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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3:04:00

형가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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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암살미수 사건을 묘사[1]한 전한시대 석판 탁본, 3세기경 작품
荊軻
? ~ 기원전 227년
1. 개요2. 생애
2.1. 협객 시절2.2. 진왕 영정 암살 시도
3. 후일담4. 평가5. 대중문화 속의 형가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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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此地別燕丹 이 땅에서 연단(燕丹)과 이별하면서
壯士髮衝冠 장사들의 머리칼 관을 띄웠도다.
昔時人已沒 그 시절의 사람들은 이미 가고 없지만
今日水猶寒 지금도 이 강물 여전히 서늘하도다.
낙빈왕(640년? ~ 684년?), 〈역수 강의 송별〉(易水送別)
중국 전국시대 협객이자 유명한 자객. 시황제 암살하기 위해 갔으나 실패한 일화로 유명하다. 그의 생애에 대해 잘 알려진 것은 없으나 《사기》 〈자객열전〉 이나 《 십팔사략》에 그에 관련된 이야기가 남아 있다. 특히 〈자객열전〉에 있는 형가의 기록은 중국 고서상 가장 스펙타클하기로 손에 꼽는 대목이다. 전한초에 이미 여러 버전으로 부풀려 전해지던 형가의 일화가 〈자객열전〉에서 이토록 생동감 있고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은 이유는 저자 사마천의 스승인 동중서와 동중서의 친구 공손홍이 실제 사건의 목격자이자 등장인물인 하무저와 친구였으므로 내막을 자세히 알고 사마천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이었다.[2][3]

2. 생애

2.1. 협객 시절

형가의 조상은 강제의 간신이었던 경봉(慶封)이었지만 태어난 곳은 위(衛)나라(지금의 하남성 부근. 과거 상나라가 있었던 자리)였고, 본인이 사는 곳은 연(燕)나라였다. 왜냐하면 초 영왕때, 오나라에 의탁한 경봉과 그 일족이 초군에 의해 주살된 후, 그 후손들이 성을 바꾸고 여기 저기 흩어졌기 때문이다. 형가는 꼬마 때부터 책읽기와 검술을 좋아했다. 검술로 당시 위나라 군주였던 원군(元君)에게 출사했으나 외면당했다.

형가는 개섭이라는 검객과 검술을 논하다 틀린 사실을 말했고, 말다툼이 일어났다. 개섭이 노려보자 형가는 말 없이 도망쳤다.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 머물 당시, 노구천(魯句賤)이란 사람과 장기를 두다가 말다툼을 했다. 노구천이 죽일 듯이 위협하자 형가는 도망쳤고 사이가 틀어졌다. 이를 두고 형가가 겁이 많았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람도 죽여본 진무양이 벌벌 떨 때 태연하게 시황제에게 다가가서 검을 휘두른 것만 봐도 형가는 용기와 담력이 어마어마한 사람이었다. 《사기》 같은 역사서에서는 형가가 훗날 큰 일을 맡을 뜻이 있어 사사롭게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 싸움을 피했다고 본다. 표현이 도망쳤다로 쓰여서 그렇지 정황을 보면 불필요하고 사사로운 싸움은 피했다로 해석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그 후 시전 바닥에서 개백정인 아무개[4]·축(현악기의 일종)쟁이 고점리와 띵가띵가 놀며 소일하였다. 그러다가 감정이 복받치면 셋이 얼싸안고 울다가 웃다가 했다고 전하는데, 이때 셋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신경 쓰지 않고 행동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방약무인이다. 이는 원래 주변에 거리낌 없는 당당한 행동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뒷날 의미가 바뀌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이렇듯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으나 당시 연나라에서 은거하던 전광(田光)[5]이라는 사람은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아봤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는 형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당시 이미 진나라를 제외한 6국 중 3진(三晉)[6]이 멸망한 상태였고[7], 조나라를 평정한 진나라는 제나라를 매수해 놓은 상태에서 초나라와의 결전을 앞두고, 연나라를 먼저 손보려 시기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2.2. 진왕 영정 암살 시도

이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전광에게 연나라 태자 단(丹)이 찾아왔다.

태자 단은 진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진왕 정에 대한 증오심이 깊었고 그 위험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국가의 멸망을 막기 위해 자객을 파견해 일거에 뒤집기를 하려는 단에게 전광이 추천한 사람이 바로 형가였다. 단이 전광에게 암살 계획에 대해 절대 비밀로 해 줄 것을 당부하자, 전광은 형가에게 암살 건에 대해 이야기한 뒤 "근데 태자는 내게 이 일은 국가의 기밀이니 발설하지 말아 달라 하였네. 그러니 태자를 만나면 전하게. '전광이는 이미 죽었다'고 말일세"라고 말하곤 형가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자기 목을 끊어버렸다.

형가는 태자 단에게 찾아와 조나라의 서부인[8]이라는 사람이 주조한 비수 상절(霜切)[9], 연나라의 곡창 지대인 독항 지방의 지도[10], 그리고 진왕 영정의 미움을 받아 망명한 진나라 항장 번오기(樊於期)의 목을 요구하였다. 비수와 지도는 즉시 준비되었으나, 다정한 성격인 단은 차마 번오기의 목을 내올 수는 없었다. 그러자 형가는 슬그머니 그의 집으로 가 "이러저러할 건데 당신의 목을 주시면 안 되겠소?" 하고 냅다 돌직구를 날렸다. 번오기는 이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더니, 놀랍게도 "아아! 저의 원한을 풀 방법을 갖고 계시다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부디 성공하시기를!" 한 뒤 형가에게 절하고 스스로 목을 찔렀다!

그 뒤에 필요한 것은 자신과 같이 보조를 맞출 담대한 부사로 13세 때 대낮에 길거리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진무양(秦舞陽)[11]이란 장사를 선택했다. 형가는 본래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다른 누군가를 기다렸지만 그는 너무 멀리 살고 있어 제 시간에 오지 못했고,[12] 태자 단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진무양과 함께 거사를 치르게 된다.

진나라로 가기 위해 역수(易水)를 건너며 형가가 남긴 노래는 아직도 남아 있다.
風蕭蕭兮易水寒 바람 쓸쓸하니 역수는 차구나.
壯士一去兮不復還 장사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 하리라.
연(燕)나라 태자와 빈객들은 거사의 내막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흰색의 의관을 차려 입고 송별을 나와 이윽고 역수(易水) 강변에 이르렀다. 노신(路神)에게 제사를 지내 장도를 기원한 후에 길을 떠날 때 고점리(高漸離)가 축을 타자 형가가 곡조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변치(變徵)[13]의 곡조로 부르는 형가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또 곡조를 우(羽)로 바꿔 부르니 전송 나온 사람들은 모두 눈을 부릅뜨고 머리에 쓴 관이 다 들릴 정도로 머리털이 곤두섰다고 한다. 이윽고 형가가 수레에 올라타고 길을 떠났는데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형가는 함양에 도착한 뒤 진왕이 총애하던 신하인 몽가 [14] 에게 뇌물을 바쳤고, 이에 기뻐한 몽가는 연나라에서 항복하러 온 사절단이라며 형가 일행과 진왕과의 만남을 주선하였고 진왕도 기뻐하며 알현을 허락한다. 그렇게 아무 의심받지 않고 당당하게 진왕 정 앞까지 온 형가였지만, 뜻밖에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진무양이 갑자기 낯이 새파래지며 바들바들 떠는 바람에 의심을 사고 말았다. 형가는 태연히 웃으면서
北蕃蠻夷之鄙人,未嘗[15]見天子,故[16]振慴。願大王少假借之,使得畢使於前。
북번 오랑캐 시골뜨기가, 일찍이 천자를 뵈온 적 없으니, 떨며 두려워합니다. 대왕께서는 작은 잘못을 용서하시어, 어전에서 사자의 임무를 마치게 하소서.
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진왕은 이상하게 여겨 형가에게 부사는 놔두고 혼자 올라와 진상물로 가져온 독항의 지도를 올릴 것을 명했다. 그러자 형가가 편 두루마리가 끝까지 펼쳐지자 그 속에 숨겨둔 비수 상절이 드러났다.[17] 이에 놀란 진왕이 재빨리 일어나는 바람에 형가가 내지른 보검은 상처도 내지 못하고 진왕의 옷소매만 스쳤을 뿐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형가가 짧은 단검을 휘두르기 위해 진왕의 옷소매를 잡아챘는데, 그 옷소매가 북 찢어졌다는 설도 있다. 형가는 원래 한 손으로 진왕의 의복을 잡고 다른 손으로 단검을 쓰면 암살이 성공할 것이라고 여겼으나, 추운 북쪽 나라라 두껍고 질긴 옷을 입는 연나라에 비해 진나라에서는 훨씬 얇고 부드러운 옷을 입었기 때문에 소매가 찢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계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8] 또 다른 설로는 형가의 원래 계획은 부사 역을 맡은 신뢰하는 친구가 두루마리를 펼치면 형가가 재빨리 비수를 꺼내 찌를 계획이었으나 친구가 오지 못해 대신 데려온 진무양이 겁을 집어먹는 바람에 형가 혼자 단상에 올라와 지도를 펼치는 작업과 비수를 꺼내는 작업을 혼자 하느라 비수를 뺄 때 진왕이 눈치채고 피할 수 있었다는 설이 있다.
未至身,秦王驚,自引而起,袖絕。
몸에 닿기 전에, 진왕이 놀라, 스스로 몸을 일으키면서, 소매만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어쨌거나 형가는 포기하지 않고 비수를 쥐고 진왕 정을 쫓아 전상 단상 기둥 사이에서 술래잡기를 시작했다. 당시 진나라 국법에 대전에서 무기를 지참할 수 없었기에[19] 병기를 가진 사람은 진왕 혼자였고 너무 급박한 나머지 대전 밖의 군사를 부를 겨를이 없었다. 당시 진왕은 보검을 패용하고 있었는데, 길이가 길어서 허리가 아닌 등에 차고 있어서 급박한 상황에 제대로 뽑질 못했다.[20] 신하들이 맨손으로 형가에게 달려들었고, 어의인 하무저(夏無且)가 약주머니를 던져 형가를 방해했다. 또 신하들은 칼을 등에 지고 뽑으라고 소리쳤다.[21]
左右乃曰:「王負劍!」
좌우에서 외쳤다, 대왕께서는 칼을 등지십시오!
결국 진왕 정은 칼을 뽑을 수 있었고, 짧은 비수를 들고 있는 형가를 내리쳤다. 형가는 쓰러진 채 마지막으로 비수를 던졌으나 기둥에 맞았다. 그 틈을 노려 영정은 칼로 형가를 여덟 번이나 내리쳤다. 형가는 영정을 보고
事所以不成者,以欲[22]生劫之,必得約契以報太子也。
"일이 실패한 것은 너(진왕)를 사로잡아 약속을 받아내어 태자에게 보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근위병들이 달려들어 형가를 죽였다. 마지막에 한 말만 들으면 형가는 진왕을 죽일 생각이 아니라 붙잡은 후 협박해서 불가침조약을 맺거나, 빼앗긴 땅을 돌려받으려 한 것일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노나라의 조말(曹沫)이 제환공을 칼로 협박해 빼앗긴 땅을 받아낸 적이 있다.

전상 아래에 있던 진무양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지만 당연히 살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형가를 방해한 어의 하무저는 진왕 정에게서 '그대가 나를 위해 약봉지를 던졌도다!' 는 칭찬과 함께 금 200일이라는 큰 상을 받았다.

3. 후일담

이 사건 직후 분노한 진왕 영정은 왕전 왕분, 이신을 보내 연나라 침공을 시작한다. 연나라 왕 연희는 수도 계성까지 함락당하자 대나라의 왕 조가(趙嘉)( 조도양왕의 장자이자 조유류왕의 이복 형)의 주장을 받아들여 암살을 주도한 아들 단의 목을 잘라 진나라로 보내지만 진군은 무시하고 계속 연왕을 추격했다. 또 다른 설로는 도망친 단을 이신이 수천 기의 병사만을 데리고 추격하여 잡아왔다는 얘기도 있다. 연왕은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넘을 시도를 했지만 직전에 진나라 군대에 따라 잡혀 포로가 되었다.[23]

〈형가열전〉의 후일담에 의하면 형가와 장기를 두다가 다툼으로 사이가 벌어진 노구천은 형가의 진왕 정 암살미수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24]
아아, 그가 칼로 찌르는 법[25]을 배우지 않은 것이 애석하구나!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26] 예전에 내가 그를 꾸짖었을 때, 그는 나를 자신과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형가가 죽고 연나라가 멸망하자 형가의 벗 고점리는 머슴이 되어 송자(宋子) 땅에 잠적했지만 축 솜씨 때문에 정체가 발각되었고, 그의 축 솜씨가 진왕 정에게 알려지자 진왕 정은 고점리를 용서하는 대신 그의 눈을 멀게하고 악공으로 삼았다. 악공으로 일하면서 진왕 정과 가까워진 고점리는 축에 납을 넣어서 암살 기회를 노리다. 어느 날 연주를 하다 말고 진왕 정을 향해 축을 냅다 후려갈겼으나 계산을 잘못했는지 진왕 정이 정말 왕운을 타고났던 건지 어깻죽지를 스쳤을 뿐[27]이었고 그대로 맞아 죽었다. 형가와 고점리에게 연이어 죽을 뻔한 진왕 정은 다시는 멸망당한 6국 사람을 자신에게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다.

4. 평가

이처럼 멸망당하고 멸망당하기 직전인 6국의 한을 풀려는 듯한 형가와 태자 단의 의기로운 모습은 후에 많은 시인들과 서사가들에 의해 칭송되거나 협객이라고 평가되었다. 시황제와 통일 진나라가 통치를 잘했으면 몰라도 그 정치가 매우 가혹하고 심하였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후에 나오는 장량 창해 역사와 더불어서 노래되고 많은 협객들과 호걸들의 그의 모습을 따라하고자 하였다. 장량 또한 형가와 태자 단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형가의 행위에 대해서는 평가가 다소 엇갈린다. 결국 이 문제는 진의 통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진의 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형가는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받을 것이고, 반대로 진의 통일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면 형가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진시황이나 형가나 둘 다 각자의 입장이 있으므로 반드시 어느 쪽이 좋고 어느 쪽이 나쁘다는 식으로만 이야기할 것도 없다. 대체로 현대 중국에서는 진시황의 통일 공적과 형가의 의협심을 둘 다 좋게 평가한다.

5. 대중문화 속의 형가

6. 기타


[1] 형가가 진시황을 찌르려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왼쪽의 덩치 큰 사람이 형가이고 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도망가는 사람이 소매가 잘린 진시황이다. 오른쪽 밑에 넘어져 있는 사람은 형가를 수행한 부사 진무양. 당황해서 달려오는 호위병과 번오기의 목이 든 상자, 형가가 던진 칼이 기둥에 박혀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형가가 있는 왼쪽을 자세히 보면 그가 양팔과 한쪽 발을 들고 있고, 칼을 던지는 형가를 말리기 위해 어떤 사람이 형가의 몸을 한 팔로 붙잡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2] 〈자객열전〉 -형가- 이야기 말미에 사마천이 직접 밝힌 내용이다. 그런데 하무저가 원 출처라 그가 진시황을 구하는 대목에서 뻥을 좀 섞었으리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3] 〈자객열전〉 -형가- 이야기에서 진나라가 형가의 암살미수에 대한 보복으로 연나라를 공격하여 태자 단을 죽이고 그로부터 5년 뒤에 연나라가 멸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암살미수사건은 BC 227년 이전이다. 공손홍이 BC 199년생, 동중서가 BC 179?년생이므로 하무저와 이들의 나이 차가 어마어마하다. 하무저가 엄청나게 장수한 듯… [4]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5] 이 사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고 용기와 지혜가 비범해서 연나라 태부인 국무의 추천으로 연나라에 출사하였다고 한다. [6] 조·위(魏)·한. 본디 진나라의 鄕이었으나 이 세 집안이 진나라를 갈라먹어 3진이라 불렀다. [7] 그나마 조나라는 왕족인 조가가 대군(代郡)에서 대나라의 왕위에 올라 저항하고 있었다. [8] 여자가 아니다. 이름이 '부인'이다. 한자 표기도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부인이긴 하다(…). [9] '서리마저 벤다'는 뜻. 강철을 진흙처럼 자를 만큼 명검이라고 한다. 여기에 독을 발라 피부를 살짝만 그어도 즉사할 수 있도록 특별히 준비했다. [10] 특정 나라의 사신이 자기 나라의 지도를 가지고 가서 바친다는 것은, 그 땅을 넘기겠다라는 의미이다. [11] 《사기》 〈흉노열전〉에 그의 집안 내력이 언급되는데, 진무양의 조부는 연나라의 명장인 진개로, 흉노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기회를 봐서 도망쳐 귀국했다고 한다. 진개는 한국사와도 관련이 깊은데, 고조선을 쳐서 서쪽 영토 2,000리를 빼앗았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12] 《십팔사략》에는 그 사람을 예전 저잣거리에서 형가와 다투었던 노구천이라고 했다. 노구천은 형가의 부름에 서둘러 달려오다가 하필 비가 내려 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길이 막혀서 오지 못하고 있던 중이었다고. 이때문에 과거의 사사로운 다툼이 훗날 형가의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장치로 작용해서 형가의 스토리를 더욱 처절하게 만들었다. 또 다른 기록에는 형가, 고점리와 의형제를 맺은 개백정이 그 사람이라고도 한다. [13] 동양 음악에서 5음의 각 이름을 일컫는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 중 '치'를 변주했다는 뜻. [14] 몽가(蒙嘉)는 몽무, 몽염, 몽의 등을 배출한 진의 명가인 몽씨 가문의 일원으로 여겨진다. 이 사람이 진왕 암살 실패 후 어떻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사기에 '형가의 암살 미수 사건 후 공이 있는 자에게는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자에게는 벌을 내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어떤 형태로든 처벌은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15] 일찍이 [16] 그러므로 [17] 여기서 도궁비현(圖窮匕見)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18] 연나라의 수도 계성(연경)은 현재의 베이징으로 베이징은 평양보다도 위도가 높은 반면, 진나라의 수도 함양은 현재의 시안(정확히는 쌍둥이 도시 셴양시)으로 제주도 정도의 위도에 있다. [19] 진나라만 그랬던 게 아니라 애초에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국가원수 앞에서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 사람은 극도로 한정되어 있는 법이다. [20] 사실 장검은 안전을 위해 일부러 자루에서 쉽게 빠지지 않게 만든다. 다만 이 시기의 장검은 중세 유럽 롱소드보다 더 긴 검이었다. 관련 링크 [21] 야사에 조고가 외쳤다거나, 한 호녀가 저 말을 해서 이후 진시황의 총애를 얻었고 그래서 낳은 아이가 호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무저의 하드캐리가 돋보이는데, 이후 진시황에게 크게 치하받고 200금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헌데 사마천의 기록의 출처가 하무저에게 직접 이야기를 전해들은 동중서와 공손홍이기 때문에 약간 의심스러움이 남는다. 열전과 본기의 타임라인상 암살사건 후 최소 5년 후 연나라가 망하므로 암살사건은 늦어야 기원전 227년인데 둘중 연장자인 공손홍이 기원전 199년생이다. 하무저가 10대에 어의가 되었다 해도 40년 넘게 차이 나는 할아버지와 손주뻘이다. 교차검증도 할 수 없는데 할배가 손주뻘 되는 이들에게 소싯적 얘기를 한다고 생각해보면 본인 역할에 과장이 들어갔을 확률이… [22] 하고자 하다 [23] 이때 고조선도 진나라에 칭신하였다고 한다. [24] 고우영의 만화 '초한지'에서는 이 내용을 각색하여 형가가 죽고 연나라가 망한 뒤 노구천이 역수강에 술을 부으며 "형가, 내가 뭐라던가? 검술은 이론과 고집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결국 연나라는 망하고 태자 단도 죽었네."라고 그를 추모하는 장면이 나온다. [25] 검술에 나름 일가견이 있던 형가지만, 진왕을 반드시 처치할 정도의 검의 달인이 아니어서 아쉽다는 뜻일 것이다. 뛰어난 검객이었던 개섭과의 일화가 그러하고, 도연명도 형가의 검술이 미숙했던 게 아쉽다고 시로 탄식했다. [26] 형가를 욕하거나 폄하하는 게 아니라 그가 그만큼 담력 있는 호걸임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말이다. [27] 고점리가 살해를 시도한 공간이 궁중 악단 연주회였는데, 이 자리에 있던 커다란 에 진왕 정의 목소리가 울려퍼져서 고점리의 계산이 실패했다고도 전해진다. [28] 홍콩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자본인 미라맥스의 자본도 들어갔다. [29] 연출로 나오지 않고 문자로만 교대한다. [30] 메인 선역들은 모두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데, 그나마 목숨이라도 남은 고점리 부자 역시 아내와 어머니를 잃는다. [31] 여기서 그의 지략과 담이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는 게, 동료 진무양은 장대궁 정전에 들어가기 직전에 진나라 궁궐의 위엄에 지려버린 나머지(혹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 못 들어갔는데 형가는 몽염의 위병들에게 쫄지 않고 당당하게 입장했고, 진왕에게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서 천진난만하게 행동하는 등 치밀한 모습을 보인다. [32] 원래 조회에서는 군주만이 칼을 찰 수 있으며, 호위병이 아닌 한 무기를 맡겨두고 군주를 알현해야 한다. 군주 곁에서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은 신하에게 굉장한 특권이다. 구석 문서로. [33] 이 때 형가가 내지르는 기합소리와 경악한 진왕 정의 비명소리가 동시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