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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5.18 민주화운동/왜곡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 왜곡 |
민주화운동 진보편향 명칭설 · TV조선의 왜곡 · 채널A의 왜곡 · 지만원의 날조 · 5.18 연고대생 북한간첩설 · 무장폭동설 · 북한개입설 · 유공자 관련 왜곡 · 그날의 광주 모욕 사건 |
1. 개요2. 무장폭동이 아니라는 근거 및 무장폭동이란 주장에 대한 반박
2.1. 국회 해산
3. 둘러보기2.1.1. 비상계엄 확대는 정당한 법 절차를 받았다는 주장
2.2. 김대중 석방운동 혹은 배후조종이라는 주장2.3. 최규하의 민정이양 약속을 믿지 않고 선제적으로 일으킨 시위다?2.4.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서2.5.
교도소 습격 사건 실체는 민간인 살상을 위한 행위였다?2.6. 윤한봉의 사전 무기고 답사에 따른 조직적 폭동이었다?2.7. 시위대가 과격시위를 해서 공수부대원이 진압했을 뿐이다?2.8. 최초 사망자에 대한 논란2.8.1. 최초 사망자는 경찰관 4명이다?2.8.2. 공수부대원이 18일날 실종돼서 19일날 시체로 발견된 증언이 있다?2.8.3. 공수부대원이 18일날 실종되고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2.9. 최초 시위는 민주화운동이지만 시민군 결성부터는 폭동으로 서로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2.10. 5.18을 성격이 다른 사건과 비교하는 행위2.10.1.
프랑스 혁명처럼
이기면 혁명이고 지면 폭동이다?2.10.2. 5.18이
LA 폭동과 성격이 같은데 이름만 다르게 부른다?
2.11. 미국의 문건이나 유네스코 등에서 5.18을 '폭동(riot·uprising)'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2.12. 기타 폭동설1. 개요
[1]이
광주 사태는, 광주 문제는 어... 내가 해결한다, 내가 해결하는 게 좋다. 그거는 그 사람의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다르겠지만은 어... 역사의 심판에 에 맡길 수밖에 없다, 역사의 심판에. 그런데 그것은, 순수한 그... 광주는, 어 그거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야. 근데, 그러니까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근데 사람들이
그 후 내가 대통령이 되었으니까, 내가 그거를, 광주 사태를 진압한 사람으로 그래 몰고 가더라, 재판에 요번에 할 때도,
재판할 때 내가 그러지 않았다는 거, 그거는 분명히 그게 밝혀졌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 2003년 2월 SBS 인터뷰 중
북한군 개입설과 함께 5.18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부정하는 주장으로, 그 당시 어쨌든 무력을 동원한 폭동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니 계엄군은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폭도들을 사살해야만 했다는 주장이다.전두환 전 대통령, 2003년 2월 SBS 인터뷰 중
그러나 민주화 이후 국가 차원에서 여러 차례의 면밀한 조사를 거쳐 오히려 그 계엄군이야말로 제4공화국을 불법적으로 무너뜨리려고 폭동을 일으킨 반란군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5.18은 폭동도 아니었을 뿐더러[2][3] 계엄군에게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진압할 권리 역시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5.18 민주화 운동은 합법이다. 이는 헌법재판소가 판결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되어 있다.
2. 무장폭동이 아니라는 근거 및 무장폭동이란 주장에 대한 반박
2.1. 국회 해산
1980년 5월 12일 여야는 20일 임시국회를 열어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유신헌법을 개정하는 논의를 진행시키기로 합의했다. 양당 국회대책 계엄해제 논의 등 활성화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보안사가 민주공화당을 이끌던 국회의원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진만 등을 국회의 동의 없이 불법체포하고 신민당을 이끌던 이철승, 김영삼을 가택연금에 처하면서 임시국회는 정상적으로 열릴 수 없게 됐다. 더욱이 1980년 5월 20일 노태우의 지시를 받은 33보병사단 101연대 소속 병력이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국회에 등원하던 국회의원의 출입을 금지함으로써 제10대 국회는 실질적으로 해산 상태에 처했다. 제10대 국회의 역할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의결에 따라 만들어진 국가보위입법회의가 대체했다.
신군부의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 조치는 국회가 계엄령 해제, 개헌 논의를 이끌어 나가게 되면 군의 정치적 입지가 축소될 것을 우려하여 단행된 정치 테러의 성격이 짙다. 1997년 대법원은 이처럼 국회의원 등의 권한을 침해하거나 배제함으로써 그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은 국헌문란(내란죄)에 해당된다고 판결내렸다.
2.1.1. 비상계엄 확대는 정당한 법 절차를 받았다는 주장
명분론 중 특히 자주 사용 되는 것이 "비상계엄 확대는 정당한 법 절차를 받았으며, 당시 일개 군인에 불과한 전두환에겐 실권이 없었다. 모든 사태를 좌지우지 한 흑막은 최규하이므로, 모든 책임은 최규하에게 물어야 한다."라는 주장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 역시 헛소리이다. 대법원은 1997년 12.12 군사반란 가담자들에 대한 재판에서 전원합의체로 판시하길, 내란죄의 경우에도 국헌문란의 목적을 가진 자(하나회)가 그러한 목적이 없는 자(최규하)를 이용(협박)하여 간접정범 형태로도 범할 수 있다고 했다.이들의 논리를 하나하나 논파해보자. 먼저 간접정범이란 형법에서 말하는 정범의 한 형태로, 범죄를 저지를 마음이 없는 자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런 간접정범의 행위에는 협박이나 기망 등이 매우 자주 따른다. 당시 하나회는 정승화를 체포해서 조사할 마음도 없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가기관을 마비시키고, 국민들을 때려잡을 생각도 전혀 없는 최규하를 사실상 협박하여 자신들의 의사 지배 하에 놓았다. 그로 인해 최규하가 하나회의 위법한 결재를 해줬지만, 이건 사실상 하나회가 자신들 스스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대법원도 하나회의 내란행위를 사실상 자신들이 한 것이나 다름없는 간접정범이라고 한 것이다.
그 다음, 전두환은 1980년 4월 14일 이후 제10대 중앙정보부장 서리도 겸직했기 때문에 국무회의에도 참여가 가능했고, 5.17비상계엄확대에도 관여가 가능한 상태였다. 또한 이 시기 중앙정보부장은 국무회의에서 국방장관보다 높은 직위였으므로 매우 깊게 관여되어 있었다.
5.17일 전군지휘관회의에서 육참총장이 참여한 가운데 비상계엄 확대가 결의 되었고 그날 저녁 국무회의에서 통과되었는데, 이 당시 국무회의가 열리던 중앙청을 계엄군이 둘러싸고 신분증을 검사하며 위압적인 행위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법원에서는 비상계엄 확대에 대해 "내란 행위자들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강압하여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라고 판시하였다. 즉, 비상계엄행위 자체가 국헌문란행위에 의해 발효된 것이다.
또한 당시 계엄군 사령관이였던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은 전두환이 임명에 관여[4]했으며 확대계엄 당시 계엄군 투입에 대해 최규하 대통령의 사전재가를 받은 일이 없고, 통상적으로 사후에 허가를 받았다라는 증언을 하였다.
즉, 확대계엄(전국계엄) 때는 계엄사령관이 대통령에게만 계엄 내용을 직접 보고하도록 되어 있어 다른 국무위원들이 개입할 수 없고, 심지어 계엄사항조차 최규하는 볼짱다본 후 사후보고만 받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최규하 대통령이 총책임자이고 전두환이 일개 사령관이니 모든 책임은 최규하에게 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이처럼 명분론을 내세울 경우, 오히려 시민군이 어떠한 수단을 사용했더라도 그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논리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신군부의 만행을 합리화할 수 없는 것이다.
2.2. 김대중 석방운동 혹은 배후조종이라는 주장
광주민주화운동의 배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있었다는 주장은 의외로 유서깊다. 신군부는 5.18 이후에 5.18 "폭동"의 배후에 김대중이 있었다고 주장했으며 이것이 이러한 주장의 근원이다.이러한 주장을 따르는 이들은 광주민주화 운동은 계엄령 철폐와 민주화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을 석방하기 위한 운동이거나, 혹은 그렇게 하도록 김대중이 배후에서 조종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구호 중 하나로 "김대중을 석방하라"라는 것이 있었고, 또한 김대중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나를 위해서 광주시민들이 죽었다"라는 부분이 바로 광주 민주화운동이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김대중에 대한 석방운동 혹은 김대중이 조종한 운동이라는 주장의 근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우선, 1980년 시위 당시 김대중과 광주시민들은 서로의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다. 김대중은 체포된 이후 며칠이 지나서야 광주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았으며, KBS 다큐 <푸른 눈의 목격자>에 의하면 광주시민들도 김대중의 자세한 상황에 대해 서독의 방송기자가 외신을 전해주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전두환 정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강도 높은 언론 통제 정책을 시행했다. 광주 밖에서 "광주사태"에 대해 들을 수 있었던 가장 빠른 보도는 항쟁으로부터 닷새 후 나온 동아일보의 석간이었고, 이마저도 정부측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여 (민주화 운동이 아닌) 소요사태 혹은 폭동으로 칭하는 검열된 소식지에 가까웠다. 당시 김대중은 "본적도 없는 생면부지의 학생에게 몇백만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광주에서 일을 벌이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말도 안되는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이후 무죄 판결을 받았다.
민주화 운동에서 "김대중을 석방하라"라는 표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단순히 김대중에 대한 석방운동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호남에 대한 경제, 정치적 차별은 눈에 띄게 심해졌다. 당시 정부의 4대 권력 요직인 중앙정보부장, 검찰총장, 국세청장, 치안본부장에 호남 출신은 치안본부장 단 한 명 뿐이었고 그나마도 임기는 10개월에 불과했다. 이러한 차별과, 박정희 정권의 심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은 호남 출신으로서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실질적인 야당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에 대한 불법적이고 반민주적인 견제는 계속되었고, 그것이 현실화 된 것이 전두환의 내란음모 조작 사건이었고, 5.17 계엄 전국확대였다. 따라서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표어는 곧 김대중에 대한 반민주적인 탄압을 멈추라는 의미이며, 이는 비상계엄을 철폐하라는 요구, 그리고 민주화에 대한 요구와 동일한 맥락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맥락을 감안하지 않고 민주화운동을 김대중 석방운동으로 본다면, "김대중을 석방하라"라는 문구와 함께 있는 "비상계엄을 철폐하라"라는 문구는 서로 연관을 전혀 찾을 수 없다.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은 고의적으로 비상계엄을 철폐하라는 구호를 모른척하곤 한다.
회고록의 문구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곳[5]에서 벌어진 일이며 김대중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차별을 받다가 희생당한 일이니 당연히 지지자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하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
맥락을 완전히 거세한 이러한 주장은 마치 6월 민주항쟁때 "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가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삼아(함께 있는 "호헌철폐"라는 구호는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6월 민주항쟁은 "이한열 부활운동"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3. 최규하의 민정이양 약속을 믿지 않고 선제적으로 일으킨 시위다?
박정희 사망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최규하가 민주적 헌법으로의 개헌과 정권 이양을 약속했는데, 그것을 믿지 않고 시위를 일으켰으니 폭동이라는 주장.이것 역시 터무니없는 주장인데, 당시 비상계엄이 선포된 명분은 '대통령의 유고로 인해 국가의 안보가 위험해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새로 당선된 이후에도 계엄령은 해제되지 않았다. 이에 전국에서 대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5월 14일 전국 32개 대학 가두시위
5월 16일 국무총리 신현확이 늦어도 연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고 추후 선거를 실시해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5월 16일 국무총리 신현확 담화 발표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인 5월 17일 정부는 신군부의 주도하에 보안의 예비검속을 통해 김대중, 김종필를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을 합동수사본부로 불법 연행했다.
주요 정치인 연행 직후 신군부는 비상 계엄령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하고, 이와 동시에 계엄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면서 정치활동 금지, 대학교 휴교령, 언론보도 사전검열 강화, 집회 및 시위 금지 등의 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5월 18일 새벽 2시에 신군부는 국회를 무력으로 점령한 뒤 봉쇄했고, 이후 국회를 해산시켜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또한 최규하 전 대통령은 발표 때 "이 정부는 과도정부가 아니라 안정을 위한 정부"라며 민정이양을 부정하는 뉘앙스의 표현으로 자기 정부의 입장을 발표했다.
요약하면 정부가 개헌과 정권 이양을 약속한것은 사실이나, 집회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계엄령을 해제하지 않았고 이는 많은 국민들에게 정권이 한 약속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주요 정치인 연행으로 국민들에게 신군부가 정권을 탈취하려 한다는 확신을 갖게 했고, 이것이 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으로 이어진 것이다.
2.4.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서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헤리티지 재단이 1985년 작성한 보고서가 광주 폭동설의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6] 물론 헤리티지 재단의 입장이 미국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 해당 보고서 전문만 놓고 보면 헤리티지 재단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6.29 선언 이후의 보고서를 보면, '신군부에 의한 학살', '민주화 운동' 으로 입장을 선회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88년 보고서 2005년 보고서 2011년 보고서참고로 말해서 헤리티지 재단은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성향의 싱크 탱크로 미국정치 특히 공화당(미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게다가 1985년은 바로 미국에서 2차대전 이후 가장 강경한 우익으로 평가되는 로널드 레이건 정권 시절이다. 이때 레이건 정권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면서 반소반공이라면 동맹국의 군사독재, 인권탄압, 민간인 학살도 모두 눈감아주고 있었다. 아예 눈감아 주는 수준을 뛰어넘어서 CIA와 미군을 동원해서 이런 범죄행위를 지원하고 직접 동참하기까지 했다.[7] 이런 시기에 레이건 정권의 인력풀인 헤리티지 재단이 5.18을 반정부 폭동으로 평가하는 것은 당연한 행보이다. 이후 냉전이 종식되고 소련이 무너지자 미국이 동맹국의 군부독재 정권들을 무리하게 지원할 이유가 사라지고, 당연히 헤리티지 재단도 5.18을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당시 한국의 언론과 출판이 통제되던 상황에서 미국 현지에서 민간연구기관이 명확하게 확인 가능한 사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헤리티지 재단은 당시 확인가능한 선에서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고, 이후 입장을 정반대로 선회했기 때문에 광주 폭동설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리고, 해당 보고서에서는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 전혀 다루지 않았다.
2.5. 교도소 습격 사건 실체는 민간인 살상을 위한 행위였다?
자세한 내용은 광주교도소 습격 조작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무장폭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했는데, 이것 자체로도 폭동이라고 불릴 만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반론이 있다.
5.18 당시 광주교도소장이었던 한도희 씨는 1995년 한 지방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시민군이 80년 당시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계엄사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일부에서 법원 판결을 들기도 한다. 법원 판결에 따르면 시민군이 교도소 주둔 계엄군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법원 판결에선 시민군이 교도소 주둔 계엄군을 공격했다는 내용만 나오지,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내용은 없다. 만약 교도소 주둔 계엄군을 공격할 정황이 교도소 습격말고 없다면 당연히 교도소 습격설이 타당하나, 당시 교도소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광주교도소는 광주에서 담양, 곡성 쪽으로 빠져나가는 29번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동광주IC가 교차하는 곳 사이에 자리 잡은 교통의 요충지이다. 즉 광주교도소가 궁벽한 땅끝마을에 있어서 거기까지 찾아간 것이 아니라 광주에서 담양, 곡성, 순천 방향으로 피난 가든지, 놀러가든지 하려면 광주교도소 몇 미터 옆을 스쳐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사건 직후 계엄사는 폭도들이 교도소를 5차례 습격하였다고 주장하였고, 현재 광주 민주화 운동 왜곡 세력은 6차례 습격하였다고 주장한다.
광주교도소는 1차 진압을 맡았던 31사단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 31사단은 사단장 정웅 소장이 시위 학생들의 말을 경청하고 가급적 유혈사태를 막고자 하는 온건 방침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때도 광주 시위대 차량이 2차례 도로를 지나가려고 했지만 31사단 측의 철수 권고로 자진 철수를 하였으며, 이후 3공수여단에게 인계 하였을 때 비로소 "총성"이 들려왔다. 나중에 20사단이 광주 교도소를 다시 인계 받은 후에는 교도소 인근에서 총성이 들리지 않았다.
일부는 광주교도소 습격(?) 여부를 알려면 3공수여단의 전투상보를 살펴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1995년 검찰에서 작성한 5.18관련 사건 수사 결과(1995.7.18)에 따르면 1980년 5월 22일 00:40경 시위대가 고속버스 2대, 픽업 1대, 1/4톤 트럭 3대 등 차량 6대에 나누어 타고 광주교도소에 접근, 3공수여단과 교전을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같은 날 09:00경 시위대 6명이 트럭에 탑승하고 기관총 사격을 하면서 광주교도소에 접근했으며, 경계근무 중이던 3공수여단 11대대 11지역대 병력과 총격전이 벌어져 시위대 3명이 사망하고 수명이 부상을 입고 도주하였으며 3공수여단은 고속버스 2대, 트럭 1대, 픽업 1대와 LMG 1정, M1소총 1정, 칼빈 4정과 실탄 약 4백발을 회수하였다고 하고 있다.[8]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는 다음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당시 3공수여단의 임무는 두 가지였다.
3공수,265/1,261 광주교도소 경계, 남부 고속도로 차단[9]
3공수여단은 남부 고속도로 차단을 하면서 교도소 부근에서 수많은 학살을 벌였다. 여기서 황당한 것은, 이 3공수여단 머저리들은 광주교도소 일대가 국방장관령 군사작전지역으로 봉쇄되었다는, 사람 목숨이 달린 중요한 사실을 경고 방송이나 계도 활동 등으로 제대로 알리려는 노력은 일절 하지 않고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나가는 차량이 있으면 경고 한 마디 없이 보이는 대로 그냥 막 쐈다는 것이다.
5. 21.의 자위권 발동과 함께 다량의 실탄을 지급받고 광주시 외곽 주요 지점에서 봉쇄작전을 수행했던 계엄군들이 무차별 발포에 나서는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계엄군들은 외곽봉쇄지역에서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했고, 외곽지역에서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3공수여단이 철수해 봉쇄작전을 수행했던 광주교도소 부근에서도 민간인 살상이 발생한 것을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설명했던 것이다.[10]
해당 부분을 다시 보자.
당시 3공수여단이 경계했던 광주교도소 부근은 광주-담양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했다. 광주교도소는 민간인 학살이 빈번하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설명됐다.
실제로 3공수여단 전투상보에도 무장시위대가 바리케이드로 돌진한 것으로 나온다.
익일인 5.22일 08:20-08:50까지 수색작전 실시하였으나 흔적은 발견 못함, 수색작전간 노획버스 1대로 정문에서 약 50미터 이격지점에 도로를 차단, 수색 복귀 후 09:00경에 2 1/2톤 탑승한 폭도 6명이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교도소로 접근했으나 50미터 전방의 바리케이트에 봉착 진출을 못하자 이에 11대대에서 즉각 응사 2명 사살, 4명은 부상을 입고 도주 전과(아군: 피해 무, 2 1/2톤 1대 노획, 칼빈 1정, 실탄 230발, 엠원 1정, 엘엠지 1정 노획)
전투상보에도 바리케이드에 봉착한 사실이 드러난다. 교도소 습격 목적이란 건 3공수여단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3공수여단의 추측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본다면 3공수여단의 바리케이드에서 벌어진 충돌이다.
원래 3공수여단은 당시 미리 수하를 한 뒤에 발포해야 했지만 3공수여단은 그러지 않았다.
5. 21. 18:49 전교사는 ‘확인사격 지시(전상자전 제611호. 5. 21. 20:55)’를 하달했다. 수하 불응시 사격하라는 지시였다. 그러나 송암동 20사단 사건, 광주교도소 발포, 주남마을과 녹동마을 주민들에 대한 총격 등은 수하 자체가 없는 발포였다. 5. 24. 외곽봉쇄 작전 부대교대 지시가 내려졌다. 이때 전 부대에 사격을 중지하고 먼저 확인한 뒤 불응하거나 먼저 사격하면 대응 사격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하지만 이 지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이날 하루 두 차례나 오인사격이 있었다.[11]
당시 3공수여단은 민간인을 무차별로 학살했지만 그것조차 불순분자들의 선동으로 인한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착각 혹은 의도적으로 왜곡했다. 그러니까 교도소로 접근하지 않은 무장 시위대도 교도소 습격으로 착각했으며, 무장시위대한테는 교도소 습격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교도소 경계 병력을 공격할 동기가 존재했다.
이런 상황이기에 무장시위대가 교도소를 습격했을 거라는 증거는 없었다. 그러자 계엄군은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왜곡 행위를 벌였는데 훗날 국방부 조사 결과 날조로 밝혀졌다.
전남합수단에서 작성한 「광주교도소 습격기도사건」에는 당시 광주교도소에 복역 중인 류락진의 처 신애덕과 동생 류영선이 시위에 가담해 교도소를 습격, 복역 중인 류락진을 구출하도록 선동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특히 류영선은 시위군중과 함께 교도소를 습격하다 총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광주교도소 습격기도사건」(보안사, 383-1989-8, 89쪽). 그러나 이 개요는 ‘5. 18’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몰기 위한 의도에서 조작됐음이 위원회 조사결과 밝혀졌다. 류락진이 광주교도소에 복역한 것과, 류영선이 총상으로 사망한 것은 사실이나 당시 신애덕은 합수부에 의해 시위주동자로 예비검속됐던 딸 류소영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또 류영선은 소재를 모르는 조카 류소영을 찾으려다 계엄군의 과격진압을 보고 시위대에 합류했다가 5. 21. 전남도청 앞 발포로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사망했다.[12]
죽은 사람은 변호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죽은 사람이 습격했다는 조작을 벌인 것.
2.6. 윤한봉의 사전 무기고 답사에 따른 조직적 폭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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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그 출처가 된 게 윤한봉 자신의 증언인데 정작 그 증언 안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4월 1일인데 아무도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뭔 쓸데없는 소리 한다느니 회의 분위기 깬다느니 여 다른 나라 이야기 하고 앉았다느니 그런 식으로 우스워 보인거지. 내가 잔뜩 다급해가지고 그래도 지방에서는 부산은 부마항쟁으로 피해를 많이 봤으니까……근데, 아무도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더라고. 돌아와 가지고 아예 4월 달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한테 그 이야기를 했어. 개똥이를 만나면 이 이야기, 또 두셋이 만나면 이 이야기, 아무도 내 이야기에 귀를 안 기울이고, 아 쓸데없는 소리 왜 자꾸 해싸요,아이고 그런 날이 좀 왔으면 좋겠소 내가 봤을 때는 어림 반푼어치도 인자 어림없다 이거지, 민중들이 무슨 들고 일어나야 그러지. 우리가 뭐 부마항쟁은 예측이라도 했었냐. 아 그건 어떤 특수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거지, 아이고
윤한봉은 무기답사를 주장하긴 했으나 주변 사람들에게 씹혔다.다 잡아간거다. 기습 당한거죠. 아 이거. 와 눈 앞에 캄캄해져불죠. 왜 그냐면 기습을 예측을 못했으니까. 뭐 뜬 눈으로 밤 새우고 새벽에 이제 집에서 빠져 나가 가지고 시내 용화 후배네 집에 가서 잤어요. 안전한 곳에 가서 동태를 살펴 보니까 엉망이지. 다 잽혀들어가불고. 전대 조대 할 것 없이 전부 접수되어버리고 학생회 간부도 일부 도망가고 일부 다 잽혀불고. 긍게 인제 박살나분거야, 박살이. 아무 준비없이. 와 그때처럼 내가 후회스러웠을 때가 없었어. 왜냐면 나는 21일부터 25일로 봤지, 17일날 밤에 당할 것을 생각을 못하고, 기습에 대해서는 예측을 못했거든. 그래가지고 19일날 아침에 새벽에 빠져나갔지, 광주로. 뭐 인제 연락할 길이 없는 거야.[13]
그런 상황에서 윤한봉은 대비도 없이 당했다고 한다.윤한봉 증언을 근거했는데 정작 윤한봉 증언에서도 그런 내용 없다.
2.7. 시위대가 과격시위를 해서 공수부대원이 진압했을 뿐이다?
1980년 5월 18일, 7공수여단이 벌인 행위에 대한 동아일보 기자의 증언일요일이었다. 날씨는 아주 화창했다. 평균기온 16.3도로 아침은 약간 쌀쌀했지만 낮의 최고 기온은 25.1도까지 올라간 아주 쾌청한 날씨였다.
세째 일요일이어서 상가에는 문을 닫고 쉬는 점포가 눈에 띄게 많았다. 한달이면 대개 첫째와 세째 일요일은 쉬는 날로 정하는 점포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농촌에는 바야흐로 모내기철을 앞두고 그 준비에 온 힘을 쏟고 있어서 집앞과 논밭에는 활기가 넘쳐 흘렀다.
그런 일요일이었다.
광주직할시 북구 북동 180번지 앞 큰길. 금남로의 연장이어서 그냥 금남로길이라고 불리어지는 길이다.
……얼룩무늬 군복에 머리에는 방석망이 달린 헬멧을 쓰고 손에는 방패와 방망이를 든 1개중대 가량의 공수부대 군인들.……대결이 이 횡단보도 위에 도착할 무렵 내려진 명령이었다. 그러자 군인들은 횡당보도선에 맞추어 일제히 멈추어서서 대오를 가다듬고 있었다.
유동 3거리에서 4백50m쯤 떨어진 횡단보도. 여느 횡단보도와 마찬가지로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이 횡단 보도는 북동 180번지와 누문동 62번지를 연결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로 들어가는 길로 이어져 있다.
짧고 숨막히는 시간이 흘렀다. 시계의 짧은 바늘이 4자 위에 서고 긴 바늘이 12자 위에 이르렀다.
바로 4시 정각이었다.
바로 이때였다. 대열을 따라온 초록색 1.5톤급 차량 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금속성으로 위압적인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거리에 나와있는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빨리 돌아가십시오."
……스피커에서 귀가를 종용하는 방송이 나온 지 1분이 지났을까. 이번에는 짧은 순간을 두고 엄청난 명령이 뒤따라 튀어나왔다.
시민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거리에 나와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
딱 한마디. 이 명령 이외 어떤 세세한 행동지침이 나올 법한테 그렇지도 않았다. 아무런 군더더기도 없었다.
……
이 명령이 떨어지자 현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돌변해버렸다.……시위했던 학생들만 잡는 것이 아니라 젊다고 보이는 사람이면 보는대로 두들겨 패고 잡아 끌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
'저놈 잡아라' '저기 간다'는 소리와 동시에 '아이구' '억' 소리가 터져 나와 거리는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횡단보도 바로 옆, 북동 276번지 3층 건물 2층에 있는 동아일보 광주지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2명의 공수부대원이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는 듯한 자세로 뛰어 올라왔다.
두 사람 모두 대검이 꽂혀 있는 M16소총을 앞으로 내밀고 서슬이 퍼렇게 되어 있었다. 마치 총검술시범을 보이는 자세처럼 착검한 M16소총을 앞으로 겨누고 있었다. 곧 아무에게라도 방아쇠를 당겨 버릴 자세, 아니면 금방 찔러 버릴 듯한 그러한 모습이었다.
……
마침 일요일인데도 출근한 정은철 총무는 바깥의 시끌벌적한 사태와는 관계없이 자기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그는 '시위를 한 일도 없음은 물론 구경조차 하지 않았던 터라 무슨 상관이 있으랴'는 듯 태연하게 자기 일을 부지런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두 군인은 다짜고짜로 정 총무의 뒷 덜미를 낚아챘다. 정 씨는 의자와 함께 뒤로 벌렁 넘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두 군인은 정 씨를 마구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짓이겼다. 곧 숨이 끊어 질 것 같았다. 큰일이었다.
……
정 총무는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반항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두 군인은 사무실 바닥에서 기진맥진해 찍 소리도 못하는 정 총무의 두발을 양쪽에서 하나씩 붙잡고 끌고 내려갔다. 바닥에 끌린 채였다. 마치 죽어있는 짐승을 끌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2층 계단을 내려갈 때도 그대로 끌고 내려갔다.
……이 날 그는 자기가 맡은 구역의 수금실적이 나빠 하루 전날 지사장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일요일인데도 출근했다가 당한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담당구역 수금을 하기 위해 출근한 배달학생 박준하군(광주공고 1년)도 수없이 맞고 짓밟혔다. 그리고나서 끌려나가다 계단에서 실신해버렸다. 그러자 비로소 그들은 그대로 팽개쳐 두고 내려가 버렸다.
……동아일보 광주지사 바로 앞쪽에는 두대의 트럭이 유동 3거리 쪽을 향해 정차해 있었다.
……
그 차량에는 길거리와 건물 안팎에서 붙잡혀 끌려온 사람들이 가득가득 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머리와 코, 입에서 피를 토해 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들의 하얀 옷자락은 피에 젖어 엉망으로 되어있었다.
어떤 사람은 기진한 듯 눈만 껌벅껌벅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 사람이 붙잡혀왔다. 그의 머리나 코에서는 피가 줄줄 쏟아져내렸다. 웃옷은 갈기갈기 찢겨진 채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끌고 온 군인이 대기 중인 군인에게 인계하면 또 한 차례 군화발이 날아오고 몽둥이 세례가 쏟아졌다. 그리고 짐짝 실리듯 트럭 위로 이끌려 올라갔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또 다른 군인이 '이 새끼 머리 숙여'라며 군화발로 머리와 등을 짓밟는다.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아야 끝이 난다.
……
그때 마침 택시 한대가 지나가려다가 이들에게 붙잡혔다.
감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와 색동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예쁜 새색시가 차에서 끌려 나왔다. 한 눈으로 보아도 신혼부분임에 틀림 없었다.>……이 길은 시내 중심가에서 광주공항이나 고속버스 터미널 또는 광주역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다. 그래서 이 신혼부부는 공항이나 역쪽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그들 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택시에서 끌려나오자마자 신랑은 무자비한 몽둥이와 장작개비 그리고 군화발 세례를 받았다. 이유도 없었다.
순식간에 일이었는데 신랑은 '아이구, 눈이야'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붙잡고 땅바닥으로 뒹굴고 있는 것 이 아닌가
……
신부도 군화발로 채였는지 한복은 엉망이 된 채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사람 살려!"
신부는 자신의 몰골은 돌아보지도 않고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신랑을 붙잡고 엉엉 울며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이 쌍년"
군인들은 또 다시 신부를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하더니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당시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 김영택의 증언. 김영택, 현장기자가 쓴 10일간의 취재수첩, 1988, 사계절, 11~22
세째 일요일이어서 상가에는 문을 닫고 쉬는 점포가 눈에 띄게 많았다. 한달이면 대개 첫째와 세째 일요일은 쉬는 날로 정하는 점포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농촌에는 바야흐로 모내기철을 앞두고 그 준비에 온 힘을 쏟고 있어서 집앞과 논밭에는 활기가 넘쳐 흘렀다.
그런 일요일이었다.
광주직할시 북구 북동 180번지 앞 큰길. 금남로의 연장이어서 그냥 금남로길이라고 불리어지는 길이다.
……얼룩무늬 군복에 머리에는 방석망이 달린 헬멧을 쓰고 손에는 방패와 방망이를 든 1개중대 가량의 공수부대 군인들.……대결이 이 횡단보도 위에 도착할 무렵 내려진 명령이었다. 그러자 군인들은 횡당보도선에 맞추어 일제히 멈추어서서 대오를 가다듬고 있었다.
유동 3거리에서 4백50m쯤 떨어진 횡단보도. 여느 횡단보도와 마찬가지로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이 횡단 보도는 북동 180번지와 누문동 62번지를 연결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로 들어가는 길로 이어져 있다.
짧고 숨막히는 시간이 흘렀다. 시계의 짧은 바늘이 4자 위에 서고 긴 바늘이 12자 위에 이르렀다.
바로 4시 정각이었다.
바로 이때였다. 대열을 따라온 초록색 1.5톤급 차량 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금속성으로 위압적인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거리에 나와있는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빨리 돌아가십시오."
……스피커에서 귀가를 종용하는 방송이 나온 지 1분이 지났을까. 이번에는 짧은 순간을 두고 엄청난 명령이 뒤따라 튀어나왔다.
시민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거리에 나와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
딱 한마디. 이 명령 이외 어떤 세세한 행동지침이 나올 법한테 그렇지도 않았다. 아무런 군더더기도 없었다.
……
이 명령이 떨어지자 현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돌변해버렸다.……시위했던 학생들만 잡는 것이 아니라 젊다고 보이는 사람이면 보는대로 두들겨 패고 잡아 끌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
'저놈 잡아라' '저기 간다'는 소리와 동시에 '아이구' '억' 소리가 터져 나와 거리는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횡단보도 바로 옆, 북동 276번지 3층 건물 2층에 있는 동아일보 광주지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2명의 공수부대원이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는 듯한 자세로 뛰어 올라왔다.
두 사람 모두 대검이 꽂혀 있는 M16소총을 앞으로 내밀고 서슬이 퍼렇게 되어 있었다. 마치 총검술시범을 보이는 자세처럼 착검한 M16소총을 앞으로 겨누고 있었다. 곧 아무에게라도 방아쇠를 당겨 버릴 자세, 아니면 금방 찔러 버릴 듯한 그러한 모습이었다.
……
마침 일요일인데도 출근한 정은철 총무는 바깥의 시끌벌적한 사태와는 관계없이 자기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그는 '시위를 한 일도 없음은 물론 구경조차 하지 않았던 터라 무슨 상관이 있으랴'는 듯 태연하게 자기 일을 부지런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두 군인은 다짜고짜로 정 총무의 뒷 덜미를 낚아챘다. 정 씨는 의자와 함께 뒤로 벌렁 넘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두 군인은 정 씨를 마구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짓이겼다. 곧 숨이 끊어 질 것 같았다. 큰일이었다.
……
정 총무는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반항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두 군인은 사무실 바닥에서 기진맥진해 찍 소리도 못하는 정 총무의 두발을 양쪽에서 하나씩 붙잡고 끌고 내려갔다. 바닥에 끌린 채였다. 마치 죽어있는 짐승을 끌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2층 계단을 내려갈 때도 그대로 끌고 내려갔다.
……이 날 그는 자기가 맡은 구역의 수금실적이 나빠 하루 전날 지사장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일요일인데도 출근했다가 당한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담당구역 수금을 하기 위해 출근한 배달학생 박준하군(광주공고 1년)도 수없이 맞고 짓밟혔다. 그리고나서 끌려나가다 계단에서 실신해버렸다. 그러자 비로소 그들은 그대로 팽개쳐 두고 내려가 버렸다.
……동아일보 광주지사 바로 앞쪽에는 두대의 트럭이 유동 3거리 쪽을 향해 정차해 있었다.
……
그 차량에는 길거리와 건물 안팎에서 붙잡혀 끌려온 사람들이 가득가득 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머리와 코, 입에서 피를 토해 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들의 하얀 옷자락은 피에 젖어 엉망으로 되어있었다.
어떤 사람은 기진한 듯 눈만 껌벅껌벅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 사람이 붙잡혀왔다. 그의 머리나 코에서는 피가 줄줄 쏟아져내렸다. 웃옷은 갈기갈기 찢겨진 채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끌고 온 군인이 대기 중인 군인에게 인계하면 또 한 차례 군화발이 날아오고 몽둥이 세례가 쏟아졌다. 그리고 짐짝 실리듯 트럭 위로 이끌려 올라갔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또 다른 군인이 '이 새끼 머리 숙여'라며 군화발로 머리와 등을 짓밟는다.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아야 끝이 난다.
……
그때 마침 택시 한대가 지나가려다가 이들에게 붙잡혔다.
감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와 색동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예쁜 새색시가 차에서 끌려 나왔다. 한 눈으로 보아도 신혼부분임에 틀림 없었다.>……이 길은 시내 중심가에서 광주공항이나 고속버스 터미널 또는 광주역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다. 그래서 이 신혼부부는 공항이나 역쪽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그들 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택시에서 끌려나오자마자 신랑은 무자비한 몽둥이와 장작개비 그리고 군화발 세례를 받았다. 이유도 없었다.
순식간에 일이었는데 신랑은 '아이구, 눈이야'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붙잡고 땅바닥으로 뒹굴고 있는 것 이 아닌가
……
신부도 군화발로 채였는지 한복은 엉망이 된 채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사람 살려!"
신부는 자신의 몰골은 돌아보지도 않고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신랑을 붙잡고 엉엉 울며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이 쌍년"
군인들은 또 다시 신부를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하더니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당시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 김영택의 증언. 김영택, 현장기자가 쓴 10일간의 취재수첩, 1988, 사계절, 11~22
1980년 5월 19일, 11공수여단의 행위에 대한 11공수여단원 하사의 증언(본인은 5월 18일로 잘못 알고 있음),
쓰고 있는 베레모를 벗고 방탄 헬멧으로 바꾸어쓰라는 이 지시는 곧 차량에서 하차를 의미하고 어디선가 시위대와 맞닥뜨려 시위진압을 의미한다는 걸 사전교육을 통해 저희는 잘 알았답니다. 차량은 다시 양복 복개상사에서 좌회전으로 돌려서 전차량 금남로에 단숨에 달려가 관광호텔 앞에 정차를 하니 여기저기 돌멩이가 어지럽게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더군요. 차량에서 하차는 하지 않고 기다리는데 시위대는 전부 도망갔으니 전 병력이 하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2~4분)"하차"하는 명령이 하달되더군요. 이 명령이 곧 우리 귀에는 "무자비하게 젊은 사내는 두들겨패라"는 지시로 들렸읍니다.……차량에서 하차하니 이미 다 시위대는 뿔뿔이 도망치고 누군가에 이 증오심을 풀어야겠는데 시위대는 없고 모두다 그 근처 관광호텔, 다방, 이발소 등등 건물을 수색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때 나는 관광호텔 뒤에 있는 미도장인가 하는 여관을 7~8명이서 수색하기 위해 갔더니 앞에 철문이 닫혀 있더군요.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안 열어주어 담을 타고 다른 사병이 넘어 들어가서 철문을 여니 '''몇몇 종업원이 우르르 나오더니 우리 집에는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요.
차라리 뒷문을 통해 피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 개새끼들이 겁대가리 없네" 하면서 태권도 동작 발차기로 2단 뛰어차기로 일부는 때리고 일부는 진압봉으로 구타를 시작했읍니다. 이 진압봉은 서두에 설명했듯이 너무나 단단하고 무게가 있어서 조금만 힘을 가해서 때리면 손목이나 팔목으로 막으면 팔이 부러졌읍니다. 4~5명의 종업원이 불과 2~3분 사이 하얀 와이셔츠에 나비 넥타이는 간 곳이 없이 시멘트 바닥 위에 나뒹굴었읍니다. 다시 일으켜세워서 4명을 전체 벽에 뒤로 기대게 하자 마침 지역대장 소령이 오더군요. 구타에는 장·사병이 따로 없었읍니다. 그는 무릎을 꿇게 한 다음 신고 있는 군화발로 있는 힘을 다해서 얼굴을 한 번씩 차는 것이었읍니다.
모진 것이 사람의 목숨이었읍니다. 얼굴은 뭉개지고 피는 쏟아지고 군화발의 충격으로 인해서 뒷머리를 시멘트 벽에 그토록 강하게 부딪쳤지만 쓰러진 사람은 없더군요. 다만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얼굴로 변했지요. 한편 함께 수색하던 일부 병력 2~3명은 각 객실을 수색하여 젊은 사람은 무조건 밖으로 집합시키고 있었읍니다. 10여 명 이상의 20대 30대 젊은 사람들이 공포의 표정으로 2열종대로 집합하더군요. 그중 30대 중반의 사나이는 신혼여행 왔다고 사정을 하더군요. 저희하고는 대화가 필요없었읍니다. 무조건 무자비한 구타요, 연행 이외의 방법은 통하지가 않았읍니다. 신부가 나와서 사정사정하더군요. 눈물도 피도 없었읍니다. 일단 붙잡힌 시민들은 일차례 구타가 시작되었읍니다. 왜냐하면 도망을 못 가게 한다는 이유요, 기를 죽인다는 이유였읍니다. 다음 차례는 무조건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히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차고 있던 본인의 혁대로 뒤로 손을 묶고 묶인 손으로 자신의 벗은 옷을 듣고 저희가 타고 왔던 트럭 옆으로 끌고가서 다른 연행자와 함께 금남로 도로 한가운데 30~40명씩 집합 후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등 혹심하게 기를 죽이고 트럭 뒤에 2열종대로 집합시켰읍니다. 그후 차량에 탑승하면 손은 뒤로 묶인 상태에서, 보통 성인도 타기 힘들 정도로 높은 차량을 탔읍니다. 뒤에서 다른 연행자가 머리를 들어서 밀어 올리고 타는 연행자는 죽도록 올라탑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요, 또한 몽둥이 세례 때문에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모를 정도로 무섭더구요. 차량에 탑승하면 2~3명의 통신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고개 숙여" "고개 숙여" 지시합니다. 왜냐하면 고개를 들고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 용기도 생기고 특전사 요원이 2~3명이라는 것을 알면 집단으로 대항하여 도주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들거나 옆사람을 보면 위에서 기다리는 요원이 또한 몽둥이로 등을 사정없이 내리친답니다. 그리고 차량으로 조선대학교 종합운동장으로 이동시킵니다.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차량이 연병장에 클랙슨을 울리면서 도착하면, 잔류하고 있던 행정병이나 취사병 경계 대기병 등이 진압봉을 들고 모입니다. 그리고 차량에서 하차시켜 다시 줄을 세워 다시 기합과 구타가 시작됩니다.'''
……글로 적을 수 없도록 구타를 합니다. 그리고 체육관 건물에 수용시킵니다. 앞뒤 문에는 4~5명씩 초병을 세우고, 안에서 4~5명이 구타를 또 한답니다. 그리고 잠시 대기하다가 상무대 31사단으로 보내집니다. 시위를 하였든 하지 않았든지 젊은 사람이라는 죄로 끌려갑니다. 한번 붙들리면 3~4차례 극심한 구타와 기합 등으로 인간의 한계를 지나버릴 정도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 따릅니다. -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 「광주사태에서 나는 무엇을 했나 - 광주사태 당시 투입됐던 어느 계엄군의 수기」,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35~37쪽 ( 편저자 윤재걸은 이 수기를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라는 제목을 붙였다. -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21쪽.) 참고로 이 수기가 실린 책에선 정작 수기를 쓴 사람의 정보가 전혀 없고 '공수부대원'이라고만 되어있다. 다만 글 내용을 봤을 때 11공수여단과 일치하니 11공수여단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러나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 12쪽, 64쪽에서 이 수기를 쓴 사람이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씨 라는 것이 밝혀졌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2~4분)"하차"하는 명령이 하달되더군요. 이 명령이 곧 우리 귀에는 "무자비하게 젊은 사내는 두들겨패라"는 지시로 들렸읍니다.……차량에서 하차하니 이미 다 시위대는 뿔뿔이 도망치고 누군가에 이 증오심을 풀어야겠는데 시위대는 없고 모두다 그 근처 관광호텔, 다방, 이발소 등등 건물을 수색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때 나는 관광호텔 뒤에 있는 미도장인가 하는 여관을 7~8명이서 수색하기 위해 갔더니 앞에 철문이 닫혀 있더군요.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안 열어주어 담을 타고 다른 사병이 넘어 들어가서 철문을 여니 '''몇몇 종업원이 우르르 나오더니 우리 집에는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요.
차라리 뒷문을 통해 피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 개새끼들이 겁대가리 없네" 하면서 태권도 동작 발차기로 2단 뛰어차기로 일부는 때리고 일부는 진압봉으로 구타를 시작했읍니다. 이 진압봉은 서두에 설명했듯이 너무나 단단하고 무게가 있어서 조금만 힘을 가해서 때리면 손목이나 팔목으로 막으면 팔이 부러졌읍니다. 4~5명의 종업원이 불과 2~3분 사이 하얀 와이셔츠에 나비 넥타이는 간 곳이 없이 시멘트 바닥 위에 나뒹굴었읍니다. 다시 일으켜세워서 4명을 전체 벽에 뒤로 기대게 하자 마침 지역대장 소령이 오더군요. 구타에는 장·사병이 따로 없었읍니다. 그는 무릎을 꿇게 한 다음 신고 있는 군화발로 있는 힘을 다해서 얼굴을 한 번씩 차는 것이었읍니다.
모진 것이 사람의 목숨이었읍니다. 얼굴은 뭉개지고 피는 쏟아지고 군화발의 충격으로 인해서 뒷머리를 시멘트 벽에 그토록 강하게 부딪쳤지만 쓰러진 사람은 없더군요. 다만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얼굴로 변했지요. 한편 함께 수색하던 일부 병력 2~3명은 각 객실을 수색하여 젊은 사람은 무조건 밖으로 집합시키고 있었읍니다. 10여 명 이상의 20대 30대 젊은 사람들이 공포의 표정으로 2열종대로 집합하더군요. 그중 30대 중반의 사나이는 신혼여행 왔다고 사정을 하더군요. 저희하고는 대화가 필요없었읍니다. 무조건 무자비한 구타요, 연행 이외의 방법은 통하지가 않았읍니다. 신부가 나와서 사정사정하더군요. 눈물도 피도 없었읍니다. 일단 붙잡힌 시민들은 일차례 구타가 시작되었읍니다. 왜냐하면 도망을 못 가게 한다는 이유요, 기를 죽인다는 이유였읍니다. 다음 차례는 무조건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히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차고 있던 본인의 혁대로 뒤로 손을 묶고 묶인 손으로 자신의 벗은 옷을 듣고 저희가 타고 왔던 트럭 옆으로 끌고가서 다른 연행자와 함께 금남로 도로 한가운데 30~40명씩 집합 후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등 혹심하게 기를 죽이고 트럭 뒤에 2열종대로 집합시켰읍니다. 그후 차량에 탑승하면 손은 뒤로 묶인 상태에서, 보통 성인도 타기 힘들 정도로 높은 차량을 탔읍니다. 뒤에서 다른 연행자가 머리를 들어서 밀어 올리고 타는 연행자는 죽도록 올라탑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요, 또한 몽둥이 세례 때문에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모를 정도로 무섭더구요. 차량에 탑승하면 2~3명의 통신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고개 숙여" "고개 숙여" 지시합니다. 왜냐하면 고개를 들고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 용기도 생기고 특전사 요원이 2~3명이라는 것을 알면 집단으로 대항하여 도주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들거나 옆사람을 보면 위에서 기다리는 요원이 또한 몽둥이로 등을 사정없이 내리친답니다. 그리고 차량으로 조선대학교 종합운동장으로 이동시킵니다.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차량이 연병장에 클랙슨을 울리면서 도착하면, 잔류하고 있던 행정병이나 취사병 경계 대기병 등이 진압봉을 들고 모입니다. 그리고 차량에서 하차시켜 다시 줄을 세워 다시 기합과 구타가 시작됩니다.'''
……글로 적을 수 없도록 구타를 합니다. 그리고 체육관 건물에 수용시킵니다. 앞뒤 문에는 4~5명씩 초병을 세우고, 안에서 4~5명이 구타를 또 한답니다. 그리고 잠시 대기하다가 상무대 31사단으로 보내집니다. 시위를 하였든 하지 않았든지 젊은 사람이라는 죄로 끌려갑니다. 한번 붙들리면 3~4차례 극심한 구타와 기합 등으로 인간의 한계를 지나버릴 정도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 따릅니다. -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 「광주사태에서 나는 무엇을 했나 - 광주사태 당시 투입됐던 어느 계엄군의 수기」,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35~37쪽 ( 편저자 윤재걸은 이 수기를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라는 제목을 붙였다. -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21쪽.) 참고로 이 수기가 실린 책에선 정작 수기를 쓴 사람의 정보가 전혀 없고 '공수부대원'이라고만 되어있다. 다만 글 내용을 봤을 때 11공수여단과 일치하니 11공수여단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러나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 12쪽, 64쪽에서 이 수기를 쓴 사람이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씨 라는 것이 밝혀졌다.
시위대가 과격시위를 하기는커녕, 시위와 무고한 사람들이 수없이 계엄군의 몽둥이와 군홧발과 개머리판에 구타당했다. 그리고 이들은 끌려가면서도, 끌려간 뒤에도 계속 구타당했다. 이런 것은 "시위진압"이 아니다. 당장 대법원에서조차 이것을 폭동적 시위진압이라고 일축했다. 시위대가 아닌 계엄군이 시위진압이랍시고 한 짓이 폭동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점은, 5월 21일 도청일제사격 이전에는 시민"군"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비무장 상태의 시위대였다.
2.8. 최초 사망자에 대한 논란
2.8.1. 최초 사망자는 경찰관 4명이다?
이 주장의 요지는 최초로 사망한 건 시위를 막기 위해 대치하던 경찰들로, 시위대가 얼마나 과격한지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하지만 최초 사망자는 김경철이라는 청각장애인 시민으로, 계엄군에게 죽도록 얻어맞은 끝에 19일 새벽 3시에 사망했다. 게다가 19일 오후 5시 경에도 김안부라는 시민이 계엄군에게 구타당해 사망했다. 추가로 이때 계엄군 때문에 죽은 사람이 더 있다는 증언도 있긴 한데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극우선동가들이 주장하는 경찰관 4명이 죽은 건 계엄군이 과격진압을 시작한 20일 오후 9시 5분에 일어난 일이다. 연표 참고[14] 게다가 비록 시위대 잘못이 있긴 하나, 이 사고가 있기 전 당시 생업에 종사하던 버스 기사와 택시 기사들도 계엄군에게 구타당하거나 심지어 총에 맞아 사망하는 등 이미 계엄군이 폭력 진압을 시작했을 시기이며, 사건 자체도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던 도중 일어난 불상사[15]여서, 경찰들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엔 시민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애초에 시민들은 계엄군을 두려워하고 적대했지, 당시만 해도 최초 진압을 맡은 전남경찰청의 국장 안병하(강원 양양 출신, 육사 8기)의 온건진압 방침 덕분에 경찰에게는 적대적이지 않았다.[16]
어쨌든 분명한 건 최초 희생자는 김경철이다. 자세한 것은 김경철 문서 참조.
2.8.2. 공수부대원이 18일날 실종돼서 19일날 시체로 발견된 증언이 있다?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은 다음 증언을 한 적이 있다.- 5·18이 유혈사태로까지 번진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1980년 5월 계엄을 확대해 김대중·김영삼을 잡아넣으면 광주에서 '소요'가 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 아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한 부대를 배치한 것이다. 계엄을 확대하지 않으면 김대중이 대통령을 하게 돼 있었다. 군은 장악했다고 하지만 정권창출이 안 될 판이었다. 그래서 신군부는 계엄을 확대해서 김대중에게 정권이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5월 17일 김대중을 잡아넣으니까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는 데모가 일어났다.
5월 18일엔가 처음으로 부대가 진입했는데 그날 특전사 병사 하나가 행방불명이 됐다. 그 병사를 못 찾고 있었는데 다음날엔가 하수구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병사들의) 격분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자위권이 발동됐다고 봐야 한다. 군에 위해를 가하는 사람들을 사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데모 진압은) 유혈사태로 번진 것이다. 처음에는 실탄을 장착하지 않았다가 병사가 시체로 발견된 이후 실탄을 장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 하지만 특전사 병사의 사망은 장갑차에 의한 사고사였다는 주장이 있다.
"아니다. 시위대에 끌려가 행방불명이 됐다가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특전사에서 그런 상황을 서면으로 보고받았다. 사고사였다면 '사고사'로 보고가 올라왔어야 하는데, 분명히 하수구에서 시체로 발견했다고 보고받았다."- "5·18 '북한-미국 개입설'은 사실무근"
"1980년 5월 계엄을 확대해 김대중·김영삼을 잡아넣으면 광주에서 '소요'가 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 아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한 부대를 배치한 것이다. 계엄을 확대하지 않으면 김대중이 대통령을 하게 돼 있었다. 군은 장악했다고 하지만 정권창출이 안 될 판이었다. 그래서 신군부는 계엄을 확대해서 김대중에게 정권이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5월 17일 김대중을 잡아넣으니까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는 데모가 일어났다.
5월 18일엔가 처음으로 부대가 진입했는데 그날 특전사 병사 하나가 행방불명이 됐다. 그 병사를 못 찾고 있었는데 다음날엔가 하수구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병사들의) 격분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자위권이 발동됐다고 봐야 한다. 군에 위해를 가하는 사람들을 사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데모 진압은) 유혈사태로 번진 것이다. 처음에는 실탄을 장착하지 않았다가 병사가 시체로 발견된 이후 실탄을 장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 하지만 특전사 병사의 사망은 장갑차에 의한 사고사였다는 주장이 있다.
"아니다. 시위대에 끌려가 행방불명이 됐다가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특전사에서 그런 상황을 서면으로 보고받았다. 사고사였다면 '사고사'로 보고가 올라왔어야 하는데, 분명히 하수구에서 시체로 발견했다고 보고받았다."- "5·18 '북한-미국 개입설'은 사실무근"
그러나 글을 보면 알겠지만 김충립 보안반장은 목격한 것이 아니라 "보고를 받은 것이다." 이건 곧 다시 말해 실제 계엄군 기록을 검증하여 확인이 가능하다는 것 이다. 그리고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그런 사람 없다. 당시 계엄군중 현재까지 최초 사망자로 확인된 사람은 3공수여단 정관철 중사인데, 3공수여단은 20일부터 광주에 왔다. # 18일~19일에 죽은 계엄군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의 증언이 정확한 것이라면 오히려 당시 계엄군 사이에 유언비어가 떠돌았다는 뜻이다. 다시말해 계엄군은 스스로 만든 유언비어 때문에 "격분"을 했다는 증언이 된다.
참고로 보안사 내부에서 사실과 다른 유언비어들이 퍼졌다는 건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광주에서 최초의 발포는 5. 19.에 있었다. 5. 19. 16:50 광주시 계림동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다가 멈춰선 장갑차를 시위대가 공격하자 11공수여단 63대대 작전장교 차○○ 대위가 M16을 발포했고,(195:당시 11여단 63대대장 조창구 중령은 차○○ 대위로부터 보고를 받았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당시 조대부고 3학년인 김영찬이 유탄에 총상을 입었다. 5. 20. 01:00 보안사는 현지505보안부대로부터 “5. 19 고교생 1명(인적사항 미상)이 우측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전남의대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았다.(196: 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5. 20. 01:00, 505), 383-1980-89, 113쪽.)는 보고를 받았다. 505보안부대는 “관내 4개 파출소 파괴 집결 데모대가 쇠파이프 및 면도칼을 소지했던 점으로 보아 특정 배후 조직에 의한 조직적이고 기동력 있는 데모대로 판단”하며, “데모 진압병력에게 실탄을 미지급코 있고 경계병력만 1인당 10발씩을 분출, 장교가 통합 보관코 있을 뿐 아니라, 5. 19. 발포 사실 전무하였음을 감안할 때 고교생은 특정 데모세력에 의해 무성 권총으로 사격, 계엄군이 발포한 것으로 선동키 위한 지능적 수법”이라며, 계엄군의 발포를 부인하며 불순세력의 선동수법으로 판단했다. 계엄사령부도 고교생 총상자 확인 결과 에서 “김영찬(조대부고 3년. 19). 5월 19일 17:00 광주시 계림동 5거리에서 데모대에 가입. 장갑차에 방화하려다가 복부 관통 상해를 입고, 전남대 병원에 후송. 총탄 출구가입구보다 적으며 다수의 파편이 박혀 총기 제원 판단 곤란”으로(197:계엄사, 충정업무 일일 주요사항 (보안사, 383-1980-92, 54~55쪽 인용).)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나 당시 장갑차를 몰고 시위진압에 나섰던 11여단의 전투상보, 상급부대인 31사단과 전교사의 상황일지 등에는 5. 19. 발포에 관련된 어떤 내용도 찾아볼 수 없다. 11공수여단에서 상급부대에 보고를 하지 않은 채 발포 사실을 은폐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동구청은 계엄사나 보안사와는 다른 보고를 했다. 동구청은 “광주고에 서 계림파출소 사이 장갑차가 고장으로 있을 때 시민에게 총 발사로 국교생 2명, 중학생 1명, 고교생 1명 부상, 계엄군 차량으로 후송”으로 보고했다.(198: 광주시 동구청, 5․18사태일지 (광주광역시 5․18사료편찬위원회, 5․18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총서 제20권, 14~15쪽 인용).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는 1명만 총상을 입었다.) 그러나 김영찬을 후송한 것은 현장 부근에 있었던 공중보건의 정은택(현 원광대교수)씨였다. 정은택씨는 부근의 외과병원으로 김영찬을 후송하여 응급수술을 한 뒤 전남대병원으로 이송했다. 계엄사와 보안대에서는 “실탄도 지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군인들이 총을 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다고 정은택씨에게 출석을 요구했으나 그는 다음날 곧바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러 광주를 떠났다고한다.(199: 5․18 첫 총상자와 그를 구한 의사의 만남 , 연합뉴스, 2007. 5. 11.) -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 79~80쪽
보안사는 공수부대가 쏜 것을 시위대가 쏜 것이라고 착각해놓고는 오히려 무고한 의사를 유언비어를 퍼트린 사람으로 몰아서 출석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보안사 내부에서도 이렇게 유언비어가 퍼졌으니 검증은 당연한 것인데,
유사역사학 집단은 검증도 없이 "당시 계엄군이 18~19일날 계엄군이 죽었다고 증언했다"는 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2.8.3. 공수부대원이 18일날 실종되고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18일날 실종됐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다."는 주장이며 위의 김충립 증언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위의 김충립 증언에선 분명히 "발견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의 증언에 근거해도 틀린 것이다.2.9. 최초 시위는 민주화운동이지만 시민군 결성부터는 폭동으로 서로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
이는 그나마 극우세력 중 합리적이라고 자부하는 부류에서 내놓는 주장으로, 조갑제 등 현장 증인들의 증거를 100% 무시할 수 없다보니 '최초 시위는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지만, 시민군을 결성한 순간부터는 반국가 무장세력을 결성하여 정당한 국가공권력에 대항한 것이므로 그 순간부터는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무장반란으로 평가하자'라는 주장이다. 이들은 부마민주항쟁의 경우는 똑같이 군대가 강경진압을 했지만 시민들이 무기를 들지 않았으므로 순수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지만, 광주는 시민들이 무장세력을 결성한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며, 시민군 내부에서도 도청에 TNT를 설치한 과격파와 무기를 반납하고 계엄군과 협상하자는 온건파가 나누어졌던 점을 들어 시민군 결성 전후를 서로 분리해서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17]하지만 4.19혁명에서도 일부 지역에선 과격한 양상이 있었다.[18], 광주 시민군은 분명히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반공구호를 내걸었고, 시민군 중에 거동수상자는 간첩 가능성 때문에 계엄군에게 스스로 신병을 인도하는 등 자신들이 대한민국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권을 찬탈한 반란세력에 대항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래도 어쨌든 시민이 공권력에 저항했으니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우선 용어가 혼동되는 것은 사실이긴 하다. 시민운동 중에도 폭력사태는 일어날 수 있고 말이다. 하지만 폭동 문서 6번 문단에서도 설명하듯, '시민의 저항권에 해당되는 집단 행동이면 시민운동', '약탈과 무분별한 폭력행위가 수반될 경우 폭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약탈과 폭력행위가 수반되는 경우 폭동이라 할 수 있다.
5. 18 당시 광주는 수도도, 전기도 끊기지 않았다. 폭동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끊기기 마련인 것들이다. 그리고 계엄군의 진압과정과 시민군의 저항과정에서 피해가 일어난 건 사실이지만, 시민군은 약탈을 저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일반 시민분들이 시위대 및 시민군, 그리고 이들을 돕는 자원인들을(예, 택시기사) 자기만의 방식으로 도왔으며, 오히려 황당하게도 제11공수특전여단 소속 계엄군이 육군보병학교 교도대에게 오인사격을 당해서 화가 난다는 이유로 아무나 잡아다가 학살하는 과정에서 인근 상점까지 이유없이 약탈해 대는 추태를 저질렀다. ( #)
간혹 약탈 근거랍시고 5.18 자료 중 5.18 자료총서의 재산피해 목록(21권)을 대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말 그대로 5.18 동안 일어난 재산 피해 목록을 전부 적어놓은 것 뿐이다. 며칠 동안 그 정도 소요 사태가 일어났는데 재산 피해가 없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해당 기간 동안 손실된 재산 피해를 정리한 자료일 뿐, 피해 경위나 책임소재 모두 전부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시민군이 약탈을 하지 않았다는 증언은 있다. 김영택의 저서 <5월 18일, 광주 -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에선
...이러한 질서의식은 초기뿐만 아니라 '시민공동체 자치시기'에 들어가서도 잘 지켜져 광주시내 700여 은행 및 금융기관이 한 군데도 피해를 입지 않고 1,500억 원의 현금이 고스란히 보전됐다는 사실, 3~4건의 강력사건이 있긴 했지만 오히려 경찰이 엄존하던 이전보다 훨씬 적게 발생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또한 이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중심가 상인들은 몇몇 점포의 진열장 유리만 깨졌을 뿐 피해품목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광주)시내 백화점들이 5.18사태로 약탈당하거나 피해본것은 없는것으로 안다.(삼양백화점 관계자 증언)'라고 나와있다.
애초에 시민들이 집총까지 했고, 마음만 먹으면 은행이라도 털 수 있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당시 호남 최대 도시인 광주에서 털린 은행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들이 만약 폭도나 강도, 약탈행위를 자행했다면 가장 먼저 털려야 할 곳이 항쟁 끝날까지 안전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정부와 시민단체, 관련 역사가들이 수많은 증거 수집과 추적, 조사를 거쳐 내린 결론이 5.18은 폭동이 아닌 민주화 운동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건 좋지만, 제기하는 의문의 근거가 이미 죄다 반박당한 상황에서 추가적인 근거 없이 폭동이라고 주장해 봐야 평가가 바뀔 가능성은 만무하다. 굳이 한 사건의 전후를 분리해서 평가하려는 시도가 현재로서는 5.18을 폄하하기 위한 말장난 이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이유이다.
2.10. 5.18을 성격이 다른 사건과 비교하는 행위
2.10.1. 프랑스 혁명처럼 이기면 혁명이고 지면 폭동이다?
의외로 5.18의 가치를 부정하는 극우 세력뿐 아니라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온건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들도 종종 이러한 오류에 빠지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사적 맥락부터 배경과 전개, 결말까지 전혀 다른 두 사건을 무리하게 대입하려 해서는 안 된다.5.18 민주화운동의 목적은 프랑스 혁명처럼 기존 체제를 부수려는 것이 아니라, 전두환의 쿠데타 및 정치적 탄압을 중단하고, 계엄령을 폐지하며,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회복하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곧, 프랑스의 경우는 왕국의 기존 체제를 뜯어고치려는 쪽이 반란 세력이었지만, 5.18 민주화운동 시기 대한민국은 여전히 국민주권을 헌법에 박아넣고 군의 정치개입을 정당화하는 조항 따위도 없는 민주공화국이었으므로 내란을 일으킨 군인들이 반란세력이었다.[19] 따라서 '혁명'이 아닌 '민주화 운동'이라는 평가는 5.18의 위상을 축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지향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물론 프랑스 혁명 기간을 좀 길게 잡으면 국왕부부가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려다 잡힌 사건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 국왕 일가는 혁명세력에게 확실히 열세였고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에 외국과 동맹을 맺는 건 프랑스 왕국의 유일한 주권자로서 내란을 진압하기 위한 외교행위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반대로 시민군이 외신 기자들과 연대했다는 이유로, 아니 설령 미국의 도움을 받아 신군부와 싸웠다 할지라도 그게 내란의 주체와 저항세력의 위치를 바꿔놓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5.18 당시 시민군은 어디까지나 먼저 반란을 일으키고 먼저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려 든 신군부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직되었고, 본격적인 총기학살 이전까지는 '시민군 조직' 자체가 없었으며, 광주 밖으로 나가서 청와대를 향해 진군하지도 않았다.[20]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란행위 | 내란의 주체 | |
프랑스 대혁명 - 1792년 8월 10일 봉기 | 자코뱅주의자 및 과격 혁명가들 | |
12.12 군사반란, 5.17 내란 | 전두환 세력 |
이 내용과 유사한 내용을 김재춘( 5.16 군사정변, 제3대 중앙정보부장)도 언급한 바 있다.
김종필, 김재춘, 김계원, 장세동 씨 등 10여 명이 둘러앉았다. 전두환 씨는 불참.
국회가 화제가 되고 얘기는 80년 광주문제로 옮아갔다.
장세동(전두환 정권의 국가안전기획부장 경호실장) 씨가 광주사태는 진주민란이나 홍경래의 난 같은 것이라는 취지로 80년 5월의 광주상황을 설명해갔다. 그러자 김재춘씨(3代 정보부장)가 무뚝뚝하고 직선적인 성격 그대로 '무슨 그따위 얘기를 아직도 하고 있는 거요. 여기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가. 당신네들이 총칼 들고 정권 잡가고 저지른 짓을 무슨 홍경래 반란이라고?'하며 내쏘았다. 그 자리에서 어떤 분은 웃으며 일어서면서 '국회에서 특위 조사할 것도 없이 결론이 이미 나와 버렸군' 하여 웃고 헤어졌다. (당시의 한 참석인사)
김충식, 2012, 남산의 부장들, 782
김재춘은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을 정도로
반공주의가 강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도 내란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분명히했고, 내란행위의 주체를 왜곡하려하자 직선으로 반발했다. 내란행위의 주체가 광주시민이 아니라
전두환 세력이라는 것은
5.16 군사정변 세력한테도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국회가 화제가 되고 얘기는 80년 광주문제로 옮아갔다.
장세동(전두환 정권의 국가안전기획부장 경호실장) 씨가 광주사태는 진주민란이나 홍경래의 난 같은 것이라는 취지로 80년 5월의 광주상황을 설명해갔다. 그러자 김재춘씨(3代 정보부장)가 무뚝뚝하고 직선적인 성격 그대로 '무슨 그따위 얘기를 아직도 하고 있는 거요. 여기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가. 당신네들이 총칼 들고 정권 잡가고 저지른 짓을 무슨 홍경래 반란이라고?'하며 내쏘았다. 그 자리에서 어떤 분은 웃으며 일어서면서 '국회에서 특위 조사할 것도 없이 결론이 이미 나와 버렸군' 하여 웃고 헤어졌다. (당시의 한 참석인사)
김충식, 2012, 남산의 부장들, 782
그리고 흔히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사람은 프랑스 대혁명을 맹목적으로 찬양하리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오해이다. 이승만이나 전두환 정권의 국가 폭력을 규탄하는 사람 중에선 프랑스 대혁명 수정주의자[21]도 있으며, 부흥카페에선 프랑스 대혁명의 방데 대학살을 이승만 정권의 제주도 초토화 작전[22]과 비교하기도 한다.
2.10.2. 5.18이 LA 폭동과 성격이 같은데 이름만 다르게 부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같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표(記標)뿐만 아니라 기의(記意)도 유사하지 않다.- 행위의 목적도 다르다.
-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는 내란범도 아니고, 국헌문란폭동을 벌인 적도 없다.
- LA폭동에 개입한 군인들은 무고한 시민들을 대량으로 무차별로 두들겨 패거나 대검으로 찌른 적도 없고, 감금해서 여러명을 학살한 일은 더더욱 없다.
- 마찬가지로 무기없이 국기 들고 달려오는 시민들에게 발포행위를 한 적도 없다.
- 무고한 시민들에게 수사없이 학살하는 행위를 벌이지도 않았고, '자기 군인들끼리 오인사격해놓고 무고한 시민을 즉결총살한 행위'는 더더욱 벌이지 않았다.
오히려, LA폭동 당시 한인타운의 동포들은 흑인폭도들의 살인, 폭력, 방화, 약탈 등으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흑인폭도들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극우선동가들의 논리에 따르면, 당시 한인들도 폭도들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폭동 용어가 마이너 인종에 대한 비하를 위함이란 지적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어, 무식함만 드러내는 증거이다. 국내에서도 폭동이란 용어가 극단적인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기에 왜곡을 위한 억지라 봐야 한다.
이들은 이걸 동일시시키려고 LA 민주화 운동이란 단어를 밀기도 한다.
2.11. 미국의 문건이나 유네스코 등에서 5.18을 '폭동(riot·uprising)'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우선 유네스코가 5.18을 uprising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무력이 사용된 반란 혹은 폭동을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간단히 반박할 수 있는데, 우선 uprising 이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는 폭동이라기보다는 포괄적인 '봉기'라는 개념이고[23] 이런 정도의 의미는 3.1운동이나 4.19 혁명 때도 마찬가지였다.2020년 5월 14일에 한 극우 작가에 의해 주장된 내용도 있다. 1980년 6월 3일에 작성된 미국 국무부의 보고 문건에 나와 있는
The riot was the work of commuist agents and the followers of Kim Dae-Jung
그 폭동은 공산주의 요원들과 김대중의 추종자들의 소행이었다
그 폭동은 공산주의 요원들과 김대중의 추종자들의 소행이었다
that riot was professionally-instigated.
그 폭동은 전문적으로 선동되었다.
그 폭동은 전문적으로 선동되었다.
먼저 첫번째 문장의 원문은
The riot was the work of commuist agents and the followers of Kim Dae-Jung according to MLC account
MLC(martial law command,계엄사령부)의 설명에 따르면 그 폭동은 공산주의 요원들과 김대중의 추종자들의 소행이었다.
MLC(martial law command,계엄사령부)의 설명에 따르면 그 폭동은 공산주의 요원들과 김대중의 추종자들의 소행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문장의 원문은
thrust of the report was that riot was professionally-instigated
그 보고서의 요지는 "폭동은 전문적으로 선동되었다"는 것이다
그 보고서의 요지는 "폭동은 전문적으로 선동되었다"는 것이다
이 구절이 나오는 문단의 첫 부분에는
MLC issued an may 31 a "Comprehensive report" on th Kwangju Insurrection
MLC는 5월 31일 광주 반란에 대한 "종합 보고서"를 발표했다.
MLC는 5월 31일 광주 반란에 대한 "종합 보고서"를 발표했다.
결론적으로, 이들이 왜곡하면서 근거로 드는 구절의 실상은 당시 계엄군 측에서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미국에 보고한 것 뿐이지 미국의 입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동시에, 해당 문서를 살펴보면, 두번째 페이지에서는 시민군 간부들의 신원을 설명하고 민중 봉기에 가까운 특성을 보여준다 설명했다. 그리고 세번째 페이지에는 국무부에서 이야기한 한국인들은 보수나 친 정부 성향의 인물들까지 계엄사령부의 설명에 회의적으로 반응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와있다. 그리고 간첩설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이야기가 널리 퍼지지라고는 믿지 않는다고 언급이 되어있다.
보안문서나 편지처럼 단편적인 역사의 기록물들을 분석할 때는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우선, 공개된 기밀문서들은 미국 대사관에서 한국의 상황을 최대한 신속하게 미국 정부에 전달하기 위한 전보이지, 공식적인 조사 결과 또는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보고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이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나 한국의 보도 내용 또는 외교관, 자국 정보원에 의해 얻은 한정적 정보 및 떠도는 소문 등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전자는 신군부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된 정보였으며, 후자는 미국 또는 정보원조차도 봉쇄된 광주에 접근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광주 내부 사정에 있어서는 정확하지 않은 정보일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글라이스틴 주한 대사의 5.18일자 보고서엔 "광주에서 소요사태와 충돌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지만 거짓으로 보인다"고 적혀 있으며,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기까지만도 적어도 2~3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상황이 이랬기에 (신군부의 여론 통제를 배제하더라도) 제3자 입장인 미국인으로서는 '충분한 전말을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막연히 "시민들이 정부군과 대치한다"는 정보'만을 갖고는 '폭도(rioter)'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이 이후 드러난 내막과 사실 관계, 증언 등에 의해 뒷받침되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바꿀 수 없다. 기껏해야 1980년의 미국이 사태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 인식이 정책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정도를 논할 수 있을 뿐이다.
정반대로 미국은 보고서에서 시위대가 " 계엄령 철폐, 정치범 석방, 민주주의 회복을 외친다"고 반복해서 명시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민주화 운동의 성격을 인정했으며, 김대중을 두고도 "현 사태를 해결할 의지를 가진 유일한 인물이지만 협상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며 '그처럼 나서줄 다른 영웅(hero)을 찾기는 힘들다'고 평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현대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 역시 대한민국 정부의 역사적 평가를 존중하는 것이며, 애초에 상호 간 입장이 조율된 게 아니라면 미 정부가 한국 정부에 굳이 자국의 기밀문서들을 사전 전달하고 공유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2.12. 기타 폭동설
-
무기고를 털고 계엄군에 저항했으면 폭동이라고 불러야 한다. (X)
→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신군부에게 충성하는 이상, 당시 계엄군이 시위 진압이라는 명목 아래 취한 모든 행동은 법적 정당성을 완전히 상실한 범법 행위로 취급된다. 광주시를 포위한 시점부터 이미 계엄군은 대한민국 국군이 아닌 쿠데타 세력에 가담한 반란군으로 격하되었다는 것이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신군부를 진압하려다가 그들에게 제압당한 장태완 前 수경사령관이 일갈한 것과 같이 이들은 국가를 배신한 역적이며 탱크로 머리통을 날려버려야 했을 존재들일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수괴인 전두환 역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 전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일체 받지 못했는데, 이것은 공식적인 입장 표명만 하지 않았을 뿐 전두환을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수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공언하는 것과 다름없다. 국가에서 암묵적으로 쿠데타 수괴, 반란군의 우두머리라는 낙인을 찍은 셈이다. 4.19 혁명 당시에도 시위대는 무기고를 털어 얻은 무기로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즉, 시민들은 정당한 ' 저항권'으로 군부 세력에 맞선 것이다.
-
최초 발포 명령자는
전두환이 아니다. (△)
→ 이것은 애매하다. 문제의 애국가 발포 사건 당시 직접 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법부 측에서는 여러 증거와 증언을 토대로 계엄군이 선제 발포했다고 보고 있으며, 발포하라는 명령을 누군가가 내린 것은 분명하다. 계엄사령부의 명령을 어기고 중간의 누군가 단독적으로 발포 명령을 내렸더라도 최종 책임자이자 집권자였던 전두환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5.18 당시 공수부대의 각종 만행들을 부정하려고 들거나 이 사건에 전두환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만약 당시 계엄사령부의 내부 명령을 어기고 집단 발포를 한 것이 맞다고 해도, 비무장한 시민을 상대로 한 집단발포를 명령한 자를 엄벌하지 않고 어물쩡 넘긴 신군부 또한 처벌받아야 할 것이다.
-
5.18 참가자들은 깡패같은 범죄자들이었고, 그런 범죄자들이 주도했으니 5.18은 폭동이다. (X)
→ 이는 SBS 드라마 모래시계에 방영된 내용을 무지한 시청자들이 그대로 믿고서 떠드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실제로 모래시계 방영 당시에도 이런 연출이 역사왜곡이라고 크게 비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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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은 무분별한 살상과 파괴를 일삼았다. (X)
→ 아니다. 미필자와 미성년자에게는 무기를 배분하지 않았고 신분증도 확인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았을 때, 시민군은 당시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체계적으로 조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잘 조직된 시민군은 대민 약탈 같은 무분별한 폭력이나 파괴행위를 일체 일삼지 않았다. 이들이 무분별한 파괴를 일삼고 약탈을 자행했다면, 당시 호남 최대 도시인 광주에서 그 많은 은행 중 단 한 곳도 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가 없다. 계엄군과의 교전도 도청에서의 교전처럼 자기보호를 위한 산발적인 총격 수준이었지 전면적인 교전은 없었다. 오히려 계엄군 간의 오인사격으로 인한 피해가 더 컸을 정도다. 시민군은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온건하게 행동한 경찰들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않고 무사히 보내 주었다.
-
계엄군 철수 후 광주시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X)
→ 마찬가지로 시민들은 자체적인 질서를 철저히 유지했으며, 이들이 주장하는 혼돈과 광기의 파괴 행위 따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로 그런 상황이었다면 광주 시내의 주요 금융기관들 역시 이 때 약탈당했다는 기록이나 보고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25] 무엇보다 실제 폭동 발발 시 최우선으로 차단되는 수도 및 전기는 5월 27일까지 차단되지 않았다. 당시 시민군에 의한 살인사건이 3건 있었다고 했지만, 그나마도 1건의 사례를 3건으로 나누어 부풀렸다는 것이 당시 경찰들의 증언이다.
-
광주시민은 '민주화'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X)
→ 당시 광주 시민들의 시위 구호는 '계엄철폐 독재타도', '전두환, 신현확 물러나라'였다. 하다못해 다른 5.18 왜곡 선동들은 논리적인 척이라도 했지, 이건 직접적으로 '민주화' 세 글자를 외치지 않았으므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고 말장난이나 하는 수준이니 굳이 반박할 가치도 없다. 이런 궤변을 입에 담는 것은 스스로 '민주화'의 사전적 정의를 모른다고 시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화가 나서 온갖 몸짓으로 분노를 표현하고 있는데, 말로 '화났다'고 하지 않았으니 그 사람은 화가 난 게 아니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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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버스를 몰고 계엄군에게 돌진하여 사상자가 났으므로 계엄군의 사격은 정당하다. (X)
→ 이는 5월 21일, 도청 발포 직전 실제로 있었던 버스 돌진 사건의 책임을 시민들에게 돌린 주장이다. 19~20일에 운행하던 버스와 택시의 기사들까지 폭행당해 사망한 것에 분노한 기사들이 차량을 몰고 시위대와 함께 도청 앞에서 차량시위를 벌였다. 이 때 공수부대 측에서 버스를 향해 최루탄을 쏘았고, 버스 안에 최루탄이 터지자 당황한 기사 배용주 씨가 미처 버스의 시동을 끄지 못하고 내리는 바람에 버스가 그대로 달려서 전경들이 치여 사망한 사건이다. 당시 공수부대가 버스에 실탄 사격을 가하여 운전사 김복만 씨가 사망하기도 했다. ( 광주매일 '正史 5.18' <61> 출처)[26]
-
어쨌든 5.18은 폭동의 한 종류라고 규정되어야 하며, 굳이 타협하자면 민주화 폭동(?) 정도가 될 것이다. 과격 진압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X)
→ 상기하였듯이 신군부가 헌정질서를 준수하면서 적합한 과정을 거쳐 국민의 손으로 당선된 권력이라면 맞는 말이겠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니 틀린 주장이 되는 것이다. 계속 강조되는 사실이지만 신군부는 명백히 쿠데타로 헌정질서를 훼손한 반란군 세력이며, 5.18 시민군은 이들로 인해 훼손된 헌법 정신을 바로잡기 위한 국민적 저항이다. 오히려 신군부의 12.12 군사반란이야말로 국가전복을 도모한 군사 폭동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수괴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이미 1995년에 군사반란 및 내란수괴 혐의, 즉 폭동죄로 공식적인 단죄를 받았으며, 더불어 사법부에서도 전두환 일당의 5.18에 대한 과격 진압은 엄연한 학살 행위라고 판결하였다. 오히려 '과격 진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온건한 것이다.
또한 자기들 나름대로 타협했다는 '민주화폭동'이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나 법리적으로나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그들만의 괴상한 합성어에 불과하며, 그 이전에 '폭동'이라는 단어를 삽입한 것 자체가 끝까지 5.18을 폭동으로 간주하겠다는 아집이 담긴 의미이기에 결코 타협된 표현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국제법상으로도, 심지어 전시 상황이라도 무기를 들지 않은 민간인을 상대로 하는 증오범죄나 살인은 전쟁범죄로 처벌받는다. 즉 이들이 과격 진압을 했다면 그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하며, 설령 이 과격 진압이 옳고 필요에 의해 일어났다고 인정된다면 우리는 공산군이 6.25 당시 벌였던 수많은 학살사건들, 더 나아가 일제가 벌인 학살사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된다.[27]
-
어쨌든 5.18은 과도하게 미화되고 포장된 사건이며, 객관적으로 성역 없는 재조사를 거쳐야 한다. (X)
→ 김대령 문서 참고. 87년 민주화 이전 지속적으로 폭동이라고 명예훼손당해 왔고 아예 국가 차원에서 앞장서 왜곡 작업을 진행하여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잘못 알려져 있었던 일이다.[28] 그 진실이 뒤늦게나마 밝혀지고 정당하게 복권된 일인데 과도하게 미화되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은 이전까지 관련자들의 묘지에 찾아가지도 못했다. 또한 객관적인 성역 없는 재조사는 이미 노태우 정권부터 지금까지 몇 차례나 진행한 후에 대법원에서까지 확정된 판결이라는 것을 숨기고 아직도 미완이라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왜곡하는 것이다. 즉 정권 바뀔 때마다 재조사를 숱하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 현재의 5.18에 대한 인식이다. 애초에 극우 진영에서는 당시 군부정권을 미화하는 공작을 벌이고 있으면서 5.18 성역 운운하는 것 자체가 내로남불에 궤변이다.
-
5.18 당시 부상을 당하거나
PTSD 등으로 고통을 당하는 계엄군 및 경찰들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 이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후대에 5.18이 과도하게 미화되고 포장된 사건이라서 묻혔기 때문이다. (△)
→ 물론 군대는 개인의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상부와 국가의 명령을 따라야만 하는 집단이고, 그렇기에 나치를 철저히 청산하는 현대 독일에서도 독일 국방군에 종군했던 군인들의 전과만큼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시 진압에 참가했던 계엄군 및 경찰 개개인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당시 이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 및 사후 관리, 치료 등의 사후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5.18의 피해자 측이 아닌 전두환과 신군부이다. 당시 참전 군인들 또한 전두환과 신군부에게 이용당한 또다른 역사의 피해자들인 것은 틀림없으며, 군인들이 부당한 명령에 복종하느라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면 5.18의 가치를 폄훼하고 사실 관계를 왜곡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방향성이 아니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은, 5.18에서 군인들이 받은 명령은 어디까지나 시위 진압이었지 구타, 학살, 강간 명령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참된 군인은 명령에 복종하되 적을 격멸하는 데 결코 사적인 감정을 실어서는 안 된다. 보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겠지만 그 보상과 5.18 운동 자체의 정당성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로 판단되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어떤 이유로든 범죄를 멋대로 저지르며 인권을 짓밟은 군인들에 대한 철저한 추적과 단죄 역시 병행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
5.18은 전라도가 독립하려고 했던 사건이며, 이를 진압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분열됐을 것이다. (X)
→ 물론 시민군이 해방 광주를 조직하고 지역주의적 관점에서 '전라도민의 단결과 봉기'를 촉구했던 것은 사실[29]이지만, 이것은 당시 전라도 전 지역의 연락망이 군부에 의해 차단된 당시 상황에서 다른 지역과 직접적인 연대를 맺을 수 없었으므로 당연히 반사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는 조치였다. 선택지가 없었던 상황을 가지고 전라도가 주권 국가로 독립하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하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이자 답정너에 불과하다. 그리고 전라도민들이 분리독립을 원했다면 오히려 대한민국의 국가적 붕괴와 내부 분열을 조장했어야 하는데, 정반대로 광주 시민들은 목숨 걸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다. 게다가 5.18 직전까지 호남 지방뿐만 아니라 서울, 대구, 부산 등 전국에서 신군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있었으며, 5.18의 참상이 알려진 뒤에는 전라도 외 타 지역에서도 연대와 진상 규명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렇다면 이상의 지역들 또한 전라도를 따라 분리독립을 원했다는 것인가? 만약 5.18이 전라도 독립운동이었다면 전라도 바깥의 국민들이 대체 왜 지지를 보냈겠는가? 심지어 당시에는 정치인들의 이간질로 인해 전라도와 지역감정이 한창 심했던 경상도에서조차 5.18 민주화운동에 높은 지지를 보냈다.
-
김대중이 속칭 '
앙망문'이라는 사죄문에서 5.18은 폭동이라고 인정했다. (X)
→ 나무위키의 앙망문 문서에 원문과 해석이 있으니 참고하자. 전문을 몇 번이고 읽어 봐도 5.18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김대중이 실제로 저런 발언을 했다고 치더라도, 당시 김대중은 구금당한 채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양심에 따라 발언할 수 없었던 처지였기 때문에 폭동이라고 인정했든 말았든 전혀 의미가 없다. 위력에 의한 증언은 법적인 효력을 일체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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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가 있으므로, 5.18이 폭동이라고 주장해도 된다. (△)
→ 문장 자체는 맞는 말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개개인의 생각은 모두 다르므로 표현의 자유에 의해 그 생각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5.18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 존재한 온갖 5.18 관련 망언 및 그 처벌 사례들을 보면, 단순히 5.18은 폭동입네 운운했다고 해서 처벌된 경우는 없다. 그런 주장을 선동하려는 목적으로 조작된 정보를 퍼뜨리거나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는 등의 범법 행위를 같이 저질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처벌을 받은 것이다. 이런 조작된 정보 없이 그냥 '나는 폭동이라 생각한다'라고 주장만 하면, 아무도 귀담아들어 주지 않는다는 현실만 제외하면 일단 법적으로 문제는 없다. 다만 표현에 자유가 있는 것처럼, 그런 허황된 주장을 비판하는 것도 자유다. 즉 5.18이 폭동이라고 주장했다가 사회에서 받는 지탄이나 불이익도 (합법적인 선 내에서라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주장을 했다가 얻어맞았다면 폭행죄로 고소하면 되고, 직장에서 직장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는데 부당하다 생각하면 역시 소송하면 된다. 하지만 지인들에게 절연당하거나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받는 등 여타 법적으로 문제없는 갖가지 불이익이 있을 수 있고, 그 뒷감당은 전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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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세력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벌인 폭동이다. (O)
→ 유일하게 맞는 주장이며 이는 법원 판결을 통해 확인되었다. 해당 판결에서는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정의한 것이 아니라, 전두환이 시위진압을 명목으로 자행한 짓이 폭동적 시위진압임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그리고 계엄군이 5.18 내내 보여준 추태들을 종합해 보면 신군부가 주도한 폭동이라는 것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5공은 총기를 들고 일어난 그 하나의 쿠데타야
11. (내란의 모의) 내란을 모의하거나 내란죄의 폭동행위를 한 사실이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가. 피고인들은 원심이 인정한 1980.5.17. 이후의 내란을 사전에 공모하거나 준비한 일이 없고, 원심이 판시한 것 처럼 내란의 실행행위인 개별적 폭동행위를 모의하거나 이를 담당하는 방법으로 내란에 가담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심은 증거능력 없는 증거에 의하여 이러한 사실을 잘못 인정하였다고 피고인들은 주장한다.
원심 및 당심에서 적법하게 조사·채택한 증거들을 종합하면, 피고인들은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979.12.12.의 군사반란에 성공한 뒤 군의 주요 요직에 각 취임하여 군의 지휘권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함과 아울러 보안사령관이었던 피고인 전두환은 다시 중앙정보부장서리까지 겸직함으로써 국가의 정보기관을 완전 장악한 사실, ② 1980.5.초부터 피고인 전두환의 지시에 의하여 보안사령부나 중앙정보부장 안가 등지에서 권정달과 피고인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이 비상계엄의 확대, 국회해산, 비상대책기구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한 뒤 원심 판시와 같은 방법으로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정호용 등과 한 자리에 회동하거나 개별적 또는 순차적으로 상의하는 방법으로 이를 검토하고 피고인 이희성, 주영복까지 끌어 들여 이를 그대로 추진하기로 순차 모의한 사실, ③ 또 피고인들은 정치권에서 국회를 소집하여 비상계엄해제를 논의할 것을 우려하여 시국수습방안의 실행시기를 임시국회소집예정일(5.20.) 이전인 1980.5.17.로 정한 사실, ④ 한편 피고인들은 시위 진압에 군을 동원하기 위하여 비상계엄확대 이전인 5.3.경부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2군 및 수도권지역 전 부대를 대상으로 소요 진압 준비태세를 점검하고 특전사령부 예하 공수여단과 해병사단 및 20사단을 출동이 용이하도록 서울에 보다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배치하고 수도군단이나 수경사에 배속 또는 작전통제시킨 사실, ⑤ 위 시국수습방안에 따라 1980.5.17. 10:00 전군주요지휘관 회의를 열어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건의하는 결의를 함에 있어, 원심 판시와 같이 피고인 주영복, 이희성이 회의를 주도하였고, 수경사령관이던 피고인 노태우, 특전사령관이던 피고인 정호용, 육군참모차장이던 피고인 황영시 등이 계엄확대를 적극 지지하였고, 특히 피고인 정호용은 전군주요지휘관 회의 소집 전 1980.5.17. 10:35경 육군 참모총장실에서 피고인 이희성에게 전두환 등이 추진하는 시국수습방안을 전군의 일치된 의견으로 유도하도록 협조하여 달라고 부탁한 사실, ⑥ 피고인들은 비상계엄확대를 전후하여 계엄군의 위력으로써 원심 판시와 같이 학생·정치인·재야인사의 체포로부터 시작하여 대법원판사의 사직 강요 등에 이르기까지의 개별적 폭동행위에 이른 사실 등을 각 인정할 수 있고, 한편 피고인들은 1980.5.18. 이후 5.27.까지 있었던 광주에서의 시위를 계엄군의 위력으로써 진압함으로써 광주시민들을 강압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을 다치게 하거나 사망하게 한 사실이 있었음은 앞에서 광주시위진압의 폭동성에 대하여 판단할 때 본 바와 같다.
위 인정 사실에 의하면 피고인들은 국헌을 문란할 목적을 함께 가지고, 시국수습방안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하는데 대하여 개별적 또는 순차적으로 모의함으로써 이미 내란집단을 형성한 것이고 이를 기초로 하여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계기로 계엄군의 위력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내란의 범의를 실현시켜 나가면서 내란집단의 구성원 상호간의 연락과 용인하에 원심 판시와 같은 일련의 내란행위를 저지른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고, 이러한 사실인정의 과정에서 원심이 증거능력 없는 증거에 의하여 사실을 오인한 위법이 있음을 찾아 볼 수 없다.
나아가 내란죄는 다수인이 집단을 이루어 국헌문란행위라는 하나의 내란행위에 나아가는 것이므로 내란집단의 구성원 각자가, 내란을 구성하는 모든 개별적·구체적 행위 즉 내란집단의 행위라고 인정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 이를 인식하거나 관여할 필요는 없고 전체로서의 내란에 각자가 가공하는 의사를 가지고 이에 기여한 바가 있는 이상 내란죄의 책임을 진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 있어서 피고인들이 가사 공동피고인들이 구체적으로 입안하고 실행한 위에 나온 개별적 폭동행위 및 광주시위진압행위 전부에 대하여 이를 모의하거나 관여한 바가 없다고 하더라도 내란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전체로서의 내란에 포함되는 개개의 행위에 대하여 부분적으로라도 그 모의에 참여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기여하였음이 인정되는 이상 포괄하여 하나의 내란을 구성하는 위의 개별적 폭동행위 모두에 대하여 내란죄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논지는 결국 이유 없다.
다만, 당심에서 피고인들의 죄명을 표시함에 있어서 피고인 노태우, 황영시,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의 경우에 그 행위의 내용 중에 모의에 참여한 부분이 두드러지므로 이를 모두 내란모의참여자로 표시하기로 한다.
서울고등법원 1996. 12. 16. 선고 96노1892 판결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류위반(뇌물)] [대집1997(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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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상 자체에 음성 오류가 있어 한 쪽 스피커에서만 소리가 난다.
[2]
무장 시위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초기에는 평화적이었다가 이후 내부의 노선 투쟁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무장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일각의 주장처럼 경찰서 무기고를 습격하고 군부대에 쳐들어가는 식의 과격한 과정은 없었으며, 자위권 차원의 무장이었다.
[3]
엄밀히 말하자면, 폭동이 맞다. 다만
신군부가 주도한 폭동이라는 것.
[4]
12월 13일 전두환이 이희성 육참총장이란
메모를 보여줌 - 12.12 5.18 7차공판 지상중계 -13기사 참조
[5]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경력은
제3대 총선 당시 전남 목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한 것이 시작이다.
[6]
물론 상식적인 주장이 아닌, '미국도 폭동으로 생각한다!' 정도의 주장이다.
[7]
중남미에서 좌파정권이 들어서면 CIA를 동원해서 군부쿠데타를 배후조종했으며, 이후에는 CIA요원들이 군부독재 정권에 고문 기술을 전수하는 등 민주화운동 탄압을 지원하였다. 이런 사례가 한두건이 아니며 최근까지도 일명
콘도르 작전의 배후에 CIA가 있었다는 기사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8]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110페이지,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1995. 7. 18
[9]
12.12, 5.17, 5.18 국방부 조사 결과 보고서 93쪽
[10]
12.12, 5.17, 5.18 국방부 조사 결과 서서 94~95쪽
[11]
12.12, 5.17, 5.18 국방부 조사 결과 보고서 102쪽
[12]
12.12, 5.17, 5.18 국방부 조사 결과 보고 118쪽
[13]
연구소 자료총서 3권에서 확인가능
[14]
추가로 당시 상황이라고 알려진
버스가 경찰들에게 돌진하는 영상이 있는데, 이건 5월 15일에 서울에서
서울역 회군 당시 일어난 일로 이때는 경찰 1명이 사망하고 몇 명이 부상을 당했다.
[15]
계엄군의 집단 구타와 사격에 동료 사망자가 나오자 택시와 버스 기사들이 시위에 합류, 저지선을 버스로 돌파하려다 경찰의 최루탄이 창문을 깨고 들어오자 놀란 기사가 버스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그대로 경찰들을 덮친 것.
[16]
안병하 국장은 발포명령 거부 후 보직해임되고, 보안사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고문후유증을 앓다가 88년에 사망하였다. 이후에도 명예가 회복되지 못했다가 5.18이 제조사된 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7]
참고로 이들은 과격파는 무장세력, 폭도, 북한 특수군이고 온건파는 선량한 광주 시민이라고 주장한다.
[18]
실제로 4.19혁명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일부 시민들이 경찰들의 발포에 분노하여 차량을 징발하고 경찰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를 이용해 경찰서 등을 습격하고 군대와 추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19]
엄밀히 말하면
내란과
민주주의 체제로 돌아가는 것과는 무관하다. 예컨대 북한이나 중국 혹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같은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무장봉기를 한다면, 그 정부 입장에서는 폭동이 될 수 있다. 다른 예로
4.19 혁명 당시
이승만은 분명히 독재자였으나, 그 이전에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그 시점에서의 대한민국 헌법으로부터 합법적인 권한을 부여받은 상태였으니 내란 수괴라고는 볼 수 없다. 단지 그 당시 대한민국의 시스템이 비민주적이었을 뿐이다. 가장 극단적인 예로
나치 독일의
히틀러도 독재자이자 전쟁범죄자이지만, 어쨌든 합법적인 선거로 당선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체제에서 규정하는 절차를 교묘히 이용해 자기에게 권력을 집중시켰으니 (
뮌헨 폭동을 제외하면) 내란 수괴라고 볼 수는 없다.
전두환이
내란 범죄자인 것은
제4공화국의 헌정체제가 군인의 쿠데타나 정치 개입을 허용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군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이며, 그 이후에 설사 독재를 유지하지 않고 곧바로 민정이양을 했더라도 그 평가는 변하지 않는다. 이는
제2공화국의 헌법에 반한
5.16 군사정변의
박정희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정치적, 역사적 가치 평가와는 무관한 이야기이다.
[20]
사실 막말로 전두환이 먼저 반란을 통해 정권을 잡은 정통성 없는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진짜 청와대로 가서 전두환을 끌어내렸다 해도 내란도 폭동도 아니다. 단, 현실적으로는 그 와중에 시위대가 진행 경로 상의 다른 지역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다른 주권자들에게 폐를 끼쳐 폭동으로 진화했을 여지는 있다.
[21]
여기서 수정주의는 프랑스 학계를 기준으로 한다면 1980년대의 프랑스와 퓌레다. 한국에선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학문은 1980년대 기준도 새로운 편이다.
[22]
제주 4.3 사건 이후 이승만 정권이 계엄령을 한 후 벌인 대량학살 작전이다.
[23]
당장
바르샤바 봉기가 Warsaw Uprising이라고 불린다는 점에서 이 의견은 신뢰를 잃는다.
[24]
단, 실제로도 시민군 세력 내에서 온건파와 과격파가 나뉘었던 건 사실이다.
[25]
당시 광주 시내에는 수백 곳의 은행과 금은방이 있었지만, 단 한 건의 약탈이나 절도 강도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광주 시민들이 철저하게 질서를 지켰고, 그들이 결코 일부에서 왜곡하는 것처럼 강도나 폭도가 아니었다는 강력한 증거다.
[26]
이와 비슷한 사례로 "518때 폭도들이 버스를 밀어 경찰을 죽였다."라는 소문이 오랫동안 돌아다녔으나 그 당시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보호하려던 경찰들 쪽으로 버스를 미는걸 길가에 서있던 근처 상가 주민들이 다 목격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민주정권이 들어서서 진상조사가 들어갈때까지 현장에 있던 광주시민들은 두려워 증언은 꿈도 못꾸고 경찰들을 살해한 폭도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왔다고 한다
#
[27]
만약 이런 주장을 수용한다면 우리가 북한에게
서울대병원 학살사건을 논하면서 왜 학살을 자행했는지 추궁하거나, 일본 측에게 전쟁 중 일어난 여러 학살사건에 대해 항의했을 때 "우리는 단지 미래의 빨치산/조선 반란군이 될 수 있는 불순분자들을 소탕하기 위해 과격 진압하였을 뿐이다"라고 주장하면
우리는 우리가 수용한 논리로 인해 반박할 수 없게 된다.
[28]
오히려 최근 헬기 사격이 공식화되는 등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점들이 더 많다.
[29]
5.18 관련 미국 대사관 측 기밀자료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