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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23:12:30

치치지마 식인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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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무슨 일이 있었는가?
2.1. 원인2.2. 내용2.3. 처벌
3. 관련자들
3.1. 피해자3.2. 가해자3.3. 그 외
4. 일본 측 주장5. 기타6. 외부 링크

1. 개요

小笠原事件, 父島人肉食事事件

1945년 2월경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지마에서 벌어진 사건. 오가사와라 사건 또는 치치지마 사건(Chichijima Incident)이라고도 부른다.

산 사람을 일부러 살해하고 그 시신을 도축해서 먹은 식인 사건이었으며, 이 사건을 저지른 다치바나 요시오의 휘하 부대는 식량 부족으로 고생하던 형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임팔 전투 무타구치 렌야 중장 휘하의 일본군의 식량 사정이 훨씬 더 열악했다. 당시 임팔에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당시 31사단장 독단적 전선 이탈과 이전에 일본 군인들이 부른 노랫말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일본군 포로는 이 사건을 두고 "무타구치 렌야는 굶어죽더라도 을 뜯어 먹을지언정 사람 먹을 생각은 안 했다!"라며 다치바나 요시오를 일갈했다고 한다.

전쟁 중 식인을 했던 부대는 이들 말고도 더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극도로 처참한 전황에 굶어 죽기 직전까지 몰린 자들의 최후의 선택이었다. 독소전쟁 당시의 소련군도 보급, 특히 식량이 너무나도 부족한 나머지 얼어죽은 전우의 시신을 녹여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적어도 이들은 이미 죽은 시체들을 먹었지 산 사람을 일부러 죽이지는 않았다.[1] 그러나 일본군은 치치지마 식인 사건 이전에도 사기 진작이나 몸보신을 위해서 식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2. 무슨 일이 있었는가?

파일:taaachibana-mori.jpg
타치바나 요시오(좌)와 모리 쿠니조(우)

섬의 수비를 맡은 일본 육군 중장 다치바나 요시오(立花芳夫)와 함께 있었던 일본 해군 중장 모리 쿠니조(森 国造)[2], 그리고 그 부하들이 미군 포로를 살해해 인육을 먹고 대대원들에게도 인육을 강제로 먹인 엽기적인 사건이었다. 실제로 하급 장교들은 인육을 먹지 않았다고 상관들에게 얻어터졌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2.1. 원인

사실 전쟁 중에 고립된 부대가 식량이 부족해서 식인을 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3] 소련군도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는 식량이 심각하게 부족해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는 일이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서 따로 식인을 막기 위한 임시 자경대를 만들어야 했고, 독일 국방군 제6군도 스탈린그라드에 갇혀서 보급이 안 되자 시신을 먹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일본군 역시 기아에 허덕이다가 인육을 먹는 사례가 자주 있었다. 열대 섬이라는 특수 환경[4]에 고립되었거나 연합군에 의해 보급선이 박살나서, 혹은 그 2가지 원인이 모두 겹쳐 식량이 부족해진 것이 이유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나무위키에 등재된 밀리환초 학살사건을 들 수 있다. 다른 사례로는 1944년 12월 뉴기니 전선의 육군 제18군사령부가
"연합군의 인육을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아군의 인육을 먹으면 엄중하게 처벌한다."
는 지침을 내리고 이를 위반한 병사 4명을 처벌한 것을 들 수 있다. 1946년 12월 11일에 있었던 극동군사재판에서 밝혀졌다.

그래도 앞서 언급한 예시들은 먹을 것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질렀다는 점에서 그 정상을 참작할 만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치치지마 식인 사건은 식량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태도 아니었고 살아 있는 사람도 도축해서 먹었다는 점에서 상기의 사건들과는 궤를 달리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미군은 처음에는 식량 부족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나보다고 생각했지만 상술했듯 치치지마의 일본군은 결코 식량 부족 때문에 식인을 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치치지마의 식량 상황은 [5] 본토보다는 훨씬 사정이 나았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사건의 동기는 어처구니없게도 식인을 통해 수비대 장병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처벌이 엄청나게 셌던 것도 이 때문이다.

고위 장교 몇몇이 인육에 술 파티를 벌인 목적이 병사들의 사기 진작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어쩌면 소(小)영웅주의나 엽기적인 호기심, 그리고 포로를 학대하는 일본의 오래된 엽기적인 군사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일지도 모르며, 혹은 특별한 술안주가 먹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식인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에서의 재판 경과와 증언들을 감안했을 때 이쪽이 더 신빙성이 높다. 자세한 증언들은 괌에서 열린 이 식인종들에 대한 군사 재판을 참고하자.

2.2. 내용

파일:external/ogasawara-info.jp/env_0045.jpg
치치지마(父島)
오가사와라 제도는 일본 본토에서 남쪽으로 1,000km 떨어진 중부 태평양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섬인 치치지마(父島)는 이오지마(硫黃島)에서 북쪽으로 200km 정도 떨어져 있는 섬으로, 일본 본토와 이오지마를 연결하는 '보급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섬이었다. 당시 치치지마에는 일본 육·해군 혼성 제1 여단이 주둔해 섬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육군은 다치바나 요시오 장군이 이끄는 5개 보병 대대 등 약 9,000명의 병력으로 이뤄졌으며 일본 해군은 모리 쿠니조(森國造) 소장 휘하에 치치지마 방면 특별근거지대, 통신대 등 약 6,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45년 2월, 이오지마 전투를 위해 병력을 투입하던 미군으로서는 공격로 주위의 다른 섬으로부터의 지원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치치지마였고 그를 위해 공군을 동원해 폭격을 진행했다.

이때 제51 뇌격대(VT-51)의 대원 중 한 명으로 비행기를 타고 출격한 조지 H. W. 부시 중위의 애기(愛機) '바바라'[6]는 8,000 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던 중에 일본군의 대공포에 정통으로 맞아 버렸고 그 충격으로 추락했지만,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에 부시는 간신히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해서 구명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던 일본군은 함정 두 척을 파견해 그를 쫓아왔지만 미군 비행기들이 일본군 함정이 오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파일:o1ILS77.jpg

구조되는 부시.

부시는 그렇게 2~3시간 정도 치치지마 앞바다에서 표류하다가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구명정이 치치지마 쪽으로 흘러가던 중 미군 가토급 잠수함 USS Finback에게 구조되었다.[7] 다른 미군기 몇몇도 대공포에 격추되어 탑승 인원 여럿이 바다에 떨어졌는데 다른 인원들은 일본군의 포로가 된 후 전쟁 포로로 일본으로 보내진 1명을 제외하면 모두 처형되었다. 포로로 잡힌 9명 중 8명이 살해 당했고 그 중 식인의 피해자는 5명이다. 일부 포로는 이때가 아닌 1944년에 잡혔다.

1945년 3월 이오지마의 일본군이 전멸하자 일본 본영은 치치지마의 다치바나 장군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제109 사단장에 임명했으며, 해군도 모리 제독을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치치지마의 두 지휘관 중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건 다치바나였고 모리와 해군 부대는 사실상 육군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그들 외에도 마토바 스에오 육군 소좌요시이 시즈오 해군 대좌가 식인 사건에 깊이 관여했다.

사실 한두 명의 정신이상자가 포로를 학대하거나 즉결 처형하는 경우는 당시 일본군에서 흔한 일이었다. 들의 처우가 열악했던 것으로 유명했던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일본군은 병영부조리, 가혹행위, 구타가 참전군 군대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미친 군대에서 정신이상자가 발생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침략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정신 검증이 되지 않은 인원을 마구잡이로 뽑아왔던 데다 군부 내에서도 명령권자들이 난징 대학살처럼 점령지의 국민들을 비국민으로 취급해 대량 학살한 사건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부대의 최고 지휘관들이 관여해 직접 포로를 구타, 학대, 고문하고 인육을 먹은 사건은 치치지마를 제외하면 달리 예가 없었다.

1947년 1월 13일 재판에 제출된 마토바 스에오의 진술서에는 식인 만행이 시작된 당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인육 사건은 1945년 2월 23일부터 25일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그때 나는 사령부로 불려가서 다치바나 장군에게 미군 비행사는 스에요시 부대에서 처형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사령부에서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했습니다. 화제는 부건빌이나 뉴기니에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군으로 옮겨졌으며, 일부 부대에서 비축된 식량이 동나고 추가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나중에 카토 타케무네 대좌가 우리를 위해 연회를 베푼다고 해서 갔는데, 술과 안주가 충분하게 마련되지 못한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불만을 표시하면서 육류와 술을 준비할 무슨 방도가 없냐고 물었습니다. 장군은 내게 미군의 처형에 대해 물으면서 인육을 얻을 수 없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육과 술 1되를 준비시켰습니다. 인육은 카토 대좌의 방에서 요리했는데,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조금씩 맛 보아야 했습니다. 물론 인육이 맛있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치바나의 명령에 따라 마토바가 처형한 미군 포로의 처리에 대해 구두 명령이 내려졌다. 군사재판에 증거로 제출된 당시의 명령은 다음과 같다.
1. 대대(大隊)는 처형된 미 해군 조종사의 인육을 먹을 것.
2. 칸무리(冠) 중위는 그 인육의 배급을 담당할 것.
3. 사카베 군의관은 처형에 입회하여 장기를 적출할 것.[8]

1945년 3월 9일 오전 9시 대대장 육군 소좌 마토바 스에오

발령 방법: 칸무리 중위와 사카베 군의관을 직접 불러 명령 하달. 다치바나 여단장에게 보고하고 호리에 참모에게도 통고함.
증언에 따르면 다치바나는 미군의 손발 고기와 내장을 먹고[9]
"이거 맛있다. 한 접시 추가"
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2.3. 처벌

파일:tachibana.1.jpg 파일:morii.1.jpg
재판장에서의 다치바나 장군과 모리 제독
일본 제국의 패전 이후인 1945년 9월 2일 치치지마에 미군이 상륙하자 9월 3일에 다치바나 장군과 모리 제독이 대표로 미 해군 전함에서 정식으로 항복했다. 항복 교섭에서 미군은 낙하산으로 탈출한 미 해군 조종사가 몇 명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다고 했는데, 교섭에 나섰던 호리에 요시타카 참모는 방공호에서 포로 전원이 폭사했다고 둘러댔다. 이미 일본군은 전범으로 처벌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면밀하게 입을 맞추어 두었고 포로들의 가짜 묘도 만들었으며 전 부대원에게 함구령을 내려 놓은 상태였다.

치치지마 주둔 일본군의 본토 귀환도 순조롭게 이뤄져 다치바나 등은 안도했지만, 그 동안 미군은 일본 본토로 조사관을 파견하여 귀환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진상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1946년 2월에 접어들자 본격적으로 이 식인종들을 하나둘씩 체포해 나가기 시작했다.

재판에서는 식인이 아닌 시체 훼손과 포로 살해 등의 혐의로 재판을 진행했으며, 당시 재판장 라다비노드 팔, 검사 아서 로빈슨 미 해군 소장의 지휘 하에 열린 재판의 결과 다치바나 요시오 장군 외 4명에게는 포로 살해 시체 훼손 혐의가 적용되어 사형에 처해졌으며, 치치지마에 주둔한 해군 최선임자였던 모리 쿠니조 제독을 포함한 다수가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사형이 집행되는 그 날까지 심한 학대를 당했다고 한다. 이 중 2명은 학대 후유증으로 인해 집행 전에 사망했다고 한다.

모리 쿠니조 제독은 종신형을 선고 받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남방 전선 당시 포로 학살죄를 부하인 호리우치 도요야키 대좌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 발각되어서[10] 네덜란드 측에 의해 재기소되었고 결국 사형을 선고 받아 술라웨시 섬 마카사르에서 교수형으로 목이 매달렸다. 전쟁 초기에 남방 전선에서의 네덜란드 포로 학살 건을 부하 호리우치 도요야키 대좌에게 책임전가해 사형당하게 만들고 본인은 비겁하게 빠져나온 것이 발각된 것 이다. 그리고 호리우리 도요야키 대좌 유가족에게 배상금과 사죄의 편지를 보냈다.
파일:7KTzsWD.jpg
쪽발이[11]들이 싱긴[12]을 저지르다, 호주 정부 왈

미군 신문 <괌 뉴스>는 연일 ' 카니발리즘'이라는 큰 제목으로 재판 경과를 보도했으며, 일부는 미국 본토 신문에도 전재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재판에 대한 기사가 갑자기 신문에서 사라졌는데, 희생된 미군의 어머니들이 너무 처참하다고 보도 좀 그만해 달라고 탄원을 내서 군 상부에서 보도를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자제들이 전쟁에서 명예롭게 전사한 줄 알았는데 저런 식으로 끔찍하게 잡아 먹혔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 또 그런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오르내리면서 모욕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으니 부디 우리 자제들이 명예롭게 기억될 수 있도록 이 보도를 중지해 달라"
고 했다고 한다.

3. 관련자들

3.1. 피해자

총 8명
기타(생존자)

3.2. 가해자


하야시 미노루, 이소가이 군지, 키도 마츠타로, 마스타니 신이치, 마츠시타 카네히사, 모리 야스마스, 사사키 미츠요시, 카토 타케무네 등이 포로 살해 지시 및 직접적인 포로 처형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3.3. 그 외

4. 일본 측 주장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건지 그냥 단순하게 오가사와라 사건이라고만 부른다. 일본에는 이런 사례가 상당히 많다. 할힌골 전투노몬한 사건으로 축소한다든지.

일본어 위키백과에 등재되어 있는 외부 링크의 글을 보면 더 확실해지는데 위키 내에서도 최소 2명 이상을 먹은 것으로 기록해 놓았음에도 정황 증언이 있는 츠치야 코우켄의 증언만을 들먹이면서 물타기를 하고 있다.

츠치야의 증언에 따르면 워렌 본 중위의 사형 당일 일직 장교였는데 저녁쯤에 병사 2명이 본 중위의 시체를 먹으려 하는 걸 제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즉, 본 중위를 먹은 건 지휘관들이 아니라 배고픔을 못 이긴 병사 2명뿐이었고 그마저도 제지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왜 워렌 본의 이야기를 들먹이는지는 위 항목에 나온 괌 군사재판에서 제시된 명령문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는데, 본 항목에 등재된 내용에 따르면 1번 항목에 '대대는 처형된 미 해군 조종사의 인육을 먹을 것'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미군 비행사 본 중위의 인육을 먹을 것'이라고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c0067880_571c5a552bc79.jpg

양측 항목을 대조해 보면 알겠지만 저 명령문은 3월 9일자이기[27] 때문에 이 명령에 해당되는 인물은 같은 날 처형된 플로이드 홀이거나 2월 28일 처형된 그레이디 요크의 시신에 대한 명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전 증언을 보면 2월 22일~2월 25일 사이에 인육 사건이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때의 희생자는 기간 중에 살해된 마빈 머숀이나 제임스 다이로 봐야 할 텐데도 난데없이 명령문이 내려온 당시에는 멀쩡히 살아있었고 13일이나 지난 후에 피살된 워렌 본을 들먹이면서 그 워렌 본은 '실은 먹히진 않았다'는 츠치야 코우겐의 증언을 개재하는 것은 ''식인의 대상이 되었다는 본 중위는 실제론 안 먹혔는데 미군이 누명을 씌운 거다"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외부 링크로 등록된 '치치지마섬 진상의 일단'이란 글에서 이를 나름대로 자세하게 서술해 '승전국이 자국에서 벌인 재판인 만큼 반드시 공정한 처벌이 내려졌을 거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며 은근슬쩍 '누명을 썼다'라는 식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저 글들을 종합해서 아무리 잘 봐줘도 피살된 8명의 조종사 중 워렌 본 중위는 식인의 대상이 아니었을 가능성 정도가 최대한이지 식인 사건 자체를 날조라고 할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주범인 다치바나 요시오 장군은 에히메현 에히메대학 바로 옆에 있는 호국 신사에서 영령으로 모신다. 이 작자는 야스쿠니 신사에도 모셔져 있으며 수많은 일본인들이 참배하고 있다.

일본 넷 우익들은 이들이 처형 당했다고 표기하는 것은 죄를 인정하는 것이니 법무사(法務死)라는 용어를 아예 새로 만들어서 이들의 사인은 사형이 아니라 법무사라는 괴상한 주장을 한다. 한 마디로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뜻이다.

사법살인이란 이미 있는 말을 쓰지 않고 굳이 법무사라는 신조어를 만드는 저의도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일단 일본어 위키백과에도 해당 문서에만 안 썼을 뿐이지 이 법무사라는 단어는 등록되어 있다.

그나마 사가와 잇세이는 정신질환자로 취급 받아 풀려났고 지금 봐도 책임 능력과 별도로 정상인이 아니라는 점은 한 눈에 알 수 있지만, 다치바나는 누가 봐도 명백한 100% 정상인이었다. 진짜 정신병자라면 미군도 정신병원에 넣었지 사형 시키지는 않았다.

해당 사건은 같은 일본군들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이라 범인들은 합방된 일본군들에게도 경멸을 받아야만 했다.

5. 기타

6. 외부 링크



[1] 전쟁· 대기근 같은 극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식인 행위는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보고 형량을 줄이는 식으로 어느 정도 봐준다. 예를 들면 인상식(人相食)이란 말이 그것이다. 이런 형태의 식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식인 문서를 참고할 것. [2] 참고로 이 모리 쿠니조라는 인간 말종은 남방 작전 때도 이미 사고를 친 적이 있었다. [3] 사실 대기근 같은 상황에서의 식인은 역사를 보면 거의 항상 있어왔다. 이것에 대해서는 식인 문서를 참고하자. [4] 열대우림은 결코 채집이나 둔전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그래서 녹색 사막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런 척박한 기후의 작은 섬에 20,000명이 넘는 병력이 주둔한 적도 있으니... [5] 쌀 배급량이 5홉에서 3홉으로 줄기는 했지만(대충 소주 2병을 쌀로 채운 것 정도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충분한 양은 아니지만 식인을 생각할 정도로 부족한 건 아니다.) [6] 당시 애인인 바버라 피어스(Barbara Pierce, 1925~2018)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전후 부시 중위와 결혼하여 4남 2녀를 낳았고(둘째(딸)는 3살 때 백혈병으로 요절),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미국 영부인이었다. [7] 출혈과 구토 증세로 정신을 잃어 가면서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 만약 잠수함이 부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현재 미국의 모습이 상당히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아래 '생존자들' 문단 참조. [8] 여단 산하 육군 308대대의 군의관이었다. 하지만 명령과는 달리 본인 대신 하급자인 테라키 중위를 보내고 본인은 관여하지 않았으며 현장에도 없었기 때문에 기소되지 않았다. [9] 고기는 구이로, 내장은 스키야키(전골)로 먹었다고 한다. [10] 호리우치 대좌는 이 일로 의례 소총 5발로 총살형 사형이 집행되었다. [11] Jap은 일본인들을 비하하는 말로 한국어 왜놈, 쪽발이, 중국어 워누와 뉘앙스가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은 Japan을 JAP으로 쓰지 않고 JPN으로 쓴다. [12] 'cannibalism' 대신 'cannabilism'으로 오타를 냈다. [13] CV-10 요크타운 소속. [14] 혹은 글렌 체스터 프레이저 주니어(Glenn Chester Frazier Jr.) [15] CV-15 랜돌프 소속. [16] CV-15 랜돌프 소속. [17] CV-20 베닝턴 소속. [18] CV-20 베닝턴 소속. [19] CV-15 랜돌프 소속. [20] CV-20 베닝턴 소속. [21] CVL-30 샌 재신토 소속. [22] 개인적인 경험과는 반대로 일본을 한국과 함께 미국의 비 NATO 주요 동맹국으로 지정하기도 했는데, 1980년대 소련 태평양 진출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다. 공과 사를 구분하고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23] CV-12 호넷 소속. [24] 네덜란드 포로 학살 건은 죄를 부하에게 뒤집어 씌워 사형 당하게 만들고 자기는 살아 나왔던 것으로, 이후 진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재판이 열려 거기서 교수형을 선고 받았다. [25] 본인의 자서전인 《출격 이오지마》. [26] 치치지마 사건을 다룬 서적인 《Sorties Into Hell: The Hidden War on Chichi Jima》. [27] 일본어 위키백과에도 3월 9일자로 서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