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 황립 및 왕립 발칸전선사령부(k.u.k. Kommando der Balkanstreitkräfte)
2.2.1.1.1. 황립 및 왕립 발칸전투부대최고사령부(k.u.k. Oberkommando der Balkanstreitkräfte)2.2.1.1.2. 황립 및 왕립 발칸전투부대사령부(k.u.k. Kommando der Balkanstreitkräfte)2.2.1.1.3. 황립 및 왕립 남서부전선사령부(k.u.k. Kommando der Südwestfront)
2.2.1.2. 황립 및 왕립 오이겐 대공 군집단(k.u.k. Heeresgruppe Erzherzog Eugen)2.2.1.3. 황립 및 왕립 콘라트 군집단(k.u.k. Heeresgruppe Conrad)2.2.1.4. 황립 및 왕립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군집단(k.u.k. Heeresgruppe Erzherzog Joseph August)2.2.1.5. 황립 및 왕립 보로에비치 군집단(k.u.k. Heeresgruppe Boroević)
2.2.1.6. 황립 및 왕립 군전선사령부(k.u.k. Heeresfrontkommando)
2.2.1.6.1. 황립 및 왕립 카를 대공 군전선사령부(k.u.k. Heeresfrontkommando Erzherzog Joseph)2.2.1.6.2. 황립 및 왕립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군전선사령부(k.u.k. Heeresfrontkommando Erzherzog Joseph August)2.2.1.6.3. 황립 및 왕립 쾨베시 군전선사령부(k.u.k. Heeresfrontkommando Kövess)
2.2.2.1. 황립 및 왕립 제1군(k.u.k. 1. Armee)2.2.2.2. 황립 및 왕립 제2군(k.u.k. 2. Armee)2.2.2.3. 황립 및 왕립 제3군(k.u.k. 3. Armee)2.2.2.4. 황립 및 왕립 제4군(k.u.k. 4. Armee)2.2.2.5. 황립 및 왕립 제5군(k.u.k. 5. Armee)2.2.2.6. 황립 및 왕립 제6군(k.u.k. 6. Armee)2.2.2.7. 황립 및 왕립 제7군(k.u.k. 7. Armee)2.2.2.8. 황립 및 왕립 제10군(k.u.k. 10. Armee)2.2.2.9. 황립 및 왕립 제11군(k.u.k. 11. Armee)2.2.2.10. 황립 및 왕립 제12군(k.u.k. 12. Armee)2.2.2.11. 황립 및 왕립 키르히바흐 군집단(k.u.k. Armeegruppe Kirchbach)2.2.2.12. 황립 및 왕립 테르스찬스키 군집단(k.u.k. Armeegruppe Tersztyánszky)2.2.2.13. 황립 및 왕립 쿠머 군집단(k.u.k. Armeegruppe Kummer)2.2.2.14. 황립 및 왕립 플란처 군집단(k.u.k. Armeegruppe Pflanzer)2.2.2.15. 황립 및 왕립 로어 군집단(k.u.k. Armeegruppe Rohr)2.2.2.16. 황립 및 왕립 벨루노 군집단(k.u.k. Armeegruppe Belluno)2.2.2.17. 황립 및 왕립 알바니아 군집단(k.u.k. Armeegruppe Albanien)
2.2.3. 황립 및 왕립 티롤 방위사령부(k.u.k. Landesverteidigungskommando Tirol)2.2.4. 황립 및 왕립 군관구사령부(k.u.k. Militärkommando) 1914-1918
황립 및 왕립 군사령부(K.u.k. Militärisches Kommando)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군사령부 체계이다.[1] 평시에는 전쟁성(Kriegsministerium)이 공동군과 해군의 최고 행정기관이었으며, 참모총장은 전쟁성에서 군사작전을 계획했다. 1914년 7월 31일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전쟁 발발에 대비해 최고사령부(Armeeoberkommando)를 설립하면서 전시 체제로 전환했다.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이 최고사령부에 상주하며 전선을 직접 지휘했고,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은
황립 및 왕립 전쟁성과 최고사령부를 오가며 작전 지휘와 행정을 조율했다.
황립 및 왕립 전쟁성은 행정과 보급을 담당하는 후방 지원 기관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각 전선별로 독립적인 사령부를 운영했으며, 전황에 따라 조직이 변화했다. 그 중에서 최고사령부를 정점으로 하여 전선사령부(Frontkommanden), 군집단사령부(Heeresgruppen), 야전군사령부(Armeekommanden), 군관구사령부(Militärkommando) 등으로 구성되었다.
전선사령부는 전선 전체를 총괄하는 최고사령부로서, 각 전선별로 설치되었다. 예를 들어 남서전선사령부(k.u.k. Kommando der Südwestfront)는
이탈리아 전선 전체를 관할했다. 군집단사령부는 전선 내에서 복수의 야전군을 통합 지휘하기 위해 설치된 사령부로, 전선사령부와 야전군사령부 사이의 중간 제대에 해당한다. 보로예비치 군집단사령부(k.u.k. Heeresgruppenkommando Boroević)가 대표적이다.
야전군사령부는 전선에 투입되어 실제 작전을 수행한
야전군 단위의 임시 사령부로, 전시에 편성되어 예하의 군단과 사단을 지휘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제1야전군사령부(k.u.k. 1. Armeekommando)부터 제11야전군사령부(k.u.k. 11. Armeekommando)까지 다수 존재했다. 한편 군관구사령부는 제국 영토를 몇 개의 군관구로 나누고 평시 각 관구의 방위와 군정을 담당한 상설 사령부로, 주요 도시에 위치했으며 빈 군관구사령부(k.u.k. Militärkommando Wien), 부다페스트 군관구사령부(k.u.k. Militärkommando Budapest) 등이 있었다.
이처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전시 작전 수행을 위한 야전군사령부와 평시 지역방위를 위한 군관구사령부를 운영했으며, 규모나 전략적 중요성이 큰 전선에는 군집단사령부와 전선사령부를 추가로 설치해 유기적으로 운영했다. 최고사령부는 총사령관인
프리드리히 대공의 영지
테셴에 본부를 두었다가 1917년
카를 1세가 총사령관이 되면서 본부를
바덴바이빈으로 이전했다. 최고사령부는
독일 제국과 연합하여 발칸전선,
러시아 전선,
이탈리아 전선 등 주요 전선의 작전을 지휘했다.
보통 전선 전체를 총괄하는 최고사령부를 의미한다.
세르비아 침공 초기 때와는 다르게 전쟁이 지속되면서 구조가 계속 바뀌어갔다. 특히 전선사령부를 군집단으로 개편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그 이유는 전선 확대에 따른 대규모 병력 운용의 필요성, 다수 야전군의 통합지휘를 위한 상위제대 필요, 전략적 융통성 제고 및 동맹군과의 협력 강화, 지휘관 개인의 역량과 황제의 신임을 반영한 지휘체계 개편, 전쟁 양상 변화에 따른 군 편제 최적화 요구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전선 상황 변화에 맞춰 보다 유연하고 효율적인 지휘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즉 전선사령부>군집단>군전선사령부로 이해하면 된다.
2.2.1.1.황립 및 왕립 발칸전선사령부(k.u.k. Kommando der Balkanstreitkräfte)
2.2.1.1.1. 황립 및 왕립 발칸전투부대최고사령부(k.u.k. Oberkommando der Balkanstreitkräfte)
1914년 8월 7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위해 발칸전선에 발칸전투부대최고사령부를 설치하고 세르비아 원정을 총지휘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지휘체계를 단순화할 필요가 있었다.
2.2.1.1.3.황립 및 왕립 남서부전선사령부(k.u.k. Kommando der Südwestfront)
5월 23일
이탈리아 왕국이
협상국으로 전쟁에 참전하자 5월 27일 발칸전투부대사령부는 남서전선사령부로 개편되어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했다. 이후 남서전선사령부는 1916년 3월 해산될 때까지
이탈리아 왕국군과 싸웠고, 그 역할은
오이겐 대공 군집단(Heeresgruppe Erzherzog Eugen)이 이어받았다. 1917년 3월
오이겐 대공 군집단이
콘라트 군집단(Heeresgruppe Conrad)으로 바뀌면서 남서전선사령부가 재설치되어
이탈리아 왕국군과 전투를 계속했고, 1918년 1월 최종적으로 해산되었다.
2.2.1.3.황립 및 왕립 콘라트 군집단(k.u.k. Heeresgruppe Conrad)
1917년 3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참모총장을 지낸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원수가
이탈리아 전선에서 새로운 군집단의 지휘권을 부여받으며 창설되었다. 이 군집단은 1916년 3월부터 이탈리아 전선을 담당했던 오이겐 대공 군집단을 계승한 것으로, 콘라트의 이름을 따서 콘라트 군집단으로 명명되었다. 콘라트 군집단은 창설 직후인 1917년 5월과 6월,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한 제10차, 제11차
이손초 전투에 참전했다. 1918년 6월에는
피아베강 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펼쳤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같은 해 7월 21일, 콘라트 군집단은 요제프 대공 군집단으로 개편되면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2.2.1.4.황립 및 왕립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군집단(k.u.k. Heeresgruppe Erzherzog Joseph August)
1918년 7월 21일, 기존의 콘라트 군집단이 요제프 대공 군집단으로 재편되었다. 지휘관은 6개월전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군전선사령부를 이끌었던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이었다. 하지만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고, 병력과 물자의 부족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10월 말, 이탈리아군의 대반격인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가 벌어지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선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10월 23일에는 군집단의 명칭이 티롤 군집단(Heeresgruppe Tirol)으로 바뀌었고, 종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휴전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고,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군집단도 전쟁의 종결과 함께 해체되고 말았다.
2.2.1.5.황립 및 왕립 보로에비치 군집단(k.u.k. Heeresgruppe Boroević)
1915년 5월,
이탈리아 왕국이
협상국 측으로 전쟁에 참전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이손초강 유역에 제5군을 배치해 이탈리아군과 대치했다. 제5군은 1917년 8월까지 총 11차례에 걸친
이손초 전투를 치렀는데, 초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전선이 확대되고 제5군의 병력도 늘어났기에, 하나의 군 단위로는 지휘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여기에 독일군의 지원이 예정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력이 더욱 강화될 전망이었다. 대규모 병력을 체계적으로 운용하고 독일군과의 협력을 원활히 하기 위해 제5군을 분할해 지휘 체계를 개편할 필요가 있었다.
1917년 8월 23일, 용맹한 지휘관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원수가 군집단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보로예비치 군집단이 창설되었다. 제5군이 이손초 1군과 2군으로 분할되어 군집단 예하에 편성되었는데, 이를 통틀어 이손초군으로 불렀다.
보로예비치 원수는
이손초 전투에서 보여준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이손초군, 즉 보로예비치 군집단의 수장에 올랐다.
보로예비치 군집단은 그해 10월,
독일 제국군과 함께
카포레토 전투를 수행해 대승을 거뒀다. 이탈리아군은
피아베강 너머로 밀려났고, 이를 바탕으로 보로예비치 군집단은 대폭 증강되었다. 1918년 1월, 이손초 1군과 2군이 통합되어 단일한 이손초군이 되었지만 보로예비치 군집단과 이손초군이라는 명칭은 계속 병존했다. 이러한 개편은 전술적 융통성을 높이고 동맹군과의 연계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1918년 6월과 10월, 보로예비치 군집단은
피아베강 전투와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대규모 공세를 펼쳤지만
협상국의 저항에 부딪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군집단은 전쟁 말기까지
이탈리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중추로 활약했다. 1918년 11월 전쟁이 끝나자 보로예비치 군집단도 해체되었다.
보로예비치 원수는 1914년 제5군 사령관을 시작으로, 이손초군과 보로예비치 군집단을 거치며 줄곧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한 명장으로 기억된다.
2.2.1.6. 황립 및 왕립 군전선사령부(k.u.k. Heeresfrontkommando)
군전선사령부는 전선의 일부 구간을 담당하는
야전군급사령부로, 전선사령부와 군집단의 예하에서
군 사령부를 지휘했다. 전형적인 위계는 전선사령부 > 군집단 > 군전선사령부 > 군 사령부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는 이 체계가 유동적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군집단과 군전선사령부의 차이점은 군집단은 여러 개의 군이나 군전선사령부를 통합 지휘하는 대규모 부대인 반면 군전선사령부는 할당된 전선의 일부 구간을 담당하며 예하의 군들을 지휘한다. 상황에 따라 군집단이 전선사령부에서 개편되거나 군전선사령부가 군집단으로 승격된 사례도 있었다.
2.2.1.6.1.황립 및 왕립 카를 대공 군전선사령부(k.u.k. Heeresfrontkommando Erzherzog Joseph)
제1차 세계대전 중반이던 1916년 여름, 트란실바니아 전선에서는 루마니아군을 상대로 전투가 한창이었다.
카를 대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독일군 연합군을 지휘하며 8월
시비우 전투, 9월
트란실바니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0월에는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까지 함락시켰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카를 대공의 군대는 1916년 10월 4일, 군전선사령부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두 달도 안 되는 12월 2일,
카를 대공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국정에 전념하기 위해 지휘권을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에게 넘기면서 카를 대공 군전선사령부는 요제프 대공 군전선사령부로 개칭되었다.
2.2.1.6.2.황립 및 왕립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군전선사령부(k.u.k. Heeresfrontkommando Erzherzog Joseph August)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군전선사령부는 1916년 12월 2일부터 1918년 1월 15일까지 존속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전선사령부다.
카를 대공이 황제에 즉위함과 동시에 국정에 전념하기로 결정하면서, 그가 이끌던 카를 대공 군전선사령부(Heeresfrontkommando Erzherzog Karl)의 지휘권이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에게 넘어갔다. 이에 따라 부대명도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군전선사령부로 바뀌게 되었다.
루마니아와
부코비나 지역의 방어를 책임지는 한편,
동부전선에서
러시아 제국군의 공세에 대응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특히 1917년 여름의
케렌스키 공세 당시에는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918년 1월, 부코비나 전선을 책임지고 있던 쾨베시 군전선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군전선사령부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결국 1918년 1월 15일,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후임으로
쾨베시 원수를 지명하고 자신은 물러났다. 이로써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군전선사령부는 해체되고 그 역할은 쾨베시 군전선사령부가 이어받게 되었다.
2.2.1.6.3.황립 및 왕립 쾨베시 군전선사령부(k.u.k. Heeresfrontkommando Kövess)
1918년 1월 16일,
콜로즈바르에서 쾨베시는 제7군[3]에 제1군을 합친 쾨베시 군전선사령부(Heeresfrontkommando Kövess)의 사령관이 되어
도브루자에서
갈리치아까지 이어지는 광범위한
몰도바 전선을 담당하였다. 제7군은
부코비나와
산악 카르파티아 지역을, 제9군단과 제21군단을 휘하에 둔 제1군은
트란실바니아의 국경선 방어를 담당하였다. 1월 말경 쾨베시의 군대는 여러 지역에서 활발한 포격전을 벌이며 방어선을 유지했다. 3월에 들어서자 쾨베시는 제7군으로
부코비나에 속한 세레트-구라후모라-수차바 삼각지대를 점령하였다. 이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와
루마니아가 전쟁에서 이탈함에 따라 군집단은 1918년 4월 5일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