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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송( 禮 訟) 또는 예송논쟁( 禮 訟 論 爭)예송의 원래 의미는 '예절에 대한 쟁송, 논쟁'이며 이 문서에서는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한 직후 효종의 의붓어머니[1]인 장렬왕후가 행해야 했던 상례 격식을 두고 서인과 남인 간에 여러 차례 격렬하게 벌어졌던 학술적, 정치적, 사회적 논의를 다룬다.
1차(기해예송, 1659년)는 효종이 사망한 이후, 모후인 장렬왕후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규례'를 두고 일어난 논쟁이다. 그리고 2차(갑인예송, 1674년)는 장렬왕후가 며느리 되는 인선왕후에 대해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로 벌인 논쟁이다(현종 15년).
2차 예송논쟁에서 결국 숙종이 남인의 주장을 들어주면서 서인들은 밀려나게 되었다.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논쟁으로 취급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가 정치, 사회, 생활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또한 왕조 국가의 특성상 국왕의 정통성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에 현실 정치와 크게 엮인 중대한 논란으로, 단순한 예법 논란이 아니었다. 이 논쟁은 예를 중시했던 조선 시대의 사회·문화적 맥락이 반영된 사안이자 당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전제 왕조 국가 조선에서 왕의 정통성이 걸린 중대한 논쟁이었고, 이후 환국과 연결되어 조선 정치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왕조 국가에서 왕의 정통성은 국기(國基)와 관련된 중대한 사안이다.
동서고금 어느 나라든 국가를 책임지고 이끄는 지도자의 정당성은 매우 중요하며, 정치력은 정당성, 정통성에서 나온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조선 중기부터 일반적이지 않은 계승이 빈번해짐에 따라 정통성 논쟁이 결국 발생했고, 이를 둘러싼 파벌 간 논쟁이 무력 충돌이 아닌 무혈로 끝났단 점에서 예송논쟁은 조선 시기 한국사 내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예송논쟁의 발단을 유럽식으로 묘사하면 '대관식을 제대로 치르지 않은 적장자도 아닌 놈이 왕이랍신다' 하고 일어난 소동이고, 평소에 돈이나 계약 관계를 가지고 국왕과 귀족 사이에 싸움 좀 나던 평시와 달리 계약의 전제 조건인 주권자의 정통성이 걸린 사건이라 심각한 규모의 내전이 발생한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예법이란 이름의 법이 존재한 국가에서 왕에게 특권을 주느냐, 왕도 국민이니 법에 따라야 하느냐의 이야기라 그냥 왕이 심기 뒤틀리면 욕 좀 먹고 목을 쳐버려도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조선은 중앙 집권 체계와 유교 사상이 뿌리 잡은 국가였기에 역대 한반도 국가를 떠나 동시대 국가로 따져도 왕권이 강한 국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예송논쟁은 연산군의 일이 있었다 해도 자신의 권위를 신하들이 운운하는 모욕을 감당한 현종의 초인적인 인내력이 있었으며[2] 신하들도 무기가 아니라 학술 및 사상 논쟁만으로 대단히 평화롭게 해결한 쪽이다.
후대인이 보기에는 뭔 "고작 상복 입는 거 가지고 정치인들이 민생도 팽개치고 쓸데없이 지들끼리 정쟁이나 벌이냐?" 라는 식으로 폄하되기도 하나, 하술하겠지만 이 문제는 절대 단순한 옷을 얼마 동안 입느냐로 싸운 게 아니라 국가 및 왕위 계승의 정통성 그리고 예법을 비롯한 의전을 두고 논쟁이 벌어진 사안이었다. 당장 현대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나 미국 등 국가에서 애국가나 The Star Spangled Banner에 대한 제창을 거부하는 문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등의 국가의전 문제는 2020년대가 된 현재에도 정치적으로 매우 첨예한 갈등 사안으로 번지기에도 충분하다.
한국에서는 애국가 제창 및 국기에 대한 경례로 정치적 논쟁이 발생한 바 있었고, 미국 역시 2016년 당시 콜린 캐퍼닉의 국가 연주 당시 인종 차별 문제 등으로 인한 기립 거부 및 무릎 꿇기 등으로 첨예한 논쟁이 벌어졌었다. 예송논쟁을 단순히 상복 입는 것에 대한 논쟁으로 따지자면, 이 사례들 역시 단순히 "노래를 부르느냐 마느냐, 경례를 하느냐 마느냐, 무릎 꿇느냐 같은 사소한 걸로 싸운다" 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허나 위 사건들 모두 제창이나 기립 거부 등은 표면적 사례일 뿐이고 그 이면에는 더 깊은 정치적인 논쟁과 갈등 요소가 깔려있음을 생각해 보자. 예송논쟁도 그런 것이다.
2.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
1659년 5월 효종이 승하한 후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가 효종을 위해 입어야 할 상복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에 관해 모두가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다. 효종이 적자이지만 장자는 아니었고, 형 소현세자에 대해 이미 어머니가 큰아들에 대한 장례를 마쳤었다. 왕위를 계승받은 국왕이었으므로, 종법상 모후인 장렬왕후가 효종을 차자로 보고 1년짜리 상복인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하는가 장자로 보고 3년짜리 참최복(斬衰服)을 입어야 하는가가 문제된 것이다. 이에 관해 조정 신료들이 물밑에서 조심스럽게 논의를 시작하였다.《국조오례의》에는 효종과 같은 경우, 즉 차적자가 승계하였는데 먼저 승하하고 모후가 생존하여 상복을 입어야 하는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었고, 경국대전의 규정 역시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영의정 정태화는 많은 예학자들에게 의견 조회를 했고, 장자(長子)이든 차자(次子)이든 1년이라는《 경국대전》의 예를 따르려 한 반면 윤휴는 의례를 인용해 비록 효종이 장남은 아니지만 인조의 적통 후계자이니 참최복(3년상)이 맞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신하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었다. 이시백이 문제를 고심하다 정태화에게 서찰을 보내고, 정태화는 송시열에게 물어봤는데, 이때 송시열이 '4종지설(四種之說)'을 꺼내들었다.
4종지설(四種之說)은 의례에 적힌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경우를 아래와 같이 4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 맏아들인데(正體, 정체) 자손을 얻지 못함(不得傳重, 부득전중)
- 적통인데 아들이 아닌 자손이 계승(正而不體, 정이부체). 이를테면 적장자의 적장자가 후사를 이은 경우(즉, 적장손)
- 아들이긴 하지만 적장자는 아님(體而不正, 체이부정). 맏아들이 아닌 다른 아들이 후사를 이은 경우
- 적통도 아니고 아들도 아님(不正不體, 부정부체).
- 이를 다른 말로 전중비정체(傳重非正體)라고도 한다. 맏아들(정체)이 아니지만 자손인 건 맞는다(전중)는 말.[3]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송시열의 발언이 문제가 될 순 있었지만 일단 넘어갔고, 정태화는 아버지가 아들이 죽었을 때의 하던 상례의 관습을 꺼내들어 1년복을, 송시열은 여기다가 대명률을 꺼내어 역시 1년복을 내세웠다. 국제와 대명률이라는 명분이 있던 데다 사실 이때까지 진짜로 아버지가 아들 장례에 3년복을 입은 경우도 없었기에 1년복은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었다.
윤휴의 주장대로 3년복을 하는 것도 맞지만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또 정태화와 송시열의 논리와(관습+대명률) 경국대전에 나온 대로라면 장차남, 적서 관계없이 1년복이고 효종은 인조의 아들이므로 당연히 1년복이므로 정태화와 송시열 측 논리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1년 뒤인 현종 1년(1660) 3월 21일, 허목이 참최복을 주장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윤휴의 주장은 임금은 '왕'이니까 전부 3년복을 입자고 해석할 수도 있다('내종'은 '외종'을 위해서 3년복을 입어야 한다).
이후 송준길이 다급하게 반박했지만 허목은 다시 상소를 올려 송준길을 발라버렸고 서인 진영은 크게 동요했다.
송준길은 "의심되는 게 없던 건 아닌데 국제에 3년복이 없어서 한 겁니다. 근데 허목이 말한 대로라면 장남·차남·3남·4남이 죽을 때마다 3년복을 입어야 합니까? 그리고 의례에도 둘째 이하는 모두 서자라고 한다고 밝혔고 체이부정은 서자로서 이은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서자는 첩의 아들이 아닌 것으로 첩의 아들이라 하면 모순됩니다"라고 주장했다. 송준길의 주장은 좀 어설펐던 게, 서인들이 처음부터 1년을 말하던 것이 아니라 답이 안 나와서 당시에 예학에 가장 밝다고 인정되는 송시열에게 문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인 중에서도 한당에 속하는 원두표 같은 이들은 아예 허목을 지지하면서 이전의 논의에서 큰 실수를 했다고 인정하기까지 했다. 이때 송시열이 다시금 상소로 '효종이 장자가 아니니 1년만 상복을 입어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자칫 현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서인들은 《경국대전》과 《대명률》에는 장남이든 차남이든 다 기년복을 입게 하였으므로 경국대전과 대명률을 따라 기년복을 입자고 실드를 쳤다.[6] 서인의 학문적인 주장은 '왕이라도 장자 아니니까 1년이잖아? 그럼 됐지'라는 것이었다.
성리학적 개념에서 군주는 맹자가 말한 역성혁명에 따라 교체될 수 있는 존재이고, 사대부는 왕의 통치를 보조하는 자들이 아니라 왕과 같이 백성들을 보살피고 양육하는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왕이라고 크게 다른가? 장자가 아니라면 아닌 거지' 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다만 송시열은 상소 마무리 부분에서 "확실히 애매한 부분이 있고 주자급 대성인이 아니면 판단할 수 없다. 서인이든 남인이든 우리 수준에서 함부로 결론 내릴 문제가 아님. 이럴때는 일단 전례를 따르자.[7]"라고 말했는데, 이는 남인들에게도 적당히 물러날 길을 마련해 주면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노련한 수였다. 이때만 해도 상황은 잘 무마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윤선도는 "우리 선왕이 '서자'라면 첩 자식이라는 것이며, 소현세자 애들이 진짜 종통이라는 것이니 왕실이 쪼개진다"는 내용으로 상소를 올리면서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이 상소문 탓에 송시열이 역적이 아니라면 윤선도가 역적이 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윤선도가 옳다면 송시열은 효종의 적통을 부정한 역적이 되고, 송시열이 옳다면 윤선도는 예론을 잘못 편 것도 모자라 송시열을 역적마냥 몬 것이 되어 반좌율에 걸린다고 할 수 있다.
서인들은 '윤선도가 송시열을 역적죄로 모함했다' 주장[8]하며, 윤선도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남인들 역시 가만히 있지 않고 서인들의 윤선도 처벌 요구에 반발하였으며 송시열의 강경한 태도에 동의하지 않았던 일부 서인들까지 윤선도의 주장에 동조하는 등 조정을 비롯하여 조선 전체가 예송이라는 주제를 놓고 들끓었다. 마침내 현종은 윤선도를 귀양 보내고[9] 정태화를 비롯한 서인 다수의 견해를 받아들여 《주자가례》를 근거로 1년설을 채택한다.
권력적인 구도에서 보면 인조반정 이후 성립된 서인, 남인 공존 체제가 송시열이라는 산당의 영수 등장과 함께 깨질 조짐을 보인 사건이라 볼 수 있고 또한 환국 정치의 예고편으로도 볼 수 있다.[10] 인조 반정 이후 30여 년간 조선의 정치 구도는 여당인 서인과 야당인 남인으로 분류되지만, 또한 그 집권 서인이 공서와 청서, 한당과 산당 등의 계파로 갈라져 대립하곤 했기 때문에 남인은 그 사이에서 나름대로 캐스팅보트를 쥘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남인의 입지는 사실상 관제 야당 수준으로 전락해 갔으며 거기에 산당의 송시열이 전면에 나서면서 서인의 계파 갈등을 산당을 중심으로 봉합하자, 이런 흐름이 남인들을 자극하게 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남인 중 강경 세력인 청남(윤휴, 허목)이 서인을 똘똘 뭉치게 만든 송시열을 끌어내리기 위해 논쟁을 이끈 것이었다.
인조반정을 이끈 공서(功西)파들이 인조 정권의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한 책략으로서 당시 명망 높던 오리 이원익에게 영상직을 주는 등 일부 남인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청과의 전쟁에서 청에 굴복한 공서파들에 대해 지방에서 원리 원칙을 교육받아서 올라온 청렴한 서인들이 비판을 가하면서 분화되었는데, 인조 시기까지는 공서파들이 정권을 잡았지만, 기반과 숫자에서 소수였기 때문에 사라져 버렸다. 이후 대동법을 두고서 이를 시행하자는 융통성을 가진 서인들과 역시나 원리 원칙에 집중하던 서인들이 대립하였는데, 원리 원칙을 따지던 사람의 대표가 거의 모든 서인들의 정신적인 스승이라고 불리던 사계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 김집이었고, 우암 송시열은 이 김집의 제자였다. 당시 서인들 대부분이 산당에 속하였으니 서인 정권은 사실 이들 산당이 이끄는 것이었다.
비록 이 논쟁이 서인의 판정승으로 귀결되었지만[11] 지속적으로 남인 유생들의 반발 상소가 올라오고, 몇 년이 지나도록 상소와 주장이 빗발치는 등 여전히 불씨는 남아 있었서 하다못해 왕이 직접 예송 금지령까지 내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불씨는 꼬박 15년 뒤 다시 불타올랐다.
3.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
조선 시대의 환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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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서인은 왕후니까 기년복으로 얘기해 놓고 왕의 결재를 받았는데, 송시열은 9개월이 맞다고 지적하였고, 결국 왕에게 '대공복이 맞는 것 같다'고 올렸다. 이에 현종은 몹시 화를 내어 예조의 담당자들을 모조리 파직해 버렸다. 지난번 송시열과 논박을 펼쳤던 윤휴나 허목은 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윤선도는 이미 3년 전인 1671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대구의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상소를 올려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2차 예송이 일어났다.
송시열은 이번에도 일관된 논리로 효종이 장자가 아니니 인선왕후도 맏며느리가 아니라는 명분으로 9개월만 입어도 된다고 주장했고, 서인들은 《주례》·《의례》에 맏며느리를 위해 9개월 동안 상복을 입게 했음을 근거로 들어 대공복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현종은 '전에는 지금의 법(아들에 대해서 기년복이라는 《국조오례의》)을 썼는데 이제는 옛 법(맏며느리에 대해서 대공복이라는 《주례》·《의례》)을 쓰라니 일관성이 없지 않냐'는 논리로 서인의 주장을 반대하였다. 논리상 현종이 밀리는 건 아니었지만, 졸지에 이렇게 되니 대비는 '아들에게도 1년 상복을, 며느리에게도 1년 상복을 입는' 또 다른 의미의 예법 붕괴가 일어났다.[12]
이런 현종의 태도에 대해 사실상 자신보다 권위가 높은 송시열과 그의 문하들로 장악된 조정에 압박을 느낀 현종이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송시열과 서인을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보기도 한다. 추가로 군신공치(君臣共治) 이념에 따르면 군주(君主)와 사대부(士大夫)의 예(禮)는 동일하다고 하지만 송시열 등 서인의 주장은 국왕 입장에서는 자신과 자기 아버지의 정통성을 약화시키는 주장이라 국왕인 현종 입장에게는 거부감이 드는 주장이었다. 또한 1차 예송 때는 현종은 겨우 10대 후반에 이제 막 왕에 즉위해서 집권당인 서인의 눈치를 봐야 했지만, 2차 예송 때 30대 나이에 15년 가까이 국왕 경험과 권력이 원숙해진 현종 입장에서는 불편한 서인 없이도 국정 운영이 가능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정된다.
갑인예송은 1674년(현종 15년) 7월에 벌어졌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신속하게 마무리되었다. 현종은 송시열에게 싸늘하기 그지없는 비망기를 내려 송시열을 질책했고 송시열과 서인들은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남인이 득세하는 것도 바라지 않았던 현종은 송시열의 제자이자 서인 출신인 김수흥을 영의정에서 파직하고 남인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는 대신 김수흥의 동생 김수항을 좌의정으로 삼아 조정의 균형을 맞추었고 남인이 자신에게 가세하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8월 18일에 현종이 숨을 거두었다. 효종 때처럼 너무 타이밍이 절묘해서 송시열이 현종을 독살한 게 아니냐는 설이 있다. 하지만 예송논쟁 자체는 이미 완만하게 마무리되었고, 송시열과 서인이 역적으로 멸문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임금을 암살할 만한 위기도 아니다.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숙종 시절에 그 말이 안 나왔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인선왕후는 현종의 어머니이다. 어머니가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한창 슬퍼할 시기에 눈물도 참아가며 논쟁을 해결하느라 애를 써야 했으니 병이 악화되기 충분한 환경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현종은 모후의 빈소에서 죽었다. 날짜로 보면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고 반년 후에 본인도 사망했다. 어쨌거나 현종을 이어 왕에 즉위한 숙종은 이 예송을 근거로 송시열이 예송을 잘못 이끈 죄를 물어 서인들을 내쫓았다.
이 예송의 판정승은 남인이 잠시 득세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숙종 때의 환국도 현종이 어느 정도 판을 만들어뒀으니 가능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4. 배경
예송논쟁은 정치적, 철학적, 윤리적 상징성이 엄청났던 사건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단순한 복식 정도였지만, 배경적으로는 서인과 남인(더 정확하게는 동인) 시절부터 있었던 이기1원론과 이기2원론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조선 초기부터 존재하였던 조선의 통치 체제 문제까지 걸려 있던 일대 격전이었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효종의 정통성과 맞물려 대폭발로 이어진 것이 바로 예송논쟁이다. 실제 송시열이 체이부정 이야기를 꺼낸 순간 정태화가 기겁하고 막아서며 경안군 이석견[13]을 이유로 송시열을 막았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예송은 시작부터 왕의 정통성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제였다. 다만 정통성 논쟁은 말을 꺼낸 순간부터 역모로 처벌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나마 곁다리로 낀 상복으로 논쟁을 벌인 것이다. 그리고 논쟁 당사자들도 상복은 그저 꼼수라는 것을 시작부터 알고 있어서, 정태화가 이석견(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을 이야기하거나, 윤선도가 상소에서 왕의 적통과 종통을 이야기한 것이다.논쟁에서 진 이후, 야당으로 계속 갈 것 같던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정계 개편을 시작하고, 먼 훗날이긴 하지만 숙종과 경종, 영조 대에 여러 위기를 넘으면서 다시 정권을 잡는다.[14]
4.1. 효종의 정통성 문제
이 논쟁의 가장 큰 원인이자 핵심은 효종의 정통성 문제다. 사실 상복 문제는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고,[15] 사건의 당사자인 송시열과 정태화, 윤선도 모두 효종의 정통성 문제 때문에 싸우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16]이라 윤선도가 송시열을 역적이라고 주장하고, 전 당파가 나서서 싸운 이유도 이 왕의 정통성 문제 때문이었다. 사실 아래의 사상적 원인들은 배경적 원인이고 어찌보면 조용하게 흘러가서 합의될 만한 원인이었지만 이것이 절대 왕조 국가에서 왕의 정통성이라는 국가 이념적 문제가 맞물려 버리게 되자, 전 당파가 나서서 반대 측을 역적으로 모는 과격한 정쟁으로 격화된 것이다.[17]이 논쟁은 기본 바탕이 굉장히 깊다. 사실 예송논쟁은 흔히 알려진 효종을 넘어 인조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즉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인조반정 후 능양군 이종은 서궁에 유폐된 소성대비에게서 보위를 인정받았는데, 사실 인조는 왕위에 정통성이 전혀 없었다. 보다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일단 능양군 이종은 광해군을 폐위시킨 상황에서 왕으로 즉위하려면 선왕인 선조에서 정통성을 찾아야 했다. 사실 선조의 적자는 인목대비 소생인 영창대군뿐이었으나, 나이가 어린 데다 이미 광해군으로 세자가 정해져서 즉위하지 못했고, 서장자 임해군은 왜란기에 민중에게 납치될 정도의 행패를 부렸기에 둘째인 광해가 전시에 세자로 책임을 다하여 대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차피 인조반정을 능양군이 주도했는데 능양군 본인이 왕이 되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 있다. 허나 반정을 누가 주모했는지와, 그래서 누가 폐위된 임금을 이어 왕이 될거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만약 능양군에게 적절한 정통성이 없다면 아무리 반정을 주도했다고 한들 그 뒤에 적절한 대통을 찾아서 잇게 하는게 타당했다.
인조는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 소생 중에서 셋째(전체적으로는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의 장남이다. 정원군의 형이였던 신성군의 아들이었다면 혹시나 정통성을 주장했을 수도 있는데, 임진년까지 다음 보위를 이을 것으로 생각되던 사람은 광해군과 신성군이었다. 적자는 없고, 서장자인 임해군은 이미 세자가 되기 부족한 인사라는 게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둘째 아들이니 그렇고, 신성군은 선조의 4남이지만, 동복형인 의안군이 어린 나이에 죽으면서 광해군 다음 순위가 된 데다, 어머니가 당시 총애를 받던 인빈 김씨였고, 장인이 당대 조선 제일의 명장 신립이었다. 정여립 사건 이후 좌상이 된 정철이, 영의정 이산해의 충동질에 속아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자는 주장을 앞장서서 하는 건저의 사건으로 몰락할 정도였던 만큼, 신성군이 세자가 될 가능성은 꽤 높았다.[18] 따라서 광해군 폐위 직후 다음대 장손 개념으로 정통성을 세우기에는 더 좋았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당시 인조는 적손도 뭣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심지어 선조의 아들들이 살아있는 상황이니, 인조의 즉위는 사실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즉위의 명분으로 인목대비의 양자, 즉 할아버지인 선조의 양자가 되는 것으로 정통성을 세웠다. 이건 이거대로 탈법이었지만 어쨌건 여기서 멈췄으면 예송논쟁의 시초는 없었을 것[19]이다. 그런데 인조는 병자호란 직전 친부인 정원군을 추숭하면서 대원군을 넘어 원종이라는 묘호까지 올려 정통성을 재창조했다.[20][21]
딴에는 초기의 불안 요소들이 없어졌겠다 불명확한 정통성을 자신의 아비에게서 찾으려던 것이었겠지만, 어찌 되었든 사대부들이 보기에 왕실의 정통성은 끊기고 새로 생겼다. 선조의 경우도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선조는 명종이 조카들 가운데 직접 낙점한 후계자이므로 문제삼는 사람도 없었고 제 아비를 왕으로 올리지도 않았다. 인조는 선조의 양자로서 왕통을 이어받은 주제에 그 사이에다 억지로 자기 친부를 추숭해, 쉽게 말하자면 족보 브레이킹을 저지른 게 문제였다.[22] 그나마 왕실 최고 어른이자 선조의 왕비인 대왕대비 인목왕후가 오래 살았다면 이런 문제가 방지될 수 있었겠지만 인목왕후는 40대 후반의 나이로 일찍 죽었고, 인조는 작정했다는 듯이 인목왕후의 3년상이 끝나는 시기에 맞춰 정원군 추숭을 진행했다.
그러다가 세자와 대군들의 친모이자 조강지처 인열왕후까지 산욕열로 사망한 상태에서, 병자호란을 거치고 난 뒤 볼모로 잡혔던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가 청에서 풀려나 귀국한 지 얼마 못 가 급사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적자이자 장남으로, 사대부들에게는 인조 사후 왕이 되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었다. 급사의 이유는 둘째치고, 이후 인조의 행태가 예송논쟁 이후 영조 초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까지 영향을 끼칠 만큼 문제를 일으켰다.[23] 예학에서 장자가 죽으면 장손에게 먼저 종통이 이어진다고 하였으나, 인조는 소현세자의 가계를 아예 지워버릴 심상이었는지 둘째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하필이면 앞서 언급했듯 당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친모이자 인조의 정비 인열왕후, 대왕대비 인목왕후까지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된 시기라서 이렇게 계승 절차를 무시하는 인조를 말릴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계비 장렬왕후는 어린 건 둘째 치고, 자녀도 없던 탓에 성년이 된 뒤에도 이러한 문제에 대한 발언권이 아예 없었다.
인조는 장자가 죽었는데 며칠 만에 탈상하고[24], 이후 소현세자의 아내이자 인조의 며느리인 민회빈 강씨를 억지에 가까운 주장을 내세워 주살한 데다,[25][26] 예법상 자신의 대통을 이어받는 게 마땅한 소현세자의 아들 3명은 제주도로 유배 보내버리고 사실상 죽게 방치하여 결국 전부 죽거나 요절한다. 당연히 사대부들은 예학을 넘어 인륜적으로 반대했지만 인조는 권력으로 사대부들을 억눌러 버렸다. 이때 인조가 강빈을 두고 욕설을 퍼부었고 이것이 왕의 욕설 가운데 실록에 직접적으로 기록된 유일한 기록이다. 보통 왕의 욕설은 공문서인 실록에 기록할 때는 '들을 수 없는 하교' 등으로 적당히 수정 처리 하는데 이 욕설만큼은 그대로 실어놓았고, 이걸로 사관을 비롯한 사대부들이 강빈 옥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자세한 것은 조선왕조실록/내용 문서 참조.
장자가 장자 대우를 받지 못하려면 장자로서 자리를 이어받을 자질이 없든가, 아들이 없든가, 몸이 약하든가 하는 합리적인 이유(사종지설 중 정체부득전중, 양녕대군과 제안대군의 예)가 있어야 하는데 소현세자는 앞의 3가지가 모두 해당되지 않는다. 소현세자와 강빈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유배된 과정까지 소현세자 일가의 몰락은 당대에도 논란이 될 정도로 정당한 이유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만 살펴봐도 소현세자 부자가 적장자-적손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이 얼마나 부당한지 알 수 있다.
소현세자 이전의 조선 왕조에서 형이 모종의 이유로 계승권을 잃었을 때 형의 자식에게 계승권이 가지 않고, 동생에게 계승권이 간 선례는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이를 납득할 수 있는 내/외부 요인들이 있었다.
- 정종→ 태종: 일단 태종이 이세민마냥 창업에 큰 지분이 있기도 했지만, 왕자의 난에서 태종이 주장한 '적장자가 아닌 서자[27]를 왕으로 내세울 수 없다'는 명분에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게 서자들만 있었고 적자는 없었던 정종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태종이 어떻게든 계승할 여지가 있었다. 중간에 형이 두 명 있는 게 걸리지만 방의는 사망했고 방간은 대형 뻘타를 치는 바람에…또한 정종은 아예 태종을 "아들 삼겠다" 하여 세자로 봉했으니 계승 직전까지는 명목상 정종의 자식이었다.
- 양녕대군→ 세종: '양녕대군으로는 안 되겠다'는 여론이 자리잡아서 가능했다. 중간에 효령대군이 있긴 했으나 '어차피 장자 못 세우는 거면, 왕위가 걸린 문제인데 택현(擇賢) 좀 해야죠?' 했던 건지 반대 의견도 없었다. 그리고 이 선택이 결과적으로 옳았으니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28]
-
의경세자→
예종: 그나마 소현세자-효종과 비슷한 사례. 의경세자가 사망했지만 아들
월산대군이 태어나 있었고 예종과의 나이차도 크지 않았다(4살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예종을 세자로 책봉했는데, 이는 월산대군이 어려도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단종이 11살에 즉위했다가 세조에게 사사당했으니 명분이 아예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삼전도의 굴욕 등으로 권위가 크게 손상된 인조와는 달리 이때의 세조는 이미 왕권을 강화하고 신하들을 장악한 상태였다. 또한 월산대군에게 왕위를 줬다가는 누가 봐도 예종이 '왕의 삼촌'으로서 제2의 세조가 될 확률이 높았기에 신하들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29]
또한 소현세자를 이유도 없이 박대한 인조와는 달리 세조가 의경세자의 가족들에게 무슨 해코지를 한 건 없다. 오히려 매우 후하게 대하였다.[30] 그나마 남아 있던 의경세자의 정통성 문제도 의경세자의 자식인 성종이 즉위하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된다(물론 임사홍이 딴지를 걸었다). - 연산군→ 중종: 양녕대군처럼 '연산군은 이제 글렀다'는 여론이 자리잡아서 가능했다. 성종의 남아있는 유일한 적자이므로 정통성 문제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반정 세력들이나 중종이야 연산군을 쫓아낸 것이 잘못되었다며 누가 들고일어날까 봐 우려했지만, 사건·사고는 많았을지언정 정통성 얘기를 꺼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사대부의 여론이 연산군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 인종→ 명종: 이건 후계자 교체도 아니고, 형에게 자식이 없어서 동생이 계승한 케이스. 인종도 직접 명종을 지목했다.
- 임해군→ 광해군: 양녕대군 사례처럼 임해군의 행실이 너무 나빠서 다음 순위인 광해군을 낙점했다. 오히려 광해군의 정통성 시비는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열폭과 막판에 탄생한 적자의 존재 등으로 유발된 것이다.
인조의 이런 행태에 지방의 명망 있는 산림들은 여전히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인조의 정통성이 있다고 보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아버지 인조의 무자비한 숙청에 엄청난 반감을 가지게 되어 그 뒤를 이은 아들 효종의 정통성은 즉위 전부터 크게 무너졌다. 여기에 더하여 두 번의 호란 이후 조선 사회가 예법에 더 까다로워진 것도 한몫했다. 과거라면 '그럴 수 있지'라고 여기고 넘어갈 일도 이 시대에는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줄여 말하면, 앞서 이야기한 장자인 소현세자가 장자로서 대우를 받지 못한 상태, 심지어 소현세자의 후계인 아들들이 생존하고 있는 상태에서, 차자인 효종이 대통을 계승하였다고 장자로 취급이 될 수 있는가와, 새어머니와 전처 소생 자녀의 관계가 부모 자식 관계인가 더하여, 대비가 종법상 아들인 왕의 신하인가 하는 것까지 따지는 문제였다.
장자 승계가 원칙이었던 조선 사회에서 이러한 인조의 어거지에 가까운 두 차례에 걸친 정통성 훼손은 당연히 봉림대군, 다시 말해 효종의 정통성을 크게 훼손시켰다.[31][32] 효종 본인도 이 정통성 문제 때문에 재위 기간 내내 시달렸으며, 이 때문에 형수인 민회빈 강씨를 폄하하고 김홍욱의 사례처럼 아예 죽여서라도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강빈 사건에 대해서는 편집증적으로 대처하였다. 즉 효종의 즉위 문제는 현대로 비유하자면 거의 부정 선거에 가까운 '계승 스캔들'이었으며, 예송논쟁은 여기에 반발한 사대부들의 집단 반발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예송논쟁이 있었을 때 소현세자의 3남이자 인조의 장손인 이석견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송시열의 주장은 효종과 효종의 아들인 현종의 정통성을 제대로 부정할 수 있었다. 1차 예송을 시작한 윤선도의 반대 상소도 '서인이 효종이 장자가 아니라고 서자 취급하며 비하한다!'라고 시비 걸었다가 서인들에게 깨져서 귀양한 바 있다. 쉽게 말해서 겉으로는 장남과 차남의 서열, 왕족과 양반의 차이를 두고 단순히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를 따지고 있지만 효종의 정통성도 관련이 있었으니 "과연 효종이 왕위를 이은 게 정당한가?"라는 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송시열은 효종이 추친한 북벌을 담당했기에 효종의 총애를 받았던 송시열의 배신처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효종과 송시열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만큼 그리 각별하지 않았고 북벌 내용도 본인의 주장이지 효종 실록 등에는 송시열이 북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된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송시열 문서 참조.
- 조선 시대에 왕위 계승에 관한 성문법 체계는 없지만 종법에 근거하여 제사 상속에 대입하여 보면 "경국대전"의 "예전" '봉사조'와 '입후조'에 그 순위가 규정되어 있다. 순위는 우선 제향자의 ① 적장자 및 적장손, ② 중자 및 적장손, ③ 적장자의 첩자 및 첩장손이며, 이들이 모두 없으면 제향자의 아우에게로 승계되어 위와 같은 순서로 승계되며, 양첩자가 천첩자보다 우선하였다. 단, 적장자일지라도 불구, 불효, 불충 등 제사 승계를 할 수 없는 사유가 있으면 그 자격을 박탈하였는데, 이를 ‘폐적(廢嫡)’이라고 한다. 그래서 폐적되면 장자는 중자의 지위로 떨어지고 차적(次嫡)봉사를 하거나 입양을 하였다. 이에 근거하면 제향자 인조의 적장자는 소현세자, 적장손은 경선군, 경완군, 경안군이고 효종은 중자에 해당하며 현종은 중자의 적장손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효종에 세자에 책봉될 때, 경선군이 살아 있었기에 효종의 세자 승계에 논쟁이 있었고, 현종이 즉위했을 때도 소현 세자의 3남인 경안군이 살아있었기에 종법에 근거하면 현종의 정통성에 문제가 되었고 이는 후대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어서 현종의 손자에 해당하는 영조 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인좌가 영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으며 왕으로 추대한 인물이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이었다.
조선 시대의 지배 이념인 성리학은 '이기론'처럼 세계관을 모두 포섭하는 학문 체계이고 그 안의 분파에 따라 그 사람의 세계관, 정치 성향이 결정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조선의 관료는 모두 성리학에 능통한 학자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논쟁의 기반도 포괄적인 세계관인 성리학적 학문 체계에 포섭시켜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성리학과 정치적 관점이 융화된 모습으로 나타는데, 상복을 입는 기간 자체가 그 사람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일면으로 평가될 수 있고, 특히 위 문제는 효종 치세의 정통성을 인정하느냐의 여부까지 더해진 복잡한 문제가 된다.
단 왕권 정치, 신권 정치의 대립이라는 해석은 좋지만, 그러면 정통성이 부족한 왕은 다르게 대우할 수 있는가?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리고 정통성이 부족한 왕의 적자는 적자이기에 정통성이 높아지는데, 그러면 자식이 아비보다 더 높은 예우를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차라리 마그나 카르타나 명예혁명마냥 입헌 군주국 체제를 도입하려는 것이라면 모를까, 송시열이 이러한 발상으로 그랬던 것도 아니다. 차라리 왕의 권력 자체를 꺾어버리겠다면 몰라도, 정통성으로 왕의 격을 나눈다는 발상 자체가 생산적일 수 없다는 관점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4.1.1. 현종의 역할
어쨌든 예송논쟁의 주체는 서인, 남인, 막 즉위한 현종이다. 점차 교조성을 나타내는 유교 종법과 예법에 관한 견해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며, 같은 당 내부에서도 해석이 엇갈리고 다른 주장이 나오는 등 매우 큰 사건이었다. 동시에 왕은 이런 분열상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치열한 파워 게임이었다. 특히 각종 개설서나 대중 역사서 등에는 현종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등한시되거나 아예 현종의 존재 자체가 무시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현종을 빼놓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의 아들 숙종은 아버지를 모방해 환국 정치를 했고 마침내 왕권의 강화를 이룬다.한편 현종 개인에게는 무척 고통스러운 논쟁이었다. 부모 상중에 일어난 싸움이며, 지리한 예학 논쟁이 이어지는 동안 자신의 정통성은 계속 상처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한쪽의 손을 들 경우 광해군 때같이 자칫 역모가 일어날 위험이 컸다. 산림 등 벼슬 없는 유자들까지도 편이 갈려 싸우기 시작해 골치를 썩였으며, 그 반면 대다수 백성들에겐 다른 세상 얘기일 뿐 민생이 더 시급했다. 현종 치세에 백성들의 삶을 최악으로 내달리게 만든 경신 대기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다만 경신 대기근이 시작되자 연례행사처럼 올라오던 예송 관련 논의는 사라지게 되었다. 애당초 경신 대기근 당시에는 재상이나 왕실의 인척[33] 마저 죽어나갔던 시기라서 왕가나 사대부도 예외 없이 생존의 문제가 더 시급했기에 예송이고 나발이고 신경 쓸 틈도 없었다.
4.2. 이기 이원론 vs 이기 일원론
서인과 남인이 효종의 정통성을 걸고 다투게 된 데는 왕의 경우가 사대부의 경우와 같은가라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는 견해의 차이도 있었다. 왕의 경우가 사대부의 경우와 같다면 당연히 효종은 집안의 2남일 뿐이지만, 왕위가 다른 것보다 앞선다고 보면 효종이 장자냐 아니냐는 접고 넘어갈 일이 된다. 이 차이에서 정통성의 문제가 등장하는 것이다. 왕가의 예법이 사대부와 다르다면 당연히 왕의 정통성 문제는 제기될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왕이 다스리고 신하는 보좌하는 나라'인가, 아니면 '왕과 신하가 같이 다스리는 나라'인가라는 질문에, 두 견해를 각각 이황의 이기 이원론과 이이의 이기 일원론이 학문적으로 지탱해 주고 있었다공자가 '仁'이라고 말한 물체의 본질인 理와 그것이 발현되어서 눈에 보이는 것을 氣라고 지칭하는 것에서 시작되며, 어떠한 움직임에 대하여서 理氣가 어떻게 움직여졌는가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이론이다. 이기 이원론은 정통적인 성리학의 개념으로 理는 氣와 존재가 다른 것으로 理가 먼저 움직임을 결정하면, 氣는 이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기 일원론은 理와 氣는 원래 하나였으니 理가 움직이면 氣도 함께 움직인다는 것이다.[34] 이가 먼저고 기가 따른다면, 조선의 정치도 국왕의 움직임을 신하가 따르는 것이 된다. 이황의 학맥이 기반이 된 동인의 분파인 남인들은 이렇게 생각하여 국왕과 신하의 예가 다르다고 보았다. 물론 이와 기가 대등하다고 보았던 이기 일원론의 이이를 계승한 서인들은 그와 정반대였다. 그리고 이 문제에서 밀리는 것은 붕당의 기반이 되는 학맥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 되었다.[35]
어느 왕조이든 '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새로운 왕조가 일어나면 왕과 개국 공신들 사이의 관계 정립은 중요한 이슈였고, 조선은 이방원이 정도전 등 공신들을 척결하면서 관계를 확립한다. 이와 함께 조선은 정치 이념인 유교적 이상 사회를 위한 왕도 정치를 추구하면서, 우리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절대 왕정을 펼치는 국가가 된다. 이런 절대 왕정의 분위기 속에서 연산군 같은 왕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이 유달리 효(孝)를 중시한 건, 효(孝)는 충(忠)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즉 조선은 철저한 신분 사회의 국가였다. 사대부도 지배 계급으로서 신분 사회의 혜택을 누렸지만 역설적으로 이때문에 사대부도 이 신분제의 정점에 있는 왕(王)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고려에서처럼 무신 정권으로 왕을 갈아치우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무력을 압도하는 정신적 사상이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절대 왕정에 균열이 생긴 게 바로 방계 출신으로서 왕위에 오른 선조 이후부터다. 붕당이 시작되면서 서인의 실질적인 영수 이이, 예송논쟁의 보스 송시열까지 끗발 센 놈들이 계속 나타났고, 왕의 정통성에 흠이 잡히면 왕권은 흔들렸다. 기본적으로 '근왕파'인 동인의 일파인 북인들을 중심으로 국정 운영을 하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나면서 사색 당파 중 한 세력인 북인이 완전히 몰락했다. 결국 이때는 판이 서인 중심으로 짜이면서[36] 약간의 남인을 포함하는 형태로 양반층이 구성되었으니, 정통성이 허약한 효종 초기의 경우는 서인을 끌어안지 않으면 국정 운영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결국 국왕들은 왕권을 서인을 냅다 쳐낼 수 없었다. 대신 상대적으로 약했던 남인을 지원하면서 대립의 균형을 잡았다.[37]
덧붙여, 두 학파 모두 이와 기를 따로 논할지라도 아예 따로 존재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만약 완전히 하나가 독립적이라면 '이기 일원론'이 아니라 '이 일원론'이나 '기 일원론'이라 논해야 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정치에 빗대어 얘기하자면 군주와 신하가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이견이 없었다는 뜻이다. 신하들 없이 임금만 따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약술해 보자면, 이와 기의 하나임을 계속 밀어부치게 되면, 기보다는 이의 입지가 매우 애매해지는데, 바로 이것이 사단 칠정 논변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이기 일원론인 노론판이 되자, 이번에는 인물성이론과 인물성동론으로 싸우는 호락논쟁이 시작되게 되는데 이는 이이의 이통기국에서 이통을 강조할 것인가 기국을 강조할 것인가라는 점에서 대립한 것이다.[38]
5. 의의
이 논쟁에 대해서는 정치권의 다툼과 학문적 견해 대립이 예송이라는 학문적 논쟁으로 표출되었다는 이면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예송논쟁은 이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담론을 양자가 재확인한 것이며, 이는 양자가 추구하는 국가관과 개혁안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에 반영되어 나타났다. 즉 예송논쟁은 정치 철학의 기초에 대한 논쟁이었으며, 조선의 성숙과 함께했다.
5.1. 정치적 의의
예송논쟁은 단순히 입어야 하는 상복 종류와 입어야 하는 기간을 결정하는 사소한 것으로 싸운 논쟁이 절대 아니다. 이는 전대 왕인 효종과 그의 죽은 형 소현세자의 정통성을 두고 벌어진 초대형 정쟁으로, 자칫하면 반란이나 내전의 명분이 될 수도 있었던 대사건이다. 서인과 남인들이 각자 명운을 걸고 치열한 논리로 대립하느라 조선의 정신적, 철학적 사고의 정점을 보여준 정치 이벤트였으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회 경향의 분수령이 된 전환점이었다. 양란과 당쟁으로 인한 사회 질서 붕괴와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혼란이 가중되어 가는 시대를 맞아 유학자들이 조선 질서 회복을 위해 종법과 예법을 더욱 강하게 매듭지으려는 강경파와 종법보다는 실리를 중시했던 실리파, 이렇게 두 유학 사회의 견해가 엇갈린 사건으로, 양란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또한 유교적 윤리와 사회적 규범이 일치하던 조선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현대 사회에서 법의 제정과 적용에 대한 올바름을 따지는 논쟁과 똑같다. 이 논쟁의 쟁점에 '왕의 적장자 여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이 논쟁을 절대로 잉여 병림픽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된다. 왕조 시대의 왕에게 혈통적 정당성이 가지는 의미는 부정 선거 여부를 따지는 것과 같다. 유교적 도리를 국가 이념으로 표방하고 있던 조선에서 예(禮)가 가지고 있는 중대함이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가 지니는 가치와 다를 바 없다. 조선은 성리학적 질서와 원칙으로 돌아가는 왕정 국가였는데, 이미 한참 지난 과거의 역사를 분석된 텍스트로 접하는 현대인에게 이것은 그냥 그랬다는 '현상'으로 인지되기 쉽다. 그러나 당대인들에게 조선은, 성리학적 질서에 기반한 왕조 국가'이면서'(현상) 동시에 '이어야 했다'(당위).
예송논쟁은 계속 언급되었다시피 고작 상복 입는 기간만으로 말싸움한 게 아니라 적자 승계 원칙과 관련된 효종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 논쟁에 가깝다. 이를 상복으로 치환한 것은 직접적으로 '지금의 왕은 정통성이 있다/없다'로 논쟁하는 것은 심각한 불충(不忠)의 문제로 번지기 때문에 돌려 말한 것에 불과하다.
유교 종법을 원칙적으로 따진다면,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 계승권은 인조의 맏손자이자 소현세자의 아들인 경선군에게 돌아가야 하는 게 맞았다.[39] 문제는 실제로는 종법을 어기고 인조의 차남인 효종이 계승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종법에 어긋난 계승이 발생했던 이유는 인조가 소현세자의 가계를 싹 쓸어버리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원칙적으로는 효종과 효종의 아들인 현종은 엄밀히 말하면 왕위 계승의 법칙에 위배된 '비정통 군주'였던 셈이다.[40] 따라서 상복을 3년 입자는 쪽은 종법엔 어긋난 즉위였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 왕위를 물려받았으니 그래도 정통성이 있다는 입장이고, 1년 입자는 쪽은 억지로 왕위는 물려받았지만 종법상 어긋난 즉위였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다는 입장인 것.[41]
더군다나 예송논쟁은 사회 계급 논쟁이기도 했다. 예법을 지키는 데 있어서 최고 권력자가 이데올로기보다 위에 위치한 초월자냐, 아니면 왕도 어디까지나 '유교 이데올로기'를 준수해야 하는 사대부일 뿐이냐의 논쟁은 현대에도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유럽에서도 군주는 '법' 위에 있는가 아닌가는 꾸준한 논쟁거리였으며 최종적으로는 왕도 법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상이 생김에 따라 입헌 군주제가 생겨났다. 당시 조선에서는 '헌법'을 대신한게 유교적 이념과 종법 같은 요소들이었으니 왕도 이를 지켜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논쟁이 바로 예송논쟁이라고 볼 수 있다.
5.1.1. 평화로운 해결
또한 예송논쟁 과정을 보면 이 논쟁으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리어 서인 세력의 지주였던 송시열이 와병하자 논쟁의 상대였던 허목에게 처방을 부탁하고, 허목이 독성 약재인 비상을 포함한 처방을 했지만 결국 송시열이 허목을 믿고 먹어서 나았다는 일화가 나온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수차례나 피바람이 불었던 숙종 시기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와중에도 골수 송시열 추종자들로부터 윤선도가 송시열을 역적으로 모함했으니 반좌의 율을 적용하라고 간접적으로 죽음을 주장한 일도 있긴 했으나 소수에 불과했고 당시의 군주 현종이 적절히 싸움을 완화시키면서 숙종 때의 피바다와는 비교도 안 되는 온건하고 점잖은 분위기였다.현종이나 신하들이나 재위 기간 내내 예송에만 매달린 것도 아니었고, 병자호란의 여파와 당시 이상 기후로 인한 연이은 기근[42] 때문에 피폐해진 민생을 수습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했다. 때문에 붕당 정치의 원칙이 가장 잘 지켜진 시기를 인조반정부터 숙종 시기 경신환국 이전까지로 산정하는데, 실제 전쟁 기간을 제외하면 예송논쟁 시기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붕당 정치의 모습이 지켜지던 시기였다. 뒤의 영조조, 정조조에서 "상대 당파와는 의리상 한 하늘 아래에서 못 삽니다!"라고 악을 써대던 모습에 비하면 여기선 상대 당파의 말이 합리적이면 오히려 편들어 주는 일도 허다했다. 송시열조차 처음에 윤휴가 3년복을 주장했던 것에 "근거가 아주 없진 않은데 사종지설 때문에 안 됩니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송시열의 친구 권시 등은 윤선도를 옹호했고 이시백, 정태화, 원두표 등 한당도 계속 중재를 시도했다. 게다가 산당 내에서도 송준길이 윤선도의 감형을 주장하는 등 온건한 사람들이 많았다.
가령 근세 유럽에서 예송논쟁 같은 것이 벌어지면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전쟁을 일으키는 명분이 되었고, 일본에선 예송논쟁 비슷한 것 때문에 전 국토가 전란에 빠졌다. 학자마다 의견이 있지만 일본 전국 시대의 시발점은 일반적으로 요시마사 쇼군의 후계자 자리을 두고 아들과 동생을 지지하는 다이묘 사이에 벌인 오닌의 난을 곱는다.
또한 이슬람 시아파와 수니파의 끝없는 분쟁의 시작은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누구냐는 분쟁에서 시작되며 수니파는 수니파대로 시아파는 수니파대로 또 정통성을 두고 싸움을 벌였다. 단 수니파의 경우는 우마이야 왕조에서 아바스 왕조로 교체된 계기만 해당된다. 그 이후는 교리별 대립.
5.2. 사상적 의의
예송논쟁을 통해 정립된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은 서인과 남인의 정책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며, 이것이 실용 정치에 반영된다. 대동법에 대한 논의, 노비제에 대한 논쟁, 호적의 재점검, 예학의 보급, 폐4군의 재개발 논의 등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진 시기가 현종 ~ 숙종 시기임을 파악하면 예송논쟁을 통해 정립된 당론이 어떻게 현실 정치에 적용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성리학의 가례, 나아가 성리학의 기본 정신은 "가정 질서의 확립과 이를 통한 안정적인 가족의 확보였다. 이는 예학이 보급된 17세기 후반 이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호적 상의 기록을 통해 개인호가 줄어들고 안정적으로 가정을 구성하는 농가가 증가하는 것을 통해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최재석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한국 가족 제도 연구', 1983년), 1630년 25.6%에 달하던 1인 가족은 1807년 3.9%까지 줄어드는 한편 부부 가족(남녀 부부와 그에 딸린 자식으로 구성된 가족)과 직계 가족(친부부와 아들 부부 등 2쌍 이상으로 구성된 가정)의 합산 비율은 71.2%에서 89%로 증가한다. 성리학의 보급을 통해 안정적인 가족 구성이 확산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유교 문화에서 군주가 우선이냐 부모가 우선이냐는 오랜 떡밥이었다. 성리학에서는 군주와 사대부에 차등을 두지 않았다. 논어에 나온 주 무왕의 현신 10명 중 문모(文母)에 대해 성리학의 개창자 주희는 '그래도 그렇지 어미가 자식의 신하가 되는 것이 가능하겠냐.'고 평하면서 무왕의 어머니가 아니라 무왕의 부인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조선에서는 부모가 높다고 말하는 성리학이 주류이기 때문에 이 말이 옳지만 중국에서는 달랐다. 중국의 경우 황제들이 강력한 황권을 휘둘렀기 때문에 성리학이 주류가 될 수 없었다. 윤휴는 문모를 무왕의 어머니로 보고 비록 모자관계이지만 군신관계가 구성된다고 해석하였다. 성호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충이 앞서고 효가 뒤따른다고 말했다.
예송논쟁의 핵심은 왕족도 일반 사대부의 예와 같이 적용해야 한다는 보편주의와 왕족은 때에 따라서는 특별한 예외를 적용해야 한다는 특수주의의 충돌이다.[43]
5.2.1. 서인과 남인의 사상
임진왜란 이후부터 현종 시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16세기 이래 조세 제도의 방만, 양난과 소빙하기로 인해 국가 경제에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이를 재건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정치에 참여하는 사대부마다 의론이 달랐지만, 대표적으로 서인과 남인의 의견을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5.2.1.1. 서인
김육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대동법이 보급된 이후 이전까지 반대하던 송시열이 찬성론으로 선회하면서,[44] 대동법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노비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노비 종모법 등을 통해 이를 적극적으로 해체하려 하였다. 한편 후에 소론 계통이 되는 남구만 등은 폐4군의 개발을 논의하기도 하였다.기본적으로 서인이 추구했던 사회는 자영농을 직접적으로 육성하여 국가의 기반으로 삼는 사회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노비제의 해체와 민생의 안정을 위한 보조 조치가 필요하였다. 이 때문에 서인 측에서 대대적으로 주장한 것이 '누구나 사대부이며, 왕이든 노비든 성리학적으로 따졌을 때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사람'[45]임을 주장한 이기일원론이었다.
5.2.1.2. 남인
대동법, 호포제 등의 세역 개혁안에 대해서는 윤휴와 허목 등의 인물 사이에 의견차가 있었다. 윤휴는 대동법에 소극적인 대신 호포제를 추진하였고, 허목은 대동법에는 호의적이었으나 호포제에는 비판적이었다. 노비제를 비롯한 사회 질서를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오가작통제와 호패법 등을 강화하여 호구 파악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한편 재야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남인 세력에서는 균전제, 한전제 등으로 토지의 집중을 방지하려고 하였다.기본적으로 남인이 추구했던 사회는 국가적인 힘을 통해 위계 질서를 바로잡고, 이를 통해 각각에게 맞는 역할을 배당하는 사회였다. 이 때문에 왕권의 확립을 주장하였고 신분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폐쇄적이었다.[46] 이를 위해 남인이 내세운 것이 절대성인 이(理)에 대한 관념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사회 질서를 회복코자 한 이기이원론이었다.
남인 계통의 유형원이 균전제를 주장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균전제란 국가에 의해 역(役)을 배당받고, 이에 걸맞은 토지를 수여받는 것인데, 국가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토지 소유 구조를 바로잡고자 한 것이다. 이는 맹자의 정전제 담론을 수용한 남인 고학파(古學派)의 성향이기도 하다.
5.2.2. 결과
위와 같은 서인과 남인의 국가적 목표는 조선에 혼합적으로 반영된다. 서인에 의한 신분제 해체와 자영농 육성의 담론이 18세기 노비제가 대대적으로 해체되고 안정된 중소 농민의 가정이 확립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한편, 남인의 담론을 통해 안정된 왕권이 확립되는 한편 토지 소유 구조에 대한 논의가 계속해서 전개되었다. 17세기의 준비 과정이 있었기에 18세기 서민층의 성장과 탕평 정치가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17세기 중국과 일본이 상업을 융성시킨 것을 보고 '왜 조선은 저렇게 못했냐'는 질타가 있는데, 17세기 중국과 일본을 지탱한 것이 안정적인 농민층의 형성과 농산물 생산의 증대, 그리고 이를 통한 상업 발전[47]었고, 17세기 조선의 국정은 이를 지향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다만 여러 악재로 인해 타 국가들보다 다소 그 발현이 늦었을 뿐이다. 중국에서도 후베이, 쓰촨 등지의 활발한 농지 개발과 종족 질서의 확립을 통한 안정적인 사회 구조가 뒷받침되었기에 상인층의 기반이 형성되었고, 일본에서도 안정적인 무라(村) 질서의 확립과 대대적인 개간 등이 잉여 농수산물의 증대를 낳아 겐로쿠의 번영을 이끌었다. 상업은 1차, 2차 산업에서 나온 잉여 생산물이 없다면 형성될 수 없는 업종이다.
6. 이후
역사적으로 유명한 예송논쟁은 기해예송, 갑인예송이지만 그 이후에도 없는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철종 즉위후 불거진 신해조천의 예송으로 왕조를 세우면 종묘를 세우게 되고 종묘는 천자국에서는 7대까지 제후국은 4대까지 모시며 만일 자리가 차게 되면 조천이라 하여 옮기고 새로운 왕의 위패를 모시게 되며 특별히 불천위로 지정된 경우에는 조천하지 않는다. 그런데 철종이 헌종의 7촌 숙부뻘인게 문제가 되었다. 철종 위로 4대까지는 영조, 진종(효장세자), 정조, 순조[48] 이렇게 되어있기에 직계 항렬로 보면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익종(효명세자)과 헌종이 철종보다 먼저 즉위했던 임금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헌종이 죽어서 종묘에 모셔져야 하는 상황이라서 이 원칙대로라면 진종의 위폐는 조천되어야 했다. 그래서 이 때 권돈인, 김정희 등은 조천에 반대하고 안동 김씨는 조천에 찬성하는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승자는 안동 김씨로 진종은 조천되었으며 권돈인, 김정희 등은 유배되었다.7. 현대에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의미
앞서 항목에서 설명한 것처럼 예송논쟁 뒤에는 다양한 철학적, 이념적, 정치적 배경이 있었고 이것은 왕의 정통성과 직결된 중요한 시대적 주제였다. 그러나 구한말 지식인들부터 왜 이런 쓸모없는 걸로 싸우나라는 반응부터, 조선시대의 왕조 체제와, 왕조 및 국가 정통성/정당성을 지탱하는 유교와 성리학이 무의미해진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형식적인 것에 목숨을 걸었던 의미없는 뻘짓, 내지는 유교의 병폐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부정적 인식이 현대까지 축적되어 '예송논쟁'이라는 네 글자는 한국의 인터넷 상에서 정말 하찮은 문제를 가지고 결론이 나지 않고 지리멸렬한 쓸모없는 말싸움내지 병림픽을 의미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으며, 이런 의미로 거의 비공식 고사성어급 관용어로 쓰이고 있다. 심지어 언론에서까지도 정치권의 시시콜콜해 보이는 수싸움을 '현대판 예송논쟁'이란 말로 비하하기도 한다. 관련 기사 대한민국 언론에서 예송논쟁이라는 말이 사용된다면 저런 부정적으로 굳어진 관용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시
8. 기타
- 조선 후기를 뒤흔든 최대의 논쟁이지만 이를 소재로 한 창작물은 거의 없다. 앞서 말한 '비생산적이고 쓸데없는 논쟁' 이란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고, 무엇보다 논쟁 자체가 왕실의 정통성과 정치 이념의 방향을 두고 한 논쟁이라서 창작물로는 매우 딱딱하고 흥미롭게 풀어내기 어려운 소재이다. 게다가 험악해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실제로는 상당히 온건하고 평화롭게 끝난 논쟁이라서 살벌한 정치적 암투로 재해석하기도 어려운 부분이다.
- 대한제국의 고종이 죽은 1919년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예송논쟁 비슷한 것이 있었다. 대한제국 황제가 붕어하였으니 유림들이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의견과, 나라가 망했는데도 자결하지 않고 오히려 일본의 이태왕이 된 역적에게 상복은 과분하다는 의견으로 갈라진 것인데 일명 복제논쟁이라고 부르는 논쟁이었다. 다만 고종이 일본에 저항하다 일본 당국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극단적인 보수파를 제외하고는 상복을 입는 것으로 빠르게 정리되었다.
- 한자어 의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진 현대에는 이해를 돕기 위해 뒤에 '논쟁'을 덧붙여 '예송 논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나, 이는 역전앞과 같은 겹말 표현이다.
9. 관련 인물
[1]
효종의 친모인
인열왕후가 사망한 후 새로 들어온 왕비로, 예법상 효종의 어머니가 맞긴 하나 워낙 어린 나이(14세에 책봉)에 결혼하였기에 나이상으로는 아들인 효종과 며느리인
인선왕후보다 5살이나 어렸다.
[2]
다만 스트레스는 확실히 컸는지 2차 예송 때는 어머니 인선왕후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도 겹치면서 요절했다. 공교롭게도 현종의 자녀들도 아들인 숙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30대가 되기도 전에 요절했다. 현종의 성격을 어느 정도 물려받은 걸로 보이는 장손자 경종도 30대 후반의 나이로 죽었는데 이쪽의 경우에는 오히려 타고난 성격을 떠나서 노론 신하들이 임금 열외 행위라는 만행을 저질렀기에 화를 내는 게 당연했다.
[3]
조선 왕실사에서는 정조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선조, 인조도 있지 않느냐 싶겠지만 족보상 선조는 명종의 아들로 인조는 선조의 아들로 들어갔다. 반면 정조는 효장세자의 아들로 들어갔는데 효장세자는 영조의 서자였기에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4]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라 정통성이 없다면 실제 맏아들인 소현세자에게 정통성이 있다는 뜻이고, 당연히 적통은 소현세자의 (생존한) 아들인 석견으로 이어지므로 석견이 왕이 되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5]
조선 전기 편찬한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장자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1년을 입도록 규정되었다.
[6]
정확히 말하면 송시열과 같은 서인 내 학자에 가까운 사람들이 하는 주장이 아니라 정태화를 비롯한 당대 정치가들의 송시열을 위한 포장이라고 하는 게 더 가깝다.
[7]
당시까지 조선 왕가에서 아들을 위해 부모가 3년복을 입은 전례가 없었다.
[8]
정확하게는 '
종통이 둘로 갈라진다'는 발언이 문제였다. 송시열이 역적으로 논해졌던 것은 예송 이후의 일이지, 당시의 일은 아니다. 윤선도의 발언 자체가 너무나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고, 당시 조정에서는 논의 자체를 금지했었다.
[9]
현종은 윤선도를 삭탈관직하는 것으로 끝내려고 했지만 결국 서인들이 반좌율을 적용할 것을 주장해 윤선도를
갑산으로 귀양 보냈다.
[10]
다만 환국 정치의 진짜 원인으로는 예송논쟁 그 자체보다는 중요 당사자이면서 한창 나이였던 국왕
현종의 단명, 그리고 현종이 붕당과 세력 균형을 위해 보험으로 들인 왕세자빈이자 며느리
인경왕후가 숙종 대 20살에 아들도 못 낳은 채 천연두로 단명한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현종이 단명하지 않았거나 인경왕후가 오래 살아 아들을 남겼다면 환국 정치가 다소 판이한 방향으로 흐르거나 아예 없을 여지도 있었다. 실제로 이 두 명의 단명은 환국 정치를 주도한 아들 숙종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인경왕후의 단명은 붕당의 균형과 화합의 여지를 아예 붕괴시킨 기사환국을 일으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1]
국가에서 지정한 예법인 《국조오례의》의 내용을 따른 것으로 일반 사대부들이 따지던 《주자가례》보다 일단은 정당성이 있었다. 물론 사대부들 입장에서는 예법으로 치면 국가에서 만든 국조오례의보다는 '주자'가례가 더 정당성이 있다고 여긴 사람도 있겠지만 유교적 예법이라든가 하는건 국가에서 정하는게 아니다. 현실적으로는 그걸 그대로 다 따를 순 없으니 국가적으로 예법을 만들지만 그것들도 결국 유교적 예법을 따르는 것이니 근본적으로는 주자가례도 충분히 정당성이 있다. 다만 아버지(+어머니)가 아들 상에 3년상을 입은 적이 없으니 전례와 관습상으로는 국조오례의가 더 정당한 것일 뿐이었다.
[12]
다만 《국조오례의》에서 왕통을 인정할 경우에는 아들 1년, 맏며느리 1년이라서 예법 붕괴는 없다. 즉 현종의 논리대로라면 둘 다 국조오례의를 쓰고 아들 1년, 며느리 1년은 모두 국조오례의에 따른 것이므로 예법 붕괴도 없다. 서인 측 논리가 빈약하긴 빈약했던 것.
[13]
현종의 사촌 동생이자 인조의 장손이다.
[14]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은 호위청, 어영청 등 군사권을 가진 지위를 사실상 독점해오면서 그 기반을 마련하였다. 비록 인조의 공신들인 공서파들이 사라졌지만, 같은 학파의 선후배 사이이기에 그들의 아들들은 서인의 일원으로서 남아 있었고, 현종 때에 처족인 한당의 김육의 자녀들 같은 경우에도 왕실의 일원으로 예송논쟁에서 산당의 송시열과 싸웠지만, 역시나 같은 서인의 일원으로 숙종 초기의 환국에서 서인의 일원으로 일하였다. 이들은 숙종의 세자 때 아내로 사계 김장생의 가문에서 뽑았다가 사망 이후에 서인의 중진 여흥 민씨에서 중전을 선출했을 만큼 힘을 가졌다. 세자/왕의 어미가 며느리를 그렇게 뽑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었겠는가? 숙종이 명성왕후와 외숙 김석주 및 첫 장인인 김만기와 둘째 장인인 민유중, 그리고 장렬왕후가 사망한 이후에 기사환국으로 장희빈을 중전으로 맞아들이고 남인 정권을 만들었지만, 몇 해 안 가서 갑술환국으로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서인들을 불러들였으니 이들의 권력 독점은 사실 꽤 오래된 것이였다. 또한 서인의 명문가들은 대다수가 조선 초기와 중기에 관학파나 훈구파에 속했던 가문들이 많았으므로 관학파 및 훈구파와도 연관성이 있다.
[15]
만약 상복으로 포장하지 않고 효종의 정통성을 직접 거론했다가는 토론이고 뭐고 열리기도 전에 첫 문제제기 발언 하나만으로도
역적으로 몰려 죽을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왕의 정통성을 몰래 거론했다가 피바람이 분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연산군 시절의
무오사화다. 예송논쟁에서도 효종의 정통성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윤선도가 죽을 뻔하다가
삼수로 귀양 간 것을 보면 이때도 정말 큰 문젯거리였다.
[16]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정태화는 상복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기겁하며 인조의 장손인 이석견을 이유로 송시열을 말렸고, 윤선도도 주요 논거로 효종이 인조의 적통을 이어받은 정통성을 근거로 3년상을 주장했다.
[17]
왕조 시대에서 역적이란 참 좋은 반대파
숙청거리, 중앙 집권이 발달한
동북아시아에서는 더더욱 그러했기에 패자는 역적이 되는 순간
서든데스가 벌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건 그냥 실각과 집권의 단계를 넘어 생과 사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18]
나이가 문제이기는 한데 선조 사망 때까지 살아있었다면 30세로 사실 그래도 임해군, 광해군보단 한참 적지만 그래도 왕위에 못 오를 나이는 아니다.
[19]
예컨대 연산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중종은
성종의 또다른 적자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의 법칙 갖고 태클 걸리는 일이 없었다('성종→ 적자 중종'으로 왕통이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 그러나 인조는 선조의 적차자나 적장손이 아니기 때문에 '왕통이 선조에게서 인조에게로 이어졌다'는 논리를 내세우면
설정 오류가 발생한다. 이를 메꾸려면 어떤 방식으로나 탈법이 발생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니, 사람들도 '반정의 공'으로 퉁치고 넘어가줬을 것이다.
[20]
이게 해괴한 일인 이유는, '원종'에게 종통을 물려준 왕이 누구인지 설명할 방법이 (인조가 선조의 양자가 됨으로써) 없어졌기 때문이다. 왕의 손자로서 왕위를 이은 정조의 경우 왕위를 '대습상속'한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묘호를 올려도 문제될 것이 없지만(다만, 생부인 사도세자가 아니라 양부인 효장세자가 추존됨), 선조의 아들로서 종통을 이어받은 인조는 선조의 다른 아들인 정원군을 왕으로 만들면 본인의 정통성만 흐리게 된다.
[21]
이건 단순한 설정놀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도움 안 되는 짓이었는데, 이를 이유로 친동생들이 능원대군과 능창대군으로 승격했기 때문이다. 즉 왕의 적자로서 왕위를 노릴만한 존재를 제 손으로 만든 것. 능창대군은 이미 죽은 상태였고 능원대군은 본인이 막장이라 결국 별 문제는 없었지만.
[22]
그래서 인조 시기 이미 정원군 추숭을 놓고 대립이 벌어졌다. 하지만 앞서 보면 알겠지만 인조의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정말 거의 없었으며 심지어 반정 공신들도
이귀 빼면 인조 편을 들지 않았을 정도였다.
[23]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자결을 명받은 밀풍군 탄이 바로 소현세자의 3남 석철의 후손이다.
[24]
유학에서 맏아들은 아버지와 거의 같은 위치로, 부모와 같이 3년 상복을 입도록 하였다.
[25]
자신을 독살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는데, 아들 사후 며느리를 엉뚱한 데 엮어 후궁에 감금해 두더니, 갑자기 전복에 독을 넣었다느니 자기한테 문안을 안 오느니 하며 사형시키라고 하질 않나, 죽인 뒤에도 강씨가 원수를 갚아달란 혈서를 남겼다고 주장하더니 신하들이 정식으로 조사하자고 하니 무시해 버리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이 과정에서 여러 명이 고문사당했음에도 증거가 나오지 않았던 점은 덤이다. 그나마 신생이라고 하여 민회빈 강씨 밑에 있던 이가 민회빈 강씨가 저주한 증거를 궁궐 이곳저곳에서 발굴하게 했는데 문제는 이게 민회빈 강씨 사후 1년 뒤 일인지라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26]
강씨를 억지로 죽인 이유 자체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에 어거지로 올려도 강씨는 왕대비가 되기 때문에 봉림대군의 후계로 잇는 본인의 구상이 어그러지기 때문이다. 근데 애초에 계승 자체가 소현세자와 강씨의 아들들을 통해 이어져야 했던 만큼 이런 인조의 명분이나 속사정은 오늘날에든 당대에든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27]
여기서는 이방석을 말한다.
[28]
이 선택이 없었다면
한글이라는 쉬운 문자가 빛을 보지 못했을 거고 우리는 이 문서마저
한자나
가나로 읽고 있었을 것이다.
[29]
사실 결과적으로 보면 월산대군은 물론 훗날 성종이 된 자을산군이 성년이 되고 나서도
수렴청정을 할 왕실 어른인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세자빈
소혜왕후가 모두 대왕대비까지 되고 오래 살았으므로 뻘짓이라 볼 수도 있지만, 정희왕후와 소혜왕후 모두 당시 기준으로 오래 산 편이므로 이 두 명이 오래 살아서 수렴청정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도 어렵긴 했다.
[30]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성종을 매우 아꼈다고 한다.
[31]
여담으로 조선의 경우 이렇게 장자 상속에 목숨을 걸었던 국가였지만 의외라면 의외로 적장자가 상속한 경우는 별로 없고, 그 경우에 은근히 뒷끝이 별로 안 좋은 경우가 많았던 것도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애초에 적장자 상속이라는 매우 어려운 조건을 내세운 것도 한몫하지만(자식 중에서도 아들이, 아들 중에서도 적자가, 적자 중에서도 장자가 정통성이 있다는 논리이니 정말 그 범위가 협소할 수밖에 없다. 물론 내세우는 게 이랬고, 적장자가 없을 시의 왕위 계승 순서도 미리 만들어두었다.)
[32]
당연하지만 꼭 적장자가 아니더라도 종법제에 맞게 계승되었다면 어지간해서는 왕권의 정통성이 훼손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대부들도 사람의 자식들인 만큼 왕가에서 적장자가 아닌 차자에게 물려준다고 해도 적당한 명분만 있다면 그러려니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 실제로 명종과 선조는 각각 인종의 동생, 명종의 조카이지만 인종과 명종이 직접 유언으로 낙점한 후계자였고 선조는 명종과 대비의 허가 하에 명종의 양자로서 대통을 이었다.
[33]
현종의 처백부였던 병조 판서
김좌명이 경신 대기근 와중인 1671년에 죽었고, 그 후임으로 병조 판서가 된
서필원도 얼마 안 가 목숨을 잃었다.
[34]
사실 이기 일원론은 순자의 '화성기위론'과도 연계될 수 있으며, 비록 사물인 氣라고 하더라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의미다. 반대로 이기 이원론은 정통적 성리학의 주장이지만 理를 깨닫는 것만 중시하고, 현실 활동에 대한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35]
불교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이기 이원론은 소승 불교에, 이기 일원론은 대승 불교에 비유할 수 있다. 소승 불교[49]에서는 개인의 노력과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지만 부처(佛)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 즉 대중들이 깨달음으로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는
아라한으로, 아라한의 위(位)는 불위(佛位)가 아니다. 즉 소승 불교에서 부처=왕으로 본다면, 왕은 절대자의 위치에 있다. 이(理)와 기(氣)는 다르므로 임금의 경우와 신하의 경우는 다른 것이다. 반면에 대승 불교에서는 누구나 불성(佛性)이 있으므로 누구나 노력하면 부처(佛)가 될 수 있다. 대승 불교에서 부처=왕으로 본다면, 부처(佛)는 수많은 보살들 중에서 깨달음을 먼저 얻은 보살일 뿐 즉 왕의 절대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理)와 기(氣)는 근본은 같은 것이니 임금의 경우와 신하의 경우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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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층인 서인도 한당, 산당, 원당 등으로 분리되었으나 송시열 대에는 거의 완전히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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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국왕권을 강화하고 싶던 후대의 왕들은 꾸준히 남인에게 관심을 보였다. 완론 탕평을 주장한 영조도, 준론 탕평을 주장한 정조도 남인 세력은 항상 친위 세력에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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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통 쪽이 주자의 성리학에는 더 가깝긴 한데, 이와 기 중에서는 기를 강조해서 양자를 비슷하게 만들어놓고, 다시 거기서 이를 강조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호락논쟁이 양란 이후 신분제와 기존 질서 붕괴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문제인데, 호론이 주류가 되면서 신분제 유지 강화로 간다. 송시열-권상하-한원진으로 이어지는 학파에서 권상하·한원진이 전형적인 호론이다. 이 때문에 왕이나 사대부는 성리학을 배웠다는 점에서 같지만, 성리학을 못 배워 먹은 것들과는 다르다는 결론이 나와버린다.
[39]
여담으로 장남이 죽을 경우 차남이 아니라 장손이 계승하는 것은 유럽의 계승법도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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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숙종의 어머니로서 숙종 재위 기간 내내 월권행위를 많이 자행하여 사관에게도 많이 까였던
명성왕후 김씨가 정작 중전 시절인 현종 재위 기간 내내는 가만히 있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본인이 왕비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인 남편이 비정통 군주였기 때문인 데다, 시어머니인 인선왕후는 아예 그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인선왕후가 사망하고 숙종이 왕위에 오른 시점에서는 눈치를 더 보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면서 제 성격대로 국정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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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소현세자 사망 시에 3년복을 입었다면 그런대로 이번에 3년을 입는 것에 문제점이 줄어들겠지만, 인조는 자신의 장남인 소현세자가 사망 시에 며칠 만에 탈상을 하면서 아들 복상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그때 왕이 며칠 만에 탈상을 하고, 이번에 대비가 3년복을 입는다면 효종이 인조의 장남이 되는 것이니 이거보다 더 큰 문제가 없게 되는 것이였다.
[42]
경술, 신해년의
경신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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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남인측도 서인측도 논리는 충분했던 것이 먼저 남인의 왕=사대부 부정론의 근거를 보면 바로 왕실의 서얼 대우다. 서자의 경우 친자 취급은 받지만 계승권은 적자들에게 밀려 사실상 없다시피 했고 얼자의 경우 아얘 신분상 노비신분이다.(실제로는 알음알음 사실상의 면천이 되었다.) 하지만 왕족의 서얼은 그렇지 않았다. 반면 서인측의 왕=사대부의 경우 왕도 어쩄든 사대부와 마찬가지로 성리학을 배우고 성리학에 따라야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왕이나 사대부나 똑같이 성리학을 배우고 따르는데 그럼 예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발상이 나오는건 이상하지 않은 셈. 결국 어느 한쪽이 반드시 맞다 틀리다 할 수 없는 사회상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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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인 신독재 김집이 대동법에 반대하였는데, 송시열이 어떻게 판단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는데, 나중에 왕과의 대화에서 대동법의 이로움을 말하면서 사실상의 찬성 의견을 보였다.
[45]
왕이든 노비든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왕과 사대부가 함께 정치를 한다는 개념만 있을 뿐이다. 또한 자영농 육성과 노비제 해체와 같은 내용을 일부에서 주장하는데, 이는 율곡이 주장한 理通氣局에서처럼 理만큼 氣에도 집중하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지방에서 중소지주들이었던 사대부의 특성상 전면적인 노비제 해제를 통한 자영농 육성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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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폐쇄적이었다는 것이지, 1660년대부터는 노비 가격이 대폭 폭락하는 등 노비제가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남인 계통의 인물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등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려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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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는 조선에서도 상업으로 호황을 누렸던 시기다. 그게 서민 경제와 결합한 게 18세기라서 그렇지 조선은
남명과
정성공의 활동, 그리고 서양 세력에 대한 다소의 경계로 인해 내려진 해금령 아래에서 일본과 중국 사이를 중개하며 많은 이익을 거두었다. 대표적인 무역품이 중국의 생사(生絲)와 양자를 중개하는 은이었고, 조선 인삼도 호란 이후 개시가 열리면서 무척 잘 나갔다. 일본 내에서 20% ~ 60% 대 순도의 은을 쓰는데 조선은 인삼 팔면서 80% 은 내놓으라고 강짜 부릴 정도. 오히려 무역 수지를 비교하면 중국과 일본이 직교역을 트고 인삼에 대한 수입 대체가 일부 이루어진 18세기에 조선 무역이 더 위축됐고 은가가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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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