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初夜權Droit du seigneur ( 프랑스어, "영주의 권리")
jus primae noctis ( 라틴어, "첫 밤의 권리")
군주가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 백성 중 여성의 '첫날밤에 대한 권리(중세 프랑스어로 Droit du seigneur)'를 뜻하는 용어. 영어로는 프랑스어 명칭과 라틴어 명칭을 각각 번역한 'right of the lord', 'right of the first night'로 부른다.
중세 유럽에서 영주가 휘두르는 대표적인 권력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초야권에 상응하는 대가로 세금을 징수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실제로는 초야권은 실재하지 않았고 후세에 만들어진 도시전설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입장이다.
초야권과 관련된 인류 최초의 기록은 무려 수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를 배경으로 한 길가메시 서사시로, 주인공 길가메시가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예비신부들을 대상으로 초야권을 주장하자 사람들이 신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신들은 엔키두를 창조해 그로 하여금 길가메시를 벌하게 하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초야권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2. 유럽에서
중세 초야권의 기원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십일조와 연관지어서 생각하지만 사실 초야권은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 없는 게르만족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애초에 초야권은 기독교 문화권의 도덕관념과 굉장히 모순되는 개념이다. 기독교는 다른 문화권에 비해 엄격한 일부일처제를 지향하며 혼인 관계를 벗어난 성교는 이유를 불문하고 모두 도덕적 지탄을 받았다.[1] 예나 지금이나 신경 안 쓰는 사람이야 차고 넘치지만 초야권급 막장을 대놓고 성문법 내지는 관습법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게르만족은 일반적으로 첫 수확물을 자신을 먹여주고 재워 주는 부족장에게 바치는 관습이 있었는데, 부족장들에게 행하는 한 가지 의무였다. 이 전통이 중세로 넘어오면서 제도화되고 변경되었지만, 여전히 농노들은 영주들에게 첫 수확물 중 일부를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바쳐야 했다. 물론 농노들은 영주들의 토지 또한 경작했다. 이것이 여러 종류로 파생•변질된 과정에서 나온 것이 초야권이다.2.1. 역사계의 관점
최근 역사학계의 유력한 견해는 초야권은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초야권이 실제로 행사되었다는 사료가 전 유럽에 걸쳐 단 한 건도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초야권 문제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영주나 초야권의 남용으로 민란이나 다른 소요가 발생했다는 기록도 전혀 없다. 국내 서적 중에는 김응종 충남대 사학과 교수의 저서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에서도 실제 유럽에서 초야권이 실행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초야권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되는 최초의 기록은 로마 제국 시절인 서기 300년 정도의 문학작품에서이며, 이후 본격적으로 초야권에 대해 등장하는 사료는 1300년대 문학 작품인데, 그 사이의 1000년간 초야권에 대한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유럽의 각종 문학 작품에서 갑자기 초야권에 대해 기술된 사료가 폭증하는데, 학계에서는 이 때 어째선지 초야권에 대한 농담, 혹은 잘못된 믿음이 전 유럽에 걸쳐 퍼진 듯했다고 본다. 즉, 중세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초야권에 대해 믿기는 했지만, 용이나 마녀, 주술 같은 것과 동급의 실체 없는 풍문, 일종의 도시전설이었던 셈이다.
1300년대는 중세 말기로 이미 전 유럽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지 수백 년이 지난 뒤였다.[2]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였으며, 기독교는 10계명으로 간음을 금지한다. 그런 상황에서 영주가 강제로 초야권을 법으로 시행하려 했다가는 교회로부터 파문이 내려오거나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것이다. 아무리 금전적으로 곤궁한 영주라도 이런 복잡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초야권을 발동시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3]
1500년대 말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한 영주가 초야권을 근거로 신부에게 성희롱을 했다가 농부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사료가 있다. 이것이 유럽에서 초야권이 실제 성적 접촉과 연결된 유일한 사료이다. 출처[4] 희롱만으로도 폭동이 일어났을 정도였으니, 만약 초야권 같은 제도가 만연했다면 당연히 이에 반발한 폭동이 유럽 각지에서 일어났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기록이 상당수 남았을 것이다.
사실 영주 입장에서는 위생과 품위가 한참 떨어지는 평민 여자와 굳이 맨살을 맞댈 이유도 없었다.[5] 어쩌다 자기 눈에 띄는 하층민 여자가 있으면 부모나 본인을 잘 꼬셔서 첩으로 삼거나[6] 하룻밤 치르고 후한 대가를 지불하면 되는 일이었다. 오히려 첩으로 삼는 것이 당시의 관념상 하층민 여자의 부모 입장에서는 딸이 출세하게 되어 좋은 일이라 여기기도 했다.
다만 이 속설이 유명해지자 1400년대부터 이를 이유로 실제로 세금을 뜯어내려 하던 영주들이 있었다. 정확히는 원래 중세에는 초야권과 무관하게 결혼세가 따로 있었는데, 초야권이 유명해지자 몇몇 영주들이 이를 근거로 세금을 더 받아내려 했다. 즉, 초야권을 피하려면 세금을 더 내라는 것이다. 즉 중세 말엽에 들어 몇몇 악덕 영주들이 이를 명목으로 세금을 더 받거나 성희롱을 하다 반발을 산 적은 있지만, 이런 사례를 보편적인 현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사학자들은 여기에 더해, 근대의 학자들이 초야권을 예시로 들어 중세를 미개한 시대로 깎아내리면서 후대에 실제 역사처럼 전해졌다고 본다. 볼테르를 비롯한 계몽주의 시대 학자들이 중세 문학 작품에나 나오던 일종의 도시전설을 가져와 과장을 섞어서 중세가 이 정도로 미개한 암흑기였다고 폄하하기 시작했고, 결국 일반화되어버린 것이다. 당대 지식인들이라 할지라도 사적인 감정에 의해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으며, 현대의 사람들도 불확실한 추측을 사실인 양 기록으로 남기면 후대에 그것을 진실이라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약간 다른 사례로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토리노 광역시에 속한 마을 이브레아에서는 현재까지 초야권이 기원이 된 오렌지 전투 축제가 있다. 19세기 무렵 이 지방을 다스리던 영주 라니에리 백작은 주민들에게 폭정을 일삼았다고 한다. 어느날 백작이 밀러의 딸 비올레타라는 새신부에게 초야권을 요구하자 그녀는 몰래 단도를 숨겨가서 영주의 목을 그어버렸다. 이후 비올레타의 의거에 자극받은 주민들이 폭정에 저항하는 혁명을 일으켰는데 이때 변변한 무기가 없다보니 백작의 사병들을 향해 오렌지를 투척하여 대항했다고 한다. 현재의 이 축제는 이러한 투쟁의 역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병사 역을 맡은 이들이 방호구를 쓰고 탑 모양 구조물에 모여있으면 축제 참가자들이 뭉개진 오렌지를 그쪽으로 던져서 진행한다. 과일을 던진다는 점에서 라 토마티나와 유사하다.
3. 아시아에서
3.1. 몽골[7]
3.1.1. 긍정설
몽골족인 원나라가 한족인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할 때, 한족의 반란이 두려워 가한 제재 중 하나이다. 그 당시 원나라가 가한 제재로는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거나, 야간통금시간을 지정하기도 하고, 신분제를 만들어 한족을 하위 등급으로 만드는 것 등이 있었다. 또 다른 제재가 바로 초야권이다. 10가구의 한인(漢人) 당 1명의 몽골 병사의 시중을 들어야 했는데, 여기서 몽골 병사가 새로 결혼하는 한족 여성에 대한 초야권을 가지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한족의 신분이 노예와 다름없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처사였다.신문에 칼럼도 쓰는 유명한 교육자 겸 중국 역사학자인 신리지엔(信力建)[8][9]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몽골이 후기 좌도(左道) 밀교의 초야권이 성행하던 티베트를 점령하고 티베트 불교(일명 라마교)를 원나라의 국교로 삼았는데, 원나라의 몽골인들은 매우 열성적으로 티베트 불교를 믿었다. 또한 군인이자 라마승이기도 한 몽골인 군인 1명당 20호(20가구,100명)의 한족의 마을들을 감시하며 칼같은 철제 무기를 만드는지 감시했고, 한족들이 결혼하면 티베트 불교의 풍습으로 몽골 군인이 한족들이 결혼할 때 한족 여자에게 초야권을 행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족들이 첫째 아이를 죽이는 풍습은 이때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또한 몽골인이 한족에게 초야권을 행사한 것은 중국 문헌에도 나오고, 몽골은 19세기까지 티베트 불교가 성행하여 매독이 유행하였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다.
실제로도 초야권이 실제로 발생했다고 확실시되는 지역은 티베트 불교를 믿는 지역이다. 동아시아에서는 티베트 불교가 국교였던 중국 대륙에만 성행하였고 일본이나 한국에는 전파되지 못했다. 또한 명나라때의 불교도 후기 밀교인 탄트라가 사라져서 원나라 때만 후기 밀교인 탄트라교가 성행하였다. 티베트나 몽골에서 신부의 첫날밤은 라마교를 믿는 몽골 승려에 의해 행해졌다.
사실 밀교는 예전부터 존재하였던 것인데 8세기 힌두교의 성력이라는 개념이 불교에 전파되면서 샤크라 즉 성력을 중시하는 불교가 되었고 이는 성관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불교에 성관계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좌도 밀교라 불리면서 그릇된 불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성관계를 해야만 한다라는 해석으로 변질되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이런 폐단이 일어난 것이다. 몽골에서 초야권이 관습적으로 자리잡았던 이유도 티베트를 통하여 라마교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좌도 밀교인 탄트라는 인도를 거쳐 티베트로 전파되었고 원나라 때는 라마교가 국교가 되어 원나라 각지에 주둔했던 몽골군에 의해 원나라에서 시행되었다.[10] 몽골에서도 초야권이 관습적으로 자리잡았던 이유도 티베트를 통하여 티베트 불교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몽골의 초야권에 대하여 중국 쪽 기록만 있고 몽골에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몽골인들 자신이 쓴 기록 자체가 중국에 비해 적다. 그리고 19세기까지 티베트 불교를 믿었으며[11] 초야권이 성행해서 조선인이 매독을 고치러 파견 나간 적도 있다.
한반도와 일본의 경우에는 티베트 불교는 퍼지지 못했다. 한반도의 경우에는 워낙 대승불교 등 원래 있던 불교의 세력이 강해서 티베트 불교는 퍼지지 못했다. 하지만 몽골 공주가 결혼을 하러 왔을 때 어느정도 불교 건축물에는 티벳 불교 양식이 적용이 되었다. 또한 몽골 제국이 중국에 행성을 설치했던 것과는 다르게 한반도에는 행성이 존재하지 않았다.[12]
중국에서는 이미 몽골의 원나라가 초야권이 성행하던 후기 밀교를 믿는 티베트에서부터 티베트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나서는 한족에게 초야권을 행사한 것이 문헌에 나타나있으며 신리지엔의 글을 찾을 수 있다. # 간혹 신리지엔이 역사학자가 아니기에 그의 주장이 신빙성이 없다고 하거나, 초야권이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신여록은 위서이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신여록이 위서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불분명하며 아래 하단 반론 문단에 등장하는 초야권 반박 관련 바이두 글들은 友善用户川丹丹, 文史宴 라는 닉네임의 아마추어 바이두 회원들이 쓴 글들로, 이학을 중시했던 원나라에서 초야권을 행사했을 리 없다는 식의 추측성에 지나지 않는 반론글이며, 당시 원나라의 국교였던 티베트 불교와의 관계로 초야권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바이두 글도 존재한다. #
3.1.2. 부정설
초야권 설은 야사(野史)에 해당하는 《신여록(燼餘錄)》이란 문헌에 처음 등장하였지만 근대 학자들에 의해 《신여록》은 위서(僞書)로 판명되었고, 몽골의 잔혹성을 입증하기 위해 원대 역사를 왜곡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李則芬《明人歪曲了元代歷史》,《文史雜考》,1979年.) # 정사(正史)인 《원사(元史)》, 《신원사(新元史)》 등에는 초야권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13]청말민초(淸末民初)에 출간된 민속학자 저우쭤런(周作人)의《담룡집(談龍集)》 등 초야권과 관련된 민담, 풍습을 다룬 산문집과 그 영향을 받은 일부 대중역사서들로 인해 실제 초야권이 실시되었다는 루머가 퍼진 적도 있지만, 현재는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부정되고 # # 바이두 백과 초야권 항목 # 이나 중국어 위키백과 초야권 항목 # 에서도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바이두 백과 초야권 항목에는 百科TA说로[14] 원대 초야권의 허구를 상세히 입증하는 글이 링크되어 있다. 《“蒙元初夜权”,一个历史谣言的原型、变形与事实。》
원대 초야권이 실시되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현대 중국의 언론인 중 신리지엔(信力建)이란 인물이 있으나 신리지엔은 중산대학(中山大学) 중문과를 졸업하였을 뿐 역사학 관련 학위가 없는 비전문가이며 # 그의 주장들 역시 앞서 언급한 《신여록(燼餘錄)》같은 위서나 《담룡집(談龍集)》 같은 민담에 근거하여 신뢰도가 매우 낮다.
초야권설이 유포된 배경에는 원(元)과 원을 계승하여 몽골의 대칸을 자처한 청(淸) 등 전대(前代) 이민족 왕조에 대한 한족 지식인들의 반감이 존재한다. 이들의 역사관은 이른바 "원청비중국론(元清非中國論)" 혹은 "만몽비중국론(滿蒙非中國論)''이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하나의 중국이란 이데올로기를 따라 원, 청도 중국 왕조 중 하나로 인식하는 현대 중국의 중화주의적 역사관이 강화되면서 중국인들이 굳이 근거 없는 초야권 설로 원나라를 비하하고 한족 스스로를 치욕스럽게 만들 이유도 사라졌다.
또한 인터넷상에는 외몽골 같은 일부 티베트 불교권 지역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승려가 초야권을 행사하여 매독(syphilis) 감염의 주요 경로가 되었다는 출처 불분명한 주장이 있다. 근현대 몽골에 매독이 창궐했던 것은 사실이나 매독이 유행하게 된 원인은 분명치 않다. 청이 몽골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매독, 임질 등 성병에 감염된 죄수를 일부러 몽골에 유배보냈다는 설, 마을의 우물에 매독균을 풀었다는 설, 초야권을 행사하는 승려들을 통해 매독을 전파했다는 설 등 다양한 주장이 있으나 모두 불확실한 추측성 루머에 해당한다.
불교학자 바차이칸 노로브(Batsaikhan Norov)에 따르면 몽골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매독이 전파된 몇 가지 원인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당시 몽골의 상당한 비혼(非婚)인구 비중이다. 비록 청 왕조가 불교 전파를 지원했지만 몽골의 각 구역 당 단지 40명의 남자만 출가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제한은 점차 효력을 잃고 총 승려 수는 가파르게 증가하였다. 1918년까지 승려 수는 105,577명으로 칼카(Khalka) 몽골 남성 중 거의 절반(44.5%)에 이르렀다. 이 시기까지 내몽골에는 1600여 개에 달하는 사원과 10만 여명의 승려가 존재했다. 비구계를 받은 승려는 결혼을 할 수 없기에 상당한 수의 몽골 여성 또한 비혼으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가볍고 혼외(婚外)적인 성관계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낮은 개인 위생 또한 감염 전파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전염병에 대한 지식과 전염병 예방을 위한 의학적 치료 및 노력은 부족했다. 성병(性病)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몽골의 문화도 감염된 환자가 의학적 치료 받는 것을 꺼리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티베트 불교 학승(學僧)들은 17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몽골에서 대유행했던 천연두, 매독같은 감염병의 예방에 기여하였다. 이들은 사부의전(四部醫典, gso dpyad rgyud bzhi)에 기초한 티베트 불교 의학과 티베트, 몽골, 중국의 전통의학이 결합된 자신들의 의학지식을 활용하여, 청의 군인과 상인들을 통해 유입된 감염병들의 예방법과 치료법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질병 퇴치를 위한 종교적 의식을 행할 뿐 아니라 홍분(紅粉), 경분(輕粉), 주사(朱砂) 등 당시 매독의 유일한 치료법이었던 수은이 포함된 약재들을 치료에 활용하였다(이들은 신장 질환같은 수은으로 인한 부작용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었다). 또한 감염자 및 감염 매개물을 격리하는 한편 위생 증진을 위한 생활수칙과 마늘, 유황, 사향 등의 약재를 활용한 소독법 등을 연구하였다.
Batsaikhan Norov (2019), 《Mongolian Buddhist Scholars’ Works on Infectious Diseases (Late 17th Century to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또한 캠브리지대 사회인류학과의 바산자브 테르비쉬(Baasanjav Terbish)는 딴뜨리즘의 성력(性力) 수행만으로는 몽골 승려들의 성생활을 설명하기 힘들다고 보았다. 딴뜨리즘의 성력 수행은 범속한 성행위와는 달리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근기를 갖춘 극소수 수행자에게만 허용된 고도의 수행 방식이기 때문이다. 테르비쉬는 세속 사회와의 근접성과 사원의 경제활동에도 주목하였다.
Baasanjav Terbish (2013), 《Mongolian Sexuality: A Short History of the Flirtation of Power with Sex》
원대(元代) 몽골인들이 한족에게 초야권을 행사했다는 설은 사실상 루머 취급을 받으며 주류 학계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나무위키를 포함하여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는 몽골 초야권설 대부분은 주장만 있을 뿐 명확한 학술적 근거가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일례로 본 문서의 반론에서는 몽골의 초야권이 "역사적 사실"임을 강변하지만, 근거로 제시한 사료는 전무하다시피 하며 사건들 간의 인과관계 또한 지극히 모호하다. 이들의 주장은 후술할 《신여록》같은 위서(僞書)나 민담 등 신뢰할 수 없는 자료를 바탕으로 과장ㆍ날조한 유사역사학에 해당한다.
결정적으로 이러한 피지배민족에 대한 몽골이라는 집단에서의 초야권 행사가 매우 보편적이라면 몽골제국의 발자취가 닿은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등 지역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몽골에 대한 초야권 관련 내용은 오직 중국발 야사에서만 나오며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근거조차 수십년전의 중국발 자료다.
4. 기타
다른 지역에서도 초야권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왕에게 받을 선물로 초야권을 얻어내고 이를 행사하려다 신랑에게 맞아 죽은 위인의 이야기가 있고, 아라비안 나이트에도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종종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일어나는 종교적인 초야권은 여성의 처녀혈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황금가지에 수록된 여러 설화들이 실제와 다른 것처럼 엄밀한 검토가 되지 않은 내용일 수도 있다.
오덕들 사이에서는 다키마쿠라나 에로 동인지 등을 해외에서 구매할 때 세관에서 검사를 위해 먼저 뜯어서 내용물을 확인하는 것을 뜻하는 은어로도 쓰인다.
5. 픽션에서
- 강제로 첫날밤을 빼앗는다는 이미지 때문인지 매체에서는 네토라레, 네토리같이 묘사되는데, 일부에선 중세 유럽을 모티브로 한 판타지 세계에서 중세를 미개하다고 까 내릴 목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를 피하기 위한 영지민들의 행동(밤에 몰래 결혼, 속도위반 등)을 통해 귀족들의 갑질을 부각시켜 고발, 풍자하기도 한다.
-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이 초야권이 스토리 전반에 걸친 갈등을 야기하는 주요 소재가 된다. 피가로의 주인인 알마비바 백작이 피가로의 예비 신부인 수잔나를 탐내기 시작하는데[15], 그런 백작이 수잔나를 어떻게 해 보고 싶어서 초야권을 발동시키려고 한다.
- 게임에서 이 초야권을 직접/간접적으로 주장/행사한 캐릭터로는 란스가 있다.
- 지혜안의 만화 에스할름 이야기에서 여주인공인 이본느는 자신을 짝사랑한 젊은 영주 루트에게 초야권을 빌미로 강간당한다.
-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웨스테로스에도 초야권이 존재했지만, 재해리스 1세가 공식적으로 폐지시켰다. 드래곤의 씨들은 과거 타르가르옌 가문의 초야권 행사로 태어난 사람들의 후손인 경우가 많았다.
- 김세영& 허영만의 만화 타짜에서 주인공 장태영이 린다정의 결혼식 직전에 화장실로 끌고 가 초야권을 행사한다. 물론 이건 사전적인 의미의 초야권과는 아무 관계도 없고 단지 린다 정에게 당한 장태영이 결혼식 직전에 강간하여 복수한 것에 불과하다.
- 우리나라에선 영화 브레이브 하트가 대박을 거두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 나온 초야권은 고증이 엉망인 엉터리이다.
- Leslie Stevens의 'The Lovers'에서도 초야권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결혼을 앞둔 마을 처녀를 미치도록 좋아하게 된 기사도의 화신이자 전쟁 영웅인 영주가 등장한다. 영주는 기독교도이고 영지민들은 노르망디 부근의 이교도로 나온다.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 그에게 동생이 초야권에 대해 알려주며, 영지의 기독교 사제에게 이런 게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받는다. 여기서 사제는 '이교도들에게는 이러한 법이 있지만, 이는 그리스도인의 법에는 없고, 심지어 죄악일 수 있다'고 답한다. 초야권을 행사하러 마을에 가자 촌주는 '그들의 법에는 이런 것이 없지만, 우리의 법에는 존재하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며 허락한다. 뒷이야기가 궁금한 사람들은 구하기 어려운 이 책보다는 이를 영화화한 찰턴 헤스턴 주연의 'The War Lord(1965년작)"를 보는 것이 낫다.
- 불쏘시개급 소설 초인 고교생들은 이세계에서도 여유롭게 살아가나 봅니다!에서는 부패 귀족이 실제로 행사해서 주인공 일행에게 박살난다.
- 조지 오웰의 소설인 1984(소설)에서는 당을 찬양하고 혁명 이전의 세계를 격하하는 선전 동화에서 언급이 된다. 현실에서의 통념과 달리 거부들이 실크햇을 쓰던 산업시대에 부자들이 공장의 여성들에게 저질렀다고 한다. 그러나 당의 각종 공작으로 거짓된 정보가 만연한 소설 세계관의 특성상 작중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그저 당의 흑색선전일 뿐인지 알 길이 없다.
- Reigns에서 마녀가 공작[16]이 이 제도를 실행하려 한다고 이야기할 때가 있는데, 용인하면 민심/신앙이 깎이고 군사가 오르며, 금지하면 민심이 오르고 군사가 깎일 수도 있다. 작중에서 마녀가 선한 캐릭터인 만큼 게임 내에서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럼 고증오류가 된다. 그렇다고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민심이 너무 많이 깎인다.
- 곱게 키웠더니, 짐승에서 아주 잠시 언급된다. 현 시점에서는 초야권이 이미 없어진지 오래이지만 일부 악질 귀족들 중에서는 그걸 들먹이며 평민들에게 갑질하는 사례가 있는 것으로 지나가듯이 언급된다.
-
트라우마(만화)에서는 나쁜 영주가 초야권 행세한다며 헬렐레하고 있는데 그날밤에 들어온 건
못생긴게이커플이었고 기겁한 영주는 사형을 언도한다(...)
- 어벤져스2에서 토르의 묠니르를 다 같이 들어보는 게임을 할 때, 토니 스타크가 "내가 (이걸 들어서) 아스가르드를 지배하게 되면 초야권(prima nocta)를 재정립 해보도록 하지"라는 섹드립을 날린다. 자막으로는 일부다처제로 순화.
[1]
당장
십계명만 보아도 '간음하지 말라',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며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불륜를 금지하는 계명이 두 개나 들어있다. 여기에 더해 유대 율법에서는 남의 배우자나 약혼자와
혼외정사를 하다가 적발된 자는 남녀불문하고 거의 무조건
투석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여기서 '거의'라고 표현한 것은 여성이
억지로 겁탈을 당하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던 상황에 한해 여성은 투석형을 받지 않는다는 예외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성경의 일화가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이야기이다.
[2]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스칸디나비아 반도도 서기 1100년 무렵에는 대부분 기독교로 개종했다.
[3]
영주라 해도 무작정 마음대로 영지에서 왕노릇 할 수는 없었다. 교회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전통이나 관습법 등에 의한 지역 공동체의 의사 등도 엄연히 적용되었기 때문. 자유민 농민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영주가 맘에 안 들면 좀 힘들더라도 다른 영지로 떠날 수 있었다. 농노도 자유민보다는 제약이 있었지만 엄연히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서 교회와 관습의 보호를 받았다. 영주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폭정을 저지르면 자기 자리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4]
이 글은 일개 블로거가 아니라 독일 괴팅던 대학부설 연구기관인 괴팅턴 과학원 소속 Jörg Wettlaufer 박사의 글이다.
[5]
귀족들이 자기네들보다 아래인 신분의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는
리그스툴라에 직설적으로 나와있다.
[6]
기독교 국가들은 일부일처제였기에 첩으로 삼는다는 것도 동북아처럼 정식 첩실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관계, 즉 정부이다.
[7]
정확히는
몽골제국이 아닌
원나라에서만 해당되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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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중국 광둥성 광저우 출신 中山대학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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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국 웹에서도 신리지엔이 쓴 글을 번역한 게시물이 검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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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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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티베트 불교가 주류이다.
[12]
물론
입성책동이라고 하여 고려를 아예 원나라 영토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고려인들의 반대와 저항에 부딪쳐 모두 실패했다.
[13]
송사,
원사,
명사 같은 정사들은 그 왕조를 멸하고 세운 새로운 왕조가 편찬하는 것이지 해당 왕조가 편찬한 것이 아니다. 즉 원나라에 실제로 초야권이 있었다면 원나라를 멸하고 세운 명나라가 원나라를 깎아내리기 위해서라도 원사에 초야권을 기록했을 것이다.
[14]
百科TA说는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바이두 백과 운영진이 전문가, 학자, 기관 등에게 작성 권한을 제공하는 항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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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로의 결혼의 (스토리 상) 전작인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백작이 피가로의 도움 덕분에 지금의 아내인 로지나를 맞이하게 된 걸 생각하면 배은망덕도 이런 배은망덕이 없다. 결국 백작은 바람기를 제어하지 않고 밖에서 딸을 낳아오고 로지나도 남편의 바람기에 대항하여 자신의 시종 케루비노와 맞바람을 피워서 아들을 낳는데 부모의 맞바람으로 태어난 아들과 딸이 자란 후 피가로-수잔나 부부가 이들을 엮어주어 둘은 결혼을 하게 된다는 막장 드라마로 결말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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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공작이지 공작의 그 공(公)이 공(空)으로 보일 정도로 비중이 없는 캐릭터다.
Reigns/캐릭터의 해당 항목 참고.