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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d700>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교육부인민위원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Наде́жда Кру́пская | Nadezhda Krupskay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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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 크룹스카야 Наде́жда Константи́новна Кру́пская Nadezhda Konstantinovna Krupskay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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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9년 2월 26일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사망 | 1939년 2월 27일 (향년 70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크렘린 벽 묘지 | ||
재임기간 | 교육부인민위원 | ||
1929년 ~ 193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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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d700> 배우자 |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 |
직업 | 정치인, 노동운동가, 교육학자 | ||
소속 정당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 볼셰비키) | ||
1903년 ~ 1918년 | |||
[[소련 공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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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 1939년 | |||
종교 | 무종교 ( 무신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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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교육학자, 정치인. 블라디미르 레닌의 배우자로 유명하다.2. 생애
1869년 2월 26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몰락 귀족의 딸로 태어났다. 귀족 혈통이었으나 빈곤하게 지냈던 어린 시절은 후일 그녀가 사회주의에 호감을 갖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894년 마르크스주의 서클에서 배우자가 되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을 만났고 1896년부터 시베리아 유형을 함께하면서 그곳에서 결혼하였다.유형에서 돌아온 후 1903년부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 분파의 주요 활동가로 자리잡았다. 1905년에는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으며 같은 해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프랑스로 망명해 교사로 일하다가 러시아 혁명기에 러시아로 돌아왔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중앙위원회 위원을 맡으며 주로 교육 업무에 관여하였다. 당시 소련의 문제점이었던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학교를 대량 증설하고 도서관을 개방함으로써 소련의 교육 인프라 확충에 크게 기여하였다. 다만 독선적인 측면도 있어서 주코프스키의 동화에 대해 난잡하다면서 혹평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주코프스키가 한동안 동화를 쓰는 것을 포기했을 정도였다.
이오시프 스탈린과 사이가 안 좋았는데 이미 레닌이 살아 있을 때부터 앙숙이었다. 스탈린이 당내 논쟁에서 트로츠키에게 밀린다는 부담감에 그녀에게 전화로 직접 ‘창녀’, ‘매독 걸린 암캐’등 욕을 하면서 협박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이후 레닌은 이 사실을 알고 스탈린에게 절교하겠다고 경고했고 모욕을 당한 그녀는 집단지도체제 시기에 스탈린의 반대파 정치인들을 지원하였다. # 다만 스탈린을 멈춰세울 정도의 정치력은 없어서 결국 스탈린이 권력을 강화하는 것을 지켜보는 신세가 되었고 대숙청 초기에는 부하린을 비롯한 고위급 당원들의 제명에 찬성하였지만 대숙청이 확산되어 동료 당원들조차도 굴라크로 끌려가거나 사형에 처해지는 등 일이 심심치 않게 돌아가자 대숙청을 멈추려는 시도를 했다. 그 결과 일부 당원을 구하기는 했지만 결국 당내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스탈린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사망했을 때 스탈린이 독살했다는 의혹이 나돌 정도였다.[1]
3. 저서
- 레닌을 회상하며
- 국민교육론
4. 여담
서양에서는 젊은 시절의 모습이 배우 스칼렛 요한슨과 닮았다는 의견이 많다.
[1]
대숙청이 한창 진행되었을 때 재판을 직접 참관하면서 이런 재판이었으면 남편도 처형되었을 것이라며 대놓고 쓴소리를 날리기도 했다. 그나마 레닌의 아내였기 때문에 시베리아로 추방 당하거나 처형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이러한 불편한 관계 때문에 크룹스카야가 사망했을 때 스탈린이 독살했다는 음모론이 나돌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