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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9:15:21

퀸틴스힐 철도 참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상세3. 사고 이후4. 추모


파일:퀸틴스힐 철도 참사.jpg

1. 개요

Quintinshill Rail Disaster

1915년 6월 22일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발생한 열차 3중 충돌사고.

2. 상세

제1차 세계 대전이 장기화되자 영국에선 열차를 많이 만들어 최대한 군인들을 수송했다. 한 항구엔 12분에 군용열차가 한대 씩 도착하기도 했다. 군용열차를 많이 만들다보니 안정성은 고려되지 않기도 했고, 나무로 만들고 끝내기도 했다. 아예 버려지던 열차를 다시 끌고 와 재활용 하기도 했다.

1915년 6월 4일 오전 6시경, 스코틀렌드 그레트나 그린(Gretna Green)역 인근의 퀸틴스힐 신호소. 원래는 1명이 근무했지만 이날은 2명이 왔다. 1명은 야간 근무자인 조지 미킨스(George Meakins), 그리고 주간 근무자인 제임스 틴슬리(James Tinsley)였다. 미킨스는 야간근무가 끝나고 신호소 내에서 신문을 읽으면서 쉬고 있었다. 원래는 오전 6시에 딱 인수인계가 끝나고 주간 근무자인 제임스가 일을 이어받아야 했으나, 주간 근무자가 좀 더 자다가 근무 할 수 있도록 야간 근무자가 30분 가량 더 일을 맡아주곤 했다. 일을 넘길때는 이전 근무자가 철도 상황을 노트에 적어서 다음 근무자에게 넘기는 식이었다. 이 때문에 신호소에서 철도에 집중해야하는데 노트에 더 집중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곤 했다.

퀸틴스힐 신호소에선 칼라일(Carlisle)로 가는 상행선, 글래스고(Glasgow)로 가는 하행선, 그리고 이 두 레일 양 옆에 달린 사이드 트랙을 관리했다. 급행열차가 오면 기존의 열차를 사이드트랙으로 보내 먼저 급행열차를 보내고 다시 기존의 열차를 보냈다. 또 상행선과 하행선 사이에 분기기를 넣어 상황에 따라 가는 선로를 바꿀수 있었다.

파일:Quintinshill_animation_1.gif
사고 당시, 하행선의 사이드 트랙엔 화물차가 잠시 정차중이었다. 또 하행선으로 열차 2대가 오고 있었는데, 한대는 일반, 다른 한대는 급행이었다. 급행열차 한대가 지나가야 했기에 분기기를 돌려 잠시 일반 열차를 상행선으로 보냈다. 한편 신호 대기중이던 석탄 실은 상행선 열차는 상행선 사이드 트랙으로 보냈다. 6시 30분, 일을 마친 미킨스는 틴슬리에게 일을 넘겼다.

틴슬리는 이제 대기중인 열차들을 마저 처리해야했다. 우선 틴슬리는 상행선에서 대기중이던 군용열차를 올려보냈다. 해당 군용열차는 22일 라베르크에서 출발한 리버풀행 열차로, 영국 7번대대 # 군인들이 타고있었다. 문제는 상행선에는 아까 위로 보낸 일반열차가 대기중이었다. 틴슬리는 자기가 그 열차를 타고 출근 했음에도 열차가 아직 대기중인 것을 잊고 그대로 그 상행선으로 군용열차 통행을 허가시켰다. 그리고 하행선에서 대기중이던 급행열차도 출발하라 신호를 보냈다. 군용열차는 상행선으로 달려가다 일반 열차를 발견했으나, 너무 늦었다. 오전 6시 49분, 브레이크를 제대로 밟지 못하고 그대로 충돌했다. 충돌로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열차가 탈선해 하행선으로 흩어졌다. 상황을 본 틴슬리는 놀라 급행열차에 경고했지만, 급행열차는 이미 출발한 상태였다. 그대로 하행선으로 달려가다, 탈선한 군용열차와 충돌한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탈선했다. 결국 3중 충돌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사고의 피해는 너무 컸다. 1차 충돌 당시 열차에서 떨어지거나, 부상을 입고 탈출한 사람들이 그대로 급행열차에 치여 숨졌다. 거기다 충돌의 충격으로 군용 열차 내부에 있던 가스등이 깨지고, 나무로 된 열차 차체에 불을 붙여 큰 화재가 일어났다. 열차에 석탄이 아직 많이 있는데다 차체에 가스 탱크까지 달려있어서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구조대가 달려오고, 주변 마을 사람들도 달려와 구조를 도왔다. 승객들을 한시라도 더 빨리 구출해야 했기에, 신체가 끼인 승객들의 신체를 절단하고서라도 구출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살아남은 몇몇 승객은 구조 과정에서 신체 일부를 잃었다. 몇몇 군인이 불타는 차체에 갇혀 고통스러워하는 다른 군인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총으로 쏜 사례도 있었다. 불은 계속해서 타오르다가 사고 23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꺼졌다.

결국 사고로 226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중 215명은 군인이었다. 당시 7번대대 군인의 절반 가량인 498명이 열차에 탑승했었는데, 62명만 상처없이 리버풀에 도착했다.

사망자 상당수는 라잇(Leith) 출신이었다. 당시 라잇에선 216명이 사망한지라 주민 대부분이 생존자와 연관이 있던 사람들이어서 통곡을 감출 수 없었다. 거기다 사망자 중 83명의 신원만 겨우 파악 가능할 정도로 시신이 온전했고, 133명은 시신이 너무 훼손돼서 누가 누구인지 구분을 하기 힘든데다, 몇몇 시신은 불에 아예 뼈까지 다 타버리기도 했다.

3. 사고 이후

사고 소식은 금방 신문을 통해 전해졌고, 해외서 주둔중이던 군인들에게도 알려졌다. 생존자 62명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호소해 에든버러로 다시 돌려보내졌다. 

사고 다음날인 23닐, 시신 107구가 담긴 관이 에든버러로 이송됐고, 이후 라잇의 Battalion's Drill홀에 안치됐다. 24일엔 라잇의 로즈뱅크 공동묘지서 합동장례식이 열렸다. 장례식이 열리는 동안엔 가게들이 문을 닫았고, 대중교통도 멈췄다.

사고 원인은 킨슬리가 인수인계 받으면서 넘겨받은 노트에 더 집중하고, 선로에는 덜 집중하면서 사고가 벌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에 더해서 미킨스가 신호를 구분해서 어디에 어느 열차가 있는지 표시하는 것을 잊은 것으로 드러났다. 미킨스는 과실치사 혐의로 18개월, 킨슬리는 3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당시 세계 1차 대전 상황인지라 둘다 1년만에 가석방됐다. 이 둘은 신호소로 복귀해서 일을 계속했다.

퀸틴스힐 부근의 신호소는 건물이 모두 철거되었고, 신호소만 남아 있다.

4. 추모

1916년 12월, 로즈뱅크 공동묘지에 사고를 추모하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 이후 1917년, 사고 당시 부상을 입은 군인 제임스 앤더슨의 이름도 추가로 새겨졌다.

2015년엔 사고 100주기를 맞아 추모식이 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