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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1:38:56

황영조

파일:오륜기(여백X)_흰색.svg 올림픽 마라톤 남자 우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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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황영조
黃永祚 | Hwang Young-cho
파일:황영조감독.jpg
출생 1970년 3월 22일 ([age(1970-03-22)]세)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 초곡리[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평해 황씨
학력 궁촌국민학교[2] ( 졸업)
근덕중학교 ( 졸업)
강릉명륜고등학교 ( 졸업)
경주대학교 문화관광대학 ( 문화재학 / 학사)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 체육교육학 / 학사[3])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 체육교육학 / 석사[4])
고려대학교 대학원 ( 체육학[5] / 박사[6])
신체 170㎝, 68㎏, 265㎜
종목 육상
주종목 마라톤
종교 불교
병역 예술체육요원[7]
가족 배우자 안서연(1978년생, 2011년 12월 결혼-현재)[8]
장남 황유찬(2013년생)[9]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4. 은퇴 이후5. 평가6. 수상 기록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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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前) 마라톤 선수며,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의 뒤를 이어 동갑내기 마라토너 이봉주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받았다. 현재 대한민국 마라톤계는 그와 이봉주 이후의 후계자가 안타깝게도 나오지 않고 있다.[10][11]

2. 선수 경력

2.1. 마라톤 입문 전

중학생 시절 사이클로 운동을 시작[12]한 황영조는 강릉 명륜고 입학 후 육상으로 전향했다. 처음에는 중거리로 시작했지만 해녀 어머니의 영향으로 폐활량이 컸던(?) 그는 1학년 2학기 때부터 장거리로 전향했다.

2.2. 1991년

경주대학교 재학 시절인 1991년 3월, 동아마라톤에서 3위로 입상하면서 마라톤계에 데뷔했다. 또한 같은 해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2.3. 1992년

2.3.1. 국제대회

1992년 초에는 일본 벳푸의 벳푸-오이타 마라톤에서 2시간 8분 47초를 기록,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2시간 10분의 벽을 깨면서 2위를 기록했다.

당시 한국 마라톤에서 '2시간 10분'은 국제 무대와의 격차를 상징하는 경계처럼 여겨졌고, 이 점에서 황영조가 2시간 10분의 벽을 넘어선 것은 큰 의미를 가졌다. 여기에 그가 앞선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던 것까지 더해지면서, 수개월 후로 다가온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의 입상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주목받게 되었다.

2.3.2.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남자)

Barcelona 1992 Olympic Marathon

파일:황영조 바르셀로나.jpg
황영조! 여유 있는 모습! 황영조, 골인 직전! 황영조! 황영조! 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월계관의 주인, 황영조! 골인 직전! 골인 직전! 황영조! 황영조! 골인! 황영조~! 금메달! 올림픽 금메달! 2시간 13분 23초!
KBS 김윤한 캐스터의 골인 멘트[13]

8월 9일에 열린 마라톤 경기에서 김완기[14], 김재룡[15] 등과 함께 출전해 1936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이후 56년 만에 마라톤 금메달을 수상했다. 이것이 대한민국 국적을 내걸고 받은 사상 첫 마라톤 금메달이자 올림픽 육상에서의 대한민국 소속으로 딴 유일한 금메달이다. 당시 바르셀로나 주경기장 서쪽의 급경사 난코스인 '몬주익 언덕'에서 마지막 스퍼트를 통하여 2·3위로 뒤쫓아오던 일본의 ' 모리시타 고이치'와 독일 선수 스테판 프라이강[16]과의 차이를 크게 벌리고 1위로 골인한 뒤 쓰러진 일화로 인해 몬주익의 영웅이라고 불렸다.

그의 마라톤 금메달은 과거 손기정이 국권 상실 상태로 출전해 일장기를 달고서 금메달을 획득했던 역사상의 상처를 씻었다는 점에서 민족사적으로 지대한 가치가 있었다. 때문에 황영조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골인 장면은 꽤 오랫동안 지상파 방송사의 애국가에도 단골로 삽입됐다.

황영조와 코오롱 마라톤 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팀 동료 김완기는 33km 지점까지 황영조, 모리시타와 선두 그룹을 이루며 모리시타를 견제하고 뒤로 처졌다.[17] 사실상 김완기가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했던 셈이다.[18]

올림픽 마라톤 역사상 최악의 무더위와 최악의 난코스의 조합으로 첫 손에 꼽히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당당히 따낸 황영조의 금메달은 절대로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피와 땀과 눈물의 결실이다.

그리고 이 금메달이 지금까지도 올림픽 남자 마라톤 종목에서 아시아 국가가 획득한 마지막 금메달이다. 또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이봉주의 은메달도 아시아 국가가 획득한 마지막 남자 마라톤 메달이다.[19]
파일:황영조 손기정.jpg
특히 이 날 경기장에는 손기정이 직접 참석하여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컸다. 당시 손기정 옹은 마라톤 경기일(8월 9일)이 56년 전 자신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와 같은 날짜임을 알고서 각별한 기대를 안고 바르셀로나를 방문했던 것이다.[20]

한가지 재미있는 점도 있는데, 1936년 올림픽의 개최 경쟁 도시가 베를린과 바르셀로나였다는 점이다. 1936년 개최에 실패한 후, 1992년에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는데, 이 두 대회의 마라톤 우승자가 한국인이라는 점이다.

한편,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전부터 지긋지긋한 족저근막염에 시달리고 있던 황영조는 대회가 끝난 뒤 12월, 족저근막염 수술을 받고 기나긴 재활에 돌입한다.

2.4. 1994년

4월에 열린 98회 보스턴 마라톤에 이봉주와 함께 출전했다. 92년 12월에 수술 이후 무려 2년4개월간의 기나긴 재활 끝에 출전한 첫 풀코스대회였으며, 한국기록을 25초 앞당긴 2시간8분9초의 기록으로 3위에 1초 차이로 뒤진 4위를 차지한다. 이로써 재활을 아주 성공적으로 마쳤음을 보여주었다. 함께 출전한 이봉주도 2시간9분57초로 11위를 차지하며 준수한 성과를 냈다.

이어 반년 뒤인 10월,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여,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 1위로 골인하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 옛날 한국 육상계의 대선배 손기정과 남승룡에게 일장기를 달고 뛰도록 강요했던 일본 땅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차지하며 다시금 국민들의 환호를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금메달의 기쁨도 잠시, 선수생활 내내 황영조를 괴롭히던 족저근막염 때문에 아시안게임이 끝난지 한달만인 11월에 두번째 족저근막염 수술을 받는다.

2.5. 1995년

10월 28일에 열린 조선일보 춘천국제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레이스 초반 물병을 집다가 다른 선수들에게 밀려 허벅지에 상처가 나는 불운 탓에 2시간 11분 42초라는 다소 저조한 기록으로 에콰도르의 '롤란드 베라'에 불과 2초 차로 밀려 2위를 차지했다. 이듬해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그 다음 해 3월 동아국제마라톤에서 더 좋은 기록을 낼 필요가 있었다.

2.6. 1996년

그러나 3월 24일에 열린 동아국제마라톤 대회에서 선두 그룹을 형성하여 잘 달리다 27㎞ 지점에서 발바닥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 레이스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 힘차게 달렸지만 이미 경쟁자들은 저만치 앞서 달리고 있었고 결국 29위(2시간 25분 45초)로 골인했다. 전년도 조선일보마라톤과 이 대회의 기록 중 좋은 기록이 3위 안에 들어야[21] 애틀랜타 올림픽에 나갈 수 있었는데, 황영조는 동갑내기 이봉주[22], 김완기[23], 김이용[24]에 이어 4위에 머물러[25] 올림픽행이 좌절되었다. 이에 황영조를 구제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커졌고, 대한육상경기연맹은 황영조를 예비 엔트리에 올렸다.[26] 그러나 만약 이 과정에서 황영조를 제외한 누군가가 강제로 탈락한다면, 해당 선수의 거센 반발이 예상되었고[27], 고뇌하던 황영조는 결국 기자회견을 통해 세는나이로 27세라는 한창 나이에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3. 은퇴

흔히들 황영조를 올림픽 금메달과 아시안 게임 금메달 이후 전성기를 오래 누리지 않고 빠르게 은퇴해 버린 한량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특히 후술할 자기관리 부재로 인한 추문이 있었기 때문에, 게으른 천재 유리멘탈 취급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실 이런 평을 듣는 이유가 후술할 은퇴 이후의 사건사고 때문인데, 안타깝게도 그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거기에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동갑내기 이봉주의 성실함, 보다 오랜 선수 생활 기간과 더욱 대비되기도 한다. 물론 황영조가 이른 은퇴를 한 건 그의 멘탈이나 성실성과는 다른 문제인 고질적인 발 부상 때문이었다.

황영조는 올림픽 때도 족저근막염을 앓고 있었다. 황영조는 경기 당일 아침 기상했을 때도 통증 때문에 기권을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고 한다. 소속팀의 회사인 코오롱 스포츠에서 거액을 들여 개발한 마라톤화와 아식스에서 만든 마라톤화를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아식스 제품을 신고 경기에 나갔는데, 상당수가 코오롱 제품을 신고 금메달을 딴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족저근막염이라는 게 심각하지 않을 때는 자고 일어나면 통증이 심하다가 운동을 하다보면 통증이 가라앉는데 황영조도 그러했다고 한다.

족저근막염 때문에 올림픽이 끝나고 휴식과 회복에 전념하고 싶었지만 대한육상연맹이나 언론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고, 결국 족저근이 찢어지는 사달이 나서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 후 회복에 성공해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마라톤도 제패했는데, 정말로 황영조가 음주가무에 찌들어 나태한 상태였다면 발바닥 수술을 받고 나서 다시 재활에 성공하고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1996년 족저근막염 재발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재활 문제로 은퇴하게 된 것이다.

이봉주의 경우는 마찬가지로 수술을 받고 재활에 성공해서 꾸준히 선수생활을 했지만, 황영조는 그러지 못했다고 비난을 퍼붓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족저근막염은 애초에 사람이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이상 반드시 재발할 수밖에 없는 평생 고질적인 난치병이며, 한 번 찢어져서 수술을 받은 부위가 또 심각하게 손상돼서 재수술을 받게 된다면 평생 제대로 걷는 것이 힘들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은퇴를 결심했으니,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다.

4. 은퇴 이후

4.1. 2001년

은퇴 이후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팀 감독을 맡았으나 2001년 부적절한 처신과 독단적인 팀 운영, 비인간적 대우와 비상식적인 훈련 등으로 선수들과의 마찰이 발생, 선수들이 육상연맹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집단 이탈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선수들은 모두 다른 팀으로 이적하였으며, 팀 운영과 관련해 물의를 빚은 책임을 물어 육상연맹 강화위원직도 박탈당했다. 12월에는 음주운전에 적발되어 100일 면허정지 처분을 받았다.

4.2. 2003년

2003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홍보대사로 위촉되었으며, 강원대학교에서 육상 교양과목과 코칭론을 강의하는 겸임교수가 되었다.

4.3. 2004년

'황영조 마라톤 스쿨' 이라는 마라톤 입문서를 출간했으며,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강원일보 아테네통신원으로 활동했다. 올림픽이 끝난 후에는 대한올림피언협회(KOA) 이사로 선임되었다.

4.4. 2005년

대한체육회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세계선수권 마라톤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4.5. 2006년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마라톤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4.6. 유튜브 활동

2024년부터, 골드클래스라는 명칭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마라톤 관련 코칭 활동 영상을 업로드하고 있다.

골드클래스 채널 정보 설명을 보면,
" 골드클래스는 대한민국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감독의 러닝클래스 채널입니다.
건강하고 올바른 러닝 문화 정착과 공익적 가치 실현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

라고 기재되어 있다.

5. 평가

마라톤 관련 그의 천재적 재능은 바로 뛰어난 폐활량에 따른 어마어마한 심폐지구력에 있었다. 부친은 어부였고, 모친 이만자 여사도 강원도 해녀였으니 유전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현역 시절 폐활량이야 훈련을 해서 얻었겠으나, 훈련을 해도 늘릴 수 있는 양은 사람마다 선천적인 한계가 있다. 그런데 그는 '일반적인 마라토너들' 범위보다도 훨씬 뛰어났다. 해외 탑급 마라토너들에 비해서도 '약간 더 큰' 폐활량을 가진 선수로 심폐지구력이 세계 최고급이라는 것은 마라톤에 매우 유리한 재능이기에, 올림픽 이전에도 원래부터 마라톤계에서 세계적인 유망주로 꼽히기도 했었다. 이봉주조차 황영조의 엄청난 폐활량에 부러움을 느꼈다고 할 정도였다.[28]

이러한 일화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황영조의 선수생활에 대해 타고난 재능에만 기대어 노력을 등한시하다 일찍 져버린 소위 '게으른 천재'인양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황영조는 지옥훈련의 대가 정봉수 감독 휘하에서 무시무시한 훈련량을 소화하면서도 운동선수에게 치명적인 질환인 족저근막염 때문에 수술, 재발, 재활을 반복적으로 이어가며 위태로운 선수생활을 보내야 했다.[29] 족저근막염은 오래 걷거나 뛸수록 무조건 예후가 나빠지는 질환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종목의 운동선수들 중에 훈련의 내용을 보나 경기의 양상을 보나 가장 오래 뛰어야 하는 마라톤 선수였으니 더더욱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악조건에 시달리면서도 7년여에 불과한 짧은 현역시절 동안 올림픽 금메달-보스턴마라톤 4위-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연속해서 성취해낸 그의 선수생활을 의지가 부족한 게으른 천재 따위의 수식어로 폄하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반일감정, 한-일간 격차가 상당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일본 선수를 밀어내고 금메달을 차지하고, 2년 뒤에는 아예 일본 홈인 히로시마에서 역시 일본선수를 밀어내고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차지하여 극일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며 전국민적인 환호를 이끌어낸 공로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다만 은퇴 이후에 방송출연이나 인터뷰에서는 강한 프라이드가 드러나는,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대중의 호불호가 많이 갈렸으며, 2001년에는 코치로 재직하던 팀에서 여성문제, 소통부재 등의 이유로 선수들과의 갈등이 발생하여 선수단 항명-집단이탈 사건이 일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정지되는 물의를 빚었다. 또한 2014년에는 불법 재임대 논란이 터지는 등 은퇴 이후의 평판은 현역시절에 비해 많이 좋지 못한 상황인 것도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동갑내이기면서도 선수로 롱런하며 아무런 사회적 물의 없이 항상 대중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였던 이봉주와 대비되어 더더욱 그의 현역시절 성과가 지나치게 폄하되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6. 수상 기록

올림픽
금메달 1992 바르셀로나 마라톤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4 히로시마 마라톤
유니버시아드
금메달 1991 셰필드 마라톤

7. 여담



[1]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근덕면 초곡리 [2] 現 근덕초등학교 궁촌 분교장 [3] 3학년으로 편입하여 졸업했다. [4] 석사 학위 논문: 마라토너 孫基禎의 生涯와 思想 (1998) [5] 스포츠사회학 전공 [6] 박사 학위 논문: 마라톤의 문화적 인식과 활성화 방안 연구 (2009) [7]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8] 직업은 교사로 알려져 있다. [9] 아들이 마라톤 선수가 되겠다면 기꺼이 선수로 키우겠다고 한 적이 있다. [10] 현재 남자 마라톤은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펼친 지 오래되었다. 황영조 이후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이탈리아인이 1명( 2004 아테네 올림픽 '스테파노 발디니') 있고, 나머지는 다 아프리카 선수들이다. 아프리카 선수는 논외로 하더라도 마라톤 자체가 동양인이 유독 힘을 쓰지 못하는 종목이라 올림픽 역사를 통틀어도 금메달을 획득한 "동양" 남자선수는 손기정과 황영조 단 2명 뿐이고, 전체 메달로 넓히면 마지막으로 마라톤 종목에서 메달을 획득한 "동양" 남자선수는 1996년 이봉주(은메달)이다. [11] 심지어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심종섭이 대회를 4개월 남짓 앞둔 2021년 4월 4일에야 기준 기록보다 불과 6초 빠른 기록으로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그가 출전권을 따내지 못했다면 케냐에서 귀화한 오주한 1명 만이 올림픽에 출전할 뻔했다. [12] 속초에 위치한 73년 전통의 함흥냉면옥의 창업주인 이섭봉씨가 스승이였다. [13] 김윤한 아나운서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황영조라는 이름을 강조해서 외쳤다고 한다. [14] 황영조가 벳푸-오이타마라톤에서 2시간 10분벽을 돌파하기 전까지 한국기록(2시간 11분 2초) 보유자였다. [15] 황영조 등장 이전까지 김완기와 쌍두마차를 이루던 간판스타로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10위에 오른 이후 이듬해인 1993년 보스턴마라톤 준우승과 세계육상선수권 4위에 올랐다. [16] 이 선수는 일본의 나카야마 다케유키와 경기장 진입시까지 치열한 3위싸움을 벌이다 막판 스퍼트로 나카야마를 2초 차로 제치고 동메달을 땄다. [17] 황영조는 대회 당시 일본선수들과 신경전이 있었다고 한다. 손기정은 이유야 어찌됐든 일본국적으로 금메달을 딴거지 너네나라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화가 굉장히 났다고 한다. 결국 경기내내 모리시타가 페이스메이커가 되면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일본에서 두번다시 그런말을 입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한다. [18] 보스턴마라톤, 런던마라톤 등 단일 마라톤 대회는 좋은 기록을 내서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에 코스를 최대한 평탄하게 선정할 뿐만 아니라 페이스 메이커를 최대한 활용하여 기록 단축에 힘쓴다. 여기에 날씨가 비교적 쾌적한 3~4월이나 9~10월에 대회 일정을 잡는다. 하지만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 게임 등 종합 대회의 마라톤은 기록보다는 메달 경쟁이기 때문에 페이스 메이커의 개념이 희박하고 사실상 모든 선수가 메달을 목표로 레이스를 펼친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의 김완기도 황영조 등장 이전까지는 대한민국 남자 마라톤의 간판스타였고,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좋은 기록을 냈기 때문에 당당하게 국가대표로 뽑힌 것이다. 후배의 페이스 메이커의 역할이나 하려고 바르셀로나의 지독한 무더위 속에서 힘겨운 레이스를 펼친 것이 결코 아니다. [19] 황영조 이후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에티오피아, 케냐, 우간다 등 아프리카 국가에서 마라톤 금메달이 많이 나왔다. 황영조 이후 유일한 비아프리카인 남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의 스테파노 발디니(이탈리아)인데, 그 발디니의 금메달도 레이스 후반까지 압도적 선두를 달렸던 브라질의 '반데를레이 리마'가 관중의 습격을 당하는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리마가 금메달을 땄어도 비아프리카인 금메달리스트다. [20] 바르셀로나 현지로 중계를 간 최우철 앵커 대신 손석희 앵커가 서울 스튜디오에서 백업을 들어갔는데 이 사실을 짚어 주는 코멘트로 그날 아침 MBC 뉴스와이드 오프닝을 했다. [21] 1996 동아국제마라톤에서 국내 3위 안에 든 이봉주, 김완기, 김이용의 기록이 모두 1995 조선일보마라톤에서의 황영조의 기록보다 훨씬 빨랐다. [22] 1996 동아마라톤에서는 전년도 세계선수권 우승자인 스페인의 '마틴 피스'와 막판까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다 결승선을 150m 앞두고 피스에게 추월을 허용, 1초 차로 아쉽게 준우승했다. [23] 황영조 이전까지 한국 남자마라톤의 간판스타였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33㎞ 지점까지 황영조, 모리시타 고이치와 선두그룹을 유지하다 바르셀로나의 무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뒤처져 28위까지 밀려났는데, 사실 무더운 날씨는 김완기의 최대 약점이었다. 그 후 1993 동아마라톤에서 그 해 세계랭킹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을 냈고 국제대회 승격 원년이 된 1994 동아국제마라톤에서 2시간 8분 34초의 한국신기록을 세웠으나 불과 한달 후 보스턴마라톤에서 황영조가 2시간 8분 9초로 다시 깼다. [24] 황영조의 고등학교 후배다. [25] 상술한 대로 1995 조선일보마라톤에서 좋은 기록을 냈다면 논란이 발생할 여지조차 없었을 것이다. [26] 올림픽에 출전할 3명 외에 예비 선수를 두는 것은 꼭, 황영조 때문만이 아니라 원래 당연한 절차이다. [27] 세 선수들 모두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해 정정당당하게 선발된 선수들이었다. 이런 선수들이 정당하게 따낸 출전권을 누군가를 위해 양보하게 된다면 공정성이 생명인 스포츠에서 원칙이라는 것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국제대회에서 초강세를 보이는 쇼트트랙이 잊을 만하면 짬짜미 논란이 불거져 국민들로부터 괄시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28] 황영조는 자신이 태중에 있을 때에도 모친이 해녀 일을 계속하고 있어서 그런 부분에 대한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했다. [29] 92년 올림픽이 끝나고 한 번, 94년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한 번, 총 두 번의 수술을 진행했고, 96년 올림픽 선발전에서에 또 다시 재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선수은퇴를 선언한다. [30] 근로자들이 회사의 명예를 걸고 다른 회사와 게임을 겨루던 프로그램이었다. [31] 정확히는 2살 차이지만 윤정수가 빠른 나이라 1년 후배여야 한다. [32] 고등학생 때 전교 1등만 하던 수재였다고 한다. [33] 경주대학교를 졸업한 후 1994년에 고려대학교 3학년으로 편입(학사편입)해서 92학번을 들어갔다. 이 역시도 당시 언론에서는 1994년에 편입했다고 신문에 94학번으로 표기하는 등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 [34] 그러나 2020년을 기준으로 철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