원한, PaK 36등 구형 독일 장비와 이탈리아군 노획 장비로 무장한 40만 병력이 프랑스령 소말릴란드를 점령하고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진군하여 알제리 및 리비아를 점령한 프랑스 식민지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

평화회담 논의에서 프랑스령 소말릴란드와 에리트레아를 요구하지만 독일을 제외한 인종차별 및 제국주의 정서가 남아 있던 다른 연합국들에게 무시당한다. 그나마 주인공이 에리트레아를 받아 매각형식으로 넘기기로 영국과 합의를 보면서 홍해 방면 출구가 될 영토를 얻으며 내륙국에서 벗어난다.

추운 곳에 적응하지 못할 점이 우려되어서 소련 대신 아시아 전선으로 파병, 영국군과 함께 임팔에서 일본군을 막아낸다. 이후 에티오피아가 선례가 되어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자주 독립을 꾀하고 있으며, 에티오피아는 이 나라들에게 독일에서 판매하는 미사용 무기들을 채권 형식으로 판매하고 아프리카 독립운동가들의 군사 훈련을 돕는 등의 지원을 진행하면서 195-60년대에 본격적으로 독립을 시작했던 아프리카 국가들이 더 빨리 생겨날 가능성이 생겼다. 원 세계에서는 공산화되었지만, 이 세계관에서는 소련이 패전국이 되어 국제 영향력이 크게 감소한데다 당장은 내전을 거쳐 내부 정비에 집중하는 상태이고 중국 공산당 또한 연합군에게 쓸려나간 끝에 이너 차이나 서북부나마 간신히 사수했지만 그마저도 연합국과 북중국 연방의 눈치를 봐야 해서 국제 정세에 신경쓸 수 없게 된 터라 공산 세력은 원역사보다 빨리 몰락하게 생겼다. 그 결과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체제가 공고히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81]

이후 종막에서는 아프리카의 여러 구 식민지들을 주축으로 하는 아프리카 연방을 조직했다. 현대의 유럽 연방과 비슷한 단체로, 현실의 아프리카가 말 그대로 지도 위에 줄을 긋는 방식으로(...) 나라로 만들어 버린 탓에 각국 내부에서 타 부족 간의 내전으로 인한 상잔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각 부족 대표자들을 연방에 파견, 우선 부족별로 국가로 독립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이후 에티오피아는 이 아프리카 연방의 맹주로서 세계에서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국가로 그 영향력을 발휘할 예정. 그리고 아프리카 해방 작업에 벨기에가 흑인들의 국가라고 무시하고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곧바로 아프리카 연방의 이름으로 아프리카 내 벨기에 식민지로 진격, 벨기에군을 탈탈 털며 그 힘을 과시하게 되고 결국 벨기에가 식민지 해방 및 배상금 지급이라는 백기를 들게 만드는 등 국제 영향력도 확보했다.

후일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의 심장'이라는 별명과 함께 아프리카 연합국의 리더로서 국제사회에서의 자리를 굳혔지만, 이집트 등 일부 국가들과 갈등을 빚어 이들이 아프리카 연합을 탈퇴하긴 했다.

그럼에도 아프리카 독립을 주도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에티오피아가 참전한 전쟁으로 인해 해방된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가 에티오피아에 큰 힘이 되어주었고, 외교 고문인 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에게 교육받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우수한 외교관들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원만한 외교를 유지하여 현대까지 국제질서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제3세계의 지위를 지켜냈다.

셀라시에 황제의 후손이 그 위광을 업고 독재정치를 펼치다가 반발을 사 입헌군주로 물러났지만 아디스아바바에는 아직까지 메넬리크 2세와 하일레 셀라시에, 디트리히 샤흐트, 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의 이름이 붙은 거리가 있다고 한다.

이 세계관에서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에티오피아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연방이 생기면서 생겨난 또 하나의 나비효과는 이스라엘이 등장하지 않았다. 물론 이는 독일에서 유태인의 조직적인 학살이 일어나지 않아 시오니즘이 제대로 힘을 얻지 못한 것도 그 이유이긴 하지만 애초에 이스라엘의 건국 배경에 혐성국영국의 이중 계약이 있었다는 것이 컸다. 이 세계관에서는 에티오피아라는 강력한 동맹국이 있기에 굳이 유대인들을 밀어줄 필요도 없어 이중계약이 존재 할 수 없고 이는 상대적으로 중동 또한 안정을 찾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이 독립했는지는 언급이 없어 알 수 없다.

24. 대한민국

중화민국 내에서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고 있었으나 중화민국이 중일전쟁으로 어려워지자 살 길을 찾아 연합국에게 승인을 요청하고 같이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한다. 독일에게 텅스텐 채굴권을 내어주는 조건으로 독일이 열강을 압박하는 등 도움을 받아 연합국에 가입하고 망명정부로서 승인받는다.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임정 산하의 대한광복군 심리전 요원과 통역요원을 보내서 일본군의 임팔 공격에 대응해 방어전을 준비하는 영국군, 에티오피아군과 함께 싸우고 있다. 식량도 없고 무기도 없어서 싸우지 못하는 일본군에게 심리전을 벌여 일본군이 대거 항복하고 일본군에 징병된 조선인들은 광복군으로 합류하면서 일본군이 패할수록 병력과 물자가 늘어나고 있다.

승인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친독 국가가 되었으며, 중국을 여러 개로 찢어서 견제하려고 생각한 디트리히의 전략적 지원을 받은 옌시산과 함께 하고 있다.

이후 연합국의 그랜드슬램 폭격으로 방공호에 들어가 있던 히로히토 천황과 군부 인사 전원이 사망하고 벌어진 일본의 내분과 독일군의 빠른 공세 덕에 원 역사보다 2년 빠르지만 같은 날짜인 8월 15일에, 김구의 선언과 함께 광복을 맞게 된다.

중국은 의견 대립으로 분열될 예정인데다가 소련은 자유 러시아와 내전 중이라 공산주의가 한반도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어 분단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독일은 여기서 3개로 분열될 중국 중 하나가 너무 강해지면 약해지는 곳을 지원해주는 지렛대로 활용할 계획이기에 미래는 제법 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연합군이 극동에서 사용한 장비들을 인계받고 독일의 군사고문단이 파견되어 빠른 시일 내에 상당한 수준의 국방력을 갖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사회주의 세력은 이 세계관에서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이는데 소련이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넘어서 동맹을 맺어버린 순간 독립 운동계에선 이미 붕 뜬 처지가 되었고[82] 그나마 그것은 소련이 진주만 공습이후 바로 동맹을 철회하면서 소련도 일본의 실상을 몰라서 동맹을 맺은 것이라는 변명거린 생겼지만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패전국이 된 뒤 내전에 시달리며 극동에 신경쓸 겨를이 없고 그나마 중국 공산당도 국민당과 연합군에게 쓸려나가고 간신히 남은 세력도 서북 군벌, 신강 군벌을 이기고 정착에는 성공했으나 여전히 강국인 독일과 북중국 연방의 눈치를 봐야하고 그들이 눈감아준 범위 내에서 중화민국 쪽으로의 확장에 집중할 것으로 보이기에 역시나 한반도에 신경 쓸 수 없다.
게다가 연합군은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공식 망명정부로 인정한 상태고 이미 홍군도 두들겼겠다 실제 홍군과 협력 체계가 있던 조선 의용군, 조선 독립 동맹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사회주의 세력도 놔둘 이유가 없다. 즉, 임정에 전향한 김원봉 등이 아니면 중국 영내의 한국인 사회주의 세력은 마오쩌둥 참수 작전 때 이미 쓸려나갔거나 앞으로 쓸려나갈 가능성이 높다.[83] 설사 종전까지 살아남더라도 나라를 뺏어간 일본과 협력한 소련의 사상을 믿는 매국노 놈들이라는 낙인이 찍혀 국내에서의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소련이나 중국 서북부의 공산당 거점으로 도망 가거나 체념에 빠져 정부에 전향할 이들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종막에서 소련 국제여단 소속이던 김일성이 만주 진공을 건의했으나 소련이 씹어버렸는데[84] 김일성 및 일부 공산주의자들[85]은 이에 분노해 만주로 탈영하다 사살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 세계관에서 한반도의 분단 가능성은 없어졌다. 오히려 제대로 두들겨맞은 패전국인 신탁 통치로 일본이 분할된 상황.

이후 임정의 주석이었던 김구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 한반도로 들어왔으며, 그의 정적이었던 이승만은 그의 친미 성향을 우려한 디트리히 샤흐트[86]로 인해 국제정치에서 배제된 상태로 미국에 남아 있는 상태[87]이며, 김구는 여운형과 서로 협력하여 독일식의 의원 내각제를 한국에 도입한다.

에필로그 시점에서는 독일의 투자와 중화연방공화국과의 밀월 속에서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지만 그것이 버블경제를 일으켜 부패와 방만한 경영의 폐해에 잠식 되어간다. 이에 경제 고문으로 온 얄마르 샤흐트가 경제 개혁을 요구했고 대한민국 정치계에서도 이를 추진하려 했으나 재계의 반대에 부딪쳐 일부만 개혁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재계는 버블 경제가 붕괴 되자 완전히 박살나버렸고, 이후 일부나마 한 선조치와 뒤늦게나마 내놓은 대책들이 성공하며 위기를 극복했다. 오늘날에도 안정적인 투자처로 각광 받으며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가 있다고 한다.[88]


[1] 근왕주의자가 없었던건 아니지만 독일 내전 도중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며 괴멸적 타격을 입었고 초대 국방장관 디트리히 샤흐트가 군부의 문민통제에 힘쓰면서 융커들의 힘도 약화시켜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했다. [2] 참고로 제4제국이라 불리는 이유는 정부체제가 군주국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통일 독일의 민족 국가들의 순을 따 신성 로마 제국을 제1제국, 독일 제국을 제2제국이라 칭한 것의 연장선상으로 작중 독일이 4번째이기 때문. 참고로 원역사에서는 나치 독일을 제3제국으로 부르는 것과 다르게 작중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제3제국으로 간주하여 제4제국이 되었다. [3] 바이마르 공화국의 후예를 천명해서 내전 때 프랑스와 영국의 지지를 받은 거라 바이마르 공화국 때 체결된 로카르노 조약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중 알자스는 투표를 통해 프랑스 잔류, 독일 합류, 독립 중에 독립을 선택해 중립국이 된다. 로렌은 그대로 프랑스의 영역이다. [4] 이스트리아 반도의 경우 독일의 지중해 영향력을 없애려는 영국과 발칸의 골치아픈 정치 상황을 미리 알고 있던 디트리히 샤흐트의 의견이 맞아 포기했다. [5] 터틀백 설계. 현측장갑이 단단해서, 근접전이 붙을수록 적탄에 대한 방어력이 강화되어 전장환경이 독일 전함에게 유리해진다는 점이다. [6] 보다 정확히는 젊은 애들도 저렇게 하는데 우리라고 못할소냐라는 일종의 의욕이지만.. [7] 이 결과로 양면전선이 형성된다. [8] 하인켈과 보잉이 공동 제작자가 되었기에 Heinkel + Boeing이란 이름이 붙는다. 당연히 하인켈 입장에서는 속이 쓰릴 수 밖에... [9]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주인공이 폴란드에 대한 관대한 처사와 더불어 엄청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독일군에도 이제 막 배치되기 시작한 5호 전차와 6호 전차 일부를 폴란드군에 지원까지 해줌으로서 대소련전만큼은 독일군과 폴란드군은 혈맹에 가까운 관계인 상태 [10] 소련의 침공을 받을 때 그 누구도 지원을 해주지 않았지만 독일만큼은 나치독일과 내전중인 상황에서도 무기 지원을 해줬고, 특히 프랑스와의 전후협상과정에서 핀란드에 프랑스 육군 100만을 핀란드 전선에 파병시켜줌으로서 열세였던 핀란드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11] 비록 독일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에 패전했지만 전후처리과정에서 주인공 주도하에 관대하게 처리해줬고 무엇보다 프랑스군의 해체를 시도하려했던 다른 연합국들을 프랑스군의 핀란드 전선파견으로 대처함으로서 프랑스군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12] 패튼의 지휘하에 셔먼 1000대로 구성된 기갑부대가 참전하였다. [13] 극도의 반공성향을 가진 소련포로들로 구성되었으며 지휘관은 원 역사대로 블라소프와 카민스키가 지휘하고 있다. [14] 오토 슈코르체니 대령이 지휘하는 팔시름예거의 전폭적인 지원과 더불어 블라스코비츠 원수의 포병대가 투입되었다. [15] 톨보이 5발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며, 그랜드슬램 한발도 준비 되어있다고 한다 [16] 베르너 폰 브라운 등이 원래 독일인이고 원역사에서도 로켓의 시초가 되는 V2(로켓)을 개발한 독일이었던 만큼 원래 항공우주 기술이 발달한 나라였기도 했고 원역사의 우주경쟁도 독일로부터 기술진과 연구자료를 획득한 양국에 의해 촉발했듯이 이 세계에서는 충분히 독일이 먼저 인공위성을 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17] 현대 역사를 통해 비유하자면 포클랜드 전쟁을 보게 된 영국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8] 결국 이런 문제는 최후반부의 함대결전에서 비스마르크와 샤른호르스트가 야마토와 나가토에게 격침당하게 만든다(...) [19] 물론 충분한 자금과 공돌이를 갈아서... [20] 실제로 판터 G형의 전비중량은 44.8t으로, 소련의 IS-2, IS-3 중전차(46t내외)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21] 주인공이 폴란드군에도 판터와 티거 일부 물량을 넘겨 주었다. 쿠르스크 전투 당시 배치양은 독일군이 판터 500대 티거 150대, 폴란드군이 판터 100대 티거 50대다. 그렇게 전장에 나온 두 전차는 소련군에게 독일군과 폴란드가 겪었던 T-34와 KV-1 쇼크를 되돌려 주고 있다. [22] [[M3 스튜어트|M3 스튜어트 [23] 원랜 아흐트 아흐트(Acht-Acht, Acht-Achter, 8-8) 포라는 애칭이었다. [24] 공군과 같이 6일동안 24시간 내내 공격을 퍼부었다. [25] 미국제 고출력 엔진을 쓰기 위해 다된 설계를 급히 뜯어고친 마개조 버전이지만, 기존 엔진이 워낙 쓰레기라서 마개조 버전이 훨씬 안정적이고 성능도 좋다고... [26] 이 내용은 Me 262 문서에도 나와있다. [27] 알자스급은 15인치 4연장 3기를 올릴 예정이었다. 당연하게도 샤른호르스트급과 리슐리외급은 포탑이 호환되지 않는다. [28] 당시 소련은 티르피츠에 맞설 전함전력이라곤 구시대 전함인 강구트급 전함밖에 없었다. 소비에츠키 소유즈급 전함은 미완성이었다. [29] 뜻은 재상이다. 빌헬름 3세가 자신의 재상이 되라는 명령을 거부한 디트리히에게 그러면 최소한 이렇게라도 재상을 가지겠다는 뜻으로 다음과 같이 이름을 지었다. 전후 기준 3대를 만들었는데, 1번은 당연히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자 전함이었던 비스마르크, 2번은 재상부 장관이었던 얄마르 샤흐트, 그리고 3번 함의 이름은 재상부 차관이었던 디트리히 샤흐트이다. 결국 어쨌든 그를 재상으로 임명하기는 한 셈. [30] 이들의 활약 덕분에 필리핀에 상륙할 예정이던 일본군 12만 중 3만이나 바닷속으로 보내 버렸다. [31] 덕분에 전함 마라는 기존역사와 동일하게 함수 절반만 살아남아 해상포대 역할을 하는 중이다. [32] 보다 정확히는 폭격에는 살아남았지만 그 이후 돌입해온 이탈리아군에 맞서 소총을 쏘며 저항하다 눈먼 탄에 맞고 전사한 것이다. 즉, 포로로 잡을수도 있었는데 전사시킨거라 오스트리아의 민족주의가 더 거세게 폭발할 수 있었고 무솔리니도 대체 왜 빌헬름 황자를 전사시킨거냐며 곤혹스러워 하기도 했다. [33] 종전 협상에서 쥐트티롤을 돌려받는다. 다만 이스트리아 반도와 슬로베니아는 민족 문제도 있고 독일의 지나친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는 처칠의 의중도 있어 포기했다. [34] 이 점에 대해서는 민주세력, 융커 등 모든 정치세력들의 의견이 동일했다. [35] 조건을 안 들어주면 체코슬로바키아의 산업시설을 모조리 독일로 옮겨 빈털터리로 만든 다음,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분할하여 각각 독립시킬 것이라고 협박했다. [36] 완전히 장식은 아니고 마오쩌둥 참수 작전 때 폴란드의 공수부대가 활약하는 장면이 나온다. [37] 무려 400기에 달하는 슈투카 편대가 프랑스 해군을 조져버리기 위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38] 벨기에는 칼레를, 영국은 노르망디를 원했고 브르타뉴까지 독립하라는 얘기가 나왔지만 조약이 파토나면 전선을 담당해야하는 독일이 바이마르 공화국이 체결한 로카르노 조약때문에 땅을 뜯을 수가 없고 디트리히가 식민지에 대한 욕심도 거의 없어서 뜯어먹을게 많지 않다고 판단. 이후에 분쟁을 없애기 위해 다른 국가에도 관대한 협상을 요구한다. 알자스의 경우도 독일에 할양된게 아니라 투표를 통해 독립국이 되었다. 로렌은 그대로 프랑스에 존속했다. [39] 이러한 프랑스의 전시 경제 운용은 메포 벡셀의 고안자이자 독일의 재상인 얄마르 샤흐트의 머리에서 나왔다. [40] 독일로서는 100만대군이 그쪽에 주둔하기만 해도 소련군이 견제를 위해 레닌그라드의 병력을 분산 배치해야 돼서 그냥 자리만 지켜도 그럭저럭 만족하는 상황이었다. [41] 다만 2차 대전 당시 현실의 이탈리아의 기업들은 전범기업에 해당하지 않는 것처럼 패전국의 전쟁을 도왔다고 무조건 전범기업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독나없의 프랑스가 저지른 일들을 생각해보면 전범기업이 되는 건 피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42] 물론 독일 내부의 반대 세력의 주장 때문에 돈은 더 냈다(...) [43] 육군은 100만 이상 보유가 불가능하다. [44] 디트리히는 나치 독일 치하에선 매국 행위로 연결된 페탱의 성향이 지금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며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45] 이 세계관에서는 국제 연합은 미국, 독일, 영국, 소련 4개 국가가 상임이사국이다. 다만 실제 역사에 존재하는 거부권이 절대적이지는 않아서 90% 이상의 나라가 찬성할 경우 통과할 수 있다. [46] 실제 후드는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침몰했는데, 후드가 침몰하자 미쳐버린 영국 해군 전 부대가 비스마르크를 미친 듯 쫓아서 결국 침몰시키는 데 성공했다. 상대가 비스마르크에서 야마토로 업그레이드되었다는 것이 차이지만. [47] 이 과정에서 무사시에 타고 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또한 전사한다. [48] 심지어 오스트리아 국경방위대는 군대가 아니라 경찰이다. 이탈리아의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경찰에게 패배한 것(...) [49] 군부가 제대로 폴란드를 공략하지 못한 것을 견제하기 위해 반전 공작이 성공한 것처럼 보고했지만, 저 연설로 인해 단숨에 소강 상태로 접어들고 말았다. [50] 이것이 매우 큰 나비 효과를 불러오는데, 멕시코에서 은둔하고 있던 트로츠키가 이에 격분해서 제4인터내셔널을 다시 본격적으로 일으키기 위해 미국으로 입국하고, 그로 인해 미국의 반공 정서를 더욱 자극하게 되면서 이후 대통령 선거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51] 실제로는 전사하지 않았지만,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외전에 따르면 제대한 뒤 소련 남부에 정착하여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여동생과 살게 된다. [52] 삼두정이긴 하지만 주코프가 정치력이 부족하고 티토는 유고출신 외부인사라 안드로포프가 주역이긴 했다. [53] 실제 소련의 역사에서는 80년대 말에 다당제, 선거제가 도입되었고 서기장의 직함도 대통령으로 바뀌었다. [54] 불신도 있지만 연합국이 소련과의 절멸전을 원하지 않다는 이유가 더 크다. 일례로 베를린 회담 당시 영국이나 벨기에 등 독일 서쪽의 국가들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들여 소련을 전복시키자고 주장하자 이에 디트리히가 그럴거면 총동원령 선포하고 동부전선에 파병하라고 일갈한다. 그러자 처칠마저 주변의 만류로 아무말도 못했을 정도. 이렇듯 연합국 내에서조차 소련의 전복은 하고는 싶지만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55] 전략적 가치가 우크라이나보다 크게 떨어져서 이쪽으로 공세가 올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이건 소련도 똑같아서 전략적 가치가 너무 낮아서 벨라루스로 공격할 생각이 없었으나, 워낙 사기가 떨어져서 당장의 승리가 급한 탓에 벨라루스를 공격하게 됐다. [56] 연합국으로부터 트란실바니아 합병 여론을 독일이 설득시키는 것에도 자국의 재무장에도 도움이 되었기에 승인하였다. 당장은 자국의 무기생산이 차질이 생겨 재무장에 어려움이 있지만, 진보된 독일제 장비의 지원을 받는 것이 이익이고 전후에 공장을 돌려받은 후에도 라이센스 생산을 통해 그대로 공장을 가동할 수 있기 때문. [57] 독일에 반전 사보타주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베리야가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NKVD 공작원에게 무리하게 암살을 시도하도록 요구했고, 그 결과 암살이 실패한다. 이후 트로츠키는 다시 공산 혁명을 일으켜 스탈린과 싸우기 위해 미국으로 밀입국한다. [58] 셔먼 중형전차 5천 대를 한꺼번에 지원할 수 없으며 해당 물량이 모두 전장에 도착할 때면 독일에서는 5호 전차 판터, 6호 전차 티거, 레오파르트 경전차 등이 실전 배치되는 터라 당장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군수보급에 혼선이 생겨 불필요한 비용이 늘어날 판이었다. 그래서 디트리히는 장비 대신에 병력이나 보내라고 다른 나라들이 죽네 사네 하는 판국에 장사나 하려는 심보로 온 테프트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려서 그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59] 이 과정에서 일본에 대한 대비를 주문한 윌키에게 반대한 테프트 등의 공화당 계열 정부 인사들과 군인들은 모조리 물갈이 당했다고 한다. [60] 소련 측도 일본이 미친 짓을 했다는 것을 알기에 즉시 일본과의 동맹을 파기했다. [61] 참으로 적절한 이름이다. 태평양 전쟁 전까지 일본은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라고 불렸다. [62] 원 역사에서는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5개국이다. [63] 독일이 발표한 핵무기의 위험성이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에 큰 역할을 했다. [64] 문제는 이런 행패를 핀란드에 원군으로 프랑스 대육군이 파견된 상태에서 부린 것. [65] 레오폴트 2세 때 벨기에령 콩고에서 벌인 착취의 참상을 국가 차원에서 은폐한 것. 자세한 내용은 레오폴트 2세 항목으로 들어가서 콩고 파트에 나온다. [66] 이후 잠수함전대는 정보교환은 전보 등으로만 나누는 한편 통신망에다 하울링을 해대며 일본 해군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67] 심지어 루델은 한수 더 떠서 슈투카로 기습공격을 하는 도중에도 일본군 통신망에 "오레사마노, 나마에와, 한스, 울리히, 루델! 키싸마타치노, 흐메와, 오레사마노, 히타라키니, 낫타!" (이 몸의 이름은 한스 울리히 루델! 네놈들의 배는 이 몸의 공적이 되었다!) 라며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다. [68] 이 총체적 난국은 당연히 일어 해독 담당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요원이 참석한 연합군에 의해 도청되고 있었는데 연합군 측은 답이 안 나오는 무전 내용에 임정 요원이 스파이거나 적이 기만전술을 피는 거 아닌가 하고 의심까지 했다. [69] 묘사가 일품인데 나약한 귀축 영미의 백인들 밑에서 노예로 일하는 깜둥이라며 얕보는 순간 중화기에 갈려나가고 어찌저찌 백병전에 들어선 순간 일본군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건장한 에티오피아군의 체격에 압도당한 채 죽는다. [70] 3단계인 공고급 순양전함과 중순양함, 경순양함, 구축함을 이용한 야간수뢰전은 해당 작전에 투입될 함선들이 이미 대거 손실한 탓에 3단계를 시행할 생각을 못했다. [71] 이때 일본은 강철도, 기름도 없어서 전투에서 이기든 지든 전쟁을 이어나갈 능력이 없었다. 강철이 없으니 손해를 입은 장비를 수리하거나 새로 만들 수도 없고 기름이 없으니 장비를 굴릴 수도 없었기 때문. 게다가 이기면 연합국 특히 미국의 물량 공세가 기다리고 지면 그대로 해군은 괴멸이다. [72] 현실에서는 요크타운은 미드웨이 해전, 렉싱턴은 산호해 해전에서 침몰되었다. 위 해전들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당연히 다치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멀쩡한 상태였던 것. [73] 얼마나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유키카제는 역사에서처럼 끝까지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74] 폭격광으로 유명한 독일의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미국의 커티스 르메이, 영국의 아서 해리스 세 사람이 모여서 한 공습으로 도쿄의 80%를 소멸시킨 불바다를 만들었다. 3개국 쑥재배 권위자들의 합동 공연 [75] 현실의 비스마르크급 전함과 이 소설의 야마토급 전함의 운명이 서로 바뀐다. 야마토는 함대결전때 후드를 격침시키고 그로인해 빡돈 영국에 의해 정말 온갖 공격을 다 받지만 어떻게든 버티다가 어뢰를 맞고 키가 먹통이 된 후 한번 더 어뢰를 얻어맞아 결국 침몰하고 무사시는 톨보이를 맞고 침몰해 버린다. 각각 야마토는 비스마르크, 무사시는 티르피츠에 해당한다. 현실의 나치독일의 운명을 이 소설의 일본이 그대로 따라간다는점과 야마토급과 비스마르크급은 각각 각국의 최대크기의 전함이자 해군력 대비 지나치게 크게 건조한 전함, 거기에 크기에 비해 많은 문제점을 가졌던 점 등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76] 현실에서는 야마토 호텔같은 조롱이나 들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적어도 여기서는 조국을 위해 제대로 된 군함의 삶을 살았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게 단순히 현실의 비스마르크의 운명을 그대로 따라간거지만... [77] 원역사의 대륙타통작전은 1944년에 실행되었다 [78] 순간 디트리히는 폭소하고 말았는데, 그건 원역사의 중국 공산당이 저지르고 있는 현실을 알기 때문. 그러나 현실에서도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에는 연방주의적인 모습으로 티베트, 위구르 등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마냥 고증에 틀린건 아니다 [79] 대통령중심제와는 달리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을 대신하는 자리로 일종의 명예직이다. 현실에선 독일 대통령이 이런 케이스. [80] 권총, 소총 가리지 않고 45구경 총알을 발사할 수 있도록 개조했다고 한다. 은퇴하기 전에 모든 총을 45구경 총알을 쏠 수 있도록 개조하라는 괴상한 지시를 내렸다가 군의 반대로 무산된 기묘한 실책이 언급되는데 아마... [81] 참고로 실제 역사에서 대한민국은 셀라시에 황제에 대한 빚이 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이탈리아에게 지배당했던 아픈 기억을 바탕으로 한국이 같은 고통을 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의 근위대를 파견한 사람이 바로 셀라시에 황제였던 것. [82] 이때부터 사회주의를 버리고 임정에 합류하는 여운형 같은 인물들도 있었다. [83] 실제로 이들은 원역사에서 홍군을 따라 옌안에 있었기에 홍군의 리더인 마오쩌둥도 도망치다 사살당한 상황에서 이들이라고 살아남았을 리는 없다. [84] 독소전으로 이미 국력을 엄청나게 잃은데다가 미국을 등에 업은 자유 러시아와의 내전이 아직 남아있었고 독일의 영향권에 있는 만주에 김일성의 만주 진공은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제2의 독소전으로 향하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에 들어줄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85] 원역사에서의 옌안파, 소련파로 추정 [86] 이승만이 임정을 대표하게 되면 대한민국을 도와줘도 결국엔 미국의 영향권으로 넘어가는, 죽 쒀 개 주는 꼴을 당할 것을 우려했다. [87] 이는 실제 역사에서는 거꾸로였다. 김구는 주석으로 들어올 수가 없어서 결국 개인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물론 이건 김구가 의도한 것은 아니며 이승만은 극단적으로 좌파를 혐오했기에 여운형을 위시한 중도파 사회주의 세력의 주도로 정치에서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88] 이 세계관 경제에서 한국은 원역사의 일본을, 일본은 원 역사의 독일의 역사의 절차를 밟는다는 것이 아이러니.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621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621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