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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영삼과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에 대해 다룬 문서이다. 참고로 김영삼은 생전 직설적인 어법과 독설로 꽤나 유명한 정치인이었고,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도 독재자에 대한 악평 외엔 특히 민주화 이후 정치인들에 대해선 상황에 따라 인터뷰 시기마다 자주 바뀌어 오락가락하는 면이 있었다. 이를 참고하면서 보자.2. 목록
2.1. 상도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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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영춘 전 국회 사무총장 |
상도동계는 김영삼의 자택이 상도동에 있다 해서 김영삼 계파의 일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상도동계 원로들이 현역이었던 시절(주로 1960~90년대)엔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쌍벽을 이루던 계파였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동교동계나 상도동계나 단순히 양김의 집이 거기 있던 것만으로 이름이 그렇게 지어진 것이 아니라, 정부의 탄압과 감시를 매우 심각하게 받던[1] 시기에 비밀 이야기를 할 곳이 각자의 집밖에 없어서 거기서 주요 당 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 많았었고, 신변의 위협까지 받던 시기에는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적지 않은 인원의 비서(훗날 주요 정치인사가 된 사람들)[2]들이 아예 그 집에서 돌아가며 숙식을 한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즉, 당시 이들의 집은 하나의 사무실이나 회사급이었다. 그래서 기자들이건 정부 주요 인사들이건 그곳 근처에서 기웃거려야 하기 일쑤였고, 그런 사람들끼리 정보를 나누는 대화를 할 때 "어디가?" 하면 "상도동 간다!" 혹은 "동교동 간다!" 등의 표현을 자주 쓰게 되면서 그 곳에 안 갈 때도 계파 사람을 표현할 때, "상도동 사람 만난다!" 혹은 "동교동 쪽 사람 만난다!" 하는 일이 많아지며 아예 계파명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이는 군사정권의 수장들도 차이가 없어서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 전두환은 연희동 자택 등을 중심으로 가신들이 모여서 밀실정치를 하던 일종의 반관저, 사저 정치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던 당시 군사정부에서도 이들이 모이는 것 자체까지 통제하지는 못하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21세기 유명 신흥 정치세력이라 할 수 있는 친노나 친문 등이 김해파나 거제파 등으로 불리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일정 지역에 항시 모여있던 세력도 아니라 장소보단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친X하는 작법들이 언론계에서 유행한 탓도 있고[3], 상도동계, 동교동계와 생성 및 발전 메카니즘이 다르기 때문도 있다. 상도동계나 동교동계는 지도자 한 명의 카리스마 속에 그야말로 함께 먹고 자고 정부의 감시를 피해 비밀회의도 하여 혈육 같은 친밀감을 늘리면서 접착력이 강하게 생성된 계파이나[4], 신흥 정치세력들은 정치적 성향과 소신, 혹은 정치인에 대한 호감으로 뭉친 일종의 팬덤 형태라서 사적 친분의 영향력이 이전만큼 크게 강조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김영삼 본인이 90년대 집권하면서 보수 진영에서 하나회 인물들을 대거 숙청한 후 보수정당의 뿌리 중 한 역할을 했었기 때문에[5], 대부분은 신한국당, 한나라당이 이어지던 이명박 정부 때까지도 한나라당의 원로급을 맡고 있었으며[6] 2010년대 기준 대표적인 현역 정치인으로 김무성[7], 서청원[8], 정병국[9][10], 김영춘[11], 박재호[12] 등이 있다. 은퇴한 이로는 김수한, 최형우, 김동영[13], 서석재, 김덕룡[14], 김광일, 박종웅, 강삼재, 신상우, 박관용, 황병태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김영삼의 천거로 정치를 시작한 정치인으로 한나라당계에는 이회창[15], 이인제, 이명박[16], 손학규[17], 이재오, 홍준표, 안상수, 정의화, 김문수, 이방호, 심재철, 박형준, 김태호 등이 있고, 민주당계는 노무현, 안희정, 이광재 등이 있다. 다만, 이들은 상도동계로 분류되진 않는다. 김영삼과 함께 한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아 김영삼 직속(또는 비서)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 다만 ' YS키즈'라는 표현은 언론에서 사용된다.
1984년 말, 김영삼과 김대중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기반으로 신한민주당 창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민추협 세력과 기타 세력 간 인적 지분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 김영삼 계열과 김대중 계열의 의견이 나뉘면서 김영삼 계열 정치인들을 분류하기 위해 상도동계로 불렀던 것이 시초다. 이후 대체로 연합하며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으나 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되며 뜻을 달리하게 됐으며, 3당 합당을 계기로 동교동계와는 완전히 갈라졌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계파였지만 김영삼 퇴임 후, 이회창이 당권을 차지하여 한나라당이 보수정당으로서 색을 더 갖추기 시작하였고[18], 이해타산에 따른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상도동계라는 정치 계파가 무색해졌고,[19] 멤버들도 세월의 흐름을 피해갈 순 없는지 연로해감에 따라 대부분이 정계에서 자취를 감춘 데다 남아있는 정치인도 친이, 친박, 친노, 친문 같은 새로운 구심축의 등장에 따라 여기에 속하면서 현재 상도동계를 자처하는 인물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상태다.[20] 그리고 구심축이던 김영삼까지 사망함에 따라 상도동계도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세대가 되었다.
2.2. 이승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인물이며 실질적인 국부이고 건국의 아버지이다. 1960년의 3.15 부정선거 전까지의 이승만은 정통이다. 김구는 정치적 감각이 없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정치인이며, 정치적 판단도 김구는 이승만을 못 따라간다.
김영삼의 평[21]
이승만 정부 시절, 김영삼은
장택상 前 국무총리의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만 25세의 나이에 자유당 후보로 당선됐다. 허나
사사오입 개헌 논란으로 1년도 안되어 탈당하고 이승만과 사이가 틀어진다. 김영삼이 2009년 시사 주간지 <시사오늘>과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때 경무대를 찾아가 이승만과 직접 만나 "박사님을 위해서라도 개헌하면 안 된다"고 진정 어린 조언을 했으나 이승만은 화가 난 듯 손을 떨더니 말없이 나가 버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탈당은
6년 뒤엔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22]김영삼의 평[21]
2.3. 박정희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이후 야당 정치인 김영삼은 반(反)군부 투쟁에 나섰다. 1963년에는 군정 연장 반대집회에 참여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었다. 1969년에는 박정희의 3선 개헌을 비판하던 와중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 초산 테러’를 당할 뻔했다. 다만, 김대중 납치 사건처럼 직접적인 지시를 청와대가 내렸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하여간 그야말로 김영삼은 항거하려고 목숨까지 걸었다.
사실상 박정희 정권에게 종언을 고한 사건이었다는 소리를 듣는 1979년 8월 9일 YH 사건으로 김영삼은 정국의 중심에 섰다. 이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간단히 설명하자면, 가발 회사인 YH무역 여성 노동자 170여 명이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당시 김영삼은 신민당 당사를 에워싸고 까칠하게 굴던 경찰 간부의 멱살을 잡고 따귀를 올려붙였다. 8월 11일엔 경찰 2,000여 명이 투입되어 YH무역 노동자 전원을 연행했다.
이 시기에 조일환 등 3명의 신민당 의원은 평소 이철승의 지지도가 높았는데. 선거에서 결과가 뒤집힌 점을 들어 불법으로 총재가 되었다며 "총재직무중지"를 요청하였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을 제어하는 수단으로 한국에 대한 원조를 모두 중단해야 한다"는 언급을 하고, 이를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국회의원의 품의가 없는 망발로 규정하고, 무술경위들을 동원해 날치기로 통과되어 신민당 총재직에 이어 10월 의원직까지 박탈 당하고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김영삼 의원 제명이 결국 일어나자 10월 13일 야당 의원들은 전원 자진사퇴를 제출했고, 공화당은 사퇴를 모두 받아들일 수 없으니 이 중 선택해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허나 이는 신민당 의원들의 지지층이었던 부산과 마산을 자극해, 10월 16일부터 부마항쟁이 발발한다. 이에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이 투입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10.26 사건이 발생하며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피살당한다.
10.26 사건 이후 김영삼은 피살된 박정희를 조문하면서 "하나님도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라고 했으나... 2003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선 당시 "총 맞아도 싸다" 고 생각했다고 밝힌 걸 보면 그냥 고인을 조문하는 자리에서 고인을 욕되게 하는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겉치레로 한 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009년 인터뷰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 김대중과는 화해했지만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못을 박기까지 했다.[23]
2.4.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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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서[24][25] |
다만, 1990년 3당 합당이 이뤄지면서 군사정권 관련 인사들이 내건 조건이 처벌의 감형이었다. 이는 집권하자마자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현직(?) 하나회 척결 외엔 집권 3년째인 1995년 전반기[27]까지만 해도 여론의 질타를 받은 그 유명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못한다'라는 검찰의 괴상한 논리에서 볼 수 있듯 전직에 대한 처벌이 자제되면서 어느 정도 지켜지는 듯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에서 '성공한 쿠데타 역시 처벌할 수 있다'라는 판결이 나오고[28], 1995년 10월 통합민주당 국회의원이었던 박계동이 노태우의 비자금 존재를 폭로하면서[29] 노태우에 대한 구속 수사가 이뤄지고 국민들의 5-6공 비판 여론이 최고조에 이르자, 이를 계기로 김영삼은 뚝심있게 12.12 군사반란의 주역들을 처벌하는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과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포함한 신군부 재판 회부를 이끌어낸다. 이는 쿠데타를 통해 군사독재정권을 세운 반란수괴의 뒤통수를 친 셈이었으니, 국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었다[30].
두 사람 모두 권력 무대에서 퇴장한 이후에도 김영삼은 그 특유의 직설적 화법으로 전두환을 디스했다. 2010년 광복절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주최한 전직 대통령 정모에 초청을 받았을 때 전두환도 참석하자 전두환이 듣는 와중에 "전두환이는 와 불렀노? 점마는 대통령도 아이데이. 죽어도 국립묘지 몬 간다."라고 폭풍 디스를 했으며, 와인을 찾는 전두환에게 "니는 청와대에 술 처무러 왔나?''라고 대놓고 면박을 주어 전두환이 화를 참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간 일화가 있다.[31]
사실 김영삼은 인터뷰를 할 때도 전두환은 뻔뻔하고 치졸하다며 엄청 까댔다. 정권을 잡았을 때는 폭압적인 모습을 보였으면서, 문민정부 출범 후 잡혀들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이를 양김이 감형시켜주니 후에는 낯짝 두껍게 굽실거리는 게[32]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한다.[33] 김영삼은 차라리 노태우가 인간성이나 성격 면에서 더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언급했을 정도였는데, 이 이야기는 노태우 단락에서 후술한다.
이토록 사이가 나빴던 두 사람이지만, 노태우가 투병으로 인해 칩거에 들어간 2000년대 중반부터는 위 사진처럼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기도 했다. 보통 전직 대통령들은 재임 순서대로 자리 배치를 해주는데, 가운데 사람이 못 나오니 서로 옆자리에 앉게 되었던 것.
전두환이 속으로 얼마나 사무쳤으면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조문은 왔지만, 화해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끝까지 대답을 안 했을 정도다. 그래도 조문을 와 주었기에 전두환도 사후 김영삼의 부인 손명순 명의로 된 화환을 받았다.
2.5. 노태우
노태우는 하나회의 2인자였고, 전두환과 더불어 신군부 군사반란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뒤 처음으로 치러진 대선이었던 1987년 13대 대선에서 김영삼-김대중의 분열에 힘입어 당선되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민주적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김영삼도 전두환과 달리 노태우는 전직 대통령으로 인정했다.노태우는 집권 후, 쿠데타를 통해 국민의 반발을 무시하고 체육관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던 전두환과 달리 '국민의 뜻에 따라 선출되었다'는 명분도 있었고,[34] 여소야대 정국인 점도 한몫하긴 했으나 야당과도 원만한 관계를 구축하고 협의해서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전두환을 백담사로 귀양보내고 정, 관, 군 내의 전두환계 세력 일부를 경질하기도 했다. 당시 전두환이 노태우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본인이 상왕 행세를 하려는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전두환 세력의 위세가 약화됐다.[35] 실제로 현 대한민국 헌법 상 전직 대통령을 국가원로자문회의의 의장으로 둘 수 있다고 되어있는데 이 국가원로자문회의가 바로 전두환이 퇴임한 후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고 자기가 국가원로자문의장으로서 상왕 대통령으로 뒤에서 조종하려고 만들어 둔 자리인 것이다. 하지만 노태우는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뒤 이를 설치하지 않고 본인의 대통령 행보를 이어나간다.
더욱이 노태우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김영삼과 상당히 가깝게 지냈고, 야당 대표들과 자주 만나서 국정현안을 소개하고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3당합당 이후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대표를 지낼 때에는 아예 매주 청와대로 불러서 김영삼에게 국정현안을 알려주고 현안을 의논했다. 노태우가 권좌를 차지한 뒤부터는 양김과 더 많이 교류했고, 이후 김영삼과 노태우, 김종필, 박태준은 통일민주당-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을 통합했다. 이게 3당 합당인데, 여기서 태어난 정당이 민주자유당이고 이 계보가 (2021년 4월 기준으로) 국민의힘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3당합당 이후 김영삼을 결코 믿을 수 없다며 김영삼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反YS 민정계 출신들의 주장을 묻어버린 노태우는 차기는 김영삼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하지만 자신의 후임 대통령인 김영삼 역시 임기를 마치고 청와대를 떠나고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재임중이던 시절 김영삼을 맹비난하고 김영삼을 민주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하며 국민들에게 죄송하다고 밝힌 적도 있는 등 아주 원만한 관계도 아니었다. 노태우는 당시 김영삼이 경선을 거부하고 자신을 지명하라고 했다면서 YS를 "민주주의와 관계없는 사람.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YS 측은 이에 대해 전혀 근거가 없으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맹 비난.[36]
그래도 김영삼은 생전 노태우의 인간성에 대해선 인정하고 제법 호평했다. 물론 하나회라는 악연 때문에 훗날 김영삼은 전두환과 함께 노태우를 감옥에 보내기야 했지만, 노태우는 반발하던 전두환과 달리 그런 와중에도 별 탈 없이 묵묵하게 모든 걸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노태우가 5공 군사정권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지만, 그나마 전두환보단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민주화가 된 제6공화국 이후에도 전두환보다는 덜 까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2.6.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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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씨는 대단히 어려운 일을 아주 쉽게 생각한다.
김대중[37]
최고의
동지이자
라이벌로 20세기 중후반 민주 진영을 이끈 두 거물이었고,
삼김시대에서도 가장 주요한 이른바
양김으로 군림했다. 둘의 관계는
사이 좋을 때는 등 뒤도 맡길 수 있는 누구보다 든든한 전우였고 나쁠 때는 이렇게 사이가 나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원수라도 진 마냥 죽일듯이 싸워댔던 정적 관계로 정의할 수 있다.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는 대체로 협력 관계였다면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대립 관계가 주로 이어지다가 결국 이 둘은 끝내
그 중 한 명이 죽기 직전이 됐을 때에야 화해할 수 있었다.김대중[37]
정치 계보에서도 둘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민주당의 계파에서 김대중은 장면 신파의 적자로, 김영삼은 조병옥 구파의 적자로 자리잡아 정치 세력을 이끌었다. 둘이 본격적으로 정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1971년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 1차 투표에서는 김영삼이 이겼으나, 과반이 안 돼서 다시 한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이 승리하며 김대중이 대선 후보가 되었는데, 김영삼은 결과에 승복하며 '김대중 후보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이기 때문에 김대중 후보의 선거를 적극 돕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대중이 사실 이때 3등 후보였던 이철승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서 후보 당선이 유력했던 김영삼을 이기게 된 것인데, 김영삼은 고민 끝에 김대중을 돕기로 하였고 김대중의 당선을 위해서 열심히 선거를 뛰었다.
이후 두 사람의 신민당 내 입지상 서로 맞서는 위치에 서서 대결하기도 했으나,[38] 궁극적으로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바는 동일했다. 5공에서도 역시 온갖 정치 탄압과 규제를 받으면서도 협력하여 민추협을 만들고 신한민주당을 창당하는 등 민주화 운동의 정계 구심점으로 맹활약했다.
이들의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로 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김영삼이 제안한 범국민 천만 서명 운동이 있다. 이때 김대중은 '정권의 감시가 서슬퍼런데 현실적으로 천만이 가능하겠냐’며 ‘백만도 어려운데 그냥 백만 서명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김영삼은 '어차피 둘 다 안 될 거면 통 크게 천만 지르자'고 설득해 결국 천만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39]
어쨌든 이들을 포함한 민주화 인사들의 노력으로 한국은 민주주의의 희망을 가지며 전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노력의 결실인 1987년 대선에서 둘의 단일화가 실패하면서 사이가 완전히 멀어졌고, 전두환의 친구이자 신군부의 2인자였던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어부지리로 당선되고 만다. 이때 상도동계에서는 1971년 대선에 YS가 양보해주었는데 1987년에 DJ가 독자 출마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으로 별도의 노선을 굳히게 된다. 특히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90년 3당 합당을 하자 그 둘의 간격은 더욱 더 벌어지게 되었다. 그 후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권을 차지한 김영삼은 아이러니하게도 1997년 대선에서 다음 정권을 김대중에게 넘겨주는데 일조하게 된다. 뭔 소린가 하면, 당시 김영삼은 신한국당 대선후보인 이회창과 갈등이 심했던지라[40], 이회창에 밀린 이인제의 독자 출마를 용인하고 선거 중립을 선언하는 등 김대중 당선을 암묵적으로 동의해준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15대 대선이 끝난 1997년 12월 20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이 대선에 대해 "어려움 속에서 선거의 명예혁명을 이뤄낸 국민들의 용기와 지혜에 경의를 표한다. 김대중 당선자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며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 힘을 모아 협조하자"는 성명을 발표했다.[41][42]
이에 호응했는지 이후 DJ 정부도 YS 차남 김현철에 대한 사면 복권[43]이 거론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 했으나, 당시 사면에 부정적인 국민여론을 거스르지 못한 DJ는 결국 자신의 임기 동안 김현철의 사면 카드를 꺼내지 못했다. 김현철의 사면이 이루어진 것은 노무현 정권 말인 2007년. 둘의 관계는 YS가 김대중에 대해 '내 뒷조사를 엄청 한다'거나,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당시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 #)라 비난했다. 김영삼 정부[44]가 김대중에 노벨평화상 수여를 방해하기 위한 공작을 펼쳤다는 의혹이 있다는 것( #)을 감안하면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다음은 DJ정부 출범 후 지난 4년간 YS가 한 반(反)DJ 독설 가운데 정책 및 상황 인식에서 DJ와 차이나는 주요 대목을 정리한 것이다. 많은 부분에서 YS의 자기합리화와 궤변도 읽히지만, 한편으론 YS의 확고한 신념도 읽을 수 있다. 노무현 딜레마, YS의 '反DJ 독설 4년'
김대중의 말년에도 둘의 사이는 전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기만 했다. 김영삼은 2008년 11월에는 김대중을 '정신이상자'라고 맹비난하며 "김대중의 장점은 거짓말 잘 하는 거"라고 맹비난하기도 했으며, #1 #2 2009년 1월에는 김대중에게 "민주주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맹비난했으며, # 2009년 4월에는 " IMF 사태가 오게 된 것은 최소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65% 책임이 있다"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2014년에 공개된 주장에 따르면 김영삼 집권기에 정부 측에서 김영삼이 노벨평화상[45]을 수여받는 것을 도움과 동시에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수상받는 것을 막기 위해 김대중에 대한 악소문을 노르웨이에 유포했다는 의혹도 있다. #
사실 DJ는 먼저 화해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이때만 해도 김영삼은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0년 6월 전직 대통령 입장으로 김영삼이 청와대 오찬장에 들어섰을 때 김대중은 화해를 요청했지만 YS는 IMF 문제에 대해서 먼저 사과하지 않으면 화해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거절했고, 김대중 역시 더이상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둘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는 2005년에도 있었다. 당시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2005년 11월 6일 오후 YS는 DJ의 동교동 자택으로 전화해 5분 가량 통화했다고 한다. 김대중이 몸이 안좋아 그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자 김영삼은 병문안을 가려고 했으나 병원 쪽의 면회 사절 방침 때문에 무산되었고, 그 대신 퇴원 이후 위문전화를 한 것이다. 이때 김영삼은 "건강은 어떠시냐"고 먼저 물었고, 김대중은 "좋지는 않지만 괜찮다. 전화해줘 감사하다."고 답하며 "김 대통령은 어떠시냐, 손(명순) 여사는 어떠냐, 대만은 잘 다녀오셨냐"고 안부를 건넸다고 한다. 이에 김영삼 역시 "괜찮다."며 이희호 여사의 안부를 물으며 화답했다. 전화 후 김영삼은 측근들에게 "병원에 가보지도 못했는데 뒤늦게나마 통화하니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때문에 둘이 드디어 화해를 한 것이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다시 연락을 주고 받진 않았다.
티격태격하던 (정확히는 YS가 DJ에게 일방적으로 독설을 퍼부은 것이지만) 둘의 사이는, 결국 2009년 위독하여 사경을 헤메는 김대중에게 김영삼이 병문안을 가서야 확실한 화해의 움직임으로 나아가게 된다. 당시 병문안을 마치고 나온 김영삼이
"김대중 대통령하고 나하고 관계는 6대 국회부터 동지적인 관계에 있었고, 오랜 동지적인 관계로 있었지만, 경쟁 관계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입니다. (기자들이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냐고 묻자) 그렇게 봐도 좋죠. 이제 그럴 때가 된 것도 아닙니까?"
라고 언급한 것이다. 이때 김대중은 거의 의식이 없었지만 김영삼은 김대중의 아내
이희호를 위로했고, 김대중 사망 후 측근인 동교동계 정치인들을 찾아가 위로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며 양 계파 간 화해를 이루려고 노력했다.이후 2015년 김영삼이 사망했을 땐 동교동계 정치인들이 조문을 오고 상도동계 정치인들을 위로하면서 화합하는 모습을 보였다.[46]
여담이지만 사석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호로 불렀다고 한다.[47]
2.7.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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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은 훗날 인터뷰에서 '첫 만남이 좋았어요. 군정시대(1961-63년)에 김종필 정보부장이 나를 찾아와 공화당에 참여해달라고 설득을 하는 거예요.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군인 같지 않게 부드러웠습니다. 물론 나는 딱 잘랐습니다. 그랬더니 JP는 '알았습니다. 그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우리 술이나 한 잔 합시다'라고 하더군요. 당시 정권의 실력자인데 그렇게 나오기가 참 어렵지요. 그날 우리 둘이서 기분 좋게 술 한 잔 한 기억이 납니다.'라고 밝혔다. #
이후 김종필은 2인자를 경계한 박정희의 견제로 70년대엔 인척임에도 가택수사만 3번을 당하는 등 거의 정계 은퇴 수준의 탄압을 받았고, 이는 80년대 신군부 시대에도 마찬가지라 어찌보면 쿠데타 선배임에도 양김 못지 않은 탄압을 받았다.[48]
그래서 김영삼도 이때 김종필에게 함께 민주화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김종필은 이땐 그 제안을 거부하고 해외로 도피했고, 그러다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된 1987년 다시 정계에 복귀해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이런 기회주의적 행보에 당연히 당시 민주 진영은 김종필을 좋게 보진 않았는데, 정작 김종필은 김영삼을 지지하려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90년 3당 합당으로 둘은 민주자유당이란 한 당에 몸 담게 되었고, YS의 문민정부가 집권한 이후 2년 정도 JP가 민주자유당 당대표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종필에 대한 상도동계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는지, 이후 김종필의 청구동계는 당시 민주자유당 당권 경쟁에서 처절하게 밀리게 되고 김종필도 결국엔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게 된다. 다만 김영삼은 2001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그의 탈당은 지금까지 나의 정치 역정 가운데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사건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라고 남기거나[49]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때 김종필을 탈당으로 몬 것을 후회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 김영삼이 군부 계열 인물 중 인간적으론 괜찮았다고 그래도 비판을 삼가는 극소수의 인물 중 한명이 김종필이었다. 그 후 김종필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을 만들었고, 제15대 대통령 선거에는 DJP연합을 통해서 정권교체를 이루어낸다. DJP 연합이 깨지고 둘 다 정계 은퇴한 후에는 가끔씩 만났다. 2006년 11월 30일에는 DJ와 노무현의 회동에 대응해 둘이 서울의 한 호텔에서 단독 회동을 가지고 이를 이례적으로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2007년 대선 경선 당시엔 박근혜 대신 이명박 후보를 같이 지지하기도 했다.[50]
김영삼은 박정희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 악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부정적인 평가를 했지만, 박정희 정부의 2인자였던 김종필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며 말년까지 관계를 유지했다. 2003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97년 대선 당시 JP가 당선되기를 바랬었다고 말하기도 했고, JP가 당선됐으면 DJ와 이회창이 나타나지 않았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본인은 JP를 DJ보다 훨씬 유능한 지도자로 생각한다고. #
2015년 11월 22일 김영삼이 사망하자, 노령의 나이에도 휠체어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조문한 김종필은 김영삼을 "신념의 지도자"라며 애도를 표했다.
2.8.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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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당시 김영삼의 행동을 야합으로 여기고 이에 실망하여 민자당에 합류하기를 거부하였고[54], 이후 1991년 민주당과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이 합당해 민주당이 창당되면서 김대중과 인연을 맺게 된다. 이때 김영삼은 "노무현은 내가 픽업했죠. 의리가 없어요."와 같은 평을 했다. 노무현도 97년 대선 정국에서 김대중 지지 유세를 하며 "87년 때까지는 DJ와 함께 훌륭한 분이었으나 3당 합당 이후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인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YS를 평가했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선 한동안 다시 관계가 복원되는 기류도 보였는데, 당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노무현은 양김 세력을 복원할 생각이 있었는지 2002년 5월 3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고향을 방문한 자리에서 "민주세력의 양대 산맥을 통합시켜야 한다. 민주세력이 15년간 단절돼온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후배들이라도 손을 잡을 수 있게 어른들이 도와주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전대통령은 올바로 평가받아야 한다. 과오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총 들고 나와 수많은 사람을 죽인 과오에 비하면 그분들이 무슨 과오냐"고 말하며 '신 민주연합'을 호소했다.
이에 김영삼도 속이 좀 풀렸는지 노무현이 자신을 찾아오자 서로 덕담을 나누는 등[55] 사이가 다시 복원되는 듯했으나, 이때 예전 김영삼으로부터 선물 받은 시계를 내보이며 '이 시계만 보면 지금도 총재님 생각이 난다'는 등 옛 정을 언급했다가 당시만 해도 YS에 대한 앙금이 꽤나 남아있었던 호남이나 민주당 지지층에서 역풍이 불고 지지율이 떨어지자,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한 것 때문에 지지율이 떨어진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런 점도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해 이를 듣고 화가 난 김영삼과 사이가 다시 틀어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탄핵소추를 당했을 때도 중의적 표현이긴 하지만 "사필귀정", "나라가 하루속히 안정되길 바란다"고 했다. # 하지만 2006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김종필과 대담하였는데, 대담 중 노무현을 향해 "정신상태가 이상하다"고 말한 것을 시작으로 김종필도 노무현을 향해 정신분열증이 있는 거 아니냐, 정상이 아니다라며 호응했고 김영삼 본인이 정치에 입문시킨 노무현을 향해서 장소마다 말이 다르다, 대선에서 국민이 선택을 잘못하면 큰일난다고 말했으며 양김 모두가 원색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했지만, 2007년에 차남 김현철이 사면되고 이후 세월이 흘러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이 먼저 세상을 떠나버리자 장례에 참여하였으나, '국민장'에 대해선 '가족장'으로도 충분했다고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음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잡지에 따르면 "내가 발탁해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그는 내게 빚이 있는데, 이렇게 돼 버려서 조금 실망했다"며 "나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헌화할 꽃만 그냥 던져버리고 왔다"고 말해 당시 친노계였던 안희정이 김영삼에게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2.9.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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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동계의 몇몇을 제외한 거의 전부가[56]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 때부터 친이계로 편입돼서 이명박을 지지하기도 했다.[57] 또한, 이명박은 김무성, 박종웅, 김문수, 안경률, 김덕룡, 정의화, 정병국, 김태호, 심재철, 이재오, 이병석, 이방호, 박형준, 안상수, 이상득, 김형오, 박희태[58] 등 김영삼계 출신인 다른 친이계 정치인들과 함께 김영삼과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간적으로도 가깝게 지냈다. 특히 이 중 김덕룡은 상도동계 직계인데, 이재오, 이상득, 박희태와 더불어 친이 6인회에 들어가기도 했다.[59]
다만, 이명박 및 친이계가 2008년 한나라당 공천권을 쥐고 한나라당 공천에서 상도동계 직계 인물 박종웅을 공천에서 탈락시키고, 친이계가 아니었던 김무성을 공천에서 떨어뜨리자 이땐 김영삼이 이명박을 비난하면서 김무성의 선거운동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만큼 김영삼이 김무성을 아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2010년대 들어 당대표가 된 김무성이 당시 박근혜 정부에 너무 노골적으로 굽신거리는 행보를 보이자 아들 SNS를 빌려 병문안도 안오냐고 불쾌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래서 김무성이 급하게 병문안을 갔다.
이명박의 고향인 포항과 본관인 경주는 비록 행정상으로는 경상북도에 소속되어 있지만, 부산과도 지리적으로 멀지는 않기 때문에 실 생활권상으로 PK과도 가까운 지역인데다가[60][61] 이명박의 고향이기도 해서, 압도적인 이명박 지지와 반대로 반박근혜 성향을 보여 정치상으로 PK 계열로 분류되기도 했다.
또한 이명박은 김영삼에게 본인과 친한 저명 인사들을 소개하기도 했고,[62] 재임 중에도 김영삼뿐만 아니라 기타 상도동계 주요 인사들도 대우하였다. 또 문민정부의 핵심 인사들 중에서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중책을 맡은 사람들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문민정부에서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내고 이명박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맡은 한승수와 문민정부에서 경제기획원 차관을 지내고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강만수[63], 그리고 문민정부에서 청와대 제2부속실장을 지내고 이명박 정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정병국이 있다.
어찌됐든 친이계는 보수정당내 민주계에서 상도동계를 잇는 계파로 인정받고 있기에[64] 2015년 김영삼이 사망했을 당시 이명박도 굉장히 비통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2.10.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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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2000년대 초반 인터뷰에선 자신은 박정희 정권과 싸운 사람이고 그 정권이 자신에게 못할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아버지와 딸은 다른 법'이라며 선대(先代)의 일과 연관짓는 비난은 하지 않겠다며 일종의 지원사격을 해주기도 하였다. 허나 여전히 뒤끝은 있었는지 2006년 박근혜가 면도날 테러를 당했을 때도 직접 병문안을 가서 박정희 정부 시절 질산 테러를 당한 자신의 과거를 언급하며 뼈있는 위로를 하기도 했다. 이토록 미묘한 두 사람의 관계는 김영삼이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당시 박근혜와 치열하게 경쟁했던 이명박의 손을 들어주면서 완전히 멀어졌다.
2011년엔 박근혜의 박정희 미화 발언에 열받아 "18년 장기 독재를 한 박정희가 이 나라 군사독재 정권의 원흉"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독설의 정점이 이른바 2012년 7월 나온 "박근혜는 별 거 아니다. 아주 칠푼이다."라는 이른바 칠푼이 발언이었다. "유신시대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사실상 유신의 2인자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대통령이 되기에는 결격사유가 있다"고 한 발언은 덤. 이는 그래도 예의 좀 차리는 정계에선 너무나도 원색적인 비난이라 당시 정계에서도 후폭풍이 꽤나 거셌다.
헌데 재미있는게 고작 몇달 후인 대선 당시엔 박근혜를 지지하기도 했다. 물론 이에 대해선 초반만 해도 지지 안한다고 했다 바뀐거라 내부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65] 대선이 12월 막판에 이르면서 경합 양상을 띄자 김봉조 당시 민주동지회 회장이 찾아와 설득한 모양. 그의 말에 따르면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가 5·16과 유신에 대해 반(反)헌법적이고 정치발전을 훼손했다고 인정하면서 피해자들에게도 사과했다. YS의 아픔이 많지만 지금 마땅한 다른 후보가 없으니 박 후보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말하자 YS가 개인과 단체의 아픔이 있지만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는 거야라면서 승락해줬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일각에선 '전직 대통령으로서 그렇게 말하는 게 자연스럽다. YS는 도와줄 때는 확실히 도와준다. 그러나, 박 당선인이 잘못된 행동을 할 때는 확실하게 비판할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 #
이후 박근혜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몇달 안된 시점부턴 병세가 악화되어 쓰러진 후 2년여간 투병 후 작고했으므로 박근혜의 대통령 활동 시기엔 대외적인 사회적 활동은 딱히 없었다고 볼 수 있다.[66] 그러다 2015년 YS가 사망하면서 박근혜도 현직 대통령으로 국가장을 치르게 되었는데, 피로 누적으로 인한 고열 증세와 당일 눈이 오는 기상 날씨 등을 공식적인 이유로 본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장시간 진행되는 영결식에는 불참해 또 말이 나오기도 했다.[67] 운구차가 떠나는 7~8분간 예를 표한 것이 전부. 이로서 박근혜는 '최초로 국가장에 참석하지 않은 현직 대통령'이라는 기록 아닌 기록을 쓰게 되었다.
2.11.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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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2011년쯤에는 이미 고령으로 정치 활동이 예전만큼 활발하지 못했던 때다가 개인적인 접점도 없어서 딱히 둘이 무슨 큰 연관이 있진 않았다. 다만 2012년 대선 당시엔 새누리당 국민대통합위원회를 맡고 있던 김중태 부위원장 말에 의하면 김덕룡, 문정수, 강삼재를 비롯한 상도동계 일부가 문재인 후보를 지지할 때[70] 비서 김기수 왈 그 미친놈들이라는 표현을 YS가 썼다고 한다. # 다만 정작 이땐 YS 차남이던 김현철조차 아버지와 상의 후 문재인을 지지했다고 밝혔기 때문에 묘한 부분이긴 하다. #[71] 김현철 말에 의하면 대선이 끝난 후 김영삼이 입원하자 문재인이 병문안 온 적도 있다고 한다.[72] 당시 김영삼은 말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옆에 있던 김현철이 "덕담 한마디 해주시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문재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고. 이후 2015년 김영삼이 사망하자 영결식에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2.12. 홍준표
검찰에서 쫓겨나다시피 하고 변호사를 개업해서 힘겹게 살아가던 홍준표를 정계로 부른 인물이 바로 김영삼이다. 사실 가족의 안위를 위해 홍준표 본인도 갈팡질팡하고 있었는데 김영삼이 직접 전화해서 " 문민정부에서 큰 사람이 왜 야당으로 가려 하느냐"라고 하며 신한국당 입당을 권유했다고 한다.
원래는 민주당에 입당하려고 했으나 대통령의 전화에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공직(검사)에서 물러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대통령의 전화에 거부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전화 통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전화에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립 자세로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사반세기 전인 그 시절에 대통령의 권한과 위치를 생각하면 당연한 얘기. 당시만 해도 참여정부[73] 이후의 한국 정치에서는 어느 정도 정립된 당정분리가 저 때는 되어 있지 않아서[74]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하고 여당 내의 당직[75] 인선, 각종 선거 공천에 대놓고 직접 관여했다.[76]
입당 직전 노무현 변호사가 찾아와서 자신과 같이 민주당에 가자고 설득했지만 마음을 바꾸지 않자 실망했고 이때를 기점으로 이들의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홍준표는 상도동계는 아니지만 노무현과 마찬가지로 YS 키즈에 속한다.
홍준표는 정계에 입문한 이후로 특별히 누구의 계파라고 자임한 적은 없지만, 1997년 대선 이후 이회창 총재가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장악한 이후에는 상도동계, 민주계로 분류되어서 이회창 총재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77]
그리고 줄곧 정치를 하면서 김영삼에 대한 존경은 계속해서 표현했다. 2011년 한나라당 대표에 당선한 뒤 상도동을 찾아 YS에게 인사를 할 때도, “저희들이 다 ‘YS 키즈’”라며 “제가 장인, 장모님도 안 계시고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셔서 밖에서 큰절하는 데는 각하밖에 없다”고 말했다. YS 또한 “장하다. 압도적으로 이겼다“며 “내가 역시 공천을 잘했다”고 말할 정도로 홍준표를 아끼기도 했다. #1 #2
YS 사후인 2017년, 자유한국당 대표로 취임한 홍준표는 중앙당사 및 전국 시도 당사에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과 더불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을 걸도록 하기도 했다. 그는 보수 우파의 적통을 이어받은 본당으로서 건국 시대의 상징인 이승만 대통령, 조국 근대화의 상징인 박정희 대통령, 민주화 시대의 상징인 김영삼 대통령의 사진을 당사에 걸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78]
[1]
당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정치인들 모두 물적 증거만 잡지 못했을 뿐, 정황 증거상 자신들과 관련된 편지 검열이나 집 전화를 도청당하는 거 정도는 기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2]
상도동계나 동교동계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당시 다 최소 한 번, 보통 여러 번씩은 그 집에서 숙식을 한 적이 있고, 수도 없이 자주 그 집을 들락거렸다고 보면 된다.
[3]
물론 어떤 일관된 이념이나 사상이 아닌 정치인을 가지고 계파를 나누는게 한국 언론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증표라는 비판도 있지만, 어찌됐든 구분이 쉽다보니 쓰이고 있다.
[4]
물론 이러다 보니 현실은 1인 보스 체제의 변질 아니냐는 비판도 제법 받았고, 이것이 이후 정치권 탈권위주의 바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5]
물론 YS 퇴임 이후부턴
뉴라이트 논란 등 다시 보수 진영이 극우화되면서 사실 뿌리 운운하기 민망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는 보수 내에서도 김영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데서 알 수 있다. 극우층에선 지금도 YS 보수 아니라고 부정한다. 이른바 극우 틀튜브 영상에서도 (지지층들이 싫어하니) YS를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고, 오히려 민주당계 유튜버들이 더 언급하는 경향도 있다.
[6]
거기다가 이명박의 친이가 사실상 김영삼의 상도동계를 잇는 세력이기도 했기 때문에 연관성이 있었다.
[7]
상도동계 막내라고 불렸다고 한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뒤 내무부 차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다만 상도동계에서 잠깐이나마 친박으로 넘어가 활동하기도 했고 2010년대 박근혜 정부 시기엔 박근혜에 너무 굽신거리다 서로 사이가 서먹해지기도 했었다. 허나 김영삼이 서거한 뒤 김무성은 언론 인터뷰에서 "그 분은 내 정치인생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고 나는 그분의 정치적 아들이다"라면서 상주를 자처하여 다른 상도동계 정치인들과 장시간 빈소를 지키기도 했고, 2016년엔 박근혜 탄핵에도 찬성하면서 이후부턴 상도동계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내세우고 있다. 2020년대 기준으론 사실상 정계 은퇴.
[8]
이 작자는 친박으로 전향하고 박근혜가 파면당한 직후, 후배 상도동계 현역 정치인인 김무성, 정병국, 김영춘, 박재호 등의 인물들도 상도동계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사실상 상도동계에서 제명당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2020년대 기준으론 정계 은퇴.
[9]
정병국은 넣기도 하고 안 넣기도 하는데, 넣으면 상도동계의 막내인 김영춘의 바로 윗 세대가 정병국으로 넘어간다.
[10]
일찍이 통일민주당 시절부터 활동했었는데, 2017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새누리당을 탈당,
바른정당을 만들어 초대 대표를 역임했으며, 이후
박주선 등의
동교동계와 연합하여
바른미래당을 창당하였다.
[11]
김영삼의 최측근이자 상도동계 직계로, 명실상부한 상도동계의 막내라고 할 수 있다. 상도동계 직계로서는 한나라당 內 상도동계의 파워가 건재하던 시절부터, 참여정부 시절 한나라당을 탈퇴하고 열린우리당으로 이적한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김영삼이 여기서 있지 뭣하러 탈당하냐고 김영춘을 불러 대화했는데 김영춘은 '이 당이 민주정의당처럼 변해 가는데 더이상 제가 남아있을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2]
김영춘처럼 상도동계 막내로 통하며, 한나라당 시절 열린우리당으로 이적 직후 현재도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현역 상도동계 직계 정치인이다.
[13]
최형우와 김동영은 김영삼의 최측근으로서 민주화 운동 시절부터 평생을 보좌해와 '좌동영 - 우형우'라는 별칭이 생겨날 정도였다. 최형우는 김영삼 집권 뒤로도 큰 권한을 누리면서 승승장구한 반면, 김동영은 김영삼의 대통령 취임도 보지 못한 채 암으로 사망한 상태.
[14]
김영삼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의 선거 운동을 도와 이들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하기도 했다.
[15]
훗날 김영삼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한나라당의 핵심 인물로서 부상하여 당권을 장악하나,
김대중-
노무현에게 대선 연패를 겪는다.
[16]
김영삼이 "우리는 도덕적 선구자가 아닌 능력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라며 현대건설 사장으로 있던 이명박을 정치판에 데뷔시켰다. 혹은 대권 출마를 하려던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을 한 방 먹이기 위한 카드였을 수도 있다. 이명박 영입 외에도 김영삼은 이래저래 정주영을 골탕먹인 경력이 있다. 덕분에 빡친 정주영은 김대중과 손을 잡는다.
[17]
민주화 인사 출신으로, 2000년대 이명박, 박근혜와 경쟁하던 유력 대권주자 중 한명이기도 했으나, 경쟁에서 패하자 결국 민주당으로 이적했고 민주당 당대표까지 지내는 등 나름 족적을 남겼다. 다만 여기서도 문재인한테 밀려 대선에는 못나갔다. 이후 바른미래당-민생당 등을 오락가락하다 정계 은퇴.
[18]
다만 이때만 해도 이회창 역시 독재자 묘소엔 참배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등 자유보수 색채가 더 강하긴 했다. 물론 박근혜가 입당해 점점 군부보수계 색도 다시 짙어지는 시기긴 했다.
[19]
특히나 상도동계 및 김영삼이 발탁한 인사들이 주로 남은 한나라당은 삼김청산론을 기치로 만들어진 정당이라 상도동계라는 이름은 더더욱 무색해졌다.
[20]
이는 동교동계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은 YS 이후 박근혜와 이명박이 권력을 얻고
친이,
친박 체제가 생겼으며, 상도동계가 흩어졌듯이, 민주당 쪽은 DJ 이후 노무현/문재인/정동영 등이 권력을 얻고
친노,
비노 체제가 세워지며 동교동계가 약화되었다. 2010년대 들어 정치 기사에서 동교동계 운운하는 것은 실제 동교동계가 지금까지도 유의미한 간판이라 언급된다기보다는, 동교동계였던 정치인, 혹은 동교동계가 의탁하고 있는 정치인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정도로 보면 된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박지원.
[21]
출처는 2007년 잡지 '시대정신'에 기록된 김영삼과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의 대담.
[22]
만약 계속 남아있었다면 자유당이 몰락할 때, 같이 나락으로 떨어져 대통령은커녕 국회의원도 못 했을 수 있다.
[23]
이건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그냥 단순히 정치적인 견해가 달라서 대립했을 뿐, 그 이전엔 오랜 시간 동안 함께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동료였다. 서로가 인간적으로 티격태격할 순 있어도 사상 자체는 동질성이 있으니 나중에 화해하고 앙금을 풀기도 쉬울 수밖에 없다. 반면 쿠데타로 정국을 뒤집고 불법적으로 권력을 찬탈한 박정희와 전두환은 김영삼과는 보수 진영 정치인이라는(물론 김영삼 입장에선 보수를 사칭하는 가짜 극우보수) 공통점만 있을 뿐 애초에 사상부터가 양립할 수가 없는 인물들이다.
[24]
당시
취임하는 대통령과도 껄끄러운데,
옆자리 짝꿍과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사진에서 어색함이 제대로 풍긴다. 그리고 잠시 뒤 김영삼은 저걸 덮고 깜빡 잠이 들어 자신의 렘수면을 전국에 생중계했다. 대통령을 역임한 순서대로 자리를 배정했는데, 하필 양쪽 사람 모두와 악감정이 덜한
가운데 사람이 투병 중이라 못 나오니 이런 광경이 펼쳐졌던 것.
[25]
여담으로 당시
취임하는 대통령과
옆자리 짝꿍과의 관계도 만만치 않게 껄끄러웠다는 게 개그포인트다.
[26]
거기다 자신의 민주화 운동 동지이자 라이벌인 김대중을
내란음모죄를 들먹이며 가두었고, 그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갈 정도까지 신군부가 위협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상도동계 인사들에게도 누명을 씌우며 고문했으니, 당연히 전두환과 사이가 좋을 리 없다.
[27]
12.12 사태와 5.18의 이론상 공소시효 15년이 만료되던 시기.
[28]
실제로 쿠데타는 일종의 내란으로도 보는 시각도 있다. 심지어 유신헌법 관점에서 보더라도, 엄연히
최규하 前 대통령이라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뽑은 대통령이 있는데 전두환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니 내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9]
사실
서석재 당시 총무처 장관이 먼저 의혹 제기를 한 바 있으나, 민정계의 반발로 되레 서석재가 경질되면서 무마된 상태였다.
[30]
물론, 김영삼 본인도 군부독재 세력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으나 자신이 줄곧 말하던 민주화를 위한 길과 민주정부 수립,
3당 합당 당시에 내건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간다."는 말을 지켜버리니 변절자라고 욕하던 반대파들까지 모두의 지지를 얻어버렸다.
[31]
김영삼은 1929년생, 전두환은
1931년생으로, 김영삼이 전두환보다 2살 더 많았다.
[32]
아이고, 김영삼 김대중 씨, 날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33]
거기다 김영삼 본인도 일본으로 가 TV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전두환에 대한 디스를 엄청 해댔다.
[34]
그것도 그 명분을 직접 건네준
2명의 장본인 중 하나가 김영삼 본인이다.
[35]
다만 전두환계 세력만 사라졌지 하나회 자체가 없어진 건 아니었다. 애초에 노태우 본인도 하나회의 일원이었고, 2인자까지 했던 인물이었던지라 완전한 숙청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 하나회는 김영삼 본인이 직접 대통령이 된 이후에 숙청해서 없앴다.
[36]
물론 당시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문민정부가
박근혜 정부 이전까지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하는 등 국민적으로 버림받다시피 했던 것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37]
재미있는 것은 김영삼은 김대중을 쉬운 일도 대단히 어렵게 생각한다며 정반대로 평가했다는 점이다.
# 두 사람의 살아온 인생이나 성격차가 드러나는 부분.
[38]
김대중이 신민당 대권 후보는 됐지만, 당권은 여전히 김영삼이 70년대에만 당수를 두 번이나 지내는 등 틀어쥐고 있었다. 김대중은 의외라면 의외로 신민당 당수를 지내 본 일이 없음은 물론이고, 87년에 평민당 당수를 지낸 것이 첫 당수직일 정도로 당권과는 연이 멀었다.
[39]
혹은 김대중이 "인구가 몇 명인데 천만 명을 받아?"라고 하자 김영삼이 "그걸 세리(헤아려)보나?"라고 맞받아 쳤다고 한다.
[40]
오죽하면 이회창 지지자 측에서 YS 인형 화형식까지 벌일 정도였다.
#
#
[41]
선거 명예혁명을 이룬 국민들 지혜와 경의, 1997.12.20 동아일보
[42]
김대통령 담화 의미 1997.12.20 동아일보
[43]
보석 석방으로 징역에서는 석방된 상태였다.
[44]
김영삼 본인의 의향이었는지, 부하들의 과잉충성이었는지는 불명. 허나 전자였어도 국가 통수권자로써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45]
김영삼은
1994년 북한과 미국의 제네바 기본합의서 서명으로 북핵 문제가 (당대에는) 일단락되자 한반도 긴장완화의 물꼬가 트였다고 판단하여 노벨평화상 수상을 추진했다고 한다.
[46]
당시 여야의 핵심 정치인이었던 김무성과 박지원이 사적으로 교류가 많았던 사이라 이들을 통해 어느정도 접점이 만들어질 수 있었는데, 김영삼의 유언대로 통합과 화합이 이뤄진 셈이다.
[47]
두 사람의 호는 모두 각자의 고향 지명에서 유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대중의 호 '후광(後廣)'은 김대중의 고향 마을인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유래했고, 김영삼의 호인 '거산(巨山)'은 고향인
거제시에서 '거(巨)'와 정치적 기반인
부산광역시에서 '산(山)'을 따와 지은 것이다.
[48]
이에 대해 김종필은 고약한 아우들을 뒀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49]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하, 2001년, p33
[50]
김종필과 박근혜의 서먹한 관계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51]
다만 상도동계라 불릴 정도로 측근은 아니었고 YS 키즈 중 한명이었다.
[52]
노무현도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돈을 물 쓰듯 썼다고 회고하였다.
[53]
노무현은 김영삼이 자신을 "때로는 근엄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가까이에 때로는 멀리 하면서 노련하게 다뤘다."고 회고한 바 있다.
[54]
김영삼의 최측근으로 여겨지는
김광일 또한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했고, 상도동계 좌장인
최형우마저 첨엔 나도 안간다고 했을 정도로 반발이 세긴 했다. 이에 YS는 일일이 만나며 속내를 털어놓고 설득했다는데[79], 노무현 의원은 만나서 설득해도 안 될 사람이라고 여겨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노무현도 이후 자신 역시 YS를 만나면 어찌 될지 몰랐을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확실한 답은 없는 문제.
[55]
YS의 3당합당을 당시엔 자신도 거세게 비판했지만 지금 와서 보면 또 상당수 군부 세력이 숙청되었으니 공도 있다는 식으로 평가했고, YS 역시 기뻐하면서 대통령 선거 잘해보라고 덕담을 해줬다. 상대주자 이회창과 김영삼의 관계가 여전히 나빴기 때문에 더 그렇기도 했다. 웃긴건 둘 다 YS 본인이 픽업한 인물이었다는 것. 인재 보는 눈은 인정.
[56]
예외로 강삼재는 이회창을 지지했고, 서청원은 박근혜를 지지했으며, 김무성도 당시에는 친박으로 분류됐다.
[57]
당시 박근혜를 지지하던 친박계가 군부보수계를 대표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행보였다.
[58]
사실
이상득,
김형오,
박희태는
민정당에서 정치생활을 시작한 인물들이지만, 14대 대선의 민자당 경선에서 김영삼을 지지하면서 김영삼의 민주계로 사실상 편입되었다.
[59]
본문에서 언급되지 않은 나머지 둘은 이명박 본인과 이명박 정부에서
방송통신위원장을 지낸
최시중이다.
[60]
특히
울산, 포항, 경주가 매우 긴밀한 관계로 엮여있다. 예를 들면
현대제철 포항 제철소의 가장 중요한 고객은 울산의
현대자동차 공장이며,
현대자동차의 자동차 시트 공급처는 경주에 본사가 있는
다스(!)라는 회사였다.
[61]
반대로
경상남도
창녕,
합천 지역의 경우 행정상으로는 경남이지만
대구와 워낙 가깝기 때문에 실 생활권상
TK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 참고로 이런 모호성 때문에 이 지역에서 태어난 인물들은 각자 선택한 고등학교의 위치에 따라 TK 또는 PK로 서로 다르게 분류되는데, 예를 들면
대구에 있는
영남고를 다닌
홍준표와
대구공고를 다닌
전두환은 TK로,
부산에 있는
경남고를 다닌
강만수와
부산고를 다닌
안경률은 PK로 분류된다.
[62]
대표적으로 정운찬 前 국무총리나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있다.
[63]
다만 이명박이 강만수를 기용한 것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에 와서도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특히 진보 좌파 진영에서는 이명박이 문민정부 시절에
외환위기를 일으킨 주범으로 꼽히는 강만수를 기용해
대기업과 부동산 부자에 유리한 경제 정책을 폈다고 주장했다.
[64]
다만 이명박의 스탠스는 좀 애매하긴 하다. 친박 세력도 품어야 되기 때문에 김영삼이 싫어한 박정희도 은근히 띄워주는(17대 대선 경선때 이기고 난 이후에도 어릴 땐 나도 운동권에서 박정희 정부 반대 시위도 하고 했지만 지금은..이라면서 말을 흐리기도 했다) 행보를 보였다. 물론 2023년 박정희 추도식에도 안간다고 에둘러 표현한거 보면 이명박 속내는 본인만 알 것이다.
[65]
사실 문재인 측과도 연락이 있었지만, 과거 노무현 후보 시계 발언처럼 역풍이 불까 우려해 최종적으론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66]
다만 당시에도 YS를 옆에서 모시던 차남 김현철이 SNS에서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들을 올리며 박근혜 정부를 지속적으로 디스했기 때문에 이게 YS의 의중이 담긴 것 아니냐는 세간의 평가는 있었다. 이런걸 보면 김현철이 김영삼 사망 당시 말한 통합과 화합이란 유언이 민주계 화합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보수계 화합을 말하는 것인지 YS의 행보에 비춰보면 중의적이긴 하다. YS의 정치력을 감안하면 일부러 노린 걸지도.
[67]
사실 당시 YS가 사망하면서 지지율이 떨어지던 당시 박근혜 정부의 상황과 겹쳐, 주요 인터넷 사이트 추모댓글란이 칠푼이 드립으로 도배된 영향도 있어보인다.
[68]
문재인은 원래 정치에 별 관심이 없어서 애초에 노무현이 아니었으면 정치를 하지 않을 인물이었고, 대선 출마의 결정적 원인 중 하나도 노무현이었다.
[69]
덕분에 경남고는 대통령을 2명이나 배출한 2020년대 기준 유일한 고등학교다.
[70]
이 3명은 5년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대로 문재인 지지선언을 했다. 특히 강삼재는 문재인과 함께 경희대 총학생회 간부로 같이 학생운동을 했던 인연이 있다.
[71]
정치공학적으로 보자면 이때 어느 쪽이 될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 YS계가 양다리를 걸쳤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도 YS는 보수진영 대통령으로 일단 되어있기 때문에 중립을 선언하며 질질 끌다가 막판에 생색내기용으로 박근혜를 지지하되, 내심으론 또 아들을 통해 민주당쪽과도 루트를 튼 것.
[72]
"2013년(기사에 따라선 2014년이라는 말도 있었는데 현재는 삭제가 된건지 검색이 안된다) 아버님이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을 때 문재인이 문병을 왔어요. 좋은 인상을 받았고 그 뒤 가끔 연락했습니다. 2015년 말 문재인은 경남 김해 출마를 권했습니다. 김해는 노무현 고향이고 그전 선거에서 민주당이 이겼던 지역입니다. 하지만 저는 ‘노무현 후예’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지역에 출마할 명분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버님 상중이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습니다."(다만 김현철은 그전에 이미 민주당으로 재보궐 출마 여부를 타진하다 부정적인 여론 때문에 포기한 적이 있어서 정확한 사실관계는 확인이 필요하다), "문재인을 공개 지지하게 된 것은, 그가 3당 합당 얘기를 꺼내며 보수 정당은 YS 정신을 못 살렸다. 민주화 세력이 재결합하자. YS는 민주화 투쟁의 선두 주자였지 않나. 우리 당이 그 정신을 되살리겠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버님의 유훈은 통합과 화합이었다. 이를 반드시 실천해달라. 정권을 잡아 그렇게만 하면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김현철은 2012, 2017년 문재인을 공개 지지하고 민주당 입당까지 했지만 탈당 후 2022년엔 윤석열을 지지했다.
[73]
노무현 대통령의
당청분리는 본인 대에는 처음 해보는 실험적인 것이라서 그런지 열린우리당과 정권(
청와대)이 공조가 잘 안되어 고생했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도 제왕적 총재였던 이회창이 대선 2연패로 물러났겠다, 또한 권위적인 당의 이미지를 지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열린우리당을 따라서 총재 명칭을 없애고 대표로 바꾸었고, 정권 교체 이후 보수 정부 시절에도 그 당청분리의 기조는 그대로 이어져 2010년대에는 여야를 불문하고 정계의 상식이 되었다.
[74]
2021년 기준
국민의힘이 야당임에도 불구하고 당 재산이 민주당(천억 원대)에 비해 서너 배, 수천억 원 단위나 되는 이유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래 근 40여 년 동안 보수 정권이 장기 집권 했는데, 잘 알다시피 그 후신이 현
국민의힘이다. 당.정.청 분리가 제대로 안 되어 있을 시절이라, 정부의 자산, 즉 세금과 예산을 자연스럽게 스리슬쩍 여당의 당 자산으로 유용할 수 있었다. 2016년 말 탄핵 정국에 김무성 전 대표가 말했던, '지금
새누리당 자산은
전두환 독재 시절에 재벌들 등쳐서 쌓아놓은 것이 그 기반이라, 불법 / 탈법적인 것이라서, 국고에 지금이라도 헌납해야 한다'라는 주장과도 논지가 통한다.
[75]
원내대표, 사무총장 등. 그래서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이
유승민 의원을 원내대표(임기 1년) 임기 몇 달 만에 반강제로 쫓아냈던 것이 시대에 맞지 않게 비상식적이고 구태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76]
오늘날의 정치 풍경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정치 지망생들에게 전화해서 '우리 여당으로 오라' 이렇게 할 수 있는 풍경도 아니거니와, 애초에 그러면 정치 중립을 위반하는 것이라 큰일 난다.
[77]
정작 홍준표와 이회창은 꽤나 막역한 사이라고 한다. 1999년에 홍준표가 선거법을 위반해서 의원직을 상실해서 홍준표의 지역구였던
송파구 갑 보궐 선거에 이회창이 대신 출마해서 당선된 일이 있는데 이회창은 홍준표에게 지역구를 빼앗아서 미안하다며 피선거권을 회복할 수 있도록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협상에 나섰고 홍준표가 2001년 재보궐 선거에서
동대문구 을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공천장까지 직접 챙겨줄 정도로 각별한 사이다. 그리고 홍준표는 지속적으로 이회창에 대한 존경심을 표해왔다.
[78]
물론
상도동계 직계인
정병국은
이승만을 반대한 사람이
박정희이고 박정희와 견원지간인 사람이
김영삼인데, 김영삼에 대해 제대로 안다면 김영삼과 박정희를 같이 배치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산업화 세력인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민주화 세력인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연합한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은 보수정당의 중시조인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에 현재 보수 정당에서 김영삼을 이승만, 박정희와 함께 기리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79]
사실 김영삼 본인조차 이때 마음이 수십차례 바뀌었다고 회고했다. <김영삼 회고록>(백산서당)은 그때를 이렇고 적고 있다. "그 누구와도 상의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몇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민정당과 통합할 것을 결심했지만, 새벽에 눈을 뜨면 다시 마음이 바뀌기를 거듭했다.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살아온 내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쿠데타를 한 세력과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 쿠데타 정권의 재등장을 막고 이 땅에 영원한 문민정부를 세우기 위해, 제3의 길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비록 그 길이 험난한 가시밭길이라도 나는 정의의 길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